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9)

File#5. 오수민, 23세, 오메가 (3)

사무실은 적당히 바쁘고 적당히 한가했다.

인혁의 말이 아니더라도 서 여사와 박 씨는 수민을 부려먹을 생각이 없었다. 수민이 언제까지 이 사무실에 있을지 모르니, 일을 가르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멀뚱하니 앉아 있던 수민은 눈치 있게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청소나 복사, 우체국 소포 심부름 등의 일을 도맡았다. 허락을 받고 사무실 내 자료들을 조금씩 읽어 나가기도 했다.

“공부나 해.”

인혁이 청소하는 수인의 뒷목을 잡아채 책상에 앉히고 교재를 펴놓게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수민은 잠깐 앉아 있다 또 슬그머니 일어나 사무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우리 사무실이 이렇게 깨끗했었나, 박 씨?”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저 화분들, 어…… 살아 있네요.”

“정말? 죽은 거 아니었나? 하루 날 잡아서 죄다 가져다 버리려고 했는데. 저거 잎 원래 누런색 아니었어?”

“선물로 들어왔을 때 녹색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으음.”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서 여사와 박 씨는 새삼 알아챘다. 수민이 오고 나서 사무실이 매우 쾌적해지고 있다는 것을.

놀라운 발견이었다.

두 사람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커다란 고무 대야에 물을 채워 넣고, 난인지 뭔지 선물로 들어온 화분들을 하나하나 담그고 있는 수민을 보았다. 수민은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라는 표정으로 연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탕비실 구석, 햇빛도 안 비치는 응달에서 시름시름 죽어 가던 십여 개의 화분들이 수민의 손에서 되살아났다. 말라비틀어진 잎 사이로 연두색 새싹이 돋았다.

그날 점심, 서 여사와 박 씨는 자신들이 깨달은 것을 앞다퉈 인혁에게 말했다. 가만 듣고 있던 인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수민에게 물었다.

“그래서, 검정고시 공부는?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수민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인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서 여사와 박 씨는 수민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내비쳤다. 처음 봤을 때부터 호의적이긴 했으나 그건 외부인을 대하는 예의가 바닥에 깔려 있는 호의였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함께 일하고 식사를 하며 친분이 생기자, 수민을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이 듬뿍 어렸다. 그건 서 여사와 박 씨,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수민이 처신을 잘해 그들의 마음을 홀렸기 때문이었다.

수민은 얌전하고 성실했다. 승원이나 다른 아이들처럼 인혁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고 달라붙지 않을까 염려하던 서 여사마저 경계를 풀 정도였다.

그랬기에 수민이 입사하고 2주가 되었을 즈음 일이 터졌을 때, 서 여사는 망설임 없이 수민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수민 학생, 밤중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지금 급히 경찰서로 좀 가줄 수 있겠어요? 박 씨가 도통 연락이 안 돼서, 나도 지금 좀 멀리 나와 있고. 김 소장이, 김 소장이 또!

김 소장.

그 단어면 충분했다.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 수민은 낡은 점퍼를 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옆 동네 경찰서였다.

저녁 6시만 되도 사방이 어두워지는 한겨울이었다. 경찰서는 계절도 안 타는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취객, 길 잃은 노인, 교복 입은 학생, 양복 입은 사람들, 서로 삿대질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갈라놓다가 대신 머리끄덩이를 붙잡히는 경찰까지. 경찰서 안은 시장통처럼 북적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금방 인혁을 찾는 건 수민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수민은 바로 다가가지는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서 그를 보았다.

인혁은 철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경찰의 질문이 설렁설렁 대답하고 있었다. 귀찮아 보일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옆엔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상태가 심각한 건 그쪽이었다. 취해서 그런 건지 얻어맞으면서 그렇게 된 건지 옷차림이 엉망이었다. 얼굴은 더 엉망이었다. 빨갛게 파랗게 울긋불긋한 얼굴이 시시각각 부어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힐끔힐끔 인혁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경찰이 제 편을 들어 주는 듯하자 금세 기가 살아선 인혁에게 삿대질하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너 이 새끼, 두고 봐라. 어? 콩밥 먹여 줄 테니까. 잘 걸렸어, 너 이 새끼. 니가 뭔데 날 이렇게 만들어, 어? 어?

“저기, 조용히 좀 하세요. 그쪽 분도 잘한 거 하나 없어요.”

보다 못한 경찰이 남자를 말렸다.

옆에서 삿대질을 하든 말든, 경찰이 말리든 말든, 인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가서 놀라지 말고, 지금 미리 놀라지도 말고. 수민 학생, 뭘 상상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거 아니야. 정반대로 생각해요. 김 소장이 맞고 다닐 사람으로 보여? 때리면 때렸지. 너무 잘 때리고 다녀서 문제야. 거기 경찰서도 이미 수십 번도 더 드나든 데라 다 아는 사이고, 변호사한테도 연락해 놨으니까 별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가서 데리고만 나와 줘요. 절대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뭐하면 청심환 하나 먹고 가도 되고.

서 여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이전의 아이들은 청심환을 먹을 정도로 놀랐었던 걸까? 겨우 이런 상황을 보고? 수민은 의아했다.

그때 덩치 큰 사람이 수민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아, 죄송. 그러게 왜 거기 멍청하게 서 있어 가지곤.”

덩치는 껄렁하게 사과하는 듯 시비 거는 듯 중얼거렸다. 수민은 부딪친 어깨를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인혁과.

“너!”

인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자리 앉으시죠.”

“너, 니가 왜 여기 있어!”

“선생님!”

경찰이 인혁을 잡아당겼다.

“…….”

왜 여기 있냐니. 누구 때문에 온 건데. 수민은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너 여기 왜 있냐고. 무슨 일이야.”

인혁이 성큼 걸어와 수민을 살폈다. 혹여나 다친 곳이 있나 위아래로 살피고 뒤로 돌려 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 온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의 처지를 잠깐 잊어버린 것 같았다.

“서 여사님이 가보라고 해서 왔는데요.”

수민의 몸이 인혁이 밀고 끄는 대로 이리 휙, 저리 휙, 돌아가며 말했다.

“널 보냈다고? 못 오면 못 오는 거지 널 왜 보내? 그리고 넌 가란다고 이 시간에 여길 와? 지금이 몇 신데? 혼자 온 거야? 택시 타고 왔어?”

“신원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거, 김 선생님. 지금 남 걱정하실 때가 아닌데. 이리 오세요, 앉으시구요.”

지켜보던 경찰이 수민 대신 인혁의 처지를 대신 일깨워 주었다. 수민이 그거 보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하, 참.”

인혁은 그제야 수민을 놓아주고 자리로 돌아갔다.

수민은 졸졸 따라가 옆에 섰다. 인혁은 수민이 자신과 남자 사이에 서자 팔을 잡아당겨 반대편에 세웠다.

“뭐야, 동생인가? 거, 형 관리 좀 잘하슈.”

남자가 훈수 두듯 말하며 수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눈빛이 음흉하고 징그러웠다.

“얘한테 말 걸지 마.”

인혁이 수민을 숨기듯 잡아당기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경찰서로 온 이래 처음으로 남자의 말에 반응한 것이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어? 내가 합의 안 해주면 넌 감방행이야. 알아? 어?”

남자는 인혁의 기세에 눌려 움찔했다가, 그게 쪽팔렸는지 꽥꽥댔다.

시끄러웠다. 수민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인혁의 법률 대리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인혁보단 어리지만, 수민보다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변호사였다. 이 밤중에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는데도 복장이 깔끔했다. 앞머리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양복에 코트, 머플러, 구두까지. 특히나 구두코가 반들반들 빛났다.

변호사는 한숨 돌릴 새도 없이 형사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명함을 내밀었다. 남자에게도 주었다. 남자는 금박 박힌 명함을 받아 들고는 인터넷으로 급히 뭘 검색해 보더니, 고소하겠다고 다시 큰소리쳤다.

“고소? 해, 해. 절대 합의해 주지 말고, 고소 꼭 해라.”

인혁이 남 일인 듯 부추겼다.

“씨발, 하라면 못 할 줄 알고! 너 딱 기다려!”

“소장님!”

변호사는 차마 인혁의 멱살은 못 잡고, 두 손만 바들바들 떨었다. 아으, 저 입을 진작 꿰맸어야 했는데.

그때 진짜 피해자가 다른 경찰의 부축을 받고 나타났다. 인혁이 피해자를 부축해 데리고 나온 경찰을 노려보았다.

“피해자 보호, 제대로 안 합니까?”

인혁이 인상을 구기며 경찰을 쏘아보았다.

“아니요, 제가 오겠다고 했어요. 경황이 없어서 감사하다고, 인사도 못 드리고……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피해자가 울먹이며 인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피해자는 인혁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품이 커 망토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

“저 사람이 절, 강제로 모텔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어요. 싫다고 했는데, 이상한 약을 먹이려고 하고, 발정 난 오메가 주제에 왜 비싸게 구냐고…… 사람들 지나가면, 사귀는 사이라고 거짓말하고, 저는 아니라고 했는데 다들 그 말만 믿고 그냥 다 지나가고. 그랬는데, 저분이 도와주셨어요.”

피해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남자가 모함이다, 꽃뱀이다, 고함을 질러 댔다. 그 바람에 피해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뿐이었다. 피해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 사람이 저분을 고소하면, 제가 절 도와주시느라 그랬다고 증, 언, 그런 거 다 할게요. 그리고 저도 저 사람 합의 안 해줄 거예요. 절대로.”

“자, 잠깐만!”

피해자가 강경하게 나오자 남자가 허둥지둥 일어나 피해자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인혁이 바로 그의 어깨를 잡아 의자에 도로 앉혔다.

남자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같다, 그런 게 아니다, 호감이 있어 잘해 보려고 했던 거다, 너도 여지를 주지 않았냐. 변명하는 남자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남자가 피해자 앞에서 감히 주둥이를 나불댈 수 있었던 건 경찰과 변호사가 양쪽에서 인혁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세요, 참아요. 또 뉴스에 나오시려구요?”

“김 선생님. 한 성격 하시는 거 내가 모르지 않는데, 좀 참읍시다. 응? 나도 참는데 왜 김 선생님이 못 참아.”

변호사와 경찰이 필사적으로 인혁을 말렸다. 인혁은 저 새끼 주둥이를 박살 내지 못한 게 한이라는 듯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기,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경찰은 인혁을 변호사에게 맡기고, 슬쩍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저 사람, 오범연 김 소장. 요즘 TV 출연도 많이 하고 그래서 알아보는 사람들 좀 많던데 못 알아보시는 거 같아서.”

“예? 무, 무슨…….”

“아, 요즘 TV를 잘 안 보시는가 보네. 최근에 왜, 그 우주민 나온 범죄 드라마. 그 드라마가 저 사람 이야기잖아요. 그거 때문에 우리 경찰서에서 촬영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우주민하고 찍은 사진도……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튼. 여기서 일 크게 불거지면, 내일 저녁 뉴스에 선생님 나올지도 모릅니다. 딸뻘 오메가 성추행하려다 저쪽 선생한테 잡혀서 폭행당한 사람으로다가.”

“…….”

“거 요즘엔 네티즌 수사대? 요즘엔 이런 말 안 쓰나? 아무튼, 사람들이 무서워 가지고 모자이크 처리돼 나가도 다 알아보는 거 알죠? 정말,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일 크게 불거지면 선생님한테 절대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지, 지금 저를 협박…… 경찰이, 한쪽 편을 들다니!”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하시나. 잘 모르시는 거 같아서,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합의를 하든 말든 그건 두 분이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응?”

경찰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물러났다. 고소한다 어쩐다 지랄하는 성추행범을 향한 짜증이 얼굴에 은은히 깔려 있었지만. 남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까,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남자가 그 얼룩덜룩한 얼굴을 씰룩거리며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고소해. 합의 안 할 거니까.”

인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변호사의 얼굴만 움찔움찔 떨렸다.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데, 인혁이 봐주질 않아 속만 타들어 가는 듯했다.

“여기 매일 뻔질나게 들락거리던 윤 기자, 오늘은 안 왔습니까? 저번에 나 왔을 때 아주 신나 가지고 기사 써재꼈잖아. 야식 먹으러 갔나? 연락해서 오라고 해요. 건수 올릴 기횐데, 밥 먹다가도 튀어 오겠지.”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남자가 대뜸 무릎을 꿇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렸다. 경찰의 부축을 받아 돌아서던 피해자까지 놀라 도로 돌아보았다.

하. 인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허리를 굽혀 남자에게 물었다.

“니가 잘못한 게 나야?”

“어, 저, 그게……. 아, 아닙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남자가 풍뎅이처럼 무릎으로 바닥을 비비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절 내려다보고 있는 피해자에게 싹싹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뭐에 씌었는지…….”

남자의 추한 변명이 이어졌다.

피해자는 고개를 돌렸다.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문 게 보였다.

“쓰레기 같은 자식.”

적당히 합의 보고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했던 변호사마저 고개를 돌려 버렸다.

***

피해자는 합의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인혁 역시 나 봐줄 생각 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라고 성추행을 응원하려 했으나 변호사가 그 용감한 입을 틀어막고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어유, 김 선생님. 진정하시고. 응? 내가 내 동기보다 김 선생 얼굴이 더 익숙해요. 안다니까? 선생님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는 거. 아니까, 근데 이제 그 성질머리 좀 죽이세요. 이제 자기 몸도 좀 챙겨야지. 그러다 진짜 밤중에 어디서 칼 맞아요.”

변호사가 성추행범을 살살 구슬리는 동안 경찰은 인혁을 살살 구슬렸다. 성질내며 성추행범에게 또 달려들지도 모르니, 이번엔 놓치지 않고 제대로 제압해 보이리라. 경찰은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런데 인혁이 어째 얌전했다.

“어라? 뭐 잘못 먹었습니까? 아니, 사고 치고 여기에 온 거 보면 여전한 거 같은데.”

경찰은 성추행범이 개소리를 지껄이는데도 가만 앉아만 있는 인혁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이상하다. 이렇게 얌전할 리가 없는데?

“갈비뼈가 부러졌다거나 그래서 지금 말도 못 하게 아픈데 참고 있다거나. 그런 거 아니시고?”

경찰은 일차적으로 인혁의 몸 상태를 의심했다. 난동을 부릴 수 없을 정도로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인혁은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경찰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바라 마지않는 대로 한 번 책상을 들어 엎을까, 하는 생각도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소장님.”

슬그머니 소매를 붙드는 손길이 있어, 인혁은 다시 한번 성질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계세요. 그러다 정말 처벌받으면 어떡해요.”

수민이 인혁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그맣게 말했다.

인혁은 수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했다. 낮에 사무실에서 봤을 때와 똑같아 보였지만, 아니었다. 2주 넘게 한솥밥을 먹은 사이인데 모를 수가…… 아니, 솔직해야지. 인혁은 수민에게 꽤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수민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혁은 수민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왜, 내가 감옥 갈까 봐 겁나니?”

“네.”

수민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데 어찌 제 성질대로 굴 수 있을까.

“여사님은 왜 널 보내 가지고.”

인혁이 혀를 차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래, 잘 생각했수!”

경찰이 얼굴을 활짝 폈다.

수민은 성추행범 쪽을 바라보았다. 변호사는 수민과 눈이 마주치자 한숨 돌렸다는 듯 식은땀 닦는 흉내를 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수민은 덩달아 꾸벅이고는, 변호사 옆에서 기가 살아 날뛰는 성추행범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혹시라도 헷갈리지 않도록.

이후 피해자와 인혁은 귀가 결정이 났다. 성추행범은 좀 더 경찰서에 남아 있어야 했다.

인혁과의 일은 인혁과의 일이고, 피해자와의 일은 피해자와의 일이건만. 인혁과 합의하면 피해자와도 합의한 거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성추행범이 인혁을 뒤따라 경찰서를 나가려고 했다.

“그쪽은 가시면 안 됩니다.”

경찰이 성추행범을 제지했다.

“내, 내가 왜. 왜. 다 해결된 거 아닙니까.”

성추행범이 당황하며 횡설수설 말을 쏟아 냈다. 그러더니 경찰서를 나가는 인혁의 등 뒤에 대고 악을 써댔다. 인생이 불쌍해서 한 번 봐준 거라는 둥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둥 말도 안 되는 개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피해자는 경찰차에 올라탈 때까지 인혁을 돌아보며 인사하고 또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감사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조심해서 가고, 힘들든 안 힘들든 알려 준 연락처, 그쪽으로 꼭 전화해서 도움받으세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잊으세요.”

인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피해자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꾸벅 인사하고는 경찰차를 타고 떠났다.

수민은 피해자가 걸친 인혁의 코트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어휴, 오늘은 그래도 일찍 마무리됐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소장님. 밤중에 저처럼 달려오신 새 직원분도.”

옆에 서 있던 변호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수만은 조금 전 경찰서에서 그와 통성명 하였다. 누구냐고 묻기에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변호사는 그럼 앞으로 자주 보겠다며 살갑게 악수를 청했다.

“밤늦게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네. 고마워, 신변.”

인혁은 성의 없이 답했다.

“알면 좀 자제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고갱님. 네?”

“뭐, 서로 돕고 살면 좋지. 내가 그냥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비용 알아서 다 청구해. 비용 다 낼 테니까.”

“그건 당연한 거구요, 고갱님. 안 그래도 아주 야간 특별 출장 수당까지 싹 다 추가할 예정이니까, 내역 보고 놀라지나 마시구요. 가지고 계신 빌딩 중 하나 팔 생각이나 해두세요.”

“짜식, 많이 컸다?”

인혁이 깐족대는 변호사의 어깨를 툭 쳤다.

“고맙다. 나중에 따로 밥 한 번 살게.”

“또 그 말. 말만 하실 거면 이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 소장님께 얻어먹을 밥만 스무 그릇도 넘습니다.”

변호사는 제발 좀 밥 한 번 사 줘보라고 투덜대고는 인혁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무튼,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아까 말했다시피 저분이 경황없을 테니까, 며칠 연락 기다려 보다 안 오면 네가 먼저 연락해서라도 꼭 좀 도와주고. 비용은 나한테로 돌리고.”

“예에, 예.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걱정 마세요.”

“늘 고맙다.”

“네에, 네. 말로만 고맙다는 말. 오늘도 잘 접수했습니다. 고마운 마음은 내일 보내드릴 비용 청구서에 멋진 사인으로 표현해 주세요. 옆에 계신 새 직원분은 오늘 신고식 화려하게 하셨는데, 저처럼 밥도 못 얻어먹고 가지 마시고. 꼭 밥 얻어먹고 들어가시구요.”

변호사가 수민에게 웃어 보이고는 산뜻하게 돌아섰다.

인혁과 수민은 변호사가 타고 온 차를 빼 경찰서를 나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인혁만 지켜보았다. 수민은 변호사가 차에 올라타자 흥미를 잃고 다른 곳을 보았다. 수민은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진 경찰서를 보았다.

아직 저 안에 있었다. 끝까지 인혁에게 삿대질하고, 나중에 가선 “두고 보자, 밤길 조심해. 어?”하고 협박하던 남자가.

‘저거 협박죄 안 돼? 고소하자. 맞고소.’

‘진정하세요, 소장님. 소장님은 지금 멀쩡히 자기 두 발로 여기서 나가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직전에 들었던 인혁과 변호사의 농담 같은 대화보다 밤길 조심하라는 성추행범의 협박이 더 선명했다.

수민은 아까 본 것들을 잊지 않으려 속으로 여러 번 곱씹었다. 경찰이 컴퓨터로 작성하던 조서 내용, 언뜻 보이던 성추행범의 인적 사항. 성추행범이 조용한 구석으로 가 아내에게 전화해서는 세상에 다시 없을 자상한 목소리로 회사 사람이 갑자기 상을 당해 오늘 밤 집에 못 들어갈 거 같다고 말했을 때 핸드폰 액정에 떴던 전화번호.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인혁이 수민에게 손짓하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 좀 놀랐지?”

“아니요.”

처음 서 여사의 전화를 받았을 땐 조금 놀랐다. 한밤중에 인혁이 경찰서에 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경찰서에 온 뒤로는 되려 마음이 편해졌다. 인혁이 다치지 않은 걸 확인했으니까.

어찌 된 상황인지 눈치채고는 더욱 그러려니 했다.

“그럼 다행이고. 가자.”

인혁이 변호사에게 했듯 수민의 어깨를 툭 쳤다. 무심코 따라가던 수민이 우뚝 멈춰 섰다.

“잠시만요.”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왜? 뭐 놓고 나왔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요.”

수민은 경찰서 말고, 밖을 훑었다. 밤늦게까지 불을 환하게 켜놓은 가게 중 수민이 찾는 곳이 있었다.

“잠깐만 여기 계세요.”

수민은 그곳으로 뛰었다.

등 뒤에서 인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바람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수민은 길을 건너 슈퍼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슈퍼에는 TV에서 본 것 같이 봉지에 담아 주는 말랑하고 따뜻한 두부는 없었다. 슈퍼 주인은 요즘 누가 그런 걸 파냐며 두부와 오뎅, 유제품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냉장 코너를 가리켰다.

수민은 어쩔 수 없이 플라스틱에 포장된 단단하고 차가운 두부를 샀다. 슈퍼 주인은 검은 봉지에 두부를 담아 주었다.

검은 봉지를 들고 오자 인혁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거, 설마…….”

“…….”

역시 알아보는구나. 까먹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수민은 한숨을 내쉬며 포장을 깠다. 그리고 차가운 물에서 두부를 건져 내밀었다.

“이거 얼른 드세요.”

“이걸?”

“네.”

“이걸, 나보고 먹으라고?”

“네.”

“하하.”

인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왜 이런 반응인 거지? 수민은 의아해졌다.

“누가 가르쳐 줬어. 나한테 이거 먹이라고.”

“…….”

“서 여사님이지? 서 여사님 맞지? 내 이 사람을 진짜.”

어휴, 인혁이 숨을 푹 내쉬었다.

“아닌데요.”

“아니야? 그럼 박 계장님?”

“아니요.”

“박 계장도 아니면, 뭐야. 주변에 감방 들어갔다 나온 사람 있어?”

“아니요. 아마, 없을 거예요.”

수민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과 장로들은 감옥에 가기 전 다 죽었으니까.

“그럼? 이건 어떻게 알고 사 왔어.”

“그냥, 다들 그러던데.”

“다들? 누구?”

“TV에서요.”

<행복이 별거>에서도 그랬다. 주인공을 괴롭히던 전 애인을 때린 재벌 3세가 경찰서에 잡혀갔다 나왔을 때, 주인공이 두부를 사 들고 와 재벌 3세에게 내밀었다.

“아, 하.”

인혁이 알 만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TV가 애들을 다 망친다니까.”

“…….”

수민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이게 아닌가? 자신감을 잃고 두부를 든 손을 내리려는데.

“왜 줬다 뺏어.”

인혁이 수민의 팔을 잡아 올리더니, 수민이 든 두부를 크게 베어 물었다.

“차갑네.”

투덜대면서도 뱉지 않고 꼭꼭 씹어 삼켰다.

“됐어?”

“…….”

“더 먹을까?”

“아뇨. 다 먹으면 안 돼요.”

수민이 얼른 손을 잡아당겼다.

두부를 마저 먹으려던 인혁이 고개를 들어 수민을 보았다.

“왜? 왜 줬다 뺐어?”

“TV에선 다들 한 입만 먹었단 말이에요.”

수민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인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널 어쩌면 좋니, 수민아.”

수민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퍽 다정하게 들렸다. 착각일까?

“저를요? 왜요?”

“그러게. 왤까?”

인혁이 수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내 수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기대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골 때리네. 이거.”

“머리 아프세요?”

수민은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슈퍼 옆에 약국이 있었다. 약국도 아직 영업 중이었다. 인혁이 수민의 시선을 쫓아 약국을 보고는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었다.

“아니,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프니까, 또 뛰어가지 마.”

인혁이 손으로 수민의 눈을 가려 버렸다.

“방금 골 아프다고…….”

“아냐, 잘못 말한 거야. 두부 먹으니까 괜찮아졌어.”

인혁이 수민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웃음을 참는 건지 어깨가 잘게 떨렸다.

수민은 인혁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왜 그러냐고 묻거나 인혁을 함부로 밀어 내진 않았다.

인혁이 기대듯 제 어깨를 감싸 안는 게 좋았다. 어깨에 닿는 인혁의 숨소리와 웃는 소리도 좋았다. 인혁이 왜 이러는지 알지 못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인혁이 좀 진정됐는지 고개를 들었다. 아직까지 두부를 든 채 서 있는 수민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손에 든 걸 뺏어 근처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한 입만 먹었으니까, 이제 됐지? 가자.”

“딸 같아서 구해 주셨어요?”

수민이 불쑥 물었다.

“……뭐?”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던 인혁이 고개를 들었다.

경찰서 안에서 성추행범을 죽이고 싶어 하던 분노는 어디로 간 걸까. 그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눈은 버석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딸 같아서 구해 주신 건가요?”

“난 딸 없어. 아들 하나야.”

인혁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곤 버릇처럼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코트를 피해자에게 덮어 주면서, 코트 안에 넣어 놓았던 담배와 지갑은 따로 잘 챙긴 듯했다.

코트를 빌미로 피해자와 두 번 만날 여지 따윈 만들지 않으려는 거겠지. 설사 코트를 돌려주고 싶다고 연락해 와도 그냥 버리라거나 정 신경 쓰이면 경찰서에 맡겨 놓으라고 말할 테고. 수민은 멋대로 인혁의 속내를 짐작해 보았다.

인혁은 담배를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버릇처럼 필터를 두어 번 씹은 뒤 담배 연기를 내뿜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얀 숨이 까만 밤하늘에 흩어졌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 날 닮았을 수도 있고 제 엄마를 닮았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남자애고 오메가라는 건 알아. 애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인사한 게 전부거든.”

“…….”

“마지막 인사가 이런 거였어. 안녕, 아가. 아빠야. 얼른 널 만나고 싶어. 거기 건강하게 잘 있지? 오늘 아빠가 바빠서 엄마랑 같이 병원에 못 가네. 대신 삼촌이랑 다녀올 건데, 무서워하지 말고. 잘 다녀와. 이따 보자.”

인혁이 박자를 맞추듯 수민의 어깨를 톡, 톡, 두드리며 말했다.

인혁의 머리 뒤로 달이 환하게 떴다. 안쪽 입꼬리만 들어 올려 웃는 얼굴이 달빛에 환히 드러났다. 웃고 있는데,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얘기, 재미없지?”

“…….”

아니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나 때문에 밤잠 설친 김에 해장국이나 먹고 가자. 이 근처에 맛있게 하는 데가 있거든.”

인혁이 앞서 걸으며 손짓했다.

“네.”

수민은 달빛을 쫓아 그를 따라 걸었다.

***

사흘 뒤, 변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성추행범이 차 사고가 나서 죽을 뻔했다고. 그 덕이라긴 말하면 찝찝하지만, 덕분에 어영부영 잘 마무리됐다고.

-이 새끼 자식이 둘인데 다 오메가래요. 피해자랑 나이도 비슷해요. 딸뻘한테 그 지랄을 한 거예요. 우씨, 저승사자는 도대체 뭐 하는 거래요? 데려가려면 제대로 데려가든가. 왜 데려가려다 말아?

경찰서에서 인혁을 말리느라 애썼던 신 변호사는 정작 일이 마무리되자 제 일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인혁이 핸드폰을 뒤로 멀리 떼고 질색했다.

“소리치지 마라, 귀 아파.”

-소장님은 경찰서에서 더했어요.

“난 소리 안 질렀어.”

-소리만 안 질렀지, 눈이 완전 사람 여럿 죽인 눈이었는데.

“살인도 한 적 없고.”

-그래야죠. 제가 살인죄까진 커버 못 해줍니다. 설령 누구 죽였어도, 저한텐 절대 말하지 마세요. 소장님 땅 많잖아요. 사유지에 깊숙이 묻고 그냥 미제 사건 만들어요. 괜히 뒤늦게 자수한답시고 나한테 말하지 말고. 아니면 공소 시효 끝난 다음에 말하든가.

“사람 안 죽였다고. 이게 나를 이제 살인범으로 몰려고 하네? 신변, 너 많이 컸다?”

-에이, 왜 또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농담이죠. 근데 왜 말이 여기까지 튀었더라? 아, 아무튼. 주차장에서 출근하려고 차 시동을 켰는데 갑자기 차가 급발진해서 벽을 박아 버렸다네요.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고, 본인만 다쳤는데. 꽤 크게 다쳐서 한동안 거동하기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고요. 언뜻 듣기로는 재활을 꽤 오래 해야 한다던데. 해도 뭐, 완전히 나을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고요.

“그래? 자세히도 듣고 왔네.”

-나쁜 새끼 망하는 이야긴 재밌으니까요.

“심보 좋게 써라. 암튼 고맙다. 나중에 진짜 밥 한번 먹자.”

-네, 꼭이요. 이러고 또 다음번에 경찰서에서 만날 거 알고는 있는데, 저 소고기 특수 부위 무척 좋아하-.

“끊는다.”

인혁은 전화를 끊고 빙글, 의자를 돌렸다. 수민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창가에 놓은 난인지 뭔지 모를 화분의 잎사귀를 천으로 닦는 중이었다.

“다 들었지?”

“…….”

동그란 뒤통수가 멈칫하는 게 보였다. 말만 걸어도 얼른 돌아보는 녀석이 계속 뒤통수만 보이는 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

상대방 목소리가 워낙 크기도 했고 남이 들어도 별 상관없는 내용이기도 해서, 인혁은 수민에게 왜 남의 전화를 엿듣냐고 타박할 마음은 없었다.

“천벌 받았단다, 그 새끼.”

“천벌이요?”

그제야 수민이 돌아보았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니, 다행이지.”

“안, 죽었나요?”

“그래. 그런데 안 죽었냐니, 무슨 질문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니. 수민아.”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뉴스 보면 자동차 급발진 사고로 운전자가 죽었다는 말 많이 나오던데. 그래서 그런 줄 알았어요.”

수민이 제법 길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긴. 위험하긴 하지. 자동차 급발진하는 거.”

인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튼튼해서 용케 살았단다.”

“……그렇군요.”

어쩐지 아쉽다는 듯 들렸으나 인혁은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성추행범이 차 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는데 뭐, 아쉬워할 수도 있지. 신 변호사도 왜 저승사자가 데려가려다 말았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하지 않았던가.

“너도 조심해. 차 사고는 내가 잘한다고 안 나고 그러는 게 아니니까.”

“저 차 없는데요. 운전면허도 없고.”

“그래? 그래도 나중엔 차 사고 운전도 하게 될 거 아냐.”

“글쎄요.”

“글쎄요는 무슨. 아무튼 차 살 땐 무조건 튼튼한 거로 사. 새 차 사는 게 제일 좋고, 중고 사려면 차 잘 아는 사람 꼭 데리고 가고. 모르면 나한테 물어보든가. 그런 곳은 나이 많은 어른이랑 가야 해.”

인혁이 책상 위 서류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살 곳도 마땅치 않아 인혁의 도움을 받고 있는 수민이 차를 사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단 한참 돈을 모아 월세로든 전세로든 번듯한 집을 구하고, 그런 다음에 차를 살 생각을 할 수 있으리라. 그 먼 훗날의 일을, 인혁은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다. 나랑 가자.

수민은 한 번도 운전면허를 따거나 차를 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차를 타고 멀리 나갈 수 있다는 건 동선이 넓어진다는 의미였다. 혹시나 수사망이 좁혀지면 알리바이에 빈틈이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운전을 배우지 않았다.

이후에도 필요성을 못 느껴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저와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제 와 새삼, 운전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가자는 말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운전면허를 따고 인혁과 함께 차를 사러 가는 미래. 생각만 하는 건데도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해졌다.

정작 말한 사람은 제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생각도 못 하고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민은 손가락에 남아 있는 희미한 기름 자국을 천으로 꼼꼼하게 닦으며 대답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