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6. 오수민, 24세, 오메가 (3)
초여름. 새삼 사무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인혁을 모델로 삼았다는 범죄 드라마가 다시금 화제가 되면서, 인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다시 커졌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판권이 할리우드에 팔려 영화로 제작된다고 했다.
어디 연예 기획사 사장이라는 사람이 대뜸 사무실에 찾아와선 인혁에게 주말 드라마 서브 남주 자리를 제안하며 매니지먼트 계약서를 내밀었다.
“우리 김 소장 과거와 외모가 좀 드라마틱 해야 말이지.”
서 여사가 그 불청객을 보며 태평하게 말했다.
“그럼 뭐해요, 성격이 연예인 할 성격이 아닌데.”
박 씨는 그 불청객의 멱살을 잡아 사무실 밖으로 집어 던지는 인혁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예인 하세요?”
문을 쾅 닫고 돌아서는 인혁에게 수민이 물었다.
“안 해.”
인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인혁의 그 대답을 방송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튕긴다고 생각하는 건지 본격적으로 방송 일을 해보자며 자꾸 찾아왔다.
CF 출연 제안서를 들고 오는 감독도 있었고, 연락도 없이 대뜸 인터뷰 요청을 한다면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PD도 있었다.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한 소품을 가방이나 몸에 붙이고 와서는 범죄 현장을 제보한답시고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 여사가 귀띔해 주기로, 드라마 방영하던 시기엔 하루가 멀다 하고 저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대한민국에 TV 채널이 얼마나 많고 많은지 그때 실감했다고.
불법 촬영으로 사무실과 인혁을 찍어 대는 것들을 처리하는 건 박 씨의 몫이었다. 그는 귀신같이 카메라가 설치된 소품을 알아보곤 실수를 가장해 망가뜨렸다.
“아이고, 실수. 쏘리, 쏘리.”
수민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박 씨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불법 촬영 장비를 슬쩍 빼내 망가뜨리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방송 쪽 사람들의 관심이 죽지 않는 건 인혁의 탓도 있었다. 그는 방송가의 러브 콜을 딱히 반기진 않았지만 피하지도 않았다.
제 과거사를 드러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굴곡진 과거사는 대중의 눈물과 탄성, 감탄을 자아낼 만한 것이었다. 20년 가까이 회색 지대에서 범죄와 싸워 온 그의 경험담은 마르지 않는 화수분 같았다. 대중들에겐 들어도 질리지 않는 자극이었다.
인혁은 마스크만 멀끔할 뿐 아니라 쇼맨십도 좋았다. TV에서든 라디오에서든, 지면 인터뷰로든 말로 상대방의 흥미를 끌 줄 알았다. 때문에 강연이나 인터뷰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인혁은 본업에 지장 받지 않는 선에서 요청에 응했다. 제보 연락을 받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이메일로만 응하는 게 조금 특이할 뿐이었다. 성격 급하게 사무실로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사람의 제안은, 그게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응하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굳이 인터뷰나 TV, 라디오 출연에 응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딘가에 살아 있는 가족이 우연히라도 자신을 보고 연락해 오지 않을까 하여. 인혁은 오직 그 때문에 계속 매체에 자신을 노출시켰다.
“솔직히 이런 일 하면서 얼굴 팔리는 게 좋은 짓은 아니지. 길 가다 누구한테 칼 맞을지 모르는 게 이 일인데.”
박 씨는 인혁의 속내를 알면서도, 인혁이 외부 일정을 못마땅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 8시. 사무실 유선 전화와 연결해 놓은 인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상대방이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살려 달라 울부짖었다.
인혁은 바로 사무실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인혁은 가까이 사는 수민을 태웠다. 서 여사는 술 퍼먹고 있던 박 씨를 잡아다 뒷좌석에 태웠다. 차 두 대에 나눠 탄 사무실 사람들이 꼬박 두 시간 반 거리를 운전해 제보자가 말한 주소에 도착했다.
그곳엔 어수룩하게 생긴 20대 청년 세 명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급하게 차에서 내려 자신들 쪽으로 달려오는 인혁을 보고는 입을 헤 벌렸다.
“어, 정말, 진짜로 오네? 대박.”
“와, 와, 진짜 김인혁이야!”
“아, 저기요.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에 위험해 보이는 오메가가 있었거든요? 제가 베타인데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 오메가인 줄 어떻게 알았냐고요? 막 자기가 오메가라고, 근데 위험한 상황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알았죠. 근데, 뭐. 잘 해결됐나 봐요. 아무튼 이왕 온 김에 저랑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면 안 돼요?”
허위 신고였다.
인혁은 긴장이 풀려 차에 몸을 기대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허위 제보자들은 그런 인혁을 핸드폰으로 찍어 대기 바빴다.
“이 새끼들이!”
술자리에서 목덜미를 잡혀 끌려 나와야 했던 박 씨가 분노를 터뜨렸다. 서 여사는 박 씨를 말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자꾸 일어났다. 인혁이 유명해질수록 심해졌고, 박 씨는 더더욱 인혁의 방송 출현을 싫어하게 되었다.
제보 전화의 다섯 건 중 네 건은 허위였다. 허위가 아닌 한 건마저도 굳이 사무실 사람들이 달려갈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인근 경찰서에 신고하면 될 일을, 굳이 인혁에게 연락해서는 사설탐정이나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역 부리듯 부리려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박 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서 여사 또한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인혁은 묵묵히 할 일을 했다. 경찰이 필요한 일이면 경찰에 연락했고, 어쨌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 그 지역의 돌봄 센터에 연락해 인계해 주었다. 사인을 해달라거나 사진을 찍자는 제안은 정중히 거절했다.
상황이 이러하면 제보를 받았다고 무조건 뛰쳐나가는 걸 좀 자제하고 정확한 상황을 파악한 뒤 움직일 법한데, 인혁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허위 제보에 시달리면서도, 살려 달라는 전화에 예민하다 싶을 정도로 과민하게 반응했다. 밤이든 낮이든, 즉시 달려갔다.
사무실 인력이 차고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사무실 사람이라 봐야 고작 4명. 그 4명이 매번 허위 전화에 속아서는 대한민국 전국을 돌아다녔다. 고작 반년 근무했을 뿐인 수민이 보기에도 굉장히 비효율적인 상황이었다.
서 여사와 박 씨는 허위 제보로 한 번 현장에 나갔다 오면 눈에 띄게 피곤해했다. 그래도 인혁에게 섣불리 그만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수민은 서 여사와 떡볶이를 먹으러 가서 물어보았다. 왜 그런 거냐고. 말을 하며 서 여사의 표정을 살폈는데, 선을 넘는 질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대답하는 게 서 여사의 입장에선 선을 넘는 행동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뭐, 김 소장이야. 예전부터 그랬으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뭐 어쩌겠어요.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하잖아?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그나저나 오늘따라 순대가 맛있네. 수민 학생, 우리 이거 조금만 더 먹을까?”
서 여사가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수민은 사무실에서 둘만 있을 때 박 씨에게도 물어봤다. 박 씨는 눈 감고도 클리어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던 게임에서 바로 죽어 버렸다.
“어? 응? 뭐라고?”
그러고도 게임에 집중해 질문을 못 들은 척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민은 알아서 물러섰다. 좀 더 시간이 걸리겠구나, 생각하며 때를 기다렸건만.
때는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일주일 뒤, 금요일 저녁.
모처럼 일찍 퇴근하려는데,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막 사무실 전화를 제 핸드폰으로 연결하려고 조작하던 인혁이 급히 전화를 받았다.
목격자의 제보 전화였다. 동네 외곽에 폐공장 터가 있는데, 요 근래 자꾸 거기에 외지인이 드나드는 게 수상하다. 밤엔 비명도 나는 것 같고. 그래서 마을 분위기도 좀 안 좋아졌는데, TV에서 인혁이 나와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 전화했다. 그런 내용이었다.
인혁은 전화를 끊고 그 지역 협력 단체에 쭉 전화를 돌렸다. 몇 군데에서 협조 가능하다는 답을 받고, 합류할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정시 퇴근이 물 건너갔는데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현장에 나갈 준비를 했다. 수민도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조끼를 꺼냈다. 조끼 주머니엔 여러 호신 도구가 들어 있었다.
“또 허위 제보 아니야?”
박 씨가 투덜거렸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가볍게 건넨 농담이었다.
“멀지 않은 곳이니까, 일단 가봅시다.”
인혁이 앞서서 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잠깐만. 내가 받을게.”
박 씨가 전화를 받았다.
“예? 에, 예예. 맞습니다. 예. 아, 어디요? 잠깐, 잠깐만요.”
박 씨가 메모지에 급히 주소를 휘갈겨 썼다.
“예, 예에, 일단 진정을 좀 하시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상대방은 예고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박 씨는 허망하게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사무실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잠깐 와 봐. 가야 할 곳이 하나 더 있어.”
박 씨가 선반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지도를 들어 소파 테이블 위에 펼쳤다.
“김 소장, 아까 어디라고 했지?”
“남양주 쪽이요.”
인혁이 핸드폰에 찍힌 위성 지도를 내밀었다. 박 씨가 사인펜 뚜껑을 입에 물고 지도 위에 X자를 쳤다.
“방금 연락 온 곳은 여기야.”
박 씨가 파주 쪽에도 X자를 쳤다.
사무실 사람들이 지도 주변에 빙 둘러섰다.
남양주.
TV를 보다 문득 생각나 전화했다는 제보 전화. 전화를 건 사람은 아님 말고 식으로 태평했다. 하지만 이쪽에서 알아서 걸러 듣자니, 내용이 제법 심각했다. 듣기에 따라선 현장 사이즈가 꽤 크게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착각이거나 허위 제보만 아니라면. 그래서 곧바로 그 지역 협력 단체에 연락을 돌린 것이었다.
파주.
제보자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횡설수설했다.
틈을 봐서 잠깐 나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건 거고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 여기에 가출한 10대 남자 오메가만 꼬드겨 데리고 와선 사이비 종교 교리를 세뇌시켜 이용해 먹는 범죄 집단이 있다.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것들은 다 구원받지 못할 것들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종교에 도움이 돼야 구원받을 건덕지라도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미친놈들 소굴이다. 이게 제보자의 주장이었다.
제보자는 이런 곳인 줄 모르고 취직시켜 준다는 말만 듣고 왔다가 붙잡혔다고 했다. 빨리 와서 나랑 여기 애들 좀 구해 달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제법 다급했다.
“…….”
수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일단 남양주 먼저 갔다가 파주 가자고.”
서 여사가 지도 위에 이동 경로를 그었다. 박 씨는 동의했으나 인혁이 동의하지 않았다.
“급하다고 했습니다. 여기도 바로 가 봐야 돼요.”
“두 군데를 어떻게 동시에 가.”
“가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불가능해도 가야 합니다.”
“김 소장! 이러지 마. 그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서 여사님이야말로 이러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
“…….”
인혁과 서 여사가 눈을 마주쳤다.
사무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자자, 지금 상황 급한데 우리끼리 이러면 안 되지. 어? 자자, 이러지들 말자고.”
박 씨가 애써 쾌활하게 말하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인혁이 한숨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니, 김 소장이 죄송할 게 뭐 있어. 다 내 잘못인데.”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닙니다.”
“아니면 뭔데?”
서 여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사님.”
“아직도 원망하고 있는 거잖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미안하게 생각해. 계속 잊지 않고, 나도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서 여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인혁이 고개를 숙였다. 서 여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미안해요, 김 소장.”
잠시 뒤 서 여사가 말했다.
“자자, 서로 사과했으니까 끝! 그렇지? 와. 화기애애하고 좋네, 좋아. 오늘 아주 대박 나겠어?”
박 씨가 또 눈치 없는 척 나섰다. 하지만 박 씨 혼자 아무리 애써도 분위기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행히 인혁과 서 여사는 격해진 감정을 금방 추슬렀다.
“이미 남양주 쪽으로 사람들 불렀잖아. 이쪽부터 가야 해. 이미 연락 다 돌려 놨잖아.”
“나눠서 동시에 가죠. 이쪽은 저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다만 둘 다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진 않았다.
“김 소장이 없으면 그 현장을 누가 컨트롤해? 안 돼.”
“여사님이 해주시면 되잖습니까.”
“김 소장 보고 온 사람들이야. 감 소장 없인 안 돼. 그리고 진짜 제보가 맞다면 여기가 더 급한 상황일 것 같고.”
“둘 다 진짜라고 생각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김 소장.”
“그래야 합니다, 여사님.”
“알아. 나도 그런 마음이야.”
서 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일단 남양주 쪽 먼저 같다가 그다음에 파주로-.”
“그러다 또 늦으면요.”
“김 소장.”
“두 곳 동시에 갑니다. 파주 쪽 제보가 정 미심쩍다면 저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김 소장!”
“아니, 아니. 잠깐만. 왜 자꾸 우리를 빼먹으실까나? 그렇지, 수민아?”
서 여사가 언성을 높이려는데 박 씨가 냉큼 끼어들었다.
직전에 박 씨는 수민에게 신호를 보냈다. 옆구리를 쿡 찌른 다음에 손가락으로 자신들 둘을 가리키며 눈 찡긋. 수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여사님 말씀은 일단 남양주는 꼭 가야 한다는 거잖습니까. 거기 김 소장도 꼭 가야 하는 거고. 그리고 김 소장 말은, 두 군데 동시에 가야 된다는 거고. 그게 뭐 문제라고 그렇게들 싸우실까. 으잉? 남양주에 여사님이랑 김 소장이랑 둘이 가고, 파주는 나랑 수민이랑 둘이 가면 되지. 오케이? 해결?”
“그게 무슨-.”
“자, 그럼 그렇게 알고. 얼른 갑시다. 한시가 급하다며!”
인혁이 제지하려 했으나 박 씨가 잽싸게 수민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섰다.
“수민이가 얼마나 일 잘하는지 김 소장도 알잖아. 김 소장은 이제 우리가 셋이 아니라 넷이라는 걸 머리에 빡 박아 놔야 해. 그치, 수민아?”
박 씨가 수민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네.”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혁과 떨어져 다른 현장으로 가는 건 불만이었으나 셋이 아니라 넷이라는 박 씨의 말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파주 쪽에서 온 제보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괜찮겠어요, 둘이 가도? 괜찮겠어?”
인혁은 차를 나눠타는 순간까지 박 씨와 수민 쪽을 걱정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으니, 그냥 다 같이 남양주부터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민은 박 씨가 운전할 차에 올라타며 사무실에서 들었던 인혁과 서 여사의 대화를 곱씹었다.
“너무 걱정 말아. 응? 돈 워리! 우리 파이터 둘이 뭉쳤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수민이 조용하자 박 씨가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그러다 으윽, 엄살을 부리며 핸들 위로 엎드렸다. 분위기 메이커 노릇 하느라 오늘 여러모로 고생이 많아 보였다. 수민은 뒤늦게 믿는다고 말해 주고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인혁과 서 여사가 탄 차가 먼저 출발했다. 이어 박 씨와 수민이 탄 차가 출발했다. 두 사람은 한참 차를 몰았다.
파주 출판 단지를 지나 위쪽으로 좀 더 올라가니 산기슭에 낡은 창고 부지가 보였다. 낡은 담 위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문은 녹슨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창문은 죄다 깨져 있고, 안은 깜깜했다. 작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앞 공터엔 제멋대로 자란 잡초와 잔뜩 쌓아 놓은 철골이 황량하게 서로를 부여잡고 있었다.
“씨발, 내가 사람은 안 무서워해도 귀신은 무서워하는데. 아까 사이비 단체 어쩌구 했지. 막…… 귀신이나 좀비 튀어나오고 그런 건 아니겠지?”
박 씨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민은 말없이 창밖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차창에 수민의 얼굴이 비쳤다. 음산한 공장 부지 위에 드리운 무표정한 얼굴이 희게 빛났다.
박 씨는 길을 잘못 들은 것처럼 근처를 천천히 돌고 나서 차를 뺐다.
좀 떨어진 길에 차를 세우고 두 사람은 어떻게 잠입할지 의논했다. 의논 끝에 한 명은 남고,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제보자와 연락이 안 되는 상태에서 둘 다 잠입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으니까.
“제가 갈게요.”
“으잉?”
당연히 자신이 가려고 안전벨트를 푸르던 박 씨가 멈칫, 했다.
“가긴 어딜 가. 이런 건 베테랑이 가는 거야. 신삥은 여기서 얌전히 연락만 기다리고 있어.”
“귀신 무서우시다면서요.”
“그, 그냥 농담 삼아 해본 말이지. 그 말을 또 믿었어?”
“…….”
수민은 박 씨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박 씨는 딴청을 부렸다.
“제가 안에 들여다보고, 뭔가 발견하면 연락 드릴게요.”
수민은 호신 도구가 든 조끼를 꺼내 입으며 차 문을 열었다.
“잠깐. 내가 들어간다니까. 수민이 널 혼자 들여보냈다가 나중에 서 여사님이랑 김 소장한테 무슨 해코지를 당하려고? 난 못해. 안 해!”
“소장님한테 그러셨잖아요. 이제 우리 사무실은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라고.”
“그건 그랬지.”
“그러니까 제가 제 몫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러면 차로 정문이든 벽이든 밀고 들어와 주세요. 저는 운전을 할 줄 모르잖아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담담한 얼굴엔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허, 참. 박 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귀신이 무섭고 그래서 맡기는 건 아냐. 절대로.”
결국 박 씨가 물러섰다.
“알아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네.”
수민은 박 씨가 건네는 무전기를 받아들고 전원을 켰다. 수신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기가 막혔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키운 적도 없는데, 제가 알아서 훌쩍 커버린 자식을 본 부모의 허탈함이 이러할까 싶었다.
“조심해. 무조건 조심해. 제보자랑 연락할 수단도 없고, 차라리 허위 제보였으면 싶은데…… 혹시 모르니까, 무조건 조심하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나오고. 내가 계속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바로 연락하고. 응?”
“네.”
수민은 무전기를 조끼 윗주머니에 넣고 차 문을 열었다.
가로등 하나 없어 온통 새까맸다. 달마저 어둠에 가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수민은 겁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수민을 지켜보던 박 씨는 한순간에 수민을 놓쳤다. 놀라 눈을 껌뻑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서고 수민은 보이지 않았다.
박 씨는 감탄스러운 한편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 사람 몫은 무슨. 혼자 열 사람 몫도 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무전기를 확인하고, 언제든 차를 몰아 벽이든 정문이든 때려 박을 준비를 마쳤다. 그러고도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아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밖으로 빛이 새지 않게 조심하며 핸드폰을 켰다.
“아까 오기 전에 찾아봤어야 했는데.”
인혁과 서 여사 사이에서 등 터질까 눈치만 보다가 기본 조사조차 못 했다. 남들이 알면 천하의 박홍식이 한물가다 못해 두 물 갔다고 비웃을 일이었다.
박 씨는 쩝, 입맛을 다시며 일단 인터넷에 이곳의 주소를 쳐보았다. 가장 기본적인 조사부터 해볼 생각이었다.
인터넷, 정보의 바다는 넓고 쓰잘데기없는 정보가 가득했으니까. 경험상 내게 가장 필요한 정보는 남에게 가장 쓰잘데기없는 것이었다.
***
수민은 조끼에서 장갑을 꺼내 끼고 단번에 담을 타 넘었다. 흉물스러울 정도로 빽빽한 철조망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안은 밖에서 둘러본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을씨년스러웠다. 범죄 현장이라기보다는 심령 탐사 스팟으로 알려졌을 만한 곳으로 보였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숨기려고 애쓴 티가 났다. 두어 사람의 발자국이 흙바닥에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제보대로 이곳이 어떤 범죄 집단의 은신처라면. 그 규모를 고려해 볼 때 고작 이 정도 흔적만 남아 있는 건 흔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민은 이 정도까지 위장에 능한 범죄 집단을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종교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알파와 오메가를 증오했다.
내부 제보자에 의해 일망타진되었으나 정말 모두 잡힌 거였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제보가 사실이라면, 이곳이 그들의 새로운 은신처일 수도 있다. 잡히지 않은 자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최후 심판의 날을 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수민은 생각했다.
건물 앞에 자란 잡초는 수민의 허리까지 올라왔다. 수민은 담벼락 아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는 때를 맞추고 몸을 숙이고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수민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바람을 따라 수풀이 움직이는 때를 맞추어 앞으로 나아갔다.
문득, 아주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이 정도 높이로 자란 수풀을 헤치며 뛰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혼자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팔이 붙잡혀 끌려 내려갔다.
그 사람은 지금의 수민처럼 몸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아마 방법을 몰랐으리라. 무척 다급해 보이기도 했다.
수민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그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데리고 도망치려 했던 건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그를 오 박사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났다. 그리고 자신이 그를 죽였던 것도.
첫 살인이었다.
수민은 수풀에 숨겨져 있던 캠코더를 발견해 메모리를 부쉈다. 바람이 불면 금속성의 소리가 나서 처음부터 바로 알아차렸다. 캠코더는 수민이 이쪽으로 올 줄 알았다는 양 담을 향해 놓여 있었다.
캠코더라니. 답지 않게 허술한 장비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아닌 걸까? 수민은 잠시 고민했으나 섣불리 확신하지 않았다.
교단은 궤멸 수준으로 붕괴되었다. 잡혀가지 않은 자들이 남아 교단을 수습한들 얼마나 온전했을까. 그 점을 고려한다면 이 정도는, 그럴 만했다.
수민은 건물 입구에 붙어 있는 렌즈를 부쉈다. 엄지손톱만 한 것이었는데 녹슨 철골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근처에 설치된 초소형 카메라와 녹음기도 마저 찾아내 부수고 메모리를 제거했다.
녹슨 문에 감긴 사슬을 만져 보았다. 인위적인 조작이 느껴졌다. 사람의 손을 탄 흔적 위에 화장하듯 꾸며 놨다. 자물쇠는 낡은 것이었으나 최근에 열렸다 잠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역시나 허술했다.
수민은 자세를 낮추고 창고 벽을 따라 걸었다.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인터넷에서 쉽게 주문할 수 있는 초소형 카메라였다. 수민은 보이는 족족 부쉈다.
틈새가 제법 큰 창문이 있었다. 수민은 그곳을 통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퉁. 바닥이 울렸다. 창고 안은 밖보다 더 어두웠다. 그리고 너무 조용해 작은 숨소리, 발소리도 크게 들렸다.
수민은 숨을 멈추고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조끼에 손전등이 있었으나 켜지 않았다.
창고 안엔 커다란 기계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녹슬고 부서져 있었다. 수민은 사이를 지나치며, 간간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나는 것들을 부쉈다. 그리고 생각했다. 혹시 ‘장로’가 살아 있을까?
공익 시절에 만난 공무원들이 말했다. 여덟 장로는 모두 죽었다고.
그들이 보여 준 사진은 조작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여덟 장로는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홉 번째 장로가 어딘가에, 아니, 여기에 살아 있다면?
장로는 여덟뿐이었다. 숙청의 밤 때 살아남은 여섯 명, 그리고 새로 임명된 두 명. 교단에 아홉 번째 장로는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없었을까? 어쩌면 선생님은, 자신이 잡혀간 뒤를 예비해 두었을지도 모른다. 교단이 무너진 뒤 자신을 대신해 교단을 수습하고 구원을 위한 사역을 이어 나갈 자신의 후계자를.
수민은 선생님이 제 몸 위에 타올라 헉헉댄 뒤, 희번덕하게 눈을 뜨고 중얼거렸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혹시라도 내가, 우리 교단이 잘못된다면 ‘너희’만은 나에게, 우리에게 학대당하고 능욕당한 피해자로 살아남아 대업을 이어 나가야 한다고.
결국 선생님의 말대로 됐다. 선생님과 여덟 장로는 죽었다. 교단은 무너졌고, 중요한 직급의 사람들은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굳이 수민이 한 달, 두 달 단위로 거처를 옮기지 않았더라도 수민을 기억하고 찾아낼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을 터였다.
선생님이 말한 최후의 날은 오지 않는다. 구원은 없다. 하늘 아버지에겐 독생자 예수만 있을 뿐이다.
수민은 이제 그것을 안다. 알게 되었으니 이제 더는 교단의 교리를 믿지 않으나, 그럼에도 그들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은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은 삶의 과정이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현재는 과거에 예속된다.
아이는 장로에게 속한다.
만약 아홉 번째 장로가 있다면, 살아남은 아이는 그에게 속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속했던 장로가 남긴 명령은, 더는 마지막 명령일 수 없게 된다.
행복해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니 행복해져야 한다. 그것이 명령이니까. 그런데 새로운 장로에게서 새로운 명령을 받게 된다면, 그로 인해 행복해질 수 없게 된다면 어떡하지?
수민은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박 씨를 밖에 남겨 두고 홀로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부식되어 반쯤 꺾인 쇠 파이프가 보였다. 살짝만 손을 대도 끼긱, 흉측한 소리를 내었다. 비틀어 꺾자 삭은 부분이 부서졌다. 다른 부분은 녹이 슬었어도 아직 단단해 쓸 만했다. 사람 몇 명의 머리를 부술 수 있을 정도는 되어 보였다.
어쩌면 방해받을지도 모른다. 수민은 방해자를 의식했다.
수민이 신경 쓰는 방해자는 차 핸들을 움켜쥐고 무전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박 씨가 아니었다. 아직도 제 곁을 맴도는 감시자였다.
감시자는 사무실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지 않았다. 괴한을 죽일 뻔했는데도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변명은 준비되어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귀신이 나올까 봐 무서워서, 너무 흥분해서, 손에 든 걸 휘둘렀다고. 사람이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수민은 고개를 들어 안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기계 뒤쪽이 다른 곳과 달리 어스름했다. 빛을 숨긴다고 숨긴 것 같은데, 우리가 여기에 있다 알리듯이 역시나 어설펐다.
함정이어도 좋고 함정이 아니어도 좋다. 어차피 오늘, 여기서 누구도 살아 나가지 못할 테니까.
지익, 덜커덩, 지익, 덜커덩. 수민은 기다란 쇠막대기를 끌며 그쪽으로 갔다.
걸어가며, 수민은 다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첫 살인 후 아이는 피범벅이 되었다. 뒤집어쓴 피는 남의 피였으나 그렇다고 아이의 몸이 상처 없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남을 상처 입히는 건 내가 상처 입을 걸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어른을 칼로 찔러 죽이기엔 힘이 부족했기에, 손이 미끄러져 칼에 베였다. 손바닥에 긴 자상이 났다. 하지만 제일 아팠던 건 팔에 난 손자국이었다.
시뻘건 손자국은 시퍼레졌다 거무죽죽해졌다.
박 장로와 김 장로가 당부했다. 오 박사를 잊으라고. 그게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그래서 아이는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잊지 못했다.
그래서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러니까 숙청의 밤이 지난 이후 바로 선생님의 방에 불려가게 된 것이리라. 마음속으로 죄를 지었으니까. 속죄해야 했으니까.
인혁의 사무실에서 일하며 이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졌다. 야간에 일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이 남았다. 퇴근하면 집까지 바래다주니 얌전히 집에 들어가야 했다.
집에 가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일하는 중에도 멍때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이전 기억들이 떠올랐다. 수민은 종종 그날을 떠올렸다. 생각을 되풀이할수록 흐릿해졌던 기억이 선명해졌다.
오 박사는 필사적이었다. 아이는 그저 따라갔다. 오 박사의 숨소리가 너무 컸다. 계속 이렇게 뛰면 오 박사의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오 박사는 헉헉대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뭐라고 말했다. 거친 숨소리에 먹혀 잘 들리진 않았지만, 문명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던 것 같은데.
‘……인가? 연락이 닿았어!’
수민은 두꺼운 암막 커튼을 쳐놓은 기계 뒤편에 섰다. 가까이 다가오니 안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왜 다 먹통이냐고! 시발, 분명 들어오는 걸 봤는데? 여, 여러분? 진짜 리얼. 실화입니다. 이거 진짜 진짜라고요. 완전 미쳤어. 미쳤다니까!”
커튼을 살짝 들추니 안의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이 수민의 얼굴로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하지만 수민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밖에 누, 누구야!”
커튼 안에서 우와악, 비명이 들렸다. 시끄러웠다. 역시나 어설펐다. 과연 이 안에 아홉 번째가 있을까.
그렇다면 알아보기 전에 바로 죽여야 하는데. 입을 막아야 하는데. 명령을 못 내리게.
수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커튼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수민아, 수민 학생! 거기서 당장 나와!
조끼 안에서 박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 받은 목소리였다.
수민은 잠깐 멈칫했다.
잠입한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 밖에서 먼저 무전 하지 않는 게 규칙이었을 텐데. 박 씨는 그 규칙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무슨 일이지?’라고 생각했다가 아차 싶었다.
눈앞에서 머뭇거리다니. 반격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쪽에선 끄아아아악. 비명만 질러 댔다. 어설퍼도 이렇게 어설플 수가.
어쨌든 다행이었다.
수민은 무전을 무시하고 쇠 파이프를 휘두르려 했다.
그때였다.
-씨이팔, 이 새끼들 다 가만 안 둬. 수민아, 걔들 다 뻥이야! 얘네들 지금 실시간으로 너튜브에 영상 처올리고 있어! 우리 가지고 실시간 방송을 하고 있다고!
“…….”
수민은 조심성 없게 암막 커튼을 걷었다.
“히, 히이익. 와, 완전 무서웠어. 귀, 귀신인 줄. 우와아, 나 오, 오줌 지릴 뻔……. 하, 하하. 아, 안녕하세요?”
헤드셋을 낀 남자가 뒤로 발랑 넘어가서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주변엔 카메라와 전자 기기를 든 사람이 서넛 더 있었는데,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헤드셋 낀 남자 앞에 커다란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모니터의 2/3는 잘게 분할된 CCTV 화면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망가졌는지 지직거리거나 까맣게 변해 있었고, 모니터의 나머지 1/3은 채팅창이었다. ‘ㅋㅋㅋㅋㅋ’로 도배된 채팅이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수민은 잘게 분할된 화면 중 하나에 자신과 남자의 모습이 떠 있는 걸 보았다. 수민이 모니터를 바라보자 채팅이 더 빠르게 업로드되었다. 수민은 쇠 파이프로 모니터를 부쉈다.
-수, 수민아? 방금 이거 무슨 소리야? 설마, 설마 너 사고 친 거 아니지? 안 된다, 수민아. 너마저 김 소장 뒤를 따르면 안 돼! 사람 죽이면 안 된다. 어? 수민아, 안 돼! 하지 마!
박 씨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민에게 일단 ‘안 돼, 하지 마.’부터 외쳤다. 그 무선을 들은 남자가 결국 소변을 지렸다.
“히이이이익.”
모니터와 모니터에 붙은 캠은 부서졌으나 머리에 끼고 있던 헤드셋이 망가진 건 아니었다.
“오줌 쌌어?”
“혀, 형 미쳤어요?”
“윽, 냄새.”
그의 겁에 질린 목소리와 주변에서 기겁하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송출되었다. 확인할 길 없는 채팅방 상황이 어찌 되었을지는 수민이 알 바 아니었다.
수민은 쇠 파이프를 어깨에 걸치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라고?”
수민이 물었다.
“죄, 죄송해요. 저희가 진짜 아이템이 없어서, 그냥, 정말 오나 안 오나 그냥, 장난삼아, 아니, 그냥 전화해 본 거긴 한데.”
“정말, 아니라고?”
수민이 재차 물었다. 그러면서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거짓말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즉시 머리를 내리칠 생각이었다.
-수민아! 안 돼! 하지 마! 어? 너 그런 거까지 김 소장 닮으면 안 된다. 듣고 있어? 아무리 빡쳐도 사람은 죽이면 안 돼!
“죄,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오오오.”
헤드셋 낀 남자가 울며 싹싹 빌었다.
그를 바라보는 수민은 무표정했다. 수민은 마지막까지 경계심을 놓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박 씨가 와서 상황을 수습했다. 수민은, 그제야 쇠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
헤드셋을 낀 남자는 유명한 스트리머였다. 주로 심령 스팟을 돌아다니며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업로드했는데, 요즘 인혁이 여러모로 화제다 보니 콘텐츠로 엮어 보려고 무리수를 던진 것이라고 했다.
공중전화로 제보 전화를 건 것은 연기였으며, 그 과정도 너튜브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사이비 종교 어쩌고 하는 건 스트리머에게 고용된 작가가 쓴 대본이라고 했다. 평소에 <이것을 알고 싶다>를 꼬박꼬박 챙겨 보는 애청자라고 했다.
“내 살다 살다 이런 일을 다 겪어 보네.”
박 씨는 허탈해했다.
“어째 세상에 이런 일이?”
“저기…….”
오줌까지 지리며 싹싹 빌던 스트리머는 허탈해하는 박 씨의 눈치를 살피더니, 변명하듯 중얼댔다.
다섯 번 넘게 인혁에게 메일로 제안서를 보냈다. 그런데 거절 답장조차 받지 못해서 이런 일을 저지른 거다. 그런 말로 면피하려 들었다. 박 씨는 그게 이런 짓을 벌인 이유가 될 수 있냐고 호되게 야단쳤다.
스트리머는 박 씨를 만만하게 본 죗값을 톡톡 치러야 했다. 박 씨는 그새 해당 부지 소유주의 연락처를 알아내선 연락한 뒤였다. 소유주는 안 그래도 개발 예정인 부지에 심령 스팟이니 뭐니 스트리머들이 찾아 골치를 썩이고 있던 차였는데 거기에 사이비 종교 집단이 둥지를 틀고 있다는 허위 제보까지 더해졌다니, 분기탱천하여 한달음에 달려왔다. 경찰도 출동했다.
스트리머와 그의 일당은 줄줄이 엮여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박 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부지 소유주와 악수하며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파주 현장 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박 씨와 수민은 땅 주인과 경찰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박 씨는 운전석에 앉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런 일이 다 있냐. 수민아, 넌 괜찮아? 많이 놀랐지?”
“아니요. 괜찮아요.”
수민은 쇳녹이 잔뜩 묻은 장갑을 벗어 조끼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어휴, 난 또 설마, 네가 김 소장처럼 열 받아 가지고 그놈들 패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엄청 걱정했지 뭐야. 하하, 우리 수민이가 김 소장도 아니고, 그럴 리 없는데.”
“…….”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은 죄다 죽이려 했는데.
“아무튼 고생했어. 어휴, 내가 못 살아.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정신 단단히 붙들어야지. 앞으론 뭐든 제보 전화 오면 일단 너튜브에 쳐보기부터 해야겠어.”
박 씨가 한숨 돌리고는 차 시동을 켰다. 수민은 조끼를 벗고 안전벨트를 맸다.
두 사람을 실은 차는 다시 어둠 속 도로를 달렸다.
박 씨는 운전에 집중하며 아무 말이 없었다. 수민은 신호에 걸렸을 때 물병을 건넸다. 박 씨는 그제야 목을 축이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오늘 일을 소장님한테 말씀드리면, 허위 제보를 좀 거르고 현장 나갈 수 있을까요?”
“글쎄. 그랬으면 좋겠는데.”
박 씨가 핸들을 꽉 쥐었다 놓으며 씩 웃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을걸? 거짓말인 거 빤히 눈에 보여도 일단 가보자고 하는 양반이니까. 그때 그일 이후론 더 악착같아져서 말이야.”
“…….”
그때 그일. 수민은 궁금했으나 캐묻지 않았다. 수민이 묻지 않자 상대는 알아서 민망해했다.
“음, 이거. 참. 계속 말을 안 하자니 수민이만 따돌리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좀 거시기하네.”
박 씨가 이마를 긁적이고는 다시 출발했다. 그는 조금 뜸을 들이다 제풀에 말을 이었다.
“아까, 사무실에서 김 소장이랑 서 여사님이랑 언성 높일 때 놀랐지? 무슨 일인가 하고.”
“아니요.”
“고맙네, 그렇게 말해 줘서. 그래도 놀랐을 거 알아. 갑자기 왜들 저러나, 하고. 근데, 이유가 있거든. 지금 듣고 바로 잊어버려. 알았지?”
박 씨가 천천히 코너를 돌았다.
“좀 된 일인데, 오늘처럼 같은 날에 현장 갈 일이 두 건 겹친 날이 있었어. 몇 달 동안 뒤쫓던 사건 실마리를 겨우 잡아서 현장 덮치기로 했던 날이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김 소장 핸드폰으로 연락이 온 거야. 이전에도 같은 사람한테 몇 번 연락이 오긴 했어. 자기가 무슨 범죄 조직에 속해 있는데 거기서 베타 애들을 데리고 이상한 인체 실험 같은 걸 한다고. 무슨 일인지 자세히 물으려고 하면 바로 전화를 끊고, 그러다 잊을 만하면 또 연락 오고 그래서, 전화를 받으면서도 항상 긴가민가했어. 그때도 허위 제보가 많이 들어왔거든. 장난 전화가 반이었지.”
장난 전화에 지친 인혁은 박 씨를 통해 음지에서 일하는 브로커들에게 정보를 사들였다. 그편이 훨씬 타율이 높았다. 그래서 은연중에 제보 전화에 소홀해졌다.
그땐 지금처럼 사무실과 인혁의 연락처를 사방팔방 오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인혁에게 연락이 온 것이니,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처럼 체계가 안 잡히고 미숙해서 그랬다고 말하면, 그건 변명이겠지. 맞아. 우리가 잘못한 거야.”
수민은 뭘 잘못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박 씨는 알아서 말해 주었다.
“우리가 막 현장에 나가려는데 그 사람이, 너무 다급하게 전화해서 자신이 지금 아이 한 명을 데리고 도망칠 건데, 와 달라고. 급하다고, 몇 시까지 어디로 오라고. 그러더라고. 그 말만 남기고 전화를 바로 끊었어.”
문득 왼쪽 골반 부근이 시큰하게 아려 왔다. 수민은 손으로 왼쪽 골반 부근을 감쌌다.
“그때도 오늘처럼 고민했어. 김 소장은 전화 온 곳에 가보자는 입장이었지. 몇 달 쫓던 곳은 이미 근처에 협력 업체 사람들이 모였을 테니까 거기서 알아서 하라고 하자고. 전화 목소리가 너무 다급해서 마음에 걸린다고. 그런데…….”
“…….”
“미리 말해 두지만 서 여사님 잘못 아니야. 물론 김 소장 잘못도 아니고. 병신같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내 잘못……이려나?”
박 씨가 쓰게 웃었다.
“서 여사님이, 요즘 장난 전화 많이 걸려 오지 않느냐고. 이번에도 장난 전화일 거라고. 장난 전화 때문에 몇 달 공들인 일을 날려 버릴 거냐고 말했지.”
“그래서요?”
“김 소장하고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정말 장난 전화가 많이 걸려 왔었거든. 왜 오메가만 구하냐고, 알파는 다 죽어 버려도 상관없는 거냐고 테러 같은 것도 당하고 그래서 다들 좀 지쳐 있었어. 그리고 몇 달 공들였다고 했던 곳. 거기가 오갈 데 없는 고아 중에 미성년자 남성형 오메가들만 골라서 나쁜 짓 한다고 알려진 곳이라, 아무래도 거기가……. 뭐, 가능성이 있겠다 싶은 곳이었지.”
인혁의 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베타 아이들을 데리고 인체 실험을 한다느니, 애들이 보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나 지껄이는 제보보다는 우선순위에 놓일 만했다.
“……그래서요?”
수민의 목소리가 차게 가라앉았다.
“뭐, 못 갔지, 아니, 안 갔지. 거기를. 그날, 그 시간. 그 사람이 와달라고 했던 때에.”
“…….”
“나중에, 나중에 가볼 생각이었어. 혹시 모르니까. 일단 그 건만 처리하고 바로 가볼 생각이었는데. 그 몇 달 공들였던 건이 이상하게 꼬이는 바람에 거기서 며칠 발이 묶였거든. 그래도 결국 거기 가보긴 했는데.”
박 씨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그 근처에 폐병동 부지가 하나 있었다는데. 인근 민가에 물어보니까 평소에 외부인들이 좀 왔다 갔다 하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얼씬도 안 했다더라고. 거기가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있었어.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조사 나온 경찰한테 물어보니, 사건 이미 종결되었다고 그러고. 얼마 안 있어 거기 부지가 싹 밀리고 무슨 병원이 들어섰다는데. 그 뒤로, 그 전화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어.”
박 씨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렸는데, 다시는 전화가 안 오더라고.”
전소된 폐병동 부지는 금방 밀리고 새 병원이 들어섰다. 아무리 화재가 난 김에 일을 해치우는 거라고 해도, 내내 폐병동 부지를 버려두었던 터 주인은 너무 일을 서둘렀다.
그 지역, 그 동네는 병원이 들어설 만한 입지가 아니었다. 병원 설립 인가도 화재 이후에 진행한 거라던데,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냥 돌아서기에는 찜찜했다.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공사 현장에서 일했던 일용직 인부들을 수소문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일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한참 후에야 인부 몇 명과 연락이 닿았다. 박 씨가 변죽 좋게 접근하여 술을 사주고 이것저것 묻자 그들이 술김에 하나둘 속을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빨리 찜찜한 속을 털어 내고 싶은 듯 보였다.
사실 거기 터를 다지는 작업을 할 때 사람 뼈 같은 게 좀 나왔는데. 토지 주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넘기니까 그냥 아무렇지 않게 덮어 버렸다고. 다른 공사 현장보다 돈 좀 더 챙겨 주고 일도 제법 편해서, 일용직으로 간 사람들이 다들 쉬쉬하며 모른 척했다고. 괜히 들쑤셨다가 잘릴까 봐.
“그 말 듣자마자 김 소장이 눈이 뒤집혀서 다시 찾아갔는데, 뭐 어쩌겠어. 벌써 새 병원 들어서서 잘만 운영되고 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그 아래 마을 사람들까지 다 병원 편이 돼서는, 외지인이 괜히 찾아와 물 흐린다고 우리를 역병 몰아내듯 몰아내더만. 그 뒤로 김 소장이 완전 변했지.”
박 씨의 이야기는 어쩐지 익숙했다. 수민은 욱신거리는 왼쪽 골반을 움켜쥐었다.
“그게, 언제쯤이었나요?”
“글쎄, 그게 그러니까……. 벌써 시간이 꽤 흘렀지. 한 7, 8년은 넘었을 거 같은데. 아, 맞다. 그때였어.”
마침 그해 그달에 박 씨의 노총각 친구가 결혼을 했다. 박 씨가 기억을 더듬어 그 시기가 언제쯤인지 말해 주었다.
“…….”
수민의 얼굴이 굳었다. 항상 무표정했기 때문에 티 나진 않았다.
“이런 이야기 너무 무겁지? 그냥 듣고 잊어버려. 괜히 얘기했나 보네.”
박 씨가 하핫,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오늘은 그때랑 달라서. 우리가 두 팀으로 나뉘어서 현장에 갈 수 있었고, 또 우리 쪽은 단순한 허위 제보였잖아. 이게 다 수민이 네가 우리 사무실에 와 준 덕분이야. 나 혼자 파주 가보겠다고 했으면 김 소장이 절대 안 보내 줬을걸?”
박 씨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것이었다. 그 노고를 모르지 않았다. 이전처럼 작게라도 반응해 주면 박 씨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터이나.
“…….”
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아무튼 그러려니 해. 알았지?”
수민이 아무 반응이 없자 박 씨는 허흠, 헛기침하고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수민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유리창에 수민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김 소장인가? 연락이 닿았어!’
드디어 기억났다. 그때 그 사람이 했던 말.
왼쪽 골반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욱신거렸다.
***
남양주 현장은 진짜였다.
경찰차에, 협력 단체 사람들이 몰고 온 차까지. 조용한 동네가 시끄러웠다. 한쪽에선 제보자로 보이는 사람이 경찰들에게 진술하고 있었다. 다른 쪽에선 경찰들이 구경 나온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수민과 박 씨는 그들을 헤치고 현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 경찰이 막아섰으나 마침 근처를 지나던 인권 단체 사람이 신원을 보증해 줘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피해자들은 모포를 여러 겹 두르고 여기저기 주저앉아 있었다. 사무실 사람들, 인권 단체 사람들이 그들에게 물과 따뜻한 음식을 나눠 주었다. 겨우 안도하여 울음을 터뜨리면 안아 주고 달래 주었다.
“저기 있네. 서 여사님!”
박 씨가 서 여사를 발견하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수민은 인혁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인혁은 커다란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수민은 박 씨가 그러했듯 인혁에게 가려고 했다. 하지만 채 두 걸음도 걷지 못하고 멈춰 섰다.
인혁의 앞에는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싶은 남자애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모포를 여러 겹 두르고 있는데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겁에 질려 있었다.
인혁은 그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 몸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이따금 말을 걸었다. 그렇게 그들을 안심시킨 뒤에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인혁은 그들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애써 부드럽게 꾸며 낸 얼굴은 잘 보이는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민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김 소장인가? 연락이 닿았어!’
인혁이 모포를 덮어쓴 남자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민은 빠르게 걸어가 그 손이 그들 중 누군가에게 닿기 전, 낚아챘다.
“누구…… 어, 왔구나. 언제 왔니.”
인혁이 수민을 알아보고 몸을 일으켰다.
“방금요.”
“박 계장님은? 그쪽 상황, 간단히 전화로 전달은 받았는데. 아, 잠깐만.”
방금 손이 닿을 뻔했던 남자애가 인혁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남자애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어물거렸다.
인혁이 수민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그 남자애를 바라보았다. 그 애의 말을 듣고자 다시 몸을 굽히려 했다.
“…….”
수민이 그런 인혁을 잡아당겼다.
“어?”
인혁을 제 등 뒤로 밀어 내고 남자애의 손을 발로 찼다.
윽. 남자애가 채인 손목을 움켜잡고 몸을 움츠렸다. 다시 겁에 질려서는 벌벌 떨며 수민을 올려다보았다.
“나, 나는…….”
“만지지 마.”
단조로운 목소리, 싸늘한 시선, 무표정한 얼굴. 남자애가 흠칫, 놀라며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겁을 집어먹고는 저들끼리 뭉쳤다.
“오수민, 너 뭐 하는 짓이야!”
인혁이 수민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제가 뭘요?”
수민이 차분히 되물었다.
“뭘요? 몰라서 물어?”
“네.”
정말 모를 일이라고, 수민은 생각했다.
‘김 소장인가? 연락이 닿았어!’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인혁은 오지 않았으니까.
‘김 소장인가? 연락이 닿았어!’
절실하고 다급했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그럼에도 수민은 슬프지 않았다. 새삼 화가 나지도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은데. 저보다 더 열을 내는 인혁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김 소장인가? 연락이 닿았어!’
그가 그토록 바랐던 김 소장은 인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불쌍한 오메가 아이를 구하고자 제보 전화를 받고 뛰쳐나가는 ‘김 소장’이 김인혁 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어쩌면 박 씨의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 너무 오래전 일 아닌가. 헷갈릴 수도 있겠지. 그날이 그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설사 같은 날이었다고 해도 인혁이 절 버린 게 아니라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필 같은 날, 다른 두 곳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인혁에게 선택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같은 날 일어난 같은 사건일 수도 있다.
인혁이 외면한 그 제보 전화가 오 박사의 것이었고, 인혁이 외면한 아이가 032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게 인혁의 잘못인가? 오수민이 김인혁에게 화내고 짜증 내고 분노할 이유가 되는가?
아니오.
그날 인혁이 수민을 버리고 더 많은 오메가 아이들을 구하러 갔다 해도 그건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인혁에게 수민을 구해야 할 의무는 없었으니까. 오직 자신의 아들을 찾을 수 있는 권리만 있었을 뿐.
선택받지 못한 아이가 절 구해 주려는 줄도 모르고 절 구해 주려 했던 사람을 죽이고, 제 발로 다시 절 착취하고 이용하려는 소굴에 걸어 들어간 것이 인혁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이는 예정된 수술대에 누웠다. 몸을 찢었다 이어 붙였고, 절뚝이며 어른들에게 끌려 나와 불타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갔다.
거기서 또 사람을 죽였고, 죽였다. 다시 죽였고 죽였다. 속죄하기 위해 선생님의 방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그 사이 인혁에게 선택받은 다른 오메가 아이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인혁은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옷을 사주고 가구를 사주고 집을 주고 같이 밥을 먹어 주었을 것이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이미 지난 일이다.
인혁은 인류애를 실현하기 위해 범죄에 연루된 오메가를 돕는 게 아니다. 오로지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의 목적은 오직 아들을, 가족을 되찾는 것뿐. 그러니까 그날도 그는 그 목적에 맞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 선택받지 못한 건 아니리라. 그러니까 수민은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았다.
‘김 소장인가? 연락이 닿았어!’
첫 살인이었다.
이후 032는 한진영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래도 인혁은 그를 구하러 와주지 않았다.
그가 오수민이 되어서야 인혁은 비로소 그를 봐주었다. 곁에 있을 수 있게 해주었다. 같이 밥을 먹어 주고, 차를 타면 옆자리에 앉게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에 비하면 저 아이들은 운이 좋았다. 인혁은 별거 아닌 전화 한 통에 그들을 선택했고, 그들을 구해 주었다.
그런데.
만족하지 못하고 또 인혁을 원하다니.
너무 과한 욕심이었다. 선을 넘은 짓이었다. 그러니 그 손을 쳐내는 것쯤은 해도 되는 일 아닌가. 짓밟아 뼈를 으스러뜨린 것도 아니고 절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손대지 말라고 쳐낸 것뿐인데.
“오수민!”
인혁은 저 남자애가 아니라 수민을 밀쳤다. 선을 넘은 건 저 아이가 아니라 너라고 말하듯이.
수민은 인혁의 굳은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선을 넘은 건가?
문득 승원이란 아이가 생각났다. 그러자 터질 듯 뜨겁던 머리가 단번에 식었다. 발꿈치를 칼로 베어 내어, 그곳을 통해 몸속의 피가 줄줄 새어 나가는 것 같았다.
선을 넘은 건, 나다.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왔다.
‘김 소장인가? 연락이 닿았어!’
고작 그 부름에도 응해 주지 않았다. 그가 선을 넘은 아이에게 얼마나 매몰찬지 이미 보았지 않은가.
수민은 어깨를 잡은 인혁의 손을 밀어 내고 뒤로 물러섰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 너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듯 바라보던 눈길. 차를 운전하면 당연히 옆자리에 앉아도 되는 암묵적인 룰. 공부하라는 잔소리. 싫어하는 반찬도 먹으라는 염려.
저를 향한 것이나 이따금 자신이 아니라 자신 너머의 누군가를 향하는 것 같았던 그 얄팍한 애정. 그것마저도 더는 받아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날 승원이란 아이를 대했던 것처럼 밀어 내리라.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무시하고 외면하리라. 다른 곳으로 보내리라.
‘김 소장인가? 연락이 닿았어!’
“저는…….”
말문이 막혔다.
선을 넘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왜 날 구해 주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또 날 버리려고요?
왜 날 구해 주지 않았어요?
“…….”
아예 입술이 달라붙어 열리지 않았다.
두려웠다.
슬펐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울고 싶었다. 아마.
항상, 선생님의 방에 가는 게 싫었다. 선생님이라 불러야 하는 남자의 몸은 미지근하고 소름 끼쳤다. 숨은 축축했고 두 다리를 벌리는 손은 징그러웠다. 속죄의 행위지만, 그건 성교이며 강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됐다. 그런 생각을 하면 단 하루도 그곳에서 버틸 수 없었다.
이건 속죄일 뿐이다.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뿐이다. 어제 다른 아이가 누웠을 침대 위에 누워, 어제 다른 아이가 당했던 짓을 똑같이 당하며,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어쩌면 가끔, 아니 언제나, 구원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방으로 가는 게 싫은 만큼이나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성서엔 살인하지 말라 쓰여 있었는데 왜 난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걸까? 사람은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데.
그럼 나는 사람이 아닌 걸까?
그래서 아이는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건 인혁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인혁에게 화내면 안 된다.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원망해선 안 된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버림받았는데 왜 또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해야 하는 건지. 수민은 이해되지 않았다.
“수민아, 오수민. 너 왜 그래.”
인혁이 다시금 수민의 어깨를 붙잡았다.
상처투성이. 굳은살 박이고 마디진 거친 손. 그럼에도 늘 조심히 다가오는 온기. 그 커다란 손에 어깨가 덮였다.
“무슨 일이야. 너.”
늘 무심하고 단정한 얼굴. 짜증 낼 때만 잠깐씩 변하던 얼굴이, 지금은 안타깝다는 듯 일그러졌다.
왜, 어째서?
수민은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을 넘은 아이를 버릴 때 늘 이런 표정이었을까?
그런 거라면 왜 승원이 버림받고도 인혁에게 매달린 건지 이해됐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많은 생각으로 가득 차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수민은 탈력감에 눈을 감았다. 과부하 걸린 머리가 표백되었다. 숨마저 따라 멈췄다.
망가져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망가진 지 오래였다. 제가 단 하루라도 망가지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하루라도 멀쩡한 적이 있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인혁에게 또 버림받느니 이대로 전원을 끄고 그만 멈추고 싶었다.
행복하지는 않지만,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로, 이대로 모든 게 멈춰 버렸으면. 수민은 간절히 바랐으나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단 한 번도, 기도를 들어준 적 없었으니까. 신도, 그 누구도.
“눈 떠, 숨 쉬어. 뭐 하는 거야.”
그런 수민을 끌어안는 손길이 있었다.
“파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민아.”
늘 인혁에게서 나던 냄새가 얼굴을 덮고 온몸을 감쌌다.
“숨 쉬어, 일단 숨 쉬어.”
인혁이 등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을 따라 숨이 트였다.
허억, 숨을 몰아쉬자 인혁이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인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주변의 소음이 뭉개졌다. 인혁의 목소리만이 선명했다.
수민은 손을 들어 인혁의 등을 감쌌다.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숨을 들이켰다. 그의 냄새가 폐를 가득 채우고 머리끝과 손끝, 발끝까지 퍼졌다.
조금 전, 망가진 채로 작동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걸 취소하고 싶었다. 수민은 지금, 이 상태로 작동을 멈추고 싶었다.
이 마음이 무엇인지, 수민은 여전히 이름을 알지 못하였다.
“괜찮아, 수민아. 이제 다 괜찮아.”
인혁은 파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계속 등을 도닥여 주었다. 수민은 그의 품에서 그의 냄새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그의 온기를 누렸다.
하지만 착각하지는 않았다. 수민은 이 온기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물을 수 없었다.
왜 나를 구해 주지 않았어요?
왜 나는 당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수민은 눈을 들어 인혁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인혁의 바짓단을 잡으려 했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수민은 그 아이를 노려보았다.
아이가 겁에 질려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수민은 그 아이를 계속 노려보았다.
인혁의 등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짝 깎은 손톱이, 힘을 잔뜩 준 손끝이 셔츠를 짓누르고 살갗을 찍었다. 그래도 인혁은 뿌리치지 않았다. 수민은,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다. 잠에서 깼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귀만 열리고, 촉각만 남아 있었다.
차 안인 것 같았다. 박 씨와 서 여사의 목소리가 앞에서 들렸다.
그럼 인혁은? 수민은 잠결에도 인혁을 찾았다.
“괜찮아. 어디 안 가고 옆에 있으니까. 걱정 말고 더 자.”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제야 수민은 제가 인혁의 다리를 베고 누워, 인혁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무언가를 덮고 있었는데 이불은 아니었다. 인혁의 냄새가 가득 배여 있었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따뜻하고 느긋했다.
수민은 그 손길에 취해 다시 고른 숨을 내쉬었다.
서 여사와 박 씨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파주에서 너무 놀란 것 같다. 그놈들 순순히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이라도 가서 다시 혼쭐을 내줄까 보다. 멀쩡해 보여도 사실은 계속 긴장하고 스트레스받았던 게 아니냐.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수민 학생, 자는 거 보니까 애다, 애. 정말 제대한 스물세 살짜리 맞냐, 스무 살 안 됐다 해도 믿겠다. 저 어린 것을 데리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원.
수민의 어깨를 다독여 주는 사람은 말이 없었다. 수민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며, 인혁의 손을 꼭 붙잡았다.
붙잡아야 했다.
먼저 붙잡아 주지 않을 테니까.
***
박 씨가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워 주었다. 인혁은 수민을 챙겨 안았다. 수민은 누가 절 들어 올리는지도 모르고 눈 뜨지 못했다. 인혁은 혹여나 수민이 깰라, 목소리를 낮추고 박 씨와 서 여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김 소장, 안색이 안 좋아. 수민이만 집에 눕혀 주고, 김 소장도 얼른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
“그래요, 김 소장. 얼굴이 말이 아니네.”
“두 분도 주말 동안 잘 쉬세요.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두 사람이 떠났다. 인혁은 수민의 집으로 갔다. 그는 닫힌 문 앞에 서서 수민을 깨워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민을 고쳐 안고 한 손으로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눌러 보았건만.
띠리릭. 문이 열렸다.
“비밀번호 바꾸라고 한 게 언젠데.”
인혁은 혀를 차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인혁은 헤매지 않고 침실로 갔다. 침대를 설치하러 올 때 인혁도 와 있었기에 다른 방과 헷갈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수민을 침대에 뉘었다. 옷을 갈아입혀 줘야 하나 싶어 셔츠에 손을 댔다가 바로 뗐다. 인혁은 수민에게 닿았던 손을 꽉 주먹 쥐고 뒤로 물러섰다.
수민은 인혁의 겉옷을 둘둘 말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도 벗겨 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깰 것 같아 손을 댈 수 없었다.
인혁은 그냥 얇은 이불만 덮어 주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수민의 이마에 손을 댔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말간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잘 자라.”
인혁은 묘한 열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정히 속삭이고는, 서둘러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침실 문이 닫혔다. 이어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띠디딕.
“…….”
수민이 눈을 떴다.
방금 인혁이 만져 줬던 이마를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그리곤 몸에 말고 있던 인혁의 겉옷을 끌어안고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인혁의 냄새가 폐에 가득 들어찼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랫배에서 불덩이가 뭉쳤다.
수민은 아직 이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
주말 동안 수민은 평소처럼 가만히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손에 인혁의 옷이 들려 있다는 것이었다. 점점 인혁의 냄새가 사라졌지만, 수민은 간간이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틀 내내 인혁의 냄새에 덮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 몽롱해지는 것도 같았다. 종종 아랫배가 찌르르하게 아팠다가 괜찮아졌다.
일요일 저녁, 수민은 거실 바닥에 인혁의 옷을 깔고 누워 밖의 하늘을 보았다. 여름이라 그런지 아직 하늘이 파랬다. 그래도 달이 떠 있었고, 구름은 붉었다.
수민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빨리 밤이 오고,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
월요일 아침. 수민은 평소처럼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9시가 가까워져 오자 서 여사와 박 씨가 순서대로 도착했다.
다들 끝내주는 주말을 보냈는지 죽을상이었다.
“이 나이 되면 이틀 내내 누워만 있어도 이래요.”
서 여사가 나는 아니라며 변명을 하고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박 씨는 술 깨는 약을 들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이 뒤로 회까닥 넘어갔다. 저 상태로 두면 굳이 목뼈를 꺾지 않아도 디스크로 죽을 것 같았다. 수민은 마른 수건을 돌돌 말아 목에 대주었다. 박 씨는 촉촉한 눈빛으로 수민을 바라보며 윙크했다.
“그나저나 수민 학생은, 몸 좀 어때.”
“아, 맞다. 수민아. 괜찮아? 많이 놀랐지?”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민은 두 사람의 걱정을 적당히 흘려보내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9시가 넘었는데도 인혁이 안 왔다.
이젠 인혁이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오늘은, 괜히 조바심이 났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 오는 것도 같고, 몸이 뜨거워지는 것도 같고.
수민은 감기 기운이 있나 싶어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딱히 열이 느껴지진 않았다.
“왜, 감기 걸렸어요? 여름 감기는 독하다던데.”
“아니요. 그냥요.”
“아직 힘들면 이리 와서 앉아요, 오늘 김 소장 안 올 테니까.”
서 여사가 수민에게 손짓했다.
“응? 김 소장 오늘 안 와요? 왜요?”
박 씨가 대신 물어봤다.
“몸이 안 좋다네.”
“몸이 안 좋다고요? 그 김 소장이?”
“몸살 날 때 됐지. 요즘 계속 바빴잖아. 우리 말고 김 소장. 아픈 김에 며칠 쉬겠다고 그러더라고.”
“그건, 그렇긴 한데. 그 양반이, 한두 달 바빴다고 몸살 나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박 씨가 고개를 갸웃했다. 서 여사 또한 딱히 이해 간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무튼 아침에 그렇게 문자가 왔어. 정말 몸이 안 좋은지 맞춤법도 다 틀렸더라고.”
서 여사가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수민은 얼른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정말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엉망이었다.
“병원 가봤냐고, 내가 한 번 들를까 했더니 절대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제 몸 아끼는 양반은 아니지만 아픈 거 미련하게 참는 사람도 아니니까, 놔둬요. 그런 말 듣고 괜히 찾아가 봤자 혼나기만 할걸요.”
“그럴 생각이야. 에구, 그래도 혼자 살면서 아프면 서러운 법인데. 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병문안도 못 가고.”
박 씨와 서 여사의 대화를 듣다 보니 예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던 듯했다. 예전에 멋모르고 죽을 사 들고 찾아갔다 문전박대당한 적도 있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그러니까 수민 학생, 혹시나 하는 말인데. 찾아갈 생각은 하지 말어. 알았지?”
서 여사가 수민에게 말했다.
“네. 전 소장님이 어디 사시는지도 모르는걸요.”
“하긴, 그렇겠네.”
수민은 서 여사를 안심시키고는 컴퓨터를 켜 박 씨가 부탁한 문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예전에 정리해 둔 파일을 뒤져 이전 양식을 확인하는 척하며, 인혁의 주민 등록 등본을 확인했다.
인혁의 집은 수민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
목이 탔다.
인혁은 손을 뻗어 물병을 집어 들었다. 물병에 물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담긴 물은 제법 차가웠지만,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물로 해결할 수 있는 갈증이 아니었다.
인혁은 손에 들고 있는 약통 뚜껑을 비틀었다. 빨간 알약을 꺼내 물을 마시지 않고, 그냥 씹어 삼켰다. 입 안에 쓴맛이 확 퍼졌다.
그 때문에라도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머리끝까지 치솟은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금요일 밤. 수민을 침대에 눕혀 줄 때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 하고 무시했던 게 화근이었다.
토요일 새벽, 인혁은 몸의 열기를 못 이겨 자다 말고 눈을 떴다. 몸은 이미 불덩이였다. 침대는 그가 흘린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뿐이었다면 감기에 걸렸거나 몸살기가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아랫배가 묵직하게 저리고 다리 사이가 뻐근해졌다.
침실엔 그의 페로몬이 가득 차 있었다. 인혁은 제 페로몬 섞인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살의에 가까운 짜증을 느꼈다.
러트 사이클에 접어든 알파의 본능이었다. 제 페로몬 말고, 오메가의 페로몬을 갈구하는 본능.
주말이었다. 동창의 사생활을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인혁은 바로 의사에게 연락했다.
그는 곧바로 와 인혁을 거실 소파에 눕히고는 억제제 수액을 놔주었다. 그리곤 집에 남아 있는 약병을 들여다보고는 길길이 날뛰었다.
“적당히 처먹으랬지! 역효과 나서 페로몬 수치 더 불안정해지면 러트 사이클 올 수 있다고. 내가 말 했어, 안 했어! 오메가 페로몬 거부 증상 있는 너한테 러트 사이클은 독이란 말이야!”
“…….”
인혁은 맞받아칠 힘이 없어 누워서 한 팔로 얼굴을 가렸다.
“수액 놔준 건 일시적인 거야. 너 같은 우성은 원래도 약이 잘 안 맞아, 그런데 러트를 약으로 누르겠다고? 평소 시키는 대로 복용하고, 건강한 성생활을 한 알파도 될까 말까 한데 니가 퍽이나 되겠냐고!”
“……저주하라고 부른 거 아닌데.”
“저주? 저주 같은 소리 한다. 새겨들어. 왕진비 백만 원짜리 소견이니까. 그만 먹으라고 해도 먹을 테니까, 다른 종류 억제제 가져온 거 놓고 가긴 할 건데 먹어 봤자 두통 심할 때 두통약 먹는 정도일 거야. 그마저도 너한텐 잘 들을지……. 하아, 정말 난 모르겠다.”
어차피 힘들 건데, 조금 덜 힘들게 해줄 뿐이라는 소리였다.
“어쨌든 웬만하면 먹지 말고 그냥 버텨. 애국가를 백만 번 복창하든, 가부좌 틀고 앉아서 성인 반열에 오를 정도로 명상을 하든, 견뎌 보라고. 아니면…….”
의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웅얼댔다. 아쉽게도 발음이 너무 좋아 그렇게 말해도 인혁에게 고스란히 들렸다.
“난 의사야. 의사란 말야. 제발 날, 포주 비스무리한 거로 만들지 마. 난 그런 게 정말 싫어. 러트 사이클이니 히트 사이클이니, 그런 걸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불러 성관계를 맺으라고, 그게 현재로선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이딴 말 하게 만들지 말라고. 씨발, 동물도 아니고 인간인데. 아니, 요즘엔 동물도 그렇게 교미시키면 학대라고 신고당해.”
세상이 좋아졌다. 이제는 억제제만 잘 먹으면 알파도 오메가도 러트 사이클이나 히트 사이클을 무리 없이 넘길 수 있다. 장기간 억제제를 복용하면 발기 부전이나 불임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나, 위험성은 피임약의 위험성과 거기서 거기였다.
그 일상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게 우성 알파, 우성 오메가였다. 요즘 세상에 성욕이 들끓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있다니.
삼류 포르노에도 안 나올 법한 설정값이건만. 우성은 우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설정값을 감당해 내야 했다.
우성에게 억제제가 잘 듣지 않는 건 아주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우성을 위한 억제제가 수지타산에 맞지 않아 대기업 제약사들이 건드리지 않아서.
전 세계에 알파나 오메가는 35%이다. 그중 우성은 1% 남짓. 고작 그 정도 되는 인구를 위한 억제제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 일이다. WTO 협약에 따라 억제제의 시중가가 고정되었기 때문에 값을 높여 팔 수도 없다.
그런데 우성은 한 카테고리로 묶여 있어도 페로몬 수치가 제각각, 천차만별이다. 그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약을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 보니 우성을 위한 억제제 연구는 더욱 더뎠다.
시중의 우성용 억제제는 일반 알파, 오메가들이 쓰는 약을 용량만 늘려 출시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의사들이 히트 사이클, 혹은 러트 사이클 때문에 괴로워하는 우성 오메가나 알파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마음에 맞는 파트너와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맺으라는 말뿐이었다. 이 때문에 인혁의 주치의처럼 자괴감을 느끼는 의사들이 많았다.
“내가 베타라 아무것도 모르고 속 편하게 이런 말 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아.”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니까.”
“……말이나 못 하면.”
의사는 뭍에 나온 인어처럼 축 늘어진 인혁이 안쓰러워 창문이라도 열고 환기를 시켜 주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인혁은 우성 알파였다. 게다가 몇 년 만에 러트 사이클을 겪는 중이었다. 베타라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의사마저 숨 막힌다 생각할 정도로 집 안 공기가 무거웠다. 괜히 이 페로몬을 밖으로 내보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의사는 오히려 닫힌 창문도 다시 확인해 꼭꼭 닫아걸고 커튼까지 쳤다. 인혁은 그런 의사를 보며 웃었다.
“내가 전염병, 걸렸냐.”
“차라리 전염병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격리 병동에 처넣고 치료라도 해주지. 이건 뭐…….”
의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곤 떠날 준비를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너희 집 TV 성인 채널 나와? 안 나오면 내가 미리 결제해 주고 갈까?”
“꺼져.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인혁은 의사를 핵폐기물 보듯 봤다. 의사는 울컥했으나 다시 자괴감을 느끼고 쓸쓸히 돌아섰다.
“사이클 지나면 연락해.”
“왜?”
“기운 나는 수액이라도 맞혀 주려고 그런다.”
“의사 선생님, 나 하나 가지고 병원 월세 뽑으시려고 드네.”
“월세는 무슨, 낸대도 받지도 않으면서. 암튼 잘 버텨 봐. 약은 최대한, 최대한 적게 먹고.”
“마중은 못 나간다.”
“바라지도 않는다.”
“잘 가, 고맙다.”
인혁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의사는 그런 그를 딱하다는 듯 보고는 떠났다. 옆에 있어봤자 도움 되긴커녕 거치적거릴 뿐이었다. 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게 상책이었다.
그 뒤로 인혁은 혼자서 이틀을 버텼다. 열에 달떴지만, 자위를 하거나 핸드폰을 뒤져 아는 오메가에게 연락해 꾀어낸다든가, 그런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몸은 섹스를 원하고 있으나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도무지 버틸 수 없어 수음을 하려고 해도 머릿속이 총 맞은 것처럼 뻥 뚫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대체 누굴 상상하고, 무얼 상상해 흥분하고 사정한단 말인가.
언뜻 병아리색 스웨터가 생각났다. 얇은 셔츠 위로 길게 뻗은 하얀 목선도.
그때마다 인혁은 혀를 짓씹었다. 물도 없이 억제제를 씹었다.
생각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더 끔찍한 건 그 노란 스웨터에 묻어난 페로몬을 기억하고 반응하는 아랫도리였다. 인혁은 부엌으로 가 식칼로 사타구니를 도려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주말을 버텼다. 이틀 만에 상태가 좋아지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다.
젊은 시절, 인혁의 러트 사이클은 사흘에서 닷새 사이였다. 억제제를 먹고 관리하면 그 정도였고, 가족을 잃고 정신적인 이유로 페로몬 수치가 날뛸 때는 꼬박 일주일을 버텨야 했다. 오메가와 관계를 맺으면 그보다 일찍 끝날 수도 있다고 하나, 인혁은 경험해 본 적 없었다.
밥은 안 챙겨 먹어도 약은 꼬박꼬박 씹어 삼킨 게 도움이 됐을까. 월요일 새벽, 잠깐 정신이 들었다. 인혁은 서 여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 살아 있냐는 의사의 문자에도 답장을 보냈으나 뭐라고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욕실로 가 샤워기로 찬물을 틀어 놓고 한참 서 있다가, 의사가 사놓고 간 견과류를 몇 개 주워 먹고 침실로 가 쓰러지듯 누웠다. 잠깐 잠들었으나 몸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금세 깼다.
침대에 걸터앉아 약통을 손에 든 채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침실에 가득 찬 페로몬이 무겁게 몸을 짓눌렀다. 그간 억눌렸던 걸 풀기라도 할 셈인지 지독했다. 인혁은 제 페로몬을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했다.
이러다간 알파 페로몬 거부증 증상까지 추가될 듯했다.
알파 페로몬 거부증? 자기 페로몬 거부증이겠지. 이제 슬슬 뇌가 맛 가기 시작하는지, 그게 웃겼다. 인혁은 실없이 웃다가 깜박, 생각해 버렸다.
이번엔 노란 스웨터 말고 다른 거. 여름이라고 얇은 셔츠를 입고, 더우면 팔락팔락 셔츠를 흔들어 대는. 그 자락 사이로 보이는 마른 몸. 페로몬은 또 얼마나 연약하면서 달달…….
“빌어먹을.”
인혁은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암담했다.
버텨야 하는데. 버티면 되는데. 언제까지 버텨야 할까. 아니, 제대로 버틸 수는 있을까?
혹시나, 혹시나. 사정의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모습이 그 아이면 어쩌지. 그게 무서워 인혁은 성기에 손도 대지 못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으면 죽었지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의사가 봤다면 성인군자 납셨다며 혀를 내두를 만큼 버티는 중이었다. 이대로 끝까지 버티면, 굳이 가부좌를 틀지 않아도 어떤 경지에 이를 것도 같았다.
실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풀지 못한 욕구가 죄다 열기로 산화해 핏줄로 스며든 것 같았다. 피가 끓었다. 눈이 빠질 듯 아팠다.
풀지 못한 성욕은 고통이 되었고 몸을 갉아 먹는 고문이 되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인혁은 알약을 하나 더 씹었다. 이젠 쓴맛으로 입 안이 얼얼해져도 아픈 줄 몰랐다.
찬물을 한참 맞으면 좀 정신이 들 것도 같은데, 욕실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혁은 다리에 팔을 기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그저 시간만 지나길 바랐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앉은 채로 잠시 졸았던 것 같은데.
띠디딕. 도어 록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열기와 잠기운으로 온전치 못한 머리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신 나간 머리보다 먼저 반응한 건 몸이었다.
드디어 왔다.
아니, 여기에 있을 리 없는데. 오면 안 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애가 탔다. 빨리, 좀 더 빨리 왔으면.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아니, 아니야. 오면 안 되는데. 왜, 여기에. 네가.
닫힌 문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인혁은 애가 타서 고개를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문을 부수고 싶었다. 아니, 저 문을 잠가야 했다.
어서 들어와.
안 돼, 들어오지 마.
끼익, 문이 열렸다.
아아, 드디어.
안 돼.
인혁은 환희와 참담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런다고 먼저 도착한 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늘 생각했다. 연약하고 기분 좋은 향이라고. 달달하고 미약해서. 안쓰럽고 사랑스럽고.
아무래도 맛있게 느껴져서.
“소장님.”
그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불가항력적이었다.
인혁은 고개를 들었다.
프랜차이즈 죽집 쇼핑백을 들고 있는 수민이 보였다. 종일 굶주렸던 인혁은 그 쇼핑백 말고, 그 쇼핑백을 든 하얀 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 눈을 돌렸으나,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이었다. 수민은 연한 노란색 반팔 셔츠에 얇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하얀 팔을 눈으로 훑어 올라가는데,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괜찮으세요?”
말간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분명 문을 잠갔는데. 이 아이가 이곳을 알 리 없는데. 현관 도어 록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열었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생각해야만 했는데.
수민이 쇼핑백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달달한 향 때문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가느다란 두 팔이 인혁을 끌어안았다. 인혁은 전율했다.
“필요한 거죠? 오메가가.”
수민이 천천히 등을 쓸어 주었다.
인혁은 대답할 새도 없이 수민의 셔츠 속으로 손을 넣었다. 마른 허리가 잡혔다. 가느다란 목에 코를 박고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토악질 날 정도로 독한 페로몬에 절여져 있던 폐에, 달달한 향이 스몄다.
처음 만났을 때 먹었던 자두 맛 사탕.
그보다 더 달았다.
***
수민은 여섯 시에 퇴근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했어요.”
“고생 많았어. 들어가서 푹 쉬어.”
서 여사와 박 씨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에서 나와, 건물 1층에 주차된 인혁의 차를 한 번 보았다. 눈에 익은 번호판을 새삼 읽고, 죽집으로 가서 죽을 샀다.
그리고 철물점에 들려 케이블 타이를 얻었다. 원래는 살 생각이었다. 가게 주인이 어디에 쓸 거냐고 묻기에 집에 있는 데스크톱 컴퓨터 전선을 정리하는 데 쓸 거라고 대답했는데, 가게 주인이 공짜로 적당량을 끊어 주었다.
원래는 돈 주고 팔아야 하는 건데 김 소장을 봐서 주는 거라고 했다. 이 동네, 특히 이 골목 사람들은 사무실에 고용된 것도 아니면서 인혁을 꼬박꼬박 김 소장이라고 부르면서 좋아했다.
수민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케이블 타이를 쇼핑백에 넣었다.
버스를 타고 인혁의 집으로 갔다. 당연히 문은 잠겨 있었다.
일단 가능성 있는 번호 조합을 몇 번 눌러 보고 안 되면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뜯을 생각이었다. 인혁이 사는 집 현관을 태우거나 부수고 싶진 않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민은 인혁이 인터넷이나 핸드폰으로 돈을 이체할 때 쓰던 비밀번호를 떠올렸다. 거기서 핸드폰 번호 뒷번호와 차 번호판을 조합한 숫자만 입력해 보았다.
바로 문이 열렸다.
집 도어 록 비밀번호를 잘 관리하라고 신신당부하던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엔 너무 허술했다.
문을 열자마자 더운 열기가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평소에 늘 맡았던 인혁의 냄새였다. 하지만 평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 묵직하고 진하고, 독했다. 부드럽게 감싸 주는 게 아니라 단번에 집어삼킬 듯 휘감았다.
숨을 한 번 들이쉬었을 뿐인데, 머리가 어질했다. 수민은 벽을 잡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제 발로 걸어 들어왔음에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그런데 감히 뒷걸음질 칠 수 없었다. 수민을 뒤덮은 열기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랫배가 찌르르하게 아파 왔다. 아니, 골반 왼쪽 부근이 울리는 것 같았다.
숨이 뜨거워지며 입 안이 말랐다.
이 냄새, 이 열기의 정체가 무엇일까. 혹시 알파의 페로몬이란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으나 수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망가진 오메가.
태생적으로 오메가이긴 하나 베타나 다름없게 되었다. 알파 페로몬을 맡지도 못할 거고, 히트 사이클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럼 좋은 거 아니냐고 물으니, 공무원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쳤다. 몸이 성한 게 좋은 거지, 망가진 게 뭐가 좋아. 기어이 혼났다.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뭘까.
수민은 집 안을 가득 메운 열기에 눌리고 홀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철컥.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수민은 신발을 벗었다.
집은 수민의 집과 비슷했다. 그래도 방문이 다 닫혀 있어 어디에 인혁이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수민은 냄새에 이끌려 문 앞에 섰다. 그 문 안에서, 인혁의 존재가 더없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문손잡이를 잡자,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런 류의 예감은 늘 틀리는 일이 없었다. 이전에 여러 번, 이 감각에 의지해 여러 번 목숨을 구했다. 그래서 수민은 제 감각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현관을 열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한 냄새가 쏟아졌다. 수민은 용케 비틀거리지 않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무척 괴로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수민은 공익 시절에 들은 10시간짜리 성교육이 떠올렸다. 알파들이 정기적으로 겪는다는 발정기, 고상하게 러트 사이클이라 부르는 그것. 인혁이 지금 그 상태라는 것을.
수민은 괴로워하는 인혁을 보며 배 속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열기를 느꼈다. 그것을 무어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이 열기가, 지금 이 상황에 방해가 되진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베타에 가깝다고는 하나 오메가는 오메가. 망가진 오메가라고는 하나 아무튼 오메가는 오메가, 라고 했으니까.
“…….”
수민은 손으로 아랫배를 눌러 보았다.
인혁과 성교하게 될지 모른다. 아니, 성교해야 한다. 성교하게 될 것이다.
인혁이 아프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먹었다. 죽과 케이블 타이를 살 때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결국 그 승원이라는 아이와 비슷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게 불안했지만,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새삼 지난 기억에 발목이 붙들리는 걸까.
많이 아프겠지.
끔찍하고,
소름 돋고,
물컹거리고.
그들은, 선생님은, 그것을 ‘속죄 의식’이라고 불렀다.
속죄 의식은 성교나 다름없었다. 아니, 성교였다. 선생님의 혀가 몸을 핥을 때마다 개미 떼가 살갗을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라고 해서 내밀어 축축한 게 닿으면, 구역질이 났다. 다리를 벌리면 바로 침입해 들어오는 성기는, 늘 수민을 아프게 했다.
인혁을 가지기 위해, 인혁과 그런 걸 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인혁과 함께한 기억은 늘 좋은 것뿐인데. 그 좋은 것 위에 더러운 것, 아픈 것을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 했다. 그래야만 계속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인혁이 절 버릴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까.
드라마에서 실수로 하룻밤을 보낸 주인공들은 서로를 피하고 싫어하다가도 결국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민은 그런 행운이 제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
서 여사가 말했다.
‘물론, 오메가랑 자놓고 책임 안 지는 알파 새끼들은 죽어 마땅하고. 책임지기 싫으면 좆을, 아, 미안해요, 수민 학생. 아무튼,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지. 함부로 놀렸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고. 그게 상식이고 도리야. 수민 학생도 잘 기억해 놔요, 책임감 없는 사람은 절대 만나면 안 돼.’
‘그럼, 소장님 같은 사람을 만나면 되나요?’
‘뭐, 그렇지. 책임감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니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까. 어떤 이유에서건 한 번 성교한 사람을 내치거나 멀리 보내지 않을 것이다. 끔찍해하고 귀찮아하면서도, 곁에 있게는 해주겠지.
대신 더는 아껴 주지 않겠지.
어쩔 수 없이 곁에 두겠지만 더는 상냥하게 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며 챙겨 주겠지만, 같이 밥을 먹어 주진 않을 것이다. 먼저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게 싫었지만, 지금 멈춰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했다.
모든 계산을 끝내고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러니 물러설 수 없다. 감당해 내야 했다.
“소장님.”
수민이 인혁을 불렀다. 인혁이 고개를 들어 수민을 보았다.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아니, 평소와 같으나 더 지독했다. 버석하게 메마른 사막 같은 눈동자에 열기가 일렁였다. 지독한 우기일까, 건기일까.
그 눈이 수민의 몸을 훑었다. 쇼핑백을 든 손을 집요하게 노려보더니 팔을 훑어 올라갔다. 어깨를 거쳐, 목과 턱 입. 그리고 눈. 눈길이 닿는 곳마다 화상을 입은 듯 화끈해졌다.
“…….”
인혁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입을 열었으나 다시 닫았다. 미간을 찌푸렸다.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려 턱에 맺혔다. 수민은 그걸 핥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혁은 손에 약통을 들고 있었다. 내내 생명줄처럼 붙잡고 있었을 그것을 이제야 놓쳤다. 데굴데굴 구른 약통이 수민의 발치에 멈췄다. 뚜껑이 열려 알약이 바닥에 흩어졌다.
“…….”
수민은 그걸 발로 툭, 찼다. 약통이 책상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뺨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수민은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안에 든 케이블 타이를 꺼내야 한다는 걸 까먹고, 빈손으로 인혁에게 좀 더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상냥함을 흉내 내고 싶었다. 인혁이 잠시라도 긴장을 놓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인혁은 수민이 다가갈수록 어깨를 굳히며 긴장했다.
짜증 날 만한 일이었다. 경계를 풀지 않으면, 제압할 수 없고. 제압할 수 없으면 계획했던 일을 성공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수민은, 바짝 긴장한 인혁이 마음에 들었다. 긴장을 풀고 순순히 곁을 허락해 주는 것보다 더.
좋았다.
왜일까. 이 사람은 날 버렸던 사람인데. 언제든 또 버릴 수 있는 사람인데.
수민은 두 팔을 벌려 인혁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인혁의 몸이 굳었다.
수민은 인혁이 제게 해주었듯이 너른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길을 따라 인혁이 움찔, 긴장했다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커다란 맹수를 품에 안고 제멋대로 어르는 기분이었다.
“필요한 거죠? 오메가가.”
수민이 속삭였다.
기다렸다는 듯 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뜨겁고 젖은 손이 허리를 더듬었다.
“…….”
수민은 절 마음대로 주물러 대며 거칠게 다룰 손길을 예상하고 눈을 감았다.
각오했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는 거부감을 아주 지워 낼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참아 낼 뿐이었다. 지금 절 만지는 사람이 선생님이 아니라 인혁이라는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인혁의 손길은 우악스럽지도 거칠지도 않았다. 오직 수민이 여기에 있는 걸 확인하는 게 목적이라는 듯 조심스럽게 허리를 더듬었다. 그럼에도 손이 닿는 자리마다 화끈거렸다.
“하아.”
인혁은 수민의 목과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셔츠를 밀어 내고, 맨살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아.”
수민은 몸을 떨었다. 버티기 위해 인혁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인혁 역시 파고들 듯 얼굴을 묻고 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인혁의 손이 달래듯 수민의 등을 도닥였다. 수민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손길을 느끼고, 눈시울이 화끈해졌다. 수민은 매달리듯 인혁에게 기댔다.
“…….”
“…….”
두 사람은 그대로 있었다. 인혁은 뭔가 더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수민의 허리를 쓸어내리고 토닥여 주고, 목에 코를 묻고 심호흡할 뿐.
수민은 그를 끌어안았으나 그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되었다. 수민은 제가 끌어안은 인혁의 머리에 뺨을 대고 느리게 숨을 쉬었다.
인혁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인혁. 그걸 깨닫자 굳었던 몸이 풀렸다. 여전히 인혁의 손이 맨살, 허리를 만지고 있으나 역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나른하고, 몸이 따뜻한 담요에 감싸져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기분.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수민은 인혁의 머리카락에 뺨을 비비며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
인혁이 수민을 밀쳐 냈다.
불시에 당한 일이라 버틸 수 없었다. 수민은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인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망한 눈을 들어 수민을, 그리고 방금까지 수민의 맨살을 만지고 있던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소장님.”
“너, 너 여길 어떻게 알고, 읏.”
인혁이 말하다 말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소장님.”
“가까이 오지 마!”
인혁이 소리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래봤자 조금 몸을 젖히는 것에 불과했지만, 거부 의사는 분명히 드러났다.
놀랍게도 수민은 상처받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너, 도대체 어떻게 여길, 무슨 정신으로…… 아니, 아니. 그건 나중에, 나중 문제고. 너…… 여기서 나가. 얼른.”
인혁이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거렸다. 정신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약통을 찾는 것 같은데 그 약통은 저 아래로 굴러가 버린 지 오래였다.
인혁은 수민의 발치에 깔린 알약들을 발견하고는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의 손에 약이 닿기 전, 수민은 알약을 밟아 으스러뜨렸다.
“오수민!”
인혁이 고개를 들었다. 수민은 그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 보며, 제 목을 매만졌다. 방금 전까지 인혁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였다. 아직도 화끈거렸다.
인혁도 그걸 기억했는지 얼굴이 벌게졌다. 수치스러운 걸까, 아니면 계속 탐나는 걸까.
“너, 얼른 나가. 안 나가고 뭐 해.”
인혁이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수민은 목울대에서 울리는 쉰 목소리가 무척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민은 손을 내려 제 옷의 단추를 하나둘 푸르기 시작했다. 인혁이 사준 옷은 다 좋은데, 단추가 너무 많았다. 옷의 단추를 반쯤 끌렀을 때였다.
“너, 뭐 하는 거야. 오수민!”
멍하니 바라보던 인혁이 언성을 높였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직접 단추를 도로 잠가 주었을 것이다. 뒷목을 잡아 번쩍 들어서라도 집 밖으로 내쫓았을 것이고. 코앞에서 문을 쾅 닫으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인혁은 그럴 수 없었다. 수민에게 손대지 않으려고, 손을 등 뒤로 숨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인혁은 이를 악물고 몸속 열기를 눌렀다. 수민은 그런 인혁이 불쌍하고 안됐다고 생각하며 마지막 단추를 끌렀다.
정사이즈였으나 수민에겐 조금 컸던 셔츠가 스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
인혁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수민이 바지 벨트를 풀었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시각이 닫히자 청각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졌다.
“너!”
인혁이 이를 악물고 다시 눈을 떴다. 동시에 수민이 다가갔다. 인혁은 제게 안기려 드는 수민을 밀어 내고, 흘러내리는 바지를 붙잡았다.
그대로 수민을 아주 밀어 내고 방문이라도 잠그는 게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혁은 거기까지 생각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수민에게 옷을 도로 입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인혁은 수민의 바지 버클을 잠그려고 애썼다.
자꾸만 손이 헛돌았다.
“빌어먹을!”
“소장님.”
수민이 인혁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
인혁이 눈을 부릅떴다.
고작 입술만 맞댔을 뿐인데, 달달한 향이 입 안에 확 퍼졌다. 너무 달아 눈이 뿌예졌다.
“하지 마.”
인혁은 수민을 밀쳤다. 힘 조절할 틈이 없었다. 수민은 바로 밀려났다. 허벅지까지 흘러내린 바지 때문에 균형을 못 잡고 비틀대다가 책상에 등을 부딪쳤다.
“윽.”
수민이 불쌍하게 몸을 웅크리고 신음했다.
“미안, 괜찮니? 다쳤어?”
인혁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놀라며 수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웅크린 수민을 보며 어찌할 바 몰라 하다가 결국, 수민을 안아 들었다.
“수민아, 많이 아파?”
수민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 말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소, 장님.”
“그래, 수민아.”
“…….”
수민은 인혁에게 기대 축 늘어지는가 싶더니, 두 팔로 인혁의 목을 끌어안고 다시 달라붙었다. 입을 맞추려 했다.
“오수민!”
인혁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수민을 밀어 내려 했지만, 이번엔 쉽지 않았다. 수민은 악착같이 달려들어 인혁에게 매달리고 입맞춤을 갈구했다.
인혁의 목에, 턱에, 귀에, 뺨에 수민의 입술이 닿았다.
“수민아, 그만. 그만!”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던 인혁은 침대에 다리가 걸려 뒤로 넘어졌다.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함께 엎어진 수민이 바로 인혁의 위에 올라타 인혁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이게, 무슨. 너, 안, 비켜?”
“내가 망가진 오메가라서, 안 되는 거예요?”
“……뭐?”
인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내가 망가진 오메가라서, 그래서 밀어 내는 거예요?”
수민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다시 말했다.
“그게 무슨 말…….”
인혁은 ‘망가진’이란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망가졌다고? 뭐가? 그럼 지금,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이 향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수민의 숨이 코와 입술에 닿았다. 달달한 향이 함께 닿았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인혁은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건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냐. 일단, 일단 내려와. 놔, 수민아!”
“성교, 해야 되잖아요.”
수민이 엉덩이를 인혁의 하체에 문질렀다. 더없이 어색하고, 설익은 행동이었다. 고작 그 몸짓에 인혁은 흥분했다. 성기가 바로 발기했다.
하아. 인혁은 더운 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튕겼다. 저도 모르게 수민의 엉덩이에 하체를 비볐다. 천 너머로 느껴지는 그 말랑한 감촉만으로도 눈앞에서 별이 튀었다.
“읏…….”
인혁이 움직이자 어색하게나마 움직이던 수민의 몸이 굳었다.
왜, 어째서? 인혁은 그 설익은 행위에 목이 말라 입맛을 다시며 수민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수민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잠깐 정신이 나가 허리를 쳐올렸던 짓을 반성하기 전에, 인혁은 다른 이유로 충격을 받았다.
“너, 왜…….”
수민은 겁에 질려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져서는.
“소장님.”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처롭게 그를 불렀다. 살려 달라는 듯 인혁의 젖은 셔츠를 꽉 움켜쥐고. 또 어설프게 엉덩이로 성기를 문질러 댔다.
왜 너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굴면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수민아. 그만, 그만.”
이렇게 겁에 질린 아이를 데리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인혁은 죄책감을 느꼈다.
“아니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수민은 일어나려는 인혁을 눌러 다시 눕히고, 더 강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인혁은 수민을 밀어 낼 생각도 못 한 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혁은 제 아랫배에 닿은 수민의 사타구니가 전혀 뜨겁지도, 단단하지도 않다는 걸 알아챘다. 수민은 발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달콤한 향을 내는 오메가면서. 러트 온 알파의 침실에 제 발로 찾아와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흠뻑 뒤집어썼으면서.
전혀 원하지 않는 주제에, 자신 역시 발정 났다는 듯 굴고 있었다.
“수민아.”
“필요, 하잖아요. 오메가. 저도, 오메가예요.”
수민이 인혁의 손을 잡아끌어 제 허리에 얹었다. 아까처럼 만지라며 허리에 인혁의 손을 문질러 댔다.
“…….”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안쓰러워서. 불쌍해서. 사랑스러워서.
멈춰야 하는 걸 알면서도, 수민의 엉덩이에 눌린 성기가 커졌다.
“소장님.”
수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쁘다는 듯 웃었다. 허리에 닿은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수민아.”
인혁이 수민의 뺨에 손을 댔다.
“네.”
수민은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말랑하고, 따뜻했다. 겁에 질렸으면서, 순순히 따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안 돼. 하면 안 돼. 이렇게 겁먹은 아이를 건드리면 안 돼. 안 되는데.
……내가, 상냥하게 대해 주면 되잖아.
이렇게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품에 안고 얼러 주고, 잔뜩 키스해 주고, 빨아 주고, 핥아 주고. 그래서 다시는 이런 표정 못 짓게 하면 되는 거잖아.
“수민아.”
인혁은 몸을 일으켰다.
“소장님, 안 돼요.”
“아니, 아니야. 수민아.”
수민이 다급히 인혁의 가슴을 눌렀으나, 이번엔 인혁도 가만 당해 주지 않았다. 인혁은 수민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 잡아당겼다.
“…….”
수민이 뭔가 다른 점을 느꼈는지 팔에서 힘을 뺐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인혁은 수민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그냥 입만 맞대는 게 아니라, 입술을 가르고 혀를 넣었다. 놀라 굳은 혀를 잡아당겨 빨며 몸을 뒤집었다.
풀썩. 매트리스가 흔들렸다.
“으, 읍.”
침대에 누운 수민이 바르작댔다. 인혁은 몸으로 수민을 짓누르며 더 깊게 입 맞췄다. 마른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손으로, 계속 떨고 있는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데. 어떻게 돌봤는데. 계속 곁에 끼고 보살폈는데. 네가 왜, 나한테 그런 얼굴을 해.
이성이 끊겼다.
***
수민은 제 입 안에 남의 혀가 들어와 헤집어 대는 게 어색했다. 혀를 얽어도 금방 도망갔다. 인혁은 그 어설픈 행동에 애가 탔다.
“혀, 더 내밀어 봐. 수민아.”
쪽, 쪽. 수민의 입술을 빨며 달랬다.
수민은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굴렸다. 인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보다는 훨씬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어서, 기분 좋게 해줄게.”
인혁이 수민의 뺨과 코에 입을 맞췄다.
“착하지. 응?”
“……네, 읏.”
수민이 망설이다가 살짝 혀를 내밀었다. 인혁은 수민이 겁먹지 않도록 천천히 입술을 겹치고, 그 조그만 혀를 빨았다.
촉촉하고 말랑한 살덩이가 달았다. 입 안이 얼얼해질 것 같았다. 인혁은 수민의 혀를 제 입 안으로 가져가 정신없이 물고 빨았다.
“으읍, 읍.”
수민이 주먹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인혁은 손으로 수민의 턱을 잡고 입술을 뗐다.
수민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숨도 달았다.
“이번엔 혀를 안쪽까지 깊게 넣어 줄 테니까. 맛있게 빨아 봐.”
“…….”
“맛없으면 깨물어도 돼.”
인혁이 다시 입을 맞추고 혀를 밀어 넣었다.
두툼한 혀가 밀려 들어오자 수민이 눈을 꼭 감았다.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두 팔로 인혁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인혁은 그런 수민이 사랑스러웠다.
인혁은 수민의 입 속을 구석구석 핥았다. 깊숙이 입천장을 핥아 주자 수민이 목울대를 울렸다. 머리가 돌아 버릴 정도로 귀여웠다. 이미 돌아 버렸지만.
수민이 어설프게나마 혀를 섞고 비비게 되었을 즈음, 인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수민의 몸을 만졌다.
손이 허리에 닿았을 뿐인데. 키스로 흐물흐물해져 있던 몸이 다시금 굳었다.
“무서워하지 마.”
“소, 장님.”
“응. 괜찮아. 괜찮으니까.”
인혁은 계속 입 맞추며 수민의 마른 허리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잠깐 닿았을 때도 느꼈었지만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디든 뇌가 녹아 버릴 정도로 달 것 같았다.
수민이 천천히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다. 인혁은 턱을 내려가며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고 다시 목에 얼굴을 묻었다. 수민이 내는 향이 미치도록 달았다. 또한 미치도록 미약했다.
“아, 으, 소장니임.”
수민이 잘게 몸을 떨며 인혁의 어깨를 손끝으로 긁었다.
인혁은 수민의 가슴에 입을 맞추다 유두를 물었다. 빨자 수민이 또 몸을 굳혔다. 유두 주변에 쪽쪽, 입을 맞추고 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절대 널 다치게 하지 않아. 상냥하게, 기분 좋게 해줄게.
수민이 애써 긴장을 풀면 인혁은 또 조금씩 수민을 맛보았다. 그 과정을 수차례 반복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달고 맛있는 걸 한 번에 집어삼키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핥고 빨아서 녹여 먹어야지.
어떻게 손에 넣은 건데.
인혁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바지를 벗기고 양말을 벗겼다. 한 손에 들어오는 발을 간지럽히며, 발등과 무릎에 입을 맞추었다. 수민이 간지럽다며 웃었다. 듣기 좋았다.
수민이 손을 뻗어 인혁의 셔츠를 벗기려고 했다. 인혁은 수민이 제 바지 버클에 손을 대다 몇 번이나 멈추고 머뭇거려도 기다려 주었다.
자신이 벗을 수도 있으나 그 이후의 상황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참았다. 수민이 겁먹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수민은 저를 배려해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인혁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제 품에 들어온 오메가를 놓치기 싫어 안달 난 개새끼 알파의 얄팍한 수작질이었다.
인혁은 이미 이 오메가 없이 이틀을 버텼다. 그 끔찍한 나날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앞으로는 그 이틀에 비할 바 아닌 천국이 펼쳐질 터였다.
그러니 발정 난 개새끼는 제 오메가를 완전히 집어삼키려고 꾀어내느라 공들이는 중이었다.
인혁은 수민의 도움을 받아 바지와 팬츠를 벗었다. 갇혀 있었던 성기가 튕기듯 튀어나왔다.
“어…….”
수민은 좀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거기서 좀 더 기다렸어야 했는데. 인혁은 참지 못하고 수민의 손을 제 성기에 가져다 댔다. 수민이 놀라 손을 움츠렸다.
“왜, 이것도 무서워?”
쪽, 쪽. 귓가에 입 맞추며 인혁이 속삭였다.
“아, 아니. 너무 커서…….”
“칭찬 고맙네.”
“칭찬이, 아니라 사실을……읏.”
인혁은 수민의 목덜미를 빨며 수민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것이 한 손에 꼭 잡혔다. 반쯤 일어서 있었다.
“만져 줄래?”
인혁이 수민에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도망치는 혀를 빨아 비비며 수민의 성기를 손으로 흔들었다. 수민이 흐으, 우는 소리를 내며 인혁의 성기를 두 손으로 쥐어흔들었다.
“앗, 아!”
인혁이 수민의 것을 세게 흔들자 수민이 인혁의 것을 놓쳤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인혁은 손끝으로 귀두를 누르고 비벼 끝까지 발기시켰다.
“아흣, 읏, 놔, 놔주세요.”
“왜. 수민아, 기분 좋잖아.”
“으, 응, 그러니까, 놔, 놔주, 아, 으, 안 돼.”
수민이 허리를 뒤틀며 인혁을 끌어안았다.
얼마 못 가 수민이 인혁의 손안에서 사정했다. 수민은 허리를 크게 휘며 몸을 떨다 축 늘어졌다.
인혁은 다시 말랑해진 것을 두어 번 더 흔들었다.
“제발, 그만…….”
수민이 우는 소리를 내자 그제야 놔주었다. 그리곤 손에 묻은 걸 혀로 핥았다. 그걸 본 수민의 눈이 커졌다.
“왜, 왜…….”
“다네.”
“그럴 리, 없는데…….”
“아냐, 달아. 수민이, 넌 다 달아.”
처음부터 달다고 생각했다
수민에게선 막 딴 자두 향이 났다. 함빡 물기 머금은, 살짝만 깨물어도 과즙이 줄줄 흐르는, 달고 새콤한, 한입에 다 넣고 깨물고 빨고 싶어 만드는.
무표정한 얼굴에 메마른 사막 같은 눈을 가진 아이가 너무 달큼한 향을 풍기고 있어서, 그래서 자꾸 눈이 갔다. 그 향처럼 환하게 웃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자꾸 손이 가고 마음이 쓰였다. 곁에 두고 아껴 주고 싶었다. 보호해 주고 싶었다.
이렇게 다니까.
‘그렇게 밀어 냈는데.’
기어이 품에 안기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한입에 집어삼킬 수밖에.
인혁은 보란 듯이 혀로 핥고는 수민에게 입 맞췄다. 수민은 당연하게 입을 벌리고 혀를 얽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닌데…….”
수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맛없어?”
“네.”
수민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상하네.”
인혁은 웃으며 수민의 입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수민은 기다렸다는 듯 인혁에게 달라붙었다.
땀에 젖은 살갗이 부딪쳤다. 맨살이 닿아도 수민은 이제 겁먹거나 굳지 않았다.
수민은 먼저 매달려 입 주변에 쪽쪽 입 맞췄다. 손을 뻗어 인혁의 어깨와 팔을 살짝살짝 만져 보았다.
인혁은 다시 혀를 얽었다. 수민은 역시나 맛이 이상하다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나만 먹어야겠네.”
인혁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네? 아, 자, 잠깐!”
수민이 말릴 새도 없이 수민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인혁은 방금 사정한 수민의 성기를 입 안에 넣고 굴렸다.
“아읏, 흣. 이, 이건…… 하지, 마세요. 아, 안, 돼.”
수민이 인혁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비명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왜 안 돼.”
인혁은 수민의 성기를 입 밖으로 빼내 혀로 길게 핥으며 물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다음 행동이 바뀔 여지가 있었건만.
“차라리 제, 제가 해드릴, 아!”
수민이 그 기회를 날려 버렸다.
인혁이 다시 수민의 성기를 입 안으로 넣었다.
“해주긴, 멀 해저.”
넌 얌전히 나한테 먹히기만 하면 돼.
인혁은 수민의 성기를 빨며 두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수민을 놀리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성기에서도 자두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인혁은 문득 이 귀여운 걸 깨물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은 건 성기만이 아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다 씹어 삼키고 싶었다.
당장은 입에 넣고 빤 성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아! 아, 읏.”
살짝 이로 살 기둥을 긁자 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민은 저도 모르게 허리 짓 하며 인혁의 입 안에 제 성기를 박아 넣었다 뺐다. 곧 수민이 허리를 떨며 사정했다.
놀란 수민이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도 제 성기를 물고 있는 인혁의 얼굴을 밀어 냈다.
“죄, 죄송, 그, 그러니까…….”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눈가에 물기가 그렁그렁 맺혀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라니.
“우리 수민이,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인혁은 성기를 쭉 빨며 수민을 올려다보았다.
“…….”
수민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 바람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걸 받아먹지 못한 게 아쉬웠다. 어쩔 수 없지,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일단 지금은 수민의 아랫도리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인혁은 다시 수민의 성기를 빨았다.
“읏, 그, 그만!”
수민이 인혁의 머리를 감싸 안고 신음했다. 인혁은 발버둥 치는 수민의 두 다리를 꽉 잡고 수민의 귀두에 입 맞췄다. 쪽.
“기분 좋게 해준다고 했잖아, 수민아. 내가.”
눈꼬리를 휘며 기분 좋게 웃는 인혁의 얼굴은, 제정신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
인혁은 수민을 입으로만 세 번 사정시킨 후 정액을 모두 삼켰다. 그 뒤 물로 입을 헹군 후 탈진한 듯 헐떡대는 수민에게도 물을 먹여 주었다. 잔을 입에 대주었지만 제대로 삼키지 못하자 입으로 먹여 주었다. 수민은 꼴깍꼴깍 잘 받아먹었다.
인혁은 수민을 편하게 눕히고, 천천히 수민의 몸을 맛봤다. 오랜 전희와 잇따른 사정으로 축 늘어진 몸은 이제 인혁이 어딜 만져도 긴장하거나 굳지 않았다. 인혁은 마음껏 수민의 온몸을 핥고 빨았다.
“흣, 소, 장님. 뜨거, 워요. 너무 뜨거워.”
수민은 바르작대며 발끝을 오므렸다. 그게 귀여워서 발가락까지 입에 넣어 빨았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혀를 넣고 비비자 수민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빨개져 우는 게 예뻐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미안, 수민아. 더 기분 좋게 해줘야 하는데, 잠깐만.”
인혁은 수민의 두 다리를 모아 어깨에 걸치고, 다리 사이에 제 성기를 끼워 넣었다. 인혁의 성기가 하얀 허벅지 틈에 끼어 삐죽 튀어나왔다.
“힉.”
수민은 그걸 보고 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병아리이고 자두인 줄 알았더니 토끼이기도 한 것 같았다.
이렇게 귀여워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인혁은 걱정됐다. 너무 걱정돼서, 답을 금방 떠올렸다. 어쩔 수 없네. 내가 품어야지. 밖에 내돌리지 말고, 여기서 나만 기다리고, 나만 보게 만들어야지. 밖은 위험하니까. 위험한 것 투성이니까.
이미 한 번,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소중한 것은 절대 밖에 내보내면 안 된다.
“한 번만 빼고, 더 기분 좋게 해줄게.”
인혁은 수민의 발바닥에 입 맞추며 상냥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수민이 놀라지 않게, 천천히 허벅지에 비벼 일단 급한 불을 끄려고 했는데.
“그, 그냥 하셔도 돼요.”
수민이 말했다.
“뭐?”
인혁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괜찮아요.”
“뭐가, 수민아?”
“제 구멍이요. 그냥 바로 넣으셔도 돼요.”
“…….”
인혁은 수민이 하는 말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맨살이 닿기만 해도 겁먹고 긴장하던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그런 말을 하는 주제에 수민의 얼굴은 다시 하얘졌다. 겨우 빨갛게 익혀 놓았더니.
인혁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이 아이에게 그딴 말을 가르친 걸까. 그딴 짓을 한 걸까. 이런 얼굴을 하도록.
“수민아, 그런 말은 그런 얼굴로 하는 게 아니야.”
인혁이 손을 뻗어 수민의 얼굴을 문질렀다. 수민은 얌전히 그 손에 제 뺨을 가져다 댔다.
“소장님.”
“응, 그래.”
“저 정말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인혁은 어깨에 얹은 수민의 발목을 깨물고 입 맞췄다.
“말했잖아, 기분 좋게 해준다고.”
혀로 길게 발목을 핥고 발꿈치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빨리요, 저 괜찮으니까…… 어서, 어서요…….”
수민이 자꾸 보챘다.
“아니, 안 괜찮다니까.”
인혁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수민의 말대로,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벌리고 성기를 처박고 싶었다. 겁에 질려 울든 말든, 얼굴이 하얗게 질리든 말든. 구멍이 찢어져 피가 나면 뭐, 어떻단 말인가. 이미 제 품 안으로 떨어진 오메가인데.
이 순한 아이는, 아프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끝까지 저를 밀어 내지 않을 것이다.
그 모습은 얼마나 어여쁠까. 꼴리겠지. 상상만 해도 지금 당장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아이한테는.
인혁은 손으로 엉덩이를 감싸 쥐고, 그 틈을 비집고 구멍 입구를 만져 보았다. 제 말대로 바로 삽입할 줄 알았는지 움찔, 떠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서 그냥 해도 된다니. 그런데도 그냥 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니. 인혁은 조소했다.
구멍은 뻑뻑했다. 분명 오메가인데, 이렇게 달큼한 향을 내고 있는데. 인혁의 페로몬에 익사할 듯 잠겨서도 뒤가 젖지 않았다.
인혁은 페로몬을 좀 더 흘렸다. 수민이 흡, 숨을 멈췄다. 저런다고 못 맡게 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구멍은 흐물해지지 않았다.
이래서야, 거부당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런 몸을 하고선 그런 말을 하다니.
인혁은 속상했다.
얼마나 더 달래고 꼬드겨야 뒤로 애액을 질질 흘리며 절 받아 낼까. 괜찮으니 빨리 들어오라는 말은 그런 상황에서 듣고 싶었다.
마음이 조급해졌으나 다시 한번 인내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그동안 이 오메가는, 절대 도망치지 못할 터였다.
“수민아, 정말 괜찮아?”
“네, 읏!”
“그럼, 버텨 봐. 정말, 괜찮은지.”
인혁은 수민의 두 다리를 한 팔로 안은 뒤 허리를 뒤로 뺐다 한 번에 박아 올렸다. 수민의 몸이 덜컥, 흔들렸다.
허벅지 사이에 발기한 성기가 비벼졌다.
“아!”
“하아.”
두 사람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샜다.
인혁은 좀 더 빨리 허리를 치댔다.
“아, 으, 이, 이거, 이상.”
수민이 양손으로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갈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몸이 덜컥 흔들리며 밀렸다.
“이상한 거 아냐. 기분, 좋은 거.”
인혁이 밀려 올라간 수민의 몸을 잡아당기며, 더 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
수민이 허벅지를 꼬았다.
“읏.”
인혁은, 낮게 신음했다. 여린 살이 비벼지며 조여 대는 게, 터질 듯 발기한 성기엔 기가 막힌 자극이었다.
“하, 미치, 겠네.”
인혁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수민은 계속 다리를 꼬며 신음했다.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인혁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흔들리던 수민의 성기가 또 반쯤 일어섰다. 인혁이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두 성기가 자꾸 부딪쳤다.
“흑, 윽, 이, 상해, 요, 이거.”
“이상한 거 아니고 기분 좋은 거.”
인혁은 말을 고쳐 주며 더 세게 성기를 박아 댔다. 탁탁, 쳐올릴 때마다 고환이 수민의 엉덩이에 부딪혀 짓눌렸다. 그 감각도 말 못 하게 짜릿했다.
인혁은 수민의 손을 모아 두 성기를 잡도록 했다. 퍽퍽 찔러 올릴 때마다 수민의 손안에서 성기가 서로 부딪쳤다.
“읏, 으, 으…….”
수민은 발가락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인혁은 흥분해 수민의 몸을 거의 반으로 접을 기세로 박아 올렸다.
“아, 소, 소장님…… 으!”
수민이 먼저 사정했다. 곧 인혁도 수민의 배 위에 정액을 뿌렸다. 수민의 것보다 훨씬 진하고 양이 많았다.
“하, 시발.”
인혁은 머리를 뚫고 천장까지 치솟는 듯한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계속 허리를 쳐올렸다. 흑, 흐읏, 흑. 수민은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흐느꼈다.
“기분 좋아? 수민아?”
인혁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수민의 발목을 마구 깨물며 물었다.
“이, 이상, 이런 거…….”
수민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기분 안 좋아?”
인혁이 수민의 성기를 손으로 움켜쥐고 주물렀다.
“아, 으, 아직, 만지, 아, 안 돼, 요.”
수민이 인혁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인혁은 손등을 꼬집는 힘없는 투정을 즐기며 느긋하게 몇 번 더 허리 짓 했다. 인혁의 것은 한 번 사정하고도 여전히 단단했다.
수민의 발목은 잇자국과 키스 마크로 얼룩덜룩했다. 족쇄를 두른 것처럼 보여서, 인혁은 퍽 만족스러웠다. 정말 족쇄여서, 어디 도망가지 못하고 잡혀가지도 않고 계속 여기에 묶어 둘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인혁이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고 수민의 다리를 벌렸다. 수민의 배는 두 사람이 싸지른 정액으로 흥건하였다.
정액은 가슴, 턱에까지 튀어 있었다.
조금 진정된 듯 수민이 인혁을 올려다보다 혀를 내밀었다. 인혁이 그 빨간 살덩이를 쳐다만 보자, 수민은 무심코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정액이 입술에까지 한 방울 튀어 있었다.
“젠장.”
인혁은 달려들 듯 입 맞췄다.
“흡, 읏, 소, 자, 흐.”
“하아, 수민아.”
목구멍에 닿을 정도로 혀를 찔러 넣고 수민의 입 안을 남김없이 핥았다. 쪽, 쪼옥, 쪽. 수민은 애처로울 정도로 연약하게 인혁의 혀를 핥았다. 인혁은 한 손으로 수민의 턱을 잡고, 혀를 넘겨주었다. 수민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부드럽게 빨고 비벼 주었다.
“흐읏.”
수민의 눈가가 붉어졌다.
“우, 으응, 소, 자, 니이.”
“하아, 응, 응. 조금만, 더 입 벌려 봐. 응?”
인혁이 입 맞추며 손으로 수민의 배를 문질렀다. 정액이 수민의 배에 번졌다. 수민의 몸에 인혁의 향이 한층 더 깊게 뱄다.
수민의 가슴을 문지르고, 몸을 비볐다. 하체끼리 맞닿아 비벼지는 감촉에 수민이 흐읏, 흑, 우는 듯한 신음을 냈다. 그 신음을 모조리 받아먹고, 인혁은 수민의 몸을 뒤집었다.
“소, 장님?”
수민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인혁은 가볍게 입 맞추고, 어깨부터 등, 허리, 엉덩이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엉덩이를 벌렸다. 아직도 뻑뻑한 구멍에 혀를 가져다 댔다.
“소장님!”
수민이 후들거리는 두 팔을 들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만있어.”
인혁이 노크하듯 혀끝으로 구멍 입구를 두드리다 혀를 밀어 넣었다.
“흣.”
수민이 다시 고꾸라졌다.
알아서 젖지 않는다면 적셔 주면 될 일이었다.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기분 좋아서 엉엉 울고, 제발 넣어 달라고 빌 때까지.
인혁은 수민의 뒤를 잔뜩 빨아 주었다.
“그, 그만, 이건, 이건, 소장님, 제발.”
수민이 어느 때보다 당황하며, 발버둥 쳤다. 도망치려고 앞으로 기어가기까지 했다. 그래 봤자 인혁이 잡아당기면 다시 주르륵 밀려 내려왔지만.
“기분 좋게 해준다니까.”
인혁은 일부로 질척한 소리를 내며 더 안쪽까지 혀를 밀어 넣었다.
“아, 읏, 마, 말도 안 돼. 흐윽, 흑. 이건 아니야. 이러면 안 돼요.”
“괜찮아, 착하지. 숨, 쉬고.”
인혁은 말로는 괜찮다고 달래 주곤 제법 축축해진 뒤에 혀와 손가락을 동시에 집어넣었다.
“아……!”
수민의 허리가 굳었다. 인혁은 수민의 허리를 손으로 누르고,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혀가 닿지 못한 곳에 손가락이 닿았다. 뻑뻑했다. 뜨겁고 좁았다. 이렇게 좁아서 날 어떻게 받아먹으려고. 그냥 해도 된다던 수민의 말이 떠올라 실소가 나왔다.
“하으…….”
수민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인혁은 수민의 앞쪽을 만져 보았다. 성기가 제법 단단해져 있었다.
인혁은 계속 구멍을 핥으며 앞쪽을 만져 주었다.
“아… 아!”
수민은 얼마 안 가 사정하며 완전히 축 늘어졌다.
인혁은 제가 하도 주물러 발갛게 변한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정액 묻은 손으로 구멍을 헤집었다. 손가락 개수를 늘려갈 때마다 수민이 흐느꼈다.
인혁은 몸을 들어 수민의 위에 올라탔다. 한 손으로 제 몸을 지탱하며, 수민의 어깨와 목덜미에 입 맞췄다.
“소장님, 소장니임.”
수민이 끙끙댔다.
“응, 수민아.”
인혁이 이름을 불러 주면 수민은 몸을 이완시키려고 애썼다. 인혁은 그걸 알아채고 계속 수민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이제 해주시면 안 돼요?”
손가락 네 개로 구멍을 쑤시는데 수민이 눈물 가득한 눈으로 인혁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
“흐, 읍.”
인혁은 수민의 목을 감싸 입 맞추며 구멍을 쑤시던 손을 뺐다. 히끅. 너무 급했는지 수민이 놀라는 게 느껴졌다. 미안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혁은 수민의 뒤를 쑤시던 손으로 제 성기를 두어 번 문질렀다. 그것만으로도 갈 것 같았다.
“힘 빼고, 수민아. 아프면 말하고.”
인혁이 수민의 목덜미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네, 네…… 어서, 빨리요…… 아!”
인혁이 성기를 잡고 수민의 뒤에 찔러 넣었다.
씨발. 인혁은 하마터면 수민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뻔했다.
좋았다.
너무 좋았다.
그렇게 풀어 놨는데도, 수민의 구멍은 버겁다는 듯 입구에서부터 조여댔다. 공들여 적셔 놓아 그나마 이 정도로 매끄럽게 들어가는 것이었다. 뜨겁기는 얼마나 뜨거운지. 겨우 귀두만 넣었을 뿐인데 인혁은 바로 쌀 뻔했다.
“커, 왜 이렇게 커…….”
수민이 흐느꼈다.
“안 커, 수민아.”
“커요, 커……. 흐윽, 거짓말.”
수민이 숨 막혔다. 인혁이 수민의 목을 손으로 감싸 들었다. 그러면서도 삽입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인혁으로서는 너무도 천천히, 수민에게는 너무 벅차고 빠르게, 성기가 밀고 들어갔다. 반쯤 넣자 수민이 못하겠다며 허리를 들었다.
“이만큼만 넣어도, 되, 되지 않을까요?”
이 정도도 이미, 느낌상으로는 넣어본 적 없는 위치였다. 수민은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성기가 제 배 속을 뚫을까 봐 겁냈다. 그건 처음 성교를 마음먹었을 때, 고통이 무서워 겁에 질렸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겁이었다.
잔뜩 빨린 구멍이 간지러웠다.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쓸려 기분 좋긴 한데, 너무 컸다. 길어도 반밖에 안 들어왔다는데 이미 배 속이 꽉 찼다. 더 들어오면 목구멍까지 닿을 것 같았다.
인혁은 상냥하니까. 계속 아프지 않게, 기분 좋게 해주겠다고 말했으니까. 그 친절에 물든 수민은 도망치는 대신 인혁에게 매달렸다.
“이대로, 이대로 해요. 소장님.”
침대를 짚은 인혁의 팔에 매달려, 그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수민아.”
인혁이 고개를 숙여 수민의 뺨에 입 맞췄다. 다정한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안심됐다.
“절대 너 다치게 안 해. 응?”
“네…….”
“기분 좋게 해줄게.”
“네.”
수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힘 빼.”
“네…… 네?”
“힘주면 너만 힘들어.”
다정한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성기가 마저 박혔다.
“……아!”
수민이 입을 벌렸다. 인혁은 그 상태의 수민에게 입 맞추고 혀를 얽었다.
“흐, 흐으, 읍. 읏.”
수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인혁은 끝까지 따라 입을 맞추며,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박았다.
“그, 그…… 앗, 으!”
수민은 인혁의 키스를 뿌리치고,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자, 자…… 잠, 깐…… 흣, 으…… 아, 아, 이, 이거…….”
배 속에 꽉 들어찬 것이 버거워 헐떡댔다.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배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얇은 뱃가죽 위로 인혁의 성기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너, 너무해, 내가, 내가…….”
인혁의 미움을 받을 걸 각오하고 방 안에 들어선 것이었다. 어떤 고통을 각오하고서라도 인혁과 성교하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그새 인혁의 상냥함에 젖어 모든 걸 잊고, 배신감에 흐느꼈다.
“수민아, 하…… 수민아.”
인혁은 칭얼대는 수민이 못내 귀여워서, 당장 이대로 박아 대고 싶었다. 펑펑 울려서 저 없이는 안 될 몸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배 속에 성기 모양대로 길을 내고 싶었다. 잔뜩 박아 대서, 성기를 빼도 구멍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페로몬이 흉흉하게 일렁였다.
애처롭게 떨리는 수민의 몸에서 단 향이 새어 나왔다. 인혁은 군침을 삼키며 허리를 살짝 쳐올렸다.
“아, 읏…… 자, 잠깐만, 요…… 흐으…….”
수민이 놀라 몸을 퍼덕였다. 인혁은 수민을 씹어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아 내며 낮게 신음했다.
참아야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야 했다.
이제 막 삽입했는데. 버거워 우는 아이를 앞에 두고 제 욕심만 채우려 하다니. 안 될 말이었다. 그런 건 해도 나중에, 배 속이 길이 좀 난 다음에 해야지. 인혁은 수민의 마른 허리를 진득하게 바라보며 혀를 씹었다.
오랜 삽입에 두 사람의 몸에서 땀이 났다. 인혁의 몸에서 땀이 뚝뚝 흘러 수민의 어깨로, 등으로 떨어졌다.
“으, 흐으…….”
수민이 꿈틀댔다. 그마저도 자극이 된 듯했다. 가엾게도.
“많이 힘드니?”
인혁은 이제 와서 걱정된다는 듯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동안 수없이 쓰다듬어 주며 길들였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마저 수민은 그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네, 네에…….”
히끅. 잘게 딸꾹질까지 하며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 읏. 배, 안이, 너, 무, 꽉 차서…….”
수민이 아랫배를 두 손으로 감싸며 웅크렸다.
“하.”
인혁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이성을, 놓쳤다. 아니, 그게 정말 이성이었는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꾹꾹 누르고 있던 페로몬이 확 퍼졌다.
“흡. 왜, 왜…….”
수민이 그 냄새를 맡고, 어리둥절해하며 인혁을 돌아보았다.
“꽉, 찼어?”
“네.”
“그래서 싫어?”
“…….”
“싫어, 수민아? 뺄까?”
인혁이 정말 빼려는 듯 허리를 뒤로 물렸다.
“아, 아니. 흣.”
수민이 다급히 인혁의 팔을 붙잡았다.
“하, 해요, 저, 저 괜찮,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안 괜찮아도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야비하게 허락을 얻어 낸 알파가 제 밑에서 끙끙대는 오메가의 목덜미를 물었다.
“읏!”
수민이 허리를 휘었다. 인혁은 그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기분 좋게 해줄게, 수민아.”
그게 시작이었다. 인혁은 수민의 몸을 둘로 쪼개려는 듯 박아 대기 시작했다. 귀두가 구멍에 걸릴 정도로 뺐다가 한 번에 퍽, 박아 넣었다.
“윽! 읍!”
퍽퍽 쳐올릴 때마다 수민의 몸이 들썩였다.
“아, 흣, 읍…… 아, 너, 너무…… 흑, 아, 소, 소자, 소장님.”
수민이 팔다리를 버둥댔다.
“하, 수민아. 수민아.”
인혁은 수민의 허리를 으스러질 듯 붙잡았다.
“하읏!”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게 보였다. 아쉬웠다. 저걸 빨아야 하는데. 왜, 손이 두 개밖엔 안 되어서는. 입이 하나뿐이고, 목을 뒤로 돌릴 수 없을까. 목을 길게 늘일 수 없을까.
박고 있는데 더 박고 싶었다. 실컷 물고 빨았는데 더 씹고 핥고 싶었다.
얜 왜 이렇게 달아서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걸까.
더 만지고 싶어 미칠 거 같은데, 그나마 참을 수 있는 건 성기를 오물오물 맛있게도 씹어 대는 구멍 때문이었다. 그 구멍에 드디어 박고 있으니까.
지금 여기 집중해야 했다. 빨고 핥고, 씹는 건 나중에 또 하면 되니까.
깊숙이 찌를 때마다 안쪽 살이 경련하듯 오물대며 성기에 들러붙었다. 빠져나갈 땐 딸려 나갈 듯 뻑뻑하게 따라붙고, 다시 박아 올릴 땐 언제 박은 적 있었냐는 듯 조여 댔다.
수민의 안은 너무 좁고, 뜨겁고, 축축했다. 엉덩이의 말랑한 감촉마저 좋았다.
어떻게 이걸, 이걸, 참고 여태 견딘 걸까. 인혁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씨발, 고자가 아니고서야.
“읏.”
인혁이 수민의 안에 사정했다. 피임을 한다거나 밖에 사정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머릿속에 없었다. 좀 더 깊이, 가득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고환까지 구멍에 집어넣을 듯 깊게 박고는 정액을 쏟아 냈다.
“아, 아…….”
인혁의 밑에 깔려 신음하고 우는 것밖에 못 했던 수민이 덜덜 떨며 배를 감싸 쥐었다.
“뜨, 뜨거…….”
“뜨거운 건 너야, 수민아.”
인혁은 사정하고도 계속 허리를 쳐올리며 속삭였다.
“소, 소장님.”
드디어 인혁이 제 말을 들어 주나 싶어 수민이 손을 뻗었다.
“응, 수민아.”
인혁이 그 손을 잡고 손등에 입 맞췄다. 당연하게 손목을 빨아 진한 자국을 남겼다. 수민은 제 손목이 얼룩덜룩해지는지도 몰랐다.
“수민아, 하고 싶은 말 있어?”
인혁이 잘게 허리를 쳐올리며 물었다.
“흣, 네.”
“말해 봐, 들어 줄게.”
“어, 얼굴…….”
“얼굴? 하아.”
“얼굴, 보고 싶어, 아, 요.”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하지. 하, 우리 수민이.”
우리 수민이. 그 말이 좋았다. 수민은 저도 모르게 아래를 조였다. 윽. 인혁이 낮게 신음했다. 잘못한 건가 싶어 수민은 숨을 흡 들이켰다.
예전에, 선생님은 이렇게 성교 중에도 기분이 나쁘다며 화를 내고 그를 침대 밖으로 집어 던진 적이 있으니까.
선생님이랑 할 때와 달리 기분 좋고 짜릿했다. 힘들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키스가 좋았다. 뜨거운 손으로 만져 주고 핥아 주고, 빨아 주는 것도 좋았다. 다정히 대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계속 하고 싶었다.
여전히 뜨거운 인혁의 것이, 아직도 제 안을 쑤셔 대고 있는데. 그때마다 배 속이 찌르르하게 저려 오는데.
그러니까 좀 더…….
“앗!”
수민의 몸이 홱 돌았다. 삽입한 채로 뒤집힌 거라 성기에 안쪽 내벽이 쓸렸다. 버거운 자극이었다.
“하읏…… 읏!”
수민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신음하며 몸을 웅크렸다. 인혁이 웅크린 수민의 품으로 파고들어 팔과 다리를 풀어내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수민아.”
“으, 흐으…….”
“얼굴 보고 하자며, 응?”
“아……, 아…….”
수민은 정신을 못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닿았다. 수민은 당연히 인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우응, 으, 읏.”
“하아, 아, 좀 더, 빨아 볼래?”
“흑, 읍, 네.”
“응. 그래, 읏. 착하지.”
인혁은 수민을 끌어안고 잘게 허리를 쳐올렸다. 수민은 파드득 놀라 떨면서도 인혁의 키스에 매달려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혁은 간지럽게 핥아 대는 수민의 혀를 희롱하며 허리를 둥글게 굴리며 박았다. 아까보다는 조금 천천히. 수민이 무서워하지 않게. 이제 와서 새삼 무슨 배려인가 싶지만.
수민이 간간이 눈을 뜨고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여, 여기, 여기까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착하게도, 배를 더듬으며 그쯤까지 느껴진다며 울상지었다.
“그래, 거기.”
인혁은 부은 눈가를 입술로 꾹 누르며 거기까지 세게 찍어 올렸다.
“아흣!”
수민의 아랫배가 성기 모양으로 불룩해졌다. 인혁이 수민의 손을 거기에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쿵쿵, 뱃가죽 아래에서 계속 박혀 오는 성기가 느껴졌다.
“……!”
수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인혁은 수민의 손을 덮어 누르며 쾅쾅 박아 댔다.
“아, 아, 아……!”
“여기구나, 우리 수민이 좋은 곳.”
“아, 흐, 아니, 이거, 이상…… 이런 거…….”
“이상한 거 아니야. 기분 좋은 거라니까.”
“흑, 읏, 기, 기분 조, 좋…….”
“그래. 더 해달라고 해봐. 기분 좋은 거니까, 응?”
“흑, 흐읏…….”
“어서, 수민아. 응?”
“더, 더…… 해, 해주…… 읏!”
인혁이 수민의 허리를 한 팔로 둘러 잡고 허리를 쳐올려 내벽 깊은 곳을 꾹꾹 눌렀다.
“아아, 앗. 아……!”
수민은 싸지도 않았는데, 방금 사정한 사람처럼 몸을 떨더니 뒤를 확 조였다. 인혁은 하마터면 따라 쌀 뻔했다.
“미치겠네.”
이를 악물고 버티고는 수민이 예민하게 반응했던 그곳을 다시 쳐올렸다.
“앗, 아…… 소, 장니, 아! 아, 으, 아…….”
수민은 다시 한번 사정감을 느끼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혁의 팔과 어깨를 마구 잡아당겼다.
“흑, 흐읏…….”
그러더니 품 안에서 축 늘어지며 펑펑 울었다.
인혁은 이상하다고 말하는 수민을 달래 기분 좋은 거라고 말해 주며, 수민의 눈물을 모조리 핥아 마셨다. 이후 기진맥진한 수민의 두 다리를 허벅지에 올리고 쳐올려 실컷 즐긴 뒤 사정했다.
하아, 하아. 인혁의 어깨와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인혁은 수민의 다리를 벌리며 성기를 반만 빼냈다.
“으, 읏!”
수민의 허벅지가 경련했다.
안을 가득 채운 정액이 구멍 밖으로 흘러내렸다. 인혁은 쯧, 혀를 차며 흘린 걸 손으로 훑어 다시 구멍 안으로 넣으려고 했다.
“아, 안 돼요, 안 돼.”
수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성기가 박혀 있는 것만으로도 구멍이 빠듯했다. 거기에 손가락을 더 넣으려는 줄 알고 놀란 것이었다.
귀여워서 그 오해를 현실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으나 바로 단념했다. 인혁이 보기에도 수민의 구멍은 지금이 한계였다.
여전히 제정신은 아니지만 약간 여유가 생겼다. 인혁은 여전히 구멍 안에 성기를 박은 채, 수민을 안아 주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으응…… 응.”
수민은 키스하면 아무리 힘이 없어도 두 팔로 인혁의 목을 껴안았다. 버거워도 목 끝까지 들어오는 인혁의 혀를 빨았다.
인혁은 금방 수민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챘다.
수민은 몸을 맞댄 채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걸 해줘야지. 인혁은 너그럽게 수민을 꽉 끌어안고 계속 입 맞추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읍, 으, 흣”
“하, 읏.”
입술을 깨물고 혀를 얽으며 느긋하게 박아 올렸다. 그건 인혁에게도 꽤 만족스러운 정사였다.
둘은 손으로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더러는 껴안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입술은 잠깐씩 숨 쉴 때 외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만지며 장난스럽게 손장난치고 눈을 맞췄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왼쪽 가슴이 벅차올랐다. 수민도 그랬고 인혁도 그랬다. 그래서 두 사람은 키스할 때도 눈을 감지 않고 계속 서로를 바라보았다.
박은 채로 성기를 거의 빼내지 않고 허리를 흔들어도 수민은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인혁은 이를 악물고 사정감을 참아야 할 만큼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니 노팅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고 의도하지 않은 일이지만, 막상 사정 후 노팅이 시작되자 인혁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당황한 건 관련 지식이 미흡한 수민뿐이었다.
사정하고 난 뒤 성기가 가라앉긴커녕 더 크게 부풀었다. 특히 귀두 부분이 커지고 딱딱해졌다. 인혁의 성기는 그동안 제가 수민의 안에 쏟아 낸 정액이 밖으로 흐르지 못하도록 입구를 꽉 틀어막았다.
처음 노팅이 시작될 때 성기를 뺀다면 빼낼 수 있었겠으나 인혁은 그럴 이유를 못 느꼈다.
“소장님. 이거, 뭔가, 이, 이상, 읏!”
“쉬이, 수민아.”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 놀라 버둥대는 수민을 몸으로 꽉 누르고는 수민의 배 속이 진짜 제 것으로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렸다.
수민은 실시간으로 제 배 속을 채우는 성기의 부피에 놀라 경악했다.
“터, 터져요. 안, 돼. 읏.”
수민은 몸을 빼내려 했다. 움직이자 배 속에 든 게 여기저기를 긁어 댔다. 고통과 자극이 더 심해졌다.
“가만있어. 움직이면 더 위험해.”
인혁은 수민을 달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수민은 팔다리를 허우적대다가 인혁에게 달라붙었다.
“아, 아파요. 아파, 이거, 이상해.”
이상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하지만 인혁과의 성교는 온통 이상한 일들뿐이었다.
각오했던 혐오스러운 감각이나 고통은 없었다. 대신 몸속이 찌릿찌릿하고, 숨이 막혔다. 자꾸 눈물이 났다. 인혁의 성기가 배 속에 들어올 때마다 눈앞에서 폭죽이 튀는 것 같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인혁이 입 맞춰 주고 혀로 입 안을 핥아 주면 인혁에게서 나는 냄새로 온몸이 가득 차올랐다. 기묘한 고양감에 몸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인혁의 성기가 세게 박아 댈 때는 몸이 땅에 푹푹 파묻히는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은데, 더 하고 싶었다. 자꾸만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다, 말고 다른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각이 전신을 뒤덮었다.
가장 이상한 감각은 지금이었다. 안 그래도 인혁의 성기는 크고 길어서 버거웠다. 그런데 그거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커질 셈일까. 수민은 배 속에서 크기를 키우는 인혁의 성기가 무서워 바들바들 떨었다. 인혁을 좋아하고 그와의 성교가 기분 좋은 것과는 별개로, 생리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그 두려움을 부채질하듯 부픈 성기가 자꾸 배 속을 자극했다. 토할 것 같이 버겁고, 짜릿하게 기분이 좋은 것 같다가도, 우둘투둘한 성기가 여린 속살을 헤집어 아팠다.
생소한 경험이었다.
“소장님, 소장님. 이거, 이게…….”
수민을 이 같은 상황에 처하게 만든 건 인혁인데, 수민이 살려 달라 매달릴 사람도 인혁뿐이었다.
“조금만 참으면 돼. 긴장 풀어, 긴장하면 더 힘들어지니까. 착하지.”
인혁은 등을 쓸어 주며 수민에게 입 맞췄다.
“착하지 아가, 응?”
“……네.”
그 한마디에 수민이 얌전해졌다.
인혁은 수민이 무엇 때문에 노팅을 거부하지 않고 순해졌는지 금방 알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아낌없이 써먹었다.
“아가, 이건 기분 좋은 거야. 몸에 힘 풀고. 그래, 착하지.”
인혁은 쉼 없이 수민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 착하다.”
“흐, 으…… 네, 네에…….”
수민은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며 제 모든 걸 인혁에게 내맡겼다.
체감상으로 꽤 긴 시간이 지났다. 노팅된 성기가 수민의 배 속에 자리 잡고 수민이 얌전해지자 인혁은 살살 허리를 쳐올렸다.
“하, 하지, 하지 마세요.”
수민이 기겁했다. 인혁은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멈추진 않았다.
“흑, 흐윽, 하지, 하지 말아요. 제발.”
수민이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인혁의 성기가 기어이 안쪽 깊숙이까지 파고들어 수민이 느끼는 지점을 꾹 찍었다.
“……!”
수민은 소리도 못 내고 입을 벌렸다. 인혁은 계속 그곳을 치댔다.
“아, 아, 아…….”
수민은 인혁의 어깨에 얼굴을 댄 채 더는 반항하지 못했다. 인혁은 품에 제 오메가를 가두고 만족스럽게 노팅을 즐겼다.
노팅이 풀려도 수민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인혁은 수민의 몸을 제 팔 힘만으로 들었다 내리며 성기를 박아 댔다.
“흑, 힛, 읏…….”
수민의 몸이 들릴 때마다 뽀얀 엉덩이에서 흉물스러울 정도로 커진 살 기둥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수민은 다리를 벌린 채 아래를 제대로 조이지도 못했다. 그래도 인혁은 너무 조인다고 투덜댔다.
히윽, 히윽. 수민의 숨이 인혁의 허리 짓을 따라 이어졌다 끊겼다.
그 상태로 한참 박아 올리던 인혁은 새삼 수민이 힘들어 보인다며 걱정해 주는 듯 말하고는 수민을 침대 위에 눕혔다. 등에 푹신한 이불이 닿자 수민은 그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혁이 그러도록 놔두지 않았다.
인혁은 수민의 한쪽 다리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힘 있게 허리를 박아 댔다. 낯선 자세였고, 낯선 자극이 밀려들었다.
“아! 아…….”
수민의 몸이 꿈틀댔다. 퍽퍽 찧듯 박을 때마다 수민의 몸이 위로 밀렸다.
인혁은 수민을 끌어 내리고는 손을 모아 쥐었다. 수민이 밀려 올라가지 못하도록 붙잡은 뒤 성기를 반 이상 빼냈다가 박아 대기를 반복했다.
“흣, 읏.”
“도망가면 안 되지. 아가, 응?”
“아, 니, 저는…….”
“착하다, 착해.”
인혁이 수민의 발꿈치를 잘근잘근 씹으며 웃었다. 알파의 러트는 이제 시작이었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