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27)

후일담

모처럼 늦잠을 잤다. 어젯밤엔 미열도 없었고 평소보다 기침도 덜했다. 그의 품에 꼭 안긴 채 토닥임을 받으며 잠든 일이 어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떠 보니 불투명한 유리창에 햇빛이 둥글게 모양 진 것이 보였다. 해의 위치가 오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노란빛이 도는 방 안이 눈부셔서 나도 모르게 눈을 찡긋거리자 내 눈썹 위로 손바닥 차양이 생겨났다.

“잘 잤어? 오늘은 꽤 많이 잤네.”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가 아직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내 정신을 흔들어 깨웠다. 절로 느슨하게 풀어지는 입가로 부드럽고 따듯한 입술이 내려와 ‘쪽’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눈부셔도 눈을 뜰 수밖에 없는 기분 좋은 그의 인사는 오늘도 무사히 내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아무도 없이 혼자 일어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밤새도록 곁에서 나를 지켜보았을 그의 수고 덕분이었다. 그런 그의 눈가가 거칠어 보여 손을 들어 눈 밑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내 걱정에 밤새 안녕하지 못했을 그가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나를 끌어안고 있느라 자세가 불편할 텐데도 내색 하나 없는 그는 자신의 눈가에 있는 내 손을 잡아 입 맞추었다. 나를 깨우는 주문 같은 행위에 손끝부터 온기가 퍼져 나갔다.

“유모가 기다리고 있어. 밥 먹으러 나가자.”

“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따듯한 온기가 멀어져 가고 허전함이 몰려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나를 잘 아는 그가 두 팔을 벌려 안아 일으켰다.

상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 매일 아침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눈을 뜨고 사랑을 속삭이는 그런, 따듯한 삶. 내게 주어진 남은 삶은 이렇게도 아름답고 눈부신 나날이었다.

밥 먹기 전 열대어에게 먹이를 주고 싶었지만 그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의 우선순위는 항상 나였기에 열대어에게 먹이를 주고 싶으면 먼저 밥을 먹어야만 한다고 단호한 뜻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열대어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하면 밥 먹을 생각 않고 꼬박 30분 이상을 어항 앞에 앉아 뻐끔거리는 모습들을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뜻이 곧 나의 바람이자 신념이기에 나는 군말 없이 유모가 차려 준 자그마한 소반 앞 방석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그도 소반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의 앞과 내 앞엔 소복하게 올라간 밥이 있었다. 모처럼 컨디션이 좋은 나는 오늘 죽이 아니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사님, 맛있게 드세요.”

그는 내 입으로 밥이 넘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소리 없이 정갈하고 우아한 그의 식사 모습은 유모와 나의 소박한 밥상을 저택의 기품 있는 식탁으로 바꿔 버린다. 긴 다리가 불편할 법도 한데 방석 위로 단정하게 자리 잡은 모습은 꼭 그림같이 멋있어서 항상 밥을 먹다 말고 그를 빤히 쳐다보기 일쑤였다.

“지영우.”

“……네?”

“안 먹고 뭐 해.”

밥만 소복이 올려 있는 수저 위로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조림이 올라갔다. 내가 왜 빤히 바라보는지 알면서도 그는 내 시선을 받지 못한 척 말했다. 항상 고백하듯이 ‘멋있어요’, ‘좋아요’, ‘사랑해요’를 연발하는 나를 알면서도 그랬다.

“멋있어서요.”

지금도 나는 솔직한 심정을 고백한다. 당신이 멋져서 밥 먹는 것도 잊고 바라보았노라고 말이다. 내 대답에도 그는 듣지 못한 척 묵묵히 식사를 했다.

“이번엔 굴비 주세요.”

말 한마디에 고소하고 윤기 나는 굴비 살이 척하니 밥 위에 올라왔다. 그의 앞에서만 젓가락질을 못하는 아이가 되어 버린 나는 이런 보살핌이 어느새 자연스러워진 지 오래였다. 커다란 굴비 살은 모조리 입 안에 넣고 그 아래에 있는 밥은 아주 조금만 먹자 흘긋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밥을 더 먹으라 말하고 싶지만 입이 짧은 내가 먹는 것을 언제 멈출지 몰라 타박을 참는 눈치였다.

“더 주세요.”

아직 밥이 남은 수저를 그의 앞에 쓱 내밀자 그가 다시 커다란 굴비 살을 올려 주었다. 이번엔 굴비 살만 먹지 않고 밥까지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다 씹지도 못하는데 욕심부리지 말고 조금씩 나눠 먹어.”

내가 적게 먹어도, 많이 먹어도 그는 언제나 내 걱정뿐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웃음 짓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달콤한 잔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기침을 조심하며 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그 밥 다 먹으면 가 보고 싶었던 뒷산 올라가 보자.”

“……정말요?”

“그래.”

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 씹고 있던 밥을 얼른 꿀꺽 삼키고 물었다. 뒷산은 고택에서 가까운 작은 동산이었다. 완만하다고는 하지만 산은 산인지라 차마 오르지 못하고 엄마와 내가 컨디션이 좋을 때 가볍게 언저리만 산책하던, 멀고도 가까운 동산이었다. 꼭 한 번은 올라서 주변 풍경을 내려다보고 싶었던 그 산을 그가 올라가 보자고 한 것이다.

내가 웅크려 있었던 계절 동안 꽃과 나무들은 기지개를 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연한 녹음이 펼쳐져 있고, 나무에 알록달록 예쁜 꽃들이 피어 있을 것이다. 그 개화를 드디어 마주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죠?”

“그래, 대신 그 밥 다 먹으면.”

“알겠어요.”

그와 함께 내게 다가온 찬란한 봄은 계절의 정점에 달해 있었다. 따듯하고, 눈부시고, 포근했다. 얼어붙고 거칠었던 겨울이 지나간 자리는 더 단단해지고 굳건해졌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산을 오르는 그의 등에 업힌 나는 두 다리가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것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손을 잡고 언덕 아래까지 걸어왔으나 경사가 시작되는 부분에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등에 업혀야 했다. 넓고 든든한 등에 가슴을 맞대고 어깨를 부여잡았다. 규칙적인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무리 말랐어도 성인 남자인 나를 업고 가는 것이라 힘들 텐데도 그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언덕을 올랐다. 그의 수고가 고마워 뺨을 그의 목덜미에 묻은 채 속삭였다.

“이따가 저녁도 남기지 않고 다 먹을게요.”

“…….”

“정말이에요. 유모가 담아 준 밥 다 먹을 거예요.”

그는 말없이 흐트러진 자세를 고치며 나를 단단히 업어 올렸다. 흔들흔들 몸이 흔들리자 떨어질까 무서워 그의 목덜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동시에 따듯한 봄바람이 우리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최근 들어서 자르지 못해 길어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나부끼는 것이 느껴졌다.

“춥지는 않고?”

“네. 안 추워요.”

살랑거리는 따듯한 봄바람마저 걱정하는 그를 안심시키려 바로 대답했다. 실제로도 춥지 않았다. 내 등엔 유모의 극성스러움의 증거인 포근한 담요가 덮여 있었고 가슴팍엔 따듯한 그의 체온이 닿아 있었다.

“상쾌하고 좋아요. 숨도 시원하게 잘 쉬어지는 것 같아요.”

정말이었다. 기침이 잘게 쏟아지지도 않았고 기분은 상쾌했다. 그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오를 수 없다 생각한 동산을 오르는 것이 현실이듯, 그가 현재 내 곁에 있는 것도 현실이었다.

“다 올라온 것 같은데…….”

편히 등에 업혀서 주위의 꽃나무들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데 혼잣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온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완만한 경사가 아닌 점점 평탄한 평지로 접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두 다리를 흔들며 내려 달라 청했다.

“이제 걸어서 갈래요! 내려 주세요.”

“위험하게 움직이지 마.”

경고와 함께 엉덩이 언저리에 있던 그의 손바닥 하나가 팡 하고 한쪽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미약한 발버둥도 위험하다 생각하는 그의 노파심이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며 두 다리를 땅에 내려놓았다. 흙 위에 피어오른 잔디를 밟자 발바닥에 폭신함이 느껴졌다.

어깨에 걸쳐진 담요가 흘러내리는지 그가 내 앞에 서서 다시 단단히 여며 주었다. 겨우내 앓던 감기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더욱 조심하는 것이었다.

“막상 올라오니까, 별거 없는 것 같아요.”

평지보다 조금 더 높은 동산의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 보며 말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저 아래에서 이곳을 얼마나 올라와 보고 싶었던가. 간절했던 열망과 소망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별거 없음에 마음이 후련해지기까지 했다.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고택의 청색 기와지붕과 아담한 마당이 눈에 띄었다. 내 방 창문 앞에 서있는 노란 꽃을 피운 산수유나무와 유모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내 누비이불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도 보였다. 늘 내가 보던 풍경이었다.

“이제 알았어?”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목소리엔 작은 웃음기가 머금어 있었다. 나는 몸의 방향을 돌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네가 저기서 보는 세상도, 이곳에서 보는 세상도 모두 같아.”

“…….”

“그러니, 슬퍼하지도 말고. 속상해하지도 마.”

우두커니 살아온 나의 삶을 위로해 주는 그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울린다. 내가 바랄 수 없었던 외롭지 않은 삶을 선물해 준 그가 참 좋아서 까치발을 들어 가까이 얼굴을 마주했다.

“이사님.”

나는 항상 그를 부르고.

“키스해 주세요.”

사랑을 조른다.

서서히 감는 눈앞으로 밝은 어둠이 끼칠 때쯤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입을 벌려 받아들이고 혀를 감아올리며 숨을 나눈다.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듯 그의 팔이 더욱더 조여 왔다. 내가 그 틈을 타 더 파고들며 안달하자 그의 키스가 다정하게 나를 달랬다. 그 다정함이 달고 달아서 눈물이 났다. 결국 짭조름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달콤한 키스를 방해하고 말았다.

“키스해 달라며.”

“……네.”

“왜 우는 거야.”

“이사님이 너무 좋아서요.”

한숨처럼 내뱉는 말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고개 숙여 입술을 부딪쳐 왔다. 한심한 곤란함이 아닌 사랑스러운 곤란함이 묻어나는 키스로 나를 해제시킨다.

그러면 난 매달리고, 조르고 또 매달리며 숨이 가빠 올 때까지 그의 입 안에서 머문다.

“하아…….”

양 뺨이 열로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거칠어진 내 숨소리에 그가 살며시 입술을 떼고 내려 보는 것이 느껴져,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고 천천히 눈을 떴다. 햇살과 함께 보이는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눈부셔 그만 웃고 말았다. 가쁜 숨소리와 터져 버린 웃음은 동산 꼭대기 언저리에 울려 퍼졌다.

“뭐가 그렇게 좋아.”

내 웃음의 이유를 다 알면서 꼭 저렇게 물어 오는 그가 좋았다. 내게 사랑을 확인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알잖아요.”

“…….”

“내가 이사님, 사랑하는 거.”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뜻깊은 것이라. 그가 원할 때까지 사랑을 말한다. 내가 곁을 떠나기 전까지 항상, 언제까지나.

“지영우.”

내 이름을 나직이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허리를 꼭 끌어안느라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이사님 아닌데 언제까지 이사님이라 부를 거야.”

“…….”

그는 자신이 짊어진 모든 것들을 버리고 나에게 돌아왔다. 그가 내게 온 뒤로 검은 자동차를 탄 회장님의 사람들이 고택으로 그를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불안해하는 날 위해 그는 매일매일 자신을 포기하며 내 곁에 있어 주었다. 자신의 자리가 마치 이곳인 것처럼.

“나 이제 백수야.”

“……알아요.”

“이사님 아니라고.”

“……알아요.”

“그럼?”

쉬운 문제를 내준 그의 표정이 한가로워 보였다. 이제 정말 큰 무게를 덜어 낸 것 같은 후련함도 얼핏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것이 내게는 어렵고 어려워서 다시 가슴팍에 곤란한 얼굴을 숨겼다.

“그럼 뭐야.”

“…….”

“이사님 아니고 뭐야?”

“……백수님.”

웅얼웅얼, 그가 바라는 정답이 아닌 다른 답이 나오자 그는 크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사실 정답을 알고 있지만 차마 맞힐 용기가 없었기에 오답을 말하고 그 뒤에 몸을 숨겨 버렸다. 자꾸만 파고드는 나를 그가 간단한 손짓으로 떼어 내며 다시 불렀다. 그에게서 멀어진 허전함에 몸을 떨며 올려 보았다.

마주한 그의 눈은 고결한 단단함을 품고 있었다. 우리가 마치 순리를 거스른 적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지영우.”

“……네.”

“너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하면 돼.”

“…….”

“나는 그거면 돼.”

아직까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를,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네 형이어도, 네가 내 동생이어도 상관없어. 달라지는 건 없어. 그러니 괜찮아.”

그가 내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임을 알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마지막 죄책감을 자신에게 버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내 걱정대로 되고 말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 그가 다시 또 다른 짐을 짊어지고 말았다. 바로 내 사랑이었다.

사랑밖에 줄 수 없는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는다. 애정을 담아, 기쁨을 담아, 나의 모든 것을 담아…… 나의 형인 그에게.

“……형, 사랑해요.”

“…….”

“형인 당신을, 내가 많이 사랑해요.”

“그래, 알고 있어.”

울음이 섞인 고백이 단단한 그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가만히 내 사랑을 받아 주는 그의 손길이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이제 나는 알 수 있었다. 한없이 따듯하고 상냥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그대의 손길이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

재차 쏟아지는 그의 담담한 대답이 내 귓가로, 마음속으로 위로처럼 다가와 머물렀다.

내가 남은 생을 살아갈 이유와 힘을 주는 어느 봄날이었다. 날은 따듯했고, 눈부셨다. 그리고 내 곁엔 그가 있었다.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그대에게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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