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2권) (6/19)

File#5. 오수민, 23세, 오메가 (2)

승원의 발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인혁은 제가 운전하겠다고 했으나 박 씨가 키를 넘겨주지 않았다.

박 씨가 중간에 피곤해하면 자리를 바꿔 주겠다며 서 여사가 보조석에 앉았다. 졸지에 인혁과 수민이 뒷좌석에 탔다.

가는 내내 차 안은 조용했다. 인혁과 서 여사는 창밖만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수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드드득. 수민은 핸드폰의 액정을 보며 잠깐 고민했다.

발신인은 얼마 전에 면접 본 편의점의 점주였다. 인혁이 사무실에서 일하라고 허락해 줬고, 돈도 준다고 했으니 이젠 야간 아르바이트를 구할 이유가 없어졌다. 전화를 받아 일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되는데.

“받아, 눈치 보지 말고.”

인혁이 손짓했다.

“아, 네.”

수민은 몸을 반대로 돌리고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오수민 씨 맞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아, 예. 저기…….”

-편의점 일하려면 빠릿빠릿해야 하는데 내가 가끔 전화해도 바로 받고. 어?

“저기요, 죄송한데요.”

-내가 원래 야간엔 오메가 안 쓰는데 사정이 좀 급하기도 하고 오수민 씨 얼굴 봐서 한 번 써보기로 했지만.

면접 볼 때도 느꼈지만 이 점주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스피커폰으로 돌린 것도 아닌데 통화 목소리가 차 안에 쨍하게 울려 퍼졌다. 수민은 당황했다.

“어, 잠시만요. 저기요?”

면접만 본 거고, 하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수민이 말을 하려고 했으나 점주가 듣질 않았다.

-원래 편의점 일은 수습 기간 있는 거 알죠? 일단 6개월로 하고, 시급은 70%만 줄게요. 일 배워야 하니까. 그리고 지각하거나 갑자기 일 빠지는 날은 5만 원씩 뺄 거고.

“씨발, 뭐라고?”

-뭐라고요? 오수민 씨, 지금 나한테 씨발이라고?

“아니요. 제가 아니라.”

“그래, 씨발. 이 씨발새끼야. 너 뭐야?”

옆에서 손이 뻗어 나와 핸드폰을 채갔다. 수민이 놀랄 만큼 빨랐다.

수민은 제 핸드폰을 부술 듯 움켜쥔 인혁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다.

“넌 그런 얼굴을 하고 이딴 개소리를 가만 듣고 있어? 제정신이야?”

인혁이 다그치듯 말했다. 수민은 놀라 눈만 깜빡였다.

오래 본 사이는 아니지만, 고작 며칠 본 게 다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아니, 이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뭐 이 새끼야? 너 뭔데 나한테 씨발이야. 씨발이. 너 누구야!

“씨발, 니 개잡소리 얌전히 들어 주고 있던 순진한 애새끼 보호자다. 왜.”

-뭐? 어, 오수민 씨는 고아라고 했는데?

“고아? 씨발, 애가 고아든 아빠가 멀쩡히 살아 있든, 그게 뭔 상관인데. 그리고 새끼야, 설령 고아라도 그래. 고아니까 수습 6개월에 시급 70%만 줘? 지각하면 거기에 5만 원을 깎아? 씨발, 알바를 왜 뽑아. 니 편의점 니가 그 시급 받아 가면서 24시간 카운터 보다 뒈지던가 하지.”

-아니, 근데 이 사람이. 뭔데 자꾸 새끼 새끼하고-.

“귓구멍이 틀어 막혔나? 오수민 보호자라고 하잖아. 넌 씨발. 니 새끼가 그딴 개소리 듣고 있으면 안 돌 거 같아?”

-아니, 근데 이 사람이…….

“너 지금 이 대화 다 녹음되고 있어. 내가 바로 노동청이랑 구청, 시청 아주 온갖 데다가 다 신고 넣을 테니까. 기대해. 아, 나 하는 일이 좀 그래서 기자들도 제법 아는데. 왜? 연락 돌려 줄까? 저녁 뉴스에 악덕 점주로 한 번 출연시켜 줘? 그동안 인생을 너무 편하게 살았지? 심심했지? 모자이크 처리한다고 너랑 니 편의점, 사람들이 못 알아볼 거 같아? 본사가 널 지켜 줄 거 같냐고. 이미지 깎아 먹었다고 고소나 안 당하면 다행일 거 같은데. 어? 한 번 해봐? 인생 버라이어티하게 만들어 줘?”

-아, 아니, 저기 선생님? 너무 흥분하신 거 같은데. 일단 좀 진정하시고. 말로, 말로 하시죠.

“말로 뭐 새끼야. 너 가만 기다리고 있어. 니 인생 아주 재미있어질 테니까.”

-저기요? 저기, 잠깐. 잠깐만요!

뚝.

인혁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차 시트에 내동댕이쳤다.

“씨발놈.”

그러고도 성이 가라앉지 않는지 이를 갈다가, 내동댕이친 핸드폰이 제 것이 아닌 걸 뒤늦게 깨닫고는 핸드폰을 주워 깨진 곳은 없나 살폈다. 그런 다음 수민에게 내밀었다.

“아, 감사합…….”

“감사하긴 뭐가 감사해.”

“…….”

수민이 인사하다 말고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더 힘을 주어 핸드폰을 잡아당겼다.

핸드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혁이 핸드폰 끝을 쥐고 놔주지 않았으니까.

“너. 방금 전화 뭐야.”

“…….”

“눈 들어. 나 똑바로 보고 말해.”

“…….”

수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 굴리지 마라. 있는 그대로 말해.”

“저, 그게, 평일 야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려고…….”

“아르바이트? 이딴 데서? 너 수습 기간에 시급 깎는 거 불법인 줄 알아, 몰라?”

몰랐다.

“그렇게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어? 이딴 데 면접 보러 다닐 만큼?”

자리가 없는 건 아닌데. 다른 데도 면접을 보고, 이력서를 보고 나면 다들 그렇게들 말했다.

“너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면서. 아니었어?”

역시. 이 말을 할 줄 알았다.

“뭐야, 다른 데서 일하고 싶다면 이딴 데 말고 우리 사무실도 말고, 좀 더 편히 일할 만한 곳을-.”

“아니요, 아니에요.”

수민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 정말 아니에요. 그냥, 생활비만 벌 생각으로 면접 봤던 거고, 전 연구소에서 일하고 싶어요. 일할 거예요. 여기 있을 거예요.”

수민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혹시라도 인혁이 일하러 오지 말라고 할까 봐 마음이 급했다. 겨우 손에 잡힐 거 같은데, 승원이라는 애처럼 놓칠 수 없었다. 놓쳐서는 안 됐다.

수민은 핸드폰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그래. 그런 거라면…….”

인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서 힘을 뺐다. 그대로 핸드폰이 수민의 손으로 넘어갔다. 수민이 다행이다, 안도하려는 찰나.

“아니, 잠깐.”

인혁이 수민의 손을 낚아챘다. 핸드폰이 다시 차 시트로 떨어졌다.

“뭐? 생활비 벌려고 알바를 구해? 너, 진짜로 돈 안 받고 일할 생각이었어? 우리 사무실에서?”

“…….”

“고개 들어.”

“…….”

“눈 안 들어? 나 봐. 오수민. 니 이름 오수민 맞지.”

“네.”

“너 진짜 내가 너 월급도 안 주고 부려 먹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인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드드득- 수민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인혁과 수민은 동시에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SH 편의점 주말 야간」

인혁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수민은 핸드폰을 잡으려 했지만, 인혁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보세요. 오수민이 핸드폰입니다.”

인혁이 핸드폰을 어깨에 대고 받았다. 이번 점주는 목소리가 크지 않아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아, 아, 예. 그쪽은 그래도 양심이 있네. 아, 아니요. 별말 안 했습니다. 그리고 죄송하게 됐습니다. 수민이가 취직을 해서 일하기 어렵게 됐네요. 예, 예에, 예. 수고하십시오.”

인혁이 전화를 끊고 수민을 봤다.

“취직, 축하한다네?”

핸드폰을 까딱이며 말하는 모습이 핀을 뽑은 수류탄처럼 보였다.

“저런. 수민이 학생 장고 끝에 악수를 뒀네. 하필 김 소장 앞에서 무급 소릴 하다니.”

앞에서 박 씨가 혀를 끌끌 차며 핸들을 돌렸다. 서 여사가 옆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어디 면접 봤어. 말해.”

“…….”

“네가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기 싫구나.”

“없어요.”

“거짓말하지 말고.”

“정말이에요. 면접 보기로 한 곳이 두 곳 더 있긴 한데…….”

“야간?”

“네.”

“전화해.”

인혁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면접 못 갈 것 같다고, 일할 곳 정해졌다고 말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생각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전화해. 나도 너 월급 주기로 한 거 생각만 하지 않고 진짜 줄 거니까.”

“…….”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밤새는 일 구하지 마. 돈 좀 덜 받아도 낮에 일해. 젊어서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고. 네 몸과 건강을 아끼란 말이야.”

인혁이 수민의 손을 놓아주었다. 수민은 얼얼한 손목을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혁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수민은 눈치를 보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전화.”

인혁이 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

수민은 차 안에서 면접이 예정된 두 곳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수민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근로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보고 서명해.”

“네. 근데…….”

수민은 종이에 쓰인 숫자를 보고 당황했다. 월 급여가 십 원 단위까지 명시되어 있었는데.

“너무, 많은 거 같은데요.”

전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은 것보다 세 배 이상 많았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던 수민이 보기에도 너무 큰 돈이었다.

“뭐가 많아. 하나도 안 많아.”

인혁은 뭔 소릴 하냐는 듯 수민을 보았다. 그 바람에 수민은 자신이 최저 시급을 잘못 알고 있나 순간 헷갈렸다.

“…….”

이상하다. 수민이 고개를 갸웃 저었다.

“얼른 사인 안 해?”

“아, 네.”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민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펜을 들었다. 계약서에 막 사인하려는데.

“하란다고 하니?”

인혁이 손으로 계약서를 가렸다. 하마터면 인혁의 손등을 펜으로 찍을 뻔했다. 수민은 얼른 볼펜을 거둬들이며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수민아. 짜증 나?”

“…….”

솔직히 좀 그랬다. 하래서 하려고 했더니 왜 하냐고 혼내다니. 김인혁은 일관성 없는 사람인 걸까?

“뭘 잘했다고 그렇게 봐. 신체 포기 각서를 들이밀어도, 사인하라고 소리치면 그냥 사인할 거야?”

“……이건 신체 포기 각서가 아니잖아요.”

“뭐가 달라. 돈 몇 푼에 니 인생, 하루에 1/3 이상을 저당 잡히는 건데.”

“…….”

“자세히 봐야지. 꼼꼼히 읽어 보고 모르겠는 건 물어봐야지. 아니다 싶은 건 왜 이러냐고 따져야지. 고쳐 달라고 하고. 최소한 네가 무슨 내용에 사인하는지는 알고 사인해야지.”

혼내듯 매섭던 목소리가 점차 누그러졌다. 아이를 가르치듯 말하는 목소리에, 반발심이 치밀었던 수민의 마음도 금세 가라앉았다.

“눈 뜨고 코 베일 녀석. 그간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았니. 잘생긴 코가 성한 게 용하다.”

“…….”

“그렇게 쳐다보지 마. 불쌍해서 화날 것도 안 날 거 같으니까.”

여태 화낼 거 다 냈으면서.

“그럼 더더욱 이렇게 눈 뜨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더 안 혼나려면요.”

“말은 잘하네. 그래, 어디 가서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그래. 개같은 소리 가만 듣고 있지만 말고.”

오히려 잘한다, 잘한다, 추켜세우니 아이가 제 주제를 모르고 자꾸만 욕심내게 되는 것 아닌가.

“자꾸 절 어디로 보내려고 하시네요.”

“그럼 평생 여기 다닐래?”

“네.”

“꿈 깨. 나중에 여기보다 더 좋은 데, 니가 진짜 하고 싶은 일 찾아가야지.”

“…….”

“대답.”

“…….”

“짜식, 고집은 있어 가지고.”

인혁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일단 여기, 집중해서 봐봐.”

인혁이 근로 계약서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 가며 이게 무슨 뜻인지, 혹시 나중에 다른 곳에 가서 이런 서류에 사인할 때 뭘 조심해야 하는지.

수민은 인혁의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길고 굵고, 마디지고. 여기저기 상처 자국이 나 있고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

“잘 듣고 있어?”

“……네.”

“잘 들어 둬. 두 번 설명은 안 한다.”

“그럼 지금 다시 한번 설명해 주세요.”

“제대로 안 듣고 있었네.”

“그건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냐.”

인혁은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꾹 눌렀다.

“이 부분 중요하니까. 잘 들어 둬. 딴 데서 말장난 많이 치는 부분이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고용 계약서 한 장을 가지고 한 시간 가까이 머리를 맞댔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저거 또 또 저런다며 웃다가 멈칫했다. 아직 승원이 마음에 무거운 돌로 얹혀있어 마음 편히 웃을 수 없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질문하고. 없으면 여기에 네 주소, 연락처 쓰고 사인해. 이름은 내가 적어 놨어. 오수민.”

“네.”

“내일 등본이랑 통장 사본 가져와서 서 여사님께 드려. 그러면 그쪽으로 월급 입금될 거다. 질문 있어?”

“아니요.”

“그럼 여기에 주소랑 연락처 적어.”

“네.”

수민은 핸드폰으로 제가 사는 고시원의 이름을 검색했다. 자주 옮겨 다니는 터라 짐을 푼 고시원 주소를 굳이 찾아 외우지 않았더랬다.

수민이 핸드폰을 보며 주소를 또박또박 적자 인혁이 힐끗 보았다. 사무실 가까운 데 사나 먼 데 사나 확인하려던 것이었는데. 주소를 확인한 인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두고ON 고시원? 너 여기 살아?”

“네.”

“이런 미친.”

“네?”

어제에 이어 오늘 또 욕을 들었다. 왜? 수민은 핸드폰 번호를 적다 말고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다 썼지. 일단, 얼른 사인해.”

“네, 다 했어요.”

“그럼 당장 일어나. 옷 입고. 서 여사님, 박 계장님. 나 얘랑 나갔다 옵니다. 오후 늦게나 들어올 테니까, 늦으면 알아서들 퇴근하시고. 연락할 거 있으면 전화 주고.”

인혁이 수민을 집어 들다시피 하여 데리고 나갔다. 어어? 수민은 당황하여 끌려 나가며 서 여사와 박 씨를 보았다. 두 사람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밥은 얻어먹고 다녀요, 수민 학생.”

“그래, 밥은 꼭 먹어.”

“……?”

이해할 수 없는 배웅이었다.

인혁에게 떠밀리듯 차에 올라타 도착한 곳은 수민이 등록한 고시원이었다.

“여기는 왜…….”

“이런.”

인혁은 낡은 건물, 더 낡은 고시원 입구를 보며 혀를 찼다.

“진짜 여기 산다고?”

“네.”

“당장 짐 챙겨 들고 나와.”

“네?”

“네는 무슨 네야, 얼른.”

“어…….”

수민은 인혁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어 머뭇거렸다.

“말 안 들려? 왜 가만히 있어.”

“어, 저기.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서들 싸우시면 안, 아. 안녕하세요.”

안까지 소리가 들렸는지 졸린 눈의 총무가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그가 수민을 알아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수민도 얼결에 고개를 숙였다.

인혁이 총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알파?”

“저요? 아, 네. 그쪽은, 아, 그쪽도 베탄가 보네요.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좀 알파처럼 생겼나 보죠?”

총무가 으스대듯 말했다. 눈이 덜 졸려 보였다.

“그쪽도?”

“예. 그쪽도 여기 분도 베타잖아요.”

“아아, 베타.”

인혁이 알 만하다는 듯 수민을 보았다. 수민은 눈을 내리깔았다. 속이려고 한 게 아닌데. 오해를 받게 되었다.

뺨에 와 박히는 시선이 따가웠다.

“여기 이분 형, 님이신가요? 우리 고시원은 외부인 출입 금지이긴 한데. 가족은 뭐 가족이니까. 그런데 너무 시끄럽게 구시면 곤란합니다. 아시잖아요, 전에 난리 난 거.”

“아, 예.”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른 분들이 예민하시니까.”

“난리?”

인혁이 끼어들었다.

“아, 사실은요. 그게 하하, 별일은 아닌데.”

총무가 별일을 주저리주저리 말했다. 수민은 그의 목을 비틀어서라도 입을 틀어막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13호 방에서 오메가 애인을 데리고 와 떡을 쳤다. 그 바람에 양옆에 사는 알파들이 덩달아 발정 나 벽을 두드리고 문을 부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고시원은 베타랑 알파뿐이라 다른 곳처럼 불의의 사고 같은 건 없는 편이다.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시설이면 무난한 거 아니냐. 주로 막일하시는 분들이 좀 오는데, 동생 분 같은 분이 와서 사실 좀 놀라긴 했다. 어디 대학생이냐. 돈 좀 더 내면 외창 방, 사흘 후에 한 곳 비니까 옮겨 줄 수 있다.

“그러니까, 창도 없는, 샤워실 옆방에서 살고 있다? 여기엔 알파랑 베타만 사는 고시원이고?”

총무의 말을 듣고 있던 인혁이 이게 뭔 개소리냐는 눈으로 수민을 돌아보았다.

“속이진 않았어요. 안 물어봐서…….”

수민은 눈치를 보다가 인혁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신분증 검사도 안 하고 방을 내줘? 그런 데서 살았다고?”

“말 안 하면 다들 몰라서요. 지금까지 알아챈 건, 어…….”

“뭐, 나밖에 없었다고?”

“네.”

“그걸 말이라고!”

인혁이 욱해서 언성을 높이자, 한참 자기 말에 취해 있던 총무가 “예?”하고 되물었다.

“아니, 됐고. 얘 오늘 방 뺍니다. 남은 돈 환불해 주세요. 하아, 넌 얼른 가서 짐 정리해 나와.”

“예? 갑자기 왜요? 이렇게 갑자기 방 빼면 위약금이 커서 돈 거의 못 돌려받으실 텐데. 뭐, 불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방 옮기는 거나 뭐, 그런 건 최대한 맞춰 드릴 테니까요.”

“아뇨. 얘 오늘 방 뺍니다. 그리고 위약금? 그건 이제부터 나랑 이야기해 보시고. 법대로.”

인혁이 싸하게 웃었다.

총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걸 보니 어쩐지 잘못 걸린 거 같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그 비슷한 생각을 수민도 하고 있었기에,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수민이 짐을 정리해 나왔을 때, 총무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인혁은 그 옆에서 만 원짜리 현금 뭉치를 손에 들고 악당처럼 웃고 있었다. 수민이 본 중 가장 의욕 넘치는 모습이었다.

“짐은 이게 다야?”

“네.”

“이리 줘.”

“아니요, 제가 들게요.”

“왜? 안에 금덩이라도 들었어? 내가 훔쳐 갈까 봐?”

“그런 건 아닌데.”

“아니면 내놔. 지 몸 하나도 못 가누게 생겨서는.”

인혁이 쯧, 혀를 차며 수민의 백팩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

수민은 넋 나간 총무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인혁을 쫓았다.

인혁이 크로스백을 차 뒷좌석에 던져 놓고 운전석에 앉았다. 수민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총무에게 되돌려 받은 돈을 건네주곤 핸드폰 주소록을 훑었다.

“아까 너 오메가인 거 알아본 사람 나밖에 없었다고 말하려 했던 거 맞니?”

핸드폰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인혁이 툭 던지듯 물었다.

“네.”

“근데 왜 말을 하다 말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요. 소장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왜 소장 아니면 아빠라고 부르게?”

별생각 없이 되묻던 인혁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장례식장 흡연 장소에서 제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소장이라고 불러, 이젠 니 소장 맞으니까.”

인혁이 수민의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여보세요, 우수한 부동산입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장사 접었어? 망했어?”

인혁이 핸들 위에 엎드리듯 팔을 걸고 말했다. 수민은 까치집이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귀를 기울였다.

-아, 김 소장. 우리 김 소장 거 관리하면서 나한테 떨어지는 게 얼만데 망하긴 왜 망해. 오래오래 해먹고 내 딸한테도 물려줄 거니까. 김 소장도 일찍 죽지 말고 오래 살아야 돼. 알았지. 그나저나 방금은 손님 계셔서 전활 못 받았는데 무슨 일이야.

“지금 어디 빈 데 있나 해서. 남자애가 혼자 살 만한 데 찾는데.”

인혁이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상대편이 하는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런 데 말고. 좀 안전한데. 다른 데 말고 내가 맡긴 거 중에, 그래. 응. 거기 빈 데 있어? 왜긴, 말했잖아. 들어갈 사람 있다고. 507호? 알았어, 어? 임대 계약서 쓰러 온다고? 돈에 환장했나, 됐어. 또는 무슨. 아무튼 거기 오늘부터 사람 사니까 매물 내리고. 언제까지? 모르지. 암튼 내가 말할 때까지 빼놔. 그래, 다음에 보자고. 어. 술 안 마셔, 밥 한 번 살게. 수고 좀 해줘.”

인혁은 통화를 마친 뒤 내비게이션을 켜고 주소를 입력했다.

“안전벨트 매고.”

“네.”

운전해 도착한 곳은 근처의 아파트 단지였다. 연식이 좀 되어 보이는 곳이었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아파트 입구 쪽 작은 상가 건물에 학원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건물에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매달리는 게 보였다.

둘은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208동 507호로 갔다. 인혁은 문 앞에서 부동산에 한 번 더 전화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나중에, 아니, 오늘 당장 바꿔. 귀찮다고 짧게 바꾸지 말고 최대한 길게.”

인혁은 신발장을 열어 카드키와 비밀번호 바꾸는 법이 적힌 안내서를 꺼내 수민의 손에 들려 주었다. 어깨에 둘러멨던 수민의 백팩은 바닥에 내려놓았다.

수민은 현관에 서서 멀뚱멀뚱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거실, 화장실 하나, 방 두 개, 주방. 베란다도 있었다. 고시원 방보다 열 배, 아니, 그 이상 넓어 보였다.

베란다로 통하는 거실의 큰 창에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불을 켜지 않아도 집 안이 환했다. 눅눅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혁은 굳이 불을 다 켜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각 방과 화장실 문도 다 열어 안을 확인했다.

“여기서 지내. 혼자 살기엔 그럭저럭 괜찮을 거야.”

그럭저럭?

“이건 좀…….”

수민은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인혁이 고시원 방을 빼라고 했을 때부터 그가 살 곳을 구해 주려 한다는 걸 예상은 했다. 하지만 공익 생활을 마치고 머물렀던 원룸 정도를 생각했건만. 설마 아파트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왜 좁아? 하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답답한 거 싫어하지?”

인혁이 핸드폰을 들었다. 수민의 머뭇거림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수민은 재빨리 신발을 벗고 인혁에게 다가갔다. 다시 부동산에 전화를 걸기 전에 핸드폰을 뺏을 생각이었다.

수민이 손을 뻗자.

“어딜.”

인혁이 슬쩍 뒤로 물러나며 웃음 지었다.

분명 웃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중심을 잃었다. 비틀거리자 인혁이 한 손으로 가볍게 수민의 허리를 감싸 지탱했다. 잠깐이지만 인혁의 품에 안겼다. 수민은 숨 쉬는 걸 잊었다.

“조심해, 넘어져서 다칠라.”

인혁이 수민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바로 허리를 놓아주고 뒤로 물러섰다. 얼굴이 살짝 굳어 있었다.

페로몬 거부증.

수민은 서 여사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인혁에게 붙잡혔던 허리 왼쪽 부분, 골반 근처가 욱신 아려 왔다.

“여긴 침실로 쓰고 저 방은 옷방으로 쓰든지 공부방으로 쓰든지 해. 여기 주소, 잘 외워 놓고.”

인혁이 수민의 핸드폰에 집 주소를 적어 주었다.

“대충 봤으니까 나가자. 나중에 혼자 꼼꼼히 둘러보고. 뭐 이상하거나 고쳐야 할 곳 있으면 나한테 말하…… 아니다. 내가 언제 한 번 와서 둘러볼 테니까, 그때 보자. 고칠 데 있는지.”

인혁이 다시 수민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현관 앞에 덜렁 놓인 백팩이 두 사람을 배웅해 줬다.

“인터넷으로 해도 된다는데, 어차피 한 바퀴 돌아야 하니까 그냥 신청하고 가자. 밥도 먹고.”

집주인은 어딘가로 가는 도중 관공서에 들렀다. 거기서 전입 신고를 마치고, 주민 등록 등본을 뽑게 했다. 세입자는 제 이름만 달랑 적힌 등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등본에 적힌 주소를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좀 멀리 나가 한정식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수민은 수십 가지나 되는 반찬이 신기해 하나씩 먹어 보았다. 다만 척 봐도 매워 보이는 것, 빨간 양념으로 범벅되어 있는 건 손도 대지 않았다.

“입맛이 나랑 비슷한가 보네.”

인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하얗게 무친 나물을 동시에 집어 먹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얗게 무친 게 왜 매워. 이건 반칙이잖아.”

“그러게요.”

수민이 기침하며 대답했다.

“너 붕어 됐다.”

인혁이 수민의 입술이 부은 걸 보며 놀렸다. 수민은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인혁을 째려보며 물을 한가득 입에 물었다. 수민을 놀리던 인혁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동치미 국물에 손을 댔다.

“소장님은 물 먹는 하마 같아요.”

수민이 동치미를 벌컥 들이켜는 인혁을 보며 분한 듯 말했다.

“뭐, 임마?”

“물 먹는 하마요.”

“내가 못 알아들어서 다시 물은 거 같니?”

“아닌 거 알아요.”

“근데.”

“물 먹는 하마 같다구요, 소장님.”

“어쭈.”

“매워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물 주전자에 손을 뻗었다. 티격태격하며 서로의 물잔을 먼저 채우려 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 반찬에 손을 대지 않았다.

밥으로 배를 채운 건지 물로 배를 채운 건지 모를 식사를 마친 후, 인혁이 카운터에서 받은 캐러멜을 수민에게 던졌다.

제법 멀리에서 던졌는데도 수민은 날렵하게 잡아챘다. 인혁이 감탄하며 말했다.

“제법인데. 나중에 같이 캐치볼 할까?”

“…….”

쑥스러운 듯 웃으려다 멈칫한 수민은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아직도 매운 기가 남은 거 같은 혀를 캐러멜로 달래며 차에 올라탔다.

굳이 멀리 떨어진 한정식집까지 온 이유가 있었다. 인혁은 곧바로 근처의 대형 전자샵으로 갔다.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훈기가 확- 몰려들었다.

“실평 15평 정도 되는 거 같은데. 거기 맞춰서 잡아 줘 봐요. 쓸 만한 거로다가. 아, 여기 얘가 쓸 거니까. 젊은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거로.”

인혁은 저흴 반갑게 맞이하는 직원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친절히 웃고 있던 직원은 더욱 환히 미소 지었다.

“형님, 아니, 아버님이신가요? 아버님이시라기엔 너무 젊으신 거 같은데. 엄청 일찍 결혼하셨나 봅니다. 전 아직인데. 아, 부럽습니다. 벌써 이만한 아드님이 있으시다니.”

직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인혁과 수민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많이 닮았나?”

인혁이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버님 잘생긴 외모를 아주 빼다 박았는데요, 뭘. 연예인 두 분이 들어오시나 했습니다. 오늘 어디 촬영 협조 요청 들어온 곳도 없는데 무슨 일인가 했지요.”

“이 사람, 장사 잘하시네. 내가 좀 결혼을 일찍 하긴 했지. 스물셋에 애 아빠가 됐으니까.”

인혁이 싫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 저기.”

두 사람을 졸졸 따라가던 수민이 인혁의 코트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왜.”

“왜 그러세요. 뭐 마음에 드는 게 있으신가요?”

인혁과 직원이 동시에 수민을 돌아보았다. 수민은 눈을 굴리며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숫기 없기는.”

인혁이 웃으며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드님 자취방을 꾸미러 오신 건가요? 혹시 대학 합격해서 학교 근처에서 처음 자취하시는? 풀옵션 오피스텔 말고 그냥 아파트나 오피스텔을 얻으셨나 봐요?”

“뭐, 그 비슷한 거라 생각하시고. 아니, 그렇다 치고. 뭐가 하나도 없어서 다 채워야 하는 건 맞으니까. 잘 좀 맞춰 줘 봐요.”

“아우, 그럼요. 일단 TV,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청소기, 건조기에 그리고 컴퓨터는 기본인데. 요즘은 거진 노트북으로 쓰시니까, 저희도 요즘 새 학기 맞이 이벤트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기도 해서, 노트북으로 권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요즘 성능이 워낙 좋아서 노트북으로도 웬만한 게임은 다 됩니다. 아, 대학생이면 탭도 하나 따로 있어야 공부하기 수월하시죠. 이건 제가 최대한 할인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공기 청정기가 필수니까 이것도, 아, 네. 이것도 한 번 보시고. 그리고 요즘 신혼살림 필수품으로 알아주는 건데, 젊은 분들도 많이 쓰시더라구요, 스타일러. 일단 한 번 사신 분들의 만족도가 엄청 높습니다. 어디 고기집 가서 친구들이랑 술 한잔하고 들어와도, 여기에 옷 딱 넣어 놓으면 알아서 냄새가 다 빠지니까 다음 날 바로 입어도 되고요.”

직원이 인혁의 표정을 살피며 가전을 하나하나 추가해 갔다.

잘 모르는 수민이 듣기에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구매 목록이 길어졌다. 직원마저 추가하면서 슬쩍 눈치를 봤건만. 인혁만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러냐, 그럼 그것도 넣어라. 이왕이면 1등급으로, 비싸도 좋은 거로, 최신형이면 그걸로. 수민보다 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공기 청정기에 스타일러? 광고로나 보던 걸 왜 사는지 알 수 없었다. 인덕션? 수민은 그 아파트에 가스레인지가 설치되어 있는 걸 두 눈으로 똑똑이 보았다.

인혁은 에어 프라이어와 밥솥, 김치 냉장고까지 추가해 나갔다. 수민은 여러 번 인혁의 옷소매를 잡고 고개를 흔들었으나 인혁은 갑자기 눈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왜, 딴 거로 사고 싶어? 65인치는 너무 작나?”

“아니요, 그게 아니라, 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그런 말 하려면 가만히 있어.”

“그럼요, 아드님. 아버님 말씀대로 하세요. 가전은 한 번 사면 진짜 오래 쓰니까. 아버님 말씀처럼 살 때 좋은 걸로다가 장만하는 게 백번 천번 낫습니다. 1, 2년 쓰고 말 거 아니잖아요. 여기서 취직도 하고 계속 사셔야죠. 이렇게 좋은 거로다가 사서 쓰시다가 나중에 결혼하실 때 혼수 할 땐 바꾸시면 됩니다. 자신하건대 고장 없이 쭉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아, 물론 고장 나도 AS 완벽하게 될 거고요. 저희 브랜드 아시잖아요, AS 끝내주는 거.”

직원의 말을 들으며 인혁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보자 수민은 더는 인혁을 말릴 수 없었다.

인혁은 수민이 살 집의 살림살이를 채워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인혁의 옆에 앉아 있는 것도 분명 수민이었다. 하지만 직원의 말을 듣고 웃는 인혁은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인혁의 옆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인혁의 눈에만 보였다.

아드님 자취방을 채우러 오셨냐는 직원의 물음에 아니라고 답하지 않은 건 수민과의 관계를 달리 설명하기 귀찮고 애매해서이기도 하지만, 직원의 입담으로 만들어진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인혁의 눈매가 휘어졌다. 지친 눈동자에 어리는 마약 같은 기쁨의 순간을, 수민은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최고로 좋은 것들로만 사서 아들의 첫 시작을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 그럴 수 있는 현실. 인혁은 그 조합으로 꾸며진 망상에 푹 빠져 있었다. 나아가 제가 사준 가전을 쓰며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아들이 결혼하겠다며 배우자감을 데려오는 모습까지 상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 돼서 많이 낡아 버린 가전들을 둘러보며 세월의 흐름을 뿌듯해 할 수만 있다면. 훌쩍 자란 아들과 아들의 배우자가 새 가전으로 신혼집을 꾸미는 걸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한 환각의 끝을 언제나 냉혹한 현실과의 직면이었다.

“고객님? 고객님. 괜찮으신가요?”

직원의 목소리가 인혁을 현실로 끌어냈다.

“…….”

인혁은 잠에서 깬 듯 눈을 깜박였다.

“고객님?”

“괜찮, 습니다. 좀 피곤해서. 그건 방금 말한 대로, 그렇게 해주시죠.”

인혁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떴다. 수민은 그런 인혁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인혁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직원과 열띤 토론을 이어 나갔다. 둘의 합작으로 긴 구매 목록이 완성되었다. 곧바로 수민의 눈앞에서 카드가 오갔다. 몇천만 원짜리 영수증이 무성의하게 구겨져 인혁의 코트 안쪽으로 사라졌다.

“안녕히 가십쇼. 감싸합니다!”

두 사람은 직원의 진심 어린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이제 그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수민은 벨트를 매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해도 체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피곤했다.

“벌써 지쳤어?”

“네, 아니, 아니요. 제가 뭘 했다구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힘내라.”

“…….”

힘내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인혁은 수민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갔다.

그동안 고시원이나 적당히 옵션이 있는 원룸에서 살아왔던 수민은, 적당한 크기의 빈집을 사람 살 만하게 채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릇과 주방 도구 등 온갖 걸 샀다. 당장 급한 이불도 샀다. 인혁은 책상과 책장을 살 때 가장 공을 들였다. 형제냐고 묻는 직원에게 아버지와 아들 같아 보이진 않냐고 되묻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침대를 살 땐 수민의 취향을 존중해 주는 아량을 보였다. 방금 옆의 매장에서 제일 비싼 제품을 일시불로 산 아버지와 아들이 자신의 매장으로 들어오자, 점원은 가장 비싼 침대를 팔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멀뚱히 서서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수민은 점원에게 붙잡혀 이 침대 저 침대를 굴러다녀야 했다.

엄청 푹신푹신한 매트리스도 있었고, 조금 딱딱한 매트리스도 있었다. 후자가 편한 것 같아 그걸 고르니.

“그것도 나랑 비슷하네.”

인혁이 흐뭇해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가기 마련이지요.”

점원이 카드를 긁으며 방긋 웃었다.

백화점을 싹 쓸고 나오니 밖이 어둑했다.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벽에 고시원에 돌아갈 때보다 더 고단했다.

“가자.”

인혁이 침구 세트를 차 뒷좌석에 실었다. 당장 오늘 밤 써야 하니, 침구 세트만 챙겨 들고 온 것이었다. 수민은 기어오르듯 보조석에 올라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젊은 것이 웬 한숨이야.”

“그러게요…….”

“속이 비어서 그래. 밥 먹고 가자.”

두 사람은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갈비탕을 먹었다. 인혁은 갈비탕을 포장해 수민의 손에 들려 주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집에 아직 이걸 끓여 먹을 도구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일단 베란다에 내놓고 내일 봐서 상했으면 그냥 버려.”

3만 원짜리 갈비탕을 버리라고? 수민은 혼란을 느꼈다. 3만 원이면 수민의 일주일 식비였다.

“상한 거 먹지 마라. 그냥 버리면 돼.”

“겨울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확인하고 먹어.”

인혁은 당부하며 수민을 아파트 단지 앞에 내려 주었다.

“들고 올라갈 수 있지?”

“네.”

“그래, 추우니까 이불 잘 덮고 자라. 내일 보자.”

“네, 조심히 가세요.”

수민은 양손에 갈비탕과 침구 세트를 들고 꾸벅 인사했다. 인혁은 얼른 들어가라며 손짓하고는 수민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다음 출발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수민은 문득 서운해졌다. 그리고 서운함을 느끼는 자신에게 놀랐다.

수민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갈비탕과 침구 세트. 제법 묵직했지만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인혁이 이걸 들여다 주지 않은 게 서운했다. 고시원에서는 이거보다 훨씬 가벼운 백팩도 내놓으라고 뺏어가 들어 줬으면서.

오늘 하루, 저를 위해 수천만 원을 쓴 사람에게 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다니.

이렇게 배은망덕해도 되는 건가?

띵-.

수민은 반성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507호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훈기가 몰려나오며 수민을 반겼다. 낮에 왔을 땐 분명 빈집 특유의 싸늘함이 감돌았건만, 이젠 따뜻했다.

수민은 불을 켜고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창문이 닫혀 있고, 보일러가 돌아가고 있었다.

“언제…….”

수민은 인혁이 저보다 조금 늦게 집에서 나왔던 걸 떠올렸다. 조금 전 집 앞에서 느꼈던 서운함이 훈기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민은 짐을 내려놓고 베란다로 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하게도 인혁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민은 뺨이 차갑게 얼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까만 밤. 하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네모난 창들. 옅은 TV 소리와 아이가 우는 소리. 함께 웃는 소리. 아파트 단지 내 도로는 조용하고 까맸다. 수민은 오래도록 그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뒤에야 수민은 창문을 닫고, 포장된 갈비탕을 베란다에 내놓고 거실 구석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불은 끄지 않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려 잠들었다.

***

수민은 일찍 일어나 이불을 개고 씻었다. 백팩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고, 핸드폰으로 이곳에서 사무실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다. 차를 타고 오는 길에 눈으로 익혀 두었으나 다시 확인했다.

그즈음 인혁에게서 문자가 왔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라 열어보지 않으려 했는데 문자 내용 앞부분이 떠서 인혁의 문자인 줄 알았다.

「니 소장이다.

출근하지 말고 기다려.」

수민은 인혁의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고 벽에 기대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26분 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수민은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인혁이 흠칫 놀라며 뒤로 반 발자국 물러섰다.

“깜짝이야. 나인지 확인하고 문 연 거지?”

“…….”

수민은 눈을 내리깔았다. 인혁은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왔다. 수민은 가지런히 놓인 인혁의 구두 옆에 제 운동화를 나란히 놓고 따라 들어갔다.

“아무나 벌컥벌컥 문 열어 주지 마.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소장님은 아무나가 아니잖아요.”

“아무나라고 생각하고 일단 의심부터 해.”

“왜 오셨어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인혁이 수민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리곤 물기 묻은 머리카락이 손에 감기는 걸 느끼곤 물었다.

“씻었어?”

“네.”

“부지런하네. 다음부터는 머리 잘 말려라.”

어제 헤어드라이어를 샀던가. 인혁의 혼잣말에 수민은 괜히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인혁이 피식 웃으며 손에 든 봉지를 들어 보였다.

“일단 밥부터 먹자.”

콩나물 해장국이었다. 밥과 김치도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바닥에 음식을 펴고 이른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국물이 담백하고 개운했다. 술도 안 먹었는데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먹을 만하니?”

“네.”

수민이 입 안에 콩나물을 가득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혁이 웃음 지었다.

“그래, 많이 먹어.”

“소장님도요.”

“오냐.”

두 사람은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자리를 정리했다.

일회용기를 깨끗이 씻어 싱크대 위에 넣어 둔 인혁이 멀뚱멀뚱하게 절 보고 있는 수민에게 말했다.

“너 통장 있지.”

“네.”

“가져와 봐.”

“네.”

수민이 백팩에서 통장과 체크카드를 찾아 인혁의 앞에 내려놓았다.

“가져오란다고 진짜 가져와?”

인혁이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

수민은 어제 느꼈던 억울함을 다시 느꼈다. 왜 이 사람은 뭔가를 하라고 하고, 왜 그걸 하냐고 화내는 걸까. 앞으로는 시키는 일을 정반대로 해야 하는 걸까?

“고개 들어, 혼내는 거 아니니까.”

“그러면요?”

“다음부터는 누가 통장 보여 달라고 해도 함부로 가져다주지 마.”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래요.”

수민은 잠깐 고민하다 다시 말했다.

“안 그랬어요.”

대놓고 보여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잘도 그랬겠다.”

“진짜예요. 그리고 소장님이 아무나는 아니잖아요.”

“내가 뭔데? 너 나 본 지 일주일도 안 됐어.”

“…….”

“근데 이거 왜 이러니?”

인혁이 수민의 통장을 팔랑팔랑 넘겨 보더니 또 인상을 썼다. 역시 시키는 일을 정반대로 해야 했던 걸까? 가져오라고 했을 때 가져오지 말아야 했을지도.

“왜요?”

“돈 다 어디 갔어. 알바비. 보니까 꼬박꼬박 들어왔던데. 왜 다 출금했어? 다 어쨌어.”

“고시원비 내고, 식비로 썼어요.”

“그걸로 매번 다 썼다고?”

물론 그러진 않았다.

“너 게임하니? 현질해?”

“아니요.”

수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도박?”

인혁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아니요.”

“사채 썼어?”

이번엔 심각해졌다.

“아니요.”

“그럼 고등학생 때 잘못 사귄 친구들한테 아직도 삥 뜯기니? 매달 월급 다 가져다 바치래? 어떤 새끼야.”

“아니요.”

“아니야? 그럼 술?”

“아니요.”

“담배?”

“아니요.”

수민은 아니오 로봇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인 있어? 툭하면 돈 빌려 달래? 시도 때도 없이?”

“그것도 아닌데…….”

“그럼 그동안 번 거 다 어디 갔어.”

인혁이 수민의 통장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냥…….”

“그냥?”

“…….”

기부했다. 그때그때 눈에 띄는 곳에.

말해도 되나? 왠지 혼날 거 같은데. 수민은 인혁의 눈치를 봤다.

“됐다. 아무튼 사채나 도박, 그런 건 아니라는 거지?”

인혁이 한숨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술도 담배도 안 해요. 애인도 없어요.”

수민은 애인 없다는 말을 특히 힘주어 말했다.

“그래, 그렇다 치고.”

“……진짜예요.”

“알았다니까.”

인혁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수민의 통장 계좌 번호를 보며 제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폰뱅킹을 이용하진 않지만, 인혁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 않았다. 예전에 아르바이트했던 곳의 사장이 그렇게 월급을 입금해 주곤 했으니까. 굳이 눈앞에서.

그런데 인혁은 왜 지금, 자신의 앞에서 폰뱅킹을 하는 걸까. 수민은 의아했다.

“뭐 하세요?”

“입금 중. 됐다.”

“……?”

설마, 싶었다.

“혹시, 저한테요?”

“그럼 누구한테 하겠니. 지금 내가.”

인혁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고 대답했다.

“왜요?”

“왜긴. 우리 사무실 입사 축하금. 첫 달 치 월급만큼 주는 게 우리 사무실 룰이야.”

“……?”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그런 식으로 돈을 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무엇보다.

“계약서에 그런 내용 없었는데요.”

인혁이 그렇게 강조한 근로 계약서에 그런 조항은 쓰여 있지 않았다.

“소장 마음이야.”

“…….”

근로 계약서에 없는 내용을 강요하면 노동청에 신고하라고 했던 게 어디의 누구였더라. 수민이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보자 인혁이 눈을 부라렸다. 왜? 뭐? 신고하려고? 해봐. 월급 한 달 치 더 줬다고.

그러면서 나중에 저 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일한 거 이상으로 돈을 주고 뭔가 부당한 짓거리를 시키면 바로 신고하라고 당부했다.

“지금 신고하면 되나요?”

수민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물었다.

“난 부당한 짓을 안 시키잖아. 근데 그 태도는 좋네. 항상 그렇게 하고. 종이랑 볼펜 있니? 가져와 봐.”

“…….”

수민은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는 게 부당한 일인지 아닌지 고민하며 백팩을 뒤졌다. 고시원 마크가 찍힌 메모지와 가방 바닥에 굴러다니던 펜을 들고 가자 인혁이 그걸 수민에게 내밀었다.

“적어 봐, 그동안 한 달 월급 어떻게 썼는지 아니면, 앞으로 어떻게 쓸 예정인지.”

“…….”

“괜찮아. 화 안 낼 테니까 편하게 써봐.”

“역시 화내셨던 거…….”

“아니야.”

“…….”

“어서.”

“……네.”

어려울 건 없었다. 고시원비, 식비, 핸드폰 요금, 세탁비와 기타. 그리고 나머지.

나머지는 버리듯 기부한 거였는데, 왠지 기부라고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인혁의 표정을 보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혁이 ‘나머지’란 세 글자를 씹어 먹을 듯 노려봤으나 더 캐묻진 않았다. 대신 다른 걸 트집 잡았다.

“핸드폰 요금이 왜 이래? 요즘 많이 나온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그런가요?”

“남 말 듣듯 하지 말고. 잠깐 줘 봐.”

인혁이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이것저것 눌러 보고는 금방 알아냈다. 이 핸드폰에 무려 48개월 약정이 걸려 있는 핸드폰이란 것을.

“너…….”

인혁이 핸드폰과 수민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핸드폰을 샀다고 말했을 때 정 목사의 반응과 비슷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거냐. 신장은 멀쩡하지? 콩팥 다 있고? 간도 성하고?”

“네.”

왜 갑자기 오장 육부의 위치를 묻는 걸까. 수민은 의아했으나 순순히 대답했다. 왼쪽 골반 근처의 기관이 적출당한 것을 빼곤 멀쩡했으니까. 다행히 인혁은 그 장기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너 혹시 길에서 누가 밥 사줄 테니까 같이 가자 하면 절대 따라가지, 아…….”

인혁은 수민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곤 한숨지었다. 통장을 다시 들여다보고는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혁은 새 메모지를 뜯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들여다보니 한 달 월급 지출 계획표였다. 수민은 그 목록이 이번 달부터 제 지출 목록이 될 것임을 알아챘다.

월세와 관리비 옆에는 X가 그어져 있었다.

“저 월세랑 관리비는요.”

“쓰읍.”

“……네.”

“한 달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50%, 아니, 넌 월세랑 관리비 안 나가니까 60%는 무조건 저축해. 적금은 하나로 넣지 말고, 갑자기 큰돈 필요할 일 있을지 모르니까 여러 개로 쪼개서 넣고, 항상 여유 비용을 10% 정도 떼서 따로 보관해 놓고. 청약 없지? 당장 청약부터 들자. 신용 카드 있어? 없으면 당분간 만들지 말고, 체크카드만 쓰고.”

금융 교육은 말로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혁은 기어이 수민을 은행으로 데리고 가 생활비용 통장, 적금 통장, 청약 통장 등을 만들도록 했다. 폰뱅킹도 깔았다.

은행을 나와선 서둘러 다시 집으로 갔다. 급하니 우선 냉장고만이라도 빨리 보내 달라고 했는데, 냉장고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연락이 와서였다.

냉장고를 설치하고, 타이밍 좋게 배송 온 조리 도구를 집 안으로 옮겼다. 어제 사 온 갈비탕을 냉장고에 넣은 뒤 근처 가게로 나가 점심을 먹고 마트로 갔다.

인혁이 주차권에 도장을 찍으며 수민에게 백 원을 주었다.

‘이걸 왜 주지?’

주니까 받긴 받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어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카트 빼 와.”

“아, 네.”

수민이 카트를 빼 오는데 인혁의 핸드폰이 크게 울렸다. 소리가 정말 컸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인혁을 돌아볼 정도였다.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 있어도, 곤히 자고 있다 해도, 실수로라도 걸려 오는 전화를 모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잠깐만.”

인혁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구석으로 걸어갔다. 수민은 빈 카트 손잡이를 잡고 덩그러니 서서 인혁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됐어? 허탕? 정말? …… 젠장, 아니, 아니야. 큰 기대는 안 했…… 씨발, 포기하고 말곤 내가 결정해. 그딴 식으로 말하지…… 돈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무조건 찾기만…… 그래, 부탁해.”

오가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스피커에서 들리는 음악과 안내 방송. 그 밖의 소음 때문에 인혁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표정이 심각해서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겠거니 짐작될 뿐이었다.

“젠장.”

인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렇게 심각하고 급한 일이면,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수민은 어제 인혁이 사무실을 나서기 전,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던 걸 떠올렸다.

가려나? 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실망감이 몰려들었다. 실망. 그래, 실망. 수민은 실망스러웠다.

실망감은 무력감을 꼭 닮아 있었다. 인혁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던 날. 그때 느꼈던 느낌과 비슷했다.

그제야 수민은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줄곧 무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꽤 즐거운 상태였다는 것을.

딱히 즐겁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빼앗기게 되니 알게 되었다.

물건이 든 카트를 믿고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민은 혼자였다. 언제는 혼자이지 않은 적이 있었느냐만. 인혁이 여기에 절 두고 떠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자신이 혼자라는 것이 섬뜩하리만치 실감 났다.

수민은 가족, 또는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웃고 떠들며, 카트를 밀고 입구로 걸어 들어가는 걸 멍하니 보았다.

“아빠 나 헤드셋 사줘. 위층에 봐 둔 거 있는데.”

“안돼. 엄마한테 들키면 아빠만 죽어.”

“안 들킬게, 진짜야. 안 들킬게. 응? 응?”

“얼만데.”

“삼십?”

“삼시입?”

수민 또래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애가 인혁보다 좀 더 푸근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와 카트를 끌고 지나갔다.

아빠는 아들이 팔을 잡아당길 때마다 휘청거리면서도 아들을 밀어 내지 않았다. 말로는 안 된다, 싫다 그러는데 표정은 웃고 있었다.

수민은 저도 모르게 인혁을 보았다. 인혁은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통화 중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인혁이 눈을 좀 크게 뜨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수민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였다.

잠시 후 인혁이 통화를 마치고 수민에게 걸어왔다. 그동안 수민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돌아가자고 하겠지? 아니면, 이곳에서 혼자 알아서 사 오라고 할까?

어느 쪽이든 싫었다.

“이렇게 같이 오니까 좋다.”

“나라고 뭐, 같이 안 오고 싶었겠어.”

“흥, 말은 누가 못해. 앞으로 계속 같이 오자. 너무 좋아, 둘이서 오니까.”

부부인지 연인인지 모를, 두 여자가 카트를 밀며 수민의 등 뒤로 지나갔다. 수민은 카트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미안.”

“싫어요.”

“통화가 좀 길어져서, 뭐?”

“…….”

인혁도, 수민도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가 싫어? 무슨 일 있었어?”

“…….”

“어떤 놈이 너한테 치근덕대기라도 했어? 시비 걸었어? 아직 이 근처에 있어?”

인혁이 자연스럽게 수민을 한 팔로 감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민은 인혁에게 안긴 채 눈만 깜빡였다. 제 입에서 나온 싫다는 말도, 절 걱정하는 인혁도, 모두 다 놀라운 것뿐이었다.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어. 정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주 작은 일이어도 괜찮아, 괜찮으니까 말해 봐.”

인혁이 수민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눈가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계속 저 눈빛으로 자신을 봐줬으면 싶어서, 순간 고민했다.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면 실망하며 멀어질까 봐. 더는 이런 눈으로 봐주지 않을까 봐. 더 급하고 심각한 일을 하러, 절 여기 두고 떠날까 봐. 겁났다.

하지만 거짓말할 수 없었다. 등 뒤, 그리고 마트 입구에 CCTV가 있었다. 모두 수민이 잘 보이는 위치였다.

“아니요.”

“정말 아니야?”

“네.”

“그럼 다행인데.”

인혁이 숨을 내쉬며 수민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

역시나. 수민은 멀어지는 인혁의 냄새를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인혁은 여전히 수민의 바로 앞에,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있었다.

“고개 들어 봐.”

“…….”

“어서. 내가 네 말 안 믿고 여기 CCTV 다 까보기 전에.”

“…….”

수민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인혁이 다시 물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수민만 보고 있었다. 걱정하고, 걱정된다는 듯.

“……네.”

수민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

“아빠 손 놓치고, 미아 된 애 같은 얼굴이잖아.”

“제가요?”

“그래, 걱정되게.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걱, 정? 저를요?”

“인마, 그럼 내가 내 백 원 먹은 카트를 걱정했겠니.”

인혁이 카트를 잡고 있는 수민의 손을 내려다봤다. 툭, 손등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인혁이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너 왜 그래.”

“뭐가요?”

질문만 뱉어 내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수민은 생각했다. 인혁이 자꾸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왜 우냐고.”

봐봐. 또 이렇게 이해 못 할 말을. 수민은 속으로 생각하다 고개를 들었다.

“울어요? 누가…….”

“너. 네가, 수민아.”

수민아, 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래서였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제야 수민도 알게 되었다. 제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더욱 모를 일이 되어 버렸다.

“왜 울어.”

“…….”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혁의 행동이 좀 더 빨랐다.

인혁이 수민을 끌어안았다. 수민을 제 코트 속에 숨겼다. 인혁에게서 나는 냄새가 폐를, 온몸을 채우고 덮었다. 마음이 놓였다.

수민은 어째서인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더 서러워졌다. 혹시나 인혁이 절 떼어 놓을까 봐 무서워지기까지 해서, 인혁의 셔츠를 한 손 가득 움켜잡았다.

수민은 코트에 감싸여 사라졌으나 한 팔이 남아 인혁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수민은 카트를 놓지 않았다. 코트 속에서 가는 팔이 삐죽 튀어나와 카트를 잡고 있는 건 희한한 광경이었다.

인혁은 수민을 계단 쪽으로 데려가 달래고 왜 우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차근차근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카트가 인혁의 계획을 방해했다.

“카트는 왜 죽자 살자 잡고 있어. 이게 증거야?”

“…….”

“카트 어디 안 도망가니까 잠깐 놔 봐.”

“…….”

“내가 끌고 갈게. 그럼 됐지?”

“…….”

“카트가 그렇게 좋아? 하나 사줘?”

“…….”

“수민아. 잠깐만 놔 보자, 응?”

“…….”

아무리 말해도 수민은 카트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등 위로 뼈가 희게 불거질 정도로 세게,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게 느껴졌지만, 품속에서 울음은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제가 우는지조차 모르고 울면서, 카트를 죽자 살자 붙잡고 있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인혁은 막막하고, 답답하고, 안쓰러웠다.

손이 여러 번 수민의 어깨에 닿을 뻔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인혁은 허공에 붕 뜬 제 손을 보며 한숨지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의 시선이 수민에게 닿는 걸 보자마자 생각이란 걸 할 새도 없이 몸부터 움직였다. 그렇게 코트 안에 숨기고선 정작 어깨에 손을 대도 될까 망설이다니.

인혁은 결국 수민의 등에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수민을 코트 밖으로 꺼냈다.

수민이 고개를 들어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길가 한복판에서 부모 손을 놓친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혁은 쓰게 웃으며 제 셔츠를 움켜쥔 수민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곤 수민의 손을 잡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인혁이 앞장서고 수민이 뒤따르고 카트가 터덜터덜 따라왔다.

그렇게 마트 뒤편 공터로 갔다. 인혁은 벤치에 수민을 앉히고 저도 옆에 앉았다.

수민은 벤치에 앉아서도 양손에 카트와 인혁의 셔츠를 쥔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샘이 고장 난 사람 같았다.

바라보는 인혁은 목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화가 나고 안쓰러웠다.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우는가. 차라리 볼품없을 정도로 추하게, 콧물에 침까지 질질 흘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바닥을 구르면 보기 편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자꾸 눈이 가고 마음 쓰이진 않았을 텐데.

“왜 울어, 우는 이유가 뭐야.”

인혁이 수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새 앞머리마저 눈물에 푹 절어 있었다.

“모르겠어요.”

“정말 나 전화하는 동안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잠깐이라도.”

“네. 없었어요.”

“그래. 그렇다 치자.”

“정말로…….”

“그래, 알았어.”

인혁은 수민을 끌어당겨 안았다. 수민이 제 어깨에 얼굴을 묻자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애한테서는 한시도 눈을 떼면 안 된다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수민은 그래서 좋았다.

하아, 인혁의 숨이 하얗게 퍼져 나갔다. 수민은 허공에서 흩어지는 인혁의 숨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에서 흐르는 물을 눈물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람이 기쁘거나 슬플 때, 혹은 무섭거나 감동받았을 때 흘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무얼까. 기쁨? 슬픔? 두려움? 아니면 감동?

수민은 이유를 찾아보려 애쓰다 그냥 포기해 버렸다. 왜 우는 건지 애써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

셔츠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겨우 눈물이 그치자 인혁이 수민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수민은 얌전히 그의 손길대로 움직였다.

“아주 붕어가 되었구나.”

인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수민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뒤늦게나마 얼굴을 빼내려 했다.

“어딜.”

인혁이 턱을 감싸 쥐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놔주세요.”

“왜?”

“…….”

“부끄러워? 이제 와서?”

“……놔주세요.”

“잠깐 기다려 봐, 붕어야.”

인혁이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깨끗한 거야. 새거는 아니지만.”

인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수민은 손수건이 새것이 아니라 더 좋다고 생각했다.

손수건에선 인혁의 냄새가 났다. 눈가를 덮을 땐 인혁의 손이 닿는 것 같았다. 뺨을 문지를 때도 그랬다.

손수건이 코를 덮었을 땐 후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아니, 온 세상이 단 하나의 색으로 물든 것 같았다. 수민은 그 색채에 집중하고 싶어 눈을 감았다. 그래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는데.

“옳지 잘한다. 코 풀어. 시원하게.”

인혁이 뜻밖의 말을 했다. 수민은 그 말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수민이 숨을 멈추자 인혁은 왜 하다 마냐며 손수건에 덮인 손으로 수민의 코를 살짝 잡고 흔들었다. 수민은 그제야 인혁의 말을 이해했다.

“코 풀어.”

“…….”

“흥 해. 안 해봤어?”

“…….”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코 풀라니까. 안 답답해?”

인혁이 재촉했다. 그는 전혀 이상한 점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인혁이 저를 챙겨 주는 게 좋았다.

하지만 곧 기분이 나빠졌다. 저 말고도 승원 같은 애들이 여럿 있었다는 서 여사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그들에게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굴었을까. 울면 안아 주고, 눈물을 닦아 주고, 코를 풀라고 하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수민은 인혁의 손수건을 붙잡고 코를 풀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심술을 부린 것이었는데. 수민은 하자마자 후회했다. 반대로 인혁은 만족스러워했다.

“잘했어.”

인혁이 수민의 등을 두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수민은 급히 인혁의 코트를 붙잡았다.

“왜?”

“어디 가세요?”

“이거 처리하러.”

“어떻게요?”

“어쩌긴. 버려야지.”

인혁이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

“괜찮아. 집에 많아.”

“그럼 저 주세요.”

“뭘. 이걸?”

“네.”

“왜?”

“…….”

“설마 빨아서 돌려준다거나 할 생각은 아니겠지?”

“…….”

“아서라. 집에 아직 세탁기도 없는 녀석이.”

인혁은 기특한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말했다.

“안 그럴 테니까 주세요.”

“안 돌려줄 건데 왜 달래.”

“……주시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는데. 그러니까 왜 이건 달라고 하, 음, 혹시, 미안해서 그러니?”

“…….”

“이게 뭐라고.”

인혁이 쓰게 웃었다.

“절대 세탁해서 돌려준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귀찮으니까.”

뭐가 귀찮다는 걸까. 알 수 없었으나 수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야 손수건을 받을 수 있었다.

“집에 갈까?”

인혁이 주차장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수민은 고개를 저었다.

“안 힘들어? 괜찮겠어?”

“네.”

“다음에 와도 돼. 집 근처 가게에서 급한 거만 간단히 사고, 내일이든 모래든 시간 날 때 또 오면 되니까.”

“싫어요.”

“정말 괜찮겠어?”

“네.”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야.”

인혁은 의아해하면서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마트에 들어가 장을 봤다. 카트는 수민이 끌었다. 인혁은 제가 카트를 끌려고 했으나 수민이 생전 처음 카트를 밀어 보는 사람처럼 뺨이 상기되어 신나 하니 그냥 내버려 두었다.

수민은 처음엔 카트를 제대로 돌리지 못해 매대를 툭툭 쳤다. 인혁은 애가 다칠라 괜히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수민은 금방 카트 다루는 법을 익혔고, 그 뒤엔 씽씽 잘도 끌고 다녔다.

인혁은 수민을 따라다니며 카트에 물건을 툭툭 집어넣었다. 우선 필요한 생활용품만 골랐는데도 카트가 금세 가득 찼다.

“너 집밥 해 먹을 수 있니? 아니, 해 먹은 적 있어?”

인혁이 애호박과 두부를 카트에 넣으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민과 카트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얘가 어디 갔어. 수민아. 오수민.”

주변을 둘러보며 조금 큰 소리로 부르자 벌써 저만치 가 있던 수민이 카트를 끌고 돌아왔다.

“요리할 줄 아는 거 있어?”

“아마, 조금요.”

“계란 프라이, 햄 굽기 그런 거 말고.”

“…….”

“그래.”

인혁은 애호박과 두부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밀 키트를 몇 개 고르고 추어탕이니 삼계탕이니 완제품도 몇 개 골랐다. 토마토와 사과 등 과일이 소량 포장된 것도 카트에 넣었다.

“과일이랑 야채는 매끼 챙겨 먹어.”

“네.”

수민은 대답하다 옆을 보았다.

입구에서 봤던 아빠와 아들이 보였다. 아들은 결국 원하는 걸 얻은 듯했다. 카트에 헤드셋 박스가 담겨 있었다.

아빠가 ‘전단지 행사 상품’이라고 적힌 매대 앞에서 가지를 고르자 아들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들은 아빠가 연근과 핸드폰을 번갈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가지를 슬쩍 들어 다시 매대에 올려놓……으려다 딱 걸렸다.

“이게!”

아빠가 아들에게 꿀밤을 때렸다.

“저번에 미나리 안 사 갔다가 아빠 엄마한테 된통 혼난 거 안 봤어? 그때 용돈 깎였으면 너 지금 이것도 없어.”

아빠가 위협하듯 헤드셋 박스를 가리켰다. 안 돼! 아들이 몸을 날려 카트를 덮었다. 아빠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카트에 엎드린 아들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아, 뭐해.”

“니 엄마도 봐야지. 열 달 배 속에 품고 낳아 키운 자식 놈이 밖에서 뭔 짓 하고 다니는지.”

“아씨, 하지 마. 지워. 엄마가 교회 사람들한테 막 보여 준단 말야!”

아빠와 아들이 투닥투닥 다투며 지나갔다. 가지는 헤드셋 박스 위에 위풍당당하게 올려져 있었다.

수민은 고개를 돌려 인혁을 보았다. 인혁은 견과류가 소량 포장된 팩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카트에는 포장된 토마토와 사과가 제일 위에 놓여 있었다. 수민은 인혁을 살피며 슬쩍, 토마토 봉지를 들어 올렸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수민이 토마토를 매대에 돌려놓아도 인혁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니까 유통기한이 석 달이라는 거지. 넉넉하니까 좀 많이 사 둬도 되려나?”

인혁이 매일 먹는 견과류 세 박스를 들고 수민을 보았다.

“왜?”

“…….”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요, 아무것도.”

수민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이 아닌데? 왜? 뭐야? 왜 시무룩해져. 내 얼굴에 아무것도 안 묻은 게 실망할 일이야?”

“…….”

수민은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실없는 녀석.”

인혁이 견과류 박스를 카트에 툭 내려놓았다.

“그런데 여깄던 토마토 어디 갔어.”

“……!”

수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가 치웠니?”

“네.”

수민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토마토 안 좋아해?”

인혁이 별일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어, 아마도요. 싫어, 할지도 몰라요.”

“그래? 그럼 앞으론 좋아하도록 노력해 봐.”

인혁이 다시 토마토를 카트에 넣었다. 그러곤 옆에 놓인 귤 박스도 번쩍 들어 카트에 올렸다.

“귤은 왜…….”

“말도 없이 토마토를 뺀 벌. 어디 감히 밑장을 빼?”

“…….”

수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아닌데?

“또 몰래 빼 봐. 두 배로 사줄 테니까.”

“아…….”

그건 싫었다.

“이렇게 애써서 사주는데 설마 썩어 버리거나 하진 않겠지.”

“…….”

“내 호의를 그렇게 무시하진 않으리라 믿어. 오수민 씨.”

“…….”

수민은 눈을 내리깔고 귤 박스를 살폈다. 유통기한을 찾으려고 했으나 공산품도 아니고 과일에 그런 게 붙어 있을 리 없었다. 수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민이 하는 꼴을 지켜보던 인혁은 웃음을 참으며 수민의 머리를 꾹 눌렀다.

“편식하지 마, 골고루 먹어.”

애써 웃음을 참고 엄격하게 말했다.

“…….”

“가자.”

인혁은 수민을 끌고 마트 식품관을 마구 돌아다녔다.

산더미 같은 식품관과 생활용품을 계산하고 차에 실은 뒤 향한 곳은 아파트 근처에 위치한 반찬 가게였다. 인혁은 어제 그 부동산에 전화해서 맛집인지, 음식을 깔끔하게 잘하는지, 주변 평판은 어떤지 확인한 뒤에야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에선 반찬 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월요일하고 목요일 새벽에, 사흘 치 반찬과 국을 배달한다고 했다. 전용 용기를 쓰는데 일요일 저녁, 수요일 저녁에 용기를 문 앞에 두면 회수해 간다고 했다.

인혁은 한 달 반찬 표를 꼼꼼히 살피고, 전용 용기를 어떻게 소독하는지까지 직접 본 뒤 6개월 치를 결제했다.

“일단 먹어 보고 그 이후에 연장하든가 하겠습니다.”

수민은 제 유통기한이 6개월인 걸까, 라고 생각했다.

반찬 가게는 사람 좋아 보이는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부부는 인혁과 수민을 형제로 보고는 1인분을 시켰지만 넉넉하게 두 분도 드실 수 있게 잘해 보겠다며 인사했다.

“그냥 맛있게만 부탁드립니다.”

인혁은 수민 혼자 먹는 거라고 정정해 주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서도 수민에게 당부했다.

“일부러 동네방네 자기 사정 떠들고 다닐 성격은 아닌 거 같은데.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누가 날 봐서 형이나 아빠랑, 그래, 아무래도 아빠라고 보겠지.”

터울 큰 형제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인혁은 다르게 기억하는 것 같았다.

“아빠랑 같이 사냐고 하면 그냥 그렇다고 해. 니 아빠 왜 자주 안 보이냐고 하면 바빠서 출퇴근이 좀 이르고 늦다고 하고. 쉬는 날엔 집에서 퍼져 자기 바쁘다고.”

“…….”

“무슨 말인지 알겠어? 굳이 혼자 산다고 말하지 말란 말이야.”

“네.”

“여긴 가족 단위로들 많이 살고 경찰서가 가까워서 분위기가 좋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문단속 신경 쓰고.”

“왜 저한테 잘해 주세요?”

가만 듣고 있던 수민이 불쑥 물었다.

“잘해 줘? 누가?”

“…….”

“내가?”

“네.”

“잘해 주긴 뭘 잘해 줘. 그냥 기본만 해주는 거지.”

“하지만 아무도 저한테 이렇게 해주지 않았어요.”

당신이 처음이었다.

단지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값비싼 전자 제품을 사준 사람은 인혁이 처음이었지만. 수민이 말하는 ‘잘해 준다.’의 기준은 그것이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기에 더 확실했다. 인혁이 제게 선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이.

공익 생활 중에 배웠다. 세상에 대가 없는 선의는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어떤 사이비 종교 집단이 저희에게 속한 아이들에게 잘 곳과 먹을 것을 준 것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저희에게 속한 아이들을 학대하여 키웠으며, 불법적인 일에 도구처럼 이용했다. 더 나쁜 일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아이들을 구해 준 조직 또한 대가 없이 선의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구출하고 보호한 건,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대가로 월급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직은 이 나라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된다. 국민이 세금을 내는 건 자신들이 사는 나라가 안전하게 관리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구출된 건 그 거래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들에게 고마워하지 말라고.

대가 없는 선의는 없다. 그러니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듯 선의를 퍼주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는 사기꾼이거나 다단계 영업자이거나 사이비 집단의 신도이거나 그 밖의 범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에게 잘못 걸리면 또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게 된다.

그게 뭐가 나쁜 거냐고 물으니, 정훈이라는 사람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조직에서 세금을 써 구해 준 게 헛수고가 되지 않느냐고. 수민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 인혁의 선의는 주의해야 하는 것이었다.

무조건적인 선의를 베푸는 인혁은 위험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니 의심하고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배웠는데.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어요. 왜 알려 주지 않은 걸까요.”

“뭘?”

“모르겠어요.”

수민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왜 이건 알려 주지 않은 걸까. 무조건적인 선의가 이렇게 달콤한 늪 같다는 것을.

발을 들였는지도 몰랐는데 어느새 발이 빠져 버렸다. 너무 달콤해서 발을 뺄 수 없었다. 오히려 몸을 더 밀어 넣고 싶었다. 자신 이전에, 또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한 달콤함을 나눠 줬을까 봐. 자꾸 짜증이 났다.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았어?”

되묻는 인혁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는 씁쓸해 보였고 안타까워 보였으며,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수민은 그의 얼굴에 스치는 여러 감정을 보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의 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승원을 떠올렸다.

“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이렇게 해주셨어요?”

다 내 아들 같아서?

“아니.”

예상과 다른 답을 들었다.

“…….”

수민은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애들은 이렇게까지 안 해줬어.”

인혁이 손을 뻗어 수민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절 빤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잠깐 보았다가 장난치듯 머리카락을 좌우로 흩트리고는, 손을 거뒀다.

“너만큼 노답인 애는 없었다는 말이야.”

인혁이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넌 젊고 앞길 창창한 녀석이 왜 그렇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막살고 그러냐.”

“…….”

“못 알아듣겠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건 네가 처음이라고.”

“…….”

수민이 웃었다.

“웃어? 뭐 좋다고 웃어. 지금 혼내는 거야.”

“네.”

“대답은 잘하네.”

인혁이 다시 손을 뻗어 수민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렇게 까치집을 만들어 놓고는 시동을 켰다.

아파트 단지 앞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인혁은 운전하며 수민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느라, 수민은 저뿐이었다는 말을 곱씹느라 서로 바빴다.

오늘은 인혁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함께 올라가 주었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무거운 짐들을 현관 안쪽에 쌓아 주고는 바로 떠났다. 집을 나서며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말했다.

인혁이 가고 얼마 되지 않아 핸드폰이 울렸다.

곧 세탁기 등을 배송하러 가겠다는 확인 전화였다. 이건 인혁에게 연락할 만한 무슨 일일까 아닐까 고민하는 사이 배송기사들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SH전자샵에서 왔습니다. 이건 어디에 둘까요.”

“글쎄요. 어디에 두면 좋을까요?”

“보통은 이 정도쯤에 두시는데. 괜찮으실까요?”

“네.”

“그럼 여기에 설치하겠습니다.”

기사들은 순식간에 물건들을 옮기고 설치해 주었다. 수민은 인혁에게 전화할 새가 없었다.

수민은 그들이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그들이 내미는 종이에 무심코 사인했다. 사인하고 나서야 어디에 사인할 땐 꼼꼼히 읽어 보라던 인혁의 말이 생각나 아차 싶었다.

기사들이 떠나자 수민은 마트 봉지와 박스를 뒤적거려 샴푸와 린스 세제 등을 주방과 화장실에 가져다 두었다.

다용도실에 설치된 세탁기 옆에 세제를 내려놓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벗어 놓은 점퍼를 찾았다. 주머니에 인혁의 손수건이 있었다.

수민은 설명서에 나와 있는 대로 세제를 보충하고, 세탁기에 손수건을 넣고 돌렸다. 그리곤 세탁기 앞에 쭈그려 앉아 손수건이 물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걸 구경했다.

수민은 오늘 인혁과 마트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수민은 팔과 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카트를 끌고 마트를 돌아다녔던 걸 계속 계속 생각했다. 그사이 세탁이 끝났다.

젖은 손수건은 건조기에 들어갔다 나오니 금세 마른 손수건이 되었다. 수민은 혹시나 싶어 손수건에 코를 대 보았다. 역시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대신 손수건을 사이에 두고 닿았던 인혁의 손길이 생각났다.

냄새가 사라졌으니 기억에만 의지해야 했다. 수민은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젖은 눈가를 조심조심 눌러 주던 손길, 뺨을 쓸어내리는 투박한 손가락, 코를 잡고 살짝 흔들 때 들렸던 숨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손수건에 배어 있던 그 냄새.

“…….”

수민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다리 사이가 뜨거워졌다. 거기에서 시작된 열감이 손끝으로, 발끝으로 퍼졌다.

손수건을 쥔 손이 절로 다리 사이로 향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그만해, 안 돼, 이건 하면 안 되는 거야. 누가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말해 준 건지도 분명하나 분명치 않았다.

에덴동산에선 자위는 죄악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속죄의 의식 때 몇 번, 그와 비슷한 행위를 강요했다.

다 벗고, 선생님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손으로 만졌다. 선생님은 손으로 비비고 문질러 딱딱하게 만들라고 했다. 수치심, 그때는 그게 수치심인지 알지 못했으나 그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하기 싫었다. 화장실 갈 때나 쓰는 걸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주무르고 싶지 않았다.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자꾸 자신과 몸을 겹쳤을 때를 떠올리면 된다고 말했지만, 고통뿐이었던 지난 속죄의 의식을 아무리 떠올려 본들 다리 사이의 것이 딱딱해지는 일은 없었다.

보다 못한 선생님이 손을 대기도 했다. 성기를 잡아 뽑을 듯 움켜쥐고 흔들었다. 아파서 눈물이 났다. 무서웠다. 성기는 한 번도 딱딱해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결국 선생님이 포기했다. 불감증, 나무토막 같은, 애교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쓸모없는, 따위의 말을 듣고 발로 차였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뒹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공익 생활 중에 10시간짜리 성교육을 들었다.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적당한 주기로 하는 자위는 나쁘지 않은 거라고.

그러니까 해도 되는 건데. 아니, 하면 안 되는 건데. 아니, 해도, 안 해도…….

인혁의 코트 속으로 파고들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에게 기대 울었던 것도,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도.

그의 손은 컸다. 길고 두껍고 마디졌다. 곳곳에 상처 자국이 나 있었고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인텔리 같이 생긴 외모와 달리 손은 거칠었다. 그 거친 손이 수민에게 닿을 땐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귀한 것을 다루듯 조심조심.

‘수민아.’

그리고 이름을 불러 주었다.

“읏…….”

신음이 났다.

수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위는 죄악. 하면 안 되는 것. 하지만 사실 해도 되는 것. 죄가 아닌 것. 자연스러운 것. 하지만 하늘 아버지가 보시면? 인혁이 보면?

기어이 발기하지 못하는 수민을 보며 험하게 일그러지던 선생님의 얼굴 위로 인혁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안 돼, 그건 안 돼. 수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수민아.’

그러던 중에도 그의 부름은 달콤할까.

세탁기와 벽 사이 공간이 눈에 띄었다. 수민은 망설이다 그 틈으로 갔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저를 숨기듯 몸을 웅크리고는, 손을 다리 사이에 가져갔다.

막상 잡고 나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 살짝 바지 위를 문질러 보았다.

“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허벅지 사이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수민은 망설이다가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속옷마저 젖히자 손이, 아니, 손에 덮인 손수건이 성기에 닿았다.

“흐으.”

그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비비고 문지르라고. 그 시절의 다그침이 생각났다. 그때 느꼈던 수치심이 덩달아 떠올랐다. 수민은 놀라 성기에서 손을 떼려 했다.

‘수민아.’

하지만 곤란한 듯 다정히 부르던 목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수민은 머뭇거리다 성기를 손으로 감쌌다.

‘수민아.’

뒤에서 안아 주며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큰 손으로 만져 준다면 어떨까. 어떻게, 이렇게. 이럴까.

“읏, 흣.”

마른 몸이 작게 요동쳤다.

수민은 눈을 감고 그 냄새를 떠올렸다. 늘 인혁에게서 나는, 가까울수록 선명해지는, 폐에 가득 차오르는 것 같은, 몸을 뒤덮으면 안심이 되는.

두근.

손안의 성기가 딱딱해졌다.

“읏, 흐…… 이, 상해, 이, 흐…….”

수민은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며 몸서리쳤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수민아.’

다정히 부르는 그 목소리에 몸이 한껏 달아올랐다. 고양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흡. 아…….”

수민의 몸이 꼿꼿하게 굳었다.

손안이 축축해졌다.

긴장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졌다. 하아, 하아. 수민은 거칠어진 숨을 뱉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읏, 으…….”

끝나고도 두어 번 더 잔 사정감이 몰려왔다. 수민은 몸을 움찔움찔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소끔 뒤, 숨이 가라앉았다. 몸의 열기마저 가시고 한기가 돌 즈음, 수민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수건이 젖어 있었다.

‘다른 애들은 이렇게까지 안 해줬어.’

인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 의미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

수민은 손수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세탁기에 넣었다.

손수건이 물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바지를 추스르고 다시 세탁기 앞에 웅크린 수민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

다음날. 손수건은 집에 놓고 나왔다.

인혁의 차에 올라타선 새삼 낯을 가리듯 어색하게 굴었다. 눈도 제대로 못 맞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인혁은 수민이 어제 마트에서 운 걸 쪽팔려 하는 줄 알고 모르는 척해주었다.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 식사를 대충 때우고 시내로 나갔다.

어색한 분위기는 인혁의 말 한마디에 반전되었다.

“공부요?”

수민의 눈이 커졌다.

“왜 그렇게 놀라? 공부 안 할 생각이었어?”

“…….”

생각도 안 하고 있었긴 했다.

“이런.”

인혁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후 수민은 오전 내내 인혁에게 붙잡혀 시내의 큰 서점들을 돌아다니며 책을 잔뜩 샀다. 오후엔 대형 검정고시 학원에서 상담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놔. 그 뒤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걸 공부하고, 자격증이 필요하다면 따고. 딱히 하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으면 일단 대학에 가. 학생증이 고민할 시간을 벌어 줄 거야.”

인혁은 내친김에 입시 학원도 가보자고 했다. 일단 상담이라도 받아 보라는 것이었다. 수민은 필사적으로 인혁을 말렸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 긴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일단 검정고시 공부는 EBS 강의로 준비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수민이 예전에 검정고시 공부를 한 적 있었다고 말하니, 인혁이 기특하다는 듯 바라봐 주었다. 수민은 갑자기 대학에 가보고 싶다는 욕심이 조금 생겨났다. 그러면 인혁이 절 더 기특하게 봐 줄 것 같았다.

아무튼 검정고시 교재까지 집에 들이고 난 다음에야 수민은 사무실에 출근할 수 있었다. 근로 계약서를 쓴 지 나흘째 된 날이었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오랜만에 만나는 수민을 환영했다. 하지만 곧 수민의 손에 들린 검정고시 교재를 보고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서 여사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또?

“…….”

교재를 들고 있던 수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무 보조가 할 일이 얼마나 있겠어. 일하다 시간 남으면 공부해.”

인혁의 말은 수민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얘 공부해야 하니까 일 많이 시키지 말라고, 서 여사와 박 씨에게 에둘러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수민의 자리는 서 여사의 옆자리였다. 며칠 안 온 사이에 새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수민은 이제 탕비실 테이블이나 소파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수민은 제 이름이 적힌 교재를 책상 책꽂이에 꽂고 책상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내 자리.

기분이 좋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