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생님……. 저 너무 배고파요…….”
손에 통통한 젖살이 붙어 있어야 될 나이였다. 재운이 성인보다도 마른 손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한 여성의 앞치마를 부여잡았다.
“간식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여기가 네가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먹을 수 있는 덴 줄 아니?”
대한 보육원에서 일하는 여자는 일이 많았다.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수만 백 명이 넘어갔다.
Khan 그룹에서 후원하는 보육원이라 봉급이 적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한 명을 키우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다른 보육원에 비해 많았지만, 그녀가 체감하는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수준이었다.
“죄송해요…….”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이니까 그때까지만 버텨.”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앞머리로도 가려지지 않는 커다란 눈망울에 마음이 약해진 그녀가 아이를 다독였다.
어린 재운은 그 말에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쥐고 놀이방 구석으로 향했다. 유독 햇살이 따스한 날이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 나가 또래끼리 모여서 뛰어다녔다.
놀이방 내에도 비슷한 나이대 아이들이 끼리끼리 모였다. 낡은 장난감들을 가지고 소꿉놀이도 하며 옹기종기 노는 얼굴들은 옅은 그늘이 보였지만 아이답게 천진난만했다.
외톨이처럼 동떨어져 있는 아이는 재운이 유일했다.
토옹, 통, 통. 침을 모아 삼키면 덜 배고플까 싶어서 입술을 오물거리던 재운의 곁으로 주먹만 한 공이 튕겨 왔다.
재운이 아이들 눈치를 보면서 공을 주우려고 할 때였다.
“만지지 마.”
재운 또래의 남자아이가 재운의 손을 탁 소리가 나게 밀어냈다. 하얀 손등이 벌겋게 부어오를 정도로 거센 힘이었다.
생각보다 소리가 크자 남자애가 청소로 정신이 없는 선생님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애들이 어질러 놓은 책을 정리하는 손길이 분주했다.
“나한테 말도 걸지 마. 너랑 말하는 거 알면 강윤조가 뭐라 한단 말이야.”
“미, 미안…….”
강윤조라는 단어에 재운이 아픈 손등을 부여잡고 구석으로 다시 들어갔다. 자신의 시야가 가려지면 다른 이들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재운이 무릎 위로 고개를 푹 숙일 때였다.
“이재운, 여기 있었어?”
겉모습만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은 지났을 것 같은 아이가 놀이방 안으로 들어왔다.
놀이방에서 놀고 있던 애들이 하나둘씩 아이의 눈치를 보며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운의 손을 매섭게 쳐 냈던 남자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윤조야. 재운이 좀 바깥에 데리고 가서 놀아. 재운이가 맨날 혼자 있어서 선생님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는데.”
“그럴게요, 선생님. 재운아, 같이 나가자.”
“아, 아니……. 나는…….”
재운이 입술을 우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때 자르지 못한 머리카락이 허공을 민들레 홀씨처럼 부유했다.
그러나 재운은 우악스럽게 제 팔을 잡아채 오는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두 발에 힘을 버티고 서 봤지만 잠시뿐이었다. 금세 제 덩치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강윤조에게 속절없이 끌려갔다.
“아파……. 제발 놔줘…….”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재운이 울먹거렸다.
“내가 놀이 시간에 바깥으로 나오라고 했잖아.”
재운도 강윤조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나갔을 때 제게 벌어질 일들이 예상이 가기에 일부러 실내 놀이방에 숨어 있었던 거였다.
선생님도 있는 곳이니까 강윤조가 자신을 발견해도 데리고 나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선생님이 이렇게 자신을 무방비하게 내보낼 줄은 몰랐다.
선생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까.
재운의 몸 군데군데 얼룩을 만든 아이가 강윤조라는 게.
“윤조야! 또 이재운 데리러 간 거야?”
“응. 재운이가 골키퍼 할 거야.”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축구공 하나를 돌려 가면서 차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 사이에서 재운은 손목을 옭아맨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빨리 저기 가서 서. 공 못 막을 때마다 한 대씩이다.”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잔인했다. 재운은 도망갈 수 없는 현실에 힘없이 골대 앞으로 가 섰다.
재운은 운동 신경이 없었다. 진짜 친구들끼리 축구를 해도 제대로 막지 못할 텐데,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몸으로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강윤조가 못 막을 때마다 한 대씩 때린다고 했으니까. 한 대라도 덜 맞으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날아오는 공을 막아 내야만 했다.
강윤조가 가장 먼저 공을 재운을 향해 찼다.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힘이 세기로 유명한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공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아흑…….”
재운이 공을 막아 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가 공에 배를 맞고 주저앉았다. 바닥을 구른 공은 데구루루 골대 안으로 들어가 그물을 출렁이며 멈췄다.
“이재운, 똑바로 안 해? 처음부터 못 막으면 어떡해!”
막지 못하기를 바랐으면서 강윤조가 재운을 윽박질렀다. 하필 공이 명치를 쳐 숨을 헐떡이던 재운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 미안…….”
“공 이리로 차.”
재운이 까무러치려는 몸을 움직여 공을 향해 발을 뻗었다. 공을 발끝으로 밀어냈지만 얼마 굴러가지도 못하고 멈춰 버렸다.
“아, 답답한 새끼.”
결국 강윤조가 다가와 재운을 밀치고 공을 뺏어 다른 애들에게 패스했다. 재운이 넘어진 자리를 따라 흙먼지가 부옇게 피어올랐다.
까끌한 모래에 쓸린 손바닥에 생채기가 났지만 피를 닦을 새도 없었다.
퍼억, 퍼억, 퍽. 작은 몸을 향해 내리꽂히는 공에 재운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입고 있던 옷이 흙먼지로 엉망이 된 건 오래전 일이었다.
한번은 축구공이 얼굴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코에서 떨어진 피가 얼굴 하관과 목덜미, 상의에도 흔적을 남겼다.
“얘들아! 저녁 먹어야지!”
축구 놀이로 포장된 일방적인 구타는 저녁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멈췄다.
“너는 밥 먹지 말고 바로 숙소로 들어가서 씻어. 핏자국 안 보이게.”
“배, 배고픈데…….”
“야.”
선생님의 시야에 재운이 제대로 보이지 않도록 그를 가리고 선 강윤조가 재운에게 밥을 먹지 말 걸 강요했다.
재운은 오늘 아침에도, 점심에도, 간식 시간에도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밥을 먹지 못하게 방해하는 강윤조 때문이었다.
재운이 애원하듯이 강윤조의 소맷귀를 붙들었다.
“내가 빵 하나 챙겨다 줄 테니까 숙소로 가라고.”
날파리를 쫓아내듯이 손을 털어 낸 강윤조가 눈을 부라렸다.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큰 아이였다. 힘의 차이도 역력해 재운은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식당으로 향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숙소로 걸어가는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터덜터덜 걸음이 이어질 때마다 바닥에 점점이 자국이 생겼다.
“흐윽, 흑…….”
재운을 때리던 원장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생활에 좋아하던 것도 잠시. 재운은 보육원 애들의 괴롭힘에 하루하루 말라 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재운을 못살게 구는 건 재운에게 따로 주어지는 선물에 질투가 나서였다. 재운을 구해 준 아이는 간간이 비서를 통해 재운에게 선물을 보내왔다.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일 년에 한 번 선물 받기도 힘든 고가의 물품들이었다. 변신하는 로봇 장난감부터 불빛이 나는 팽이에 명품 브랜드 옷까지.
처음에는 애들끼리 놀 때 재운을 끼워 주지 않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보육원 원장도, 일하는 이들도 재운에게 다른 애들보다 관심을 많이 쏟는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대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재운을 교묘하게 사지로 몰아갔다.
선생님들이 재운을 불러다 왜 밥을 잘 먹지 않냐고 물어볼 때도 있었지만, 자신을 감시하는 아이들이 두려워 재운은 그저 속이 좋지 않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서러웠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와 아빠가 미웠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선생님들도 보기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윤조에게 제대로 대들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가장 끔찍했다.
힘없이 걸음을 멈춘 재운의 앞에 그림자가 더해졌다. 가까이 다가온 인기척에 놀란 재운이 고개를 들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어…….”
윤일우.
자신을 구해 줬던 아이의 이름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 대한 그룹 사장의 아들이기도 했다.
“누가 이랬어?”
윤일우가 치렁치렁하게 내려져 있는 재운의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드러난 처참한 몰골에 색소 옅은 눈동자가 달조차 뜨지 않은 밤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이답지 않은 눈빛이었다.
“넘어졌어…….”
재운이 우물쭈물하며 거짓말을 했다. 이 애한테 얘기해 봤자 얘가 돌아가고 나면 더한 괴롭힘이 다가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거짓말하면 나쁜 아이인데.”
윤일우가 울긋불긋하게 부어오른 콧등을 톡톡 건드렸다. 건드릴 때마다 울먹거리는 얼굴이 눈에 밟혔다.
“다시 물을 거야. 이번에도 거짓말하면 나 다시는 너 보러 안 와.”
“…….”
눈물이 고인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윤일우가 찾아오는 시간은 재운이 힘든 나날 속에서 매 순간마다 기다리는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내는 고가의 선물들보다 훨씬 더.
다시는 윤일우를 볼 수 없다는 말에 커다란 눈망울 가득 눈물이 넘쳐흘렀다. 물길을 따라 흙먼지에 덮여 있던 뽀얀 살결이 드러났다.
“누가 이런 건지 말해. 주동자 이름.”
“강, 윤조…….”
재운이 자그맣게 말하는 이름을 곱씹어 기억한 윤일우가 생긋 웃었다.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재운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후 상처투성이 손을 잡았다.
“가서 치료하자. 코는 엑스레이도 찍어 봐야 될 것 같으니까 아예 병원으로 가는 게 낫겠다.”
재운은 손을 붙잡아 오는 온기에 온 마음이 꽁꽁 묶이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넓은 세상에 홀로 있는 듯한 외로움에 질식할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상쾌한 바람이 부는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
그를 따라 걸어가며 재운이 내내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자신은 말라깽이에 겁도 많고, 소심하고, 눈물도 많다.
다들 못난이라고 놀리는 자신을 왜 부잣집 애가 이렇게 챙겨 주는지 계속 궁금했다.
“글쎄…….”
윤일우는 재운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재운의 눈물 젖은 눈동자를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짙었다.
“우는 게 마음에 들어서?”
“그게 뭐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운은 눈물이 많은 제 성격이 처음으로 좋아졌다. 수동적으로 잡혀 있던 손에 힘을 줬다.
같은 나이인데도 저보다 큰 손에 담긴 온기가 기분이 좋아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노을빛이 차양처럼 드리운 운동장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는 손을 잡고 있어 꼭 하나의 형상처럼 보였다.
* * *
“……노을이네.”
재운이 침대 위에 손길을 뻗은 노을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오랜만에 눈을 뜬 것처럼 눈꺼풀도 빡빡하고 목도 말랐다.
하지만 재운은 생리 현상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하얀 이불 위를 물들인 빛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등에서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났다. 손등과 연결된 투명한 줄에서는 링거액이 흐르고 있었다.
은은하게 배어 있는 소독약 냄새로 보아 병원이었다. 이렇게 넓은 창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 걸 보면 1인실이었다.
재운에게는 과분한 장소.
누가 여기에다 재운을 입원시켰는지 모르기도 힘들었다. 힘없이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눈가를 따라 흘러내렸다.
“차라리…… 구해 주지 말지 그랬어…….”
구원받은 줄 알았던 시간이 동전이 뒤집힌 것처럼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마음을 빼곡하게 찌르고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재운은 갈가리 찢어진 마음을 부여잡을 의지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버석거리는 목소리처럼 재운의 얼굴에 생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눈을 뜨니 떠오르는 기억에 재운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잠을 청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은 오지 않고 그날 있었던 일들만 뒤섞여 떠올랐다.
히트 사이클이 터진 상태였던지라 기억들은 검은 먹물이라도 부어진 것처럼 군데군데 공백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억지로 뚫던 성기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재운이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져 봤다.
딱지가 앉아 있는 상처가 그날의 일이 결코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잔인하게 되새겨 주었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도 심장이 뛸 때마다 두웅, 둥 머릿속까지 울려 왔다.
“…….”
재운이 눈을 감은 상태로 숨을 멈췄다. 혼자만 있던 공간에 누군가 들어왔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페로몬 향으로 보아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갈무리하던 페로몬을 풀어내는 행동이 이상했다. 마치 재운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잠시 멈췄던 눈물이 푹 젖은 속눈썹 끝에 구슬처럼 맺혀 있다가 시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재운아, 일어났어?”
자는 척을 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미 그는 재운이 의식을 차렸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식은땀에 젖은 재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손끝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정전기라도 인 것처럼 마른 몸이 들썩거렸다.
“입술 상처가 아직 다 안 아물었어. 아래도 그렇고. 약하게 진통제 넣고 있는데 아프면 말해. 양 추가해야 하니까.”
“……나한테 왜 그랬어.”
묻고 싶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던 건지.
오랜 시간 말하지 못했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어도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처럼 버석하기만 했다.
“왜 그랬냐니. 그런 질문이 어딨어.”
재운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고작 상체를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어렵게 시선을 들어 쳐다본 윤일우의 얼굴에는 죄책감이라고는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강, 간했잖아……. 다른 애들한테도 넘겨줬잖아…….”
강간이라는 단어를 말하는데 말하면서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가장 충격이었던 건 재운이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애들에게 넘겼다는 거였다.
소파 위에 몸이 고정된 채 아래위로 뚫리는 순간까지 떠오르자 재운이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입술이 찢어지도록 깨물어도 당시의 기억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잔인한 기억이 병실에 있던 재운을 별장으로 끌어당겼다.
‘재운아, 후회는 언제나 늦는 거야.’
“아니야……. 제발, 그만해…….”
머리채가 잡히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몸을 어린아이처럼 웅크려 봤지만 엉망인 몸을 시선으로 강간하던 눈길만 떠오르고 말았다.
“괜찮아, 재운아. 나 좀 봐 봐.”
윤일우가 눈물 젖은 뺨을 감싸 안아 올렸다. 창백한 얼굴에 눈물과 콧물이 가득해 윤일우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너한테 한 거 강간 맞아.”
윤일우는 자신의 행동을 포장할 생각 따위 없었다. 도망치려는 재운을 옭아매고 노팅까지 한 건 분명 제정신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으흑……. 왜……, 왜 그랬어…….”
눈물샘이 크기도 하지. 끊임없이 투명한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눈가를 윤일우가 손가락으로 뭉근하게 문질렀다.
“나는 나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원래 그렇게 행동해. 너도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알잖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윤일우에게 수줍게 고백했던 이들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그랬기에 재운은 감히 윤일우에게 고백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친구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채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그래도…… 우리 친구, 였는데…….”
곁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 윤일우가 유일하게 십 년 넘게 제 옆에 둔 게 재운이었다. 그래서 재운은 자신도 모르게 자만했는지도 모른다.
히트 사이클에 제정신이 아니었어도 윤일우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면 동화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제게 펼쳐지리라고.
“한 번도 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어.”
눈물로 얼룩진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크게 뜨였다. 그럼 그와 자신의 관계는 뭐였을까. 재운에게 윤일우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깜깜한 세상에서 유일한 빛이었는데.
“나는 너를 계속 울리고 싶었어.”
“아…….”
윤일우가 상처 난 입가를 강하게 짓눌렀다. 딱지가 얹어졌던 상처가 재차 벌어져 붉은 속살을 내보였다.
천천히 제게로 숙여지는 고개를 재운은 피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보이지 않는 끈에 칭칭 감겨 있는 기분이었다.
제 몸인데도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으읍…….”
찌릿한 통증이 일던 부위에 뜨겁고 습한 살덩이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숨이 막혀 뒤로 물러나려는 얼굴을 부여잡고 윤일우가 고개를 깊숙이 틀었다.
윤일우의 혀가 사정 봐주지 않고 작은 입안에 들어섰다. 살덩이가 마찰되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재운의 몸이 뒤로 무너지자 커다란 손이 목 뒤와 허리를 안정감 있게 받쳤다. 피할 곳도 없는 상황 속에서 재운은 윤일우가 질릴 때까지 저를 맛보도록 몸을 내줘야만 했다.
“하아……. 상처 다시 생겼네.”
윤일우가 뒤로 물러났을 즈음에 재운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마른 가슴을 연신 들썩이고 있었다. 멀어지는 입술 사이로 길게 늘어졌던 은실이 툭 끊어졌다.
“역시 너는 우는 모습이 어울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열에 달떠 허덕이며 우는 모습이. 뒷말을 삼킨 윤일우가 흐무러져 내리는 몸을 침대 위로 눕혔다.
이불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는 손길은 그가 한 행동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다정하기만 했다.
“여기에서도 피 나네. 아프겠다.”
버둥거리며 손을 움직인 터라 링거 줄이 연결됐던 손등에서도 피가 비치고 있었다. 윤일우가 호출 버튼을 눌렀다.
특실답게 호출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윤일우에게 목례를 했다. 재운의 손등을 치료하는 손길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가녀리게 몸을 떨고 있는 재운의 얼굴을 살피지도 않았다. 그녀는 짧은 시간 동안 할 일만 하고 사라졌다.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던 생각은 무생물 같은 시선을 본 순간 사그라들었다. 재운이 상처투성이인 입술을 어물거렸다.
이런 식으로는 살 수 없었다. 윤일우를 다시 보지 못한다면 삶이 고통스럽겠지만, 지금처럼 살 바에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방금 한 키스에는 짙은 욕망이 묻어나 있었다. 윤일우는 언제든 별장에서처럼 재운을 범할 마음이 있다는 걸 질척하게 섞이는 혀로 표현했다.
재운은 용기를 내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색소 옅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 다시는 네 주변에 나타나지 않을게. 학교도 조용히 다닐게. 그것도 싫으면…… 입학 취소하고 외지에 내려가서 살게.”
“왜?”
“그야…… 너는 나를 싫어하고…… 내가 보이지 않는 걸 원할 테니까…….”
윤일우는 재운에게 벌을 내리고 있다. 제 주제도 모르고 좋아한다, 마음을 고백한 재운에게 다른 이들한테 했던 것처럼 주제 파악을 할 수 있도록 몸으로 알려 주는 거였다.
“나 너 싫어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왜…….”
윤일우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손을 뻗어 겁먹은 재운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리는 손길에는 장난기마저 묻어났다.
“좋아하는 감정은 뭔지 모르지만, 싫어하는 감정은 확실하게 알아.”
인생의 반 이상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재운은 윤일우가 어떤 아이인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동안 제가 겪어 온 삶은 모두 허상이었던 건 아닐까.
“계속 내 옆에 있어.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니까.”
윤일우는 이재운이 옆에 있기를 바란다.
“퇴원은 내일 시켜 줄게. 바깥에 가드들 있으니까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고 얌전하게 치료받아. 알았지?”
재운은 평범한 사이처럼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윤일우에게서 마지막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혼자 남게 됐다. 재운의 숨소리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이 작아져 갔다.
도망칠 수가 없다. 윤일우는 이재운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제 옆에 묶어 두려고 한다.
재운이 멍하니 숨만 내쉬고 있을 때였다. 있는지도 몰랐던 재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었다.
굳은 몸을 움직여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뜬 핸드폰을 가져왔다. 지문으로 잠겨 있던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가 도착한 메신저 창을 열었다.
“…….”
메시지 내용은 간결했다.
[일우: 혹시나 해서 보내.]
재생 표시 아이콘이 떠 있는 영상은 살색으로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멈춘 이미지에서도 보이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뼈가 두드러지는 마른 몸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억, 으, 흐, 윽…….”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후려치는 듯한 파열음이 곳곳에 섞여 든 영상이었다. 제 신음 소리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심장 곳곳을 찔러 댔다.
커다란 눈동자에서 떨어진 눈물방울이 한 몸처럼 얽혀 움직이는 영상을 투명하게 물들였다.
영상에서 제대로 보이는 사람은 재운 한 명뿐이었다. 온갖 체액으로 물들어 엉망인 얼굴이 영상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갈가리 찢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화면 너머로 재운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영상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재운은 결코 별장에서 벌어졌던 일에서 해방될 수 없다. 재운은 그날에서 벗어난 게 아니었다. 여전히 진창 속에 몸이 처박힌 채로 찢긴 날개를 붙들고 울고 있을 뿐.
* * *
“이재운, 오랜만이다.”
“…….”
재운이 이미 엉망이 된 입술 위로 새로운 상처를 냈다. 그를 기다리면서 긁어내린 엄지손가락 옆에도 핏방울이 새롭게 맺혔다.
그날 이후로 처음 보는 자리였다. 병원에서 퇴원한 날부터 재운은 집 안에 틀어박혀 한 걸음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혼자 있는데도 때때로 떠오르는 장면들에 숨이 막혔다. 재운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그날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거라고 끊임없이 되뇌어야만 했다.
핸드폰을 꺼 둔 상태로 두지 말라는 윤일우의 말을 어길 수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한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고요하던 핸드폰에서 낯익은 벨 소리와 함께 액정 위로 떠오른 이름은 지금 재운이 만나고 있는 진대원이었다.
“살이 더 빠진 것 같네. 밥 좀 잘 먹고 있지 그랬어. 안 그래도 말랐었는데 지금은 무슨 뼈다귀가 걸어 다니는 것 같잖아.”
“……만지지 마.”
재운이 제 팔목을 들어서 팔목 뼈가 도드라진 부위를 문지르는 진대원의 손을 뿌리쳤다. 순순히 물러난 진대원이 재운의 앞에 앉았다.
“음료는 또 왜 안 시키고 있었냐? 이런 데서 그러면 욕먹는다니까.”
진대원이 물컵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재운의 앞자리를 힐끗 살피고 손을 들어 음료 두 잔을 주문했다.
“딸기 파르페 어느 쪽으로 놓아 드릴까요?”
“저기.”
종업원이 가져온 딸기가 잔뜩 올려진 파르페는 재운 앞에 놓였다. 진대원이 트레이 위에 올려져 있는 아메리카노를 직접 들어 올렸다.
빨대를 입에 물고 기다란 유리컵에 든 음료를 반 이상 빨아들인 진대원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재운을 향해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왜 그렇게 보냐? 오랜만에 보니까 새삼 잘생긴 것 같아?”
“……말 돌리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왜 불렀어.”
나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재운은 진대원의 말을 무시하는 순간 일어날 일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았다. 그날의 일이 기억 속에만 묻혀 있는 게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고 만다면…… 재운은 정말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아슬아슬하게 얼어 있는 호수 표면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왜 불렀기는. 알면서 묻는 거야?”
음흉하게 웃는 진대원의 얼굴에 앞에 놓인 파르페를 들어 뿌리고 싶었다. 재운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눈시울이 뜨끈하게 달아올랐지만 진대원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다는 얄팍한 자존심을 붙들고 버텼다.
“별장에서 맛도 제대로 못 보고 끝났잖아. 내가 그날 이후로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알면 왜 만나자고 했는지 물어볼 생각을 못 할 텐데.”
“……너 좋다는 애들 많잖아. 왜 하필 나야.”
무리 중에서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사람은 재운 한 명뿐이었다. 무리의 리더 격인 윤일우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으로 얽힌 이들이었다.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재산을 10대 때부터 제 몫으로 받은 애들이었다.
게다가 진대원은 알파였다. 얼굴도 양아치 같은 성격에 묻히지 않을 만큼 잘생겼다. 지금도 카페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알게 모르게 진대원을 향해 모여들었다.
오메가라면 진대원이 눈짓만 보내 줘도 먼저 다가올 거였다. 베타도, 같은 알파도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안을 수 있으면서, 도대체 왜…….
“그러게. 나도 그게 계속 궁금해서 생각을 해 봤거든.”
컵 안에 들어 있던 얼음 하나를 입안에 문 진대원이 아그작아그작 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진지한 표정으로 내뱉는 말은 사람이 아니라 개가 짖는 것처럼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냥 꼴리더라고, 네가.”
재운은 결국 눈동자 아래로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이 금세 물기로 젖어 갔다.
“왜 울고 그래. 여기서 바로 자빠뜨리고 싶게.”
진대원이 입맛을 다시듯 입꼬리를 혀로 훑었다. 남은 음료를 다 마신 진대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운의 팔목을 잡아챘다.
“야, 올라가자. 오면서 룸도 잡아 놓고 왔어.”
카페는 호텔 안에 있었다. 진대원이 평소 애용하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5성급 호텔이었다.
재운이 음료 한 잔도 시키지 못하고 물 한 컵으로 버틴 건 여기서 사 먹는 음료 한 잔의 값이 웬만한 프랜차이즈 음료 가격의 몇 배는 되어서였다.
“버텨 봤자 헛수고라는 거 알지?”
힘을 주고 버티는 재운을 내려다보는 진대원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힘을 주면 끌고 가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카페에 생각보다 아는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쳐서 집안에서 감시까지는 아니어도 주의를 받은 참이었다. 불필요하게 이목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가자, 친구야.”
자리에서 일어난 재운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친 진대원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흐트러트렸다. 싸구려 샴푸 향이 나는데도 재운의 체향이 은은하게 섞이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아까부터 피가 몰리던 곳으로 혈류가 빠르게 돌았다.
“룸 좋은 거 골랐다. 저번에는 제대로 쑤시지도 못하고 뺐잖아. 어떻게 보면 오늘이 첫날이니까.”
진대원의 목소리는 봄바람에 살랑이는 꽃잎처럼 들떠 있었다. 푸르죽죽하게 죽어 있는 재운의 표정만 제외하면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연인 같았다.
재운을 향한 진대원의 얼굴이 꽤 다정한 빛으로 물들어 있는 탓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느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속도는 빨랐다. 하지만 진대원은 연신 초조한 눈길로 숫자가 올라가는 전광판을 힐끔거렸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스위트룸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진대원이 재운의 팔목을 이끌고 예약한 룸으로 곧장 향했다.
카드 키를 댄 문이 열리는 순간 재운의 등이 딱딱한 벽에 부딪혔다.
“으읍…….”
진대원이 재운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부터 맞춰 왔다.
“아……. 뭐야, 우리 재운이, 생각보다도 성깔 있네?”
진대원이 핏방울이 맺힌 입술을 혀로 핥으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입술 위의 살점이 파일 정도로 거센 반항이었다.
“……키스는 하지 마. 어차피 너 나랑 자고 싶어서 이러는 거잖아.”
남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재운은 아래를 접붙이는 것보다 혀를 나누는 행위가 더 마음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잘것없는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재운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그래, 뭐.”
진대원의 눈동자 위로 싸늘한 서리가 한 겹 내려앉았다. 핏방울이 묻은 재운의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른 진대원이 재운의 몸을 그대로 뒤로 돌렸다.
“윽…….”
쿵 소리와 함께 재운의 이마가 호텔 문에 처박혔다. 스위트룸을 얻고도 진대원은 침대로 가지 않고 현관문 앞에서 그대로 재운의 옷을 벗겨 냈다.
하체를 감싸고 있던 바지와 속옷이 벗겨져 허벅지 아래에 어중간하게 걸쳐졌다. 하얀 살결 위에는 여전히 그날의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하나도 안 젖었네. 그날은 여기가 뻐끔거리면서 물을 질질 싸고 있었는데.”
“아, 흐…….”
곧장 손가락 두 개가 구멍 속을 파고들었다. 재운이 이마를 문 위로 비비적거렸다. 차가운 문의 감촉이 절망으로 들끓는 마음을 위로해 주기를 무의식중에 바란 거였다.
“오메가는 진짜 박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지 않아? 봐 봐. 몇 번 쑤셔 줬다고 이렇게 젖잖아.”
오메가인 게 이토록 저주스러울 수 있을까.
진대원의 말대로 메말랐던 사막은 어느새 축축한 늪지대로 변모해 있었다. 진대원이 손을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는데도 움직이는 궤적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젖은 소리가 룸 입구를 휘돌았다.
“흐윽, 으, 아…….”
그날은 히트 사이클이 와 반쯤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입구를 한계 이상으로 벌리는 성기의 감촉이 끔찍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윤활액이 나와도 소용이 없었다. 손가락이 빠져나간 뒤, 다시금 입구가 천천히 벌어지는 감각을 맨 정신으로 느끼자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통이 강했다.
진대원이 재운의 목 뒤를 잘근잘근 씹으며 허리에 힘을 가했다.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내벽이 침입하는 성기에 정신을 못 차렸다. 밀려났다가 다시 핏줄이 돋은 살갗을 옴쭉옴쭉 물어 대는 움직임이 난잡했다.
재운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손을 뒤로 뻗었다. 진대원의 허벅지를 몇 번 치기도 전에 진대원이 재운의 두 손목을 결박해 한데로 모아 잡았다.
문과 진대원의 몸 사이에 끼인 재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신음조차 제대로 뱉어 내지 못하고 떨리는 몸은 바스라질 듯 연약해 보였다.
“후우……. 아다 같다, 재운아.”
고환이 볼기에 닿을 정도로 기다란 기둥을 다 집어넣었을 즈음에는 진대원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들었다.
그날은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의 페로몬과 비정상적으로 흘러가는 광경 탓에 이성이 반쯤 나가 있었다.
재운의 몸에서 피를 봤는데도 한번 불이 붙은 성욕을 억누르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찢어져 있던 곳이라 더 양심의 가책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진대원은 오늘은 재운 또한 즐길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재운은 믿지 않을지 몰라도, 강간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
“말라서 그런가. 뱃가죽이 좆 모양으로 늘어난 것 같은데.”
진대원이 손을 움직여 마른 배를 꾹 눌렀다. 성기가 꽉 조이는 감각에 기분 좋은 쾌감이 하복부로 번져 갔다.
“흐으, 아, 하, 하지 마…….”
재운이 핏줄이 잔뜩 선 목을 움직여 앓는 소리를 냈다. 진대원과 달리 재운은 끔찍한 고통만 느껴졌다. 안 그래도 거대한 성기에 짓눌린 내벽을 손바닥으로 압박하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페로몬 풀어 줄게. 그러니까 너도 제대로 풀어.”
재운은 고집스럽게 페로몬을 풀지 않고 악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 재운을 향해 진대원이 먼저 페로몬을 해방했다. 재운의 온몸을 묵직한 알파 페로몬이 뒤덮었다. 페로몬 샤워였다.
“아, 아아……!”
윤일우와는 다른 향이었다. 재운은 순간 호텔 룸이 아니라 숲 한가운데에 떨어진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알파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은 재운의 페로몬 샘이 꾹꾹 눌러 놨던 페로몬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귀밑은 보편적으로 페로몬이 강하게 흘러나오는 곳 중 하나였다.
진대원이 귀밑 여린 살갗을 입술 새로 빨아들였다. 하얀 살결 위로 붉은 울혈이 날 때마다 진대원의 눈동자가 열기로 번져 갔다.
발발 떠는 몸을 꽉 끌어안은 채 허리를 움직였다.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 단단해지기 시작한 성기도 손에 잡은 채 엉덩이에 골이 파이도록 허리에 힘을 줬다.
마찰음이 퍼질 때마다 재운이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바르작거렸다. 강제로 끌어 올려진 쾌감에 머릿속이 혼몽해져 갔다. 친구였던 이에게 또 한 번 강간을 당하고 있다는 잔인한 현실감마저 무뎌져 갔다.
“흐, 아흐…….”
신음 소리라기보다는 죽어 가는 소동물이 내는 소리 같았다. 차가운 문을 짚어 봐도 땀이 배어난 손바닥 때문에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몸을 피할 곳도 없이 막다른 곳이었다. 재운은 몸에 콱콱 들어박히는 성기에 꿰뚫린 채 하염없이 흔들렸다.
“아, 씨발……. 존나 좋아…….”
쾌락이 뒤섞인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는 재운과 달리 진대원은 빠르게 허리를 털어 댔다. 차오르는 쾌감에 심취한 눈동자가 재운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오금에서 힘이 풀려 아래로 추락하는 몸을 진대원이 틀어박힌 좆으로 지탱하며 허리에 팔을 감았다. 허리를 치받을 때마다 제 좆이 얇은 뱃가죽을 뚫을 기세로 볼록하게 솟는 감각이 팔에 느껴졌다.
“이재운, 너 왜 이렇게 맛있어? 응?”
진대원이 재운의 귓불을 잇새로 잘근잘근 씹었다. 피가 날 것처럼 붉어진 귓바퀴가 입질에 더 붉어졌다.
가능하다면 재운의 온몸에 제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음습한 욕망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 드는 하얀 목덜미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이미 이로 씹어 놓은 터라 군데군데 붉은 울혈이 남아 있는데도 잇자국을 제대로 박아 넣고만 싶었다.
페로몬 샘이 위치한 귀밑의 목선은 알파와 오메가 모두에게 성기만큼이나 예민한 부위였다.
혀의 넓은 부분으로 상처 난 부분을 핥을 때마다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리는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알파가 오메가의 목에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도록 무는 건 사귀는 사이에서나 가능한 행위였다.
갈등하던 진대원이 애써 입술을 아래로 내려 목덜미 대신 어깨를 깨물었다. 좆으로 아래를 헤집고 있으면서 그것만큼은 꺼려지는 속마음이 제 것인데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 흑, 아, 아파…….”
피부 위로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강한 입질에 재운이 진대원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렸다. 목이 물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발 떨리는 손은 어느새 목덜미를 덮은 채였다.
“야, 안 물 거니까 손 치워.”
진대원이 귀찮게 하는 날파리를 쫓아내듯이 작은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울혈이 남은 살갗을 계속해서 빨아 댔다.
원래의 피부색을 찾기 힘들 정도로 뒤덮여 가는 자국에 재운이 울부짖었다.
“그만, 해……. 싫다고…….”
내일은 학교 오리엔테이션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흔적을 남기면 목티를 입어도 티가 날 게 분명했다.
오메가가 목 근처에 잇자국이 아닌 울혈을 남기고 돌아다니는 건 언제든지 자신을 범해도 좋다고 말하는 거랑 비슷했다.
진대원이 제 몸을 파고드는 감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다른 알파들까지 제 인생에 꼬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왜? 흔적 남으면 안 돼?”
“그걸, 흣, 말이라고…….”
재운이 고개를 뒤로 움직여 진대원을 힘껏 노려봤다. 그래 봤자 붉어진 눈가에 매달린 눈물이 처량하게 볼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진대원의 좆이 더 단단해졌다.
“아다도 아닌데 뭐 어때. 윤일우랑 나랑 구멍 동서로 만들었잖아, 너.”
“…….”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꺼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재운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순간에도 윤일우를 보고 싶은 스스로가 제일 혐오스러웠다. 그런 짓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 처지가 한심스러워 억눌린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아, 진짜…….”
이전까지는 재운이 울고불고해도 제 욕심에 취해 몸을 움직이던 진대원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끝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끄윽, 흑, 억눌린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녀리게 떨리는 마른 어깨가 시야에 맺혀 들었다.
“지금 한 말은 내가 심했으니까 그만 좀 울어.”
“흐, 윽…….”
하지만 그가 재운에게 보이는 동정심은 종이 한 장보다도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질척한 물이 새어 나오는 좁은 속을 성기로 쑤시는 행위는 멈추지 않았으니까.
“으윽, 만지지 마…….”
진대원의 성기 크기 때문에 그가 특별하게 재운이 느끼는 지점에 좆을 갖다 대는 게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짓눌렸다.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재운의 의사와 상관없이 물이 나오는 뒷구멍처럼 연분홍빛 성기도 단단해지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재운의 것을 손안에 담고 적당히 압박하면서 앞뒤로 움직였다.
재운이 손을 떼어 내기 위해 손등을 긁어내렸다. 진대원은 허리를 움직이면서 손도 멈추지 않았다.
“하, 으응, 으……. 아, 흐아…….”
차곡차곡 쌓여 가는 쾌락에 몸서리쳐졌다. 눈물에 푹 젖은 속눈썹이 살갗에 달라붙어 눈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살덩이가 쭈욱, 쭉 늘어나자 진대원의 손이 하얀 액으로 엉망이 되어 갔다.
사정감에 움찔 떨면서 조이는 내벽 안으로 진대원이 정액을 사출했다. 재운이 사정한 직후였다. 틈 없이 맞물린 접합부 새로 정액이 질금질금 흘러나올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눈을 깜박이는 몸이 침대 위로 옮겨졌다.
움직이면서 좆이 떨어져 나간 밑구멍이 뻐끔거렸다. 애액이 뒤섞인 정액을 뱉어 내는 구멍이 붉게 부어오른 채로 시선을 끌었다.
“그만, 해…….”
한 번 사정하면서 갔을 뿐인데도 체력이 뚝 꺾여 버렸다. 눈을 감고 숨을 몇 번 쉬면 정신이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잠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진대원이 정액으로 뒤덮인 제 몸을 일면식도 없는 알파들에게 내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끔찍한 가정을 내릴 정도로 재운은 진대원에게 어떤 믿음도 없었다.
“한 번 쌌는데 뭘 그만해. 너도 부족하잖아.”
개소리 말라고 욕이라도 해야 하는데 푹신한 침구에 닿은 몸이 점점 까무러치고 있었다.
그동안 몸을 챙기지 않은 결과였다. 방 안에 틀어박힌 채로 굶다시피 했었다. 잠을 제대로 잔 시간은 긁어모아도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도 체력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약해진 몸은 격한 섹스를 견디지 못하고 재운의 이성을 나락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 다른, 놈들한테…… 건네면…… 너 진짜…… 용서 안 할 거야…….”
협박 같지도 않은 말만 남긴 고개가 툭 꺾였다.
“……이재운?”
진대원은 재운의 다리를 벌리고 정액이 새어 나오는 광경을 보는 중이었다. 제 좆을 문지르다가 놀라 재운의 이름을 불렀다.
재운의 허리와 목 뒤를 감싸 들어 올리니 눈물, 콧물에 엉망인 얼굴이 드러났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린 입술에 가만히 귀를 묻었다.
자그맣게 흘러나오는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진대원이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씨발, 존나 놀랐네.”
잠깐 사이에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뛴 건지 가슴이 뻐근했다. 근육이 옹골지게 들어찬 흉곽이 위협적으로 들썩였다.
“야, 이재운. 정신 좀 차려 봐.”
진대원이 아프지 않게 마른 뺨을 톡톡 건드렸다. 물기에 젖어 평소보다 새까만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기만 할 뿐 눈꺼풀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체력이 왜 이렇게 약해……. 그리고 널 다른 놈들한테 넘기기는 왜 넘겨.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 같냐?”
한숨을 푹 내쉰 진대원이 별수 없다는 듯 재운을 품에 안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발기가 죽지 않은 성기가 들어가고 싶다는 듯이 재운의 등허리를 찔렀다. 그러나 진대원은 이상하게도 잠든 재운의 몸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욕실에 들어가 욕조에 온수가 차오르도록 물을 틀었다. 진대원이 재운을 안은 상태로 욕조 안에 들어갔다. 잠이 든 상태라 그런지 표독스럽게 자신을 노려보던 눈매가 평소처럼 순했다. 잠든 얼굴이 아기처럼 무해했다.
체액으로 엉망인 얼굴을 닦아 낼수록 지친 얼굴에 말간 빛이 더해졌다.
“얘가 이렇게 예쁘게 생겼었나…….”
오메가 특유의 여린 선으로 이루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진대원이 보기에 재운의 외모는 흔하지 않기는 해도 독보적인 건 아니었다.
그런데 색색거리는 숨결이 가슴에 닿을 때마다 심장의 움직임이 거세어졌다.
진대원이 손을 들어 제 흔적이 남은 몸 곳곳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이 정도면 최소한 며칠은 가겠지. 윤일우 새끼가 보면 난리 치겠는데.”
별장에서 재운에게 제대로 삽입하기도 전에 제재당했다. 그날 이후로 진대원은 오늘처럼 재운의 몸에 박는 순간을 고대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만난 윤일우의 성격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재운이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넘길 때는 언제고 숨이 넘어가려 하자 재운을 데리고 방으로 사라졌다.
재운은 다 같이 있던 메신저 창에서 나간 지 오래였다. 재운과의 메신저 내용이 남은 창을 올려 보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진대원도 나름대로 재운을 아꼈다. 가끔 달큼한 페로몬 향과 여리여리한 체향에 음심이 동해도, 손을 뻗지 않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너도 참 인생이 박복하다. 나 같은 놈이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더 달라붙어 있잖아.”
겉보기에는 진대원의 성격이 제일 사나워 보였다. 하지만 다른 놈들도 하나같이 어딘가 결여됐다. 가장 무뚝뚝하고, 정상인처럼 보이는 김본기도 마찬가지였다.
결벽증이 있어 다른 사람이랑은 손끝이 닿는 것조차 꺼리는 송진오도 윤일우에게 더럽혀진 재운은 스스럼없이 안으려고 했다.
“어쩌겠냐. 이미 일이 이렇게 된 걸.”
듣는 이는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지 오래였다. 진대원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이재운.”
잠시 망설이던 진대원이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 * *
“눈 떴네.”
“……나 이제 가 봐도 되지?”
“룸서비스 시켰어. 밥 먹고 가.”
“됐어.”
넓은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재운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지 않는 곳을 찾기가 힘들 만큼 온몸이 쑤셔 왔다.
다리를 움직여 침대 바깥으로 내려놓자마자 재운의 몸이 뒤로 떠밀렸다. 순식간에 재운의 위로 올라탄 진대원이 어깨를 지그시 누른 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먹고 가. 좋은 말 할 때.”
“…….”
재운의 아랫입술이 희게 질려 갔다. 힘에 눌려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동해야만 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자존심이라는 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몸을 비틀어 움직여 봐도 족쇄처럼 어깨를 쥔 손은 미동도 없었다.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대원의 눈동자를 마주 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몸의 떨림이 강해졌다.
“알았으니까 놔.”
재운이 결국 진대원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재운의 몸 위에서 내려온 진대원이 입고 있던 가운을 벗고 옷장 앞으로 향했다.
보고 싶지 않은 나신에 재운이 눈물이 흘러나오는 눈꺼풀을 꾹 감았다.
울기만 하는 제 처지가 못내 서러웠다.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손을 들어 손등으로 눈을 짓이길 기세로 거칠게 문질렀다.
“야, 벌게졌잖아.”
그마저도 어느새 옷을 입은 진대원에게 잡혀 떼어지고 말았지만.
“너도 옷 입어. 안 입고 있는 게 보기 좋기는 하지만.”
진대원이 가운 하나를 입고 있었던 것처럼 재운도 헐벗은 나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재운이 순순히 그가 건네는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유명 백화점의 로고가 박힌 쇼핑백 안에는 새 속옷과 재운의 체형에 딱 맞는 셔츠와 바지가 들어 있었다. 양말과 신발까지 맞춤인 듯 디자인이 조화로웠다.
재운의 사정으로는 일 년에 한 벌도 사기 힘든 옷들이었다. 같이 다니는 이들이 몸에 걸치는 게 하나같이 고가라 재운도 보는 눈은 있었다.
“……이렇게 비싼 옷 필요 없어.”
“너한텐 비쌀지 몰라도 나한텐 얼마 안 되는 금액이야.”
그러시겠지.
비웃고 싶은 걸 속 깊숙이 눌러 담은 재운이 등을 돌리고 앉아 속옷부터 입었다.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속옷을 입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옅게 들썩이는 가슴팍을 따라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들었다. 등 뒤에 닿아 오는 시선이 뜨거워 빨리 옷을 입고 싶었다. 하지만 급한 마음과 달리 움직임은 굼뜨기만 했다.
“옷 입는 데 한나절 걸리겠네. 팔 벌려.”
“……됐어.”
“아까부터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들어.”
하얀 나신이 눈앞에서 꼼지락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금세 고간이 두둑해졌다. 한숨을 내쉰 진대원이 재운에게 다가가 쇼핑백 안에 들어 있던 셔츠를 꺼내 재운이 입기 편하도록 펼쳤다.
재운은 잠시 망설이다 팔을 들어 셔츠에 끼워 넣었다. 진대원이 아예 재운의 몸을 돌려 앉히고 빠른 속도로 셔츠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채워 갔다.
하얀 몸 곳곳에 남은 흔적에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누가 남긴 건지 몰라도 걸작이야.”
조각상을 감상하듯이 내뱉은 감탄사에 재운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너 내가 여러 번 말하지 않았냐? 그렇게 째려보는 거 무섭기는커녕 꼴리기만 한다고.”
분한지 파들파들 떨리는 속눈썹을 보며 진대원이 충동적으로 눈가에 입술을 붙였다.
“……하지 마.”
“알았어, 그만 놀릴게. 이제 다리 뻗어.”
붉어진 눈가가 다시 축축해질 기세였다. 진대원이 바지를 펼쳤다. 바지 사이로 다리를 넣은 재운을 아이처럼 반쯤 일으켜 안아 바지까지 제대로 입혀 줬다.
호텔 룸 입구 쪽에서 벨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버클은 채우지 않고 놔둔 진대원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룸서비스 온 것 중에서 1인분만 먹어. 그러면 얌전히 집에 데려다줄게.”
사육하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재운이 가까스로 참았다. 버클을 채우고 양말에 신발까지 신었다. 어차피 새 신발이라 호텔 안에서 신어도 무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룸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나자 막혔던 숨이 조금은 편하게 쉬어졌다.
“이리 와서 앉아. 걷기 힘들면 안아서 옮겨 주고.”
“됐어.”
비틀거리며 일어난 재운이 힘겹게 식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위트룸답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진대원은 손이 컸다. 식탁 위에 놓인 접시는 언뜻 봐도 다섯 개가 넘어갔다.
“……1인분만 먹을 거야.”
“누가 뭐래?”
진대원이 앞접시에 요리를 골고루 덜어 담아 재운의 앞에 놓았다. 재운은 입맛이 없었지만 맥이 없는 몸을 보니 뭐라도 먹어야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완자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삶은 엉망진창으로 어그러졌는데도 맛있는 음식이 들어갔다고 환호하는 미각이 우스웠다.
간신히 1인분을 비운 재운이 진대원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요구대로 밥을 먹었으니 이제 좀 놓아 달라는 마음을 담은 눈초리였다.
“나도 밥 좀 먹자. 너만 다 먹었으면 다냐?”
1인분도 간신히 먹은 재운과 다르게 진대원은 입맛이 넘쳐 보였다. 남은 요리들이 빠르게 진대원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언뜻 보면 게걸스러워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진대원이 식기를 움직일 때면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마지막 접시까지 깔끔하게 비운 후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진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바로 갈 거야? 아니면 영화라도 한 편 볼래?”
“집 갈 거야.”
“그래, 그럼.”
오가는 대화가 일상적이었다. 재운이 정신을 잃기 전에 겪었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방 안에는 어제 격하게 뒹굴었던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든 재운의 몸 상태와 유사했다.
재운의 집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차체가 낮은 스포츠카의 배기음 소리는 웅장했지만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잘 가라, 이재운.”
익숙한 골목길 안에 주변 풍경과 이질적인 스포츠카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재운은 진대원의 인사에도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혹독하게 시달린 몸은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 힘들었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오피스텔 건물 앞에 섰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떨렸다. 등 뒤로 차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피스텔 호수와 네 자리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어 다행이었다.
18층을 누르고 벽에 기대 벅찬 숨을 가다듬었다. 1807호라 적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외출했을 때와 변함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라고는 어지럽게 흐트러진 침대 위 이불자락이 전부였다.
집 안에 들어선 걸 누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지 주머니에서 소리가 났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윤일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일우: 10분 뒤에 오피스텔 앞으로 데리러 갈게.]
한국 대학교 경영학과 오리엔테이션 시작은 14시부터였다. 지금은 13시 30분이었다.
그저 윤일우가 좋아 그와 같은 대학교, 같은 과에 입학하기만을 고대했던 과거의 자신이 슬퍼지는 시간이었다.
재운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진대원이 뒤처리도 깔끔하게 해 준 덕에 새 옷 냄새가 났다. 새 옷 냄새 사이로 차를 타고 오면서 묻은 진대원의 페로몬 향이 느껴졌다.
집 안에 구비해 놓은 페로몬 탈취제를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뿌렸다.
진대원이 재운을 찾아온 건 윤일우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벌어진 일일 거였다. 하지만 재운은 본능적으로 제 몸에 진대원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윤일우의 기분이 좋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좋아했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이 되어 버렸다. 바닥을 딛고 있는 감각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 * *
“못 보던 옷이네.”
“응…….”
“누가 사 준 거야? 취향을 보니까…… 진대원인가?”
조수석에 올라탄 재운을 살피는 윤일우의 눈초리가 서늘했다. 대답은 없지만 움찔 떨리는 재운의 손끝을 시선으로 낚아챈 윤일우가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얼어 있어. 친구 사이에 옷 정도는 사 줄 수 있는 건데.”
재운이 훅 다가온 윤일우의 체향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재운의 상체를 감싸다시피 한 윤일우가 안전벨트를 매 주고 순순히 운전석으로 물러났다.
“오티, 많이 가고 싶어 했잖아. 안 설레?”
“……설레.”
윤일우의 앞에서 대학교에 입학하면 오리엔테이션이라는 행사가 있다며 들뜬 목소리로 얘기하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제게 벌어질 일은 모른다는 듯이 해맑게 말려 올라갔던 입꼬리가 지금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같은 과라서 좋네. 송진오랑 김본기는 같은 학교여도 다른 과고. 진대원은 아예 우리 학교에 오지도 못했고.”
윤일우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자신만 다른 학교에 붙었다면서 발광하던 진대원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재운아.”
“……응.”
매끄럽게 올라간 윤일우의 입꼬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재운이 어렵게 그와 시선을 맞췄다. 분명 표정은 웃고 있는데도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속에 담긴 눈동자는 한겨울 시린 바람처럼 차갑기만 했다.
“다음에는 페로몬 탈취제 뿌리지 않아도 돼. 냄새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은밀하게 남거든.”
“…….”
“군데군데 많이도 남겨 놨네.”
아직 차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 재운은 윤일우가 제 셔츠 단추를 푸는 걸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좁은 차 안을 가득 채운 윤일우의 페로몬이 재운의 몸을 사정없이 압박하는 탓이었다. 꾹 다물린 입술이 떼어지면 곧바로 신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짙은 향에 재운이 눈을 감아 버렸다. 시야라도 차단되면 영향을 덜 받을까 싶어 그런 거였다. 하지만 하나의 감각이 차단되자 성난 알파의 페로몬이 더욱더 강하게 느껴졌다.
“흐읏…….”
진대원이 괴롭힌 유두에 손끝이 닿았을 때는 더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윤일우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 재운의 오메가 페로몬 또한 질금질금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페로몬으로 가득 찬 차 안의 밀도가 높아졌다.
“오티가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까……. 중간에 들어가도 되겠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이었다. 윤일우가 차를 운전해 오피스텔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재운이 사는 오피스텔은 윤일우의 도움으로 구한 거였다.
차가 없는 재운 대신 윤일우의 차가 1807호 앞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실외보다 어둑한 주차장 한쪽에 차가 멈춰 섰다. 재운이 덜덜 떨리는 손을 손잡이로 가져갔다.
문을 열기도 전에 재운이 앉아 있던 조수석의 의자가 확 뒤로 젖혀졌다.
키 버튼을 눌러 시동을 끈 윤일우가 의자 위로 드러누운 재운 위에 올라탔다.
“일우야……. 제발…….”
“왜? 차 안이라 더 설레?”
윤일우가 땀이 맺혀 드는 하얀 이마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불안한 눈동자가 제 위에 올라탄 윤일우 너머로 창밖을 살폈다.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지만 언제든지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장소였다. 심장이 거세게 뛰는 소리가 귓가에서도 울리는 듯했다.
“흐으, 안 돼……. 하지 마…….”
고개를 내린 윤일우가 진대원의 흔적이 남은 살결 위에 입술을 묻었다. 잇자국이 남은 어깨는 다른 곳보다 더 시간을 들여 물고 빨았다.
재운의 손이 색소 옅은 머리카락 위에서 목적지를 잃은 배처럼 정처 없이 흔들렸다.
당장 그를 떼어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 몸 위에 올라탄 이가 윤일우라서 망설여졌다.
“재운아, 입 벌려.”
눈을 지그시 감고 재운의 입술을 빨아들인 윤일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마치 별장에서 제 좆을 재운의 입술 가까이에 댔을 때처럼.
떨리던 입술이 자그맣게 벌어지자 그 틈을 두터운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으읍…….”
숨이 막힐 정도로 격한 키스였다. 입도 막히고 코도 짓눌려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산소가 부족한 하얀 얼굴이 새붉게 달아올랐다.
좁고 밀폐된 공간이라 입술이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울렸다. 고작 입을 맞추는 건데도 내밀한 살결이 맞붙는 것 같은 소리가 은은하게 차 내부를 감돌았다.
아직 겨울이라 서늘했던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한여름과 같은 열기를 품어 갔다.
“옷 새로 사 줄게.”
윤일우가 재운의 몸에서 뜯다시피 벗겨 낸 셔츠를 좌석 위에 이불처럼 깔았다. 셔츠에서 떨어진 단추 두어 개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속옷과 바지는 다 벗겨지지 않은 채 오금 언저리에 걸쳐졌다.
“흑……!”
손가락 두 개가 애액이 새어 나오는 밑구멍을 불시에 침범했다. 몇 시간 전까지 단단한 좆에 시달렸던 살결은 아파 보일 정도로 부어오른 상태였다.
애액 때문에 미끌거리고 있어도 닫혀 있던 곳이 벌려지는 감각은 여전히 아팠다.
재운의 몸이 크게 들썩이자 그 움직임이 고스란히 차체에도 전해졌다. 차가 출렁이는 듯한 느낌에 재운이 눈을 크게 뜬 채로 창밖을 바라봤다.
누군가 이상함을 느끼고 차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면 이 상황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목덜미에 돋은 소름이 자글자글하게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바, 방에 가서 하자……. 응……?”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재운이 사는 오피스텔이 나왔다. 차체에 둘러싸여 있지만 사방이 뚫린 곳에서 몸을 섞는 기분이었다.
“누가 볼까 봐 걱정돼? 나는 오히려 설레는데.”
불안한 재운과 달리 윤일우는 몸이 더 달아오르는 모양이었다. 바들거리는 재운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입술 새로 빨아 당겼다 놓아주는 움직임에 여유가 넘쳐났다.
여전히 한 손으로는 밑구멍을 쑤시는 채로 윤일우가 재운의 입속을 거칠게 탐닉했다. 입천장을 훑고 혀를 빨아 당기는 과정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덩치 차이가 크게 나는 몸이 재운을 속박하듯 내리눌렀다. 바지와 속옷이 벗겨지지 않은 터라 재운의 다리가 접힌 상태로 상체에 밀어붙여졌다.
“불편하네.”
걸리적거리는 바지가 귀찮은지 윤일우가 입술을 떼어 내고 재운의 바지와 속옷을 완전히 벗겨 냈다.
널브러진 다리를 제 허리에 감았다. 구멍 속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한껏 벌렸다 좁히며 성기가 들어갈 길을 냈다.
“맛봤던 좆 빨리 쑤셔 달라고 보채는 거야? 소리 들려? 아래가 흥건해.”
“아, 아니야…….”
재운이 눈물 젖은 얼굴을 좌우로 저었다. 윤일우의 말대로 커다란 손이 둔덕 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물소리가 났다.
별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몸이 망가진 걸까.
재운의 구멍은 알파가 페로몬을 풀고 몇 번 쑤셔 주기만 해도 물을 질질 싸 댔다.
처음에는 히트 사이클이 터졌는데도 긴장감에 몸이 굳어 피까지 봤으면서. 지독할 정도로 빠른 몸의 변화에 재운의 눈동자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흐, 아아…….”
진대원이 쑤실 때와 마찬가지였다. 버클을 풀어 성기만 바깥으로 빼낸 윤일우가 귀두를 욱여넣는데도 구멍은 찢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촘촘한 주름이 쭉 늘어났다.
아니라고 말하는 재운과 몸의 반응은 달랐다. 내벽은 제 속을 파고든 좆이 반가운 듯 붉은 속살을 움직여 성기의 표피 위로 옴쭉옴쭉 달라붙었다.
천천히 허리를 뺐다가 강하게 치받는 움직임에 두 사람분의 체중이 실린 시트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땀이 배어난 손바닥으로 재운이 윤일우의 가슴과 어깨를 밀어냈다. 윤일우가 한 손으로 얇은 손목 두 개를 한데로 모아 고정했다.
다른 손은 마른 가슴 위를 오가며 꼿꼿하게 선 유두를 한쪽씩 괴롭혔다. 여린 살덩이가 짓눌릴 때마다 재운의 몸이 들썩였다.
“으흑……. 아, 그, 그만…….”
“안은 다른 말을 하는데.”
윤일우가 손목을 놓아주면서 재운의 무릎을 제 어깨에 걸쳤다. 틈 없이 맞붙은 몸 사이에서 비벼지는 재운의 성기가 묽은 액을 픽 쏟아 냈다.
한결 매끄러워진 배가 비벼질 때마다 재운의 발끝이 무력하게 천장을 긁어 댔다.
발가락 마디가 하얘지도록 곱아들었다 펴지는 모습이 어지러운 시야에 맺혀 들었다.
“윽……, 아, 흐…….”
재운이 눈을 깜박이며 눈동자 안에 가득 고인 눈물을 흘려보냈다. 몸이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지금 있는 장소가 주차장이라는 것도 잊어 갔다.
억눌렸던 신음에 서서히 열락이 깃들었다. 목덜미에 선명하게 떠오른 핏줄 위를 뜨거운 혀가 핥아 댔다.
윤일우는 땀방울이 맺힌 재운의 살갗에 단 사탕 가루라도 뿌려진 것처럼 타액을 묻히더니, 이윽고 이를 세워 박아 넣었다.
“아, 악……!”
목젖 옆으로 잇자국이 났다. 윤일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들바들 떨리는 목덜미 위로 짧은 키스를 연이어 남겼다.
김이 뿌옇게 서린 차창 위로 애처로운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주르륵 미끄러지며 투명해진 창은 다시금 김이 서려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얽힌 차 안의 모습을 뿌연 장막 사이로 감췄다.
“우리 학과에 알파들이 많대. 평균적인 수보다 많다고 하더라.”
윤일우의 목소리 사이로 땀에 젖은 살갗이 붙었다 떨어지는 음률이 섞여 들어갔다.
“오메가도 몇 명 있는데, 알파에 비해서는 많이 없어.”
상처가 난 부위를 혀를 길게 내밀어 쓸어 올리며 윤일우가 재운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췄다.
눈물과 쾌락, 고통으로 얼룩진 눈동자가 세상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웠다.
다른 놈이 그랬다면 더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침을 흘리는 입가에 입을 맞출 만큼.
“흐으, 응, 아흐…….”
격하던 허리 짓을 부드럽게 이어 가자 교성 또한 따라 하듯이 울림이 매끄러워졌다.
“누가 접근해서 짝이 있냐고 물어보면 목덜미를 보여 줘. 알았지?”
땀에 젖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둥근 이마 뒤로 쓸어 넘겼다. 덫에 걸린 소동물처럼 헐떡이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윤일우가 재운의 몸을 반에 가깝게 접었다. 망치로 튀어나온 못을 박듯이 허리를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접합부에서 튄 물이 시트를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시트 위에 깔았던 재운의 셔츠는 애액으로 범벅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지 오래였다.
재운이 차에 타자마자 느껴졌던 진대원의 냄새에 불쾌했던 기분이 나아졌다.
“아, 아아…….”
볼기가 발개지도록 박는데도 재운은 이미 아픔보다 더한 쾌락에 잡아먹혀 동공이 한껏 풀어졌다.
히트 사이클이 아니라 자궁이 내려오지 않은 상태인데도, 자궁구까지 닿아 오는 귀두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길이 생긴 내벽에 좆이 오갈 때마다 짓눌리는 부위 때문에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가 아득해지기까지 했다.
사정감은 차오르는데 정액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윤일우의 옷에 쓸려 표피만 붉어졌다.
“괴로워…….”
재운이 울먹이며 윤일우의 어깨를 쥐었다.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쥐는 손길에는 고통을 풀어 달라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어떻게 해 줄까?”
윤일우는 재운의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모르는 척 열이 맺힌 귓불만 잘근잘근 씹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은밀했다.
“사정, 흣, 하고 싶어…….”
말갛게 빛나던 눈동자가 빛을 잃은 채 윤일우를 애타게 바라봤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윤일우가 먼저 재운의 안에 파정했다.
“으, 흐…….”
배 속이 뜨끈한 액에 달구어졌다. 재운이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내벽을 꽉 조였다. 윤일우가 손을 내려 아플 정도로 달아오른 재운의 성기를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맨질맨질한 살결을 훑을 때마다 보답하듯이 쫀득쫀득한 내벽이 윤일우의 성기를 압박해 왔다. 언제 사정했냐는 것처럼 단단해진 좆이 흐물흐물 녹은 내벽 안에서 부드럽게 앞뒤로 오갔다.
틈 없이 맞붙은 접합부 새로 애액에 뒤섞인 정액이 흘러내렸다. 이미 척척하게 젖어들어 간 시트 위에 작은 웅덩이가 고일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커다란 손이 요도구에서 흘러내린 액을 윤활제 삼아 아담한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중간중간 요도구도 문질러 주고 동그란 알사탕 같은 고환도 건드려 주니 재운의 눈가가 찌푸려지며 목에 퍼런 줄기 같은 핏대가 섰다.
“흐윽, 하…….”
가느다란 허리가 튕겨 오르며 윤일우의 옷에 점점이 정액을 뿌렸다. 사정의 여운으로 들썩이는 몸을 윤일우가 뒤집었다.
“그, 그만…….”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재운아.”
개구리처럼 시트를 잡고 엎드린 자세가 적나라했다. 아랫배가 불뚝 솟을 정도로 진입했다가 빠져나가는 성기의 움직임은 집요했다. 재운이 시트에 최대한 몸을 가깝게 붙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거대한 좆을 몸속에서 빼내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내벽은 재운의 의사와 상관없이 윤일우의 좆을 애타게 빨아들이는 통에 보채는 행동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특하네.”
“아, 흐, 아, 죽을 것 같아…….”
윤일우가 재운의 골반을 잡고 격한 허리 짓을 시작했다. 재운은 시트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윤일우가 움직이는 대로 꿰뚫듯이 파고드는 좆을 온몸으로 받아 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섹스는 오티가 시작하고 한 시간이 넘어가는 시점까지 이어졌다.
* * *
“늦게 오셨네요.”
“……네.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괜찮아요. 여기 팸플릿이랑 기념품 받고 들어가시면 돼요. 가방 안에서 외투 꺼내서 바로 입으면 되고요.”
“감사합니다.”
재운이 입구에서 학교 선배로 보이는 여자가 건네는 물건들을 받아 들었다. 다행히 여자는 베타인 것 같았다.
현재 재운의 몸은 윤일우가 적시다시피 덮어씌운 알파 페로몬을 은은하게 흘리고 있었다. 페로몬 탈취제를 뿌려 봐도 안에 들어찬 정액 때문에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형질인 중에서 페로몬에 민감한 이라면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페로몬이 피부에 스며들어 버렸다.
재운이 한국 대학교 로고가 박힌 에코백 안에서 남색으로 된 후드 집업을 꺼내 들었다. 프리 사이즈인 듯 넉넉하게 나온 집업이었다. 옷을 걸치자 소매가 재운의 손등을 반은 덮을 정도로 큼지막했다.
집업의 지퍼를 목 끝까지 채운 재운이 모자도 푹 눌러썼다.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 반 가까이 가려졌다.
핸드폰으로 온 메시지를 확인한 윤일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나는 오티 못 가겠다. 여기서 내려 줄 테니까 혼자 들어가. 끝나면 바로 연락하고.’
재운이 말없이 있자 윤일우는 재운의 볼을 손등으로 한 번 쓰다듬고는 그대로 내려 줬다. 재운은 원래 입고 있던 옷 대신 윤일우가 새로 사 준 옷을 입은 채였다.
윤일우는 특별히 재운의 목이 가려지는 흰 목티를 사서 입혔다. 진대원이 사줬던 옷과는 정반대로 윤일우의 취향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옷들이었다.
‘안에 있는 정액, 내가 빼라고 할 때까지 빼지 마.’
참기 힘든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재운은 현재 속옷에 패드 하나를 깔아 놓은 상태였다. 윤일우가 배 속에 가득 채운 정액을 재운이 빼내지도 못하게 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무리한 요구도 들어야만 하는 제 처지가 서러워도 재운이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뿐이었다.
재운을 내려 주고 천천히 사라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음울한 시선이 길게 따라붙었다. 차 안은 차를 새로 사야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밤꽃 냄새로 가득했다.
현재 재운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짙은 페로몬과 색사의 흔적이 차와 일체가 되어 있었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멍하니 서 있던 재운이 정신을 차린 건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이 재운에게서 나는 냄새에 코를 틀어막는 걸 본 이후였다.
재운이 주변을 둘러보다 근처에 있던 편의점 안으로 뛰어갔다. 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하체가 끊어질 듯이 아파 왔지만, 아픔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페로몬 탈취제를 사 한 통을 들이붓다시피 하며 오티가 진행되는 한국 대학교 경영관 글로리 홀로 향했다.
오티를 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재운은 뿌연 의식 속에서 명령어가 입력된 기계처럼 오티가 열리는 홀로 들어갔다.
무대에서는 축하 공연이 한창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 경영학과 내에 있는 댄스 동아리 선배들이 공연을 하는 것 같았다.
재운은 최대한 사람들이 적은 줄로 향했다. 가장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무거운 몸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흣…….”
의자에 닿은 면적을 따라 피어오르는 아픔이 지독했다. 재운이 아랫입술이 희게 질리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와 불안한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홀이 울리도록 음악 소리가 크게 나오는 중이었다. 누군가의 귀에 신음이 흘러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재운이 땀이 흘러나오는 이마를 소맷귀로 훔쳤다.
침대에 누워서 쉬어야 되는 몸 상태인데, 급하게 움직였더니 탈이 난 듯했다.
무대 위로 어지럽게 비쳐드는 색색의 조명 빛이 흐릿하게 망막에 맺혀 들었다.
재운의 눈꺼풀이 느릿느릿하게 깜박이던 것도 잠시, 결국 새까만 눈동자가 눈꺼풀 새로 모습을 감췄다.
“……기.”
“으음…….”
잠에 취해 있던 재운이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서서히 깨어났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끔벅거리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제 일어났네.”
“공연이 벌써…….”
“공연은 한참 전에 끝났어.”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크게 울려 나오던 음악 소리가 뚝 멎어 있었다. 무대 위에는 뒷정리를 하는 사람들 일부만 보였다. 홀 내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재운이 처음에 들어왔을 때보다 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너도 이번 학년 입학생 맞지? 한국 대학교 경영학과.”
“응…….”
재운이 살갑게 자신에게 말을 붙이는 학생을 올려다봤다. 재운과 같은 후드 집업을 입은 남자애는 친절한 매너가 몸에 배어 있었다.
주눅이 든 재운을 보고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춰 오는 행동에서 다정한 심성이 묻어났다.
“오티 끝나고 선배님들이랑 같이 근처 호프집 가기로 했거든. 너도 같이 가자. 지금 가기로 한 사람들은 대부분 호프집에 먼저 가 있어.”
“나는 괜찮아…….”
모르는 사람들이랑 부대껴서 술을 마신다는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원래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별장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재운은 사람이 두려웠다.
지금 재운의 앞에서 다정하게 말을 거는 남자애도 대화가 길어지자 불편했다. 당장 자리를 피하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거칠게 펄떡거렸다.
“약속 있는 거야?”
“응…….”
거절할 이유를 생각해 내기도 전에 남자애가 알아서 변명할 거리를 던져 줬다.
“그런데 너 어디 아파? 얼굴도 붉고, 식은땀도 흐르는 것 같은데.”
“아…….”
남자애는 그저 같은 연도에 입학한 학우의 건강이 걱정돼서 한 행동이었을 거였다. 재운이 손등이 벌게지도록 남자애의 손을 세게 쳐 낸 제 손을 놀라 내려다봤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재운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상처가 난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애가 머쓱한 웃음을 짓더니 재운을 향해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미안. 내가 내 이름도 얘기 안 하고, 선을 넘었다. 함유재야, 너랑 같은 신입생이고.”
“…….”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는 재운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핏줄이 보기 좋게 오른 손등과 다른 누군가의 손이 겹쳐 보이는 탓이었다.
현재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정액을 재운의 몸속에 가득 채운 사람의 손이.
“어? 잠깐만.”
재운이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는데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함유재는 당황했다. 그러다 재운을 두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는 재운의 얼굴만 살피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운과 계속 가까이 있자 묘한 냄새가 온몸으로 다가왔다.
“너 혹시 알파야? 아니, 아니다. 이건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
오메가가 알파의 페로몬을 이토록 진하게 내보이는 경우는 하나였다. 함유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가 재빨리 재운에게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재운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식은땀에 젖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하얀 이마 위에 한 폭의 수묵화를 그리듯 난을 쳤다.
재운이 함유재한테서 은근하게 흘러나오는 알파 페로몬을 느낀 탓이었다. 윤일우와 질펀하게 몸을 섞으며 예민해졌던 오메가의 몸이 새로운 알파의 페로몬을 느끼자 빠르게 달아올랐다.
발정이라도 난 개처럼 곧바로 반응이 오는 몸에 재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가를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이 마른 볼을 흠뻑 적시고도 모자라 뼈마디가 하얗게 두드러지도록 굳게 쥔 주먹 위까지 투명하게 물들였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함유재가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을 벗어 재운의 몸을 감싸 안았다. 벌벌 떠는 재운을 안다시피 해서 일으켰다. 그의 손끝 또한 떨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흐윽…….”
제어되지 않은 오메가 페로몬이 조금씩 공기 중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거 설마 오메가 페로몬이야?”
“난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넌 베타니까 그렇지. 히트 사이클이 터진 건가?”
“요즘 누가 억제제도 안 먹고 돌아다니냐.”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귓가에 닿아 왔다. 재운은 함유재가 이끄는 대로 시야가 가려진 채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참아.”
함유재가 위로하듯이 재운의 팔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어디론가 향하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그가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몇 걸음조차 걷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을 만큼 재운의 다리에는 힘이 없었다.
자꾸만 다리가 꺾이는 몸에 함유재가 재운을 안아 들었다.
“내, 내려 줘…….”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천을 사이에 두고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불과 몇 분 전에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재운이 당황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이어진 함유재의 말에 침묵했다.
“아직 수업 안 할 때라 강의실들이 비어 있을 거야. 안쪽에 있는 데로 갈 거니까 조금만 참아. 너 여기서 얼굴 드러나면 학교생활 힘들어질지도 몰라.”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하는 오메가라고 낙인이 찍히는 순간 재운을 쉽게 여기는 이들이 늘어날 건 자명했다.
안 그래도 알파들은 보통 오메가들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형질인이 처음 등장했던 때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오메가의 인권이 신장한 현시점에서도.
강의실 문을 잠그고 나서야 함유재가 앞쪽에 놓인 책상 위에 재운을 내려놓았다.
“괜찮아?”
재운을 덮고 있던 집업을 내리니 눈물로 엉망인 얼굴이 드러났다. 불이 켜지지 않아 다소 어두운 강의실 내부에서도 재운의 하얀 살결은 스스로 빛을 내는 듯이 말갰다.
눈가가 눈물에 젖어 붉은빛이 더욱 잘 보였다. 함유재가 갑자기 느껴지는 갈증에 목울대를 울렸다.
“보, 보지 마…….”
재운이 한눈에 봐도 확연하게 부풀어 오른 고간을 자그마한 두 손으로 가렸다. 감긴 눈가를 따라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미안.”
함유재가 재빠르게 몸을 뒤로 돌렸다. 분명 재운은 옷을 다 입고 있는데도 열기가 고인 얼굴을 마주하자 아랫배가 저릿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창가로 가 창문도 활짝 열었다. 재운에게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채 그는 재운이 진정할 시간을 주었다.
“……고마워.”
재운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함유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만약 그가 나쁜 마음을 먹었더라면 재운을 어디론가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협박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곤경에 처한 재운을 구해 준 것뿐만 아니라 재운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해 주고 있었다.
가장 가깝게 지냈던 이들에게 짓밟혔던 마음이 그가 보여 준 친절에 조금이나마 위로받았다.
“이런 거 가지고 뭘. 지금은 괜찮아?”
“……응.”
열린 창문을 따라 불어온 봄바람이 땀에 젖은 이마를 한 김 식혀 줬다. 패드를 했는데도 속옷이 온통 축축해졌지만 티가 나게 부풀어 올랐던 앞섶은 다행히 가라앉았다.
“기숙사에 살아?”
“……아니.”
“그러면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나 차 있어서 주차장에 세워 뒀거든.”
재운이 떨리는 시선을 들어 함유재를 바라봤다. 단정하게 생긴 외모였다. 평생 싸움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유약한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다만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와 다부진 체격이 그러한 외모를 중화시키며 남성다운 매력을 내보였다. 키도 평균보다 아득히 커 보였다.
“너는…… 알파야?”
“응.”
알파다운 생김새였다. 스치듯이 느껴졌던 그의 페로몬도 떠올랐다.
재운이 두려움에 젖은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창가를 타고 흘러들어 온 햇살이 한 뼘을 사이에 두고 재운의 곁에서 맴돌았다.
“혹시 사귀는 알파 있는 거야? 이런 거 묻는 게 실례라는 건 아는데…… 페로몬이…….”
뒷말은 삼켰지만 재운은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알파의 정액을 몸에 품고 있으니 물어보는 거겠지.
페로몬 탈취제로도 가려지지 않는 알파의 짙은 페로몬이 제 몸에 달라붙어 있으니까.
“……사귀는 사람, 없어.”
차라리 윤일우와 사귀는 사이였다면 덜 비참했을지도 몰랐다. 친구도 연인도 아닌, 좆집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그를 연인으로 포장하는 건 이미 난도질된 마음을 한 번 더 죽이는 일이었다.
“……다행이다.”
“뭐?”
“아니야. 이제 나갈까?”
함유재가 단정한 발걸음으로 재운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재운을 부축해 주려는 거였다.
하지만 재운은 고개를 살며시 젓고는 제힘으로 책상 위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지만 함유재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운의 인생에 알파는 이미 엮여 버린 이들로도 충분했다. 오늘 그가 베푼 호의는 고마웠지만 필요 이상으로는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가자.”
거절당한 손을 머쓱하게 바지에 넣은 함유재가 생긋 웃으며 턱으로 닫힌 문을 가리켰다.
“이거.”
“너 덮고 있어. 한 겹이라도 더 몸을 감싸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재운이 함유재의 집업을 어깨에서 끌어 내렸다. 그는 받아 드는 대신 마른 어깨 위로 재차 집업을 걸쳤다.
윤일우와는 다른 페로몬이 섞인 체향이 재운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밝은 햇살을 머금은 듯한 따스한 향이었다. 맡아 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해바라기 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침묵이 함께했다. 재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고, 함유재는 재운의 표정과 걸음걸이를 살피기 바빴다.
재운의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만 없었다면 두 사람의 걸음은 주차장까지 이어졌을 거였다.
“야, 왜 연락 안 받아?”
그날 이후로 처음 만나는 송진오였다.
날카로운 눈매가 재운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민하게 훑었다. 재운에게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에 미간을 찌푸린 그가 재운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댈 때였다.
“당신, 누굽니까?”
“이건 또 뭐야. 너 벌써 새로운 놈 하나 낚았냐?”
함유재가 순했던 인상을 무섭게 굳히고 송진오를 막아섰다. 자연스럽게 함유재의 등 뒤에 서게 된 재운이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이 희게 질리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송진오는 재운이 그들의 사이가 친구라고 믿었을 때에도 재운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별장에서 그는 재운의 희망을 산산조각냈다. 무자비하게 입을 벌리고 제 성기를 욱여넣던 그의 눈동자는 그 순간 재운을 정말로 같은 사람보다는 하나의 물건으로 여긴 것처럼 보였다.
“손대지 말고 얘기해요.”
함유재가 재운에게 손을 뻗는 송진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키가 비슷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송진오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짜증으로 일그러진 눈초리가 매서웠다.
“이재운이랑 친구니까 비키라고, 너는.”
“……친구라고요?”
“어. 학창시절 내내 붙어 다녔으니까 비켜.”
송진오가 거칠게 함유재의 어깨를 밀어냈다. 함유재는 굳건하게 재운의 앞을 막아선 상태로 버텼다.
“재운아, 정말로 친구 맞아?”
“재운아? 어이가 없네.”
친근하게 재운을 부르는 함유재의 말투에 송진오의 입꼬리가 일자로 굳었다. 분명 자신은 오늘 처음 보는 놈이었다. 그런 놈이 재운하고 친한 척 붙어 있는 게 거슬렸다.
재운의 곁에 친구라는 명목으로 붙어 있는 놈들은 자신과 다른 친구 놈들이 다였다. 눈치로 보아 대학교에 들어와서 만난 새끼였다. 그런데도 놈과 재운의 사이는 자신과 재운의 관계보다 친밀해 보였다.
“……마, 맞아. 나 가 볼게. 오늘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송진오의 목소리에 어린 짜증에 정신을 차린 재운이 힘겹게 함유재와 시선을 맞추고 작별 인사를 고했다. 여기에서 송진오를 무시하고 자리를 피해 봤자 자신은 어차피 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외국으로 밀항선이라도 타고 도망가지 않는 이상 놈들의 눈길을 피해 숨을 곳은 대한민국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적이 드문 동네를 찾아 숨어든다고 하더라도 금세 사람을 풀어 자신을 찾을 테니까.
“진짜로 괜찮은 거 맞아?”
함유재의 등 뒤에서 나와 송진오에게 걸어가는 재운의 손을 함유재가 붙잡았다. 식은땀이 흥건한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으로 얼룩진 얼굴은 누가 봐도 두 사람이 일반적인 친구 관계가 아니라는 걸 드러냈다.
“아…….”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송진오가 재운의 팔목을 잡아 제게로 당겼다. 재운의 손을 잡고 있던 함유재의 손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재운은 졸지에 송진오의 품에 고개를 묻게 됐다.
“괜찮다는데 너야말로 왜 이렇게 질척거려. 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송진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함유재는 쉽사리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재운의 몸에 남아 있던 알파의 페로몬과는 다르지만 눈앞의 놈도 알파였다.
경고하듯이 흘러나온 페로몬이 불유쾌하게 함유재의 전신을 압박했다.
이대로 재운을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계속해서 하는 이유였다.
“도와 달라고 말해. 그러면 내가 구해 줄게.”
“……어이가 없네.”
송진오는 살아오면서 이토록 자신을 무시하는 놈은 처음이었다. 알파로 발현되기 전에는 등에 두른 집안의 후광이 함께였다. 알파가 된 이후로는 본인의 능력까지 더해졌다. 자신을 몰라서 이렇게 행동하는 거겠지.
페로몬으로 압박까지 하는데도 버티는 게 제법이었다.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송진오의 알파 페로몬은 품에 있는 재운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살갗을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분명 고통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그런데 정액으로 뒤범벅된 성기가 움찔 떨면서 반응을 보였다.
재운은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송진오의 손을 잡았다. 송진오는 뒤끝도 길다. 여기에서 함유재가 송진오와 계속 부딪치면 그의 인생에도 먹구름이 낄지 몰랐다.
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건 자신 한 명이면 족했다. 자신을 도와준 함유재에게 은혜를 갚지는 못할지언정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송진오, 제발…….”
작은 손은 송진오의 손을 다 잡지도 못했다. 고작해야 검지와 중지만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운이 좋네.”
송진오가 재운의 손을 감싸 쥐었다. 누군가와 손을 잡는 행위 따위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달리듯이 닿아 오는 체온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가자.”
함유재에게 비웃음을 던진 송진오가 재운을 끌어당겼다. 비틀거리면서 끌려가던 재운이 고개를 돌려 망부석처럼 서 있는 함유재를 바라봤다.
‘미안.’
입 모양으로만 사과를 건네는 게 재운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함유재한테 도와 달라고 말해 봤자 그를 곤경에 빠트리는 결과만 낳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