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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용하고 있는 방을 비우고 있어야 할 때가 있었다. 바로 사용인들이 하루에 한 번씩 청소를 할 때였는데 그때만큼은 방에서 나와 볕 좋은 정원이나, 거실에 앉아 있었다. 딱히 내 공간이랄 곳은 따로 없었다. 내가 들어가 본 타인의 공간은 그의 서재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공부할 때 외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솔직히 이곳에서도 나의 동선은 한정적이었다.
그와 수업을 하고 또 일주일 동안 앓아누웠다. 점점 심해지는 기침 덕분에 30분짜리 수업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호흡기가 좋지 않은 나 때문에 사용인들이 하루에 한 번 방 안에 있는 나를 조심하며 젖은 수건으로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정리하고 가는 것이 다였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그녀들은 일주일 동안 하지 못했던 청소를 드디어 한다는 듯, 점심 식사 전에 나를 방 안에서 몰아냈다.
나는 내 방에서 쫓기듯이 복도로 나왔다. 내 옆으로 새로 정리할 침대 시트와 청소 도구들을 들고 사용인들이 지나갔다. 꼭 역병이라도 들었던 방을 청소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역병까진 아니지만 몹쓸 병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 광경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청소는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넉넉잡아 한 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어디서 이 시간을 보내야 하나 생각했다. 정원에 나가 앉아 있을까, 아니면 거실에 가 있을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고민할 것도 없는 비루한 선택지였다. 저택 안에 있느니 정원이 나을 듯싶어 발걸음을 계단으로 향하며 그의 방을 보았다. 늘 자연스럽게 인사하듯 일상이 된 행동이었다.
늘 견고하게 닫혀 있던 그의 방문이 오늘만큼은 반 뼘 정도 열려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서는 기분을 느꼈다. 평소엔 닫혀 있는 미지의 공간이 나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저곳을 보고 싶다고 머리가 인지하기 전에 내 발걸음이 먼저 움직였다.
사용인들이 청소를 하고 실수로 열어 놓은 그의 공간을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놀렸다. 아무도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도록, 눈치채지 못하도록 발끝에 힘을 주고 한 걸음씩 다가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소에도 내가 그의 방을 구경하고자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몰래 와서 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방문은 단단한 성벽처럼 굳게 닫혀 있었고 나는 그 성벽을 침입할 힘과 용기가 없었다.
지금은 그 단단한 성벽에 틈이 있었다. 그 틈을 놓치고 침입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세상 멍청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살짝 열린 틈이 나약한 나를 자극했다. 이제 사랑을 깨달은 나에겐 모든 것이 이유가 되었다.
긴 복도를 지나 내 옆방인 그의 방문 앞에 다다른 나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이미 열려 있는 그의 방은 문고리를 돌리지 않아도 살며시 당기는 힘만으로도 쉽게 열렸다. 긴장으로 양턱에 아프도록 침이 고였다. 목울대가 울릴 정도로 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의 공간에 발을 내디뎠다.
들어오자마자 나는 도둑이 된 심정이었기 때문에 소리 나지 않게 그의 방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쿵쾅쿵쾅 가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방문에 등을 가만히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내 눈앞에 펼쳐질 그의 공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었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숨어 들어온 지금, 심호흡이 필요했다. 눈을 뜨면 보일 그의 공간. 조금이라도 상상을 해 볼걸,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불온한 마음으로 볼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속눈썹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눈을 천천히 떴다.
깜깜한 시야를 벗겨 내고 본 그의 공간은 그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가구 배치가 눈에 띄었는데 내 방보다 훨씬 커다란 그의 방은 썰렁하리만치 깔끔했다. 아주 커다란 침대는 짙은 색의 나무 프레임이 인상적이었다. 내 것처럼 새하얀 시트는 아니었다. 그와 어울리는 짙은 쪽빛이었다. 바닥은 내 방과 같은 어두운 대리석이어서 가구 색과 썩 잘 어울렸다. 서재가 따로 있어서인지 그의 방엔 침대와 양옆으로 놓인 협탁, 그 위의 스탠드, 한쪽 벽면을 통째로 차지한 기하학 무늬가 흰색으로 그려진 검은 바탕의 커다란 그림이 다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방이란 쉬는 것 외에는 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 공간이었다.
내 방과는 다르게 그의 방은 커다란 창을 별개로 발코니가 따로 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보이는 발코니엔 의자는 없지만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엔 재떨이가 올라가 있었다. 아직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의 방을 고개만 돌려 보다가 내 발을 속박하는 실내화를 벗었다. 그리고 양말도 벗어 던졌다. 맨 피부로 그의 공간을 자박자박 느끼고 싶었다. 내 방과는 달리 뜨듯하지 않은 대리석 바닥은 발바닥으로부터 작은 흥분과 소름을 전달해 주었다.
나는 구석구석 그의 공간을 느끼고 싶었기에 두 손에 양말을 꼭 쥐고 느릿느릿 바닥을 쓸 듯이 발바닥을 움직였다. 그의 공간을 마구마구 침입하고 쟁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느리던 내 발걸음은 기분에 취해 춤을 추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톡톡 뛰듯이 가벼웠다.
무겁기만 하던 내 몸이 날아갈 듯이 팔랑거렸다. 두 팔을 벌리고 그의 방을 떠도는 공기를 가로지르고 휘어잡으며 정복의 기쁨을 만끽했다. 뱅글뱅글 돌던 내 몸이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코 휘청거렸다. 휘청거리던 내 병약한 몸은 풀썩 그의 침대로 쓰러졌다.
쓰러진 고통 따윈 없었다. 빳빳하고 버석한 시트의 감촉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주름 하나 없이 정리했을 사용인들의 수고가 나의 간절한 몸짓으로 엉망이 되고 있었다. 맨 얼굴을 그의 베갯잇에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잘 마른 섬유의 향이 코끝을 진동했다. 그의 체취를 찾고자 더 킁킁거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갈증이 났다. 갈증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와 했던 일주일 전의 수업이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를 느끼고 싶었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코니, 한쪽 벽면에 크게 걸린 그림, 그리고 아까 보지 못했었던 방문보다 조금 작은, 양쪽으로 열리는 두 쪽의 문. 나는 마법에 걸린 듯 그 문으로 향했다. 나란히 있는 문고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아 돌려 열었다. 활짝 열린 문 안쪽엔 작지 않은 공간으로, 그의 옷들이 양쪽으로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건조한 옷 내음 사이로 은은한 수풀 냄새가 났다. 엄마와 유모와 함께 나들이 가던 동산에서 맡은 냄새 같았다.
꽉 막혀 있던 숨이 뻥 뚫리듯이 코로 밀려 들어왔다. 분명 세탁되어 정리된 옷들일 텐데도 그의 체취가 났다. 이 감춰진 작은 공간은 내게 단비와도 같았다. 아늑한 안정감이 내 마음의 충족을 불러일으켰다. 일렬로 걸린 그의 수많은 옷들을 손가락 하나하나로 쓸어 보며 한 바퀴를 돌아 배회했다. 다 돌고 난 뒤엔 가운데에 놓인 목재 수납장에 다가가 그의 몸을 감거나 채우는 타이와 시계를 구경했다.
투명한 유리로 덮인 수납장 아래로 보이는 수많은 시계 중에 맨 위 왼쪽 메탈 시계는 손가락이 만년필 촉에 찔렸을 때 차고 있었던 시계고, 짙은 갈색의 가죽 시계는 돈가스를 잘라 주었을 때 소매 사이로 보인 것이었다. 미음을 먹여 주었을 때 차고 있었던 건 아래쪽에 있는 검은 가죽 시계였다. 그 외로 반짝이고 고급스러운 시계들이 칸칸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 정돈을 흐트러트리지 않게 조심하며 메탈 시계를 슬쩍 하나 꺼내어 손목에 둘렀다. 차가운 메탈이 손목을 감쌌다. 내 손목엔 커서 시계 알이 아래로 빙글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간 시계 알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으며 시간을 봤다.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30분이 지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실장이 생각났다. 분명 다른 사용인이 청소하는 중에 내가 어디 있는지 위치 파악을 했을 텐데, 내가 안 보이니 수상쩍다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서둘러 손목에 두른 그의 시계를 빼어 원래 위치에 다소곳이 정리했다. 그리고 그의 옷 방을 다시 한번 눈 안에 새기려 뒤돌아 둘러보고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내가 잔뜩 흐트러트린 침대 시트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고, 쫙쫙 펼쳐 가며 주름을 없앴다. 방을 다시 휘둘러보며 조금이라도 내가 건드린 것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없었다. 나는 문 앞에 벗어 둔 실내화를 냉큼 신고 그의 방 안에서 나왔다. 나오기 전 문을 살짝 열어 복도를 둘러보고 사용인들이 주변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기에 조용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올 수 있었다. 방문을 꾹 닫고 시치미를 딱 뗀 표정을 하고 있을 때 계단 너머 한 실장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그의 방문에서 최대한 떨어졌다.
“도련님, 어디 계셨어요? 한참 찾았어요.”
“아, 화장실에 있었어요.”
“화장실이요?”
“네, 좀 오래 있었어요.”
급하게 나오느라 숨이 찼다. 나를 보는 한 실장은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믿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것이 당연했다. 분명 화장실을 두드려 보았을 테니까. 나는 그녀의 추궁에 긴장이 되어 땀이 삐질삐질 났지만 이미 비루한 변명을 뱉어 버린 터라 어쩔 수 없었다.
“30분 동안이나요?”
“……네.”
입술을 꾹 다문 한 실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 대답에 탐탁지 않아 했지만 더 이상 추궁하거나 혼을 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의심 어린 시선을 피하고 싶어 괜히 피곤한 척 손을 이마에 얹었다.
“청소는 아직인가요?”
“이제 막 끝났습니다.”
“저 들어가서 쉴게요. 조금 힘들어서요.”
역시 도망칠 때는 아픈 척을 하는 것이 최고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병든 나에게는 꽤나 크게 통하는 수법이었다. 내 방으로 슬쩍 뒷걸음질 쳤다.
“식사는 그럼 방으로 올릴까요?”
벌써 점심이 먹을 시간이 됐나 보다. 내게 밥 먹는 시간은 딱히 즐겁지 않았다. 커다란 식당에서 한 실장과 사용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혼자 밥을 먹는다면 나 말고 누구나 다 그럴 거다. 아픈 핑계를 삼는 김에 나는 그들 사이에서 밥 먹는 것을 거절하기로 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한 나는 도망치듯이 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내가 지내는 방이라고 그새 익숙해졌는지 들어오자 안도감이 퍼졌다. 그의 방을 몰래 들어갔던 것을 한 실장에게 들켰다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을 떠나 죽고 싶었을 거다. 그리고 앞으로도 몰래 그의 방 안에 들어가 구경하는 짓을 다신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느새 그의 방을 방문할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해진 낮잠 시간만큼은 나를 찾거나 감시하지 않는 한 실장을 피해 그의 방에 들어가는 계획까지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쉬운 법이었다.
30분의 일탈이 내게 심적 부담을 주었던 것이 분명했다. 한 실장이 가져다준 식사를 침대 위에서 먹은 나는 약과 사탕을 먹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내 방에 사용인이 들어와 식기를 가져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깊은 잠이었다. 잠귀가 밝고 예민한 내게 모처럼 단잠 같은 낮잠이었다.
얼마나 잤는지 가늠도 안 되었다. 내가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 실장이 나를 깨우러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어깨 부근이 흔들리는 느낌과 단호한 한 실장이 목소리가 들렸다.
“영우 도련님, 일어나셔야 해요.”
베개에 묻고 있던 얼굴을 조금 움직여 나를 깨우는 한 실장을 올려다보았다. 한 실장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나를 일으킬 기세로 나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지금이 몇 시예요?”
“저녁 드셔야죠.”
“아…….”
한 실장은 밥 못 먹여 죽은 귀신이 붙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그리고 곧 지 이사님 들어오세요.”
잘 떠지지 않던 눈이 번쩍 떠졌다. 그가 비틀린 세상을 갖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변함이 없기에 보고 싶은 마음도 여전했다. 나는 바삐 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맞이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재개되는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도련님,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옷을요?”
“많이 구겨졌어요.”
오랜 시간 잠이 들어서인지 내가 입은 옷은 많이 구겨져 있었다. 고로 이 저택에 어울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양말도 신고 나오세요.”
방문 앞에 벗어 던진 슬리퍼를 한 실장이 주워 오며 내게 말했다. 나는 시선을 내려 내 맨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온몸이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내가 맨발인 이유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양말을 벗어 버린 나는 손에 꼭 쥐고 돌아다니다…… 그의 옷 방에서 시계를 차 볼 때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러다 나를 찾을 한 실장을 생각하며 후다닥 나오느라 챙겨 나온다는 것을 새카맣게 잊어버렸었다. 큰일 났다. 지금 그는 돌아오는 중이고 한 실장 몰래 그의 방에 다시 들어가 양말을 가져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떡하지…….
“뭐 하고 계세요. 어서요.”
머릿속에서 산더미같이 떠오른 생각과 걱정을 한 실장이 밀어 냈다. 멍청히 서 있는 나에게 그녀는 언제 꺼내 왔는지 옷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순면의 흰 양말도 함께.
“빨리 갈아입으세요. 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내가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당당하게 흔적을 남기고 나온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갈아입었다. 어쨌든 한 실장 말대로 그를 맞이하러 나가야 했다. 다시 한번 아픈 척 핑계를 대 볼까 생각을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연이은 거짓말을 한 실장이 이번엔 속아 넘어가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고삐가 내 목에 둘린 듯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한 실장 뒤를 따랐다. 1층 현관에 가까워질수록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오로지 그의 생각뿐이었다. 지난 새벽엔 몽정으로 인해 더러워진 속옷을 빠느라 발가벗은 아래인 채로 그의 물건을 몰래 쓰다가 들켰다. 그리고 선생님과의 은밀한 수업 주제가 까발려졌고, 이번엔 그의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간 것을 들키게 생겼다. 그에게 나는 딱히 호감 가는 사람이 아닐 것인데 자꾸만 좋지 않은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약하거나, 멍청하거나, 못되거나.
죽 늘어선 사용인들 사이로 내 자리를 찾아 섰다. 안절부절못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고, 뻥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을 때 그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이사님.”
한 실장과 사용인들이 저택에 들어오는 그를 맞이했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묵묵히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에게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지은 죄가 있는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분명 피하는 것이 티가 났을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아직 안 들어오신 건가?”
“네, 관장님께선 오늘 US건설 사모님과 저녁 약속이 있다 하셨습니다. 이사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바로 먹을게.”
차라리 그와 함께 식사할 일이 없었으면 했는데 그가 저녁을 먹는다고 대답하니 나는 더 안절부절못해졌다. 물론 자주 볼 수 없는 그와 그나마 함께할 수 있는 식사나 수업 시간을 늘 기다리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오늘은 그와 함께 먹다간 체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며 식당을 향하는 한 실장과 그를 쫓았다.
정말, 그에게 이번만큼은 들통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한 나는 다시 한번 거짓말을 해 보기로 했다. 어색하지 않게 노력하며 식당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에게 급하게 말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먼저…… 식사하고 계세요. 죄송해요. 금방이면 돼요.”
화장실을 다녀오는 척하고 그의 방에 재빨리 다녀올 생각이었다. 넓디넓은 이 저택을 재빨리 돌아다녀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절박한 상태였다.
“준비하고 있을 테니 어서 다녀오세요.”
단정한 얼굴 뒤에 못마땅함을 숨긴 한 실장의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두 사람을 벗어나 그와 내 방이 있는 2층으로 최대한 빠르게 향했다. 소리 나지 않게 걷도록 조심하는 내 발걸음일랑 던져두고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걸었다. 평소의 느릿함과는 달리 빠른 걸음으로 내달리자 조금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방에서 내 양말을 구출해야 했다.
어울리지 않게 성큼거리는 몸짓으로 2층에 다다르고 다시 그의 방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진 그의 방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가쁜 내 숨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나는 아까 들어갔던 옷 방의 위치를 기억해 내고 삭막한 그의 방 한편에 있는 두 짝의 문으로 다시 다가갔다.
아까 내가 그의 방에 또 들어올 경우를 생각해 보았었지만 지금처럼 허겁지겁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이 저택에 없을 때, 한 실장이 나를 감시하고 있지 않을 때, 낮잠 자는 척 그녀와 사용인들을 속이고 여유 있게 들어오고 싶었다.
이렇게 다급하게 그의 옷 방에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희미하게 비쳐 드는 창밖의 조명을 의지하며 양말을 찾는 상황 따위는 없었다.
“아, 여기 있다.”
시계와 타이 수납장 아래 돌돌 말린 양말을 발견하고 허리를 숙여 집어 들었다. 안도감이 전신에 퍼졌다. 이제 다시 식당으로 내려가야 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한 실장이 추궁하면 배가 아팠다고 해야지.
주운 양말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일어났다. 잠시 현기증이 핑 하고 돌았지만 참을 만했다. 나답지 않게 너무 격하게 걸어서인지 다리가 조금 후들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휘청거리지 않게 수납장을 붙잡고 일어나 희미한 불빛이 스며드는 옷 방의 문으로…….
“도둑고양이처럼 내 방에서 뭐 하는 거지?”
“…….”
수납장을 붙잡은 것이 무색하게 나는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내 눈앞에 그가 우뚝 서 있었다. 불빛을 등지고 서 있던 그가 내게로 걸어왔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가까워지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희미한 어두움에 그의 표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 화가 났는지, 아니면 불쾌한지, 아니면 당황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현장을 들킨 현행범이었다. 당당하지 못한 마음을 가졌기에 몰래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어리석은 현행범.
“뭐지?”
“…….”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주저앉아 주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표정이 드러났다. 화가 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저 고요하고 깊은 호수와 같은 눈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항상 이런 그의 모습에 나는 함락되고 만다.
“……못난 모습만 보여 드려 죄송해요.”
“…….”
“나쁜 짓 하려고 들어온 건 아니에요.”
울고 싶지 않아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나는 구겨 넣었던 양말을 주머니에서 꺼내 그에게 보여 줬다. 구겨진 양말이 꼭 내 마음 같았다.
“이걸 찾으려고 들어왔어요.”
“…….”
내 양말이 왜 이곳에 있는지 그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그에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당신이 궁금해서, 당신을 느끼고 싶어서 들어온 내 마음을 곡해 없이 설명해야 했다.
“아까 낮에 방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왔다가 방을 구경했어요. 답답해서 양말을 벗었는데 나오면서 그대로 두고 왔어요.”
“…….”
“근데 그게 지금 생각이 나서…… 허락 없이 남의 방에 들어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안 되는 거 알면서 왜 들어왔어?”
가만히 내 말을 들어 주던 그가 낮게 속삭였다. 나의 몸이 잠시 움찔 떨렸다. 왜 들어왔냐는 그의 물음에 내 눈이 흔들렸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그의 속삭임에 굴복했다.
“궁금해서 들어왔어요.”
“왜 궁금한데?”
그가 집요하게 물어 왔다. 그 집요한 물음의 답은 이미 예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을 뿐이었다.
“지영우.”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솔직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주문에 빠져든다. 턱이 뻐근할 정도로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방에 몰래 숨어 들어온 기이한 행동의 이유를 솔직히 얘기해도 되는 것일까?
나를 바라보는 눈이, 나를 부르는 그의 입술이 진실을 채근했다.
“지영우.”
“……좋아요.”
내 입술에서 작은 한숨과 함께 진심이 쏟아졌다. 그 진심은 미약한 싹을 틔어 내는 씨앗과 같았다. 던져진 씨앗에서 틔어 난 싹은 무럭무럭 자라나 그의 가슴속 깊이 파고들 것이다.
“……이사님이 좋아서요.”
“…….”
“처음 저를 데리고 와 주었을 때부터 좋았어요. 궁금하고, 보고 싶고…… 그래서 그랬어요.”
나를 보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떨리는 눈을 애써 가다듬으며 고백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이 사랑인 듯 동경인 듯 헷갈리도록, 그 어드메에 머무는 마음인 양.
“허락 없이 죄송해요.”
이런 나의 마음이 그의 완전한 세상에 오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미안했다.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내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에선 어떠한 감정도 짐작할 수 없었다. 커다란 마음의 무게를 덜어 낸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내 손을 떨치지 않았다.
“그래.”
나의 사과를 조용히 받을 뿐이었다. 무례한 나의 행동에 나무라지 않고 늘 그렇듯 나만이 알 수 있는 상냥하고 따듯한 포용력으로 나를 이해할 뿐이었다.
그와 함께 식당에 내려왔다. 옷 방에 주저앉은 나를 그가 일으켜 주었고 ‘저녁 먹으러 가자’ 소리 이후 2층에서 식당으로 내려오는 내내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그도 그렇고, 나도 그랬다.
화장실에 간다고 했던 내가 그와 같이 오자 한 실장의 표정에 의문의 빛이 스쳤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정말 배가 아팠던 것처럼 어설프게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의자에 앉았다. 회장님과 관장님께서 계시지 않은 식사 자리는 그와 나란히 앉지 않는, 마주 보는 자리였다.
이미 올라가 있던 국이 식었는지 사용인들이 그와 내 국그릇을 서둘러 교체했다. 국그릇에서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조개가 들어간 뽀얗고 맑은 국이었다. 나는 흰 살 생선은 좋아하지만 그 외의 해산물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조개만 하더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가끔 역할 정도로 비린내가 올라오기도 했다. 이런 나 때문인지 고택에서는 해물로 된 음식은 하지 않았다. 죽을 밥 먹듯이 먹는 내가 흔한 죽 중에 하나인 전복죽만큼은 먹지 않았다. 해물이 올라올 때는 회장님이 방문하시는 날밖에 없었다.
“마침 좋은 백합이 들어와서 끓이라 했는데 이사님이 저녁을 들어서 다행이에요. 좋아하시잖아요.”
국그릇 안에 수저를 일절 담그지 않겠다고 작은 다짐을 하고 있는데 한 실장이 살갑게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는 대답 없이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국을 한 수저 떠먹었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회장님과 관장님의 아들, 나의 이복형, 그리고 이사라는 직책을 갖고 있다. 키는 굉장히 커 내가 그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꺾어야만 했다. 그렇게 보는 얼굴은 매우 섬세하고 정갈한 미남이었다. 벗은 상체는 탄탄했고, 나를 번쩍 들 정도로 힘이 좋았다. 그리고 내게 상냥하고 무심했다. 이것이 내가 아는 그의 전부다. 하지만 난 그 전부를 사랑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가 수없이 많았다. 그가 조개를 좋아한다는, 한 실장도 알고 있는 사실도 몰랐다. 이제야 알았다. 나는 이럴 때마다 가끔 부아가 치밀었다. 흰밥을 한 가득 수저에 올렸다. 조금씩 깨작깨작 먹는 내 식습관에 반하는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조갯국을 먹어 볼 참이었다. 조금이라도 비린내가 올라오지 않도록 밥이라도 많이 먹어야 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먹어 보고 싶었다.
뽀얀 국물에 수저를 넣고 반 못 미치게 떠서 입 안에 넣었다. 밥알 사이로 짭짤한 국물이 스며들었다. 나는 숨을 참고 꾸역꾸역 밥알을 씹어 넘겼다. 누가 강요하지 않은 짓이었다. 온전히 내 뜻에 이루어지는 미련한 짓이었다.
관장님께서 지시하신 뒤로 내 밥그릇 근처에는 내가 좋아할 만한 반찬들이 늘 있었는데 꿀에 절인 소고기가 가장 가까이에 있어 얼른 집어 입에 넣었다. 그나마 조개의 향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우아하게 소리 없이 식사를 하는 그의 앞에서 나는 우물우물 양 볼을 부풀린 채 먹는 소리를 냈다. 미어터지게 넣은 밥과 소고기를 씹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한 실장, 물 좀 가져다줘.”
“네, 이사님.”
조용히 식사를 하던 그가 한 실장을 부르자 그녀가 재빠르게 물 잔을 그의 앞에 가져왔다. 나는 여전히 소리를 내며 버겁게 먹고 있었다. 조갯국의 비린 맛이 넘어오려 하자 이번엔 동그란 전을 집어 입 속에 넣었다. 더 커다래진 볼을 실룩거렸다. 그는 이 비린 조개가 뭐가 맛있다고 먹는 거지? 생각하는데…….
“나 말고, 지영우.”
그가 앞에 놓인 물 잔을 보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한 실장은 이 저택의 막내 도련님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눈치챈 듯했다. 나는 또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그의 앞에 놓인 물 잔은 그대로 두고 새로 떠 와 내게 가져다주었다.
“드세요.”
입 안에 든 것이 많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내 웃음을 보고도 표정이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한 실장이 전해 준 물을 조금씩 마시며 그가 좋아하는 조갯국을 넘겼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싶었다. 그가 하는 것을 나도 해 보고 싶었다.
“또 뭐 좋아하세요?”
조용한 식탁 위에서 불쑥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식사를 하다가 나를 보았다.
“조갯국 말고 또 뭐 좋아하세요?”
그는 대답 대신 가까운 곳에 자리한 나물을 집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나는 나물을 싫어했다. 심지어 그가 집은 건 내가 알지 못하는 나물이었다.
“먹기 싫은 것 억지로 먹지 마.”
굳은 다짐을 하고 그의 근처에 놓인 이름 모를 나물을 집어 드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억지로 먹는 것 아녜요. 먹고 싶어서 먹는 거예요.”
사실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고 그가 먹었기 때문에 먹고 싶었다. 보란 듯이 나물을 집어 입에 쏙 넣어 우물댔다. 이로 씹히는 질겅거리는 나물의 맛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런 것치곤 네 표정이 좋아 보이진 않는데.”
“……좋은 거하고 먹고 싶은 거하고는 다른 문제예요.”
한마디도 지고 싶지 않은 나는 그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는 분명 내가 조갯국과 이름 모를 나물을 왜 집어 먹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네 맘대로 해.”
내 고집을 가볍게 무시한 그는 또 젓가락을 움직였다. 또 내가 먹기 싫어하는 반찬을 집으면 어떡하나 걱정한 일은 기우였다. 이번엔 나물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꿀에 절인 소고기였다. 나는 그의 정갈한 젓가락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이 두둥실 공기 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의 젓가락이 머물렀던 곳에 내 젓가락이 뒤따랐다. 이번엔 새 모이만큼의 적은 밥을 먹은 뒤에 소고기를 입에 넣었다. 목구멍에 미약하게 머무는 조갯국의 비린 향이 사라졌다.
그는 나보고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모두 말하라고 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지 말라고도 했었다.
“저 다 나았으니까. 오늘 수업할 수 있는 거죠?”
“……그래.”
마지막 한 수저를 끝으로 식사를 마친 그가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나의 밥그릇에는 아직 밥이 한가득 남아 있었다. 나는 이 밥을 다 먹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내 남은 밥을 보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속이 괜찮으면 밥 조금 더 먹어. 조금 더 먹고 한 시간 뒤에 내 서재로 와.”
“그럴게요.”
그는 내 새로운 선생님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말 잘 듣는 학생이고 싶었다. 그의 모습이 식당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밥공기에 남은 밥을 한 수저 퍼 올려 뽀얀 조갯국에 퐁당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