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9)

File#1. 032, ???, ???

첫 기억은 벌거벗은 채 또래의 아이들과 열을 맞춰 서 있었던 장면이다. 아마 50명 정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는 적었을지도, 혹은 많았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엔 숫자 개념이 없었으니까.

수를 센다는 건 나와 다른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땐 무엇도 아니었으며 무엇으로도 불리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그저 한 무리의 무엇이었다. 무리에서 자신을 구별해 내지 못했다.

자신이 ‘아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도 꽤 나중의 일이었다. 간간이 찾아와 먹을 것을 주고 뭔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들. 그 크고 억센 존재들이 무리를 ‘아이들’이라고 불렀기에, ‘아, 우리는 아이구나.’ 생각한 따름이었다.

크고 억센 사람들은 ‘어른’이었다. ‘어른’은 ‘장로’와 장로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나뉜다는 것에 익숙해질 즈음, 아이 중 절반이 사라졌다. 남은 아이들은 새로운 아이들과 합쳐져 다시 무리가 되었다. 새로운 아이들에겐 남은 아이들이 새로운 아이들이었다.

몇 차례 더 절반이 사라지고 새롭게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절반씩 사라지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남은 아이들은 숫자를 받았다.

비로소 아이들은 ‘나’와 다른 아이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032는 그중 하나였다.

032는 키가 크지 않았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하진 않았으나 뺨이 통통하고 보드랍지도 않았다. 많이 먹지 않았고 힘이 세지 않았다. 날랜 편이었으나 최상위는 아니었고, 잠을 많이 자지 않았다.

어두운 곳에서 웅크려 있는 걸 좋아했으나 햇볕을 쬐는 시간엔 늘 창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고 햇볕 쬐는 걸 좋아했다. 가끔 다른 아이에게 먹을 걸 빼앗겼으나 같은 아이에게 두 번째 빼앗겼을 땐 반드시 덤볐다.

032는 눈이 크고 검었다. 무리의 아이들이 서로 별명을 부를 정도로 친했다면, 그런 걸 할 줄 알았다면, 032는 왕눈이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032는 아이들이 사라질 때마다 매번 남는 쪽에 속했다. 숫자를 받은 아이가 다섯 명 남을 때까지 솎아지지 않았고, 세 명 중 하나가 되었을 때.

오메가로 발현했다.

두 명의 장로는 032를 앞에 세워 두고 탄식했다.

“하필 오메가라니. 그럼 모체가 오메가였다는 걸까요? 우린 모두 정상인이니, 모체가 오메가인지 정상인인지 알 수 없고 키트로 검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죠. 그래서 최대한 여성 임산부만 모셔왔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군요.”

“이 말세에 그 구분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요즘은 베타 사이에서도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것들이 곧잘 태어난다는데.”

“어쨌거나 아쉽게 됐군요. 선생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기대가 크셨던 만큼 실망이 크실 텐데요…….”

“음, 김 장로.”

“왜 그러십니까. 박 장로.”

“우리가 꼭 그분을 실망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이 아이가 오메가가 되어 버렸는데, 무슨 수로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요. 이미 오메가가 된 아이를 정상인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방법은 없지요. 그건 분명하지요. 우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로 알파와 오메가란 말세의 증거. 이미 이마에 악마의 인을 받은 것들이니, 때가 오면 가장 먼저 지옥에 떨어져 죽을 것들이지요. 그들은 음욕에 젖어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붙어먹고, 성욕에 눈이 뒤집혀 제 아내와 남의 아내를 구분 짓지 못하고, 신성한 결혼을 모독하고, 음욕의 대가로 남자마저 수태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오, 신이여. 그들의 음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이 입술에 묻은 더러움을 부디 씻어 주소서.”

박 장로가 말을 하다 말고 무릎 꿇고 땅에 이마를 댔다. 그 자세로 중얼중얼 속죄문을 읊기 시작했다. 속죄문은 ‘선생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음성을 받아 적어 주신 것이었다.

모세의 돌에 새긴 십계명과 모하메드가 동굴에서 들고 기록한 계율. 예수가 말로 전파한 사랑의 계명,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남긴 유훈에 이은 제5계명. 그것이 선생님의 전언이었다.

선생님은 말세 전 이 땅에 내려온 마지막 메신저였다. 그분은 명상으로 하늘 아버지와 교통하고, 기도와 예배를 통해 말세의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하루빨리 심판의 날이 도래하도록 애쓰고 계셨다.

선생님은 자신을 따르는 어린 양들이 심판의 날을 앞두고 휴거할 수 있도록 마음 써주셨는데, 그 방도가 영혼을 육신에 잡아 붙드는 죄로부터 가벼워질 수 있도록 만드는 주문이었다. 속죄문은 그중 하나였다.

박 장로가 긴 속죄문을 암송할 동안 김 장로는 옆에 서서 눈을 감고 두 손을 박 장로의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박 장로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주었다. 박 장로는 속죄의 시간을 함께 견뎌 준 김 장로를 신뢰와 우정이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속죄받은 자가 계속 죄인이라 자처하는 것이야말로 선생님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시는 일이요. 우릴 구원해 주신 그분께 불신의 죄를 짓는 일 아니겠습니까.”

김 장로가 박 장로를 일으켜 세웠다.

“그렇지, 그렇고말고요. 내 아무리 어리석어도 그런 죄까지는 저지르지 말아야겠지요.”

“그래, 그나저나 아까 하려던 말이 뭡니까.”

“그러니까, 그게…….”

박 장로가 목소리를 팍 낮추었다. 거 왜, 낮말은 알파가 듣고 밤말은 오메가가 듣는다지 않습니까. 존경하는 선생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한 일인데, 극히 조심 또 조심해야지요.

“아니, 그래도 그건…… 글쎄요, 그래도 선생님을 속이는 건…… 그래, 속이는 게 아니고, 알지요, 알아. 박 장로 말이 뭔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닌데…… 하아, 알겠습니다. 알았어. 일단은 뭐, 그렇게 해보지요.”

김 장로는 결국 박 장로의 설득에 넘어갔다. 그때까지도 032는 그들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김 장로는 무표정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는 혀를 찼다.

“하긴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제가 오메가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세상 밖의 다른 오메가라면 모를까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서 자라난 아이인 것을. 선천적인 낙인의 죄 말고는 어떤 죄도 짓지 않은 깨끗한 영혼이니. 평생 선생님을 위해 봉사하면 더러운 음욕의 낙인을 벗고, 최후의 날 함께 선생님을 따를 수도 있겠지요.”

김 장로는 032가 딱해 박 장로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거라는 듯 말했다. 선생님을 속이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말이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맞장구치는 박 장로의 표정도 마냥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김 장로와 박 장로. 두 장로의 마음을 이토록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든 032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겪게 될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불안해하거나 겁먹지 않았다.

“얘야, 이게 다 널 위해서란다. 알겠지?”

자상한 목소리. 어깨를 꽉 움켜쥐는 두툼한 손. 맹목적으로 빛나는 두 쌍의 눈빛. 그 아래에서 032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오직 하나였다.

032는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뒤 고개를 숙였다. 윗사람에게 대단한 물건을 하사받는 모습 같아 보였다. 선생님께서 직접 내려 주시는 하늘의 계명에 순종하겠다는 자세였다.

망설임 없이, 당연하게 복종하는 032를 보며 김 장로와 박 장로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오메가 따위가 되었다고 폐기하기엔 아까운 아이이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며.

***

다음 날. 셋은 둘이 되었다. 김 장로가 하루 만에 마음을 바꿔 032를 폐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셋은 귀한 수였다. 고작 셋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오메가로 발현한 032를 폐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김 장로와 박 장로는 기꺼이 032의 선천적인 음욕마저 품고자 했으나 셋 중 하나가 스스로 솎아지기로 결심한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문제를 일으킨 건 032가 아니라 011이었다.

011은 요망하게도 박 장로와 김 장로가 없는 틈을 타 문을 지키는 어른을 뱀처럼 홀려 냈다. 마시라고 준 물을 제 몸에 끼얹고는 젖은 몸을 드러내 어른을 은근히 유혹했다. 그렇게 제가 홀린 어른을 CCTV가 닿지 않는 사각으로 끌어내 오메가처럼 발정하여 다리를 벌리는 척했다.

그리고.

제게 덤비는 어른의 목을 그 길고 유연한 다리로 감싸 꺾었다.

011은 푸들푸들 경련하며 죽어 가는 어른의 육신을 밟고, 그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빼내 에덴동산의 문을 열고 도망쳤다.

011은 늘 장로나 다른 어른들과 동행하였던 길을, 처음으로 혼자 나섰다. 에덴동산 외벽을 지키던 어른 열둘을 죽이거나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011을 보고 방심한 건 에덴동산의 어른들뿐이었다. 에덴동산 밖의 어른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혼자 돌아다니는 011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바로 알아챘다. 그들은 011을 추격하고, 공격했다. 011은 미로처럼 복잡한 교단 내부를 빙빙 돌다 사살되었다.

선생님과 함께 금식 기도 중이던 박 장로와 김 장로가 연락을 받고 달려왔을 땐 상황이 끝나 있었다. 011은 엽총에 맞고 죽은 사슴처럼 쓰러져 있었다. 이미 싸늘한 시체였다.

박 장로는 011의 눈을 감겨 주고, 이 불쌍한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길 눈물로 기도했다. 김 장로는 냉정하게 주변 상황을 수습했다. 그리고 011의 피 냄새가 가시기 전에 범인을 색출하고자 했다. 에덴동산에 소리 없이 숨어들어 011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악독한 뱀의 숨결을.

제일 먼저 의심받은 건 에덴동산 경비를 맡은 어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거나 치명상을 입고 위중한 상태였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막 봉합한 상처를 도로 뜯고 자해했다. 김 장로는 독실한 믿음을 보이는 그들에게서 사특한 뱀의 그림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선생님께서는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관심법을 익히셨다. 그러니 선생님을 찾아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뱀의 숨결을 머금은 배반자를 찾아내 달라 부탁드리면 될 일이나 김 장로는 그러지 않았다. 김 장로와 박 장로는 이런 하찮은 일에 선생님이 마음 쓰실 것을 두려워하며 일단 상황을 수습하는 데에만 애썼다.

그렇게 셋은 둘이 되었다.

남은 둘 중 하나. 032는 더더욱 소중해졌다. 김 장로는 032를 폐기하지 않기로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박 장로는 그러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후속 조치를 서둘렀다.

이틀 뒤.

032는 박 장로를 따라 에덴동산 밖으로 나갔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인 복도를 한참 걸으니 연구동산에 다다랐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표식에 구애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간 박 장로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하얀 가운을 입은 오 박사에게 032를 넘겼다.

“이 아이입니까?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쉬잇. 낮말은 알파가 듣고 밤말은 오메가가 듣는 법이야. 입조심하게.”

“여기엔 저희 말고 아무도 없습니다만. 아, 오메가가 한 명 있긴 하네요. 마침 밤이기도 하고.”

오 박사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몰래 일을 처리하려 절 찾아오셨으면서 이 정도에 놀라면 어쩌시려고요.”

“몰래라니? 허튼소리 말게. 선생님께서는 만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심법을 쓰시네. 내, 내가 크흠,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모든 일을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야. 선생님을 향한 내 충성심도 말일세.”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걸 알고 계실 선생님께 제가 직접 찾아가 이 사안을 말씀드리고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도 되겠군요.”

“서, 선생님께선 사흘째 금식 기도 중이시네. 고작 이런 자, 작은 일로 하늘과 교통하심을 방해해선 안 돼!”

“그렇다면 그 금식 기도라는 것이 끝난 뒤에 말씀드리면 되겠군요.”

“그 뒤에는 우리들을 위해 참회의 기도를 올리러 성전에 드실 것이니, 괜한 말로 그분의 평안하신 심기를 거스르지 말게!”

“흐음.”

“알겠지? 어엉?”

박 장로가 대답을 재촉했다.

오 박사는 알 만하다는 듯 비죽 웃었다.

“뭐, 그렇다 치죠. 이쪽에서 다시 정밀하게 검사해 봐야겠지만. 넘겨주신 데이터만 보자면, 확실히 발현한 오메가가 맞네요. 발현한 지 이제 3주. 아직 몸속 기관이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은 상태일 테니.”

오 박사는 성의 없이 차트를 넘기다 말고 032를 힐끗 봤다. 안경이 형광등 불빛을 반사해 하얗게 빛났다.

“오메가 기관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면, 베타나 다름없어질 겁니다. 페로몬도 못 맡고 뭐, 거의 페로몬을 내지도 못하겠지요. 보통 97% 정도 제거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긴 한데. 히트 사이클은 확실히 안 올 거고. 음, 하지만 배 속 장기만 적출한다고 완벽하게 베타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야 밖에서 너나 나나 할 거 없이 다 수술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부작용이 심하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정상인과 다를 바 없긴 하겠지?”

“직계 가족이라면 모를까. 베타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페로몬이 떨어질 테니까 아무도 오메간지 모를 테고. 뭐, 베타나 다름없다고 보면 될 겁니다. 직계 가족이래도 페로몬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성적 어필을 느끼기도 한다는 논문을 본 적이 있지만. 뭐, 그게 특이 사례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연구 결과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 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 박사의 말에 박 장로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건 걱정 없어. 032의 부모는 모두 죽었으니까.”

박 장로가 확신에 차 말했다가 아차 싶었는지 032를 바라보았다.

032는 차렷 자세로 미동도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형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박 장로는 그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011 사태를 겪었던 터라, 011과 달리 무던한 032가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032는 뱀의 간계에 넘어간 011과 다르다. 비록 오메가로 발현되었으나 교단의 순결한 가르침을 받고 자라 몸도 마음도 정신도 순결하지 않은가. 박 장로는 감정 없는 인형 같은 032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수술 일정을 잡아 주게. 당장 오늘도 좋은데.”

박 장로가 손을 싹싹 비비며 오 박사를 재촉했다.

“글쎄요. 저도 마냥 노는 인력은 아닌지라.”

오 박사가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근처에 앉아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료 연구원을 툭 쳤다.

“수술방 언제 비지? B번.”

“글쎄요. 한번 연락해 보겠습니다. 저흰 최근에 계속 D만 썼잖아요?”

“뭐, 급한 건 아니니까. 지금 하는 거 마저 한 뒤에 알아봐.”

“아니, 급하니까 당장 확인해 보게!”

박 장로가 버럭 소리 질렀다. 현미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연구원은 박 장로를 돌아보고는 “네넵!” 바짝 군기 든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쯧, 오 박사가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박 장로는 자신의 권위가 통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고는 만족하여 웃었다. 그리곤 이거 보라는 듯 오 박사에게 으스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 박사는 찌뿌둥한 얼굴을 한 채로 삐딱하게 서서 손에 든 차트만 넘겨 보았다.

‘한 번 보면 다 외우는 천재라면서 이미 훑어본 걸 새삼 다시 들여다보다니. 날 똑바로 볼 엄두가 안 나나 보지?’

박 장로는 멋대로 생각하고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박 장로는 제게 존경심을 보이지 않을뿐더러, 이 중차대한 일에 별 관심도, 의욕도 보이지 않는 오 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장로에게 순종하지 않는다고 처벌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오 박사는 선생님의 총애를 받아 초빙된 인재. 연구동산에서 핵심 프로젝트를 도맡는 천재 의사였다. 그를 교단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들인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사이버 종교 따위에게 협력하지 않는다고 뻗대던 녀석 아니던가. 선생님의 자비로운 인품과 신이한 능력, 교단의 숨겨진 위세에 감명받아 제 발로 기어들어 왔을 땐 어찌나 통쾌하던지.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끝까지 뻗댔다면 실망한 선생님을 위해 쓱싹,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오 박사가 선생님을 찾아왔을 때, 선생님께선 예배 중에 직접 단상 아래로 내려와 오 박사를 맞이했다. 장로들 앞에서 제 겉옷을 벗어 오 박사의 어깨에 얹어 주며, 오 박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선물이라고 선포하기까지 했다.

그를 향한 선생님의 총애가 이렇듯 깊고 무거우니. 오 박사는 오만하게 굴며 장로 알기를 뭣 같이 알고 뻣뻣하게 굴었다. 때문에 박 장로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장로들도 오 박사를 좋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불편한 감정과는 별개로, 밖에서 천재 소릴 듣던 오 박사의 실력은 독보적이었다. 박 장로가 직접 오 박사를 찾아와 032를 맡긴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박 장로는 오 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오 박사의 능력이 교단에, 특히나 에덴 프로젝트에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건 인정하는 바였다. 그렇기에 그를 고까워하는 마음은 잠시 접어 두고, 진심을 다해 충고했다.

“마지막 기회.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하고. 오직 선생님만이 구원자요, 말세 도래를 여는 메시아라 믿고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네.”

“고작 애새끼 하나 배 속 열어 엉망으로 헤집고 망치는 일에 최선은 무슨.”

오 박사는 박 장로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조소했다. 032는 그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얀 가운. 시니컬한 얼굴. 자꾸 하얗게 빛나는 안경.

온통 하얀 벽에 복잡한 기계로 가득 차 있는 연구실. 032를 투명인간 보듯 하며 각자 제 할 일 하기 바쁜 연구원들. 그 중심에 서 있는 오 박사는 메마르고 삭막했다.

032는 박 장로의 옷자락을 꾹 말아 쥐었다. 눈은 오 박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박 장로가 허리를 굽히고 032와 눈을 마주쳤다.

“무엇을 걱정하느냐.”

“…….”

“걱정되는 게냐?”

“…….”

032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선하기도 하지.”

박 장로가 032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자상하게 말했다.

“괜찮다. 다 잘될 거다. 모든 게 선생님의 뜻대로 될 것이니, 너는 아무것도 두려워 말고 따르거라. 알겠지?”

“…….”

032는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박 장로는 널 믿는다고 말하며 돌아섰다.

“곧 있으면 배 속이 헤집어져 망가질 아이한테 믿는다니, 참 나.”

오 박사가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

032는 연구실 한가운데 오도카니 서서 오 박사를 올려다보았다. 오 박사는 032를 보다가 에이씨, 짜증 내며 돌아섰다.

“오 박사님, B번 수술방 내일 저녁에 두 타임 빈답니다.”

“그렇게 빨리?”

“네?”

“뭐? 왜?”

“아, 아니, 방금.”

“방금 뭐? 두 타임 가지고 안 돼. 앞뒤로 스케줄 밀고 네 타임 잡아 놔.”

“네, 그건 좀…….”

“왜? 박 장로 말은 말씀이고 내 말은 개잡소리로 들리냐?”

“아,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럼 해.”

“아우우, 박사니이이임.”

“닥쳐, 네 목소리 짜증 나니까. 박 장로한테 꼬리 흔드는 걸 보니까 꼬리뼈 퇴화가 덜 된 거 같던데. 이참에 개 꼬리 달아 줄까? 내가 또 이식 전문이잖아? 응?”

032는 애꿎은 부하 연구원에게 화풀이하는 오 박사를 계속 바라보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콩콩.

심장이 뛰었다.

불안이라는 죄가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괜찮다고, 다 잘 될 거라고 박 장로가 말했지만. 그래도 032는 불안했다. 하얗게 빛나던 오 박사의 안경알 속 눈을 봐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032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오 박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헉. 헉. 숨소리가 거칠었다. 줄곧 뛰었으니 그럴 수밖에. 뒤를 돌아보니 낡고 흰 건물이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 제법 멀리 도망 왔으나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경찰서는커녕 민가, 작은 마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건물 밖은 끝없이 이어지는 허허벌판. 웃자란 잡초, 갈대가 사람 가슴께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나마 그거라도 있어 몸을 숨길 순 있으니 장점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 외에는 전부 단점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났다. 잡초의 풀줄기가 자꾸 발에 감겨 뛰는 데 방해됐다. 손이며 얼굴이 풀잎에 베어 피가 났다. 그래도 뛰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이만큼 멀어졌는데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러면…… 그러면, 만날 수 있어. 살 수 있어.”

오 박사가 헉헉대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게 팔이 잡힌 채 끌려오듯 따라오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숨이 흐트러지지도, 넝쿨에 걸려 넘어지지도 않았다. 오 박사가 이끄는 대로 달릴 뿐이었다. 오 박사가 비틀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가만 서 있기만 하였다. 도망치지도, 부축해 주지도 않았다.

오 박사는 애초부터 아이에게 그런 인간적인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일어서고 다시 달릴 따름이었다. 다만, 아이의 손목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그들이 탈출을 감행한 것은 대략 한 시간 전이었다.

오 박사는 혼자 B번 수술방으로 갔다. 보조하겠다고 나선 팀 연구원들에게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한다며 신경질을 냈다.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숱하게 경험한 연구원들은 감히 따라나서지 못했다.

오 박사의 말마따나 갓 발현한 오메가의 배 속을 헤집는 일 따윈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뒤늦게 마취 담당이 자신은 따라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었냐고 중얼거리자, 연구원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마취도 안 시키고 할 셈인가?”

“설마요. 아, 아무리 오메가가 싫어도 그렇지…….”

다들 닫힌 B번 수술방을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렸다.

수술방은 완전 방음을 자랑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얼마나 끔찍한 비명이 나든 말든, 밖까지 샐 일은 없는데도. 그들은 미성숙한 어린 오메가의 비명을 들은 듯 사색이 됐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누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잣말이라기엔 조금 큰 목소리여서 모두에게 들렸다. 다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거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지.’

그 오 박사가 B번 수술방에 들어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어린 오메가를 보았다.

아이는 밑이 뚫린 수술복을 입고 있었다. 수술대 옆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수술 도구들이 살벌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는 떨거나 울지 않았다. 멍해 보일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거나.

“오늘, 지금. 무슨 수술을 하는지 알고 있어?”

“…….”

천장을 보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오 박사를 보았다.

“말해도 돼. 대답해 봐.”

“예.”

“무슨 수술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정말로?”

그런데도 이렇게 얌전히 누워 있어?

“네.”

아이는 짧게 대답하고는, 오 박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연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세상이 말세에 이르르니 신을 잊고 쾌락과 음욕에 더럽혀진 세상은 이제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건 에덴동산에서 남자인 아담과 여자인 하와를 만들고, 여자로 하여금 출산하여 번성케 하신 신의 뜻에 어긋나니. 우리 선생님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두 번째 아드님으로, 이 땅에 최후의 심판을 열고,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남자와 여자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건 아이의 입에서 나오고 있으나 아이의 말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듣고 외우는 말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거기까지. 빌어먹을 교리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오늘 네가 받는 수술이 뭔지나 말해.”

“네. 그런데 저는 기도와 예배를 게을리하여 선천적인 음욕을 억누르지 못해 오메가로 발현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을 실망시켜 드렸으니 폐기되어야 마땅하나 선생님의 자비와 은혜를 받아 특별히 한 번 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몸속에 생겨난 더러운 음욕의 증거를 제거하고 정상적인 남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수술을 받게 된 것이지요. 이 수술을 통해 저는 다시금 구원받을 겁니다. 모두 선생님의 보우하심 덕입니다.”

“너는…….”

오 박사는 말을 하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아니다. 제대로 교육받았네.”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 하아, 아니다. 관두자.”

하아. 오 박사가 한숨을 내쉬며 CCTV를 등지고 섰다. 그리곤 이번에야말로 메스를 잡는 대신 제 수술복 앞섬을 풀어 헤쳤다.

안 그래도 수술복을 입은 오 박사의 상체가 연구실에서 봤을 때보다 부해 보인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아이는 오 박사의 수술복 안쪽에서 줄줄이 나오는 노트북과 반팔 티셔츠 따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번엔 실패 안 해. 절대로.”

오 박사는 손톱을 깨물며 노트북을 켰다.

우선 연구동산 서버에 접속해 CCTV 시스템을 조작했다. B번 수술방 CCTV를 다운시키고, 미리 준비해 둔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동영상이 재생되자 중앙 통제 시스템과 연결된 B번 수술방 CCTV는 오 박사가 마취약으로 아이를 잠재우고, 그 몸을 갈가리 찢는 과정을 재생했다. 수술방에 오메가의 피가 철철 넘쳐흘렀다.

오 박사는 복도와 건물 입구 등지의 CCTV에도 조작된 영상을 틀었다.

“그걸로 갈아입어. 설명은 나중에. 일단 이곳을 벗어나 접선 장소에 도착하면 해줄 테니까. 젠장.”

오 박사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시간이 없어 급하게 연락하긴 했는데, 그쪽에 제대로 닿았을지는…… 부디 그랬기를 바랄 수밖에.”

오 박사는 불명확, 비정확, 만약에, 오차 따위를 싫어했다. 지극히 혐오했다. 아래 거느리고 있는 연구원이 보고서를 내밀며 그딴 소리를 입에 담았다면 “30초 뒤, 네 미래를 명확하게 해주지. 넌 나한테 쥐어 터졌어.”라며 보고서로 그 멍청한 주둥이를 마구 쳤을 것이다.

그런데 오 박사의 입에서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튀어나왔다. 오 박사는 제 주둥이를 쥐어뜯고 싶었다.

아이는 오 박사가 던져 준 셔츠와 바지를 손에 든 채 머뭇거렸다.

“저, 그냥 수술시켜 주세요. 박사님.”

“너,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오 박사는 가차 없이 아이의 말을 끊으며, 어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재촉했다. 아이는 입을 꾹 닫고 오 박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오 박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032가 맨발인 걸 알아차렸다.

오 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철두철미한 그가 빠트린 게 있다니. 좋지 않은 징조였다. 오 박사는 제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 수술방 캐비닛을 뒤져 새 슬리퍼를 꺼냈다. 어른용이라 아이에겐 컸지만, 안 신는 것보단 나았다.

동료 연구원들이 B번 수술방 쪽은 쳐다도 안 보고 자기들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오 박사는 아이의 팔을 잡아채고 B번 수술방에서 도망쳤다.

CCTV를 피해 미로 같은 건물을 빠져나가고, 억센 풀이 우거진 산속을 달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 박사 같은 책상물림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오 박사는 걷는 수준으로 뛸망정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빌어먹을, 개, 새끼, 들, 도대체, 헉, 헉, 애들한테, 까지…… 더는, 못…… 안, 돼…….”

오 박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쉼 없이 중얼거렸다. 헉헉대는 숨소리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뛰었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전히 세상이 어두웠다. 달빛에 의지해 산속을 달리고 구르고 넘어지던 오 박사는 기어이 산비탈 아래 도착했다.

녹슨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 너머도 여전히 새까맸지만, 그럼에도 오 박사는 안도했다.

“됐어! 이, 거만 넘어가면 돼.”

오 박사가 한 발 뒤에 서 있는 아이를 잡아끌었다. 일단 아이를 먼저 넘기고, 그다음에 자신도 넘어가든 어쩌든 할 생각이었다.

반짝.

철조망 너머에서 불빛이 보였다. 손전등 불빛 여러 개가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김 소장인가? 연락이 닿았어!”

지칠 대로 지친 오 박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었다.

“여깁니다, 여기. 김 소장!”

오 박사가 소리 질렀다. 상대편에서 오 박사를 발견한 듯했다. 불빛이 이쪽을 향했다. 손전등을 든 사람들이 웃자란 수풀을 헤치고 다가왔다. 오 박사는 철망에 바짝 다가가 그들이 이쪽으로 오길 기다렸다.

오 박사는 손전등 불빛이 절 도우러 온 사람들일 거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과 아이의 탈출은 완벽했고, 손전등 불빛은 안이 아니라 밖에서 나타났으니까. 안의 놈들은 아직도 B번 수술방에서 비명과 피가 흘러나오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을 게 분명했다.

급했으나 준비는 완벽했고, 도망치는 내내 실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찾았다.”

저기서 손전등을 들고 반갑다고 활짝 웃는 사람이 박 장로여서는 안 되는데.

“어, 째서?”

오 박사가 철조망을 놓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김 소장? 미안하군. 김 소장인지 박 소장인지가 아니라.”

박 장로가 히죽 웃으며, 철조망 바로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 박사는 아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이를 등 뒤로 숨기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잡으면 잡는 대로 뛰면 뛰는 대로 끌려오던 아이였는데.

오 박사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버티고 선 채로 오 박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구름 속으로 숨었던 달님이 드러나 아이의 얼굴을 환히 비췄다.

싸늘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 아무 감정이 없는 얼굴이라 생각했었는데, 왜 지금은 다르게 보이는 걸까.

“그러니까 그냥 수술하자고 했잖아요.”

032가 말했다.

오 박사는 아이의, 아니, 032의 팔을 놓쳤다.

***

에덴동산 경비를 담당한 형제자매들 중 011의 공격을 받고 살아남은 자는 여섯. 그들은 모두 치명상을 입어 몸의 일부가 영구 손실되었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와 선생님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울부짖으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막 봉합한 수술 자리를 찢거나 서로의 목을 졸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살은 선생님께 가장 큰 죄라는 계명을 어기지 않으려는 순정한 노력이었다.

박 장로는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뱀의 간교한 숨결을 느끼지 못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형제자매들 중에 범인이 있을 리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011의 허파에 달콤하고 사악한 뱀의 숨결을 불어넣었단 말인가?

011의 단독 범행일 리는 없었다.

에덴동산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그곳으로 옮겨져 밖의 세상과 격리되어 키워진 순수다. 오직 정해진 사람들만 만났고, 정해진 것만 먹고 마셨으며, 정해진 것만을 보고 들었다.

선생님의 에덴동산은 하늘 아버지의 에덴동산과 달리 유혹하는 선악과도, 시험하는 뱀도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히 통제되고 격리된 공간이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한 명 한 명이 다니엘이었다. 바빌론에 끌려갔으나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당당히 주님께서 주신 먹을 것만 먹겠다고 선언한 다니엘.

그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세 명의 아이들.

그들의 머릿속에 하늘 아버지와 선생님의 제5계율 외에 다른 것이 들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밖에서 에덴동산의 평화를 망치고자 뱀이 기어들어 와 달콤하고 치명적인 독을 011의 귀에 흘려 넣었다는 건데. 그 뱀은 누굴까. 어디에서 똬리를 틀고 숨어서는 다른 두 아이의 발꿈치마저 물어뜯으려 하고 있을까.

박 장로는 에덴동산을 탈출한 아담, 011이 건물 밖으로 나갈 출구를 찾지 못하고 안을 헤맸다는 것에 주목했다.

011은 에덴동산에서 가장 우수한 아이였다. 대인 살상력은 물론이거니와 공간 지각 능력과 지형지물 적응력 또한 최상이었다.

아무리 교단 건물이 폐병동을 사들여 방송국처럼 내부를 복잡하게 꼬아 놨다 하나 그건 외부의 침입을 대비하는 것에 불과했다. 일반인이나 헤매지. 에덴동산에 남은 최후의 세 아이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 보통 사람엔 경찰과 군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뛰어난 011이라면 바로 출구를 찾아내 건물 밖으로 나갔어야 했다. 주력 경비 인원도 그러리라 예상하고, 대부분 건물 밖을 포위하고 011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011은 출구를 찾지 않았다. 이미 건물 밖에 교인들이 포진해 있을 거라 예상하고 다른 출구를 탐색했던 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건물을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는 이 건물이 오직 수비와 폐쇄에 치중했을 뿐, 내부인의 생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지어졌기 때문이다.

우수한 011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내부를 헤맸다는 건, 내부에 탈출을 부추긴 공범자가 있다는 의미 아닐까. 011은 애초부터 출구 말고, 공범자에게 가려 했던 게 아닐까.

박 장로는 011이 최종적으로 어디로 도착하고 싶어 했는지 추적해 보았다.

내부에 적이 있다고 확신하고 011의 이동 경로를 선으로 연결해 보니,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연구동산.

“011 백혈구 수치가 낮다며 오 박사 팀이 전담 관리했지. 정기적으로 검사하다 마지막으로 검사했던 게 아마, 011이 소동 벌이기 직전이었지?”

한때 밖에서 형사 소릴 들으며 밥벌이했던 박 장로가 히죽 웃었다.

032가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였다. 032를 어떻게 처리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혹여나 다른 아이들도 알파나 오메가 판정을 받게 될까 봐 일시적으로 신체검사를 중단시켰다.

그동안 연구동산에서 두어 번, 011의 상태를 추적해야 하니 보내 달라며 연락해 왔다. 하지만 박 장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작 3주 남짓한 그 시간이 011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걸까?

오 박사와의 접촉을 금지당한 011은 과격 행동을 보였고, 사살됐다. 011의 죽음에 자극받은 오 박사는 032를 데리고 무리한 탈출을 감행했다.

과연 선생님의 말씀대로지 않은가.

불안은 죄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며 기꺼이 타인을 전염시키며, 이성을 마비시키고 상황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궁지에 몰린 범인이 어이없는 실수를 하여 제가 범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처럼.

바스락, 바스락. 오 박사와 032의 등 뒤에서 엽총과 각목 따위를 든 교인들이 나타났다. 오 박사와 032는 완전히 포위됐다.

“처음부터, 날 의심하고…….”

오 박사가 창백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내 분명 경고했을 텐데. 마지막 기회,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그게 그런 뜻이었다고?”

그저 ‘선생님’의 눈을 피해 제 잘못을 수습하기 급급한 박 장로의 당부의 말일 뿐이라고 생각했건만.

오 박사는 몸을 돌려 032를 봤다. 032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전, 032에게서 이유 모를 섬뜩함을 느끼고 손을 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032를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후회는 들었다. 좀 더 앞뒤 상황을 살피지 않고, 다급한 마음에 일을 저지른 것이.

“젠장.”

오 박사는 032에게 달려들었다. 박 장로를 제외한 신도들은 움찔하며 엽총과 각목을 고쳐 쥐었다. 박 장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오 박사가 032의 어깨를 붙들었다. 작은 몸이 마른 잎사귀처럼 흔들렸다.

“오메가는 죄가 아니야. 망가져야 하는 존재도 아니야. 너는, 너는 그냥 평범한 아이일 뿐!”

푹.

칼이 배에 박혔다. 032가 든 칼이 오 박사의 배에. 아니, 박 장로가 던져 준 칼이. 높이 포물선 그리며 날아온 칼을 잡은 032의 손에 의해서.

주저 없이, 무참히, 단번에.

“……어?”

칼에 찔렸다는 자각이 늦었다. 고통은 자각하자마자 썰물처럼 몰려왔다.

032가 배에 박힌 칼을 비틀었다. 컥. 오 박사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칼이 박힌 몸뚱이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오 박사는 가물가물한 눈으로 제 피를 뒤집어쓴 032를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그냥 수술해 줬으면 좋았잖아요.”

032가 오 박사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여전히 단조로운 목소리인데, 안쓰럽게 들리는 건 어째서일까.

“아니, 안, 돼. 더는, 안…… 싫, 시…….”

오 박사의 몸이 032에게로 쏟아졌다. 푹 꺾인 고개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아직 마르고 작은 032가 감당하기 벅찬 무게였다. 032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아직 오 박사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오 박사에게 안기듯 깔린 032에게 선명히 들렸다. 몸에서 계속 피가 쏟아져 두 손을 뜨겁게 적셨다. 032는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엽총과 각목을 든 신도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끼이이익-. 녹슨 철조망을 열고 들어온 박 장로가 오 박사의 몸을 밀어 내고 032를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032는 두 손으로 칼을 꼭 쥐고 있었다.

“잘했다. 다 잘 됐어. 네가 제 몫을 해주어서 모든 게 선생님 뜻대로 되었구나.”

박 장로는 피범벅 된 032의 손에서 칼을 빼내 옆의 교인에게 건네주었다.

032가 박 장로를 올려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니? 말해 보렴.”

“박사님은 어떻게 되나요?”

“좋은 질문이구나.”

박 장로가 인자하게 웃었다.

“오 박사는 마지막에 가서 그릇된 선택을 하였지만,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정상인이고 오랫동안 선생님을 위해 일했으니. 과만큼 공도 크구나. 으음, 그래도 잘못이 너무 크긴 하지만. 지옥불에 떨어질 뻔하였지만, 스스로 제 죄를 깨닫고 절망하여 자살하기 전 네가 오 박사를 대신 죽여 줬으니. 그러니 지옥으로 떨어지진 않을 거란다.”

“그럼, 하늘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가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란다.”

박 장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를 씻지 못했으니 육신과 영이 함께 이 땅에 묻힐 거란다. 그리고 최후 심판의 날에 땅에 묻힌 영들이 깨어나 심판을 받게 될 때, 오 박사도 그 무리에 끼겠지.”

“…….”

그래선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032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 박사를 걱정하는 거냐?”

“…….”

“선하구나, 아이야. 하나 지금은 오 박사를 걱정할 때가 아니란다.”

박 장로가 032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불행하게도 오메가가 되었으니 이 말세에 정상인으로 태어나 죄를 짓고 땅에 묻힌 오 박사보다 더 구원이 절실한 죄인이란다. 선천적인 음욕의 죄를 씻기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드리고 예배 올리고, 선생님께 순종하여야 한다. 그래야 최후 심판의 날 때 선생님과 함께 휴거할 수 있지.”

“제가 선생님께 더더욱 순종하며 열심히 기도하면, 저도 오 박사님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 오 박사뿐 아니라 앞으로 네가 죽일 사람들 모두가 구원을 받을 거란다. 일단 오늘은, 나도 오 박사를 위해 기도해 주마.”

“네.”

“오 박사의 죄가 크다 한들, 오 박사를 꾀어낸 밖의 알파, 오메가들만 하겠느냐. 다 더럽고 음탕한 알파 오메가들이 세상을 장악하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를 괴롭히려고 오 박사를 꼬드겨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란다. 그러니 오 박사가 죽은 건 우리 잘못이 아니야. 음욕에 물든 밖의 세상, 수치를 모르는 알파와 오메가 놈들의 죄지. 불쌍한 오 박사도 그저 이용만 당한 거란다.”

박 장로가 032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올렸다. 오 박사와 032를 위한 속죄의 기도였다.

032는 눈을 감지 않았다. 엽총을 어깨에 걸친 신도들이 오 박사의 시신을 들어 옮기는 모습이 말간 눈동자에 비쳤다.

032는 오 박사가 무슨 이유로 교단에 합류했는지, 무슨 이유로 변덕을 부려 선생님을 배신하고 절 소돔과 고모라 같은 밖의 세상으로 끌고 나가려 한 건지는 알지 못했다.

032에게는 알고 싶다는 궁금증을 가질 권한도, 필요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점이 032와 011의 가장 큰 차이였다.

011은 호기심이 많았다. 032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에도 의문을 가지고 눈을 반짝였다. 어른들은 그 반짝이는 눈을 내심 즐겼다. 011은 그런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011은 늘 오메가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감별 검사도 여러 번 다시 받았다. 셋 중 하나가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보고를 받은 박 장로가 누구냐고 묻는 대신 ‘역시 011이?’라고 되물었을 정도였다.

호기심과 그게 용인되는 매력을 가진 011은 습득력도 뛰어났다. 무엇을 배우든 응용할 줄 알았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는 말은 011을 위한 말이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인 032는 011을 이길 수 없었다. 언제나 최고였던 011은 은연중 에덴동산 아이들의 리더였다.

제멋대로이지만 그것마저 매력적이었던 011은 온갖 이유를 만들어 연구동산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리고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듯 더욱 활기차고 아름다워졌다. 011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으스댔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고 뻐겼다.

그랬던 011이 갑자기 초조한 모습을 보이고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약 3주 전부터 나타난 이상행동이었다.

이후 삼 주 사이, 032는 오메가로 발현했고 011은 죽었다. 오 박사는 032의 손에 죽었다.

032는 칼을 맞고 제 몸 위로 무너져 내리던 오 박사의 품에 갇혀 비린내 속에서 어떤 냄새를 맡았다. 오 박사를 연구실에서 봤을 때도 맡았던 냄새였고, 011이 연구동산에 다녀온 뒤 활짝 웃으며 깡충깡충 뛰어다닐 때도 맡을 수 있었던 냄새였다.

박 장로의 손에 이끌려 가 만난 오 박사는, 그의 눈은 매서운 말과 달리 슬퍼 보였다. 하얗게 빛나는 안경에 가려졌지만, 고개를 돌릴 때 안경 틈새로 보였던 눈은 분명 그랬다.

그래서 수술실에서 말하고 싶었다. 그러지 말라고. 당신이 011에게 약속했을지도 모를 일을 내게 대신 해주려 하지 말라고. 하지만 오 박사는 032에게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032는 오 박사가 준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얼굴과 팔다리엔 풀에 베인 생채기가 가득했다. 가장 큰 상처는 손목에 있었다. 오 박사가 꼭 쥐고 놓지 않았던 손목은 벌겋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시퍼런 멍이 될 터였다.

‘안 돼. 이런 곳에 너처럼 어린애들이 더는, 더는 희생돼선 안 돼. 어차피 여기 있으면 다 죽어. 그, 전에 애들이라도, 하나라도, 이번엔……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거야. 김 소장, 김 소장하고만 연락이 닿으면,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손목이 욱신욱신 아려 왔다. 032는 조심스럽게 그 손자국을 따라 제 손목을 쥐어 보았다. 그래도 손자국은 다 가려지지 않았다.

032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

032는 다시 수술대 위에 누웠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연구원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감았고, 배 속을 칼로 후벼 내는 통증에 놀라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팔엔 수액과 진통제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입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수술 중 작은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032는 오메가로 발현했으나 베타나 다름없게 되었다.

***

어느 산속에 위치한 폐병원 건물에서 의문의 폭파 사고가 일어났다. 신고를 받고 온 119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했으나 건물은 모두 불타 버렸다.

인근 도시에 지원을 요청하여 겨우 화재를 수습하고 원인을 조사하던 중 부탄가스와 본드, 석유통 따위를 발견했다. 근처 수풀에서 도난 신고된 오토바이 두 대도 발견했다. 형편없이 나동그라져 있었고, 지문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으나 범인은 특정되지 않았다.

경찰은 인근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탐문하던 중 최근, 웬 학생들이 밤늦게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다니고, 산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길 들었다. 펑, 펑 소리 나는 게 꼭 부탄가스 터지는 소리 같았다고.

경찰은 인근 도시의 폭주족이 폐건물에 숨어들어 실수인지 고의인지 가스 폭발 사고를 일으키고 도망친 것 같다고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이래저래 수상쩍은 면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사건은 이르게 마무리되었다. 마을이 시끄러워지는 게 싫다며 동네 유지들이 나서서 손을 쓰기도 했거니와 폐병동 부지 주인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었다.

토지주는 타고 남은 건물 잔해를 깨끗이 밀고, 그 자리에 요양 병원을 세웠다. 특히나 건물 뒤쪽에 넓은 주차장을 조성하는 작업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런 산골 오지에 세운 요양 병원이 잘 되려면 주차장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토지주는 매일 건설 현장에 찾아와 소장과 인부들에게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절대 재료 빼먹을 생각 말고, 비용 아끼지 말고, 시멘트를 마구마구 쏟아부어 주차장 바닥을 아주 두껍게 잘 다지라고.

건설의 건 자도 모를 것 같은 괴팍한 노인네가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꽥꽥대니 미운 정도 정이라고, 공사장 인부들은 어느새 토지주를 귀여운 병신 보듯 보게 되었다. 잔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안 들리면 섭섭해져서 ‘오늘은 안 오나.’하고 기다리게 된달까.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면 괜히 걱정도 됐다. 그 성질머리 못 이기고 기어이 쓰러졌나 보군. 그래도 인건비 안 아끼고 잘 챙겨 주는데, 공사 끝날 때까진 죽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야.

“예예, 시멘트를 아끼는 게 아니라 아끼지 말고 막 부어 넣으라굽쇼?”

토지주가 오면 소장은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 내밀며 슬쩍 말을 걸었다. 전국 곳곳에 땅을 가지고 있다는 노인네니 친해져서 나쁠 게 없다는 생각 반, 다른 인부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끄러운 노인네를 재밌게 여기는 생각 반에서 나오는 서비스였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반드시 그래야 해. 주차장 바닥은 아주아주 두꺼워야 한다고.”

토지주는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며 강조했다.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괴벽 같은 미신을 가진 사람들을 숱하게 보는 터라 소장은 그를 인부들만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뭐, 밑에 방사능이라도 묻어 놨댑니까? 아니면 뭐, 사이비 종교에서 무슨 요상한 일을 진행하고선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은 죄다 죽여 묻어 놓았다거나?”

소장이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거 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상상력이 풍부하시구만.”

토지주는 제가 언제 땍땍거렸냐는 듯 허허 웃었다. 지글지글한 주름 속에 감춰진 눈빛이 번뜩였다.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소장은 어깨만 으쓱이고 말했다.

그리곤 다시 생각하니 제가 한 말이 웃긴지 뒤늦게 킬킬댔다. 공사를 진행하는 중 기억도 나지 않는 평범한 어느 날의 일이었다.

새 병원이 들어선다고 하니 인근 마을 사람들은 환영했다. 폭주족들이 사고 쳐준 덕분이라며 고맙다고 말하는 어르신들도 계셨다.

새 병원이 크게 들어서니, 조용한 마을에 활력이 돌았다. 요양 병원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저 앞 큰 거리까지로 큰 길이 났다. 낡은 다리도 새것처럼 보수됐다. 요양 병원에 취직한 직원들이 오가고, 개원 전부터 입원을 원하는 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방문하니 작은 마을에 숙박 업소가 생기고, 제법 번듯한 음식점과 마트가 여럿 생겨났다.

노인뿐이던 마을에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외지인들이 섞이자 마을 사람들은 병원 자리에서 일어났던 폭발 사고인지 뭔지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폭발 사고가 있기 전에 산속에서 간혹 외지인이 보이기도 하고, 이상한 소리가 종종 들리기도 하여, 마을이 을씨년스러웠던 일 따위는 더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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