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13/27)

회장님과 관장님의 출근을 그와 함께 배웅하고 내 방 안 대리석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만의 고독한 시위였다. 입 안엔 쓴 약 맛이 맴돌았다. 이 또한 내 작은 시위였다. 그가 준 초콜릿은 다 먹고 없었고 관장님이 새롭게 사다 주신 젤리가 있었지만 먹기 싫었다.

어젯밤 그는 윤 교수의 딸과 만나고 오느라 늦게 들어온 것일까? 양주 한 병 안 되게 마셨다는 것도 그녀와 마신 것일까?

이런 생각으로 우울해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우울을 곱씹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지영우.”

문밖에서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고 몸을 더 웅크렸다. 누가 보면 커다란 방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공 같아 보일 것이다.

“지영우.”

“…….”

다시 한번 나를 부르는 소리에도 나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냥 돌아갈 줄 알았던 그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벅저벅 그의 실내화 소리가 들렸다. 작은 한숨 소리도 함께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바닥에서.”

“…….”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에 꾸었던 기분 좋은 꿈에는 엄마와 유모가 나온 게 아닌 것 같았다. 그에 품에 안겨 키스를 받았던 일이 꿈인 것 같았다. 지금이 현실이었다. 곧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 그를 전전긍긍 바라보며 사랑하는 내가 현실이었다.

“일어나.”

어느새 내게 다가와 안아 드는 그가 느껴졌다. 나는 울지 않으려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못난 얼굴이 아니길 바라며 그의 품에 매달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묻고 싶었던 질문을 퍼부었다.

“예뻤어요?”

“…….”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예뻐요?”

그는 천하의 박색이 아닌 이상 올해 안에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부질없는 바람이지만 나는 간절히 그가 만나고 온 윤 교수의 딸이 박색이길 바랐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 그를 볼 자신이 없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박색은 아니더군.”

“……그럼 결혼하시는 거예요?”

그가 나를 고쳐 안더니 자신의 어깨에 묻힌 내 고개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나는 반항 없이 순순히 그의 손짓에 따라 눈을 떴다.

“지영우.”

“……결혼하셔도 저 안아 주실 거예요?”

자세를 바꿔 다리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나의 눈높이는 어느새 그보다 높이 올라가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눈빛을 한 채 가만히 나를 올려 보았다.

이 눈빛은 항상 나를 간절한 마음이 들게 했다. 안달 나게 만들었다. 그에게 빠지게 만들었다. 그의 어깨에 얹힌 손을 들어 곧게 뻗은 잘생긴 눈썹 아래 눈가를 매만졌다. 남자다운 강인한 골격이 단단하게 그려졌다. 그곳에 입술을 내려 키스했다. 조금 오랫동안 머물던 입술을 떼어 내고 눈을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결혼하셔도 저랑 키스해 주실 거예요?”

그에게 답을 듣지 못하고 안긴 채로 벽에 밀어붙여졌다. 딱딱한 벽이 등에 닿고 몸이 스르륵 내려갔다. 동시에 목덜미가 강하게 잡혀 들어가고 내 입술이 그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내 입 안이 쓴 덕분일까 그의 입 안이 달고 달아서 절여지는 것 같았다. 그의 허리에 매달린 다리를 더 강하게 옭아맸다. 뜨거운 타액에 입술이 젖어 축축한 소리를 냈다. 강하게 빨아올리는 게 버거워 잠시 고개를 젖히려 했지만 힘에 막혀 꼼짝할 수 없었다. 달콤한 입 안과는 달리 건방진 질문을 한 나를 혼내듯 매서운 키스가 계속됐다.

그의 답을 듣고 싶은 나는 고개를 돌려 피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추격하듯 내 입술만을 쫓는 그의 집요함을 느꼈다. 깨물리고 씹히는 거친 키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우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었다.

할딱거리는 내 호흡이 느껴지자 그가 마지못해 키스를 멈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멀어졌다. 눈가가 뜨거웠다. 코끝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키스를 하면 늘 열이 올랐다.

“……네가 하고 싶다면, 해 줄게.”

“……하아,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 주실 거예요?”

“그래.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줄게.”

“약속해 주세요.”

마음이 다급했다. 어린아이처럼 약속을 받아 내고 싶었다. 비록 말뿐인 약속이라도 그가 그렇게 해 준다고 하면 행복할 것 같았다. 나는 그 행복을 졸랐다.

“사랑해 달라고는 안 할게요.”

“…….”

“그것만은 해 달라고 안 할게요.”

그의 목을 끌어안아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지금의 내 간절한 표정이 엉망일 것 같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사랑은 내 몫이기에 감히 사랑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그가 이런 나를 온전히 받아 주기만 한다면…….

“지영우.”

내 허리와 뒤통수를 강하게 끌어안은 그가 나를 불렀다. 내 귓가에 와 닿는 그의 음성이 평소와 같으면서도 무거워서 내 마음이 조여들었다. 숨을 참고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약속할게. 네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그가 해 주었음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쪼개지듯이 아팠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쩍쩍 갈라지는 듯한 통증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어느 누구도 온전히 행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끄는 내가, 몸서리치도록 미웠다.

볕 좋은 정원에 그와 같이 나와 있었다. 그는 오늘 휴일을 나와 함께 보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파서 나갈 수 없는 나를 위해 자신의 금 같은 하루를 내게 내주었다. 정원수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보기 좋았다. 내게 별다른 것을 해 주지 않아도,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내게 큰 세상이 되었다.

나도 책을 들고 있었지만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그도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내색하지 않았다. 나의 시선과 자신에 대한 흥미를 고스란히 받아 주고 있었다.

“머리 자를 때가 된 것 같아요.”

불어오는 높새바람에 내 앞 머리칼이 휘날렸다. 요 며칠 눈을 살금살금 찌르는 머리칼을 만지며 말했다. 머리를 손질한 지 한 달이 넘은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내 머리카락은 엄마가 잘라 주었었다. 손재주가 꽤나 좋았던 엄마는 작은 바가지를 내 머리통에 얹어 놓고 열을 맞춰 싹둑싹둑 잘라 주었었다. 그러다 조금 큰 뒤로는 어느 정도 손에 익은 내 머리칼을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도 눈대중으로 예쁘게 잘라 줬었다. 사각사각 가위 소리와 실수하지 않으려 숨죽인 엄마의 호흡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간지럽게 울리듯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엄마가 죽고 이 저택에 온 뒤부턴 주기적으로 한 실장이 부르는 출장 미용사가 방문해 머리를 손질해 주었었다. 엄마의 어설픈 둥근 바가지 머리가 아니라 세련된 깔끔한 머리 스타일이 되었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어색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머리?”

“네. 이렇게 조금 눈을 찔러요.”

책을 보던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주시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눌러 그에게 보여 주었다. 머리카락이 눌려 눈앞에 비처럼 쏟아졌다.

“불편하긴 하겠네. 아직까진 몸이 안 좋으니 나가서 자를 순 없고, 한 실장에게 말해 둘게.”

“이사님이 잘라 주면 안 돼요?”

조금은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따듯하게 불어오는 높새바람이, 고택의 앞마당 의자에 앉아 보자기를 목에 두른 채 엄마의 손길을 받던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따듯한 추억을 그가 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내 머리칼을 바라보는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무리한 요청 같았다. 그가 해 주면 좋고, 안 해 줘도 괜찮은 일이라 거절해도 대수롭지 않았다. 이 거슬리는 앞머리는 한 실장이 불러 주는 미용사에게 맡기면 되니까.

“잘라 줄게.”

“네?”

“잘라 준다고.”

그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나는 그냥 찔러본 요청이었는데 쉽게 돌아온 승낙에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물론 굉장히 기분 좋은 얼떨떨함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머리는 잘라 본 적 없어. 네 앞머리만 눈을 찌르지 않게 잘라 줄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근처에 있는 사용인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사용인이 자리를 비우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잘라 주시는 거예요?”

“네가 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멋진 사람이었다.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어른이었다. 사용인들이 없는 틈을 타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재빠르게 뽀뽀했다. 말 그대로 뽀뽀였다. 유아기 아이들이 하는 입맞춤에 그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나를 내려보았다.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멋지게 잘라 주셔야 해요.”

“노력은 해 볼게.”

사용인들이 가지고 온 얇은 천을 내 몸에 두르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내 뒤에서 가위를 들고 서 있었는데 앞에 있는 전신거울 속에 비친 그 모습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 자꾸 웃음이 나왔다. 볕 좋은 날 정원에서 책을 읽다가 별안간 벌어진 상황이 못내 맘에 들었다.

어디서 준비해 온 건지 가위도 미용 전용이었다. 그는 내 뒤에서 가위를 긴 손가락에 끼고 움직였다. 서걱서걱 가위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듣자니 정말 맡겨도 되는 건지 아주 짧은 후회가 스치긴 했지만 잘못 자르면 어떠랴. 다시 기르면 된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바람이 멈췄어요.”

나를 앉혀 두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멈추길 기다리던 그에게 말했다. 말없이 내 앞으로 다가와 얇은 빗으로 내 앞머리를 빗어 주었다. 그의 손짓은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초조해 보이진 않았다.

“자를게.”

키가 큰 그가 허리를 숙여 고개를 내 머리 쪽으로 가까이 했다. 눈앞에 그의 입술이 보였다. 꾹 다문 곧은 입술이 약간은 붉어 보였다. 나로 인한 흔적이었다. 다시 탐하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이런 음흉한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빗질을 멈추고 가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목울대가 울리고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에 머리카락이 들어올까 눈을 꾹 감았다. 실은 숨도 참고 있었다. 숨을 쉬느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앞머리가 삐뚤빼뚤해질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귓가에선 가위질의 금속성 소리가 들리고 신경이 곤두설 법한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도 들렸다. 느릿느릿 천천히 싹둑싹둑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쉽네.”

무심히 툭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눈을 뜨니 높새바람이 다시 한번 불어왔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눈썹 위로 나부끼는 느낌이 이마에 와 닿았다. 자른 내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돈하는 그의 진지한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콧잔등에 잘린 머리카락이 있는지 따갑고 간지러웠다. 콧등을 찡긋거리며 움직이고 있자니 그가 손으로 집어 후 불어 주었다.

“멋지게 잘렸어요?”

“글쎄…….”

“잠시만 비켜 보세요. 거울 보고 싶어요.”

앞에 서 있는 그 때문에 거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거울을 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뿌리내린 나무처럼 우뚝 서 있을 뿐 비켜 주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 때문에 바보처럼 잘린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심 그가 잘라 주기만 한다면 쥐가 파먹은 모양이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잘리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의 표정으로는 내 머리가 바보같이 잘렸는지 멋지게 잘렸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차분한 눈빛으로 내 앞머리를 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자르신 거죠?!”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녜요. 거울 안 보여 주시는 거 보면 분명…….”

“겁쟁이 같으니라고.”

걱정과 초조함으로 어린애 같은 말투가 나왔다. 그렇다고 울먹이는 정도까진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가 듣기로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울 정도는 아니야.”

얇은 천을 목에 두르고 있느라 숨겨져 있던 내 손을 찾아내 그가 손거울을 쥐여 주었다. 나는 재빨리 거울을 들어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댔다.

“…….”

“쉽다고 했잖아.”

겁먹은 커다란 내 눈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눈썹 위로 깡충 올라가 있는 가지런한 앞머리가 보였다. 하얀 이마 위에 새카만 머리칼들이 그의 손가락에 정돈되고 있었다.

“……너무 짧아요.”

솔직히 말하면 못 자른 머리는 아니었다. 삐뚤빼뚤하지도 않았고 쥐가 파먹지도 않았다. 다만 이 머리는 꼭…….

“옛날에 열 살도 전에 엄마가 잘라 준 머리 같아요.”

바가지를 씌워서 조심조심 잘랐던 그 머리 같았다. 내 머리를 잘라 주며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가 왜 웃는 줄도 모르고 크게 따라 웃었던 나도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못 잘라 바보 같은 머리는 아니었어도 조금은 우스운 모양이라 그렇게 웃었던 것 같다.

그가 잘라 준 머리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손을 들어 올려 짧아져 어색해진 앞머리를 만졌다. 나이가 들수록 내 취향이 확고해져 짧게는 잘라 주지 말라고 엄마에게 말했었기에 이렇게 짧은 앞머리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마음에 드나 보지?”

“아니요!”

나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가 아니야. 입이 귀에 걸렸는데.”

“우스워서 그래요. 꼭 어린애 같잖아요.”

분명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접히고 웃음이 자꾸만 비집고 흘러나왔다. 엄마가 죽은 뒤 다시는 이런 행복을 겪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녀가 없어도 내 머리를 잘라 주는 사람이 있었고, 나를 안아 주는 사람이 있었다.

“우습지 않아.”

“정말요?”

손거울에 얼굴을 바짝 붙여 머리를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그나마 이 쓸모없는 몸뚱이에서 잘난 부분은 엄마를 닮은 얼굴밖에 없는지라 꼼꼼히 살펴보는데 그가 거울을 가져갔다. 나는 빼앗긴 거울에 아쉬워하며 그를 보았다. 그는 다시 손으로 내 둥근 이마를 쓸어내렸다.

“멋지진 않아도…….”

“멋지지 않다니 그게 뭐예요.”

“충분히 보기 좋아.”

“…….”

따듯한 초여름의 날씨. 멀리서 불어오는 높새바람이 그와 나를 스쳐 갔다. 그의 짧은 머리도 바람에 연약하게 흩날렸다. 그는 내 곁에 있었고 나도 그의 곁에 있었다. 다가올 아득한 미래는 멀리 치워 둔 채로 같이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보기 좋다는 말로는 내 좋은 기분을 꼭대기까지 충족시킬 순 없었다. 조금 더 욕심이 났다. 간절하게, 바랐다. 나는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바람이 그에게 닿았을까? 꾸물꾸물 가지지 말아야 할 욕심이 부풀고 있을 때 그가 툭 내뱉듯이. 들릴 듯 말 듯. 지나가는 바람처럼.

“……예뻐.”

“…….”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던 손이 멀어졌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그는 내게 특별함을 선물해 주었다. 덩그러니 의자에 나를 앉혀 놓고 무심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그는 다시 읽던 책을 펼쳐 들었다.

“……그게 뭐예요. 나는 남잔데, ‘예뻐’가 뭐예요.”

실은 좋으면서, 기쁘면서 마음과는 다르게 퉁퉁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내 목소리에도 그는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그저 책만 응시하고 있었다. 목에 둘린 답답한 천을 걷어 낸 나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내게 커다랗고 뭉근한 기쁨만을 주는 그가 좋아 어쩔 줄 몰라서였다. 이렇게 다급한 내 마음을 모른 척하고 책만 보는 그가 얄밉고 사랑스러웠다. 저 멀리 대기하고 있는 사용인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고 그가 앉은 언저리에서 꽃을 쫓는 나비처럼 머무르길 한참.

“왜 그러고 있어.”

가까이 오지도, 또 떨어지지도 못하는 내가 못내 거슬렸는지 그가 드디어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봐 주었다.

“좋아서요.”

“…….”

저 멀리 있는 사용인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좋아요.”

“……알고 있어.”

나지막이 들린 말에 가슴이 뛰었다. 사랑을 말하는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아까워서, 고요한 눈빛을 한 채 무심한 것만 같은 그의 귀가 내 눈엔 빨갛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여서, 두근두근 심장이 고동을 울렸다. 아, 이러다 정말 제명에 못 살 것 같았다.

눈썹 위로 깡충 올라갔던 앞머리가 자라는 동안 나는 세 번 코피를 쏟고, 한 번 피를 토했다. 간헐적 기침은 계속되었고 미열은 달고 사는 정도였다. 날이 더워짐에 따라 늘어져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앞으로 바빠질 거라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길게는 일주일까지 출장을 다녀왔고, 나의 수업을 챙겨 주지 못할 정도로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날이 허다했다. 만약 내가 새벽마다 그의 방에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 나는 밀려오는 잠을 참아 가며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내 등을 감싸 안은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무랐다.

“왜 안 자. 어제도 코피 쏟았잖아.”

“낮에 자면 돼요.”

“멍청한 소리 말고 빨리 눈 감아.”

하필이면 아침 식사 시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코피를 쏟는 바람에 걱정거리를 안겨 주었다. 출혈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조금만요.”

“안 돼.”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눈두덩을 가리자 어둠이 내려앉았다.

“키스 한 번 더 해 주시면 잘게요.”

“너.”

“제발.”

어둠 사이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나는 한숨 유발자였다. 그가 한숨을 쉬거나 말거나 나는 입술을 쭉 내밀고 그의 키스를 기다렸다. 곧 따듯한 입술이 닿았다. 우물우물 그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그를 꼭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요즘 나는 그에 대한 욕심이 점점 커져서 욕구 불만 상태였다. 키스로는 해결되지 않는 흥분이 날 곤란에 빠트렸다. 혼자 있을 땐 더위에 늘어져 있느라 욕구가 생기지 않다가도 그와 함께 있기만 하면 달아올랐다. 처음엔 키스만으로도 좋았지만 품에 안길수록 그를 만지고 싶었고, 만져 볼수록 그를 느끼고 싶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재우려는 부드러운 키스에도 발정 난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느라 바빴다.

예전에 김재형 선생님이 알려 주신 내용 그대로였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키스하고 싶고 만지고 싶고 섹스하고 싶어진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나는 그와 이렇게 입 맞추는 것 말고 그 이상을 하고 싶었다.

“으응…….”

그의 입술이 떨어지니 아쉬운 마음에 몸이 떨렸다. 기분 좋게 반쯤 발기한 내 성기가 느껴져 다리를 꼬았다. 같은 집에 살고, 나와 눈을 맞춰 주고, 대화를 하고, 품에 안아 주고, 키스를 했다. 시작은 ‘같은 지붕 아래에 같이 있기만 해도 좋겠다’였지만 사람 욕심은 끝도 없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요.”

“……이러다 못 자겠어. 네 방에 데려다줄게.”

분명 그는 내 아랫도리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게 키스해 줄 때마다 내가 몸을 덜덜 떨며 끙끙거리는 것을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자극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그가 주는 자극은 새로운 것들이었고, 그 새로운 자극에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아, 아니에요. 잘게요. 내 방에 가라고 하지 마세요.”

결국 나는 그에게 또 지고 만다. 시무룩한 표정을 감출 길 없이 눈을 감았다. 서운한 마음에 입술이 비죽 나온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입 주변 근육이 뻐근했다.

내 입술이 그의 손가락에 아프지 않게 꾹 하고 꼬집혔다. 나는 그의 품에 내 몸을 더 밀착했다. 중심이 그의 하체에 닿도록, 문질러지도록, 조금이라도 닿게 말이다. 그도 남자인 걸 아는 나의 영악한 수였다.

“……지영우.”

“…….”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더 하체를 밀착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나를 차마 떼어 내지 못하고 그가 이번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숨이 내 머리칼을 간질였다. 맞닿은 하체 부근이 단단해졌다. 내 것도, 그의 것도. 이 아찔하고 혼란한 감각을 즐겼다.

“……너 이러면 후회하게 될 거야.”

정적 사이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건조하게 퍼졌다. 조용히 나를 재울 것 같았던 그가 내뱉은 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그리고, 나도 후회하겠지.”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랬다. 내가 그와 하고 싶은 것은 서로가 후회를 하게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형인 그를 사랑하고, 마음에 담고, 그리워하고, 또 입을 맞추는 것들부터가 해서는 안 될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가 이 세상에 얽혀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어릴 적 몽정을 하던 그 밤, 회장님과 엄마가 짐승처럼 얽혀 희열을 내뿜던 그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납득은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꾸만 커져 가는 이 마음이, 열망이, 두려움이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고 싶다. 그를 갖고 싶다. 내가 그를 사랑했다는 것을, 그에게 남기고 싶었다. 후회라는 찌꺼기 같은 감정일지라도.

“……많이 후회하게 될까요?”

“…….”

“내가 형인 당신을 갖게 되면요.”

“……그래.”

“나는 괜찮을 것 같은데. 당신이 나를 아프게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울게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내 하체와 맞닿은 그의 중심이 단단해졌다.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목구멍에 절로 치미는 신음을 참았다. 그를 볼 자신이 없어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내 몫이었으나, 그 사랑을 받아 주는 것은 그의 몫이기에.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울리고 싶지 않아.”

“…….”

“후회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게 하고 싶지도 않아.”

나직한 다짐과 같은 그의 음성이 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아파도 괜찮다고, 울어도 괜찮다고, 후회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가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아파할 것 같았다. 그러면 내 자신이 더 미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그의 다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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