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9)

File#6. 오수민, 24세, 오메가 (1)

아내와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활기차고 멋진 1년 후배 과대표님께서 막 제대하여 어리바리한 복학생을 수거해 주셨으니, 간택 받은 복학생은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감읍할 따름이었다.

아내의 부모님은 목사님이라고 했다. 모태 신앙인 자신은 가풍상 혼후관계주의자이니, 키스 이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야무지게 말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아내 말대로 뽀뽀만 했다.

그렇게 사귄 지 6개월이 좀 넘었을까. 어느 날 아내가 늦은 시각에 인혁을 밖으로 불러냈다. 장소는 술집이었다. 이미 혼자서 소주 반병 정도를 비운 아내의 얼굴은 매우 심각했다. 아내는 인혁과 달리 술을 잘 못 마셨다.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면서, 소주 반병을 혼자 마시다니. 무슨 일이지?

“너 일루 왑.”

인혁을 발견한 아내가 손짓했다.

“넵.”

인혁은 후다닥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아내는 터프하게 인혁의 앞에 소주잔을 탁 내려놓고 술을 가득 채웠다.

“마셔.”

“넵.”

인혁은 일단 주는 대로 마셨다.

술 한 병을 비우자 아내가 물었다.

“선배, 넌 왜 성욕이 없어?”

인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너 고자야? 아니면 남성형 오메가 좋아하면서 나랑은 장난으로 그냥 한번 만나 보는 거야? 우씨, 선배 그런 거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내 동생 시켜서 고자로 만들어 버릴 거야! 고자여도 또 고자로 만들 거라고!”

아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어?”

졸지에 장난으로 여자 오메가와 사귀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 스물두 살 인혁은 얼음이 되어 버렸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대답을 못 한 거였는데, 아내는 그걸 다른 의미로 이해한 듯했다.

“으헝, 맞네, 맞아. 내가 속았어. 저 잘생긴 얼굴이랑 착한 매너에 속았다고오오오.”

아내가 테이블에 쾅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어찌어찌 술 취한 아내를 집에 들여보내고, 다음 날. 인혁은 맨정신으로 아내를 만나 오해를 풀었다. 아내는 못 믿겠다며 인혁의 멱살을 잡고 근처 모텔로 끌고 가려고 했다.

인혁은 아내를 어르고 달래 큰 호텔로 가 자신이 고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아내가 혼후관계주의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우성 오메가인 줄 알면 다들 무슨 발정 난 것처럼 덤벼드니까. 그게 싫어서 그렇게 말했던 거였어요, 선배.”

아무렇지 않은 척 쾌활하게 말했지만, 눈동자가 많이 떨렸다. 인혁은 아내의 불안을 이해했다. 인혁 또한 우성 알파라는 이유만으로 섹스 중독자, 종마 취급을 받았으니까.

“고마워. 날 믿어 줘서, 그리고 말해 줘서.”

인혁은 이불에 돌돌 말려 있는 아내를 이불 채로 끌어안았다.

“나도 선배한테 고마워요, 날 아껴 줘서.”

아내는 인혁의 품속에서 한참 훌쩍였다.

이후 관계를 맺을 때 항상 피임에 신경 썼다. 각자의 히트 사이클과 러트 사이클 때는 억제제를 먹고 넘겼다. 아내는 아직 어렸다. 자신도 아직 어렸다. 그래서 조심했다.

그런데 덜컥 아이가 들어섰다.

어느 날, 아내가 몸이 이상한 거 같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옆에 앉아 한참 달래니 겨우 속내를 털어놓았다. 주기가 꾸준한 편인데 벌써 두 달 넘게 소식이 없다고. 인혁은 바로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갔다. 그리고 임신 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병원에서 나와 근처 카페에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내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죠?”

인혁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무릎 꿇었다. 뭐 하는 거냐고, 얼른 일어나라고 잡아당기는 아내의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 따윈 상관없었다.

“내가 책임지게 해줘. 나랑 결혼하자. 우리 아이, 낳아 주면 안 될까? 내가 잘할게, 정말, 정말 잘할게.”

스물둘, 내내 혼자였던 인혁은 가족이 가지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친과 우연히 찾아와 준 아이와 셋이서 함께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기적 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라고 욕먹어도 좋았다. 아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설득하고 싶었다.

“나한테 잘할 거예요?”

“잘할게.”

“지금도 잘하고 있잖아요.”

“더 잘할게.”

“정말?”

“응.”

“혹시 아이 때문에 부담감을 느껴서 그러는 거라면…….”

“아닌 거 알잖아. 물론 아이도, 우리한테 와줘서 너무 기쁘지만. 너랑 내 아이여서 좋은 거야.”

“진짜?”

“응. 제발.”

“……나랑, 우리 애기한테 진짜 잘해야 돼요.”

“응.”

“그럼 나도, 선배한테 진짜 잘할게요.”

“아니야, 잘하지 마. 잘해 주지 않아도 돼.”

“그런 게 어딨어.”

아내가 울며 툭툭, 어깨를 때렸다. 인혁은 아내를 끌어안았다가 혹시나 아이가 잘못될까 봐 얼른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아내가 울면서 웃었다.

두 사람은 비로소 마음 편히, 병원에서 준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다음 날.

인혁은 소갈비, 홍삼, 과일을 싸 짊어지고 처가댁에 찾아가 넙죽 절을 올렸다.

장인 장모는 선하고 교양있는 분들이셨다.

두 분은 인혁의 사람 됨됨이만 보고 결혼을 허락하셨다. 인혁이 천애 고아라는 것을 문제 삼기는커녕 제 일인 듯 아파하시며 끌어안아 주셨다. 이제 우린 한 식구니까, 부모처럼 생각하라고. 우리도 아들처럼 생각하겠다고.

곰 같은 덩치의 처남이 코를 훌쩍이며 휴지를 찾아 손을 더듬거렸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아내도 덩달아 코를 훌쩍였다. 둘이 동시에 팽-하고 코를 풀었다.

인혁은 둘이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질색했지만.

장인 장모는 인혁이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슬쩍 “인혁 선배 완전 부자야!”라고 말을 꺼냈다가 호되게 혼났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 얼마나 많든 적든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많던데…….”

“너어!”

“넵. 못난 딸은 조용히 입에 지퍼를 잠그겠습니다. 읍.”

정다운 모습이었다. 인혁은 이런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혁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장인 장모가 내건 결혼 승낙 조건은 두 가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여 아내와 자식을 굶기지 않겠다는 성실함과 의지를 보일 것. 다른 하나는,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는 처가에서 맡을 테니 아내가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

굳이 조건으로 걸지 않아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장인 장모님께서 걱정하시며 결혼 승낙 조건으로 내거니, 더더욱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후 인혁은 곧바로 대학 조기 졸업을 준비하고, 취직 활동에 나섰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내와 아이에게 소홀하지 않으려 애썼다. 특히 병원을 가는 날에는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비워 동행했다.

딱 한 번. 딱 한 번을 제외하고.

1순위로 지망했던 기업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하필이면 병원 가는 날과 겹쳤다.

외국계 기업이라 연봉과 근무 조건이 좋고, 무엇보다 사내 육아 휴직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어 마음에 들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인혁은 면접을 포기하려 했으나 아내가 가만 두고 보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이 물러서 나랑 우리 아기를 어떻게 먹여 살리려고!”

아내가 면접에 다녀오라며 인혁의 등을 꾹꾹 밀었다.

“아냐,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요즘 밖이 흉흉하기도 하잖아. 자꾸 임산부들이 실종되고 그런다는데. 혼자서는 위험해.”

“실종되는 임산부는 다 베타라면서요. 난 베타 아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조심해서 나쁠 거 없고.”

인혁은 못내 불안했다.

“나 혼자 안 가면 되는 거죠? 그럼 걔랑 다녀올게요. 동생 놈 이럴 때나 써먹어야지. 선배는, 아니, 여보야는 면접 갔다 와요. 꼭 가고 싶은 회사라고 했잖아.”

“그래도…….”

“어허, 이럴 땐 아내 말 듣는 거예요. 거기 육아 휴직 3년까지 낼 수 있다며. 그럼 나 아이 낳으면 선배가 기르고, 그동안 내가 학교 졸업하고 취직해서 벌어먹여 살려 줄게.”

“그럼 난 쭉 집에서 육아만 하면 되는 거야?”

“무슨 소리! 집안일도 해야죠. 그러니까 일단 다녀와요. 우리 애기도 그걸 바랄 거야. 그치이?”

“치사하게, 아이를 끌어들이다니.”

“치사하긴. 우리 아이도 한 표가 있다. 그리고 아직 내 배에 있으니 우린 1+1야, 그러니까 선배가 철저히 불리하다, 이거지.”

“……알았어. 대신 꼭 처남이랑 같이 다녀와야 해.”

“네,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혹시라도 날 납치하려는 사람이 있어도 그 곰 새끼 무서워서라도 가까이 못 올걸?”

“사람한테 곰 새끼가 뭐야, 곰 새끼가. 그것도 처남한테.”

“여보 처남이니까 그나마 곰 새끼지. 내 동생이기만 했으면 곰 취급도 못 받았어요.”

아내가 까르륵 웃으며 처남에게 바로 전화했다.

-나 입대 앞두고 예민한 거 몰라? 누나 목소리 들으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전화하지 말랬지.

곰 새끼가 음산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음산한 목소리는 병원 같이 가자는 말 한마디에 확 돌변하였다.

-어? 뭐? 왜? 저번엔 따라간대도 안 된다고 하더니? 형은? 나 따라가도 돼? 그 기계 가지고 두근두근 심장 소리 나는 거 나도 들어 볼 수 있어?

같이 안 가자고 했으면 큰일 났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리 처남 목소리가 이렇게 명랑했나? 인혁은 웃음이 났다.

“선배 면접 보러 가야 하는데 걱정된다고 너라도 데리고 가래.”

-콜. 대신 이번에 받는 초음파 사진 나도 한 장 줘.

“뭐야, 징그럽게. 남의 애 초음파 사진은 왜?”

-남의 애라니! 내 조카잖아! 안 주면 안 갈 거야!

“야, 그냥 오라면 와. 잔말 말고.”

-뭐야, 왜 함부로 오라 가라야. 나도 인권이 있다!

“그 인권 내 앞에서는 없으니까 깝치지 마라.”

-그니까 그냥 초음파 사진 한 장 달라고오!

처남은 끝까지 초음파 사진을 달라며 징징댔다. 징징대는 목소리가 신나 보였다.

인혁은 전화를 바꿔 처남에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다. 처남은 저만 믿으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인혁은 처남 덕에 한숨 덜었다 싶었다.

그러지 말걸.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혁은 후회 속에서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눈을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4시 44분.

일어나 두 다리를 바닥에 대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4시 45분.

새벽 특유의 냄새가 났다. 다시 혼자가 된 이후 인혁은 이 냄새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매일 매일, 몰아닥치는 하루의 시작을 감당해 내야 했다.

***

사무실에서 일한 지 4개월째에 접어들 무렵, 수민은 처음으로 현장에 나갔다. 사무실 사람들이 작정하고 데리고 나간 건 아니었다.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된다 싶어 사무실에서 계속 일하게 해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사무실 사람들은 수민을 현장에까지 데리고 나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베타나 다름없다지만 그럼에도 오메가였다. 그리고 아직 젊었다. 현장에까지 데리고 나가면 아예 이쪽 일에 발을 들이게 하는 셈인데, 인혁은 물론이거니와 서 여사도 박 씨도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사무실 병아리로 끼고 있다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지 않은가. 언젠간 떠날 사람이다. 떠나는 때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난 후인지,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간 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민이 그들의 생각을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하고, 사무실 사람들은 그저 수민을 사무실 안에서만 끼고 돌았다. 그러므로 수민의 첫 현장 동행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사무실 사람들에겐 천재지변과 다를 바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였다. 불쑥 인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노곤해져 있던 사무실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인혁은 모르는 번호인 걸 확인하자마자 핸드폰을 컴퓨터에 연결하고 스피커를 켰다.

-사, 살려 주세요. 거기, 도와주시는 곳 맞죠. 제발요.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지금 계신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모르면 핸드폰 켜놓기만 하세요. 최대한 소리 줄이고, 안 들키게. 이쪽에서도 더는 소리 내지 않겠습니다. 액정 끄고 핸드폰 숨기세요. 전화는 최대한 끊지 말고. 그럼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제가 지금 어디에 잡혀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말을 더 하지는 않았지만 흐윽, 끄윽, 우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인혁은 키보드를 두드릴 뿐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진 않았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즉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컴퓨터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철컹. 핸드폰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 더는 안 되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김 소장!”

“됐어요. 이 주소로 갑니다, 지금 당장.”

인혁이 핸드폰에서 컴퓨터 선을 뽑아 내던졌다.

근 2주 만의 현장 일이었다. 그것도 피해자가 직접 연락해 온. 세 사람은 다 정신이 없었다. 또 그동안 넷이서 움직이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차를 타고 한참 달리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차에 탄 게 셋이 아니라 넷이라는 걸.

“가자마자 상황 파악해서, 아주 급하지 않으면 근처 경찰서에 연락하거나 그 지역 단체에 연락하자. 위치 보니까 근방에 한 곳, 저번에 같이 일했던 곳 있더라. 일단 지금 내가 연락해 놓을게. 가서 상황이 정 급하면 일단 김 소장하고 박 씨가 들어가서 시간 벌고 있어. 그동안 나랑 수민 학생이 피해자 파악…… 수민 학생? 수민 학생이 여기 왜 있어?”

뒷좌석에 앉은 서 여사가 제 옆을 보고는 꽥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앞에 앉은 두 남자도 수민의 존재를 눈치챘다.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따라붙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늦게 알아차린 거 아닌가. 이런 실력으로 어떻게 위험한 일을 하며 여태 무사했던 거지? 수민은 오히려 세 사람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제 한 몸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할 쪽이 어느 쪽인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수민, 너!”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인혁이었다. 인혁이 콱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도로 한가운데서 급정거할 뻔했으나 박 씨가 “뒤에 차, 차! 안 돼! 멈추지 마!” 소리치는 바람에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인혁은 계속 운전하며 백미러로 수민을 쏘아보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수민아. 니가 여기 왜 있어. 엉?”

박 씨가 인혁을 대신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결에 따라왔어요.”

수민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했다.

“따라올 데가 따로 있지!”

서 여사가 소리쳤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인혁은 후일을 논할 뿐 지금 당장 수민을 어쩌진 못했다.

이제 와 차를 돌려 수민을 사무실에 데려다줄 순 없었다. 그렇다고 이 도로 한복판에서 수민 혼자 차에서 내리게 해 사무실이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수민을 데리고 현장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인혁은 당장이라도 핸들을 꺾고 싶은 눈치였으나 수민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인혁은 급박하게 걸려 온 연락에 유독 약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앞뒤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몇 번이나 허위 제보로 골탕 먹어도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조금 전 걸려 온 전화는 수민이 듣기에도, 허위 제보 같지는 않았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정말 다급하고 절실하게 들렸다.

수민은 피해자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아닌지는 관심 없었다. 다만 인혁이 지금 상황을 다급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일분일초가 아쉬워 속도위반 단속에 걸릴 건 생각도 안 하고 액셀을 밟고 있는데, 자신을 사무실에 데려다 놓을 여유 따윈 없으리라.

수민의 생각대로였다. 셋은 일단 이대로 현장까지 가기로 했다. 차를 안전한 곳에 두고, 그 차 안에 수민을 꼭꼭 숨겨 두든지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래. 정말. 우리야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쳐. 수민 학생은 데리고 나왔다고 정말 따라오면 어떡해.”

서 여사는 수민이 일부러 따라붙었다고는 생각지 않는 듯했다.

현장에서 혹여나 수민이 잘못될까 봐 염려하며, 뒷좌석에서 커다란 연장함을 끌어내 열었다. 안에는 척 보기에도 흉흉한 도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서 여사는 아무렇지 않게 뒤적이다가 구석에 낑겨 있는 전기 충격기, 테이저건 따위를 꺼내 수민의 손에 쥐여 주었다.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쏴요. 어떻게 쓰는 줄은 알아요? 이건 이렇게, 여길 누르고. 나쁜 사람을 향하게 해서. 응?”

“네.”

수민은 서 여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받아 챙겼다. 그래도 앞에 앉은 두 남자는 심란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현장은 경기도 외곽의 야산이었다. 세 사람은 차를 수풀 뒤에 숨기고 수민도 그곳에 숨기려고 했지만, 수민은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여기 혼자 있는 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 무서워요.”

전혀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수민이 말했다.

“서 여사님 뒤에 붙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서지 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차라리 도망가거나 어디 숨어 있어. 아니, 되도록 무조건 서 여사님 옆에 붙어 있어.”

인혁이 당부했다. 수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따라나서서는…….”

인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김 소장. 그게 어디 수민이 잘못인가. 어쩌다 보니 우리들 달려 나올 때 얼결에 끌려 나온 거지. 수민이 그만 혼내고, 가자. 지금 한시가 급하잖아.”

박 씨가 몸을 던져 방어해 주었다. 그리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고 수민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감사해요.”

수민은 일단 고개를 꾸벅였다.

“인사는 나중에, 오늘 일이 끝나고도 마음에 여유가 남으면. 그때 해줘.”

“네.”

“조심해요. 무조건 조심해. 서 여사님 옆에 꼭 붙어 있고.”

박 씨도 인혁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인혁과 박 씨는 차 트렁크에서 야구 배트와 각목을 꺼내 들었다.

“자, 갈까요?”

수민에게 호신용품을 잔뜩 챙겨 줬던 서 여사만 빈손이었다. 수민은 서 여사의 옆에 섰다.

으슥한 산길을 올라, 수풀 사이에 숨어 길 없는 내리막 쪽을 보니 낡은 창고 건물이 보였다. 나무 덩굴이 벽과 지붕을 휘감고, 창문과 문이 다 못질 되어 있었다.

이런 외진 산에까지 산행하러 올 사람은 없겠지만, 설사 있다 한들 길을 잘못 들어 여기까지 왔다 해도 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이상한 점을 못 느꼈을 것이다. 으레 산속에 하나둘 있는 버려진 건물이거니, 하고 지나갔을 터.

하지만 인혁은 달랐다.

“여기 맞아요.”

그의 핸드폰 GPS가 정확히 저 창고를 가리키고 있었다.

“좀 더 지켜보고, 바로 돌입합니다.”

인혁이 말했다.

“이쪽에 연락됐어. 곧 사람을 모아 온대. 그 사람들 도착하면 같이 움직여, 김 소장.”

서 여사가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할 때였다. 창고 문이 열렸다.

등산복 차림의 떡대들이 몇 명 나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안쪽에 손짓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등산복 차림인 여자들이 하나둘 걸어 나왔다. 총 여섯 명이었는데, 평상복 차림의 여자와 남자를 한 명씩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도망갈까 봐 단단히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잡혀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잘 안 보였지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볼 때 건강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바로 갑니다. 서 여사님, 무조건 피해자들부터 보호하세요.”

“김 소장!”

“박 계장님.”

“젠장, 난 몰라.”

인혁과 박 씨가 뛰쳐나갔다.

“아으! 저 고집불통!”

서 여사는 분노했으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상황이 안 좋은데, 여기서 보고 있을래요?”

“아니요, 도울게요. 제 걱정은 마세요.”

수민은 테이저건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였다.

“든든하네. 상황이 저래서, 솔직히 수민 학생이 따라와 준 게 고맙기도 하고. 내가 수민 학생 실력을 잘은 모르지만, 박 씨가 보증한 걸 보니까 한 사람 몫은 할 거 같은데. 믿어도 되죠?”

“네.”

“부탁해요. 무리는 하지 말고. 저 떡대들 막는 건 김 소장이랑 박 씨가 할 테니까, 우리는 저기 피해자들 떼어 내서 한쪽으로 몰고 보호하는 거로. 응?”

“네.”

“가요.”

서 여사와 수민은 비탈길을 내려갔다.

이미 인혁과 박 씨가 떡대들을 막고 있었다. 인혁도 박 씨도, 솜씨가 제법이었다. 수민은 곁눈질로 살피고는 안심했다. 떡대들의 수가 많았지만, 인혁과 박 씨가 불리해 보이지는 않았다.

서 여사와 수민은 창고 뒤쪽으로 도망가는 등산복 여자들을 뒤쫓았다. 두 사람이 쫓아오자 패거리는 씨발, 욕을 하며 팔짱 끼고 있던 피해자들을 던지고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착착착, 나이프를 손안에서 굴렸다.

“수민 학생, 조심해!”

서 여사가 당부했다.

“네.”

수민은 서 여사가 걱정됐으나 곧바로 그 걱정을 거둬들였다.

“이야아압!”

서 여사는 제게 달려오는 등산복 여자의 찌르기를 피하고, 손등을 내리쳐 나이프를 떨구더니 멱살을 잡고 엎어치기로 바닥에 내리쳤다.

엎어치기당한 등산복 여자는 바닥을 뒹굴며 괴로워하다가 서 여사에게 어깨가 밟혀 우두둑, 탈골되었다.

“내가 한때 말이야, 유도 국가대표 상비군이었거든.”

서 여사가 두 손을 탁탁 털며 씩 웃었다.

단단한 체구와 눌린 귀, 두꺼운 손을 보고 내심 짐작하긴 했는데. 국가대표 상비군이었다니. 수민은 왜 박 씨가 서 여사 앞에만 서면 약해졌는지 알게 되었다. 인혁과 박 씨가 서 여사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 당부했는지도.

“선수 시절에 몸 관리하느라 매운 걸, 특히 떡볶이 같은 건 절대 못 먹었어. 그때 한이 들려서 말이야. 이야아압!”

서 여사가 떡볶이에 집착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서 여사가 단번에 두 사람을 해치우자 남은 넷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한 명이 서 여사보다 만만해 보이는, 멍하니 서 있는 비리비리한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아마 인질로 삼아 퇴로를 뚫으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지지지지직-!

바로 전기 충격기의 제물이 되어 버렸다.

털썩.

등산복 여자가 쓰러져 바들바들 경련했다. 수민은 폴짝 건너뛰었다. 어깨를 부서뜨리진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래 놔둬서, 방전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방전된 거 같은데요?”

수민이 전기 충격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푸른 전기가 일지 않았다.

“이런.”

서 여사가 안타까워했다.

“젠장, 이것들이이이!”

등산복 여자 중 한 명이 이를 악물고 수민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전기 충격기가 작동하지 않으니, 만만하다고 생각한 듯했다.

아무리 만만해도 그렇지 왜 한 번에 함께 덤비지 않고 하나씩 덤비는 걸까. 불리하게. 수민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민은 등산복 여자가 제게 닿기 전에 전기 충격기를 집어 던졌다. 퍽. 전기 충격기가 정확히 어깨에 부딪혔다. 등산복 여자는 꺅! 소리를 내며 나이프를 놓쳤다. 그 사이 수민은 주머니에서 테이저건을 꺼내 여자에게 쏘았다.

전기 구이가 한 마리 추가되었다.

“이건 몇 번 더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수민이 테이저건을 들고 남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은 두 명이 사색이 되어 등을 보였다.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어딜!”

서 여사가 바로 따라가 한 손에 한 명씩 목덜미를 잡아챘다.

“저런.”

수민은 조금 전 서 여사가 그랬듯 안타까워했다.

서 여사가 일부러 말해 주지 않았던가. 유도 국가대표급이라고. 그런데 허투루 등을 보이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듯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을 뒹굴었다. 빡, 빡. 뼈 부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수민은 적들의 시체를 폴짝폴짝 뛰어넘어 피해자들에게로 갔다.

피해자들은 옹기종기 모여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여자 둘, 남자 넷이었다. 옷이 찢겨 있고, 얼굴과 몸에 멍과 상처가 나 있었다.

“오메가 대상 범죄 연구소에서 나왔습니다. 혹시 전화 주신 분이…….”

수민이 여섯 명을 둘러보며 물었다. 흐윽. 제일 오른쪽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저, 저요. 저요. 제가요…….”

체구가 작은 단발머리 여자가 손을 들었다. 머리가 쥐어뜯겨 있었다.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한데, 눈물 맺힌 두 눈엔 일말의 희망이 번지고 있었다.

“네. 그러시군요. 연락을 주셔서 찾아왔습니다.”

수민이 말했다.

“그, 그러면, 그러면…….”

단발머리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서 여사가 다가와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무표정한 수민의 얼굴을 보고선 전혀 마음을 놓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서 여사를 보고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두 명은 기절했고, 네 명은 울음을 터뜨렸다. 서 여사는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모두 끌어안아 주고 다독였다.

수민은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인혁과 박 씨 쪽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 보였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서 있는 떡대 한 명의 목과 무릎을 동시에 내려쳤다. 바닥에 쓰러진 떡대들을 발로 차 한곳에 모았다. 언제 챙겼는지 가져온 로프로 꽁꽁 묶고는 이쪽으로 왔다.

“수민아,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박 씨가 촐싹맞게 다가와 수민을 앞뒤로 살폈다. 두어 걸음 뒤에서 걸어온 인혁도 수민을 보았다.

“저 괜찮아요.”

질문한 건 박 씨지만 인혁을 보며 대답했다.

“그래.”

인혁이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나쳤다. 수민의 눈이 인혁을 뒤쫓았다.

박 씨가 서 여사 품에 안긴 피해자들을 보고는 서 여사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인혁은 딱히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수민처럼 누가 전화를 한 건지 찾고는, 단발머리 여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이제야 무슨 사정인지 물었다. 코트 자락이 바닥에 쓸려 더러워졌다. 이미 군데군데 구겨지고 찢겨 있긴 했지만.

인혁은 단발머리 여자가 울면서 띄엄띄엄 말하는 걸 인내심 있게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자 둘에 남자 넷. 모두 20대 초중반의 오메가들이었다. 구직난에 높은 연봉의 무역 회사에 취업시켜 준다는 말을 믿고 면접을 보러 갔다가 잡혀 온 거라고 했다.

여섯 명 모두 가족이 있었고 신원이 분명했다. 인혁은 더 묻지 않았다.

한참 후 이 지역 협력 단체가 도착했다. 인혁은 그들에게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넘기고 물러났다.

차를 세워 둔 곳까지 걸어 내려와 차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사무실 사람들은 별말이 없었다. 따라서 수민도 아무 말이 없었다.

차가 한참 도로 위를 달렸다. 올 때는 그래도 환했던 것 같은데, 가는 길은 하늘이 불긋했다가 금방 어두워졌다. 수민은 멍하니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많이 놀랐죠?”

서 여사가 수민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요.”

수민이 고개를 저었다.

“서 여사님 옆에 있는데 무서울 게 뭐 있었겠어. 그치?”

박 씨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차 안은 언제 조용했냐는 듯 시끌벅적해졌다. 서 여사는 수민이 얼마나 차분하고 제 몫을 잘해 냈는지 칭찬했다. 박 씨는 자신이 얼마나 기깔나게 날아다녔는지 떠들어 댔다. 인혁은 운전에만 집중했다. 박 씨의 헛소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수민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틈을 봐 박 씨에게 말했다.

“감사해요.”

“응? 뭘? 내가 뭘 했다고?”

“…….”

“왜, 왜? 뭐야. 뭐가 감사해.”

박 씨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아까, 오늘 일 다 끝난 다음에 감사하라고 하셨거든요.”

“내가? 언제…… 아, 아. 그때? 기억력도 좋아, 우리 수민이.”

박 씨가 크게 웃으며 수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민이 얼결에 손을 잡자 악수한 손을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늘 신고식 아주 제대로 했네.”

그렇게 말하고는 인혁을 돌아보았다.

“김 소장, 걱정할 거 없겠는데.”

“그렇게 말해도 오늘뿐입니다.”

“왜에, 보니까 서 여사님이랑 찰떡 콤비 될 거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뭐, 그건 나중에 차차 의논하기로 하고.”

“의논할 거 없습니다.”

“아, 나. 왜 이래, 사람이 융통성 없이. 아무튼 오늘 한 건 멋지게 해결했는데 말이야, 수민이도 함께. 뭐 없어? 응? 회식. 고기!”

박 씨가 손으로 술 마시는 흉내를 내었다. 인혁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듯하더니 풀렸다.

“뭐, 다들 고생들 했으니까.”

“그렇지이! 고기, 소고기 합시다! 우리 수민이의 멋진 첫 현장 체험을 기념하며!”

“처음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번에 마지막일 테니까.”

인혁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으나 박 씨 역시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차가 큰길에 접어들어 길가의 큰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은 당당하게 음식점으로 걸어갔다. 아니, 신나게 걸어 들어간 건 서 여사와 박 씨, 두 명이었다. 인혁과 수민은 휩쓸려 끌려들어 가듯 따라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가게에 들어가기 전, 인혁이 수민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어깨를 툭툭 쳤다.

“오늘 고생 많았다.”

잠깐이지만 어깨가 무거워졌다. 늘 맡던 그 냄새가 유독 진하게 느껴졌다. 벽돌처럼 어깨에 얹힌 기분이 들었다.

수민은 신발을 벗다 말고 인혁이 두드린 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인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 구한 피해자는 여섯.

그중 남자는 둘이었다.

모두 20대 초반이었다. 하지만 인혁의 아들일 가능성은 없었다. 둘 다 평범한 가정에서 잘 자라다 취업이 안 되는 바람에 삐끗해서 범죄의 타깃이 된 것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인혁은 굳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수민 학생, 얼른 들어와!”

서 여사가 자리를 잡고 앉아 손짓했다.

“아, 네.”

수민은 고개를 끄덕이곤, 얼른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웠다.

***

아침에 눈을 뜨니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인혁은 아내의 배에 살짝 손을 올렸다.

“꼬맹아, 너도 아직 자는 중이야?”

퉁. 난 깼다며 아이가 배를 찼다. 아니, 주먹을 내지른 건지도.

“쉿. 엄마 깰라.”

인혁이 조그맣게 말하니 알아들은 것처럼 잠잠해졌다.

귀여운 녀석. 인혁은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온기에 미소 지었다.

식사를 준비해 아내와 먹은 뒤, 인혁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취업 희망 1순위였던 그 회사의 면접 날이었다. 인혁은 면접에 대한 가벼운 긴장감과 아내와 병원에 함께 가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며 현관 앞을 서성였다.

“오늘 아빠랑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아빠 보고 싶어 할 거지?”

인혁은 아내의 배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뭐래. 얼른 못 가!”

아내가 무슨 주책이냐며 등을 팡팡 때렸다. 인혁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 엄살을 부렸다. 아야, 아야. 엄마가 아빠 막 때린다.

그 말을 용케 알아들었는지 아기가 배 속에서 발을 뻥뻥 차댔다. 엄마와 편 먹어 아빠를 때리는 건지, 아빠 그만 때리라고 엄마한테 항의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인혁은 저 좋을 대로 생각했다.

“아빠 없는 동안 엄마 지켜 줘. 엄마 힘들게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알았으니까 얼른 가요. 이러다 해 지겠어.”

“나 우리 아가한테 말한 건데. 방해하지 말아 줄래?”

“내가 대신 대답해 주는 거예요. 얼른 안 가?”

“아가야, 봐봐. 엄마가 벌써 우리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네. 그래도 우리 아가는 아빠 목소리 잘 듣고 있지? 아빠 목소리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 아빠 꼭 기억해야 해.”

“뭐 하는 거예요, 영영 헤어지는 사람처럼. 어디 출장이라도 가요? 아니면 내가 갑자기 울 애기랑 같이 도망이라도 갈까 봐? 몇 시간 있으면 또 볼 텐데. 왜 그래, 정말 미쳤어, 미쳤어.”

아내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남사스럽다며 인혁을 구박했다. 그래도 인혁은 꿋꿋하게 계속 말했다.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아빠 목소리를 많이 들려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줘야 아기가 태어나서도 금방 아빠를 알아보고 따른다고 했으니까.

“내 목소리만 들어도 난 줄 알아야지, 우리 아가는. 그치, 아가야?”

인혁은 다정히 속삭였다.

“아가야, 사랑해. 너무 사랑해. 아빠는 우리 아가 너무 보고 싶어. 사랑해.”

알고 있다는 듯 퉁퉁, 발로 차는 게 느껴졌다.

인혁은 너무 좋아서 아내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임신 중이라 그런지 특유의 페로몬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아내와 아이는 인혁의 행복, 그 자체였다. 이 행복을 두고 혼자 나가야 한다니. 가기 싫은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인혁은 절 문밖으로 내모는 아내가 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선배, 돈 안 벌어 올 거야? 그럼 우리 결혼 못 해.”

자꾸 이러면 우리 결혼 없어. 아내가 엄포를 놓았다.

“이미 혼인 신고했잖아. 장인어른도 어쩌지 못하시겠지. 그리고 내가 설마 너랑 우리 아기를 굶기기야 하겠어?”

인혁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와, 이거 봐. 결혼 허락받으러 올 때만 해도 뭐든 한다더니. 도장 찍으니까 이렇게 마음이 바뀌어? 이보세요, 김인혁 씨.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마음에 달라진다더니, 그런 겁니까?”

“마음이 달라지긴 한 거 같네요.”

“뭐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깊어졌으니까, 달라지긴 한 거지. 일 안 하고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아기한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어야지. 그냥 돈 많은 백수 아빠가 되고 싶은 거야? 아기 보기에 부끄럽지 않아?”

“빌딩 열 채를 물려줄 수 있는 아빠라면?”

“우리 아기를 그런 속물로 키울 거야? 아빠를 존경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

언제나 그렇듯 아내의 말이 옳았다.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었다. 양복을 입고 큰 회사에서 근무하고, 그 모습 그대로 퇴근해 유치원에 또 초등학교에 하교 시간을 맞춰 데리러 가면. 아이가 ‘봐봐라, 우리 아빠다. 멋있지?’라며 친구들한테 자랑하고는 ‘아빠아!’하고 달려올 수 있도록.

“……면접 보러 가기 싫다. 진짜.”

인혁은 끝까지 질척대며 집을 나섰다.

일단 대학에 들러 졸업에 필요한 서류를 접수하고, 담당 교수님과 상담을 마친 뒤 면접 볼 회사로 갔다. 다행히 면접 시간 전, 여유 있게 도착했다.

‘지금쯤이면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있겠지. 초음파로 우리 아가 보고 있으려나. 건강하려나, 산모 상태도 좋아야 하는데.’

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혁은 화장실로 뛰듯 걸어가며 바로 전화를 받았다.

“왜? 무슨 일이야? 혹시 뭐가 잘못된 건 아니지?”

-선배! 우리 아기 오메가래요. 아들이고.

아내의 목소리가 밝았다.

알파든 오메가든, 아들이든 딸이든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오메가라니까 괜히 웃음이 났다.

“여보 닮았나 보네.”

-그런가 봐. 옆에서 동생 놈이 죽상이야. 오메가면 날 닮은 거 아니냐고, 왜 형 안 닮고 날 닮았냐고.

“뭐? 그 소리 듣고 가만있었어?”

-내가? 설마. 옆에서 이 자식 우는 소리 안 들려요?

아닌 게 아니라 형, 혀엉, 하며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내와 처남의 모습이 그린 듯이 눈에 선했다. 곰처럼 덩치 큰 베타 남성을 퍽퍽 때리는 작고 마른 오메가 여성. 병원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며 돌아봤을 터였다.

인혁은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아내와 처남이 티격태격 말다툼하는 소리가 정답게 들렸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글쎄. 지금은 없어요. 그냥 우리 아기는 아빠가 보고 싶기만 하대요. 나도 우리 자기 보고 싶고.

우웩-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못 있어? 아내가 소리 지르며 처남의 등을 퍽퍽 내리치는 소리도 들렸다.

“조심조심. 위험하니까. 처남 때리는 건 나중에 하고.”

-괜찮아요, 평소보다 약하게 때렸어.

“그럼 다행이고.”

다행? 다행이라니! 처남이 옆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인혁은 소리 내 웃으며, 더 다정하게 물었다.

“정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응. 없으니까, 면접 잘 보고 조심해서 들어와요. 나도 지금 바로 집에 갈 거니까. 기다리고 있을게요.

“냉장고에 망고랑 체리 있으니까 먹고 있어. 나 갈 때까지 처남 보내지 말고 같이 있고.”

“응.”

인혁은 웃으며, 또 아쉬워하며 겨우겨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고, 화장실에 온 김에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잘하자, 김인혁. 우리 아들한테 부끄러운 아빠가 되면 안 되지.”

반드시 합격하자. 육아 휴직 3년! 인혁은 거울을 보며 각오를 다졌다.

대기실로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이름이 불렸다. 인혁은 앞 번호 사람들과 함께 면접실로 갔다.

면접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면접관들은 인혁에게 호의적이었다. 인혁은 회사를 나서며 합격할 것 같다고 확신했다. 대개 이런 확신은 잘 맞는 편이었다.

산모는 건강하고 아이도 건강하다. 아이는 오메가고, 남자아이라는 걸 알게 됐다. 면접은 준비한 걸 다 보이고 좋은 분위기로 끝났다. 이대로 집에 가면 아내와 처남이 거실에 앉아 망고와 체리를 먹으며 그를 반길 터였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놈이 또 있을까. 인혁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미친놈처럼 계속 웃어 댔다.

미친놈 같다고 생각한 건 본인만의 생각이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인혁을 돌아보았다.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단정히 넘긴 인혁은 눈에 띄는 미남이었다. 안 그래도 잘생긴 남자가 세상 모든 행복을 거머쥔 양 웃고 있는데, 눈길이 안 갈 리 없었다.

인혁은 절 힐끔힐끔 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왜요? 제가 끝내주게 행복한 유부남 같아 보이나요?’

구름을 걷는 듯 발아래가 두둥실 했다. 사람 가득한 버스에 낑겨 가도 계속 웃음이 났다. 인혁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계속 웃었다.

인혁은 두 정거장 앞에서 내려 동네에서 맛집으로 알려진 빵집으로 갔다. 아내는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빈손으로 갈 순 없었다.

아내와 처남은 빵순이 빵돌이었다. 특히 이 집 빵을 좋아했다.

갓 나온 빵을 종류별로 넉넉해 산 인혁은 큰 빵 봉지를 안고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 집으로 갔다.

뭔 빵을 이렇게 사 왔냐고 타박하면서도, 서로 먼저 슈크림 빵을 먹겠다고 손 내미는 두 사람이 집에 있어야 했는데.

집엔 아무도 없었다.

인혁은 눈을 떴다.

또 꿈을 꿨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젠 익숙했다. 그 꿈속에서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또한.

“…….”

인혁은 두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정말 그렇게 될까 봐 끔찍해하는 자신을 느꼈다.

가족을 잃은 그날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히는 게 나을까. 아니면, 가족을 잃고 20년 넘게 헤매는 현실에서 눈뜨는 게 나을까. 어느 게 더 끔찍한 일인지 인혁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

우성 오메가라는 이유로 성희롱당하고 똥차만 만나던 아내가, 그래서 히트 사이클이 올 때마다 빼먹지 않고 억제제부터 챙겨 먹던 아내가. 배 속 아이가 오메가란 말을 아무 구김살 없이 말해 주었다. 그 맑은 목소리에는 절 지켜 주고 믿어 주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새끼는. 그 새끼는 여태 제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벽에 걸린 시계는 4시 44분을 가리켰다.

인혁은 보이지 않은 끈에 묶인 듯 일어나 두 다리를 바닥에 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4시 45분.

열어 둔 창문에서 새벽 냄새가 밀려들어 왔다. 인혁은 새벽 특유의 습기에서 비린내를 맡았다. 그것이 사실 제 몸에서 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페로몬이 느껴졌다.

인혁은 발작적으로 손을 뻗어 협탁 위를 더듬었다. 큰 약병과 작은 약병이 모두 손안에 들어왔다. 인혁은 작은 약병의 뚜껑을 비틀듯 열어 빨간 알약을 입에 물었다.

알약을 억지로 삼켰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인혁은 무릎에 팔을 걸치고 고개를 숙인 채 절 둘러싼 비린내가 사라질 때까지 참고, 참았다.

무얼 참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

인혁은 수민의 현장 동행을 단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상황은 인혁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제보 전화를 받고 급히 차에 오를 때마다 수민은 소리 없이 따라붙었다. 운전하고 가다 아차 싶어 돌아보면 수민이 앉아 있었고, 운전대를 돌릴 수 없었다.

그건 다급한 제보 전화를 받으면 앞뒤 생각 못 하고 일단 달려 나가고 보는 인혁의 허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 여사와 박 씨의 은근한 묵인 때문이기도 했다.

“애를 언제 내보낼지 생각해 두라더니. 그런 말을 하셨던 분이 이러시기입니까.”

참다못한 인혁이 서 여사에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미안, 김 소장. 그런데 너무 도움이 되는데 어떡해. 솔직히 셋보다 넷이 낫잖아? 수민 학생이 현장에선 얼마나 펄펄 날아다니는지 알아? 솔직히 박 씨보다 더 든든해.”

“나보다 든든하다는 말은 잘못된 거 같지만, 수민이가 제 몫 잘한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김 소장, 아니 일 잘하는 애를 왜 놀려? 지금 손 하나가 아쉬운 판 아냐?”

협력 업체의 도움을 받고, 때론 경찰과 연계해 일하기도 하지만. 정말 급할 때는 사무실 사람들만으로 범죄 현장을 급습했다. 그러니 사무실 사람이 셋인 것보다는 넷인 게 좋았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그 하나가 아주 똘똘하여 제 몫을 충분히 하니, 이제 나이 들어 힘들다고 투덜대던 서 여사와 박 씨의 눈이 돌아갈 만했다.

그래도 인혁은 웬만하면 수민을 현장으로 내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민 본인의 의지가 굳건한 데다가 주변에서 모두 수민의 편을 드니, 인혁 혼자 아무리 반대한들 도리가 없었다. 인혁이 꺾이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얼마나 더 고집을 부리며 버티느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인혁은 제가 언제 허락할지를 두고 서 여사와 박 씨가 내기를 걸었다는 걸 알았다. 서 여사는 일주일, 박 씨는 고작 3일에.

인혁은 기를 쓰고 2주를 더 버텨 두 사람의 내기를 물거품으로 만든 뒤 수민을 받아들였다. 전날 현장에서 서 여사가 크게 다칠 뻔했던 사건 때문이었다. 수민이 옆에 있어 다행히 가벼운 찰과상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웬만하면 네가 현장에 안 따라왔으면 좋겠어.”

인혁이 수민을 따로 불러내어 말했다.

“절대 방해되지 않을게요.”

“방해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야. 네가 위험해질 수 있어. 그게 문제지.”

인혁이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잘근잘근 씹었다.

소장으로서 수민을 현장에 데려가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오범연 소장이 아니라 그냥 김인혁은,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혁은 수민의 말간 얼굴을 보면 자꾸 마음이 편협해졌다.

수민을 위험한 곳에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서 여사가 그렇게 크게 다칠 뻔했고, 수민이 현장에서 얼마나 유능한지 봤는데도.

“위험해지지 않을게요.”

“그게 네 마음대로 되는 거면!”

무조건 따라나서겠다는 수민이 답답해, 인혁이 발끈했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인혁은 수민의 까만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목이 멨다. 아니, 목이 마른 걸지도 몰랐다. 날 듯 말 듯 연약하던 수민의 향이 유독 진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인혁은 하마터면 손을 뻗어 수민을 붙잡을 뻔했다.

붙잡아서 뭐 하려고?

당혹스러워 눈을 피하는데.

“소장님께서 지켜 주시면 되잖아요.”

수민이 기어이 쫓아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인혁은 다시 목이 탔다. 실수로라도 수민에게 손대지 않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

서 여사와 박 씨만 수민에게 약하다는 생각은 철회되어야 했다. 수민에게 약한 건 인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켜 주실 거죠?”

“……절대 위험할 땐 나서지 말고.”

인혁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네.”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서 여사님 뒤에 숨어.”

“네.”

“서 여사님 다치고 우리 다 잘못돼도 나서지 마.”

“…….”

“대답해. 왜 대답을 하다 말어?”

인혁이 재촉해도, 수민은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대답 안 하면 안 데리고 갈 거야.”

“……생각해 볼게요.”

“생각해 봐? 뭘 생각해 봐. 무조건 네, 라고 대답해.”

“싫어요.”

“싫어?”

“소장님 다치는 건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요.”

수민이 담담히 말했다. 표정 없는 말간 얼굴로. 흔들림 없는 눈으로 인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혁은 말문이 막혔다.

“나는 어른이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건만.

“제가 도와서 소장님이 안 다칠 수 있다면, 전 그렇게 할 거예요.”

수민이 바로 반박했다.

“수민아.”

어째서인지 인혁은 수민의 이름을 부를 때면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전 괜찮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뭐가 괜찮아, 뭐가.”

인혁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치겠다, 너 때문에.”

“저도 힘들어요, 소장님 때문에.”

“뭐? 뭐가 힘들어.”

“자꾸 이렇게 일하는데 방해하시잖아요.”

“말하는 거 보게? 내가 널 방해해?”

“저도 여기서 월급 받고 일하는 직원이에요. 똑같이 일할 수 있게 해주세요. 혼자만 남아 있는 건 싫어요.”

혼자, 라는 말. 인혁이 그 말에 약하다는 걸 알고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수민은 그 말을 입에 담았고, 인혁은 수민이 그런 말을 하는 걸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설사 위험해지더라도, 아니, 차라리 위험한 게 낫겠지. 혼자가 되는 것보다.’

인혁은 이렇게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머릿속이 뿌옜다.

‘내일부턴 약을 더 먹고 와야겠구나.’

인혁은 더 짙게 느껴지는 것 같은 수민의 향을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

“안 위험하게, 조심할게요.”

여기서 안 된다고 대답했다가는 또 도돌이표가 될 테니. 인혁은 뒤로 물러선 김에 마저 물러섰다.

“그래, 일단, 알았어.”

인혁은 무심코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흠칫, 손을 거두었다. 수민은 왜 만지다 마냐는 눈빛으로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사무실에, 서 여사님이랑 같이 있어.”

인혁은 제가 무슨 정신으로 코트를 챙겨 들고 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 길로 인혁은 집에 가 억제제를 한 알 더 먹고, 최신형 전기 충격기와 테이저건을 사 수민에게 주었다. 동행을 허락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

“처가댁으로 갔나?”

이상하다, 간다는 말이 없었는데.

인혁은 빵 봉투를 식탁에 올려놓고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서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아침에 넣어 둔 망고와 체리가 그대로 있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처남의 핸드폰은 아예 꺼져 있었다.

“피곤해서 자나?”

처남은 컴퓨터로 게임 하느라 핸드폰이 꺼져 있는지도 모르고?

예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기에, 인혁은 처가에 전화를 걸었다.

-김 서방, 무슨 일이야. 오늘 면접이었다면서, 잘 보고 왔어?

“네, 장모님. 걱정해 주셔서 잘 보고 왔습니다. 제 아내랑 처남은 거기 가 있나요?”

-으응? 우리 애들? 아까 막내가 누나랑 병원 간다고 나갔다가 아직 안 들어왔는데? 왜? 아직 도착 안 했어?

“…….”

-김 서방?

“아, 네. 올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안 오네요.”

-그래? 둘이서 또 딴 길로 샜겠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서 먹으러 갔다거나.

“그렇겠죠? 말도 없이 그럴 리는 없을 거 같은데…….”

-걔네 둘은 예전부터 잘 그랬어.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노는 거에만 신이 나서. 나만 속 탔지.

“예에.”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애들이 철이 없어서 김 서방이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그럼 두 사람 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저녁은 먹었고?

“아니요, 오면 같이 먹으려구요.”

-그래요, 그럼.

인혁은 전화를 끊고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았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왠지 답답한 기분이 들어 목을 죄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보니 오후 5시 30분이었다.

“어딜 간 거야, 말도 없이. 사람 걱정하게.”

돌아오면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혼내 줘야지. 전화는 왜 안 받고, 핸드폰은 왜 꺼놨냐고 따끔히 한마디 하고. 둘 다 삐져서 입이 댓 발 나오면, 그 입에다가 슈크림 빵 하나씩 물려 줘야지.

인혁은 애써 행복한 상상을 하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을 꾹꾹 짓눌렀다.

그렇게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인혁은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지 않았다.

오전 10시 45분. 면접 봤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합격.

다음 달부터 출근이 가능한지, 필요한 서류는 무엇인지 안내하는 긴 메일이 왔다. 인혁은 메일을 읽는 대신 112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고 나서도 견딜 수 없어 경찰서로 달려갔다.

문은 잠그지 않고 열어두었다. 혹시라도 아내와 처남이 돌아왔는데, 집 현관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못 들어올까 봐.

하지만 아내와 처남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인혁은 미친 사람처럼 아내와 처남을 찾아 헤맸다. 좋은 회사에 합격하고도 입사를 포기했다. 졸업을 앞두고 학교를 휴학했다. 다시 자퇴했다.

사람들은 인혁이 원한 적 없는 동정심을 마음껏 퍼주었다. 어떻게 저런 남편을 놔두고 지 동생이랑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대?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피가 안 섞였어도 그렇지. 애도 남편 애가 아니라는 말이 있던데…….

인혁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인혁은 단 한 번도 아내와 처남 사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둘이 실종된 이후에도 단 한 번도.

형형 거리면서 곰살맞게 굴었으면서, 누나 몰래 불러내선 우리 누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가만 안 둘 거라고 협박했던 스무 살 청년. 입대를 앞두고는 ‘형, 군대 가면 진짜 PX에서 총알 개인이 알아서 사야 해요?’라고 진지하게 묻던 그 순박한 청년을, 어찌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범죄자들에게 납치라도 당한 거 아닐까?

인혁은 두 사람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산부 실종 사건의 피해자가 된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경찰서를 찾아다니고 관공서를 쫓아다니며 제발 수사 좀 해달라고 매달렸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매몰찼다. 그 많은 돈도 이럴 땐 아무 쓸모가 없었다.

윗대가리들은 어떻게든 피해자 규모를 줄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실무자들은 밀려드는 업무에 지쳐 일개 실종자 가족을 일일이 케어해 줄 여력이 없었다.

인혁은 몇 달을 낭비한 끝에 공권력에 기대 아내와 처남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장인 장모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직접 찾아 헤맸다. 아내를, 처남을, 그리고 아이를.

돈과 시간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돈이 드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건 시간, 시간이었다.

하루가, 일분일초가 지날 때마다 심장이 저미고 등골이 섬뜩해졌다. 아내와 처남이, 그리고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찾을 가능성이 점점 더 낮아지는 것은 아닐까 하여.

시간이 정신을 좀먹었다.

장인 장모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장모가 먼저 쓰러졌고, 그다음은 장인이었다.

“우리 애들, 우리 애들을 찾아 주게. 김 서방, 미안하이. 김 서방한테 이런 짐을 맡겨서……. 알아, 이젠 다 내려놓고, 다 포기하고, 자네 갈 길 가라고 놔줘야 하는 걸 아는데. 모르지 않는데…… 내 새끼들, 우리 애들이 눈에 밟혀서, 김 서방. 미안하이, 미안해…….”

“제가 반드시, 반드시 찾을 겁니다. 아내도 처남도, 아이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네, 고마워. 내가, 죽어서도…… 이 은혜는 절대, 절대 잊지 않겠네.”

그들은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혁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다.

인혁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장인의 장례식까지 마치고 납골당을 나선 인혁은 집으로 갔다. 발이 알아서 움직였다.

몇 달 만에 와 본 걸까. 아니, 어쩌면 몇 년 만에 돌아온 것일지도.

혼자 돌아온 집은 먼지가 새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여전히 빵 봉지가 놓여 있었다.

인혁은 그 빵 봉지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아, 나는 또 이 꿈을 꾸고 있구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또 가족을 잃었고, 혼자가 되었을 뿐.

인혁은 제가 이곳에서 뭘 가졌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잃었는지 곱씹었다. 심장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쥐어짜 내며 피와 고름을 쏟아 냈다.

가족을 가지고 싶었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모자란 것 하나 없이 기르고 싶었다.

아빠가 되고 싶었다. 일찍 죽지 않고, 오래오래 아이 옆에 있어 주는 아빠가.

남들에겐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 그에게는 일생의 목표가 되었다.

아이를 낳는다면 자신처럼 홀로 자라게 하지 않으리라. 어리광도 부리고 철없이 떼도 쓰고 짜증도 내고. 사춘기 때는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제 방에 들어갔다 엄마한테 혼도 나고. 엄마 몰래 아빠가 준 용돈으로 좋아하는 게임기도 사고 피시방에도 가고. 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학교 졸업식이면 부모님이 꽃다발을 들고 오는 게 너무 당연해서 굳이 목을 길게 빼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되게. 그렇게 듬뿍 사랑받고 자란 아이로 키우고야 말리라.

내 부모는 내게 못 해주었지만, 나는 내 아이에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잃어버렸다. 가족을, 아내를, 아이를.

너무 쉽게 얻었기 때문일까?

인혁은 가정을 꾸린 뒤, 그 행복을 잃는 게 무서워 종교를 믿기 시작했다. 장모가 목사로 있는 교회에 다니며 세례도 받았다. 장인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렸지만, 인혁이 밀어붙였다.

이렇게 행복한데. 이 행복이 아무 이유 없이 제게 우연히 굴러들어온 거라는 게 불안했다. 이유 없이 얻은 거면 이유 없이 잃어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차라리 이 세상에 신이 있어서, 그 신이 자신에게 행복을 준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간 너는 너무 외롭게 홀로 살아왔구나. 불쌍하니까 가족을 주마. 행복을 주마. 그렇게 신이 내려 준 거라면, 이 행복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인혁은 신을 믿었다.

하지만 신을 믿었는데도 또 가족을 잃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뭐라고 말할까? 그간 너는 너무 쉽게 행복을 누렸구나. 그만하면 됐으니, 이제 그 행복을 거둬 가마?

그런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인혁은 구둣발로 걸어 들어가 식탁에 놓인 빵 봉지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이랬던가? 아니면 지금, 꿈이기에 이럴 수 있는 건가.

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백, 수천 번의 꿈에서도 똑같이 고민하였고, 똑같이 저질렀을 테니까.

인혁은 빵 봉지를 벽에 걸린 십자가에 집어 던졌다. 봉지가 터지며 상할 대로 상한 빵들이 십자가와 벽에 덕지덕지 붙었다. 상한 음식이 피고름처럼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당신이 존재한다면. 정말 존재해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나는 당신을 증오하겠어. 다시는 당신을 믿지 않겠어.”

인혁은 더럽혀진 벽을, 손이 긁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살이 찢겨 피가 흘렀다. 그래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게 싫다면, 정말로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돌려 내, 되돌려 줘. 내 행복을, 내 가족을. 내 아이를.”

그건 차라리 비명이었다.

“두고 봐. 반드시 되찾을 거야. 이렇게, 이렇게 빼앗기지 않아. 이렇게 내게서 빼앗아 갈 순 없어.”

인혁은 제 피고름 맺힌 벽에 대고 맹세했다. 긴 시간이 흘러도, 평생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되찾고야 말겠다고.

“절대, 절대 포기 안 해.”

너무 쉽게 얻어 쉽게 잃은 거라면 아주 어렵게 되찾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이번엔 신이라 하더라도 다시는 빼앗지 못하겠지.

내 가족, 내 행복을.

인혁은 핏발 선 눈으로 더러워진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눈을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4시 44분이었다.

인혁은 일어나 두 다리를 바닥에 대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곧 4시 45분이 되었다.

또 새벽, 또 비린내. 하루의 시작은 어제보다 좀 더 끔찍했다.

몸이 찐득했다. 셔츠가 기분 나쁘게 몸에 달라붙었다. 자면서 땀을 흘리기엔 이른 계절임에도 인혁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인혁은 협탁 위의 약병 두 개를 한 손에 쥐고 부엌으로 갔다. 식탁 위로 던지듯 약병을 내려놓고 알약을 꺼냈다. 파란 거 한 알, 빨간 거 두 알.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물은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인혁은 싱크대에서 수돗물을 받아 약을 삼켰다.

인혁은 욕실로 가 샤워기 앞에 서서, 얼굴에 달라붙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타일 벽을 바라보았다.

한참 찬물을 뒤집어써도 개운해지지 않았다. 몸을 감싸고 도는 페로몬이 기분 나쁘게 일렁였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다면 다 쥐어뜯어 내고 싶었다.

찌르르하게 두통이 밀려왔다. 두통이 눈알까지 밀려 내려왔다. 인혁은 무언가를 생각하려다가, 제가 무얼 생각하려고 했었던 건지 기억나지 않아 생각하길 포기하고 샤워기를 껐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래도 머리가 맑아지지 않았다.

인혁은 대충 물기를 닦고 가운을 걸친 뒤 세면대 앞에 섰다. 날 선 면도칼로 면도를 하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물에 흠뻑 젖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남자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뭐 잘한 게 있다고 저렇게 멀쩡한 걸까. 짜증이 났다. 짜증은 짜증으로만 끝나지 않고, 충동을 부채질했다. 페로몬에 절어 희뿌옇게 흐려진 머리가 그 충동에 끌려갔다.

인혁은 주먹으로 거울을 내리쳤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거울이 부서졌다.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이 세면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등이 찢어졌는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손이 아파도 머릿속은 여전히 희뿌옜다.

아직도 벽에 남아 있는 거울 조각이 인혁을 비췄다. 크고 작은 수십 명의 인혁이 인혁을 바라보았다.

입 안에서 비린내가 났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더 보고 있으면 손으로 거울을 깨는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인혁은 치솟는 충동을 참고 또 참으며 거실로 가 소파에 길게 누웠다.

피 흐르는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성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페로몬이 갈무리될 때까지.

서서히 몸이 바닥으로 푹 꺼졌다.

몸에서 찬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몸이 다시 끈적해지는 것 같았다. 애매한 열기가 몸을 둘러쌌다. 입 안이 말랐다. 자꾸 비린내가 났다.

목이 탔다.

하지만 이건 물을 마신다고 해결될 갈증이 아니었다.

자꾸만 뭔가 생각나려고 했다. 그걸 생각해 내면, 갈증이 덜해질 것도 같은데. 그걸 생각해 내면 이제 정말 끝일 거라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인혁은 생각하길 포기해야 했다.

계속 생각하길 포기했다.

기어이 생각하길 포기했다.

몸은 서서히 나락으로 내려앉았지만, 그래도 몸은 여전히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2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지옥을 헤매고 있지만, 그래도 인혁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참으면 되고 버티면 된다. 그럼 다 지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또 온통 회색빛뿐인 물비린내 나는 삶을 걷고 또 걷고, 걷게 되겠지.

익숙한 일이건만. 문득 시야에 노란 것이 들어왔다.

인혁은 그걸 애써 포기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해서는 안 됐다.

그래도 그 노란 것은 한 번 눈에 어른거리면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 꼬물거렸다.

제가 사준 노란 옷을 입고, 말간 얼굴을 하고, 졸졸 따라다니는 병아리.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으면 어색해하며 얼굴을 굳혔다가도, 손을 거두면 왜 벌써 손을 떼냐는 듯 눈을 들어 쳐다본다. 살풋 묻어나는 페로몬이 풋풋하고 달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생각해서.

생각하니까.

“빌어먹을.”

인혁은 진저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마른세수하고는 식탁을 노려보았다.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다시 부엌으로 가 크기가 작은 약통을 열어 빨간 알약을 덜어 냈다.

파란 건 정신과 약이었고, 빨간 건 억제제였다. 보통 알파는 하루 한 알이면 된다지만 인혁은 우성이라 기본 복용량이 두 알부터였다.

과거, 정신적인 이유로 페로몬 수치 낙폭이 크고 불안정했을 때는 빨간 약만 하루 세 번, 도합 다섯 알씩도 먹었다. 주마다 병원에 가서 피 검사를 하고 페로몬 수치를 확인해야 했다.

그랬던 적도 있으니까. 지금 한두 알쯤 더 먹어도 상관없겠지.

인혁은 물도 없이 삼켰다. 까득, 알약을 깨물어 부쉈다. 쓴맛이 혀를 마비시켰다.

그렇게라도 정신 차리고 싶었다.

페로몬은 신체적 문제인데, 어째서 정신까지 영향을 받는 걸까. 페로몬 수치가 불안정해지면 정신도 따라 약해지는 걸까?

인혁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식탁을 짚고 심호흡했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끌리는 건 당연한 거야.’

사람들은 선심 쓰듯 말했다. 이제 그만 과거를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라고.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을 되찾으라고.

인혁은 그 값싼 동정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 오메가면 상관없는 알파가 아니야. 내 아내는 아무 알파든 베타든 상관없는 오메가가 아니었어. 그러니까 아무 오메가한테나 끌리지 않아, 나는.

나는…….

그러니까 유독 노란 옷자락이 눈에 밟히는 건, 다른 이유여서라야 했다.

인혁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인혁은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게 사는 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건가?

드디어 만났잖아. 그 향, 맡았잖아. 달콤하지 않았어? 그 아이도 널 계속 지켜보고 있어. 네가 손만 뻗으면 그 아이는, 그 아이는…….

“빌어먹을.”

인혁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누군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하다. 환청이라는 걸 알아도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가족을 되찾을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불안해하지 말자. 무너지지 말자.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마음이 흔들린다.

죽음의 유혹은 항상 달콤하다.

속삭여 주는 방법은 쉽다. 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리면 된다.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것만 신경 쓰면 될 일이다. 아니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더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을 써도 좋으리라. 머리부터 떨어져도 지나가던 사람에게 일찍 발견되어 응급조치를 당해 살 수 있으니.

범죄 현장을 들쑤시고 다니며 불법적인 일을 해주는 브로커 수십 명과 알게 되었다. 김인혁이란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며 죽여 버리겠다 달려드는 놈도 있고, 그럭저럭 적당한 협력 관계를 오래 유지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놈들도 제법 있지만, 누구한테든 상관없다. 아무한테나 연락해 그걸 구해 달라고 하면, 아니, 김인혁을 불편하게 여기는 브로커일수록 빨리 구해다 주리라.

그거 한 알이면 하룻밤 만에 죽을 수 있다. 나중에 시체를 발견할 사람이 놀라지 않도록, 죽은 뒤 모습도 비교적 온전할 터.

이보다 시간이 덜 필요한 방법도 있다. 더 확실하게 죽는 방법도 안다. 방법은 많다.

방법을 안다. 다만 실행에 옮기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살면서도, 계속 살고 싶어? 죽음이 뱀의 머리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인혁의 몸을 칭칭 감싸 조였다.

죽어. 왜 안 죽는 거야?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잖아? 뭐가 아쉬워서, 이러고 살아? 이게 사는 거야? 그런 아이한테 눈독 들이면서까지 살고 싶은 거야?

황홀하리만치 달콤한 속삭임. 모든 걸 내려놓고 편해지고 싶은 저열한 이기심. 발끝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노곤한 절망. 해일처럼 밀려드는 용기와 의욕. 그 모든 걸 기어이 꺾어 내는 건, 억지로 몸에 익게 만든 습관. 습관이 되어 버린 자기 세뇌.

이게 사는 거야. 아쉬우니까 살아야지. 죽느니만 못한 삶이라도 살아야 해.

삶을 붙잡는 건 한 가닥의 집착이었다. 희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오래된 희미한 가능성을 놓지 못하는 집착.

만약 죽었다면……이라는 가정조차 하기 싫었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그딴 말을 꺼내는 사람에겐 무조건 주먹부터 날리고 봤다.

그 시절의 김인혁에게 미안하지만. 30대가 된 김인혁은 어느 순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혹시 죽었다면, 내가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해 잘못됐다면. 내가 이 세상에 정말로 혼자라면.

그래도 찾아야지. 시체라도 찾아야지. 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라도, 하얗게 드러난 백골이라도 찾아야지. 죽는 건 그다음이어야지.

40대의 인혁은 서른 즈음부터 기어이 제 정신을 좀먹기 시작한 절망에 어느 정도 순응하고야 말았다. 아직 먹히지 않은 절반의 무언가가 섣부른 기대를 하게 만들고 실망을 반복 학습시켰지만. 아직은 버틸 만했다. 버텨야 했다. 버틸 수 있었다.

혹시라도 내 아이를 이 세상에 홀로 남겨 두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워서.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는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수십 번 수백 번 속삭였던 약속을.

아빠는 널 사랑해. 절대 널 이 세상에 혼자 두지 않을 거야. 나처럼 자라게 하지 않을 거야. 너를 지켜 줄 거야. 오래오래 네 곁에 있을게.

미안해. 아직까지 못 찾아서.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 계속 찾고 있어. 널 버리고 죽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거야. 죽는 건 네가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다는 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음이어도 늦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비참하고 더럽고 처절하게라도 살아남아서 찾아 헤매자. 그리고 기어이 찾아내서, 살아 있는 아이든 죽어 있는 아이든 꼭 끌어안고 말해 주자. 사랑한다고, 계속 찾아다녔다고. 아빠는 널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제발, 어떤 모습으로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길. 반드시 찾을 테니까, 찾아내고야 말 테니까.

아내를, 아이를 잃고도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제 페로몬에, 제 발정 난 본성에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인혁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눈을 감으면, 온통 회색빛인 세상에서 노란 병아리의 옷자락이 꼬물꼬물 보였다. 그래서 인혁은 생각하길 포기했다.

삶은 여전히 지옥.

그래도 버텨야 했다.

아가. 네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죽을 수조차 없어.

***

“좀 늦었습니다.”

병원에 들러 손에 붕대 좀 감고 느지막이 출근했다.

“손이 왜 그래?”

박 씨가 바로 알아차렸다.

저 눈썰미, 어쩌면 좋지. 인혁은 혀를 차며 별일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손?”

서 여사가 퍼뜩 고개를 들었고,

“…….”

수민은 말없이 몸을 일으켜 인혁에게로 걸어왔다.

“아, 그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세수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자니 짜증 나서 거울을 깼다? 오던 중에 불량배를 만나 한판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변명 중 무엇을 써먹을지 고민하는데. 그 잠깐 새 수민이 다가와 붕대 감은 손을 붙잡았다.

수민은 인혁의 손을 앞뒤로 뒤집어 살폈다. 고정해 둔 부분에 손대는 걸 보니 붕대를 풀러 상처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뭐하니.”

인혁이 손을 잡아 뺐다. 수민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으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놀란 것도 같고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눈빛 때문에, 인혁은 잠깐 망설이고 말았다. 수민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 손을 높이 들어 다시 인혁의 손을 붙잡았다.

다시 빼낼 수도 있겠지만, 인혁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수민은 다시 붕대를 풀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수맥을 찾듯 붕대 위를 더듬으며 상처를 찾으려 했다. 병원에서 붕대를 두껍게 감아 줬다. 그러니 그렇게 더듬은들 찢어진 살갗이 만져지지도 않을 텐데, 수민은 진지했다.

“누가 그랬어요?”

수민이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정수리만 보였다.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뭐?”

“누가 그랬냐고요.”

“누가 그러긴.”

“말할 수 없는 상대인가요?”

묻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건만. 인혁은 괜히 등줄기가 뻐근해졌다. 그 감각은 소름을 닮아 있었다. 마치 현장에서 팔다리가 썰려 있는 시체 더미를 마주했을 때 같은 기분?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상대는 오메가 연쇄 살인마가 아니라 수민이었다. 오수민. 사무실 병아리. 인혁은 그 말도 안 되는 느낌을 떨쳐 내고자 서둘러 대답했다.

“내가 그랬다, 인마.”

일부러 거칠게 말했다. 그래도 이상한 긴장감을 지울 수 없었다.

“왜요?”

수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혁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말갛고 우유 냄새가 날 것 같은.

인혁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

수민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을 가렸다.

인혁은 안 다친 손을 들어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얌전히 제 손길대로 따르는 수민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이런 애를, 뭐랑 착각을 했다고? 김인혁, 미친 새끼.’

인혁은 입 안쪽 살을 아프게 깨물었다.

때마침 붕대를 감은 손이 시큰시큰 아려 왔다. 슬슬 진통제 기운이 가시는 것 같았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말했다.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머리에서 손을 떼자 수민이 다시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그냥.”

“그냥 손을 찢어요?”

‘다쳐요?’도 아니고 ‘찢어요?’라니. 수민은 상처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찢긴 무슨.”

인혁은 수민의 말을 깊게 생각지 않고 넘어갔다.

“그럼요?”

“그냥 실수로 다쳤어. 별거 아냐. 그만 묻고 가서 공부해.”

인혁은 수민의 등을 밀곤 제 자리로 갔다.

“정말, 괜찮은 거지?”

박 씨가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인혁은 코트를 옷걸이에 걸며 대답했다. 박 씨는 미심쩍은 듯 인혁을 지그시 바라보다 ‘그건 그렇지.’하고 물러났다.

다행히 약발이 잘 받는 듯했다. 페로몬에 둔한 서 여사야 그렇다 치고, 박 씨마저 순순히 물러나는 걸 보면.

인혁은 무심코 제 셔츠에 코를 묻고 페로몬이 흘러나오는지 확인하려다가 말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쟤한테 왜 페로몬을 갈무리 안 하고 흘리고 다니냐고 한 소리 하려고 했는데.’

말 꺼내기 무섭게 제 옷에 코를 묻고 냄새를 확인하던 수민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생각난 김에 수민의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아니면 또 멍하니 앉아서 딴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던 건데. 수민이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눈이 마주쳤다.

말수가 적고 조용한 아이였다. 할 일이 없으면 멍하니 앉아 있거나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자신을 곧잘 쳐다본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늘 따라붙는 시선이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건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뭘 봐. 공부나 해.”

인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

수민이 시무룩해져서 바로 고개를 숙였다.

인혁은 웃으며 컴퓨터를 켰다. 어쩐지,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제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의식적으로 입매를 굳혔다.

웃을 자격이 어디 있다고, 감히.

***

수민은 점점 더 사무실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서 여사는 제가 언제 수민을 내보내야 한다고 말했던 적 있냐는 듯 사무실 안에서나 밖에서나 제 한 몫 단단히 해내는 수민을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박 씨는 상태가 더 심했다. 툭하면 인혁 앞에서 수민을 종신 계약으로 사무실에 묶어 두자고 노래를 불러 댔다. 수민이 컴퓨터 업무를 대신 해주니, 그 고질병인 독수리 타법을 쓰지 않게 되어 좋은 듯했다.

이제 두 사람은 수민이 인혁의 해바라기인 것마저 안타까워했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늙다리가 뭐가 좋다고.”

“그러게 말이야. 아무래도 우리랑만 계속 같이 다녀서 그런 거 아닐까 싶은데. 저번에 갔었다는 그 복싱장, 다시 보내면 안 돼? 거기 수민 학생 또래도 많다며.”

“거긴 물이 좀 안 좋아요. 수민이한테 한 방에 나가떨어진 새끼가 있는데, 기회만 되면 수민이한테 찰떡같이 들러붙을 기세라.”

박 씨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딴 비실이를 우리 수민이와 엮어 줄 순 없지! 꼬장꼬장한 장인어른이 따로 없었다.

“그럼 다른 동호회나 학원 같은데 말야. 젊은 애들 많이 다니는 데, 그런 데라도 좀 나가 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서 여사는 나름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보고 주변에 물어물어, 요즘 젊은 알파 오메가들 사이에서 핫하다는 데이팅 앱을 알아 와선 수민의 핸드폰에 깔아 주었다. 수민은 서 여사가 시키는 대로 회원 가입을 하고 로그인했다.

“아니, 사람을 얼굴도 안 보고 핸드폰 메시지 띡 보내서 만난다고요? 뭘 믿고 우리 수민이를 정체 모르는 놈들이랑?”

“박 씨, 정보 다룬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 이건 그런 이상한 게 아니야. 이건 오메가인 회원만 알파 회원 프로필을 보고 메시지를 보낼 수 있고, 알파 회원은 절대 먼저 치근덕거릴 수 없는 거랬단 말이야. 그래서 젊은 애들 사이에서 인기 많다고 했는걸.”

“아니,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좀 있어!”

서 여사는 박 씨를 찍어 누르곤 수민에게 핸드폰을 들이댔다.

“수민 학생, 여기 봐봐.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알파가 있어.”

“예, 많네요. 등록된 20대 알파 10만 명, 20대 오메가는 1만 5천 명.”

“……너무 차이가 큰데? 이거 이상한 데 아녜요?”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온 박 씨가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서 여사는 그 못난 얼굴을 옆으로 주욱 밀어 버렸다.

“많다는 건 일단, 선택의 폭이 넓다는 거 아니겠어? 수민 학생, 천천히 둘러봐 봐. 10만 명이나 되니 이 중에 수민 학생 취향이 하나쯤은 있겠지.”

“…….”

수민은 서 여사의 정성을 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서 여사가 핸드폰을 들이밀고 회원 가입을 하라고 할 때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막상 앱을 켜 둘러보니, 볼수록 흥미가 일었다.

“어때? 수민 학생. 괜찮지? 물 좋지?”

“네.”

수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민아? 딴 사람도 아니고, 네가?”

박 씨는 제 안에 쌓아 올린 ‘수민이’에 대한 선입견이 흔들리는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곤 자신이 가진 정보의 오류에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민은 데이팅 앱에 좀 더 집중했다.

자의로 제 개인 정보를 이렇게 다 공개한다고?

작정하고 이중 아무나 하나를 골라 개인 정보를 도용하면, 오랜 시간 신분을 위장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알파들은 남성형, 여성형 할 것 없이 얼굴과 몸이 드러나는 프로필 사진과 신상명세를 공개해 놓았다. 앱은 실명제로 운영되었다. 이름은 가운데 글자가 가려져 있었지만, 생년, 키, 몸무게, 학력, 성격, 취미 등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남이 몰래 유출한 데이터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자신의 정보를 작성해 업로드 한 것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개인 정보를 이렇게 쉽게 노출하다니. 이름 한 글자와 연락처, 주소는 노출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부주의해 보였다. 수민은 대한민국 10만 명의 20대 알파들의 평균 지능 지수가 궁금해졌다.

수민이 흥미를 보이자 신이 났는지, 서 여사가 제 눈에 잘생겨 보이는 알파들을 콕콕 짚었다. 어느새 마음을 다잡은 박 씨도 끼어들었다. 두 사람이 열심히 젊은 알파들을 고르며 메시지를 보내 보라고 재촉했지만, 수민은 그 단계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위장이 필요해 이들 중 한 명의 신분을 도용해야 한다면, 공개된 개인 정보 말고 다른 정보가 더 필요했다. 그때 메시지를 보내 대화를 유도해 빼내면 될 일.

아직 필요하지 않은데 굳이 작업할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 그런 작업을 본인 명의의 핸드폰으로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수민은 의욕이 일지 않았다.

예. 네. 예쁘네요. 잘생겼군요. 능력이 좋네요. 취미가 많네요. 수민이 영혼 없이 대답하자 신이 나서 알파 목록을 훑어 내려가던 서 여사와 박 씨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우리만 신났네. 왜? 별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네.”

수민은 솔직히 대답했다.

“김 소장이 그렇게 좋아?”

“네.”

“…….”

“…….”

서 여사와 박 씨는 멍해지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수민은 두 사람의 상태를 살피고는 내심 안도하였다. 이제 이 정도까지는 괜찮은 듯했다.

“뭐합니까, 일 안 하고?”

인혁이 돌아왔다.

머리도 빗어 넘기고 면도도 하고, 새 셔츠와 구김 없는 양복바지를 입고 잘 닦인 구두를 신고. 인혁은 평소와 다르게 말끔한 모습이었다.

잡지사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사진 촬영이 있다고 해서 모처럼 사람답게 하고 나온 것이었다. 후줄근할 때도 종종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외모가 새삼 돋보였다.

하지만 서 여사와 박 씨는 새삼 반하지 않았다. 함께 일한 지 십수 년째였다. 인혁의 외모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수민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죄 많은 인간.”

서 여사가 그 잘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 지금 뭐라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이고, 난 모르겠다.”

박 씨가 두 손을 깍지 껴 머리 뒤에 대며 돌아섰다.

“뭐야. 왜들 저래?”

인혁이 수민을 보며 물었다.

“글쎄요.”

수민은 데이팅 앱을 삭제하며 대답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어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인혁이 물었다.

“아뇨.”

수민이 고개를 저었다.

“싱거운 녀석.”

인혁이 수민을 스쳐 지나갔다. 수민은 다시 고개를 들어 인혁을 보았다.

보이지 않는 꼬리처럼 따라붙는 냄새가 수민에게 닿았다. 질긴 끈이 목을 감는 기분이었다. 하루하루, 점점 더 냄새가 진해지고 있었다. 착각일까? 서 여사와 박 씨는 인혁이 근처에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 김 소장 어땠어?”

“뭐, 그럭저럭요.”

인혁이 박 씨의 말에 대답해 주며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아무튼 저 잘난 얼굴이 죄라니까.”

박 씨가 투덜대며 평소보다 급하게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저 냄새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으, 이놈의 꽃가루. 봄은 봄이구나.”

박 씨가 코를 팽, 풀었다.

코가 막혀 맡을 수 없는 걸까, 이 냄새를?

여전히 정보가 부족했다. 서 여사와 박 씨에게 함부로 물을 순 없었다. 인혁에게는 더더욱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수민은 그런 예감을 무시하지 않고 잘 따르는 편이었다.

“응? 왜? 할 말 있어?”

“아니요.”

눈이 마주친 박 씨가 묻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숨죽이고, 제게 맡겨진 서류 정리 업무를 해나갔다.

아직 이 사무실에는 수민이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수민은 참을성 많은 아이였다. 아주 예전부터.

***

저녁에 인혁은 일찍 퇴근하여 병원을 찾았다. 시내 큰 도로 앞 상가 건물 3층에 들어선 내과였다. 인혁은 잠겨 있는 병원 문의 키패드를 열고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기계음을 내며 잠금쇠가 풀린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혁은 사무실을 막 나올 때 봤던 수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퇴근하겠다고 일어나니, 수민은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이 뎅그레져서는 인혁을 바라보았다. 놀란 얼굴이 귀여워서, 나가는 길에 동그란 머리통을 꾹꾹 눌러주었다.

시간이 빠듯하지 않으면 너도 퇴근하라고 말하고 집까지 데려다줬을 텐데. 데려다주는 길에 저녁밥까지 먹여서 들여보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서 여사에게 저녁밥 먹여서 들여보내라고 말해 놓긴 했는데. 또 떡볶이 같은 거나 먹이는 건 아닐는지, 신경 쓰였다.

병원 안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데스크엔 어스름한 등 하나만 켜져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진료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그 안은 환했다.

“이제 오면 어떡해.”

의사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인혁을 반겼다. 인혁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사과했다.

의사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꾸준히 연락하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20년 전 그 파탄이 있고 나서는 꾸준히 얼굴 보고 지내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의사는 인혁이 속도위반으로 결혼한다 했을 때 황당해하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해 줬고, 아내가 실종됐을 때도 다방면으로 애써 줬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하필 내분비내과 전공이어서, 인혁의 페로몬 거부증을 조기에 진찰하고 이후 꾸준히 관리해 주고 있었다.

인혁은 한 달에 한 번 의사를 찾아와 약을 처방받았다. 약을 인질로 삼아 협박하는 바람에, 타 병원 의사를 소개받아 정신과 상담도 받고 있었다. 그러기를 벌써 십 년째였다.

의사는 제멋대로인 환자를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늦은 시간까지 병원에 남아 주었다.

의사는 손수 인혁의 피를 뽑고 간단한 검사를 돌렸다.

“낮에 왔으면 내가 직접 안 해도 되잖아.”

의사가 투덜댔다. 인혁은 제게 원한을 품은 의사가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손에 들고 있어도 태연했다.

“내가 백번 천번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지만. 제발 좀 귀담아들어라. 어? 요즘은 약이 잘 나와서 사람들이 사이클을 약으로 넘기고 그러는데. 너무 어릴 때부터 성관계 맺는 건 안 좋으니까 의사들도 그걸 권장하는 편이지만, 그건 일반 알파 오메가 이야기야. 그 일반 알파와 오메가도 상태를 봐서 약 끊게 해. 그런데 너는 우성이잖아? 우성은 기본 복용량부터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그렇다고 몸속 장기가, 특히나 간이 우성답게 두 배 이상 튼튼하고 건강한 건 아니고. 뭐든 약을 과다하게 장기 복용하는 건 안 좋은 일인데, 넌 1, 2년도 아니고 20년째 그러고 있잖아. 누가 그동안 내가 너한테 처방전 써준 거 보면 나보고 미친 의사라 그럴걸? 어?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의사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늘 듣는 소리기에 인혁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고마워만 하지 말고. 약 끊을 노력을 하란 말이야. 주변에 좋은 사람 없어? 너 정도 되는 놈이 왜 약에 절어 살아. 사람을 좀 만나! 마구잡이로 원나잇하고 다니라는 말이 아니야. 좋은 사람, 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주기적으로-.”

“그런 소리는 됐고. 약이나 처방해 줘.”

“약이나 처방해 줘어? 내가 처방전 자판기냐? 누르면 처방전이 나오게?”

“아니었어?”

“야, 김인혁! 나 지금 엄청 중요한 말 진지하게 하고 있는 거야. 흘려듣지 마. 너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난다고.”

“알잖아, 나 오메가 페로몬 거부증인 거.”

“그거 심리적인 거라고! 몇 번을…… 아으, 나는 그쪽이 전공도 아니고, 아픈 사람한테 이런 말 하는 거 정말 잘못된 거라는 거 아는데.”

“알면 하지 마. 아는데 왜 하지?”

아무튼 그놈의 입이 문제였다. 이놈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환자들한테는 절대 안 해. 그런 생각조차도 안 해.”

“그럼 나한테도 하지 마.”

“그런데 너한테는 해야겠어. 야, 네 경우는 마음먹기 달린 거야.”

“오늘 낮에 본 윤 선생은 그렇게 말 안 하던데.”

잡지사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쪽에 들러 정기 상담을 받았다. 수년째 차도가 없는 환자를 마주하면서도,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더없이 이성적이고 조심스러웠다.

그에 비하면, 눈앞의 내과 의사는 영 아니었다. 정신과 의사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걸 내과 의사가 건드려? 인혁의 지적에 의사가 발끈했다.

“알아, 의사로서 해선 안 되는 말이라는 거.”

“알면 하지 말라니까.”

인혁은 남의 일인 듯 무심했다. 그 태도가 의사의 화를 돋웠다.

“이건 친구로서 하는 말이야. 정말 내분비계 혼선 때문에 페로몬 거부 반응 일으키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넌 네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거부하고 있잖아. 그 마음을 어떻게 바꿀 생각을 안 하고,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면 어떡해.”

“안 되는 걸 어떡해?”

“안 하는 거겠지. 넌 지금 네 상태 혼자 만족하고 있잖아.”

“무슨 소리야. 고치려고 병원 꼬박꼬박 오잖아.”

“약 타려고 오는 거잖아. 그래, 마침 윤 선생님 말 잘했다. 그 윤 선생님이 그러더라. 네가 도통 마음을 안 연다고. 지금 윤 선생님한테 상담받은 지가 몇 년짼데 아직도 그런 말이 나와. 꼬박꼬박 상담은 왜 받냐? 돈이 그렇게 많아? 아, 시발, 너 돈 많지.”

출신 대학 병원에서 코스 잘 밟으며 올라가다가 빈정 상하는 일이 있어 위쪽을 콱 들이받아 버리고 뛰쳐나온 개천 용 출신. 학자금 대출이 아직 남아 있던 그가 이런 번듯한 자리에서 개업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인혁의 투자 덕분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인혁에게 굽신거려도 모자랄 판국이지만, 의사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런 성격이었으면 애초부터 대학 병원에서 안 뛰쳐나왔겠지. 그도 인혁 못지않게 반골이었다.

“환자 상담 기록을 의사들끼리 막 공유하고 그러네? 이거 불법 아냐?”

“넌 내 환자고, 너 처음 거기 갈 때 내가 니 상담 기록 봐도 된다고 네 손으로 사인했어.”

“그랬나?”

수민에게는 그렇게 무슨 계약서에든 사인할 땐 주의하고 꼼꼼히 읽어 보라고 당부했던 사람이, 정작 본인 일에는 빈틈투성이였다.

“그랬나? 지금 그렇게 말로 넘길 상황이 아니라니까.”

의사가 인혁의 결과 검사지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뭐 문제 있어?”

“넌 언제나 문제야.”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무섭네.”

인혁이 하나도 안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의사는 더 말하면 내 입만 아프지, 오직 그 마음으로 입을 꾹 닫았다.

“요즘에 혹시 꾸준히 접촉하는 오메가 있어?”

그래도 이 말은 해야 했다. 의사는 모니터에 복잡한 그래프를 띄워 놓고 물었다.

“그건 왜 물어?”

잔소리 패턴을 바꿨나. 인혁이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의사가 물으면 성실하게 대답해. 이상하게 요 두 달 동안 페로몬 수치가 계속 올라가서 그래. 약으로 누르는데도 내려가질 않잖아, 봐봐.”

“그래?”

“그래는 무슨. 남 말 듣냐? 진지하게 들어. 다른 이상은 없는데…… 너 약은 꼬박꼬박 먹고 있지?”

“먹고 있지. 꼬박꼬박.”

“그래, 네가 과다 복용이 문제지. 처방해 준 것보다 덜 먹었을 리는 없고. 그럼 이럴 이유가 없는데. 진짜, 꾸준히 만나는 오메가 없어?”

“꾸준히는 무슨. 내가 옆에 그런 사람을 둘 리가…….”

있다.

인혁은 말을 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사무실을 여기저기 부지런히도 돌아다니며 청소하고 일하기만 하는, 도통 공부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병아리가 하나 생각났다.

“뭐야, 왜 말을 흐려? 있어?”

의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왜 말을 안 했어! 그럼 아까 입 아프게 잔소리할 필요 없었잖아!”

“글쎄, 우리 사무실 직원이라. 뭐, 꾸준히 만나기는 하네. 우리 사무실 주5일제니까.”

“그래? 4일이든 5일이든 뭐가 중요해. 아무튼 꾸준히 만…… 어? 니네 사무실 직원? 너희 사무실에 오메가 직원이 어디…….”

당장 의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서 여사와 박 씨, 둘 뿐이었다.

“아, 너희 사무실에 새로 들어왔다던?”

의사는 의사였다. 기억력이 남달랐다. 지난번에 인혁이 흘리듯 말한 걸 용케 기억해 냈다.

“아직 너희 사무실에 있어?”

의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뭐야, 혹시…….”

의사가 묘한 눈으로 인혁을 바라봤다.

“아들뻘이다. 너랑 나보다 스무 살이나 어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인혁이 곧바로 경멸 어린 눈초리를 드러냈다.

“야, 사랑에 나이가 무슨…….”

“사랑엔 나이가 중요해. 넌 니 딸이 스무 살 많은 오메가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시킬 거야?”

“미쳤냐? 시발, 어디 감히 늙다리가 내 귀한 딸을 건드려? 죽여 버려야지.”

사람을 살리는 의사 입에서 바로 죽인다는 말이 나왔다. 인혁이 거보라며 의사를 비웃었다. 아, 씨. 의사가 민망해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수민이 사무실에 오고 열흘 정도 되었을 때, 인혁이 진료를 받으러 왔다. 의사는 그때 처음 수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옅게 페로몬이 느껴지는데, 역하지는 않다고. 페로몬 거부 증세가 완화된 거 같다고 말했었지.’

인혁의 말에 의사는 본인이 더 신이 나서 이것저것 검사를 추가로 진행했다.

오랫동안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던 환자가 갑자기 차도를 보이는 일이 종종 있지 않던가. 의사는 인혁이 그 사례 중 하나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지난달과 다를 게 없었다. 인혁은 여전히 오메가 페로몬에 거부 반응을 일으켰고, 그 증세는 지난달보다 미세하지만 조금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완화되지는 않았다.

“그럼 왜 그 아이의 페로몬은 역하지 않은 거지?”

그때 인혁이 물었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정도인 거 같은데. 하나는 네가 섣불리 기대할까 봐 내가 감히 말 못 하는 그거고.”

“아니야,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대. 나이도 안 맞아.”

“아니면 그 직원이 극열성이어서 그런 걸 수 있어.”

그때 의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인혁은 뭐라 답했던가.

‘과거에 사고를 당해 몸 상태가 베타나 다름없다고 그랬다고, 했었지.’

의사는 기억을 되짚으며 모니터에 띄운 그래프를 바라보았다. 사고를 당해 내부 장기가 얼마나 어떻게 망가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오메가는 오메가였다.

‘아무래도 그 수민이라는 아이가 영향을 준 것 같은데.’

오로지 정신적인 문제로 억눌렸던 알파의 본성이, 약에 찌들 대로 찌든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수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직원은 드물게 인혁의 곁에 나타난 특이변인이었다. 의사는 새로운 변인에 흥미를 느꼈다.

“그 애 언제 한 번 데리고 와 봐.”

“쓸데없는 관심 갖지 마.”

인혁이 단칼에 거절했다. 예상한 반응이긴 했으나 그 정도가, 의사의 예상 이상이었다.

20년 전 그 사건 이후로 인혁은 3무(無)인간이었다. 무덤덤, 무심, 무감각. 그 태도는 제 아들일지도 모를 오메가 청년을 찾아내 보호할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의사는 과거, 자신이 승원이라는 청년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인혁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인혁은 그 청년이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내비쳤고, 의사는 제 일처럼 기뻐하며 한 번 병원에 데려와 보라고 했다. 의사의 눈썰미를 믿어 보라고. 얼굴만 봐도 단박에 부자지간인지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그때 인혁이 뭐라고 대답했던가.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설레발치지 말고, 알아서 소개해 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승원을 대하던 태도와 아들일 리 없다고 단념한 수민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아들일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는 직원이기에 소개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기엔 반응이 너무 과한데.

“네 주치의로서 너한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체크해 두려는 거야.”

“나랑 전혀 상관없는 애야. 괜히 얽히고 싶지 않아.”

인혁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아닌가?’

의사는 아리송해졌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데리고 오라고 강요하진 않겠는데, 베타나 다름없다 어떻다 해도 오메가는 오메가야. 혹시 모르니까, 나 보여 주기 싫으면 네가 알아서 조심해.”

“조심은 무슨.”

인혁이 의사의 말을 비웃었다. 너는 니 딸을 조심하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하라면 조심해. 알파 오메가 사이에 나이 차이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런 말 하는 놈들을 경찰서에서 많이 끌고 갔지.”

“야, 넌 날 뭐로 보고 자꾸 그런 말을 해?”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 딸이 있는 의사는 이번에야말로 울분을 참지 못했다.

“너야말로 날 뭐로 보고 그딴 소릴 해.”

인혁이 싸늘한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자신과 수민을 자꾸 엮으려는 의사에게 가감 없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뭐로 보긴, 논문감으로 본다. 거부증 앓고 있는 주제에 왜 그렇게 또 예민한 건지.”

의사가 기세에 눌려 한발 물러났다. 베타라 페로몬을 느끼진 못하지만, 주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건 느낄 수 있었으니까.

“……데이터 잘 모아서 써 봐. 그 정도는 협조해 줄 테니까.”

인혁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페로몬 수치가 높아지고 있다는 말이 새삼 실감 났다. 고작 저 정도 말에 흔들려서 상대를 페로몬으로 찍어 누르다니. 인혁은 ‘알파다운’ 이런 짓거리를 즐기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럴 거거든?”

한결 숨 쉬기 편해진 건지, 의사가 목을 잡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인혁을 너무 자극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어디 의사를 페로몬으로 겁박하냐는 둥 항의는 하지 않았다.

“아무튼, 약은 평소처럼 처방해 줄 건데. 이 상태면 갑자기 러트가 올 수도 있어. 조심해.”

“러트?”

인혁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의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요 몇 년간, 아니, 지난 20년 가까이 러트 사이클을 겪지 않았다.

오메가 페로몬 거부증 때문에 억제제를 상시 복용하고 있으니, 러트 사이클이 오려야 올 수 없었다. 인혁이 생각하기에, 페로몬 거부증의 가장 큰 이점이었다. 의사는 인혁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페로몬 거부 증상이 완화되지 않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계속 약으로 눌러 놨던 게 팡, 터지는 거지.”

의사가 인혁의 눈앞에서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의사가 그렇게밖에 설명 못 해?”

“지금 환자 눈높이에 맞춰 주고 있잖아. 어디서 날 의심해? 네가 지난 20년 동안 그래도 사람 구실 하고 사회생활 할 수 있었던 게 누구 덕분인데?”

“고맙게 생각하고는 있는데.”

“하나도 안 고마워 보이거든? 아무튼 확률은 낮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말해 두는 거야.”

“…….”

“새로 온 직원이 베타나 다름없다곤 하지만, 아무튼 오메가잖아. 영향을 받은 걸 수도 있어. 아니면 약에 내성이 생겨서 페로몬이 안 잡히는 걸 수도 있고.”

“약을 더 처방해 주면?”

“너 간 이식하고 싶어? 이미 최대치야. 더 먹으면 네 간부터 맛이 갈걸?”

“상관없어.”

“상관없긴. 너 젊은 나이에 병원에 누워서 오늘내일할래? 네 성격에 잘도 누워만 있겠다. 의사 말 좀 들어!”

의사가 언성을 높였다.

“좋은 사람 만나서 교류하고 약을 끊던가, 아니면 이번 러트만이라도 약 먹지 말고 어디 동굴에라도 처박혀서 죽을 둥 살 둥 버텨 봐. 그러면 ‘아, 좋은 사람 만나서 알파답게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테니까.”

“러트 오라고 고사를 지내는군.”

인혁은 의사가 출력해 준 처방전을 받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마저 들어.”

의사가 일어서는 인혁의 팔을 붙잡았다.

“약으로 억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넌 지금 넘치기 직전의 댐 같은 상태야. 물이 넘치든 댐이 무너지든, 아무튼 한 번은 터질 테니까. 차라리 적당할 때 물을 한 번 방류하는 게 나을 거야.”

“비유 보소.”

“정 오메가랑 엮이기 싫으면 혼자 버텨 보든가. 나도 너한테 좋은 사람 만나라, 섹스해라, 그딴 소리 하기 싫으니까. 그래, 가라, 가. 너 좋아하는 약 실컷 먹든가 말든가.”

의사가 인혁의 손을 놓고 훠이훠이 팔을 내저었다. 인혁은 픽 웃으며 돌아섰다.

약 실컷 먹으라고 악담했던 의사는 아무래도 제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인혁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자기 페로몬에까지 거부감이 들면 정말 위험한 거야. 무조건 약 복용 중단하고 병원으로 와. 그 상태에서도 계속 약 먹으면 네 상태가 어떻게 될지, 난 아무것도 장담 못 해. 약이 독이 될 수도 있어. 몸이 약을 안 받고 갑자기 러트 터지는 게 다행인 수준일 테니까.”

의사의 말이 등에 꽂혔다.

‘러트, 러트라…….’

새삼스러웠다. 이제 와서 러트 사이클을 걱정해야 한다니.

아내와 사귈 때도, 그전에도, 혼인 신고 한 이후에는 아기 때문에라도. 인혁은 러트 사이클마다 억제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러니 사춘기 때 우성 알파로 발현한 이후 억제제 없이 제대로 러트 사이클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20년 전, 가족을 통째로 잃어버린 그 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는 더더욱. 인혁은 억제제를 몸에 쏟아붓듯 먹으며 제 페로몬을 누르고 또 눌렀다.

제 가족도 지키지 못했던 주제에. 언제 발정 나 아무 오메가나 붙잡고 섹스해 댈까 봐 두려워하다 정신병이 걸려서 약이나 처방받아 먹는 주제에, 러트 사이클은 무슨.

지금까지 넘겨 온 모든 러트 사이클이 그랬듯 이번 러트 사이클도 별 탈 없이 넘어갈 것이다. 한동안 좀 더 예민해지고 짜증이나 내겠지. 안 그래도 더러운 성질머리가 왜 더 더러워진 거냐고, 그 성질머리 받아 낼 서 여사와 박 씨만 고생일 테고.

병원 문을 나서며 처방전을 코트에 쑤셔 넣던 인혁은 불현듯 사무실에 또 한 명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당분간 제 더러운 성질머리에 고생할 또 한 명.

“걔한테는 짜증 내면 안 되는데.”

한참 낯가리던 녀석이 이제야 슬슬, 사무실을 편해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제 성질머리에 놀라 또 움츠러들면 어쩌나 걱정됐다.

“무슨 걱정을 하는 건지.”

인혁은 낮게 혀를 차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드니 여기저기 피어난 개나리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이 선명했다.

봄, 봄이었다.

인혁은 눈에 어른거리는 노란빛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으나 이내 고개를 돌리고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아직 샘난 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이었다. 그럼에도 봄은 봄이건만, 인혁은 알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봄이었으니까.

인혁은 또 한 번의 봄을 홀로 맞이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단 것이 당기는 게 사람 마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꼭 해야 할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람의 마음. 적당히 거리를 둬야지 생각할수록 가까이 곁에 두고야 마는 것이 빌어먹을 사람의 마음.

모처럼 의사의 충고를 들어 볼까, 수민과 조금 거리를 둬볼까. 기특한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절 졸졸 잘도 따라오는 수민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있었다.

“…….”

수민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거 같은데, 입을 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인혁이 수민의 머리를 움켜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올백한 머리를 좋아하세요?”

“누가? 내가?”

“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오수민 씨?”

“자꾸 제 머리를 올백 머리로 만들 듯 넘기시잖아요.”

“앞머리가 눈을 가려서 불편하다는 생각은 안 드시고?”

“아…….”

수민은 그제야 제 머리카락이 제법 길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아아?”

인혁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김 소장, 수민 학생한테 뭐라 그럴 거 하나 없어. 완전 김 소장 판박인데 뭐. 어떻게 배워도 저렇게 나쁜 것만 배울까.”

“제가 뭘요, 서 여사님.”

“예전에 한 달 넘게 이발도 안 하고 머리도 안 잘라서, 무슨 산적처럼 하고 다녔던 거 기억 안 나? 완전 임꺽정 같았어. 수민 학생, 임꺽정 알아? 요즘 젊은 사람들도 임꺽정을 아나?”

“왜 얠 무시하고 그래요. 임꺽정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

수민은 조용히 이 화제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으나 수민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수민의 바람대로 흐르지 않았다. 앞머리를 간 덕분에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인혁은 말없이 눈만 굴리는 수민을 봤다. 설마? 인혁의 얼굴에 의혹이 서렸다.

“임꺽정 알지?”

모른다.

“한국사 시간에 배울 텐데? 검정고시 과목에 한국사 없어?”

있다.

“가만있어 보자, 4월에 시험이 있지 않나?”

있다.

“뭐야, 이제 곧이잖아. 접수는 했어?”

“…….”

“수민아, 대답.”

“아니요.”

“뭐? 아니요?”

“공부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얼마나 더. 8월에 시험 보려고?”

“네.”

“네에?”

“…….”

“요즘 계속 박 계장님하고 게임만 한다 했더니, 아주 공부를 손에서 놨구나?”

“……놓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임꺽정이 누구야.”

“…….”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기에 인혁이 이렇게 강조하는 걸까. 수민은 슬쩍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임꺽정을 검색해 보려고 했으나.

“지금 뭐하니, 수민아.”

인혁이 제 눈앞에서 일어난 그 광경을 눈뜨고 지켜볼 리 없었다.

“이거 압수.”

“네?”

“퇴근할 때 줄게.”

인혁이 수민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어?”

수민이 무심결에 손을 들어 핸드폰을 잡으려고 했다. 인혁은 핸드폰을 높이 들어 올렸다. 수민은 잠깐 분한 표정을 짓더니 폴짝 뛰었다.

그런다고 뺏을 수 있을 것 같나? 인혁은 수민의 뜀박질을 가볍게 생각했다. 귀엽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제가 뛰어 봤자지. 키 차이가 얼만데.’

방심했던 인혁은 수민의 얼굴이 제 눈앞에 쑥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예상치 못한 점프력이었다. 하마터면 핸드폰을 빼앗길 뻔했다.

인혁이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 바람에 수민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핸드폰을 스쳤다.

수민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다시 손을 뻗었다.

“잠깐, 잠깐만. 어어-.”

인혁이 말리려고 수민의 어깨를 잡고 눌렀다. 그 바람에 수민의 몸이 휘청였다. 수민은 금방 균형을 되찾았으나 인혁은 혹여나 수민이 넘어질까 봐, 수민을 붙잡았다.

마른 허리에 팔이 감겼다. 수민의 몸이 인혁의 가슴에 폭 파묻혔다.

향이, 냄새가 확- 끼쳤다. 충격적이라 싶을 만치 타격감이 컸다. 단번에 전신을 뒤흔들었다.

인혁은 저도 모르게 수민의 허리를 힘주어 잡았다. 수민 역시 인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

“…….”

잠깐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일 정도로 잠깐. 그런데 그 잠깐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수민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 그 눈에 비친 자신. 인혁은 목이 탔다.

인혁은 저도 모르게, 아니, 오직 자신의 의지로 수민의 허리를 더듬었다.

이대로, 이대로 좀 더…….

“……!”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혁은 바로 수민을 밀쳤다. 그 와중에도 세게 밀지는 않았다. 혹여나 수민이 다칠까 봐. 그러곤 자신도 뒤로 물러나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당혹감에 얼굴이 굳었다.

“미, 미안. 아니…… 그러니까 핸드폰은, 압수라니까.”

그새 목소리가 쉬었다.

“공부, 공부해.”

인혁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수민을 책상에 앉혔다.

“…….”

수민의 시선이 계속 인혁을 쫓았다.

인혁은 수민에게 닿았던, 수민을 더듬으려고 했던 손을 꽉 주먹 쥐었다. 화상을 입은 듯 손끝이 화끈거렸다. 차라리 잘라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인혁은 그 충동의 방향을 돌려 수민의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서류를 수거했다. 그리곤 그것을 원래 주인인 박 씨에게 던져 주었다. 펴본 흔적이 거의 없는 검정고시 교재를 꺼내 수민의 앞에 직접 펼쳐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수민에게 닿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박 씨가 울상 지었다.

“오늘 퇴근할 때까지 공부만 해. 일단 한국사부터.”

인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급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김 소장? 어디 나갈 일 있어?”

서 여사가 고개를 길게 빼고 물었다.

“잠깐, 잠깐 요 앞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인혁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요 앞 어디? 왜?”

등 뒤로 서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민의 것이 분명한 시선도 느껴졌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에도 대답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인혁은 도망치듯 건물 뒤편으로 갔다. 벽에 등을 기대고야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스르륵, 주저앉았다.

“미친 새끼.”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는데, 하필이면 수민에게 닿았던 손이었다.

수민의 허리를 더듬었던 손끝이 입술에 닿았다. 손이 멈칫, 하더니 입술을 문질렀다.

그럴 리 없는데 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군침이 돌았다.

“……미친 새끼.”

인혁은 다른 손으로 입술을 거칠게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인혁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미치겠네, 진짜.”

지치고 열 오른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인혁이 나간 후. 수민은 한국사 교재를 파라락 넘겨 보았다. 도대체 임꺽정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길래 인혁이 저렇게 정색하는 건지, 답답해하며 사무실을 나가 버리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임꺽정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수민은 컴퓨터를 켜고 임꺽정을 쳐봤다.

상투를 틀고 수염이 가득한 이미지가 잔뜩 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 인혁의 얼굴에도 수염이 나 있었는데,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얼마나 기르면 이만큼 수염이 자랄 수 있는 걸까?

수민은 제 턱을 만져 보았다. 그래도 오메가라고, 수민은 체모가 적었다. 수염은 아예 나지 않았다. 수민은 민둥민둥한 제 뺨과 턱을 문질러 보다 인혁의 빈자리를 보았다.

수민은 임꺽정처럼 수염이 난 인혁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그 위에 면도해 주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시퍼렇게 날이 든 면도칼로 인혁의 뺨과 턱, 목을 제 손으로 그어 내리는 걸 생각했을 뿐인데. 아랫배에 뜨거운 불덩이가 뭉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민은 책상 위에 엎드렸다.

“수민 학생, 피곤해?”

서 여사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수민은 입을 꾹 다물고 아랫배를, 왼쪽 골반을 움켜잡았다.

뜨거웠다.

몸이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

녹슬고 어둡고 축축한 컨테이너 안. 먼저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최대한 구석진 곳에 웅크려 제 몸을 숨기기 바빴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건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배 속에 든 아이였다.

그곳에 또 임산부가 잡혀 들어왔다. 그런데 그 임산부는 혼자가 아니었다. 덩치가 곰만 한 사내가 딸려 있었다.

남자는 덩치가 아깝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댔다. 뒤에서 누가 발로 걷어차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안 돼!”

함께 잡혀 온 임산부가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그들을 끌고 온 패거리는 남자의 얼굴에 라이터를 비추고 에비, 하고 놀리며 낄낄댔다.

불빛에 남자와 임산부의 얼굴이 드러났다. 임산부의 얼굴은 눈물 자국만 가득할 뿐 다른 상처는 없었다.

그건 컨테이너 구석에 웅크려 벌벌 떨고 있는 다른 임산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잡아 온 패거리는 어째서인지 임산부들을 가둬만 둘 뿐,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남자의 얼굴은 폭력으로 뭉개져 있었다. 코뼈와 광대뼈는 함몰되어 있었고, 입술은 길게 찢어지고 부어 있었다. 턱이 나갔는지 벌어진 입에선 이 조각과 피가 흘러내렸다. 퉁퉁 부은 눈은 뜬 건지 감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얼굴이 그 정도니 몸 상태가 어떨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남자는 용케 정신을 놓지 않았다. 끄으으, 끄르륵. 피거품 끓는 소리를 내면서도 임산부를 제 등 뒤에 숨기려 애썼다.

“꼴에 남편이라고.”

“죽을 둥 살 둥 매달려서 같이 끌고 오긴 했는데, 괜찮은 건가? 같이 둬도? 그냥 이건 먼저 처리하는 게 나을 텐데.”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고.”

패거리가 남자의 머리를 발로 툭툭 치며 지껄여 댔다.

“하지 마! 하지 말아요, 제발!”

임산부가 흐느끼며 남자를 지키려 했다. 패거리는 차마 임산부한테는 손을 못 댔다. 남자한테만 퉤, 침을 뱉고 나갔다.

철문이 닫히고, 컨테이너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패거리의 눈을 피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임산부들의 숨 쉬는 소리, 숨죽여 우는 소리. 그리고 덩치 큰 남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

남자의 숨소리가 이상했다. 끄윽, 끅. 신음도 들렸다. 아마 갈비뼈가 부러져 몸속 장기를 찌르는 듯했다.

“아파? 많이 아파? 어떡해…….”

임산부가 흐느꼈다.

“누나, 나 괜찮, 아. 하나, 도 안 아파.”

남자가 팔을 들어 임산부를 다독였다. 뼈가 부러졌는지 팔 중간이 흉하게 툭 튀어나와 있었다. 바들바들 떠는 걸 보니 팔을 들어 올리는 것만도 고통이 상당한 듯한데, 남자는 용케 신음하지 않고 버텼다.

남자와 임산부가 끌려온 뒤로도 간간이 문이 열리고, 새로운 임산부가 잡혀 들어왔다. 또 다른 임산부가 잡혀 오지 않더라도 먹을 걸 넣어 주려고 문이 열렸다. 그때 잠깐 밖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갇힌 사람들은 배고프면 자루에서 빵과 물을 꺼내 먹었다. 다들 어떻게든 살고자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리곤 배를 끌어안고 울다가 잠들었다.

임산부는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를 벽에 기대 앉혀 놓고, 자루에서 물과 빵을 꺼내 왔다. 빵을 잘게 찢어 입에 넣어 주고, 물도 먹여 주었다. 그런 뒤에야 제 입에 빵을 밀어 넣었다.

“우욱.”

“누나, 괜찮, 아?”

“응, 으응. 응. 그냥, 급하게 먹다가 체했어.”

“속이 안 좋은, 거지.”

“……여기 빵, 진짜 맛없다. 그치?”

임산부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우리 동, 네 그 가게 빵이…… 진짜 맛있는데.”

남자가 얼른 맞장구쳤다. 말할 때마다 가래 끓는 소리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임산부도 남자도 알아챘으나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남자는 이곳이 전등 하나 없는 어두운 곳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 몰골을 보여 주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응, 거기 진짜 맛있, 맛있었…….”

임산부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아픈 팔을 뻗어 임산부를 안고 다독여 줬다.

“괜찮, 아, 누나. 울지 마. 형이 우리, 구하러 올 거야. 꼭.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아기 생각, 해서라도, 응?”

“응, 으응…….”

아이를, 아이만은 지켜야 한다. 그게 임산부가 제정신을 유지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남자가 버티는 이유도 비슷했다. 난 몰라도 임산부와 아이만은 지켜야 한다.

임산부가 울다 겨우 잠들었다. 남자는 벽에 기대 선잠을 자다 문득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컨테이너를 지키는 패거리가 오줌 갈기는 소리였다.

더럽고 추잡스러웠다. 벽에 기댄 등이 뜨끈해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지만, 남자는 꾹 참고 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패거리는 이런저런 말을 주절댔다. 그들에겐 시답잖은 대화겠으나 갇혀 있는 사람에겐 귀중한 정보였다.

얼마 전엔 새로 받아 온 임산부들 형질 판정이 늦게 나온다느니, 오메가가 나오면 바로 끄집어내서 갈아 버려야 하는데, 귀찮으니까 베타로 좀 제대로 골라 왔으면 좋겠다느니.

남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남자는 베타였으나 임산부는 오메가였으니까.

그 뒤로 남자는 앉아 있는 게 편하다며 계속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엉덩이와 등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계속 긴장하며 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다시 더러운 오줌발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 남편이랑 같이 들어온 임산부는 어떻게 되는 거야? 오메가 판정 났다며?”

“혹시나 해서 두 번 했는데, 한 번은 베타로 나오고 한 번은 오메가로 나왔다나 봐.”

자신들 이야기였다. 남자는 이 컨테이너에 끌려오기 전 한 번, 갇힌 뒤 한 번, 조그만 바늘이 달린 플라스틱 스틱에 손가락이 찔렸던 걸 떠올렸다.

“그럼 오메가 아닌가?”

“글쎄. 저기 강원도 쪽에서 두 번 검사해서 오메가 판정 나서 갈아 버렸는데, 세 번째 정밀 검사한 결과 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베타였던 적 있었다잖아. 그때 아주 난리 났었다는데.”

“그래서 위에선 지금 한 번 더 검사를 해봐야 하나 고민하시는 거 같더라고. 그런데 간이 키트 공급 루트가 막혔나 봐. 빌어먹을 경찰 놈들, 이럴 때만 쓸데없이 일하는 척하지.”

“뭐 굳이 검사해 볼 필요 있나? 남편이 베타잖아. 딱 봐도 베타던데. 남편이 베타면 아내도 베타겠지. 그게 제일 확실한 거 아닌가?”

“남편이 아니면?”

“오메가가 베타를 데리고 다녀서 뭐 해?”

“뭐, 가만 보면 서로 남편, 부인 소리 하는 건 못 들어본 것도 같아서.”

“에이, 그렇게 쥐어 터질 때까지 지키려 드는데, 남편 말고 뭐겠어? 아니면, 알파 남편 놔두고 베타 애인이랑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건가?”

“오메가는 그러고도 남지. 더러운 걸레잖아.”

“그건 그래. 참, 위에서 그러더라. 남자는 쓸모 없으니까 그냥 갈아 버리라고.”

“하긴 오래 데리고 있긴 했지. 그럼 이따가 들어가서 반응 좀 볼까? 정말 남편인지?”

떠드는 소리가 멀어졌다.

아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자는 벽에서 귀를 떼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남자는 고개를 숙여 임산부를 보았다. 컨테이너 안은 어두웠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사람의 형체 정도는 구별해 냈다. 남자는 그 형체라도 눈에 새기듯 임산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부러진 팔을 들어 임산부를 깨웠다.

“누나, 누나.”

“으, 응? 응…… 많이 아파?”

“아니, 누나, 그건 아닌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응?”

“우리 조카는 살려야 하잖아. 그치?”

“너, 그런 말 왜 해.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누나, 시간 없어.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남자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색색 거친 숨을 뱉으면서도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가 누나 남편이야. 응? 누나는 베타고, 나도 베타고. 우린 부부야.”

“너,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왜 그래.”

“그래야 누나가 살아. 우리 조카도 살아. 그러니까.”

남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임산부는 보지 못하는데, 인혁에게는 선명히 보였다.

“야, 야아, 야. 너 왜 그러는 건데. 그런 말 하지 마. 윽.”

임산부가 불안해하며 남자를 말리다가 신음하며 배를 감쌌다.

“누나.”

남자가 놀라 여자를 감싸 안았다.

두 남매가 어둠 속에서 흐느꼈다.

“형, 형. 어딨어요. 제발 좀, 빨리, 우리 누나 좀…… 형!”

남자의 목소리가 울음에 뭉개져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혁에게는 선명하게 들렸다.

인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두운 컨테이너 안이 환하게 보였다. 하지만 손을 뻗어 남자와 임산부를 붙잡을 수도, 구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컨테이너 문이 열렸다. 쇠사슬이 풀리고, 녹슨 철문이 기기긱 흉물스러운 소리를 내며.

밖은 낮이었다. 패거리들의 얼굴은 역광이 드리워져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낄낄대며 남자와 임산부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왔다. 어깨에 둘러멘 각목에는 못이 잔뜩 박혀 있었다. 그 못에 덕지덕지 묻은 검붉은 덩어리는 녹이 아니라 핏물이었다.

그들이 남자와 임산부 앞에 섰다.

“뭐야, 이, 새끼들아! 내 아내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봐. 다 죽여 버리겠어!”

남자가 피고름을 토하며 소리쳤다.

인혁은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눈을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4시 44분이었다.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지근했다.

인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 오랫동안 일어나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 쉬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4시 45분이 되었다.

인혁은 일어나 두 다리를 바닥에 대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수백, 수천 번 꿨던 꿈이었다. 이런 꿈만 꿨던 것도 아니었다. 꿈속에서 아내와 처남은 연쇄 살인마에게 붙잡혀 어떻게든 탈출하려다가 산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들은 그 위까지만 수색한 경찰에게 발견되지 못하고 죽어 낙엽에 덮였다. 그 꿈을 꾼 다음 날부터 인혁은 석 달 동안 미친 듯이 전국의 야산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병원에서 나와 외진 곳에 있는 맛집 탐방에 나섰다가 하필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길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해, 범인의 차 트렁크에 실려 그대로 저수지 아래에 가라앉는 꿈을 꿀 때도 있었다. 역시나 전국의 저수지란 저수지를 다 뒤지고 다녔었다.

그 외에도 많았다. 사이비 종교 신도들에게 붙잡혀 제물로 바쳐지고, 식인하는 신도들에게 한 입씩 먹혀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거나. 사이코패스에게 묻지마 살인을 당해 어느 빌라 벽에 시멘트로 발린 채 시체가 은닉됐다거나. 아니면 교통사고를 당해 둘 다 이전 기억을 까맣게 잊고 어딘가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거나.

꿈은 불안과 죄책감의 산물이었다. 인혁은 늘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꿈에서 깨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시 새벽, 하루가 시작되었다. 인혁은 미지근한 열기에 몸부림치며 알약을 씹어 삼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