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길드전 (2)
“뭐가 좋다고 웃어요. 형 때문에 제 이름도 길드원들이 다 알게 생겼는데.”
―그러게. 이름 닳으면 안 되는데.
“이름이 왜 닳아요. 제가 민망해서 그렇지.”
―어차피 길드원들은 너 모르니까 괜찮아.
그래, 지금은 그렇지.
개나소나의 연인이 염소구더기인 걸 알면 더 놀리려고 눈에 불을 켤 길드원들의 모습이 상상돼서 눈을 질끈 감았다.
문정하도 그렇지만 길드원들한테도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지.
[길드] 초팡: 불 거너 궁 조심! 뒤로 빠지는 중
거너를 하는 유저가 그렇게 많지 않다 보니 다른 속성을 가진 거너도 처음이었다.
불 속성의 거너. 저격을 하는 기본 속성의 거너와는 달리 연발탄이 가능한 캐릭터였다. 그리고 궁극기는 앞으로 달리며 연발탄을 쏘다가 적군과 부딪히거나 강제로 멈추면 몸을 회전시켜 사방에 연발탄을 쏜다.
기본 속성보다 치명타는 낮았지만, 훨씬 더 넓은 광역기를 가진 기술. 아군 탱커의 보호 아래 감춰져 있던 믄님은 적군의 최대 목표였다.
솔직히 믄님만 없으면 딜을 뽑을 만한 아군 캐릭터가 없었으니 경계를 하는 건 당연했다.
초팡의 경고처럼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군을 향해 적군 거너가 궁극기를 시전하며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무수히 많은 탄환들이 연속으로 아군을 향해 쏘아졌다. 초팡이 제일 앞에 서서 굳건하게 버텼으나 많은 탄환을 모두 막지는 못했다. 오메가원이 버프 스킬을 쓴 건지 아군의 머리 위에 검은 꽃이 피어올랐다. 공격을 하든 도망을 가든 이동 속도는 중요하니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채팅도 없이 상황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세히봐도잘생김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겠지. 이대로 물러설까 아니면 같이 한타를 할까.
해그늘이 장검을 든 채 원을 그리듯 돌아와 힐러 앞으로 접근했다. 방어력을 높인 캐릭터 중에서 가장 거슬리고 그나마 체력이 약한 존재.
검이 무서운 속도로 타격하자 자세히봐도잘생김의 HP가 줄어들고 있었다.
초팡과 자세히봐도잘생김은 맞고 있는 중이라서 궁극기를 써도 캔슬 될 확률이 높다. 오메가원의 궁극기는 원거리라서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피할 확률이 높으니 쓰기가 애매해지고.
결국 손머리발발이 원을 이루며 믄님을 지키던 자리에서 벗어나 자세히봐도잘생김을 공격하는 해그늘을 견제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같은 기본 속성의 전사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머리발발은 만렙도 아니고 시작한 지 오래된 유저도 아니었다. 손머리발발이 조급한 마음에 연계 스킬을 시도하는 그 타이밍을 노려 해그늘은 궁극기를 사용했다.
내 칼이 오늘도 붉게 물들겠군.
크게 베어내고 검집에 검을 집어넣자 출혈이 크게 터지며 손머리발발이 자리에 쓰러졌다. 자세히봐도잘생김이 치유를 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손머리발발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길드] 손머리발발: 죄송해유 뉴.뉴
[길드] 믄님: ㄱㅊ
순식간에 5대 4가 되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적군의 궁을 두 개 뺀 상황이기도 하다.
이걸 과연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적군 거너가 회전을 하며 연발탄을 쓰려는 것을 막기 위해 초팡이 잡기를 시전하려고 할 때였다.
초팡의 몸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암흑 속성의 마법사 궁극기였다. 지정한 적군을 본인의 곁으로 소환할 수 있는 기술.
아군이 몰려있는 곳에 데리고 올 수도 있고, 적군과 따돌리는 용도로 쓰기도 한다. 큰 대미지를 주는 궁극기는 아니지만 회피하기가 매우 어려운 궁극기로 유명했다.
적군 마법사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초팡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메인 탱커를 잃은 아군은 셋만 남았다. 믄님, 오메가원, 자세히봐도잘생김. 서포트와 원딜만 남아 있으니 근딜을 상대하기에는 쥐약인 조합이었다.
적군 거너가 파고들며 강제로 자리에서 멈춰 몸을 강하게 회전시켰다. 연발탄이 사방으로 쏘아지며 셋을 공격했다.
오메가원이 믄님 앞에 서서 최대한 막아주었지만 메인 탱커 캐릭터가 아닌 암흑 힐러였기에 HP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해그늘 역시 자세히봐도잘생김이 궁극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집중적으로 마크를 하고 있었다.
믄님이 거리를 벌리려고 해도 귀신같이 알아차리며 힐러와 거너를 번갈아 가며 압박하는 해그늘.
[오메가원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길드] 오메가원: 아놔
오메가원이 적군 거너에게 당했다. 궁극기를 제외한 스킬은 근거리였기에 오메가원이 상대하기는 힘들 법했다.
남은 적군은 초팡을 처리하러 간 듯 둘의 앞에는 해그늘과 거너인 물밤만이 굳건히 서있었다.
[길드] 오메가원: 초팡이 더럽게 단단하네ㅋㅋㅋㅋㅋ 자잘님 없어도 잘 살아남는구만
오메가원은 적군 마법사에 의해 강제 소환된 초팡의 상황을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이 상황을 믄님이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해서 초팡이는 구경하고 있지 못해서 나는 문정하에게 물었다.
“형, 지금 어디 보고 있어요?”
―나 지금 초팡이.
“3대 1로 다굴당하고 있죠? 혼자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빠져나오는 건 무리일 것 같지만, 시간 끌기는 잘하고 있어. 방어만 찍어서 이동 속도도 느리니까 계속 잡히기는 하는데 체력이랑 방어력이 높아서 죽지도 못하는 중이야.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지원 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손머리발발이 리스폰 되기 전까지 버텨줬으면 좋겠네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화장실 때문에 스스로 죽지 않는 이상.
그러고 보니 아까 화장실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지. 그럼 악착같이 버티지는 않겠다 싶어서 믄님을 바라보았다. 기본 코스튬에 초창기 거너 랭커 1위를 찍고 받은 금색의 케이프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당할까. 아니면 믄님이라면…….’
만약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별다른 스킬이 없는 거너는 저격을 쓰기 위해서는 무조건 거리를 벌려야 한다. 하지만 아군을 미끼로 두고 뒤로 도망가도 그런 뻔한 수법에 순순히 넘어갈 적군은 없었다.
적어도 적군이 다운되거나 한 명이었으면 가능성은 있었을 텐데.
그때였다. 자세히봐도잘생김과 믄님이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보통 아군 핵심 건물로 도망칠 텐데, 의외의 움직임이었다.
이것도 자세히봐도잘생김의 오더로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그동안 둘이 합을 맞춰보고 나온 작전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믄님이 도망간 곳은 암흑 지대였다. 시야가 가려지고, 오래 있을 경우에는 지속적인 대미지를 주어 HP가 감소하는 위험한 지역.
그런 곳으로 도망친다고?
믄님을 따라간 것은 물밤이었다. 적군 거너는 믄님을 놓칠세라 바짝 추격하며 붉은 권총을 쏘아댔다.
탕, 탕.
특유의 권총 소리가 믄님을 노렸지만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전부 다 피하지는 못해서 HP가 닳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것인가.
해그늘은 자세히봐도잘생김을 마킹 하며 따라간 상태다.
암흑 지대에 도달한 믄님은 한 번 더 탄환을 쏘는 적군 거너 쪽으로 회피기를 사용했다. 순간 잘못 눌렀나 싶을 정도로 바짝 붙은 모양새였다.
오히려 암흑 지대에서는 정확한 위치를 모르게 멀리 떨어질수록 좋을 텐데, 어째서?
바짝 다가온 거너 캐릭터가 일어서며 그 자리에 연막탄을 던졌다. 피하지도 못하고 연막탄을 맞은 적군 거너는 서둘러 옆으로 몸을 피했다. 뒤로 피하면 믄님의 궁극기가 일직선으로 닿을 걸 염려해서 취한 행동인 것 같았다.
믄님은 그런 물밤의 행동을 예측한 듯 바깥을 겨눴다.
옆으로 피하면서 암흑 지대를 벗어난 물밤은 확 트인 곳에 위치하게 되었고, 반대로 믄님은 여전히 암흑 지대에 있어서 제대로 인식이 안 되는 상태였다.
연막탄까지 그를 감싸고 있어서 총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예측하기도 힘든 그 상태로 믄님은 HP가 더 떨어지기 전에 연속으로 저격을 날렸다.
물밤은 빠르게 몸을 날려 헤드 샷을 피했지만 어깨에 탄환이 박혔고, 다시 날아올 탄환을 예상해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물밤의 이마 위엔 결국 붉은 점이 그려졌다.
체크메이트.
[믄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아주 잠깐 몸을 움직이기 직전에 적군 거너의 머리칼이 움직일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흩날리는 것을 확인했다. 그 이외에는 전혀 움직임을 눈치챌 만한 힌트는 없었다.
나야 지금 여유롭게 상황을 살펴보고 있으니 발견할 수 있었지만, 믄님은 저렇게 급박한 찰나에 캐치를 했다고?
[전체] 물밤: 와, 정말 믄님 대박이다.
[전체] 물밤: 왜 다들 믄님 칭송하는지 알 것 같음.
물밤도 어떻게 본인의 움직임을 읽고 맞혔는지 대충 눈치챈 것 같았다.
멀리서 여유롭게 저격을 하고 있을 때는 예측 샷을 날릴 수 있지만, 이런 근접전의 전투에서 적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어지간히 거너만 밥 먹듯 하거나 미친 듯한 재능이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미쳤다. 믄님 진짜 멋있어.”
―반했어?
“원래도 반했는데 지금 더 홀딱 반했어요.”
―그건 좀 싫은데. 나보다 더 좋아?
“그렇게 당연한 거는 묻지 말아 주세요.”
―…….
문정하가 대답이 있든 없든 무시하며 바보처럼 “와, 와!” 소리만 내었다. 진짜 창문 열고 우리 믄님 최고!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지금 우리 길드원이야! 내가 존경하는 거너라고!!
[길드] 초팡: 난 잊었냐, 이것드라아아아!!
그런 나를 저격하듯 초팡이 길드 채팅으로 시끄럽게 외쳤다.
[길드] 오메가원: 아직도 안 죽음? 힐러도 없는데 적당히 죽고 화장실 간 줄ㅋㅋㅋㅋㅋ
[길드] 초팡: 초팡이 자존심 강한 청개구리라서 죽으라고 판 깔아주면 절대 죽지 않아!! 초팡이의 자존심이닷!!
[길드] 오메가원: 그게 뭐임ㅋㅋㅋㅋㅋ
[길드] 초팡: 필요 없다던 힐 줄 사람은 어디 갔어!! 우리 힐러 나타나!!
[자세히봐도잘생김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길드] 초팡: 지옥 갔냐!! 천벌 받았다, 이놈아!!
[길드] 오메가원: ㅋㅋㅋㅋㅋㅋㅋㅋ누가 쟤 좀 말려. 저 와중에 ♡나 잘 버티는 게 웃곀ㅋㅋㅋㅋ
[길드] 손머리발발: 믄님이랑 해그늘님 한타 하는 중! 초팡님 저 부활할 때까지 버티실 수 있어요? 믄님은 못 갈 것 같은데ㅠ
[길드] 초팡: 노력해볼게요ㅠ
[길드] 오메가원: 힐러 투콤보 가기 전까지 버티삼~ 또 죽지 않게 해주겠음~
[길드] 초팡: ㅇㅅㅇ 꿱
[초팡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믄님을 보고 있느라 초팡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채팅을 하다가 방심이라도 한 모양인지 바로 죽었다는 알림이 떴다. 그래도 저 정도면 3대 1로 잘 버텼네, 하고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정하가 작게 웃었다.
―일부러 죽었네.
근데 그 웃음이 묘하게 귀여워하는 것 같은데, 음? 청개구리라던 스스로의 말처럼 더 이상 버티는 걸 포기하고 죽은 초팡이 모습이 웃길 수도 있지만 그걸 보고 웃는 게 문정하라서 기분이 이상했다.
남들이 뭘 하든 관심도 없는 인간이 어쩐 일이지.
‘초팡이랑 연락처도 주고받았다고 했고… 정말 관심 있어서 집적거리는 거 아니야?’
그런 마음에 찝찝함을 억누를 수 없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내 기분을 눈치챈 듯 문정하가 평소보다 다정하게 불렀다. 원래도 현실에서는 다정하기는 했지만 미묘한 변화였다.
―지언아.
“네?”
―무슨 생각해?
“형을 믿어도 되나 고민 중.”
―왜?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여기저기 꼬리 치고 다니는 것 같아서요. 초팡 님한테 관심 있어요?”
―뭐? 왜 그런 생각을 해?
“번호도 교환했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재수 없게 대하는데 초팡이한테는 묘하게 잘 대해 주잖아요. 성별 따지지 않고 시비 잘 걸면서.”
―나 번호 교환한 적 없는데.
“아, 무슨 소리예요! 어디서 그런 뻔한 거짓……!”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다급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미친 듯이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X됐다. 얼굴을 보지 않아서 게임과 현실을 착각했다.
문정하는 내게 초팡이에 대해 얘기를 한 적도 없고 당연히 번호를 교환했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 그건 전부 워너비 길드에서 주고받은 대화들일 뿐이다.
“아, 미친. 손지언 나가 죽어라! X신아!”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숨기던 일을 이렇게 어이없는 실수로 들키게 되다니. 아니, 들킨 게 아니다. 의심하고 있던 문정하는 이제 이 일로 확신할 것이다.
염소구더기라는 게 밝혀지면 뭐가 문제가 되지?
첫째는 일단 싸가지 없는 성격이 들통난다. 오케이, 현실도 버릇없으니 상관없다.
둘째는 문정하가 손지언을 짝사랑하고 있을 때 일부러 그릇된 정보를 나눠줬다. 오케이, 이것도 상관없다. 문정하가 따져도 그때는 내가 싫어서 그랬던 거라고 하면 되니까.
“…그럼 딱히 문제될 건 없나?”
그때는 문정하랑 연인 관계가 될 거라는 걸 몰라서 필사적으로 더 숨겼지만, 지금은 사실 들켜도 상관없지 않을까?
짝사랑한다며 조언을 구한 문정하는 흑역사로 창피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솔직히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사실 문정하가 화를 내봤자 현실에서 나한테 얼마나 독하게 굴겠나 싶은 마음도 있긴 했다.
[개소]
전화가 울렸다. 휴대폰 위로 올려진 손이 살포시 물건을 뒤집어 올려놨다. 진동을 끈 것도 동시였다.
‘문정하의 흑역사를 위해서다.’
내가 찔릴 일이 있어서 피하는 건 절대 아니야! 이래 봬도 남친을 생각하는 갸륵한 마음이라고!
문정하가 알았다면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였다.
[길드] 초팡: 아, 누가 갑자기 욕을 하나 했더니
[길드] 초팡: 개소님 마이크 켰네? 저희 이길지도 모르니까 길드전 언급은 하지 마셔요~ ㅇㅅㅇ
[길드] 오메가원: 통화 끝났나? 왜 저렇게 짜증 내지
[길드] 초팡: 갱년기여
[길드] 오메가원: 저런… 나보다 늙은이였음? ㅠ
[길드] 초팡: ㅇㅇ환갑에 찾아온 첫사랑!! 운명적인 사랑!!
[길드] 오메가원: 진정한 와기 초팡아… 갱년기는 그렇게 늦게 오지 않아
[길드] 초팡: ㅇㅂㅇ!! 초팡이 애기야! 모를 수도 있지!! (뻔뻔
[길드] 오메가원: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초팡: 근데 오자마자 개소님이 저한테 짜증 내는데 왜 저럼? 자잘님이 개소님 보고 왜 개소3리 하냐고 물어봐 주세용
[길드] 손머리발발: 자잘님 너무 진지하게 벌칙 게임 시키냐고 묻는 거 웃겨ㅋㅋㅋㅋㅋㅋ
문정하의 전화를 받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는 환경이라니.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게다가 왜 가만히 있는 초팡이한테 뭐라고 하냐고. 본인이 잘못해 놓고.
길드전 2라운드는 비록 한타에서 밀리기는 했지만, 1라운드에 비해 엄청 긴 시간 동안 대치를 이루었다.
아직 양쪽 핵심 건물은 멀쩡한데 시간은 35분이 지나간 것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오래 버티기는 해도 확실히 1라운드에 비해 위너 길드가 잘해. 농담을 하는 것도 죽었을 때뿐이고 그 이외에는 한타에 집중해서 채팅도 못 할 정도니까.’
그렇게 말이 많은 길드원들이 저렇게 집중할 정도면 방심할 틈이 없다는 거겠지.
영상으로 봐도 한타를 하고 있으면 뒤나 위에서 궁극기를 사용하며 달려드니 긴장의 끈을 놓기가 쉽지 않을 법하기는 했다.
가끔씩 윈드퓨리가 궁극기로 믄님을 강제 소환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그 자리에 적군은 윈드퓨리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한타를 하고 있었으니 아마 소환해서 기습으로 죽이려는 의도였겠지만, 믄님은 1대 1의 싸움에서도 지지 않았다.
이후로는 해그늘이나 물밤과 함께 있을 때 불러내어 믄님도 어쩔 수 없이 당하기는 했지만.
[2 Round 길드전 승리!]
45분이라는 긴 시간을 박빙으로 싸우던 길드원들은 아쉽게도 패배를 안고 돌아왔다. 길드전이 끝나자마자 말이 없는 그들에게 얘기했다.
[길드] 염소구더기: 다들 수고했어요!! 잘 버텼고 한타도 전혀 밀리지 않았음! 너무 아쉽게 끝났다ㅜㅜ
[길드] 영원한이등병: 2라운드 너무 아쉽게 졌어요 ㅠㅠㅠㅠㅠㅠㅠ 이길 수 있었는데!
[길드] 도리두리: ㅅㄱ 멀리 배웅 안 갑니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아나, 도리두리님ㅋㅋㅋㅋㅋㅋ
[길드] 초팡: 터덜터덜… 초팡이 짐싸는 즁…….
[길드] 잔팡: ㅂ2
[길드] 오메가원: 터덜터덜… 오메가 애기도 짐싸는 중…….
[길드] 영원한이등병: 오메가형님ㅋㅋㅋㅋㅋ초팡 누님 따라하지 마세욬ㅋㅋㅋㅋㅋㅋ
[길드] 자세히봐도잘생김: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 버텼네요. 한 명은 딜러로 갔으면 승산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함.
[길드] 믄님: ㅈㅅ
[길드] 초팡: 믄님이 뭐가 죄송해요!! 혼자서 15Kill이나 했는데!!
[길드] 손머리발발: 마자요ㅠㅠ 솔직히 제가 똥싸서… 죄송합니다ㅠㅠㅠㅠ
[길드] 초팡: 초팡이가 슈레기였어… 미아냉… 아듀…….
[길드] 염소구더기: 다들 진정해요ㅋㅋㅋㅋㅋ충분히 잘했으니까
[길드] 개나소나: 염소야
[길드] 염소구더기: 3라운드에서 이기면 되죠!!
[길드] 개나소나: 염소야
[길드] 염소구더기: 10분 남았으니까 다시 참여하실 분들은 화장실도 가고 충분히 쉬세요
[길드] 초팡: 아 맞다 나 화장실!!
[길드] 개나소나: 손염소
아놔. 애써 무시하던 개나소나의 마지막 부름에 이마를 짚었다. 눈치 깠다고 대놓고 광고를 하네.
[길드] 초팡: 오, 지언님 남편 개소님이다!
[길드] 개나소나: ^^?
[길드] 초팡: 비록 갑자기 나에게 짜증은 냈지만
[길드] 오메가원: 솔직히 이거 진 거 개소님 지분도 있음. 초반에 너무 닭살 멘트 날려서 집중력 떨어짐
[길드] 손머리발발: ㅋㅋㅋㅋㅋ앜ㅋㅋㅋㅋ
[길드] 자세히봐도잘생김: ㅇㅈ
[길드] 개나소나: 다 들림? ㅋㅋㅋㅋ
[길드] 영원한이등병: 그 정도면 들려주려고 한 거 아니에요……? 난리 났던데, 워후.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슴까!
[길드] 초팡: 살 수는 있어ㅇㅅㅇ
[길드] 잔팡: ㅇㅇ안 될 건 뭐야
[길드] 영원한이등병: 아니 내 말은 부럽다는 거징…….
[길드] 초팡: ㅎ넝~담!
[길드] 잔팡: ㅎ진~담!
[길드] 영원한이등병: 저 팡팡이 시리즈들… 부들부들
[길드] 믄님: 염소가 손씨임?
애써 잊혀지고 있는 주제가 믄님을 통해 부각되었다. 사실 성은 들켜도 상관없긴 해서 긍정하려고 하는데 개나소나의 말이 더 빨랐다.
[길드] 개나소나: ㅇㅇ 손지언
[길드] 염소구더기: 야 이 ♡♡놈아ㅣ
[길드]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3쳤다진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렇게 공개 처형한다고요????
[길드] 초팡:ㅋㅋㅋㅋㅋㅋㅋㅋㅋㄹㅇ 공개 처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유명한 지언님???
[길드] 오메가원: ^^; 안녕하십니까, 형수님
[길드] 영원한이등병: 형수님이랰ㅋㅋㅋㅋㅋㅋㅋ이제 막내 길마님 탈출하고 형수님 포지션이냐고욬ㅋㅋㅋㅋㅋ
[길드] 자세히봐도잘생김: 실화? 진짜 애인?
[길드] 믄님: ??
[길드] 손머리발발: 진짜예요?! 저 염소님 남자인 줄 알았는데
[길드] 개나소나: 남자 맞음 ㅇㅇ
[길드] 손머리발발: 그럼 개소님이 여자였어요? 그럼 더 충격과 공포인데
[길드] 개나소나: 나도 남자
[길드] 손머리발발: …….?
[길드] 초팡: 초팡이는 편견 없쪄
[길드] 초팡: ㅇ~ㅇ 게이 맛집 촵촵!
[길드] 잔팡: 어쩐지 아까 통화 소리 상대가 남자인 것 같드라
[길드] 영원한이등병: 요즘 대세는 남남! 브로맨스죠! 응원하겠습니다, 형님들!
[길드] 오메가원: 애만 못 가지고 할 건 다 할 수 있으니까
[길드] 자세히봐도잘생김: 결혼은요?
[길드] 오메가원: 게임 내 결혼식 시스템 있음
[길드] 초팡: 시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랜선 결혼이냐고욬ㅋㅋㅋㅋㅋㅋㅋ아, 뻘하게 웃기넼ㅋㅋㅋㅋ
[길드] 잔팡: 성격 나오니까 조신하게 웃어
[길드] 초팡: 유캬캬야야퓨ㅜ햐하하하하하
[길드] 영원한이등병: 포기해요, 잔팡 형님. 초팡 누님은 애초에 조신이랑 거리가 멀엇…….
[길드] 염소구더기: 문정하 미2칫냐??? 제정신?
[길드]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ㅋㅋ실명 오픈 타임임???? 네, 제 이름은 안정호입니다!!
[길드] 초팡: 김밤비입니다!!
[길드] 영원한이등병: 그건 이름이 아니자나요!
[길드] 초팡: 너 지금 밤비 무시해!?
[길드] 영원한이등병: ㄴㄴ초팡 누님을 무시했을 뿐…….
[길드] 초팡: 개갞기
이름을 밝힌 것도 모자라서 남자라는 것도 밝히다니. 길드원들은 여전히 웃으며 얘기하기 바빴지만, 나는 생각보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내가 비록 전화를 씹기는 했지만……. 야, 미친놈아. 이건 선 넘었지!!
[길드] 개나소나: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예쁜 염소
[길드] 영원한이등병: 웩
[길드] 초팡: 우웩
[길드] 잔팡: 염소 고기 맛있음
[길드] 초팡: 잔팡이 염병 떨지말자 ><
[길드] 잔팡: ㅇ;
[길드] 개나소나: 이제 숨겨도 소용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게임 같이 하고 전화 무시하지 말고 받아주면 참 좋을텐데~
[길드] 염소구더기: 형 귓말 할 줄 몰라요?? 문자 몰라? 야
[길드] 오메가원: 이게 바로 형에서 야가 된다는 매직?
[길드] 영원한이등병: 원래 야 → 자기가 되어야 하는 패턴 아닌가욬ㅋㅋㅋㅋㅋ
[길드] 초팡: 사랑 싸움 진정해~ ㅇㅅㅇ 3라운드부터 이기고 붙어요
[길드] 자세히봐도잘생김: ㅇㅇ5분 남음
[길드] 자세히봐도잘생김: 분노 조절하고 게임은 진지하게 ㄱㄱ
[길드] 염소구더기: 저 지금 너무 열받는데 어쩌죠
[길드] 영원한이등병: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개소 형님 차단 박고 시작할까요?
[길드] 염소구더기: 좋은 생각
[길드] 개나소나: 이등병 혼나고 싶음? ^^
[길드] 염소구더기: 님은 나한테 혼나고 싶음?
[길드] 개나소나: 그것도 좋지 ><
[길드] 영원한이등병: 하……. 인생… 살기 싫다…….
[길드] 초팡: 초팡이 길드 탈주합니다… 안구 테러 당함…….
[길드] 도리두리: 화장실 갔다 와서 연어 했는데 이것 참… 개소님 또 해킹당하셨네요
[길드] 오메가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세히봐도잘생김 님이 파티에 초대하였습니다.]
[염소구더기 님이 파티 신청을 수락하였습니다.]
3라운드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채팅만 하고 있자 총대를 멘 자세히봐도잘생김이 출전하는 선수들을 파티에 초대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신 차려라, 손지언. 네가 할 일을 지금 신입이 하고 있잖아. 사적인 감정은 버리고 내가 벌인 길드전에 집중하자.
[개소]
또 전화가 왔지만 이번에는 바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길드] 개나소나: ;; 화났엉?
[길드] 염소구더기: 겜ㄱ
[길드] 개나소나: ㅠㅠ
[길드] 잔팡: 혼날 짓 하긴 했지
[길드] 개나소나: ㅡㅡ?
[길드] 잔팡: ㅡㅡ?
[길드] 초팡: 게임 시작 전에 한마디만 할게용 잔팡이 뇌 거치지 않고 말하는 놈이라서 뇌 빼고 들으시면 돼용~ 걍 인성이 나쁜 놈입니당
[길드] 염소구더기: ㄱㅊ 개소도 인성 나쁜 놈이라서
[길드] 개나소나: ㅠㅠㅠㅠㅠ 염소야
―게임 시작합니다. 사담은 나중에 해 주시고 길드전 집중할게요.
마이크로 자세히봐도잘생김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문구와 함께 다들 자신의 캐릭터를 골랐고 나는 오랜만에 물 정령을 선택했다. 레어 코스튬을 입고 있는 물 정령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모습이 화면에 가득 채워졌다.
사실 거너 주캐 포지션이 겹쳐서 승률을 위해서는 믄님만 참여하고 나는 빠지겠다고 얘기했지만, 믄님이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본인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 거라면 본인이 빠지겠다고.
하지만 믄님을 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사용할 줄 아는 물 정령을 선택하게 되었다.
게임이 시작하자 제자리에서 무지개를 그리며 등장한 물 정령은 오랜만에 함께 해서 즐거워 보이는 것 같았다.
[워너비]
염소구더기: 정령사(어시/물)
개나소나: 전사(근딜)
믄님: 거너(원딜)
자세히봐도잘생김: 힐러(힐러/빛)
잔팡: 무투가(탱커/바위)
[WINNER]
불경한눈깔: 거너(원딜)
해그늘: 전사(근딜)
공공칠파라팡: 마법사(원딜/물)
저오늘복귀했어요: 무투가(탱커/불)
물밤: 거너(근딜/불)
마지막 길드전 3라운드의 시작이었다.
―1승 1패라서 마지막은 신중하게 가겠습니다. 우선 건물부터 확실히 부수고 진행하는 걸로 하죠.
적군 건물을 향해 전원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아군 건물 앞에도 다섯 명이 보였다. 자세히봐도잘생김의 오더가 내려졌다.
―저쪽 거너 둘에 전사 한방 딜이 제법 아프니까 원딜들은 너무 앞에 붙지 마세요. 힐 주기 전에 썰립니다.
물 정령의 평타는 대미지가 그리 강하지 않지만, 개나소나와 믄님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건물은 빠른 속도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후퇴하세요! 아군 건물 부서졌습니다.
자세히봐도잘생김의 오더에 아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졌다. 적군 건물을 부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괜히 무리했다가 한타에서 지는 게 더 미련한 짓이었다.
―우선 레벨 먼저 올리고 믄님은 가끔 견제 사격해 주는 걸로 하죠. 다른 분들은 조금만 대기해 주세요.
믄님이 거리를 벌려 저격을 들었다. 하지만 궁극기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가장 앞에 있던 물밤 앞으로 와서 대신 맞아주는 저오늘복귀했어요.
듬직한 어깨를 가진 탱커는 믄님의 사격에 HP가 줄기는 했으나 금방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저렇게 버티고 있으면 오히려 탄환만 낭비하는 거지.
믄님은 망설임 없이 궁극기를 해제하고 아군 쪽으로 합류했다.
―적 탱커가 우리 원딜들을 견제하지는 못해도 본인 쪽은 잘 보호하네요. 시야도 넓은 것 같고.
―계속 저러면 저격이 무의미할 텐데.
잔팡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적군 원딜을 믄님이 견제를 해줘야 한타에서 움직이기 용이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했다. 물 정령으로는 딜을 직접적으로 뽑아내지 못하니까 믄님의 딜마저 묶여버리면 안 된다.
―적 탱커는 잔팡 님이나 개소 님이 상황 보면서 묶어주고 남은 한 명은 원딜 움직임 방해해 주세요.
그럼 나는?
가만히 오더를 기다렸지만 물 정령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지금 물 정령 무시하냐. 나는 인상을 와락 찡그리면서도 채팅은 하지 않았다. 그래, 솔직히 귀여운 거 빼고 무시 받을 만하지.
―적군 건물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을 거예요. 처음 한타는 저희가 열어야 합니다.
적군 건물을 부수지 못한 채 한타를 해봤자 방어력이 낮아진 아군만 불리할 뿐이었다. 적군이 매복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
잔팡이 기다렸다는 듯 선두를 달렸는데 정면으로 가지 않고 뒤로 돌아갔다.
―그쪽으로 밀게요.
적군 건물이 있어서 진즉에 들켰지만, 잔팡은 회피를 하며 가장 뒤에 있던 원딜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죽이지는 못하지만 잡아서 위로 높이 쳐올리면…….
[믄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허공에 무방비하게 방치된 적군의 몸에 탄환이 박혔다.
출혈을 흘리며 바닥에 떨어지는 공공칠파라팡을 본 자세히봐도잘생김이 오더를 내렸다.
―한 명 더 따고 건물 칩시다.
그때였다. 멀리서 붉은 점이 물 정령 이마 위로 그려졌고, 나는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으나 탄환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치명타가 뜨며 절반 이상이 줄어든 HP에 혀를 찼다.
‘제대로 맞았으면 한 번에 죽었겠네.’
또다시 붉은 점이 물 정령의 이마 위로 덧그려졌으나 개나소나가 앞을 막아섰다. 자세히봐도잘생김의 치유 스킬로 HP가 빠르게 원상 복구되어 앞으로 나섰다.
잠깐 앞을 막아주던 개나소나는 곧바로 잔팡을 도와 적진의 한복판에 있었고, 상대 탱커인 저오늘복귀했어요가 물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리한 게 물 속성 마법사. 그럼 안 보이는 유저는 불경한눈깔과 해그늘이었다.
―해그늘 님 발견. 왼쪽 사각지대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자세히봐도잘생김의 오더에 믄님이 쫓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묘하게 찜찜한 기분.
왜일까.
잠깐 인상을 찡그리던 나는 믄님과 달리 해그늘이 도망친 골목길 끝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얼핏 보이는 카키색의 교복. 불경한눈깔의 코스튬이었다.
저격을 들고 있으니 내가 평타를 때려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해그늘이 지원해 올 수 있는 가까운 위치였기 때문에 나는 위험한 모험보다는 안전하게 가기로 마음 먹었다.
불경한눈깔을 노리고 쓴 궁극기에 대미지가 조금씩 줄어드는 게 보였는데 이상하게 대미지가 두 개가 뜨고 있다.
아주 귀여운 숫자로 HP가 닳고 있는 게 의아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 믄님의 궁극기가 이어졌다.
어항 속에 갇혀 숨쉬기 힘들어하는 모션을 취하는 불경한눈깔에게 탄환이 박히며 사망 메시지가 떠 올랐다.
불경한눈깔이 죽었지만,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궁극기 실행을 취소하지 않고 최대한 오래 붙잡아 두었다.
1Kill.
2Kill.
불경한눈깔에 이어 사망 표시가 뜨는 해그늘.
만약 평타로 불경한눈깔의 움직임을 방해하려고 했다면, 위치가 들통나서 바로 목숨줄이 끊어졌겠지.
아군에게 돌아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궁극기를 써서 천만다행이다.
―염소 님 굿 보이.
암흑 지대에 있으면서 HP가 닳은 믄님을 여유롭게 치유해 주며 자세히봐도잘생김이 보이스로 칭찬을 해주었다. 너무 건조한 칭찬이어서 진심인지 빈말인지 구별하기는 힘들었으나 기분은 꽤 괜찮았다.
―말할 시간에 여기 좀 도와주시죠? 개소 님만 열심히 돕는 중이라고.
존대와 반말을 섞어서 투덜거리는 잔팡의 말과는 달리 거기도 상황이 크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적군은 탱커와 불 속성 거너뿐이었다.
―거너 궁극기 쓸 타이밍 절대 주면 안 되고, 혹시 모르니 한곳에 뭉쳐있지 마세요.
일행들과 합류해서 탱커 뒤에 숨어있는 물밤에게 평타를 날렸다. 큰 대미지를 주지는 못해도 연속으로 맞히면 시야 차단이 되니 혹여나 궁극기를 쓸 상황이 되어도 방해를 줄 수는 있을 터.
평타는 피하지도 못하기에 연속으로 맞던 물밤은 그대로 뒤쪽으로 점프를 했다. 난간에 아슬하게 걸친 그는 순식간에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목표는 물 정령이었다.
하, 썩을. 만만한 게 물 정령이라 이거지?
열은 받았지만 물 정령은 극강의 어시스트 캐릭터라서 뛰어난 공격력도 없고 적군이 환장하는 회피기도 없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1데스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난간에서 떨어지며 물 정령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던 적군 거너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치솟는 엄청난 출혈량.
급격하게 닳은 HP와 캔슬된 궁극기에 놀라 눈을 깜빡이는데 그 위로 검이 내리 찍혔다.
[개나소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아니, 잘했는데 굳이 궁극기를 쓸 것까지야……. 물 정령 주고 저희가 스킬로 킬 따는 게 더 이득이었을 것 같은데.
―탱커 치다가 갑자기 거기로 가면 어떡하라고!
자세히봐도잘생김의 헛웃음 소리와 잔팡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왔지만, 개나소나는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이 아니었다. 애초에 신경 쓰는 놈이었으면 내가 인성 운운하지는 않았겠지.
[길드] 개나소나: 내 사람은 내가 지켜야지
개나소나는 오그라드는 말을 잘도 하며 잔팡의 재촉에 탱커 쪽으로 다가가 공격을 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데 물 정령이 한참을 서있다가 커다란 잎사귀를 바닥에 깔고 앉는 행동을 취해 보였다. 유저가 잠수를 타고 있을 때 나오는 캐릭터의 반응이었다.
문정하는 똑똑한 놈이기는 했다. 현실에서 그가 다정하게 대하든 돈질을 하든 말든 게임에서 한 번 인상 깊은 장면을 보여주는 게 훨씬 더 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었으니까.
하, 이 새끼. 쓸데없이 멋있고 지랄이네.
귓불이 뜨끈해져서 문지르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게임 유저로서 자연스러운 두근거림이었다.
[적군의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적군의 방어력이 감소합니다.]
탱커를 붙잡고 있는 동안 나와 자세히봐도잘생김은 건물을 부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건물이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리고 알림이 떴다.
[전체] 해그늘: 염소님. 거너만 잘하신다고 울상이셨는데 물 정령도 잘하시네요ㅎㅎ
과거 믄님과 종종 셋이서 하던 때를 떠올린 건지 해그늘이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때는 거너 이외의 캐릭터만 잡으면 기본 10데스를 자랑할 정도로 처참했었다. 궁극기도 제대로 못 맞히거나 캔슬당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게임을 막 시작하던 때라고 해도 참 심했다.
그런 걸 보다가 2인궁을 썼으니 해그늘 입장에서는 기특할 법도 하지.
나는 조금 뻘쭘한 감정을 느끼며 대답했다.
[전체] 염소구더기: ㅎ운이 좋았어요. 거기 왕재수만 노렸는데
[전체] 불경한눈깔: ㅡㅡ? 뭐?? 제정신??
[전체] 염소구더기: 아, 나중에 생각 있으시면 저희 워너비 길드 들어오실래요? 초대해 드릴게요.
[전체] 불경한눈깔: 야 미2쳤냐거 남의 길드원을 누가 이렇게 대놓고 영업질을 해?
[전체] 해그늘: 음, 조금만 고민해보고 제가 먼저 연락드릴게요.
[전체] 불경한눈깔: 야
[전체] 염소구더기: 네ㅎㅎ 저 부캐라서 이걸로 친추 해놓을게요.
[전체] 해그늘: ㅎㅎ~ 네
[전체] 불경한눈깔: 이것들이 날 무시해!!? 위너가 우스워!!?
[전체] 염소구더기: 어른 말씀하는데 겁나 시끄럽네
[전체] 불경한눈깔: 뭐? 고작 궁 한 번 성공했다고 기고만장이네? 믄님 덕분에 킬 딴거지. 너 혼자였으면 절대 못 죽였거든?
[전체] 염소구더기: 하는 짓이 초딩이라서 한 말인데? 그리고 어쨌든 믄님도 워너비 길드임. ^^ 같이 해낸 게 당연한 거 아님?
[전체] 믄님: ㅇㅇ
[전체] 불경한눈깔: …믄님… 제가 잘해준다니까요……ㅜ
[전체] 믄님: ㄴ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예전부터 나 못지않게 믄님을 존경하던 거너 유저인 불경한눈깔은 유독 믄님에게는 평상시의 성격과 달리 조신한 태도를 보였다.
전체 채팅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자존심보다 믄님을 더 생각하는 꼴이라니. 여러 의미로 대단한 놈이었고 동시에 저런 놈의 집착과 사랑을 받는 믄님이 불쌍했다.
―성격이 평범하기라도 했으면 믄님이 어느 정도 챙겨줬을 텐데. 믄님이 불협화음을 싫어하긴 하죠. 그것 때문에 솔플 하는 것도 있고.
―난 해당 사항이 없군.
―잔팡 님,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초팡 님이 전해 달래요.
―뻥 치지 마.
―네, 뻥인데요. 쓸데없는 소리 하면 지랄하지 말라고 미리 언질은 받았습니다.
―…….
뻔뻔한 잔팡도 초팡의 이름이 나오자 혀를 차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은근히 누나한테 잡혀 사는 남동생 포지션이라니까. 약간 초기 개나소나보다 싸가지는 덜한데 건방진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게임 잘하는 놈들은 원래 저런가, 싶다가도 초팡이라는 고삐가 있으면 케어는 가능할 것 같아서 굳이 제재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선을 넘는 발언을 하는 건 아니고 성인이니 다들 알아서 하겠지.
해그늘에게 친구 신청을 보내놓고 아직 활성화되지 못한 궁극기를 바라보았다.
궁극기를 제외한 물 정령의 스킬은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군의 체력을 소량 회복하는 능력. 또 다른 하나는 들고 있던 커다란 잎사귀를 썰매처럼 앉아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일정 거리를 빠르게 미끄러지는 능력이었다.
후자는 주로 한타나 기습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회피기로 많이 사용하나, 1대 1의 상황에서는 적군에게 부딪혔을 시 잎사귀를 밟고 넘어지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철저하게 어시스트 노릇을 해 줘야지. 불경한눈깔 열 받게.’
나도 킬을 내는 데 관심이 있어서 거너를 하기는 했지만, 불경한눈깔도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킬을 못하는 탱커나 힐러는 그나마 맡은 바 역할이 있어서 덜했지만 어시스트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무시하던 게 그였으니까.
그런 어시스트 캐릭터에게 짜증 날 정도로 견제를 당하면 어떤 기분일까.
흡족함에 미소를 그렸다.
매번 문정하 인성 언급을 하지만 나도 인성질에 있어서는 부족하지 않지. 물론 불경한눈깔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말이다.
중앙 무대로 가서 시야를 보고 있던 잔팡이 헬프 핑을 찍었다. 미니맵을 통해 공공칠파라팡이 잔팡에게 맞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적군이 지원 오기 전에 하나라도 잘라야 하는 상황.
믄님이 지원을 가고, 개나소나는 공공칠파라팡을 지원하러 오는 딜러들을 자르기 위해 뒤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가는데 저 멀리 저격을 준비하는 불경한눈깔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그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군은 탱커와 근딜 둘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걱정이 되는 건 해그늘이었지만, 다행히 미니맵에서 믄님의 뒤로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믄님 뒤!
다급한 자세히봐도잘생김의 언질에 믄님이 연계 스킬을 회피하는 걸 확인하고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개나소나가 불경한눈깔에게 달려가고 있었고 그 뒤로 불 속성 거너가 바짝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저 스피드라면 평타를 다섯 번 이상 연속으로 맞히기도 힘들 듯싶었다.
그렇게 확신한 나는 회피기로 사용하는 스킬을 사용했다.
물 정령이 까르륵 웃으며 커다란 잎사귀에 몸을 얹고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불 속성 거너가 노리는 것은 명백했기 때문에 그 앞쪽으로 물줄기를 타고 미끄러지니 미처 피하지 못한 물밤이 잎사귀를 밟고 미끄러졌다.
[개나소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그사이에 저격을 들고 있어서 옆의 시야를 확인하지 못한 불경한눈깔이 죽었다.
방해를 받지 않고 적군을 처리한 개나소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물 정령을 공격하는 물밤에게 뛰어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물밤이 있던 자리를 그어냈지만, 물밤은 빠르게 회피기를 사용해 지독하게 물 정령만 노렸다. HP가 빠르게 닳기 시작했다.
―지원 갑니다. 버틸 수 있어요?
―우리 애기 죽기 일보 직전. 빨리 오시길.
채팅을 칠 시간도 없어서 디코를 사용한 개나소나의 말에 자세히봐도잘생김이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래도 착실히 오는 걸 보면 지원은 와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잔팡이 신경질적으로 후퇴 핑을 찍기는 했지만. 그런 건 살포시 무시하고.
―아, 전사 따라붙었어요. 궁만 쓰고 빠집니다.
자세히봐도잘생김이 움직이는 걸 봤는지 해그늘이 이동 속도를 올려 빠르게 추격해 오는 것이 미니맵에 보였다.
소름 끼칠 정도로 빠른 상황 판단이었다.
이미 적군은 원거리 딜러가 죽은 상황. HP가 간당간당한 공공칠파라팡은 깔끔하게 버리기로 결심한 움직임이었다.
젠장, 궁극기 캔슬이었다.
빠르게 궁극기만 쓰고 빠지려고 했던 자세히봐도잘생김에게 필사적으로 따라붙은 해그늘이 기어코 궁극기를 캔슬 시켰다.
물 정령은 HP가 아슬아슬했고 아직 궁극기는 활성화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해그늘까지 합류하다니.
―믄님이랑 잔팡 님 오기 전까지 조금만 버텨주세요. 개소 님 가능하신가요?
―버텨봄.
검과 총이 맞부딪혔다.
근거리 딜러인 불 속성의 거너는 총으로 내려찍는 검을 막아내고 근거리에서 탄환을 날렸다. 개나소나는 옆으로 굴러 탄환을 피했고, 스킬을 사용하자 또다시 검과 총이 맞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나는 내게서 관심을 끈 물밤을 피해 사각지대로 움직였다. 이제 곧 궁극기 활성화도 되어가니까 멀리 가지 않고 사각지대로 피하려는데… 이제 막 코너를 돌아오는 탱커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히 착각이겠지만, 왜 탱커가 웃는 듯한 느낌이지. 소름 끼치게.
잘 차려진 밥상에 저오늘복귀했어요가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어 어퍼컷을 날렸다. 아코코, 하는 귀여운 리액션과 함께 물 정령이 높이 떠올랐다.
―스트라이크~!
―홈런입니다~!
―이야, 큰 거 한 방 터뜨리셨는데요! 하지만 더쎄는 막판의 막판까지 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죠? 한 방 맞은 염소 투수는 마인드 컨트롤 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짜고 콩트 대사를 치는 것처럼 합이 착착 맞는 길드원들의 말에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걱정을 해도 모자랄 망정!
믄님은 아무 말도 안 했으니 저 셋 중에 문정하도 범인으로 있었다.
저러고도 남자친구야?
높이 떠오른 물 정령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고 주변에서 가장 높은 난간 위로 떨어졌다. 대단한 착지 기술이라고 해야 할지 던진 놈이 대단한 조준력을 가졌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 개판 5분 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상황이 바뀌어 2대 1로 다굴을 당하고 있는 개나소나와 해그늘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자세히봐도잘생김, 잔팡, 믄님.
그래도 저기는 3대 1이니 알아서 버티겠지.
개나소나를 지원하러 가려는 아군을 요령껏 막아내는 해그늘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저기서 다굴은 당하지 못할망정 오히려 가지고 놀고 있다니. 잔팡이 혈압 오르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네.
―염소야.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조곤조곤 귀에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는 문정하보다 더 섬세하고 여린 느낌이었다.
목소리가 예쁘다고 느끼는 건 처음인데.
[길드] 염소구더기: ???
누구인가 싶어서 의문을 가지는데 그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궁, 저 둘한테 닿아?
저 본론만 말하는 특유의 짧은 어법이 익숙했다.
믄님의 캐릭터에게 저도 모르게 시선을 주다가 말한 게 개나소나를 공격하고 있는 적군 둘을 가리키라는 걸 깨닫고 대답했다.
[길드] 염소구더기: 닿을 것 같은데
[길드] 염소구더기: 믄님이세요!?
[길드] 믄님: ㅇ
미쳤다, 미쳤다, 미쳤어!!
이제까지 믄님과 같은 게임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목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막연히 어른스러운 그의 태도에 나보다 훨씬 연상의 듬직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미성이 아닌가. 어쩌면 나보다 어릴 수도 있고.
와, 와!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믄님 지금 나한테 팬 서비스 해준 건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개나소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받은 성의에 비해 나는 개나소나를 구하려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괜히 찔리네.’
하지만 저놈도 지은 죄가 있으니 나한테 뭐라고 하지는 못하겠지.
궁극기는 활성화된 상태다. 아니, 안 닿나? 평타를 날려보았지만 평타도, 치유 스킬도 닿지 않았다. 궁극기도 아슬아슬하게 안 닿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미 믄님에게 가능하다고 한 상황.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개나소나가 아닌 믄님을 위해서.
높은 난간 위에서 떨어져 내리며 궁극기를 시전했다. 낙하하면서 궁극기를 쓸 수는 있었지만, 적군의 작은 공격에도 쉽게 캔슬될 수 있는 부담감이 있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를 마킹 하고 있는 적군은 없다.
커다란 어항이 둘의 밑에서 솟아올랐고 뒤늦게 알아차린 적군이 빠져나오려고 회피 기술을 썼지만, 개나소나가 재빠르게 달려들어 넘어뜨렸다.
다운된 적은 그대로 어항에 갇혀 버렸다. 독 안에 든 쥐였다.
물에 떠오른 적군을 본 개나소나의 눈동자가 빛났다.
높이 뛰어오르며 백색의 제복이 바람에 펄럭이며 궁극기를 시전했다. 시원스럽게 베어낸 적. 이내 칼집에 검이 모습을 감추는 순간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1Kill.
2Kill.
[개나소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개나소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믄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연속으로 다섯을 죽이지 못해서 버프 효과는 받지 못했지만, 이어지는 한타는 아주 완벽한 우리 승리였다.
비록 물 정령은 낙하의 충격으로 간당간당하던 HP를 전부 소모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염소구더기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좋은 날에 찬물 뿌리기?
[길드] 염소구더기: 잔팡쓰
[길드] 염소구더기: 왜 이렇게 자꾸 귀엽게 굴죠? ㅎ
[길드] 잔팡: ㅎ 저 아닌데요, 길마님. 사람 오해 하지 마세요. 개소님인 듯
[길드] 염소구더기: 개소는 저 짝사랑해서 그런 말 안 하는데요
[길드] 잔팡: 아놬ㅋㅋㅋㅋㅋㅋㅋ ㅈㅅㅈㅅ 지인들한테 하던 습관이 있어서 자제할게요
[길드] 염소구더기: 개소한테 하는 건 허락함
[길드] 잔팡: ㅇㅋ
[길드] 개나소나: 나 다시 짝사랑이ㅑ……?
얼마나 다급했으면 말도 제대로 완성을 짓지 못한 건지. 휴대폰 진동이 다급하게 울렸지만, 나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길드] 개나소나: 염소야
[길드] 개나소나: 지언아 화풀어
[길드] 개나소나: 형이 잘못했어ㅠㅠㅠㅠ 실명 거론한 것도 초팡이랑 친하게 지낸 것도
[길드] 잔팡: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초팡이한테 질투했어요, 염소님????
[길드] 염소구더기: ㅎ 약간 일부러 더 화를 돋우는 것 같기도 한데. 일단 게임 끝나고 얘기해요 ^^
[길드] 개나소나: ㅠㅠㅠ웅
[길드] 잔팡: 무섭……. 개소님 잡혀 사시네.
―불경한눈깔 리스폰 했으니까 저격 올 거 조심하세요. 남은 한타에서 지면 순식간에 밀릴 확률 높으니까 방심은 금물입니다.
자세히봐도잘생김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유치원생들을 타이르는 선생님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아마 다음에 마지막 한타가 되겠지.
중간 건물을 전부 처리했으니 다음에 적군 네 명 이상을 먼저 처리한 쪽이 순식간에 핵심 건물까지 밀고 들어갈 것이다.
여기서 이기면 길드전에서 승리한다. 생각보다 가까운 희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발, 기왕 하는 거 제발 이겨서 불경한눈깔에게 꼭 엿을 먹여줄 수 있기를!
―이번에는 먼저 물지 않고 적군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저랑 전사, 물 정령 궁극기 아직 쿨타임이라서 시간 벌어야 해요.
확실히 한타 때 궁극기가 없으면 이길 확률이 줄어든다. 그리고 적군에 치명타가 높은 딜러가 있으니 힐러의 궁극기는 필수였다.
하지만 적군 또한 우리가 한타를 피하며 시간을 버는 걸 알 테고 악착같이 지금 타이밍을 노릴 테지. 분명히 들어온다.
그동안의 더쎄를 했던 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서 우리는 모여 있지 않고 흩어져 주변을 살폈다.
선두에서 시야를 보고 있던 잔팡이 서둘러 후퇴 핑을 찍었다.
―적 탱커랑 눈인사함.
―탱커 있으면 불경한눈깔도 있을 거예요. 원딜들은 뒤로 빠져주세요. 탱커는 미끼입니다.
1라운드에서 당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뒤로 빠졌다. 탱커를 잡으려 달려가는 순간 뒤에서 저격을 들고 있던 불경한눈깔의 밥이 되겠지.
아군 핵심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내 앞으로 개나소나가 힘없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기습! 저격 들었습니다!
젠장!
탱커 뒤에 당연히 안전하게 저격을 준비 중일 거라는 우리 생각을 비웃듯 불경한눈깔은 옆으로 돌아와서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방어력이 낮은 나와 믄님은 사정거리에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 바로 노려지지 않았다는 것.
맞히려고 거리를 좁히려면 궁극기 소리가 들릴 테니 최대한 멀리서 궁극기를 켠 모양이었다.
개나소나는 HP가 아직 절반 이상이었다. 그에, 자세히봐도잘생김이 치유 스킬을 쓰지 않았고, 내가 대신 썼다.
[개나소나 님이 물의 정령 가호를 받습니다.]
[체력이 소량 회복됩니다.]
물의 정령이 개나소나의 주변에 날아다니며 일정 HP를 회복시켜 주고 있었다.
자세히봐도잘생김의 치유 스킬을 개나소나에게 써버리면 나중에 급하게 살려야 할 원딜의 목숨을 허무하게 잃을 수 있다. 그걸 알기 때문에 개나소나도 불만을 토하지 않고 믄님 앞을 막아서며 적을 노려보았다.
―탱커 뒤에 딜러 전혀 안 보임. 다들 돌아가는 것 같으니까 핵심 건물로 빠져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잔팡이 뒤로 되돌아오던 길이었다. 우리에게 오던 그는 갑자기 궁극기를 시전하며 달려들었다.
몸이 팽창하고 평소보다 빨라진 속도로 나와 믄님 사이를 가로지른 잔팡의 모습에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잔팡에게 맞고 스킬이 끊긴 해그늘의 모습이 보였고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 언제 온 거지?
믄님도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 해그늘을 집중 마킹하는 잔팡을 보더니 이내 앞으로 고개를 돌려 저격을 들었다.
그리고 찍힌 핑은 우측.
좌측에 불경한눈깔이 저격을 들고 있었고 뒤에는 해그늘이 기습을 노리고 있었다. 앞에는 탱커가 다가오고 있고 우측에서도 적의 그림자가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우리의 숨구멍을 조여오기로 작정한 것처럼.
―궁극기 쿨 타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들 무리하지 말고 최대한 뒤로 물러서세요! 아군 핵심 건물 끼고 싸워야 합니다.
나는 혀를 차고 잔팡을 지원하기 위해 뒤로 돌아섰다.
평타를 날려 잔팡에게서 벗어나려는 해그늘의 움직임을 막았고, 검에 베여 HP가 닳은 잔팡에게 치유 스킬을 시전했다. 소량 회복이기는 해도 그만큼 쿨타임이 짧아서 스킬을 자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장점이었다.
[잔팡 님이 물의 정령 가호를 받습니다.]
[체력이 소량 회복됩니다.]
―우측 불 거너.
믄님의 목소리였다. 저격으로 우측에 숨어있는 물밤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럼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한 명뿐이다.
공공칠파라팡의 궁극기가 큰 대미지를 주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같이 뒤로 빠져나가고 있던 우리에게 가장 거슬리는 궁극기다.
‘지금 상황에서 걸리면 전원 죽음이야. 어디 있지? 분명히 궁극기 타이밍을 노리고 있을 텐데.’
궁극기 쿨타임이 40초 정도 남았다.
40초, 고작 그 시간만 버티면 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38초.
나는 잔팡을 지원하던 걸 포기하고 핵심 건물로 달려갔다. 혼자 도망친 모습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섯 명 전원이 걸리면 안 된다. 믄님도 궁극기를 해제하고 뒤로 빠져나오려는 순간이었다.
26초.
쿨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 아군을 향해 거대한 폭포가 몰아쳤다. 핵심 건물로 피하지 않았으면 나도 저기에 걸렸겠지.
저오늘복귀했어요가 기다렸다는 듯 궁극기를 켜고 달려들었다.
저주의 폭포에 휩쓸려 디버프를 받는 아군을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이용해 한곳으로 모은다.
아슬하게 저주의 폭포에는 닿지 않은 잔팡이 해그늘이 궁을 쓰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몸도 점점 저주의 폭포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18초.
내 궁극기보다 먼저 시전했던 자세히봐도잘생김의 궁극기는 이미 쿨타임이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비슷하게 사용한 개나소나의 궁극기도 이제 곧 쿨타임이 끝나겠지.
12초.
자세히봐도잘생김의 궁극기를 쓸 수만 있다면 가능성은 있지만, 적군이 쉽게 쓰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모여 있는 아군을 향해 물밤이 한방 딜을 넣기 위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아군의 HP가 무섭도록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사각지대에서 자세히봐도잘생김에게 치유 스킬을 걸었다.
[믄님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방어력이 낮은 믄님은 물밤의 궁극기까지 맞고 장렬하게 사망했다.
이제 5대 4가 됐고, 나를 제외한 아군은 궁극기 콤보에 맞고 있는 상태. 누가 봐도 진 싸움이었지만 누군가 내게 물었다.
―할 수 있겠어요?
내가 뭘 할 건지 눈치챈 건지 먼저 궁극기 쿨타임이 끝난 자세히봐도잘생김이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물었다.
어차피 여기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저 다섯을 막을 방법은 없다.
2초.
끝낼 거면 다 같이 죽거나 다 같이 살아서 처리해야 한다.
잔팡을 저주의 폭포로 떠밀어 넣은 해그늘이 나를 발견했다. 동시에 물 정령의 궁극기 쿨타임도 끝났다.
현재, 나를 제외한 아군은 저주의 폭포에 닿아있고, 적군도 불경한눈깔을 제외하고 모두 모여있었다.
물 정령의 궁극기는 쓸모없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야 뛰어난 공격력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아군을 지킬 수도 없고 치유할 수도 없다. 고작 적군의 움직임을 잡아두고 아주 소량의 디버프와 대미지를 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움직임을 잡아둔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지금 뼈저리게 느끼기를 바랐다.
서둘러 뒤로 빠지려고 했던 해그늘과 저주의 폭포를 시전하고 디버프 스킬을 사용하던 공공칠파라팡. 폭포 안에서 궁극기를 시전하고 있던 저오늘복귀했어요와 물밤이 바닥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어항에 갇혔다.
동시에 아군들은 간당간당한 HP로 어항 밖으로 튕겨 나가듯 밀려났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출혈 효과로 죽기 직전이었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듯 힐러의 궁극기는 물 정령보다 빨리 썼었다. 그러니 쿨타임도 먼저 끝난 상태다.
캐릭터 중에서 가장 사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어항보다 넓은 영역을 지정한 자세히봐도잘생김의 궁극기에 아군의 HP가 빠르게 샘솟고 있었다.
더불어 저주의 폭포에 걸린 많은 디버프를 순식간에 상쇄시켰다. 그중에서도 빛 힐러의 가장 사기적인 설정은 이거였다.
[신의 가호로 믄님이 부활합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믄님을 언제 부활 대상으로 지정했던 거지?
궁극기를 사용하기 직전에 부활 대상을 지정하면, 아군이 죽었을 때 50%의 HP를 회복한 채 부활시킬 수 있었다.
어항에 갇힌 적군을 노리는가 했지만, 저격이 향하는 곳은 다른 곳이었다.
내 궁극기에 걸리지 않고 저격을 들고 공격 준비 중이었던 불경한눈깔이 믄님에게 헤드 샷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믄님 님이 적군을 처리하였습니다.]
물 정령 궁극기도 끝났다. 유리가 깨지는 효과와 함께 적군이 낙하하고 있었고 HP는 당연히 아주 소량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 궁극기의 대미지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아군이 전장을 끝낼 상태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으니까.
1Kill.
2Kill.
3Kill.
4Kill.
[적군이 전멸하였습니다.]
[아군의 사기가 올라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연속으로 올라오는 메시지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사실상 게임이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