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길드원 비상 소집
길드. 사실상 더 세이렌에서 길드를 만드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일정량의 코인과 최소 레벨만 이상만 되면 개설할 수 있다.
그 길드를 단순한 친목용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WINNER처럼 대형 길드로 만들 것인지가 중요했지만.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단순 친목용이 아니라는 거지.’
건방진 불경한눈깔이 무시하지 못할 대형 길드를 만드는 것. 그것이 최종 목표였다.
길드를 만들 수 있는 최소 조건은 달성했지만,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대형 길드는 만들 수 없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길드를 이루는 구성원들이었다.
실력자들이 많을수록 길드 레벨도 빨리 오르고 명성도 올라갈 테니까.
실력자…….
‘개나소나랑 오메가원은 먼저 제안했으니 권하면 들어올지도 몰라. 만렙은 아니지만 둘 다 실력은 괜찮으니까 좋은 초기 멤버가 될 테고.’
영원한이등병도 잘하면 들어와 줄지도 몰랐다. 물론 학생이라서 시험 기간 등에는 자주 접속은 어렵겠지만, 지금은 한 명이라도 더 모집하는 게 중요했으니까.
공책의 빈 공간을 의미 없이 까맣게 칠하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의식중으로 볼펜은 하나의 단어를 쓰고 있었다.
[믄님.]
솔직히 그가 온다면 그의 명성만 보고 길드를 가입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과거 WINNER가 초창기에 그랬었으니까.
지금은 어느 길드에도 소속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던데 요청하면 들어와 줄까. 확신은 없었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고 게임도 솔플을 즐기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지인들의 성화에 얼떨결에 WINNER 길드 마스터를 맡고 있었지만, 애초에 길드를 키우는 데 큰 관심도 없었고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뭐 해?”
강의에 집중하지 않고 휴대폰을 보고 있던 임해서가 슬쩍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 물었다. 시선 끝은 어느새 볼펜으로 향해 있었고 ‘믄님’이라는 글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너 연습한다더니 랭커 영상 참고하려고? 믄님이 거너 쪽에서 유명하긴 하지. 초창기 유저이기도 하고.”
“응. 지금 길드를 만들까 하는데 믄님도 초대할까 싶어서.”
“믄님 들어오면 땡큐지. 너도나도 네 길드에 들어오려고 할…….”
하던 말을 멈춘 임해서가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본인의 휴대폰은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점점 더 입이 벌어지는 게, 임해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진짜 소름 끼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방금 들었거든? 네가 들으면 비웃을 수도 있음.”
“응. 지껄여 보시오.”
“너 설마 믄님이랑 아는 사이냐?”
“응.”
임해서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소리 없는 절규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용케 교수님에게는 들키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임해서를 비웃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우리의 대화가 들리지는 않는 모양인지 조금 떨어진 쪽에 앉아있는 황보욱은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네가 어째서? why?”
“안되는 영어 쓰지 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믄님이랑 레벨 차이 나서 매칭되기도 어려울 텐데. 애초에 랭킹전 위주로만 돌리는 분이란 말이야.”
그런데 감히 네가? 라는 사랑스러운 눈빛에 손가락으로 눈을 좀 찔러줄까 하다가 인내심을 겨우 발휘했다.
사실 임해서한테는 조금 더 나중에 말할까 싶었지만 지금 얘기해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
“나 예전에 위너 소속이었어.”
“…응?”
“거너 랭커였고 믄님한테 직접 조언받은 적도 있음.”
“…응?”
“그 반응은 뭔데.”
“아니. 나도 몰랐지만 네가 정신병이라도 있나 싶어서 진지하게 걱정됐음.”
결국 손가락을 들었다. 인내심은 한 번이면 족했다.
좋아, 찌르자.
“와씨, 스톱! 스톱! 나 실명시키려고 작정했어, 손지언?!”
“거기! 모른 척해줄 때 좀 조용히 해라!”
영원한이등병의 대시 스킬보다 빠른 손가락 공격에 임해서가 기겁하며 언성을 높이자 결국 교수님도 언성을 높이셨다.
그래, 그렇게 속닥거렸는데 모를 리가 없지.
교수님의 지적에 동기들의 시선이 쏠리고 황보욱의 시선도 우리에게 향했다. 그에게 장난스레 윙크를 해 보이니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린다.
‘딴 놈들은 몰라도 저놈한테는 아직 들키면 안 돼.’
이따위로 반응하면 오히려 저 성격에 더 관심을 끄려고 악착같이 귀를 닫고 있겠지.
내 성격이랑 비슷한 면이 있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손지언, 너 나중에 보자.”
임해서가 눈을 부릅뜨며 째려봤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휴대폰을 몰래 꺼냈다. 문정하는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나: 형]
[나: 뭐 하세요?]
생각해 보니 먼저 연락하는 건 처음인 것 같기도 하다. 항상 문정하가 귀찮도록 보내오는 메시지를 한참 뒤에나 답장하거나 아니면 몰아서 답장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진짜 나 같은 후배 없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나도 그건 잘 알고 있었고.
그 얼굴에 이런 취급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문정하는 그런 기색도 없이 내게 다가왔고 옆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 호감이 가는 사람. 그게 어떤 의미일까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스쳐 지나가는 예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믄님을 존경하고 가까이하고 싶어지는 그런 호감도랑 비슷하려나?’
만약 그런 거였다면 문정하에게 완전 쓰레기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해석이 된다. 설마 그 정도로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건 아니겠지, 라고 단정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믄님은 좋아할 만한 부분이 많지만, 나는 고작 바퀴벌레 하나 잘 잡은 것뿐인걸.
[개소: 지언아.]
[개소: 나 방금 꿈꾸는 줄 알았어. 너한테 먼저 연락이 왔길래ㅎㅎㅎㅎ]
문정하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실제로도 메시지처럼 실실 웃고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개나소나는 정말 믄님을 우러러보는 나처럼 나랑 친해지고 싶은 건가?
만약 그게 정말 맞다면, 아주 조금은 상냥해질 용의가 있었다.
임해서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알았다면 속으로라도 개소리는 지껄이지 말라고 정정해 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속마음을 읽는 재주 따위는 없었다.
[개소: 나 지금 과제 하는 중인데 올래?]
[나: 제가요? 그 자리를?]
[개소: 손지우도 있고 곧 점심시간이잖아.]
그 말은 즉 가면 밥을 사주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거지는 아니었지만 공짜 밥을 거절할 정도로 부자는 아니었으니까.
문정하의 호구 같은 씀씀이가 이제는 살짝 걱정은 되었지만, 본인이 먼저 제안을 한 거니까 괜찮겠지.
[나: 위치 알려주세요.]
[나: 임해서도 데리고 가도 되나요? 얘 밥은 본인이 사 먹으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개소: 그래. 점심은 배달시키자고 하네.]
손지우는 누구 사촌 형인지 참 배운 사람이었다. 중식 메뉴 선정에 흡족해하며 임해서의 메뉴까지 정해서 보내주는데 강의가 끝났다.
순식간에 부산스러워지는 강의실과 임해서.
경악한 얼굴로 내 어깨를 잡고 흔드는 바람에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너 진짜 이때까지 왜 말 안 했어!!”
“벌써 2년 전이라서 그때 실력도 안 나오는데, 뭘. 어차피 계정도 새로 팠고.”
“그래도 그렇지! 거너님의 후계자로 유명하던 거너똥이 너라니!”
“그따위로 부르지 말고 볼륨 좀 낮춰, 쪽팔리니까.”
교수님에게 지적당하고 조용히 계속 휴대폰만 만진다 했더니, 그새 검색을 해본 모양이었다.
믄님과 같은 길드 소속의 거너 랭커.
더쎄 자유게시판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믄님을 줄여 거너님, 염소똥을 줄여 거너똥이라고 불렀었다.
거너똥이 뭐야, 거너똥이.
그때 처음으로 닉네임을 염소똥이라 지은 자신이 원망스러웠었다.
오랜만에 듣는 명칭이지만 기분만 더러워질 뿐이었다.
“X발, X발……. 내가… 내가……!”
동기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은 창피하지도 않은 걸까. 마치 실연을 당한 여주인공처럼 굉장히 억울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던 임해서가 이내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
“네 영상보고 연습한 적도 있단 말이야! 존나 자존심 상해!!”
“영상?”
“임해서,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야동 얘기하나? 근데 손지언 영상보고 했다면서.”
쏠리는 시선들 일부에 호기심이 피어난다.
말을 해도 꼭 저따위로 해서 오해를 사게 만든다. 나는 임해서의 등을 신경질적으로 내려쳤다. 찰진 소리가 들려오고 임해서가 악, 하는 비명을 질렀다.
“개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형이 같이 밥 먹자고 연락 왔어.”
“형? 지우 형?”
“아니. 문정하.”
“와, 여기 없다고 이름 막 부르는 거 보소. 근데 이제 개나소나랑 거리 안 두고 친해지기로 했어?”
임해서의 입을 황급히 막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있던 황보욱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간 모양이다.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임해서를 노려보자 그도 제 실수를 눈치챈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실수, 실수. 쏘리.”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듯.”
“괜찮아. 나도 오늘 여러 번 식겁했으니까. 학식 가기로 했어?”
“아니, 배달. 중식이라서 너랑 난 간짜장 시킴.”
“간짜장 좋지. 그보다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해봐. 진짜 리얼로 님 랭커였음?”
“내가 그딴 걸로 뭐 하러 거짓말을 해.”
“그럼 너는 내가 사실 믄님이었다고 하면 쉽게 믿을 것 같아?”
임해서를 돌아보았다. 멍청한 얼굴로 씨익 웃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존경하는 믄님이 이딴 녀석일 리가 없지.
내 표정에서 대답을 들은 모양인지 그가 또 울컥하는 얼굴로 얘기했다.
“지금 내 심정이 네 표정이거든!”
“그렇구먼. 사실 처음부터 얘기할까 했는데 서프라이즈 하려고 입 다물고 있었지.”
“그런데 이렇게 덤덤하게 얘기해 준다고? 너 사실 실력으로 서프라이즈 시켜주려고 했는데, 예전 실력 안 나오니까 그냥 얘기해 주는 거지?”
“…지랄 노노.”
“표정 보니 정답이구먼.”
꽤나 진실에 가까운 날카로운 추리. 팩트 폭행을 당해서 약간 어질어질했다.
조금씩 예전 감각을 찾아가고는 있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게임을 했던 그때보다 지금 못하는 것이 당연하기는 했다. 2년이라는 시간도 짧지도 않았고.
그래,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건 본인뿐이지.
씁쓸하게 웃으며 더 이상 반박을 하지 않으니 임해서는 그제야 믿는 눈치였다. 하여간 더럽게 사람 말을 믿지 않는 놈이다.
“너 근데 진짜 길드 만들려고? 믄님한테는 얘기 꺼낸 거야?”
“아니. 아직 아무 얘기도 못 했고 솔플 하는 걸 좋아하셔서 거절당할 것 같기는 해.”
“하긴 영상 보면 대부분 혼자 플레이하긴 하더라.”
문정하가 알려준 강의실로 이동하며 얘기하는데, 믄님에 대해 제법 아는 모양인지 임해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새삼 믄님에 대한 유명도를 느낄 수 있었다. 더 세이렌의 초창기 유저도 아닌 임해서가 알 정도면 유명하긴 유명하지.
“근데 왜 위너는 다시 안 들어가고? 예전 소속이었으면 부캐라고 해도 받아주지 않아?”
“거기에 이제 믄님도 없고 재수 없는 놈이 있어서 절대 안 가. 불경한눈깔이라고, 지금 길마로 활동 중인데 예전부터 나랑 사이가 안 좋았거든.”
“아, 한동안 거너똥 접은 이유가 부길마랑 1대 1로 붙었다가 져서 계정 폭파한 거라고 하던데 진짜였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때는 지우 형 주민 등록 번호로 하고 있었는데, 공부도 안 하고 멋대로 이용했다고 계정 날렸어.”
“헐. 랭커까지 키웠던 그 계정을? 팔아도 몇십만 원은 받았을 텐데.”
안타깝다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지금도 그날만 생각하면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정작 그 악마는 게임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그럼 길드 만들어서 길드전이라도 하려고?”
“길드전?”
“응. 지금 네 말투 들어보면 위너 부길마가 마음에 안 들어서 새로 만드는 것 같은데. 길드전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지. 그래서 믄님도 탐낸 거 아니야?”
길드전이라. 생각도 못 해본 의견에 잠깐 고민했다. 단순히 파티원들을 무시하는 태도에 기분이 나빠서 즉흥적으로 생각했던 건데 나쁘지 않을지도……?
물론 그렇게 하려면 길드원들이 최소 만렙은 찍은 유저여야 하겠지만.
“문정하 선배님한테도 말해 봐. 전사 잘하잖아. 솔직히 만렙 찍으면 더 날아다닐걸? 전사하는 유저도 많은데 그 레벨 대에 벌써 마스터 찍은 거 보면 답 나왔지.”
“그럴까 싶기도 해. 애초에 개나소나가 먼저 길드 만들어보라고 권유했었거든.”
“의외네. 성격만 보면 솔플이 적격인데. 혹시 네가 염소구더기인 거 눈치챈 거 아니야?”
소름 돋는 예시에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쳐다보니 임해서가 시선을 회피하며 이어서 말했다.
“예시지, 예시!”
“너 설마… 뭐 지껄였어?”
“어허! 넌 친구를 어떻게 믿고!”
“딴 놈은 믿어도 넌 못 믿지. 말했어, 안 했어?”
“안 했어, 안 했어! 그… 비슷한 뉘앙스로 묻기는 하셨지만!”
“물었다고? 뭘?”
생각도 못 한 답변에 임해서의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었다. 조금 전과는 정반대의 상황. 대답 없이 어색하게 웃는 그를 한 번 더 다그치니 그제야 입을 연다.
“모타리가 정말 네 계정이 맞냐고 묻던데?”
“…왜 그렇게 묻는 건지는 물어봤어?”
“응. 근데 친구한테 빌려준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아서래. 그렇다고 네가 게임을 안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다른 부계정이라도 있는 건지 지나가는 말로 궁금해하셨어.”
저번에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났었거든, 하고 말을 덧붙이는데, 왜 이렇게 오금이 저리는 건지.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야.
황보욱이 최근에 이벤트전을 한다고 매일 접속했었으니 의심을 할 만하기도 했다.
내 표정이 썩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눈치를 살피던 임해서가 슬쩍 제 의견을 얘기했다.
“그냥 말하는 게 어때? 너도 처음보다는 그 선배 좀 덜 불편해하는 것 같더만.”
“그건 그래.”
“그럼 굳이 아등바등 숨길 이유는 없잖아?”
“그건 그런데. 이제 와서 막상 밝히려고 하니 민망하고, 게임에서까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쭈쭈 하는 개나소나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해.”
시비를 걸지 않고 ‘염소야~’ 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개나소나를 생각하자니 빈속임에도 헛구역질이 나왔다.
파랗게 질린 나를 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임해서도 이내 별반 다를 거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내 기분 이해하지?
“뭐야, 너희 어디 아파? 왜 이렇게 죽상이야.”
밖에서 여자 친구와 통화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복도에 나와 있던 손지우가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씨익 웃는 모습이 꽤나 여유로워 보였다.
“뭐야, 과제 한다더니 혼자 팔자 좋네.”
“무슨 소리. 형님도 지금 엄청난 임무를 수행 중이란다.”
“땡땡이?”
“아니. 저기 봐.”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은 강의실이었다. 이제 막 과제를 끝내고 정리를 하는 모양인지 노트북을 덮고 있는 문정하가 보였다.
평소처럼 단정한 옷차림에 안경까지 끼고 있는 그는 정말 개나소나와 동일 인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멀쩡하고 잘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수줍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여성.
손지우가 히죽 웃어 보였다.
“핑크빛 기류가 가득하지 않아?”
“저 두 사람 썸 타는 중이에요?”
“아직은 아닌데, 여자애가 엄청 적극적이야. 나한테도 적당히 보고 중간중간에 빠져달라고 해서 도와주는 중이고. 문정하가 그래도 이건 되잖아.”
얼굴을 가리키는 손놀림이 현란하다. 그 행동에 임해서와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잘난 외모이긴 하지, 게다가 돈도 많다.
“뭐, 근데 어차피 문정하가 관심이 없어서 실패하겠지만.”
“문정하 선배는 연애 생각이 없대요? 아니면 이상형 스타일이 다른가요?”
“저놈 성격 잠깐이라도 겪어봐서 알잖아. 좋은 성격은 아닌데 취향도 좋은 편은 아니거든.”
임해서의 질문에 손지우는 고개를 우리에게 내밀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너희니까 말해 준다는 뉘앙스가 가득했다.
“약간 청개구리 스타일이야. 본인 좋다는 놈들은 관심 없고 그 반대에 관심 가지는 스타일.”
임해서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리고 얌전한 성격보다는 할 말 하는 드센 성격을 좋아하는 편이면서, 은근 건드렸을 때 반응 재미있는 성격을 좋아해.”
이번에는 손지우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동시에 내리꽂히는 시선에 내가 확 인상을 찡그리는데 손지우가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성격은 터프함. 무슨 일을 할 때 터프한 걸 좋아하는지는 지언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터프함은 얼어 죽을. 그냥 바퀴벌레만 잡을 줄 알면 세상 사람들 다 이상형으로 보이겠네.
어이가 없어서 손지우를 올려다보는데 강의실 문이 열리고, 문정하와 그 옆에 여자 선배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다.
청순한 외모의 선배는 손지우와 함께 있는 우리들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해왔다.
“지우가 얘기했던 사촌 동생이구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반가워. 그럼 나는 가볼 테니까 식사 맛있게 해. 정하야, 나중에 자료는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줄게!”
“응.”
문정하가 짧게 대답했다.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하면서 시선이 닿는 곳은 내 정수리였다.
시선을 회피하고 있는 내 모습에 문정하가 웃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의 대답과는 너무 다른 어조인 것을 여기에 있는 이들이 모를 리가 없겠지.
“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있었어?”
“과제 덜 끝난 것 같아서요.”
조금 전에 손지우가 놀린 것 때문에 그럴까. 괜히 민망하고 쑥스러워서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있자 문정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왜 사람 의식하게 만들어!
“내버려 둬. 쑥스러워서 그래. 해서야, 들어와라. 너 챙겨줄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역시 지우 형님입니다. 전 형님 없으면 못 살아요.”
“아부는 잘해.”
손지우의 손짓에 임해서가 냉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뻘쭘하게 문정하랑 둘이서 있고 싶지 않아서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커다란 몸이 그 앞을 막았다.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그쪽으로 따라붙고 왼쪽으로 움직이면 그쪽으로 따라붙는다.
결국에 울컥해서 고개를 들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왜 계속 사람 앞길을 막아요!”
“이제야 얼굴 보여주네. 뭐가 그렇게 쑥스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 오늘은 아직 잘해준 게 없는데.”
능청스럽기도 하다. 평소에 잘해 준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고, 오늘도 잘해 주려고 했다는 뉘앙스가 적절히 섞여 있는 말. 역시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야.
이런 놈을 한순간이나마 의식했다는 스스로가 어이없어서 이내 신경질적으로 그의 정강이를 툭툭 찼다. 저렇게 능글맞은 모습을 보자니 딱 개나소나가 따로 없다.
“아야.”
“지언이 이제 문정하한테 막 나가네.”
“나를 편하게 여기는 모양이야.”
음식이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후다닥 뛰어나가는 임해서와 달리 여유롭게 자리를 세팅하고 있던 손지우가 장난스레 얘기했다. 거기에 대고 저따위의 말을 내뱉는 문정하의 모습은 얄밉기도 한데 또 묘하게 감동을 받은 표정이라 화를 내기도 뻘쭘하다.
아니, 왜 사람이 정강이뼈 한 번 차였다고 감동하지? 로우킥이라도 날리면 좋아서 실성하려나.
“지언이도 낯가림 심한데, 편하긴 편해진 듯.”
“응. 그래서 길고양이 길들이는 기분이라 귀여워.”
“길고양이한테 죽빵 맞아 보고 싶으세요?”
“냥냥이 펀치야?”
“…….”
개나소나 때는 시비를 걸면서 사람 혼을 쏙 빼놓더니 현실에서도 혼을 쏙 빼놓는구나. 정신이 아찔하다. 이게 이 사람의 귀여워하는 방식이라니. 진짜 귀여움받기 싫다.
“배달 도착!! 문정하 선배님 잘 먹겠습니다!!”
결제한 카드를 문정하에게 내밀며 임해서가 허리를 90°로 숙여 보였다. 별다른 말 없이 카드를 받는 것을 보아하니 임해서의 밥값도 계산하려는 모습이었다.
이러면 데리고 온 내가 좀 민망한데.
민폐를 끼치고는 싶지 않아서 지갑을 꺼내려고 하니 문정하가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나를 보았다.
“뭐 하려고?”
“저랑 임해서 거는 그냥 제가 낼게요. 제 마음대로 데리고 온 건데.”
“괜찮아. 선배가 후배 밥 사주는 건 당연하지.”
“지우 형은 저희 한 번도 안 사 줬어요.”
손지우는 못 들은 척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탕수육 비닐을 벗기고 있었다. 얻어먹는 주제에 탕수육도 시킨 모양이다. 나이스!
“됐어, 내버려 둬. 문정하가 호구도 아니고 진짜 괜찮으니까 하는 말이야. 오늘 저놈 주식은 빨간불이 가득했거든.”
“주식? 빨간불?”
주식에 대해서는 뭔지 모르겠지만, 빨간불이 들어오면 좋은 건가. 문정하가 어이없다는 듯 손지우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내 시선에 웃으며 덧붙였다.
“진짜 괜찮아. 주식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돈이 부족한 편은 아니라서.”
“…허세가 가득한 건지, 사실을 말한 건지?”
“후자.”
손지우는 단호하게 얘기했다.
아하, 그럼 마음 편하게 먹어도 되겠군.
미안함을 쿨하게 버리고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원래 연예인 걱정이랑 부자 걱정은 하는 거 아니랬다.
“근데 진짜 아까 지우 형님 얘기 들어보면 문정하 선배님 이상형이 손지언이랑 비슷하네요. 남자이긴 하지만.”
간짜장을 입에 한가득 넣어놓고도 제대로 된 발음을 구사하는 임해서가 신기했다. 그리고 저렇게 정신 나간 소리를 멀쩡히 지껄이는 모습도 신기하다.
아무리 조건이 비슷해도 어차피 둘 다 남자인데, 어떻게 엮을 사람이 없어서 나랑 엮는 거지. 속으로 혀를 차며 탕수육을 입 안에 꾸역꾸역 넣고 있던 중이었다.
손지우가 태연하게 얘기했다.
“아, 쟤 바이라서 남녀 상관없음.”
“쿨럭!”
하마터면 입에 넣은 탕수육을 역주행시킬 뻔했다. 휴지를 건네주는 문정하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뭐지? 왜 저런 말을 손지우가 하고 문정하는 저렇게 태연하지?
내가 너무 보수적인 건가 싶어서 당황하는데 이미 음식을 역주행시키는 임해서의 꼴을 보아하니 정상적인 반응인가 보다. 더러워.
“아니, 그걸 왜 형이 말해? 남의 사생활을.”
“이미 우리 동기들은 다 알아. 문정하가 대놓고 얘기했거든. 아까 걔 말고 다른 여자애가 공개적으로 고백했다가 차인 뒤에 도대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 건지 물으니까 여자 말고 남자도 가능한데, 라고 했음.”
“…진짜예요?”
“응. 귀찮게 구는 것도 싫었고 애초에 내 마음에 들기만 하면 딱히 상관없으니까.”
이걸 쿨하다고 해야 할까,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까. 나도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편견이 없는 모습이었다.
진짜 알면 알수록 대단한 남자다. 어떤 의미로는 믄님보다 더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다.
“그, 그럼 손지언이 진짜 선배님의 이상형인가요?”
아니, 그러니까 왜 자꾸 그 이상형에 나를 걸고넘어지냐고.
임해서의 당황한 목소리는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본인이 역주행시킨 음식을 서둘러 치우면서도 시선은 문정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무례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걸 받아들이는 저 선배들이 너무 태연하다.
“이상형이라는 건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문정하가 탕수육을 하나 집어 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아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새처럼 퍽이나 자상한 모습이었다.
“지언이가 호감 가는 스타일이긴 하지.”
임해서가 눈빛으로 물었다. 어딜 봐서요? 하지만 문정하에게 대놓고 물을 용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내 얼굴에 침 뱉기라서 가만히 있었다.
“형은 제 스타일 아닌데요.”
“자상하고 돈 많은 남자 좋아한다면서.”
“그렇긴 해도 그게 연애 대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죠. 저한테 진지한 거면 조금 더 구애를 해보도록 하세요. 생각은 해볼게요.”
뻔뻔한 말에 문정하는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참 취향 한번 특이한 사람이었다.
“구애를 하면 받아줄 생각은 있고?”
“하는 거 보고요. 저 쉬운 남자는 아니라서.”
“손지언 모쏠임.”
손지우가 태연히 남의 비밀을 밝혔다. “형!” 하고 신경질적인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인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임해서도 조금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조금 무안했다.
“너 그래도 고백은 몇 번 받지 않았어?”
“받은 적 없는데.”
“아니, 동기 중에서 새롬이가 너한테 몇 번 밥 먹자고 했잖아.”
“그건 그냥 밥이잖아. 귀찮아서 싫다고 했는데.”
“은정이가 커피나 음료수도 가져다준 적도 있잖아.”
“…고맙다고 했는데?”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먹을 거 준 사람한테는 고맙다고 얘기했다는데 왜 이딴 반응이야.
그런 생각에 인상을 찡그리니 문정하의 따뜻한 시선이 이어진다.
뭐, 왜 또!
“그래, 지언이가 나중에 연애 대상으로 여겨지면 구애라는 게 확실히 티 날 정도로 행동할게.”
“너도 진짜 어지간하다. 쉬운 남자가 아니긴 하네.”
어쨌든 문정하는 지금 내가 연애 대상으로 보이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손지우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맞다. 나중에 저번에 하던 게임 한 번만 더 가르쳐 줄래?”
성인 남성 넷이 모이니 음식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릇을 치우고 있는데 손지우가 지나가는 말로 묻는 소리에 잠깐 버퍼링이 걸린 듯 손이 멈추었다.
게임?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후비적거리자 손지우가 무심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여자 친구가 시작한다고 해서 같이 해보기로 했거든. 연아 친구 중에 그 게임 잘하는 사람이 있나 봐. 같이 하자고 졸라서 하기로 했는데 그래도 저번처럼 너무 못하는 꼴을 보이면 쪽팔리잖아.”
“…와, 내가 아는 형 맞아? 내 계정도 망설임 없이 지우던 그 형이 게임을 배우겠다고?”
“그때는 네가 내 주민 등록 번호를 마음대로 쓴 거잖아.”
“정확히는 전 여친한테 차인 충격으로 화풀이한 거지.”
“너 연아 앞에서 그딴 소리 절대 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못 들은 척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당한 게 있으니 이 정도 복수는 애교였다.
“형! 그러면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피시방 콜?!”
“그러든가.”
임해서의 제안에 손지우가 흔쾌히 수락했다. 이번에는 제 계정도 새로 만들어서 할 거라는 말이 퍽 낯설었다. 정말 여자친구가 대단하긴 하구나.
“밥은 문정하가 쐈으니까 피시방비는 내가 쏠게. 저번에 문정하한테 받았던 돈이 아직 남았거든.”
그럼 결국 피시방비도 문정하가 내는 게 아닌가……?
굉장히 뻔뻔하게 얘기하는 저 모습을 보고도 정작 본인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형도 갈 거예요?”
“응? 아아. 지언이 네가 가면 가야지. 어차피 급한 일도 없고.”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염소구더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거너를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다른 캐릭터도 익숙해지면 좋으니까.
네 명이 나란히 피시방에 들어섰다.
새로운 캐릭터를 연습해 볼까 생각하며 자리에 앉는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지언아. 모타리 지금 접속 중이라고 뜨는데?”
…황보욱, 이 개새끼. 공부는 안 하고 지금 게임이나 처하고 앉아있냐. 피시방에 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문정하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못하고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큰일 났다. 당연히 모타리 아이디를 사용할 생각으로 왔는데 이런 상황이 생길 줄이야.
일단 피시방 의자에 앉으며 여유로운 척 말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특할 정도로 능청스러운 연기였다.
“친구가 요즘 더쎄에 푹 빠져서 그래요. 저는 어차피 임해서 부캐 써도 되니까 금방 들어갈게요.”
“네 건데 지금은 네가 사용한다고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본캐가 더 익숙하잖아.”
“괜찮아요. 어차피 쪼랩이라서 별 차이도 없어요.”
애초에 둘 다 내 계정이 아닌 건 똑같았으니까.
임해서의 부계정 아이디를 묻는 나를 문정하가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건 알지 못했다.
[개나소나 님이 파티를 초대하였습니다.]
[호로쯉로록 님이 파티 신청을 수락하였습니다.]
손지우가 계정을 새로 만들고 튜토리얼을 하는 동안에 나는 임해서의 부계정을 살펴보았다. 당연한 거겠지만, 고작 1회(+손지우 대여 1회)만 사용했던 부계정은 템이 텅텅 비어있었다.
“미쳤네. 이게 인벤토리냐 창고냐.”
“부계니까 당연히 제대로 된 템이 있을 리가 있냐.”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라는 듯 타박하는 임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럼 이걸로 어떻게 게임을 하라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장인이 아닌 나는 장비 탓을 좀 많이 하는 유저였다. 랭커들이 유니크 템을 당연하다는 듯 끼고 다니는 이유도 부속된 효과를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언이 너 뭐 할 건데?”
“저요?”
잠깐 고민을 하다가 거너는 포기했다. 굳이 문정하 앞에서 거너 플레이 스타일을 보여주었다가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러면 물 정령? 하지만 그건 딱히 재미가 없다. 애초에 2년 전에 손지우의 주민 등록 번호로 게임을 했던 이유도 출혈 효과를 보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만큼 나는 킬에 환장하는 유저였다.
“딜러 하고 싶은데. 근딜 해볼까 싶기도 하고요.”
“원딜 한다고 하지 않았어?”
“어차피 제 계정도 아니니까 재미 삼아 근딜도 해보고 싶어서요. 사실 근딜을 진짜 못해서 욕을 많이 먹었거든요. 그래도 지금은 좀 게임에 적응했으니까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2년 전에는 심리전도 모르고 무조건 건물로 돌격만 했으니, 근딜을 해도 욕을 먹을 수밖에.
그때는 시야를 봐야 하는 것도 몰라고 뒤로 돌아가서 적 원딜들을 잘라내야 하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가능하지 않을까? 근딜로 멋있다고 칭찬받는 것도 뿌듯할 것 같은데.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흐뭇해하니 문정하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럼 전사 할래? 내가 가르쳐 줄게.”
“형은 뭐 하려고요?”
“나도 다른 거 하면 돼. 어차피 손지우와 함께 하는 판은 버리는 판이니까.”
꽤나 매몰찬 말이었다. 손지우가 노려보는 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튜토리얼이 끝나기 전까지 연습장에서 같이 스킬을 연습하기로 한 우리는 동시에 접속했다.
전사 캐릭터가 텅 빈 공간에 서있었다.
물 정령과 거너 위주로만 하다가 전사가 있으니 어색하다. 기본 코스튬을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전사는 조금 불량해 보이기도 했다.
이어지는 접속 알림과 함께 개나소나가 들어왔다. 마법사 캐릭터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가 선택한 것은 힐러였다.
“힐러?”
“생각보다 힐러 속성들이 전반적으로 괜찮은 것 같아서 연습해 보려고.”
그가 최근에 만났던 힐러 속성들은 오메가원의 암흑 속성 힐러와 자세히봐도잘생김의 빛 속성 힐러였다. 완전 상반되는 타입의 힐러들은 확실히 저마다의 매력이 뚜렷했다. 초반에 오메가원의 플레이를 보고 진지하게 거너 대신 암힐러를 잡을까 고민하기도 했었으니까.
“전사는 궁극기 이외에는 사정거리가 짧아서 적에게 바짝 붙어서 연속 콤보로 밀어붙여야 해.”
개나소나는 공격해 보라는 듯 가만히 서있었다. 거너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빠른 이동 속도로 달려가며 검을 빼 들었다. 사정거리는 짧아도 무기 자체가 길다.
힐러의 턱밑까지 바짝 도달한 전사가 평타를 때리려고 하자 힐러의 손이 쭉 뻗어온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호로쯉로록의 전사 얼굴이 옆으로 홱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내 고개도 문정하 쪽으로 홱 돌아갔다.
“정면에 있는 적에게 일직선으로 달려가면 평타를 맞고 스킬을 끊길 확률이 높아. 좌우로 움직이면서 오든가 아니면 건물이나 지형을 이용해서 공격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런 깊은 가르침을 주시려고 뺨을 때려요?”
무기가 없는 힐러의 평타는 뺨 때리기였다. 눈을 질끈 감고 상대의 뺨을 때리는 힐러의 모습은 대미지가 거의 없었지만 기분은 무척이나 나쁘다. 그래서 보통 유저들은 다른 스킬은 몰라도 힐러 평타는 죽어도 맞기 싫어했다.
“한번 해보고 싶었어.”
해맑은 미소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
역시 성격이 좋은 놈은 아니야.
나는 질린 얼굴로 그의 설명을 들으며 전사 캐릭터의 콤보를 연습했다.
물론 재능은 어디 안 간다고, 거너를 제외한 캐릭터에는 똥손이라고 얘기했던 믄님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 뒤로도 힐러의 찰진 손에 전사 캐릭터의 고개는 쉴 틈 없이 돌아갔다.
피시방에 무려 두 시간이나 있었지만―멤버에 손지우가 있는 걸 감안하면 엄청 오래 있었던 거다―놀랍게도 단 한 번도 이긴 적은 없었다. 이제 막 태어난 신생 뉴비와 똥손 전사, 싸대기만 때릴 줄 아는 힐러 조합이었으니까.
아무리 임해서가 탱커로 적을 물어다 바쳐도 제대로 딜을 해 줄 만한 아군이 없었다. 오죽하면 임해서가 먼저 지친 목소리로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말했을까.
묘하게 힐러 캐릭터에 흥미가 있는 듯한 문정하의 모습이 불안하긴 했지만, 설마 나중에 한다고 하지는 않겠지.
이제 곧 파티원들과 함께 이벤트전에 접속할 시간이었다.
일행들과 헤어지고 자취방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믄님의 매드 무비를 보며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부름이 들려왔다.
“손지언.”
고개를 돌리니 의외의 인물이 보인다.
분홍 머리가 왜 여기에 있지. 스토킹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황보욱이 억울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딴 눈으로 보지 마! 스토킹한 거 아니니까!”
“나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눈빛으로 지껄였잖아.”
“우리가 언제부터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가 됐다고?”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하품을 했다. 스토킹은 아니더라도 자취방 근처에서 나를 기다린 건 맞는 모양이다. 임해서한테 물어서 찾아왔겠지.
안 들어도 뻔한 스토리에 굳이 이유를 묻지 않고 피곤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또 왜? 나 뭐 잘못했어?”
“너 왜 사기 쳤어?”
“뭐?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내가 욕은 해도 사기는 안 쳐.”
“근데 왜 내 친구 계정을 네 거라고 거짓말을 하는 건데?”
나는 눈을 비비던 손을 멈추곤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버벅이며 고개를 힘겹게 움직여 황보욱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서 황당함과 짜증만 보이는 것이 염소구더기가 나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닌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굴리는데 황보욱이 이어서 말했다.
“개나소나가 오늘 갑자기 귓말 걸던데.”
“…뭐?”
“계정 주인이랑 같이 피시방 왔는데 양보할 생각 없냐고. 그거 보고 내가 얼마나 어이없었는 줄 알아? 그 계정 주인한테 끌려가서 같이 피시방에 있었는데.”
“너, 너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아니, 정확히 개나소나가 무슨 말을 했는데?”
“사기 친 것 때문에 이제야 쫄리냐? 됐어. 내 친구한테는 안 말했으니까.”
“아니, 네 친구는 알 바 아니고 문정하한테 뭐라고 했냐고!”
문정하? 황보욱이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묻는 눈빛에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무는데 그의 눈빛이 점점 가늘어진다. 호랑이 앞에 놓여진 토끼가 된 심정이었다.
“문정하 선배님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그 선배님이 개나소나였어? 개나소나도 같은 학교 선배라고 하기는 했는데, 설마…….”
황보욱은 지언이도 피시방에 있으니 본 계정을 주인에게 양보해 주면 안 되겠냐는 개나소나의 귓말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지언이가 누구인가 싶어서 의아해하는데 친절하게도 손지언이라고 얘기해 주던 개나소나.
그런데 그 개나소나가 문정하 선배님이란다. 얼마 전에 카페에서 음료도 사 줬던 친절하고 잘생긴 선배가 그 입 험한 전사 유저라니…….
“근데 왜 굳이 모타리 계정이 네 거라고 거짓말을 한 건…….”
왜 불길한 예감은 이상할 정도로 절묘하게 다가오는 걸까.
머리가 좋은 황보욱은 문득 예전에 카페에서 문정하에게 아이디를 말해주지 말라며 엄포를 놓던 손지언이 떠올랐다.
“너 설마……?”
그리고 연달아서 염소구더기가 했던 의미불명의 행동이 스쳐 지나갔다.
개나소나에게 귓말이 오더라도 대답하지 말라던 의미불명의 말에도 그저 해맑게 웃으며 그러겠노라 대답하던 자신.
황보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차마 이어지지 못한 질문에 덩달아 눈앞의 이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갔다.
그 표정으로 대답을 들은 황보욱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동안 모타리로서의 자신의 행동들이 영화 필름처럼 끊임없이 재생되어 갔기 때문이다.
“야! 너 어디 가?!”
“X발!!”
그리고 그날 이벤트전에 모타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 * *
[파티] 영원한이등병: 신입님은 왜 안오쥬?
그대로 도망친 황보욱은 끝내 게임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타리에 영원한이등병이 의문을 가졌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무슨 일이라도 있나?
[파티] 영원한이등병: 따로 개인 연락하는 분 없죠? 이렇게 되면 오늘 이벤트전은 참여 못 할 것 같은데.
[파티] 오메가원: 흠
[파티] 오메가원: 급한 일이나 아플 수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음.
[파티] 오메가원: 실친도 아니고 우리가 길드톡 같은 것도 없으니 연락할 수단이 없음.
황보욱의 연락처는 알았지만, 어차피 연락해도 받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동안의 전적이 있으니 황보욱의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고 있는데 개나소나가 말했다.
[파티] 개나소나: 일반전이라도 하실?
[파티] 개나소나: 어차피 레벨은 올려야 함.
[파티] 영원한이등병: 콜!
[파티] 오메가원: ㄱㄱ
[파티] 개나소나: 염소는?
‘문정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나?’
상황을 봤을 때는 모타리가 황보욱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황보욱도 내가 염소구더기라는 걸 조금 전에 알았으니 그에게 말했을 확률도 낮다. 다만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깨달았겠지.
하지만 이유를 묻는 문자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지.
[파티] 염소구더기: ㄱㄱ
[파티] 영원한이등병: ㅇㅋ 그럼 일반 돌립니다?
방장이었던 영원한이등병이 얘기하면서 바로 게임 스타트를 누른 모양이다.
[방을 찾고 있습니다.]
[진행 중인 방에 입장하게 되었습니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맞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저 아마 이벤트전 끝나고 같이 하는 거 힘들 수도 있어요 형님들ㅜ
[파티] 개나소나: ?
[파티] 영원한이등병: 길드 캐스팅 됐으유
[파티] 영원한이등병: 안 그래도 슬슬 길드 가입할까 했는데 권유하더라고요. 좀 빡센 길드라서 고민 중이긴 하지만. 개나소나 형님도 같이 들어가실래요??
길드!
황보욱의 사건으로 깜빡하고 있던 주제에 서둘러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내 손가락을 그들의 대화를 막으려 안달이 나 현란하게 움직였다.
[파티] 염소구더기: 님들
[파티] 염소구더기: 잠만
[파티] 개나소나: ?
[파티] 영원한이등병: 넹?
[파티] 오메가원: ㅇㅅㅇ?
마지막에 귀여운 척을 하는 오메가원의 행동에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나는 오전부터 고민하던 걸 얘기하기로 했다.
그들이 거절하면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하다면 초창기 길드원들이 이 멤버이길 바랐으니까.
[파티] 염소구더기: 길드 만들어볼까 하는데
[파티] 염소구더기: 같이 해주실 수 있나 해서요.
[게임에 입장합니다.]
답변을 받지도 못했는데 게임이 시작되어 버렸다.
잠깐의 로딩 화면 이후에 캐릭터를 선택하라는 문구가 올라왔다. 파티원들을 제외하고 매칭된 나머지 아군은 처음 보는 사람이다. 레벨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익숙하게 거너를 선택하는데 파티원들도 주 포지션을 선택하고 서둘러 파티 채팅으로 얘기했다.
[파티] 개나소나: 길드?
[파티] 개나소나: 저번에는 생각 없는 것 같더니?
[파티] 영원한이등병: 막내님, 길드 만들 거예요?!
[파티] 오메가원: 난 쉬운 남자임.
오, 다행히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오메가원은 바로 흔쾌히 수락했고 개나소나와 영원한이등병도 잘만 얘기하면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개나소나는 애초에 본인이 얘기한 거니까 들어와 주겠지.
다른 길드의 가입 신청을 권유받은 영원한이등병이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는 내 걱정이 무색하게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채팅이었지만 그 활기참이 화면 너머로 느껴질 정도였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와!! 재밌겠다! 그럼 저 부길마 할래요!
[파티] 영원한이등병: 막내님이 길마하면 빡세지도 않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봐도 될 것 같아여
[파티] 염소구더기: ㅇㅇ그래도 길드전은 할거라서 연습은 좀 해야 해.
[파티] 영원한이등병: 길드전이요? 에이, 그거 그냥 길드끼리 자존심 대결이고
[파티] 영원한이등병: 별로 떨어지는 콩고물도 없는데.
[파티] 염소구더기: 그건 아는데
[파티] 염소구더기: 불경한눈깔 엿 먹일라고
양쪽의 캐릭터 선택이 끝났다. 또다시 로딩 화면으로 돌아오고 금세 화면 가득 맵이 떴다. 그새 이벤트전에 익숙해진 건지 아군 건물 타워를 보고 있으니 조금 어색했다.
[파티] 개나소나: 위너랑 길드전을 한다고?
[파티] 개나소나: 제정신?
그래,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이기는 했다.
대부분의 길드원들이 랭커에, 상위권 랭커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대형 길드. WINNER.
그런 길드에 이제 막 생성하려는 길드가 도전장을 내밀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으니, 어쩌면 내 이기적인 복수심을 위해 그들을 이용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파티원들이 무시 받는 게 싫다고 하면서 막상 길드전에서 지면 더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수준도 안 되는 것들이 대형 길드에 함부로 전쟁을 선포했다고.
역시 안 되는 걸까.
조금 시무룩해져서 키보드 위에 올려둔 손을 꼼지락거렸다. 평소와 같은 비꼬는 대답이 섣불리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티] 개나소나: ㄱ
[파티] 영원한이등병: ? 하신다구요?
전사 캐릭터로 부지런히 달려가던 개나소나의 채팅에 영원한이등병이 물었다. 적군의 건물을 부수러 가자는 건지 아니면 길드에 가입하겠다는 뜻인지 헷갈리는 모호한 대답이었으니까.
영원한이등병이 아군의 건물로 달려가자 나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영원한이등병이 암흑 지역에서 몸을 숨기고 적군에게 다가가는 동안 나는 반대쪽의 높은 지형에서 자리를 잡았다. 궁극기는 켜지 않았다.
적군이 공격당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켤 생각이었다. 예민한 유저들은 궁극기 소리만 듣고 바로 대처를 할 테니까.
영원한이등병이 스킬로 적군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난도질하자 기다렸다는 듯 궁극기를 켰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내가 있는 이 위치는 확 트인 장소가 아니라서 적군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형물 사이에서 도망치려고 움직이는 적군의 머리가 슬쩍슬쩍 보일 뿐.
영원한이등병의 손에 한 명이 걸려들자 나머지 적군이 지원하려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움직이는 발걸음이 분주하다.
지형물 사이를 지나가는 캐릭터의 모습에 방아쇠를 당겼다.
1Kill.
운이 좋게도 공격 위주로만 성장시키던 캐릭터인 모양이었다.
거너 궁극기에 죽은 적 마법사의 모습에, 적군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앞에는 도적이 있고 사각지대는 거너가 노리고 있었으니까.
[전체] 농염한할미: 거너 사다리 위
죽은 적군이 거너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일부러 전체 채팅으로 올린 것이 겁을 먹고 거너가 도망치기를 바라기라도 한 의도처럼 보였다.
적군은 본인들의 건물을 방패 삼아 영원한이등병의 공격을 피하곤 빠르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거너가 종이 몸이니 서둘러 해치우려는 계획인 듯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격을 들고 있는 거너를 향해 저렇게 정면으로 달려오다니. 저 딴에는 저격에 맞지 않기 위해 좌우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내 눈엔 귀여울 뿐이었다.
그동안 이벤트전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 거너 플레이의 한을 풀 듯이 집중했다.
저격 안에 들어오는 적군의 움직임.
우측으로 움직였다가 좌측으로 빠지려는 움직임에 총구를 좌측으로 움직여 쐈다.
탄환이 쏘아지고, 이미 좌측으로 움직이고 있던 적군은 중간에 멈추지도 못했다. 캐릭터가 이동할 곳에 탄환이 날아가고 있었다.
예측 샷. 믄님이 가장 잘하던 플레이였다.
믄님만큼은 하지 못하더라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있다. 긴박한 상황에서는 이렇게 신중히 쏠 자신이 없었지만, 초반에 방심하고 있는 적군을 사살하는 건 어렵지 않다.
2Kill.
순식간에 2킬을 가져오자 달려오던 나머지 적군이 황급히 뒤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 또한 무리하게 따라가지는 않고 적군의 건물을 부수는 아군들과 합류했다.
[파티] 개나소나: 안 그래도 재수 없었는데
[파티] 개나소나: 눈깔인가 눈알인가 뭐시기
이름을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적군의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적군의 방어력이 감소됩니다.]
[파티] 개나소나: 길드 이름은 보복? 복수?
[파티] 염소구더기: 누가 그딴 거를 이름으로 해;;
[파티] 염소구더기: 어쨌든 들어올 거?
[파티] 개나소나: ㅇ
[파티] 염소구더기: 조금 더 성의있게 수락해 주면 안될까, 길드 초창기 멤버님아.
[파티] 개나소나: ㅇㅇ~
적군의 방어력이 감소된 타이밍을 노려 기습을 하려는 의도인지, 서둘러 달려가는 전사 캐릭터의 뒷모습과 함께 성의 업는 채팅이 올라왔다.
아무리 집중을 한다고 해도 저렇게 성의 없이 대답할 줄은 몰랐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저도!
[파티] 오메가원: 권유받은 길드는ㅇㅉ?
[파티] 영원한이등병: 계약서 도장 찍기 전에 사람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법ㅋㅋㅋㅋㅋ
고작 게임 길드 때문에 저런 표현법을 쓰는 영원한이등병을 보고 있자니 미래가 밝은 K-중딩의 모습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다행히도 계획했던 대로 원했던 이들을 길드에 영입할 수 있었다.
마음 바꾸기 전에 이번 판만 끝나면 바로 길드를 만들려고 하는데 어떤 이름을 할지 고민되었다.
WINNER가 그래도 이름은 깔끔하고 좋았는데.
[파티] 염소구더기: 길드 이름 추천받음요
[파티] 개나소나: 눈깔뒤집기ㄱ
[파티] 염소구더기: 기각
[파티] 영원한이등병: 이등병과 아이들!
[파티] 오메가원: 오? 서타지와 아이들도 아심?
[파티] 영원한이등병: 그게 뭔데용?
[파티] 오메가원: …….
예상치 못한 세대 차이에 오메가원이 조용해졌다.
하긴 이제 중학생인 영원한이등병은 모를 만도 하지.
영원한이등병이 자꾸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오메가원도 딱히 길드 이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팀] 아이스녹챠12: 님들 뭐함?
[팀] 아이스녹챠12: 파티?
말없이 구역을 나눠서 적군을 기습하러 가는 초공격형 모드에 아군 아이스녹챠12가 당황하며 물었다. 이벤트전 하던 게 그새 버릇이 된 모양이다.
이벤트전이랑 달리 리스폰도 긴데 그것도 잊고 무작정 돌격부터 하려 했다니.
지적이 담긴 질문에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아군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래도 여전히 캐릭터들은 적군 건물 주변에 매복한 상태였지만. 아이스녹챠12도 눈치껏 따라와 일단 합류한 상태였다.
[팀] 영원한이등병: 스미마셍
[팀] 영원한이등병: 와따시 노빠꾸맨
[팀] 아이스녹챠12: 안되는 일본어 ㄴㄴ
[팀] 아이스녹챠12: 우리 탱 없어서 한 번 밀리면 답 없으니까 무리ㄴ
그나마 탱커를 하던 모타리도 빠지고, 아군으로 만난 아이스녹챠12마저 마법사를 선택하니 맞는 말이기는 했다.
여기서 방어력이 좋은 건 전사 정도겠네.
이런 조합이라면 보통 전사를 픽한 유저가 방어에 올인해 주겠지만, 개나소나는 아시다시피 팀을 위해 희생하는 놈은 아니었다.
[팀] 아이스녹챠12: 전사가 방 갔어야 했는데
[팀] 아이스녹챠12: 그마나 할 만한게 전사구만
[팀] 개나소나: ?
그리고 저런 시시껄렁한 시비를 그냥 흘려들을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문정하가 나에게는 친절하지만 손지우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딱히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나처럼 하고 싶은 말은 하는데 조금 더 시비적이고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겠지.
나는 황보욱의 시비에 동기들의 시선이 쏠려 어쩔 수 없이 강의에 참여했지만, 문정하였다면 어쩌라는 눈빛을 보내며 쿨하게 강의실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나름 그럴듯한 그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잠깐 어울렸다고 문정하의 성격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된 느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순순히 바이라고 인정했을 때는 상상 이상이기는 했지만.
‘주변에서 무슨 뒷말을 해도 신경도 안 쓰이나?’
성격이 나쁘다는 등의 뒷말도 신경 쓰이지만, 성적 취향을 가지고 뒷말을 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불필요한 시선들을 더 끌기 쉽고 혐오감이 섞인 시선도 받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아무리 본인에 대한 자존감이 높아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다. 태연했던 그 얼굴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한숨이 났다.
알면 알수록 이상한 선배였다.
[팀] 개나소나: 불만 있으면 네가 방 타지
[팀] 개나소나: 왜 무고한 사람 건드림?
[파티] 영원한이등병: 우리한테 시비 걸었던 사람은 어디 갔죠? ㄷㄷ
[파티] 영원한이등병: 일코 ㅁ1쳤ㄴ다
개나소나의 태연한 일반인 코스프레 행세에 영원한이등병이 기겁을 했다.
난입 되었던 첫 게임이 떠오른다. 부캐를 하는 아군을 찍어 누르며 비웃던 개나소나가 아직도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 구먼.
[파티] 오메가원: 회개하는 어린 양을
[파티] 오메가원: 가슴으로 안아줍시다
[파티] 오메가원: 그 당시는 줘ㅍㅐ버리고 싶었지만
[파티]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오메가 형님
[파티] 영원한이등병: 혈압 오르신 것 같은데?!
[파티] 영원한이등병: 혈압약 투척!
[파티] 염소구더기: 해킹당한 듯 개이득 핵이득
[파티]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아놬ㅋㅋ
[파티] 개나소나: ^^?
아이스녹챠12가 화가 난 모양인지 정중한 척하면서 장문의 편지를 채팅으로 쓰는 게 보였다. 하지만 개나소나는 무시를 하는 건지 아니면 차단을 한 건지 대답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저 시비를 봤으면 맞대응으로 같이 시비를 걸었을 테니까.
그는 어쩐 일로 시비를 받아주는 것보다 게임에 더 집중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파티 채팅으로 개나소나는 아군 건물 쪽으로 가지 말 것을 주장했다.
[팀] 아이스녹챠12: 머함? 대기 안 함? ㅅ2ㅂ
아군 건물 뒤쪽으로 가서 숨어있는 아이스녹챠12와는 대조적인 의견이었다.
어차피 적군은 아군의 건물을 부수기 위해 아이스녹챠12가 있는 곳에 갈 것이다. 매복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탱커들만 와서 조금만 치고 빠질 것인지, 아니면 탱커를 미끼로 아군이 모습을 드러내면 궁극기로 한타를 노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저기는 이제 곧 전쟁터가 될 것이다.
개나소나는 아군 건물로 오는 가장 빠른 길인 적군의 암흑 지역에 핑을 찍었다.
[파티] 개나소나: 염소ㄱ
숨어서 돌아올 확률이 높은 곳에 매복을 해서 기습하라는 뜻이었다.
암흑 지역이지만, 거너는 스킬로 시야를 밝히고, 궁극기로 적을 노릴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일직선의 암흑 지역은 숨을 공간도 없었다.
몇 명이 돌아올지 모르지만, 만약 그곳에 전부 온다면 거너 혼자 처리할 능력은 없었다. 궁극기는 이미 두 번을 사용한 뒤였기에 남은 탄환은 고작 세 개뿐이다.
[파티] 염소구더기: 거너를 미끼로 쓰려고?
[파티] 개나소나: 너무 과분한 역할인가ㅎ
앞이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저격이 날아오면 정신이 없을 것이다. 사각지대에 숨을 수도 없고 도망칠 곳은 뒤밖에 없으니, 아군들이 뒤를 노리면 된다.
‘과분한 역할이냐고?’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궁극기는 어느새 하나가 더 살아난 상태였다.
[파티] 염소구더기: 주워 먹을 거 없을 듯^^
[파티] 개나소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네
[파티] 개나소나: 자신감을 가질 실력은 아닌데
[파티] 개나소나: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ㅎ
[파티] 영원한이등병: 오메가형님
[파티] 오메가원: ?
[파티] 영원한이등병: 저 둘은 친한 게 맞겠죠……?
[파티] 영원한이등병: 합리적 의심인 것 같은데ㄷㄷ
[파티] 오메가원: 톰과 제리도 사이는 좋음
[파티] 영원한이등병: 아하!
솔로몬의 대답 같은 현명한 예시에 영원한이등병이 순식간에 걱정을 거두어들였다. 어울리고는 있지만 혹시나 또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어린 마음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부길마 못하는 줄 알고 쫄았음요ㅜㅜ
…다른 의미의 걱정이었나.
묘한 배신감과 동시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적군이 오고 있었다. 서둘러 개나소나가 말했던 위치에 자리를 잡고 궁극기를 켰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스킬의 효과로 암흑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훤히 보인다. 안개가 넘실대고 있었지만, 분간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스킬의 지속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그러니 그사이에 적군을 처리해야 한다.
과연 몰려서 올까, 아니면 나뉘어서 올까.
총구 끝에 적군 캐릭터가 포착되었다. 아직 이쪽을 의식하지 못한 모습이다.
지금 쏘면 오히려 밀려 나가서 다운되었을 때 사정거리가 멀어 두 번째 저격이 맞지 않을 확률이 높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 번에 적군을 죽이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서.
‘그래, 그렇게 앞으로 한 발자국만 더.’
순진한 적군은 머뭇거림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에 잠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눈치였다.
이렇게 되면 쉽다. 헤드 샷을 맞혀주지, 하고 생각하려던 순간 적군의 뒤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탱커였다.
빠른 속도로 제치고 나온 탱커는 이동 속도 아이템이라도 먹은 모양인지 순식간에 적군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탱커는 맞혀봤자 한 번에 죽이지 못할 뿐이고 탄환만 낭비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돌격에 당황한 나머지 공격을 하고 말았다. 저격을 맞은 적 탱커가 움찔하더니 서둘러 아군의 앞을 막아섰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든든한 대처였다.
‘제기랄!’
[파티] 염소구더기: 들킴
[파티] 개나소나: 네~ 염소가 염소했죠~?
저딴 소리를 할 거면 빨리 오기나 하든가!
서둘러 궁극기를 끄고 뒤로 회피하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 적 탱커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거너를 발견했다.
암흑 지대는 바로 눈앞의 캐릭터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접근한다면?
암흑 지대는 지뢰밭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속적인 대미지를 주는 영역이다. 그래서 거너의 HP는 이미 꽤 많이 닳은 상태였는데, 적군에게 위치를 발각당한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더 거대한 주먹이 거너 캐릭터를 향해 내질러졌다. 이미 회피기는 쓴 상태다. 제대로 피하지 못해 얻어맞으니 또다시 HP가 닳았다. 이제는 1/3이 남았다.
‘젠장.’
거너는 근접전에 약하다. 그리고 나도 거너로 랭커까지 올라가기는 했지만, 대부분 기습이나 암살 위주였다. 애초에 거너에겐 근접전을 피할 만한 스킬이 없다.
연막탄을 쓰지 못하게 구석으로 몰아놓고 평타를 때리자 탱커 뒤에서 적군들이 서둘러 달려온다. 기다렸다는 듯 골목길로 우수수 쏟아지는 적군들.
도망칠 길이 없다.
[팀] 아이스녹챠12: 뭘 믿고 혼자 감? ㅉㅉ
아군의 건물 뒤에 숨어있는 아이스녹챠12는 도와줄 생각이 없는지 채팅으로 신경만 긁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공격해서 연막탄 던질 시간이라도 주면 좋을 텐데! 꼭 저렇게 몸을 사리는 아군들이 있지!
이대로 죽겠네.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체력 회복 아이템을 쓸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맞고만 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시야 확보 스킬 저 너머로 무언가가 어렴풋이 보였다.
적군의 뒤편에서 거너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경찰 제복의 전사 캐릭터. 이동 속도를 올린 개나소나가 적군의 뒤쪽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거너에게 시선이 몰려 전군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내 칼이 오늘도 붉게 물들겠군.
전사의 궁극기 스킬이 빛을 발했다.
발검하자 어두운 암흑 지대에서 유달리 검이 반짝이고, 뒤에 자리를 잡고 있던 원거리 딜러들이 순식간에 다운됐다.
1Kill.
2Kill.
3Kill.
Triple Kill!
원샷 쓰리킬이었다.
순식간에 적군의 원딜들이 죽자 탱커와 근딜만 남게 됐다.
탱커가 서둘러 개나소나를 막으러 뒤로 달려갔고, 근딜은 거너를 마저 죽이려 스킬을 시전하려고 할 때였다.
간당간당한 HP를 아련하게 쳐다보는데 또다시 궁극기 알림이 울려 퍼졌다.
연속 알림이었다.
뒤는 항상 조심해야지.
동료를 위한 제물은 너희들인가.
적 근딜을 그림자에 가두는 도적 캐릭터와 HP가 높은 탱커에게 향하는 거대한 사신의 낫. 개나소나와의 전투로 체력이 줄었던 탱커가 암힐러의 스킬에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암힐러가 유일하게 아군을 치유하는 순간.
[제물의 효과로 아군의 체력이 랜덤으로 50% 회복됩니다.]
[염소구더기 님의 체력이 50% 회복됩니다.]
지금처럼 궁극기로 적군을 처리했을 때였다.
염소구더기의 HP가 순식간에 차올랐다. 간당간당해서 한 대만 맞아도 죽기 직전이었는데!
4Kill.
[오메가원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5Kill.
[영원한이등병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때마침 영원한이등병도 적군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파티원들이 거너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위풍당당해 보이는지.
[적군의 전멸로 아군의 사기가 올라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파티] 개나소나: 염소야
[파티] 염소구더기: ?
[파티] 개나소나: 끄억
[파티] 개나소나: 배탈 날 것 같은데ㅠ
[파티] 염소구더기: ♡♡♡…….
주워 먹을 거 없을 거라고 얘기했던 나에게 들으라는 듯 트림을 하는 개나소나. 얄미웠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존나 멋있는 개새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