소설리스트

10. 길어지는 꼬리 (11/21)

10. 길어지는 꼬리

진지하게 의문이 들었다. 나는 나름 하고 싶은 말도 잘하고 남 눈치도 안 보는 이기적인 놈이라고 생각했는데(사실 황보욱한테 남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는 편이다. 본인에게 관대해서 황보욱한테만 뭐라고 할 뿐).

‘진짜 눈치챈 건 아니겠지?’

눈치챘다고 내 장기가 정말 털리거나 목숨을 잃을 정도의 긴급함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끝까지 들키지 않는 게 좋다.

들켰을 때의 반응도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 이후의 귀찮음이 더 클 것 같았으니까.

현재는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며 과제 중이었다. 오후에서 밤까지는 이벤트전을 달려야 했으니 영원한이등병이 오기 전까지는 현생의 필수적인 부분을 마무리해야 한다.

멍청하게 볼펜만 돌리는데 앞에서 희고 긴 손가락이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고개를 올리니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놈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화려한 분홍색 머리도.

“신경 거슬리니까 얌전히 좀 해.”

“꼬우면 다른 자리로 옮기든가.”

모타리 아니, 황보욱의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 앉은 건 손지언 너였거든?”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워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그래, 과제는 해야 하는데 도서관은 가기 싫고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하려고 카페에 왔는데 자리가 없었다.

정처 없이 헤매다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하나 우울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보이던 것이 저 분홍 머리 뒤통수였으니까.

“그렇지만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기는 귀찮았는걸.”

“참나. 멀어봤자 얼마나 멀다고.”

“게다가 도서관에는 이 맛있는 연유 라테도 팔지 않아, 우기우기.”

“내가 그따위로 부르지 말라고 했지?”

이를 갈며 노려보는 녀석은 투덜거려도 과제를 하러 왔다는 말에 합석을 허락해 주었다. 솔직히 조금 의외이긴 했지.

저놈은 이미 과제를 끝냈는지 열심히 복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저런 내용을 배웠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말이다.

똑같은 페이지인데 왜 내건 깨끗하고 저놈 거는 빽빽하게 메모가 있는 걸까.

“예습?”

“복습이야.”

어이없다는 시선이 다시금 따라붙었지만 천연덕스럽게 연유 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앞에 있는 치즈 케이크를 한입 베어 먹으니 달달한 향이 입 안을 감돌았다.

역시 커피에는 달달한 디저트지!

“야.”

“응?”

“너 좀 뻔뻔한 거 인정하지?”

“에이, 합석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잖아. 새삼 또 생색내려고?”

“아니, 그거 말고! 이 케이크 내가 사 왔거든?”

치즈 케이크를 한 입 더 얻어먹으려고 뻗었던 내 손등을 황보욱이 찰싹 때렸다. 꽤나 매운 손맛에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먹는 걸로 치사하게 그러면 안 돼, 우기우기.”

“너도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생각을 좀 해라. 애초에 우리가 이렇게 친한 것처럼 한 테이블에 앉아있을 이유가 있어?”

있지. 너 모타리잖아.

차마 그 말은 못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낭창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쩔 수 없지. 지금부터 친하게 지내줄게.”

“하아.”

짜증 섞인 한숨 소리가 깊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었다.

이래서 공부가 사람을 망쳐놔요, 쯧쯧.

“조금 있다가 나도 케이크 사줄게. 배고파서 그래, 쏘리.”

“밥은 안 먹고 왜 이 시간에 밖에 있는 건데? 과제에 손도 제대로 안 대고 있는 것 같은데.”

“집에 있으면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거든. 카페에 나오면 조금이라도 진도가 나가지 않을까 싶어서.”

실제로 카페에 와서 한 페이지 정도는 했다. 뿌듯한 얼굴로 말하는 내 모습에 황보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잠깐 쉬려는 모양인지 허리를 뒤로 젖히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셨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니 인상을 찡그린다.

“또 왜.”

“그냥. 공부는 참 열심히 하는데 머리는 왜 양아치처럼 분홍색인가 싶어서.”

“그래? 많이 이상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황보욱이 앞머리 끝을 매만졌다.

솔직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저 얼굴이 워낙 화려해서 저런 색도 잘 소화해서 그렇지. 하지만 솔직하게 얘기해 주기는 싫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는 아니지만 좀 이상하긴 하지.”

“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직설적으로 잘한다?”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아야지. 걱정 마, 이래 봬도 잘 보여야 하는 사람한테는 적당히 말도 가려가면서 하니까.”

“그게 누군데.”

“경찰.”

“아니, 미친놈아.”

황보욱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기껏해야 교수님이라고 할 줄 알았더니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웃긴 놈이네. 나한테만 재수 없게 구는 줄 알았더니.”

“우기우기한테는 더 특별하게 굴긴 하지.”

“그래. 그걸 아는 놈이 오늘은 갑자기 왜 친한 척 다가오는 건데? 솔직히 적응 안 되거든.”

황보욱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습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치즈 케이크를 열심히 탐하는 내 모습을 보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케이크 그릇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요새 좀 친하게…는 아니고 어쩌다 보니 알고 지내는 놈이랑 너랑 비슷해서. 내적 친밀감이라고 해야 하겠지.”

“나랑 비슷한 놈? 그놈도 널 짜증 나게 하는 모양이지?”

“오, 뭐야. 너 생각보다 주제 파악을 잘한다?”

“…….”

“농담이야, 얼굴 풀고 케이크 접시는 가져가지 마.”

치졸하게 케이크 접시를 본인 쪽으로 당기는 모습에 서둘러 말을 바꿨다. 다급히 남은 케이크 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니 황보욱이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그런 이유로 내적 친밀감이라니. 너도 어지간히 단순하다. 게임만 하는 뇌라서 그런가.”

“넌 게임 안 하는 척하네.”

“…나는 많이는 안 해.”

“얼마만큼 하는데?”

“최근에 시작한 거야. 친구가 추천해서. 공부에 지장은 없도록 하고 있으니까 너랑은 입장이 다르지.”

“아, 그러셔요.”

연유 라테를 한 모금 가득 입 안에 머금었다.

맛있다, 맛있어. 카페인이 충전되니까 살 것 같다!

저도 모르게 풀리는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니 쳐다보고 있던 황보욱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넌 좀 웃고 다녀라. 독하게 눈 좀 그만 부라리고.”

“뭣이? 갑자기 왜 외모 지적이야?”

“외모 지적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순둥이처럼 보이는 애가 매일 눈 부라리고 쌈닭처럼 구니까 그렇지.”

“쌈닭이라니, 말이 심하네. 나 상처받았어. 초코케이크 하나 더 플리즈.”

“돈 맡겨놓으셨나 봐요?”

“나 용돈 다 떨어졌어.”

“어이가 없네. 나도 거지야.”

“거지면 카페에서 공부할 생각을 안 하겠지. 공짜 에어컨이 나오고 자릿세도 공짜인 학교 도서관에서 했겠지.”

“시끄럽고 과제나 집중해. 불필요한 돈은 아껴야 해.”

“나한테 사주는 게 불필요해? 언제는 내가 좋다고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고.”

“개꿈 꿨어?”

하, 모타리. 내가 오늘 너 접속하면 개같이 굴려준다. 아니, 무시를 해야 더 훌륭한 복수가 되려나.

임해서가 봤다면 인성 쓰레기라며 혀를 찼을 법한 생각을 하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다시 공부 모드에 집중 들어간 황보욱을 방해하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때마침 문자도 와있다. 늘 연락하는 익숙한 그분이었다.

[개소: 뭐 하고 있어?]

오늘도 개나소나는 한가한 모양이군. 이 선배는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을까.

게임 로딩 시간에도 가끔씩 연락이 오고 강의 시간 중간에도 연락이 왔었다. 물론 대게 연락은 한꺼번에 쌓아놓고 나중에 한 줄 정도만 답장을 보내기는 했지만.

보통 이러면 기분 나빠서라도 연락을 안 하지 않나?

나는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보욱도 그렇고 문정하를 대하는 내 태도가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아무리 친해지고 싶지 않은 상대라고 해도 어느 정도 예의는 지키는 것이 좋긴 하다.

특히나 문정하 같은 경우에는 호감을 가지고 대해 주는 상대라서 이렇게까지 차갑게 대할 필요가 없긴 하다.

문득 어젯밤에 개나소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귓말] 개나소나: 난 친해지고 싶은데

‘진심인가, 그 미친놈.’

원래 제정신이 아닌 놈이긴 했지만, 어제는 상태가 더 이상했다. 마지막 게임을 져서 충격이라도 받은 건가. 하지만 랜덤 보따리에 별다른 욕심은 없어 보였는데.

‘진짜 눈치챈 건 아니겠지?’

한 번 떠볼까 싶기도 하면서도 어쩐지 이 능글맞은 남자한테 말릴 것 같아서 시도하기도 무서워졌다.

됐다.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게 아니면 나도 모른 척하자.

[나: 카페에서 과제 하는 중입니다.]

괜히 개나소나가 생각이 나서 더 딱딱하게 보낸 것 같았지만 상관은 없겠지.

과제에 다시 집중하려고 하는데 답장이 왔다. 하루 종일 휴대폰만 보고 있나 싶을 정도로 빠른 답장이었다.

[개소: 어디 카페인지 물어봐도 될까?]

[나: 안 된다고 대답해도 될까요?]

[개소: ㅜㅜ]

[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요.]

[개소: 배 안 고파? 밥 사줄까?]

[나: 저 돼지 아닌데요.]

[개소: 그럼 뭘 원하는데?]

시선이 비어있는 케이크 접시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작 케이크 따위에 문정하를 이곳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답장을 포기하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집중했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집중이 잘되는 것 같았다. 다른 손님의 디저트 메뉴 냄새에.

[나: 허니브레드! 대학로 뒤쪽 골목길 xx카페.]

[개소: 그래, 금방 가서 사줄게.]

본인이 사주고 싶어하는 거니까 내 잘못은 없겠지. 잘못이 있다면 옆자리에서 향긋하게 제 몸값을 뽐내는 허니브레드 탓이었다.

허니브레드를 기다리며 과제에 집중하는데 이내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가 제법 청아하다.

알바생의 인사와 옆자리 손님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보다 과제가 잘 풀리고 있는……!

“지언아.”

부르는 목소리는 퍽이나 다정했다. 낮은 목소리가 정수리 바로 위에서 들려오자 그제야 황보욱이 고개를 들고 낯선 이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드니 오늘도 잘난 얼굴을 소유한 개나소나의 본캐인 문정하가 보였다.

“과제는 잘되고 있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도 부드럽다. 사촌인 손지우보다 더 형같이 동생을 챙겨주는 느낌이었다.

그 손길이 사실상 나쁘지는 않아서 모른 척하며 계산대를 가리켰다.

“형, 나 허니브레드.”

“그래. 금방 주문해서 올게. 더 필요한 건 없어?”

“아직 라테는 덜 마셨으니까 괜찮아. 우기우기, 너 필요한 거 있어?”

그래도 케이크를 뺏어 먹은 것이 양심에 찔려서 물었는데 황보욱의 시선은 다른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까는 무서울 정도로 계속 쳐다보더니 이번에는 다른 놈을 쳐다보고 있다.

그 시선의 끝은 문정하였다.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문정하도 시선을 돌려 황보욱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저에게 향했을 때와는 달리 조금 서늘한 느낌이었다.

허공에서 마주하는 두 남자의 시선.

‘그러고 보니 개나소나랑 모타리도 딱히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현실에서의 둘도 딱히 친해질 것 같지는 않을 느낌이었다.

“난 괜찮아.”

“그럼 허니브레드만 사 올게. 조금만 기다려.”

어색하게 대답하는 황보욱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정하가 걸음을 옮겼다.

긴 다리로 순식간에 저만큼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는데 황보욱이 물었다.

“누군데? 친형이라고 하기에는 비주얼이 너무 차이 나는데.”

“이 새끼가…….”

하지만 차마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다.

계산대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힐끔 바라본 황보욱이 작은 소리로 묻는 말에 나도 덩달아 상체를 앞으로 숙여 작게 대답했다.

“우리 학교 선배. 사촌 형이랑 친구라서 알게 됐는데 케이크 사준다고 해서 부름. 아까 그 케이크 대신에 갚은 거다?”

“네가 산 것도 아니면서 생색내네. 간호과야?”

“아닐걸. 사실 알고 있는 정보는 이름밖에 없음.”

개나소나라는 것도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나만의 비밀이지.

태연히 대답하는 내 모습에 황보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밖에 모르는데 왜 저렇게 친근하게 대하시는 건데?”

“난들 아나. 내가 귀여워 죽겠나 보지.”

“그냥 죽이고 싶을 뿐인데.”

“우기우기, 자꾸 이러면 나 섭섭해.”

황보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을 말자는 표정이라서 턱에 꽃받침을 하고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고개도 비스듬하게 꺾어서 눈을 깜빡이니 우웩, 토하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그때 본 친구보다 친해?”

주문을 하고 온 모양인지 진동 벨을 테이블 위에 올린 문정하가 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는데 그 과정에서 황보욱에게 꽃받침을 하고 있던 내 어깨를 뒤로 밀었다.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동시에 단호하기도 했다. 순식간에 멀어진 거리에 눈을 깜빡이는데 문정하가 태연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번의 친구라면 임해서를 말하는 거겠지. 황보욱도 대충 누구를 말하는 건지 눈치챈 모양인지 우리 둘은 동시에 부정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완전 사이 나쁜데.”

“그런 것치고는 지언이 네가 끼를 부리는 것 같길래.”

“끼……?”

황보욱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게 마치 같은 남자끼리 할 만한 농담인가 가늠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는 것을 보아하니 선배라는 것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어쨌든 여기는 나랑 같은 과 동기인 황보욱. 황보가 성이고 욱이 이름이에요. 우기우기, 여기는 문정하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우기우기?”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황보욱과는 달리 다른 곳에 꽂힌 듯한 문정하가 턱을 매만졌다. 그 시선이 닿는 곳에 앉아 있던 황보욱은 괜히 볼펜도 손에 놓고 긴장한 표정이었다.

뭔가 데리고 온 남편감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 포스 같기도 하고.

“그래, 나도 잘 부탁할게. 우기우기.”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눈은 웃고 있지만 입은 안 웃고 있는데요.

내가 우기우기라고 부르는 걸 그토록 질색하던 황보욱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게 닿는 시선이 언제까지 이 자리에 앉아있을지 묻는 듯해서 나는 문정하를 쳐다보았다.

“허니브레드는 감사합니다. 바쁘시면 진동 벨만 넘겨주고 이제 가셔도 되는데.”

“과제 방해 안 할 테니까 잠깐만 앉아서 구경하면 안 될까?”

“뭘 구경할 건데요.”

“지언이 공부하는 모습. 손지우가 엄청 희귀한 장면이라고 했거든.”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애써 정리했다. 사촌 동생의 칭찬은 못 해줄 망정.

“동기가 불편해하니까요.”

나름 상식적인 대답을 꺼내자 그제야 문정하가 다시 시선을 황보욱에게 옮겼다. 마치 눈빛으로 정말 불편하냐고 묻는 듯한 태도에 황보욱은 어색하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게임에서도 그렇지만 이상하게 선배를 필요 이상으로 깍듯하게 대하는 놈이었다.

방해 안 할게, 하고 덧붙인 문정하는 정말 허니브레드만 산 채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가끔씩 휴대폰을 볼 뿐, 대부분은 과제를 하는 내 옆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히려 집중을 하는 우리가 더 불편할 정도였지.

이럴 시간 있으면 더쎄 하면서 레벨이나 더 올릴 것이지. 만렙도 아닌 놈이 여유만만이었다. 물론 만렙이 아닌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때였다. 문정하가 어느새 휴대폰 화면을 가로로 하고 무언가를 집중을 해서 보고 있는 것이.

인강이라도 보나, 아니면 뉴스 같은 거라도 보고 있는 건가 싶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주었는데 익숙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소리는 들려오지 않지만 익숙한 근접 모드와 함께 사살되는 적군. 건물 위를 걷는 적을 헤드 샷으로 맞히는 무빙에 바로 고개를 내밀었다.

믄님이다. 아주 잠깐의 장면이었지만 얼마나 많이 보고 감탄하며 연구했던 매드 무비 영상이었던가! 벌써 2년 전의 영상이었지만, 지금도 거너를 목표로 하는 유저들이 한 번쯤 찾아볼 만큼 조회 수가 엄청난 영상이었다.

휴대폰 화면이 보기 쉽게 앞으로 내밀어진다. 문정하의 시선도 느끼지 못하고 홀린 듯 화면을 바라보는데 화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황보욱이었다.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휴대폰 화면에 남자 셋이 매달려 게임 플레이를 보고 있었다. 영상의 제목은 [눈 호강하는 믄님 신들린 거너 매드 무비]였다.

2년 전의 더 세이렌은 캐릭터별 속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기본 속성만 존재했고 이렇게까지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상대 캐릭터의 기술이나 콤보도 잘 알 수 있고, 대처가 가능했었다.

매드 무비는 하이라이트 장면만 누군가가 짜깁기한 것처럼 편집되어 있었다.

건물이나 난간 위를 점프하며 이동하는 적의 헤드 샷을 맞히는 건 기본. 높은 위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도적의 궁극기 타이밍에 맞춰 궁극기를 사용하는 모습은 다시 봐도 감동이었다.

근접전에서는 누구보다 불리한 거너 캐릭터로 구석에 몰렸을 때, 연막탄을 사용하여 회피기를 사용한 뒤에 바로 저격을 갈겨서 연속 더블 킬을 가져갔을 때의 감동도 장난이 아니었다.

“재밌어?”

눈을 반짝이며 보는 내게 문정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믄님 영상인데 당연히 재미가 없을 리가 없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궁금해졌다. 개나소나는 분명히 전사 캐릭터니까 본다면 전사 매드 무비를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거너 매드 무비를 보는 거지?

‘설마 원딜 포지션을 탐내는 건가?’

전사가 주캐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를 나쁘지 않게 잘하던 과거를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거너도 해보면 나보다 잘하는 거 아니야?

“선배님도 더쎄 하세요? 거너 하시나 봐요.”

의외로 관심을 안 가질 줄 알았던 황보욱이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말했다.

“응. 더쎄는 맞는데 거너는 아니야. 이거는… 그냥 아는 친구가 거너를 하고 있어서 참고용으로 보는 중이고.”

친구? 문정하도 의심스럽지만 개나소나 성격에 게임 친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최근에는 나랑만 했었고.

그런 개나소나의 게임 친구가 거너를 하고 있다? 염소구더기를 말하는 거겠지.

“너도 해?”

“네. 친구가 추천해서 하는데 어렵더라고요. 탱커를 하고 있는데 팀에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일 것 같긴 한데.”

목 뒤를 느리게 문지르는 황보욱은 게임 이야기를 하는 게 좀 어색해 보였다. 그래도 썩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재미있기는 해요. 게임 친목 같은 건 불필요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익명성의 장점이지. 레벨은 높은 편?”

“아니요. 이제 겨우 30 조금 넘었어요.”

게임 이야기가 나오니 문정하가 생각보다 원만하게 대화를 받아주었다. 어쩌면 그를 너무 얼굴만 멀쩡한 사회 부적응자로 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사람들과 멀쩡히 어울리는 모습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정말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네. 같이 어울리고 있는 탱커도 레벨이 낮은데 너랑 비슷하네. 친구 추천해서 하는 것도 똑같고. 아이디는 네 거야?”

“아니요. 아이디도 친구 거예요. 친구는 다른 게임으로 갈아탔다고 저 쓰라고 넘겨줬거든요.”

문정하의 긴 손가락이 끝난 영상을 끄고 다른 영상을 재생했다.

더 세이렌의 거너 매드 무비를 검색했던 모양인지 대부분 거너 영상이었는데, 무언가를 보고 멈칫했다. 이내 클릭한 영상은 새로 재생되고 있었다.

2년 전에 WINNER에 속해 있던 염소똥의 영상 모음집이었다.

“우연이네. 걔도 같은 학교 후배라고 했는데. 혹시 지언아.”

부르는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왜 이렇게 솜털이 쭈뼛 서는 걸까.

“게임 아이디 빌려줬다는 친구가 우기우기였어?”

이상하다. 갑자기 현실 장르가 스릴러가 되었다.

때마침 울리는 진동 벨에 문정하가 일어섰다. 생각보다 빨리 해치운 허니브레드를 보고 다른 디저트를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본인 마실 것도 주문했겠지.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황보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네 아이디를 왜 빌려?”

“그런 게 있어. 그보다 너 저 선배님한테 닉네임이나 아이디 말하지 마.”

“왜?”

“…저 선배 유명하거든. 후배 게임 아이템 괜찮은 거 있으면 다 졸렬하게 뺏는 걸로. 취미로 해킹도 한다는 소리가 있어. 그거 네 아이디도 아닌데 친구 개인 정보 해킹당하면 안 되잖아?”

“그렇게 안 보이는데.”

“네가 저 선배에 대해서 뭘 알아.”

“그건 그렇지만…….”

오늘이 문정하와 초면인 황보욱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에 대한 신뢰보다 문정하에 대한 첫인상 신뢰도가 더 높은 모양이었다.

방금까지 불편해하던 게 누구였는데!

“나는 10분 뒤에 갈 테니까 이거 먹으면서 과제 마저 해.”

“더 계셔도 되는데.”

네가 뭔데!

기껏 간다고 얘기하는 문정하를 잡는 황보욱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누가 보면 나보다 본인이 더 잘 알고 지낸 사이인 줄 알겠다.

“선약이 있어서.”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잘 먹겠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황보욱의 음료까지 사 온 모습에 ‘설마 호감도를 올린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단순한 놈인가 싶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타리의 행동을 보면 이해가 가기는 한다.

처음에 자신을 구해주며 편들었다고 지금까지 따라다니는 놈이었으니까.

그럼 현실에서는 나한테 왜 이래? 라고 스스로 묻다가 이내 자문자답했다. 먼저 잘못한 것도 모자라 적반하장으로 화도 냈으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대우였다.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게임 하자.”

문정하는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의 대답을 딱히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조금 뻘쭘해지기도 해서 눈치를 보다가 케이크에 손을 뻗는데 기습적으로 질문이 들어왔다.

“지언이는 잘됐네. 친구도 탱커 하니까 같이 연습하면 되겠다.”

“쿨럭.”

“탱커요?”

“응. 지언이도 탱커 아니면 물 정령을 주로 하는 모양이더라고.”

황보욱의 시선이 ‘탱커? 네가 탱커를 한다고?’ 하고 묻는 것 같아서 시선을 회피했다.

그는 저번에 나를 잡으러 피시방까지 왔을 때 내가 거너를 하는 걸 어렴풋이 봤었을 테니까.

꼬리가 너무 길면 밟힌다.

아니, 이 꼬리를 일부러 밟을락 말락 간을 보는 듯한 고양이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었다.

* * *

[파티] 영원한이등병: 확실히 레벨대가 높은 상대를 만나니까 뚫기가 힘드네요 ㅜㅜ

벌써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 진행한 게임들의 승률이 처참하다.

이벤트전은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임시로 이루어지는 게임이다. 다섯 명의 정해진 파티원들끼리 참여해야 하는 게임.

그렇다 보니 보던 멤버들을 또 적으로 만날 수도 있었고 매칭되는 상대도 랜덤이었다.

더 세이렌은 고인 물이 많다. 그런 게임에서 아직 만렙 하나 없는―심지어 모타리는 이제 막 부화한 뉴비였다―멤버들끼리 팀을 꾸렸으니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조금 전까지 적군에게 둘러싸여 다굴을 당하던 모타리는 조금 멍한 눈치였다.

[파티] 개나소나: 안 되겠다

[파티] 개나소나: 염소야, 너 코스튬 갖고 싶지?

[파티] 염소구더기: ㅇㅇ

[파티] 개나소나: 너랑 암힐 중에 번갈아 가면서 하자

[파티] 개나소나: 공격형 넷에 탱커 한 놈이니까

[파티] 개나소나: 당연하다는 듯 탱커한테 달려들고 있으니까 너무 빨리 끝나

그건 맞는 말이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잠깐 고민을 했다. 빠른 공격기와 이동 속도를 가지고 있는 영원한이등병은 전장을 누벼야 하니 타깃으로서는 위험 부담이 컸다.

그나마 비교적 적합한 것은 오메가원. 가끔씩 페이크로 거너를 섞어주는 것이 맞는 방법이기는 했다.

어차피 지면 랜덤 보따리는 얻을 수 없으니 직접적으로 타깃을 잡지는 못해도 하나씩이라도 꾸준히 얻을 수 있는 선택지가 낫겠지.

[파티] 염소구더기: ㅇ

[파티] 오메가원: 막내 다 컸네

[파티] 오메가원: 집안 사정도 다 이해할 줄 알고

[파티] 모타리: 형, 괜찮겠어요? ㅜ 제가 계속 해도 되는데.

[파티] 염소구더기: 괜춘. 이렇게 지는 것보다

[파티] 염소구더기: 랜보 하나씩 꾸준히 받는 게 더 좋을 것 같음

[파티] 영원한이등병: 크, 이과세요? 계산 빠른 거 보소!

영원한이등병의 말에 의미 없이 웃어주다가 이내 게임 시작 화면을 바라보았다.

인벤토리에 있는 랜덤 보따리는 현재 여덟 개였다. 제일 처음에 타깃을 죽이고 얻은 다섯 개를 제외하면 그 뒤로 고작 세 개만 더 얻은 것이다. 저조한 성적이었다.

[현상 수배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문구와 함께 게임 화면이 바뀌었다.

[팀] 개나소나: 염소야

[팀] 염소구더기: ?

[팀] 개나소나: 랜보는 언제 개봉?

친해지고 싶다며 길드를 만들라고 했던 건 꿈속의 일이었다는 것처럼 오늘 만난 개나소나는 평소와 똑같은 태도였다.

그래서 나도 별다른 언급 없이 게임을 하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했다. 가능하면 개수가 많이 쌓였을 때 한 번에 개봉하면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어서 미루고 있었는데.

[팀] 염소구더기: 글쎄

[팀] 영원한이등병: 이번 판 끝나고 저희 동시에 개봉해볼래요?!

[팀] 오메가원: 상관없음

[팀] 염소구더기: 조금 더 쌓았다가 한 번에 풀까 했는데

[팀] 개나소나: 어차피 될놈될 안될놈안될

[팀] 염소구더기: 저주를 퍼부어라, ♡♡♡야

[팀] 영원한이등병: 오늘도 여전히 사랑이 넘치는 커플이군요ㅎ

[팀] 개나소나: ㅋㅋㅋㅋ

점심때 사줬던 허니브레드와 케이크 덕분에 이 정도로 참아준다.

코스튬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 알면서도 저런 말을 지껄이는 개나소나가 그저 얄미울 뿐이었다.

‘그래, 너는 돈도 많으니까 언제든지 현질로 살 수 있다 이거지?’

다음에는 진지하게 문정하한테 코스튬이라도 뜯어낼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아이디를 가르쳐 줘야 하는데 그건 싫었다. 그렇다고 금액만 송금하라고 할 만큼의 뻔뻔한 성정은 아니었고.

게임이 시작되었고 시작한 장소 주변 벽에는 고양이 머리띠를 한 덩치 큰 사내가 그려진 몽타주가 존재했다. 몽타주 앞에 서서 빤히 쳐다보던 오메가원이 이내 몸을 돌려 애교 모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팀] 염소구더기: ?

[팀] 모타리: ㅇㅅㅇ;;

[팀]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ㅋ오메가형님!

[팀] 영원한이등병: 지금 캡쳐 하고 있죠?

[팀] 영원한이등병: 이제 이 정도는 충분히 유추 쌉가능이쥬~

[팀] 오메가원: 집사람한테 자랑해야지

[팀] 오메가원: 유명 인사 됐다고ㅎ

고양이 머리띠를 한 사내 캐릭터를 자랑한다고?

영원한이등병이 슬쩍 그 옆으로 가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보였다. 눈치를 슬쩍 보던 모타리도 그 무리에 합류한다.

아니, 무슨 졸업 사진 찍는 애들도 아니고.

[팀] 영원한이등병: 막내님이랑 개나소나 형님도 빨리!

[팀] 오메가원: 이것도 기념임

[팀] 모타리: 형, 빨리 오세요~ ㅎ

우리 방금 게임 시작 전까지만 해도 진지하게 이길 방법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받지 않았었나?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어느새 거너 캐릭터를 지나쳐 가는 경찰 제복이 보인다. 허리에 검을 찬 개나소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팀] 개나소나: ㅁㅎ?

[팀]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와기 막내님, 눈치 주는 어르신 같음욬ㅋㅋㅋ

[팀] 오메가원: 와기가 뭐임?

[팀] 영원한이등병: 아기라는 뜻이에요!

[팀] 오메가원: 어허… 요즘 애들 언어란 해괴하군

[팀] 영원한이등병: 갑자기 왜 이러셔요? 아재 느낌 나게ㅜ

[팀] 오메가원: 나만 모름? 개나소나도 모를 듯

[팀] 개나소나: ?

어느새 모인 일행들이 현상 수배지 앞에서 기념 캡처를 하고 있는데 머리채가 잡힌 개나소나가 의문을 가졌다.

[팀] 오메가원: 솔직히 연세가?

[팀] 오메가원: 동년배 느낌이 물씬 나는데

[팀] 영원한이등병: 엥? 저는 저랑 비슷한 또래일 줄 알았는데

[팀] 오메가원: 우째서?

[팀] 영원한이등병: 상대 시비 걸고 조롱하는 행동이 애 같아서?

[팀] 오메가원: 와기 같음?

[팀] 영원한이등병: 세대를 거스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ㅋㅋㅋㅋㅋ 오메가 형님

[팀] 영원한이등병: 와기는 조금 더 귀여운 사람들한테 쓰는 긍정적인 느낌이라유

[팀] 오메가원: ㅎ

[팀] 영원한이등병: ㅎ

기다렸다는 듯 침묵이 찾아왔다.

나이 차이는 나더라도 티키타카는 참 잘 된다고 생각하며 사각지대에 매복했다. 적군이 온다면 가장 잘 보일 만한 각도였다.

이번에는 모타리를 포함한 개나소나와 영원한이등병이 앞으로 뛰쳐나갔고 곧이어 중간에서 요란한 스킬을 사용하는 효과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귓말] 오메가원: 와기 막내님

[귓말] 염소구더기: 네?

여전히 세대를 거스르고 싶은 마음은 없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메가원의 부름에 대답하면서도 의아했다. 왜 굳이 팀 채팅으로 얘기하지 않고 귓말을 걸어온 것일까.

[귓말] 오메가원: 믄님 때문에 위너 가려고 했던 거 맞음?

[귓말] 염소구더기: 넵

[귓말] 오메가원: 근데 지금 길탈 했는데

[귓말] 오메가원: 어쩔티비?

저건 또 무슨 해괴한 질문법이지. 일단 대화 전개상 그 길드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믄님이 나왔으니 그런 생각이 없어졌는지 묻는 것 같았다. 사실 WINNER에 가장 가고 싶었던 이유는 믄님이 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믄님이 길탈을 했다고 했을 때부터 마음은 이미 시들시들해졌다.

저번 게임을 끝으로 친구 추가도 했으니 이제 굳이 WINNER 길드에 매달릴 이유는 없었다. 옛 추억이 있어서 조금 그립기도 했지만.

[귓말] 염소구더기: 안 갈까 싶어요

[귓말] 오메가원: 그럼 우리가 만드실?

[귓말] 염소구더기: 오메가님이 길드 만드시려고요?

[귓말] 오메가원: 난 그런 큰 직책을 맡기에는

[귓말] 오메가원: 넘나 하찮은 것

그럼 어쩌자는 거지.

적군은 아직 쳐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앞서 나간 일행들과 마주쳐서 싸우는 모양이었다. 저 셋은 힘들겠지만 헬프 요청은 들어오지 않았으니 합류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귓말] 오메가원: 그냥 이 멤버 잘 맞는 것 같아서

[귓말] 오메가원: 한번 얘기 꺼내봄

[귓말] 염소구더기: 개나소나 껄끄러워하던 거 아니었어요?

[귓말] 오메가원: ? 지금 와서 묻기에는 그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는데

[귓말] 염소구더기: 그건 그렇지만ㅋㅋㅋㅋ

저번에 개나소나도 그러더니, 길드라.

과거 WINNER 길드 소속이었을 때는 길드 룰 때문에 생각보다 힘들었었다.

길드전에는 정기적으로 참여해야 했고―참여하지 않아도 잠수자가 있을 것을 대비해 대기조로 접속했어야 했다―랭커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랭킹전을 한 뒤 보고해야 했었다.

물론 그건 믄님이 정했던 건 아니었고 부길드장으로 올라왔던 불경한눈깔의 단독 소행이었지만.

하필이면 믄님이 수험생이어서 제대로 관리를 못 할 때 그렇게 나설 줄이야. 그 당시에 랭커 취급도 제대로 못 받고 이루어지는 고된 일정에 길드를 탈퇴했던 몇몇 랭커들도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길드원들은 길드의 버프를 받기 위함이거나 길드의 명성 때문이었다.

[귓말] 염소구더기: 조금만 고민해볼게요

[귓말] 염소구더기: 아직 길드 신청 답변도 안 온 상태라서요.

[귓말] 오메가원: ㅇㅋ

[팀] 개나소나: 저기가 제일 여유롭네

[개나소나 님이 사냥에 성공하였습니다!]

[게임이 종료됩니다.]

오, 잠깐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개나소나가 적군의 타깃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큰 노력 없이 인벤토리에 쌓이는 보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 판이 끝나고 보따리를 바로 개봉해 보기로 했으니 얼른 대기 화면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며 쳐다보고 있는데, 대기 화면으로 돌아가던 게 갑자기 다시 게임 시작 화면으로 바뀌었다.

[현상 수배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파티] 모타리: 뭐죠?? 갑자기;

[파티] 개나소나: 자동 시작 눌러놨음?

[파티] 염소구더기: ㅇㅇ 매칭이 느려서 그랬는데

[파티] 염소구더기: 이렇게 바로 잡힐 줄은 몰랐네

[게임 캐릭터를 선택하십시오.]

캐릭터를 선택하고 맵이 보여야 상대 적군의 캐릭터도 파악할 수 있었다. 쉴 틈도 없이 달려야 하는 상황에 괜히 눈치를 보았다.

이번에 타깃으로 지정된 것은 거너였다.

[팀] 모타리: 괜찮아요! 이거 끝나고 개봉하면 되죠ㅎ

[팀] 염소구더기: ㅜ

[팀] 개나소나: ㅉㅉ

[팀] 염소구더기: ㅡㅡ뭐, 어쩔티비

[팀] 개나소나: 뭐야, 그 유치한 건 어디서 주워듣고 옴?

[팀] 오메가원: 움찔

[팀] 오메가원: 흠칫

[팀] 오메가원: 화들짝!

[팀] 개나소나: …….

개나소나는 침묵을 지켰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빨리 게임을 이길 생각을 하며 상대편의 조합을 살펴보려고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조합보다 우선적으로 들어오는 파티원들의 닉네임.

자세히봐도잘생김, 이라는 닉네임이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를 제외한 전원의 닉네임 옆에 상위 랭커라는 것을 나타내는 화려한 효과와 표식이 존재했다.

랭커라는 것뿐만 아니라 익숙한 닉네임들.

2년 전에도 봤었고 함께 게임을 하기도 했던 멤버들이었다. WINNER의 길드원들. 그중에는 불경한눈깔도 존재했다.

불경한눈깔.

이름도 비호감인 그가 누구였던가. 지금은 모르겠지만, 2년 전에는 대형 길드인 WINNER의 부길드 마스터였고 동시에 거너 랭커였다.

나와 똑같이 믄님을 동경하고 길드에 들어와 부지런하게 활동했었던 초창기 길드 멤버.

지인들과 가볍게 만들었던 길드가 믄님에 대한 동경으로 가입 신청을 요구하는 유저들이 많아져서 믄님은 꽤나 불편해했었다.

그때 본인이 길드 관리는 알아서 할 테니 믄님은 편하게 게임에만 집중하라며 나선 것이 불경한눈깔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첨하는 게 아니꼽고 질투도 했었는데…….

정작 믄님이 거너 콤보도 가르쳐 주고 나를 은근히 챙겨주자 불경한눈깔이 시샘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어쨌든 좋은 추억이 하나도 없던 놈인데 이런 데서 볼 줄이야. 아니, WINNER라면 이런 이벤트전에 무조건 참여를 할 것 같기는 했지만.

[팀] 모타리: 어라

[팀] 모타리: 저번에 보셨던 분이랑 이름이 비슷하네요??

자세히봐야몬생김이랑 믄님과 함께 한 적이 있던 모타리가 눈썰미 좋게 캐치했다.

[팀] 염소구더기: 저게 본캐

[팀] 염소구더기: 저번이 부캐

[팀] 모타리: 그렇군용! 근데 본캐 레벨이 엄청 높네요ㅠㅠ

[팀] 개나소나: 다른 놈들은 심지어 만렙

[팀] 개나소나: 위너 소속이네

WINNER가 주는 압박감은 엄청났다.

대형 길드의 길드원들은 만렙 유저들도 쉽게 받아주지 않았었다. 대부분이 상위권 랭커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고인물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쉽게 이기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긴장하는데 개나소나가 말했다.

[팀] 개나소나: 님들

[팀] 영원한이등병: 넹?

[팀] 개나소나: 내 의견임

[팀] 개나소나: 1대 1로 붙으면 우리가 불리하니까

[팀] 개나소나: 방어전으로 가면 ㅇㄸ?

방어전이라. 초공격형으로 이루어졌던 멤버들이 적군을 기습하러 가지 않고 타깃이 된 아군을 보호하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방어만 가능할 뿐, 기습을 하기는 힘들었다. 유일하게 장점이 있다면 탁 트인 공간이라서 적군이 다가오는 방향을 알 수 있다는 것.

[팀] 영원한이등병: 모여있으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팀] 영원한이등병: 광역기에 저랑 막내님은 휘청거릴 텐데

[팀] 개나소나: 어차피 이벤트전에서 중요한 건 하나임

[팀] 개나소나: 지정된 타깃을 먼저 죽이는 것

[팀] 개나소나: 우리는 타깃을 암힐러로 하고 실제로는 탱커인 척 둘러싸자

[팀] 오메가원: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음

[팀] 오메가원: 이번에는 거너나 도적이 하면 너무 금방 죽을 거고 나는 스킬로 체력 회복은 가능하니까

[팀] 개나소나: ㅇㅇ

[팀] 염소구더기: 그러다 지면?

[팀] 개나소나: 지면 지는거지

[팀] 개나소나: 솔직히 지금 우리 팀 레벨로도 많이 밀리고 경험 차이도 있으니까

[팀] 개나소나: 기습으로 궁극기 몰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함

확실히 질 확률이 높은 게임이다. 나도 이번 판은 이길 생각을 버려야겠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고 모타리를 제외한 나머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팀] 모타리: 화이팅! 열심히 합시다ㅎㅎ

[팀] 영원한이등병: 맞아요, 일단 이건 타깃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죽어도 리스폰이 빨리 되니까

[팀] 영원한이등병: 본거지에서 싸우면 합류하기도 빠를 듯!

게임이 시작되었다.

모타리가 가장 뒤에 자리 잡았고 그 앞에 나와 오메가원이 위치했다. 전방에는 개나소나와 영원한이등병이 들어오는 입구 사각지대에 붙어있었다.

자세히봐도잘생김: 힐러(힐러/빛)

불경한눈깔: 거너(원딜/바람)

투제로: 무투가(탱커/바위)

공공칠파라팡: 마법사(원딜/물)

해그늘: 전사(근딜)

[전체] 불경한눈깔: ?

[전체] 불경한눈깔: 조합이 왜 그따위

[전체] 불경한눈깔: 공격에 자신 있나봄?ㅋㅋㅋㅋ

[전체] 불경한눈깔: 탱커라고 대놓고 광고를 하네

[전체] 자세히봐도잘생김: ㅎㅇ

[전체] 해그늘: 잘 부탁드립니다

[전체] 공공칠파라팡: ㅅㄱ

시작하기도 전에 초를 치는 공공칠파라팡과 시비를 거는 불경한눈깔. 길드를 탈퇴한 건 아닌 건지 저놈은 여전했다. 개나소나를 초반에 질색했던 이유도 불경한눈깔을 연상하게 하는 시비 투 때문이었다.

[팀] 염소구더기: 거너→ 한타하고 좀 이긴다 싶으면 원딜 포지션에도 달려드는 습관 있음

[팀] 염소구더기: 법사→ 다혈질, 시비 걸면 이 악물고 그놈만 죽어라 패러 옴

[팀] 염소구더기: 전사→ 신사, 잘함, 뒤로 와서 원딜 잘자름

[팀] 염소구더기: 무투가, 빛힐러 실력은 모름

[팀] 염소구더기: 조심ㄱㄱ

[팀] 오메가원: 꿀팁ㄱㅅ

[팀] 영원한이등병: 헐ㄷㄷ 막내님,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여?

[팀] 오메가원: 믄님 후계자

[팀] 영원한이등병: ????? 내가 아는 그 믄님???

적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뿌렸다. 최근에 키보드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쳐본 적이 있나 고민될 정도였다.

아, 있구나. 개나소나한테 맞대응할 때.

[팀] 개나소나: ㅋ모타리

[팀] 모타리: 네 선배님

[팀] 개나소나: 법사 시비ㄱㄱ

[팀] 영원한이등병: 순한 신입님한테 그런 거 시키지 마세요 ㅠㅠㅠ;; 그런 건 개나소나님 전문이신디

[팀] 염소구더기: ㅇㅇ못할 듯

아군들 핀잔에도 시무룩해지고 언제나 존대를 하며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놈이었다. 실제 황보욱도 적군이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먼저 시비를 거는 성격도 아닌 것 같고.

[전체] 모타리: 법사 조1또 못하는 ㅅ1키가 수고는 뭘 수고? ㅋㅋㅋㅋ니 멘탈이나 수고해

…아니었을 텐데?

순간 개나소나의 채팅을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비비는데 모타리가 팀 채팅을 올렸다. 조금 전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팀] 모타리: ㅎㅎ; 신고당하면 어떡하죠?

[팀] 개나소나: ㅋㅋㅋㅋㅋㅋ ㄱㅊ 내가 책임짐

[팀]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ㅋ대밬ㅋㅋㅋㅋ

[팀] 영원한이등병: ㄱㅊ 신고 먹어도 채금이 끝임

[팀] 모타리: 채금이요?ㅠ

[팀] 영원한이등병: 채팅 금지! 어차피 일주일 지나면 풀림ㅋㅋㅋㅋㅋ

[팀] 모타리: 아… 형이랑은 얘기하고 싶은데 ㅜㅜ

[팀] 염소구더기: ㅎ잘했어

[팀] 모타리: ㅎㅎㅎㅎ 칭찬 들었으니까 일주일은 참을만 할 것 같아요!

살벌하게 노려보던 황보욱이 떠올라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놈 성격 어디 안 가지.

[전체] 공공칠파라팡: ??ㅋㅋㅋㅋㅋㅋ나보고 한 거?

[전체] 공공칠파라팡: 레벨 40도 안되는 게

[전체] 공공칠파라팡: 뭘 믿고 나대

[전체] 공공칠파라팡: 어처구니 없넼ㅋㅋㅋㅋ?

[전체] 공공칠파라팡: ㅅㄱ 닌 ㄷ1져따

[팀] 모타리: 어쩌죠

[팀] 모타리: 중고딩인 것 같은데 ㅜㅜ 상처받진 않았겠죠?

[팀] 염소구더기: ㅋㅋ ㄴㄴ 서른아홉

[팀] 염소구더기: 2년 지났으니 마흔 넘었음

[전체] 모타리: 젊음 믿고 나댐ㅅㄱ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수재였다, 모타리는.

대체 만렙 랭커를 적으로 두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질 거라면 적군 혈압이라도 높여야지. 해그늘과 투제로한테는 큰 감정은 없지만 불경한눈깔의 존재가 워낙 크니까.

[팀] 염소구더기: 개소야

[팀] 개나소나: ?

[팀] 개나소나: 내가 왜 개소임

[팀] 염소구더기: 개3소리를 자주 하잖아

[팀] 염소구더기: 근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팀] 개나소나: ?ㅋㅋㅋㅋ 이유 없이 욕먹는 게 안 중요하다고? 인성 뭐지?

[팀] 영원한이등병: 형님 보고 배우는 거죠, 뭐.

[팀] 개나소나: ?

[팀] 영원한이등병: ㅈㅅㅈㅅ

[팀] 염소구더기: 저기 거너 집중 공격해

[팀] 개나소나: 왜, 원한 있냐

적군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투제로. 앞세운 탱커는 빛 힐러의 특정 보호 대상이라는 뜻으로 머리 위의 닉네임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건 빛 힐러가 궁극기를 사용했을 때, 보호 대상으로 지정한 이가 죽으면 부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투제로가 타깃일 확률이 높겠구나.

[팀] 염소구더기: 나 코스튬 없다고 개꼽 줌 ㅡㅡ

[팀] 염소구더기: 시비도 자주 걸고

[팀] 개나소나: 그래서 코스튬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

[팀] 염소구더기: ㅇㅇ

[팀] 개나소나: ㅋ

[팀] 영원한이등병: ㅋ

[팀] 오메가원: ㅋ

[팀] 모타리: ㅇㅅㅇ? ㅋ?

모타리는 의문도 모르고 따라 웃는 느낌이었다.

뭐야, 나머지는 왜 웃어. 내가 시비 걸렸다고 기분 나빠하는데!

투제로 뒤로 빛 힐러와 전사가 빠르게 달려왔고 어렴풋이 저격 소리가 들려왔다.

불 속성의 거너 스킬은 정확히 모르지만 저격이라는 기본 스킬은 동일하겠지.

[팀] 영원한이등병: 막내님이 그동안 혹독하게 이벤트전을 굴린 원인이 저놈이렸다?

[팀] 영원한이등병: 날뛰고 오겠습니다

[팀] 영원한이등병: 아무도 흑염룡의 소유자인 나를 막지 못해!

[팀] 오메가원: 화장실 가는 것도 눈치 보던 그 억울했던 시절

[팀] 염소구더기: ;;아니, 다들 뭔 소리예요

[팀] 오메가원: 원수를 갚을 때가 되었다!

[팀] 염소구더기: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했다곸ㅋㅋㅋ아니, 진짜 방어전으로 가자던 우리 계획은! 야, 개소야!

[팀] 개나소나: 염소야

달콤살벌 한 호칭이었다. 그는 이미 선두로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팀] 개나소나: 목 따서 바칠게^^ 더 이상 우리 염소 피눈물 흘리지 않게~

‘방어전은 어디 갔냐고! 계획은 네가 짰잖아!’

그 뒤를 따라서 영원한이등병이 투제로의 공격을 피하고 건물 위로 뛰어 올라갔다. 오메가원이 사슬낫으로 투제로의 움직임을 막은 뒤라서 수월하게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견제하듯 전사가 건물 위로 뛰어올랐고, 시퍼런 날이 도적의 목을 노렸다.

[전체] 영원한이등병: 형님

[전체] 영원한이등병: 방해ㄴㄴ요! 저 지금 원통한 막내의 복수를 해야 한다구요!

[전체] 해그늘: ?

가까스로 회피기를 시전해 피한 영원한이등병이 대시 스킬을 사용했다. 빠르게 공격하러 올 거라 생각하고 잡기 스킬을 사용하려 했던 해그늘은 영원한이등병이 본인을 스쳐 지나가자 물음표를 띄웠다.

[전체] 자세히봐도잘생김: 복수~? ㅎ

자세히봐도잘생김은 이어지는 상황이 흥미로운지 다가오는 개나소나를 막지 않았다.

곧이어 불경한눈깔에게 다가가는 둘의 모습에 저격을 들고 있던 그가 뛰어내리는 영원한이등병을 겨누었다.

화염탄이 불길에 휩싸인 채 빠르게 날아갔다. 기본 속성보다 훨씬 더 모양이 컸고. 맞으면 화염 대미지를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신이 나간 이들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저격을 맞고 순식간에 딸피가 되었지만, 그는 홈그라운드라서 금방 리스폰 될 거를 믿고 싸우는 건지, 아니면 그냥 눈이 돌아간 건지 무조건 직진이었다(사실 눈이 돌아간 척 재미를 보는 게 목적인 것 같기도 했다).

불경한눈깔이 서둘러 도망치기 위해 궁극기를 거두어들이고 일어나는 그를 향해 영원한이등병이 스킬로 내려찍으려고 할 때였다.

회오리치며 뻗어오는 폭포수에 휩쓸린 영원한이등병이 쭉 밀려 벽에 부딪혀 사망했다.

[영원한이등병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전체] 공공칠파라팡: 거너를 왜 노림? 제정신인가

[전체] 개나소나: 정의 구현

회오리 폭포수가 영원한이등병에게 향하느라 연속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는 틈을 노린 개나소나의 검이 빠르게 직선으로 내리꽂혔다. 그 끝에는 불경한눈깔이 검에 꽂힌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불경한눈깔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전체] 불경한눈깔: 개오바;;;; 머임? 단체로 ㅁ2침??

[전체] 공공칠파라팡: 랭커란 놈이 마스터한테 바로 죽넼ㅋㅋ

[전체] 불경한눈깔: ㅗ

불경한눈깔은 유독 근접전에 취약한 유저였다. 원딜을 고집하는 이유도 적군과 대면하지 않고 기습을 노리기 쉬워서이다.

저렇게 악착같이 본인을 노리고 들어오면 당황해서 싸우기보다는 회피하려는 경향이 짙은 유저.

믄님이 대처 상황을 여러 번 알려주었지만, 그때만 알겠다고 대답할 뿐 크게 실천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놈이었다.

그 뒤로 믄님이 크게 터치하지 않았었지. 본인은 제대로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지만.

[전체] 공공칠파라팡: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급히 후퇴하려는 개나소나에게 평타를 연속으로 맞히고 바로 연계 기술로 스킬을 사용하는 공공칠파라팡. 마법사의 경직 스킬에 굳어버리자 건물에 있던 해그늘이 빠르게 달려와 합류했다.

[개나소나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팀] 개나소나: 잘하긴 하네

[팀] 염소구더기: 네가 더 잘함

[팀] 개나소나: 어쩐 일로 순순히 칭찬을? ㅋ

[팀] 염소구더기: 세상 잘함

[팀] 염소구더기: 멋있어 잘생겼다!!

[팀] 개나소나: 그건 사실이고ㅇㅇ

잘생긴 거 본인도 알고 있구나.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불경한눈깔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뻤으니까!

[전체] 공공칠파라팡: 요행은 끝남? ㅇㅋ?

한 번 더 이어지는 사슬낫의 스킬을 회피기로 피한 투제로가 오메가원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주먹이 그의 몸을 때리자 묵직한 파워에 오메가원이 휘청거렸다. 빠른 속도로 닳는 HP.

서둘러 저격을 켰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적군은 한 명이 죽었지만, 가장 거슬렸던 원딜이 죽었다. 하지만 아군은 둘이나 죽은 상태. 리스폰이 된다면 바로 합류가 가능하지만 최소 1분은 버텨야 했다.

하지만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팀] 개나소나: 모타리ㄱ

계획을 수정하고 탱커를 앞으로 돌격시키는 지시에 모타리가 별다른 투정 없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이 한 몸 바쳐 동료를 지키겠다.

기특하게도 궁극기는 미리 켠 채였다.

다시 봐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라고 하기에는 게임 센스가 돋보이는 놈이었다. 하지만 그런 센스가 저 랭커들에게는 얼마나 통할 수 있을까.

오메가원을 공격하는 투제로에게 달려가 스킬을 캔슬시킨 덕분에 오메가원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우리를 무섭게 압박해 오며 다가오는 적군. 투제로를 모타리가 막고 있기에, 남은 적군은 둘이었다.

빛 힐러인 자세히봐도잘생김과 전사 캐릭터의 해그늘.

해그늘은 2년 전에도 유명한 유저였다. 올라운더 유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체로 모든 캐릭터를 잘했었으니까.

랭커들이 주캐 위주로 실력이 편중되어 있는 반면에 그는 모든 캐릭터를 잘해서 믄님이 랭킹전을 할 때면 항상 데리고 가려고 했던 유저이기도 했다.

빛 힐러가 보호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는 캐릭터는 투제로였다. 여기서 1대 1로 적군과 싸워봤자 승산은 없다. 근딜이 없는데 접근하는 근딜을 막기는 힘드니까.

다가오는 길목에 연막탄을 던지고 서둘러 회피기를 사용했다.

동료를 위한 제물은 너인가.

해그늘이 잠깐 멈칫한 사이를 노려 오메가원이 투제로를 향해 집중적으로 궁극기를 사용했다.

적군의 HP가 높을수록 더 강한 효과를 내는 오메가원의 궁극기는 오히려 탱커와 상성이 좋은 편이었다.

사신의 거대한 낫에 베인 투제로가 큰 출혈과 함께 HP가 빠른 속도로 감소했다. 그런 그를 놓칠세라 집중적으로 패는 모타리. 하지만 그가 딱 한 번 헛스윙을 했을 때 투제로는 놓치지 않고 옆으로 회피기를 사용했다.

영생을 기원하리라…….

힐러 중에서도 최강의 치유를 자랑하는 빛 힐러의 궁극기가 터져 나왔다. 발밑에 퍼지는 밝은 빛과 함께 보호 대상으로 지정된 투제로의 HP가 완전 회복되었다.

애초에 죽었더라도 방금 그 궁극기로 부활을 시켰을 테지.

사기적인 궁극기였다. 공격 스킬이 전무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아군의 보호를 받으면 끝없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 아마 이벤트전이 아니었더라면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빛 힐러가 되었을 것이다.

연막탄 위로 점프를 해서 시야를 확보한 해그늘이 검을 치켜들었다. 근접해 있어서 저격도 제대로 켜지 못한 염소구더기가 목표였다.

[염소구더기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시. 체력이 높은 모타리가 버티는 사이, 아군이 리스폰 되면 한 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렇게 의심을 받기 위해 모타리를 초반에 구석으로 감싼 형태로 배치시킨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우리를 비웃듯…….

저주의 폭포.

물 속성의 마법사 궁극기가 이어졌다.

마법사 속성 중에서 가장 넓은 광역기를 가지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캐릭터가 거대한 폭포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이내 머리 위에서 많은 양의 물이 거세게 쏟아졌다.

대미지도 문제였지만, 이 궁극기의 가장 큰 무서움은 디버프!

저주의 폭포라는 궁극기 명이 남부끄럽지 않게 이 궁극기는 이동 속도 감소, 공격력 감소, 방어력 감소 등 때려 박을 수 있는 디버프는 전부 존재했다.

사실상 아군에 디버프를 상쇄시킬 수 있는 힐러의 궁극기가 없으면, 이 궁극기를 맞고 한타를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

‘젠장, 젠장! 속성별 캐릭터 특징을 조금 더 파악하고 왔어야 했는데!’

안일했다. 일반전에서는 그렇게 많은 속성별 캐릭터를 마주하지는 않아서 같은 아군의 캐릭터들만 파악했었는데. 미리 파악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오메가원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궁극기와 스킬의 쿨 타임으로 적의 체력도 뺏지 못한 오메가원이 해그늘의 손에 사망했다. 이어지는 영원한이등병의 부활 알림이 들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게임은 끝이었다.

[해그늘 님이 사냥에 성공하였습니다!]

[게임이 종료됩니다.]

[전체] 해그늘: 수고하셨습니다

[전체] 공공칠파라팡: 아!! 아직 못 죽였는데!!

[전체] 공공칠파라팡: 모타리 내가 이름 기억해 둔다

모타리의 HP가 간당간당한 것을 본 공공칠파라팡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했지만, 모타리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 모두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조금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초반에 거너를 죽일 때 빼고는 압도적으로 밀리는 한 타.

조합의 탓도 아니었고 이벤트전이라서 원래 싸우던 맵이 아니라는 이유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우리보다 실력이 좋을 뿐이었다.

[전체] 불경한눈깔: 처음에는 우연이었지ㅋ

랜덤 보따리의 보상이 지급되는 동안, 대기 화면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불경한눈깔이 얘기했다.

[전체] 불경한눈깔: 랭커도 아닌 떨거지들이 뭔 재주가 있다고? 받아주는 길드도 없을 듯

[전체] 불경한눈깔: 그리고 염소구더기

[전체] 염소구더기: ?

뭐지, 설마 염소똥의 부캐라는 걸 눈치챈 건가. 본캐와 크게 다를 게 없는 닉네임이라서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채팅창을 쳐다보는데 불경한눈깔이 얘기했다.

[전체] 불경한눈깔: 위너에 길드 가입 신청했다고?

자세히봐도잘생김이 얘기한 모양이다. 굳이 말을 섞고 싶지 않기도 하고 믄님이 없는 WINNER 길드에 갈지 말지 고민 중이었기 때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니 그가 비웃으며 얘기했다.

[전체] 불경한눈깔: 위너 많이 죽었네~ㅋㅋㅋㅋ

[전체] 불경한눈깔: 저딴 실력으로 신청하는 그지들이 있고

[전체] 모타리: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요

[전체] 불경한눈깔: 맬이 너므 심핸거 애닌가요~ 보호자세요?ㅋㅋㅋㅋ 사실을 말했는데 왜 급발진?

[전체] 불경한눈깔: 네 실력도 쓰레기얔ㅋㅋㅋㅋ쓰레기들만 모아놨나

[전체] 투제로: 하지 마

[전체] 불경한눈깔: 님은 빠져ㅋ 만렙이라서 받아줬지만, 아직 길드 신입이면서 길마님한테 함부로 명령질 하면 안됨~ 부모한테 교육 못 받음?ㅉㅉ

길마? 저놈이 길마라고?

부길마가 사퇴했다는 소리는 정말 루머였다. 쓰레기 같은 루머.

같은 길드원에게도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구는 놈의 행동에 적군도 조용해졌다. 길드 놈들이랑 마주치기 싫다던 자세히봐도잘생김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공공칠파라팡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데 눈치 없는 놈은 여전히 막말을 내뱉는다.

내가 저런 놈이랑 개나소나를 비교했다니!

의외로 조용한 개나소나의 모습이 의아하면서도 불경한눈깔의 태도에 화가 났다.

쓰레기? 아직도 게임을 하면서 부모 욕을 하고 실력이 부족하다고 욕을 하는 진상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대형 길드의 길드 마스터가 할 행동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로도 최악이었다.

[전체] 염소구더기: 야

[전체] 염소구더기: 그딴 길드 줘도 안 가짐

심지어 믄님이 이끌어갔고 많은 이들이 동경했던 길드를 저런 식으로 욕보이다니! 불경한눈깔도 못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과거 나와는 비빌 수도 없었던 놈이 저러니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저놈이 지금 나은 거라고는 레벨과 코스튬 효과뿐이면서.’

그래. 똑같은 조건이라면 이렇게까지 당할 이유가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랬기에 저놈의 저런 태도가 더욱 기분 나빴다.

받아주는 길드가 없을 거라고? X발, 내가 차리고 만다. 그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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