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꼬리가 길면 밟힌다
통화를 끊은 문정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옆에서 같이 걷던 손지우는 시선도 주지 않고 물었다.
“이제 질렸어?”
“뭘?”
“손지언. 처음처럼 좋아 죽으려는 태도가 아니길래.”
하긴 고작 바퀴벌레 한 마리 잡아준 거 가지고 호감도가 너무 높긴 했다.
손지우는 원래 문정하의 성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동안 하던 행동이 쥐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해괴하긴 했지.
“질린 거 아닌데. 조금 거리를 두고 있을 뿐이야.”
“거리?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나 혼자 이러는 건데. 그냥 내 생각보다 지언이를 더 좋아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예뻐하는 후배? 아니면 연애 상대로?”
“그게 애매해서 거리를 두는 중.”
실화냐.
손지우의 표정이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문정하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지금까지는 별다른 의식 없이 예뻐하는 후배로서 반응도 재미있으니 다가갔던 게 컸다. 하지만 오늘 오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던 손지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황을 봐서는 단순한 장난인 것 같았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던 ‘썸’이라는 단어.
그래, 손지언이 연애를 하게 된다면 동급생의 여학생이랑 하게 되겠지. 본인을 제외한 인물이 손지언을 예뻐하고 귀여워해 주는 모습이라니.
미묘한 감정이었다.
질투라고 하기에는 그렇게 화가 날 정도는 아닌데,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혹시 진짜로 있나 싶어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내 사촌 동생이기는 하지만, 너도 참 취향 독특하다. 너 좋다는 예쁜 여자들도 많잖아.”
“지언이가 더 귀여운데.”
“못난 얼굴은 아니긴 한데, 거지고 바보잖아.”
“돈은 내가 있어. 그리고 누가 우리 지언이보고 바보라고 지껄이래.”
“미친놈아, 그냥 이미 빠져들었다고 고백을 해라. 한 대 치겠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내려다보는 눈빛이 제법 서늘하다. 손지우는 그 시선에 질색하며 한 발자국 옆으로 떨어졌다.
“연애 감정은 더 아련하고 간질간질한 거 아닌가?”
“보통 짝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감정이라는 게 다 동일하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그 얼굴로 연애는 안 해보고 도대체 뭐 했어?”
손지언은 상대방의 호감을 눈치 알아차리지 못하는 똥멍청이라서 모태 솔로였다고 치자. 하지만 문정하는 그런 눈치 없는 놈도 아닌데, 왜 이제까지 연애도 안 해본 거지? 그렇다고 문란하게 노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기껏 해 봐야 공부를 하거나 게임을 심심풀이로 하는 건전한 놈이었다. 외모만 봐서는 클럽 가서 방탕하게 놀아도 아무도 욕하지 않을 얼굴인데.
“굳이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하고 싶은 사람도 없었어.”
“네가 말하니까 되게 재수 없다. 어쨌든 지언이한테 강요는 하지 마.”
“가족이 동성애 하는 게 싫어서?”
“뭐,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니까 지언이만 괜찮으면 상관없어. 다만 걔가 입 험한 거랑 달리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놈이라서 걱정이지.”
조금 전에 손지언에게 왔던 문자를 떠올리며 문정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찔려서 얘기를 꺼낸 것 같기는 했다. 뒤에서 험담이라도 했나. 험담 정도는 별 상관없지만 그 당사자가 손지언이라면 조금 신경 쓰일지도.
문정하는 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신경 쓰일까. 이상했다. 지금 당장 보고 싶어 죽을 정도로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 건 겪어보지도 못했지만.
‘착각이겠지.’
연인이 남자라도 상관없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는 상대를 먼저 좋아하고 싶지는 않다. 마음을 강요하고 싶지도 않은데 보답받지 못하는 감정을 소비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손지언이 저를 좋아할 리는 없으니 쓸데없는 의심으로 감정을 착각하지 말자
문정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지우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사실 손지언이 권유한 저녁 약속도 솔깃했지만, 당분간은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으니, 참아볼 생각이었다.
염소구더기와의 약속을 더 중요시 여긴 거라고 생각하며 감동받은 손지언이 알았다면 실망할 생각이었지만.
“뭐야, 벌써 들어와 있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접속한 건데 영원한이등병을 제외한 일행들이 접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 짧은 사이에 처음 보는 인물 두 명이 길드원에 추가되어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했길래 새로운 길드원도 영입한 거지.
둘 다 만렙은 아니었지만, 정보를 찾아보니 승률은 대체로 높았다. 영 못하는 놈들을 데리고 온 건 아닌 듯했다. 지인이거나 게임을 하면서 마음에 든 유저들을 꼬셔서 데려온 거겠지.
[길드] 염소구더기: ㅇ?
[길드] 염소구더기: 왜 이렇게 빨리 와요?
개나소나가 접속했다는 알림을 본 모양인지 게임 중이던 염소구더기가 길드 채팅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왜 소름 돋게 존댓말을 하는 걸까.
은연중에 저보다 어린 나이라는 건 알 것 같았지만, 저런 식으로 존대를 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건방진 염소구더기만 보다가 존대를 쓰는 염소구더기를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문정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해킹이라도 당했나?
[길드] 개나소나: 그냥ㅇㅇ 불만있음?
[길드] 염소구더기: ㅋ
[길드] 염소구더기: 말을 해도 참 예쁘게도 해
[길드] 개나소나: ㄱㅅ
이제야 익숙한 태도로 대하는 행동에 문정하는 목 뒤를 주무르며 작게 웃었다.
손지언에게도 느끼는 거지만 본인의 취향은 은근히 저렇게 틱틱거리며 대답하는 당돌한 사람인 모양이다. 고분고분한 것보다는 저런 반응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염소구더기 따위보다는 손지언이 훨씬 더 착하고 귀엽기는 하지만.
[길드] 개나소나: 언제 끝남?
[길드] 염소구더기: 재촉ㄴㄴ 조신하게 기다리삼
[길드] 개나소나: 조신이라는 단어도 알고 기특하네
[길드] 염소구더기: ♡♡
그래도 염소구더기도 첫인상과는 달리 제법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욕을 했음이 틀림없지만, 저마저도 그저 같잖은 게 귀여워 보일 뿐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저렙으로 본캐 랭커라는 소리에 어이없었지만, 알고 보니 거짓말은 아니었고―아직 예전 실력이 다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지만―생각보다 2인팟을 할 때 합이 잘 맞기도 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게임을 같이 하자고 귓말을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엮이게 될 줄은.
원래 타인에게는 무심한 성격인데 손지언을 제외하고 염소구더기도 나름대로 문정하에게 특별한 녀석이었다.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동안 받았던 랜덤 보따리를 심심풀이로 열었다. 개봉되는 것들은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제복도 질려가고 있어서 새로 바꾸는 김에 염소구더기 것도 같이 사줄까 고민했다.
코스튬에 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굴었으니 선물해 준다고 하면 제법 좀 사근사근하게 굴지 않을까?
얌전한 염소구더기도 재밌을 것 같긴 하다. 놀려도 제대로 화도 못 내고 부들거리며 참는 꼴이 놀릴 만할 것 같기도 하고.
‘제복 종류 좋아하는 것 같긴 하던데.’
근데 얘가 이런 걸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덥석 받을 성격인가? 아직 염소구더기에 대해 제대로 된 파악이 되지 않아서 고민되었다.
손지언은 밥 사주는 것도 부담스러워하기는 했다. 손지우나 임해서가 별다른 생각 없이 얻어먹는 거랑 달리.
그 둘에 비해서는 염소구더기는 굳이 따지자면 손지언이랑 닮긴 했지. 부담스러워할지도? 그럼 어떻게 해야 부담을 주지 않고 선물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둘이 닮은 구석이 좀 있네. 내 취향이 이러니까 친해지려고 하는 사람이 비슷한 건가.’
아주 잠깐 염소구더기가 손지언이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한 문정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문정하는 문득 염소구더기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 지금까지의 대화를 돌이켜 보았다.
‘절대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길드] 염소구더기: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음?
[길드] 개나소나: ㅇㅇ 오늘부터 개조신이라고 불러
[길드] 염소구더기: ㅋㅋㅋㅋㅋㅋ개조신ㅋㅋㅋㅋ그게 뭐야
[길드] 염소구더기: 너 때문에 저격 삐끗했잖아!
[길드] 개나소나: 실력 탓을 이렇게 하다니……?
[길드] 개나소나: 이게 랭커의 마음가짐인가
[길드] 염소구더기: 아니, 지금은 랭커 아니라고!!
[길드] 염소구더기: 어디 가서 나 랭커라고 하지 마!
[길드] 개나소나: 네가 처음에 말했잖아
[길드] 개나소나: 지금 생각해도 지도 그릴 듯
[길드] 염소구더기: 그때는 개소 네가 ♡♡ 사람 열 받게 하니까 그렇지
[길드] 염소구더기: ㅡ,.ㅡ 솔직히 인정?
[길드] 개나소나: 조신하게 기다리는 개조신은 욕 먹어서 슬픔
[길드] 염소구더기: ㅋㅋㅋㅋㅋ뭐래
문정하는 좋은 편인 본인의 감을 이번에는 철저히 무시하기로 했다.
(누군가의 워너비 3권에서 계속)
누군가의 워너비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