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돌아간 후 저녁 식사를 먹고 내 방으로 돌아와 준비물인 티슈를 내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고 잡지책을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 말대로 내가 전에 접했던 책처럼 유익한 성에 대해서 알려 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몰랐던 세상이 담겨 있는 것은 확실했다. 짤막하게 성에 관한 고민이나 상담 글이 실려 있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알지 못했던 자위 방법이라든지, 어떻게 하면 좀 더 흥분되고 짜릿한 섹스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이 경험담으로 적혀 있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내가 몰라서 하지 못했던 자위에 관한 글이 적힌 부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을 해서 글을 읽었다. 수업 중에는 대략적으로 선생님이 설명해 줬었지만 꼬치꼬치 캐묻기에는 민망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기에 이렇게 혼자서 글로 읽으니 조금 더 와닿는 것 같았다.
내가 꼭 몰래 무언가를 도모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긴장이 되고 조금은 떨렸다. 고작 성인 잡지 하나 보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헐벗은 여자들의 사진은 내 흥미를 끌지 못했고, 이렇게 남몰래 성인 잡지를 본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감흥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글을 보면서 나는 손을 슬쩍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속옷 위로 조금 묵직해진 성기가 느껴졌다. 침대에 엎드려서 잡지를 보고 있었기에 살짝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잡지 내용을 참고하면서 손으로 슬쩍 ‘야한 생각’을 하며 만져 보려 했다. 근데 야한 생각이라는 걸 잘 안 해 봐서인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자위를 해 보기로 한 이상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여자들을 꺼내 보았다. 잡지책에 있는 여자들도 떠올려 보았고, TV에서 보았던 연예인들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일주일 전 몽정을 했던 밤으로 거슬러 갔다. 하체를 발가벗은 채로 몰래 면도를 하다 그에게 발각됐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그날 수치스럽고, 창피하고, 부끄러웠었다.
“읏!”
짜릿한 느낌과 함께 갑자기 터진 음성에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내 손에 잡히는 성기가 어느새 딱딱해져 있었다. 엎드린 자세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리고 우뚝 솟은 내 아래를 확인했다. 발기가 처음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자극해서 세운 적은 처음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한동안 쳐다보다가 다시 손을 뻗어 솟은 바지 위를 톡톡 건드렸다. 저릿저릿한 느낌이 건드린 부분에서부터 전해졌다. 오싹하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하고 오금이 절로 튀었다.
생경한 느낌에 나는 가만가만 손바닥을 펼쳐 문질렀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른다면 이렇게 쓰다듬어 줘야지 한 손짓으로 내 성기를 쓰다듬다 감싸 잡았다. 뭔가 부족했다. 면직물이 감촉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눈을 꾹 감고 손을 속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뜨끈한 단단함이 내 축축한 손바닥에 감겼을 때 나는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누가 내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속옷 안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우뚝 서 있는 중심을 가리려 이불을 덮었다. 잡지책은 베개 밑으로 숨겼다. 2초 정도 지났을까?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간결하게 두 번.
당황한 나는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늦은 저녁을 지나 밤이 되려 하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누구일까?
환히 켜 있는 방 불을 끌 시간은 없었다. 나는 서둘러 침대에 옆으로 돌아누웠다. 급하게 눕는 바람에 베개에 얼굴 반쪽이 파묻혔다. 답답해서 다시 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꾹 감고 숨을 죽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난 소리 없이 조용한 관장님의 발소리를 제외한 이 저택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노크를 하고 거침없이 방 안을 누비는 발소리. 그였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발기한 성기가 아린 것처럼 아파 왔다.
얇은 눈꺼풀이 흔들려 내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들킬 수도 있으니 눈동자를 굴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속눈썹이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쉬던 숨마저 멈춘 채 그가 내 방에 무슨 볼일로 들어왔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베개에 반쯤 파묻혀서 얼굴이 찌그러져 보기 흉할 텐데, 걱정이 앞섰다.
거침없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불 밖으로 나온 손에 땀이 절로 고였다. 그가 들어오기 전에 하던 행위가 머릿속을 흔들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 지금 나의 청각과 후각은 온통 그에게 쏠려 있었다. 바닥을 스치는 소리,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숨소리, 또 무겁고 나른한 어른의 향수 냄새 모두가 나를 자극했다.
“자는 건가?”
그의 음성에 움찔하고 몸을 떨지 않게 조심했다. 만약 내가 자는 척을 하지 않고 그를 맞이했다면, 아니면 내가 자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내게 무슨 이유로 내 방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검은 시야가 더욱 검게 내려앉았다. 그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기척이 느껴졌다. 코끝으로 그의 향이 훅 하고 치고 들어왔다. 아아, 나는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하마터면 앓는 소리를 낼 뻔했다.
침 삼키는 것도 하지 못하고 양쪽 턱이 뻐근해지도록 숨을 얕게 조금씩 나눠 쉬었다. 그가 나를 오랫동안 지켜볼수록 고통은 커져 갔지만 그만큼 흥분도 더해져만 갔다. 성기가 아릿함을 넘어서 팽팽함에 고통스러워질 즈음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다시 났다. 속삭이듯이 저 멀리 멀어지는 소리와 함께 방 불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 꺼진 어두운 방. 얇은 눈꺼풀 너머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방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그가 나갔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손을 이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허리에 걸쳐진 바지를 지나 속옷을 향해 움직였다.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망설임 없는 행동이었다. 갑갑하게 느껴지는 속옷과 바지를 반쯤 벗어 버리고 발딱 발기한 내 성기를 움켜잡았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잡지책을 꼼꼼히 읽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뜨끈하다 못해 뜨거운 내 성기의 표피를 축축한 손으로 느릿느릿 쓸어 올렸다. 저절로 허리가 파닥파닥 튀었다. 신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나를 자극하는 모든 것들이 둥둥 떠다니며 내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의 체취, 그의 소리, 그의 다정함들이 내 손의 움직임을 재촉했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혀가 나오고 손짓이 빨라졌다. 탁탁 소리가 고요한 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고조되는 흥분에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에 발끝에 힘을 주었다. 날아갈 것 같았다. 이대로 날아가 공기 중에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처음 접해 보는 느낌에 무서운 마음과는 달리 내 손은 멈출 줄 몰랐고, 감은 눈 속에서 둥둥 떠다니던 것들 중에 하나인 나의 입술을 쓸어 주던 그의 손길이 내 성기 끝에 머무는 착각에 휩싸였을 때.
“아앗! 흐…읏……!”
환희에 사로잡혔다.
“하…아…… 하아.”
코끝과 눈에 열이 몰리더니 관자놀이가 뜨듯해졌다가 시원해졌다. 나는 울고 있었다. 손안에 울컥거리며 쏟아진 따듯한 점액질이 감격스러웠다. 티슈를 준비했지만 차마 닦지도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아직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내 스스로가 가로막혀 있던 하나의 세상을 뚫었다. 그를 향한 열망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행하게 하였다. 눈물이 멈추질 않고 하염없이 흘렀다. 이 눈물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열에 들뜬 감정은 쉬이 식지 않았고 온몸이 노곤하게 끓어올라 아프기까지 했다. 상비하고 있는 해열제를 꼭꼭 씹어 물을 넘기고 관장님께서 주신 사탕을 내내 빨아 먹으며 새벽을 견디어 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나는 의연했다. 오히려 잠을 자지 못하는 동안 그를 생각하며 사정했던 아까의 시간을 곱씹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그를 알아 버렸고, 사랑하게 되었다. 또한 그를 그리며 열망과 환희를 염원하게 되었다. 나의 형인 그를, 회장님의 아들인 그를, 관장님의 아들인 그를, 내가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점점 시들어 말라 가는 나의 욕망은 커다란 감정을 선사해 준 그를 갖진 못하더라도 곁에 머무르고 싶은 것이었다. 비겁하고 못난 욕심이 내 안 깊숙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 6시가 안 된 시각에 눈이 떠졌다. 밤을 지새우다 한 시간 조금 안 되게 잠이 들었다 깬 것이었다. 나는 그가 화장실을 이용하기 전에 먼저 쓰기로 했다. 식은땀을 흘리느라 몸이 좀 찝찝하기도 했고 식사 시간에 그의 옆에 앉아 있을 때 안 좋은 냄새라도 풍길까 싶어 아침부터 샤워를 하고 싶었다.
어제의 흔적들인 뭉친 티슈와, 새 속옷을 챙겨 들어 방을 나섰다. 벽에 걸린 미등이 어두운 복도를 은근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차피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시각이라 나는 잠옷 차림에 맨발인 상태였다. 복도의 대리석 바닥은 내 방에 비해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웠다. 많이 걷지 않는 덕분에 얇디얇은 거죽의 발바닥을 갖고 있는 나는 머리끝까지 시린 온도에 서둘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기로 뜨거운 온수를 틀어 놓고 세면대 앞에서 양치를 했다. 회장님의 저택에서 살게 된 뒤로 나는 아주 조금씩 ‘빨리빨리’에 적응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멍하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다가 양치를 끝낸 뒤 샤워기 물을 틀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한 번에 두 가지를 해내려고 나름 노력 중이었다. 곧 있으면 그가 샤워하러 나올 시간이었기에 나는 손놀림을 빠르게 놀려 양치를 마친 뒤 옷을 벗고 샤워 부스 안 물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정수리부터 타고 내리는 따듯함에 나는 양손으로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살집이 없는 마른 몸이 물기에 젖어 미끄럽게 만져졌다. 거품을 내어 문질문질 닦아 낼수록 근육일랑 하나 없는 몸에 작게 한숨이 나왔다. 발끝과 손끝, 팔꿈치나 발꿈치는 분홍빛에 가까웠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몸이라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떠올랐다. 그의 벗은 몸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나와 같은 몸이 아니었다. 재킷을 걸치지 않고 셔츠만 입었을 때 보이는 그의 몸은 작은 움직임에도 꼭 맞는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지곤 했는데 섬세한 근육이 드러날 정도였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생동감 있는 근육이 내 몸과 확연히 대조됐다.
따듯한 물 아래 서 있기 때문일까? 양 뺨이 뜨거워졌다. 내 몸을 닦아 내리며 그의 몸을 상상해서일까? 발끝이 저릿해지고 성기가 달아올랐다. 어제 수업을 하면서 선생님이 남자들은 보통 여자들을 보면 흥분하고 성욕이 인다고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남자인 그를 보고, 이복형인 그를 떠올리며 흥분했다.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꼭꼭 숨겨져 있던 것이 뒤늦게 발현한 탓인지 이제 참을 수가 없어졌나 보다. 나의 성기가 무섭게 부풀어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샤워기의 물이 따가울 정도였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런 상황은 없었다. 자주 있어 봐야 한두 달 기간으로 되던 발기가 하루 만에 다시 되었다. 깨달은 열망이 내게 무서움을 안겨 주었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끼쳐 오는 두려움에 온수로 향해 있던 레버를 황급히 냉수로 돌렸다.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끝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뜨거웠던 몸이 차갑게 식길 바라며, 나의 들뜬 열망이 조금이라도 식길 바라며 나는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이가 서로 맞부딪칠 때까지 서 있었다. 이렇게 있다간 또 폐렴이 올지 몰랐지만 나를 잡아 삼키려는 욕망을 피하고 싶었다.
원래도 질색하는 차가운 물을 평소보다 오래 맞았던 탓인지 몸에 한기가 돌았다. 나는 보들보들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 냈다. 나의 성기는 다시 축 늘어진 상태였다. 속옷을 꿰어 입고 위로 면 옷을 걸쳐 입었다. 오늘은 수업도 없는 날이니 도톰하고 편한 면직물로 된 옷이 옷장에 걸려 있었다. 한창 봄이었지만 나는 항상 날씨에 뒤떨어지는 옷을 입곤 했으니 불만은 없었다.
냉기가 도는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딛는 대리석 바닥은 역시나 차가웠다.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움을 적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한 발, 한 발 적응이 되도록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벽을 붙잡고 걷는 내 꼴이 우스웠다. 메마른 손끝에 닿는 패브릭 소재의 벽이 버석하게 느껴졌다.
그가 샤워하러 나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전에 우스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차갑게 식은 몸과 반대로 자꾸만 뜨겁게 달아오르려 하는 정신이 나를 흐트러지게 했다. 내 방으로 가는 걸음이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저 멀리서 그의 방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막 자고 일어났는지 굉장히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동안 슈트를 잘 차려입은 모습만 보았었다. 같은 저택에 살고 있어도 그가 출근을 하거나 퇴근한 모습만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러 갈 때에도 방문 뒤에서 귀를 기울이는 일은 있어도 문을 열어 눈으로 보는 짓은 하지 않았었다. 그의 무방비한 모습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직까진 쌀쌀한 아침이었음에도 그의 상체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로 하체는 긴 트레이닝 바지가 전부였다. 나는 아까 샤워를 하며 상상했던 그의 몸이 실제로 눈앞에 드러나자 머릿속이 아연해졌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단단했고 윤곽의 선이 거칠었다. 자극적이고 광포한 그의 몸에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엉덩이가 부딪쳤다. 이 시간에 나를 발견한 그의 눈이 잠시 의아함으로 가늘어지다 평소의 크기로 돌아왔다. 몇 주를 넘고 달이 넘는 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상황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른 아침 그의 주위를 맴돌지 않고 숨어만 있던 내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띈 나를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성큼성큼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가까워지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볼 뿐이었다. 키가 큰 그를 올려 보느라 한껏 꺾여 있던 내 고개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그는 내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맨 상체에서 살 내음이 훅하고 내 코로 스며 들어왔다.
“아…안녕하세요.”
나의 입에서 멍청이 같은 인사가 튀어나왔다. 이런 멍청함 때문인지 그의 표정이 언뜻 까칠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이러고 있어.”
그의 짙은 눈동자가 나를 쫓고 있었다. 아직 축축이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파랗게 얼어붙은 손끝, 아마도 손끝과 같이 얼어붙었을 내 입술이 그의 시선에 녹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한 질문에 대답하려 입을 벙긋거렸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못했다. 느린 내 대답을 참지 못하고 그가 내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기 때문이다.
가슴속 깊이 식어 있던 욕망이 불꽃이 되어 터져 올랐다.
따듯한 그의 손이 차가운 나의 뺨을 감싸자 나는 그 커다랗고 안락한 손바닥에 그만 고개를 기대고 말았다. 눈을 감고 거칠면서도 한없이 따듯한 그의 체온을 느꼈다.
“몸이 얼음장같이 차가워.”
한 손은 내 뺨을 감싸 쥐고 남은 손으로 내 목덜미와 팔뚝을 쓸어내리며 그가 말했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손길을 받는 고양이처럼 늘어져 있었다. 아까 그를 향한 열망에 정복되어 두려움에 떤 것이 무색할 만큼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좋음도 순간이었다. 그의 한 손이 나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내 뺨이 기대고 있던 따듯한 손이 다리 아래로 쑥 들어왔다. 나는 그의 몸에 더 가깝게 밀착되었다. 내 뺨이 그의 맨 가슴팍 어딘가에 닿았다. 그의 체취와 체온이 더 강하게 들이닥쳤다. 내 온몸에 뜨거운 불길이 닿는 것 같았다. 몸이 두둥실 떠오르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머리 위에서 낮은 음성이 스산하게 터졌다. 나는 눈앞에 바로 보이는 맨 상체를 보고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턱을 보았다. 말을 하느라 움직이는 그의 턱엔 푸르스름하게 수염이 자라 있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왜 미련하게 널브러져 있어.”
나를 안고 내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는 내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말투는 사납고 거침없었으나 축 늘어져 자신의 상체에 몸을 밀착하는 나를 안아 든 품은 말투와 다르게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따듯한 그의 품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아프니까, 몸이 좋지 않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픔을 앞세운 핑계와 용기를 무기 삼아 나는 손을 들어 그의 턱을 매만졌다. 까끌한 수염이 느껴졌다. 충동적인 내 행동에 그가 내려다보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내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 것 같기도 하다. 그도 눈치챘을까?
“…….”
엉뚱한 나의 행동에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불쾌하지도, 의아하지도 않은 표정에 내가 오히려 민망해졌다. 그래서 또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따갑네요.”
“…….”
“저는 수염이 없잖아요. 실제로 만져 보니 따가워요.”
턱을 만진 그럴듯한 이유를 대자 그가 바람 빠지는 헛웃음을 냈다. 나는 손끝에 머무는 턱의 감촉을 조금 더 느끼고 싶어서 느릿하게 다시 꼼지락거리며 매만졌다. 그가 싫다고 하면 떼어 낼 생각이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나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
“숨은, 쉴 만해?”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이 순간이 계속되도록 화장실과 내 방의 거리가 엿가락처럼 늘어나길 소망했다. 하지만 그의 거침없는 걸음은 어느새 내 방문 앞에 다다랐다. 따듯한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본능적임 마음에 놀고 있던 손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는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로 향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내 침대가 코앞이었다.
“아침 먹으러 내려오지 마.”
“……배고픈데요.”
실은 배고프지 않았다. 그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곧 있을 아침 식사에도 내려오지 말라는 건 오늘 이대로 그와 헤어지고 하루 종일 볼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방의 훈기가 나의 식은 몸을 녹이기 시작했으나 미련한 짓의 결과로 몸에 열이 끓어올랐다. 저번처럼 폐렴으로 도질 기세였다. 그렇게 되면 나는 또 방에서 하염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그의 체온과 상냥함을 받은 대가로 그를 한동안 볼 수 없게 된다.
“저도 밥 먹을래요.”
“……왜 항상 쓸데없는 부분에서 왜 고집을 피우는 거야.”
이불을 걷어 내고 그가 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눕지도, 이불을 덮지도 않고 그를 올려 보았다. 차갑게 식은 발이 시려 왔으나 시위하듯 이불 안으로 넣지 않았다. 하얀 발등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추워 보였다. 그 발 위로 이불이 덮어졌다.
“맨발로 돌아다니지 마. 이 집은 넓어서 난방에도 한계가 있어.”
“……답답한걸요.”
자꾸만 말대꾸를 하는 내가 못마땅한지 그의 눈썹이 꿈틀댔다. 나는 눈을 휘어 살짝 웃었다. 가끔씩 엄마와 유모에게 작은 반항을 할 때 한 번쯤은 봐 달라며 부탁했던 웃음이었다. 이 웃음이 그에게도 통했으면 좋겠다.
“내려가서 한 실장에게 식사 가져오라고 말해 둘게. 여기 있어.”
그가 내 어깨를 지그시 눌러 나를 눕혔다. 어쩔 수 없이 베개에 누운 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이불이 내 턱 밑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내 이마 위로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닿았다.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자꾸만 예기치 않은 그와의 접촉에 더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내 침대 한편에 걸터앉은 그의 모습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매일 이렇게 아팠으면 했다. 내가 아플 때마다 그가 다정해지고 나를 보살펴 주는 일이 생기니까.
“열이 있어.”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열로 머리가 조금 멍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열은 내 동반자 같은 것이기에. 쓸모없는 몸뚱이가 또 말썽을 부렸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이제 곧 열이 진탕 끓을 테지만, 지독한 기침이 시작될 테지만 기뻤다. 그의 관심이, 그의 다정함이 내겐 그 무엇보다 감사했다.
“내일 수업도 취소야.”
“오늘이면 금방 나을 수 있는데. 더 지켜보다가 취소하면 안 돼요?”
“아니, 움직일 생각 말고 얌전히 있어.”
그의 단호한 말에 나는 풀이 죽어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내려뜨렸다. 내 미련한 행동의 결과이지만 매번 이렇게 선생님과의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나의 세상 공부는 지지부진했다.
“이렇게 매일 수업이 취소되면 그럼 공부는 언제 해요?”
“공부가 그렇게 하고 싶어?”
“네, 처음 해 보는 거였어요. 나한테는 선생님도 수업도 없었어요. 엄마와 유모밖에 없었어요.”
“…….”
고개를 돌리고 있기에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도 내 표정을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불퉁거리는 내 목소리는 듣고 있을 것이다. 나는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내 의견을 그에게 피력했다.
“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에겐 말도 잘 못하면서 나는 그의 앞에서만 떼쟁이가 된다. 투정을 부리고 만다.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그렇질 못하고 고집을 피운다. 이런 나의 못남을 그는 말없이 받아 주고 있었다.
“항상 아프기만 하고 바보 천치인 건 싫어요.”
내 투정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실은 재형이가 이제 수업이 어렵게 됐어. 어젯밤 말을 전해 주려 왔는데 자고 있어서 못했어. 지금 말할게.”
“갑자기 선생님은 왜요……? 선생님 무슨 일 생기셨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제만 해도 선생님은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는 말은 없으셨다. 선생님과 많은 수업을 하지 못했지만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진솔하게 받아 주시고 가르쳐 주려 하셨다. 어제 수업만 하더라도 나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딛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었다. 열망, 욕망, 희열을 처음 느끼기도 했다.
“그런 건 없어.”
그는 내게 이유를 알려 주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오지 못했던 선생님의 부재, 또 수척해진 얼굴이 떠올랐고 마지막에서야 지난번 서재 안에서 그와 선생님이 나누던 대화가 기억났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내 세상을 빼앗아 가는 건가?
“그럼 제 공부는요? 선생님이 세상을 알려 주신다고 했는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가 뿌옇게 흐려졌다. 울고 싶지 않은 마음에 눈을 깜박이지 않고 힘을 주었다. 또다시 인형 같은 삶으로 돌아갈 앞날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의 다정함에 의해 충만해졌던 내 마음이 급속도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30분씩이야.”
“…….”
“이틀에 한 번씩, 길게는 안 돼. 30분씩 내 서재에서. 아플 땐 이 방에서.”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나의 시야는 차오른 눈물로 뿌옜고 열이 오르는지라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으려 집중했다.
“내가 가르쳐 줄게.”
마지막 말이 오도카니 내 귓속에 꽂혀 들어왔다. 울고 싶지 않아 힘주었던 눈이 흔들렸다. 투둑, 눈물이 흘러내렸다. 맑아진 시야로 보이는 그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공부 하게 해 줄 테니.”
“…….”
“울지 마.”
아아, 그는 정말로 다정하고 상냥하다. 내서는 안 되는 욕심이 날 만큼. 나에게 따듯했다.
이제는 할 수 없는 선생님과의 수업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그와 하게 될 공부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서 양심이 콕콕 찔렸다. 그래도 나는 이 기꺼움을 즐기기로 했다.
열이 펄펄 끓어 결국 다시 의료용 산소통이 내 방에 들어오고 침대 위에서 생활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번만큼은 슬프지 않았다. 한 실장이 가져다주는 식사를 불평 불만 없이 싹 비워 먹었고, 약도 미루지 않고 꼬박꼬박 먹었다.
나는 이렇게 아픈 것이 아무렇지 않고 일상 중의 한 부분인데 이 저택의 사람들한테는 그렇지가 않았다. 관장님께서는 매일매일 출근 전에 들러 내 상태를 보고 가셨고 한 실장이나 다른 사용인이 내 방 한구석에서 나를 계속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관장님이 나를 보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인사를 하고 가시는 것은 참 좋았으나 한 실장이 내 방에서 계속 있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고 싫었다.
저번에 크게 앓고 나고 또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폐렴이 온 내가 걱정됐는지 관장님이 한 실장에게 나를 돌보라고 하셨다. 비약적으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꼭 내가 언제쯤 숨이 꺼지나 감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오늘부터 내 공부를 봐주기로 한 이후부터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좀 더 따가워졌다.
나는 이런 부정의 눈초리를 본능처럼 잘 알 수 있었다. 고택에서 살았을 때 나를 향한 엄마와 유모의 따스한 애정만 받았던 내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내게 관심을 갖거나 호의를 주는 것을 싫어하는 듯했다.
회장님도 관장님도 그도 주지 않는 눈칫밥을 한 실장이 내게 주고 있었다.
“오늘 수업할 수 있으세요?”
부드러운 달걀죽을 먹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실장이 초를 치는 말을 건넸다. 이틀을 내내 앓다가 겨우 기운을 차리고 미음에서 죽을 먹게 됐다. 나는 오늘 그와 수업을 하기로 했다. 어젯밤 나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그에게 온갖 시위와 회유를 통해 얻은 결과였다.
“할 수 있어요.”
나는 보란 듯이 마지막 달걀죽을 싹싹 긁어서 한입에 넣었다. 조금 벅찼지만 티 내지 않고 꿀꺽 삼켰다. 한 실장이 주는 약도 씩씩하게 털어 마셨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에 고이 모셔 둔 그가 준 초콜릿을 꺼냈다. 이제 딱 세 알밖에 남지 않았다. 관장님께서 주신 사탕과 번갈아 가며 먹었는데도 그랬다. 섬세한 결이 살아 있는 초콜릿을 입 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으며 결들이 부드러워졌다. 혀를 굴리며 달콤함을 만끽하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장님.”
사용인이 부르는 소리였다. 한 실장은 내가 먹은 식기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는 사용인이 한 실장이 건네는 쟁반을 받아 들고 이곳에 온 이유를 말했다.
“지 이사님 아까 오셔서, 식사 중이세요. 한 시간 뒤에 영우 도련님 공부 시작하신다고 하셔요.”
“이사님 오신 걸 이제야 말하면 어떡해?”
사용인은 고개를 숙이며 한 실장의 채근을 받아 냈다. 영우는 날이 선 한 실장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지라 조금 긴장됐다. 이 저택 주인들의 귀가를 책임지는 한 실장에게는 그를 맞이하는 것이 굉장한 중요한 일이었다.
“아…… 저 그게, 실장님은 영우 도련님 식사 시중들고 있다고 하니, 이사님이 따로 내려올 필요 없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눈치를 보며 말하는 사용인의 표정은 어딘가 민망해 보였다. 한 실장이 내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기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뒤로 느껴지는 아우라가 그녀가 이 상황이 매우 언짢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거 이리 내. 내가 나가 볼게. 영우 도련님 곁에 있어.”
“네, 실장님.”
한 실장은 내게 나가 본다고 말하는 것도 잊었는지 사용인에게 주었던 쟁반을 빼앗아 방에서 나가 버렸다. 한 번 정도는 귀가를 못 챙길 수도 있는 것인데 뭘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그가 따로 내려올 필요 없다고까지 말했는데도 말이다.
“영우 도련님,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사용인이 다가와 살갑게 내게 물었다. 사용인 눈에 비치는 나는 어린 나이에 병든, 회장님의 불쌍한 혼외자여서인지 기본적으로 다들 친절한 편이었다.
“링거 교체해야 할 것 같아요.”
수액이 얼마 남지 않아 팩 바닥에 얇게 고여 있었다. 그와 공부할 때 교체하게 되면 방해가 되니까 미리 해 두고 싶었다. 사용인이 링거를 한번 보고 다시 방문으로 향했다.
“네. 간호사 불러올게요.”
사용인이 나가고 혼자가 되었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게 되니 갑갑한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다. 식사를 한 뒤라 눕기 부담스러운 나는 베개를 여러 개 겹쳐서 침대 헤드 앞에 놓고 몸을 기댔다. 양치를 하고 싶었지만 배 속에 무언가를 넣어서인지 잠이 노곤하게 몰려왔다. 조금만 졸고 양치를 할까? 아니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면 그와의 수업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졸음을 참으며 간호사와 사용인이 링거를 교체하러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용인의 시중을 받으며 양치까지 마쳤다. 현재 내 옷은 부드러운 면 잠옷이었다. 아이보리색에 헐렁한 목 부근은 라운드 모양이고 단추가 다섯 개 달려 있다. 소매는 7부라 조금 짧아 언뜻 멍청해 보였다. 정말 인형이 입을 것 같은 옷이었다.
옷장을 뒤져 보았으나 비슷한 스타일의 옷들뿐이었다. 나는 이 집안의 귀한 도련님이기 때문에 그들이 맞춰 주는 대로 입었었다. 매일매일 신경 써서 고른 옷들이 하나씩 또는 두 개씩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앓는 중이라 그런지 잠옷뿐이었다.
비록 30분짜리 수업이어도 그와의 공부가 있는데 잠옷을 입은 채 맞이하기 싫었다. 뒤져도 안 나오는 걸 알지만 미련을 못 버리고 옷장 앞을 서성이자 사용인이 물었다.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
“옷이요.”
“네?”
“잠옷 말고 다른 옷 없어요?”
“한 실장님께서 챙겨 주신 것 중에 다른 옷은 없었습니다.”
사용인이 곤란한 듯 웃으며 말했다. 나는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런 나를 눈치챘는지 사용인은 한 실장 대신 변명을 해 주었다.
“지금 몸이 좋지 않으셔서 일상복은 불편하실 거라고 부러 편한 옷들로만 준비하셨어요.”
아닐 거다. 한 실장은 일부러 멍청해 보이는 옷들로만 걸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와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그녀가 작은 심술을 부린 것 같았다. 평소에 선생님이 와서 수업할 때는 ‘공부’ 옷을 따로 마련해 줬으면서 이제 와서 준비해 주지 않는 것이 이상한 거였다.
나는 사용인에게 옷을 갖다 달라고 고집 피울 수 없었다. 곤란한 표정의 그녀를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터덜터덜 기운 없는 몸짓으로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는 식사할 때나 설치하는 트레이가 그대로 있는 상태였다. 곧 그와 할 공부를 위해 치우지 않은 것이었다. 트레이 위에는 깨끗한 노트와 간단한 필기도구가 있었다. 선생님과 공부할 때 필요한 잡지는 내 베개 아래에 깔려 있었다. 침대에 앉아 슬쩍 손을 뒤로 해 잡지가 잘 있나 만져 보았다.
이곳은 내 방임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안락처가 되지 못하는 곳이었다. 매일 청소하는 사용인들의 손길이 닿는 곳이었고 무언가를 숨길 곳이 딱히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은밀한 교재를 어디에다 숨겨 놓아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내 베개 밑에 며칠째 감춰 놓고 있었다. 그가 가르쳐 주는 수업에선 꺼내지 못할 교재였다.
매끄러운 재질의 표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마도 저 노크 소리의 주인은 그일 것이다.
“네!”
사용인이 대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소리 내어 대답했다. 그를 맞이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사용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서자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그는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씻고 왔는지 늘 멋있게 올라가 있던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내려와 있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더 어려 보였다.
“이사님,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30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사용인은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하고 내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와 그, 둘만이 남았다. 갑자기 숨 막히는 긴장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토록 바라던 그와의 시간이 떨리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그는 내 침대 근처에 놓인 의자로 다가와 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는데 순간 의아함이 떠올랐다. 나를 가르치러 들어온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펜 한 자루도 없었다.
그는 가지런하게 적당한 간격으로 벌리고 있던 다리를 꼬아 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은 팔짱을 낀 채였다. 늘 첨예한 자세를 하던 그가 방만한 자세로 흐트러졌다.
“네가 공부하고 싶은 세상은 뭐지?”
그는 평소처럼 내게 불쑥 말을 내뱉었다.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는 나는 그가 묻는 질문에 단번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내 베개 아래에 깔린 잡지가 떠올랐다.
“그냥…….”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해도 그는 그저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알고 싶은 세상과 모르는 세상이 많다는 걸 어떻게 전달해야 와닿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긴장한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됐다.
“제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요. 그래서 답답해요.”
“…….”
“알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요. 근데 이래서야 할 수 없으니까.”
내 팔뚝에 꽂힌 링거 바늘을 그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누가 보면 비웃는다는 것도 알아요. 어떻게 세상을 공부로 알 수 있겠어요. 그치만 저는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어리석은 욕심이라는 것도 잘 안다. 이런 몸과 건강으로 공부해야 뭐 한다고, 알아야 뭐 한다고. 남은 생을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조금이라도 덜 고생스럽게 살다 가는 것이 제일 어울리는 삶인데.
“이대로 그냥 살기는 싫어요. 뭐라도 하고 싶어요.”
나는 긴장한 것치고 담담하게 나오는 내 목소리에 내심 놀랐다. 뻣뻣했던 입가는 심지어 부드럽게 풀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회장님이 네게 공부를 권한 것이 큰 의미가 없는 줄은 알고 있겠지?”
잠자코 내 얘기를 듣고 있던 그가 물었다. 회장님이 내게 공부를 시켜 준다고 한 것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회장님은 그저 내게 작은 동정을 베푼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은 네가 어떤 공부를 하는지 크게 관심이 없을 거야.”
“알고 있어요.”
알고 있었다. 회장님에게 엄마와 나는 단순한 소유물 같은 존재였다. 가끔 생각나면 찾아와서 예뻐해 주고 사랑을 주고 가는 그런 존재.
“재형이와 어떤 수업을 했었지?”
나는 차마 잡지책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선생님과 성에 관해 공부를 할 예정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적당하게 둘러댈 말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음, 그게…….”
나는 거짓말에 서툴다.
“그냥, 바깥 얘기하고 간단한 수학이나 영어 같은 거…….”
“그리고?”
그는 나를 파헤치듯이 보고 있었다. 방만한 자세였지만 눈빛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작살에 꿰인 새처럼 꼼짝달싹 못 하고 그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거짓말이 티가 나는 걸까.
“그리고…… 수업을 네 번밖에 듣지 못했어요. 그래서 별다른…….”
“몽정을 한 이유가 그날 수업 때문이었나?”
“…….”
그의 말에 숨이 턱 하니 막혔다. 그는 새벽녘에 마주한 날을 얘기하고 있었다. 세면대에 잠긴 속옷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내게 면도하는 법을 알려 주고 사라진 그였다. 그가 그날을 되짚었다.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나를 그가 빤히 보고 있었다.
“내가 데려다 놓은 선생이야. 수업에 대한 보고는 항상 받고 있었지. 그날 이후로 어쩔까 고민을 좀 해 보았는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당황해 하는 나를 보고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내 수치를 들먹였다.
“정도를 좀 넘어서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너도 김재형도.”
나와 선생님의 은밀한 수업 내용이 이 저택의 막내 도련님 수준에 걸맞지 않은 주제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나에게 직시해 주고 있었다.
“네가 지난 스무 해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현재가 중요하지.”
그에게 나는 서영우가 아닌 그의 이복동생 지영우였다. 이 집안에 어울려야 할 존재.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단, 내 범위 안에서 해.”
선생님이 나의 수업을 못하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왜 내 수업을 자처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내가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었던 은밀한 수업은 그가 보기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보였나 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평생 메여 있던 고삐가 이제야 풀려 드넓은 초원으로 나가는 망아지와도 같았으니까. 그는 이런 나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방목할 생각인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나는 그의 울타리 안에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물음이었다. 배움이 아닌 경험이 될 것이 자명했다.
남은 삶 동안 찬란하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 잠시 스쳐 가는 삶에 나의 마음 한 자락 흘리고 가는 것.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없어도. 비록 나 혼자 불타올라 사라져 버릴지언정.
“그럼 가르쳐 주실 거예요?”
“…….”
“이사님 범위 안에서라면 뭐든지 알려 주실 거예요?”
내겐 절호의 기회였다. 그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나의 이복형이든 아니든 내 맘속에 숨어 있는 욕망이 고개를 자꾸만 치켜들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좋아요.”
나는 결연한 마음이 되었다. 링거 바늘이 꽂히지 않은 팔을 뒤로 뻗어 베개 밑으로 집어넣었다. 곧 매끈한 잡지책이 손에 잡혔다.
말없이 잡지를 꺼내어 그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내가 내민 잡지만 흘끗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앞에서 표지에 이어 책장을 한 장씩 넘겼다. 헐벗은 여자들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애석하게도 나는 이 여자들을 보며 흥분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그랬어요.”
“…….”
“보통의 남자들은 이런 것을 보며 좋아한대요. 이렇게 커다란 엉덩이를 만지고 싶고, 가슴을 빨고 싶고 아무튼…….”
나는 잡지를 뒤적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서늘했는데 그 서늘하고 무관심한 눈빛에 잡지 안의 여자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근데, 저는 이 여자들을 봐도 아무렇지 않아요.”
그가 내게서 잡지를 거두어 갔다. 나는 비어 버린 손을 보다 그를 보았다. 그에게 답을 요구하며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결연한 고백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받아 주었다.
“이런 것을 보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지. 모두 다 같을 순 없어.”
“이사님은요?”
“글쎄…….”
그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스쳐 갔다. 나는 궁금했다.
“우선 이런 원색적인 자료를 보고 흥분할 만큼 궁색하진 않지.”
“그럼요? 그럼 어떨 때…… 흥분하고 어떨 때……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나의 상체가 그에게 가까이 기울었다.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양새가 우스웠지만 괜찮았다.
“궁금해?”
그가 팔짱을 풀며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을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손댈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렇지. 그 아름다움을 안음으로써 충족할 수 있는 성취감이 있다면 더욱이 그렇고. 하지만 아름다움과 성취감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아. 그 외에 하고 싶을 땐 생리적인 욕구를 풀기 위해 하고 싶은 거지.”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요.”
가볍고 단조로운 그의 목소리는 낭독과 같았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알쏭달쏭 어려운 말이었다. 손댈 수 없는 아름다운 것. 그리고 성취감.
“내게 흥분을 가져다주는 것들은 많지 않아.”
그에게 금욕적인 기운과 또 그에 반하는 거칠고 광포한 색욕의 기운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가 손을 들어 자신에게 가까이 닿은 내 얼굴을 그러쥐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가 쥔 것은 내 얼굴이었지만 숨통을 그러쥔 것 같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손길로 열띤 흥분에 사로잡혔다.
“간혹 흥분을 주는 것들이 있어도 내가 취할 수 없는 것들이지.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보통의 섹스란 그저 무의미한 배출과도 같아.”
“배출이요?”
“그래.”
꽉 막혀 나오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가 섹스는 배출과도 같다고 한다. 반면 책에서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행위라고 했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유하기 위해 하는 행위를 그는 배출이라 말한다.
“……그 안에 사랑은 없는 거예요?”
나는 안심하고 싶었다. 그가 다른 이들과 행하는 섹스가 사랑 없는 배출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그와 할 수 없는 행위가 진실로 무의미하길 바랐다.
구름 속을 헤매는 어린아이 같은 질문이었다.
“없어.”
단호한 목소리가 내 마음에 울려 퍼졌다. 안도감에 나는 눈을 감았다. 사랑은 없다고 말하는 그를, 나는 사랑한다.
“그것참…….”
슬프네요. 마지막 말은 내 마음속으로 삼키었다.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 여자들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너도 있겠지.”
“그렇네요.”
“사람들은 모두 다 각자만의 비틀린 세상이 있어. 다들 숨기고 살아갈 뿐이야.”
“…….”
슬프면서도 기뻤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의 비틀린 세상이 나에게 기회를 주면서도, 절망을 안겨 주었다. 어찌 됐든 나와 그는 이루어질 수 없다. 내 비틀린 세상에서 피어오른 사랑만이, 그를 향해 발악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