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개나소나의 애정 공세 (16/21)

15. 개나소나의 애정 공세

임해서가 연애 관련 눈치는 더럽게 없다며 수시로 핀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기가 호의를 좀 베풀 수 있는 걸 다 그린 라이트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착각이었을 때의 민망함은 누가 감당하라고.

게다가 어차피 나는 연애 감정이 없고 저쪽도 직접적으로 표현 안 하는 걸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내게 관심이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을 때는 어떻게 대하면 좋지? 눈치는 없지만,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사소한 행동도 의미가 있는가 싶어서 되돌아보게 되었다. 설마 이게 문정하가 말한 2단계 방법인가?

“오늘따라 자주 마주치는 것 같네. 내 착각이겠지?”

저 멀리 손을 흔들며 눈웃음을 짓는 문정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임해서가 움찔거렸다.

“착각이겠지?”

“손지언, 설마 너 나를 의심하는 거니?”

눈을 반짝이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 임해서를 보고 확신했다. 저놈이 범인이구나. 애초에 찔리는 게 없었으면 뭘 보냐는 얼굴로 당당하게 대응할 놈이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렇지만! 성장 패키지를 선물로 받았는걸!”

“뇌물이냐! 개인 정보 유출도 모자라서!”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드니 덩치 큰 임해서가 반항 없이 흔들렸다. 문정하는 무슨 돈이 많다고 이렇게 돈을 펑펑 써대는 거야?!

“무슨 일 있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다가온 거지. 그대로 지나칠 줄 알았던 문정하는 이번에는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사람답지 않게 천연덕스러운 모습이었다.

여우 같은 놈. 나는 네놈 속셈을 다 알고 있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니 문정하가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언이 친구 얼굴색이 이상해지고 있는데.”

“와씨! 힘들면 말을 하지!”

“수, 숨 막히는데 어떻게 말을 해……. 와, 죽다 살아났네!”

콜록거리며 숨을 몰아쉰 임해서는 문정하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도망가기 시작했… 뭐, 도망?

“야!!”

“이번 공강은 우리 좀 떨어져 있자!”

방금까지만 해도 와플 먹으러 가자고 얘기했으면서 이렇게 배신을 때리다니! 이를 갈며 임해서의 뒷모습을 노려보는데 문정하가 웃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얘기했다.

“공강이야? 우연이다. 나도 지금 공강인데.”

“…우연 맞아요?”

“그럼. 방금 우연히 지나치던 길인 걸.”

이미 임해서의 자백도 들었는데 뻔뻔하기는.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문정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비밀 조항도 있었는데.”

“형은 돈이 흘러넘쳐요? 갑부세요? 고작 이런 걸로 성장패키지를 사 준다고 하고.”

“이런 거라니. 나한테는 중요했어. 빠르고 정확한 정보잖아. 그리고 부담스러운 금액도 아니었고.”

“낭비벽 심한 사람은 싫은데요.”

그제야 힐끔 눈치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점수를 따기도 모자랄 판에 마이너스가 되고 있으니 초조하기도 하겠지. 그러게, 내가 쉽게 안 넘어갈 거라고 했지.

속으로 콧방귀를 뀌는데 문정하가 웃었다.

뭐야, 왜 저렇게 잘난 얼굴로 웃어? 뭘 잘했다고?

“내가 너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거 알고 있었구나.”

“…초반부터 그렇게 대놓고 다가왔잖아요.”

침착하자. 어제 개나소나와의 대화가 아니더라도 그동안의 문정하는 현실에서 친하게 지내기 위해 꾸준히 작업을 걸어오던 인간이었다. 새삼스레 의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태연하게 얘기하니 잠깐 내려다보던 문정하는 부정도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지언이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나랑 친하게 지내줄래?”

“지금도 충분히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난 아직 부족한데.”

잘난 얼굴이 훅 다가온다. 놀라서 뒤로 머리를 빼는데 문정하는 허리를 살짝 굽혀 눈높이를 맞추곤 빤히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 안에 당황한 얼굴의 내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오늘은 모자 안 썼네.”

“모자만 쓰고 다니는 놈 아닌데요.”

“모자 쓰는 거 좋아하는 것 같아서 선물하려고 했지.”

“제 생일 아닌데요?”

“생일에만 선물 주는 건 아니잖아.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지.”

그러면서 가방에 손을 넣는 모습이 불안했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취향의 심플한 검은색 캡 모자가 등장했다.

누가 봐도 유명한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있는. 그리고 흰색의 캡 모자도 꺼냈다.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마치 색만 다른 염소구더기와 개나소나의 커플 룩처럼.

“커플 모자!”

이게 부끄럽다고 지껄이던 사람과 동일인이 맞나. 머리 위로 모자가 푹 씌워진다. 그리고 문정하의 머리 위로도 흰색 캡 모자가 씌워진다.

모자를 써도 가릴 수 없는 미모가 눈웃음까지 더해지니 같은 남자라도 아주 눈 호강이 제대로였다.

이쯤 되면 궁금해졌다. 어디까지가 이놈의 여우짓이고 내가 어디까지 놀아나고 있는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던가. 문정하는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신박한 놈이었다.

“이런 건 지우 형이랑 하세요.”

“내가 왜 그 새… 놈이랑 해?”

새끼를 놈으로 서둘러 정정한 문정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나는 좋을 줄 아나? 하지만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아주 솔직히.

선물이 모자라서 그런가, 디자인이 취향이라서 그런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담스러워요.”

“나 원래 친한 동생한테 이렇게 선물도 주고 그래.”

“저 말고 다른 친한 동생도 있어요?”

“아니. 지언이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그럼 원래라는 단어를 왜 넣냐고.

“저는 친한 형한테 이런 선물 안 받아요.”

“나 말고 친한 형이 있어?”

“당연히 있…….”

생각해 보니 없었다. 현재 친하게 지내는 또래는 임해서가 유일하고 최근에 친해진 건 황보욱 정도. 다른 지인은 전멸이다. 고등학교 놈들도 졸업하고 가끔씩 만날 뿐이고. 하물며 친한 형? 있을 턱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나를 문정하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게 못마땅해서 시비조로 툭 내뱉었다.

“왜 웃어요? 형이나 나나 똑같은 처지인데!”

“자신 있게 대답하려다가 입 꾹 다무는 행동이 귀여워서 그랬어. 비웃으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형, 진짜 취향 독특한 거 알죠? 저 진짜 솔직하게 재수 없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도 귀엽다는 소리는 형한테 처음 들어요. 안과 가보세요.”

“그것도 똑같네. 나도 재수 없다는 소리 많이 듣는데.”

그게 뭐 자랑이라고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봐도 신경도 안 쓰는 얼굴이었다.

역시 문정하는 강적이었다. 개나소나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지만.

‘이런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이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말없이 빤히 올려다보자 문정하가 눈웃음을 지었다. 얼굴만 보면 영원한이등병이 인성질 하는 대단한 형님이라고 놀리는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말한다고 했던 건 뭔데?”

“네?”

“직접 만나면 얘기해 준다고 했잖아. 나한테 숨기고 있는 게 있다면서.”

화 안 낼게, 하고 덧붙이는 말에 순간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뻐끔거렸다.

물론 그에게 정체를 밝히려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나소나의 진심을 엿듣기 이전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다가갈 거라는 계획까지 들었는데 이제 와서 사실 내가 염소구더기라는 걸 밝히면……?

잠깐 고민했다.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없다. 희대의 쓰레기네. 받아줄 마음도 없으면서 가지고 놀다니!

“노코멘트!”

“응? 지언이 요즘 비밀이 많네. 그건 싫은데.”

“형도 저번에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나 따라 하는 거야?”

“전개가 왜 그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말했잖아요. 제가 이거 말하면 형 화낼 거라고.”

“말해 줘. 듣고 싶어.”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데는 선수였다.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눈앞의 사람을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다. 현실이든 게임에서든 계속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면, 언젠가는 내가 실수를 해서 들키겠지.

말할까. 입술이 떼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사실을 밝히고 연애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하면… 나랑은 다시는 안 볼 생각이겠지?’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머뭇거리는 내가 답답하지도 않은지 기다려 주던 문정하는 이내 강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굽혔던 허리를 폈다. 가깝던 눈높이가 멀어졌다.

“아니면 내가 직접 알아봐도 되고.”

“네?”

“성공하면 소원 들어주기.”

“왜 형 멋대로 그런 걸 정해요?!”

“강의 열심히 들어, 지언아!”

“형!”

누가 손지우 친구 아니랄까 봐! 본인 할 말만 하고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저 형 소원이라면 뻔하지! 사귀어 달라고 할 게 뻔하잖아!

이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뻔뻔하고 민망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 * *

―그래서 내기를 하기로 했어.

[길드] 염소구더기: ㅇㅇ

―후배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라는 게 뭘까? 내가 화낼 수도 있는 비밀 같은데.

[길드] 염소구더기: 몰?루

[길드원, 초팡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도와준다면서. 왜 그렇게 성의가 없어?

[길드] 염소구더기: 내가? 몰?루

[길드] 초팡: 안녕하세요! ㅇㅅㅇ 혼잣말하는 길마님!

[길드] 염소구더기: 안녕하세요 ㅎㅎ

[길드] 염소구더기: 개소랑 디X 하고 있었어요.

[길드] 초팡: 개소? 아하, 개나소나님!

[길드] 초팡: 안녕하세용!

[길드] 개나소나: ㅎㅇ

[길드] 염소구더기: 시험 끝나셨어요?

[길드] 초팡: ㅇㅅㅇ? 그럴 리가요?

[길드] 염소구더기: ㅎㅎㅎ 바람직하네요

[길드] 초팡: 잔팡이는 시험 공부한다고 당분간 못 들어온다고 해서 혼자 왔어요! 같이 놀아욧!

[길드] 초팡: 오메가 애기는 없네요ㅜㅠ

[길드] 염소구더기: 넹. 아마 집안일 하고 계실 것 같아요. 오늘 가족 생일상 준비해야 한다고 접속도 어려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길드] 초팡: 와, 집안일 잘하는 조신한 남자!

[길드] 초팡: 역시 우리 애기다! >///<

왜 얼굴을 붉히는 이모티콘을 쓰는 거지.

키보드에 올려뒀던 손가락이 멈칫거렸다. 결혼한 사람이라고 말을 해줘야 하나 싶으면서도 괜히 오버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단순한 장난이겠지.

개나소나도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라서 혼자 예민한가 싶어 그냥 웃고 넘겼다.

[길드] 염소구더기: ㅋㅋㅋㅋ

[길드] 염소구더기: 그럼 친추 할게요. 일반전 괜찮죠?

[길드] 초팡: 넹넹

[길드] 초팡: 그리고 말 놓으셔도 됩니당. 제가 더 어린 것 같은데 편하게 대하세요! ㅇㅅㅇ

[길드] 염소구더기: 땡큐. 그럼 편하게 할게.

[길드] 염소구더기: 딜러 할 거임?

[길드] 초팡: 초팡이도 게임 중에는 말 편하게 할게요!

[길드] 초팡: 길마님이랑 개나소나님 뭐 하실 건데용? 하는 거 보고 선택할게요!

[길드] 염소구더기: 난 거너 주로 하고 저놈은 전사 많이 함!

[길드] 초팡: 아하! 그럼 저 보조캐 할게요. 탱은 잘 못해서ㅠㅠ

[길드] 염소구더기: 그냥 조합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해도 됨ㅎ

[길드] 초팡: 네엥. 근데 아까 무슨 얘기 중이었는지 물어봐도 되나용?

이걸 얘기해도 되나. 어쨌든 개나소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함부로 얘기하기가 그랬다.

내가 대답이 없자 무시할 줄 알았던 개나소나는 의외로 길드 채팅으로 대답해 주었다. 영원한이등병을 대할 때와는 달리 비교적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길드] 개나소나: 연애 상담 중

[길드] 초팡: !! 저도 듣고 싶어요! 실례라도 듣고 싶어요!

[길드] 개나소나: ㅋㅋ

[길드] 개나소나: 귀찮은데

[길드] 초팡: 넹, 귀찮아도 해주세요! ㅇㅅㅇ!!

―요즘 애들은 할 말 다 하네.

영원한이등병도 그렇고 초팡도 그렇고. 하지만 그게 기분 나쁘지 않고 귀엽게만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손지우가 들었다면 지랄하지 말라며 뭐라고 했겠지만, 벌써 세대 차이가 나는 기분인걸.

[게임을 시작합니다.]

개나소나: 전사(근딜)

염소구더기: 거너(원딜)

초팡: 비행사(보조)

늅비에요: 물정령(보조)

콴택트렌즈: 무투가(탱커)

보조 캐릭터가 두 명이어서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탱커가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게임이 로딩되는 동안 개나소나에게 간략한 설명―너무 간략해서 알고 있는 나도 무슨 내용인가 싶을 정도였다―을 들은 초팡이 알아들었다는 듯 바로 얘기했다.

[길드] 초팡: 개소님은 직진공이네요!

[길드] 염소구더기: 직진공? 그게 뭐임?

[길드] 초팡: 알면 다쳐! 어쨌든 상대 후배님은 딱히 개소님한테 관심 없으신 것 같은데. ㅇㅅㅇ 눈치 없이 직진하고 있는 거 아니죠? 그런 거 진짜 매력 없는뎅!

[길드] 개나소나: 연락 잠깐 끊었을 때 신경 쓰는 것 같기는 했는데.

[길드] 초팡: 연락 잘하던 놈이 갑자기 연락이 줄면 죽었나, 살았나 정도는 신경 쓰지 않을까요? ㅎ

[길드] 개나소나: …….

입을 턱 막았다. 와, 개나소나를 말발로 입 다물게 한 건 쟤가 처음이야!

약간 경이로움까지 느껴졌다. 단순히 흥미진진하게 듣고 끝낼 줄 알았던 초팡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개나소나에게 답변을 해 주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그럴듯한 내용들이라서 더욱 놀라웠다.

[길드] 초팡: 요즘 간 보듯 찔러보는 남자 매력 없어요. 그냥 좋으면 좋다고 확실히 표현하고 상대가 질색하면 깔끔하게 물러나고, 머뭇거리는 애매한 태도면 더 직진해 봐요.

[길드] 개나소나: 상대가 낯가림이 많은데. 지금도 겨우 친해진 거라서 더 다가가면 부담스러워할 듯.

[길드] 초팡: 아니ㅎ 손잡고 싶으면 그만큼 다가가야 하고 키스를 갈기고 싶으면 그만큼 들이대야죵.

[길드] 초팡: >_< 그런 노력도 없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잡아용!

[길드] 염소구더기: 초팡이 생각보다 터프하네ㄷㄷ

[길드] 초팡: 초팡이는 수줍음 많은 아이에용. 하지만 고구마 로맨스물은 시렁!

[길드] 초팡: 그리고 집착광공 좋아해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정공이 되세요, 개소님!

[길드] 개나소나: ㅇㅇ 내숭공임.

[길드] 초팡: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초팡: 뭘 좀 아는 분이시네. 꼭 이뤄지길 바랍니다, 그 사랑♡

[길드] 개나소나: ㅋㅋㅋ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집착광공이니 다정공이니 저게 다 무슨 소리야. 요즘 신세대 용어인 건가.

저격으로 적군을 노리면서 둘의 채팅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둘은 바쁘게 채팅을 치면서도 게임을 무리 없이 잘하고 있었다. 정작 제대로 집중을 못하는 건 나였고.

[팀] 콴택트렌즈: 거너 왜 이렇게 허공에 저격함?

[팀] 콴택트렌즈: 수전증 있음?

[팀] 초팡: >_< 네가 뭔 상관이야, ♡♡♡아.

[길드] 염소구더기: 저 때문에 욕 안 해도 되는데;

[길드] 초팡: 앗. 욕 아니에용!

[길드] 초팡: 똥

[길드] 초팡: 구멍

[길드] 초팡: 이라고 했어요ㅋㅋㅋㅋ 이것도 성희롱이라고 하트로 표기되는데 욕 같죠? 희희.

[개나소나 님이 초팡 님에게 박수를 칩니다.]

[길드] 초팡: 팡이 칭찬 받았당!

욕하는 줄 알고 식겁했네.

정작 저 둘은 여유롭고 나만 놀란 건가. 초팡은 마냥 귀여운 학생인 줄 알았는데, 은근히 캐릭터가 있구나.

어쩐지 워너비 길드에 들어온 유저들 중에서 평범한 인물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라서 재미있기는 하지만.

[길드] 초팡: 어쨌든 개소님.

[길드] 초팡: 좋아하는 사람 쟁취하려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옆에 있고 다정하게 대해주면 상대가 알아주겠지, 하고 기다리면 안 됨. ㅇㅋ?

[초팡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초팡 님이 궁극기를 준비 중입니다.]

비행사 캐릭터의 초팡이 내게 다가오며 궁극기를 썼다. 이내 나를 낚아채 허공을 높이 날아올랐다. 저 멀리 적군이 보였다.

[길드] 초팡: 길마님.

[길드] 초팡: 건물 꼭대기에 떨어뜨려 줄 테니까 궁으로 적군 노려요.

[길드] 초팡: 꼭대기에서 오래 못 있음. 건물 공격 모드 되면 공격받으니까 그 전에 ㄱ

게임을 하면 말을 편하게 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짧은 시간에 정보를 넘겨야 해 평소와는 다른 말투의 초팡이가 제법 낯설었다.

정확히 건물 꼭대기에 나를 떨어트린 초팡은 그대로 추락했다. 일부러 적군의 눈에 띄는 곳에 추락한 캐릭터는 바로 도망가지 않았고 적군이 가까이 올 때까지 일부러 뜸을 들였다. 스스로 미끼 역할을 자초한 것이었다.

‘듬직하네.’

궁극기를 시전하여 초팡을 노리고 다가오는 적을 노렸다. 거너가 건물 위에 있는 건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비행사의 궁극기로 설마 거너를 여기 위에 올려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이 방법은 기습이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한다.

다음부터는 경계를 하니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테니 가능한 한 지금 많이 죽여야 했다.

―지금 가는 중이니까 최대한 붙잡고 있어.

문정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핑을 찍으며 남은 아군들과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거너의 역할은 욕심내지 말고 적군의 발목을 묶는 것.

한 명을 확실히 죽이자는 욕심에 남은 적군이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주어서는 안 된다.

초팡을 노리는 적에게 탄환이 붉은 섬광을 가로지르며 쏘아졌다. 순식간에 HP가 닳는 모습이 보인다. 두 번 더 맞히면 죽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뒤따라오는 적군들이 먼저였다. 도망치기 전에 선수 쳐야지.

등을 돌리는 적군들에게 탄환을 한 방씩 박았다.

―도착.

초팡의 뒤로 개나소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동 속도를 올리고 온 모양인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아군들이 초팡이에게 합류해 적군을 공격했다.

[개나소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법사 맞힐 수 있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니맵을 살폈다. 제일 멀리 돌아가는 적군 마법사 캐릭터가 모서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닿으려나. 궁극기를 사용한 채 방향을 전환했다. 아슬아슬하지만 닿았다.

[염소구더기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전체] 다욧트는낼부터: 악!!

[전체] 다욧트는낼부터: ♡♡ 거너♡♡ 도대체 어디서 쏘고 ♡♡이야

하트가 도대체 몇 개지. 부담스러운 애정 공세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우리 염소는 사랑도 많이 받고 좋겠네.

이 새끼는 괜찮냐고 위로를 해줄 생각도 없나 보네. 위로해 주는 개나소나가 더 소름 끼치기는 했지만.

채팅으로 조용히 하라고 답하고는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거너 캐릭터가 검은 제복을 펄럭이며 멋있게 내려왔다. 그 모습에 새삼스레 울컥했다.

내 새끼지만, 너무 멋있어!

―역시 검정보다 내 옷이 더 멋있네.

[길드] 염소구더기: 눈은 장식이세요? 검정이 훨씬 더 멋있거든. ㅡㅡ

―흰색이 더 신성해 보이지. 눈에 띄고.

[길드] 염소구더기: 거너로 눈에 띄는 게 미친 짓이지;

[길드] 초팡: ㅇㅅㅇ

[길드] 초팡: 두 분 실친이세용? 친해 보인당

[길드] 염소구더기: ㄴㄴㄴ

[길드] 개나소나: ㄴ

[길드] 초팡: 친하네요! 개소님 나중에 차이면 길마님이랑 잘해보세요! 두 분 성격 잘 어울리실 듯ㅎ

[길드] 개나소나: 어디서 그런 막말을……?

[길드] 염소구더기: ㅡㅡ

이제는 태클을 걸 힘도 없었다. 쟤는 진짜 막말로 내가 염소구더기인 걸 알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거지? 저런 태도를 보면 확실히 아직 모르는 것 같으니 안심되긴 하지만, 안타까울 지경이기도 하고.

[길드] 초팡: 사랑 싸움은 나중에 하구

[길드] 초팡: 게임에 집중해요!

앞으로 직진하는 초팡의 모습에 식겁했다. 누가 보면 메인 탱커라 착각할 정도로 저돌적인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적군을 딸 수 있을 만한 딜러 캐릭터도 아니면서 뭘 저렇게 저돌적으로 가는 거지? 의아해하면서도 착실히 초팡의 뒤를 따라갔다.

거너는 궁극기가 채워지는 동안 뒤로 돌아오는 적군을 경계하고 있었고, 개나소나는 초팡을 도와 적군 타워를 부수러 가고 있었다.

[적군의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적군의 방어력이 감소됩니다.]

[팀] 늅비에요: 님들

[팀] 늅비에요: 쉬는 시간 없음?? ㄷㄷ 체력 딸림

[팀] 초팡: ㅇㅂㅇ 돌격! 돌격하라!!

[팀] 초팡: 적군에게 우리 위치를 마구마구 알려주어라!! ㅇㅂㅇ

[팀] 콴택트렌즈: 힘들다고 도른자야;

[팀] 초팡: 어쩔티비

[팀] 콴택트렌즈: 요즘 초딩들 혈압 오르게 하네

[팀] 초팡: 어쩔냉장고~ 어쩔에어컨~

[팀] 개나소나: 애들은 뛰어놀면서 커야 함

[팀] 초팡: 마자요~! 초팡이 애기야!

[귓말] 염소구더기: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챙겼다고?

낯선 개나소나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귓속말을 보내니 채팅 대신에 디X로 대답해 주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연애 상담 보답?

[귓말] 염소구더기: ㅈ1ㄹ

―내가 좋아하는 애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채팅을 치려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도대체 어디가……?

‘혈압 오르게 하는 점이 닮았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건 아니겠지.’

찝찝했지만 이유를 아는 게 더 찝찝할 것 같아서 묻지는 않았다.

아군은 초팡의 공격적인 리드에 따라 계속 한타를 벌였다. 적군마저 제발 좀 쉬면서 하자고 사정을 해도 건물을 부수고 리스폰 되는 적군을 기다렸다가 죽이고.

[팀] 초팡: 낄낄낄.

그러고는 해맑게 웃는 모습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조금 무섭기는 해도 저렇게 돌격하고 결과도 좋다. 비행사가 암살 캐릭터도 아닌데 궁극기로 공격하기보다는 시야를 밝혀주어 도움이 되었다. 또는 궁극기가 준비된 아군을 강제로 적군의 뒤쪽으로 떨궈주기도 했다.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적군이 준비하기도 전에 궁극기를 사용하면 아군이 유리하기는 하다. 이렇게 보면 머리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게임이 끝나고 다음 게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화장실이 급해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급하게 채팅을 쳤다.

생각보다 개나소나가 초팡에게 호의적이니 심심하지 않게 잘 챙겨주겠지. 어쨌든 초팡, 잔팡이는 신규 길드원이니까 잘 챙겨달라는 귓속말도 남겨 놓았으니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어련히 할 터였다.

화장실에 다녀오자마자 도착해 있는 귓속말은 당연히 개나소나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발신자는 초팡.

[귓말] 초팡: 길마님 똑똑

[귓말] 초팡: 저번에 우리 길드전 할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귓말] 초팡: 저도 하고 싶은데 시간대 정하신 거 있어요???

처음에 길드 가입을 권유했을 때를 떠올리며 묻는 말인가.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었지만, 영원한이등병이 주로 늦은 오후에 접속이 가능한 걸 떠올리며 대답했다.

[귓말] 염소구더기: 중학생이 있어서 저녁 시간대에 하지 않을까 싶음.

[귓말] 초팡: ㅇㅎ 길마님이랑 오메가 애기님도 주로 저녁 시간대가 괜찮은 거죠? 저야 좋긴 하죠!

[귓말] 염소구더기: ㅇㅇ 나도 대학생이라서 오전에는 강의가 있으니까 저녁이 좋고 오메가님도 저녁 시간대가 좋을 듯.

[귓말] 초팡: 오전에는 다들 바쁘시네~ 알겠어용.

[귓말] 초팡: 대학생이셨구나ㅎ 고딩일 줄 알았는데

[귓말] 초팡: 몇 학년이에요?

[귓말] 염소구더기: 1학년인데 왜??

[귓말] 초팡: 그냥!! 초팡이는 호기심 많음!

이런 쓸데없는 걸 궁금해할 인물은 아닌 것 같아서 이상했다. 처음엔 오메가원에게만 관심을 보여서 나에 대해 물어보는 게 좀 수상했지만 대놓고 수상하다고 말할 정도로 친해진 건 아니라서 입을 다물었다.

신규 길드원이니까 소중하게 대해야지. 무슨 뜻이 있어도 뭐 어때. 나이 좀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다. 정확히는 개나소나는 당연히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생각이!

[길드] 초팡: 다음 판에 제가 전사해도 되나요!? 저 전사도 연습해 보고 싶은데ㅎ

[길드] 개나소나: ㅇㅇ~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던 개나소나의 쿨한 반응에 얼떨떨했다.

이전에 내가 여자든 말든 재수 없게 행동했던 걸 보면 성별 때문에 차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잘해주는 거지?

정상적인 반응이었지만, 지금 반응하는 이가 개나소나였으니까 충분히 수상할 수밖에. 뭐 뇌물이라도 받았나?

물론 그때는 뇌물 그 이상의 비리가 오고 갔을 줄은 알 길이 없었다.

그 이후로의 개나소나의 행방은 평소와 같았다. 굳이 달라진 걸 따지자면 주변 길드원들의 행동이었다.

평소처럼 개나소나와 디X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접속한 길드원들이 뜬금없이 귓속말을 걸어왔다.

[귓말] 영원한이등병: 막내 길마님!!

[귓말] 염소구더기: ?

[귓말] 영원한이등병: 나중에 저희 정모 하실?? 전 서울인데 가까우면 모여요! 저 맛난 것도 좀 사주고!

[귓말] 염소구더기: 거지인데ㅎ

[귓말] 영원한이등병: 싼 거 먹을게요ㅜ 멀어요??

[귓말] 염소구더기: ㄴㄴ 저도 서울임

길드 채팅으로 해도 될 말을 굳이 귓속말로 하는 것도 그렇고, 평소에 하지 않는 귓속말을 유독 개나소나와 같이 있는 타이밍에 하는 것도…….

[귓말] 오메가원: 똑똑똑

[귓말] 염소구더기: 네?

[귓말] 오메가원: 뭐함?

[귓말] 염소구더기: 더쎄요ㅎㅎ

[귓말] 오메가원: 그건 그렇긴 한데

[귓말] 오메가원: 어디서? 피방?

[귓말] 염소구더기: 집에서 노트북으로 하는 중입니다.

[귓말] 오메가원: ㅇㅎ 그래도 컨트롤 좋네

[귓말] 염소구더기: 칭찬은 줍줍

그리고 묘하게 쓸데없는 개인 정보를 묻는다는 것.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지만, 초팡도 그랬고 연달아서 이러는 걸 보면 착각은 아닌 것 같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오는 영원한이등병의 귓속말을 바라보았다.

[귓말] 영원한이등병: 정모 때 뭐 먹으러 갈래요!? 좋아하는 음식 뭐에요? 저는 고기!!

[귓말] 염소구더기: 난 날 거 좋아함요

[귓말] 영원한이등병: 날 거? 회나 초밥??

[귓말] 염소구더기: ㅇㅇ넹 환장함 근데 북적거리는 곳은 싫어해서 집에서 보통 배달시켜 먹음요

[귓말] 염소구더기: 정모 때는 그냥 고기ㄱㄱ

그래서 일부러 밑밥을 깔아봤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우려를 하면서도

…그리고 그 의심은 다음 날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이게 뭔데요?”

“오늘 공강이라고 하길래 같이 점심 먹으려고 사왔어. 맛집이래.”

같이 점심 먹자고 하길래 밖에서 먹는 건 줄 알고 옷을 다 갈아입고 준비했는데, 정작 문정하는 포장 봉투를 들고 집 앞까지 찾아왔다. 칭찬을 바라는 듯한 얼굴로 들고 있는 봉투에는 귀여운 초밥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저 날 거 비려서 못 먹어요.”

“…진짜?”

“네. 육회 같은 것도 못 먹고 특히 해산물 쪽은 죄송하지만 정말 싫어해요.”

초밥 봉투를 자신 있게 들고 있던 손이 힘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나.

“지우 형이 저 초밥 좋아한다고 했어요?”

“응? 아아, 얼핏 듣기로는 그렇게 들었던 것 같아서. 내가 착각했나 보다. 그럼 이건 놔두고 다른 거 시켜 먹을래?”

“그냥 편하게 밖에서 먹어요. 안에서 먹으면 쓰레기 처리하는 것도 귀찮은데.”

“쓰레기는 내가 나가면서 버릴게. 밖에 나가면 사람도 많아서 불편하잖아.”

“저 사람 많은 곳 좋아해요.”

응? 이건 너무 개소리였나.

문정하가 웃는 미간 사이로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의 찌푸림을 보였다. 하긴 사회성도 없고 낯가림도 많아서 모자만 쓰고 다니는 놈이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할 리가.

이건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모른 척 헛기침을 하며 일단 들어오라고 안내하며 좁은 자취방 바닥에 문정하를 앉히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임해서한테 또 무슨 뇌물 주고 잘못된 정보라도 얻은 거예요?”

“임해서는 아닌데, 뭐… 좀 실패된 정보이긴 하네.”

“정보상이 잘못했네요.”

문정하는 지금 나와 염소구더기가 동일인인지 의심하고 있다. 왜?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게 있었나?

‘아니, 하지만 동일인이라고 의심하기에는 좋아하는 음식이 맞는지 확인도 안 하고 사 온 게 이상해. 이건 거의 확신에 가까운 행동이잖아.’

내부의 고발인가, 아니면 문정하의 뛰어난 추리력인가.

서로가 웃고 있었지만, 가슴이 쫄깃해졌다. 찔리는 게 더 많아서 그럴지도 몰랐다. 나는 숨기는 이유가 있지만 문정하가 대놓고 묻지 않는 이유는 본인이 개나소나라는 걸 밝히기 싫어서 그런 걸까.

“일단 배고프니까 뭐 배달시킬까요? 햄버거 괜찮으세요?”

“응. 난 괜찮아. 내가 사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 초밥도 형이 사 온 거잖아요. 나중에 돈 없을 때 알아서 사달라고 할 테니까 오늘은 그냥 드세요.”

넘치는 박력에 문정하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지언이 너 터프하다.”

“남자잖아요.”

“외모는 귀여운데.”

“저 배에 복근도 있는데요?”

배달 주문을 하고 그저 귀엽다는 듯 웃는 문정하의 모습이 낯간지러워서 일부러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래도 수능 끝나고는 열심히 몸을 만든 적도 있었는데! 물론 지금은 복근 따위는 전혀 없지만.

그때였다. 문정하의 커다란 손이 배 위에 올려진 것은. 무게감이 없는 가벼운 터치였지만 기습적인 행동에 순간 움찔거렸다.

“그래? 없을 것 같은데.”

“왜요? 매일 밥 먹고 게임만 해서요?”

“그건 아니지만, 귀여운 얼굴로 복근 있는 몸이 상상이 어려워서. 있는 것도 매력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안 보여줘요. 그러는 형은 있어요? 왜 남의 복근에 이렇게 관심을 가져요.”

민망해서 툭툭 내뱉으며 손을 치워냈다.

이제 안심이다 싶어서 한숨 돌리는데, 문정하가 내 손을 잡아챈다. 그리고 훅 당겨져 이번에는 내 손이 문정하의 배 위에 올려졌다. 옷 위로도 제법 탄탄한 몸이 만져졌다.

“글쎄, 어떨 것 같아?”

이 자식이 미쳤나.

거울로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사심이 가득한 접촉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더욱 의식이 된다.

가만 생각하니 지금 방 안에 우리 둘뿐인데!

‘남자가 사는 집은 함부로 가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물론 집주인이 나고 둘 다 남자이기는 하지만!

“관심 없어요. 손 떼요. 저 화장실 갔다가 손 안 씻었어요.”

“손 씻겨줄까?”

“제가 아기도 아니고, 미치셨어요?”

“아기가 욕을 못 하기는 하지. 이렇게 깍지도 못 낄 테고.”

와, 와, 와!! 세상 사람들 이놈 하는 짓 좀 보세요!! 천천히 다정하게 다가와서 꼬실 거라던 놈이 대놓고 여우짓 해요!!

속으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욕을 하며 능청스럽게 깍지를 낀 손을 바라보았다. 커다랗고 남자다운 손이었다. 제 손을 가볍게 감싸는 행동이 징그럽다는 생각보다는 미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가만히 있는 내 행동이 의아했던 모양인지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문정하가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지언아, 기분 안 나빠?”

“기분 나쁘다고 하면 빼줄 거예요?”

“응.”

“앞으로 이런 스킨십은 일절 하지 않을 거고?”

“응.”

단호하고 심플한 대답이었다.

어떡할까. 더 이상 질질 끌지 말고 잘라낼까.

남자도 가능하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행동을 하는데, 이걸 모르는 사람이 멍청한 거다. 사실 그것만 알았으면 나는 멍청이였겠지만, 개나소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었으니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잘라내면 더 이상 이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기는 힘들겠지? 지금처럼 게임만 하면 괜찮기는 하지만.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게 맞나? 스스로 되물으면서.

“형, 저 좋아하죠?”

문정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답 없이 깍지를 끼고 있던 내 손을 본인의 입술 가까이에 가져간다. 손톱 끝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말 없는 고백이었다.

“싫어?”

태연하게 묻지만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걸 보니 문정하도 사람이긴 한가 보다. 떨리는 걸까.

“솔직히 처음에는 아는 척하는 것도 귀찮고 싫었는데, 지금은 편해지기는 했어요. 하지만 형이랑 똑같은 마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겠지. 내가 이렇게 하는 건 불편해?”

“진짜 솔직하게… 딱히? 불편하다는 느낌은 없긴 한데.”

“다행이네. 연상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제가 언제 연상은 취향이 아니라고 했던가요?”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한 적이 있었다. 문정하가 아닌 개나소나에게.

입을 다문 내 얼굴을 보던 문정하는 미소 지은 채 잠깐의 침묵 후 대답했다.

“아니. 얘기한 적 없어.”

아니, 저 얼굴이 과연 부정이 맞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형. 저번에 말한 소원 어떻게 쓸 거예요?”

“그건 왜 물어?”

“곧 쓰려고 할 것 같아서요.”

눈치챈 것 같은데.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는 건가.

괜히 그에게 휘둘리는 느낌이 불편해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빼냈다. 문정하는 멀어져 가는 내 손을 아쉬운 눈초리로 보다 중얼거렸다.

“…스킨십 피하지 않기?”

아니, 여기서 더 무슨 짓을 하려고?

* * *

오늘은 염소구더기가 사전에 늦는다고 미리 얘기했던 날이었다.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각자 접속하는 시간대는 늘 비슷하기 때문에 접속을 하자 길드원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개소 형님 하이!!

[길드] 오메가원: 굿모륑

[길드] 도리두리: ㅎㅇ~

[길드] 초팡: ㅇㅅㅇ 개소님 안녕하세요!!

접속을 하면 이 시간대에는 항상 있는 고정 멤버들.

모타리는 이벤트전 이후로는 과제 때문에 정기적인 방문은 어려울 거라 사전에 얘기했었다. 초팡의 말에 의하면 잔팡은 주로 본캐로 활동하기 때문에 접속이 뜸할 거라고 했고.

[길드] 개나소나: ㅎㅇ

[길드] 초팡: 개소님, 어떻게 됐어요? 확인했어용?

[길드] 영원한이등병: ㄹㅇ 우리가 엄청 열심히 도와줬는데ㅋㅋㅋㅋㅋ 중간 보고는 좀 해주시죠!

피시방에 의자에 기댄 문정하는 길드원들의 성화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잘못된 정보에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먼저 말을 꺼내줘서 잘됐네.

[길드] 개나소나: 잘못된 정보 전달을 한 놈은 약속했던 아이템 지급 무효

[길드] 영원한이등병: 정보 수집도 제대로 못하고ㅋㅋㅋㅋㅋ 오메가 형님 아니에요?

[길드] 오메가원: !?

[길드] 개나소나: 너임

[길드] 영원한이등병: 에엥?! 저는 왜요! 제가 많이 알려줬는데! 서울에 살고 좋아하는 음식도 알아냈잖아요!

[길드] 개나소나: 해산물 비려서 제일 싫어한다는데?

[길드] 영원한이등병: (((((0_0;;)

[길드] 초팡: 그냥 개소님이 생각하는 후배님이랑 길마님이 동일인이 아닌 거 아니에용? ㅇㅅㅇ

[길드] 영원한이등병: 옳소! 개소 형님이 완전히 헛다리 짚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초팡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영원한이등병이 동조했다. 태세 전환이 참 빠르기도 하다. 그래도 하는 꼴이 마냥 밉지는 않아서 미소를 지었다.

[길드] 개나소나: 그럴 수도 있고

[길드] 영원한이등병: 너무 쿨하게 인정해서 무서운데ㄷㄷ

[길드] 초팡: 후배님도 더쎄 한다고 했죠? 원거리 딜러하고 남자고

[길드] 개나소나: ㅇㅇ

[길드] 초팡: 대학교 1학년, 서울. 나이랑 지역 동일하고 ㅇㅅㅇ 흠. 초팡 추리 모드 ON!

[길드] 오메가원: ? 어차피 심증만 있을 뿐임

[길드] 초팡: 그렇지만 보통 형 동생 사이로 친하게 지낼 시도는 해보겠다, 라고 하면 누구나 의아해하지 않음? 너님 게이였음? 하고 바로 물어볼 듯

[길드] 영원한이등병: ㅇ_ㅇ 확실히 저도 개소 형님 짝사랑 상대가 남자라는 사실에 많이 놀라긴 했쥬…….

[길드] 오메가원: Me는 편견 없음.

문정하는 염소구더기와의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흘렸던 대화를 기억해 냈다.

―도와준다더니. 어쨌든 대놓고 다가가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형 동생 사이로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했는데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거든.

그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나갔던 염소구더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심 궁금해서 말한 거였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어서 솔직히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제대로 못 들은 건지 아무 관심도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초팡의 말대로 이상하긴 했지.

[길드] 영원한이등병: 개소 형님은 막내 길마님이 후배님이었으면 좋겠죠? 그럼 더 친해질 수도 있으니까!

[길드] 개나소나: ㄴㄴ

[길드] 오메가원: ㄴ

[길드] 초팡: 그건 아닐 듯! ㅋㅋㅋㅋㅋ 지금 보니까 현실에서는 완전 내숭공 모드인 것 같은데

[길드] 초팡: 게임에서 실제 성격 들키는 거잖아요ㅎ

[길드] 오메가원: ㅇㅇ 우리 첫인상을 기억해봐, 이등병 형제. 우리 함께 개나소나를 욕했던 추억의 나날들을.

[길드] 영원한이등병: 아하…….

[길드] 개나소나: ^^?

어지간히도 욕을 했었나 보군.

문정하는 그럴 만도 하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저들이 욕을 했던 건 상관없지만, 염소구더기한테 했던 짓들을 떠올리면 아찔하니까.

문정하는 내심 염소구더기가 손지언이 아니기를 바랐다. 정말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서.

동일인이라면 이야기 소재도 늘고 더 친해질 수 있을 것도 같긴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개나소나도 제가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재수 없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기 때문에 턱을 쓰다듬었다.

‘임해서한테 물어보면 바로 알 것 같긴 하지만.’

묘하게 그 부분으로 대화를 넘어가려고 하면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지. 뭔가 아는 눈치인 것 같기는 한데. 손지우는 전혀 도움이 될 만한 놈이 아니고…….

문정하가 화면에 있는 전사 캐릭터를 노려보고 있는데 옆자리 좌석이 뒤로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자리가 없어서 누군가 옆에 앉으려는 모양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익숙한 얼굴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아…….”

요란한 분홍색 머리였다.

하지만 그게 어울리는 손지언의 과 동기.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분홍 머리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먼저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십니까, 문정하 선배님! 선배님도 여기에 계신 줄은 몰랐네요.”

“알려준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

“아…….”

이름 모를 분홍 머리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손지언이랑 같이 만났을 때와는 다른 태도에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때는 손지언이 같이 있어서 예의상 친절하게 대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옆에 자료를 들고 온 걸 보니 과제 때문에 잠깐 방문한 듯했다. 분홍 머리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이제 와서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이 뻘쭘했는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문정하의 모니터를 힐끔 쳐다봤다.

“왜?”

“아, 죄송해요. 쳐다봐서!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 너도 더쎄 한다면서. 과제 급한 거 아니면 같이 할래?”

망설이는 눈치였다. 과제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게임은 하고 싶은 눈치. 잠깐 고민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그럼 저 금방 들어갈게요. 일반전 하실 거죠?”

“응. 들어오면 말해. 파티 초대해 줄게.”

“어차피 저 들어가면 길드에 뜨는…….”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분홍 머리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실수했다는 얼굴이었다.

문정하는 관심 밖의 인물인 그가 했던 말을 열심히 떠올렸다.

탱커, 레벨 30, 친구에게 빌린 아이디, 같은 학교 후배…….

그때는 우스갯소리로 말한 거였는데. 그리고 저 표정을 보아하니 문정하가 개나소나라는 걸 아는 눈치인 것 같았다.

“그래. 요즘 과제 한다더니 접속 뜸해질 거라더니 사실이었네.”

모타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말하니 분홍 머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아주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익숙하게 더 세이렌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아이디를 입력했다.

접속된 유저의 이름은 예상했던 대로 ‘모타리’.

[길드원, 모타리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라하~!! 신입님 오랜만!!

[길드] 오메가원: ㅎㅇㅎㅇ

[길드] 초팡: 안녕하세용!!

[길드] 도리두리: ㅎㅇ

개나소나에 이어 오랜만에 접속하는 모타리도 격하게 환영해 주는 길드원들을 보며 문정하가 말했다.

“아이디 빌려준 거 지언이야?”

“아니요.”

“거짓말하는 게 티 나는데. 저번에 빌린 거라면서.”

“손지언한테 무슨 변명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다른 친구한테 빌린 거예요.”

사실인지, 얘기하는 얼굴은 차분했다.

거짓말을 잘하는 스타일로 보이지는 않으니 진심인 것 같은데, 그럼 이것도 손지언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문정하는 어디까지가 거짓말이고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분홍 머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묘하게 회피하는 시선이 그가 다른 정보를 더 숨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번에 염소구더기랑 같이 게임 했었지?”

염소구더기는 분명히 모타리가 알고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며, 같이 피시방에 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제복 코스튬을 극악의 확률을 뚫고 받았던 그날이었다.

분홍 머리도 기억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아는 사람이야?”

돌려서 말하는 건 질색이다. 문정하의 직접적인 질문에 분홍 머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말하기 곤란하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손지언이 선배님한테 아이디 말해주지 말라고 했는데, 이미 들켰으니까 더 이상 다른 건 묻지 말아 주세요.”

“왜 나한테 말해주지 말라고 했는데?”

“후배 게임 아이템 괜찮은 거 있으면 졸렬하게 뺏는 걸로 유명하신 분이라고 하던데요.”

“…….”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문정하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문정하를 보며 분홍 머리는 묻지도 않은 추가 정보를 술술 내뱉었다. 문정하를 엿 먹이려는 것보다는 손지언이 엿 먹길 바라는 듯 고자질하는 느낌이었다.

“취미로 해킹도 한다고 조심하라고 하더라고요.”

분명히 잘해주고 내숭도 잘 떨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문정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숭을 떨어도 똑같은 쓰레기였나?’

어쩌면 게임보다 더 쓰레기 같기도 한 제 이미지에 문정하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문정하의 표정에 신나서 말하던 분홍 머리가 그제야 아차 했는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 음… 근데 아마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아마 저한테 숨길 게 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앞으로 이미지 관리를 좀 더 해야겠네.”

“누구한테요?”

“지언이 말고 누가 있겠어.”

“…방금 제가 했던 말들도 손지언한테 들은 건데요.”

그런 놈한테 이미지 관리를 한다고? 이상하다는 얼굴을 한 분홍 머리에게 친절히 설명해 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문정하는 고개를 정면에 고정하곤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그 숨기는 거라는 게 지언이가 염소구더기라는 사실이야?”

“…….”

“딸꾹.”

긍정의 딸꾹질이었다.

“하.”

문정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심각해 보여서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지금 다른 사람을 걱정해 줄 처지가 아니었으니깐.

‘미쳤네, 문정하. 미친 새끼야.’

어떻게 시비를 걸 사람이 없어서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손지언한테 시비를 건 거야!

문정하는 과거를 회상했다. 염소구더기와 첫 만남을. 그런데 첫 만남뿐만 아니라 돌이키는 과정들이 험난하기 짝이 없다.

문정하는 해탈한 웃음을 지었다.

“X발.”

“헉!”

옆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옆의 놈에게 한 욕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멍청해서 한 욕이었다.

또 뭐가 있지? 일단 첫인상 최악이었고, 시비도 먼저 걸었고, 게임 실력 무시했고… 그나마 최근에는 조금 친해지기는 했지만.

‘아.’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바로 본인에게 직접 연애 상담을 해버린 것.

고개를 숙인 문정하의 목 주변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설마 그런 우연이 있겠어, 하고 반신반의했었다. 그런데 진짜였다니.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비밀이 이거였나.’

그 뜻은 손지언은 이미 문정하가 개나소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옆의 분홍 머리 입을 단속시킨 거였을 테고.

일단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켰다.

살면서 이렇게 당혹스러운 건 난생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진 것도 처음. 그런 호감 가진 상대에게 쓰레기 짓을 한 것도 처음. 이래서 평소 행실이 착해야 한다는 거구나.

이제까지 스스로의 행실에 대해 후회를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오늘은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궁금해지는 진실. 손지언은 무슨 생각일까, 그 고백을 들으면서. 고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철벽으로 대하지는 않고 오히려 의식하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밀어내지도 않았고.

“어떻게 할까.”

“뭐, 뭐를 말입니까?”

“내가 지금 지언이를 짝사랑하는 중인데, 그걸 본인도 알고 있거든. 하지만 그 성격에 피하지 않는 걸 보면 크게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네?”

“너 이름이 뭐였지?”

“황보욱입니다, 선배님. 욱이 이름이고요.”

설마 이름도 기억 못 할 줄은 몰랐는지 황보욱은 해탈한 표정을 지으며 얼떨떨하게 이름을 말해주었다.

하긴 이름이 뭐가 대수이겠는가. 지금 친하지도 않은 선배의 짝사랑 상대가 같은 과 남자 동기라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버렸는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손지언은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했던 거에 반해 문정하는 너무 대수롭지도 않은 표징이었다.

황보욱은 이 사람은 정말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구나, 라고 부럽다는 생각을 하다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느리게 깜빡였다.

“그래, 우기우기.”

황보욱은 저도 모르게 나오려던 욕을 꾹 참았다.

이름은 기억 못 해도 쓸데없는 건 잘 기억한다. 손지언 같은 걸 왜 좋아하나 싶었는데 둘이 좀 닮았을지도.

하지만 선배였기에 황보욱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선배님!”

“요즘 과제 한다고 바쁘지? 조금 있으면 시험도 있으니까 게임 할 시간은 전혀 없겠네.”

문정하의 시선이 다시 한번 황보욱이 가지고 있는 소지품을 향했다.

뇌물이라는 것도 받는 사람이 솔깃해야 쓸모가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더 세이렌의 아이템을 주어 제 편으로 만들었지만, 눈앞의 이에게는 큰 쓸모가 없어 보였다. 게임에 미친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과제보다는 게임에 더 집중하고 있었겠지.

“간호과에 아는 사람 있는데, 족보라도 구해줄까?”

황보욱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교수 중에서는 간혹 과거 시험 문제를 그대로, 또는 약간만 변형해서 출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뜩이나 범위도 넓고 과목도 많아서 공부하기 힘들었는데, 족보가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

학점 관리를 하느라 동아리에 들지 않았던 황보욱이 유일하게 아쉬웠던 것이 족보를 구해 줄 선배와의 인맥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 족보를 구해 준다고?

“저 진짜 지금 선배님 발등이라도 핥으라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과도하게 반짝이는 눈빛에 문정하가 가볍게 웃었다.

“그런 취미는 없고.”

문정하는 게임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영원한이등병보다는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물론 이런 생각을 한 걸 알면 영원한이등병이 또 시끌벅적하게 항의를 하겠지만.

“우리 정모나 할까?”

[길드] 개나소나: 우리 정모 하실?

현실과 게임의 반응이 의아해진 건 동시였다.

* * *

한편, 늦는다고 얘기하고 접속하지 않은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니 맞은 편에 앉아있던 손지우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자취방에 들이닥쳐서는 말도 없이 한숨만 내쉬고. 어쩌라고?”

“이럴 때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뭐 하러. 너랑 나랑 언제 그렇게 각별한 사이였다고.”

서로 외동이고 거리도 가까워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주제에 말은 밉게도 잘한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 터라 할 말은 없다.

우리 집 유전자는 재수 없는 유전자라도 달고 태어나는 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손지우가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나 조금 있으면 데이트 가야 하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형은 뭘 믿고 연애를 해?”

“뭐?”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휴대폰을 놓친 손지우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코를 틀어쥐었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노려보는데, 아무래도 말뜻을 오해한 것 같아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얼굴 얘기한 게 아니라!”

“얼굴 얘기하냐고 묻지도 않았거든. 그럼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건데?”

“아니, 그냥. 완전 타인이잖아. 그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헤어졌을 때 상황을 생각하면 찝찝하잖아.”

“결론은 그 사람의 뭘 믿고 연애를 하냐고?”

“응. 연애를 하면 내 좋은 점, 싫은 점 모든 걸 보여줘야 하잖아.”

손지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설마 이런 얘기를 물을지는 몰랐던 거겠지. 물으면서도 괜히 민망해져서 시선을 회피했다.

학생 시절에도 한 적 없던 연애 상담에 손지우가 히죽 웃었다.

“문정하 때문에 이런 것도 묻네. 너 이제 보니 외모 엄청 보는구나?”

“내가 언제 문정하 선배 놈 얘기를 했어! 그냥 묻는 거거든!”

“속 보이는 거짓말하네. 네가 언제 게임 말고 다른 거에 관심 뒀었다고. 왜? 걔가 고백했어?”

“형은 사촌 동생이 남자한테 고백받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심지어 형 친구인데.”

“성별 빼고 다를 거 없잖아. 오히려 솔직히 말해서 잘난 놈이지. 얼굴로 먹고살 능력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집안 자체가 돈 좀 있고 문정하 새끼도 돈 굴리는 요령이 있어서 우리랑은 좀 다르지. 티를 별로 안 낼 뿐이지, 네 생각보다 걔 더 부자 새끼임.”

“난 그딴 건 별로 관심 없어. 믿을 만한 놈인가 중요하지. 솔직히 성격은 별로잖아.”

손지우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친구 입장에서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지금 나한테는 내숭을 떤다고 잘해주고 있지만 기본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지.

손지우는 친구를 변호할까, 솔직하게 말할까 하다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짧게 말하기로 했다.

“더럽게 솔직하고 남의 기분 따위는 생각하지 않긴 하지.”

“형. 세상은 그걸 인성이 더럽다고 말해.”

“…….”

이번에는 손지우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갑자기 뭔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고 보는데 배경 화면에 있는 여자 친구의 모습. 몇 번 사진을 본 적이 있는 터라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관심은 없어도 이런 예쁘신 분이 왜 손지우를 만나는 걸까, 의아한 적은 있었지.

“우리 자기도…….”

“뭔 자기?”

“흠흠, 내 여친도 문정하랑 비슷한 과야. 내 얼굴에 침 뱉기식이라서 말은 못 했지만.”

섬뜩한 애칭에 질색하자 손지우가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단어를 수정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여친 뒷담이라니.

문정하를 닮았다는 소리를 어떻게 여친한테 할 수가 있지? 요즘 헤어지기 직전인가?

“예쁘고 할 말 다 하는 스타일이야. 그래서 주변에서 호불호가 있고 나도 처음에 편견이 있었는데 나한테는 정말 잘해 주더라고. 고백도 얘가 먼저 했고.”

“오, 멋있네.”

“응. 그냥 솔직한 거라고 생각해.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매력 있다고 생각하고. 나랑 내 주변 사람들한테 잘해주면 딱히 상관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 네가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게 있는데.”

잘못 생각한다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손지우가 휴대폰을 다시 가져가며 말했다.

“꼭 그 사람한테 처음부터 네 싫은 점, 좋은 점 다 보여줄 필요는 없어. 서로의 신뢰가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보여주게 될 테니까.”

“그 신뢰는 볼 수가 없잖아.”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야. 상대방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좋아하니까 만나고 싶어 하는 거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단순하게 생각해.”

요즘 세상에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 시작하는 일에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도 드물겠지. 하지만 뭐든 처음이 무서운 법이다. 특히 인간관계가 겁이 나는 사람일수록 더욱.

“형, 근데 문정하는 나한테 가식적이기까지 하는데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면 좋을까?”

“…그냥 그 새끼랑 절대 사귀지 말라고 대답을 해주면 되는 거냐? 그 대답을 원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무슨 수를 써서든 사귀면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 같은데, 그렇게 싫으면 거절하면 되잖아. 억지로 너한테 강요할 놈은 아니야.”

“그건 나도 알아. 그랬으면 그 성격에 나한테 내숭까지 떨면서 다가올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사귀면 안 되는 이유를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왜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분위기에 휩쓸리는지 모르겠어.”

좋아한다, 싫어한다.

굳이 개념을 따지자면 문정하는 현실에서든 게임에서든 확실히 싫어한다에 가까웠다. 현실은 귀찮고 무관심하다는 느낌이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게임에서도 제법 친해졌고, 현실에서도 잘 대해 주는 그가 마냥 싫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어제 은근히 있었던 스킨십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문제였지.

문정하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친하게 지내고 싶은 호감인 걸까.

“분위기에 휩쓸린다는 거 자체가 관심 있다는 거 아니겠어? 너 나랑 다정하게 손잡으면 어떨 것 같아?”

“존나 싫어.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일 듯.”

손지우가 잠시 상처받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임해서랑은?”

“내가 그 새끼랑 왜?”

“문정하랑은?”

“문정하랑은 쌍방이 아니라 그쪽이 멋대로 다정하게 잡는 거겠지.”

“지금 그 반응이야!”

“뭘?”

“문정하 예시에는 욕하지 않았잖아. 그게 네가 나랑 임해서랑 달리 문정하한테는 어느 정도 다른 관점의 호감이 있다는 거겠지.”

욕을 하려다가 말았다. 개떡 같은 말인데 찰떡 같은 이해도를 선사해 주었으니까. 눈높이 교육인가.

확실히 문정하랑 손을 잡는 건 낯간지럽기는 했지만, 방금 손지우랑 임해서를 생각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기는 했다.

친한 형이랑 친구 같은 개념은 아니었나?

“나 이제 데이트하러 가야 하니까 꺼져. 상담은 됐지? 나머지는 알아서 결정해. 너도 이제 성인이야. 네가 결정하고 좋든 나쁘든 결과는 네가 감당해야지. 내가 대신 결정 못 해줘.”

“나도 알아. 그냥 내 결정에 상처받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언을 구한 거야.”

“그래?”

얼른 나가라며 내 등을 발로 꾹꾹 미는 손지우에게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두르는데 정작 그는 웃고 있었다. 현관문으로 쫓겨 나가면서 손지우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러게?’

대답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굴러다녔다. 의식하지도 못했던 내면을 누군가 강제로 연 기분이었다.

심란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게임을 켰다. 칫솔에 치약을 짜서 입에 물고 길드원들이 누가 들어왔나 확인했다.

잔팡을 제외한 모두가 있군.

이쪽은 부캐라고 했으니 접속률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강요할 생각은 없었고 초팡이 접속률이 좋으니 상관없지.

WINNER에 넣어뒀던 길드 가입 신청은 아무래도 불경한눈깔 손에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진 모양이었다. 테스트 시험도 없고 대답도 없었으니까.

새삼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믄님도 없는 길드를 내가 뭐가 좋다고 매달려?

[길드] 초팡: 라하~!

[길드] 영원한이등병: 라하~!!

[길드] 오메가원: 라하~

[길드] 도리두리: ㅎㅇ

[길드] 영원한이등병: 에이 ㅠ 도리두리님 같이 맞춰달라는 인사 무시하셨어

[길드] 도리두리: ㅎ

[길드] 염소구더기: ㅎㅇㅎㅇ 다들 계셨네요. 모타리도 들어옴?

황보욱이 어쩐 일로 게임에 접속했지. 황보욱이 아닌 원래 모타리 계정의 주인인가 싶어서 의심하는데 모타리가 대답했다.

[길드] 모타리: 불만 있음?

[길드] 영원한이등병: …다시 봐도 적응이 안되는 반항기 신입님 모드

[길드] 오메가원: ㅇㅇ…… 이래서 평소 행실이 좋아야 해 ㅠ

[길드] 초팡: 뭐죵? 길마님, 모타리님한테 죄 지으셨어요?? ㅠㅜ

[길드] 영원한이등병: 신입님이 막내 길마님한테 애정 공세 했는데 차이심요……. 게다가 알고 보니 친구였다는 설정으로 혐관 사이가 됨

[길드] 초팡: 음~ 키워드 맛집 ㅇ~ㅇ

[길드] 모타리: 루머 생성하지 말아주세요…….

[길드] 영원한이등병: 네엥!

[길드] 초팡: 네엥!

대답만 잘하고 어차피 나중에 또 놀릴 거면서.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런가, 둘이 은근히 잘 맞는단 말이야.

‘근데 얘는 왜 아는 척을 안 해?’

뻔히 들어와 있는 게 보이는데 인사가 없는 개나소나의 모습에 양치를 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인가, 싶어서 입을 헹구려고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길드] 초팡: 개소님은 잠수? 똥 is 드랍 더 비트?!

[길드] 영원한이등병: 똥이랑 비트랑 뭔 상관 관계옄ㅋㅋㅋㅋㅋㅋㅋ 골 때려

[길드] 초팡: ㅇㅂㅇ?! 한글과 영어……?

[길드] 영원한이등병: 그냥 막 썼넼ㅋㅋㅋㅋㅋ

[길드] 모타리: ㄴㄴ 잠깐 통화하러 가심.

“……?”

문정하가 통화하러 간 걸 저 새끼가 어떻게 알아?

양치 거품이 턱을 타고 흐르고 있었지만, 닦아낼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리고 길드 채팅에 빠져 눈치채지 못했지만, 염소구더기의 쪽지함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었다.

발신인은 불경한눈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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