氾濫(범람)
나는 잠귀가 밝은 편이어서 작은 기척이나 소리 따위를 잘 감지하곤 했다. 그랬기에 다른 누군가와 침대를 공유하며 함께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넓은 공간에 홀로 누워 어떠한 진동이나 움직임 없이 침묵과 잠이 드는 것이 내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늦은 새벽 모두가 잠이 든 시간. 지금처럼 내 방 안으로 도둑고양이와 같은 침입자가 살금살금 들어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을 감은 채여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굉장히 거리낌 없이 활보하는 조용한 발걸음.
아이였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시시콜콜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던 평소 때와 달리 내가 잡아 준 손을 얌전히 배 위에 올려놓고 바로 잠을 청한 아이였다. 지금 상황을 보자 하니 미리 계획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의 깜찍한 놀이에 적당히 맞장구쳐 줄 생각이었다. 내가 잠에서 깬 줄 모르고 꼼지락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오는 행동이 눈 감고도 훤히 그려졌다.
내가 깰까 봐 느릿느릿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숨죽인 호흡은 감출 수 없었다. 약간은 가빠 보이는 숨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다. 매트리스가 미세하게 내가 모로 누워 있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아이가 내게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다.
열띤 긴장과 흥분, 기대감, 설렘과 같은 아이의 빛나는 감정이 내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내 품 앞까지 왔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곁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간질간질한 아이의 머리칼이 코끝에 닿았다. 바람 하나 없는 공간에서도 나풀나풀 흔들리며 나를 자극했다.
빨랐던 아이의 호흡 소리가 일정하고 고른 속도로 잦아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의 숨소리였다. 거칠지 않은, 아프지 않고 가벼워 보이는 차분한 숨소리. 어디 아프거나 잘못된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을 주는 소리.
안도감에 깊은 숨이 터져 나왔다. 눈을 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눈앞에 나타난 아이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속에서 사랑스러운 모습을 찾아냈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뺨에 기댄 채 웅크려 누워 있는 아이를 보자 뭔지 모를 만족감이 차올랐다. 만약 신이 있다면 자꾸 내게 비겁한 시험에 들게 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라는 듯 눈 감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를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또다시 직면한 시험대 앞에서 들끓는 마음을 차분히 죽이고 있을 때였다. 내리깔려 있던 기다란 속눈썹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망설임과 호기심이 담긴 아이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움직임이었다. 결국 얇은 눈꺼풀이 열리고 투명하리만큼 속을 내보여 주는 아이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
“……이젠 대놓고 들어왔네.”
흔들렸던 속눈썹과는 달리 아이의 눈망울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나를 올려 보고 있었다. 나 역시 나무라지 않는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을 건넸다. 네가 나에게 온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듯이.
“나랑 같이 있어 주기로 하셨잖아요.”
잘못은 나에게 있었다. 아이에게 곁에 있어 준다 해 놓고 있어 주지 못한 나였다. 약속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나는 아이의 투정을 받아 주었다.
꼬물거리며 찾아오는 마른손을 피하지 않고 받아 주며 미온의 부드러운 감촉을 손안에 가두었다. 그리고 이불을 들어 올려 살짝 떨고 있는 몸을 덮어 주자 아이는 고민없이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고민 없는 행동과는 다르게 나를 차마 끌어안지는 못하겠는지 몸을 붙인 채로 가슴 사이에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말없이 아이를 한 팔로 끌어안았다. 길을 잃은 아이의 손은 내 가슴팍에 밀착되었고 따듯한 숨을 내뱉는 코끝은 내 쇄골 언저리에 닿았다. 내 몸 어딘가 하나하나에 아이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닿자 이성이 점점 모호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몸에 가두고 싶어졌다. 아이를 조금 강하다 싶을 정도로 세게 끌어안으며 물었다.
“사용인은 어떻게 하고 왔어.”
품 안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달싹거리는 아이의 입술이 쇄골을 간지럽혔다. 나는 아이가 사용인을 어떻게 하고 왔는지에 대한 것은 관심 없었다. 그저 이 늦은 새벽 나를 만나기 위해 숨어 들어온 아이의 마음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응? 어떻게 하고 왔어.”
“…….”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내 몸에 닿은 아이의 곳곳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약간 겁을 먹은 것 같아 다시 한번 달래듯 물었다. 아마 평생 너를 혼낼 수 없는 나일 테지만.
“말해 봐. 혼내지 않을게.”
잘못을 용서해 주는 척 사탕발림의 말을 건넨다.
“……잠이 들었어요.”
나를 사랑하고 있는 아이는 언제나 이런 내 비겁한 상냥함에 무너져 진실을 고한다. 작은 웅얼거림이 하나의 빠짐도 없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제가 먹는 수면제를 탄 차를 같이 나눠 마셨어요. 저는 잠이 안 들고, 사용인은 잠이 들었어요.”
목소리와 떨림에서 아이의 겁이 느껴졌다. 나는 탄식과 같은 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이렇게 만든 것은 내 자신이었기 때문에.
“당신 때문이에요.”
나를 탓하는 아이가 밉지 않았다. 속삭이듯 고백하는 아이의 진심이 사랑스러웠다. 내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은 스스로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이가 자신의 행동에 겁을 먹고 몸을 벌벌 떠는 이 순간도 모조리 내 탓이었다. 아이의 잘못이 아니었다.
“무섭지만 내가 나쁜 짓을 한 건, 사라지는 당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울음을 쏟아 내는 아이를 달래 주고 싶었다. 내 과오를 알면서도 자신이 오히려 나쁜 짓을 했다고 말하는 아이의 열렬한 눈을 보고 싶었다. 뜨거운 말을 내뱉는 아이의 입술을 맛보고 싶었다.
품 안으로 도망치려 하는 아이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드럽고 연약한 턱이 쉽게 내 손의 움직임에 맞춰 따라왔다. 코앞의 말간 얼굴을 마주했다. 어두운 시야에서도 아이의 얼굴만은 환하게 빛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깜짝 놀랐는지 검은 눈을 크게 뜨곤 아이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왜 이 눈을 보고 위로의 뜻을 발견했을까. 이기와 탐욕이 서리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 내게 폭격을 퍼붓듯 부서져 내렸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또 내가 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잘못되지 않은 것일까. 아까부터 모호한 경계를 보이던 이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 변화를 알아챘는지 아이는 더 울어 버릴 것 같은 눈을 했다. 그 눈이 내게는 너무나 지독한지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내 눈을 감아 버리는 아이를 보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계획도, 생각도 없었던 내 진심이 아이를 덮쳐 버리고 말았다.
순서 따윈 없었다. 주저 없이 입 안을 파고들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여린 입 안을 마음껏 휘저으며 마음을 풀어 냈다.
거친 입맞춤에 긴장으로 바짝 힘이 들어가 경직됐던 아이의 몸이 흥분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머뭇 움직이는 입술 사이를 혀로 짓이겼다. 모두 다 갖고 싶었다. 탐하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파괴해 버리고 싶은 위험한 마음까지 일었다.
마음은 곧 행위로 나타났다. 집요하고 사납게 아이의 숨을 뺏다시피 입 안을 빨아올렸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살결을 핥아 내리고 오목한 입천장을 쓸어 올리자 숨이 부족한지 아이가 할딱거리며 혀를 내밀었다.
붉고 말랑한 혀가 서투른 움직임으로 내 턱과 입술 주변을 배회했다. 몽롱한 눈빛을 한 아이가 내 턱과 입술을 핥을 때마다 간질간질한 마음이 들었다. 움직임을 기다릴 수 없는 나는 다시 급하게 혀를 잡아채 쭉쭉 빨아올렸다. 다시 입맞춤에 휘말린 아이는 입을 벌린 채 눈을 감고 묵묵히 내 거친 애정을 받아 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이 순간. 우리가 함께하는 이곳은 나와 아이의 숨소리와 이따금씩 젖은 입술들이 부딪치는 원색적인 소리만 존재했다.
아직도 떨고 있는 아이를 편한 자세로 바르게 뉘여 주며 강하게, 그러나 아프지 않게 몸을 위에서 아래로 밀착했다. 똑바로 누운 아이가 눈을 살며시 뜨곤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이의 눈을 보고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다시 고개를 내려 입술을 헤집었다.
“흐으……!”
결국 견디지 못한 아이의 입에서 신음을 띤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아이는 좀 전의 흐느낌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부들거리던 떨림을 가라앉히고 몸을 이완시켰다. 그 여세를 몰아 나는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이사니임.”
내 입 안에서 아이의 부름이 터졌다. 명확하지 않은 불분명한 발음이었지만 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부름에 답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답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내면 깊숙이 눌러 왔던 욕심을 분출하는 것밖에 없었다.
아이를 외롭게 두었던 것을 자책하며, 마음을 되돌려 줄 수 없음을 한심해하며.
“……이사님, 하아…….”
그러면서도 나를 애타게 부르는 아이를 여전히 무시하며 제멋대로 구는 나는…….
“하아…… 하악…….”
귓가에 헐떡이는 아이의 숨이 들려왔다. 오랜 입맞춤이 조금은 버거웠는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눈물과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천천히 입술을 떼곤 몸을 일으켜 아이를 살펴보았다. 내가 남긴 흔적에 눈물로 흐트러져 있는 아이는 숨이 가쁜 와중에도 여전히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영우.”
“……하아, 네……”
아이는 나와는 달리 부름에 착하게 바로 대답을 한다. 그 순하고 깨끗한 마음이 예뻐서 달래 주고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왜 울어.”
비록 멋없는 물음이 비죽이 튀어나오고 말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항상 벅차게 되돌아왔다.
“당신이, 좋아서요. 어쩔 줄 모르겠어요.”
이 맹목적이고 달콤한 애정을 받는 사람이 나라는 것이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내 행동과 반응 하나하나에 행복해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은 나 자신을 괜찮게 여기게 하면서도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다.
아이의 벅차다 못해 넘쳐흐르는 마음은 내 가슴에 둔통이 되어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주고 싶으면서도 정작 정말 원하는 것은 해 줄 수 없는 나였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아직까지 흉터가 남아 있는 아이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코끝으로 상처를 어루만졌다. 최대한 나의 마음이 전해지도록 절실함이 담긴 숨을 불어넣었다. 우리 둘 사이에 내 진심이 전율이 되어 흐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사실, 너를…….
진실된 바람을 담아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아이를 한참이나 달랜 나는, 용서를 구하듯 입을 연다. 당당하지 못한 말은 속삭임과 같았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이 말로 상처를 받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이일 텐데.
“알아요. 괜찮아요.”
“너…….”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하는 모습이 내게는…….
“사랑해요.”
아름다운 아이의 입에서 아름다운 말이 흘러나왔다. 담담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뒤흔들었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상기된 얼굴은 설렘과 떨림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찰나와 같이 사라지고 이윽고 위축된 울먹거림이 나타났다.
“죄송해요.”
아이의 아름답고 빛나는 마음은 이기적인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사랑해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양면의 감정이 정신없이 소용돌이치며 내게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거침없이 난도질을 하자 묵직한 둔통이 점점 화끈거리는 격통으로 변해 갔다.
숨통을 조이듯 밀려오는 감정을 회피하려 다시금 고개를 내려 아이에게 입 맞추었다. 아까보다 더 거칠고 광포하게 덤벼드는 행위에도 아이는 피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애정을 갈구하며 매달리는 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등을 끌어안아 오는 손길에 위로를 받으며 떠나지 못하고 매달리는 내가, 애정을 갈구하는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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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은은한 조명, 물 흐르듯 부드러운 음악 소리 외엔 실내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이곳은 집안의 계열사 중 하나인 호텔 내의 레스토랑이었다. 그리고 보는 눈과 듣는 이가 많은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몇십 분 전에 시작된 식사는 윤 교수 딸과의 세 번째 식사 자리였다. 단독 룸이 아닌 홀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번 만남으로 하여금 결혼을 밀어붙이려 하는 아버지의 속내가 뻔히 드러났다.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도 나였고, 내 결정이었다. 누가 등 떠밀어 보낸 자리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커다란 가시 덩어리를 삼키고 있는 느낌이었다.
눈앞엔 단정한 미소를 띠우고 윤 교수의 딸이 바른 예절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름은 윤지영으로 두어 번 정도 사교 모임에서 본 적 있는 여자였다. 안면은 있되 부친들의 관계로 인사만 하고 지내던 사이였다.
“호텔 리노베이션을 굉장히 신경 쓰셨나 봐요. 귀국한 뒤로는 처음 와 봤는데 훨씬 멋지네요.”
정적이던 식사가 못내 어색했던지 윤지영이 말을 꺼냈다. 살짝 흘러내린 옆머리를 다소곳이 귀 뒤로 넘기며 주위를 둘러보는 얼굴엔 상기된 홍조가 서려 있었다.
“호텔은 어머니께서 일궈 가고 계시니, 어머니의 능력이죠.”
나 역시 무심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곤 윤지영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에 미술관과 호텔 리노베이션을 함께 끝마치신 어머니의 결과였다.
“정말 감각이 타고나신 것 같아요. 저도 디자인 쪽을 공부하고 있지만 학영 씨 어머님이 일궈 내신 결과를 볼 때마다 경이로워요. 언젠가 한번 꼭 배우고 싶은 분이세요.”
외적으로 보이는 차분하고 심심한 인상과는 달리 욕망이 있는 여자였다. 윤 교수가 벼르고 키웠다는 소문이 뜬구름 잡는 소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호텔 내부에 있는 어머니의 개인 소장품을 바라보는 윤지영의 눈이 빛났다. 동경과 경외의 빛과 함께 그녀의 진심이 보였다.
숨김없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결혼 상대로 흠잡을 것 없는 여자였다. 서로가 원하고 추구하는 부분만 충족시켜 준다면 좋은 파트너로 지내도 될 만큼.
내가 말이 없어도 앞에 앉은 윤지영은 매끄럽게 혼자서도 대화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할 때 가끔 시선을 던져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중간중간 떠오르는 다른 이의 얼굴 때문에 대화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늘 열에 들떠 있는 것 같은 발그스름한 볼과, 나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망울. 그리고 가만히 숨을 내쉬는 오밀조밀한 코끝이 나의 집중을 흐트러뜨렸다. 손에 쥐고 있는 나이프를 다시 한번 바르게 힘주어 윤지영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의문에 빠져들고 만다.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진실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사회에서 정의 내려진 답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것을 따르려 했다. 하지만 자꾸만 부질없는 의문에 빠지곤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학영 씨?”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윤지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손에 있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그녀를 다시 응시하자 나를 부르느라 마치지 못했던 대화를 이어 갔다.
“내년은 더 바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저희 집 쪽에서 올해 안으로 날을 잡았는데 학영 씨 생각은 어때요?”
윤지영도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 놓은 상태였다. 내 의중을 살피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온화해 보였던 그녀의 얼굴에서 오늘 가장 또렷한 속내가 보인 순간이었다.
“내 생각이 중요한 겁니까?”
내가 하는 결혼이고 나의 결혼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묻고 있었지만 실상은 내 자신에게 묻는 것과 같았다. 내 질문이 조금 놀라웠는지 윤지영이 눈을 살짝 키웠다가 이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럼요. 당신의 결혼인걸요.”
어리석은 질문이었음을 알고 있다. 상대에게 좋지 않은 여지를 남겨 주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미련스럽게 다시 한번 되씹었다.
“그렇죠. 제 결혼이죠.”
목구멍에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눈앞의 와인을 한 모금 머금어 목울대가 울리도록 삼키었다. 내가 억지로 선택한 결혼처럼 와인이 목구멍을 비집고 내려갔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것처럼 속마음이 홧홧하게 올라오는 것 같았다.
갈팡질팡.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결국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의견이 목소리가 되어 나타났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를 지켜보는 윤지영의 얼굴 표정에 어색함이 스쳤다. 머뭇거리는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 전에 재차 말을 이었다.
“윤지영 씨도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자각한 감정으로 내가 추구해 왔던 견고한 삶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 미묘한 변화에 담담해지려 노력하고, 때로는 묻어 두려 했지만 다 소용없었다.
그저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에, 내 마음 한 자락을 싣고 싶었다.
집에 들어온 시각은 늦은 새벽이었다. 윤지영과 헤어지고 따로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적지 않은 상당한 양을 혼자 마셨기에 어지러움은 평소보다 심했지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어둠이 깔린 조용한 집 안을 거닐었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혼자 잠이 들 아이 걱정에 이른 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늦은 시각 홀로 귀가하는 것이 원래의 내 생활이었다.
근래에 다시 이 고루한 생활로 돌아오고 있었다. 지난번 아버지가 아이와 어머니 앞에서 윤지영과의 결혼 일을 언급한 이후부터였다. 안 그래도 불안 속에서 살던 아이의 눈에 상처의 빛이 떠올랐었다.
아이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주위를 둘러싼 상황을 의식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자신의 공간에서 홀로 지새웠고, 나는 내 세상에서 정해진 일들을 처리했다. 서로를 피하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인 모양새는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이성의 끈을 잡고 있는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기에 이런 소극적인 상황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난 오늘, 결혼에 대해 재고를 내렸다.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버린 내 결정에 대해 곱씹으며 내 방과 아이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한 계단씩 올라갈수록 머릿속은 아이의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아파하고 있을까, 아니면…….
“……안녕하세요.”
“…….”
순간 착각의 실재를 보고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눈앞에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약한 얼굴로, 무너질 것 같은 몸으로 꿈처럼 서 있었다.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흔들리는 눈망울이 보였다. 무심을 가장한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잠옷을 쥐고 있는 손마디가 떨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 모습이 내게 어떤 식으로 내게 다가와 파문을 일으키는지도 알고 있을까?
빠르게, 또는 느리지 않은 평소와 같은 내 발걸음이 아이와 나의 곁을 좁혔다. 가까이 갈수록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내 앞에 가득 서렸다. 그 모습을 보자 어지러웠던 머리가 차분해졌다.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아이가 용기를 내어 달싹거리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늦게 오셨네요.”
“그래.”
한쪽으로 기울어져 버린 결정이 제 뜻을 주장하며 마음속에서 아우성쳤다. 머릿속이 차분해질수록 손만 뻗으면 닿을 아이를 안고 싶었다. 비틀어진 애정으로 아이를 취하고, 탐하고, 울리고 싶었다.
무심을 가장한 거대한 욕심이 흉물스럽게 커졌다. 아이를 망가뜨리기 전에 이 순간을 지나치고 싶었다.
“샤워하고 싶어서 나왔어요.”
아이를 지나치려는 순간 우뚝 걸음을 멈췄다. 훤히 드러난 아이의 아픔을 두고 지나치는 것은 내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
“아파서 이틀 동안 씻지 못했거든요.”
담담히 사실을 고하는 표정에 설렘과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렇기에 아픔을 앞세워 내게 동정을 얻으려고 한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별안간 치솟는 분노를 느껴야 했다. 아이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병증의 고통을 혼자서 감내하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던 내 스스로에게 향해야 할 분노가 갈 길을 잃고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가슴에 진동이 느껴지도록 맥박이 빨라졌다. 눈가에 열기가 몰리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최대한 천천히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섰다. 하염없이 밀려오는 자괴감으로 인한 분노에 말을 아끼고 참았다. 거칠어지지 않도록,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했다.
“씻는다고.”
그러나 아이에게 두서없이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견디어 내야 할 사람인 나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새벽에.”
너에 대한 내 걱정, 안타까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몸을 하고 씻는다고?”
마음과 다른 행동이 먼저 움직였다. 겁먹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외면하고 가는 손목을 낚아챘다. 한 손에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자 아이의 몸뚱이가 비틀거렸다.
“……이사님!”
끌려가지 않으려 아이가 나를 외쳐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내 이성은 불길에 사로잡힌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저 아픈 아이를 방 안에 데려다 놓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가벼운 몸뚱이가 내 걸음에 휘청거리며 이끌려 왔다. 발버둥을 치며 반항의 몸짓이 있었지만 내게 큰 방해가 되지 못했다.
“저 씻을 거예요……!”
꼼짝하지 않고 무작정 끌고 가는 나를 설득하려 아이가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외쳤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움켜잡은 내 손을 절실하게 붙잡았다. 악착같은 악력이 아이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 꼴을 하고 씻겠다고? 지금 너 나한테 시위해?”
걸음을 멈추고 외면하던 얼굴을 내려보며 말했다. 억눌린 목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위협적으로 들리기에는 충분했다.
내 팔을 붙잡은 아이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마른 손목은 울긋불긋한 멍들이 가득했다. 시선을 내려 작은 손의 손끝이 떨군 아래를 보았다. 하얀 맨 발등 위로 피가 맺혀 있었다. 주삿바늘을 뽑은 흔적이었다.
최근 식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링거로만 버티고 있던 아이는 씻고 싶다고 이 늦은 새벽에 맨발로 얇은 잠옷 하나만 걸치고 나온 것이었다.
“내가 말했지. 네가 원하는 건 해 주겠다고, 근데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라서 지금 이래.”
나의 힐난에 아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에게 모진 말을 쏟아 내 상처를 주면서도 고개 숙인 얼굴을 들게 해 보고 싶었다.
“고개 들어. 지영우.”
내 부름에 순순히 고개를 들어 올리고 마는 아이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조그만 원망도 담기지 않은 순한 눈이 정직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눈가에 가득 담긴 눈물이 용케도 떨어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었다.
“바보 같은 행동 하지 마.”
아이가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정히 보듬어 주고 싶다가도 외면하고 싶고, 숨 막히도록 꼭 끌어안아 주고 싶다가도 도망치고 싶었다.
“식사 제때에 챙겨 먹고, 꼬박꼬박 약 먹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마. 너 지금 몸이 어떤 줄 알아?”
아이의 상태는 꼬박꼬박 주치의에게 전해 듣고 있었다. 식사는 제대로 하지 않아 영양 상태가 엉망이었고 처방해 준 약도 체력이 약해 토해 내기 일쑤였다. 온몸이 삶을 나아가길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태어나길 약하게 태어나고 폐가 좋지 않은 아이는 평생을 보살핌 속에서 살아야 했다. 행복한 마음으로 좋은 것만 누려야 하는데…….
“……어떤데요?”
결국 아이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양 뺨에 길을 트고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차마 볼 수 없어 아이의 손목을 잡고 다시 이끌다가 몸을 들어 안아 올렸다. 한 품 안에 들어오는 몸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반항하기를 포기했는지 작은 얼굴이 가슴팍으로 기대어 왔다. 순응하는 행동과는 다르게 아이의 입에선 날이 선 말들이 쏟아졌다.
“내 몸이 어떤데요? 샤워하면 죽는대요?”
죽음이라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지영우.”
“그런 거 아니면 저 씻고 싶어요. 씻게 해 주세요.”
“……너,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모든 걸 해 주고 싶다. 이루어 주고 싶다. 해가 되지 않는 것들로부터 너를 보호하고 싶다.
“이사님.”
나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심장을 울리며 따듯한 기운을 전해 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는데 찾아갈 수가 없었어요.”
보고 싶어 찾아가야 하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외로움과 아픔에 몸부림치는 아이를 외면하지 말고 찾아갔어야 했다. 조악한 고민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모든 걸 해 주겠다고 했지만.”
울먹거림을 참으며 차분히 고백하는 숨결이 목덜미에 느껴져 잠시 숨을 쉬는 것을 멈추었다. 말뿐이었던 나와는 달리 아이는 온 마음과 온몸을 부딪쳐 내게 매달린다.
좁은 세상에서 살았지만 마음만큼은 깊고 넓었기에 나를 사랑하는 감정 속에서 죄책감을 동반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엄마처럼 사는 것이 생각처럼 쉽진 않은 것 같아요.”
내 마음을 포기할지언정 아이가 서문희처럼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섭고, 힘들어요. 그리고 또 고통스러워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무섭고,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아이는 그럼에도.
“그래도, 그만둘 수 없어요.”
말 한마디가 나를 밑바닥까지 끌어 내렸다. 아이의 눈에서 아름다운 빛무리가 번지는 것 같았다. 이것이 착각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텅 빈 마음속에 벅차고 눈부신 감정들이 새롭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견고했던 내 신념이 마구잡이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정확히 눈을 맞춰 오며 고백하는 아이의 몸을 힘주어 꽉 안아 주었다. 따듯한 몸이 부드럽게 와 닿았다. 답답하리만큼 강한 내 힘에도 아이는 양팔을 들어 올려 마주 끌어안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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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늦은 퇴근이었다. 해가 길어져 제법 늦은 저녁까지 환한 하늘을 보여 주는 계절인데도 바깥의 하늘이 새카맣게 어두워질 만큼이었다. 요 며칠 이르게 퇴근해 아이와 함께 있어 주는 시간이 많았던지라 모처럼의 늦은 퇴근이 미안해 부러 초콜릿 가게를 들러 초콜릿을 사가는 길이었다.
처음 초콜릿을 산 뒤로도 종종 들렀던 곳이라 내 얼굴을 익힌 직원은 내가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요령껏 초콜릿을 포장해 주었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예쁘고 신기하게 생긴 초콜릿들이 올망졸망 상자에 담겨 포장됐다. 그럴 때마다 초콜릿을 받고 환하게 웃는 아이를 떠올리는 것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라 따로 사람을 시키지 않고 내가 사러 가는 편이었다.
한 손에 들린 초콜릿 포장의 묵직함을 즐기며 어느새 도착한 저택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퇴근하신 뒤에 들어가는 길이라 사용인들의 마중 없이 번거롭지 않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한가로운 시간대였지만 나 홀로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에서 아이와 통화했을 때 늦더라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겠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사님, 퇴근하셨어요?”
걸음을 빠르게 해 계단을 오르려 할 때 맞은편에서 사용인의 인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2층을 관리하는 사용인이었다. 근속 기간이 상당한 사용인인 그녀는 아이의 방을 한 실장과 함께 담당했다. 지난밤 아이의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든 이이기도 했다. 나는 오르려던 계단 앞에 잠시 멈춰 서 그녀에게 질문했다.
“오늘 몸 상태는 어땠습니까.”
누구인지 지칭하지 않아도 사용인들은 내 이런 질문을 곧잘 간파하곤 했다. 내가 요즘 이 집에서 신경을 쏟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다들 알기 때문이었다.
“점심 드시고 코피 한 번 쏟으셨어요. 그것 말고는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식사량은?”
“반 그릇 조금 안 되게 드셨어요. 구역질은 좀 하셨지만 구토는 없었습니다.”
“그래요. 수고해요.”
아이가 요즘 부쩍 피를 쏟는 일이 잦아서 걱정이었다. 주치의를 하루가 멀다 하고 저택으로 불러들여 아이를 진단하게 했다.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았다. 점점 시들어 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건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다.
아이와 함께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조금 더 내 입지를 완성해야 했기에 아직까지는 아슬아슬한 만남의 줄타기를 견뎌야 했다. 결혼을 취소하고 또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는 부모님을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조금이라도 아이가 죄책감을 갖지 않고 마음껏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책임감은 그런 것들이었다. 결코 싫지 않으며, 따듯한 애정의 충만함으로 가득한, 무시할 수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 무게가 내게는 기꺼운지라 힘들지 않고 버겁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초콜릿을 발견하고 함빡 웃음 지어 줄 아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해 2층에 도착했다.
어둡고 조용한 복도 사이로 아이의 방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몸을 밀착하고 서서 귀를 문에 가져다 대고 있는 한 실장의 모습도 보였다. 2층에 도착한 내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녀는 아이의 방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부러 소리를 내지 않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수족인 그녀가 아이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한 실장은 아버지와 부정을 저지른 서문희를 매우 싫어하였기에 익히 예상하던 것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 2층의 동태를 긴요하게 주시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그녀가 나와 아이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것도.
“뭐 하고 있는 거지?”
지켜보느라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한 실장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내 기척을 알아챈 그녀는 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며 문 앞에서 멀어졌다.
“영우에게 무슨 일이 있나?”
“도련님, 오셨어요.”
이사로 취임한 이후 내게 도련님이라 부르는 일이 없던 한 실장이었다. 미심쩍은 행동을 들킨 자신의 상황이 어지간히 당황스러운 듯했다.
“물었잖아. 무슨 일 있느냐고.”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한 실장에게 다시금 질문했다. 노련한 그녀는 언제 당황했었느냐는 듯. 감시 따윈 하지 않았다는 상냥한 표정으로 내게 대답했다.
“기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어디 아픈 건 아닌지 확인했습니다.”
“그래? 오늘은 어땠지?”
2층으로 오르기 전 다른 사용인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나는 한 번 더 확인했다.
“구토나 피를 쏟는 것도 없었고, 식사도 한 그릇 다 드셨습니다.”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한 실장은 내게 아이의 약한 면을 알려 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에게 어떠한 동정심이나 일말의 감정조차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조용히 주시했다. 한 실장은 나에게 위협을 줄 만한 이는 아니었다. 상대는 더욱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겐 충분한 위협을 줄 수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유난히 아이에게 날을 세워 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내게 그런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지만 한 실장 곁에 있을 때면 주눅이 드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한 실장만 눈이 있고 귀가 있는 건 아니지.”
조금 더 방문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한 실장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함께한 세월이 길었지만 이렇다 할 감정의 교류나 친밀감을 갖고 있진 않았다. 내겐 그저 어머니의 사람일 뿐.
“내가 한 실장이 하는 말을 모조리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
“이사님…!”
“그럴 일 없겠지만 내게 대적하려 들지도 말고.”
“…….”
“도를 넘는 짓도 하지 마.”
한 실장의 얼굴에 순간 낭패의 빛이 스쳤다. 어머니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녀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나마 어머니를 봐서 해 주는 경고야.”
자신보다 어린 고용주에게 듣는 소리가 싫을 법한데도 한 실장은 묵묵히 고개만 내리고 있었다. 내 말을 얼마나 귀담아들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지만 어느 정도 아이와 나의 관계를 눈치챘을 그녀에게 작은 경고만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내가 왔으니, 2층엔 사용인들 올리지 마. 한 실장도 마찬가지야.”
“네, 알겠습니다.”
고분고분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한 실장에게 직접 경고를 준 상태이니 당분간은 나와 아이가 있는 2층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짓은 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먼저 손을 깨끗이 씻고 아이의 방 안으로 들어가자 쌕쌕거리며 잠든 소리가 들렸다. 기민하게 청각을 세워 호흡 소리가 불안하지 않은지 버릇처럼 살폈다. 미약하지만 거칠지 않은 숨소리가 안심을 가져다주었다.
나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는지 불 켜진 방 안은 조명으로 환했다. 베개에 옆얼굴을 묻고 이불에 파묻혀 잠이 든 아이가 보였다. 마음고생으로 핼쑥했던 볼이 최근 들어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예뻤다.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침대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말랑말랑한 발을 한 손에 잡으니 서늘함이 느껴졌다. 온기를 나눠 주듯 오랫동안 만져 주었는데도 고단한 건지 잠귀 밝던 아이가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욕심을 내서 아이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모로 누워 이불째 끌어안았다. 포근한 몸이 안정감 있게 품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드러난 목덜미에 가만히 입술을 갖다 대었다. 입술 표면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참아 내는 마음과 감정이, 아이라는 거대한 폭풍우 앞에 곧 망가져 버릴 돛과 같았다. 방향을 잃지 않게 몸부림치는 것이 힘겨워지고 있었다. 밤마다 내게로 다가와 온 마음과 몸을 던져 애욕을 내비쳐 오는 아이를 막아 내는 것은 몹시 어렵고 곤란한 일이었다.
머지않아 무너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결국 동생을 취해 버릴 나와, 그런 비이상적인 형에게 안겨 환희에 찬 얼굴을 할 아이를.
세상이 정의한 틀에서 벗어난 우리의 끝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