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4. 오수민, 23세, 오메가 (1)
수민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근근이 먹고사는 스물세 살의 청년이었다. 가족은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기에 누가 절 태어나게 한 건지 알지 못했다.
수민은 만 18세 때 지원금을 받고 보육원을 나왔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이가 단돈 500만 원을 들고 세상에 나왔다.
세상살이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뒤늦게 부모랍시고 나타난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같이 살자고 꾀어낸 다음 지원금을 홀랑 들고 날라 버리는 일이 수민 같은 아이들에게 종종 일어났다. 하지만 수민은 그런 부모조차 없이, 정말로 혼자였다.
수민은 원동기 자격증을 따고 중고 오토바이를 구매하여 배달 일을 시작했다.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으나 비 오는 날 밤에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 모아 놓은 돈을 병원비로 쓰고 나니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13세 이하에 고아가 되었거나 보육원에서 5년 이상 보호받았으면 전시 근로역에 편입되어 현역과 보충역 복무에서 제외된다는데. 수민은 그 기간이 애매하게 걸쳐 면제받지 못했다.
차라리 현역으로 입대했으면 군 생활 동안만이라도 먹고 살 걱정은 안 했을 텐데. 교통사고 이력 때문에 공익으로 빠져 생활고를 겪었다. 딱한 사정을 인정받아 저녁에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해서 먹고살 수는 있었다.
제대하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었다.
수민은 남은 돈을 닥닥 끌어모아, 또 공익 생활 중 알게 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아주 저렴한 보증금과 월세로 작은 원룸을 계약할 수 있었다. 역시나 공익 생활 중 알게 된 분의 소개를 받아 시급이 꽤 높은 아르바이트 자리도 얻었다.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오전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엔 근처 인터넷 쇼핑몰 사무실에서 포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저녁엔 EBS 인강을 들으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진도가 잘 나가진 않았다.
2주에 한 번 수요일. 그날엔 상담을 받으러 갔다. 역시나 공익 생활 중 알게 된 어느 분의 호의 덕이었다. 그분은 평소 보육원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내몰리듯 사회로 나와 홀로 살아가는 걸 안타깝게 여기는 분이셨는데, 수민의 처지를 알고는 무료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정 목사를 연결해 주었다.
수민은 그곳에서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사이비 교단의 교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엉터리인지 배웠다. 2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특별하게 마음의 변화가 생긴 것은 없었는지 말하는 시간도 가졌다.
수민은 한 번도 상담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상담 중 졸거나 딴짓을 하지도 않았다. 정 목사의 강의와 설교가 옳다고 생각했고, 제가 이전에 알고 있던 것들을 부정했다.
그런데도 정 목사는 계속 수민을 염려했다. 정 목사는 수민이 좀 더 마음을 열고 속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3개월이 지나자 상담 스케줄에 변화가 생겼다. 정 목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세상에 너무 많았다. 날이 갈수록 일이 많아지니, 도저히 2주에 한 번씩 상담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수민은 자세한 사정까진 알지 못했지만,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또 정 목사에게 할당된 게 아닐까 짐작했다.
정 목사가 수민의 상태를 마뜩잖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보고서에 기록된 수민의 성실한 태도는 그의 상태를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수민의 상담 스케줄은 2주에서 3주로, 다시 한 달로 느슨해졌다. 보호 감찰 단계도 두 단계 조정되었다. 수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율성을 허락받게 되었다.
집주인은 수민이 원하면 몇 년이고 저렴한 월세로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편의점 점주도, 인터넷 쇼핑몰의 사장님도 비슷하게 말했다. 너는 성실하니 믿고 다른 일을 소개시켜 줄 수 있다며 작은 회사의 정직원 자리까지 알아봐 주었다.
그대로 그곳에 눌러앉으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수민은 여러 친절한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수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허락받자마자 원룸을 비우고 근처 고시원으로 옮겼다. 편의점과 인터넷 쇼핑몰은 새 직원이 올 때까지 일하다 그만두었다.
자신의 빈자리는 자신과 비슷한 사연의 누군가가 채울 거라고, 수민은 막연히 생각했다. 어느 보육원에서 자란, 어쩌면 같은 보육원 출신일지도 모르는,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아는 사람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먹고 사는 어떤 사람. 그 사람도 공익 생활 중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리라.
이후 수민은 부평초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으나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눈에 띄는 고시원에 머물렀다. 번 돈은 최소한의 생활비만 빼고 모두 기부했다.
혹시 모르니까 오메가 히트 사이클을 대비해 억제제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성교육을 받을 때 강사가 당부했으니까.
병원에 가 억제제를 처방받는데 제법 큰 돈을 썼지만, 먹은 적은 없었다.
수민은 교통사고로 골반 쪽을 크게 다쳐, 오메가 기관이 모두 망가졌다. 아이를 가지기는커녕 히트 사이클도, 페로몬도 그에게는 남 일이었다.
페로몬을 내지도 맡지도 못했다. 아니, 페로몬이 나오긴 하나, 다른 알파, 오메가들이 맡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라고 했다. 일반 베타와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수민은 오메가이나 오메가라 할 수 없는, 망가진 오메가였다. 그건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일단 거주비가 많이 들지 않았다.
오메가는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위험이 컸다. 때문에 고시원처럼 안전에 취약한 거주 시설을 이용할 시 어려움을 겪었다. 되도록 시설이 좋고 안전한 곳, 혹은 오메가 전용 고시원을 이용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그런 곳은 아무래도 비쌌다.
수민은 제가 오메가라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데나 눈에 보이는 곳에 들어가 비용을 치르고 머물렀다. 허름하거나 옆방에 질 나빠 보이는 알파가 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수민에게서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으니, 그의 곱상한 외모에 관심을 가지던 알파들은 금세 관심을 껐다.
그래도 낡고 볼품없는 고시원에 사는 곱상한 청년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제법 많았다. 낡은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오거나, 막무가내로 치근덕대며 수민을 어떻게 해보려는 추잡스러운 알파나 베타 놈들.
알파든 베타든 남녀 성별이 비슷할 텐데, 이런 짓을 벌이는 건 대부분 남성형이었다. 여성형은 좀 더 예의 바르고 은밀하게 제안해 왔다. 이를테면 연락처를 묻는다든가 제 연락처를 건네며 후원을 해주겠다고 어필한다든가.
수민은 공익 생활 중 들었던 10시간짜리 성교육 강의를 떠올리며 그때그때 적절히 대응했다. 덤벼드는 추행범은 뼈가 부러지거나 피를 쏟지 않는 선에서 제압하여 내쫓았고, 정중한 제안에는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저렴한 월세의 안전한 원룸. 시급은 높고 업무 강도는 낮은 아르바이트. 원한다면 언제든 취직할 수 있는 정직원 사무직 자리. 그 친절한 세계를 내버리고 이런 상황을 버티며 떠도는 건 TV에서 들은 말 때문이었다.
-행복은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고 알아서 다가와 주지 않아. 계속 노력하고 움직여서 내가 찾아내야 해.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면 저녁 8시 20분쯤이었다. 대충 씻고, 원룸에 놓여 있던 TV를 틀면 일일 저녁 드라마를 했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한 말이었다.
드라마의 제목은 <행복이 별거>로 이 별이라는 이름을 가진 불행한 주인공이 굳세어라, 꿋꿋하게 살아가며 자신만의 행복을 쟁취해 내는 내용이었다. 제목부터 시선을 사로잡았고, 내용도 마음에 꼭 들었다. 수민은 열혈 애청자가 되었다.
보지 못한 앞편을 보기 위해 새 핸드폰을 사고 소액 결제를 했다. 최신형 핸드폰. 48개월 약정. 할부 원금 118만 원.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
월 요금이 비싸서 부담스러웠지만 만족스러웠다. <행복이 별거>를 1편부터 볼 수 있었으니까.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라 이후 TV 없는 고시원 방을 떠돌면서도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챙겨 볼 수 있었다.
드라마 주인공은 결국 행복을 찾았다. 부자인 데다가 열다섯 살 연하인 남자의 청혼을 받고는, 결혼식 날 전 남편을 빼앗은 여자의 간계로 위기에 처했다 풀려나 당당히 결혼식장에 입장했다. 주인공은 연하남의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내가 찾은 이 행복을 절대 놓지 않을 거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행복을 꼭 지키겠노라고. 그렇게 드라마가 끝났다.
그다음 월요일부터는 <큰일 났네 왕형제들>이 방영됐다. 첫째는 오메가, 둘째는 베타, 셋째는 알파. 세 형제의 좌충우돌 연애 이야기였다.
세 형제 부모의 이야기도 제법 흥미로웠다. 20년 전에 실종됐던 오메가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알파 어머니는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행복이 별거>만큼은 아니나 그럭저럭 볼 만 했다.
상담 날, 오랜만에 만난 정 목사는 수민이 허름한 고시원을 떠도는 것도 모자라 48개월 약정으로 핸드폰을 개통한 걸 듣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수민이 일일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챙겨 본다는 걸 알게 되고는 안색이 밝아졌다.
“그래. TV 드라마가 내용이 좀 격하긴 해도, 우리 현실 생활을 반영한 거긴 하니까.”
비록 일일 막장 드라마라 할지라도 좋아하는 게 생겼다는 것 자체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도 그렇지. 뭐? 48개월 정액제? 할부 원금이…… 어이구 두야. 이 꼴을 가만 지켜봤단 말이야?”
정 목사가 구시렁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음번에 핸드폰을 바꾸게 되면 그땐 절대 혼자 가지 말고 잘 아는 사람을 데리고 가도록 해요. 알았지?”
정 목사는 헤어질 때 당부했다. 농담으로라도 자신과 함께 가자고 하지 않았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란 걸 아니까.
“네.”
수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민 역시 4년 뒤에 함께 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음 달도 그다음 달도 상담은 진행됐다.
수민은 계속 낡은 고시원을 전전했고, 궂은일을 마다 앉고 일했다.
간혹 성실히 일하는 수민을 좋게 본 사장님들이 전일 근무를 제안했는데. 그러면 수민은 제가 일하는 곳을 새삼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종교의 상징물을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엔 제 행복이 없는 거 같아요.”
수민의 말을 들은 사장님은 꿈을 좇는 20대 청춘의 철없는 말이라 생각하며 웃어넘겼다.
“행복은 무슨. 다들 그냥 죽지 못해 사는 거지.”
“…….”
수민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미련 없이 등졌다.
***
유독 일진이 안 좋은 날이 있다. 오늘 같은 날.
수민은 자꾸 치근덕대는 옆방 알파의 팔을 꺾어 엎어 친 후 고시원에서 나왔다. 마침 재등록 날이라 따로 절차를 밟을 것도 없이 그냥 짐을 들고 나왔다. 잠이라고 해봤자 백팩이 전부였다. 안에는 옷가지와 세면도구 정도만 들어 있었다.
마침 일하던 가게도 그만둔 참이었다. 가게 주인은 50대의 남성형 열성 알파였는데, 정직원이 싫으면 사모 자린 어떠냐고 추근대며 엉덩이를 만져 댔다.
분명 베타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그래도 추파는 끊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만만하게 보고 찝쩍대는 건지도 몰랐다.
20대 초반. 중졸. 고아. 갈 곳 없는 오메가. 페로몬이 거의, 아예 안 느껴지는 초열성. 그런 주제에 얼굴이 반반하고 몸이 호리호리한.
가지고 놀아도 뒤탈 없다 생각하는 걸까. 이력서를 훑어보다 눈빛부터 달라지는 점주, 사장들을 보며 수민은 생각했다.
아무튼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특별하게 재수 없는 날이었다. 알바를 그만두고. 고시원에서 나오고. 수민은 백팩을 멘 채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앉아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온통 붉었다. 활활 불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에서 지상을 벌하고자 불을 내려보내는 것 치고는 쓸데없이 아름답고 고왔다.
지상의 피조물들은 실수로라도 불타지 않았다. 붉은 하늘 아래, 거리는 여전히 바쁜 회색빛이었다.
수민은 조금 지쳐 있었다.
행복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막막했다.
수민은 아직까지도 행복을 찾지 못했다. 찾긴커녕 행복이 무엇인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쉽게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행복이 별거>에 나오는 주인공도 576화 만에 행복을 얻었는데. 자신이 손쉽게 얻을 수 있을 리가.
그러니까 지금 낙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나 몸이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좀 더 걸어서 고시원을 찾고 짐을 풀어야 한다. 아르바이트를 구해 일하고, 시간이 남는다면 30분 정도 드라마를 보다가 잠들면 된다. 해가 뜨면 일하러 가고 저녁이 되면 돌아와 드라마를 보고 또 잠들면 된다.
반복되는 삶은 고단하지는 않았으나 행복하지도 않았다. 다만 막막했다.
막막함.
감당할 수 없는 막막함이 수민을 잠식했다.
평생 모은 돈을 기부하거나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돈을 모아 남을 돕는 사람들이 요즘 계속 TV에 나왔다. 하늘 아버지의 첫째 아들의 생일이 가까워지기 때문일까?
예전엔 그들을 어리석다 생각했다. 선생님과 김 장로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무 훌륭하면 최후의 날을 앞당기기 위해 죽여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정훈과 정 목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틀린 거라고 했다. TV에 나온 사람들은 그저 착한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착한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수민은 그들을 따라 했다. 착해져야, 착한 일을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 테니까. 용서받아야 행복해질 수 있고, 행복해져야…… 행복해져야…….
‘너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 너는 로봇이나 인형 같은 게 아니야. 스스로 생각하여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단다. 그래야만 해.’
정 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수민은 더 막막해졌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동하면 되는 걸까.
이대로 살면 되는 건가? 아니면 뭔가를 더 해야 하는 건가? 그도 아니면 지금 방법이 아주 틀린 걸 깨닫고 처음부터 제대로 다시 해야 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어볼 만한 그 누군가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찾을 수 없었다. 명령을 구할 수도 없었다.
수민은 자유로웠다. 그렇기에 철저히 혼자였다. 그것이 수민을 지치게 만들었다.
수민은 태어나 처음, 자유를 경험하고 그 자유에 짓눌려 숨이 막혔다. 아직 감시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지도 못하면서, 그마저도 벅찼다.
‘사고를 치면 다시 그곳에 갈 수 있다고 했지. 차라리 사고를 낼까?’
문득 생각이 났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사고를 친다는 건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사고를 친다는 것의 정의와 범위를 규정하는 건 낯선 경험이었다.
TV에 나왔던 영화처럼 하면 될까? 덤프트럭을 훔쳐 타고 꽉 막힌 고속도로를 역주행하여 50중 추돌 사고를 내고 폭발을 일으켜 운전자 전원을 다 죽이면 될까? 그 정도면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일을 벌이는 건 쉽지만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자유. 그 자유가 수민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정훈이 말했다. 너의 행복은 이곳에 없고 밖에 있다고.
그는 제 부하에게 주저 없이 넌 여기 있는 게 행복인 줄 알라고 단언했던 사람이다. 부하가 반항하지 않는 걸 보면 그 말은 진실일 터. 그는 분명 행복을 감별하고, 남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능력자일 것이다. 선생님이 남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을 행하셨으니, 선생님과 장로들을 죽인 그도 그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해야 한다. 절대 그곳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그곳에는 행복이 없으니까.
사고를 치고 다시 그곳에 잡혀 들어가면 지금처럼 쉽게 밖으로 나오진 못하리라. 그 정도 눈치는 있었기에 수민은 사고 치는 걸 포기해 버렸다.
겨우 짜낸 잔꾀도 결국 쓸모없는 생각에 불과했다. 자유는 허튼 생각의 자유마저 허락하는 듯했다.
허튼 자유를 누리는 동안 해가 졌다. 주변이 어둑해졌다.
***
수십 대의 버스가 수민의 앞에 섰다 떠났다.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거나 내렸다.
버스 정류장을 스치는 사람 중 누구도 수민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낡은 옷차림에 커다란 백팩을 메고 캡 모자를 꾹 눌러쓴 청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니 더욱 수상쩍어 보일 터였다. 사람들은 혹시나 눈이 마주쳐 시비라도 걸릴라, 옆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면 턱선이 갸름하고 목이 희고 길었지만, 어둑한 시간에 정류장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청년을 그 정도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오메가 페로몬을 풍기고 있었다면 질 나쁜 알파가 꼬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쪽으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수민은 꽤 오랫동안이나 멍하니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주변이 꽤 어두워져 있었다. 잘 곳을 찾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고시원을 찾지 못하면 사우나나 피시방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어나지 못했다. 몸이 물 밖으로 나온 미역처럼 축 처졌다.
도저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여기서 밤을 새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민은 멍하니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문득,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버스 정류장이니 버스를 타러 오는 사람일 것이다. 수많은 발소리를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런데 이번엔 무시할 수 없었다.
‘냄새’가 났다. 처음 맡아 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냄새가.
수민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향수?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았다. 코뿐 아니라 온몸으로, 피부로 맡아지는 냄새는, 향수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선명하나 진하지 않았다. 은은히, 느껴질 듯 말 듯 했다. 더 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방법을 알지 못해 마음이 조급해졌다. 몸을 짓누르던 무력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낡은 구둣발이 수민의 앞에 멈춰 섰다. 긴 그림자가 수민의 머리를 덮었다. 수민은 고개만 살짝 들어 모자챙 너머로 앞사람을 보았다.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였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으나 피우진 않았다. 손에 라이터를 들고 있었는데 불붙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후우, 남자가 긴 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매우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밥은 먹었니.”
목소리는 담담하고 메말랐다.
그는 마른 모래로 세워 올린 성벽 같았다. 툭 치면 우수수 무너져 한 줌 재로 남을 것 같았다. 단지 낡은 옷차림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었다. 목소리, 손짓, 숨소리에서 물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버석해 보이는 남자에게서 어떻게 이런 냄새가 나는 걸까.
수민은 남자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얇은 안경알 너머의 눈 역시 바싹 말라 있었다. 수민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는 걸 알게 된 어른들이 으레 내보이는 끈적하고 불쾌한 눈빛이 아니었다.
“밥 안 먹었으면 먹으러 가자.”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밥을 사준다고 하면 따라가선 안 된다. 공익 생활 중에 들었던 10시간짜리 성교육 시간에서 강조했는데.
제 할 말만 하고선 뚜벅뚜벅 걸어가는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질수록 냄새가 멀어졌다.
수민은 몸을 일으켜 그를 쫓았다.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수민은 두세 걸음 뒤에서 그를 따라갔다.
남자는 골목을 꺾어 낡은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중국집이었다. 가게 내부는 건물만큼 낡았고, 카운터에는 사람이 없었다. 주방 쪽에서는 뜨거운 열기와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익숙하게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았다.
“앉아, 안 무너지니까.”
남자가 맞은편 자리에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수민이 앉자, 남자가 주방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이, 임 사장. 여기 짜장면에 군만두랑, 어, 잠깐만.”
남자가 수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 먹을래. 면 말고 여기 볶음밥이나 뭐, 짬뽕밥. 그런 거도 하고, 그럭저럭 먹을 만하니까 골라 봐.”
남자가 벽에 붙은 메뉴판을 가리켰다. 밥 먹이겠다고 데려와선 면을 먹이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
“아이고, 김 소장 오셨구마. 근데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니? 빈말로라도 맛있다고 하면 입에 가시가 돋나?”
주방에서 큰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수건으로 머리통을 감싸고 수염이 북슬북슬 나 있는 얼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맛있어야 맛있다고 하지.”
“하이고, 그런 분이 일주일에 한 번씩 꼭꼭 왜 오시는데? 맛없으면 딴 데 가서 드시지. 어?”
“나 없으면 여기 매상 누가 올려 주나. 망하지 말라고 와주는데 고마워는 못할망정. 여기 단골 관리가 왜 이래?”
남자가 의자에 팔을 걸치곤 변죽 좋게 받아쳤다. 아까 버스 정류장에서 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주방장을 놀려 먹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눈빛은 그대로였다. 안경으로 감춘 두 눈은 여전히 버석버석했다. 수민은 그 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앞에 빼빼 마른 청년은 뭘 먹으려나? 여기 김 소장 말 믿지 말고 뭐든 시켜요. 다 맛있을 거니까. 내가 이래 봬도 말야. 중국집만 30년이라고. 저어기 시내에서 3층짜리 건물을 통으로 세내서 가게 차리고 잘 나가기도 했어.”
“그럼 뭐해?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나 이런 허름한 데서 배달로나 먹고사는데.”
“아니, 씨발. 건물주 놈이 지 아들이 커피집 한다고 비워 달라니까 쫓겨났지. 월세 두 배, 세 배 맞춰 준대도 필요 없다고 했으면서. 젠장. 그러곤 거기에 내 가게 이름에서 딱 한 글자만 바꿔 중국집을 하더라고 내가 말 안 했나? 손님들은 그것도 모르고 맛집이라고 그리들 다 가고. 크흥.”
주방장의 얼굴이 삶은 문어처럼 벌게졌다.
“언제 적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어. 다 털어 버려.”
“그게 말처럼 쉽나, 킁. 젠장,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괜히 주책이나 떨게 만들고. 이게 뭐야. 다 김 소장이 내 음식 맛없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
주방장이 작은 접시에 단무지를 산더미처럼 담아 와 식탁에 탁, 내려놓았다.
“난 맛없다고 한 적 없는데.”
남자가 단무지를 씹으며 대꾸했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니! 맛없다는 말보다 더 나빠!”
“그래?”
“맛없다고 하면 김 소장 입맛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무시하면 되는데, 먹을 만하다니까 내가 제대로 못 만든 것 같잖아!”
주방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렇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남자는 그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암튼 다 맛있으니까 뭐든 시켜요. 비싼 거도 팍팍 시켜도 돼. 내가 싼값에 세 들어 살면서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지만, 우리 김 소장이 돈이 아주 많아. 이 건물도-.”
“어허, 그놈의 입!”
남자가 젓가락을 들어 주방장의 입술을 콱 집으려는 듯 위협적으로 까딱였다. 주방장은 입을 헙 다물고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뭐 먹을래.”
남자가 수민에게 물었다.
“짜장면이요.”
수민은 남자를 따라 했다.
뭘 먹고 싶은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수민은 계속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에 집중하고 있었다. 기름과 양파, 불 냄새를 잔뜩 뒤집어쓴 주방장이 다가와도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는 묻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코로 들이마시는 숨엔 기름과 불 냄새가 풍겨서, 온몸으로 느끼는 남자의 냄새가 흐릿해질까 봐. 수민은 혼자 다급해져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의아한 듯 수민을 보았다. 안경 속 버석버석한 눈이 찡그리듯 가늘어졌다.
“봐봐, 여기 보기에도 맛이 별로 기대가 안 되는 거 같으니까 짜장면이나 먹겠다잖아. 짜장면 둘에 군만두 큰 거나 하나 줘.”
“중국집의 기본은 짜장면이라니까! 짜장면이 맛없는 중국집은 뭐 다른 거 먹어 볼 필요도 없는 거라고! 내가 군만두도 맨날 직접 만들어 튀기는 거 알면서. 어? 두고 봐, 아주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맛으로다가 만들어 대령할 테니까!”
주방장이 쿵쾅쿵쾅 발을 구르며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자는 짜장면에 쥐약을 넣어 다 죽일 생각 말라는 말로 주방장의 화를 더 돋우고는 일어서 냉장고 쪽으로 갔다.
냉장고 옆에는 고량주 같은 술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남자는 눈으로 술병을 훑고는, 냉장고 문을 열고 콜라를 두 병 꺼냈다. 유리컵도 챙겨 와 콜라를 가득 따라 수민의 앞에 놔주었다. 그리곤 몸을 옆으로 틀고 벽에 붙은 TV를 보았다.
남자는 TV를, 수민은 남자를 보았다. 수민이 저를 계속 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수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TV에 나온 연예인들이 하하 호호 웃는데, 그걸 보는 남자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방금 주방장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피식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옆으로 봐도 지독히 피곤하고 지친 눈. 정류장에서 봤던 그 눈이었다.
수민은 안도했다. 왜인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처음에 봤던 그 모습이 이 남자의 진짜 모습이란 게 마음에 들었다.
잠시 후 주방장이 음식을 내왔다. 간짜장과 군만두 접시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특별히 간짜장으로 업그레이드했으니까 맛있게들 드시오.”
접시를 내려놓는 주방장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누구 마음대로 메뉴를 바꿔. 난 짜장면이 먹고 싶었다고.”
“어허, 간짜장이 더 손가는 줄 모르고. 그냥 드슈. 천 원 더 내라고 안 할 테니까.”
“멋대로 바꿔서 내놓고 돈 더 내라고 하면 날강도지.”
남자가 투덜대며 젓가락으로 간짜장을 휘휘 저었다. 주방장은 남자가 밉지도 않은지 옆에 서서 먹는 걸 구경하다가 카운터에서 “배달의 만족 주문!”하는 소리가 들리자 얼른 달려갔다.
수민은 남자를 따라 젓가락을 들고 간짜장을 비벼 먹었다. 짜장면이나 간짜장을 많이 먹어 보지는 못했지만, 이제껏 먹어 본 것 중엔 가장 맛있었다.
한 입, 두 입. 면을 씹어 삼키고야 수민은 이것이 오늘 첫 끼라는 걸 깨달았다.
예전엔 체력과 근력을 유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끼니를 챙겨 먹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혼자 지내다 보니, 또 이리저리 시간 맞춰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제시간에 밥을 챙겨 먹는 게 쉽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기운이 없었던 걸까. 수민은 자신이 왜 버스 정류장에서 고장 난 것처럼 멈춰 서 있었던 걸까 고민했다.
남자가 무심하게 젓가락을 놀려 수민의 그릇에 만두를 올려 주었다. 수민이 면만 먹는 게 신경 쓰이는 듯했다.
수민은 납작한 삼각형의 군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납작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속이 제법 실했다. 잘 익은 다진 고기와 부추 따위가 입 안을 데웠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촉촉하고 뜨거웠다.
하아. 수민은 저도 모르게 입김을 내뿜고는 급히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남자가 그 모습을 보곤 픽 웃었다. 눈가가 조금 느슨해지는 것도 같았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중국 요리는 기름져서 체하면 기분 더러우니까.”
남자가 젓가락으로 만두 접시를 툭 치며 말했다. 배달 주문 들어온 음식을 포장하던 주방장이 그 소릴 들었는지 꽥꽥댔다.
“귀는 쓸데없이 밝아 가지곤.”
남자는 혀를 차곤 저도 만두를 하나 입에 물었다.
수민은 남은 만두를 꼭꼭 씹어 삼키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볶은 양파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여전히, 남자의 냄새가 났다.
수민은 오랜만에 제 몫의 음식을 모두 먹어 치웠다.
***
남자는 식사를 마치고도 수민이 다 먹기를 기다렸다. 수민의 빈 잔에 콜라를 다시 채워 주고는 수민이 그것마저 비우자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그릇엔 면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남자가 카운터에 섰다. 놓인 바구니에서 사탕을 고르고 있는데 주방장이 나왔다. 주방장은 애냐고, 그냥 집히는 대로 가져가라고 구박했지만, 남자는 꿋꿋이 원하는 맛을 골라 하나는 제 입에 넣고, 다른 하나는 수민에게 주었다.
수민은 남자를 따라 사탕 껍질을 까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한 자두 향이 입 안에 확 퍼졌다.
남자가 값을 치르곤 가게를 나와 걸어갔다. 잘 가란 말도, 따라오란 말도 없었다. 수민은 망설이다 남자를 따라갔다. 공익 생활 중 들었던 10시간짜리 강의 내용에 비추어 본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하지만 수민은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이리저리 꺾어 어느 건물 앞에 섰다. 역시나 낡은 건물이었는데. 2층에 붙어 있는 간판에 깜빡깜빡, 불이 들어와 있었다.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
소장 김인혁 010-XXXX-XXXX>
간판은 등대같이 환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알려 주듯 희게 빛났다.
남자는 2층으로 올라가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라는 나무 현판이 걸린 문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안에 불이 켜졌다. 문이 열려 있어 빛이 새어 나왔다. 어두운 계단에 서 있던 수민은 그 빛을 쫓아 계단을 마저 올랐다.
문 안쪽은 사무실이었다. 한쪽엔 철제 책장이 여러 개 서 있었고 서류와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창가를 따라 기역 자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구석엔 싱크대와 냉장고, 전기밥솥 등이 놓여 있었다. 중앙엔 큼지막한 소파, 녹색 부직포와 유리로 덮은 테이블이 있었다.
“문 닫고 들어와.”
“…….”
“외풍 드니까 감기 안 걸리려면 잘 덮고.”
남자가 삐걱거리는 철제 캐비닛을 열어 모포를 꺼내 건너편 소파에 툭 던졌다. 자신은 반대편 소파에 길게 누워, 입고 있던 코트를 이불 삼아 덮고 눈을 감았다. 한쪽 팔로 눈가를 가리고 숨을 내쉬었다.
수민은 그 모습을 보고 불을 끌까 하다가 그냥 소파로 갔다. 바닥에 백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소파에 누웠다. 모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모포를 덮었다.
낡은 모포에서 같은 냄새가 났다. 덮고 있으니 그 냄새에 파묻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긴장이 풀렸다.
수민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며 남자를 보았다.
잠든 걸까? 남자의 숨이 느릿해졌다. 수민은 남자의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몸이 땅으로 영영 꺼져 버릴 듯 묵직해졌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넌 여전히 여기, 2층에 자리한 사무실에 누워 있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냄새에 감싸져 있으니까.
수민은 불 꺼지지 않은 방에서 깊게 잠들었다.
어둡지 않아도 밤은 휴식일 수 있었다.
***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 아니 둘.
발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나는 창가 쪽으로 갔고 다른 하나는 구석으로 가 서랍 같은 걸 열었다 닫았다.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뚜껑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커피 냄새가 났다. 포르르-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 하나 익숙한 게 없었다. 그 소란 속에 자신이 반듯이 누워 있다는 게 제일 당황스러웠다.
놀랐으나 바로 눈을 뜨거나 몸을 일으키진 않았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도록 몸에 익혀 두었기 때문이었다.
수민은 낯선 곳, 낯선 기척 속에서 왜 자신이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어느새 익숙해져 내 것처럼 느껴졌던 그 냄새를 다시 인식했다. 숨을 들이쉬자마자 폐에 가득 차오르는 상쾌하고 부드러운 향.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느낌.
수민은 어젯밤에 만난 남자를 기억해 냈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허름한 차림새와 덥수룩한 수염, 버석버석하게 메말라 있던 눈동자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리고 이 냄새.
비로소 수민은 제가 왜 이곳에 누워 있는지 기억해 냈다. 더불어 낯선 기척 중 그 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없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건 몸에 익은 행동을 저버릴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수민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제가 놓친 기척이 있는지 눈으로 살폈으나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블라인드 틈새로 쏟아지는 햇빛. 낡았지만 깔끔한, 아니, 깔끔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무실.
“어머?”
“오, 일어났구만.”
싱크대 앞에서 커피 잔을 들고 있는 중년 여인과 남자.
어젯밤의 그 남자는 없었다.
“…….”
믿기지 않았다. 옆에 누워 있던 남자가 사라지고, 다른 낯선 사람들이 곁에서 얼쩡거릴 때까지 자신이 깨지 않았다는 게.
멍하니 눈을 깜빡이니, 중년의 여인과 남자가 다가왔다.
“놀라지 말아요. 아니, 이미 놀란 거 같긴 한데. 어머, 머리 좀 봐. 까치집 될 정도로 곤히 자고 있었는데, 우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깬 거죠? 미안해요.”
여인이 손을 뻗었다. 눌리고 붕붕 뜬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는 것 같았는데. 그 의도를 알면서도 흠칫, 몸을 뒤로 물리고 말았다. 남자가 사라진 걸 깨달으니 바짝 경계심이 들었다.
“아, 미안해요.”
중년 여인은 사과하며 손을 거뒀다.
“에이, 서 여사님이 잘못하셨네. 왜 갑자기 손을 대요, 손을. 그러니까 놀라지.”
“박 씨!”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박 씨는 나 보라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서고는 어린아이를 어르듯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었다.
“우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자는 거 보고, 깨우기 미안해서 놔뒀는데 잘 잤어요? 여기 우리 소장님이 우리 소장님인데. 그분이랑 여기 온 거 맞죠? 아 왜, 그 수염이 이렇게 나고 안경 쓰고, 성격 더럽고 잘생긴. 응?”
설명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지만 수민은 알아들었다. 어제 중국집 주방장이 남자를 ‘김 소장’이라고 부른 걸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인간. 아우, 너무 더러워서 사우나 가서 좀 씻고 수염이라도 밀고 오라고 내보냈는데. 아마 이제 곧 올 테니까, 염려 말고. 우리는 나쁜 사람 아니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어, 음. 우리 일하기 전에 커피 한잔하려고 그러는데. 같이 한잔할래요? 아니지, 커피보단 음, 밥을 먹어야 하지 않으려나. 음?”
박 씨가 서 여사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이 양반은 어딜 간 거야. 툭하면 어디서 개, 고양이 주워오듯 사람을 주워 와선 데려다만 놓으면 끝인가? 그래도 이번엔 오메가 아니고 베타인 거 같은데. 웬 바람이 불어 베타를 데리고 왔데? 으이구, 아무튼 오지랖은.”
서 여사가 구시렁대며 냉장고를 열었다. 투덜대는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는 손길은 재빨랐다. 12첩 반상이라도 차릴 생각인지, 반찬통이 끝없이 나왔다. 그러더니 밥통을 열어 보곤 비명을 질렀다.
“아니, 찬밥 좀 남은 거 누가 그새 다 해치웠어!”
“어흠, 흠, 흠흠. 아니, 누가 다 먹어 치웠대요?”
박 씨가 헛기침하며 몸을 비비 꼬더니. 얼른 서 여사에게 다가가 딸랑대며 찬밥이랑 잊고 새 밥 짓기를 간청했다.
“박 씨, 박 씨가 또 먹었구만!”
서 여사는 배 속에 웬 거지가 들었냐며 박 씨의 등을 퍽퍽 쳤다. 박 씨를 실컷 때리고는 얼른 밥을 안쳤다.
수민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몸에 두르고 있던 모포를 끌어당겨 코를 파묻었다. 숨을 한껏 들이켰다.
냄새가 그새 옅어졌다. 아쉬웠으나 다행히 오래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어제와 같은 옷차림이었으나 수염은 사라지고 없었다. 얼굴이 말끔했고, 안경은 보이지 않았다.
수민은 모포를 내려놓고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대충 말린 듯 젖어 있는 머리카락. 그래도 여전히 버석버석하게 마른 눈. 날렵한 턱. 굴곡진 목울대. 깔끔히 씻고 면도한 남자는 매우 잘생겼다.
남자가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걸쳤다. 구겨진 셔츠에 덮인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성의 없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모습이 숨을 따라 폐를 채우는 그 냄새와 함께 망막에 새겨졌다.
수민은 태어나 처음으로 상대의 모습을 통해 상대의 상태를 해석하고 기억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 욕망에 비하면 수민이 눈으로, 또 숨으로 얻은 정보는 너무 미약했다.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 역시 어설펐다. 수민은 그의 나이조차도 파악하지 못했다. 남자는 서른 중후반 정도 되었을까 싶었으나 그보다 젊은 것 같기도, 더 나이 든 것 같기도 했다.
수민은 남자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곧, 제가 남자의 이름을 본 적 있다는 걸 떠올렸다.
“김, 인혁.”
길 잃지 말고 찾아오라는 듯 희게 빛나던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어른 이름 함부로 부르는 거 아니다.”
남자가 걸어와 수민의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손은 따뜻했다. 수민은 그가 계속 머리를 만져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금방 손을 치웠다.
“머리가 이게 뭐야. 아까 사우나 갈 때 데리고 갈 걸 그랬나?”
눌리고 붕 뜬 수민의 머리가 그의 눈에도 재미있게 보였는지, 한 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인혁은 수민을 지나쳐 창가 쪽 책상으로 갔다.
수민은 인혁의 손이 닿은 제 머리를 헤집어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인혁은 삐그덕거리는 의자에 앉고선 낡은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만 봐도 피곤한지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리곤 잔뜩 쌓인 서류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안경을 썼다. 일련의 과정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영화처럼 이어졌다.
전기밥솥에서 김이 올랐다.
“김 소장도 한술 떠.”
서 여사가 권했다.
“됐습니다. 그나저나 냉장고 필요하대서 샀더니 여기서 살림을 차리시네. 밥통은 또 언제 가져다 놓으셨대? 도로 가져가요.”
인혁이 서류를 들여다보며 답했다.
“아니, 내가 나 잘 먹자고 그러나? 여기 나 없으면 굶어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내가 밥이라도 한술 떠먹이려고 그러는 거지.”
“옳소, 옳소!”
박 씨가 추임새를 넣었다.
인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살림은 집에서나 하시고. 나와서까지 고생 말아요. 아래 백반집 사장님이 요즘엔 왜 밥 먹으러 안 내려오냐고 그러던데. 다른 가게 매상도 좀 올려 주고 그래야지. 왜? 월급이 부족해요? 점심밥은 내가 다 사잖아.”
“아니, 미현이 아빠 그게 그새 김 소장한테 꼰질렀어? 내 참, 난 뭐 입이 없어서 말 안 하는 줄 아나. 동네 장사하는 거, 어? 김 소장 말대로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그냥 나 하나만 입 다물고 있자 싶어 가만히 있었던 건데. 미현이 아빠 증말 못 쓰겠네, 사람이.”
서 여사가 밥주걱을 번쩍 들어 올렸다.
수민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보았다. 오전 10시 16분. 아마도 근무 시간이 아닐까 싶은데. 커피 끓이고 밥 짓느라 한 시간 남짓 근무 시간을 써버렸으면서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건 좀…….
“그러니까, 적당히 사 먹으면-.”
“사 먹을 수가 없으니까 그러지! 미현이 아빠가 반찬 재활용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야!”
서 여사가 소리쳤다. 인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왜?
“헐? 거기 반찬 깔끔하고 그래서 자주 갔던 건데.”
박 씨가 기겁했다. 서 여사가 원했던 반응이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한 번 내놓은 반찬을 그대로 또 가져다 써? 어? 난 그것도 모르고 꼬박꼬박 밥 시켜 먹고, 사무실에 손님 오면 돈 좀 더 주고 고기 좀 볶아서 올리라 하고, 되도록 거기서 시켜 먹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 김 소장! 내 말 듣고 있어?”
서 여사는 의기양양해져선 더 목소리를 키웠다. 창문을 열면 아래층에 있는 백반집까지 들릴 듯했다.
“아니, 손도 안 댄 반찬 다시 내놓는 게 뭐 어때서요.”
“김 소장!”
인혁의 말이 서 여사의 분노를 더 키웠다. 서 여사는 한달음에 인혁에게 달려가선 바로 옆에 서서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인혁은 귀를 틀어막고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식당에서 반찬을 재활용하는 건 이토록 나쁜 일이구나. 수민은 공익 생활 중에도 배우지 못했던 생활 지식을 습득했다.
그 사이 박 씨가 밥상을 차렸다. 서 여사가 내팽개친 주걱을 들어 밥을 가득 푼 후 수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리로 와요, 밥 먹어야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싸움 구경은 나중에 하고.”
싱크대와 테이블을 사무 구역과 구분해 파티션을 세워 놓았다. 이곳이 탕비실인 듯했다. 수민이 테이블에 앉자 서 여사가 얼른 돌아와 수민을 챙겼다. 콩나물국도 데워 주고, 어디선가 프라이팬을 꺼내 계란 프라이도 두 개나 해줬다.
수민은 테이블 위에 차려진 따끈따끈한 밥상을 바라만 보았다. 눈앞에 밥상을 차려 준 서 여사와 박 씨가 있었지만, 수민의 신경은 온통 파티션 밖의 인혁에게로 쏠려 있었다.
“왜 안 먹어, 찬이 별로라서 그래요?”
서 여사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수민은 고개를 저었다.
서 여사와 박 씨는 테이블 옆에 서서는 수민이 한술 뜨길 기다렸다. 수민이 고마운 줄도 모르고 반찬 투정이라도 하면 나가서 햄이라도 사와 구워 줄 태세였다.
다행히 수민은 그 정도까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아니었다. 또한 절 빤히 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할 성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바로 수저를 들지 않았던 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빠서였다. 무턱대고 인혁을 따라오고 소파에서 새우잠을 잤으면서, 그것과 별개로 전혀 모르는 장소에서 남에게 이렇게 호의 어린 상을 받아도 되는 건지 고민했다.
고민이 끝나기 전, 누군가 수민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인혁이었다.
“밥상 앞에서 자는 거 아니야.”
“…….”
수민은 고개를 들었다.
“아니, 김 소장은 왜”
서 여사가 물었다.
“저도 밥 주세요. 다 차려져 있으니 밥하고 수저만 더 놓으면 되겠네.”
방금 전까지 사무실에서 취사하지 말라고 구박했던 사람이 당당하게도 밥을 요구했다.
“어, 어? 자, 잠깐만. 얼른 줄게.”
서 여사는 급하게 밥을 펐다. 인혁이 마음을 바꿔 안 먹겠다고 하면 큰일이라는 듯이.
“아침 먹으면 속 부대낀다고 죽어도 안 먹는다더니?”
박 씨는 수민과 인혁을 번갈아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냥, 사우나 다녀왔더니 배가 출출해서요. 뭐, 그냥 배고프면 먹는 거지. 별수 있습니까.”
“암, 암. 고럼, 고럼.”
서 여사가 맞장구치며 인혁의 앞에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고봉밥도 이런 고봉밥이 없었다.
“이걸 먹으라고…….”
인혁이 질색했다.
수민도 밥그릇을 받고 이걸 정말 먹으라고 준 건가 의구심을 품었었다. 그런데 인혁의 밥그릇은 그보다 심했다.
“서 여사님, 나 배 터져 죽으면 누구한테 월급 받으려고? 혹시 나 죽이고 포상금이라도 받기로 했습니까?”
“말을 해도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해! 그리고 남자가 그 정도는 퍽퍽 먹어야 힘을 쓰지. 그러니까 비실비실한 거 아냐. 어어, 덜지 말고 먹어!”
서 여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혁은 밥통으로 가 고봉밥을 4/5가량 덜어 냈다.
“아니, 말은 바로 하셔야지. 우리 김 소장이 비리비리하지는 않지이.”
“박 씨는 누구 편이야! 소속 분명히 해!”
“아이구, 전 무조건 서 여사님 편이지요.”
박 씨가 서 여사와 아옹다옹하는 동안 인혁이 수민에게 눈짓했다. 너도? 수민은 얼른 두 손으로 밥그릇을 들어 내밀었다.
안 돼! 서 여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흥. 인혁은 악당처럼 웃으며 수민의 고봉밥을 덜어 냈다. 수민은 가벼워진 밥그릇을 받아 들며 안도했다.
“먹자.”
인혁이 수저를 들며 말했다. 수민은 그 말을 쫓아 수저를 들었다.
수민은 인혁이 밥을 한술 뜨는 걸 보고 따라 먹었다. 인혁이 국물을 그릇째 들이키는 걸 보고, 역시나 따라 했다. 국이 뜨거워 인혁처럼 바로는 못 마시고 후후 불어 마셨다.
갓 지은 밥은 고슬고슬하니 맛있었다. 콩나물국의 콩나물은 아삭아삭했다. 국물은 좀 짰다. 콩나물무침은 매콤했다. 멸치볶음은 달달하고 바삭했다. 반숙인 계란 프라이는 밥그릇에 옮겨 담아 노른자를 톡 터트려 밥과 함께 먹으니 맛있었다. 인혁이 그렇게 먹었다.
서 여사는 학생 계란 뺏어 먹지 말라고 얼른 프라이를 두 개 더 해서 접시에 올려놔 주었다.
인혁과 수민은 느릿하게 식사를 마쳤다. 인혁도 수민도 식사 중 조용했다. 서 여사는 김 소장이 어디서 저 같은 사람을 데리고 왔다며 웃고는, 박 씨와 일하러 갔다.
인혁은 식사 중간에 두어 번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밥을 그만 먹으려는 거 같아 수민도 따라서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면 인혁이 수민의 밥그릇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는 수민이 밥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수저를 다시 내려놓지 않았다. 수민이 밥그릇을 다 비울 때 즈음 인혁의 밥그릇도 비워졌다.
“아이구, 복덩이가 굴러들어 왔네.”
서 여사는 인혁의 밥그릇을 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수민의 등을 두드렸다.
인혁은 속이 더부룩한지 불편한 표정을 짓다가 서 여사와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서 여사는 싱글벙글이었다.
인혁은 설거지를 하겠다는 서 여사를 밀어 내고 테이블 위를 제가 치웠다.
“제가 할게요.”
“넌 가만히 있어.”
수민이 뒤늦게 나섰으나 바로 묵살당했다.
인혁은 싱크대 앞에 서서 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리곤 고무장갑도 끼지 않고 쓱쓱 설거지를 했다. 익숙해 보였다.
수민은 인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얇은 셔츠 너머로 등 근육이 움직이는 게 드러날락 말락 하게 보였다. 소매를 걷어 드러난 팔도, 흉통도 의외로 두꺼웠다. 셔츠 아래 숨겨진 몸이 보기보다 크겠구나, 수민은 내심 짐작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옷을 입고 있으면 티가 안 나는데, 벗겨 보면 의외로 몸이 체구가 다부지고 큰 사람이.
엄밀히 말하면 티가 안 나는 것은 아니었다. 셔츠와 코트를 입고 있어도 드러나는 넓은 어깨, 군살 없는 허리. 큰 키. 긴 다리. 일정한 보폭.
힌트는 어디에나 있으나 사람들은 눈여겨보지 않는다. 처음 봤을 때의 3초간, 혹은 그 이하. 그 짧은 시간의 인상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평가를 끝내 버리니까.
물소리.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 인혁의 숨소리. 그리고 폐에 가득 찬 그 냄새가 진해졌다.
창가에선 햇살이 쏟아졌다. 간혹 파티션 밖에서 서 여사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박 씨가 발 떠는 소리가 들렸다.
수민은 테이블 위에 엎드려 햇볕을 쬐는 고양이처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나른했다. 몸의 긴장이 이완됐다. 자고 일어났는데 또 자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왜 갑자기 나태해지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
눈이 더 느리게 감겼다. 그때 목소리가 끊겼다.
“피곤하면 여기서 의자 붙이고 한숨 더 자든지.”
설거지를 마친 인혁이 물기 묻은 손을 행주로 닦으며 말했다.
“…….”
잠이 달아났다.
수민은 몸을 일으켰다.
인혁이 파티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수민은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 냄새가 나풀나풀 길게 늘어지는 것 같았다. 한쪽은 그의 허리에 메여 있고 다른 한쪽은 자신의 목에 감기도록. 수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이상한 느낌을 그렇게 정의 내렸다.
***
사무실은 언제 밥 냄새가 났었냐는 듯 진지해졌다. 인혁은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쌓인 서류를 뒤적였다. 서 여사는 박 씨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제 책상으로 모조리 옮겨 오고는,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읽어 내려갔다. 간간이 걸려 오는 전화는 박 씨 몫이었다.
박 씨는 사무실 유선 전화를 제 책상에 끌어다 놓고는 전화를 받기도 하고 걸기도 했다. 오는 전화는 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잽싸게 받았다. 그럴 땐 박 씨가 맞나 싶을 정도로 목소리가 나긋해졌다. 반대로 전화를 걸 땐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괄괄해졌다.
일하는 사람들을, 그중에서도 인혁을 보는 건 흥미로웠다.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니 수민이 인혁에게서 눈을 돌려 탕비실 쪽 벽면을 바라본 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싱크대 쪽 벽에 그림과 편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림은 아이들이 그린 듯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것부터 상당한 실력의 전공자가 그린 듯 세밀한 소묘까지 다양했다. 여러 사람이 손을 맞잡고 둥글게 서 있는 그림 가운데에 분홍색 크레파스로 쓴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행복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글씨가 수민의 시선을 끌었다. 수민은 손을 들어 ‘행복’이란 글자를 만져 보았다. 매끈매끈한 질감이 손끝에 묻어났다.
보낸 사람의 개인 정보를 누출하게 될까 걱정했던 걸까. 붙어 있는 것들은 간단한 몇 줄짜리 편지나 카드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보낸 사람들의 행복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소장님을 만났던 게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덕분에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행복, 행복, 그리고 행복.
남의 행복을 훑던 수민의 손끝이 세밀한 소묘에 다다랐다.
컴퓨터 앞에서 손으로 이마를 덮고 인상을 쓰고 있는 인혁이었다. 수민은 그 그림을 손으로 훑다 뒤를 돌아보았다. 인혁이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표정을 지은 채로 거기에 있었다.
수민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인혁이 보였다. 그의 냄새가 더 확실해졌다.
수민은 다시 자리에 앉아 엎드렸다. 한쪽 팔을 베고, 인혁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수민에게 왜 계속 거기 있느냐고,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민을 무시하거나 투명 인간 취급하는 건 아니었다.
서 여사는 두 시간에 한 번씩 믹스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저주에 걸린 사람 같았다. 두 시간이 지나면 싱크대 쪽으로 와서 커피를 타갔다. 그때마다 수민을 챙겼다.
“커피 마실래요? 내가 먹는 것만 있는 거 아냐. 요즘 젊은 사람들 좋아하는 것도 사다 놨거든.”
서 여사는 다람쥐가 도토리 창고를 자랑하듯 찬장 선반을 열어 차 티백과 커피 원두 같은 걸 꺼내 보였다. 수민이 고개를 흔들어 사양하니 대신 과자를 한 움큼 집어 수민의 앞에 놔주었다.
“또 커피?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다는데 적당히 마시세요. 여사님.”
인혁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난 이걸 안 챙겨 먹으면 몸이 안 좋아진다고.”
서 여사가 향기로운 냄새를 내뿜는 머그잔을 들고 가며 말했다.
박 씨는 서류가 가득 꽂힌 철제 선반 쪽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수민의 앞을 지나갔다. 눈이 마주치면 씩 웃곤 했는데, 한 번은 수민에게 손을 까딱였다. 그 손짓을 따라 몸을 일으키자, 박 씨는 수민을 푹신한 소파로 데려와 앉혀 놓고는 책상 서랍을 뒤져 안 쓰는 노트북을 꺼내 주었다. 유선 마우스까지 찾아 연결해 주었다.
“심심하지? 가지고 놀아요. 고물이긴 한데, 그래도 인터넷 정도는 될 거야. 와이파이 비번은 음, 그건 내가 연결해 줄게요.”
박 씨가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까지 연결해 주었다. 수민은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박 씨의 정성이 고마워서 노트북을 사용했다. 수민은 인터넷에 ‘김인혁’과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를 쳐봤다.
「신연뉴스 /
[오늘의 인물] 오범연 김인혁 소장, 20년 헌신의 길
“아직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김 소장은 지난 20여 년간 ……」
「YouCutNews /
<오범연 김인혁 소장 사립 탐정 놀이에 심취했을 뿐 / 정목연 목사(종합이단피해상담연구소)> “국가 기관 수사에 협조하기는커녕 정보 공유에 소극적인 데다가 무법자 행보, 폭력적이기까지 …… 지금 한국에서 필요한 것은 피해자들에 대한 묻지마 구조와 감싸고 돌기가 아니라 …」
「시울일보Today /
“범죄 현장 난입 무조건 폭행” …관련자 뇌출혈, 전치 …
지난 3일, 시흥 경찰서는 오범연 소장 김 씨를(43세)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조사하고 … 김 씨는 지난 27일 오후 23시 50분경 ……」
「UTVS /
[2시 대담] ‘오메가 대상 범죄 가중 처벌’ 국회 법사위 계류 문제
연속 대담 3부로 이어집니다. 이 분야의 권위자이신 김인혁 오범연 소장과 정목연 종합이단연구소 목사, 여당 의원……」
「강주신문 /
[人트W크 특별 인터뷰] 오범연 김인혁 소장
오늘은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의 김인혁 소장님과 함께합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범죄 수사 드라마 <베타 피쉬 데드>의 주인공 여범석 소장(우주인 분)의 모티브로 알려진……」
「스포츠데일리M /
‘언빌리버블’ 이 나라에 오메가를 위한 배트맨은 없다.
‘언빌리버블’에서는 지난 20년간 줄곧 오메가 범죄 문제 해결에 앞장 …… 김 소장의 진짜 비밀을……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칭찬 일색인 기사도 있었고, 비난 어조의 기사도 있었다. 댓글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영웅심에 취했다는 둥 오메가만 사람이냐는 둥, 저렇게 하는 척만 하고 후원금 받아 펑펑 쓰고 다닐 거라는 둥. 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저 소장 새끼 지인인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폭력충이라 아내가 일찌감치 도망갔다는 둥.
비난 댓글 말고 지지 댓글도 많았다. 저분 도움을 받아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고 있다. 먼 곳에서라도 늘 감사드리며 살겠다. 저분 한 번도 후원 계좌 공개한 적 없고 자비로, 제 인생 갈아서 저러고 있는 거다.
잘생겼는데 배우 할 생각은 없나? 인물이 아깝네. 이런 댓글이 많은 공감을 얻어 상단에 놓여 있기도 했다.
평가가 엇갈렸다.
수민은 뉴스 기사 몇 개와 댓글에 휩쓸려 인혁을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이젠 그런 구분이 무의미했다.
수민은 다만, 묘한 익숙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범연 김 소장.’
뉴스 기사에서 계속 사용되는 줄임말을 되뇌어 보았다. 오범연 김 소장, 오범연 김 소장, 김 소장. 김 소장.
김 소장.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타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들어봄 직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오랫동안 해왔던 사람이라면, 또 자신의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곳은 안전한 곳일지도 모른다.
수민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고시원에 등록할 때 그러하듯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종교의 표식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도 이곳에선 그다지 긴장감이 들지 않았지만, 더 안심됐다.
그때였다. 세 사람의 기척이 달라졌다.
각자의 책상 앞에서 바쁘게 일하던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인혁은 코트에 팔을 꿰었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의자에 걸쳐 놓았던 파카와 점퍼를 걸쳤다. 수민은 그 세 사람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서 여사가 방긋 웃으며 수민에게 손짓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가만히 있으니, 인혁이 지나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밥 먹으러 가자.”
그제야 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11시 50분. 수민은 일어나 인혁의 뒤를 쫓아 나갔다.
***
오후 6시가 넘어도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8시가 넘으니 서 여사가 퇴근했다. 인혁과 박 씨는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일어섰다. 수민은 말없이 따라갔다. 어제 갔던 그 중국집이었다.
인혁은 뭘 먹겠냐고 물어보려다 말고 수민을 보았다. 수민이 눈을 피하지 않자 낮게 혀를 차곤 수민의 것을 알아서 주문해 줬다.
볶음밥이 나왔다. 인혁은 볶음밥을, 박 씨는 짬뽕을 먹었다. 볶음밥은 담백해서 편히 먹을 만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박 씨는 두 시간 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누군가와 입씨름하다가 에이씨, 성질내며 전화를 내던졌다. 그리곤 “나 갑니다.” 한 마디만 남긴 채 씩씩대며 떠났다. 인혁은 손을 휘- 저으며 인사를 대신했다. 그때가 밤 10시쯤이었다.
사무실에 둘만 남았다. 수민은 박 씨가 떠나고 10분쯤 지난 뒤 소파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인혁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니터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서류에 정신이 팔려 수민이 나가는 줄도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딜 가냐거나 잘 가라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래서 편히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수민은 근처 거리를 돌아다니다 고시원을 발견했다. 다행히 방이 있었다. 외창 없는 방이었다. 대신 3만 원을 깎아 주겠다고 했다. 밥과 김치, 라면을 주는 것과 공용 화장실, 샤워실이 있는 건 다른 고시원과 같았다.
“베타 맞죠?”
졸린 눈의 총무는 졸린 목소리로 묻고는 답은 듣지도 않고 핸드폰 번호만 확인했다. 보증금과 첫 달 방세만 받고 바로 방을 안내해 줬다.
침대와 책상, 작은 냉장고 하나. 그것만으로도 방이 꽉 찼다. 이런 방은 차라리 화장실과 욕실이 없는 게 낫다. 그런 게 어설프게 들어와 있으면 습기 차고 냄새나 오히려 별로였다.
“뭐든 배달시켜 먹는 건 상관없는데, 방에서 뭘 끓여 먹거나 하진 말아요. 그런 건 주방에서만 하시구요.”
총무가 슬리퍼를 찍찍 끌며 사라졌다. 수민은 문을 닫고, 백팩을 떨어뜨리듯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저녁 8시 20분에 시작하는 일일 드라마를 보지 못한 게 생각났다. 아쉽진 않았다. 핸드폰을 켜 다시 보기로 볼 마음도 오늘은 생기지 않았다.
수민은 어두침침한 한 평 반짜리 방에 누워 눈을 감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어 보았다. 냄새가 아직 남아 있어 몸을 은은히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
다음날, 수민은 일찍 일어나 씻고 백팩을 열어 옷을 갈아입었다. 이력서도 챙겼다. 자주 옮겨 다니기에 이력서는 늘 몇 장씩 뽑아 가지고 다녔다.
고시원을 나서는데 아직 주변이 어둑했다. 새벽바람이 싸하게 뺨을 쓸고 지나갔다. 수민은 낡은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하얀 숨을 내뱉었다.
어스름한 새벽. 창백한 안색의 청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빈 길을 걸었다.
수민은 어젯밤 헤맸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에 도착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아니, 잠겨 있었다.
수민은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잠깐 졸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수민은 바로 깼다. 움직이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규칙적이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보폭이 좁고 2층 계단을 오를 뿐인데 숨이 살짝 거칠어지는. 수민은 상대가 절 알아차리기 전, 그 사람이 누군지 먼저 알아차렸다.
“어머, 학생!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반가워하면서도 놀란 걸 숨기지 않는 목소리에서 정이 묻어났다. 고작 하루 본 사이인데.
“안녕하세요.”
수민은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예요? 오래 기다렸어? 설마 밤새 있었던 건 아니죠? 우린 9시 출근이라, 아니,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좀 일찍 오고 싶더라. 그래서 좀 일찍 나서긴 했는데. 아이고, 얼굴 하얘진 거 봐. 잠깐, 잠깐만. 일단 안에 들어가요. 들어가서 얘기해.”
서 여사가 수민의 뺨에 손을 대보고는 호들갑 떨며 문을 열었다.
수민은 쉽게 사무실에 재입성했다. 어제 앉았던 소파에 앉으라고 해서 앉으니, 큰 컵에 따뜻한 코코아를 가득 따라 주었다.
향정신성 약물이 들어 있는지, 자백제 성분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을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약물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으니까.
수민은 후후 입김을 불며 코코아를 마셨다. 잔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으아, 춥다. 추워.”
박 씨가 뛰어 들어왔다.
“여어, 오늘도 보는구만. 안녕해요.”
박 씨가 수민을 알아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수민은 말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서 여사도 박 씨도 왔으니, 이제 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수민은 그를 기다리며 문을 쳐다봤다.
어떤 모습으로 들어올까. 박 씨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와서는 박 씨와 서 여사, 두 사람처럼 절 봐도 놀라지 않을까? 찬바람이 섞여도 그 냄새는 선명할까?
궁금했다.
그러나 인혁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서 여사와 박 씨가 커피를 끓여 마시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한 건 오전 9시 23분. 보통 사무실이 업무를 시작하는 시각은 오전 9시.
업무 시간이 23분이나 지났는데도 인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서 여사와 박 씨는 그의 부재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이 달칵, 29분에 걸렸을 때. 수민은 섬뜩함을 느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오지 않는 거지? 나타나지 않는 거지? 이곳이 그의 주 활동지가 아닌 걸까? 가끔 들르는 곳일 뿐이라면,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김 소장, 곧 올 거예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수민은 서 여사를 바라보았다.
“그 인간이 원래 출근 시간이 좀 제멋대로예요. 아예 여기서 잘 때도 있고, 일 있으면 늦기도 하고, 혼자 연락받아서 훌쩍 어디 다녀오기도 하고. 그래도 그런 경우엔 늦더라도 무슨 일인지 연락은 해주니까. 응?”
서 여사가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일 때였다.
“사람이 없다고 욕하면 쓰나. 어쩐지 귀가 간지럽더라니.”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성큼, 그 냄새가 밀려들었다. 등에 힘이 들어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욕은 무슨, 내가 김 소장 욕을 왜 욕해.”
서 여사가 제 발 저려 하며 콧등을 찡그렸다.
“우리 김 소장, 양반은 아닌갑세.”
박 씨가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고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치며 말을 보탰다.
“내가 우리 사무실 사람들 입 무서워서 어디 밖에 나돌아다닐 수나 있겠습니까.”
인혁이 혀를 차며 코트를 벗어 털었다. 눈을 맞고 온 듯했다.
“그러니까 늦지 말고 빨리빨리 다니면 되잖아. 사람이 기다리는데 말이야, 늦기나 하고.”
“기다리다니, 누가요?”
인혁이 생뚱맞은 소릴 들었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누구긴!”
서 여사가 코끝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인혁을 째려보았다.
“날 기다렸다고?”
인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수민을 보았다. 서 여사는 저 책임감 없는 사람 좀 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수민은 계속 인혁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금방 눈이 마주쳤다.
“날 왜 기다려.”
“…….”
“이런 구질구질한데 와서 시간 때우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이나 마음껏 하고 다닐 것이지.”
인혁은 수민의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지나쳤다. 코트를 대충 걸어 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끼익, 끼익. 낡은 의자가 울었다. 인혁은 컴퓨터를 켜며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이른 아침인데도 어제처럼 피곤해 보였다.
수민은 마음속으로 열까지 센 뒤 인혁에게 갔다. 인혁의 머리 위로 수민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인혁이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크게 들이키다 말고 인상을 썼다.
“너, 조심하고 갈무리를 좀…….”
“…….”
수민은 인혁이 왜 화를 내는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야.”
하아. 인혁이 한숨지었다. 수민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혼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할 말 있어?”
“네.”
“말해 봐.”
인혁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수민을 올려다보았다.
수민은 두 번 접은 이력서를 인혁에게 내밀었다.
인혁은 이력서를 건네받되 펴지는 않았다. 까딱까딱, 종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흔들었다.
“이게 뭔데.”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뭐?”
까딱거리던 손이 멈췄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서 여사와 박 씨의 시선이 수민의 뒤통수에 꽂혔다. 인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어디서 일하고 싶다고?”
침묵이 길어진다 싶자 서 여사가 구원 투수로 나섰다. 그제야 인혁은 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학생, 여기에서 일하고 싶어?”
서 여사가 물었다. 수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여전히 인혁을 향해 있었다. 서 여사는 그걸 보고 쯧쯧, 혀를 찼다.
“에그, 죄 많은 인간이여. 그대의 이름은 김인혁이로다.”
“여사님,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얘 어디 자리 좀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너.”
인혁이 종이를 다시 수민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일하고 싶어?”
“네.”
“안 돼.”
“…….”
“안 되니까, 여기서 일할 생각 하지 마.”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사장이나 점주들이 종종 그랬다. “우리가 사람이 필요하긴 한데. 가게 사정이 안 좋아서 말이야. 한 6개월 정도 수습으로 일하고, 시급 70% 정도? 음, 아니, 50% 정도밖에 못줄 거 같은데, 괜찮지? 너도 일을 익힐 시간이 필요할 거 아냐. 일을 배우는 동안 돈 다 받길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뷔페에서 일할 땐 손님이 없는 날이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일하라며 중간에 퇴근 당하기도 했다. 당연히 시급은 일한 시간만큼만 줬다. 수민은 그간의 경험을 떠올리며 먼저 제안했다.
이 낡은 사무실에선 사람을 하나 더 쓰면 인건비 나갈 걱정부터 들 테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빨리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당연히 일하게 해줄 줄 알았는데.
“뭐?”
인혁의 얼굴이 더 심각해졌다.
“어머?”
서 여사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인혁의 눈치를 봤다.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수민은 좀 더 천천히,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돈은 야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면 된다. 고시원비와 식비, 핸드폰 요금 정도만 벌면 되니까. “돈을 왜 안 받아.”
인혁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냥 여기 여기에서 일하게만 해주세요. 돈은 진짜 안-.”
“안 돼.”
인혁이 단호하게 수민의 말을 끊어 냈다.
“왜요?”
“…….”
인혁은 얼굴을 굳히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게, 그러니까 말이야.”
다시 서 여사가 나섰다.
“우리가 하는 일이 좀 그래서, 뭔가 형질 차별하거나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는데. 음…… 베타는 아무래도 우리가 하는 일의 특성상 좀 같이 일하기가 힘들어서. 학생. 그래서, 그래. 그래서 김 소장이 안 된다고 하는 거니까. 응?”
서 여사가 최대한 순하게 말하려고 애쓰는데.
“베타? 누가요?”
인혁이 되물었다.
“김 소장, 누구긴. 여기 이 학생이. 그러니까 김 소장도 일 같이 못 한다고 한 거잖아.”
“베타라니. 오메가잖습니까, 이 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면서, 인혁이 서 여사를 힐끔 보았다.
“뭐?”
서 여사가 화들짝 놀랐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나 수민도 좀 놀라긴 했다. 어떻게 알았지? 이력서도 안 펴보고?
“엥?”
제자리에 앉아 있던 박 씨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인혁은 서 여사와 박 씨,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곤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냄새가 이렇게 진동을 하는데, 몰랐다고?”
인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냄새가 난다니. 무슨 냄새? 수민은 제 어깨에 얼굴을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고시원 방은 창이 없을 뿐 아니라 좀 눅눅하기도 했다. 벽에 곰팡이도 슬어 있었다. 바로 옆에 샤워실이 있어서 그러리라. 그 눅눅한 냄새를 맡은 걸까? 그런데 그게 오메가인 줄 안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아니, 아무 상관도 없는 건가?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연결되지 않고 흩어졌다.
수민은 아무튼 창 있는 방으로 옮기거나 코인 세탁방을 찾아 옷을 잘 건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
인혁이 제 옷의 냄새를 맡는 수민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다? 향이 전혀 안 느껴졌는데.”
“그러게요. 내가 한 개코 하잖아요? 개코 박. 그게 난데. 알파 오메가는 귀신같이 알아보는데. 이상하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수민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우리가 이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닌데. 어, 그러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도 그렇고 여기 박 씨도 그렇고 둘 다 알파거든요. 물론 여기 김 소장도 알파고. 그냥 알파가 아니라 우성-.”
“우성은 무슨. 내가 완두콩도 아니고.”
“김 소장은 좀 가만히 있어 봐!”
서 여사가 답답해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드드득, 타이밍 좋게 인혁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수민은 누구보다 먼저 액정에 뜬 이름을 봤다.
인혁이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액정을 가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여사님, 데리고 가서 설득 좀 시켜 보세요.”
인혁이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서 여사는 그것만으로도 전화 발신자가 누구인지 짐작해 낸 듯했다.
“알았어. 일단 전화부터 받아 봐.”
서 여사가 수민의 등을 밀어 탕비실 쪽으로 갔다. 박 씨는 다시 모니터에 얼굴을 박았다.
수민은 액정에 떴던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래, 잘 지냈니. 그래, 어. 그래. 잘 지냈으면 다행이고.”
등 뒤로 인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 혹은 경직. 난감함, 곤란. 그의 목소리에서 여러 감정이 드러났다.
“그래,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고?”
서 여사가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네.”
수민은 뒤통수에 신경을 집중한 채 대답했다. 계속 인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그래, 그래.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네. 어제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어요.”
전화가 끊겼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요 앞에 나갔다 올 겁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연락 오는 거 있으면 받아 놔줘요.”
인혁이 문 쪽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오래 나가 있을 생각은 없는지 코트를 걸치지 않은 채였다. 핸드폰도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갈 때까지, 수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수민은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문을 닫히고 흠흠, 서 여사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음, 학생. 그러니까 김 소장 말처럼 오메가인 거죠? 정말로?”
서 여사가 물었다. 수민은 다시 서 여사를 보았다.
“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거 대놓고 안 물어보는 게 예의라고 하던데.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근데 정말 오메가인지 몰랐어서…….”
“네.”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건지, 알겠다는 건지, 원.’
서 여사가 난처한 듯 웃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나랑 박 씨는 알파예요. 그래서 같은 알파나 오메가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데. 학생한테서는 전혀 안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베타인 줄 알았지 뭐야.”
“네.”
서 여사가 베타인 줄 알았다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메가 아니냐고 말한 인혁이 더 신기했다.
인혁을 생각하니, 제 몸에 나는 냄새가 신경 쓰였다. 수민은 다시 제 셔츠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혹시, 제게서 안 좋은 냄새가 나나요?”
“응?”
“방이 눅눅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그래도 옷은 늘 깨끗하게 빨아 입는데.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냄새?”
“네.”
“그러니까 학생한테서 눅눅한 냄새가 난다고?”
“네. 이 냄새 때문에 조금,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 소……장님이요.”
수민은 아직 인혁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학생, 혹시…… 이런 말도 실례가 되겠지만. 미리 미안해요. 혹시 열성이에요? 그래서 페로몬이 약하다거나.”
서 여사가 그제야 수민의 말을 이해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사고 때문에 베타나 다름없게 되었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살면 된다고 들었어요.”
“아, 그래서 우리가 못 알아보고 김 소장만 알아본 거구나.”
“…….”
그러니까 그게 내 몸에서 난다는 냄새랑 무슨 상관인 거지? 수민은 고개를 기울이고 서 여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음, 일단. 김 소장은 우성 알파예요. 뭐, 우성 알파가 다 예민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소장님이 그런 쪽으론 특히나 예민한 편이라 알파랑 오메가, 특히나 오메가 페로몬에 극히 예민하고.”
김인혁은 우성 알파. 인터넷 기사에는 나오지 않은 새로운 정보였다.
우성은 뛰어나고 희귀하다. 이런 인식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알파, 오메가 중 우성은 채 1%가 안 되니. 사람들은 이들을 뭔가 대단한 존재처럼 특별 취급했다. 알파와 오메가를 배척하는 사람들조차 우성을 대할 땐 예의를 갖췄다.
우성 알파는 베타보다, 일반 알파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뛰어나며 성생활도 우수하다고들 생각한다. 열성은 상대적으로 모자란 취급을 받는다. 열성 알파, 오메가는 베타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차라리 베타가 났지, 열성이 뭐냐, 열성이. 이런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이런 구분은 알파와 오메가가 정기적으로, 혹은 비정기적으로 겪는 러트와 히트 사이클과 궤를 같이한다.
알파와 오메가는 때때로 강렬한 성적 욕구에 시달린다. 단지 기분상의 문제는 아니고, 신체의 반응이 그 성적 충동에 종속된다. 그 기간 동안 페로몬이라 불리는 체향이 폭발적으로 강해져 제어할 수 없게 되며, 성기와 몸의 일부분이 삽입 섹스를 위해 변화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나 이틀에서 닷새, 길게는 일주일까지도 지속되며 이 시기에 성관계를 할 경우 임신 확률이 급격히 높아진다.
알파와 오메가가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한 인류의 진화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초기엔 사이클에 무지하여, 알파와 오메가가 폭력적인 강간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되는 사회 문제가 극심했다. 진통을 겪고야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클 기간 유급, 혹은 무급 휴가가 법적으로 강제됐다. 이 때문에 기업에서 알파와 오메가를 뽑지 않으려고 이력서에 형질을 쓰도록 해 거르고, 알파와 오메가들은 베타라 속이고 취직하는 사례가 늘어나 이 또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이클은 오직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만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고, 베타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이클은 우성일수록 약으로 제어하기 힘들 만큼 강하고, 열성일수록 약하다. 열성 중에는 반나절 정도 가볍게 미열이 나거나 사타구니가 뻐근한 느낌이 나고 마는 정도로 사이클이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전체 인류의 65%를 차지한 베타는 자신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알파와 오메가의 성관계, 특히나 우성과의 섹스 판타지를 품게 되었다.
알파와 오메가, 특히나 우성은 연예계에서 환영받았다. 베타인 팬들은 페로몬을 맡지도 못하면서 매력적인 알파나 오메가 연예인들을 좋아했다. 그들의 페로몬을 본떴다는 향수가 불티나게 팔리곤 했다.
우성인 알파, 오메가 연예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질수록 우성 알파와 오메가를 경외하고 대단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특히나 우성 알파는 전지전능, 선택받은 존재, 상위 1% 따위의 수식어로 설명되었다. 우성 알파는 페로몬을 사용하여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우성 알파에 대한 세간의 허황된 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혁은 어떻게 수민이 오메가인 줄 알아보았는지는 그가 우성 알파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우성 알파여서.
우성 알파니까.
남들은 다 네가 베타인 줄 알지만, 오메가인 줄 알아본 거지.
서 여사는 거기에 말을 좀 더 보탰다.
“우리 하는 일 때문에라도 오메가인 학생이 여기서 일하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알다시피 김 소장이랑 우리는 오메가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나쁜 일들을, 그 현장을 찾아다녀요. 조사한다면서 위험한 곳 쑤석거리기도 하고, 제보받고 무턱대고 달려가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좀 위험한…… 뭐, 이런 건 결국 다 핑계고.”
서 여사가 말을 하다 말고 쓰게 웃었다.
“사실 김 소장이 많이 불편해해서 그래요. 오메가 대상 범죄 현장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사람이, 오메가 페로몬에 너무 예민해서…… 약도 꾸준히 먹고 상담도 받는다는데, 사람이 아직 그래.”
이쯤 되면 무언가 낌새를 못 알아채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왜 이렇게 자세하게, 구구절절 설명해 주는 건지.
“아무튼 학생한테선 이상한 냄새 전혀 안 나요. 이상한 냄새는 무슨. 처음 봤을 땐 너무 곱고 예뻐서 연예인인가 했어요. 나도 모르게 편견이 있었나. 너무 당연하게 오메가 아냐 싶었는데, 페로몬을 못 느끼겠고, 저 개코 박도 학생이 베타인 거 같다고 그러고. 그래서 그런 건지 알았지. 소장님이 좀 특이해서 학생 형질을 바로 알아맞힌 거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알았죠?”
“네.”
수민은 서 여사의 말을 들으며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인혁이 보였다.
그는 건물 앞에 서 있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수민의 또래로 보이는 청년과 함께였다.
청년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갈색이었고 햇빛을 받아 간간이 빛났다. 몸은 호리호리했고 얼굴은 갸름해 보였다.
청년이 인혁에게 다가갔다. 인혁은 손을 뻗어 청년을 막으려 했는데, 청년이 그 팔을 껴안았다. 수민은 그 상황이, 눈에 거슬렸다.
“…….”
수민이 허리를 꼿꼿이 펴자 서 여사가 수민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아이고, 역시 승원이구나. 한동안 연락이 없다 했더니…….”
승원.
인혁의 핸드폰에 뜬 이름이었다. 정승원.
수민은 설명을 바라며 서 여사를 바라보았다. 서 여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차라리 지금 말해 두는 게 낫겠지요?”
무얼요, 라고 묻지 않은 건 서 여사가 그럴 틈을 주지 않아서였다.
“김 소장은 20년 전에 실종된 가족을 찾고 있어요. 아내와 아들, 처남. 그래서 학생 또래 남자아이, 특히나 오메가인 아이를 보면 사람이 물러져요. 승원이한테도 그랬고. 승원이는 작년에 구출한 아이예요. 나쁜 곳에 끌려가 갇혀서 힘든 일을 겪었는데, 제보를 받고 우리가 구출했어요. 승원이 말고도 몇 명 더 있었는데 승원이가 딱 김 소장 아들뻘이어서 김 소장이 좀 더 신경을 썼지. 승원이도 김 소장을 잘 따랐고. 그런데…….”
서 여사가 머뭇거렸다. 이제 와서 고민하는 듯했다. 이런 말을 수민에게 해도 될까 하고. 복잡한 속내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김 소장은 승원이 허락을 받아서 유전자 검사를 해볼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승원이가 자기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좀 들떠 있었던 것 같아. 그 전에 연달아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많이 의기소침해 있었거든. 나나 박 씨가 보기에도 기분이 좋아 보여서, 정말 승원이가 김 소장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승원이가 저녁에 잠깐 자취방에 와 달라고 김 소장한테 연락했었다더라고. 그 말만 듣고는 뭐, 형광등이 나갔거나 뭐가 고장 나서 도와달라는 거겠거니 하고 별생각 없이 찾아갔었던 거 같은데.”
문을 열자마자 인혁을 반긴 건 형광등이 나가서 곤란해하는 아들 같은 승원이가 아니었다.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오메가의 페로몬. 히트 사이클에 접어들어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발정 난 젊은 오메가의 열기였다.
승원은 작정했는지 억제제도 안 먹고, 제 페로몬을 모두 개방한 채 침대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통의 알파였다면 문을 연 순간, 그 열기에 휩쓸려 덤벼들었을 것이다. 히트 사이클인 오메가의 허리를 붙잡고, 이미 젖어 있는 구멍에 제 성기부터 처넣고 마구 허리 짓 해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인혁은 보통의 알파가 아니었다. 그 대단한 우성 알파의 딱지가 그때에도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건 아니었다. 우성 알파의 성욕이야말로 일반 알파와 비교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인혁은 오메가 페로몬 거부증을 앓고 있었다. 그냥 알파도 아니고 우성 알파였기에 페로몬 거부 증세는 더욱 심각했다. 인혁에게 오메가 페로몬은, 특히나 히트 사이클인 오메가가 내뿜는 페로몬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인혁은 원룸 문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정신을 잃기 전 겨우겨우 전화한 곳은 절 살리기 위한 119가 아니라 히트 사이클인 승원을 돌봐 줄 수 있는 사람, 서 여사였다.
서 여사는 알파지만 페로몬에 둔했다. 그래서 오메가 히트 사이클에 휩쓸리지 않았다. 인혁처럼 페로몬 거부증을 앓는 건 아니었다. 서 여사는 그냥, 성애에 관심이 없었다. 무성애자 알파.
무성애자가 알파이면 성욕이 없을까? 성욕이 일지 않을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케이스가 서 여사였다.
“그래서 내가 봤지. 그 처참한 광경을.”
서 여사가 손으로 눈두덩을 비볐다. 아직도 그때의 상황이 눈에 선한 듯했다.
인혁이 승원이 제 아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다른 오메가들보다 저항감이 덜해서였다.
범죄 현장에서 구출된 오메가들이 자기방어를 위해 페로몬을 열성보다도 미미한 수준으로 갈무리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서. 승원이 하루가 멀다고 발정제 주사를 맞아 가며 알파들의 난교 현장에 끌려들어 갔던 기억을 이겨 내지 못하고, 강박적으로 제 페로몬을 억누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면서.
인혁은 내 아들이어서 거부감이 덜한 게 아닐까 섣불리 기대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인혁은 여러 번, 아니, 수도 없이 그런 기대를 품곤 했으니까.
승원은 저를 구해 주고 지켜 주고, 특별하게 여겨 주는 어른의 상냥함에 취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었다.
둘 중 누구도 잘못은 없었다고, 서 여사는 반복해 말했다. 수민에게 말하듯 인혁에게도 말했다고 했으나 인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제가 잘못 처신한 겁니다. 제가 오해하게 만들었어요.”
병원에서 깨어난 인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참담함이 묻어났다.
서 여사는 우성 알파의 절망적인 기운에 눌려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산소통 없이 심해에 잠긴 듯했다.
이후 서 여사는 인혁의 머리카락과 승원의 머리카락을 구해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결과는 불일치였다.
노을 녘, 사무실 창가에 기대서서 검사지를 내려다보는 김 소장의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인혁은 승원을 믿을 만한 시민 단체에 인계했고, 승원을 더는 만나지 않았다. 승원은 계속 사무실에 전화하고 이곳에 찾아오려고 했으나 김 소장이 용납하지 않자 몇 달간 연락이 끊겼다고. 그게 다섯 달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승원이 다섯 달 만에 인혁을 찾아왔다.
“저 아이만의 일은 아니에요.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어요. 김 소장은 제 아들뻘인 사람을 보면 물러 터져서.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옆에서 보면 맞는 걸, 뭐. 배고파 보이는 애가 있으면 주워다 밥 먹이고, 갈 곳 없다고 하면 여기다 재우고. 그러다가 사무실 털린 것도 여러 번인데. 그래도 버릇을 고치지 못해. 그런데 어젠 학생을 데리고 왔더라고. 웬일로 베타를 주워 왔나 했더니. 학생도 오메가였네요.”
인혁의 치부였다. 만난 지 고작 이틀밖에 안 된 외부인에게 함부로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말을 꺼내는 건, 역시.
“…….”
수민은 서 여사의 속내를 내심 짐작해 보았다.
‘너도 똑같아. 밖에 있는 승원이란 저 애와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조심해. 김 소장의 호의를 오해하지 마.’
새겨들을 만한 충고였다.
“네.”
수민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사이 밖에서도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것 같았다. 승원이라는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인혁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고 있었다.
인혁이 승원을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수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잠시 후.
인혁과 승원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 김 소장. 안 그래도 방금 연락하려고, 어, 누구? 승원이? 승원이구나. 어이구, 이게 얼마 만이야?”
박 씨가 호들갑 떨며 둘을 반겼다. 하지만 수민은 놓치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승원을 보자마자 박 씨의 얼굴에 스쳤던 난감한 기색을.
“아니, 밖에 잠깐 나갈 일 있다고 하더니. 승원 학생 데리러 간 거였어요? 승원 학생, 오랜만이네. 나 기억해? 잘 지냈어요?”
서 여사도 승원을 반겼다. 파티션 밖으로 걸어가다 슬쩍 수민을 돌아보며 곤란한 듯 웃어 보였다. 수민은 걱정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서 여사 뒤에 섰다.
가까이서 본 승원은 예뻤다. 남자치고 긴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결 좋게 흔들렸다. 헤실헤실 웃는 얼굴에서 그 나이대의 풋풋함과 상큼함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셨어요.”
승원이 허둥지둥 서 여사와 박 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뺨이 붉었다. 추운 곳에 오래 서 있다 따뜻한 곳으로 와 그런 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승원의 뒤에 선 인혁이 원인이었다. 승원은 서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계속 인혁을 돌아봤다.
승원은 수민의 존재를 좀 늦게 알아차렸다. 곱게 휜 눈초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 눈이 대놓고 수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민은 그 눈의 의미를 알았다.
서 여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수민을 등 뒤로 숨겼다. 그래봤자 머리 하나는 더 큰 수민이 숨겨질 리 없지만.
“아, 여기는……. 어, 알바. 그래. 아르바이트 면접 온 학생이야.”
서 여사가 말했다.
서 여사 나름대로는 최선의 임기응변이었으나 인혁이 듣기엔 아닌 듯했다. 인혁이 뭔 소리를 하냐며 서 여사를 쳐다보고는 한마디 하려는데.
“아, 르바이트요?”
승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인혁을 돌아보았다.
“저, 저도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절대 안 된다고, 위험하다고…….”
승원이 말을 하다 말았다.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안 된다고 했으면서 쟤는 왜?
인혁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됐다. 면접만 보러 온 거야. 면접만.”
그 말에 승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승원이 적의를 숨기지 않고 수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숨을 내쉼과 동시에 경계가 조금은 느슨해졌다. 아니, 오만한 자신감이 승원의 눈가에 스쳤다.
승원이 다시 곱게 눈웃음을 흘렸다.
수민은 승원이 저를 하찮게 여긴다는 걸 알아챘다. 향이 나지 않으니까. 오메가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그에게 베타는 경계 대상이 아닌 걸까? 드물지만 세상엔 알파와 베타, 오메가와 베타 커플도 있다고 했는데. 수민은 승원의 자신감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행이네.”
승원이 더는 수민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서 여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수민은 그 작은 소리를 주워들으며, 승원이 이곳에 머물 때 어떻게 행동했을지 짐작했다. 구출되어 온 다른 오메가들을 보며 패악이라도 부렸으려나.
“그러니까 정승원 군이 오늘 여기에 온 건.”
인혁이 말문을 열었다. 승원과 수민이 거의 동시에 인혁을 바라보았다.
“소장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마세요. 남 같잖아요.”
승원이 울상 지었다.
“우리가 남이긴 하지.”
인혁은 담담히 대꾸했다.
“소장니임.”
승원이 매달리려는 듯 손을 뻗었다. 인혁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그 손을 피했다. 승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 서운함이 가득했다.
“정승원 군이 이번에 수능을 봐서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사하러 왔답니다.”
인혁은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승원은 애타는 눈으로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승원이 품고 있는 마음을. 그런데도 인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굳었다.
한쪽은 대놓고 무시하고, 한쪽은 대놓고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서 여사와 박 씨가 나섰다.
“어머나, 너무 잘됐네!”
서 여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맞아요, 맞아. 박 씨도 얼른 맞장구쳤다. 두 사람 덕에 분위기는 조금 밝아졌으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서 여사가 승원에게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명백히 손님 취급하며 차라도 한 잔 대접하겠다는 건데, 승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 쳤다.
“제가 할게요. 여사님도 앉으세요.”
이 사무실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온 수민이 슬쩍 끼어들었다. 서 여사와 박 씨가 탕비실에서 커피 타 먹는 걸 몇 번이나 봤기 때문에 커피 농도와 양을 맞추는 건 자신 있었다.
“니가 뭔데 그런 일을 해.”
그런데 인혁이 초를 쳤다.
너무 나선 건가. 수민은 주춤, 물러섰다. 그걸 본 승원이 슬쩍 웃었다.
“너도 손님이니까 나서지 마. 그리고 우리 사무실은 손모가지 멀쩡한 사람은 제 건 제가 타 먹자는 주의고, 정승원 군은 바로 갈 거라 차 대접은 안 해도 돼.”
인혁이 수민의 머리를 꾹 눌렀다.
수민은 그 손길이 기분 좋아 작게 웃었다. 그러다 다시 승원과 눈이 마주쳤다.
“…….”
승원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수민을, 아니, 수민의 머리를 만지는 인혁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곧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던 인혁이 고개를 돌려 승원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넌 이제 바로 갈 거잖아. 인혁이 확인하듯 물었다.
“……네. 논술 교재 사려고 요 근처 서점 찾아왔다가 잠깐 들른 거라서요.”
승원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사무실 안 모두가 알아차렸으나 누구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대화가 몇 번 더 오간 후 승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신데 갑자기 들러 죄송해요. 이만 가볼게요.”
승원이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역 앞까지 데려다줄게.”
인혁이 코트를 걸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승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걸 본 서 여사가 혀를 찼다. 김 소장이 또 또 제 버릇 남 못 주고 챙기려 든다고. 저 애가 또 괜히 기대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못마땅해했다. 박 씨도 퍽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수민은 그들의 불안에 동조하지 않았다.
발그레한 뺨. 애써 웃는 입술. 인혁의 팔을 잡고 싶어 머뭇거리는 팔. 겉으로 드러나는 들뜨고 설레는 감정. 모든 것이 처음 사무실 안으로 들어올 때와 같았으나 달라진 게 있었다.
눈.
눈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졌다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써 붙잡고 있던 반짝반짝한 사탕 포장지가 날아가고 원래의 것이 드러났을 뿐이니까.
수민은 저 눈을 알았다. 저 눈의 의미를 알았다.
아, 저 아이는 곧…….
수민은 생각하기를 멈췄다.
승원은 잠깐 수민을 바라보다 먼저 고개를 돌렸다.
***
부고를 받은 건 사흘 뒤였다. 그전까지 수민은 사무실에 매일 찾아갔다. 인혁은 여전히 수민을 고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수민을 내쫓진 않았다. 점심 식사를 하러 갈 때면 멀뚱히 앉아 있는 수민의 등을 툭 치며 챙겼다.
수민은 적당히 눈치를 보며 서 여사와 박 씨의 일을 도왔다. 돕는다고 해봤자 우체국에 대신 다녀오거나 복사, 서류 정리 등의 일을 거드는 정도였다.
서 여사의 박 씨는 인혁의 눈치를 보며 수민을 말리면서도, 은근히 달가워했다. 특히나 박 씨가 그랬다.
박 씨는 승원의 일을 잊은 건지 수민이 오메가라는 걸 깜빡 잊은 건지 적극적으로 수민의 취직 활동을 도왔다. 저렇게 야무지고 싹싹한 청년을 왜 거부하는 거냐고. 본인도 원한다는데 사무 보조로라도 뽑아 나라의 심각한 청년 실업률 감소에 힘을 보태는 게 애국하는 길 아니겠냐며 인혁을 쪼아 댔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인혁은 요지부동이었다.
수민은 실망하지 않았다. 고작 며칠 만에 인혁이 마음을 바꿔 먹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수민은 저녁에 근처 편의점 두 곳에서 평일 야간, 주말 야간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았다.
두 곳 다 수민의 이력서를 보곤 오메가인데 괜찮겠느냐고부터 물었다. 평일 야간 자리를 구하는 곳은 사정이 급한지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민은 두 곳 모두 떨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도 알아봤다. 호프집 저녁 서빙과 평일 카페 마감 아르바이트 면접이 또 잡혔다.
그러던 중 부고가 날아들었다. 연락을 받은 건 박 씨였다.
“예, 오범연입니…… 예?”
느른한 오후였다. 박 씨는 꾸벅꾸벅 졸다 으하암- 하품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입에 붙은 인사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이 쩍 벌렸다.
“아, 예. 예. 예에, 예. 그럼요, 당장, 당장 가야죠.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
박 씨가 당황하며 메모지에 무언가를 급하게 받아 적었다. 사무실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눈이 반쯤 감겨 있던 서 여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혁은 코트와 차 키를 챙겨 들고 박 씨에게 다가갔다.
탁자를 닦고 있던 수민은 팽팽한 긴장감에 반응해 고개를 들었다.
“어딥니까, 어디로 가야 합니까.”
박 씨가 전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인혁이 물었다.
그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잔뜩 긴장하다 못해 성난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제보가 아니라…….”
박 씨는 마구 손사래 치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승원이, 어젯밤에 자살한 채로 발견되어서 새벽에 경찰 조사가 끝나고, 지금 장례식장이 잡혔다고…….”
인혁이 들고 있던 코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에그머니.”
서 여사가 도로 주저앉았다.
사무실 분위기가 다시 변했다.
인혁이 떨어뜨린 코트를 주우려 몸을 굽혔다. 그러다 코트를 줍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승원이? 정승원?”
제가 잘못 들은 것을 확인받고 싶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그렇다네.”
박 씨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인혁은 허리를 펴고 한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손이, 바르르 떨렸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한동안 사무실에선 숨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수민은 탁자를 마저 닦은 뒤 걸레를 내려놓았다. 그들에게 방해는 되지 말자는 생각에 얌전히 서 있었지만, 그들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어째서 충격받고 슬퍼하는 걸까, 새삼.
***
셋 중 그나마 충격이 덜한 박 씨가 운전석에 앉았다. 보조석엔 인혁이, 뒷좌석엔 서 여사와 수민이 탔다.
누구도 수민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 여사는 달가워했다.
“아이고,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
서 여사는 수민의 손을 꼭 붙잡고, 가는 내내 앓는 소리를 냈다. 간간이 울음이 섞였다. 박 씨도 가끔 한숨을 내쉬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렸다.
장례식장까지 차가 많이 막혔다. 도착한 뒤에도 주차 자리가 마땅치 않아 한참 기다려야 했다. 겨우 주차 요원에게 키를 넘기고 내려가니, 그곳은 이미 울음바다였다.
작년에 함께 구출됐다는 사람들, 같은 입시 학원에 다녔다는 친구들, 승원을 돌봐 주었던 센터 사람들.
그들의 한숨과 울음이 깔린 빈소에 승원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었다. 명함 사진을 확대한 건지 정면을 보고 귀를 드러낸 사진이었다. 살짝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실물보다 훨씬 앳돼 보였다. 죽기엔 너무 다른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박 씨가 비치된 봉투에 이름과 소속 등을 쓰고 부의금을 냈다. 인혁과 수민은 비틀거리는 서 여사를 부축했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건지, 서 여사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상주를 맡은 건 돌봄 센터장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여성이었는데 인혁과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김 소장, 어서 와요.”
“선생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김 소장 볼 면목이 없네. 미안해요, 미안해. 날 믿고 승원이를, 그 천사 같은 아이를 보내 줬는데. 내가 부족해서…… 그래서.”
센터장이 입술을 깨물고 흐느꼈다.
거짓으로 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민이 보기엔 그랬다.
“왜, 왜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며칠 전에 수능 잘 봤다고 인사하러 온 아이가 왜!”
“미안해요, 김 소장. 내가 도대체 뭘 놓친 건지…… 심리 상담 결과도 계속 좋았고, 태도도 좋았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학 갈 생각에 잔뜩 설레하던 아이였는데…… 아무 징조가 없었어. 아니, 내가 발견하질 못했어. 내가, 내가 분명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지킬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센터장은 인혁을 붙들고 울음을 토했다.
“선생님, 이러지 마세요.”
“승원이 생각해서라도 이러시면 안 돼요.”
“김 소장님. 답답하고 저희 의심하고 싶으신 마음 모르는 건 아닌데. 센터장님께 이러지 마세요. 아시잖아요. 저희, 진심으로 승원이 아끼고 챙겼다는 거요.”
옆에 서 있던 돌봄 센터의 선생님들이 몰려들었다.
“알지, 알아. 그런 곳인 줄 알아서 애를 맡긴 건데 왜…….”
인혁은 승원의 영정 사진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수민은 서 여사를 부축하며 그런 인혁을 지켜보았다.
네 사람은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일회용기에 육개장과 밥이 담겨 나왔다. 나올 때부터 미지근했던 국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난 센터장이 테이블로 찾아왔다. 서 여사가 자리를 옮겨 줘서 인혁의 옆에 앉을 수 있었다.
“억지로라도 한술 들어요. 객들이 한술 떠줘야 가는 사람 가는 길이 가벼워진다고 하니.”
센터장의 말에도 다들 한술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자살 맞습니까? 요즘 요 몇 년간 불특정 다수에 대한 연쇄 살인 의혹이 있었잖습니까. 혹시 승원이가…….”
“자살이 맞아요. 김 소장. 경찰 조사가 그렇게 나왔어.”
센터장이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곤 품에서 흰 봉투를 하나 꺼내 인혁에게 내밀었다. 봉투는 이미 뜯어져 있었다.
“승원이가 유서를 남겼어요. 센터에 하나, 김 소장한테 하나. 경찰이 수거해 가서 조사 후에 돌려준 거야. 우리한테나 김 소장한테나 고맙고 미안하단 말뿐이네.”
“미안한 줄 알면!”
“김 소장.”
“…….”
“받아, 받아요.”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인혁은 봉투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씨가 따라 일어나려 하자 센터장이 고개를 저었다.
인혁이 혼자 떠났다. 수민은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센터장은 함께 온 수민을 궁금해했으나 인사를 나눌 새가 없었다.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센터장은 상주 노릇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박 씨는 소주병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고 사이다를 땄다. 그리곤 마침 지나가는, 오며 가며 안면을 텄던 센터 직원을 불러 옆자리에 앉히고는 대놓고 사정을 물었다.
센터 직원은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해 주었다.
승원이 자살할 정도로 힘들어했던 일이 정말 없었다는 것, 수능 성적이 우수한 데다가 센터장 추천장까지 받은 덕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모두 면제받았고 익명의 후원가가 매달 생활비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는 것.
‘익명의 후원가’ 부분에서 박 씨가 쓰게 웃었다. 수민은 그 익명의 후원가가 인혁이거나 적어도 사무실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승원은 자살했던 날 당일까지도 어떤 조짐이 없었다. 자살 추정 시간 직전엔 센터 2층 사랑방에서 친구들과 치킨을 시켜 먹으며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그러다 피곤하다고 먼저 숙소 방으로 올라갔다.
TV를 다 보고 난 후 자리를 정돈하던 아이들이 승원이 놓고 간 핸드폰을 발견했다. 옆방에 사는 아이가 가져다주려고 찾아갔는데 승원이 방에서 목을 맨 채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바로 119에 신고하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미 사망한 뒤여서 손을 써볼 수도 없었다고.
이런 사연을 들으면 당연하게도 센터부터 의심하게 된다. 혹시 센터 내에서 학대가 있었던 건 아닌지. 아이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못 하고 심적으로 막다른 길에 몰려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니었는지.
하지만 박 씨도 서 여사도 그런 쪽으로는 의심하지 않았다. 승원을 맡긴 센터는 정말 믿을 만한 곳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서 여사와 박 씨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며칠 전에 봤을 때만 해도 그리 밝아 보이던 아이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걸까. 혹시. 인혁이 제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서? 우리가 그때 그 애를 너무 매몰차게 대해서? 그래서 그런 거라면, 어떡하지?
서 여사가 수민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민은 서 여사의 얼굴에서 저를 향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읽었다.
서 여사가 너는 그러지 말라는 듯 손을 꼭 잡았다. 손은 축축하고 미지근했다.
수민은 노트북으로 검색해 보았던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의 눈부신 업적들을 떠올려 보았다. 조폭이 낀 오메가 납치·매매 사건, 경찰도 손댈 엄두를 못 내던 성 착취 현장,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처참했던 강제 오메가 대리모 공장, 등등. 그런 범죄 현장을 찾아다니며 무급 사설 용병처럼 오메가들을 구출하고, 재활을 돕는 사람들이 눈앞의 이들이었다.
그동안 볼 꼴 못 볼 꼴 별별 꼴을 다 봤을 텐데. 이들은 자신들이 구출해 낸 수많은 오메가 중 한 명, 그 한 명이 사회에 적응하다 낙오한 일에 충격을 받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그동안 그 험한 일을 어떻게 해낸 걸까. 아니, 이런 사람들이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문득 공익 생활 중 만났던 어느 공무원이 생각났다. 그는 수민이 저도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하자 너는 아직 자격이 없다고 화를 냈다.
그 자격이란 건 이 사람들이 가진 마음인 걸까? 그렇다면 자신은 그 자격을 영영 갖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민은 오히려 승원의 선택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수민은 고개를 돌려 덩그러니 놓인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진이 제게 말을 걸기 전에 수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장님 찾아보고 올게요.”
“그래 주겠어요? 고마워요.”
서 여사가 손을 놓으며 부탁했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나와 주차장을 둘러보았다. 차들이 빽빽하게 세워진 주차장 어느 틈에도 인혁은 보이지 않았다. 수민은 나무 아래, 사람들이 서성거리는 쪽으로 가보았다. 가까이 갈수록 냄새가 짙어졌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웃었다. 독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혁은 구석진 화단에 혼자 앉아 있었다. 화단엔 꽃 대신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인혁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손에는 담뱃갑과 나풀거리는 하얀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근처의 누군가가 라이터를 내밀었으나 인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인혁의 손에서 빠져나간 종이가 팔랑, 수민의 발치에 떨어졌다. 인혁이 수민을 보았다. 수민은 종이를 주워 인혁의 앞에 섰다.
“소장님. 담배 안 피우세요?”
“내가 왜 니 소장이야.”
맞는 말이었다. 수민은 수긍하고 다시 물었다.
“담배, 안 피우세요?”
“안 피워.”
인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수민을 보며 답했다. 그리고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동강 냈다.
“아내랑 약속했거든. 금연, 금주하기로. 태어날 아기한테 담배 냄새, 술 냄새 풍기는 아빠가 되지 않기로.”
그의 말이 하얀 연기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그는 지독히도 추워 보였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술 냄새, 담배 냄새가 나면 얼마나 밉겠어, 내가.”
인혁이 두 동강 난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수민은 주워 든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건 승원의 유서였다. 단정한 필체로 세 줄 정도 쓰여 있었다.
「김 소장님께.
절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들처럼 예뻐해 주셨던 거 알아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더는 행복할 자신이 없어요.」
“이리 내.”
인혁이 손을 내밀었다. 수민은 순순히 돌려주었다. 승원의 유서를 받아 든 인혁은 그걸 차마 구기지도 버리지도 못했다. 그는 한층 더 지쳐 보였다.
어째서 승원이란 사람의 죽음을 이다지도 어려워하는 걸까. 행복해지고 싶었지만 행복해지지 못했고, 행복해지지 못할 삶을 굳이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건데. 고작 그뿐인데.
그의 죽음엔 타인의 죄책감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수민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살짝 비벼 보았다. 행복이란 단어를 쓴 크레파스의 감촉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행복이 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가지기 위해 노력도 했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잘 웃고, 모두에게 상냥하게 굴었겠지. 그의 죽음에 모두가 슬퍼하고 빈소를 찾아와 줄 정도로.
하지만 그 노력은 실패했다. 그는 행복을 가지지 못했다.
수민은 인혁이 제 머리를 쓰다듬을 때 승원의 눈동자가 푹 꺼졌던 것을 기억해 냈다. 승원이나 저 같은 아이는 이전에도 몇 명이고 있었다던 서 여사의 말 또한.
그때 실감했겠지. 자신은 역시 그 여러 명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을. 그런데 어떻게 계속 살 수 있을까?
수민은 절 올려다보는 인혁과 눈을 마주쳤다. 얇은 안경알 너머, 지독히도 지쳐 보이는 검은 눈, 그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이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인혁을 거부하지 못한 거란 걸 안다. 그리곤 그런 짓을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안다.
공익 생활 중 배웠다. 남의 약점을 파고들지 말고, 상대가 약해져 있을 땐 위로를 하라고. 단지 그것만 하라고.
하지만 그래서는 행복을 가질 수 없다.
“옆에서 일하게 해주세요.”
“…….”
인혁이 눈을 찡그렸다.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옆에 있게 해주세요.”
“너…….”
“돈은 안 주셔도 돼요.”
“…….”
“돈은 정말 안 주셔도-.”
“돈을 왜 안 받아.”
인혁이 안경을 벗고 눈가를 꾹꾹 눌렀다.
“돈은…….”
“줄 거야. 식대도 따로 챙겨 줄 거고, 첫해부터 연차도 챙겨 줄 거야. 고용 계약서도 쓸 거고, 사대 보험도 들어줄 거고. 그리고…….”
하아, 인혁이 숨을 토해 냈다.
“옆에 있어도 되나요?”
수민이 물었다.
“…….”
인혁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나한테는 네 또래의 아들이 있어.”
목소리가 메말랐다.
“올해 스무 살이 됐을 건데. 엄마랑 삼촌이랑 셋이서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야. 난 걔를, 내 아들을 찾아야 해.”
“…….”
“나한텐 내 가족뿐이야. 난 오직 내 가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살고 있어. 그러니까.”
수민은 그다음에 올 말을 예상했다. 나한테 뭔가를 바라지 마. 다가오지 마.
“절대 죽지 마.”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 아들은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으니까, 너희도 죽지 마.”
“…….”
수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죽지 말라는 게 새삼 생각해 보고 대답할 일이야?”
인혁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럴게요.”
수민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인혁이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담배에 불을 안 붙였는데도 하얀 입김이 났다. 덧없이 흩어지는 인혁의 숨을 보며, 수민은 잠깐 승원의 영정 사진을 떠올렸다. 하얀 꽃 속에 파묻혀 있던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을.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