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6. 오수민, 24세, 오메가 (5)
인혁과 수민은 아홉 시가 조금 넘어서 출근했다. 금요일에 연락을 받고 각오하긴 했지만, 서 여사와 박 씨는 인혁과 함께 들어오는 수민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표정 관리를 하긴 했지만, 인혁을 보며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험악해진 얼굴로 인혁을 노려보고 말았다. 뭐지, 이 도둑놈은?
그만큼이나 수민을 감싸고 있는 알파 페로몬의 농도가 지독했다.
수민은 페로몬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으니 제가 무얼 칭칭 두르고 다니는지 모를 수 있다지만, 인혁은 멀쩡하지 않은가. 수민에게서 나는 제 페로몬을 못 맡을 리 없는데. 저걸, 저대로 그냥 데리고 와?
절 질린 눈으로 노려보는 두 사람 앞에서도 인혁은 태연하기만 했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수민이 꾸벅 인사를 하다가 제 몸을 못 가누고 비틀댔다. 인혁이 당연하게 수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심해야지.”
“아, 네.”
“힘들면 그냥 집에 가고.”
“아니요.”
“월급 안 깎아. 그러니까.”
“소장님이랑 같이 있을래요.”
“그래, 알았으니까 절대 무리하지는 말고. 힘들면 소파에 눕고.”
인혁의 목소리가 묘하게 체념 섞인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이겠지. 서 여사는 흘려 넘겼다.
“네. 그럴게요.”
인혁은 수민을 자리에 앉혀 주고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
“…….”
서 여사와 박 씨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인혁은 그 둘의 옆을 지나며 에어컨 온도를 높이고, 캐비닛에서 깨끗한 담요를 꺼내 수민의 책상에 올렸다. 그리곤 제 자리에 앉아 두 사람에게 말했다.
“계속 서 있으실 겁니까들?”
“…….”
“…….”
당신이 우리한테 할 말은 그런 게 아닐 텐데. 두 사람은 그런 눈빛으로 인혁을 쳐다보았다.
“뭐, 원하시면 얼마든지 더 서 있으시고.”
인혁은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컴퓨터를 부팅했다. 눈 주변을 꾹꾹 누른 후 안경을 쓰고는 자리를 비웠던 지난 일주일 동안 밀린 일을 하나둘 해치우기 시작했다.
이후 사무실은 종일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수민은 평소와 달리 활발하게 왔다 갔다 움직이며 청소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돕지 못했다. 서 여사와 박 씨가 부탁한 서류 작성 업무를 겨우 하며 간혹, 자세가 불편한지 허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는데. 그때마다 서 여사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 인혁이 미리 아래층 백반집에 연락해 점심 식사를 위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네 사람은 사무실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를 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었다. 박 씨는 평소와 달리 수민에게 게임 하자고 조르지 못했다. 인혁이 이때에라도 좀 누워 있으라며 수민을 강제로 소파에 눕히고 재웠다.
수민은 인혁이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눈을 감았다. 바로 잠들어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었다.
점심시간만 재운다더니, 점심시간이 끝나도 인혁은 수민을 깨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본인은 일을 하려고 자리를 뜨려다가 수민이 제 셔츠 자락을 꽉 쥐고 있는 걸 보고는 도로 소파에 앉았다. 손을 뻗어 닿는 서류를 끌어와 읽으며 자리를 지켰다.
서 여사는 감히 인혁을 밀어 내고, 잠든 수민을 깨워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할 수 없었다.
수민은 오후 4시쯤 깼다. 모포를 두른 채 소파에 앉아 멍하니 인혁을 바라보는 얼굴은, 푹 자고 일어난 사람 특유의 말랑함이 배어 있었다. 머리가 눌리고 뻗쳐 날아다니기도 했다.
인혁은 그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수민은 인혁의 손길을 즐기며 눈을 감았다. 별것 아닌 장면인데 서 여사와 박 씨는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저녁 6시.
일상의 루틴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사무실의 하루가 겨우 끝났다.
인혁은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수민을 챙겨 일어났다. 꿋꿋이 퇴근 시간까지 버틴 수민은 서 여사와 박 씨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인혁과 함께 퇴근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사무실에 남은 두 사람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며 눈만 껌벅였다.
***
인혁은 수민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갔다. 당연히 수민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로 가 차를 세웠건만, 수민은 내리지 않았다.
“들어가서 쉬어.”
인혁이 시동을 끄고 핸들에 팔을 기대며 말했다. 그는 피곤해 보였다. 목소리도 아직 쉬어 있었다. 얼른 수민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만이 목표라는 듯한 태도였다.
“싫어요.”
수민 역시 얼굴이 푸석하고 휴식이 필요해 보였지만. 그의 목표는 집에 얼른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소장님 집으로 갈래요.”
“오수민.”
“네.”
“대답하라고 부른 게 아니라…….”
인혁이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훑어 내렸다. 할 말을 고르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사무실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굴었지만, 아니, 그 이전에 인혁은 맨정신으로 제 위에 올라탄 수민을 끌어안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수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풀어 나가야 하는지.
그걸 제대로 고민하기 위해서라도, 수민을 얼른 집에 들여보내고 싶었다.
러트 사이클이 끝난 건 금요일이었다. 주말엔 제정신이었으나 혼자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저로 인해 몸 상태가 엉망인 수민을 돌보며 수민과 내내 함께했다.
때문에 인혁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말했잖아. 너 안 버린다고. 그냥 오늘은, 각자 집에서 쉬자는 거야. 내가 너를 어떻게 내 집으로 데리고 가겠니.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
인혁이 애써 가다듬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민을 탓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인혁의 의도대로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메마르게 들렸다. 비난적인 어조가 아니었다.
“싫어요.”
수민은 인혁의 노력과 배려를 단칼에 끊어 냈다.
“너 버리고 도망 안 간다고 했지. 사무실 놔두고 내가 어딜 가겠니.”
인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달래듯 말을 걸었다.
“그건 모를 일이지요.”
“하. 수민아.”
“네.”
“너, 오메가가 막 러트 끝난 알파랑 한 공간에 있는다는 게. 그것도 어떤 이유에서든 같이 러트를 보낸 오메가랑 알파가 그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 좋아요.”
“오수민. 어른 말 끝까지 들어.”
“좋았으니까 좋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소장님이 괜찮으시다면 저는 소장님과 계속 성교하고 싶어요.”
“…….”
“오늘도 상관없어요.”
“…….”
“소장님?”
“……수민아. 나도 혼자서 생각이란 걸 좀 해야 하지 않겠니?”
인혁이 한숨 쉬듯 말했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요? 절 버릴 생각이요?”
수민은 바로 반응했다.
“소장님은 책임감 강한 사람인데. 그렇게 여러 날 성교를 해도, 절 버리실 생각을 하고 싶으신가 봐요.”
“오수민.”
“네.”
물끄러미 인혁을 바라보는 까만 눈이 어두운 밤, 불 꺼진 차 안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인혁은 잠깐이지만 등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차마, 먼저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진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수민아.”
“소장님. 저 허리 아픈데. 계속 이렇게 차에서 대화를 나누어야 하나요?”
수민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너 사무실에서 괜찮…….”
무심코 대답하던 인혁은 입을 다물었다.
인혁은 낮에 사무실에서 여러 번 자세를 바꾸며 허리를 두드리고 불편해하던 수민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낮에 소파에서 좀 재우긴 했지만, 수민의 얼굴은 여전히 푸석했다. 며칠 동안 발정 난 알파에게 시달렸는데 오죽할까.
더는 못 한다고 우는 애를 달래 스스로 다리를 벌리게 했다. 잔뜩 부은 가슴을 또 빨고, 제 정액으로 젖은 수민의 구멍에 성기를 또 쑤셔 박고 정신없이 흔들어 댔다. 무섭다고 말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한테 괜찮다고 속삭이며 몇 번이나 노팅했다.
아프다고 울며 매달리는 아이를 끌어안고 마음껏 욕심을 채우던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그때의 감정들이 단번에 인혁의 뇌를 달구었다.
‘빌어먹을.’
인혁은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소장님이 원치 않으시면 절대 안 건드릴게요.”
수민이 선심 쓰듯 말했다.
“뭘 안 건드려.”
인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괜찮으시면 건드려도 될까요?”
“오수민.”
“네.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저 버리지 마세요.”
수민이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꽉 붙들고 말했다. 그 바람에 수민을 수민의 집으로 보내는 게 수민을 버리는 일이 되어 버렸다.
왜 자기 집에 들어가 쉬는 게 버림받는 일이 돼버린 걸까. 인혁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수민의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너, 정말 괜찮겠어? 내 집에 가는 거. 괜찮겠냐고.”
“소장님과 성교했던 장소인데 왜…….”
“그놈의 성교 소리 좀 그만하고.”
“그럼 영어로 할까요? 섹스?”
수민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러니?”
인혁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절 한 번 먹고 버리실 작정이었어서, 지난주에 저와 소장님이 함께 침대 위에서 보냈던, 아니, 침대 안팎에서 보냈던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를 듣기 싫어하시는 거라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드라마에서요.”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 라는 답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드라마라니? 인혁의 표정이 묘해졌다.
“드라마? 드라마에 그런 말이 나온다고?”
“네.”
<행복이 별거>에서 나왔다. 주인공와 재벌 3세가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냈다. 주인공은 없었던 일로 하려는데, 재벌 3세는 계속 주인공 곁을 맴돌았다.
주인공이 계속 자신을 외면하니까, 재벌 3세는 분노하여 사원이 오천 명이나 되는 회사 1층 로비에서 절 한 번 먹고 버린 거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주인공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인혁처럼 소리쳤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서 하는 거예욧, 도대체!’
<큰일 났네 왕형제들>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다. 여기에선 둘째와 동네 백수인 척하는 재벌 4세가 그런 식으로 엮였다.
“드라마가 애들을 다 망치는구나.”
인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수민은 동의할 수 없었다. 드라마는 정 목사도 인정한 훌륭한 사회화 교재였다. 검정고시 교재보단 훨씬 더 도움이 되었다.
“전 소장님 집이 좋아요. 우리가 성교했던 곳이잖아요.”
“…….”
인혁은 더 이상 ‘성교’란 단어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튼 괜찮다는 거지?”
확인하듯 묻는 인혁은 조금 전보다 더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인혁은 끝까지 수민을 피해자로 취급했다. 수민은 절 그렇게 대우하는 인혁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소장님이 안 괜찮으시면 경찰에 신고하셔도 돼요. 제가 소장님을 강간했다는 증거는 충분하니까요.”
그리곤 인혁이 뭐라 대답하기 전 말을 덧붙였다. 수민이 눈을 내려 인혁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인혁은 사무실에서 내내 손목을 가리려고 애썼다. 날이 더운데 일부러 긴 셔츠를 입었고, 여러 번 무심코 소매를 걷으려다 멈칫했다. 그리곤 오히려 소매를 꾹꾹 내렸다. 박 씨와 서 여사는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수민은 줄곧 인혁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바로 알아차렸다.
인혁의 손목에 남은 흔적. 집에 남아 있거나 버려졌을 다 늘어난 넥타이. 그리고 쇼핑백에 들어 있던 케이블 타이. 평소 수민이 인혁을 잘 따르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비쳤다는 서 여사와 박 씨의 증언. 그 정도면 오수민이라는 오메가가 작정하고 러트 사이클인 알파를 찾아가 강간했다는 혐의가 성립하기 충분했다.
”자수는 안 할게요. 형량이 낮아지면 갇혀 있는 시간이 짧아질 테고, 그럼 모처럼 절 떼어 내기 위해 경찰서에 신고할 결심을 한 소장님의 의지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지 못할 테니까요.”
말을 하는 중에도 수민은 붉게 자국이 남은 인혁의 손목을 만져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손으로만 만져 보고 말 게 아니라 인혁이 제게 그랬듯 혀로 핥고 입술을 문지르고 싶었다. 더 나아가 저 손이 제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만져 주고 쑤셔 주기를 바랐다.
경찰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앞선 물질적, 정황적 증거가 없어도 자신을 검거하리라. 수민은 확신했다.
“…….”
자수하고 죗값을 받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 주제에. 인혁은 수민이 죗값을 받겠다고 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를 내지도, 수민을 신고하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못 했다.
수민은 그런 인혁이 참 안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혁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좀 더 많이 곤란해져야 했다.
“너, 내가 그렇게 못할 줄 알고 이렇게 말하는 거지.”
이것 보라.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됐다. 더 많이 곤란해져도 상관없었다. 인혁은 똑똑한 사람이라 금방 헤치고 나오니까.
“네.”
그러니까 수민은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넌…….”
인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는걸요.”
“어쩔 수 없어?”
“소장님은 소장님을 강간한 저를 소장님 집에 다시 들이는 게 싫으시잖아요. 혼자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 어떻게든 절 떼어 낼 방법을 찾아내려는 거고.”
“…….”
인혁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버리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수민은 조소했다. 새삼 상처받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서 여사의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서 여사는 인혁이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했으나 그건 오직 그의 가족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인혁은 제가 수십 년간 찾아 헤매는 가족 외에는 누구도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성폭력 가해자로 만들어 경찰서로 갈 생각을 할망정 성교로 맺어진 관계를 책임질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 불쌍한 오메가들을 구출하고 도울 뿐이었다. 오직 자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서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세상은 이런 이기주의자를 착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예전에 몸담았던 곳에서는 선량한 무식자라고 불렀고, 반드시 죽였다.
그리고 지금, 수민은.
“저는 여러 날, 셀 수도 없을 만큼 저와 성교한 소장님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러니까 소장님이 그런 절 떼어 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그에게 절 새겨 넣고 싶었다. 절대 버릴 수 없도록.
“하나뿐이라고?”
“네. 정 싫으시면 소장님이 말했던 대로 사법권적인 방법으로 절 떼어 내세요. 그 방법 말고는 없어요.”
“……이렇게 말 잘하는 줄 몰랐네.”
인혁이 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단. 네가 원한다면 우리 집으로 가자.”
그리곤 수민이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야. 난 분명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게 널 버리겠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인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분명한 건 내가 널 버리지는 않을 거라는 거야, 수민아.”
그러면서도 반복해서 말했다. 버리지 않겠다고.
또 막무가내로 덤벼들까 봐 안심시키고자 하는 말인지, 정말 버리지 않을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는 불확실했다. 하지만 수민은 후자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네.”
그럼에도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인혁이 시동을 걸었다.
아파트 단지 풍경이 등 뒤로 멀어지자 수민은 비로소 안심하며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두 사람은 인혁의 집으로 갔다. 인혁이 여기서 자라며 손님방을 내주었다.
“같이 자면 안 되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소장님이 절 버리고 도망가도 제가 모를 수 있잖아요.”
“너 안 버린다고 했어. 그리고 내가 내 집을 놔두고 어딜 가.”
“갈 수 있잖아요.”
“…….”
순간 허가 찔려 대답하지 못했다. 방점은 수민을 버릴 수 있다는 데에 찍히지 않았다. 언제든 이 집을 버릴 수 있다는, 그 부분에 찍혔다.
“여기, 언제든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실 수 있잖아요.”
수민이 그거 보라는 듯 말했다. 그리곤 인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집을 둘러보았다.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럼에도 낯설게 느껴지는 건 집에 생활감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집기는 다 갖추고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차라리 드라마에 나오는 세트장이 더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인혁에게 이곳은 가끔 사무실에서 밤새고 다녀오는 사우나와 별반 차이 없는 장소였다. 수민은 바로 알아보았다. 이전에 수민이 머물렀던 모든 원룸이 그랬으니까.
“같은 방에만 있게 해주세요. 바닥에서 잘게요.”
단지 한 집에 있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수민은 한 공간, 한 방 안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같은 방에서 자면 해결될 문제야? 너 잘 때 내가 몰래 나가면 어쩌려고?”
“저 잠귀 밝아요.”
“안 자고 밤새워서 지켜보겠다는 말이구나.”
“원하시면 잠은 잘게요.”
“수민아, 이 방으로 들어가. 여기서 자. 같은 방은 꿈도 꾸지 말고. 내일 아침에 내가 깨우러 올 때까지 문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마.”
“화장실은요?”
“전화해서 허락받아. 자, 들어가자. 잘 자렴.”
인혁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수민을 손님방에 밀어 넣었다.
수민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
수민은 우두커니 서서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인혁은 바로 침실로 들어간 것 같았다.
피곤한 사람이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잠들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수민은 천천히 100까지 센 뒤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 침실 앞에 섰다. 역시나 소리 안 나게 문고리를 돌렸건만.
문을 조금, 아주 조금 열었을 뿐인데 안에서 인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기만 해봐, 오수민.”
자다 깬 목소리가 아니었다.
“왜 안 주무세요?”
“지금 그걸 나한테 묻고 있는 거니? 네가?”
“잠이 안 오세요?”
“어. 너 때문에.”
“주무시는 데 방해 안 할게요. 바닥에서 얌전히 잘게요.”
“안 돼. 네 방으로 돌아가.”
“거긴 제 방이 아닌데요.”
“그래? 그럼 네 방으로 데려다줄까? 내가 차 키 챙겨서 나갈게, 거기 서 있어.”
“아니에요.”
수민은 바로 문을 닫았다. 혹시 인혁이 정말 차 키를 들고 나올까 봐 문고리를 잡고 버텼다. 다행히 인혁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수민은 긴장을 풀고 문고리를 놓았다.
왜 아직까지 안 자고 있는 걸까. 잠자는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걸까?
정보가 부족했다.
러트 동안엔 인혁이 먼저 잠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늘 수민이 먼저 기절하듯 잠들었다. 먼저 깬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인혁은 수민을 끌어안고 곤하게 잤다. 그래서 숙면을 취하는 타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지금 상황의 특수성 때문일까? 또 강제로 성교하게 될지 모른다고 긴장하여 잠을 못 자는?
하루, 사무실에서 같이 잔 적은 있으나 그땐 인혁의 상태로 살피지 못했다.
수민은 일부러 소리 내 손님방 앞까지 걸어가선 문을 크게 열고 닫았다. 그리곤 돌아서 소리 없이 걸어 다시 침실 앞에 섰다. 바로 문을 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수민은 문 앞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니 문 안쪽에서 달칵, 약통 여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럭, 부스럭. 이불 소리도 들렸다. 인혁이 침대에 누운 것 같았다.
또 100을 세고 들어가 볼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한 번은 괜찮다. 하지만 두 번 연달아 실패하면, 상대가 긴장한다. 긴장하면 편히 잠들지 못한다.
인혁이 밤새 잠들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건 수민에게 이롭지 않았다.
인혁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차라리 푹 자게 놔두는 게 나았다. 잠들면, 도망가지 못하니까. 수민은 인혁이 곤히 잠들길 바랐다.
문 너머에 인혁이 있었다.
인혁에게 버림받을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는 한편, 버림받지 않고 아직도 인혁의 곁에 있다는 안도감. 수민은 서로 다른 두 감정에 휩싸였다.
집엔 온통 인혁의 냄새가 가득했다. 인혁의 침실 앞엔 더더욱. 때문에 푹신한 침대가 있는 싸늘한 손님방보단 침실 문 앞 바닥이 더 잠들기 좋은 장소였다. 수민에겐.
그래서 침실 문 앞에 웅크린 채로, 오랫동안 거실 벽에 붙은 시계를 바라보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수민은 그렇게 잠드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다.
새벽 5시 경이었다.
***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민은 바로 눈을 떴다. 하지만 몸이 굳어 일어날 수 없었다.
“뭐야.”
문밖으로 나오려던 인혁은 발에 걸리는 걸 내려다보고는 놀랐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수민은 몸을 더 웅크리는 방법으로 몸을 풀고는 천천히 상체만 일으켰다. 인혁을 올려다보니 얼굴이 푸석했다. 푹 잘 잔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너 왜 여깄어.”
“…….”
“설마 계속, 밤새 여깄었어?”
“…….”
“네 방 가서 자라고 했지.”
“여기서도 잘 잘 수 있어요.”
수민은 벽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저려 몸이 휘청였다.
인혁이 바로 팔을 뻗어 허리를 감쌌다. 수민은 인혁의 가슴에 얼굴을 박았다. 따뜻했다. 순간 수민은 수면욕을 느꼈다. 방금 자고 눈을 떴는데, 더 자고 싶었다. 이 품에 안겨서, 이 냄새를 마음껏 맡으면서.
하지만 안 되겠지.
수민은 바로 단념했다.
“잘 잤다고?”
인혁이 수민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수민은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제 얼굴을 훑어보는 시선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게 졸려 보였던 걸까.
“이게 잘 잔 얼굴이야?”
“…….”
소장님도 잘 잔 얼굴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인혁이 제 입으로 자신은 잘 잤다고 말한 적 없었기에 수민은 말을 아꼈다.
“수민아. 오수민.”
“네.”
“내가 너 버리고 도망갈까 봐 밤새워 지키고 있었던 거야?”
“밤을 새우진 않았어요.”
“그럼?”
“조금은 잤어요.”
“언제 잤는데.”
“……4시 조금 넘어서?”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그즈음이었었다. 4시 55분. 그러니까 아무튼 4시.
하. 인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숨을 내쉬고는 수민을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려다가 멈칫, 했다. 그리곤 거실 소파로 데려갔다.
“한숨 자.”
인혁이 수민을 눕히고는 돌아섰다. 인혁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소파에 누웠던 수민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세요?”
인혁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손을 잡고 싶었지만 뿌리칠 게 뻔했기 때문에 옷을 붙잡았다.
“출근해야지.”
“저도 출근해야 돼요.”
“잠도 못 잤으면서 무슨 출근이야. 그냥 자.”
인혁이 돌아서 수민을 다시 소파에 앉혔다.
“소장님 가시면 저도 갈 거예요.”
“안 도망가. 퇴근하고 여기로 올 거니까.”
“저도 출근했다 소장님 따라서 퇴근해 여기로 올게요.”
“누구 마음대로?”
인혁이 코웃음 쳤다.
“…….”
“너 지금 나 따라 출근하면, 저녁에 난 너 내 집으로 다시 안 데리고 올 거다.”
인혁이 협박하듯 말했다.
“그럼 제가 알아서 따라올게요.”
하지만 수민은 협박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 불법 침입죄로 경찰에 신고……. 아니다.”
“네. 신고하세요. 죄명이 추가되면 형량이 늘어날 거예요.”
“오수민.”
“네.”
“대답하라고 이름 부른 게 아니라…….”
‘원래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었나?’
한 번 의식하고 나니, 계속 신경 쓰였다.
현실 감각이 좀 떨어지고, 의외의 면에서 순진한 면이 있다고 생각해 오긴 했지만. 하지만 이렇게 말이 안 통하고, 벽처럼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너, 내가 못 할 거 알고 일부러 그런 식으로 협박하는 거니?”
인혁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네.”
수민이 바로 대답했다.
“하.”
순진하긴 개뿔. 일부러 이렇게 굴 정도로 맹랑한 녀석인 것을.
인혁은 도무지 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눈앞의 무언가를 내려다보았다.
청년이라 불러 마땅하겠으나 여전히 아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스물셋. 우유 냄새가 날 거 같은 말간 얼굴. 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 절 빤히 바라보는 크고 까만 눈. 버리지 말아 달라 말하는 덤덤한 목소리. 그 속에 숨어 있을, 남들과 달랐을 과거.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조화를 이뤄 수민이라는 아이를 완성해 냈다.
눈을 마주치고 얼굴을 보면,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자. 일단 한숨 자자.”
잠을 못 자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마음이 들 리 없으니까. 제가 수민에게 했던 일들, 수민이 제게 했던 일들, 그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그저 품에 안아 다독여 주고 싶다는 마음이라니.
인혁은 모든 걸 수면 부족 탓으로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싫어요. 저도 출근-.”
“나도 안 할게. 그럼 되지?”
“…….”
“나도 밤새 잠을 못 자서 좀 자야 할 거 같으니까, 너도 자.”
인혁은 수민을 다시 소파에 눕히고 그 옆에 앉았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수민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인혁을 바라보았다. 9시가 좀 넘자 인혁이 일어났다. 수민도 바로 일어났다.
“누워 있어. 핸드폰 가지러 가는 거야.”
인혁이 침실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도 수민은 뒤쫓아갔다.
“그래, 네가 언제 내 말을 들었니. 그래도 이 말은 들어. 들어오지 마, 수민아.”
인혁이 침실 문 앞에서 경고했다. 수민은 고개를 끄덕이곤 문 앞에 서서 인혁을 지켜보았다. 굳이 침실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인혁이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됐다.
인혁은 협탁에 대충 걸쳐 둔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 서 여사에게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예, 예. 오늘 출근 못 할 거 같아서요. 급한 연락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고. 아, 그리고 수민이도 출근 오늘 못 합니다. 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 건은 오후에 제가 여기서 처리해 바로 보낼 겁니다.”
인혁은 짧게 통화를 마치고는 핸드폰을 수민에게 흔들어 보였다.
“됐지?”
“핸드폰을 잠깐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수민은 침실 안으로 손을 뻗었다.
“왜? 내가 네 앞에서 연기라도 했을까 봐?”
“네.”
“네? 사람을 뭘로 보고.”
인혁이 수민의 앞에 서서 통화 목록을 띄운 핸드폰 액정을 보여 주었다. 수민이 핸드폰을 잡으려고 하자 피했다.
“내가 널 뭘 믿고 내 핸드폰을 내주겠니, 수민아. 이렇게 더럽게 말 안 듣는 너를. 응?”
인혁이 놀리듯 말했다.
죽을 사 들고 버스에 올라 인혁의 집 앞 정류장에 내리기 전부터 그간 쌓아 온 신뢰를 잃을 건 각오한 일이었다. 때문에 수민은 새삼 인혁의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 수민은 핸드폰 통화 목록에서 서 여사에게 발신한 기록을 확인한 것에 만족했다.
인혁은 수민을 소파로 데리고 가 세 번째로 눕혔다. 이번에도 수민은 순순히 누웠다.
인혁이 옆에 앉고 낮은 쿠션을 머리 아래에 끼워 주었다. 수민은 꾸물꾸물 모로 눕고 몸을 살짝 웅크렸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얼굴을 보니 솔솔 잠이 밀려오는 듯한데. 수민은 자꾸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 안 자. 안 졸려?”
인혁은 수민의 졸려 보이는 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졸려요. 그런데 참을 수 있어요.”
수민이 작게 하품하며 대답했다.
“참긴 왜 참아.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출근도 안 하고 있는데.”
“제가 자는 사이에 소장님 사라지면 어떡해요.”
“안 그런다니까. 너 안 버려. 안 버릴 거야, 수민아.”
하지만 몇백 번, 어쩌면 천 번 넘게 말했을지 모를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이미 말버릇이 돼버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 도중에 생각지도 않게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
몇백 번, 어쩌면 천 번 넘게 같은 말을 들었을 수민은 여전히 수긍한 눈치가 아니었다.
“기다려 봐.”
인혁이 몸을 일으켰다. 수민이 따라 일어날 걸 알았기에 미리 수민의 머리를 꾹 눌렀다.
“또 일어나면 집에 데려다준다. 아무래도 여기가 불편해서 잠 못 자는 거 같으니까, 너희 집 가서 편히 쉬라고.”
“…….”
수민은 도로 누워 인혁을 올려다봤다.
주워 온 지 반년이 넘었다. 밥도 잘 먹였다, 옷도 사줬다. 살 곳도 마련해 주었다. 공부도 시켰다.
나름 곱게 키웠는데. 왜 아직도 때가 꼬질꼬질해선 비 다 맞고 걸어 다니는 유기견처럼 보이는 걸까.
‘역시 수면 부족이라 그런 거겠지.’
인혁은 눈가를 꾹꾹 누르며 침실에 들어갔다 나왔다. 인혁의 손에 넥타이가 들렸다.
“안 버리셨네요.”
“안 버린다고 했지, 내가.”
버릴 틈이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주말 내내, 그리고 어제오늘. 인혁은 계속 수민과 함께 있었으니까. 버리려고 마음먹었어도 버릴 틈이 있었을 리 없었다. 버릴 생각을 한 적도 없었지만.
인혁은 넥타이 한쪽 끝으로 제 왼손을 묶었다. 그리고 다른 쪽 끝으로 수민의 오른손을 묶었다.
“자, 이제 됐지? 제발 좀 자자.”
“…….”
수민이 가만히 넥타이에 묶인 손을 바라보았다. 졸려 보였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 인혁은 제 눈을 의심하였다.
“잠시만요.”
수민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제 손과 인혁의 손에 묶인 넥타이를 풀었다.
하도 불안해해서 애써 묶어 주었더니, 지 손으로 풀어? 인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바로 얼굴을 폈다.
수민이 다시 두 손을 묶었다. 아주 야무졌다.
척 봐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인혁은 다 됐다며 뿌듯해하는 수민을 보고는 시험 삼아 팔을 당겨 보았다. 칼 없이 풀어낼 엄두가 안 났다.
금요일엔 운이 좋았던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넥타이가 늘어나지 않았다면, 넥타이가 아니라 밧줄이나 케이블 타이로 묶였다면. 그날 끝까지, 어쩌면 주말까지도 풀려나지 못했을 것 같았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예전에요. 제가 제일 못했어요.”
수민이 부끄럽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제일 못하는 수준이 이 정도라니. 소년병으로 특수 부대에 들어가 교전 지역을 누비거나 인신매매, 납치 영재 양성 학교를 다닌 게 아닌 이상에야…….’
인혁은 수민의 이력서를 떠올렸다.
“공익 생활 전에?”
인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혁은 더 묻지 않았다.
수민은 만족해하며 누웠다. 인혁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곧 잠들었다. 아니, 인혁이 먼저 잠들고 그다음에 수민이 잠들었다. 수민은 인혁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민은 인혁의 숨소리가 이상해진 걸 눈치채고는 바로 눈을 떴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윽. 인혁이 작게 신음했다. 수민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인혁은 소파에 앉은 채로 기대 팔을 베고 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얼굴에 땀이 송송 나 있었다. 표정은, 괴로워 보였다.
“안 돼, 안 돼……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신음했다.
깨워야 하나? 놔둬야 하나? 수민은 인혁에게 손을 뻗었다 물리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아무래도 인혁이 점점 더 힘들어하는 거 같아 깨우기로 마음먹었을 때였다.
인혁이 눈을 떴다. 바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깨셨어요?”
수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인혁이 수민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끌어안았다. 인혁의 냄새가 확 쏟아졌다. 진하고, 불안정했다.
냄새를 안정적이다, 안정적이지 않다 말할 수 있을까?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으나 아무튼 그랬다. 인혁에게서 나는 냄새가 눈에 보이는 파장이라면, 변동 폭이 너무 크고 거칠어 보일 것 같았다.
“아냐…… 너 버린 거 아냐.”
인혁이 수민의 등을 더듬으며 속삭였다. 성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지는 게 아니었다. 제가 끌어안은 존재를 확인하듯, 불안감에 휩싸여 만지는 것이었다. 손길이 절박했다.
“계속, 찾고 있었어.”
“…….”
수민은 인혁의 지금 상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일단 안긴 채로 가만히 있었다. 인혁이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을 먼저 끌어안아 주었는데. 밀치거나 거부할 수 없었다. 인혁이 이대로 절 쓰러뜨리고, 아무 애무 없이 성기를 구멍에 찔러 넣어도 괜찮았다. 수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버틸 자신이 있었다.
“절대 버린 거 아냐. 포기 안 했어, 안 했어. 안 그랬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인혁이 다급히, 애원하듯 속삭이며 수민을 꽉 끌어안았다. 숨 쉬느라 수민의 몸이 살짝만 움직여도, 제 품을 벗어나는 거라 생각하는지 더 절실하게 굴었다.
포기 안 했어. 계속 찾고 있어. 가지 마. 아니야. 찾아낼게. 포기하지 않아. 버린 게 아니야. 버리지 않아. 인혁은 같은 말을 끝없이 되뇌었다.
수민은 인혁이 잠에서 깬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또한 인혁이 이렇게나 진심을 다해 버리지 않을 거라고 속삭이는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에어컨이나 TV를 사러 갔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인혁은 수민을 끌어안고 있으나 다른 사람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니야, 버린 게 아냐. 제발.”
실성한 사람처럼 쏟아 내는 애원이 수민의 어깨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인데. 그 말이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니다. 잠에서 깬 인혁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버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 애원에 비하면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수민은 손을 들어 인혁이 제게 해주었듯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저 안 버린 거예요?”
“아냐, 절대 아냐. 아가.”
“안 버릴 거예요?”
“응, 응…….”
“네, 알겠어요.”
“포기 안 해, 찾아낼게. 찾을게, 그러니까…….”
“네, 알아요. 알겠으니까.”
“응, 응.”
“저 버리지 말아요.”
“응…….”
인혁이 수민의 목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수민은 흡혈귀에게 목이 빨려 피를 물리면 이런 기분일까, 라고 생각했다.
인혁의 몸이 천천히 이완되었다. 거친 숨이 가라앉고, 인혁이 몸을 수민에게 기댔다. 아니, 수민 쪽으로 무너졌다. 수민은 잠든 인혁을 지탱하지 못하고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인혁은 반사적으로 수민을 끌어안았다. 넥타이로 연결된 손이 불편할까 봐, 수민은 손을 같이 움직여 주었다.
인혁은 수민을 꽉 끌어안고 다시 잠들었다. 아니, 깬 적 없으니 다시 잠들었다는 말은 틀린 말이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묵직한 무게와 온기, 짙은 냄새가 수민을 짓눌렀다. 답답했지만, 수민은 작게 꿈틀대지도 않았다.
수민은 묶이지 않은 손으로 계속 인혁의 등을 쓸어내렸다. 인혁이 늘 제게 해줬던 것처럼.
인혁이 간혹 뒤척였다. 입술이 목에, 어깨에 스쳤다. 숨이 목을 간지럽혔다. 짜릿한 느낌인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아랫배에서 울렸다.
수민은 두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인혁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두 사람의 사타구니가 맞닿아 있었다.
가만히 몸을 겹치고만 있을 뿐인데, 아래쪽에 열이 올랐다. 인혁도 그 열기에 전염됐는지 잠결에 허리를 추어올리듯 들썩이며 비벼 댔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고 몇 번 그러다 말고, 또 조금 지나서 몇 번 그러다 말고를 반복했다. 잠결에 기분이 좋아 자꾸 비벼 대는 것 같았다.
간질간질하고 짜릿했다. 자꾸 허벅지 안쪽이 저리고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스스로 허리를 움직여 좀 더 격렬하게 문지르고 싶었지만, 인혁이 무겁게 누르고 있어 불가능했다. 인혁이 잠결에 주는 자극만을 받아야 했다. 수민은 감질나 울고 싶다는 기분을 처음 경험했다.
이 상태로 더 자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수민은 제 다리 사이에서 인혁의 성기가 조금씩 커지고 딱딱해지는 느낌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목에 닿는 인혁의 숨소리가 좋으면서도 조금, 아주 조금 얄미웠다.
인혁은 잠결에 뭔가 더 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에, 수민은 어설픈 열기에 달궈져 살살 비벼지고 문질러지는 자극에 익숙해졌다.
짜릿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고 뜨겁고 묵직했다. 기분 좋았다. 별빛을 부숴 뿌린 강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별 가루가 몸을 스칠 때마다 짜릿했다. 물이 몸을 감싸 둥둥 띄워 주는 기분에 몸이 나른해졌다.
절대 이대로 잠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민은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혼자 소파에 누웠을 때보단 마음이 편했다. 이 정도 무게, 온기가 사라지면 바로 알아채 눈 뜰 수 있을 테니까.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등을 다독여 주던 손이 툭 떨어져 내리자, 인혁이 잠결에 몸을 뒤척이며 수민의 목에 입을 맞췄다. 쪽, 쪽. 입 맞추다가 입을 벌려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빨았다.
“으음.”
수민도 잠결에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인혁이 놔주지 않자 인혁의 머리에 제 뺨을 대고는 그대로 더 깊게 잠들었다.
***
둘은 오후 늦게 잠에서 깼다.
수민이 먼저 눈을 떴다.
“…….”
수민은 인혁이 아직 잠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눈만 깜박였다.
20분쯤 지나자 인혁이 잠에서 깼다. 인혁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푹 자고 일어난 사람답게 멍해 보였다. 바로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숙여 제 발을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희귀한 모습이었다. 수민은 제가 있는 줄 알면 인혁이 정신을 차릴까 봐 숨까지 참고 구경했다.
인혁의 머리카락 중 수민의 목에 닿았던 부분이 눌려 있었다. 다른 쪽은 붕 떠 삐쳐 있었다. 숨죽이며 구경만 하고 있던 수민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이래서 인혁도 제 머리를 쓰다듬었던 걸까. 수민은 궁금해졌다.
인혁이 제정신을 차릴 걸 각오하고 만진 건데, 인혁은 수민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더 만지라고 머리를 들이밀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원래 한 번 자고 일어나면 쉽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걸까? 역시나 데이터가 부족했다.
러트 사이클 동안의 인혁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까무룩 잠든 수민이 이상한 기분에 눈을 뜨면, 인혁은 늘 먼저 깨어 있었다. 수민의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빨고 있었고, 아니면 수민을 뒤에서 끌어안고 허벅지에 성기를 끼워 문지르고 있었다.
수민은 러트 사이클이 아닌 인혁이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정신 차리는 모습을 즐겁게 구경했다. 멍하던 눈에 빛이 돌아오고, 느리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열렸을 때. 본래의 삭막하고 날 선 빛이 돌아오는 순간이 짜릿했다.
“얼마나 잔 거지…….”
겨우 정신을 차린 인혁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곤 수민을 생각해 내곤 고개를 들어 수민을 보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수민이 인사했다.
“어, 너도.”
“네.”
“혹시…….”
인혁이 눈가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내가 자다가 뭔가, 이상한 말을 하거나 그러진 않았지?”
“저도 조금 전에 일어났어요.”
30분 전도 조금 전이라면 조금 전이었다.
“그래, 너도 잠을 못 잤을 테니까.”
인혁은 알아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씻을게. 아니, 너는 저기 네 방 앞에 있는 화장실 쓰려면 쓰고.”
인혁이 몸을 일으키다 주르륵 딸려오는 수민의 팔을 보았다. 처음엔 잠깐 ‘이게 뭔가.’ 하는 눈으로 봤지만, 곧 기억해 내고는 수민에게 팔을 흔들었다.
“풀어.”
“…….”
“수민아. 안 들려?”
“저 좀 더 자고 싶어요.”
“그래, 나 씻고 너 자고. 딱 좋네. 어서 이거 풀어.”
“…….”
“가위 가져와서 자를까?”
“제가 드린 선물을요?”
“그 선물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지?”
“…….”
수민은 좀 더 버티다가 인혁이 옆구리에 절 끼고 주방으로 가 가위를 찾으려 하자 넥타이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인혁이 씻을 동안 욕실 앞에 앉아 있었다.
인혁은 나오다가 하마터면 수민을 발로 찰 뻔했다.
“니가 개야? 아니면 고양이?”
수민 조금 고민하다 대답했다.
“멍?”
“야. 오수민.”
“야옹?”
“수민아, 사람 말 해야지.”
인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대답은 잘해요.”
“머리 말려 드릴게요.”
수민은 벌떡 일어나 인혁이 들고 있는 수건을 뺏으려고 했다. 인혁은 수건을 잡고 놓지 않았다.
“터그 놀이하자고?”
“…….”
또 멍멍하고 대답해도 될까. 잠깐 고민했지만 안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한 번 더 멍 소리를 냈다간 정말 이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았다.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인혁이 허탈하게 웃었다. 인혁이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옆으로 비켜섰다.
“너도 들어가 씻어.”
“아뇨, 저는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아.”
“…….”
“너 씻을 동안 도망 안 갈 거고, 너 안 버릴 거니까 씻어.”
“…….”
수민이 미적거리자 인혁이 눈에 힘을 주었다. 수민은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갈아입을 옷을 안 가지고 들어온 걸 그제야 기억하고 살짝 욕실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 새 옷이 놓여 있었다.
입었던 옷이어도 좋은데. 아니, 입던 옷이 더 좋은데. 인혁은 굳이 비닐 포장을 벗기지도 않은 새 옷을 주었다.
포장을 벗기고 옷을 펴보니.
“……크네.”
사이즈가 너무 컸다.
이렇게까지 체격 차이가 났던가? 수민은 새삼 실감했다.
반바지인데도 기장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흘러내릴까 봐 허리 부분을 손으로 붙잡아야 했다. 셔츠는 어깨선이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역시나 흘려내려 한쪽 어깨가 다 드러났다.
수민은 바지와 셔츠를 움켜잡고 주방으로 갔다. 거기에서 인혁의 냄새와 부스럭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혁은 냉장고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냉장고 문에 한 팔을 올리고 기대서 있었는데, 고민하는 옆모습이 보기 좋았다. 가전을 사러 대형 전자샵에서 봤던 카탈로그 표지가 생각났다. <베타 피쉬 데드>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가 냉장고에 기대서 있는 사진이 박혀 있었다. 수민은 그 배우보다 지금의 인혁이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수민은 인혁이 제 기척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들어 절 보기까지, 그 잠깐의 과정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봤다.
인혁은 사람이 옷을 입은 건지 옷이 사람을 입은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모양새인 수민을 보고 웃음 지었다.
“미안, 옷이 뭐, 줄 만한 게 없네.”
“괜찮아요.”
미안할 일이 아니었다. 인혁의 집에 저 같은 아이가 기어들어 온 적은 없다는 거니까. 수민은 만족하며 인혁이 시키는 대로 식탁 위에 앉았다.
인혁은 기분 좋아 보이는 수민을 수상하게 생각하며 지그시 쳐다보았다. 수민은 방금 한 생각을 들키기 싫어 눈을 내리깔았다.
“뭐 좀 먹자. 그런데 집에 뭐 먹을 게 마땅치 않네.”
“네.”
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럴 땐 설사 그렇게 생각해도…… 아니다.”
“네?”
“아니, 대답을 너무 잘한다고. 오수민. 솔직해서 아주 좋아.”
“네. 감사합니다.”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대답 잘하렴. 솔직하게.”
“네.”
인혁이 ‘아니오.’라고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아서 수민은 꼬박꼬박 ‘네.’라고 대답했다.
“아무튼 골 때린다니까.”
인혁이 손을 뻗어 수민의 머리를 헤집었다. 웃는 얼굴이 아까보다는 편해 보였다. 인혁은 골 때리는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제가 골 때리나요?”
수민이 머리를 정돈하며 물었다.
“가끔.”
인혁은 찬장을 열며 대답했다.
“그래서 소장님은 좋으세요?”
“내가 좋은지가 왜 중요해?”
인혁은 찬장을 연 채로 수민을 봤다.
“소장님이 좋아하시면-.”
“더 골 때릴 수 있게 노력이라도 하려고?”
“네.”
“그러지 마, 수민아.”
“…….”
“나한테 널 맞추려고 하지 마.”
인혁이 찬장에서 햇반을 두 개 꺼냈다.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넣어 돌리고,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몇 개 꺼냈다. 의사가 러트 사이클 때 굶어 죽지 말라고 가져다준 식량이었다. 넉넉히 사다 준 덕분에 지난 한 주를 버틴 것도 모자라 오늘까지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러트 사이클이라 제정신 아닌 알파의 냉장고에 왜 계란을 한 판이나 사서 넣어 놨는지는 모를 일이나 그것도 도움이 되었다. 인혁은 계란을 세 알 꺼내 한 손에 들고 인덕션 앞에 섰다.
“할 줄 아는 게 이런 거밖에 없으니까, 대충 해서 먹자.”
인혁이 계란을 풀어 국을 끓였다. 수민은 요리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햇반에 반찬 몇 가지, 서 여사가 김장철에 억지로 한 통 떠넘겼다는 김치, 계란국. 두 사람은 그럭저럭 한 상 차려진 식탁에 앉아 늦은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아침, 점심을 내리 굶고 잠만 잤다. 그래도 배고픈 줄 몰랐건만. 인혁을 따라 밥을 한 숟갈 떠먹자 새삼 허기가 몰려왔다. 인혁 역시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았다. 상을 차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전혀 식욕이 안 돈다는 얼굴이었는데, 뚝딱 햇반 하나를 다 비웠다. 수민도 비슷하게 햇반 하나를 다 먹었다.
인혁은 말없이 일어나 햇반을 두 개를 더 데워 왔다. 국 냄비도 들고 와 수민의 국그릇에 듬뿍 떠주고 남은 걸 제 국그릇에 쏟았다. 두 사람은 다시 햇반 하나를 각각 해치웠다.
“배부르니 살 것 같네. 그치?”
“네.”
오늘 대답한 ‘네.’ 중에 제일 열렬한 ‘네.’였다.
두 사람은 주섬주섬 식탁 위를 치우면서 서로 모르게 고개를 갸웃, 했다. 왜 갑자기 식욕이 돌지? 이렇게 많이 먹었던 적이 없었는데?
인혁이 설거지를 마치고, 노트북을 가지고 거실로 갔다. 수민은 인혁을 졸졸 따라다녔다.
인혁은 서 여사와 통화 중에 말했던 일을 처리했다. 테이블 위에 쌓인 서류는 수민이 알아볼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했다. 수민은 인혁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며 기웃거리지 않았다. 인혁이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었다. 인혁이 제 옆에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수민은 인혁이 일하는 동안 옆에 앉아 가만히 있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어도 인기척이 전혀 없으니, 인혁은 수민이 옆에 있는 것도 잊고 일에 빠져들었다.
저쪽이 요구하는 서류를 작성해 보내 주고 난 뒤 기지개를 켜는 도중 불현듯 수민이 생각났다. 인혁은 얘가 뭐 하고 있나 궁금해 고개를 돌렸다.
딱히 뭘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거란 생각 역시 하지 않았는데.
수민은 다리를 모아 끌어안고, 무릎에 팔과 턱을 대고는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엔 지루함이나 졸림, 그런 인간적인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민은 본래 표정이 다채롭지 않았다. 기본 표정이 무표정이었다. 웃을 때도 웃는 듯 마는 듯 웃어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수민의 무표정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평소의 무표정은 지금의 상태에 비하면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지금의 수민은 전원이 꺼진 로봇 청소기 같았다.
표정 없는 얼굴은 섬뜩하리만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저대로, 절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기다리다 재가 돼버린 아이처럼.
“수민아.”
인혁은 수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네.”
수민은 바로 대답하며 인혁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온기가 어렸다. 텅 빈 눈에 감정이 차오르고 그 위로 인혁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인혁은 그 과정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로봇 청소기가 인간으로 변하는 걸 보는 느낌이었다. 씨앗에서 싹이 움트는 경이로움이 아니라, 한순간도 관심을 받지 못하면 그 상태로 재가 되어 흩어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상태에서 아슬아슬하게 건져 낸 안도감이 들었다.
“오수민.”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만도 하련만. 수민은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전혀 아픔을 못 느끼는, 혹은 아픔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그게 아픔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인혁은 제 생각이 너무 과한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수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을 떼면, 잡고 있는 걸 놓치면, 또 그 상태로 돌아가 버릴까 봐.
“수민아.”
“네.”
“너, 평소 집에 있을 때 뭐하니.”
“집에 있을 때요?”
“응. 퇴근해서나 주말에.”
“…….”
수민이 눈을 깜빡였다. 그 시간은 무척 짧았다. 하지만 인혁은 무척 길다고 느꼈다.
인혁은 수민의 대답을 멋대로 예상해 보았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영화를 보러 가거나 산책을 간다거나, 뭘 배우러 학원을 간다거나. 무엇이든 좋으니 아무튼 뭔가를 한다고 말하기를 바랐다.
“그냥 계속 이러고 있어요.”
하지만 수민의 대답은 인혁이 바랐던 답이 아니었다.
“계속?”
“네. 아, 저녁 8시 20분에 드라마를 23분간 시청해요.”
“그리고?”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자요.”
“드라마를 보고 자기 전까지는 뭘 하는데?”
“아무것도요.”
수민이 고개를 저었다.
하. 인혁이 수민을 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소파에 팔까지 기대 턱을 괴고는, 다른 손으로 수민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취미를 만들어 줘야 하나. 운동이나 뭐, 그런 거. 그러고 보니 너 복싱장 갔을 때…….”
인혁은 말을 채 잊지 못했다.
수민의 앞머리를 만지던 손이 멈췄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서로 자신이 강간범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수민의 억지로 아직까지 붙어 있지만, 수민과 이전처럼 지내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인혁은 지난밤, 수면제를 먹고 침대에 누워서도 한숨도 못 자고 고민했다. 피곤해 굳은 머리를 억지로 굴려 낸 결론은, 이전에 썼던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수민을 달래 돌봄 센터로 보내고 자신과 격리시키는 것.
수민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에 의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설마 그때까지 러트 사이클이어서 전화 연락을 못 받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러트 사이클이 지나면 병원에 들르라고 했다. 몸 상태를 확인해 봐야 한다고. 오메가 접촉 없이 약으로만 버텼을 테니 당분간 페로몬이 불안정할 텐데. 또 멋대로 억제제 남용하지 말고 병원에 와서 검진받고 약 복용량을 조절하자고.
인혁은 아직 의사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의사는 이 빌어먹을 우성 알파의 러트 사이클이 열흘을 넘기고 있다고, 논문감이라고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걱정하고 있을 테니 연락을 해야 할 텐데. 인혁은 의사에게 연락하기 망설여졌다.
의사의 예상과 달리 인혁의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평소 고질병처럼 뒤따랐던 두통도 없었다. 머릿속이 가을의 맑은 하늘처럼 개운했다. 오메가와 러트 사이클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그 상태가 오늘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는 건 함께 러트를 보낸 오메가를 곁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민의 숨소리, 옅지만 달달한 향, 목소리, 씻고 나와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같이 밥 먹는 수저질 소리까지. 수민의 모든 것이 인혁에겐 마약성의 안정제였다.
수민에게서 안정감을 얻었다.
인혁은 그걸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간순간, 저도 모르게 수민을 자꾸 자신의 선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좀 떨어져 있고 싶은데. 그러면 정신을 차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수민은 도통 인혁이 혼자 두지 않았다.
자신의 상태를 알고 이러는 걸까. 모르고 이러는 걸까. 아마도 후자겠지만. 전자든 후자든 자신을 무너뜨리기엔 최고의 전략이라고, 인혁은 높이 평가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까 낮잠을 잘 때 인혁은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몇 년, 아니, 어쩌면 십수 년 만의 일이었다. 수민의 은은한 페로몬을 맡으며 잠드는 줄도 모르게 잠들었다.
중간에 잠깐, 평소처럼 어떤 꿈을 꾼 것도 같은데. 도닥여 주는 손길에 취해 편안해졌다. 그 느낌이 꿈이든 현실이든, 수민 때문인 것만은 분명했다.
잠을 자는 게 이렇게 편안하고 달콤한 일이라는 걸 오랜만에 실감했다. 그리고 그걸 깨닫자마자 인혁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런 행복을 감히, 누려도 되는 건가?
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죄책감마저 오래 간직할 수 없었다. 곁에 수민이 있었다. 절 버리지 말라며 매달리는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식사를 챙겨 먹이는 김에 같이 밥을 한술 뜨고. 그리고 이렇게 나란히 앉아 일을 하고, 수민의 취미나 걱정해 주고 있었다.
인혁은 20여 년 동안 강박적으로 곱씹어 왔던 죄책감을 실수로라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두려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수민을 대놓고 밀어 낼 수도 없었다.
가까이 있는 수민에게서 페로몬이 솔솔 밀려왔다. 연약하고 가느다란 향은 어느새 공기에 섞여 인혁의 폐를 채웠다. 인혁은 수민이 주먹 하나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안정감을 얻었다.
인혁은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매몰차게 다그치지도 못했다.
인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맨정신으로 수민과 섹스했다. 그때 수민을 끌어안은 건 분명 수민의 말마따나 맨정신인 인혁이었다.
이후 주말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접촉은 없었다. 수민은 맨정신으로 한 섹스를 끝으로 널브러졌고, 인혁은 몸 상태가 엉망인 수민을 데리고 뭘 더 할 생각도, 욕망도 들지 않았다.
일단 쉬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거실의 소파를 정리하고 수민을 눕혔다. 수민은 그때도 인혁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수민은 둘 사이에 조금만 틈이 벌어져도 자신을 버릴 거냐고 물었다. 지금보다 더 다급하고 절실하게.
인혁은 그런 수민을 차마 밀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수민의 곁에 있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수민을 껴안고 다독이고 재우기를 반복했다. 깨워서 물과 음식을 먹이고, 진통제를 먹였다.
한 공간에서 이틀을 더 보냈다. 말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몸은 계속 맞댔다. 수민의 온기가, 향이, 인혁의 목을 옥좼다.
인혁은 수민이 무섭고 편안했다. 수민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하는 제 알파다운 성질에 환멸을 느꼈고, 환희를 느꼈다. 양극단의 감정이 동시에 인혁을 붙잡고 흔들어 댔다.
인혁은 수민에게 한없이 친절하고 상냥해지고 싶었다. 지금까지 쌓아 온 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지난 반년간의 기억은, 어찌 됐건 인혁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2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인혁은 제가 늘 외로웠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야 나타난, 수민은 인혁에게 너무 달콤했다.
그렇기에.
인혁은 수민을 밀어 내고 수민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까지 쌓아 온 죄책감을 잊고 새 출발 같은 걸 하고 싶지 않았다.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거리만 남기고 나란히 앉은 지금, 딱 이 거리가 인혁의 마음이었다. 밀어 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예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비겁함. 김인혁이란 사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비겁함으로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다.
인혁은 그런 자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확실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이런 안일한 마음으로는 절대, 수민을 버리지 못할 거라는 것.
수민은 손에 넥타이를 감고 있었다. 언제든 저걸로 인혁을 묶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혁은 그런 수민을 끔찍하게 여기진 못할망정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미 끝난 것 아닐까? 이렇게 어영부영 망설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인혁은 수민을 밀어 내지도, 끌어당기지도 못했다.
인혁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꾹 참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절 보는 수민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구역질 나게 싫었다.
***
그렇게 잤는데도 밤이 되니 졸렸다. 수민은 일일 저녁 드라마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꾸벅 졸았다.
“졸리면 가서 자.”
“아니에요.”
“아냐?”
“네.”
“그래.”
인혁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묻지 않았다. 수민은 입 안쪽 살을 깨물며 좀 더 버텼다.
며칠씩 잠을 안 자고 버티는 훈련을 숱하게 했다. 그 결과 수민은 극한 상황에서 사흘 이상 잠자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수민은 그런 자신이, 낮에 그렇게 길게 자놓고도 지금 맥없이 졸려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인혁의 집, 인혁의 옆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혁의 냄새가 가득한 곳이니까, 인혁이 절 버리고 가지 않는 이상 인혁의 옆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니까.
긴장하고 사는 게 당연한 몸이 자꾸 흐물흐물해졌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러면 인혁이 절 버리고 가도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될 것 아닌가. 수민은 슬그머니 인혁의 옷소매를 움켜잡았다.
“안…… 되는데.”
“뭐가.”
“그런 게, 있어요…….”
“눈 뜨고 잠꼬대하니?”
“…….”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인혁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딱히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어 본 적은 없지만,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해주거나 듣는 걸 본 적 있었다.
수민은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거 같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럼 인혁은 재벌 3세인 걸까?
“이젠 웃어?”
“…….”
수민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고개를 흔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인혁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몸이 자꾸 앞으로 넘어갔다. 수민은 고개를 들어 올리려 애썼다. 인혁은 왜 이 노력을 몰라주는 건지. 수민은 참 서운했다.
“졸리면 자라니까.”
인혁은 졸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수민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수민도 따라 일어났다. 여전히 인혁의 소매를 붙잡고 인혁을 졸졸 따라갔다.
인혁은 침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돌아섰다. 졸린 눈을 비비는 수민과 수민이 잡고 있는 제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수민은 알아서 인혁의 옷자락을 놓았다.
“여기서 또 웅크려 잘 생각이지?”
인혁이 수민의 손을 붙잡았다.
“…….”
수민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들어와.”
인혁이 한숨 쉬며 수민을 잡아끌었다. 수민은 얼결에 침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이 확 깼다.
침실 안에는 여전히 인혁의 냄새가 가득했다. 수민은 심호흡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인혁은 수민을 침대에 앉히고, 손님방에서 이불을 가져와 바닥에 깔았다.
“감사합니다.”
수민은 꾸벅 인사하고 바닥에 누우려고 했다. 인혁이 수민을 잡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여기서 자.”
인혁이 이불 깐 바닥에 누웠다.
“…….”
수민은 잠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제가 밑에서 잘게요.”
뒤늦게 인혁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인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각.”
“소장님.”
“안 돼. 안 바꿔 줘.”
“……그럼 그냥, 침대 위에서 같이 자면 안 될까요?”
“너랑 내가? 그 침대에서?”
인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
네, 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저도 그냥 바닥에서 잘래요.”
수민은 그냥 인혁의 옆자리에 누웠다.
“올라가.”
“…….”
“오수민, 말 안 들지?”
“…….”
“내쫓는다?”
“…….”
수민은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머리 위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 이것 보게. 이젠 아예 듣는 척도 안 하네?”
“……자는 중이라 그런 걸 거예요.”
“아아, 자는 중이라서?”
“…….”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바닥이 좋으면 넌 여기서 자. 내가 올라갈 테니까.”
인혁이 벌떡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
수민은 조금, 서운해졌다.
“입꼬리 내려가는 거 보인다.”
“그럴 리가 없는, 아.”
수민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만졌다. 뒤늦게 아차 싶어 눈을 뜨고 인혁을 보았다. 인혁은 턱을 괴고 누워 수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 놔두고 혼자 침대에 누우시니 편하세요?”
수민은 들킨 김에 반듯이 누워 인혁을 실컷 올려다보았다.
“왜? 밑에서 자고 싶다며.”
“보통 이러면, 침대가 넓어서 괜찮다고 올라오라고 하던데요.”
“누가? 어디서?”
“드라마에서요.”
“그놈의 드라마. 내가 항의 전화를 걸든지 해야지.”
인혁이 한숨을 쉬며 손을 까딱였다. 수민은 그 뜻을 바로 알아듣고는 베개를 들고 침대로 올라갔다. 인혁의 옆에 베개를 내려 두고 얼른 누웠다.
“빠르네? 올라오라고 안 그랬으면 서운해 울었겠어?”
“걱정하지 마세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가운데에 베개로 선을 긋지 않아도,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 드라마 이름이 뭐라고?”
“<사랑이 별거>요. 이미 완결 났어요.”
“완결 났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인혁이 웃으며 누웠다. 매트리스가 출렁였다. 수민은 손목에 감고 있던 넥타이를 풀러 인혁의 손목을 꽁꽁 묶었다. 반대쪽은 자신의 손목에 둘렀다.
“그래, 그걸 왜 안 하나 했다.”
인혁은 반항하지 않았다. 묘하게 체념한 태도였다.
둘은 나란히 누웠다. 침대는 충분히 커서,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도 몸이 닿지 않았다.
수민은 일부러 가까이 달라붙지 않았다. 인혁과 같은 침대에 누워 인혁의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물론 바로 며칠 전까지 이 침대 위에서 자신과 인혁이 어떻게 맨몸으로 엉켜 서로의 몸을 빨고 깨물었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수민은 그때가 그리웠다.
인혁에게 안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상냥하게 수민아, 라고 불러 주고 키스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부로 인혁에게 조르거나 매달리지 않았다. 지금의 인혁은 절 안아 주거나, 제 구멍에 성기를 박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수민은 참았다.
눈을 감고 자는 것처럼 숨소리를 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인혁을 바라보았다. 침실은 어두웠지만, 커튼을 치지 않아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으로 인혁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염없이 인혁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인혁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수민은 놀랐으나 피하지 않았다.
“…….”
“…….”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계속 바라보았다. 누구도 먼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수민은 인혁 쪽으로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팔을 베개 삼아 베고 몸을 웅크렸다. 인혁이 움직이기 편하라고 넥타이에 묶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수민은 그 손을 잡고 깍지 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더 오래 인혁을 보고 싶은데, 아까 잠깐 미뤄 두었던 졸음이 다시 밀려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민이 누운 곳은 인혁의 침실, 인혁의 옆자리였다. 온통 인혁의 냄새 천지였다. 그 속에서 수민은 감히 졸음과 맞서지 못했다. 수민은 웅크린 채로 먼저 잠들었다.
인혁은 수민이 잠들자 손을 뻗었다. 웅크린 모습이 안쓰러워서 손이 나갔다.
“…….”
하지만 닿기 전, 손을 거두었다.
차라리 수민이 제 손을 다시 침대에 붙들어 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인혁은 묶이지 않은 팔로 눈을 가렸다.
수민의 숨소리가 들렸다. 숨에 달달한 페로몬이 섞여 있었다. 이 미약한 향을 어떻게든 더 느껴 보겠다고, 수민의 목에 코를 박고 피를 빨 듯 숨을 쉬어 댔던 며칠 간의 기억이 아직 선명했다. 저 고른 숨이 거칠어져 간간이 끊길 때까지, 성기를 박고 흔들고 싸고, 힘들다고 흐느끼는 입술을 깨물어 그마저 완벽하게 삼켜 냈던 나날이 얼마나 만족스러웠던지.
다리 사이에 묵직하게 신호가 오는데,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면서 곤한 피로감을 느꼈다.
‘내가 약을 챙겨 먹었던가?’
수면제를 먹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으나 약을 먹으러 일어나기는커녕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인혁은 수민의 숨소리를 듣다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들었다.
달빛 비치는 침실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섞여 차곡차곡 쌓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