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5. 오수민, 23세, 오메가 (6)
수민이 해고의 위험을 겪은 이후 열흘 정도 더 바쁘게 현장을 돌던 사무실 사람들은 또 언제 바빴냐는 듯 한가해졌다. 박 씨의 말에 따르면 또 밑밥을 뿌리고 정보를 모으는 시기가 돌아온 거라고 했다.
지난 열흘 동안 수민은 사무실 사람들이 전화를 받고 뛰쳐나가면, 일찍 사무실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인혁이 부탁했는지, 수민이 혼자 사무실에 있는 날이면 미현이 아빠가 저녁 5시만 되어도 사무실로 올라와 빨리 퇴근하라고 재촉했다.
현장 나가는 일이 뜸해질 즈음, 봄이 찾아왔다. 꽃샘추위 때문에 여전히 두꺼운 겉옷을 챙겨야 했으나 그래도 봄은 봄이었다.
푸릇한 새싹이 돋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환해졌다. 수민은 외투 안에 인혁이 사준 봄옷을 입고 사무실에 출근했다.
인혁은 봄이 되어도 수민이 사준 넥타이를 매일 매고 다녔다. 외투는 조금 얇은 것으로 바뀌었다.
박 씨는 범죄 제보 전화 말고 복싱장에서 걸려 오는 전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인혁이 복싱장으로 전화를 걸어 사무실 전화번호를 유출한 게 탈이 난 것이었다.
사무실의 전화번호야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좋은 거니,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손쉽게 알 수 있지만. 범죄 현장과 거리가 먼 복싱장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모르는 관장님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거는 건 아무래도 인혁의 탓이었다.
-거, 복싱 천재는 잘 있어? 운동은 언제 하러 온대?
복싱장 관장은 괜히 박 씨의 친구가 아니었다. 시도 때도 전화해서는 수민을 복싱장으로 보내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다음 달에 아마추어 대회가 있는데 이거부터 시작해 보자, 그 실력 놀리지 말고 몸이라도 풀게 보내라 등등. 아주 끈질겼다.
해고 위험이 사라진 수민은 복싱장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가운데 낀 박 씨만 괜히 고생이었다.
싫단다, 갈 마음 없단다, 그 실력 그냥 썩히고 놀린단다, 박 씨가 전화를 붙들고 앵무새처럼 한 말을 하고 또 했다.
수민에게 집착하는 건 관장만이 아니었다.
“수민아, 저번에 복싱장에서 너랑 붙었던 걔 말이야. 걔가 네 연락처 좀 알 수 있냐고 나한테 물어보던데. 가르쳐 줄까, 말까.”
어느 날 박 씨가 물었다. 하필이면 옆자리에 서 여사가 떡하니 버티고 있을 때였다.
“누구? 누가 수민 학생 연락처를 물어봐? 젊어? 잘생겼어? 예뻐? 알파야? 베타?”
“일단 알파긴 한데요. 젊고, 잘생긴 건 잘 모르겠는데. 나 젊은 적만큼은 아닌 거 같고.”
“그럼 못생긴 거네.”
“아니 또 그렇게 단칼에 자를 건 아니고. 복싱 유망주라니까. 그 체급에서는 다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급이에요. 그나저나 그런 애를 이긴 우리 수민이는 정말 복싱의 샛별!”
“복싱 이야기는 됐고. 뭐야, 몇 살이야. 우리 수민 학생 핸드폰 번호는 왜 물어본대?”
서 여사가 눈을 반짝 빛냈다.
“크흠, 글쎄요. 뭐, 좀 관심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던데.”
“수민 학생, 번호 알려줄 거지? 알려 줘 봐, 응? 이것도 인연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
딱히 알려 주고 싶지도, 알려 주기 싫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서 여사의 등쌀에 밀려 어영부영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게 되었다.
그 뒤로 복싱 선수는 시도 때도 없이 수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 한두 번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 받았다.
-운동하고 있어? 아니, 도대체 어디에서 운동하는 거야. 어느 관장님 밑에서? 어? 그거 좀 알려 줘 봐.
뚝.
-전화가 왜 갑자기 끊겼지? 이상하네. 이런 적 잘 없었는데. 아무튼 이번에 나 대회 나가는데, 그쪽은 안 나와? 왜 안 나오는 거야? 관장님한테 물어보니까 그 실력을 그냥 묻히겠다고 그랬다던데. 그건 링을 모독하는-.
뚝.
-설마 내 전화 그쪽에서 그냥 끊는 거 아니지? 어? 내가 말이야,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 그런데 그런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그쪽이 정말-.
뚝.
계속 전화를 끊으니, 이후엔 메시지를 보내 왔다. 복싱 선수는 메시지로도 말이 많았다. 같이 대회에 나가자, 세계를 제패해 보자, 우리는 할 수 있다, 좋은 라이벌이 되자, 등등.
수민은 그냥 그를 차단해 버렸다.
정 목사와의 상담 주기는 두 달로 늘어났다. 봄이 되어 다시 만난 정 목사는 수민의 개나리색 스웨터를 보고 미소 지었다. 월급 받아 산 거냐고 묻길래 소장님이 사준 거라고 했더니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저번이랑 똑같은 표정이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사무 보조로 취직했다고 말했다. 늘 편의점이나 음식점 서빙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수민을 걱정하던 정 목사는 축하하고 반겼다. 어디에서 일하냐고 묻길래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라고 말하니, 바로 똥 씹은 표정을 지었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사무실 중에 하필이면 거기를? 허, 세상이 참, 좁네.”
정 목사가 한탄했다.
“왜 그러세요?”
“왜 그러냐고? 내가 오히려 묻고 싶네. 지금 일해야 하는 시간이잖아요. 여기 올 때 뭐라고 하고 나왔어요?”
“상담받으러 간다구요.”
“누구한테 상담받으러 가냐고 안 물어봤어요?”
“소장님이 물어보셔서 목사님 뵈러 간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
“김 소장이 아무 말 없었어요?”
어쩐지 인혁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소장님하고 아는 사이세요?”
“알다마다. 아주 징한 인연이지.”
“징한 인연?”
“나중에 인터넷에 김 소장하고 내 이름 쳐봐요. 그럼 어떤 사이인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
“설마, 아직 내 이름을 모르는 건…….”
“…….”
“혹시 김 소장 이름은, 알아요?”
“네. 김인혁이요.”
“그럼 난?”
“정 목사님이요.”
“…….”
수민은 정 목사가 상처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 내 이름. 이게 내 이름이에요.”
정 목사가 명함을 건네주었다. 수민은 명함에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정목연 목사. 종합이단상담연구소 소장. 정 목사도 소장이었다. 정 소장.
나중에 정 목사의 말대로 인터넷에 두 사람의 이름을 쳐보니 뉴스 기사나 블로그 글, 웹페이지가 많이 떴다. 두 사람은 앙숙으로 유명했다. 두 사람은 종종 오메가 범죄 문제 관련 토론이나 대담에 초대받았는데, 항상 반대편이었다.
수민은 정 목사가 윗선에 말해 오범연 사무실에서 일하는 걸 관두게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정 목사는 그러지 않았다. 걱정하는 수민을 오히려 다독였다.
“내가 김 소장, 그 사람의 행보를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사람의 신념과 인격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김 소장이 좋은 사람인 거 나도 모르지 않아요. 다만 본인의 과거 일에 갇혀서는, 너무 과격하게 행동하는 게 염려돼서 그러는 거지.”
정 목사는 인혁이 일하는 방식을 좋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수민이 인혁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건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워했다. 짧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사람이 너무 과격하게 굴어서 적이 많을 텐데. 조심해요. 괜히 옆에 가까이 있다가 덩달아 화를 입지 말고.”
연륜에서 나온 당부도 잊지 않았다.
수민은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있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은 걸 말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윗선엔 이미 보고가 들어갔겠지만.
정 목사와의 상담 시간은 사이비 종교 교리의 허점을 찾아내는 일보단 그간 어떻게 지냈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된 지 오래였다.
사무실에 다니기 전에 수민은 주로 자신이 매일 보는 저녁 드라마 줄거리를 이야기했다. 정 목사는 수민이 막장 드라마에라도 관심을 보이는 걸 기꺼워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수민이 계속 드라마 이야기만 할 뿐 도통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하는 곳의 사장이나 다른 아르바이트생에 대해 물으면, 수민은 멀뚱히 정 목사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없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지 생김새를 물어도 중년, 남자, 여자, 젊은 사람 정도로만 말할 뿐이었다.
그랬던 수민이 달라졌다.
수민은 사무실에서 박 씨와 게임을 하고, 서 여사와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 인혁에게 왜 공부 안 하냐는 구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박 씨 소개로 알게 된 복싱장 관장과 선수가 자신을 너무 귀찮게 한다고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정 목사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검정고시 공부를 한다고요?”
“네. 안 하면 소장님이 자꾸 뭐라고 하세요.”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두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수능 봐서 대학도 가래요.”
“오, 그것도 나쁘지 않지.”
“…….”
수민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수민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정 목사는 알아보았다.
보통 사람들처럼 뚜렷하진 않지만, 수민의 얼굴에 표정이 다양해지고 있었다. 분명 곁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때문이리라. 정 목사는 수민의 변화가 반가웠다. 그 빌어먹을 김 소장 새끼가 김 소장 놈으로 보일 정도로.
‘김 소장이 딴 건 몰라도 애들 돌보는 건 잘하지.’
정 목사는 인혁이 꾸준히 후원하는 돌봄 센터나 기타 복지 사업들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는 검정고시 합격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건가?”
“……소장님이랑 똑같이 말씀하시네요.”
“내가 김 소장이랑 똑같다고? 그건 아니지!”
김 소장을 대견하게 여겼던 마음도 잠깐이었다. 정 목사는 저와 인혁을 한 세트로 취급하는 수민의 말에 발끈했다.
“난 김 소장이랑 달라! 그 무데뽀랑 같이 묶지 말아요!”
정 목사가 언성을 높였다. 무데뽀라니. 수민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다음 상담은 석 달 뒤로 잡혔다. 수민은 상담 날짜를 핸드폰에 저장한 뒤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바람은 찼지만, 하늘이 맑았다. 나뭇가지마다 녹색 잎이 보일락 말락 하게 움텄다.
인혁이 사준 병아리색 스웨터와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수민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정 목사의 상담 때문에 오후 반차를 냈다. 인혁은 하루를 통으로 쉬라고 강제 연차를 내주었지만, 수민은 그냥 출근했다. 오전에 잠을 푹 자든 영화를 한 편 보든 하라고 했지만. 수민은 잠자는 것보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사무실에 가는 게 좋았다.
상담 시간이 애매해 같이 점심을 먹지는 못했다. 서 여사가 밖에 나가 아무거나 사 먹지 말고 간단하게라도 먹고 나가라고 탕비실에 이른 점심을 차려 줘서 혼자서 먹고 나왔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니 2시 반이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서 사무실로 가면 4시쯤 될 터였다.
단 두 시간만이라도 좋으니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운이 좋으면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무실로 돌아가면 분명 인혁은 인상을 찌푸리고 한마디 하리라.
“반차 내고 갔으면 끝이지 왜 돌아와? 여기 뭐 좋은 거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좋은 거’라는 걸 모르니까 하는 말이겠지. 정말 그렇게 말하면 뭐라고 말대꾸를 해야 할까? 수민은 고민했다.
지난번 해고 소동 이후, 인혁의 말에 따르자면 수민은 좀 더 말대꾸가 늘었다.
“이제 내가 만만해?”
이런 농담을 하며 수민의 머리를 꾹꾹 누르곤 했다. 그러는 인혁이야말로 수민을 대하는 게 한결 편해 보인다는 걸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인혁의 말마따나 수민은 이제 인혁이 조금은 만만해졌다.
인혁이 자신을 함부로 해고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해고하려고 해도 싫다고 우기면, 결국 제 말을 들어준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꼬박꼬박 말대꾸하고 대들어도, 먼저 말을 걸어도, 화내지 않는다는 걸 숱하게 경험했으니까.
설령 인혁이 화를 내도, 화난 것처럼 보여도 괜찮았다. 서 여사와 박 씨가 편을 들어 주니까.
복싱장을 같이 다녀온 후 박 씨는 무조건 수민의 편이었다. 서 여사 또한 떡볶이로 다져진 동맹의 의리를 더는 외면하지 않았다.
둘이 수민을 감싸고 돌면 인혁은 화를 내다가도 참았다. 얼굴엔 여전히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화를 풀었다.
“내가 너한테 화를 내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말하며 수민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 손길은 다정하고 따뜻했다. 절대 수민을 아프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민은 꼬박꼬박 말대꾸했다. 그러면 인혁과 좀 더 많이 말할 수 있으니까.
수민은 빨리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왜 돌아왔냐고 퉁명스럽게 핀잔주는 인혁에게 말대꾸하고 싶었다.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무실 앞 도로,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수민은 길 건너 담벼락에 핀 개나리꽃을 보았다. 이르게 피었어도 샛노랬다. 수민은 자신이 입은 옷과 비슷한 노란색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
꽃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이전에도 있었던가?
수민은 기억나지 않았다.
사무실 사람들은, 인혁은 알까? 벌써 저렇게 꽃이 피었다는 걸.
수민은 핸드폰을 꺼내 개나리꽃이 가득 핀 담벼락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사무실 사람들과 만든 단톡방에 올렸다.
3 (이미지) [수민
3 꽃이 피었어요. [수민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다. 수민은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바삐 걸었다.
주머니 속에 든 핸드폰이 진동했다.
박 계장님] 조으다,벌써,봄이구나, 1
서 여사님] (이모티콘) 1
서 여사님] 수민 학생이 더 예뻐♡ 1
소장님] 왜 사무실 횡단보도야? 3
소장님] 너 지금 어디니 3
소장님] 설마 3
***
봄볕이 제법 따사로운 오후였다. 서 여사는 건물 뒤편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한가롭고 좋네.”
후우,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오랜만에 피우니, 머리끝까지 찌릿했다. 니코틴이 뇌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듯했다.
짜릿한 첫 모금이 지나가자 노곤해졌다. 서 여사는 느긋하게 담배를 태웠다.
반쯤 태웠을까. 옆에 누가 섰다.
“금연하는 사람이 여길 왜 와. 얼른 올라가.”
서 여사가 연기를 후- 뱉었다. 금연자 퇴치용이었는데, 상대방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서 여사는 옆 사람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인혁이었다.
벽에 길게 기대 서 있는 모습은 화보의 한 장면 같았다. 이러니 인터넷에 자꾸 팬카페니 뭐니 생기는 거겠지.
‘저 껍데기 속 성질머리를 모르고.’
서 여사는 담배를 빨며 손짓했다. 훠이훠이.
“금연자는 저리 가라니까.”
“수민이는요. 같이 떡볶이 먹으러 안 가셨어요?”
“수민 학생? 위에서 박 씨랑 게임하는 중이야. 그거 게임기 하나 가지고 둘이서 동시에 게임 할 수 있나 봐. 요즘 아주 신났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인혁이 혀를 찼다.
정작 공부해야 할 사람은 의욕이 없는데, 공부시키고 싶은 사람만 의욕이 차고 넘쳤다.
‘공부 안 해?’
‘지금은 싫어요.’
‘뭐, 싫어? 왜 싫어?’
‘저 지금 근무 시간이에요.’
‘내가 고용주잖아. 내가 허락했어. 괜찮으니까 공부해.’
‘그래도 싫어요.’
‘그래도 싫어? 수민아, 너 많이 컸다?’
‘소장님 덕분이에요.’
‘어쭈?’
‘공부는 집에서 할 거예요. ……아마.’
‘아마?’
‘…….’
늘 이런 식이었다.
인혁의 눈치만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처음 모습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인혁에게 밀리지 않고 맞서는 수민을 볼 때마다 박수가 절로 나왔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건 뭐야?”
서 여사가 인혁의 손을 가리켰다.
인혁은 예쁜 상자를 들고 있었다. 딱 보니, 케이크 상자긴 한데. 설마 싶었다. 그 김 소장이 케이크 상자를 들고 온다고? 케이크 폭탄이라면 모를까.
“아, 케이크요.”
그런데 정말 케이크였다.
“요즘 애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길래.”
여기까지 잘 들고 왔으면서, 새삼 민망한지 인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냐 오냐 해주고 있는 게 누군데.’
서 여사가 코웃음 쳤다.
인혁은 수민이 벌써 기어오른다며 못마땅해하는 척하지만, 사무실 누구도 그런 ‘척’에 속지 않았다. 수민마저도.
수민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게 누군데.
길을 헤매는 집 없는 개도 누가 절 예뻐해 주는지 안다. 하물며 인간이 그걸 모를까. 인혁이 봐주고 여지를 주니까 수민이 그러는 거지.
지금만 해도 그렇다. 본인은 알까?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이구, 수민 아빠. 수민이 굶을까 봐 챙겨오셨어요.”
“그런 농담 마세요, 여사님.”
인혁이 바로 정색했다.
‘얼씨구?’
그래 봤자였다. 서 여사는 눈썹 하나 깜짝 안 했다.
“왜에? 생전 그런 거 한 번 사 온 적 없는 양반이 그런 걸 들고 왔으면 이 정도 놀림 받을 각오는 했어야지.”
“뭐, 여사님도 단 거 좋아하시잖아요. 박 계장님도 좋아하고.”
“아는 양반이 이전에 그런 거 한 번 안 사 오더라.”
“애랑 어른이 같나.”
“뭐가 다른데?”
“알겠습니다. 앞으로 종종 사 올 테니까. 그만하시죠.”
“우리 좋으라고 사 오나? 수민 학생 먹이려고 사 오려는 거겠지. 그런 데까지 날 들먹이려고?”
“알았으니까 1절만 합시다. 1절만.”
인혁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서 여사는 꽁초를 꾹꾹 눌러 끄고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예의상 라이터를 건넸으나 인혁은 언제나처럼 손을 내저었다.
“피지도 않을 거면서 멀쩡한 담배는 왜 축내는 거야?”
“세금 내고 있잖아요, 국가에.”
“그래서 국가가 고맙대?”
“고맙겠죠. 세금도 내주고 금연도 해주는데. 같이 세금 내는 처지에 너무 뭐라 그러지 맙시다.”
“아까워서 그러지. 쌩으로 동강 나서 버려지는 김 소장 담배가. 자원 낭비야.”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이제라도 알았으면 잘 기억해 둬요. 난 항상 김 소장이 피우지도 않고 버리는 아이들을 늘 안타까워했으니까.”
“……담배 말씀이시죠?”
“벌써 귀먹었어? 아이들이라고 했잖아.”
“…….”
“잔뜩 정 주고, 다가오면 밀어 내고. 그게 무슨 짓이야.”
담배를 피우지도 않을 거면서 물고 있다가 뱉어 내는 것과 뭐가 다를까.
“훅 들어오시네.”
인혁이 쓰게 웃으며 눈가를 문질렀다.
그는 딱히 변명하지 않았다.
“언제 쓴소리 한 번 하려고 했어.”
“저번에 그러지 그랬어요.”
“언제?”
“승원이 집에서 그렇게 됐을 때.”
“그때는…….”
서 여사는 인혁이 승원의 자취방에 갔다 쓰러져 입원했을 때를 떠올렸다. 병실에 꽉 차올라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던 우성 알파의 페로몬. 그 절망.
“아픈 사람한테 모진 소리 할 만큼 성격이 못돼 먹지는 않아서.”
서 여사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대꾸했다.
“지금 저는, 건강해 보이나 보죠?”
“병원에 누워 있지는 않잖아.”
“그건 그렇네요.”
인혁이 피식 웃었다.
서 여사는 더없이 잘생겼지만 묘하게 기운 없어 보이는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서 여사는 페로몬에 둔감한 알파다. 때문에 열성도 아닌데 러트 사이클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넘기고, 다른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반대급부라기엔 뭐하지만, 대신 서 여사는 눈썰미가 제법 좋았다. 여태까지 인혁과 함께 일하며 목숨 부지하고 몸 성할 수 있었던 게 그 눈썰미 덕분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지켜봐 왔던 게 틀리진 않으리라.
“수민 학생이 꽤 마음에 드나 봐?”
속엣말을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빙 돌려 말하게 되는 것 또한 그놈의 눈썰미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고작 이 정도 말에도 바짝 긴장하여 날을 세우는 인혁이 안쓰러워서.
“아니, 그냥. 별 뜻은 없고.”
“별 뜻 없이 그런 말 하실 분은 아닌데. 서 여사님이.”
인혁이 담배 필터를 씹으며 받아쳤다.
“진짜 별 뜻 없어. 그냥, 이전에 다른 애들 대할 때보다 좀 더 편히 대하는 거 같아서.”
“그거야 수민이 걔가 꼬박꼬박 말대꾸하고 기어오르니까 그러죠.”
“아니, 그 이전부터.”
“그 이전이라니요?”
“처음부터. 잘 만지던데.”
서 여사가 손을 들어 머리 쓰다듬는 흉내를 냈다.
“잘 만지다니.”
인혁은 질색했다.
“영어 써줘? 김 소장도 박 씨처럼 영어가 좋아? 터어치? 아니지, 스킨십이라고 해야 하나?”
“됐습니다.”
“그냥 하는 말 아니야.”
“…….”
“처음부터 좀 스스럼없는 거 같아서. 다른 애들이랑 달리. 그래서 본인도 알고 그러는 건가 궁금해서 말해 보는 거야.”
“……제가요?”
인혁은 새삼스럽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자각 없이 한 행동이었던 건가.’
서 여사는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버리며 혀를 찼다.
친절한 것과 친밀한 것은 다르다. 누구보다 그 경계가 분명한 사람이 인혁이었다.
제 아들 또래의 남성형-오메가에겐 간이라도 빼줄 듯 친절하게 굴지만, 친밀하게 곁을 내주지는 않는다. 오메가 페로몬 거부증 때문이기도 하고, 악 받쳐 20년을 버텨 온 단단함이기도 하다.
가족한테 말고는 제 옆자리를 내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저 남자는.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인혁의 친절에 속아, 친절에 취해, 부나방처럼 인혁에게 달려들었다.
그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친절과 친밀은 경계가 흐릿하니까.
페로몬 거부증을 앓고 있어 괴로운데도 제게 매달리는 오메가를 밀치지 못하는 것은 친절. 그 오메가를 스스럼없이 만지고 곁에 두는 것은 친밀.
그간 인혁이 보여 준 건 친절뿐이었다.
그렇다면 수민을 대하는 그의 행동은 뭘까.
머리를 헤집고 꾹꾹 누르는 작은 동작에 불과하지만. 서 여사는 인혁이 먼저 손을 내밀어 수민을 만진다는 게, 그 행동에서 20여 년 동안 페로몬 거부증을 앓았던 사람 특유의 벽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번엔 정말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서 여사는 저번에 수민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좀, 대하기 편한 건 있네요.”
인혁이 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서 여사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답이었다.
“하긴. 김 소장 아니었으면 나도 박 씨도 수민 학생이 오메가인 줄 아직까지 눈치 못 챘을지도 모르니까. 열성이래도 그렇게 옅을 수가 있나. 난 솔직히 아직도 수민 학생이 베타 같아.”
“아니, 그럴 리가…….”
인혁은 의아하다는 듯 서 여사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굳이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사이 서 여사는 담배를 한 대 더 입에 물었다.
“저번에 박 씨한테 들었어. 아무래도 평범한 애는 아닌 거 같다면서.”
서 여사가 물었다.
수민에 대한 서 여사의 마음은, 서 여사 본인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똑똑해서 선을 잘 지키는 것 같아 안심되다가도, 사무실 사람들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눈치 보는 게 안쓰러웠다. 매운 걸 잘 못 먹으면서 꼬박꼬박 같이 떡볶이 먹으러 다니며 아줌마와 어울려 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뭐 하나 보면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인혁을 바라보는 게, 그러다 금방 시선을 눈치채고는 눈을 마주치며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이는 게, 자꾸 마음이 가서.
어느새 이렇게 정이 들어 버렸나.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역시 매일 떡볶이 먹으러 간 게 원인이었을지도.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오늘 정 목사 만나고 온 겁니다.”
인혁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성의 없는 손길에 짜증이 묻어났다.
인혁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깍듯했다. 제가 부리는 사람들인데도 서 여사와 박 씨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이고 대우해 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 인혁이 유일하게 ‘님’자 안 붙이는 연장자가 정 목사였다.
인혁이 막 이 길로 뛰어들었을 때 길잡이가 되어 준 선배이자 스승. 하지만 중간에 노선이 틀어져 엇나가고서는 견원지간처럼 싸워 대는 앙숙.
“계속 연락해도 바쁘다고 도통 만나 주질 않더니, 만나도 입을 꾹 다물고 도통 말을 안 하네요.”
빌어먹을 영감탱이. 능구렁이. 인혁이 이를 갈았다.
아마 정 목사도 지금쯤, 제 사무실로 돌아가 제 직원들에게 똑같이 말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서 여사는 실실 웃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좋은 사이도 아닌데, 뭘 기대했어.”
“그럴 거면 부르질 말든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잔소리만 해대잖습니까. 언제까지 그따위로 살 거냐면서.”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서 여사님, 정 목사한테 스카웃 제의받으셨어요?”
“어우, 거긴 월급 짜서 싫어. 난 김 소장이 최고야!”
인혁은 그럼 제 편을 들라는 눈빛으로 서 여사를 보았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봐. 뭐 좋은 일이라고 말해 주겠어. 김 소장은, 정 목사가 와서 지난번에 구출한 피해자 명단하고 신상 정보 넘기라고 하면 넘길 거야?”
“미쳤습니까?”
“거 봐.”
“…….”
가까이 있으면 닮게 되는 걸까. 불리하면 입을 다무는 게 어째 누구랑 비슷해 보였다.
‘뚱한 표정 지을 때 나란히 세워 놓으면 볼만 하겠어. 수민 학생이 유독 선이 얇고 곱게 생겨 그렇지, 꽤 비슷해 보일지도?’
서 여사는 나란히 서 있는 인혁과 수민을 상상해 보곤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웃는데?”
“꼭 말로 해야 압니까?”
“김 소장이 수민 학생한테 정말 신경 많이 쓰고 있구나, 감탄하고 있었는데. 왜?”
“전 원래 애들한테 잘해요.”
“특히 잘해 주는 거 같아서 하는 소리야.”
“특히는 무슨.”
“유전자 검사는 언제 할 거야? 요번엔 좀 늦네?”
“…….”
“안 해? 안 할 거야?”
“뭐, 굳이.”
인혁이 대답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서 여사는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개나 소나 다 하나. 뭐 건덕지가 있어야 하지.”
“개나 소나라…….”
그동안 아무한테나 다 해봤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구출한 피해자 중에 제 아들 또래가 있으면 무조건 해보지 않았던가. 모르긴 몰라도 검사 비용으로 나간 금액이 억 소리는 날 터였다.
“나이도 안 맞고, 무턱대고 할 일은 아니죠.”
“수민 학생이 스물셋이랬나?”
“해가 바뀌었으니 스물넷이겠죠.”
“스물넷 같아 보이지 않던데.”
“그리고 부모님 모두 죽었다고 그랬다면서요.”
“그랬지.”
그 말을 듣자마자 인혁에게 말해 준 게 서 여사였다.
“할 생각은 해봤구만.”
“뭐…….”
인혁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이번엔 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10년 전이었다면. 아니, 승원의 일을 겪기 전이었더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래도 한 번 해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예 가능성 없는 아이한테 함부로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래, 김 소장답지 않게.”
“그러게요. 나도 이제 늙었나.”
인혁이 쓰게 웃었다.
“어른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녜요. 김 소장, 지금 나이가 몇이나 됐지? 아직 서른 후반 아니었어?”
“서른 후반은 무슨. 벌써 마흔셋입니다. 아니, 마흔넷.”
“벌써?”
서 여사가 담뱃재를 툭툭 털며 놀랬다.
“제 아들은 벌써 스물한 살이 됐겠죠.”
인혁이 고개를 들어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멀리, 담벼락 위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가 보였다. 며칠 전에 수민이 사진 찍어 올린 게 저곳이었던가 싶었다.
“시간이 참 빠르네.”
“그러게요.”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개비를 다 태운 서 여사가 담배꽁초를 꾹 눌러 쓰레기통에 버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다리야. 그러니까 수민 학생은 김 소장 아들이 아닌 거 같다, 이거지? 굳이 유전자 검사해 볼 필요도 없이.”
“…….”
“그런 거면 언제까지 끼고 있을지 생각해 둬요. 내가 할 말은 아닌데.”
“그러게요. 서 여사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신 거 같은데.”
매일 같이 떡볶이 먹으러 사무실을 탈주하는 한 쌍의 어미 닭과 병아리처럼 굴면서.
“그러니까 말이야. 자꾸 정들어서 큰일이야. 박 씨도 아주 좋아 죽어. 수민 학생 없었을 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다 늙어서 애 데리고 게임이나 하고, 그게 뭡니까. 서 여사님이라도 좀 말려 보세요.”
“김 소장이 못 말리는 걸 내가 어떻게 말려. 아무튼 어떻게 잘 마무리 지을지는 김 소장이 알아서 잘 생각해 보고.”
서 여사는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또 승원이처럼 되면 안 되니까.”
그리곤 말을 끝내자마자 그냥 이 말은 하지 말걸, 후회하며 괜히 부산스럽게 굴었다.
“이건 내가 들여다 놓을게.”
서 여사는 케이크 상자를 빼앗아 들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인혁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꾸만 저 멀리 피어 있는 개나리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과 똑같은 색 옷을 입고 눈앞에 자꾸 얼쩡거리는 수민이 생각나서.
인혁은 입에 문 담배를 집어 던지듯 쓰레기통에 넣고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차마 서 여사 앞에서는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자꾸 좋은 냄새가 나요, 그 아이한테서.”
자신 말고 서 여사나 박 씨, 다른 사람들은 전혀 맡지 못하는 것처럼 구는 게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그냥 냄새가 아니라 페로몬이라는 걸 안다.
너무 옅어서 모르고 있다가 문득 알아챈다. 그때는 이미 폐 속에 가득 들어차서, 숨 막힐 정도로 짙게 느껴지기도 한다.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면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그래서 내가 미친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계속,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문다.
하지만 거부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끔 숨 막히게 진하다고 느껴질 때면 인혁은 발작적으로 창문을 연다. 두드러기나 숨 막힘, 피의 역류 따위가 당연하게 뒤따를 걸 각오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슬슬 미칠 때가 됐긴 했지. 인혁은 정기적으로 찾는 정신과 의사에게 드디어 제가 미친 것 같다고 담담히 고백하기까지 했다. 입원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동의하겠다고.
의사는 복용하는 약을 조정해 줄 뿐, 인혁을 병원에 가두지 않았다.
오메가 페로몬 거부증.
20년 내내 인혁을 괴롭혀 왔던 증상이 수민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민이 혹시나 제 아들이 아닐까, 섣불리 기대하지는 않았다.
기대하기에 인혁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세상 어떤 아버지가 지 애 향을 맡고 이런 생각을 할까.”
기대하기엔 그 향이 너무 달콤했다.
인혁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담배가 절실했다.
***
인혁은 도살장에 끌려들어 가는 소처럼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다. 문을 열자마자 화악- 훈기가 쏟아졌다. 그 훈기 속에 아주 옅고 단 향이 났다.
숨을 쉬어도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혁은 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왜 이제 와.”
서 여사가 기다렸다는 듯 냉장고에서 케이크 박스를 꺼내 왔다. 박 씨와 수민은 허둥지둥 게임기를 숨기고 인혁의 눈치를 보았다.
사무실 사람들이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김 소장이 사 온 거야. 수민 학생 생각나서 사 왔대.”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어? 아냐? 아, 수민 학생이 좋아할 거 같아서 사 왔다고 했나?”
“……말을 말죠.”
“그러니까 수민 학생, 많이 먹어요.”
서 여사가 흐흐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색색의 조각 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박 씨가 탄성을 질렀다. 수민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서 여사가 케이크를 큰 쟁반에 차례로 꺼내 놓았다.
“골고루도 사 왔네. 가게 털어 왔어?”
“뭐들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하나씩 사 왔습니다.”
“저 어제 드라마에서 똑같은 말 들었어요.”
수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아직도 그거 보니? 그, 뭐라고 그랬지?”
처음 들었을 땐 무슨 드라마 제목이 이따위인가, 싶었는데. 너무 충격적이어서 오히려 기억에 남지 않았다.
“<큰일 났네 왕형제들>?”
서 여사가 대신 말해 줬다.
“네.”
“그거 재밌지. 나도 맨날은 못 봐도, 시간 맞으면 꼭꼭 보는데.”
“재밌어요.”
“수민 학생이 나랑 드라마 취향이 같네. 케이크는 뭐 먹을래요, 먼저 골라 봐요.”
서 여사가 수민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수민은 고민하며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이거 예쁘다. 치즈케이크인가? 이거 먹을래요?”
서 여사가 제일 비싸 보이는 걸 권하자 수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 그거 안 좋아해요.”
“그럼? 초코? 생크림?”
“음…… 생크림이요.”
“그래요? 그럼 이거 먹고, 다른 것도 또 먹어요.”
서 여사가 얼른 접시에 생크림 케이크를 옮겨 주었다. 수민은 다른 사람들이 케이크를 한 조각씩 가져가 한술 뜨기를 기다렸다가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먹었다.
“오, 안 달고 맛있네.”
서 여사가 감탄했다.
수민도 동의하는 바였다. 너무 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렇게 달지 않았다.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와서 그런지 적당히 차가워서 먹기 딱 좋았다.
인혁이 사 온 것이니 좋아하지 않아도 맛있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그런 마음가짐과 상관없이 맛있었다. 억지로 먹는 게 아니라 정말 맛있어서 자꾸 손이 갔다.
수민은 말없이 케이크를 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민의 머리에 손이 닿고야 서 여사의 말이 떠올라 아차 싶었지만.
“맛있어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고 살짝 웃어 보이는 얼굴이 보기 좋아서. 평소처럼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많이 먹어.”
옆에서 서 여사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많이 먹으면 살찌는데요.”
“넌 쪄야 돼. 막 먹어.”
인혁은 수민의 접시 위에 초코케이크를 얹어 주었다. 서 여사가 깔끔하게 올려 준 것과 다르게, 인혁이 막 올려 준 건 금방 옆으로 무너져 생크림 케이크와 한 덩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수민은 불평 한마디 안 하고 초코케이크를 맛있게 떠먹었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후 인혁은 외부에 나갔다 올 때면 종종 케이크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실수로라도 치즈케이크를 사 오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