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14/27)

모두가 출근한 정오의 시간. 내 평범한 일상 중의 하나인 한 실장이 챙겨 준 약을 한 잔 마시고 그가 새롭게 사다 준 초콜릿을 입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도련님, 아직 한 잔 더 남았어요.”

옆에서 한 실장이 조금 작은 잔을 내게 내밀었다. 막 넘긴 쓴 약 때문에 눈을 찡그리고 있던 내가 뭔지 몰라 쳐다보고 있자, 한 실장이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오늘부터 새롭게 추가된 약이에요. 요즘 출혈이 잦으셔서요.”

“……네.”

고분고분 받아 들어 숨을 참고 한입에 꿀꺽 삼켰다. 평소 먹던 약보다 더 쓴 기분이라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바로 입에 넣었지만 체온 때문에 녹아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할짝거리며 빨았다. 그가 준 달콤함이 입 안의 쓴 기운을 몰아냈다.

“도련님.”

“네?”

혀를 굴려 초콜릿을 녹여 먹고 있는데 한 실장이 할 말이 있는지 나를 불렀다. 양치 먼저 하라는 잔소리만 아니길 바라며 다시 침대에 늘어져 누우며 대답했다. 이런 나를 눈빛으로 오목조목 훑는 것이 느껴졌다. 약간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에.”

“……네.”

“어디 가셨었나요?”

“……네? 그게 무슨…….”

한 실장의 질문에 늘어져 누워 있던 몸이 긴장으로 잠시 떨렸다. 혹시 그녀가 보았을까 초조했다. 어젯밤뿐만이 아니라 한 달이 넘도록 나는 그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그가 출장을 가지 않는 이상 내 방을 버려두고 항상 그의 방에 숨어 들어갔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늦은 밤에 갔다가 이른 아침에 돌아왔었다.

들킬까 무서워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막을 도리는 없었다. 몸이 떨리지만 않길 바랄 뿐이었다.

“……제가 어딜 가겠어요. 이 몸을 하고요.”

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잡아뗐다.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나의 혼란함을 보여 줄 수 없었다.

“새벽에 잠시 환기 시스템이 오류가 나, 도련님 방을 확인하러 갔었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아.”

나를 살피는 날카로운 눈이 느껴졌다. 나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마땅한 핑곗거리를 찾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내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길 바라며, 표정이 멍청해 보이지 않길 바라며 입술을 뗐다.

“……화장실에 갔었어요. 어…어젯밤 코피가 나서 닦아야 했었어요. 그래서, 잠시 나갔었는데.”

“…….”

“요즘 출혈이 잦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약도 더 먹고.”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지, 말은 더듬지 않고 대답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못했다. 최대한 진실인 양 정말 코피를 쏟아서 화장실에 간 것 같은 척을 하느라 애썼다. 한 실장은 내 변명에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고 잠자코 서 있었다. 그게 더 나를 옥죄었다.

“코피가 잦으시면, 사용인들을 밤새 방 안에 상주시킬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순간 매섭게 한 실장의 눈이 빛났다. 그 눈을 보자, 너무 빠르게 손을 내저으면서까지 커다랗게 반응한 나를 속으로 질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 안에 사용인을 상주시킨다면 나는 그에게 갈 수 없었다. 더운 여름에도 땀 한 방울 잘 흘리지 않는 나였는데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많이 힘들면 먼저 말할게요. 어제는 코피도 금방 멈췄어요.”

“네.”

“저…… 이제 쉬어도 될까요? 약을 먹었더니 졸려요.”

그녀가 내 표정을 보지 못하게 등을 돌려 침대에 누웠다.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릴까 무서웠다. 얼른 내 방에서 나가 주었으면 했다.

“저녁쯤에 깨우러 오겠습니다. 쉬세요.”

한 실장이 내 방을 나갈 때까지 목소리가 떨릴까 싶어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 앞에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녀가 의심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자꾸 나를 매섭게 훑어보는 한 실장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의 방에 가지 못하는 건 싫은데, 그와 윤 교수 딸과의 결혼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데, 그전까지만이라도 가고 싶은데 아예 못 가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울적하고 슬펐다. 그리고 그가 보고 싶었다.

한 실장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막혀 있던 숨이 터졌다. 젖은 울먹임이 섞여 있는 숨소리였다.

한 실장이 내가 밤에 방을 비우는 걸 눈치챈 것 같다고 그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다. 요새 들어 그의 품에서 달아오르는 몸을 하고 엉기기까지 해서 더 말할 수 없었다. 말하게 되면 앞으로 자신의 방에 오지 말라고 할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없어요.”

서재에 앉아서 영어 단어장을 보는 중이었다. 그의 멋진 경영학 책을 읽어 보고 싶다고 말하니 그가 내게 준 것이었다. 펜으로 체크해 준 단어들을 보고는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요새 몸이 별로인 건가.”

혼잣말을 한 그가, 단어장을 보느라 아래로 향한 내 이마를 짚었다. 며칠 전 한 실장이 내게 새벽의 부재 이유를 물은 뒤로 걱정과 초조함으로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밤마다 그의 방에 가는 것을 포기하지도 못했다.

“열은 없는데.”

“그냥…… 더워서 그런가 봐요.”

“오늘 단어 많이 맞히면 아이스크림 줄게.”

여름이어도 탈 날까 봐 잘 주려고 하지 않던 아이스크림까지 준다 말하며 그가 나를 걱정했다. 걱정이 고마워 애써 웃으며 영어 단어를 보는 척했다. 아마 오늘 받아쓰기는 많이 틀릴 것이다. 그래도 그는 기운 없는 나를 위해 못 이기는 척 아이스크림을 줄 것이 분명했다.

많이 틀릴지언정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그가 체크해 둔 영어 단어를 노트에 연필로 따라 쓰고 있을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이사님, 회장님이 잠시 내려오시랍니다. 영우 도련님도요.”

사용인의 전언에 그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와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서재에 나와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처럼 회장님과 관장님 그리고 그까지 이른 저녁에 저택에 들어와서인지 간단한 다과를 할 생각이신 것 같았다. 기운이 없는 것 빼고는 내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1층 거실에 도착하니 회장님께서 앉아 계셨다. 테이블엔 이미 내가 좋아하는 쿠키들과 과일이 놓인 채였고, 약차의 향이 거실에 풍기고 있었다. 나와 그는 회장님께 목례를 하고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아, 네 엄마도 나오는구나.”

회장님께서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관장님까지 자리에 앉자 오랜만에 식사 시간 외에 식구들이 모이는 자리가 되었다. 이 집 사람들은 친밀한 가족 관계는 아니어도 꼭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대화를 하곤 했다.

“다 모였구나. 영우가 요새 몸이 괜찮으니 다행이야. 너도 우리 집 식구이니, 집안의 중요한 대소사를 같이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내려오라고 했다.”

나를 보고 인자하게 웃으시며 회장님께서 말하셨다. 중요한 대소사라 하면,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회장님은 좋으실지 모르지만 나는 별로 좋지 않은 일일 것이다.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기운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지 이사.”

“네.”

회장님께서 부르시는 소리에 그가 대답했다. 나를 부르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내가 다 떨려 고개를 돌려 그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건조한 눈빛, 다문 입술, 높은 콧대. 그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매끄럽게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네 결혼 날짜가 잡혔다.”

“아직 상견례도 하지 않았는데요. 제가 결혼 시기를 말씀드렸습니까?”

그를 이루는 매끄러운 것들이 숨긴 속내를 보일 듯 말 듯 움직였다. 회장님을 바로 주시하는 눈매가 매서웠다.

예상하고 있었던 참담한 소식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찾아오는 법이었다. 시한부 같은 내 건강보다, 더 시한부 같은 그와의 밀회가 눈앞에서 어그러졌다.

“윤 교수 딸도 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고, 너는 이 만남을 결혼을 전제하에 만난 거고 그럼 된 거지. 꾸물거릴 일이 뭐가 있어.”

“이제 한 달 지났습니다.”

“네 엄마와 나는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했다.”

회장님께선 나에게 인자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과는 달리 그에게는 단호하고 위압적이셨다. 결혼 시기에 대해 반감을 표하는 그를 못마땅해하시는 것이 보였다. 암묵적인 회장님의 강요에 거실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정확히는 58일 만이었죠.”

날 선 부자의 대화를 듣고 계시던 관장님께서 입을 여셨다. 마시고 계시던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으시는 관장님의 행동이 군더더기 없이 우아했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신하고 나, 만나고 결혼하기까지 딱 58일이 걸렸어요. 그리고 이렇게 살고 있죠.”

“나는 우리가 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학영이도 그렇게 살아 줄 거라 생각하고.”

회장님의 얼굴에선 지난 과거의 선택에 대한 한 치의 후회도 보이지 않았다. 그 고집스런 표정을 마주하던 관장님께선 말없이 고개를 돌리셨다. 어느 때처럼 회장님께 뭐라 더 말씀하실 줄 알았었는데 의외였다. 아니,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씀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독불장군과 같은 남편을 뒤로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것 같았다.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셨다.

“윤 교수 안사람이 내게 날짜를 보내왔어. 바쁜 너를 고려해서 잡았다고 하더구나. 추석도 전이야. 너 이 결혼 할 거니?”

결혼을 하지 않게 회유하려는 말투가 아니었다. 관장님의 말투는 도전적이었다. 사랑 없이 자신이 짊어진 목표를 위해 뛰어가는 아들에 대한 질책이 담긴 말투였다. 아마 사랑 없는 결혼은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가 관장님을 바라보았다.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은 채였다. 고민하는 내색도, 난감한 기색도 없었다. 묵묵히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에 대한 중압감,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는 어머니, 그리고 철모르는 어린 동생의 간절함 중에서 무엇을 우선에 두고 있을까. 그리고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끝없는 침묵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절대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우선, 결혼은 합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와 그 뜻이 나를 슬프게 했다. 이곳에서의 내 자리는 없었다. 위치도 없었고, 자격도 없었다. 내가 가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잠시나마 설레고 기뻤던 순간이 언제였냐는 듯, 그가 결혼을 해도 괜찮고 바라만 볼 수만 있어도 생각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슬픔이 내 숨통을 조여 왔다.

나에게 고통은 평생 같이하는 동반자와 같은 것이었다.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외로움과 무서움이 몸집을 키워 내게 쏟아졌다.

“날짜는 제 일정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야. 그래야 내 아들이지.”

그럴 줄 알았다는 의기양양한 회장님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관장님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표정이셨다.

“정말, 네 회장님도 너도, 진절머리가 나는구나. 네 뜻대로 하렴.”

관장님의 말씀에 시선을 내리깐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단단한 철옹성은 관장님이 거실을 떠나고 그의 결정에 기분 좋은 회장님이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언사가 끝날 때까지 열리지 않았다.

회장님도 자리를 떠나시고 사용인들이 나와 그가 일어서길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과 대화하느라 한껏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아파 왔다. 회장님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혼이 빠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혼이 나가 빠진 머리를 채우느라 움직이지 않자 그가 내 한쪽 팔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나는 힘없이 그의 손길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사용인들 앞이라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다. 힘없는 몸을 그에게 안길 수도 없었다.

느릿느릿 발걸음을 움직이는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2층으로 향하는 그의 너른 등을 보았다. 처음으로 그가 야속했다. 미웠다. 내가 원한 상황이고, 내가 자초한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나의 마음은 아직 모든 것을 감내하기에 크게 자라지 못했나 보다. 맹랑하게 그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말했던 내가 우스웠다.

그는 내가 울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프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또 후회하지 못하는 삶을 살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나는 아프고, 눈물이 났다. 또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후회하지도 못했다.

곁에 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저 멀리 떠나가지도 못하는 그의 뒷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가 뒤돌아보지 않았으면 했다. 벌써 내 얼굴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젖은 숨소리를 참느라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더 그를 쫓아가지 못하고 말없이 내 방으로 도망쳤다. 못난 모습을 보여 줄 자신이 없었다. 처음 찾아온 사랑에 신이 나 내 갈 길을 잊은 채 벌거숭이처럼 노닐던 내가 너무도 부끄러워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치고 다짐했던 상황들이 당장 코앞에 닥치자 어느 무엇 하나도 감당할 수 없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어둠이 컴컴하게 내려앉은 방 한구석에 주저앉았다. 이 저택에 처음 온 날 한 실장에게 엄마와 찍은 사진을 빼앗기고 빈 가방을 돌려받았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창밖의 하늘은 시커멓게 깊은 새벽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잠 못 이루며 뒤척이고 있었다. 최근 들어 심해진 한 실장의 관리를 받고 누운 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또렷한 정신 그대로였다.

그의 방에 찾아가지 못한 지 한참이 되었다. 그의 결혼 발표 후 나는 그의 방에 갈 수 없었다. 뻔뻔할 줄 알았던 내 마음이 그렇질 못한 결과였다.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그는 그대로였다. 아쉬워하지도,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있어 줄 뿐이었다.

따로 단둘이 있을 기회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이후로 몇 건의 해외 출장이 있었고, 바쁜 업무로 늦은 귀가가 많았다. 자연스레 그와 나는 예전과 같이 멀리 떨어진 타인이 되었다.

다시 나는 이 저택을 떠다니는 유령처럼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뭐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었으니 어색할 건 없었다. 그의 흔적을 쫓아 주변을 맴돌고, 그리워하고, 애태우다 어느 순간 이마저도 행복하단 생각이 들어 웃음 지었다. 이 행동들이 미친 사람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꼬리를 무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잠시 눈을 꾹 감아 정신을 조이고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그의 방에 찾아갔다면 내가 그의 품에 안겨 있을 시간이었다. 그에게 가지 못하는 처지와는 다르게 내 마음은, 몸은 그를 원하고 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 나를 괴롭게 했다. 해독제가 없는 독에 중독이 되어 점점 절여지고 있었다.

원래도 짧았던 내 입은 더욱 짧아져 최근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고, 불면은 심해졌다. 기본적인 생활 리듬이 깨지니 좋지 않았던 건강이 더 악화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고열에 가끔씩 식은땀을 흘리는 것 말고는 더운 한여름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기침은 더해만 갔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걱정된 관장님께서 매일 의사 선생님을 불러와 진찰을 부탁하셨다.

식사를 잘하지 못하는 나는 매일 링거를 맞았다. 덕분에 내 팔꿈치에서 손등까지 다시 울긋불긋 몇 군데 멍들이 가득했다. 혈관이 약해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은 팔도 손등도 아닌 발등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걸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남자 사용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대부분 용변에 관한 거였는데 바늘을 빼 버리면 혈관을 다시 찾아야 하는 수고로움과 괴로움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 번거롭고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기운을 차리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먹고 싶지도, 기운을 차리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기대하는 삶이 없는 내게 지금과 같은 상황은 고문과 마찬가지라 그저, 혼자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내 머릿속에 인지시키고 적응하는 것이 먼저였다.

미열 때문에 따듯하고 축축한 손바닥으로 머리를 넘겼다. 이틀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해 머리가 엉망이었다. 씻고 싶었지만 이 한여름에도 폐렴이 들까 봐 저택의 모든 사람들, 의사 선생님마저 목욕을 권장하시지 않았다. 적당한 청결과 위생이 중요하다고 들먹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미약한 땀 내음이 잠옷에서 나는 것 같았다. 한번 신경 쓰이면 끝까지 신경 쓰여 성격이 예민해지는 나는 찝찝한 몸을 씻고 싶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좀처럼 없는 데다 씻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면 억울할 것 같았다. 나는 내일 다시 혈관을 찾느라 고생할지언정 지금 씻고 싶었다. 깊은 새벽 잠 못 이루는 생각의 꼬리가 드디어 끊겼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발등에 꽂힌 테이프를 뜯어내고 주삿바늘을 뽑았다. 주삿바늘에서 링거액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발등에 피가 배어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이불로 슥슥 핏물을 닦아 내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옷장에서 잠옷 하나를 대충 꺼내 들었다. 고를 필요도 없었다. 모두 다 헐렁하고 부드러운 밝은 색의 순면 옷들뿐이었다. 약하게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나는 옷을 쥐고 방을 나섰다. 발등이 뻐근해서 약간은 절뚝거리는 걸음이었지만 모처럼 혼자 움직이는 거라 마음만큼은 거칠 것 없이 당당했다. 오랜만의 새벽 나들이가 그의 방이 아니라 욕실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멀지 않은 욕실은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복도 근처에 있었다. 혹시라도 또 한 실장이 새벽에 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발소리를 죽였다. 나는 늘 버릇처럼 맨발이었기 때문에 소리를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욕실 앞으로 다가가는데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를 밝히는 간접등 아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침없는 발소리와, 커다란 인영. 나의 고통이자 행복인 그였다. 그 실체를 보지 않아도 소리와 그림자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늦은 새벽 그가 집에 들어왔다.

욕실 문 앞에서 동상처럼 굳어졌다.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도망가고 싶은 마음 반, 그를 너무너무 보고 싶은 마음 반이 치열하게 싸우느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시선은 복도에서 떨어질 줄 몰랐고 그림자가 실체를 드러낼 때까지 거둘 수 없었다.

실체가 내 두 눈앞에 완벽히 드러났다. 욕실 문고리를 잡으려 뻗었던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대신 잠옷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강해졌다. 이제 막 복도로 들어선 그도 나를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

멍청한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나는 입을 맞추고 같이 잠을 자는 사이었다. 비록 나 혼자만의 행복이었지만 아슬아슬한 도덕적 경계에 머물고 있던 사이었다. 그랬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침묵이 현재 그와 나의 사이를 맴돌았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다가가 안기지 못하고 입술을 머금지도 못한 채 멍청한 인사말 따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받고 싶어 몸부림쳤다.

“……늦게 오셨네요.”

“그래.”

자신의 방으로 향하기 위해 나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이 간격을 좁혀 오다 다시 넓히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를 지나치기 싫은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나에게 시선이 더 머물 수 있도록, 좁아졌던 간격이 멀어지지 않길 바라며.

“샤워하고 싶어서 나왔어요.”

“…….”

“아파서 이틀 동안 씻지 못했거든요.”

그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내 말에 그는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마주 서 바라본 그의 얼굴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럴 것이 그는 조금 취한 듯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와 마주한 그는 흐트러져 있었다.

독한 술 내음이 그에게서 진동하고 있었다. 전보다 더 강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코를 움찔거렸다. 양주 한 병 못 되게 마셨다고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이상 마신 듯했다. 내 앞에 서서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그가 입을 열었다.

“씻는다고.”

“…….”

“이 새벽에.”

“…….”

“그 몸을 하고 씻는다고?”

그의 눈빛이 매섭게 나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바란 물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내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그의 힘에 내 몸이 휘청거렸다. 넘어지지 않으려 발에 힘을 주자 바늘이 꽂혀 있었던 발등이 뻐근하니 아파 왔다.

“……이사님!”

그가 내 손목을 움켜잡고 발을 옮겼다. 놀란 부름에도 나를 보지도 않고 이끌었다. 거침없는 그의 발걸음에 나는 질질 끌려가다시피 걸었다. 나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발버둥을 쳤다. 그가 향하는 곳은 내 방이었기 때문이다. 고집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방에 들어가기 싫었다. 하루 내내 누워 있다가 겨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순간을 방해받았기 때문이었다.

“저 씻을 거예요……!”

쥐고 있던 잠옷마저 떨어트리고 내 손목을 움켜잡은 그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내 힘을 느꼈는지 나를 끌고 가던 그가 나를 내려 보았다.

“이 꼴을 하고 씻겠다고? 지금 너 나한테 시위해?”

“…….”

그의 팔을 붙잡은 내 손이 떨어져 나갔다. 짧은 소매 아래로 보이는 내 팔에 멍이 보였다. 고개를 떨어트리자 발등 위로 맺힌 피가 보였다. 그리고 내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미열이 느껴졌다. 그가 말한 내 꼴이란 이런 거였다.

“내가 말했지. 네가 원하는 건 해 주겠다고, 근데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라서 지금 이래.”

화가 난 듯한 그의 목소리가 나를 서럽게 만들었다. 슬프게 만들었다. 술에 취해 평소보다 감정이 섞인 그의 목소리는 짓씹듯이 엉켜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 보았다.

“고개 들어. 지영우.”

인내심이 바닥난 그의 목소리가 정수리에 꽂혔다. 나는 그의 주문에 또 걸려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나운 눈이 나의 여기저기를 훑었다.

“바보 같은 행동 하지 마.”

“…….”

“식사 제때에 챙겨 먹고, 꼬박꼬박 약 먹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마. 너 지금 몸이 어떤 줄 알아?”

“……어떤데요?”

내 몸인데도 내가 제일 몰랐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걸 견디는 이는 나지만, 내 몸의 자세한 상황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냥 정상이 아니구나, 하고 남들처럼 살아갈 수 없는 몸인 것만 알았다. 내 물음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움켜진 내 손목을 이끌다가 성에 안 차는지 나를 들어 올렸다. 반항할 힘도 못 쓰고 그에게 안기자 강한 술 내음과 담배 내음이 맡아졌다. 그 달고도 쓴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잘게 기침이 새어 나오는 걸 꾹 참았다.

“내 몸이 어떤데요? 샤워하면 죽는대요?”

“지영우.”

“그런 거 아니면 저 씻고 싶어요. 씻게 해 주세요.”

“……너, 정말.”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 매우 화가 나 있었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방해받은 나인 것 같은데 그가 더 화가 나 보여 별다른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보같이, 내게 화를 내는 것이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사님.”

“…….”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는데 찾아갈 수가 없었어요.”

대신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마음속 고백을 했다. 차마 그에게 화를 내는 것조차 아까워서 늘 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 된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모든 걸 해 주겠다고 했지만.”

내 속삭임을 듣고만 있을 뿐 침묵하는 그의 목울대에 입술을 묻었다. 나와 그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사이였다. 세상이 정의한 정상적인 현실 속에서 작은 균열을 일으킨 나는 틈을 비집어 그 안에 살아야 했다. 그것은 괴롭고 무서우며 또 외로운 것이었다. 한 번에 그러겠노라 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처럼 사는 것이 생각처럼 쉽진 않은 것 같아요.”

묻고 있던 입술을 떼고 고개를 뒤로 젖혀 그를 마주했다. 나를 내보이고 싶게 만드는 눈빛이 미치도록 좋았다. 좋으면서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섭고, 힘들어요. 그리고 또 고통스러워요.”

“…….”

“그래도, 그만둘 수 없어요.”

강한 힘으로 몸이 꽉 감싸 안겨졌다. 아플 정도의 악력이었지만 안정감이 들었다. 나는 양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를 안고 내 방으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방향을 욕실로 돌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해 주겠다는 그의 말은 항상 거짓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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