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15/27)

따듯한 물로 샤워 후 내 방 침대에 그와 함께 누워 있었다. 이미 새벽이 많이 지난 시간이라 그는 자신의 방보단 내 방으로 가는 게 좋으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목욕할 동안 옆 샤워 부스에서 간단하게 씻은 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그의 가운 깃을 붙잡아 벌려 맨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내쉬는 숨에서 아직도 미약하게 술 내음이 났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씻으니까 좋아요. 내일은 링거 말고 밥 먹으려고 노력해 볼게요.”

“……그래.”

달라진 건 없었다. 그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고 윤 교수 딸과 결혼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 짊어진 사랑이 무거웠다. 문득 또 겁이 나 그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키스해 주세요.”

나의 등을 토닥거리던 그의 손이 내 턱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뜨거운 키스가 쏟아졌다. 나 역시 그동안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지라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입술이 부딪치며 질척이는 소리가 계속됐다. 그의 키스는 달콤하고 감미롭기보다 거칠고 사나울 때가 더 많았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철없이 먼저 덤벼들다가도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게 되는 키스였다.

“……아, 좋아요. 더 해 주세요.”

혀를 내빼고 도망가면서도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헐떡였다. 그러면 그의 혀가 집요하게 쫓아와 허전한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쫓고 쫓기듯 황홀한 키스에 취해 내 성기의 끝이 젖어 갈 때쯤 끝이 났다.

“……아아.”

그의 품에서 나른한 숨을 연거푸 내뱉었다. 한동안 좋지 않았던 몸에서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잔뜩 가시 세우고 있던 예민한 걱정이 그와 함께함에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변덕 같은 감정이 지독할 정도로 우스웠다.

“이사님.”

“…….”

“저 좀 안아 주세요.”

“안고 있어.”

이미 그는 나를 안고 있었다.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부족했다. 더 많은 것을, 이상을 원했다. 이미 그를 사랑하는 것이 마냥 행복할 수 없는 고통이 함께한다는 것을 안 이상, 주저하기 싫었다.

“그럼, 만져 주세요.”

나를 안고 있던 힘이 조금 약해졌다. 그 틈을 타 나는 다시 덤볐다.

“만져 주세요. 이사님 손으로 만져 주세요.”

그에게 부탁하는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몸이 아파 앓는 듯한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달랐다. 열에 푹 절여진 목소리였다. 열망과 간절함으로 욕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너 지금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어?”

그가 내 귀에 입술을 닿을 듯 말 듯 갖다 대고 속삭였다. 힐난하는 것 같은 속삭임이 나를 더 부추겼다. 키스할 때부터 발기한 내 성기를 그에게 더 밀착시켰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 형인 그에게 성애를 바라고 있었다. 그도 그것을 알기에 나에게 다시금 확인하고 있었다. 키스를 넘어서 그 이상을 바라는 나는 얄팍하게 가지고 있던 죄책감과 금기를 깨 버리려 하고 있었다.

“……해 주세요.”

“지영우.”

“제발…… 나를 아무것도 못하는 이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

“나는 이미 아프고, 후회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러니 제발.”

“후…….”

그의 짙은 한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무게가 내 가슴까지 전해져 왔다.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생명줄인 양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가 나를 거절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떨리는 내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그가 다시 키스했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몸은 나른하게 힘이 없었지만 정신만큼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내 입술을 핥으며 그가 몸을 일으켜 내 위로 올라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 빠른 심장의 움직임이 미열을 전신 곳곳에 퍼뜨렸다. 그의 몸 아래 갇힌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새롭게 쏟아지는 감각을 맞이하고 있었다. 조금 더 강한 자극을 쫓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영우야.”

“……네?”

그가 ‘지영우’가 아닌 ‘영우’로 이름을 불렀다. 처음 듣는 온전한 내 이름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지영우가 아닌 영우는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지학영’의 동생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꼭 그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당치도 않은 희망 사항을 생각하며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를 내려 보는 그의 눈빛이 폭풍전야와 같이 조용했다.

“나는 너를…….”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어떤 말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라는 예전 날 그의 고백이 귓가에 생생했다.

“말하지 말아요.”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래?”

“아니요. 몰라도 괜찮아요. 그냥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 해 주면 돼요. 감당은 제가 할게요.”

내 말을 들은 그는 기가 차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휘었다. 개의치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잡았다. 까칠한 그의 턱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내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가 짧게 입 맞추며 말했다. 달콤한 행동과는 다르게 그의 말투는 사나웠다.

“건방진 소리로 날 하찮게 만들지 마. 감당은 내가 해.”

“어떻게…… 아……!”

‘어떻게 감당하실 건데요?’라는 질문은 비명 같은 신음에 묻혔다. 다리 사이에 기립하고 있던 내 성기를 그가 손으로 덮듯이 잡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주는 감각은 다리를 발버둥 칠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의 몸 아래 갇힌 채라 발버둥도 소용없었다. 꽉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동안 가라앉은 기분에 몸이 좋지 않았던 나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나른하게 늘어져 커다랗게 할딱거렸다.

“쉬…… 조용. 만져 달라며.”

“으아아…… 하아…….”

“쉬쉬…….”

그의 말처럼 조용히 하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신음이 흘렀다. 만져 달라고 한 건 나인데 막상 그가 만져 주자 자극적인 손길을 피하고 싶었다. 꼿꼿하게 서 버린 성기 끝에서 나온 점액질로 속옷이 축축이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젖은 천을 그가 엄지로 문질러 댔다.

아랫배에서 반짝거리는 기포가 퐁퐁 터지는 것 같았다. 폭죽처럼 시원하게 터지는 것이 아니라서 감질나는 기분이 들어 안달이 났다.

“으읏, 흐아……!”

벌어진 입에서 자꾸 신음이 크게 터지자 그가 내게 키스했다. 내 음성은 그의 입 안에 삼켜졌다. 극도의 흥분과 긴장으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무서울 정도였다.

“이 정도 가지고 질질 흘리면서, 겁도 없이 만져 달라고 했어?”

“흐으…… 그게 아니라. 아앗……!”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은 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새벽녘 나의 부재를 의심하던 한 실장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들킬까 하는 무서운 마음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입을 막는 바람에 밀쳐 내던 반항이 없어지자 그의 움직임은 더 용이해졌다. 몸을 딱 붙여 나를 압박하는 커다란 그의 몸이 벅찼다. 하지만 나는 신음을 막으며 자극에 몸을 내맡긴 채 흔들릴 뿐이었다. 그가 주는 감각, 흥분이 머릿속의 이지를 모두 밀어 냈다.

성기를 덮고 있던 손을 떼어 낸 그가 내 하의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그 순간 물 밖에 끌어 올려진 물고기처럼 몸이 파닥파닥 튀었다. 무릎까지만 옷을 끌어 내린 그는 곧바로 내 성기를 손안에 감싸 느릿느릿 표피를 힘주어 위아래로 문질렀다. 수술하지 않은 성기의 귀두가 표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느껴지자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앙다문 입술이 아파 왔다. 막힌 소리가 갈 길을 잃고 목 안에 맴돌았다.

“지영우,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는 거야.”

나를 내려 보는 그의 눈빛이 폭풍과도 같았다. 폭풍 속에서 그의 감정들이 날뛰고 있었다.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속에 나를 내던지고 싶었다. 같이 날뛰고 휘몰아치고 싶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나직한 경고에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표현이 부족해 그가 못 알아들었을까 봐 입에서 손을 뗐다.

“아앗, 후회…… 응, 응, 안 해요! 사랑…… 아, 아, 아아아!”

마지막 단어인 사랑한다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강한 힘으로 움직임을 빨리한 그의 손아귀에 사정이 시작됐다. 핏핏 끊어지듯 힘없이 쏘아 대던 정액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주물거리는 그의 손길에 꾸물꾸물 넘쳐 흘러내렸다.

무릎 위에 걸린 옷 때문에 벌리지도 못한 다리가 간헐적으로 흔들렸고 발끝은 고부라든 지 오래였다. 성기를 팽팽하게 실로 감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간질간질하고 기분 좋은 감각이 무서워 양손으로 입을 막고 발뒤꿈치로 매트리스를 꾹 누르며 사정감을 견뎠다.

마지막 한 방울의 정액까지 쏟아 내고서야 그가 내 성기에서 손을 뗐다. 벌벌 떠느라 세웠던 무릎은 힘이 빠짐과 동시에 매트리스로 툭 떨어졌다. 입을 막았던 손을 떼자 막혀 있던 깊은 호흡이 흘러나왔다. 지금 겪은 감각은 혼자 자위를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려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가운을 벗어 내가 쏟아 낸 정액을 닦고 있었다. 손마디에 질척하게 묻은 뿌연 것을 닦고 내 성기 부근을 훑었다. 남은 성감에 다시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내 떨림에 그가 작게 웃는 것도 같았다.

“……이사님.”

그는 힘없이 늘어진 내 몸을 추슬러 주며 바지와 속옷을 입혀 주었다. 내 부름에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눈만 마주쳐 주었다. 어느새 내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준 그에게 다짐했다.

“저 후회 안 해요.”

그를 최대한 올곧게 바라보려 애썼다. 나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사랑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는 그에게 짐을 짊어지게 만들었다.

“……안 할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해.”

“몇 번이고, 매달리고 부탁할 거예요.”

이불 안에 갇혀 있는 손을 꺼내 매트리스를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았다. 내 마음을 읽은 그의 손이 먼저 다가와 주었다. 따듯하고 큰 손이 손등을 덮어 왔다. 아래로 있던 손바닥을 뒤집어 그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그러자 그가 이불째 나를 끌어안았다. 코끝에 그의 벗은 상체가 닿았다. 따듯한 체온, 부드러운 살 내음, 잔잔한 심장의 진동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사님…….”

내가 그를 부른다. 그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런 그에게…… 따듯하고도 차가운 그에게…….

“키스해 주세요.”

뜨거움을 품은 입술이 내려앉았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바라진 않는다. 그것마저 바라면 앞으로 혼자 남게 될 그에게 크나큰 형벌이 되는 것을 알기에 바랄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언제 잠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을 뜨니 새벽은 지나가 있었고 밝은 햇살이 창밖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햇살이 뜨겁게 눈부신 걸 보면 오전을 훌쩍 넘긴 시간인 것 같았다. 좀처럼 잠 못 이루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나를 위해서 사용인들이 깨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발등에 링거 바늘이 다시 꽂혀 있었는데, 바늘을 넣는 순간에도 깨지 않았던 걸 보니 그의 품 안에서 잠든 것이 약효를 발휘했나 보다.

그가 말한 대로 꼬박꼬박 잘 챙겨 먹기 위해 밥은 못 먹더라도 링거 대신 죽이라도 먹었다. 그리고 한동안 먹기 싫은 마음에 토악질을 하던 약도 꾹 참고 삼켰다. 웬일로 오늘은 씩씩하냐며 주치의에게도 칭찬을 받았다. 다 그 때문이었다. 다시 그를 사랑할 용기를 얻은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도련님, 전화 받으세요.”

독한 약에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느라 잠시 엎드려 있는데 사용인이 방으로 무선 전화기를 들고 들어왔다. 내게 전화가 온 낯선 상황에 의아한 표정을 했다. 내게 전화를 받아야 하는 일은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없었다. 정말이었다. 아는 사람은 엄마와 유모, 회장님이 다였고, 이 저택에 와서야 알게 된 사람은 그와 관장님 또 선생님이 전부였다. 고택에서도 전화 올 일이 별로 없었고 온다 하더라도 전화를 받는 사람은 유모거나 엄마였었다.

정말 나한테 온 전화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내 앞으로 전화기를 내미는 사용인의 손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빤히 보기만 할 뿐 받아 들지를 않자 사용인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사님이세요. 받아 보세요.”

엎드리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깐 현기증이 날 정도였는데 비틀거리자 사용인이 잽싸게 나를 부축해 주었다.

“아…… 괜찮아요. 전화기 저 주세요.”

누가 보면 굉장히 중요한 물건을 받는 것처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그에게서 온 전화였다. 함부로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귓가로 가져갔다.

“여…여보세요?”

처음 해 보는 말이라 약간 어설픈 음성이 튀어나왔다. 내가 내뱉고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는가 의심할 정도의 어색한 말투였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 긴장되고 초조했다. 나에게 전화를 건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몸은 좀 어때?

혹시 전화가 끊긴 건 아닌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어떡하나 싶을 때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리 없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은 그에게 빨리 대답하고 싶어 움찔거렸다.

“괜찮아요. 링거 맞고 죽 먹었어요.”

아직 밥은 무리였다. 기침과 열로 부은 목은 밥을 넘기기가 힘들었고 곱게 쌀알을 간 흰죽만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지만 그에게 자랑하듯이 말했다.

-잘했어. 약은?

“먹었어요. 근데 좀…… 속이 더부룩해요.”

의젓하게 잘 먹었다고 대답하려다가 솔직한 상태를 말했다. 갑자기 시무룩해진 내 목소리를 느꼈는지 그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초콜릿이나 사탕 안 먹었어?

“젤리 먹었어요. 하지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그와 통화를 할수록 귓가와 볼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히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랬다. 내 앞에 사용인이 서 있기도 했고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아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가슴도 뛰고 열도 좀 나고 그러는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은 안 돼.

“한…… 한 입도 안 돼요?”

별것 없는 통화이지만 그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고집을 피웠다. 실제로 아이스크림이 조금 먹고 싶기도 했다. 더운 여름 땀은 잘 안 흘려도 입맛이 없고 쓴 약 때문에 입이 텁텁해서 시원한 것이 당겼다. 그리고 내가 아플까 걱정하는 그의 목소리도 더 듣고 싶었다.

-안 돼. 아이스크림은 밥 넘길 수 있을 때 먹게 해 줄게.

“…….”

-지영우. 대답.

“……네.”

안 된다는 그의 말에 쌕쌕거리는 콧바람만 내고 있자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 내며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먹고 싶으면 오늘처럼 꼬박꼬박 밥 먹고, 약 먹고, 잘 자. 몸 나아지면 큰 통으로 사 갈게.

전에 사다 준 딸기 맛 수제 아이스크림이 생각나 그에게 요청했다.

“알겠어요. 그럼 딸기 맛으로 사다 주세요.”

-그래.

그렇게 별것 없는 이야기가 끝나자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침묵마저도 좋았다. 그가 있는 공간에 흐르는 백색 소음일 뿐이었지만 그가 존재하는 공기의 흐름이 내게로 전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사용인만 내 곁에 없다면 그리고 그가 바쁘지 않다면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고 이렇게 듣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들어갈 거야.

“우와…….”

-저녁 먹지 말고 있어. 같이 먹자.

“네!”

입가가 웃음으로 실룩거렸다. 그와 모처럼 같이하는 식사가 벌써 기대됐다.

-잘 쉬고 있고, 앞에 있는 사용인 좀 바꿔 줘.

“네, 이따 봐요.”

통화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나는 그의 말대로 앞에 있는 사용인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전화기를 받아 든 사용인은 그에게 ‘네, 이사님’ 따위의 말 몇 마디를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도련님, 쉬고 계세요. 이따 이사님 오실 때쯤 올라오겠습니다.”

“네.”

사용인 앞에서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침대에 누웠다. 그가 잘 쉬고 있으라고 했으니 쉴 생각이었다. 끊임없는 생각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기로 했고, 다가올 그의 결혼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내게 전화를 할 만큼 내 걱정을 하고 있다는 좋은 생각만 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간밤에 그가 만져 준 성기를 만지고 싶어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길을 기억하며 성기를 주무르다 잠이 들었다.

굉장히 기분 좋은 꿈이었다. 오후에 잠든 쪽잠임에도 나른한 기분이 한껏 밀려올 정도의 꿈이었다. 꼭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잠들기 전 만지작거렸던 성기를 아직도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꼭 그가 만져 주는 것 같아서 베개에 묻을 얼굴을 좌우로 비볐다.

뺨에 닿는 촉감은 건조하고 보송보송한 면직물의 느낌이 아니었다. 희미한 섬유 유연제의 향도 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진한 향수의 냄새와 바깥의 공기, 그리고 따듯하고 단단한 촉감. 이 느낌은 베개가 아니었다. 그였다.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일어났어?”

꿈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눈앞에 단단한 그의 쇄골이 보였다. 퇴근한 후인지 그는 슈트가 아닌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품에서 잠든 적은 있으나 깨어난 적은 없었었다. 상상만 하던 현실이 눈앞에 있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부터 자꾸 좋은 일만 생기고 있었다.

“어……?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

“이사님 올 때 깨려고 했는데.”

내 시위 아닌 시위에 병든 몸이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낮잠을 푹 자는 건 드문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려 두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의 손에 제지당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내 손을 치워 낸 그가 이마를 짚으며 혼잣말을 했다.

“열은 원래 항상 자주 나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아니, 평소보다 좀 더…….”

손을 치워 낸 그가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서늘한 살갗이 이마에 닿자 시원한 기분에 몸이 오싹하니 떨렸다. 내 떨림을 감지한 그가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꼭 끌어안아 주었다.

“추워?”

“아뇨. 그냥 기분이 좋아서 몸이 떨렸어요.”

내 말을 듣더니 그가 등을 토닥토닥 한동안 두드렸다. 아기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칭얼거리듯이 그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그의 체온을 느끼고, 체취를 느끼는 이 시간이 지금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혼자서 그리던 꿈같은 바람을 그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이사님.”

내 부름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그를 부른 것은 아니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나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는 것이 내겐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난 항상 용기를 내고 사랑할 마음이 들었다.

“다음에요. 내가 다시 태어나면요.”

“…….”

“당신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그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무한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지금은 이룰 수 없는 현실이기에 내가 바라는 꿈이었다.

“내가 아들이면 이사님이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잖아요.”

“나를 파렴치범으로 만드는 재미있는 소리네.”

품에서 나를 떼어 낸 그가 얼굴을 마주했다. 표정 없던 그의 얼굴은 희미한 미소가 그린 듯이 걸려 있었다. 간절한 내 표정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그가 내 이마에 입술을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이미 그런 것 같지만.”

“네?”

너무 작은 소리라 잘 듣지 못해 다시 물었지만 그는 말해 주지 않았다. 아무렴 어떠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나는 다시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열이 있는지 그의 목덜미가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졌다. 콧물도 나려 하는 걸 보면 정말 다시 감기가 오려나 싶어 코를 문질렀다. 미끄러운 무언가가 손에 묻어 나왔다.

“아…….”

내 작은 음성에 나를 내려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빠르게 몸을 일으켜 협탁에 있는 티슈를 뽑아 들더니 누워 있는 나를 반쯤 부축해 뒤에서 끌어안아 코를 막았다. 나머지 한 손으로 콧대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코피였다.

“요즘 자주 이래?”

한껏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무서웠다. 혈관이 약한 나는 코피를 자주 흘리는 편이었는데 요새 부쩍 심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각혈보단 나은 편이라 안심이 될 정도의 것이었다.

“아니요. 오랜만에 난 거예요.”

여전히 멈추지 않는 피에 티슈를 새로 뽑은 그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 사용인들이 최근에 본 것만 세 번이야. 너 혼자 있을 때 얼마나 이랬어?”

“두 번…… 아니, 네 번이요…….”

두 번이라고 줄여 말하다가 나를 보는 눈빛이 매서워서 솔직하게 네 번이라고 말했다. 원래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의 결혼에 대한 상심으로 몸이 안 좋아져 그런 것뿐이었다.

“왜 말 안 했어.”

“말해도 똑같은걸요, 뭐. 그리구 최근에 이사님 결혼 때문에 속상해서 잘 못 지내서 그런 거예요.”

무섭게 다그치는 그가 서러워서 솔직한 투정을 부렸다.

“…….”

“아, 이제는 괜찮아요! 이젠 안 속상해요.”

결혼 이야기에 그의 눈빛이 가라앉자 아차 싶은 마음에 서둘러 부정을 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피가 멎었음에도 내 콧대를 지압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 그는 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면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게.”

“……네, 그럴게요. 근데 제가 뭘 해 달라고 할 줄 알고 그러시는 거예요?”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그가 내 질문에 지압하고 있던 손을 뗀 대신 턱을 살짝 그러쥐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도록 가볍게 당기자 내 고개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돌아갔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그의 고개가 내려앉자 나는 눈을 감았다. 가볍게 핥듯이 시작된 키스는 입이 열리자 빠르고 거칠게 변모했다. 나의 턱을 잡았던 손은 내 가슴을 끌어안았고 나머지 손은 내 중심부에 내려앉았다.

움찔, 몸이 튀고 깜짝 놀란 마음에 눈이 떠졌다. 키스를 하며 조용히 내리깔아 보는 그의 눈이 깊고 어두웠다. 계속 바라보고 싶은 오싹한 눈이었다. 하지만 계속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내 속옷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는 바람에 눈이 질끈 감겼다. 그에 반해 입은 벌어져서 은근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읏…… 잠, 잠시만요!”

“아프면 말해.”

“아, 아!”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완 다르게 그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미열이 뜨끈하게 오른 몸이 작은 자극에도 발작처럼 튀었다. 도망가고 싶어 엉덩이로 뒷걸음쳐 보았지만 등에 닿는 것은 도망칠 수 없는 그의 품 안이었다. 다시 퍼붓는 키스에 정신을 못 차리고 등을 기대자 다시 몸이 움찔 튀었다. 속옷 안에 있는 손이 아닌 다른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가슴 부근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사님!”

“괜찮아. 감당은 내가 하니까. 너는 그냥…….”

그가 마지막 말을 내뱉고 내 입술을 다시 삼켜 빨아들였다. 입술이 쭉쭉 빨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울렸다. 내 아래를 휘젓는 그의 손, 가슴팍을 꽉 쥔 단단한 손바닥, 그리고 어지럽게 파고드는 그의 혓바닥이 날 환희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아득한 환희 속에 빠져드는 순간에도 마지막 그의 뒷말이 귓가에 또렷하게 박혀 왔다.

‘너는 그냥, 날 사랑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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