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6. 오수민, 24세, 오메가 (8)
8월의 막바지. 수민이 검정고시를 보러 가기로 한 날. 일이 터졌다.
아침 일찍, 인혁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평소라면 바로 일어나 전화를 받았을 텐데. 그날따라 인혁이 쉽게 잠에서 깨지 못하고 손만 뻗어 협탁 위를 더듬었다.
전날 밤늦게까지 인혁과 수민은 막판 벼락치기를 시도했다. 아니, 인혁이 수민에게 벼락치기 공부를 강요했다.
그전까지 두 사람은 퇴근해 집에만 도착하면 현관에서부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매일같이 절제 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 인혁은 문득, 자신이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 시험, 언제지?”
하필이면 성기를 박기 직전, 인혁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얼마나 매너 없는 짓인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잔뜩 발기한 게 바로 식지는 않았지만, 인혁은 묘한 위화감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검정고시가 8월 언제쯤이었던 것 같은데.’
요 근래 도통 수민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 방만한 수험 생활에 자신이 톡톡히 공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 인혁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모, 몰라요. 어서요. 빨리, 넣어 주세요.”
수민이 더운 숨을 뱉으며 삽입을 졸랐다.
희미하게 맡아지는 단내가 인혁의 이성을 뒤흔들었지만, 인혁은 꿋꿋이 정신줄을 붙잡았다.
“모르긴 왜 몰라.”
“흐윽…….”
수민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인혁을 올려다보았다.
수민은 잔뜩 흐트러진 채로 인혁의 밑에 깔려 있었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과 유두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수민은 입술을 꼭 깨물고 몸을 뒤집었다. 인혁을 침대에 눕히고, 수민이 그 위에 올라탔다.
“수민아, 잠깐, 윽!”
인혁이 뭐라고 하든 말든, 수민은 허리를 내려 인혁의 성난 성기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조였다.
“하, 윽.”
인혁이 신음했다.
목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수민은 갈증을 느끼며 그의 목선을 혀로 핥았다.
“빌어먹을.”
“흣, 아! 앗…….”
검정고시 일정이 인혁의 머릿속에 남아날 수 있을 리 없었다.
“빌어먹을.”
“흣, 아! 앗…….”
인혁은 다시 몸을 뒤집었다. 그리곤 두 손으로 수민의 허리를 잡고 성기를 박아 댔다. 겨우 원하는 것을 얻은 수민은 인혁에게 매달려 마음껏 신음하며 흐느꼈다.
그렇게 검정고시 일정 따위, 영영 잊히길 바랐건만. 인혁은 정사 후 수민을 제 위에 올리고 후희를 즐기다, 수민에게 속삭였다.
“그래서, 시험 보는 날이 언제라고?”
“…….”
수민은 바로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그런다고 인혁의 집요한 학부모적 열정을 피할 순 없었다.
그날. 인혁은 핸드폰으로 검색해 검정고시가 불과 며칠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깊게 반성했다. 공부하는데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주지는 못할망정, 시험이 얼마 안 남은 애를 데리고 매일같이 그 짓을 했다니.
인혁은 시험 날까지 금욕을 선언했다. 수민은 반발했으나 이번만큼은 인혁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대학을 가라고 강요하진 않을 거야.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도울 거고 지원할 거지만, 네가 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지만, 거기까진 강요하진 않을 거야.”
“그게, 강요가 아니라고요?”
“그래. 하지만 검정고시는 아니야. 수민아, 고등학교 졸업장은 따자. 이왕 시작한 거. 응?”
“…….”
사실 그동안 공부를 거의 안 했으니까. 시작한 셈 칠 수 없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인혁은 내년 4월 검정고시까지 성교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만들고 변호사 공증까지 받아 올 것 같았다.
“네.”
수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혁은 비로소 웃음 지었다. 그리곤 수민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줬다.
“착하다, 착해.”
“…….”
인혁은 수민을 다루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수민은 인혁의 응원에 힘입어 검정고시 교재를 폈다. 물론 다음날부터.
인혁은 수민이 출근하지 않고 스터디 카페를 가거나 집에서 공부하길 바랐지만, 수민이 늘어난 넥타이를 힐끔 쳐다보는 걸 보고 그 생각은 접었다. 대신 사무실에 출근하되 사무실에서 공부만 하게 만들었다.
서 여사와 박 씨에게 일거리를 넘겨주지 말라며 신신당부하고는, 눈에 불을 켜고 수민이 공부를 하나 안 하나 지켜봤다.
“애인 뒷바라지하는 거야?”
서 여사가 유난이라며 비꼬듯 놀렸다. 인혁은 어깨만 으쓱일 뿐,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퇴근하면 인혁은 ‘수험생에게 좋은 음식’ 같은 걸 핸드폰으로 검색해서는 사 오든 어설프게 만들어서든 차려 주었다.
식사 후엔 거실에 교재를 펴고 옆자리를 툭툭 쳤다. 방에 밀어 넣고 공부하라고 해봤자 안 할 걸 아니까 아예 옆에 앉혀 두고 공부시키려는 것이었다.
수민은 그 악독함에 치를 떨었지만 거부하지 못했다. 언제나 털레털레 인혁의 옆으로 가 앉았다. 인혁의 옆자리 말곤 갈 곳이 없었다. 수민은 인혁의 감시하에 문제를 풀고 채점했다. 다행히 인혁은 8시 20분에 TV를 볼 수 있는 쉬는 시간은 허락해 주었다.
두 사람은 드라마를 시청하고, 다시 공부했다. 침실로 가서도 인혁은 수민의 옆에 누워 한국사 교재를 읽어 주었다.
성우의 낭독을 듣는 것 같았다. 잠이 아주 잘 왔다. 수민은 인혁이 교재를 두어 장 읽기도 전에 잠들었다. 인혁은 수민이 잠든 걸 확인한 뒤 잘 자라며 이마에 입 맞추고는 불을 껐다. 그리고 수민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그 느긋함은 딱 시험 이틀 전까지만 지속됐다.
시험 전날. 인혁은 밤늦게까지 벼락치기 공부를 강요했다.
“원래 공부는 시험 전날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야. 이때 공부한 게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아.”
인혁이 수민을 격려하듯 말했지만 수민은 전혀 기운이 나지 않았다.
수민은 기운 없이 교재를 팔랑팔랑 넘기며 시험이 끝나자마자 인혁을 덮칠 생각만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유로, 어서 내일이 오길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시험 보고 같이 맛있는 거 먹자.”
“같이요?”
“널 어떻게 혼자 보내. 시험 보기 싫다고 딴 길로 새면 어떡하라고.”
“……안 그래요.”
“안 믿어. 그러니까 같이 가서 시험장에 내려 주고, 시험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
“…….”
수민의 눈이 커졌다. 인혁은 수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뭐 먹고 싶은지, 시험 끝난 다음에 같이 생각해 볼까?”
“네.”
수민은 좀 더 의욕적으로 교재를 들여다보았다. 인혁은 진작 이렇게 공부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며, 수민의 정수리에 입 맞췄다.
그렇게 둘은 함께 공부하다 누가 먼저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었다. 그러니 이른 아침의 전화가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인혁이 겨우겨우 핸드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여보세요.”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며, 옆에 누워 있는 수민부터 확인했다. 시험 보는 날인데 이런 걸로 컨디션이 흔들리면 안 될 일이었다. 안 깨고 계속 자고 있기를 바랐으나 수민은 졸음이 가신 눈을 깜빡이며 인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더 자.”
인혁은 잠깐 핸드폰에서 얼굴을 떼고 수민에게 속삭였다. 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혁의 품에 파고들었다.
-김 소장!
핸드폰에서 서 여사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인혁이 얼른 통화음을 줄였다.
“여사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
편안하게 전화를 받던 인혁의 얼굴이 굳었다. 수민은 인혁의 몸이 긴장하는 걸 느끼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툭, 핸드폰이 수민의 눈앞에 떨어졌다.
-확실하지는 않아, 그런데 그쪽에서 찍어서 보내 준 사진이, 비슷하긴 해. 여보세요? 김 소장, 듣고 있어? 김 소장!
핸드폰에서 서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민은 손을 뻗어 인혁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기 전에 인혁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인혁은 핸드폰을 들고 문 앞으로 가 서 여사와 통화를 이어갔다.
서 여사가 일방적으로 말했다. 인혁은 들을 뿐이었다. 서 여사가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 서 여사에게 연락 올 일이야 뻔했다. 급한 제보를 받은 거겠지. 당장 현장에 나가야 하거나. 그런 일이 이전에도 숱하게 있었다. 익숙한 일이건만.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수민은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인혁을 바라보았다.
인혁이 전화를 끊었다.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 그는 수민에게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민은 비틀대며 일어나 인혁의 팔을 붙잡았다.
“아, 수민아. 너…….”
인혁이 그제야 수민을 기억해 냈다. 수민은 하얗게 질린 인혁의 얼굴을 보았다.
“수민아. 어쩌면 좋지?”
“…….”
“미안하다.”
“…….”
수민은 또 숨 쉬는 걸 잊었다. 그리고 인혁이 할 다음 말을 예상했다. 내 아들을 찾은 거 같아. 이제 우린, 이러면 안 되겠다. 그만하자, 이런 관계.
그제야 수민은 저와 인혁의 관계가 고작 그런 말 한마디면 끝나 버릴, 얄팍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인혁이 아내와 아들을 찾으면 바로 버려질, 그 정도의 무게밖에 안 된다는 것을.
“수민아, 그러니까.”
인혁이 수민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수민은 그 손을 떨쳐 내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인혁의 손을 묶어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지내 왔던 나날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역시, 방심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을까? 오늘을 위해?
수민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우습게도, 동작을 멈춘 머리는 너무 쉽게 옛 기억, 옛 습관, 옛날에 훈련받은 것을 떠올렸다.
태어나면서부터 익히고 자라면서 배운 것들은 전혀 잊히지 않았다. 본능이 되었다.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수민의 사고를, 텅 빈 머릿속을 지배했다.
수민은, 수민의 머리는, 인혁을 감금할 계획을 자연스럽게 도출해 냈다.
넥타이는 밖에 있었다. 수민은 넥타이를 찾으러 가는 대신 인혁의 발목을 꺾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망칠 틈을 주면 안 되니까.
일단 발목부터 부러뜨려 놓고 그다음에 손을 묶든 하면 될 일이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재갈도 물려야겠지.
“미안하다, 오늘 시험, 보러 못 갈 것 같아.”
인혁은 수민의 예상대로 말했다.
수민은 인혁이 제게 혼자 시험을 보러 가라고, 자신은 가족을 찾으러 가겠다고 말하리라 예상했다. 어젯밤의 약속은, 함께 시험장에 가고 시험이 끝나면 둘이서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던 것은 이미 인혁의 머릿속에서 사라졌으리라.
발목이 없으면 많이 아플 텐데. 잠깐 망설였던 수민은 그 마음마저 말끔히 지웠다.
“나랑 같이 가자, 수민아.”
인혁이 말했다.
“저 안 버린다면서요.”
수민이 인혁의 발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돌아서면 바로 발을 걸고 넘어뜨려 아킬레스건을…….
“뭐?”
“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되물었다.
잠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인혁이었다.
“여기서 버린다는 말이 왜 또 나와.”
“같이, 가요? 저도요?”
수민의 얼굴에 드물게도 감정이 선명히 드러났다.
“…….”
“…….”
“수민아. 오수민.”
인혁이 수민을 끌어안았다.
“저도, 가요?”
수민이 다시 물었다.
“그래.”
인혁이 답했다. 인혁은 비로소 수민이 숨을 내쉬는 소릴 들을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네.”
수민이 바로 답했다.
“너 오늘 시험인데.”
“상관없어요.”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 그동안 노력한 거 아깝지 않아?”
“하나도 안 아까워요.”
수민은 인혁을 꽉 끌어안았다.
“……그래도 미안.”
인혁이 수민의 등을 도닥였다. 수민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후 두 사람은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씻거나 뭔가를 먹을 새가 없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타 서 여사가 문자로 보내 준 주소로 향했다.
가면서 인혁이 상황을 설명해 줬다.
서해안 쪽에서 인혁의 아내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목격했다. 제보한 사람은 그 지역 범죄 피해 여성 돌봄 센터의 복지사였다.
지난달, 그 지역에서 경찰이 작정하고 대대적으로 성매매 업소를 적발했다. 그때 돌봄 센터가 협력해 강제로 끌려오거나 안 갚아도 되는 빚에 묶여 성매매를 강요당하던 피해자들을 구출했다. 그리고 이후 피해자들의 재활을 맡았다.
복지사는 서울에서 일하다 고향으로 내려간 사람으로, 이전에 인혁의 사무실과도 몇 번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복지사는 제가 돌보는 피해자 중 한 명의 인상착의가 아무래도 익숙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종자 목록을 뒤져 보다가 인혁의 사무실에 연락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있는데, 서 여사는 인혁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 왔다. 인혁은 가까운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확인했다.
멀리서 찍은 거라 확대해 봐도 이목구비가 선명하지 않았다. 다만 대략적으로나마 여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둥근 얼굴형의 눈이 큰 미인.
인혁은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차 시동을 켰다.
한참 묵묵히 운전만 하던 인혁이 손끝으로 톡톡, 핸들을 두드렸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고맙다, 같이 가줘서.”
수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
수민 역시 말해도 될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물었다.
“소장님 아내 분이, 맞을까요?”
“확실하지 않지만. 가서 보면 알 수 있겠지.”
“…….”
가서 확인했는데, 맞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 안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수민은 앞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늘 생각해 왔다. 인혁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가족을 찾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상황을 고려했다. 인혁이 그들에게 가버릴 것은 분명했기에, 그 전제를 깔아 두고 이후 행동 방향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 일이 이렇게 당장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20년 넘게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런데도 셋 중 누구 하나도 못 찾았다고 했다.
인혁은 여전히 필사적이지만, 그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서 여사와 박 씨는 그들의 생존에 회의적이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 생각이 은연중에 태도로 드러났다.
그래서 수민은 약간, 방심했다.
20년 동안 찾아도 못 찾았는데. 이제 와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찾게 된다 해도 아주 나중이겠지.
그 안일함의 대가가 바로 오늘이었다.
이제 곧, 인혁이 그의 가족과 재회하는 날것의 상황을 맞닥뜨려야 한다.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핸드폰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던 인혁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역시 아까 집에서 인혁의 발목을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순순히 가족을 만나러 가도록 놔둬선 안 되는 거였는데. 수민은 짙은 무력감을 느꼈다.
“가족을 찾으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수민이 물었다.
“너를 왜 물어봐.”
인혁이 매정하리만치 단호하게 말했다. 수민은 눈으로 운전석을 훑었다. 핸들을 잡아채 돌리거나 액셀을 밟게 하면 어떨까.
아직 인혁과 가족을 못 만나게 할 방법이, 기회가 남아 있었다. 좀 다치더라도, 혹시나 죽더라도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수민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직전.
“너 말고 내가 어떻게 될지 걱정해 줘야지. 수민아.”
인혁이 말했다. 수민은 듣고,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네?”
“날 걱정해야만 한다고.”
“…….”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면, 물론 지극정성으로 간호할 생각이었다. 혹시, 생각을 들킨 걸까?
“제가, 소장님을요?”
수민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래.”
인혁이 답했다. 딱히 교통사고를 두려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왜요?”
그래서 수민은 인혁의 말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대로 놔두면 날 놔두고 가족한테 가버릴 사람을 왜 걱정해 줘야 하지?
20년의 벽 앞에서 반년은 너무 얄팍했다. 수민은 감히 어떤 기대도 하지 못했다.
“스무 살이나 어린, 아들뻘인 애랑 같이 사는 줄 알면 아내랑 아들이, 처남이 날 어떻게 보겠어.”
“……저랑 성교한 걸, 가족들한테 솔직하게 말씀하실 생각이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놈의 성교…….”
인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수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내가 말 안 했나? 내 처남이 덩치가 나보다 크고 힘도 나보다 세. 그 덩치로 예전에 날 불러내서 경고했었거든. 자기 누나 얼굴에서 눈물 나게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인혁이 재킷 안쪽에 난 주머니를 더듬다 말았다. 이제 그에겐 물고만 있을 담배조차 없었다.
“처남이, 내가 자기 누나 두고 너처럼 어린 애랑 살림 차린 걸 알면 날 가만 놔두겠니. 수민아, 네가 못 알아볼 정도로 맞을지도 몰라, 나.”
“…….”
“그때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 괜히 끼어들었다가 실수로라도 맞아서 다치지 말고. 알았지?”
“…….”
“수민아.”
인혁이 손을 뻗어 머리를 헤집었다. 손의 떨림이 느껴졌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 내가, 네 생각만큼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닐 거야.”
인혁이 쓰게 웃었다.
“아들뻘인 애랑 붙어먹으면서, 설마 책임질 생각을 안 했을까?”
“…….”
수민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 안 했을 줄 알았어?”
“…….”
“네가 그동안 날 어떻게 봐왔는지 이제야 알겠다.”
“……아니에요, 그런 거.”
수민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행인데.”
인혁이 손으로 수민의 뺨을 쓸었다.
“내가 운전 중이라 안아 줄 수 없을 때는 울지 말자.”
다정히 눈물을 닦아 주는 인혁의 손은 티가 날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제야 수민은 인혁의 얼굴이 얼마나 창백해져 있는지 알아보았다.
“우리 수민이, 이렇게 울보였는지 내가 몰랐네.”
인혁이 손수건을 꺼내 주며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박 씨를 흉내 내 분위기를 돌려 보려고 한 것 같은데.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냐.”
수민은 인혁의 손이 머리에, 또 어깨에 닿을 때마다 겨우 멈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오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인혁은 왜 자꾸 우냐고 걱정했지만, 수민은 그 이유를 절대 말해 주지 않았다.
목적지는 큰 도로에서 갈라진 좁은 비포장도로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커다란 공장이었다. 먼저 출발했다던 서 여사의 차가 공장 앞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여기야, 여기!”
서 여사가 둘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서 여사가 서 있는 쪽으로 갔다. 수민은 인혁과 나란히 걷다가 슬그머니 인혁의 손을 잡았다. 인혁은 말없이,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곳은 채소를 포장하는 공장이었다. 박 씨는 작업반장이라는 사람과 벌써 친해져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 오셨구만. 이쪽 분들한테 얘기는 들었수다. 사람을 찾는다고? 여서 잠만 기다리슈.”
작업반장은 TV에서 자주 봤다며 인혁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안에 들어가 누군가의 이름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기계음, 목소리로 시끄러운 공장 안에 작업반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곧, 한 여성이 이쪽으로 뛰듯 걸어왔다. 머리를 수건으로 싸매고, 앞치마와 장갑, 장화를 신고 있었다. 마스크가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었다. 키는 서 여사보다 컸다.
인혁은 여성이 걸어오는 모습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안녕하세요, 절 찾으셨다면서요.”
여성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마스크를 벗었다.
서 여사와 박 씨는 인사하는 대신 인혁을 돌아보았다. 수민 역시 인혁을 보았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인혁은 여성을 마주 보고, 옅게 웃음 지었다.
“안녕하세요. 김인혁이라고 합니다.”
인혁이 손을 내밀었다.
“아, 예. 저, 알아요! 저 TV에 나오시는, 그분이죠?”
여성이 악수를 받아 주며 반갑게 말했다.
“네.”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여성은 슬쩍 서 여사와 박 씨, 수민까지 돌아보고는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혁은 TV로 봐야 신기하고 멋있는 사람이지, 실물을 봐봤자 좋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늘 범죄 현장만 헤집고 다니고, 범죄 피해자들만 도우러 다니니까. 게다가 여성은 그런 범죄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불안해할 만했다.
“갑자기 죄송합니다. 저희가 찾는 사람이랑 인상착의가 비슷해서, 확인차 찾아왔습니다만…….”
“…….”
여성이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깜박였다.
“아니었네요. 전혀 다른 분이시네요.”
인혁이 쓰게 웃었다.
“아, 네에, 그렇군요!”
여성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일하시는 중에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인혁이 깍듯하게 고개 숙였다.
“아우, 아니에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니라니까 다행이네요. 그 찾으시는 분…… 꼭 찾으시면 좋겠어요.”
여성이 딱 봐도 안심된다는 얼굴로 편히 웃었다.
공장 안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여성은 가봐야겠다며 돌아섰다. 인혁은 붙잡지 않았다.
“뭐, 아닌가벼요?”
옆에서 지켜보던 작업반장이 뒤통수를 박박 긁으며 말했다. 인혁은 여성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아, 진짜. 서울에서 연락받자마자 쌩하니 날아왔는데. 이게 뭔 날벼락인지. 에휴, 또 헛걸음한 거죠, 뭐.”
박 씨가 청승맞게 투덜댔다.
“거, 서울 양반들이 고생이 많으시네. 여까지 온 것도 인연인데, 그럼 사무실에 가서 커피나 한잔하는 건 어떠요? 거, 담배는 피우나?”
작업반장이 박 씨의 등을 퍽퍽 두드리며 선심 쓰듯 말했다.
인혁이 오기 전, 박 씨가 슬그머니 찔러 준 봉투 속엔 커피 백잔 값 정도는 될 만한 금액이 들어 있었다. 금가루 뿌린 믹스커피를 타 준다 해도 작업반장이 손해 볼 건 전혀 없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인심 좋으시네. 인상만 좋으신 줄 알았더니.”
박 씨는 그 봉투 따윈 까맣게 잊었다는 듯 작업반장에게 고맙다고 넙죽 고개를 숙였다.
박 씨가 눈짓하니 서 여사가 얼른 동참했다. 서 여사는 박 씨를 따라가며 수민에게 눈짓했다. 수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사라지자 주변이 금세 조용해졌다.
인혁은 공장 벽에 등을 기대곤 스르륵 주저앉았다. 팔을 무릎에 걸치고는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다시 들더니, 제 앞에 선 수민을 올려다보았다.
“나 좀, 안아 줄래?”
인혁이 손을 내밀었다.
수민은 무릎을 바닥에 꿇고 앉아 인혁을 끌어안았다.
“고맙다.”
인혁은 두 팔로 수민의 허리를 감싸 안고 수민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긴장이 풀리고, 탈력감이 몰려왔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항상,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나는.”
인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주변이 정말로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반쯤 열린 철문 안에선 채소를 씻는 소리, 포장하는 소리, 박스를 접는 소리, 직원들이 소리치고 웃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배경음처럼 뭉그러졌다. 그 모든 소리를 누르고, 인혁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찾아서, 그동안 못 했던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제대로 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인혁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런데 널 만나고 나선. 적어도, 좋은 남편 노릇은 못 해주겠구나, 하고 생각했지.”
인혁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숨이 맞닿고, 서로의 눈에 서로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안한데, 비겁한 부탁이라는 거 아는데. 이런 상황에서 앞뒤 생각 못 하고, 이런 상황에서만큼은 널 우선해 생각하지 못하는 날, 조금만 이해해 주겠니?”
아내가 아니었다.
아내를 찾지 못했다.
지난 20년간 수없이 겪은 일이었다. 새삼 실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내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순간, 인혁은 실망감보다 수민에 대한 죄책감을 먼저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경멸하지 못했다.
대신 수민에게 이딴 말로 동정을 구하는 자신을 경멸했다.
“그럴게요.”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한 주제에. 수민의 주저 없는 대답에 안도하는 자신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그럴게요. 그럴 거예요.”
“수민아. 아가.”
인혁이 수민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네.”
“그렇게 말하면서 왜 자꾸 그런 표정을 지어.”
“제 표정이, 어떤데요?”
“버림받은 거 같은 표정.”
“그럼 저, 버리지 마세요.”
“안 버려. 절대.”
인혁은 수민을 제 품에 파묻듯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너도…… 나 버리고 어디 가지 마. 절대, 절대 그러면 안 돼.”
인혁의 손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수민은 그 떨림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사무실 사람들은, 특히 서 여사와 박 씨는 언제 인혁이 또 허탕을 쳤냐는 듯, 수민이 검정고시를 보러 가지 못했냐는 듯, 사정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인혁과 수민은 그 배려 속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8월이 끝나고 9월이 되어도 더위는 극성이었다. 사무실에선 여전히 에어컨이 돌아갔다.
“이젠 9월까지 여름으로 봐야 하지 않나?”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박 씨의 한탄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높고 파랬다. 9월이 자신은 가을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여름이 끝나지 않는 것 같아도, 가을이 오긴 하는 건가 의심이 들어도, 여전히 사무실은 적당히 바쁘고 적당히 느긋하게 돌아갔다.
박 씨는 여전히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눌렀다. 서 여사는 매일 한 번 떡볶이를 먹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듯 굴었다. 수민은 할 일이 없을 땐 멍하니 앉아 있거나 인혁을 쳐다보았다. 인혁은 각종 강연 요청과 출연 요청에 시달리며,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공문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사무실 사람들의 핸드폰 벨 소리는 여전히 파괴적이었다. 서 여사는 1층 백반집 사장인 미현이 아빠와 여전히 으르렁댔다. 낮이든 밤이든 제보 전화가 오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무실 사람들은 무조건 출동했다.
다만, 이제 인혁은 집에 가기 귀찮다고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자지 않았다. 웬만하면 6시에 수민을 데리고 퇴근했다.
수민 역시 이전처럼 30분 일찍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다. 인혁과 함께 출근하니, 9시가 될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면 양반이었다. 때론 9시가 좀 넘어서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했는데, 인혁이 뭐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서 여사와 박 씨의 눈빛 공격을 대신 받아 주었다.
그런 일상 속에서 인혁과 수민은, 주변으로부터 얼굴이 많이 폈다는 소릴 들었다.
“수민 학생, 또 머리 잘라야겠어. 많이 자랐네.”
서 여사가 커피 잔을 수민의 책상에 올려 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수민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서 여사가 뭘 발견한 듯 눈이 동그래졌다. 수민은 또 길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서 여사를 보았다.
“여기, 수민 학생도 귀 뒤에 점이 있네?”
“점이요?”
“응. 여기.”
서 여사가 수민의 왼쪽 귀 뒤쪽을 콕 찔렀다. 수민은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그거 알아? 김 소장도 수민 학생처럼 귀 뒤에 점이 있는 거?”
서 여사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귓속말했다. 수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요?”
몰랐다. 매일같이 붙어먹는데도.
오늘 밤에 꼭 확인해 봐야지 싶었다.
“그래. 예전에 발을 헛디뎌서 머리로 김 소장 등짝을 들이받은 적이 있거든. 그때 같이 엎어졌는데, 그때 봤지. 신기하네, 둘이 같은 자리에 점이 있어.”
서 여사가 호호,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박 씨가 모니터 옆으로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서 여사는 꺼지라며 휘휘, 손을 내저었다.
“둘만 비밀 얘기하는 거 안 보여? 낄 생각하지 마.”
“아, 맨날 나만 왕따야.”
“억울하면 박 씨도 신입 하나 더 들여서 옆자리에 앉혀.”
“…….”
수민은 서 여사의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박 씨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박 씨가 씩- 웃었다. 알았쓰.
“서 여사님, 아직 모르시나 본데. 나랑 수민이는 뽜이터끼리의 교감이 있다니까.”
“박 씨 혼자만의 교감인 거 같은데.”
서 여사는 신랄하게 비웃고는, 박 씨에게 보란 듯 수민에게 속닥거렸다.
“아, 무슨 얘기 하는 건데요오.”
박 씨가 투정 부리듯 소리치자 서 여사는 아예 몸을 숙이고 비밀 접선하듯 수민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김 소장이랑 수민 학생이랑 좀 닮아 보이는 거 알아? 둘 다 요즘 얼굴이 좋아져서 그런가. 아주 예뻐, 둘 다 얼굴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서, 내가 출근할 맛이 난다니까.”
수민 학생 오기 전에는 김 소장 저거 아주 엉망이었어. 수염 깎는 거 귀찮다고 덥수룩하게 기르고 다닌 적도 있다니까. 으으.
서 여사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사무실에 거지 왕초 하나 모시고 산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미 여러 번 들었던 터라 수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튼, 둘이 많이 닮은 거 같아.”
서 여사가 다시 한번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같이 밖에 나가면 형제나 부자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혁은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말을 듣기 거북해했지만, 수민은 좋았다.
“좋아하면 상대를 닮는데요.”
“어머, 어머? 누가 그래?”
“<사랑이 별거>에서 나왔어요.”
“하긴, 부부도 오래 같이 살면 얼굴이 똑같아지고 그런다잖아. 아이구, 좋을 때네. 좋을 때야.”
서 여사가 혼자 부끄러워하며 수민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두 분이서 뭐하십니까들?”
그때 머리 위에서 묵직한 저음이 들렸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우, 향 좀 어떻게 해봐. 내가 맡을 정도면 좀, 심한 거 아냐?”
서 여사가 질색하며 의자를 뒤로 물렸다. 박 씨는 이미 사무실 구석에 찌그러져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왜 그러지? 기분 좋기만 한데. 수민만 편안하게 숨을 들이켰다.
“여사님이랑 둘이서만 뭐 했어.”
인혁이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민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인혁의 냄새가 좀 더 짙어졌다. 머리 위로 향기로운 것을 쏟아붓는 느낌이었다. 수민은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즐겼다.
“그만해, 사무실에서 뭐 하는 짓이야!”
옆에서 서 여사가 구시렁대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수민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 순간을 고작 그런 걸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이 냄새가 인혁의 페로몬이라는 것을 안다.
서 여사의 말대로 인혁은 우성 알파니까 망가진 오메가인 자신도 그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겠거니, 쉽게 납득했다.
인혁도 수민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다고 했으니까. 수민은 우성 알파란 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나 어린 애를 끼고 사니 그리 좋더냐.”
“아주, 사무실에다 살림을 차리지? 우리 다 자르고 베타 직원 새로 고용할 거 아니면 작작 좀 하지?”
서 여사와 박 씨가 사무실 공기를 점령하듯 진해지는 인혁의 페로몬을 견디다 못해 힘을 합쳤다. 인혁은 두 사람에게 구박받으면서도 전혀 타격감 없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수민은 인혁의 페로몬에 감싸여 작게 웃었다.
그날 저녁, 수민은 침대 위에서 인혁의 귀 뒤에 있는 점을 발견하곤 입을 맞췄다. 인혁이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수민은 정 목사와의 상담에서 어제 사무실에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공격을 받았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요. 요즘, 마음이 좀 편해졌나 봐요? 인상도 부드러워진 거 같고. 아, 그렇다고 이전엔 강퍅했다는 건 아니고, 사람이 좀 메말라 보였거든. 여유도 없어 보이고.”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분위기가 훈훈하였다. 정 목사는 수민을 보자마자 놀라워하며, 그간의 근황을 궁금해했다.
인혁이 우리 관계는 숨길 만한 일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으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인 서 여사와 박 씨에게도 주저 없이 공개했으니까. 수민 역시 망설이지 않고 정 목사에게 인혁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뭐? 알파와 오메가? 수민 군이, 김 소장이랑? 그 새끼가, 지금 제정신인가? 이 미친 새끼가!”
정 목사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성경에 나오는, 말세에 이 세상에 온다는 입에서 불을 뿜는 용이 바로 정 목사가 아닐까. 수민은 잠깐 의심했다.
이후 상담 분위기가 급변했다. 정 목사는 성경을 옆으로 밀어 놓고는, 20대 젊은이와 40대 늙은이의 연애 혹은 동거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반인륜적인 일인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노아도, 요셉의 아버지도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결혼을 했잖아요. 룻기에 나오는 룻도 나이 차 많이 나는 재혼을 했구요. 하지만 다 축복받은 결혼이었어요.”
수민이 뚱한 얼굴로 반박했다.
“요즘 세상에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어떡해!”
“하지만 성경은 함부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제대로 해석해 주고 있잖아요.”
정 목사는 계속 입으로 불을 토했다.
수민은 장장 한 시간 반 동안, 인혁의 인성과 도덕성에 대한 모욕에 가까운 인신공격성 강의를 들어야 했다. 30분 정도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다. 한 시간으로 끝날 수 있었는데. 인혁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반박했다가 정 목사의 화를 돋워 30분이나 늘어났다.
상담 시간이 끝나가자, 정 목사는 씩씩대며 바로 다음 달에 상담을 또 하자고 했다. 스케줄을 관리해 주는 직원이 기겁하며 안 된다고 했지만 정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불쌍한 어린 양을 악마의 손길에서 구해 내야 하는데! 없는 시간도 만들어 내야지!”
“언제든 좋으니까, 이제 그만 집에 가게 해주세요…….”
지친 수민은 무조건 항복을 외쳤다.
고난의 상담 행군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수민은 절 맞이해 주는 인혁에게 덥석 안겨 한숨부터 내쉬었다.
“왜, 그 영감탱이가 괴롭혔어?”
수민이 유독 피곤해 보이자 인혁이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다정히 물었다.
“아니요.”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소장님을 욕해서요.”
“그 영감탱이가?”
“네에.”
“뭐, 정 목사가 날 못마땅해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그게 뭐라고 이렇게 힘들어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인혁이 수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소장님 보고 천하에 다시 없는 개쓰레기, 도둑놈, 빌어먹을 놈, 정신 나간 소아성애자 개새끼라고 했는데도요.”
“뭐?”
인혁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이 영감탱이가 애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도 않고. 노망이 들었나.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할 것이지.”
인혁은 이를 갈면서도 정 목사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내심, 정 목사가 화내는 포인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또래를 만나 건전하고 풋풋한 연애를 즐기라고 수민을 놓아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말 들어서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거야?”
“네에.”
“수민아, 고개 좀 들어 봐봐. 얼굴 보게.”
“…….”
“착하다.”
인혁은 수민의 얼굴을 잡고 깊게 입 맞췄다. 수민이 인혁의 목을 끌어안고 혀를 내밀었다.
“으응…….”
수민은 제 다리 사이로 비죽 들어온 인혁의 허벅지에 아래를 문지르며 물었다.
“또, 현관에서, 읏, 해요?”
“싫어?”
“아니, 좋아요……. 근데, 얼굴, 으응, 얼굴, 보고, 아!”
“그래, 얼굴 보고 하자. 수민아, 너 좋아하는 대로.”
천하에 다시 없는 개쓰레기는 그날 현관에서 스무 살이나 어린 애인을 질척하게 녹여 먹었다.
20대의 풋풋한 연애 따위는 개나 주라지. 개쓰레기는 어린 동거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못 씹어 먹어서 발정 나 있는 상태니까.
현관 센서 등의 성능을 실컷 확인한 뒤, 인혁은 수민을 안고 침실로 갔다.
몸을 겹치고, 천천히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고 키스하고 꽉 끌어안은 채 삽입했다. 느긋이 허리를 움직이고 배 속을 열기로 가득 채웠다.
열기가 가신 뒤에도 서로의 몸을 만지며, 두 사람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서로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인혁은 수민에게 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함께 채소 포장 공장에 다녀온 이후 인혁은 수민에게 종종 아내와 아들, 잃어버린 가족에 대해 말했다. 제보를 받기 위해 TV에 나가 말하던 피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마음속을 그대로 꺼내 보였다.
“내 아들이 너보다 세 살 어려. 이제 스물하나니까, 군대 다녀와야 할 텐데.”
인혁이 수민의 상처를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아들을 찾으면,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으세요?”
수민이 스스럼없이 물어보았다.
“그건 아주 예전에 정해 놨지.”
인혁은 웃으며 수민의 이마에 입 맞췄다.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보고, 뭐든 사줄 거야. 먹고 싶다는 건 전부 다.”
인혁이 말했다.
수민은 그 대답을 잊지 않았다.
***
가을은 짧았다. 더 추워지기 전, 연달아 급한 현장 제보가 날아들었다.
인혁과 수민은 여러 날 밤잠을 설쳤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잠옷 위에 코트만 하나 걸친 채 차에 올라탔다. 인혁은 가는 동안 좀 더 눈 붙이라며 수민의 눈가를 손으로 덮어 주곤 했다. 수민은 눈을 감은 채 검정고시 공부보다 운전면허를 먼저 따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낮에는 박 씨가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범죄 조직의 도주 루트를 추적하여 덮치기도 했다. 다른 지역 단체의 지원 요청을 받아 외근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인혁의 아들일지도 모를, 20대 초반의 남성형 오메가 피해자들을 여럿 마주쳤다. 수민은 여전히 현장 업무에 열심이었으나 그들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인혁이 그들에게 다가가 인적 사항을 묻고 손을 내밀면 바로 옆에 서서 날카롭게 지켜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런 날은 침대 위의 사정이 평소보다 좀 더 거칠어지긴 했다. 둘 다 서로를 물어뜯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인혁이 먼저 수민의 위에 올라탈 때도 있었고, 수민이 인혁에게 달려들 때도 있었다. 둘은 당장 서로에게 박고 박히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굴었다. 현관에서 엎드려 박고 박히는 바람에 무릎이 다 까져 한동안 밴드를 붙이고 다녀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인혁은 착실하게 수민의 아래를 풀어 주려 애썼다. 수민 역시 조금 아프더라도 좀 더 빨리 인혁의 것을 삼키고 싶어 안달 냈다.
러브젤은 침대뿐 아니라 집안 곳곳에 비치됐다. 인혁은 가끔, 집안 어디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러브젤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또 현관 앞에서 하는 거냐고 우는 수민을 달래며 신발장 안에 놓아두었던 러브젤을 꺼낼 때만은 복잡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인혁은 수민이 살던 아파트를 다시 부동산에 내놓았다. 집에 들일 만한 가전은 가져오고, 아닌 건 옵션으로 붙였다. 덕분에 금방 세입자를 찾을 수 있었다.
인혁의 침실엔 수민의 책상이 놓였다. 인혁은 침대에 기대 누워 책을 읽으며,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수민의 뒷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수민은 변태적인 취미라고 항의했으나 인혁의 즐거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해야 했다.
공부하다 힘들면 일부러 지친 표정을 짓고 침대 위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그럼 인혁이 오늘은 웬일로 오래 버티나 했다며 두 팔을 벌려 수민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수민은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인혁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인혁이 외부 강연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사 왔다며 책 한 권을 수민에게 주었다. 책 안에는 곱게 물든 단풍잎이 끼워져 있었다.
“이게 언제 적 감성이야! 김 소장, 미쳤어? 나 때도 이런 건 안 했다!”
서 여사가 팔을 벅벅 긁으며 인혁을 구박했다. 인혁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지만 새빨개진 귓불을 숨길 순 없었다. 수민은 서 여사 몰래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단풍잎이 끼워진 페이지는 하필 고백 장면이었다. 일부러 그 페이지에 단풍잎을 끼워 둔 게 분명했다. 책 속 주인공이 말했다. “당신과 함께하는 첫 가을이, 나는 정말 행복합니다.”
수민은 종이에 찍힌 행복이라는 글자를 손끝으로 덧그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