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뉴 페이스 (13/21)

12. 뉴 페이스

[팀] 아이스녹챠12: 수고하셨습니다ㅎㅎ

[팀] 아이스녹챠12: 다들 잘하시는데

[팀] 아이스녹챠12: 개나소나님 정말 잘하시네요

[팀] 아이스녹챠12: 제 워너비 찾은 듯ㅜ

[팀] 아이스녹챠12: 친추 하고 싶은데 혹시 아직

[팀] 아이스녹챠12: 저 차단된 상태인가요……?

물 만난 고기처럼 전장을 휘젓는 파티원들 덕분에 게임은 그 이후로 순조롭게 흘러가 가볍게 승리할 수 있었다.

세모꼴의 눈을 하던 아이스녹챠12가 저토록 순순히 인사를 하니, 말 다 했지.

[파티] 영원한이등병: 개나소나 형님, 녹챠가 친추 하고 싶다는데요?

[파티] 개나소나: ㅇㅇ보임

[파티] 염소구더기: ??? 차단한 거 아니었음?

[파티] 개나소나: 귀찮

[파티] 염소구더기: 근데 왜 대답 안 해줌?

[파티] 개나소나: ? 내가 왜 굳이?

차단한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 중이었는데, 그냥 무시한 거였다니. 여러 의미로 대단한 놈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본인을 칭찬하는 말이었는데도 그 흔한 감사 인사도 없다니.

[파티] 개나소나: 차단할까?

[파티] 염소구더기: 그걸 왜 나한테 물음?

[파티] 개나소나: 염소가 질투하나 싶어서ㅎ

[파티] 염소구더기: 개소야

[파티] 염소구더기: 그만 짖어라

저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팬은 내버려 두고 왜 나한테만 저 지랄인 거지. 나는 청개구리 같은 놈이라고 중얼거렸다.

대기 화면으로 돌아온 우리는 게임을 바로 시작하지 않고 모였다. 우선 동의를 구했으니 속전속결로 이루어야 할 때다.

길드 결성. 최소 레벨도 충족했고 창설 비용도 있다. 최소 2인 이상 운영인데 이 정도면 최소 기준치는 전부 통과다. 남은 것은 길드명.

WINNER처럼 심플한 길드명을 선호했기에 잠깐 고민하다가 아까 아이스녹챠12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WANNABE. 승리자를 나타내는 WINNER와 비슷한 듯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

혀끝에서 굴려보다가 어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바로 의견을 물었다.

[파티] 염소구더기: 님들

[파티] 염소구더기: 워너비는 어떰?

[파티] 영원한이등병: 아까 녹챠가 말했던 단어요??

[파티] 염소구더기: 넹 괜찮은 것 같아서

[파티] 영원한이등병: 웃기지는 않지만

[파티] 영원한이등병: 심플하고 나쁘지 않은 듯?

[파티] 오메가원: ㄱㅊ

[파티] 개나소나: 아무거나 결정해ㄱㄱ

[파티] 영원한이등병: 아무거나 할거면 ‘재입대각’ 어때용??!

낄낄낄 하고 웃는 소리가 화면 너머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중학생인 영원한이등병 입장에서는 그저 군대란 우스운 소재 중의 하나일 뿐이겠지만…….

[파티] 개나소나: ㅋ

[파티] 오메가원: ㅋ

[파티] 영원한이등병: 엑 형님들 반응이 왜 그래요ㅜ

[파티] 영원한이등병: 더 기겁하면서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파티] 영원한이등병: 하긴 요즘 군대 편해졌다고 하니까

[파티] 영원한이등병: 월급도 주고 밥도 주고 굿굿?

[파티] 오메가원: 귀엽다 귀여워

[파티] 개나소나: 지금 마음껏 즐겨ㅇㅇ

심플한 대답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영원한이등병을 귀여워하면서도 어이없어하는 마음이 드러났다. 근데 왜 괜히 저 채팅들에 예비 군인인 내가 섬뜩해지는지 모르겠다.

[파티] 염소구더기: 소름 끼치는 소리들 그만하구

[파티] 염소구더기: 워너비로 결정 땅땅

[파티] 염소구더기: 길마의 권한

[파티] 개나소나: 이럴 거면 왜 물어봄?

[파티] 염소구더기: 이런 게 권력이다

[파티] 염소구더기: 맛 보여주려고ㅋ

[파티] 개나소나: 인성 보소

[파티] 염소구더기: 니보다 나음ㅇㅅㅇ

[파티] 개나소나: ?

개나소나가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서둘러 채팅에서 시선을 돌려 길드 생성을 했다. 영어로 할까 하다가 그러면 너무 WINNER를 대놓고 따라 한 것처럼 보일까 봐 ‘워너비’라고 한글로 적었다.

역시 만드는 과정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길드를 생성하는 것은 처음이라서 길드원들이 없는 신생 길드와 길드 마스터로서의 염소구더기가 생소했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염소구더기 위에 새로운 길드명이 자리 잡자 영원한이등병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파티] 영원한이등병: 나나나!!

[파티] 영원한이등병: 막내님! 저 부길마! 내가 제일 먼 저 찜했음!!

[파티] 개나소나: 줘도 안 가짐

[파티] 염소구더기: ? 너 들어오지 마

[파티] 개나소나: 아까는 들어오라며ㅋㅋ 이렇게 사람을 왕따시키면 중딩한테 교육적으로 안 좋지

[파티] 영원한이등병: ㅎㅅㅎ~ 괜찮아요~

[파티] 영원한이등병: 저도 나쁜 사람 구별하는 능력 정도는 있다고요? 엣헴

[파티] 개나소나: 그 나쁜 사람이 나 말하는 거?

현실 부정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걸까. 영원한이등병에게 길드 가입 신청을 보내고 오메가원에게도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 길드에 들어오는 둘을 보고 영원한이등병에게 부 길드마스터의 자리도 넘겨주었다.

닉네임 위로 워너비 길드명과 함께 옆에는 부길마 아이콘이 떠오른다. 그것을 보고 영원한이등병이 제법 기분이 좋은지 춤을 추는 모션을 해보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고작 신생 부길마가 됐을 뿐인데 저렇게 좋을까. 사실 더 좋은 길드에 갈 수 있을 텐데도 내 길드에 와준 것에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파티] 개나소나: ?

자리에 모여있던 이들이 차례대로 길드에 가입되자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개나소나는 자신의 차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입 신청이 오지 않음에 의아함을 내비쳤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오오! 길챗은 연두색이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개나소나 형님은 안보이겠쬬??

[길드]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야, 내가 이제 말하지만 너 처음에 얼마나 재수 없었는지 알아?! 퉤퉷!

[길드] 오메가원: 진심 인정

[길드] 오메가원: 주둥아리를 찰싹찰싹!

[파티] 개나소나: ㅡㅡ? 조용한 걸 보니 길챗으로 얘기하네

[파티] 개나소나: 염소야, 이러니까 재밌어?^^

자세히봐도잘생김한테서 이상한 것만 배워왔나. 소름 끼치게 왜 저런 웃는 이모티콘에 상냥한 척 말을 하는 거지.

괜히 오싹해져서 팔을 문지르고는 서둘러 길드 가입 신청을 날렸다. 곧이어 개나소나가 길드에 들어왔다는 알림이 떴는데도 말이 없어서 몰랐던 건지 영원한이등병이 계속 신나서 떠들어댔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아오, 제가 처음에 막내님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어요!

[길드] 영원한이등병: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전사를 잘해서 놀아주고 있지만!

[길드] 영원한이등병: 잉? 근데 오메가형님 왜 갑자기 조용해졌어요?

[길드] 오메가원: ㅎ…….

[길드] 염소구더기: 부길마님, 신입님 들어오셨어요.

[길드] 영원한이등병: ……?

여기에 신입이 어디 있어, 라는 눈치로 의아하게 있던 영원한이등병이 곧이어 조용해진다. 그제야 개나소나가 길드에 가입했다는 문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길드] 개나소나: ^^안녕하세요

[길드] 개나소나: 두고 봤는데 생각보다 전사를 잘한 개나소나입니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ᐡ₃ᐡ◍)

[길드] 영원한이등병: (୨୧ ❛ᴗ❛)✧

[길드] 개나소나: 앞으로도 열심히 놀아주세요, 부길마님? ^^

[길드] 영원한이등병: 형님, 조크였던 거 알죠??

[길드] 영원한이등병: ( ʃƪꈍﻬꈍ)♡

[길드] 개나소나: 모타리 내일도 안 오면 어떻게 할 거임?

영원한이등병을 쿨하게 무시한 개나소나가 오늘 접속하지 않은 모타리를 언급했다. 하루 정도는 이해하지만, 현재 개인 연락처도 없는 상태에서 마냥 기다려 줄 수는 없으니 문제니까.

이벤트전인데 고정 멤버로만 참여해야 한다는 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그래도 하는 놈들은 잘하고 있었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 ˃̣̣̥‸˂̣̣̥)

[길드] 오메가원: 님은 이미 찍혔음

위로는 못 해 줄망정, 실제적인 막내에게 사회의 쓴맛을 가르쳐 주는 오메가원.

둘을 바라보다가 나는 개나소나의 물음에 잠깐 고민했다.

사실 연락하려면 할 수는 있다. 연락처가 없어도 모타리인 황보욱은 내일 학교만 가도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피하려고 해도 그놈이 날 피하려고 강의까지 빠질 만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얘기를 꺼내려면 꺼낼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결국 내가 염소구더기인 걸 인정하고 말을 꺼내야 하는데…….

그동안 모타리의 모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사실 황보욱의 저런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나 같아도 쪽팔리고 쥐구멍에 들어가서 죽고 싶을 것 같긴 할 것 같으니까.

게다가 사이가 좋았던 상태도 아니었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시비를 걸었던 상대가 알고 보니 형형, 하면서 애교를 부리던 사람이었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겠지.

[길드] 오메가원: 어차피 연락할 수단 없지 않음?

[길드] 염소구더기: 음

하지만 나랑 황보욱 때문에 파티원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미안했다. 더군다나 내가 코스튬을 얻고자 모았던 멤버들이었고 제일 중요한 건…….

‘코스튬은 받고 싶어! 황보욱 자존심 따위보다 더 중요한데!’

코스튬! 나도 개나소나처럼 멋있는 제복 코스튬을 입고 싶은걸! 우리 거너가 그냥 봐도 음침하게 멋있긴 하지만, 더 제대로 입혀두면 멋있을 거라고! 절대 불경한눈깔을 다시 만났을 때를 대비하는 건 아니었다. 절대로!

[길드] 개나소나: 내가 물어볼까?

[길드] 오메가원: ?? 아는 사이임?

[길드] 영원한이등병: 아, 맞다! 두 분 같은 학교 선후배라고 했잖아여! 찾았어요?

[길드] 영원한이등병: 설마 더쎄를 계기로 CC 가나요?!

[길드] 영원한이등병: 두근두근?

[길드] 개나소나: ㄴㄴ 직접 아는 건 아니고

[길드] 개나소나: 모타리 계정이 내 지인 거임. 그걸 빌려서 하고 있던 거고

[길드] 영원한이등병: 와우 인연은 돌고 도네요

[길드] 영원한이등병: 그럼 지인분이 여친?!

어려서 그런지 참 로맨스에 환장하는 모습이었다. 누구라도 이어붙이지 못해서 안달 난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개나소나가 말하는 지인이라는 건 날 말하는 거겠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황보욱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결론은 같았다. 그게 자의냐 타의냐가 문제일 뿐이었지.

언제 말을 걸어야 하나 싶어서 고민하는데 개나소나의 채팅이 올라왔다.

[길드] 개나소나: (❁ᴗ͈ˬᴗ͈)⁾⁾⁾

뭐야, 여친이냐고 묻는 질문에 왜 부정은 안 하고 쓸데없이 저런 부끄러워하는 이모티콘을 보내? 영원한이등병이 믿을 걸 알면서도 저런 반응을 내보이다니.

차마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에 뭐라 말은 하지 못하고 짜증스럽게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황보욱이 아니라 문정하가 내 정체를 알아채서 나를 피해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뭐야, 이 길드 나만 솔로야……?

[길드] 영원한이등병: 또 나만 진심이었지 부들부들

[길드] 영원한이등병: 길막내님은 솔로죠?!

[길드] 염소구더기: 길막내는 또 뭐죠?

[길드] 오메가원: 길마+막내

[길드] 오메가원: MZ세대 줄임말?

[길드]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제가 그냥 막 지은 거라구욬ㅋㅋㅋㅋ

[길드] 영원한이등병: 그래서 솔로냐구욧!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얏!

[길드] 염소구더기: ? 넹

영원한이등병이 갑자기 춤을 추는 모션을 취했다. 알면 알수록 특이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어차피 내가 봤을 때는 결혼한 오메가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솔로구먼.

물론 문정하에 대해서 알 리가 없는 영원한이등병은 저 거짓말에 제대로 속은 눈치였다. 졸지에 개나소나의 여친이 된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노트북 옆에 있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메시지 알림이었다.

‘설마 개나소나가 바로 연락한 건가?’

가능성이 있는 예상에 인상을 찌푸리고 화면을 보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메시지는 의외의 인물에게서 온 것이었다. 후보에는 전혀 고려도 하지 않았던 인물.

연락이 먼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게다가 지금 보자는 연락이어서 당황스러운 마음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차피 할 말이 있었으니 조만간 부딪힐 놈이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바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뒤이어 도착한, 근처에서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는 통보에 가까웠다.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길드] 염소구더기: 님들

[길드] 염소구더기: 저 잠깐 볼 일 있어서 나갔다 올게요

[길드] 염소구더기: 저 빼고 하고 계세요

[길드] 개나소나: 어디 감? 탈주?

[길드] 염소구더기: ㄴㄴ데이트

[길드] 영원한이등병: 없다며!! 솔로라며!!

[게임을 종료하시겠습니까?]

[YES]

난리를 치는 영원한이등병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게임을 껐다. 어린애를 놀리는 개나소나보고 나쁘다고 했지만,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저런 동생 있으면 매일 예뻐해 줄 텐데.’

물론 받는 사람이 예쁨받는다고 여길지는 모르겠지만.

모자를 눌러쓰고 가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제법 쌀쌀했고 주변은 어두웠다. 현관문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이 시간에 나오는 건 어쩐지 조금 낯설다. 원래 성향 자체가 집돌이였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크게 돌아다니지도 않았으니까. 기껏 해봐야 임해서와 피시방에 가는 것 정도였다.

황보욱이 기다리겠다는 장소는 자취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변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밤거리에도 분홍 머리는 미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가로등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걸음이 멈추었다. 놈의 뒷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술렁였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아니, 오히려 얼른 게임에 들어오라고 재촉할 생각이었는데. 저 뒷모습을 보니 울상을 짓던 모타리가 떠오른 탓이었다.

커다란 탱커로 울상을 짓고, 웃음을 짓고, 형형, 하며 나를 따랐었는데…….

‘이대로 그냥 돌아갈까.’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어슬렁거리는 인기척을 느낀 건지 황보욱이 뒤돌아보았다. 본인이 뒤돌아봐 놓고는 눈이 마주치자 딱딱하게 굳은 몸뚱어리.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오고 가는 건 숨소리뿐이었다.

황보욱이 한숨을 푹 내쉬며 좌측으로 이동했다. 우측에 앉으라는 무언의 신호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터벅터벅 걸어가 앉았다.

나란히 앉았으면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 속에 먼저 입을 뗀 것은 모타, 아니, 황보욱이었다.

“…너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잊어라, 사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따위의 말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다른 접근법에 몸이 긴장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우연이고, 처음부터 아니기는 한데.”

“본론만.”

“너 탱커 잡고 처음으로 나랑 파티 짜고 난 뒤에.”

황보욱이 그대로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짐작보다 더 이른 시간대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헛기침을 하며 변명처럼 덧붙였다.

“내가 너한테 악감정이 있어서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 우리가 초반에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내가 갑자기 가서 나 사실 염소구더기야! 라고 지랄할 수는 없잖아?”

“…….”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리는 황보욱을 보고 이러다 애 한 명 잡겠다 싶어서 서둘러 말했다.

“너 매력 있었다고.”

“…진짜 지랄이다.”

“아씨! 지금처럼 까칠한 것보다 모타리처럼 형 하면서 따라다니는 게 훨씬 귀엽지! 그리고 탱커도 생각보다 쓸 만해서 내가 고기 방패 주웠다고 좋아했… 아니, 이건 됐고. 어쨌든 절대로 비웃지는 않았어!”

괴리감은 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덧붙이지는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니 황보욱이 아까보다는 진정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쳐다보는 행동에 알 수 없는 압박을 느끼는데 그가 얘기했다.

“나 너처럼 게임 폐인 아니야. 진짜 그때 처음으로 하는 거였어.”

“지금 그게 중요해……?”

“나한테는 중요해. 너한테 공부하라고 지랄했는데 속으로 뒤에서는 게임 자주 들어오네, 하고 욕했을 거 아니야.”

“아닌데?”

사실 맞았다. 하지만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부정하니 의심스러운 눈길이 따라붙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는 눈초리였다.

저놈은 내 성격이 그렇게 못된 놈으로 보이나?

‘사람 보는 눈은 있네.’

내 성격 좋지 못한 건 인정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걸지도 모르겠다. 빤히 쳐다보던 황보욱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웃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웃는 게 예쁘다. 주변이 보이지 않고 이놈만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너 진짜 거짓말 못한다. 지금까지 숨긴 게 용하네.”

“아니라니까?”

“됐어. 이제 와서 맞다 아니다를 가려서 뭐 해. 게임 안에서 모타리 성격 병신 같았지?”

“집착남 같긴 하더라.”

“너 처음 봤을 때 첫판은 아니었는데, 그전에 계속 욕하는 사람들만 봤거든. 그래서 네가 좀 인상 깊긴 했어. 게임을 하는 놈 중에서도 어른스러운 사람이 있구나 싶기도 했고.”

별것도 아니었는데 의미를 부여하는 성격인가.

알면 알수록 까칠했던 초반 모습과 다른 면모가 많은 놈이었다. 오히려 모타리의 성격이 실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분홍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저놈 머리만 봄이 온 것처럼 화사했다. 그래서 더 눈에 자꾸 들어오는 걸지도.

“거너 잘하는 거 보니까 게임 잘하는 사람이 정말 멋있구나, 싶었어. 나도 그렇게 잘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오, 그거는 감사. 너도 탱커 생각보다 잘했어.”

“됐거든. 아직 내 실력 형편없는 거 알아. 지금 이벤트전 하는 멤버들 사이에서도 내가 유독 튀잖아.”

“어쩔 수 없지. 뉴비인데 그 정도면 잘하는 편이야.”

“웬일로 칭찬을 해? 약 먹었어?”

“한 달 동안은 같이 얼굴을 봐야 하는 사이니까.”

“아아.”

그제야 이벤트전이 떠올랐는지 황보욱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황보욱이 더 이상 게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남은 네 명도 이벤트전은 참여할 수가 없다. 억지로 참여하게 할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코스튬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잠깐 고민하던 황보욱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다시 들어갈게. 어차피 약속했던 거니까.”

“그럼 나야 고맙지만 괜찮아?”

“처음에는 쪽팔리고 뒤져버리고 싶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고작 게임으로 뭐 이렇게 열불을 내야 하나 싶기도 하더라고. 상대가 너라서 약간 더 인정하는 게 힘들기는 했지만.”

개자식.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잘 참았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아직 한 달은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 릴렉스 하자, 릴렉스!

“대신 너도 조별 관련은 잘 챙겨. 내가 감시할 테니까. 어차피 할 거라고는 더 세이렌밖에 없겠지.”

“하거든? 네가 애들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줬는데 어떻게 빠져.”

“그건 미안한데 너 솔직히 재수 없긴 했어.”

“나도 너 재수 없어.”

솔직히 게임만 아니었다면 더 엮일 이유도 없는 놈이기는 했다. 황보욱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잠깐 서로를 노려보다 동시에 픽 웃었다.

재수 없지만 당분간은 얼굴을 계속 부딪쳐야 할 놈이라는 게 또 웃겼다.

설마 이놈이랑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야, 기왕 이렇게 된 거 피시방 가서 같이 할래? 모니터로 서로 시야도 확인할 수 있고 오더도 빨리할 수 있잖아.”

“나 거지야.”

“이 새끼는 맨날 돈 없대!”

“돈 없으니까 장학금 타려고 노력하는 거지. 농담 아닌데.”

진지하게 하는 말은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이렇게 나오니까 더 할 말이 없네. 장학금 타야 하는 놈에게 억지로 게임을 한 달 동안 시키는 놈이 되어버린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고 보니 게임 끝나고 새벽에 공부한다고 했는데.

“…너 진짜 게임 해도 괜찮아?”

“어차피 한 달이니까 괜찮아. 약속한 접속 시간 전이랑 끝나고 하면 되니까. 생각보다 재밌어서 스트레스 해소가 되기도 하고.”

“그럼 다행이지만.”

“내 케이크 전부 뺏어 먹은 대가로 피시방비 쏘면 갈게.”

“나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거든?”

“그래도 빚진 건 갚아야지.”

고작 케이크 가지고! 하지만 누가 봐도 나쁜 건 나였기 때문에 이를 갈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는 꼴이 보인다.

재수 없게 잘생긴 황보욱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겨우 참으며 질문했다.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또 뭔데.”

“너 진짜 믄님한테 귓말 했었어?”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내 눈을 피한다.

나보고 거짓말을 못한다고 하더니,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다음 날에 있는 오전 강의 때문에 하품을 하며 학교로 향하는 길이었다. 때마침 같은 시간대에 오고 있던 임해서가 아는 척을 해왔다.

“손지언! 너 또 머리 안 감았어?!”

“아, 왜 남의 모자를 뺏어! 감았어!”

쓰고 있던 모자를 뺏어가는 임해서의 행동에 신경질적으로 종아리를 걷어차려고 하니 앞으로 쌩 달려가 버린다. 얄미운 놈. 초딩도 아니고 유치한 행동에 헛웃음을 짓는데 모자를 손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임해서가 물었다.

“이벤트전 보따리는 좀 많이 모았음? 랭킹전에 가야 할 상위권 만렙들이 많이 와서 그런지 좀처럼 이기기 힘들더라.”

“내 말이. 난 저번에 위너 소속이랑 붙었어.”

“헐. 거기 전원 만렙 아니야?”

“한 명 빼고. 말 나온 김에 얘기하는 건데 나 새로 길드 만들었는데 너 들어올 생각 있어?”

“길드? 어제 말했으면서 그새 만들었어?”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심한 임해서에게서 모자를 뺏었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자니 그제야 안정감이 찾아온다.

아무도 믿지는 않겠지만 나는 낯가림이 워낙 심한 편이라 남의 시선을 받는 걸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모자를 쓰고 있으면 안정이 되는 편이었다.

임해서는 그런 나를 보며 사회성 제로인 집고양이라며 혀를 찼지만.

“손지언, 완전 행동파네. 나는 지금 활동 중인 곳이 있어서 고민해 볼게. 거기 지금 누구누구 있는데?”

“네가 잘 아는 개나소나랑 만렙은 아니지만 잘하는 유저 두 명 있어.”

“지금 이벤트전 같이 하는 사람들? 그럼 황보욱도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임해서의 뒤에서 걸어오는 황보욱이 보인다. 그쪽도 나를 발견한 모양인지 가볍게 고개를 까딱해 보인다. 이제는 무시는 하지 않는 모양이다.

황보욱에게 인사를 하려는데 제 질문을 무시했다고 생각한 건지 임해서가 다시 물었다.

“야, 황보욱도 있냐니까? 너 그러다가 꼬리 길면 밟힌다? 네 정체 알면 걔 반응 장난 아닐 것 같은데.”

“내가 뭐.”

“으아악!!”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임해서가 식겁하며 내게 달려왔다. 물론 옆으로 피해서 그 손길을 피하기는 했지만.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은 임해서가 너무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쟤 왜 저래?”

“몰라. 귀신이라도 봤나 보지.”

“내가 귀신이야?”

“분홍 머리가 산뜻한 귀신이지.”

황보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름 칭찬이었는데 그렇게 느끼지는 않은가 보다.

그는 내 모자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 안 감았어?”

“아씨, 임해서에 이어 너도 그래? 모자 쓰는 이유가 머리 안 감았을 때만 그런 건 아니거든?”

“근데 뭐하러 써. 키도 작은 게 모자까지 푹 눌러쓰니까 더 불쌍해 보이게.”

“키 커서 좋겠수다!”

“나쁘지는 않지.”

태연히 받아치는 말이 아주 능청스러웠다.

정강이를 차려고 뻗은 발을 쉽게 피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노려보는데 임해서가 다가왔다. 어쩐지 얼떨떨한 표정이 바보 같았다.

“너희 뭐야?”

“뭐?”

“왜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이가 좋아졌어?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있었으면 사이가 좋아질 일이 있겠어? 그리고 안경 맞춰. 이게 어딜 봐서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거야?”

“그치만 너희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초반이랑 비교해서 지금은 썸 타는 연인들처럼 투덕거린 느낌이었는데?”

“우웩.”

“진짜로!”

“누가 썸을 타는데?”

귓가에서 임해서의 비명 소리가 들려와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는 나도 다가오는 걸 못 봤는데 문정하는 또 언제 온 거지?

임해서의 뒤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문정하 뒤에 휴대폰만 보고 있는 손지우도 보였다.

이쪽으로 올 일도 없는 사람들이 여기는 왜 온 거야?

“지언이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노코멘트입니다. 형은 여기에 왜 왔어요? 이쪽으로 올 이유도 없는데.”

“물어볼 거 있어서 왔는데.”

물어볼 거라면 모타리 관련인가? 어제 게임이 끝난 뒤에도 연락이 없어서 의아하던 참이기는 했다. 밤늦은 시간이라서 일부러 안 한 건가 싶기도 했고.

설마 직접 와서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예상되는 질문에 그저 빤히 쳐다보는데 문정하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나도 노코멘트.”

“형이 물어보러 왔다면서 왜 노코멘트세요?”

“그것도 노코멘트.”

“…신비주의 콘셉트예요?”

“지언이 너도 묻는 말에 대답 안 해줬으니까.”

반항기인가.

진지하게 생각하며 올려다보는데 문정하는 그다지 화난 것 같지 않았다. 건방진 후배를 바라보는 눈빛도 아니었고. 그렇지만 동시에 평소처럼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도 아니었다.

‘…뭐지?’

미묘한 기분이다. 너무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던 것을 받지 못하니 이상하기도 했고.

“잠깐 얼굴 보러 왔어. 그만 가볼게.”

휴대폰만 노려보는 손지우에게 가자고 얘기하며 뒤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참 낯선 모습이다. 그리고 걸어가다가 다시 뒤돌아보며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모자.”

“네?”

“쓴 거 귀엽다.”

착각이었나.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은 아니지만 여전히 눈웃음을 짓고 있는 게 귀여워하는 것 같긴 했다. 하루라도 칭찬을 하지 않으면 가시라도 돋치나.

모자 끝을 매만졌다. 답답하다며 벗으라고 하는 얘기만 듣다가 저런 평범한 반응을 보이니 오히려 쑥스러웠다.

“뭐야? 어쩐 일로 개나소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세요?”

“…조용히 좀 얘기해라.”

“안 들려, 안 들려. 걱정하지 마.”

임해서가 얼른 들어가자며 어깨를 잡아 이끌었다. 남 일에 본인이 더 태연하게 반응하다니 뻔뻔한 놈이었다.

강의실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황보욱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별 강의라서 어쩔 수 없이 근처 자리에 가서 앉는데 황보욱이 툭 내뱉었다.

“언제 갈래?”

“뭘?”

“강의 끝나고 가자며.”

피시방을 얘기하는 건가.

잠깐 강의가 끝날 시간을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원들과 만날 시간까진 여유가 있지만, 미리 들어가서 연습해도 나쁘지는 않겠지. 근데 장학금 목적이라는 애는 그렇게 일찍부터 해도 되나?

“너 공부는? 시간 남잖아.”

“그렇긴 한데, 나는 남한테 민폐 끼치고 못살아. 자존심 상해.”

즉 본인도 본인 실력을 잘 알고 있으니 연습을 좀 하겠다는 말이었다. 날이 갈수록 황보욱어 번역 기술이 일취월장하는 기분이었다.

“난 상관없음. 그럼 우리 거기서 라면 사 먹자. 내가 사줌.”

“어쩐 일로?”

“나 요즘 밥 자주 얻어먹어서 용돈 좀 남았음.”

정작 용돈을 남게 해 준 문정하에게는 제대로 쏘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렇게 얻어먹었는데 나중에 한 번 사줘야 할 텐데. 사실 밥을 사 주는 것보다 조금 더 살갑게 대하는 걸 더 좋아할 것을 알지만, 정답을 알면서도 부정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래 봬도 낯가림이 심한 놈이었다. 게다가 문정하나 개나소나나 둘 다 첫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기도 했고.

“뭐야, 너희? 데이트하러 가?”

장난으로 묻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눈빛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임해서의 질문에 황보욱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눈빛으로 임해서도 자신이 모타리인 걸 아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니 자연스레 찌푸려지는 얼굴.

말하지 말라는 뜻일까.

임해서의 말을 무시하고 황보욱을 빤히 쳐다보니 그가 마음대로 하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 모타리랑 친구 먹음.”

“뭐?!”

“아니, 말이 왜 그따위로 진행되는 건데?”

너무 부연 설명이 없었나. 능청스럽게 왜 그러냐는 얼굴로 황보욱을 쳐다보니 어이가 없다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우기우기, 너랑 나 베프 먹었잖아. 아니었어? 나 가지고 놀았어?”

“제발 지랄 좀 하지 마…….”

“너 이런 장난 되게 질색한다? 부끄러워?”

“소름 끼쳐. 게다가 너 무표정으로 말하는 게 더 무서운 거 알아?”

“그래?”

흠. 문정하는 좋아하던데 희한하네.

턱을 쓰다듬으며 서로 다른 반응에 흥미를 느끼는데 임해서가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손가락질을 하며 물었다.

“뭐야, 너희! 갑자기 왜 이렇게 가까워졌나 했더니, 들켰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뭔데! 그리고 손지언 네 베프는 나였잖아!”

“유치하게 뭐 그딴 걸 크게 말해. 애들도 아니고.”

“그 베프 자리 탐나지도 않아.”

황보욱이 질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나 함부로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분홍 머리였다.

“임해서 너도 피방 갈래?”

“당연하지. 너랑 난 피방 베프였잖아!”

“…우기우기. 내가 지금 느끼는 소름 끼침이 네가 느끼는 거랑 비슷함?”

“응. 비슷함.”

단호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황보욱한테 저딴 짓 안 해야지.

멍 때리거나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으니 강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중간중간에 황보욱의 한심하다는 시선이 닿았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무시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

게임을 하고 있으면 그걸 방해할 정도로 꾸준히 오던 문정하의 메시지가 이상하리만큼 뚝 끊겼다.

임해서를 제외하고 자주 연락하는 지인이 없어서 최근에 바쁘게 울려대던 휴대폰이 어색했었는데, 지금은 조용하니 더 어색하다.

문정하에게서 연락이 없다. 게임 캐릭터가 죽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잠깐 멍하니 화면만 들여다보았다.

‘삐졌나?’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뭔가를 잘못한 적도 없고 웬만하면 잘못을 저질러도 봐줄 것 같은 문정하가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바뀔 만한 이유가 뭐가 있지.

잠깐 고민을 하며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후배 주제에 건방지게 노코멘트라고 해서? 다른 선배였다면 삐지는 것으로 끝날 게 아니라 바로 지적을 할 법한 상황이기도 하다.

간호과는 특히나 다른 과보다 선후배 기강이 엄격한 곳이었다.

대인 관계를 즐기지 않고 집만 다니는 나는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사교성이 좋은 임해서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가끔씩 곤란해하는 것을 봤었다. 동아리에도 들어가 있으니 알고 있는 선배가 많겠지.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선배는 문정하가 처음이자 유일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사과해야 하는 건가 고민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고민을 왜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상할 정도로 호감을 보이며 친해지려는 태도가 부담스러워서 피하고만 싶었는데 이제는 연락이 없으니 신경 쓰이다니.

“그새 정이 들었나.”

“누구한테?”

똑같이 게임에 집중하지 않고 딴생각을 하고 있던 임해서가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연애 사업이냐고 은근히 묻는 눈빛에 고개를 저으며 작게 대답했다.

“개나소나.”

“갑자기 웬 개나소나… 아하. 아까 있었던 일 때문에?”

제삼자가 보기에도 문정하의 태도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긴 했던가 보다.

고개를 끄덕이니 임해서가 잠깐 인상을 찌푸린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고 집중한 것 같은데 못난 얼굴이었다.

“야, 내가 진짜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응?”

“진짜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남자도 가능하다며.”

뒷말은 작게 덧붙인 말에 문정하가 바이라고 말하던 손지우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부정하지 않던 문정하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기는 했지만,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고백하는 여자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솔직히 그 선배 원래 성격 보니까 개나소나랑 비슷한 것 같던데, 너한테만 유달리 잘해주는 게 이상하지 않아?”

“나한테 빚진 게 있어서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목숨을 살려줄 정도로 빚을 진 것도 아닌데 볼 때마다 밥을 사주려고 하고, 하는 짓도 고마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잖아.”

저번에 임해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반려견을 보는 느낌이랑 비슷하다고 했던가. 그게 확실히 고마워하는 사람의 모습과는 다르기는 했지만, 연애 상대로서 좋아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는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임해서가 작게 혀를 찼다.

“형님의 감이 확실히 말하고 있어. 너 연애 쪽으로는 완전 똥촉이잖아.”

“너도 솔로잖아.”

“그래도 고딩 때는 연애해 봤거든? 눈치라는 것도 있고.”

누가 들으면 나는 눈치라는 건 키우지도 않는 멍청한 놈인 줄 알겠다.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봐도 임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듯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나는 그 손길에 더욱 인상을 구겼다.

“손지언, 하나만 묻자.”

“뭔데.”

“너는 어떤데? 개나소나가 우리가 봐도 엄청 잘생기긴 해도 남자잖아. 너 남자도 가능해?”

혹여나 누가 들을 것을 염려한 모양인지 문정하의 이름은 말하지 않은 임해서 진지하게 물었다.

남자? 설마 지금 연애 상대로 남자가 괜찮은지 묻는 건가?

연애라는 것에 애초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남이 동성애를 하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내가 된다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도 남자를 연애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남자와의 연애가 어떨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가 문정하라니.

“모르겠는데. 애초에 개나소나가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이런 얘기는 해서 뭐 해?”

“내가 봤을 때는 100%야. 그러니까 아까 너 썸 타는 줄 알고 민감하게 반응하고 물어본 거지. 네가 대답 안 해 주니까 더 섭섭했던 거고.”

“그게 왜 섭섭한데?”

“원래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별것도 아닌 일에 좋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해.”

헛소리. 마치 본인이 연애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조언을 해주는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우습기는 한데, 또 묘하게 설득이 되는 터라 입술 끝을 불안하게 매만졌다.

문정하가 날 좋아한다고?

“하지만 저번에 나보고 연애 상대로 느껴지면 그때 열심히 구애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지금은 연애 상대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 아니야?”

“밑밥이지.”

“밑밥?”

“남자를 상대로 네 반응이 괜찮은지 아니면 혐오감을 드러내는지 가볍게 살펴보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에 나랑 지우 형도 있는데 뜬금없이 나 너 좋아해, 이럴 수는 없잖아?”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물론 한쪽 구석에서는 문정하라면 능청스럽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상대가 거절할지, 받아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고백을 하려는 사람은 없겠지.

임해서의 말인데 왜 이렇게 상식적으로 들리고 설득력이 있지?

어느새 게임은 끄고 임해서의 말에 집중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정하가 남자라는 사실 자체를 떠나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리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무척이나 낯설었다. 사람을 피하기만 하고 별다른 재주도 없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물론 제대로 확인이 된 사실도 아니었지만, 어느새 임해서에게 설득당해 문정하가 나를 좋아하고 있고, 나는 나를 짝사랑하는 문정하에게 여지만 주는 나쁜 놈이 되어 있었다.

“가슴 절절한 짝사랑까지는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일단 확실히 호감은 있어 보임. 지금 연락이 없는 것도 네가 다른 여자랑 잘되고 있는 중일까 봐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닐까?”

“그래? 그러면 농담이라고 해야 하나?”

“그걸 변명하는 것도 웃기지. 나중에 자연스럽게 만났을 때 얘기해. 지우 형도 있으니까 언젠가는 만나겠지. 아니면 네가 이번에 밥 사 준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들어서 흘려도 되고.”

“그건 그렇지만.”

“근데 너 진짜 상관없나 보네? 개나소나가 널 좋아해도.”

임해서도 그쪽으로 딱히 편견은 없는 모양인지 편하게 물어왔다. 아니, 편견을 떠나서 애초에 사람들은 본인이 아닌 타인의 일에는 무심하다. 나도 실제로 그랬었고.

동성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해?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자체가 없어서 그게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문정하가 실제로 나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이전처럼 나쁜 감정은 없다는 것. 애초에 자주 연락하는 그가 귀찮아서 그랬을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가 개나소나라는 것도 알았고 같이 게임을 하다 보니 정도 들었다. 문정하는 모르는 나 혼자만의 친밀감이겠지만.

남자랑 사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임해서처럼 그냥 더 자주 보고, 밥을 같이 먹는 일이 많아지는 거 아닌가?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취미는 게임이니까 피시방도 갈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따지면 문정하와의 연애는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입맞춤이라든가, 성적인 접촉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조금 더 친한 친구의 연장선으로 생각한 나는 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모습에 임해서는 의외라는 듯 쳐다보다가 이내 시원스레 웃어 보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러다 연애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끌리는 대로 움직여 봐. 대학교 다닐 때 연애는 한 번쯤 해두면 좋지. 고민 상담 정도는 가끔 해줄게.”

“아직 사귈 거라고 얘기도 안 했는데.”

“사람이랑 가까워지기 싫어하는 네가 연애 상대로서 나쁘지 않다는 평가까지 내렸으면 말 다 했지, 뭐.”

임해서는 대학교에 와서 친해지게 된 놈이었는데 짧은 기간에 참 나에 대해 제대로 파악했다.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해서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 봐서 그런가.

가만 생각해 보면 임해서랑은 성격도, 성향도 많이 다른데 용케 잘 어울렸다.

턱을 괴고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니 임해서가 양 볼을 감싸며 수줍게 말했다.

“뭐야, 그 눈빛은. 형님한테 반하면 곤란한데.”

“개지랄 노노.”

“너무해. 근데 손지언 님.”

“왜?”

“모타리가 개나소나 정체도 아나요? 눈빛이 강렬한데.”

목이 어색하게 뒤로 돌아갔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황보욱이 우리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임해서를 제외하고 개나소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놈이 한 명 더 있었구나.

경악이 섞인 얼굴에 실수를 인정한 나는 서둘러 황보욱의 멱살을 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다행히 교수님은 강의하는 데 집중하고 계셔서 이쪽을 보고 있지 않는 상태였다.

“너 어디 가서 소문내면 죽는다.”

“내가 그딴 소문을 뭐하러……. 아니, 근데 너 진짜야? 그 선배님이랑,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일부러 정체를 숨기려고 했어?”

횡설수설하는 황보욱의 모습에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것 같아서 한숨밖에 안 나온다.

손지우에게 뭐라고 할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본인이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멋대로 아웃팅을 해버리다니.

‘진짜 최악이네, 손지언.’

미안한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가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말이다.

황보욱이 그렇게 입이 가벼울 것 같지는 않지만, 죄책감이 문제였다. 나도 내 비밀을 누가 멋대로 얘기하고 다니면 싫을 것 같은데.

[나: 죄송합니다…….]

메시지를 보냈다. 밑도 끝도 없는 사과에 문정하가 당황할 것이 눈에 선했지만 어쩌리. 차마 사실을 말하지는 못하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당분간, 아니 앞으로는 개나소나랑 문정하한테 엄청 잘해 줘야겠다.

지은 죄 덕분에 안절부절못하며 휴대폰을 계속 바라보았지만, 강의가 끝날 때까지 메시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 * *

“휴대폰 닳겠다, 미친놈아.”

강의가 끝나고 피시방에 오는 내내 계속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임해서가 툭 내뱉었다. 그제야 휴대폰에서 겨우 눈을 떼고 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앉는 임해서와 황보욱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연락이 안 오지?”

“바쁘겠지.”

임해서에게 묻는데 좌측에 앉는 황보욱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도 내가 누구의 연락을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칼답하던 사람이 답장도 바로 안 하고, 심지어 노코멘트라고 비밀도 만들었는걸? 신경 쓰이는 게 정상 아니야? 심지어 나는 개나소나 모르게 아웃팅까지 해버렸다고!

“아악, 내가 미친놈이지. 진짜 죄인이다!”

“평소에는 남 생각 따위 하지 않는 놈이 왜 이리 유난이야? 황보욱한테도 막 대했잖아.”

“그거랑 이게 같아? 중요한 남의 비밀인데 허락도 없이 내가 까발린 게 됐잖아. 우기우기가 개나소나 정체를 알고 있는 걸 깜빡했어.”

“어차피 그 선배님은 별로 신경 안 쓰실 것 같은데. 그래도 잘한 짓이 아니긴 하지.”

뒤이어 붙이는 멘트에 내가 노려보자 임해서는 모른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본인도 같이 잘못한 주제에 쏙 빠져나가네!

“내가 입 다물고 있으면 되잖아. 그만 신경 써.”

황보욱이 전원을 켜며 툭 던지듯 내뱉었다. 그래도 그 속에는 그만 걱정하라는 배려가 담겨 있어서 조금 의외라는 눈으로 쳐다보자 또 인상을 찡그린다.

“뭐야, 그 표정은?”

“내 표정이 뭘?”

“네 성격에 뭐 하는 짓이냐고 묻는 표정인데.”

“안타깝습니다, 우기우기 선수! 정확히는 이건 무슨 개 또라이 짓이지? 하고 묻는 표정이었습니다!”

“…….”

황보욱은 대꾸하기를 포기한 듯 시선도 주지 않았다. 매정한 놈.

“네가 이해해, 황보욱. 손지언이 좀 종잡을 수 없는 놈이야. 친해지면 더욱.”

“거리 두기 좀 해야겠네.”

의자를 옆으로 떨어트리는 모습에 콧방귀를 뀌었다. 매정한 놈. 저래놓고 게임 하면 내 옆에만 찰싹 붙어있을 거면서.

휴대폰 화면을 마지막으로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계속 신경 쓰기 싫어서 뒤집어 놓은 채였다.

“나는 이벤트전 때문에 4시에 모이기로 했는데, 너희는?”

“우리는 중학생이 있어서 6시에 모이기로 했어.”

“와, 중딩도 있어?”

“응. 저번에 봤던 암흑 속성의 도적.”

영원한이등병이 인상에 깊었던 모양인지 임해서는 바로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이내 감탄하는 얼굴로 말했다.

“한국 게임의 미래가 참으로 밝구나.”

“뭐래. 헛소리하지 말고 초대나 받아.”

[염소구더기 님이 파티에 초대하였습니다.]

[솔로면봐줌 님이 파티 신청을 수락하였습니다.]

그러고보니 임해서가 들어오면 탱커가 두 명이네.

이벤트전을 위해 길드 멤버들과 모이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게임 매칭을 시작해 놓고 대기하는데 황보욱이 컴퓨터 화면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 보인다.

뭘 저렇게 빤히 쳐다보나 싶어서 놈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와씨, 깜짝이야.

“너 길드 들어갔어?”

“길드? 갑자기 무슨… 아.”

황보욱을 제외하고 전부 워너비 길드 소속이구나.

황보욱이 켜둔 친구 창에 이벤트전을 같이 하는 멤버 모두가 워너비 소속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황보욱을 따돌린 듯한 상황에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능청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너 어제 안 왔을 때 스카우트 됐지.”

“나는?”

“솔직히 모타리 실력으로 길드 스카우트는 양심 없지 않아?”

황보욱이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나도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서 임해서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기는 했지만.

장난이 심했나. 먹구름이라도 낀 듯한 얼굴을 한 모습에 나는 작게 웃으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곧이어 황보욱의 화면 위로 올라오는 알림창 하나.

길//[워너비 길드에서 초대장이 도착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스카우트.”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황보욱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발전 가능성은 있으니까 특별히 초대해 줄게.”

“길드장이 너였어?!”

“응. 나도 한 번 길드 만들어서 해보려고. 아, 매일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 같은 건 없으니까 넌 그냥 하고 싶을 때 편하게 들어와.”

혹여나 학점 관리를 해야 하는데 부담을 가질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

황보욱은 조금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홀린 듯 제안을 수락했다.

모타리 옆에 뜨는 워너비 길드 표시.

나는 임해서가 매칭이 되었다며 집중하라고 말했을 때 그제야 화면을 돌아보았다. 익숙하게 거너를 선택하고 임해서와 황보욱도 망설임 없이 주캐인 탱커를 골랐다.

‘확실히 황보욱이 탱커에 소질이 있어.’

임해서의 플레이를 보면서 탱커의 역할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듯했다.

시야를 봐주고 주 탱커가 있을 경우에 다른 탱커는 원거리 적군을 방해하는 것. 또는 뒤로 돌아와 암살하려는 적군을 견제하는 것.

말로만 쉽지, 게임을 하다 보면 그런 건 잊고 앞에 있는 적만 노리고 달려드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많은 경험을 해 봐야 제 몫을 다할 수 있다.

어느새 게임을 한 지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임해서는 말했던 것처럼 이벤트전 때문에 길드원들과 약속이 있다며 파티를 탈퇴했고 파티원에 남은 건 나랑 황보욱뿐이었다. 라면이라도 시키며 한 판하고 느긋하게 파티원들을 기다리려고 하는데 황보욱이 말했다.

[길드원, 오메가원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오메가원 님 들어오셨는데?”

“뭐? 아직 약속 시간 남았는데, 솔플이라도 하시려고 들어온 건가?”

일반전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으니 이해는 한다. 그도 들어오자마자 접속한 우리에게 길드 채팅으로 아는 척을 해 왔다.

[길드] 오메가원: ㅎㅇ

[길드] 오메가원: 신입님 복귀하셨네. 어제는 급한 일?

[길드] 모타리: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길드] 모타리: 앞으로는 무단 잠수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길드] 오메가원: ㄴㄴ 급한 일이면 어쩔 수 없는데

[길드] 오메가원: 뭔 일 있으셨

[길드] 오메가원: 어요? ㅎㅎ 왜 갑자기 딱딱하게 말함?

이모티콘을 쓰며 발랄하게 대답하던 모타리가 저토록 딱딱하게 구는 모습이 영 어색한 듯했다. 존대까지 고쳐서 쓰는 말투에 웃자 황보욱이 노려보았다.

“그냥 평소처럼 해. 나 신경 안 쓸 테니까.”

“네가 염소구더기인 걸 내가 알았는데, 어떻게 평소처럼 해. 젠장.”

[길드] 모타리: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길드] 오메가원: ;;;;

뭐, 그래. 딱딱하기는 해도 예의는 여전히 바르네.

영문도 모르고 당황하는 오메가원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앞으로 황보욱은 쭉 저렇게 행동할 테니 익숙해져야겠지. 나중에 들어올 영원한이등병이 놀라는 모습이 훤했다.

[길드] 염소구더기: 안녕하세요 오메가님

[길드] 염소구더기: 일찍 들어오셨네요!

[길드] 오메가원: ㅇㅇ 집안일 다 끝나서 들어옴

[길드] 오메가원: 일반전 같이 하실?

[길드] 염소구더기: ㅎ 좋아요! 제가 초대할게요~

[길드] 오메가원: ㅇㅋ

[염소구더기 님이 파티에 초대하였습니다.]

[오메가원 님이 파티 신청을 수락하였습니다.]

탱커, 원딜, 보조 조합인가. 사실 암힐을 딜러로 봐야 할지, 보조로 봐야 할지 고민이 되긴 했지만(힐러로는 생각도 안 했다).

게임이 시작되고 탱커와 거너를 선택한 우리와는 달리 오메가원은 암힐러를 쉽게 선택하지 못했다. 이유는 같은 편에서 빛 힐러를 선택한 유저가 있었기 때문에.

[길드] 오메가원: 곤란

심지어 남은 유저는 궁수를 선택했다. 근딜의 부재. 오메가원이 쉽게 선택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모습에 나는 길드 채팅으로 얘기했다.

[길드] 염소구더기: 어차피 일반전이니까 하고 싶은 걸로 하세요. 조합 신경 쓰지 마시고

[길드] 오메가원: 개나소나라도 있으면 좋은데

[길드] 오메가원: 그래도 첫판부터 질 수는 없으니 함 해봄

불안한데. 처음에 오메가원을 만났을 때도 새로운 캐릭터를 연습하다가 엄청 밀리지 않았던가. 이제까지 암힐을 제외한 다른 캐릭터를 잘 사용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 말은 암힐을 엄청 좋아하거나 나처럼 특정 캐릭터만 잘하거나.

‘괜찮겠지?’

괜히 어정쩡하게 숙련도가 낮은 캐릭터를 고르는 것보다 차라리 잘하는 암힐을 골라서 딜을 넣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한 불안이겠지 싶어서 걱정을 접어두고 황보욱의 모니터를 보며 요령을 알려주었다.

[팀] 초팡: 오메가님!

[팀] 초팡: ㅎㅅㅎ 혹시 뉴비세용?

근데 정작 가르침을 받고 있는 황보욱이 아니라 오메가원이 뉴비 취급을 받다니. 빛 힐러를 선택한 초팡이 오메가원 앞에 기웃거리며 말했다.

[팀] 오메가원: ㅇㅅㅇ

[팀] 초팡: ㅎㅅㅎ 괜찮아요~ 저는 뉴비한테 관대한 여자니까! 지금부터 쑥쑥 크면 되죠!

[팀] 오메가원: ㅇㅅㅇ;;

[팀] 초팡: 전사 캐릭터 처음이세용? 궁극기는 거리가 너무 멀면 안 닿으니까 좀 접근해서 써야 하는뎅

[팀] 초팡: 제가 오메가님 마킹해서 보호해 줄테니까

[팀] 초팡: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하세용! >_<

[길드] 오메가원: 오메가는 당황스럽다;;

[길드] 염소구더기: ㅋㅋㅋㅋㅋ 뉴비 만난 줄 알고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울려주세요

[길드] 염소구더기: 솔직히 지금 실력으로 뉴비 아니라고 하면 욕먹을 듯 ㅎㅅㅎ

[길드] 오메가원: ㅜㅠㅠㅠ

아군의 유일한 근딜을 하겠다며 호기롭게 전사를 선택했는데, 지금 실적은 0킬 15데스였다. 솔직히 초팡이가 욕을 하며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저 정도면 천사가 아닐까? 궁수를 선택한 유저의 닉네임도 잔팡인 걸 보면 초팡이랑 파티원인 듯했다.

파티원이 저렇게 챙겨주고 있으니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없는 사람 셈 치는 오메가원을 대신해서 킬을 하고 있을 때였다.

2Kill.

오메가원을 죽이며 무럭무럭 큰 적군이 조금 골치 아프기는 했지만, 저쪽도 다행히 전부 잘하지는 않았다. 근딜 두 명이 잘하고 있었지만, 남은 유저들은 크게 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현재 염소구더기의 스코어는 8킬, 3데스. 나쁘지는 않았다. 모타리도 생각보다 시야도 잘 보고 유인도 잘하는 편이었고. 아까 임해서랑 같이 하던 게 제법 참고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팀] 잔팡: 거너 잘하시네요

[팀] 염소구더기: ㄱㅅ합니다

[팀] 잔팡: 만렙이신가요?

[팀] 초팡: 오메가님! 거기 가면 아야 하는데! ㅜ0ㅜ

[팀] 염소구더기: 아뇨. 부캐인데 아직 만렙은 못 찍었어요

[팀] 잔팡: ㅇㅎ 부캐?

[팀] 오메가원: ㄷㄷ 괜찮아요;;

[팀] 초팡: 제 힐 받을 수 있는 곳에 있어요 ㅜㅜ

[팀] 초팡: 눈앞에 안 보이면 막막

[팀] 초팡: 불안하고 초조하잖아요! 뉴.뉴

저돌적인 초팡의 행동에 오메가원은 힐도 거부하며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또 죽은 상태였다.

길드 채팅으로 제발 살려달라고 말하는데, 이미 오메가원을 뉴비라 확신한 초팡을 어떻게 말릴까. 이제 와서 뉴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애타게 부르는 오메가원을 못 본 척하며 잠깐 화면을 바라보았다.

초팡이 말이 많기는 해도 뉴비를 도와준다는 말처럼 도와줄 실력이 있긴 했다. 힐 배분도 적절히 잘되고 있고 뒤에서 어시를 하면서도 돌아오는 적군을 발견하고 즉시 핑을 찍기도 했으니까.

저렇게 말하는 잔팡도 벌써 10킬이었다. 저격을 맞고 HP가 적은 적군을 몇 명 죽이기는 했어도 실력이 전체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

‘힐러와 원딜이라.’

지금 길드에는 주 포지션이 원딜1, 근딜2, 탱커1, 어시1이었다.

친목 길드가 아니니 기왕이면 잘하는 유저를 영입하면 좋고, 그중에 힐러가 있을수록 좋은 건 당연했다. 만렙인 빛 힐러를 모셔가려는 곳은 많을 테니 레벨이 낮은 빛 힐러 중에서 미리 찜해서 데리고 가는 게 빠르겠지.

하지만 단독으로 결정하기도 어렵고, 오메가원이 거절할 수도 있으니 고민되기는 한다.

인상을 찌푸린 채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데 황보욱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저기 힐러 잘하네.”

“그렇지?”

“응. 맞고 있으면 죽기 직전에 꼭 힐이 한 번씩 들어오더라고. 궁수도 빠져나올 수 있게 적군을 한 번씩 때려주는데 타이밍이 좋은 것 같아.”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황보욱이 그렇게 느낄 정도라면 게임 센스는 확실히 있다는 거겠지. 나중에 랭킹전을 하려면 바로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유저가 좋긴 하다.

나는 툭 내뱉듯 가볍게 물었다.

“저 둘 길드에 영입해 볼까?”

“그러든가.”

“넌 괜찮아?”

“상관없어. 잘하고 성격만 안 나쁘면 됐지. 근데 오메가원 님이 괜찮대?”

똑같은 걱정이네. 초팡이가 쫄래쫄래 오메가원만을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는데, 이제는 해탈한 모양인지 오메가원도 더 이상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길드에 들어오면 오메가원이 뉴비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설마 사기라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길드] 염소구더기: 오메가님

[길드] 오메가원: ??

[길드] 염소구더기: 저 두분 길드 초청할까 하는데 어떠세요???

[길드] 오메가원: ㅜㅠ?

[길드] 염소구더기: 싫으세요? ㅠㅠ?

[길드] 오메가원: 아니 그건 아니고… 잘하긴 하는 듯

[길드] 오메가원: 힐러는 필요하니까 ㅇㅇ

[길드] 오메가원: 대신에 나 뉴비 아니라고 설명 좀;

[길드] 염소구더기: ㅋㅋㅋㅋㅋ넵

역시 그게 조금 걸렸던 거구나. 알겠다고 하니 바로 오케이를 하는 오메가원에 안심했다. 사실 길드원들의 무조건적인 동의는 필요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모두가 환영하는 유저를 초창기 길드원으로 꾸리면 좋으니까.

[팀] 염소구더기: 잔팡님, 초팡님

[팀] 잔팡: ?

[팀] 초팡: 네엥

[팀] 염소구더기: 혹시 길드 가입 안 되어있으면 저희 길드 들어오실래요? 잘하시길래 ㅎㅎ

[팀] 잔팡: 아, 글쎄요

별로인가. 미적지근한 반응에 거절당하는 건가 싶어서 조금 긴장하는데, 일행과는 달리 초팡이가 발랄하게 얘기했다.

[팀] 초팡: 오메가 애기도 있어용?!

[팀] 염소구더기: 오메가 애기?

[팀] 초팡: 뉴비니까 애기죠!! ㅎㅅㅎ

[팀] 염소구더기: 아ㅋㅋㅋ 죄송하지만 오메가님 뉴비 아니세요 ㅠㅠ 지금 처음 쓰는 캐릭터이기는 한데 뉴비는 아니에요.

[팀] 초팡: 저렇게 못하는데요? ㅜ0ㅠ?!

[길드] 오메가원: 쿨럭;

[길드] 오메가원: 나 그렇게 못함? ㄷㄷ

[길드] 모타리: ^^

[길드] 오메가원: 웃는 게 더 무섭…….

황보욱이 나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냐고 묻는 눈빛이라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라도 오메가원의 전사를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기는 힘들었으니까.

[팀] 염소구더기: ㅎㅎ; 전사만 저럴 겁니다?

[팀] 초팡: 물음표가 몹시 수상하지만!

[팀] 초팡: 저 학교 때문에 자주 참여 못 하는데 그래도 괜차나여? ㅇㅂㅇ??

[팀] 잔팡: 야, 상의도 없이ㅡㅡ 귓말은 무시하고

[팀] 초팡: 초팡이는 ♡리는 대로 할 거얏!

저 하트는 도대체 뭐가 생략된 걸까. 말하는 걸 보면 어린 여학생 같은데.

조금 찝찝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승리 화면을 바라보았다. 오메가원을 제외하고 5:4로 싸운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승자는 우리쪽이었다.

모타리도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는 해도 아직 부족한 게 많다. 즉 이 승리에는 저 둘의 역할이 컸다는 뜻이겠지.

[팀] 잔팡: 신생 길드죠? 길드원 얼마 없던데

[팀] 염소구더기: 넵 어제 만들었는데 나중에 랭킹전도 같이 돌고 길드전도 했으면 해서 만들었어요

[팀] 잔팡: 강요 사항은 없고요?

[팀] 염소구더기: 저희 쪽도 이미 중학생이 있어서 강제로 시간을 정해서 참여하라는 규칙은 없을 예정입니다!

[팀] 잔팡: ㅇㅎ

[팀] 초팡: 초팡이는 합니닷! 오메가님이랑 함께 할래요!

[팀] 오메가원: 나 뉴비 아닌데;

[팀] 초팡: 괜찮아요! 실력이 뉴비잖아요 ㅎㅅㅎ

[팀] 초팡: 초팡이가 지켜줄게!

[길드] 오메가원: 뭔가 은은하게 욕먹는 느낌이라서 새로운데?

[길드] 모타리: 그냥 대놓고 욕먹는 것 같은데요…….

[팀] 염소구더기: 그럼 게임 끝나고 길드 초대 보낼게요! 저희는 참고로 이번 달은 이벤트전을 하느라 같이 못 할 수도 있습니다 ㅜㅜ

[팀] 초팡: 괜찮아요~ 저희 지금 시험 기간이라서ㅎ

[팀] 초팡: 어차피 지금 몰래 들어온 거라서 나가봐야해요!

[팀] 잔팡: TMI 제발 그만…….

[팀] 초팡: 히히

저 둘은 같은 학교 친구인가. 둘 다 시험 기간이라고 하는 걸 보면 그럴 확률이 높겠지. 나도 그렇고 영원한이등병도 그렇고 전부 학생 때 잘하는구나.

게임이 끝나자마자 길드 초대를 보내니 바로 길드 인원에 두 명이 추가되었다.

생각보다 쿨하게 받아줘서 다행이다. 사실 잔팡이는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초팡이가 이끌고 들어왔으니 괜찮겠지.

[길드] 오메가원: 묘하게 찜찜한 이 기분

[길드] 염소구더기: 오메가님 덕분이네요!

[길드] 오메가원: 칭찬 같지 않음ㅜ

오메가원의 울상이 섞인 말에 작게 웃고 있는데,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 진동에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어 올리는데 화면에 보이는 이름. 개소.

문정하의 전화였다.

“뭐야, 어디가?”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오메가 님한테 잠깐만 대기해 달라고 하고 네가 말 상대 좀 해 줘!”

황보욱의 어이없다는 시선이 뒤따라 붙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하랴. 서둘러 밖으로 뛰어갔다.

피시방 밖으로 나오니 소음이 멎은 듯 고요하다.

흠흠.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휴대폰을 노려보던 나는 천천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언아, 지금 통화 가능해?

“네!”

저도 모르게 너무 씩씩하게 대답해 버렸다. 대답하고 약간 뻘쭘해져서는 볼을 긁적이며 덧붙였다.

“강의 끝나셨어요?”

―응. 뭐 하고 있었어?

“임해서랑 피방 와서 게임하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그게 끝인가?

묘하게 단답에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잠깐 기다렸지만 이어지는 질문이나 말은 없었다. 항상 대화는 문정하가 이끌었기에 이런 식으로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랑 얘기하기가 싫은 건가? 하지만 전화를 끊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말이 없지. 아니면 내가 먼저 대화를 이끌기를 바라는 건가.

“형은 이제 뭐 하려고요? 바로 집에 가세요?”

―고민 중이야.

“약속 없으면 저녁이라도 같이 드실래요? 저번에 제가 얻어먹었으니까 이번에는 사 드릴게요.”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럴까.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행동을 하며 묻는데,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문정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거절했다.

솔직히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미안. 조금 있다가 약속이 있어서.

아, 약속.

그러고보니 곧 이벤트전 때문에 모이기로 한 시간이었구나. 내가 만나자고 한 약속인데 잊고 있었다니! 게다가 더 의외인 건 문정하가 나보다는 염소구더기와의 약속을 우선으로 생각해 주었다는 것이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사람 감동받게.’

염소구더기 약속이라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줄 알았던 터라 더 의외였다. 제안을 거절당했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묘하게 더 기분이 좋아지다니.

―그런데 아까 문자는 뭐였어?

“네? 문자요?”

―갑자기 죄송하다고 얘기했잖아.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잠깐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황보욱에게 문정하의 성적 취향을 아웃팅을 해버린 것.

얘기해도 되나? 잠깐 고민이 되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나를 예뻐해 준다고는 해도 충분히 민감한 주제였으니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양심에 찔리고.

―말하기 곤란한 거야?

“네……. 형한테 제가 잘못한 게 있어서요.”

―나한테? 내가 알면 화낼 일이야?

“화를 내셔도 제가 할 말이 없을 일이에요…….”

―그게 뭘까. 궁금하네. 그래도 곤란하면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무슨 일인지 궁금하거나 불안하지도 않은 걸까.

문정하는 평소와 똑같은 부드러운 어조로 나를 달래며 말했다.

―천천히 얘기해 줘도 괜찮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닌 것 같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쁜 뜻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랬으면 지금처럼 얘기하지 않고 숨겼겠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쉽게 이해를 해 주는 모습이 어른스러워서 조금 낯설었다.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정말 문정하가 맞나 싶어 화면을 다시 쳐다봤다.

‘하긴 개나소나라면 몰라도 문정하는 처음부터 다정하긴 했지.’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어느 모습이 문정하의 본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데 내가 염소구더기인 걸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황보욱도 생각보다 잘 받아들였고 문정하도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겠지만 지금처럼 잘해주지 않을까.

잘해 주는 개나소나라니. 영원한이등병이랑 오메가원이 미쳤냐고 놀라는 모습이 훤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던 모양인지 문정하가 웃으며 물었다. 내 웃음이 전염되기라도 한 것마냥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냥 형이 생각보다 어른스러운 게 멋있어서요.”

―호감도 좀 올랐어?

“아주 조금 올랐어요.”

―기쁘네.

사실은 아주 조금보다는 더 올랐지만.

큰일 났네. 처음에는 귀찮기만 하고 멀어지고 싶던 상대가 이제는 제법 친해지고 가까이 대해도 불편함이 덜했다. 현실에서도 보고 게임에서도 봐서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기에 이렇게 친해지는 건 처음이라서 어색했다.

“형은 제가 무슨 잘못을 했어도 용서해 줄 거예요?”

―잘못한 거에 따라 다르겠지만. 왜? 아까 얘기한 거 말고 다른 것도 있어?

“형한테 숨기고 있는 게 있는데 슬슬 말할까 고민이라서요.”

―숨기고 있는 게 뭘까. 내가 알면 좋아할 일이야?

글쎄. 그건 애매했다.

문정하 입장에서는 좋아할 것 같았고 개나소나 입장에서는 기겁할 것 같기도 했다. 동일 인물인데 왜 반응은 다르게 상상이 가는 건지.

가볍게 웃으며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하니 문정하도 따라 웃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곧 얘기해 줄 거지?

“네. 나중에 직접 만나면 얘기해 드릴게요. 형 반응도 궁금하고.”

―그래. 나도 지언이한테 얘기할 거 있었는데 잘됐네.

“얘기할 게 뭔데요?”

―노코멘트.

버릇이라도 들었나. 자꾸만 비밀을 만드는 문정하의 태도에 뚱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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