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18/27)

자리에서 눈을 떴을 땐 그의 방이 아닌 내 방이었다. 환한 햇살이 커튼 틈새로 스며 들어왔다.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자 오전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와 몸을 섞기 시작한 뒤로 계속 늦잠을 자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 7시면 식사를 위해 나를 부르던 깐깐한 한 실장도 내가 각혈을 하며 심하게 앓은 뒤로는 곤히 잠든 나를 억지로 깨우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무리를 해 본 적이 없던 나는 격렬한 행위 덕분인지 피곤함에 빠져 잠이 들었고 그 결과 숙면 아닌 숙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제 그가 넣어 준 해열 좌약 덕분에 올랐던 열이 내려가 있었다. 물론 아랫배 안쪽이 아직도 욱신거리고 그가 드나들었던 항문이 따가운 건 여전했지만 당분간 정사를 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그가 없는 일주일 동안 식사도 꾸준히 하고 조금씩 선선해져 산책하기 좋은 정원에도 나갈 생각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기운 있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협탁에 놓인 물병을 들어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곗바늘이 정각을 향해 있었다. 사용인들은 내가 늦잠을 자는 날이면 30분마다 방에 들어와 내 기상을 확인하곤 했다.

“네. 일어났어요.”

어제의 정사로 잠겨 버린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하자 사용인이 들어왔다. 창문을 가로막고 있던 커튼을 걷어 내고 창문을 열어 환기시킨 사용인은 다 마시고 내려놓은 물컵을 치우며 식사를 물어 왔다.

“식사 준비해 드릴까요?”

“네, 밥…… 말고 죽이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그가 휘저어 놓은 내장이 아파 밥 대신 죽을 부탁한 나는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 간단하게 세면을 할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찌르르 발끝까지 저미는 뻐근함에 몸이 잠시 휘청거렸지만 사용인이 부축해 주어 넘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으면 남자 사용인을 불러 욕실까지 부축하냐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가고 싶었다. 하체는 그가 항상 말끔하게 따듯한 수건으로 닦아 주어 괜찮았지만 막 일어난 지금 세수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 들어와 세면대 앞 거울을 보다가 슬쩍 잠옷의 상의를 들어 올렸다. 하얗고 마른 몸뚱이에 울혈이 이곳저곳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나를 탐한 흔적이었다. 누가 내 옷을 벗기지 않는 이상 보지 못할 것을 앎에도 서둘러 옷자락을 끌어 내렸다. 팔목 부근을 살펴보니 몸만큼은 아니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미한 잇자국이 있었다. 사람들이 발견하면 안 되는 자국임에도 기분이 좋았다. 그가 나를 원한다는 증거 같았다.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칫솔을 집어 들었다. 이따 사용인에게 몸이 좀 서늘하니 얇은 긴팔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해야 할 듯싶었다.

부드럽게 조리된 보양 죽을 배불러도 천천히 다 해치웠다. 전보다 잘 먹기 시작한 나를 위해 죽 그릇이 전에 먹던 것보다 조금 더 커졌다. 그래서인지 조금 더 터질 것 같은 부른 배를 소화시키기 위해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옆에 서 있던 사용인이 내게 약이 담긴 작은 잔을 건네주었다. 쓴 약물을 꿀떡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정원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소화시키고 싶어서 정원에 나가려구요.”

나는 사용인들과 같이 있을 때 나의 행방을 항상 알리곤 했다. 내 뜻을 전해 받은 사용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식당에서 나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 주었다. 약을 먹고 달콤한 사탕이나 초콜릿을 먹지 않은 것이 떠올랐지만 사용인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 쓴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바로 정원으로 나갔다.

여름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계절답게 날씨는 많이 덥지 않았다. 오랜만에 밝고 눈부신 햇살을 쬐며 넓은 정원을 산책했다. 정원은 저택의 웅장한 크기에 걸맞게 넓고 화려했다. 내가 이 저택에 처음 온 날 한 실장이 함부로 드나들지 말라고 경고했던 관장님의 개인 아틀리에가 정원 가장자리 한편에 마련되어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아주 가끔 정원에 나와 산책할 때면 부러 아틀리에 쪽으론 발걸음을 향하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몇 달 전 그가 내 앞머리를 잘라 주었던 것을 생각하며 그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일주일 후에 돌아올 그가 벌써부터 보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와 함께해도 충족감을 느끼는 것은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내가 그에게 안겨 있을 때, 그의 거친 맥박을 느끼며 숨이 달아오를 때였다. 그래서 난 쾌감보다 큰 고통을 참아 가면서까지 홀린 듯 그에게 안기러 가는지도 몰랐다.

그와 나의 미래는 예상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최상의 행복이 될 순 없겠지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고택을 떠나 이 저택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이방인의 시린 마음과 언제든 이곳을 떠날 준비가 된 외로움이 이제는 사라지고, 오래도록 그의 곁인 이곳에서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하게 자리 잡았다. 허약한 몸이 조금이라도 건강해지길 바랐다. 기침이 줄어들고, 열이 끓지 않고, 편안한 호흡을 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정원 한 바퀴 거닐었다고 숨이 차오르는 것이 현실이었다. 조금 걸음을 천천히 해 보았지만 잔기침이 터져 자리에 잠시 주저앉았다. 하필이면 관장님의 아틀리에 근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이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호흡 곤란이 올 정도는 아니고 이렇게 쉬고 있으면 가라앉을 것 같았기에 초조해하지 않고 잠시 잔디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아직 여름의 기운을 담고 있는 따듯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가만히 앉아 눈앞에 보이는 하나의 조형물 같은 관장님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닮아 세련된 외형의 작은 건물은 고풍스런 저택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네모반듯한 건물 벽엔 투명하고 넓은 창이 반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블라인드가 쳐 있어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려는데 흥미를 잃은 아틀리에에서 문을 열고 사람이 나왔다. 한 실장이었다. 관장님의 공간은 그녀가 직접 관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틀리에 앞 잔디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날 발견했는지 반듯한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들었다가 이내 가라앉히고 내게 다가오는 한 실장의 표정은 조금 오싹했다.

솔직히 나는 이곳에 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잠시 산책을 하다 숨이 가빠 쉬고 있던 것뿐이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꼭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는 한 실장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여기서 뭐 하세요.”

“아, 잠시 산책하다가 숨이 차서 쉬고 있었어요.”

잘게 기침을 하며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꼭 변명하는 것처럼 들려 신경 쓰였다. 나를 내려다보기 때문일까? 그녀의 눈이 무서웠다.

“집안분들 걱정 끼치는 행동 하지 말고 몸이 아프면, 방 안에 계세요.”

“……네. 죄송…해요.”

“일어나세요. 아무 데나 주저앉지 마시고요.”

곁으로 다가와 나를 부축하는 그녀의 손길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더한 것 같았다. 솔직히 부축받을 정도로 힘든 건 아니었으나 괜찮다고 거절하면 매섭게 쳐다볼 것 같기에 그냥 그녀의 따가운 손길을 빌리기로 했다.

나보다 조금 작은 그녀는 내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했는데 그 때문에 긴팔 소매가 손목 위로 조금 올라갔다.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울혈이 비치자 그녀가 발견할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손길을 뿌리치고 싶은 충동을 가다듬고 두 다리가 완전히 설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서둘러 그녀의 어깨에 둘린 팔을 빼냈다.

“아!”

하지만 내 손목은 한 실장에게 붙잡히고 만 뒤였다. 빠져나오려 힘을 줘 봤지만 손아귀에 제대로 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왜, 왜 그러세요. 아파요.”

덜컥 겁이 났다. 덕분에 내 목소리는 미세한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 우악스럽게 잡은 손목을 들어 올린 그녀가 내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걱정했던 것처럼 그가 남긴 울혈을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헐렁한 소매를 팔꿈치까지 밀어 올리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살벌해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이가 부딪칠 정도였다.

“뭐가 자랑이라고 이런 걸 몸뚱어리에 새기고 돌아다니세요.”

“……!”

소매를 걷어 올리던 손이 내 셔츠 끝단을 잡더니 위로 끌어 올렸다. 얼어붙은 나는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막힌 것 같은 숨을 들이켰다. 욕실 거울로 보았던 낭자한 울혈들이 한 실장의 눈에도 보일 것이다. 퉁퉁 부은 유두 근처의 잇자국과 배꼽 주위에 꽃 피듯이 생긴 빨갛고 푸른 자국들도 보았을 것이다.

“모를 줄 알았어요?”

“…….”

“본인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이면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죠.”

내 몸을 뒤져 보지 않은 것처럼 말끔하게 내 셔츠를 정리해 주며 한 실장이 말했다. 그녀의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와의 정사를 들켰다는 사실이 나를 겁먹게 했다. 한 실장이 그와 내 사이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될지 몰라 두려운 마음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파렴치한 행동도 문희랑 꼭 닮았네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내뱉는 독하고 뾰족한 그녀의 말이 나를 마구마구 찔러 댔다. 무례한 언사에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내가 엄마를 꼭 닮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잠자코 따라오세요.”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나는 한 실장이 잡아끄는 힘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꾸만 풀썩 꺾이는 무릎에 힘을 주며 그녀를 따라갔다. 나 때문에 곤란해질 그의 걱정 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혹시나 다시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머릿속에 꾸물대며 기어 들어와 무서웠다. 또, 두려웠다.

나를 끌고 저택으로 들어간 한 실장은 늘 그랬듯 내 방에 날 집어넣었다. 무슨 정신으로 넘어지지 않고 방까지 들어오게 됐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침대 근처에 다다르자 몸이 긴장과 두려움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듯이 늘어졌다.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이 팍 하고 미약하게 터지고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그녀를 따라오느라 가쁘게 올라온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세요.”

침묵을 유지하던 한 실장이 나를 똑바로 주시하며 경고했다. 온전치 못한 내 거친 호흡에도 까딱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무서웠다.

“얼마나 버틸지도 모르는 병든 몸으로 뭘 할 수 있을까요?”

“……하아, 하아.”

답답하고 어지러운 호흡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침대 옆 협탁 쪽으로 몸을 움직여 기어갔다. 서랍 안엔 위급한 상황에 쓸 수 있도록 휴대용 호흡 치료기가 있었다.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실장은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볼 뿐 도와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도움을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외면하는 그 모습을 보자 서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싸구려 같은 감정 하나로, 여러 사람 만신창이로 만들지 말고 그만두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쾅’ 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힘없이 덜덜 떨리는 내 손이 서랍을 열다가 바닥으로 떨어트린 소리였다. 덕분에 서랍 안에 들어 있던 치료기가 저만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답답해진 가슴을 부여잡으며 내게서 멀어진 호흡기를 향해 움직였다. 내 몸도 침대 아래로 구르듯이 떨어지고 얼굴이 바닥에 부딪혔다. 폐가 조여 오는 통증과 함께 생리적인 눈물이 눈 안에 가득 차 대리석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하악……. 싫, 싫어요. 허억, 절대…… 그만, 허억. 안, 둬요…….”

그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라 하는 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온전하지 못한 몸뚱이를 가지고 하는 싸구려 사랑처럼 보여도 내게는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제일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한 실장 발치에 떨어진 호흡기가 내게 닿으려 하자 손끝이 절박하게 떨렸다. 나는 지금 죽고 싶지 않았다. 타인에 의해서 그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주제도 모르는 거머리 같네요.”

손끝에 닿으려던 호흡기를 한 실장이 잔인한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나에게서 잡아챘다. 그 모습에 더 이상 막힐 수 없을 것 같던 숨이 턱 막히고, 폐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내 생명줄을 움켜쥔 그녀가 너무도 무섭고 끔찍했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며 의식이 흐려지려 할 때 머리카락이 당겨지며 고개가 들렸다. 그리고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허억! 흡……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한 실장이 거칠게 내 입과 코로 치료기를 갖다 댄 것이었다. 물속에 빠졌다가 구해진 사람처럼 갈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호흡기를 빼앗아 갈까 봐 호흡기를 붙잡고 있는 한 실장의 손등을 꽉 움켜쥔 채였다.

“이사님과의 관계. 관장님께는 절대 말 안 할 겁니다.”

“하아, 하아…….”

한 실장은 호흡기에 손을 떼며 절박한 내 손마저 뿌리치고 일어났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녀가 내치는 따가운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서문희처럼 끝을 맺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처신하세요.”

“싫…싫어요.”

고개를 흔들며 거부했다. 한 실장이 그와 나의 사이를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인 걸 아는데도 겁이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으로 거부를 했다.

“이사님이, 하아……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요. 하아. 사…사랑해도…… 된다고, 했, 했어요.”

“…….”

“그만…… 하…… 그만, 안 둘…… 거예요.”

뻑뻑한 목구멍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비참했다. 한 실장은 그런 나를 한낱 버러지를 대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등을 돌려 내 방에서 나가 버렸다.

나 혼자 남은 방 안은 거친 호흡을 하는 숨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숨을 최대한 고르게 쉬려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아닌 엄마가 떠올랐다. 빨간 피에 물들어 죽어 가던 엄마의 끝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엄마는 각혈을 하며 죽은 것이 아니었다. 더 살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자신의 아들인 내가 성인이 되는 해의 생일이 지나자마자 미련 없이 제 삶을 버리고 떠났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한 실장이 말한 엄마의 끝과 같은 상황이 내게도 올까 생각해 보았지만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싶지 않았다.

한 실장과 대치를 한 이후 그가 없는 저택에서 매서운 한 실장의 감시 아닌 감시를 받으며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 때문인지 당연히 내 병세는 좋지 않아졌는데 그를 다시 만날 때 조금이나마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던 나는 그럴 수 없음에 상심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 실장이 관장님이나 회장님께 그와 내 사이를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두 분께서는 평상시 모습과 똑같았다. 관장님께선 걱정 어린 방문을 해 주셨고, 회장님은 매일매일 내게 주치의를 보내셨다.

나는 매일매일 가슴 졸이며 두 분 중에 한 분이라도 그와 내 사이를 아셨을까 걱정했다. 편치 않은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저기…… 그동안 이사님한테 전화 온 것 없었어요?”

“네. 없었습니다.”

관장님 수행 때문에 오늘은 잠시 내 곁을 비운 한 실장 대신에 있는 사용인에게 물었다. 이 질문은 한 실장에게 할 수 없었기에 지금이 기회인 듯싶어 물어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전화로 확인한다고 내게 아프지 말고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라고 했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벌써 나흘이나 지났는데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일이 너무 바빠 시간이 나질 않는 걸까.

“제가 잘 때도 전화 안 왔어요?”

“네.”

“만약 잘 때 전화 오면 꼭 깨워서라도 바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무릎에 놓인 쟁반 위의 죽이 식을 때까지 기다렸던 나는 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뽀얀 죽을 한 수저 떠 입 안에 넣었다. 깔깔한 입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맛이었다. 그래도 먹으려 노력했다. 생각보다 나를 많이 싫어하는 한 실장 아래에서 버티기 위해서도 먹어야 했다.

한 실장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어린 도련님, 그것도 회장님의 병든 혼외자 도련님이 아니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심지어 그녀는 관장님이 자신의 집안에서 직접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관장님 옆의 내 존재는 그녀에게 당연히 눈엣가시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관장님 댁에서 자란 우리 엄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실장은 우리 엄마 나이 또래로 보였다. 엄마와 한 실장의 사이가 어땠을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나를 향한 적대를 보면 그다지 좋지 않았을 거라는 자연스러운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마, 밉고 혐오스러웠을 것이다.

나와 그의 부정한 행동을 관장님께 고하지 않겠다는 한 실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아끼던 동생과 남편이 저지른 부정과 맞먹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엄청난 사실을 또 관장님께 안겨 드릴 수 없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심정은 나 또한 같았기에 한 실장의 폭력과 같은 행위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도 알릴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직은 겁이 났다. 그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직면한 상황을 그가 어떻게 헤쳐 나갈지 걱정될 뿐이었다.

나는 한 실장의 경고처럼 그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계속 사랑하고 싶었다. 그가 사랑하라고 한 이상 그럴 수밖에 없는 순리처럼 말이다.

천천히 밀어 넣느라 차갑게 식어 버린 마지막 한 수저를 입 안에 넣고 꾸역꾸역 삼키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입 안에 있는 죽을 삼키느라 대답을 못하고 있자 다시 한번 노크 소리와 함께 나를 부르는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네. 들어오세요.”

잘 넘어가지 않는 죽을 삼키자 목구멍이 아팠다. 괴로움에 찡그리고 있던 미간이 방으로 들어오는 사용인을 보자마자 반듯하게 펴졌다. 그리고 입꼬리가 춤을 추듯 씩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용인의 손에는 무선 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내게 전화를 거는 이는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그였다.

“이사님이세요?!”

“네. 받으세요.”

절로 들썩이는 몸 때문에 무릎 위에 있는 쟁반이 엎어지려 하자 잽싸게 사용인이 쟁반을 들어 올리며 내게 전화기를 주었다. 나는 두 손으로 기쁘게 전화를 받아 들며 곧장 귀에 가져다 댔다. 사용인이 쟁반을 가지고 문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를 외쳐 불렀다.

“이사님!”

-잘 지냈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초조하고 긴장됐던 마음이 녹는 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나흘 만에 걸려온 전화가 야속해서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이제 전화하셨어요. 내가 얼마나 전화를 기다렸는데…….”

떠나기 전에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전화로 확인할 거라고 말했던 그는 내 물음에 잠깐의 침묵을 하더니 허무한 답을 돌려주었다.

-……전화를 기다렸다고?

당연한 것을 묻는 그가 야속했다.

“당연하죠! 밥 잘 먹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한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밥 잘 먹고, 잠 잘 잤어?

“네…… 밥은 잘 먹었는데, 잠은 당신이 없어서 잘 못 잤어요.”

-……낮잠도 잘 못 잤어?

잘 못 잤다는 나의 말에 그의 목소리가 조금 사나워졌다. 나의 걱정으로 사나워진 그의 목소리가 몸서리치게 좋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 실장 때문에 몸이 아팠고 그녀가 나를 협박해서 무섭고 싫었다는 이야기는 목구멍 언저리에 묻어 둔 채 사소한 투정만 전화기로 흘려보냈다.

“낮잠도 잘 못 잤어요. 이사님 전화는 기다려도 안 오고…….”

-…….

“보고 싶어요.”

항상 마음속에 담고 있는 말을 내뱉었다. 말없이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작게 한숨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숨소리마저 달콤해 눈을 감고 집중했다.

-……여긴 지금 새벽 3시야.

“왜 안 주무셔요?”

-지금쯤 전화하면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나와 통화하기 위해 자지 않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벅차올랐다. 전화기가 닿은 귓가가 뜨거워지고, 이불 아래 겹쳐 모은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목소리 들으니까, 더 보고 싶어요. 언제 오세요?”

-이틀…… 아니, 지금 이곳은 새벽이니 내일 비행기 타고 모레쯤 도착할 거야.

“이사님…….”

-응.

나는 그를 불러 놓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짧은 대답을 돌려주는 그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침묵하고 있는 나를 채근하지 않고 그 역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간간이 터지는 내 기침 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맴돌았다.

“이사님…….”

-그래.

“또 전화 주실 거죠?”

-이따가 또 할 거니 걱정하지 마.

“…….”

-자기 전에도, 내일 일어날 때도, 밥 먹을 때도. 내가 그곳에 갈 때도.

나를 달래는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 역시 잘 지내고 있는지, 그곳은 어떤 나라인지, 일은 많이 바쁘지 않은지, 또…… 나를 보고 싶진 않은지……. 입 속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많은 말들을 뒤로하고 결국 고장 난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만다.

“네……. 보고 싶어요.”

-…….

“키스하고 싶어요.”

-…….

“안기고 싶어요.”

한 치의 앞길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무궁무진하게 피어나는 나의 사랑은 늘 그를 향하고, 그를 쫓았다.

“그리고…… 사랑해요.”

-……그래.

그의 대답은 내게 언제나 용기를 주었다. 담담히 쏟아지는 고요한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신호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계속해서 가슴팍에 붙잡고 내려놓질 못했다.

그는 출장지에서 생각지 못한 일정이 생겨 예정했던 일주일이 아닌 열흘을 머물게 되었다. 그만큼 그를 기다리는 나의 그리움은 배가 되었다. 한 달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고작 열흘이었지만 최근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는 내게는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혹시나 한 실장의 폭로로 나와 그의 사이가 알려질까 두려운 마음이 은근히 나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의 병세는 늘 그렇듯이 그대로였지만 그가 출장을 떠난 첫날 쓰러진 상태보다는 훨씬 나았다.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끼니도 꼬박 챙기고 쓴 약도 엄살 부리지 않고 잘 챙겨 먹었다. 조금이라도 기운이 있다 싶으면 저택 한 바퀴를 돌면서 나름대로 체력도 길렀다. 겁이 나 웅크리고만 있었던 생활에 다시 희망을 주고 싶었다.

출장 간 그의 전화를 받은 뒤부터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가 왔었다. 아침, 점심, 저녁마다 꼬박꼬박 전화해서 그는 내 상태를 확인했다. 전화가 없었던 나흘 동안이 무색할 정도였다. 전화를 한 그에게 그곳의 시간을 물으면 항상 늦은 밤, 깊은 새벽, 이른 아침이었다. 자신의 휴식을 쪼개어 내게 전화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전화를 그만해도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1초의 시간이라도 더 그와 공유하고 싶어서, 멀리서 들려오는 그의 작은 숨소리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다른 사용인이 전화를 가져다줄 때는 나 혼자 방 안에서 통화를 할 수 있었지만 한 실장이 가져다줄 때는 그녀의 감시가 뒤따랐다. 나는 그럴 때마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조심하며 그와 대화를 했다. 보고 싶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작은 기척 하나하나가 온통 그에게 쏠려 있는지라 그를 향한 내 애정을 숨길 순 없었다.

아무리 한 실장이라도 나에게서 그의 전화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내게 전화를 가져다주고 통화가 끝나면 조용히 가져갔다. 무언가 말을 내뱉고 싶은 걸 애써 참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으나 지난번 나에게 보여 주었던 무서운 모습을 다시 보여 주지 않아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 오시는 거예요?”

-그래.

“얼른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보고 싶어요’라는 말은 목 안으로 삼키었다. 한 실장이 내 방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귓가가 뜨거울 정도로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나는 그곳의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한국보다 아홉 시간 늦은 곳이라고 했다. 새벽 4시일 터였다.

“곧 아침이에요. 아직까지 못 주무셔서 어떡해요?”

-기내에서 좀 자면 돼.

열흘 가까이 이어진 출장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에서 피로가 묻어난 듯했다. 나는 더 듣고 싶은 미련을 떨쳐 내고 그를 위해 통화를 끝내야 했다.

“이사님, 점심을 먹었더니 졸려요. 조금 자고 싶어요.”

-그래, 이따 비행 시작 전에 전화할게.

“네.”

통화를 종료하는 담백한 신호음이 들리자 전화기를 귓가에서 떼어 냈다. 내 앞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실장이 전화기를 건네받으며 입을 열었다.

“주무실 건가요?”

“아니요. 잠시 나가서 산책하려구요.”

그를 쉬게 하려 통화를 끊기 위해 핑계 댔을 뿐이지 졸리지 않았다. 자지 않겠다는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는 한 실장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저번처럼 매서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럼 저랑 잠시 나가실까요?”

“어디를…….”

“정원이요.”

“…….”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왜 나에게 정원으로 나가자고 얘기하는 걸까? 그녀를 향한 수많은 의문이 떠다녔다. 조금 무섭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한 실장이 내게 다시 한번 채근했다.

“지난번과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네.”

아무래도 내 얼굴에 떠오른 수많은 감정들 속에서 두려움을 제일 먼저 포착했는지 한 실장은 내 걱정을 불식시켜 주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옷장으로 다가가 문을 연 한 실장이 얇은 카디건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요 며칠 바람이 선선해진 탓에 내가 코를 훌쩍거리자 주는 것이었다. 말없이 카디건을 받아 팔을 꿰어 넣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사뿐사뿐 걷는 한 실장의 발걸음을 주시하며 뒤를 쫓았다. 긴 복도를 지나 높은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나타난 긴 복도를 끝없이 걷다 보면 현관이 나온다. 내게는 벅차기만 한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넘었다. 내 스무 해 인생에서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참 많은 것들이 나를 변화시키고 흔들어 놓은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깨어나는 순간마다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세상에 태어나 힘차게 어미젖을 빠는 아이처럼, 뒤뚱뒤뚱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희열과 행복을 느끼기도 했고 그만큼 슬픔과 좌절을 느끼기도 했다. 모두 그로부터 시작된 감정으로 내가 나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했다.

비정상적인 삶을 살면서 비정상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나는, 스스로가 가지는 감정이 옳다 그르다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다른 누구의 생각도 섞이지 않은 온전한 내 마음이었기에 단 하나의 거짓이 없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도련님, 기억하세요?”

현관을 벗어나 가을 초입의 날씨로 화창하기만 한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걷기를 수 분이 지나자 한 실장은 뒤따라오는 나를 향해 소리를 냈다. 그녀는 여전히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단정하게 틀어 올린 뒷머리만 보였다. 대답을 바라고 묻는 질문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잠자코 그녀를 따를 뿐이었다.

“이곳에 온 첫날 제가 말한 관장님의 아틀리에요.”

“…….”

기억하고 있었다. 한 실장은 내게 아틀리에의 출입을 주의시켰고 나 역시 그 사실을 상기하며 그 근처를 얼씬도 하지 않았다. 비록 지난번 그녀에게 그가 남긴 흔적을 들켰을 때의 장소가 관장님의 아틀리에 근처였지만 그날은 예외일 정도로 나는 관장님의 공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지금, 그곳에 가는 겁니다.”

흠칫하고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 실장은 따라가는 내가 숨차지 않도록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그녀를 뒤쫓는 난 숨이 가빠 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출입을 하지 말라던 관장님의 공간에 왜 나를 데려가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설마 나와 그의 부정을 전해 들은 관장님께서 아틀리에에서 기다리시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순간 절망에 빠져들었지만 한 실장은 관장님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관장님께서 상처받으시는 걸 원하지 않기에 얘기하지 않았을 거란 결론이 들었다. 실제로도 관장님께는 절대 얘기하지 않겠다고 내게 말했었다.

“왜 그곳에…… 절 데려가세요?”

“가 보시면 알아요.”

정원 가장자리를 빙 둘러 걷다 보니 관장님의 아틀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저택에 동떨어져 외로워 보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존재감이 있는 건물이었다. 머뭇머뭇한 걸음으로도 내가 주저앉아 숨을 골랐던 정원을 지나 출입문으로 가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주인이 없는 공간에 한 실장과 같이 간다는 것이 께름칙했다.

“관장님이 안 계신데 들어가도 돼요?”

열쇠를 꺼내 출입문을 여는 한 실장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녀와 이 공간에 가는 것이 마땅찮은 내 마지막 거부였다.

“어차피 관장님은 이곳을 사용 안 하신 지 오래됐어요.”

“……그럼 왜.”

“들어오세요.”

철컥, 열쇠로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두운 내부 안으로 익숙하게 들어가는 한 실장의 뒷모습을 보기만 한 채 차마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있자, 그녀가 뒤를 돌아 내 손목을 부드럽게 이끌며 안으로 인도했다.

블라인드가 쳐 있어 햇빛이 온전하게 들어오지 못하는 아틀리에의 내부는 평범한 가정집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뿌연 필터가 낀 것처럼 희미한 느낌이 드는 이곳은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을 들게 했다. 신도 벗지 못하고 현관 앞에 주춤거리는데 출입문이 철커덩 닫히고 조명이 켜졌다. 오래된 형광등처럼 여러 번 깜박이던 불빛이 환해지자 아틀리에의 내부가 훤히 보였다.

여러 그림들이 벽마다 걸린 것을 제외하면 아틀리에라고 보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작은 거실과 그에 걸맞은 작은 주방 그리고 좁은 복도 옆에 자리한 방문. 한 사람 내지 두 사람이 살기에 딱 적당한 공간이었다.

삐걱거리는 고갯짓으로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죽은 엄마가 생각나는 따듯하고 포근한 색감이 가득한 이곳에 한 실장은 왜 나를 데려왔을까?

“이곳, 어떠세요?”

한 실장이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아늑하고, 따듯한 가정집 같아요.”

나는 본디 느낀 대로 솔직히 대답했다. 만약 엄마가 살아 있다면, 내가 평범한 아이였다면 서로 의지하면서 오순도순 살아가기에 딱 좋은 집이었다. 관리는 되고 있지만 오랫동안 사람이 머물지 않아 어딘가 삭막한 모습의 이곳을 물끄러미 훑어보고 있자 한 실장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서문희가 임신하고서부터 도련님을 낳을 때까지 머물던 곳이에요.”

“…….”

“죽으려고 수차례 자살 시도를 했던 곳이기도 하고요.”

내가 알지 못하는 엄마의 과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알고 있는 엄마가 낯설게 느껴졌다. 때로는 밉기도 하고, 때로는 안쓰럽기도 했으며, 때로는 처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곳에 발을 디딘 나는 멍하니 한 실장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지금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비워지고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모르는 예전에 나로 돌아갔다.

“몸도 약한 애가 임신을 한 몸으로 죽겠다고 끼니를 굶고, 손목을 긋고, 목을 매달았어요.”

“…….”

“그런 서문희를 관장님께서 이곳에 두셨어요. 자신의 가슴에 못 박은 애를 살리려고 자신의 곁에 두셨어요.”

둥둥둥, 커다란 북소리가 내 가슴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미약한 진동과 함께 내 머리를 뒤흔들었다. 한 실장이 내게 말하는 사실들은 내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그만하라고 고함치고 싶었는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도련님은 그렇게 태어났어요. 진작에 죽었을 목숨, 관장님 덕분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겁니다.”

한 실장의 어조는 사납지도 않았고, 날 다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과거의 사실 하나를 전달하는 목적일 뿐인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깨우치려 하고 있었다.

“서문희가 죽고 이 저택에 도련님을 데리고 오자고 한 사람도 관장님이세요. 회장님이 아니라.”

엄마의 죽음 후, 고택에서 어미를 잃고 시들어 가는 나를 데려온 사람이 관장님이라는 사실이 내 죄책감과 양심을 비틀고 조여 댔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도련님이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관장님의 아들인 이사님과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 상황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자기 형과 그러는 건…….”

“…….”

“……사랑이 아니에요. 끔찍한 죄악이에요.”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한다. 죄악이라 말한다.

누군가가 딱딱하고 무거운 무쇠로 날 내려치는 것 같았다. 쾅! 쾅! 커다란 굉음이 환청처럼 들렸다. 귀가 아파 와 두 손을 들어 세게 막았다. 그럼에도 소리가 귓구멍을 비집고 여전히 새어 들어왔다. 절로 고개가 흔들렸다. 쪼개질 것 같은 먹먹한 가슴과 어지러운 마음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런 죄악을 관장님께 드릴 건가요?”

한 실장이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당당하게 그를 사랑하겠노라고 할 수도, 당연히 관장님께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리며 같은 말만 멍청히 내뱉었다.

“……이사님이, 사랑해도 된다고…… 그랬어요. 사랑하라고 했어요.”

사랑이란 단어를 내뱉을수록 울컥울컥 울음이 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서러움이 밀려왔다.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세상을 마주할 기회가 왜 주어지지 않는 걸까? 아파서 갇혀 있는 것 말고, 우울이 드리워진 엄마의 완전하지 않은 사랑 말고, 방 안에 혼자서 외로이 견디는 것 말고 내게 주어지는 다른 세상은 정말 없는 것일까?

양 귀를 붙잡고 고개를 흔들며 아이처럼 울었다. 정말로 원하고, 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죄악이 된다는 사실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나는 늘 아픔을 외면하며, 외로움을 외면하며 견디어 왔지만…….

“이사님이, 사랑…해도 된다고 했는데…….”

이번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외면하는 내게 한 실장이 담담히 비수를 꽂았다.

“이사님이 사랑한다 말하시던가요.”

“…….”

“이사님도, 영우 도련님을 사랑한다고 하시던가요.”

입이 크게 벌어지며 나만 들리는 소리 없는 비명이 아우성치며 밖으로 쏟아졌다. 그녀의 질문에 거짓말로라도 그도 나를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지는 세상이 내 머리를 짓밟고 어깨를 짓누르며 자빠뜨린 뒤 마음을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정말 사랑이라면, 이렇게 아프고 비참한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얼마나 더 아프고 더 비참해져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더 죄악을 지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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