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5. 오수민, 23세, 오메가 (5)
인혁과 박 씨는 꼬박꼬박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 그러다 박 씨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수민 학생 미안. 내가 진짜, 답답한 걸 싫어해서. 하지만 집에 고이 모셔 놨어. 어디 가거나 중요한 자리에선 꼭 맬게.”
다시 목을 풀어 헤치고 출근한 날. 박 씨가 손을 싹싹 비볐다. 수민은 박 씨가 넥타이를 매고 다니든 말든 별 상관이 없었기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혁은 이후로도 계속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 박 씨처럼 요란하게 티 내진 않았지만, 정말 매일매일 하고 다녔다.
수민은 서 여사가 사준 스웨터와 남방을 깨끗이 빨아 번갈아 입고 출근했다. 점심 먹고 시간이 남으면, 소파에 앉아 박 씨가 선물로 준 게임기를 만지고 놀았다. 그러면 박 씨는 뿌듯해하며 실실 웃어 댔다. 아닌 척하지만 좋아하는 티가 너무 났다.
“그렇게 재밌어? 안 사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
점심 먹으면 졸린다며 의자에 기대 낮잠이나 자던 사람이,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와 게임 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니, 거기선 그렇게 가면 안 되지. 어휴, 줘 봐. 내가 또 오락실에서 백 원으로 반나절이나 버틴 실력을 선보여 줘야겠구만.”
때론 훈수를 두다 못해 자신이 해보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면 수민은 게임기를 넘기고 박 씨의 게임 실력을 구경했다.
대개, 단돈 백 원으로 반나절이나 버텼다던 박 씨의 점수는 수민의 것보다 훨씬 낮았다. 그래도 수민은 힘껏 손뼉 쳤다. 짝짝짝.
“날 동정하지 마. 너무 오랜만에 해서 손이 굳어서 그런 거야. 내가 왕년엔 정말 알아줬다니까?”
박 씨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며 투덜댔다.
“네.”
“네? 그게 끝이야? 수민 학생, 설마 안 믿는 거야?”
“믿을게요.”
“안 믿네, 안 믿어.”
“아니에요. 진짜 믿어요.”
“목소리에 영혼이 담기지 않았어!”
“…….”
어떻게 하면 목소리에 영혼을 담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머리 위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공부 안 해? 계속 게임만 할 거야?”
인혁이었다.
“아니, 왜 애 게임 하는 꼴을 못 봐. 왜 자꾸 공부하라고 그래. 공부가 인생이 전부야?”
“쟤 검정고시 봐야 해요. 게임 할 시간이 어딨어.”
“왜? 공부하면서 틈틈이 게임 하는 게 뭐 어때서?”
“공부를 안 하잖아요. 툭하면 게임만 하면서.”
“그럴 리 없어. 그치, 수민 학생?”
“…….”
수민은 자리에 앉아 이럴 때 아니면 펴보지도 않는 검정고시 교재를 폈다.
“하핫, 뭐, 원래 시험공부는 닥쳐서 벼락치기로 하는 거라고!”
박 씨가 애써 편들어 줬지만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늘 이와 비슷한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수민은 자신이 출근하는 곳이 평범한 사무실이 아니라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라는 곳이라는 걸 깜빡 잊었다.
두 번째 월급날이 며칠 안 남은 어느 날 저녁. 수민은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가 어떤 곳인지 경험했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조용한 사무실에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사무실의 유선 전화와 사무실 사람들의 핸드폰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벨 소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크다는 것.
“뭐야, 퇴근 시간에 연락하는 이 몰상식한 놈은?”
으하암, 박 씨가 하품하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대고 몇 초 후, 박 씨의 눈빛이 돌변하였다.
“오케이. 대기해. 바로 갈 테니까.”
박 씨가 전화를 끊으며 소리쳤다.
“됐어, 꼬리 잡혔어. 성남 쪽이야. 바로 가면 돼.”
인혁과 서 여사가 바로 일어났다. 박 씨는 바로 문 쪽으로 달려가다가 멈칫했다.
“아, 수민 학생은 어쩌지?”
박 씨가 말했다. 그제야 인혁과 서 여사가 수민을 돌아보았다. 수민은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검정고시 교재를 펴놓았지만, 눈은 이미 문으로 가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수민은 당연히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넌 지금 바로 집에 가.”
인혁이 말했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닌데요.”
“상관없으니까.”
“저도 같이 가면-.”
“안 돼.”
인혁이 단칼에 수민의 말을 잘라 냈다.
“…….”
수민은 저도 모르게, 도움을 구하듯 서 여사를, 또 박 씨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면 서 여사와 박 씨가 알아서 나서 편을 들어 주곤 했으니까. 수민은 이번에도 서 여사와 박 씨가 나서 줄 거라고 생각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래, 수민 학생. 얼른 가. 택시 타고, 아니, 혹시 모르니까 사람들 많은 데로 움직이고 버스나 지하철 타고. 응?”
“집에 가서도 문 꼭 잠그고 있어. 이상한 사람이 와서 문 두드려도 바로 열어 주지 말고.”
서 여사와 박 씨는 한술 더 떠 퇴근 후 행동 지령까지 내렸다.
“…….”
수민이 가만히 바라보자 박 씨가 하핫,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냥, 그냥. 혹시나 해서.”
“들었지? 얼른 들어가.”
인혁이 마침표를 찍었다.
세 사람은 계속 문 쪽을 바라보면서도 수민에게 먼저 퇴근하라고 재촉했다.
“……네.”
수민은 일단 그들의 말대로 했다.
건물을 나와 골목을 꺾어 들어갈 때 즈음, 등 뒤로 회전하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주차되어 있던 차가 급히 속도를 올리는 소리였다. 무척 다급하게 느껴졌다.
***
무슨 일인지 대강이나마 사정을 알게 된 건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여느 때처럼 출근하고 사무실을 청소했지만, 9시가 넘었는데도 누구 한 명 출근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박 씨와 서 여사가 피곤에 찌든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수민 학생, 안녀엉. 어제 놀랐지이이이…….”
박 씨가 소파에 털퍼덕 엎어졌다.
“으아, 죽겠다.”
서 여사는 삭신이 쑤시는지 어깨와 팔다리를 주물러 대며 의자에 기댔다.
“아, 김 소장은 오늘 좀 늦을 거예요. 일 마무리할 게 있어서.”
그리곤 그대로 잠들었다. 박 씨도 마찬가지였다.
수민은 첫날 인혁이 담요를 꺼내 주었던 캐비닛을 열었다. 낡은 담요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중 제일 깨끗해 보이는 걸 꺼내 서 여사와 박 씨를 덮어 주었다.
사무실 온도를 좀 더 높이고, 가습기를 틀었다. 불은 끌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놔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에 돌아가 앉아 두 사람을 관찰했다.
둘 다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물로 문질러 지우려 애쓴 거 같은데 얼룩이 남아 있었다. 향수를 뿌린 건지 인위적인 냄새도 났다. 고작 그 정도로 피 냄새와 자국을 지우려고 했던 걸까?
너무 어설펐다.
무엇보다 신발 바닥이 문제였다. 서 여사와 박 씨가 신은 운동화의 신발 밑창이 더러웠다. 얼룩덜룩하게 말라붙어 있는 것들이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바닥에 부스러져 떨어지면서 흔적을 남겼다.
수민은 휴지에 물을 묻힌 뒤 바닥을 살짝 닦아 보았다. 거스러미처럼 부스러진 것들이 물기에 닿자마자 흐물흐물하게 녹아 본래의 색을 드러냈다. 시뻘겠다.
이렇게 허술할 수가.
하지만 남 말할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수민이 할 수 있는 뒤처리 또한 허술한 임시방편에 불과했으니까.
특수 용액을 뿌리고 시멘트로 바닥을 다시 덮지 않는 이상 핏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갑자기 바닥 작업을 다시 하는 것마저 경찰이 냄새를 맡고 수사를 들어오면, 훌륭한 증거가 될 것이다. 차라리 가스 폭발을 위장해 건물을 부숴 버리는 게…….
수민은 생각하기를 멈췄다.
수민은 한숨을 쉬며 마른 휴지로 조심조심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쓸고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싱크대로 가 휴지를 태웠다. 라이터를 구하는 건 쉬웠다. 인혁의 책상 위엔 쓰지도 않은 라이터가 여러 개 굴러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런 다음 수민은 물티슈로 서 여사와 박 씨의 신발 밑창을 닦았다. 생각 같아서는 신발을 벗겨 바로 처리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잠에서 깰까 봐 그럴 수 없었다.
수민은 완벽하게 뒤처리하는 것보다 이들의 곤한 잠을 깨우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 생각이 이성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바꾸고 싶지 않았다. 수민은 정말로, 이들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물티슈를 화장실에 가져가 조금씩 변기에 넣어 내려보냈다. 환경을 생각하면 물에 녹지 않는 물티슈를 절대 변기에 넣어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안 되지만…….
수민은 <큰일 났네 왕형제들>에서 세 형제가 식탁에 모여 앉아 10분 동안이나 떠들었던 환경 오염 토론을 생각하며 한숨 지었다.
박 씨는 들어오면서부터 얼굴을 한쪽만 보이며 바로 소파에 다이빙했다. 서 여사는 두 손을 겉옷 주머니에 넣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앉아선 웃옷 소매를 길게 늘려 손을 가리려 애썼다.
그렇게 숨기려고 했지만, 숨겨지지 않았다. 박 씨의 왼쪽 뺨엔 길게 상처가 나 있었다. 다행히 처치는 받았는지 거즈를 붙였는데, 상처의 양 끝이 거즈 밖으로 드러났다. 얼굴과 목엔 다른 상처들도 나 있었다. 날카로운 것을 피하다 스친 것 같은데, 다행히 대부분 찰과상 수준인 것 같았다.
서 여사의 손에도 생채기가 나 있었다 손톱이 부러진 건지, 크게 베인 건지 손가락 세 개에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었다.
손등에 난 상처는 손톱자국이었다. 폭이 넓지 않은 걸 보니 여자가 범인인 것 같았다. 꽤 깊게 패 있었다.
누굴까. 뭘까.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어제 퇴근하기 전까지 멀쩡했던 두 사람의 얼굴과 손이 이렇게나 엉망이 된 걸까. 인혁은 돌아오지 않는 걸까.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수민은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가끔 눈을 깜빡이는 것만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
먼저 깬 건 서 여사였다. 안 좋은 꿈을 꾼 건지 몸을 꿈틀, 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 아직 잠에서 헤어나지 못한 얼굴로 사무실을 둘러보고는 수민과 눈이 마주쳤다.
“아…….”
수민을 보고야 정신이 들었는지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닦고 허리를 세웠다. 수민이 거울과 휴지를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서 여사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수민의 눈이 서 여사의 손끝을 향했다.
“이게,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좀 다쳤어요.”
서 여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수민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울을 잡아 주었다. 서 여사가 민망해하며 입가를 문지르는데, 박 씨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아우, 죽겠다. 어째 날이 갈수록 힘드냐.”
한쪽 머리가 푹 눌린 채로 고개를 든 박 씨도, 제가 뺨의 상처를 수민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는 걸 까맣게 잊은 듯했다.
“수민 학생, 굿모닝, 아니지. 지금이 굿모닝이 맞나?”
박 씨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거즈를 붙인 뺨이 수민의 눈에 정면으로 보였다.
“아이고.”
서 여사의 입에서 곡소리가 났다.
“어디 초상났어요? 서 여사님, 왜 그래?”
“앓느니 죽지. 그래, 초상났어, 내 초상.”
서 여사가 슬쩍 수민의 눈치를 보았다.
수민은 왜 그러냐고 묻지 않고 가만있었다. 서 여사는 고맙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 여사는 표정이 풍부하고 솔직한 편이라 속내를 알아내기 쉬웠다.
의외로 어려운 게 박 씨였다. 늘 방정맞게 굴지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 나쁘다거나 곤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귀찮을 뿐이었다. 겉과 속이 다르면, 겉을 보고 속을 바로 판별해 낼 수 없으니까.
두 사람이 모두 일어났을 때가 오후 5시 경이었다.
“으어, 출출하다. 김 소장은 뭐 하는데 여태 안 와.”
박 씨가 인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통화 뒤에 다시 소파에 흐느적흐느적 누웠다.
“이 근처랍니다. 오면 같이 밥이나 먹죠.”
“그래요. 아, 수민 학생. 점심 먹었어요?”
서 여사가 물었다.
수민은 고개를 저었다. 먹었다고 거짓말했다 들키면 귀찮아질 것 같았다.
“아이고.”
서 여사가 또 곡소리를 냈다.
수민은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보리차를 따뜻하게 데워 두 사람에게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은 황송하다는 듯 두 손으로 컵을 받고는 후후 불어 마셨다.
“무슨 일이냐고 안 물어봐서 게 참 고마운데, 미안하네. 왜 이러냐고 울고불고 매달리지 않아서 편한데, 왜 더 신경 쓰이지?”
쩝, 박 씨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수민과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별말 아니에요. 고맙다고. 수민 학생.”
“네.”
수민은 평소처럼 대답하고는 컴퓨터를 켰다. 그리곤 어제 박 씨가 준 서류를 펴놓고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서류에는 군데군데 박 씨가 적어 놓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것들을 더하여 깔끔하게 서류로 만드는 게 수민이 할 일이었다.
타닥타닥, 키보드 치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
“…….”
서 여사와 박 씨는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확실히, 평범한 반응은 아냐.”
“그쵸?”
20분 정도 지나자 인혁이 왔다. 수민은 키보드를 치다 말고 고개를 들어 인혁을 보았다.
인혁도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밤을 새운 사람처럼 얼굴이 푸석했다. 턱에 수염이 올라와 있고, 머리는 엉키고 뭔가 묻어 있고, 아무튼 엉망이었다.
넥타이와 코트만은 깨끗했다. 마치 더러워지기 전 안전한 데 벗어 놓고 들어갔다 다시 입고 나온 것처럼.
옷 안쪽에 묻은 걸 숨기려고 그런 거라면, 어설픈 위장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럴 거면 코트 단추라도 여밀 것이지.
수민은 불만 어린 눈으로 인혁의 피 묻은 셔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잘 넘겼어?”
박 씨가 물었다.
“네, 일단은. 그런데 인수인계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라, 다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경찰서도 몇 번 더 불려 갈 거 같고.”
“신 변호사 불렀지? 응? 무조건 정당방위였다고, 응? 에이씨, 그러길래 그만 때리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지나간 일은 잊읍시다.”
인혁은 질린다며 박 씨의 잔소리를 차단해 버렸다. 그리곤 캐비닛을 열어 안쪽을 뒤적이더니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셔츠를 꺼냈다.
“밥이나 먹고 헤어지죠.”
인혁이 셔츠 포장을 뜯다가 수민을 보았다. 수민은 계속 인혁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눈이 마주쳤다.
“별일 없었지?”
“네.”
“그럼 같이 밥이나 먹고 퇴근해.”
“네.”
“그래.”
그게 끝이었다.
‘그게 끝이야? 더 말 안 해?’
서 여사가 눈을 크게 뜨고 인혁을 바라보았으나 인혁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먼저들 가 있어요, 옷 갈아입고 가게.”
인혁이 코트를 벗고 넥타이를 끄르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
“수민 학생, 가요.”
박 씨와 서 여사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수민은 서 여사에게 끌려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인혁이 돌아서 더러워진 셔츠를 벗었다. 다부진 어깨와 잔근육이 보기 좋게 짜인 등이 드러났다. 어깨와 허리에, 크고 작은 자상이 나 있었다. 다 아물어 새 살이 돋아 있었지만, 흔적은 선명했다.
그 위로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아마도 어젯밤에 새로 생겼을 게 분명한 멍 자국이 시퍼렇게 나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둔탁한 각목 같은 걸로 얻어맞은 것 같은 크기인데.
그 몸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얀 새 셔츠가 금세 가려 버려 더 볼 수 없었다.
“수민 학생?”
“네.”
수민은 고개를 돌리고 서 여사를 따라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
다들 피곤해 멀리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만만한 1층 백반집으로 들어갔다. 백반집 사장인 미현이 아빠와 서 여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으르렁댔다.
“아무래도 여긴 싫어. 나가자. 내가 운전하는 한이 있어도 여기보다 맛있는 데로 갈 거야.”
서 여사가 새삼 호랑이 기운이 솟았는지 일행을 붙잡고 돌아섰다. 박 씨가 배가 등가죽에 붙었다고 우는 소리를 내며 서 여사를 붙잡아 어찌어찌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손님은 사무실 사람들뿐이었다. 박 씨는 익숙하게, 메뉴판에 없는 음식을 시켰다.
“탕 좀 뭐든 시원하게 끓여 줘. 고기는 6인분 주구. 재료 아끼지 말고 좋은 거 팍팍 넣어서, 응? 알지? 우리 몸보신해야 해. 젓가락 들 힘도 없어.”
“탕거리를 맡겨 놨나. 왜 오기만 하면 메뉴판에 없는 걸 찾아?”
미현이 아빠는 구시렁대면서도,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 놓았다는 듯 싱싱한 재료를 꺼내 들어 연포탕을 끓이고 불판을 내와 두툼한 삼겹살을 올려 주었다. 박 씨는 냄새만 맡아도 살겠다는 듯 냉장고로 가서 소주와 콜라를 꺼내 왔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연포탕과 고기를 안주 삼아 소주 한 병을 금세 비웠다. 연포탕이 끓기 전 내려온 인혁은 수민과 콜라를 마셨다.
“어으, 살 거 같다.”
“뭐, 먹을 만하네.”
“에이, 서 여사님. 솔직해집시다. 그냥 먹을 만한 수준은 아니지.”
“뭐?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박 씨, 미현이 아빠한테 무슨 사주 받았어? 자꾸 왜 이래?”
입에 먹을 게 들어가니 살 만한지 서 여사와 박 씨가 투닥거렸다. 인혁은 옆에서 듣기만 하다 가끔 예의상 한마디씩 더했다.
박 씨가 소주를 한 병 더 들고 왔다. 벌써 네 병째였다. 미현이 아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가게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갔다.
“딱히 당신들 편히 먹고 마시라고 자리 비워 주는 거 아냐. 우리 미현이 올 때 돼서 데리러 가는 거지.”
미현이 아빠는 마지막까지 서 여사와 눈싸움 했다.
“저 재수탱이.”
서 여사가 미현이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미현쓰 파더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박 씨!”
“아, 예. 예에. 저는 무조건 서 여사님 편.”
박 씨가 노릇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서 여사의 그릇 위에 올리며 깨갱, 움츠렸다.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더 돌았다.
술기운이 돌고 기분이 편안해졌는지, 서 여사와 박 씨가 수민에게 엉겨 붙기 시작했다.
“놀랐죠? 미안해요, 말 안 해줘서.”
“궁금했을 텐데 물어보지도 않고. 수민 학생이 아주 속이 깊어, 백 점 만점에 천 점이야. 만점!”
서 여사와 박 씨는 경쟁이라도 하듯 수민을 추켜세우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었다. 수민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인혁을 보았다. 인혁은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수민은 마음 편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세 사람이 지난밤에 했던 일은 사무실이 늘 해오던 현장 업무였다.
이번에 급습한 현장은 불법 포르노 촬영 현장이었다.
20대 초반의 알파와 오메가 청년들에게 불법 대출을 알선해 준 뒤 그 빚을 빌미로 끌고 와 강제로 흥분제를 먹여 포르노를 촬영하고 파는 일당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제보를 바탕으로 지난 몇 주간 그 일당의 위치를 추적했다.
수민은 박 씨가 타이핑해 달라고 넘겨주었던 서류에서 봤던 불법 대출 알선, 신체 포기 각서, 주로 20대 초반 청년들을, 따위의 단어들을 쉽게 기억해 냈다.
일당이 지역구 조폭이랑 연계되어 있어 현장에서 몸싸움이 있었다. 박 씨와 인혁의 몸에 난 상처는 그로 인한 것이고. 서 여사의 손에 난 상처는 급히 피해자들을 탈출시키다 난 것이었다.
수민은 서 여사의 손등에 난 손톱자국을 바라보았다. 저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 손톱의 주인은 꽤나 절실했으리라. 그리고 서 여사는 그 절실한 손길을 절대 뿌리치지 않았을 거고. 살점이 뜯겨도, 아픈 내색 않고 계속 손을 잡아 줬겠지.
그러면 인혁은?
수민은 인혁의 몸을 훑었다. 눈에 드러나는 상처는 없었지만, 수민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협약을 맺은 돌봄 센터 쪽으로 보냈다. 붙잡은 일당은 경찰 쪽에 넘겼다. 얻어터져 줄줄이 끌려오는 범죄자들을 맞이한 경찰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그런 제보가 들어왔으면 경찰에 알렸어야지, 왜 또 당신들이 들쑤셔 사고를 치냐고. 오히려 이쪽을 범죄자 취급하며 유치장에 가두려고 하는 바람에 밤새 지랄 맞았다고, 박 씨가 투덜댔다. 밤새 한숨도 못 잤던 건 그래서인 듯했다.
“지역마다 분위기가 좀 달라요. 어느 지역에선 그냥 그쪽 경찰이 잡은 걸로 공 넘기는 걸로 퉁 치자는 데가 있고, 어느 지역에서는 깐깐하게 붙잡고 늘어지는 데가 있고. 어제 일은 좀 깐깐한 데에 걸려서.”
“신 변호사만 고생이지 뭐.”
박 씨가 낄낄댔다.
“그냥 우리가 평소 하는 일을 한 거예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놀라지 말고.”
서 여사는 수민이 놀랄까 봐 얼른 덧붙여 말했다.
“네.”
수민은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수민은 서 여사의 걱정과 달리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민망해하고 있었다.
괜히 나댄 거구나. 목덜미가 화끈해졌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수민이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는지 또 금세 소주를 한 병 뚝딱 비워 냈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한 건 해결! 이라는 거지.”
박 씨가 소주잔을 들며 외쳤다.
일이 잘 마무리돼서일까. 피곤하지만 개운해 보였다. 서 여사도 손이 아파 젓가락질을 잘 못 하면서도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수민은 열심히 서 여사의 접시에 고기를 날랐다.
“어우, 우리 수민 학생 없었으면 나 어쩔 뻔했어.”
서 여사가 수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는 코를 훌쩍였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따뜻했다.
“자, 자! 우리 일도 잘 마무리됐고, 생각해 보니까 수민 학생 환영식도 안 했잖아? 이 자리를 겸사겸사 그런 거 기념하는 자리로 삼고, 건배하면 어떨까, 응?”
박 씨가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좋지!”
서 여사가 얼른 소주잔을 들었다. 인혁은 서 여사의 재촉에 못 이기는 척 콜라잔을 들어 올렸다.
수민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콜라잔을 들어 세 사람의 잔에 함께 부딪혔다.
“좋았어, 위하여!”
“위하여!”
“적당히들 마셔요, 적당히들.”
“아아, 안 들린다. 안 들려어.”
“김 소장, 이럴 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치, 수민 학생.”
“…….”
“수민 학생, 왜 그렇게 예쁘게 웃어?”
“아이고, 서 여사님. 왜 그래요. 수민 학생 괴롭히지 말고 건배 건배!”
“내가 언제!”
“네에, 네에. 건배에.”
“오늘만 봐준다, 박 씨! 김 소장도, 조심해!”
“난 또 왜요?”
“몰라, 암튼 예쁜 수민 학생 빼곤 다 죽었어!”
화기애애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걸까. 흥겨워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박 씨, 듣기 싫다고 타박하는 서 여사, 그 둘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는 인혁. 수민은 세 사람 틈에 끼여 고개를 끄덕, 끄덕 움직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담요에 안긴 기분. 이상하게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였다.
수민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깜박, 잠들어 버렸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는데, 어깨에 뭔가 덮여 있었다. 머리도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 편안했다. 무엇보다 냄새. 그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나른해졌다.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민은 제가 인혁의 코트를 덮고 기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
언제? 당황하여 몸을 일으키려는데 커다란 손이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더 자. 아무래도 한참 더 할 거 같으니까.”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수민은 몸에서 힘을 빼고 그에게 기댔다.
편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
인혁의 숨소리를 따라 몸이 살짝 들렸다 가라앉았다.
노래 부르고 구박하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시끄러운데, 하나도 시끄럽지 않았다. 아득하게 멀어지며, 오직 인혁의 숨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수민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폐에 숨이 가득 차올랐다 꺼지고, 다시 가득 차올랐다가 꺼졌다. 따뜻하고 포근한 기분이 폐를 통해 온몸으로 퍼졌다. 독려하듯 어깨에 닿은 손길이 느리게, 하지만 꾸준하게 수민을 다독였다.
수민은 손에 닿은 코트 자락을 움켜쥐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수마가 밀려왔다. 몸이 바닥으로 푹 꺼지는 느낌은 늘 달갑지 않은 것이었으나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두렵지 않았다.
“잘 자.”
상냥해지는 게 어색한 목소리, 머뭇대지만 따뜻한 손길이 있으니까.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
***
“두 달 정돈가? 그동안 너무 조용했던 거지.”
도통 손에서 붕대를 풀 날이 없는 서 여사가 말했다.
“그건 그래요.”
얼굴에서 멍 자국이 가실 날 없는 박 씨도 동의했다.
두 사람의 말대로였다.
인혁까지 합하여 세 사람은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현장, 현장, 현장으로 나돌았다. 오전에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전화 한 통화 받고 뛰쳐나갈 때도 있었고, 점심밥을 먹다가 뛰쳐나갈 때도 있었다.
아마 밤중에 연락을 받고 뛰쳐나갔던 적도 있으리라. 그런 날엔 수민만 출근해 종일 사무실에 앉아만 있었다. 연락할 여유조차 없는지, 오후 느지막이 서 여사가 전화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해지기 전 일찍 퇴근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수민은 그런 날엔 저녁 8시까지 혼자 사무실을 지키다가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지난 두 달의 평화가 거짓말 같았다. 도통 세 사람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같이 점심이든 저녁이든 밥을 먹은 게 한 달 중 다섯 번도 채 되지 않았다.
이틀 또는 사흘 걸러 만날 때마다 몸에 상처가 늘어나 있었다. 잠을 못 자 눈 밑이 퀭한 건 기본이었다.
대한민국에 이렇게나 오메가 관련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경찰과 검찰은 뭘 하길래, 이 사람들이 이렇게 몸을 축내야 하는 걸까? 수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 같이 점심을 먹을 때 물어봤다. 인혁은 안 오고 서 여사와 박 씨만 있을 때였다.
“경찰도 경찰 나름대로 바쁘지. 거기도 불쌍해. 온갖 일에 동원되고,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도. 불쌍한 공무원들이야. 혹시라도 원망하지 말고, 그냥 불쌍하게 여겨 줘.”
박 씨는 경찰 편을 들었다. 의외였다.
“우리가 바빠 보이는 것도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수민 학생, 사실 우리가 그렇게 타율이 좋은 편은 아니거든. 헛발질도 많이 하고 그래. 요즘 돌아다니는 것도 열에 일고여덟은 허위 신고거나 함정이거나 착각이라거나, 그렇거든.”
그럼 좀 더 알아본 다음 확실할 때 움직이면 되는 거 아닌가? 수민이 묻자 박 씨가 쓰게 웃었다.
“제보가 들어오면 의심스럽든 아니든 무조건 현장에 가봐야 한다는 게 김 소장 신념이라서.”
탓하는 게 아니었다. 박 씨는 오히려 김 소장을 안쓰러워했다.
“예전에…… 아니, 뭐. 그 얘긴 됐고. 아무튼, 그렇다고 우리가 마냥 뺑이 치는 건 아니고. 나름 알아본 다음에 움직이긴 해. 우리 지난 두 달 동안, 그냥 놀았던 건 아니거든. 봤잖아? 많이 조사하고, 알아보고 그랬다니까? 지금 바쁜 건 다 그때 밑 작업했던 게 입질이 걸려서, 그래서 그런 거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이 시기만 지나면 또 한가해질 테니까 그때까지만 사무실을 잘 부탁한다고. 박 씨가 말했다. 수민은 그때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한가한 시기가 돌아오기 전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겨울과 봄의 경계 사이에 선 어느 날의 일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인혁과 박 씨, 서 여사가 튀어 나갔다. 이젠 어떻게 퇴근하라는 말도 없었다. 그만큼 익숙해져 버린 것이었다.
수민은 종일 사무실을 지켰다. 박 씨가 타이핑을 부탁하지 않으니 컴퓨터를 켤 필요도 없었다. 서 여사가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꼬시지 않으니 우체국에 갈 일도 없었다. 인혁이 공부 안 하냐고 구박하지 않으니 검정고시 교재를 펼 이유도 없었다.
수민은 그냥 책상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저녁 6시.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문득, 깨달았다. 아침에 깜박하고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내일 출근해서 해도 될 일이었다. 해지기 전에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 그냥 집에 가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혼자 사무실에 남았을 때 한 번도 정시에 퇴근한 적이 없다. 저녁 8시나 9시까지 기다렸다. 그때쯤엔 오지 않을까 해서. ‘여태 집에 안 갔어? 밥은? 안 먹으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을까 해서. 혹시나, 혹시나.
그날도 그랬다.
수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무실 불을 환히 켜고, 천천히 화분에 물을 주었다.
저녁 8시.
역시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 오긴 했다. 하지만 수민이 기다리던 사람은 아니었다.
인혁의 책상이 놓인 창가 쪽 난 화분에 물을 흠뻑 준 뒤, 찬장을 열어 영양제 박스를 꺼낼 때였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잔뜩 소리를 죽인 움직임이 느껴졌다.
낯선 기척이었다.
수민은 눈치채지 못한 척 태연히, 화분에 영양제를 하나씩 꽂았다. 세 번째 화분에 영양제를 꽂을 때였다.
등 뒤까지 침입자가 다가왔다. 긴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번뜩이는 금속의 섬뜩함이 허공을 갈랐다.
수민은 곧바로 몸을 굽히고,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반격을 예상치 못했는지, 침입자가 너무 쉽게 휘청였다. 수민은 곧바로 몸을 돌려 허공에 붕 뜬 발을 잡고 들어 올렸다.
“악!”
침입자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침입자는 덩치 큰 남자였다.
침입자는 탕비실과 사무 구역을 구분한 파티션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졌다.
챙그랑, 침입자가 칼을 놓쳤다. 수민은 칼을 멀리 차고 손을 발로 짓이겼다.
“아악!”
헤픈 비명이 들렸다.
수민은 세 번째 화분을 들어 침입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
화분이 깨지고, 침입자의 이마도 깨졌다.
억, 소리가 나며 침입자가 몸을 꿈틀거렸다. 수민은 망설이지 않고 두 번째 화분을 들어 다시 한번 침입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
“…….”
수민은 무심히 침입자를 내려다보았다.
침입자의 팔다리가 볼썽사납게 꿈틀대다 늘어졌다. 수민은 잠시 기다렸다 침입자의 손바닥을 좀 더 세게 밟았다. 침입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발끝으로 침입자의 턱을 툭 쳤다. 턱이 돌아갔다. 역시나 침입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숨은 쉬고 있으나 의식은 없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쳐 매일 닦는 바닥이 더러워졌다. 수민은 그게 못마땅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수민은 하나 남은 난 화분과 저 멀리 날아간 칼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가까이에 있는 것에 손이 갔다. 수민은 첫 번째, 아니, 마지막 화분을 들어 올렸다. 이거면 숨을 끊기 충분했다.
이제 내리치기만 하면 되는데. 문득 생각났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니, 다행이지.’
제게 행패를 부린 성추행범이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던 인혁이.
죽이면, 다행이 아닌 거겠지?
고요한 살의가 인혁의 말 한마디에 가라앉았다.
“…….”
수민은 화분을 내려놓고, 남자 옆에 앉아 경동맥에 손을 대보았다. 살아는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수민은 턱을 괴고, 살아는 있는 침입자를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왜 자신을 노렸는지, 궁금하나 궁금하지 않았다. 혹시 교단에서 자신이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찾아온 건 아닐까 의심했으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이 이렇게 허술할 리 없었다.
그러니 지금 수민의 고민은 하나였다. 이걸 사무실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치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단 치워 놔야 하지 않을까. 사무실 사람들이 보면 쓸데없이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치우자.
수민은 결론을 내렸다.
오늘도 인혁과 다른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을 거 같으니까. 들키지 않고 치우는 건 문제 될 게 없었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오수민!”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인혁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오수민, 어딨어. 오수민!”
인혁이 다급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수민을 발견하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수민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은 거지?”
“소장님?”
“다행이다, 다행이야.”
수민을 안은 팔이 심하게 떨렸다. 거친 숨이 수민의 어깨에 쏟아졌다.
수민은 조금 고민하다가 인혁이 제게 해줬던 것처럼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인혁은 흠칫 놀라더니 곧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인혁이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수민을 꽉 끌어안았다. 수민은 인혁의 왼쪽 가슴에 귀와 뺨이 눌렸다. 답답했지만,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저 괜찮아요.”
“……그래.”
“저 진짜 괜찮아요.”
“그래.”
인혁이 한숨 쉬듯 말했다.
“…….”
수민은 손을 내려 인혁의 팔을 잡았다.
문득 수민은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은데 왜 울고 싶은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당탕 쿠당탕 계단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발소리였다.
“김 소장! 수민 학생은!”
“수민 학생! 씨발, 머리카락 한 올 건드렸어 봐, 다 죽여 버릴 줄!”
인혁만큼이나 급하게 뛰어 들어온 서 여사와 박 씨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어…… 어?”
박 씨는 꽉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돌이 되어 버렸다.
서 여사는 박 씨보다는 덜 놀라고, 더 일찍 정신을 되찾았다. 수민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괴한에게 시선이 닿았다. 무슨 상황인지 대략 눈치챈 듯했다.
“다행이다.”
서 여사가 비틀대다가 소파를 붙잡고 섰다. 서 여사보다는 한발 늦었지만, 뒤이어 정신을 차린 박 씨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소파에 앉으려 했다.
“어딜!”
서 여사가 박 씨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왜- 읍.”
박 씨의 입까지 틀어막았다.
“으읍?”
“쉿!”
서 여사가 박 씨를 잡고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고개를 빼든 수민과 눈이 마주쳤다.
서 여사가 손으로 자신과 박 씨를 가리키고 또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인혁이 정신을 추스를 때까지 자리를 비켜 주겠다는 의미였다.
수민은 곧 서 여사가 인혁을 배려해 준 것임을 깨달았다.
인혁은 계속 수민을 안고 있었다. 그 소란이 있었는데도 서 여사와 박 씨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
그가 정신을 차리든 말든 수민은 상관없었다. 설사 이 밤 내내 제정신을 되찾지 못한다고 해도. 역시나 전혀 상관없었다.
수민은 인혁의 체취와 그 포근한 냄새를 가득 들이마시며 두 손으로 인혁의 허리를 껴안았다.
발은 어느새 누워 있는 남자의 경동맥 위에 가 있었다. 혹시라도 깨어나 인혁에게 허튼짓을 하려고 한다면 바로 숨을 끊을 수 있도록.
***
서 여사가 자리를 비켜 준 뒤 10분이 조금 넘었을까. 수민을 끌어안은 손이 느슨해졌다. 인혁이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나니 둘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수민은 아쉬움을 느끼며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아, 미안하다. 내가…….”
인혁은 수민을 완전히 놓지도 끌어안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수민을 내려다보았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흥미로웠다. 수민은 평소 볼 수 없는 인혁의 모습을 본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수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인혁은 뒤로 좀 더 물러서더니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서 여사님이랑 박 계장님은?”
인혁이 물었다.
수민은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여사와 박 씨가 서 있었다.
“하이. 김 소장?”
“이제 괜찮아졌어?”
서 여사와 박 씨가 문 안쪽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인혁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괴한의 처리는 인혁과 박 씨가 맡았다.
“야무지게도 때렸네.”
박 씨는 영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의 머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수민에게 엄지를 척 내밀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 여사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네.”
“대답을 잘해서 좋긴 한데. 다쳤다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저 괜찮아요.”
“정말?”
“네.”
“하긴, 수민 학생이 어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쳤으면 김 소장이 가만 안 있었겠지.”
“서 여사님, 그만 놀리세요.”
인혁이 박 씨와 침입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코트와 넥타이를 벗어 소파에 걸쳐 놓고, 셔츠 차림이었다.
두 사람이 침입자를 차에 싣고 경찰서에 다녀오는 동안 수민과 서 여사는 사무실을 정리했다.
수민은 대걸레로 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여러 번 대걸레를 빨아 오고서야 바닥에 흥건했던 핏물이 가셨다. 핏기가 가시고 다시 깨끗해졌지만, 그래 봤자였다. 육안으로는 안 보이지만 루미놀을 뿌리면 바로 핏자국이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이 사무실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하기 때문인지 그런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긴. 괴한을 경찰서에 들고 가 내가 때려잡았소, 자수하러 가는 사람들인데, 뭐.
“내가 그런 거야. 혹시 누가 와서 물어봐도 그렇게 말해. 알았지?”
“제가 그런 건데요?”
“누가 그래? 내가 그런 거야. 날 죽이려고 공격하려고 해서 내가 화분으로 이 새끼 머리 깨버린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냐. 서 여사님이랑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수민은 인혁이 떠나기 전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착한 사람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인혁과 박 씨는 금방 돌아왔다. 수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렇게 생각한 걸 후회했다.
다행이 아니었다. 차라리 경찰서에 붙잡혀 밤을 새우고 내일, 아니, 더 늦게 돌아왔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수민이가 여기서 더 일하는 건 위험할 것 같습니다.”
그랬어야 이런 소리를 안 들었을 텐데.
“내가 너무 안일했어요. 한동안 사무실을 습격해 오는 멍청한 개새끼들이 없었어서 방심했어. 이 세상엔 아직도 골 빈 새끼들이 차고 넘치는데.”
인혁이 모두를 소파에 앉혀 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역시 수민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수민이 급히 말을 꺼냈으나.
“넌 가만히 있어.”
인혁이 수민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긴. 그동안 별일 없어서…… 좀 안일해졌던 면이 없지 않지.”
“맞아요. 우리가 아는 일이 안전한 일은 아닌데.”
박 씨와 서 여사가 인혁의 말에 수긍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반성하기까지 했다.
“저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
“괜찮아요.”
“네가 괜찮아도 우리가 안 괜찮아.”
인혁은 단호했다.
평소라면 왜 그리 매정하게 구느냐고 수민의 편을 들어 주었을 서 여사와 박 씨가 오늘은 잠잠하였다. 수민은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무르게 굴긴 했어.’
‘철모르고 한겨울에 꽃놀이 판을 벌였던 거지.’
수민의 마음도 몰라주고, 서 여사와 박 씨는 자책이나 할 따름이었다.
수민이 사무실에 오기 직전에 연거푸 안 좋은 일이 겹쳤다. 기를 쓰고 뒤쫓던 범죄 현장을, 피해자들을, 코앞에서 놓쳤다. 겨우 찾아가니 피해자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인혁을 모델로 삼은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서 외부의 압력이 심해졌다.
대한민국은 공권력이 영토 구석구석에까지 잘 파고든, 세계에서 보기 드문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사적으로 범죄 현장을 들쑤시고 다니는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라는 게 있다. 기관이 보기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뛰는 인력이라면 모를까, 중간 관리자급만 돼도 인혁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인혁은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제도권 안에서 공권력에 협조하여 움직이는, 정목연 목사 같은 온건파들에게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인혁은 물을 흐리는 미치광이 미꾸라지였다.
피해자를 구하면 구할수록, 이름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적이 많아졌다.
모든 걸 각오하고 이 일에 뛰어들고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민을 만날 즈음에 서 여사와 박 씨는, 어쩌면 인혁마저도 꽤 지쳐 있었다.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상태에서 승원의 일까지 겹쳤다.
하필이면 그때 우유 냄새가 날 것 같은 말간 얼굴로 다가와 무엇도 묻지 않고 조용히 옆에 있어 주는 수민은, 큰 위로가 되었다. 본인은 자신이 사무실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인혁이 제 아들뻘인 아이들을 챙기는 거야 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민을 챙기는 건 처음부터 과한 면이 없잖았다. 서 여사와 박 씨는 그걸 알면서도 지적하기는커녕 부추겼다. 함께 어울려 웃고 떠들었다. 그러면서 즐거워 했다.
수민은 조용히, 성실히, 평범하게, 곁에 있어 주었다. 사무실 사람들은 수민을 놀리고, 수민과 같이 떡볶이를 먹고, 수민과 같이 게임을 하면서, 한숨 돌리고 여유를 되찾았다.
지난 두 달은 서 여사에게나 박 씨에게나 세간에서 말하는 힐링 타임, 뭐 그런 비슷한 거였다.
왜 하필 수민이냐고. 그 위안이 승원이나 다른 아이일 수는 없었냐고 묻는다면 다른 할 말은 없었다. 하필 그때 수민을 만나서, 수민이라서라고 말할 수밖에.
사람 일이 어디 마음먹는 대로 된다던가. 애초에 그들은 승원이나 다른 아이들을, 수민을, 위안으로 삼을 생각을 한 적도 없었는데.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십수 년이나 이 짓거리를 하고 살 수 있었을 리가.
오랜 세월, 버티고 버텨 이제 제법 무뎌졌다고 생각했건만. 그들의 마음은 아직 강철이 아니었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애써 수민의 시선을 외면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인혁의 말대로 해야 한다. 그걸 머리로는 아는데, 그간 쌓은 정이 무서워 마음이 자꾸 수민에게로 향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위험하긴 했지만, 어쨌든 수민이 잘 버텼지 않은가. 일을 야무지게 잘한다 싶었건만, 침입자까지 야무지게 잘 잡고.
이참에 수민을 제대로 키워서 사무실의 일원으로 삼으면 어떨까? 보기보다 단단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데. 승원이나 다른 애들과 달리 인혁에게 너무 달라붙지도 않고, 그냥 동경하는 듯 보이니까.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서 여사와 박 씨는 간절히 인혁을 바라보았다. 인혁이 얼굴을 구겼다.
“두 분.”
인혁의 목소리가 스산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나, 나도.”
서 여사와 박 씨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수민은 두 사람이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겪어 봐서 알겠지만.”
“전 괜찮았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위험해.”
“전 괜찮아요.”
“너한테는 더 위험하고. 아까 센터 쪽에 연락했어. 거기서 좀 지내다 보면, 여기보다 훨씬 좋은 일자리 알아봐 줄 테니까.”
“전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어요.”
“애처럼 굴지 마. 안 되는 거 알잖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인혁이 언성을 높였다.
“전 괜찮아요.”
수민은 꿋꿋하게 대답했다.
하아, 인혁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엉클어뜨렸다.
“계속 이렇게 말 안 들으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아까부터 계속 그러시잖아요.”
“정말 내 마음대로 해봐? 너, 오늘로 해고야. 그만둬.”
“싫어요.”
“싫어도 소용없어. 내가 여기 소장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수민에게 직접, 조항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고용 계약서를 읽어 주었던 고용주가 말했다.
“이건 부당한 해고예요.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해고하는 건 불법이에요.”
배운 걸 잊지 않은 고용인이 반박했다.
“네 안전이랑 관련된 문제야. 고용인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해고니까 사유가 되겠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사람을 자르는 게 어딨어요.”
“해고 예고 수당이랑 다른 것들 충분히 챙겨 줄 테니까. 일단 받고, 노동청 가서 신고해.”
“업무 변화 없고, 사무실이 멀리 이사 가지 않아서 통근 시간이 늘어난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전 제가 위험하다고 느낀 적 없어요.”
“오늘, 이 일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와?”
“네. 그러니까 이건 부당해요. 절 자르지 마세요.”
“하아, 수민아.”
“그렇게 이름 부르셔도 소용없어요. 전 안 잘릴 거예요.”
“내가 자르면 끝이지.”
“아니요, 전 안 잘릴 거예요.”
꿋꿋이 출근할 자신이 있었다. 자른다 한들 인혁이 뭘 어쩔 수 있겠는가.
“너 TV에서 안 봤어? 네 책상이랑 의자랑 없어질 거야. 너 이제 여기 와봤자 앉을 데도 없어.”
“소파에 앉으면 돼요.”
“아예 못 들어오게 할 건데?”
“문 따고 들어오면 되잖아요. 열쇠 반납 안 할 거예요.”
“열쇠 바꾸면?”
“벽 타고 창문 통해서 들어올 거예요.”
“뭐? 위험하게 그게 무슨 짓이야.”
“그러니까 열쇠 바꾸지 마세요.”
수민이 잠깐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한 번만 위험하면 돼요. 소장님 책상에서 열쇠 훔치면 되니까.”
“이거 말하는 거 보게.”
인혁이 헛웃음을 터뜨리곤 달래듯 말을 이었다.
“수민아, 너 이렇게 말하는데 왜 그동안 말 안 했니.”
“그땐 해고 위험이 없었으니까요.”
“두 번 해고하면 난리 나겠네.”
“그러니까 한 번도 하지 마세요.”
“…….”
인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너, 잘리면 월급 없어.”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협박이었다. 하지만 수민에게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전 월급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월급 안 받으면 뭐 먹고 살려고?”
“소장님이 하지 말라고 했던 야간 아르바이트할 거예요.”
“내가 밤에 일하지 말라고 했지.”
인혁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그러니까 저 자르지 마세요.”
“지금 협박하는 거니?”
“저 해고하면, 저 밤에 일할 거예요. 그리고 아침에 벽 타고 올라와서 여기로 출근할 거예요. 소파에 앉아서 일할 거예요.”
“…….”
인혁이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으나 또 아무 말 없이 다물었다. 그걸 몇 번 더 반복했다.
“내가 보기엔 김 소장이 진 거 같은데.”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서 여사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박 씨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 여사님.”
인혁이 서 여사를 노려봤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봐? 이거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거야. 수민 학생한테 말발로 밀려 놓고, 왜 나한테 화풀이야.”
박 씨와 나란히 앉아 있던 서 여사가 수민의 옆자리로 넘어왔다.
“정말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어요? 그래도 되겠어요?”
“네.”
수민은 얼른 대답했다.
“오수민.”
인혁이 수민을 협박하듯 불렀으나 수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앞으로 또 이런 일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상관없어요.”
“음…….”
서 여사가 난감해하며 박 씨를 건너보았다. 박 씨의 표정도 서 여사와 비슷했다.
위험하니까 여기 말고 다른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야겠다는 마음 반. 인혁에게 대들면서까지 여기 있고 싶어 하는데, 본인의 마음이 그렇다는데, 그냥 계속 같이 있으면 안 될까 싶은 마음 반.
마음이 아직 강철처럼 무뎌지지 못해서 자꾸만 흔들렸다.
“수민 학생. 혹시, 무슨 운동 같은 거 좀 배워 봤어?”
박 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 계장님.”
인혁이 화내듯 박 씨를 불렀다. 어이구, 무서워라. 박 씨가 엄살을 부리며 수민에게 얼른 대답해 보라고 신호를 보냈다.
운동. 운동이라. 수민은 잠시 고민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운동’은 배워 본 적 없었다.
“딱히 운동 배운 것도 없는데, 그 덩치를 넘어뜨려서 제압했어? 본인은 다치지도 않고?”
“…….”
“수민 학생, 사실 엄청 능력 있는 건지도 몰라. 진천 선수촌에서 놓친 인재, 뭐 그런 거.”
“박 씨,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일단, 한 번 운동을 시켜 보면 어떨까. 수민 학생이 자기 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면, 그러면 우리랑 계속 같이 있어도-.”
“박 계장님.”
“김 소장도, 안 된다고 말만 하지 말고. 생각해 봐. 열쇠 바꿔도 벽 타고 올라온다잖아. 수민 학생이 말만 그렇게 하는 거 같아?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네, 맞아요.”
수민은 대답했다.
“얼씨구?”
인혁이 어이없어하며 수민을 보았다.
“그니까 일단, 당분간은 우리 중 한 명이 사무실에 같이 남아 있거나, 일 있으면 수민 학생 먼저 들여보내든지 하고. 수민 학생도 이렇게 늦게까지 절대 혼자 사무실에 있지 말고. 응? 그렇게 조심하면서, 수민 학생한테 운동 하나 시켜 보자고. 그런 다음에 결정하면 되잖아.”
“일리 있네.”
서 여사가 동의했다.
“대신 수민 학생도 약속해 줘야 해. 운동을 좀 배워 보고, 아무래도 아니겠다 싶으면 김 소장 말처럼 센터로 가기로. 오늘은 어떻게 무사히 잘 넘겼다지만, 자기 몸 하나 지킬 힘도 없는데 우리 사무실에서 계속 일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어. 알지?”
박 씨가 어떠냐는 듯 수민을 보았다.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신체 능력을 기르는 것이 사무실에 남을 수 있는 조건이라면, 수민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네.”
수민은 바로 대답했다. 인혁이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김 소장도. 얼른.”
박 씨가 인혁의 팔을 툭툭 쳤다.
“자기 한 몸 지킬 수 있다는 평가는 누가 내리는 겁니까. 저요?”
인혁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니. 김 소장이 평가하면 수민 학생이 승복하지 않을걸.”
“네.”
수민은 냉큼 대답했다.
“너어!”
“어허, 김 소장. 죄 없는 수민 학생 고만 잡고.”
“그럼 누구요, 박 계장님?”
“나? 난 싫어. 김 소장이 날 얼마나 들들 볶겠어. 내가 그걸 어떻게 견뎌.”
“그럼 서 여사님?”
“난 좋은데.”
“서 여사님도 안 돼요.”
박 씨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서 여사님은 수민 학생 좋은 쪽으로 편파 판정 내릴 수 있으니까.”
“음.”
인혁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 여사의 고운 이마가 구겨졌다.
“그럼 누구!”
서 여사가 거칠게 물었다.
“내 지인이요. 완전 공정한 사람.”
박 씨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수민은 그 완전 공정한 사람을 다음날 오후에 소개받았다.
***
박 씨가 수민을 데리고 간 곳은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복싱장이었다. 복싱장은 사무실 건물보다 더 낡은 건물의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의 관장은 수민보다 반 뼘 정도 작지만, 근육으로 덮인 다부진 몸을 가진 여자였다. 머리는 반백의 짧은 스포츠형이었다. 처음 봤을 때 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리만치 납작하게 눌리고 부어 있었다.
“여긴 내 친구. 왕년에 전적은 화려한데, 이제는 그냥 밥만 겨우 먹고 사는 자영업자. 요즘엔 적자라고 다이어트 복싱? 그런 거도 강습하고 그러는데, 원래는 정통파라서 무조건 후배 양성만 했었어. 일반인 받아도 아마추어 대회 내보낼 급으로 연습시켜서, 회원들 인대 많이 아작 냈지.”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얘가 걔야?”
관장이 수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어. 내 후배.”
박 씨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후배?’
수민은 낯선 단어에 고개를 저었다. 그때 벽에 걸린 낡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관장과 그만큼 젊어 보이는 박 씨가 나란히 서 있었다. 둘 다 배 부분에 번쩍번쩍하고 커다란 황금 벨트를 두르고 있었다. 얻어맞았는지 얼굴 반쪽이 팅팅 부은 채로 젊은 박 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발치에는 탑처럼 생긴 트로피가 놓여 있었다.
“…….”
수민은 제 옆에 서 있는 박 씨를 보았다. 이 박 씨는 저 박 씨와 달리 술과 피곤에 찌든 중년 남자였다. 복싱장 관장보고 이제 한물갔다고 놀려 대지마는, 관장의 주먹 한 방이면 KO 당할 듯 비리비리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관장이 얼굴 좋아 보인다며 어깨를 툭 치자, 박 씨가 견디지 못하고 비틀댔다. 수민은 그가 넘어질까 봐 얼른 팔을 잡았다. 팔은 물렁물렁했다. 사진에서처럼 단단한 근육은 전혀 만져지지 않았다.
“고마워, 수민 학생.”
박 씨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수민을 지팡이 삼았다. 그걸 본 관장이 혀를 찼다.
“운동은 얼마나 했어. 복싱은 해본 적 있어?”
관장이 수민에게 물었다.
“운동은 해본 적 없어요.”
수민은 사무실에서 말했던 고대로 대답했다.
“말하는 꼬라지 봐라, 약해 빠져서는.”
관장이 못마땅해했다.
“복싱은 조금 해봤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민은 이어 말했다.
“엉?”
박 씨가 놀라 수민을 돌아보았다.
“운동한 적 없다며.”
“네.”
해본 적 없다, 운동은. 딱히.
“그런데 복싱은 해봤어?”
“네.”
“이게 뭔 소리야? 복싱은 운동이 아니라는 거야?”
“운동은 한 적 없어요.”
수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도 박 씨의 표정은 나아지질 않았다.
“이게 뭔 소리야. 난 못 알아듣겠는데, 넌 알아듣겠어?”
“니 후배라며. 너도 못 알아들으면서 나보고 어떻게 알아들으라는 거야.”
관장은 박 씨의 얼굴을 밀어 내며 벽에 걸려 있던 글러브를 수민에게 던졌다.
“아무튼 해봤다 이거잖아?”
“네.”
“그럼 올라와 봐. 얼마나 해봤는지 보게.”
“네.”
수민은 관장을 따라 링 위로 올라갔다.
“잠깐, 잠깐만. 뭐야. 보자마자 링 위로 데리고 올라가면 어떡해!”
박 씨가 기겁하며 뒤쫓아왔다. 차마 위에는 못 오르고, 하지 말라며 손을 휘저었다.
“니 후배라며.”
관장이 뭔 개소리를 하느냐는 얼굴로 박 씨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렇긴 한데. 운동을 해본 적 없는 애라니까?”
“해본 적 있다잖아.”
“아니, 그 말을 믿어!”
“넌, 저런 얼굴로 하는 말을 안 믿어?”
“뭐가?”
박 씨가 수민을 돌아보았다.
수민은 링의 코너에 서서 웃옷을 벗어 밖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글러브를 만지며 상태를 확인했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확실히 평범한 반응은 아니었다. 운동 배우자고 해서 쫄래쫄래 따라와선, 바로 링에 올랐는데도 당황하지 않다니. 무턱대고 글러브부터 끼려고 하지 않는 걸 보니, 복싱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세 부리는 것 같지도 않고.
근처에서 무슨 일인가 구경하던 선수가 눈치 빠르게 다가와 수민을 챙겼다. 수민은 제가 신고 있는 운동화를 그대로 신고 해도 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안 되죠. 발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핸드 랩 있어요? 줄까요?”
수민이 대답하기 무섭게, 선수가 실내화와 핸드 랩을 가져다주었다. 수민은 신발을 갈아 신고, 양손에 핸드 랩을 감았다. 제법 해본 듯 익숙했다.
“뭐야.”
박 씨가 입을 허 벌렸다.
“니 후배라매?”
“그렇긴 한데…….”
“니 뭐로 밥 먹고 산다 그랬지?”
“…….”
정보를 사고파는 일. 하루이틀도 아니고 지난 수십 년간.
“밥은 먹고 사냐?”
관장이 대놓고 비웃었다.
“그러게.”
박 씨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했다.
“계단 내려올 때 보니까 몸이 가볍던데, 자세도 똑바르고. 발놀림도 가볍고.”
“그랬어? 난 말라서 그런 줄 알았지.”
“그냥 마르기만 하면 저 자세가 안 나오지.”
관장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수민을 보니, 좀 다르게 보였다.
‘운동은 안 했는데 복싱은 좀 해봤다고?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운동 삼아 한 게 아니라는 걸까? 하지만 수민은 선수 출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박 씨나 관장이 모를 리 없었다. 박 씨는 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매년 신인전과 타이틀전을 꼬박꼬박 체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몸이, 선수의 몸이 아니었다. 그렇다기엔 너무 선이 얇았다.
“으, 머리야.”
박 씨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관장님, 헤드기어랑 마우스피스 끼고 하실 거예요? 관장님이 직접 잡아 주고?”
“됐어. 그거까지 껴서 뭐하게. 그리고 너 올라와. 내가 하긴 뭘 해.”
관장이 까딱까딱 손가락을 흔들었다. 한참 수민을 챙겨 주던 선수가 그럴 줄 알았다고 구시렁대며 링 위에 올랐다. 그리곤 수민이 돌려준 핸드 랩을 손에 감았다.
“잠깐만. 쟤 프로 준비하는 애 아냐?”
“맞아.”
“아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박 씨가 관장의 멱살을 잡았다.
“야, 여기 애 아빠가 걱정 많으니까 알아서 모셔라.”
“아아, 걱정 마십쇼. 저 일반인 상대로 막 진심 내보이고 그러는 쓰레기 아닙니다.”
선수가 글러브를 팡팡 치며 말했다. 참 믿음직했다. 반어법으로다가.
“됐지?”
관장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되긴 뭐가 돼! 수민 학생. 이리 와, 얼른. 거기 걔, 프로 데뷔 준비 중인 애야. 한 대만 맞아도 큰일 난다고!”
관장을 쪼아 대서 될 일이 아니었다. 박 씨가 수민에게 파닥파닥 손짓했다.
운동시키려고 데려온 거지. 저 예쁜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려고 데려온 게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 되면 그 후환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서 여사님은 둘째 치고 김 소장이 날 아주 씹어 먹으려고 들 텐데.’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괜찮아요.”
수민이 박 씨에게 손을 흔들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어제 수민의 괜찮아요 공격에 녹다운 되었던 인혁을 떠올리곤, 박 씨가 언성을 높였다. 얼른 이리 안 와?
“안 맞을게요.”
“뭐?”
“하하?”
박 씨와 상대편 선수, 두 사람 다 황당하다는 듯 수민을 바라봤다.
“저거 봐라.”
관장만 재밌어하며 링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내려오면 어떡해!”
“그럼 니가 칠래?”
관장이 종을 쳤다. 땡.
“유머 감각이 남다르시네요.”
상대편 선수가 링 중앙으로 나와 수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 하하. 진짜 재밌는 분이네.”
수민도 그를 따라 했다. 핸드 랩을 감을 때와 달리 어색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박 씨의 가슴은 더욱 크게 방망이질 쳤다.
‘보인다, 보여. 한 방에 나가떨어져 저 고운 얼굴이 묵사발이 되고, 나는 서 여사님과 김 소장한테 묵사발 되는 미래가.’
그리 머지않은 미래이리라. 당장 한 시간 뒤?
“잔말 말고, 시작.”
관장이 다시 종을 쳤다.
“일반인 상대로 진심을 다하진 않을 건데. 딱 한 대는 때릴게요. 그래야 할 거 같네. 이건 내 자존심 문제라. 미리 죄송.”
선수가 자세를 낮추더니 바로 어퍼컷을 날렸다.
‘저 한 방이 그 한 방이겠구나.’
박 씨는 아찔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수민이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차마,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정이 이렇게나 무서웠다.
이제 퍽 소리가 들리고 데굴데굴, 마른 몸이 바닥을 뒹구는 소리가 들리리라.
들려야 하는데.
……들리지 않았다.
“뭐해, 쪽팔리게. 눈 떠.”
관장이 박 씨를 툭 쳤다. 박 씨는 비틀거리며 실눈을 떴다.
‘뭐지?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지? 너무 가벼워서, 링 위로 날아올랐다 떨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야?’
언제 죽을지 모르고 죽을 때만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마음으로 링을 살폈건만. 아직 수민이 링 위에 있었다. 무려 두 발로 바닥을 밟고 서 있는 채로.
“어?”
박 씨가 눈을 크게 떴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게 아니었다. 박 씨가 듣고도 못 들은 척, 마음의 문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삑, 삐익, 끽, 끽. 스텝 밟는 소리가 쉼 없이 들렸다. 헉, 허억, 헉. 숨소리도 들리고. 쉭, 쉬익, 쉭. 글러브 낀 팔이 허공을 가르며 상대방에게 날아가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정작 들려야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상대편 선수의 잽을 날리는 족족, 수민이 피했다. 두 팔로 막아 피하는 게 아니라 뒤로 물러나고 좌우로 몸을 움직여서.
“이게 뭔…….”
“어디서 데리고 왔어, 저거.”
관장이 물었다. 심드렁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뜬 건지 감은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던 눈이 번쩍 뜨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몸놀림이 장난이 아닌데. 진짜 후배야? 우리 쪽?”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그러게…… 뭘까?”
박 씨가 멍하니 수민을 바라보았다.
수민이 자꾸 피하니, 선수는 바짝 약이 올라 무리하게 잽을 날렸다. 그 바람에 자세가 흐트러져 빈틈이 보였다. 박 씨의 눈에 보이는 게 수민의 눈에 안 보일 리 없건만. 수민은 피하기만 할 뿐 공격하지 않았다.
“씨발!”
선수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수민은 가볍게 스텝을 밟고 피했다. 선수가 크게 몸을 돌며 잽을 날리는 것마저 피했다. 수민은 휘청이는 상대편 선수를 두고 또 뒤로 물러났다.
“아!”
박 씨는 아쉬움에 탄성을 내질렀다. 저기서 한 방 먹였으면. 그랬으면!
‘근데 왜 공격을 안 하지?’
피하는 속도를 보면, 분명 주먹도 제법일 것 같은데.
‘설마?’
문득 떠올랐다. “한 대만 맞아도 큰일 난다고!”라고 소리치는 박 씨에게 손을 흔들며 “괜찮아요.”라고 말하던 수민의 모습이.
설마 그 말 때문에 안 맞으려고 피하기만 하는 걸까? 허, 박 씨가 허탈하게 웃고는 배에 힘을 빡 주었다.
“수민 학생! 쳐! 한 대 쳐! KO 시켜!”
“뭔 소리야. 말했잖아, 프로 준비하는 애라고.”
관장이 핀잔을 줬다. 수민을 먼저 알아보고 높이 평가한 주제에, 제가 키운 선수급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 오만함이라니. 박 씨는 관장의 오만함을 꼭 깨부수고 싶었다.
“수민 학생, 어제 말했지. 내 한 몸 지킬 수 있어야 계속 우리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다고.”
수민은 답이 없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대답은 못 들었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피하기만 하면 어떡해.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한 방 먹여! 수민 학생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는 걸 나한테 보여-.”
“컥!”
박 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민이 상대방의 턱을 갈겼다. 말 그대로 뻑 소리가 나며 선수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선수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퍽.
박 씨가 무서워했던 그 소리가 들렸다.
선수가 바닥에 쓰러졌다.
“헤드도 안 꼈는데 얼굴을 치면 어떡해.”
관장이 땡, 종을 치고 링 위로 올라갔다.
“야, 아까 수민이 얼굴에 어퍼컷 날리려던 게 누군데!”
어느새 수민 학생이 수민이 되었지만, 박 씨는 깨닫지 못하고 덩달아 링 위에 올라갔다.
“그건 그거고.”
“뭐가 그거야. 선수가 일반인 얼굴 쳐도 된다는 거야? 엉?”
“일반인은 무슨. 쟤. 어디서 데리고 왔어? 윤 관장이랑 짜고 우리 물 먹이려고 온 거야?”
“윤 씨발을 나한테 왜 가져다 붙여. 말했잖아. 후배 운동 시키려고 데리고 왔다고.”
“그냥 운동? 선수급을 때려눕히는 실력으로?”
“그러니까 제대로 좀 기르지. 어? 선수급이라면서 일반인한테 맞고 쓰러지냐?”
“야, 박 씨발, 너.”
“박 씨발? 왜 이 씨발아.”
“뭐 인마?”
“그래, 임마!”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관장과 박 씨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아웅다웅 다투기 시작했다.
둘은 금방 30년 전으로 돌아가 정겨운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때 니가 내 붕대 다 찢어 놨지, 내 글러브 빌려줬더니 걸레로 만들어 놔? 등등.
그 사이 수민은 다른 회원의 도움을 받아 쓰러진 선수를 일으켜 링 밖으로 꺼내고 매트에 눕혔다. 뇌진탕 증세가 있는지 확인한 후 물을 먹여 주었다.
얼마 안 있어 선수가 눈을 떴다.
“와…… 대박.”
한 대 맞고 날아간 정신은 되돌아오지 않았는지, 눈을 뜨자마자 감탄부터 쏟아 냈다. 수민은 다시 한번 뇌진탕 증세가 있는지 확인했다.
“어디 복싱장 다녀요? 이번에 대회 나와요? 이름이 뭐예요? 베타 맞죠? 페로몬 안 느껴지는 거 보니까 베타 맞는 거 같은데. 난 알파거든요. 와, 베타가 이렇게 세도 되는 건가? 완전 쪽 팔린데, 기분이 좋아요. 왜 그러지?”
왜 그러긴, 니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렇지.
“이번엔 내가 진짜, 방심해서 그런 건데. 와, 씨. 다시 붙어 봐요. 헤드기어 쓰고 제대로. 어? 근데 마지막에 나 치기 전에 힘 뺐죠? 어? 내가 다 봤어. 나 동체 시력 죽이거든요.”
아무래도 제정신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조용히 하세요.”
“왜요? 그럼 그쪽이 말해 봐요. 이름이 뭐예요? 나는- 읍.”
수민은 젖은 수건으로 선수의 얼굴을 덮었다. 물론 질식사하지 않도록 기술적으로다가 안전하게 덮었다.
그리고 도와준 회원이 건네준 물병을 따 목을 축이며 고민했다. 옆에 대자로 뻗은 선수가 제정신을 차리는 게 먼저일지.
“그래, 씨발. 30년 전에 못 한 승부,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자.”
“이게 어디서 평생 운동한 나한테 들이대? 야, 헤드기어 쓰고 와. 넌 1라운드 KO야.”
아니면, 저 어른들 싸움이 먼저 끝날지.
“…….”
쉽지 않은 문제였다.
***
수민과 박 씨가 돌아왔다. 수민은 멀쩡한데 박 씨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박 씨는 제 눈탱이가 시시각각 부어오르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잔뜩 흥분해서는 인혁과 서 여사에게 자신의 후배가 얼마나 대단한 권투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랑했다. 수민은 부끄러웠지만,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선 꼭 필요한 절차니까 꾹 참았다.
박 씨의 찬양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인혁의 얼굴은 점점 싸늘해졌다.
“이제 쌍으로 사기를 쳐?”
“김 소장,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수민이가 어? 인기가 많이 죽은 복싱계를 다시 되살릴 만한 샛별! 그 자체였다니까. 상대를 KO 시키고 날 돌아보는데, 등 뒤로 후광이 쫘아아악!”
“너, 박 계장님을 뭘로 꼬신 거야.”
인혁이 수민을 의심했다. 수민이 해명할 틈도 없이, 수민의 대리인이 나섰다.
“김 소장! 한 번만 더 수민이의 권투 실력을 의심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오늘, 수민이 때문에 내 안의 전투 본능이 되살아났거든? 활활 끓어오르고 있다고. 어? 쉭, 쉬익, 쉭. 지금 내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게 보이지? 이건 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냐. 내 주먹에서 나는 소리라고. 쉭, 쉬익, 쉭!”
박 씨가 허공에 잽을 날렸다.
“…….”
인혁이 매우 떨떠름하고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박 씨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박 씨는 권투계의 떠오르는 혜성, 오수민 찬양가를 멈추지 않았다.
듣다 못한 인혁이 인터넷에서 두 사람이 다녀온 복싱장 전화번호를 찾았다. 박 씨가 제 핸드폰으로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바꿔 주겠다고 했으나 인혁은 거절했다. 전화번호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날 못 믿어? 내가 주는 정보를?”
박 씨가 충격을 받든 말든, 인혁은 복싱장에 전화를 걸어 직접 관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박 씨가 한 말 중 상당 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당황했다.
“너, 운동 안 했다며.”
오늘 이 질문을 몇 번이나 듣는 건지.
수민은 변함없이 성실하게 대답했다.
“네.”
“근데 복싱을, 선수급을 이겼어?”
“네.”
“어떻게?”
“어떻게라고 말씀하시면…….”
이 자리에서 재연해야 하는 걸까? 수민은 고민하며 박 씨를 바라보았다.
“그 상황이 어땠는지 궁금하다면-.”
박 씨가 대신 나섰다.
“박 계장님은 그만하시고요.”
인혁은 그의 말을 바로 잘랐다. 그리고 수민에게 물었다.
“복싱 해본 적 있어?”
“네.”
“네?”
운동을 해본 적 없다면서 복싱은 한 적 있다니? 인혁은 다시 물으려다가 수민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닫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데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 이럴 때 생각 없이 질문하면 도돌이표를 무한 반복할 뿐이다.
“운동을 따로 한 적은 없고, 복싱은 해본 적이 있다는 거지?”
인혁이 톡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물었다.
“네.”
“그럼 복싱 말고 또 뭘 해봤어? 몸을 움직이는 거.”
“태권도요.”
“또?”
“유도랑 합기도.”
“……또 있어?”
“네.”
“다 말해 봐.”
“네. 주짓수. 검도. 기계 체조, 클라이밍…….”
수민은 떠오르는 걸 순서대로 말했다. 대략 열 가지가 좀 넘었다.
듣고 있던 세 사람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걸, 다 해봤다고?”
서 여사가 물었다.
“네.”
“그렇구나. 대단하네.”
서 여사가 감탄했다. 순수한 감탄은 아니었다. 경악에 가까웠다.
잠깐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수민은 생각에 잠긴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건 익숙했다.
“언제? 언제 그걸 다 배웠어?”
인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에요.”
“예전에 언제?”
“…….”
수민은 적당한 단어를 찾고자 애썼다.
기억할 때부터 수민은 그것들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더 배우기도 했다.
“공익 다녀오기 전에 배웠어?”
인혁이 물었다.
“아, 네.”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적당했다. 공익 생활을 하기 전까지 내내 익혔으니까.
애써 익힌 걸 잘 써먹기 위해선 몸이 둔해지면 안 되니까, 늘 식단을 철저히 지켰다. 부득이하게 밖에서 뭔가를 먹어야 할 때가 아니면 늘 김 목사가 가져다준 음식을 먹었다. 교단 내의 영양사가 준비해 준 것으로, 선생님의 축복이 내린 음식이었다. 싱겁고 담백했다. 양은 적었다.
그래서 밖에서 케이크나 고기, 그 밖의 맵고 짠 걸 먹어야 할 때가 제일 난감했다. 먹은 만큼 단련하거나 집에 와서 약을 먹고 토해야 했으니까.
“그래, 그랬단 말이지.”
인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동안 계속 말을 하지 않았다.
“저, 여기 계속 다녀도 되죠?”
수민이 물었다. 깊게 생각할 땐 말을 걸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인혁이 함부로 말을 걸지 말라고 화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나름의 승부수였건만.
“응? 응.”
그게 먹혔다.
“뭐. 어? 뭐라고?”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인혁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뭐라고 했니?”
“고맙습니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어? 잠깐, 잠깐만.”
“와, 수민 학생!”
서 여사가 손뼉을 쳤다.
“크으, 역시 복싱하는 사람들은 말이야, 타이밍을 안다니까?”
박 씨도 손뼉 쳤다. 짝짝.
“저 여기 계속 다녀도 된다고 그래 주셔서요.”
수민은 두 사람의 응원에 힘입어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방금요.”
“방금? 그건 그렇다고 대답한 게 아니라-.”
“감사합니다.”
“……너 일부러 물어봤지. 나 딴 생각하는 동안.”
“아닌데요.”
수민은 벌떡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수민아, 오수민? 잠깐. 다시 이리 와 봐. 이리 안 와? 인혁이 수민을 다시 소파로 불러들이려 했지만, 수민은 보란 듯이 검정고시 교재를 펴고 공부하는 척했다.
“저거, 저럴 때만 공부하는 척하지.”
“…….”
수민은 못 들은 척 수학 문제를 풀었다.
인혁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뭐 어때? 진짜 자기 한 몸 지키고도 남을 정도였다니까?”
박 씨가 편들어 주는 목소리도.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아냐.”
서 여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무래도 해고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했다. 수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