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누군가의 워너비 (21/21)

20. 누군가의 워너비

[작성자:앵그리보드

제목: 위너 길드전 처 발린 거 봄? ㅋㅋㅋㅋㅋㅋㅋ

내용: 개 사이닼ㅋㅋㅋㅋ 그동안 대형 길드라고 존나 나대고 다녔는데 신생 길드한테 발렸넼ㅋㅋㅋㅋㅋㅋㅋ 시작하기 전에도 쓸데없이 입 털더니 꼬시닼ㅋㅋㅋㅋ

아직도 믄님이 있던 초창기 길드값 하는 줄 아나? 요즘 랭커도 줄줄이 빠지고 있는데 이 김에 정신 좀 차렸으면ㅉㅉㅉ 근데 무시 받을만 한데 그래도 이겨버린 워너비 길드 머임? ㄷㄷ 내가 진짜 설마 설마 하고 봤는데…….]

└보렌치카: 나도 설마 하고 봤다…….

└응가썰: 22…… 어떻게 이겼지? 싶다가도 길마 전 거너 랭커이고 믄님 보유자에 번트 길드 길마 부캐 소속 있고.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있긴 했던 듯?

└Woo2: 잘하긴 잘했음

[작성자: 가재깡

제목: 나 워너비 길드 들어가고 싶다고 하면 받아줄까?

내용: 염소님 부캐로 막 시작했을 때, 우연히 같이한 적 몇 번 있었는데… 적군이었는데 거너 막 시작한 염소님 비행 궁극기로 잡아서 우리 적군 저격할 수 있게 도와줌 ㅠㅠ 날 기억하실까? 모른 척 노크질 해봐?

유명인이랑 친해지고 싶다!!]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여기 있다, 우리팀 스파이!

└힐러만할꺼여: ㄹㅇ ㅋㅋㅋㅋㅋㅋㅋㅋ 거너 위에 올려주면서 경치 구경도 시켜주고 겸사겸사 적 헤드 샷도 날리게 해주고~

└가재깡: (작성자가 무릎 꿇고 싹싹 빌고 있습니다.)

└형님로드: 아니, 근데 궁극기로 올려줬다고 저격해서 헤드 샷 하는 거너도 실력 대단한 듯ㅋㅋㅋㅋ 몇 킬함?? 더블 킬?

└홍메리: 제노사이드

└힐러만할꺼여: 막판에 떨어지면서 비행사도 맞추고 장렬하게 전사함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추락하면서 저격으로 어케 맞추지? ㄹㅇ;; 신들린 줄

└와기토끼: 저도 워너비 길드에 들어가고 싶은뎅… 뉴비라서 안 되겠죠ㅠㅠㅠ

└염소구더기: 귓말 주세요

└가재깡: 형님 저도요!! 저도!! 저도 제발!!

└└힐러만할꺼여: 님은 틀렸어ㅋㅋㅋㅋㅋ그건 인맥 아니라곸ㅋㅋㅋㅋㅋ 그냥 포기하면 편해

└총각귀신은콩깍쟁이야: 저도 워너비 길드에 들어가고 싶은뎅… 뉴비라서 안되겠죠ㅠㅠㅠ

└힐러만할꺼여: 복붙해도 안된다곸ㅋㅋㅋㅋㅋㅋ

길드전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자유게시판에는 길드전 얘기로 핫한 상태였다. 휴대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길톡 알림이 울렸다.

[이등병: 저 잘 보이려고 얼마 전에 산 새 바지 입고 갈 거예요!]

[초폭: ㅋㅋㅋㅋㅋㅋㅋㅋ나도 새로 산 옷 입고 가야지!]

유독 신나 보이는 막내들의 모습에 픽 웃었다.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길드전에서 이기고 축제 분위기였던 것이 떠올랐다.

오늘은 맛있는 거 먹고 이 기분을 만끽하자는 말에 초팡이 가만히 있던 잔팡네 가게에서 파티라도 하자고 말을 꺼낸 게 화근이었다.

“설마 정모가 실화가 될 줄이야.”

그러자면서 좋아하는 길드원들의 모습에 차마 빠지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 의사를 비쳤지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모가 있는 주말 아침은 무척이나 쾌청했다. 뜨거운 햇살에 미간을 찌푸리니 그 위로 커다란 손바닥이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눈을 깜빡이며 뒤를 쳐다보니 셔츠를 입은 깔끔한 차림의 문정하가 보였다.

“눈부셔.”

본인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머리까지 세팅하고 온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초팡이한테 작정하고 잘 보이려고요?”

“아직도 그 소리야?”

“이상하긴 하잖아요. 남들한테 관심 없는 형이 번호도 교환하고 묘하게 잘해 준다는 게.”

“연애 상담 받으려고 그랬던 거야. 번호는 모르고 톡 아이디만 알고 있을 뿐이고.”

“반대 입장이라도 형 할 말 있어요?”

문정하가 할 말이 없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뒤에서 껴안아 오며 애교를 부리듯 정수리에 뺨을 비비는 행동이 그만 화 풀라고 매달리는 대형견 같았다.

그래, 나도 머리로는 둘이 전혀 그런 낌새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사람 심리라는 게 자꾸 알면서 치졸해져서 문제지.

내가 그래도 문정하를 신경 쓰긴 하구나. 관심도 없었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도 안 했을 텐데.

새삼 문정하를 의식하고 있는 나를 자각하면서 한숨을 내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작게 웃는 그도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질투하는 내 모습이 퍽이나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대형견이 아니라 완전 여우야, 여우.’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도 선수고, 짜증 나는 사람에서 관심이 가는 사람으로 인식 변화도 자연스럽게 시켜놓고.

문정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었지만, 그 손바닥을 조신하게 펴놓고 끙끙거리는 문정하도 웃겨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정모는 서울에서 모이기로 했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 오메가원은 기차를 타고 오기로 했고 그 밖의 인물들은 멀지는 않다며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아직 고등학생이고 거리가 멀어 부모님께 허락을 받지 못한 손머리발발이 참여하지 못하는 걸 제외하면 나머지 길드전을 했던 인원들은 전원 참가였다.

“생각보다 대규모가 되었네요.”

“그나마 잔팡이 오픈 준비 중인 카페에서 모일 수 있었으니 천만다행이네.”

정모 장소를 의논하던 중 초팡이 당사자 허락 없이 잔팡이 카페를 오픈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퍼뜨렸다. 잔팡은 그저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고, 음료 시음도 해 줄 겸 쿨하게 오라고 얘기했다.

적지 않은 인원이 갈 장소를 찾는 것도 일이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도 귀찮다는 그의 말이 아직도 우스워서 미소를 그렸다.

“보면 볼수록 잔팡 님은 형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점이?”

“타인 생각 안 하고 본인 생각을 바로 뱉는 점? 약간 비꼬는 것도 있긴 한데, 정작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꼬리 내리고 져주는 모습도 닮긴 했어요.”

“그런가. 잔팡이랑 초팡이가 둘이 고등학교 친구라고 했지?”

“네. 처음에는 연인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냥 소꿉친구인 모양이더라고요. 성격이 정반대인데 용케 잘 어울린다고 했는데.”

운전하는 문정하가 사탕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딸기 맛 사탕을 입에 넣고 혀를 굴리니 하나를 더 꺼내서 내게 내민다.

그리고 제 입을 가리키는 모습이 넣어달라는 뜻인 것 같아 포장지를 까서 넣어주니 입술에 닿은 내 손가락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다.

“아, 형! 진짜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정모에서는 이런 짓 절대 하지 마요. 알겠죠?”

“알겠어, 노력해 볼게.”

“노력이 아니라 실천을 해요. 형 때문에 실명도 다 까발려지고 이게 뭐예요.”

“그야 그대로 모른 척하면 계속 연락을 무시할 것 같아서 무서워서 그랬지.”

뻔뻔하기도 하다. 저게 무서워한다는 사람의 얼굴인가? 미소를 지으며 정면을 보고 있는 저 잘생긴 옆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길드전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찾아온 문정하도 대책이 없기는 했지만.

…내가 그렇게 잠수라도 탈 줄 알았나? 문을 열어준 내 모습에 안심하며 바로 끌어안던 문정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놓칠까 봐 두려워하던 그 미세한 떨림도 숨기지 않아서 화를 내려던 마음도 수그러들었던 기억이 났다.

정황상 문정하는 분명히 같이 게임하던 도중에 내가 염소구더기라는 걸 확신한 것 같았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아직도 의문이었다.

확신하게 될 만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당황해서 그랬던 거예요. 형이랑 이렇게 사귀게 될 줄도 몰랐는데 사귀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숨길 생각이었으니까요. 근데 형은 어떻게 제가 염소구더기인 걸 의심하고 확신했어요?”

“난 중간에 일부러 눈치를 주는 줄 알았는데. 나는 초반에 몰랐지만 너는 내가 개나소나라는 걸 먼저 눈치채고 조심했었잖아. 그래도 개나소나가 문정하라는 걸 알고 있으니 무의식중에 말실수가 나올 수밖에.”

“그래도 심증일 뿐이잖아요.”

“우기우기가 결정타를 날려줬지.”

“아, 피시방?! 어쩐지 그때 왜 둘이 뜬금없이 같이 게임을 하나 했는… 설마 그때 저랑 우기우기 통화 내용 들은 거 아니죠?”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느낌이었다. 정확한 말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당시에 실례되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눈치를 살피니 문정하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뺨에 닿는 따스한 체온. 안심하라는 듯 가볍게 볼을 문지르는 손길은 낯간지러울 정도로 퍽이나 다정했다.

“신경 쓰지 마. 나도 처음에 너한테 못 할 짓 많이 했었는데, 싫어할 만했지. 알면서도 고백을 받아준 지언이 너한테 오히려 항상 감사하고 있어.”

“형도 본인이 재수 없다는 거 알죠?”

“알긴 하지. 기껏 내숭 부리고 있었는데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도 꽤 충격이었어.”

솔직한 말에 웃었다.

목적지는 꽤 멀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며 가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이대로 둘이서 계속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우리가 마지막인가 봐요. 이등병도 다행히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네요.”

중학생인 영원한이등병이 조금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잔팡네 가게에서 멀지는 않은 곳에 살고 있어서 제일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초팡, 잔팡, 영원한이등병. 이렇게 모여서 먼저 카페 음료를 마시고 있다며 찍어 올린 인증 샷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 나이 때의 개구진 모습을 하고 있는 영원한이등병은 밤톨 머리의 학생이었고, 초팡은 짧은 앞머리와 똑 단발을 하고 브이를 하고 있었다.

연예인들이 자주 하는 처피뱅 스타일의 짧은 앞머리가 잘 어울리는 귀여운 외모가 그녀의 평소 말투와 행동과 잘 어울렸다.

“둘은 생각했던 이미지랑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잔팡 님이 의외네.”

초팡이한테 당하고 살길래 조금도 소심한 사람이 아닐까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고집 있어 보이는 무표정과 초팡보다 조금 긴 머리를 끈으로 묶고 있었다. 생각보다 나이대도 있어 보이고.

카페 창업을 앞두고 있다는 걸 보면 대학생인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는 뜻이겠지. 그 말은 소꿉친구라던 초팡도 나이가 많다는 뜻인가?

의외의 사실을 깨달으며 호칭을 어떻게 하나 싶어 고민하는데 문정하가 주차를 끝내며 말했다.

“도착했어.”

제법 큰 카페였다. 야외에 앉을 수 있는 공간도 준비되어 있고 2층까지 있는 분위기 있는 건물에 감탄하며 차에서 내렸다.

1층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오고 있었는데 창가 쪽에 앉아있던 인물이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발견하고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안에 있는 인물들에게 말하는 모양인지 몇 명이 더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 우리를 보고 있었다.

“엄청 부담스러운데요.”

“미어캣 같네.”

문정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영원한이등병을 보고 웃었다.

은근 귀여운 걸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이야.

어깨를 감싸는 손이 부드럽게 나를 이끌어 입구로 안내했고 그와 동시에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길마님이랑 개소 님이다!! 확실해!!”

안에서 뛰어나온 건지 입구 문을 활짝 열며 작은 키의 여성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는 같이 뛰어나온 영원한이등병이 내 어깨에 올려진 문정하의 손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실화다! 이 커플 실화였어요! 난 몰카인 줄 알았는데! 와, 대박!! 커플은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길마님 얼굴은 처음 보는데, 와… 개소 님 눈 높네요?”

현실에서 마주하니 더 시끄러운 라인이구나. 사운드가 빌 틈을 주지 않고 입구에 들어가기 전부터 요란한 환영 인사에 뻘쭘하게 웃고 있는데 누가 그런 둘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진정해, 이 사람들아. 일단 들어오게 해야지. 어서 와.”

“잔팡 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엉. 너는 염소지? 옆은 개소??”

문정하도 제법 키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쪽도 만만치가 않다.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내밀고 올려다보는 초팡이랑 영원한이등병도 귀엽지만, 나도 작은 편이라서 둘을 올려보다가 이내 손목이 잡혀버렸다. 영원한이등병이 얼른 들어가자며 밝게 말하는 모습에 걸음을 옮겼다.

어색하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정모도 처음이었고.

처음 만나는 걸 어려워하는 내 성격상 현실 모임이 많이 불편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커플 기운 뿜뿜이네요.”

“여기는 자잘 형님! 조금 있다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일찍 도착해서 먼저 얘기 중이었어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자세히봐도잘생김이 차를 마시며 고개를 한 번 까딱거렸다. 심플한 인사에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영원한이등병은 신나 보이는 얼굴로 마저 일행들을 소개했다.

“막내 길마님, 하이.”

“여기는 오메가 형님! 말투 들으면 딱 알죠?”

“제일 멀리서 오셨는데 일찍 도착하셨네요.”

“ktx 타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아.”

안경을 끼고 아이스 초코라테를 마시는 오메가원은 생각보다 편해 보였다.

게임과 똑같은 모습에 신기했다. 성별도, 연령도, 직업도 물어보지 않아서 바로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알고 있는 특징과 비슷해서 소개받는 재미도 있었고.

그럼 남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뒤따라온 문정하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구두를 신고 있어도 꽤 키가 큰, 카리스마가 있는 여성이었는데, 문정하가 대신 소개했다.

“방금 들어오셔서 먼저 인사했는데 도리두리 님이래.”

“잠깐 담배 피우고 왔는데 다들 모였네요. 염소 님,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전 존대가 편해서 그러니까 염소 님은 편하게 하셔도 돼요.”

하긴 도리두리는 게임에서도 웬만하면 존대를 하는 인물이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한 명이다. 사실 가장 기대했던 인물이었고 평생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던 인물이라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믄님은 잠깐 화장실 가셨는데 금방 오실… 아, 저기 오네요.”

초팡이 도리두리에게 폭 안겨서 쓰다듬을 받으면서 설명을 설명하다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도 모르게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한 인물이 보였다.

눈을 살짝 덮는 앞머리가 귀찮았던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슥 넘기는 단정한 얼굴. 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너무나도 수려한 외모에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문정하가 남자답게 잘생겼고 황보욱이 화려하게 잘생긴 얼굴이라면 눈앞의 인물은 아름다웠다.

청초하다는 말을 같은 남자에게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어울리는 말을 찾기는 힘들겠지.

쏠리는 시선들을 느낀 모양인지 믄님이 고개를 들어 나와 문정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다시금 멈춘 곳은 나였다.

그의 눈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살짝 휘었다.

“염소?”

“므, 믄님……!”

연예인을 미친 듯 좋아해 본 적은 없지만, 팬 사인회를 간 사람들이 이런 심정이 아닐까. 눈물을 글썽이며 뛰어가려는 내 허리를 문정하가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믄님에게 달려가 껴안을 뻔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믄님은 상상 속의 모습과 전혀 달랐지만 그 말투나 분위기는 너무 비슷해서 감동적이었다.

“와, 지언아. 내가 질투해야 하는 상황 맞지? 너무 눈에서 꿀 떨어지는 것 같은데.”

“조만간 개소 님 차인다에 한 표.”

“정모 끝나고 바로 차인다에 두 표.”

“믄님 보다가 고개 돌리는 순간 차인다에 세 표.”

“아니, 이것들이.”

다 들릴 정도로 속닥거리는 길드원들의 모습에 문정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서로 나이도 차이가 많이 나는데 스스럼없는 모습들이 웃기고 재밌었다.

이렇게 편할 줄이야.

믄님이 자세히봐도잘생김 옆에 자연스럽게 착석하니 그 앞으로 케이크가 놓여졌다. 화려하게 장식된 초코케이크에 믄님이 시선을 들어 올리니 거기에는 무심한 표정의 잔팡이 있었다.

“먹어보고 후기라도 말해 주든가.”

“저도 초코케이크 좋아해요!”

“나도.”

영원한이등병과 오메가원이 포크를 들어 올리며 말했지만, 잔팡의 시선은 믄님에게만 고정돼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쳐다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던 믄님은 케이크를 그대로 영원한이등병 앞으로 쭉 내밀었다.

“난 단 건 별로.”

“잔팡이 차였네.”

초팡이 킬킬 웃으며 말하자 잔팡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초팡이 슬쩍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잔팡이가 예쁜 걸 좋아하거든. 막내 길마님도 조심해.”

“난 예쁜 건 아닌데. 아니, 그보다 믄님도 허용 대상이야?”

“잔팡이도 개소 님이랑 똑같아.”

닮은 점이 많다고 했더니 설마 이런 것까지 닮았을 줄이야. 아직도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문정하의 팔을 힐끔 내려다본 초팡이 덧붙였다.

“그래도 질투는 개소 님이 더 심한 듯?”

그러고 보니 아직도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었구나.

손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자 뚱한 얼굴로 그제야 손을 푼다. 문정하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잔팡은 요리를 가지고 오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빠졌는데도 여전히 많은 인원수였다.

오메가원 옆에 앉은 가장 아기 티가 나는 영원한이등병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다들 모여있으니 너무 좋네요! 이번 길드전도 이겨서 위너 길드에 제대로 똥 먹여줄 수 있었고!”

“우리한테 방심해서 1라운드에서 진 게 제일 크지. 예이!”

“예이!”

짝, 가볍게 허공에서 부딪히는 손바닥이 경쾌한 울림을 만들었다.

“여기서는 양식은 팔지만 전부 잔팡이가 만들면 힘들 것 같아서 제가 치킨이랑 족발도 시켰어요!”

“돈은? 더치페이해요.”

내가 서둘러 말하니 초팡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씨익 웃었다. 가리키는 손가락은 내 옆을 향했고 문정하를 바라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주소 물어보고 오는 길에 내가 주문해 놨어.”

“연애 상담해 준 보답으로 맛있는 거 사주기로 했었거든요! 어차피 둘이서 먹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렇게 모여있을 때 왕창 뜯어먹으려고요!”

“아, 그럼 편하게 먹어도 되겠네.”

“여기서 제일 부자들이 개소 님이랑 잔팡이 같은데 우리는 편하게 얻어먹읍시다!”

“찬성!”

오메가원이 신나게 동조했다. 기차비 왕복도 적지 않았다며 덧붙이는 말이 제법 불쌍하게 들려서 웃겼다.

카페 크기가 큰 만큼 브런치 메뉴도 준비하고 있는지 빵과 파스타가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 음식도 도착했다. 넓은 테이블에 순식간에 많은 음식이 가득 차자 영원한이등병이 행복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다들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잔팡 님! 개소 님!”

인사 한마디도 시끌벅적하다.

문정하가 덜어준 음식을 입에 넣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명이라도 소외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다들 잘 어울리고 있었다.

조용한 믄님도 걱정했던 것과 달리 연상인 듯한 자세히봐도잘생김의 챙겨줌을 자연스럽게 받고 있었고 잔팡이 그에 질세라 다른 음식을 챙겨주는 모습이 보였다.

“믄님도 대학생인가요?”

“응.”

“몇 학년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3학년.”

“그럼 군대도 다녀오셨겠네요.”

믄님은 계속 단답형으로 대답해 주었지만 그마저도 그저 즐거웠다.

헤실헤실 풀린 내 모습이 낯설었는지 빤히 쳐다보던 문정하가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꽉 쥐어왔다. 놀라서 쳐다보니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다가와 속삭인다.

“형은 안 봐줄 거야?”

초팡이 말대로 질투는 이 사람을 이길 사람이 없겠네. 고작 말 몇 마디 좀 나눴다고 질투하는 사람이라니.

손깍지를 끼고 앙탈을 부리듯 손바닥을 엄지손가락으로 은근히 문질러 왔다. 마치 저를 좀 챙겨주고 봐달라는 듯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웃으며 마주 잡은 손을 꽉 쥐었다. 그에 더 놀라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져 마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형 하는 거 보고 예뻐해 줄게요.”

“아…….”

앓는 소리를 내며 문정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귀가 빨개져서 문질러 보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손을 드는데,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먹는 걸 멈추고 빤히 쳐다보는 길드원들의 모습에 내 얼굴도 벌게졌다.

초팡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문의 우리 지언이가 길마님이셨네?”

“2라운드 할 때 너무 달콤해서 귀가 녹을 뻔했던 주인공들이네요.”

“부럽다, 부러워~ 게임도 하고 길드전도 이기고 연애도 하고!”

“그만 놀리세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니 다들 더 크게 웃는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민망해하는데 그런 나를 옆에서 누군가가 끌어안았다. 문정하 놈이었다.

“그래, 놀리면서 예뻐하는 건 개나소나 전용인데?”

“헐. 개소 형님 양심도 없어! 솔직히 초반 개소 형님은 그냥 싸가지의 결정체였는데!”

“그건 인정.”

“이등병은 먹던 거 뺏기고 싶나 봐?”

이제 막 닭 다리를 주워 들던 영원한이등병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치킨 상자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 우리 모인 김에 끝나고 다 같이 피시방 갈래요?! 재밌을 것 같은데!”

“하긴 어차피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아쉽고 이등병이 있으면 술집은 못가니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아, 술은 몸에 나빠요! 몸에 좋은 게임 해요!”

“그건 무슨 논리지?”

“워너비만의 논리!!”

징징거리는 영원한이등병의 지원사격을 하며 초팡이 시원스레 웃으며 덧붙였다.

다들 공통된 건 게임밖에 없으니 2차 장소는 자연스럽게 피시방으로 정해졌다.

웃으며 먹고 떠들던 일행들은 순식간에 자리를 정리하고는 앞장서는 초팡이를 따라 움직였다.

뒤에서 문정하와 같이 따라가던 나는 카페 내에 있는 전신 거울을 보다가 문정하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도 큰 반항 없이 딸려왔다.

우리는 나란히 거울 앞에 섰다.

“자, 보세요.”

뜬금없는 제안에 문정하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콧방귀를 뀌며 거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인 만들면 소개해 달라면서요. 어떤 놈인지 궁금하다고.”

연상이기는 하지만, 탈모도 아니고 임자가 있는 놈도 아니고 욕을 하는 놈도 아니었다.

그제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은 문정하가 웃었다.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래. 이렇게 보니까 지언이가 아까운 거 알겠다.”

“본인 얼굴에 대한 자각이 없으세요? 형 진짜 잘생겼거든요.”

“내 얼굴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했구나.”

뚱한 내 얼굴에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박한 웃음이 유독 내게는 헤픈 놈이었다.

“그러니까 솔깃했죠. 형은 진짜 솔직히 얼굴로 절반 이상 점수 따고 들어왔어요.”

“그럼 다행이네.”

“고작 바퀴벌레 잡아 준 걸로 저한테 호감을 가진 게 말이 돼요? 더 그럴듯한 걸로 좋아하지.”

내 핀잔에 그가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이어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은 누구보다 다정했다.

“너한테 별 게 아니더라도 나한테는 의미 있었어.”

밖으로 나간 일행들이 얼른 안 나오냐며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워너비’ 길드원들을 보며 문정하가 덧붙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누군가의 워너비가 될 조건은 사소할 테니까.”

모두의 워너비가 될 수는 없더라도 단 한 사람의 진정한 워너비가 된다면, 그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겠지.

말은 그럴듯하게 잘한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기분은 좋아서 웃었다.

그래,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당신에게 의미가 있다면 내게도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변변치 못한 내가 당신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어서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초팡이 한 번 더 재촉하려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황급히 영원한이등병의 눈을 가렸다.

“초팡 누님, 갑자기 뭐예요!?”

“쉿. 아기는 조용조용. 아직 너한테는 이르다.”

“네? 갑자기 무슨 소리인데??”

“그런 게 있어.”

초팡은 문정하의 멱살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는 적극적인 길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길드전 때 이후로 서먹해지지는 않았을까 은근히 걱정했는데, 역시 사랑 싸움은 무시가 정답이었다.

“해피 엔딩이네. 길드전도 누군가에게도.”

누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덤덤히 들려왔다. 그 뒤를 누군가의 웃음이 따라붙었다. 소소하지만 행복함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누군가의 워너비 완결)

누군가의 워너비 3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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