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1)

9.

“일어났어?”

“아…….”

재운이 이마를 간질이는 손길에 부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언제 기절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윤일우와 섹스를 했다.

서재에서 다시 불이 붙은 섹스는 복도를 지나 침실에 잠시 정착했다가 욕실까지 이어졌다.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곰곰이 떠올렸다. 다소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얗던 재운의 얼굴 위로 붉은 물감을 옅게 탄 듯한 빛이 삽시간에 번졌다.

“무슨 생각했길래 얼굴이 붉어진 거야?”

윤일우가 이불 속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재운의 팔을 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그, 그게…….”

재운이 휑한 아래에 기겁하며 제 옷차림을 살펴봤다. 한쪽 어깨가 다 보일 정도로 커다란 잠옷 상의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반대로 윤일우는 자신이 입은 것과 같은 디자인의 잠옷 바지만을 걸친 상태였다.

침실의 간접 등 아래에서도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상체는 선명하게 재운의 시야에 파고들었다.

“야한 생각했어? 어제는 섹스 도중에 기절하더니.”

재운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는 것처럼 윤일우가 낮은 웃음을 재운의 귓가에 흘렸다.

“그냥…… 꿈 같아서…….”

한숨 자고 났더니 현실감이 더 떨어졌다.

재운은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구는 윤일우의 행동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어떤 부분이?”

“이러고 있으니까 꼭…… 사귀는 사이 같아…….”

윤일우가 재운을 안은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톱밥을 파고든 햄스터처럼 제 품에 웅크린 재운의 몸이 어제보다도 가볍게 느껴졌다.

“사귀는 사이 맞지. 우리 지금 같이 살고 있잖아.”

윤일우의 말에 재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을 지척에서 마주하고는 재차 고개를 숙였다.

“자기야.”

“으, 응……?”

재운이 손을 들어 간질간질한 감각이 맴도는 귀를 매만졌다. 방금 들은 말 때문에 심장이 갓 잡은 물고기처럼 요란하게 뛰었다.

“자기라는 말 별로야?”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윤일우가 미친 걸까. 아니면 자신이 미친 걸까.

재운은 자신이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니면 윤일우의 정신 상태가 이상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는 건 보통 정신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은 아직도 변화된 관계에 낯선 감정이 더 큰데. 윤일우가 제게 사랑 고백을 하고, 다정한 섹스를 나눴어도 연인이 될 거라는 기대감은 없었다.

“그럼 재운이도 말해 줘.”

윤일우가 제 귓가를 재운의 입을 향해 가져다 댔다. 재운이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어물거릴 때마다 재운의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윤일우의 귓바퀴를 스쳤다.

“얼른.”

“자, 자기야…….”

“듣기 좋네.”

윤일우의 재촉에 결국 재운이 그가 원하는 말을 했다. 부끄러워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는 재운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 윤일우가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이게 다 뭐야……?”

“배고프지 않아? 어제 제대로 먹은 것도 없으니까.”

8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식탁 위에 각양각색의 음식이 먹기 좋게 놓여 있었다.

“우리 둘이서 이걸 다 먹어?”

“접시가 커다래서 그래. 안에 담긴 양은 얼마 안 돼.”

언뜻 눈에 들어오는 접시의 수만 한 손을 넘어갔다. 만약 재운이 혼자 먹는다면 이틀은 먹어도 될 양이었다.

“너 너무 말랐어. 살 좀 쪄야 돼.”

윤일우가 재운이 숨을 쉬면 도드라지는 갈비뼈 부근을 매만졌다. 재운이 시무룩하게 양 눈썹을 내리떴다.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라 그래.”

재운이 힐끗 상의 아래로 드러난 제 앙상한 몸과 탄탄한 윤일우의 몸을 비교해 봤다.

알파와 오메가여서 체격 차이가 나는 것도 있지만, 재운은 오메가 중에서도 마른 편에 속했다.

원래도 입이 짧은 편에다가 살도 잘 안 붙었는데 마음고생, 몸 고생 하면서 그나마 있던 살들도 빠진 영향이 컸다.

“앞으로는 밥 꼬박꼬박 챙겨 먹자. 스트레스 안 받게 할 테니까.”

재운은 성정이 예민한 편이었다. 작은 환경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남한테 푸는 대신 몸이 탈 났다.

재운이 살이 빠지는 데에 제가 큰 역할을 했다는 걸 윤일우가 모를 리 없었다.

“어떤 것부터 먹을까? 남는 건 내가 다 먹을 거니까 일단 골라 봐.”

이미 오전을 지나 정오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윤일우는 재운이 기절한 후에도 뒤처리를 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재운이 곤히 잠든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 해가 뜨고 점심때가 가까워질 때까지 윤일우가 한 일이라고는 고용인을 시켜 식사를 준비한 것뿐이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이 재운의 눈에는 많아 보일지 몰라도 윤일우에게는 한 끼에 거뜬히 해치울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러면…… 수프 먹을래.”

재운이 커다란 눈을 데구루루 굴려 제일 양이 적어 보이는 음식을 골랐다.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배고픈 것보다도 다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을 만큼 기력이란 기력은 죄다 윤일우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래. 수프도 먹고, 빵도 먹자.”

윤일우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여전히 재운은 그의 몸에 안긴 채였다.

“나 계속 이러고 있어?”

“응. 불편해?”

“……아니.”

맨살에 닿는 느낌이 지나치게 적나라해 아랫배에 열기가 고인다는 걸 제외하면 따뜻했다.

이미 윤일우의 고간도 부풀어 오른 건 매한가지였다. 잠옷의 소재가 얇은 실크 재질이라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불편하다기보다…….”

윤일우의 짙은 시선이 조금씩 젖어 들어가는 제 허벅지에 닿았다. 재운의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액이 잠옷 위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우리 재운이 아침부터 건강하네.”

“읏, 마, 만지지 마…….”

길쭉한 손가락이 액이 흘러나오는 구멍 주변을 문질렀다. 살짝 부어올라 적당한 온기가 손끝에 만져졌다.

구멍에 손가락 한 마디만을 넣어 쑤셔 주자 재운의 잠옷 상의 끄트머리에서도 반응이 왔다.

서서히 발기하는 복숭앗빛 성기를 보는 윤일우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질 때였다.

꼬르르륵.

재운의 배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구멍에서 나는 젖은 소리의 맥을 탁 끊었다.

“그래서 내가 만지지…… 말라고…….”

민망했던 재운이 아랫입술이 희게 질리도록 깨물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재운의 이성과 본능은 달랐던 모양이다. 고소한 음식 내음이 느껴지자 재운의 배가 음식을 넣어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밥 안 먹이면 큰일 나겠네.”

윤일우가 웃으면서 가슴이 들썩거릴 때마다 기대어 안겨 있는 재운의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이제 안 건드릴게. 여기 수저.”

재운이 먹고 싶다고 했던 수프가 담긴 그릇을 끌어온 윤일우가 재운의 손에 수저까지 쥐여 줬다.

밥을 먹기 편하도록 옆으로 안겨 있던 재운을 앞을 향한 채로 앉을 수 있게 자세를 바꿨다.

졸지에 다리를 벌린 자세로 앉게 된 재운의 귓바퀴가 더욱 붉어졌다.

“너무 식었나. 데워 달라고 할까?”

“……아니.”

재운이 적당히 식은 수프를 입안에 넣었다. 따뜻하다기보다는 약간 차가운 온도였지만 그래서 더 먹기는 쉬웠다.

또다시 배에서 소리가 날까 봐 재운이 다소 급하게 수프를 입으로 가져갔다.

“물도 마셔. 그러다 체할라.”

윤일우가 물컵을 들어 재운의 입가에 가져갔다. 재운이 얌전히 물을 받아 마셨다. 재운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는 손길이 다감했다.

재운은 어느 순간부터 수프의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시선이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짙은 눈길과 몸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온 감각을 기울이게 됐다.

수프 그릇이 바닥이 보일 즈음이 되자 우렁찬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고프던 배도 든든해졌다.

“다른 음식도 조금씩 더 먹자.”

윤일우가 소화가 잘될 만한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가져왔다. 재운의 앞에 놓인 앞접시에 다양한 음식들이 한 입 크기로 놓였다.

재운은 몸을 움직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면서 식기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몸이 잠깐만 들썩여도 하체에 맞닿아 있는 윤일우의 몸체가 자극적일 정도로 강하게 다가왔다.

“움찔움찔 떨지 마. 안 잡아먹을 거니까.”

재운의 몸 곳곳에는 붉은 자국뿐만 아니라 퍼런 물이 든 자국도 생겼다.

윤일우가 잠옷 상의를 들춰 자신의 손 모양대로 난 자국 위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 면 만지지 마…….”

안 잡아먹는다면서 손끝에서 느껴지는 건 분명한 욕망이었다.

재운이 윤일우의 팔을 잡아끌어 아래로 내렸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일단 윤일우가 덜어 주는 음식은 다 비워야 할 것 같아 턱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네 살에서 단맛 나는 것 같아.”

윤일우가 허리를 지분대는 손은 그대로 두고, 재운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다. 혀를 내밀어 넓게 쓸어올렸다.

디저트처럼 단맛이 나는 건 아니지만, 재운은 페로몬 향도 그렇고, 살 자체에서도 다디단 맛이 났다.

“너, 너는 안 먹어?”

재운이 이대로면 이번에는 다이닝 룸 식탁을 침대 삼아 섹스할 것 같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어제 윤일우와 한 섹스는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좋았지만 그만큼 힘들었다. 재운은 이 관계에 적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알았다.

재운은 윤일우가 제게 다정하게 대해 줄 때마다 그가 했던 짓들을 떠올릴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극명하게 다른 행동에 혼란스럽고, 아프고, 또 좋아서 스스로가 미쳤다는 걸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될 테지.

게다가 몸 상태 또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지금도 하체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까 윤일우가 구멍을 매만질 때도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구멍처럼 내벽도 퉁퉁 부어오른 건지 정액이 다 빠져나갔는데도 속이 더부룩한 느낌도 났다.

“재운이가 나 먹여 주면 되겠다.”

윤일우가 재운의 몸을 돌려 안았다. 얼굴이 잘 보이는 자세였다. 앞접시를 살피니 재운이 제가 덜어 준 음식들을 야무지게 먹은 흔적이 보였다.

슬그머니 손을 움직여 판판한 아랫배를 매만졌다. 여기서 더 먹이면 체할 게 분명했다.

“어떤 거 먹고 싶은데……?”

재운이 윤일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식탁 위를 훑었다. 기억을 곰곰이 돌이켜 윤일우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기 먹을래?”

“응.”

윤일우는 단정한 얼굴과 달리 알파답게 키도, 체격도 남달랐다. 다른 애들도 평균 키를 훨씬 웃돌지만 그중에서 윤일우의 키가 가장 클 정도였다.

고기 위주로 포크에 찍어 윤일우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윤일우는 군말 없이 아기 새처럼 재운이 먹여 주는 음식들을 꼭꼭 씹어 넘겼다.

“재운아.”

“응.”

음식을 다 먹고 윤일우가 자리를 옮겼다. 넓은 소파에 재운을 안은 채로 앉았다가 곱게 개어진 담요를 끌어와 재운의 하체를 덮었다.

훈훈한 공기가 돌기는 해도 추워서 몸을 떨고 있던 재운이 담요로 몸을 둘렀다.

“어떻게 복수하고 싶어?”

“……복수?”

액이 흘러나오는 엉덩이를 특히 담요로 싸매고 있던 재운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뜬금없는 화두였다.

“응. 나랑 다른 애들한테 복수해야지. 김본기는 게다가 너한테 약까지 먹였는데.”

그날 재운이 갑작스럽게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윤일우는 항상 재운을 망가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가 원해서 한 것과 다른 이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건 다른 문제였다.

윤일우는 김본기가 저지른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괜찮은데.”

잠시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고민하던 재운이 윤일우와 시선을 맞췄다. 고민에 빠져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던 저와 달리 윤일우의 눈동자는 제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재운이 복수를 생각하지 못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예전에는 복수할 힘이 없었고. 지금은 그저 윤일우와 이렇게 마음 편히 마주 보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을 내면 탈이 날지도 모른다.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재운이 어린 나이부터 깨달은 인생관이었다.

“이걸 괜찮다고 하는 건 착한 게 아니라 바보 같은 거야.”

윤일우가 차오르는 한숨을 목 뒤로 삼키며 재운의 손을 끌어당겼다.

“나한테도 복수해야지. 다른 놈들한테도 당연히 해야 되고. 네가 못 하면 내가 할 거야. 김본기는.”

재운이 손에 힘을 줄 생각은 않고 윤일우의 목만 만지작거렸다. 마음이 무른 재운 대신 힘을 가한 건 윤일우였다.

윤일우는 제 목을 조르는데도 힘을 가볍게 주지 않았다. 재운의 손을 감싸 안은 채로 있는 힘껏 손에 힘을 줬다.

“하, 하지 마……!”

윤일우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재운이 윤일우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윤일우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마치 자신이 윤일우의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윤일우의 하얀 눈자위에 실핏줄이 서고, 관자놀이에도 핏줄이 불뚝 설 정도로 압력이 강해졌다.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하지 마!”

재운의 얼굴이 순식간에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윤일우는 정말 헐떡이던 숨이 한계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손에서 힘을 풀었다.

“왜 그래, 너 진짜…….”

벌건 손자국이 남은 윤일우의 목을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재운이 울음을 터트렸다.

윤일우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피해자인 자신이 괜찮다고 하는데 기어코 몸에 상처를 낸 윤일우 때문에 거칠게 뛰는 심장을 따라 저릿한 감각이 번져 나갔다.

“언제든지 나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된다는 뜻이야.”

충격에 빠져 울고 있는 재운과 달리 윤일우의 얼굴은 태평했다.

“아. 그냥 내 손으로만 잡고 조를 걸 그랬나.”

평온했던 윤일우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발갛게 부어오른 재운의 손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인정사정없이 제 목을 조른 결과가 재운의 피부 위에 남아 있었다.

“미안. 아프게 안 한다고 약속했는데 벌써 못 지켰네.”

“앞으로는, 이런 거 하지 마…….”

윤일우가 재운의 손등을 들어 올려 입술을 붙였다. 잘게 떨리는 손이 재운이 받았던 충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아픈 게 싫어?”

“……응.”

재운이 팔을 들어 눈물로 젖은 얼굴을 닦아 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성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윤일우는 재운이 사랑하는 이였다.

심한 꼴을 당하고도 윤일우의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에 마음에 걸려 있던 부서진 빗장을 열었을 만큼.

“너랑 나랑 너무 다르네. 나는 네가 아파하는 것도 좋은데.”

“……나쁜 새끼.”

“맞아. 나 진짜 나쁜 놈이지.”

얘는 욕을 해도 어쩜 이렇게 무해하게 할까.

윤일우가 웃음을 흘리다가 목을 부여잡고 콜록거렸다. 성대가 상할 정도로 목을 조른 결과였다.

눈시울이 발개져서 윤일우를 노려보던 재운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콜록, 어디, 가려고.”

“물 가져오게.”

“됐어.”

윤일우가 품에서 벗어나려는 재운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겨 안았다. 잔기침이 연달아 새어 나왔지만 물보다는 재운의 체향을 들이마시는 게 더 좋았다.

“답답해…….”

숨이 막힐 정도로 윤일우가 재운을 끌어안은 상태라 재운이 상체를 비틀며 바르작거렸다.

“조금만 이러고 있자. 나 기침 또 날 것 같아.”

윤일우가 일부러 자잘한 기침을 터트렸다. 답답한 품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던 재운이 결국 포기하고 윤일우에게 몸을 온전히 맡겼다.

“그런데…….”

“응.”

“나 이제 학교도 나가고……. 외출도 하면 안 돼?”

윤일우의 페로몬이 안정적으로 흐르는 걸 눈여겨본 재운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떼었다.

윤일우가 재운의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재운과 시선을 맞췄다.

커다란 눈동자가 굴러가는 궤적을 따라 데굴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가고 싶어? 왜?”

윤일우가 많이 자라난 재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고개를 기울였다.

바깥에 나가 봐야 모르는 사람들 천지이고, 재운이 오메가인 이상 위험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이 좋다면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재운이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이 작아서 그런가.

“더 큰 집으로 이사 갈까? 정원도 넓은 데로.”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러면?”

“당연히 나도 바깥에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지……. 학교도 다시 다니고. 또 돈도 벌고.”

“공부가 하고 싶은 거면 내가 교수님들 집으로 부를게. 돈은 내 돈이 네 돈이 될 텐데 왜 힘들게 벌 생각을 해?”

재운이 눈을 끔벅거렸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윤일우는 재운이 어떤 말을 꺼내 던지든 다 막아 낼 용의가 있어 보였다.

깨끗하고 깊은 눈동자는 흔들림도 없었다. 정말로 윤일우는 재운이 지금처럼 생활하는 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런 건…… 정상적인 게 아니야.”

“정상적인 게 어떤 건데? 재운아, 이미 너랑 내 관계부터가 비정상적이야.”

가해자와 피해자.

세간의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면 열에 아홉은 그렇게 말할 거였다. 재운이 말문이 막혀 윗니로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윤일우가 제게 유해졌다고는 하나 지금처럼 마음대로 바깥출입도 못 하고 사는 건 애완동물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래도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 그렇게 살래, 일우야.”

재운은 비록 동공이 거세게 떨릴지언정 가라앉은 윤일우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윤일우의 손가락이 톡톡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재운의 허리 위를 건드렸다. 미세한 접촉인데도 재운은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몸이 굳어 버렸다.

“이 얘기는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얘기하자.”

윤일우는 재운에게 확답을 하는 대신 답할 시간을 미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일우가 재운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입술을 타고 머뭇거리는 숨결이 잡아먹히듯 윤일우에게 넘어갔다.

감긴 재운의 눈가를 따라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작은 자유마저 허락해 주지 않는 윤일우의 태도가 야속했다.

그런 윤일우에게서 조각난 애정이라도 찾으려 하는 자신의 모습이 눈을 감아서라도 외면하고 싶을 만큼 비참한 건 덤이었다.

* * *

“……다녀와.”

“응. 금방 올게. 늦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재운은 넓은 집 안에서 윤일우를 배웅하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목에 목줄만 채워져 있지 않을 뿐 한정된 공간에 감금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너무 답답해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에는 비밀번호가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재운이 윤일우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은 달랐다. 안에서도 비밀번호를 눌러야만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재운은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멍하니 있어야만 했다.

윤일우가 특별히 주문 제작해서 단 건지 비밀번호 없이는 집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창문은 모두 자유롭게 열고 닫을 수 있었지만 층수 자체가 까마득한 높이였다.

하필 윤일우의 집은 가장 높은 층에 단 하나 존재하는 호수였다.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재운의 머리카락을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렸다. 떨어지면 시체도 온전히 남지 않을 높이에 재운은 쓸쓸히 창문을 닫아야만 했다.

“왜 이렇게 표정이 우울해. 내일은 같이 외출하자. 급한 일은 오늘 다 끝내고 올게.”

재운의 양 눈썹이 아래를 향해 축 가라앉았다. 하얀 얼굴에 음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윤일우가 고개를 숙여 입술 위로 촉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알았어.”

재운은 더 할 말이 있었지만 말을 해도 윤일우가 들어주지 않을 걸 알아 고분고분히 대답하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등을 돌린 윤일우가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일정한 음 때문에 어떤 번호를 누르는지 유추하기도 힘들었다. 거대한 등판은 번호판을 틈 없이 가리고 있어 보는 것도 어려웠다.

문이 닫히자 재운은 망연자실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봐도 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영화, 드라마, 예능이 나오는 커다란 티비도 있었고, 각종 게임기도 구비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간단하게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부터 책장 여러 개를 빼곡하게 채운 책들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났다.

냉장고에는 음식 재료가 가득했고, 가끔은 윤일우가 사람을 통해 고급스러운 요리를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사는 건…….”

처음 사랑을 고백한 이후 윤일우는 종종 재운의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이고는 했다.

재운은 윤일우가 제게 사랑을 고백하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굳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재운은 윤일우를 사랑하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재운이 윤일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외부에 있는 사람이 재운을 도와준다면 모를까.

무엇보다 재운은 윤일우에게서 벗어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도망갔다 한 번 붙잡힌 이후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은 접었다.

“……너무 외롭잖아.”

윤일우는 재운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살기를 원했다.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재운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막고 있었다.

“나는 사람이야, 일우야…….”

재운이 현관문 앞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두 다리를 모으고 무릎 위로 고개를 묻었다.

적당히 시원한 실내 안에서 재운의 두 무릎만 뜨겁게 젖어 갔다.

오늘은 윤일우가 몇 시쯤 올까 시계만 내내 지켜보고 있기 싫었다. 차라리 수면제라도 먹고 잠들었다 일어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거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재운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오래 앉아 있자 어젯밤에도 시달린 엉덩이가 결렸다. 찌르르한 둔통이 척추를 타고 번져 나갔다.

끼니때가 지나도 먹을 게 들어오지 않자 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재운은 몸이 보내는 신호에도 말없이 웅크린 자세 그대로 숨만 쉬었다.

날짜 개념도 날이 갈수록 흐릿해졌다. 어렴풋이 지금 대학교는 기말고사 기간이라는 것만 기억이 났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점점 가라앉으며 주홍빛으로 변해 갔다.

주홍빛은 금세 어둠에 잡아먹혔다. 창백한 빛을 흩뿌리는 달이 새까만 밤하늘 가운데 걸렸다.

재운은 점심도, 저녁도 거른 채 현관문 너머에서 들려올 소리만을 기다렸다. 작은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은 인형처럼 생기가 없었다.

삑, 삑, 삑, 삑.

현관문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재운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들었다.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

아침에 나갈 때보다 지친 안색의 윤일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요즘따라 윤일우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옷차림도 나갈 때와 달랐다. 여느 대학생처럼 편안하게 입고 나갔던 옷이 짙은 남색의 양복으로 바뀐 채였다.

“……그냥 너 오는 거 기다렸어.”

오랜 시간 말하지 않아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재운이 목을 붙잡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신발을 벗은 윤일우가 재운의 허리를 휘감아 그대로 말간 뺨에 입술을 붙였다.

“눈이 부었네. 계속 울었어?”

“……응.”

“울보 돼서 큰일 났네.”

붉은 기가 남은 눈가에도 윤일우의 입술이 닿았다. 윤일우는 재운이 왜 울었는지 묻는 대신 재운의 몸을 반쯤 들어 올린 상태로 움직였다.

“밥부터 먹자. 뭐 먹고 싶어?”

“……별로 배 안 고파.”

“거짓말. 배에서 소리 나는 것 같은데.”

재운이 마른 배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제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윤일우가 말한 대로 소리는 나는데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녁 아직 안 먹었어. 간단하게 파스타 해 줄까?”

“……응.”

윤일우도 저녁을 안 먹었다는 말에 재운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운을 식탁 의자에 앉힌 윤일우가 팔을 걷어붙이고 냉장고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꺼냈다. 윤일우는 원래 요리를 못했다. 그런데 재운과 함께 살고 난 후 어느 날부터 지금처럼 직접 요리를 하고는 했다

비록 칼질은 서툴지라도 레시피를 보고 정석대로 음식을 완성하는 걸 보면 요리에 소질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재운은 멍하니 윤일우가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러고 있을 때면 꼭 윤일우와 자신이 평범한 연인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인 게 분명한데도. 부엌 가득 번져 가는 음식 냄새가 마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어 갔다.

어쨌든 이제는 재운은 윤일우를 제외한 다른 이들과 섹스를 하지 않았고, 윤일우는 재운을 아프게 하지도 않았으니까.

“뜨거우니까 식혀서 먹어.”

“……잘 먹을게.”

재운이 앞에 놓인 그릇을 내려다봤다. 통통한 새우살이 올라간 크림 파스타였다.

파슬리 가루까지 뿌려져 있어 레스토랑에 파는 것 못지않게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고소한 음식 내음이 코끝을 찌르는데도 재운이 파스타를 포크로 뒤적거리는 움직임에는 힘이 없었다.

“재운아.”

재운의 모습을 지켜보던 윤일우가 식기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포크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러고 있으니까 얘기하는 게 더 어렵네.”

“……뭐가?”

재운은 아직 윤일우가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히면 겁부터 집어먹었다. 자신이 음식을 앞에 두고 먹지 않아 화난 건가 싶어 재운이 윤일우의 눈치를 살폈다.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떨린 손에 포크가 접시와 만나 챙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 내일부터 잠깐 미국에 갔다 와야 해.”

“……미국?”

“응. 집안일 때문에.”

미국이라면 한국에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포크를 쥔 재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하루도 안 되는 시간도 윤일우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게 버거웠다. 그런데 며칠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홀로 남겨져 기다려야 한다니……. 재운은 견딜 자신이 없었다.

“다른 애들한테 맡기는 건 싫은데. 내일 진대원 올 거야. 진대원이랑 같이 있어.”

“……대원이랑?”

“응. 진대원은 그래도 믿을 만하니까.”

윤일우도 나날이 말라 가는 재운이 신경 쓰였다. 낯가림이 심한 재운이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고용인들하고만 지내게 하면 밥도 제대로 먹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윤일우는 김본기에게는 이미 손을 써 둔 상황이었다. 작은 물꼬만 틀어 준 거지만 김본기는 스스로 진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만 확실하게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재운이 원하지 않아 진대원과 송진오는 일단 놔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송진오를 재운의 곁에 붙여 뒀다가는 윤일우의 경고도 무시하고 재운에게 손을 댈 가능성이 컸다.

그답지 않게 재운을 향한 순애보를 보이는 진대원이 마음에는 들지 않아도 그나마 나은 선택지였다.

“진대원도 이제 곧 여름 방학이라 시간이 남아돌거든.”

윤일우가 포크를 들어 파스타를 먹기 좋게 돌돌 감았다. 재운의 입가로 가져다 대자 머뭇거리던 입술이 조그맣게 열렸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러니까 불편해도 진대원이랑 지내고 있어.”

“……알겠어.”

싫다고 말해 봐야 윤일우는 어떻게 해서든 재운이 진대원과 함께 지내도록 만들 사람이었다.

익숙한 체념에 잠긴 재운은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안 가득 고소한 풍미가 퍼져 나갔지만 목 뒤로 파스타를 넘기는 게 쉽지 않았다.

* * *

“오셨습니까.”

“어디 있어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윤일우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남자를 지나쳐 걸어갔다. 재운에게는 미국 출장을 간다고 말했지만 윤일우는 공항으로 가는 대신 경기도 외곽으로 움직였다.

미국에 가야 하는 일정이 있는 건 맞았다. 다만 출발하는 날짜는 내일이었을 뿐.

“상태가 생각보다 빠르게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말…… 이대로 두실 겁니까?”

“글쎄요. 어떤 꼴인지 보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죠.”

지하에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일정한 크기의 문이 달려 있었다.

“끄윽, 너는 왜 거꾸로 서 있냐…….”

복도의 한중간에 퍼질러 앉아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남자가 윤일우를 향해 검지를 치켜들었다.

퀭한 눈동자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동태 눈깔 같았다. 입고 있는 옷도 추레한 속옷 한 장이 다였다. 남자의 몸 위에는 말라붙은 체액과 잇자국이 가득했다. 핏줄이 흐르는 곳에는 벌건 구멍 자국이 빼곡했다.

“죄송합니다.”

윤일우의 곁에 서서 움직이고 있던 남자가 혀를 차고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곧 남자처럼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남자 둘이 나타났다.

윤일우와 무전기를 든 남자에게 고개를 숙인 이들이 허우적거리는 남자를 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장사가 잘되네요. 약이 효과가 좋은 건가.”

“최근에 구해 주신 것들이 특히 질이 좋습니다.”

“김본기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호강하네.”

“그렇죠. 다들 약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친구분이 계신 곳입니다.”

남자가 복도 끝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열어 준 문을 따라 퀴퀴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게 누구야.”

“와, 약이 진짜 사람을 완전 망쳐 놨네.”

윤일우가 생긋 웃으며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벽에 기댈 힘도 없어 늘어진 채로 초점 없는 눈만 깜박이는 남자는 이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너……, 씨발, 윤일우…….”

윤일우를 알아본 남자가 바들거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정갈했던 머리카락은 덥수룩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퀭한 눈 밑과 창백한 피부는 생기라고는 희미했다.

“왜 욕을 하고 그래. 네가 집안 눈치에 제대로 하지도 못하던 약 실컷 하게 해 주는데.”

“씨, 이발……!”

김본기가 어떻게 해서든 몸을 움직이기 위해 고개를 들썩였다. 그러나 늘어지는 몸뚱이는 상체를 드는 것조차 힘겨웠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김본기가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앞뒤로 휘청대는 몸을 이끌고 김본기가 윤일우를 향해 기듯이 움직였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못 할 건 또 뭐야.”

김본기는 윤일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재운에게 저지른 짓을 알면서도 강간하도록 놔둔 놈이었다. 그랬던 놈이 자신을 나락으로 끌어 내렸다.

집안에도 어떤 수를 쓴 건지 자신을 구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반항도 했지만 억지로 쑤셔지는 약에 점점 제정신을 차리는 게 힘들었다.

지금도 정신이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듯 위태롭게 깜박이고 있었다. 미소 짓고 있는 윤일우의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멱살이라도 잡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끄윽, 흑, 아흑……!”

약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중독성이 얼마나 강한 건지 벌써 금단 증상이 나타났다.

경련하듯이 떨리는 몸에 혀를 깨물었다. 피가 섞인 타액이 벌어진 입가를 타고 질질 흘러내렸다.

“약 먹을 시간인가 보네.”

윤일우가 방 안을 훑었다. 협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알약들과 물, 그리고 주사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직접 하실 겁니까?”

“혼자 하기 어려워 보이니까 도와줘야죠. 그래도 명색이 친구인데.”

남자가 침음을 삼켰다. 친구라고 말하면서 윤일우가 김본기에게 하는 짓은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쪽 업계에 몸을 담근 이후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윤일우처럼 곱게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윤일우가 다양한 알약들을 손바닥에 쓸어 담아 컵 하나에 담았다.

“술은 없어요? 물보다는 비싼 술이 마시기에 더 좋지 않나.”

여상한 목소리에 남자가 문 바깥쪽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일우의 손에 수백을 호가하는 양주 병이 들렸다.

“김본기, 네가 좋아하던 술이다. 잘됐네. 금방 맛있게 타 줄게.”

“커흑, 너……!”

윤일우를 노려보는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윤일우는 느긋하게 알약이 담긴 컵 위로 황금빛 액체를 콸콸 쏟아부었다.

“녹는 데 오래 걸린다. 조금만 기다려.”

“끅, 윽, 흐으아……!”

술잔을 빙빙 돌리는 손길이 여유로웠다. 김본기가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맞춤 칵테일 드디어 완성.”

윤일우가 김본기에게 걸어가 그의 가슴팍을 발로 툭 밀었다. 김본기의 몸이 바닥에 뒹굴었다. 윤일우는 아예 김본기의 가슴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거, 놔……!”

바르작거리는 팔을 양 무릎으로 짓눌렀다. 뒤통수가 바닥에 쾅쾅 박히도록 고개를 뒤흔드는 김본기의 양 볼을 커다란 손이 억세게 쥐었다.

“커억, 쿨럭, 쿨럭…….”

“남기지 말고 다 삼켜.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김본기의 입안뿐만 아니라 눈과 코에도 약이 뒤섞인 술이 쏟아지듯 흘러 들어갔다. 하얀 가루가 남은 바닥이 보이고 나서야 윤일우가 몸을 일으켰다.

크게 확장된 눈동자의 빛이 흐리멍덩한 색으로 물들어 갔다. 하악질하며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따라 근육이 빠진 가슴이 위험할 정도로 들썩였다.

허리를 꺾은 채로 거친 기침을 토해 내던 김본기가 잠시 뒤 발작하듯이 몸을 떨었다. 눈알이 허옇게 뒤집히고 고개가 뒤로 꺾여 들어갔다.

목에 선 핏줄이 당장이라도 피부를 뚫고 나올 듯이 선명했다. 손과 발도 오므려졌다 펴지면서 기괴한 방향으로 근육이 뒤틀렸다.

“그러게 왜 욕심을 부리고 그래. 네가 그러지 않았어도, 재운이는 어차피 내 거였는데.”

윤일우가 죽을 것처럼 몸을 떠는 김본기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복수 따위의 거창한 일을 벌이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윤일우는 김본기가 거슬렸을 뿐이다.

김본기가 재운에게 약을 먹인 이유를 한 번쯤 고민해 봤다. 그러다 항상 재운에게 닿아 있던 김본기의 시선이 떠올랐다.

재운이 자신을 바라보듯 김본기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은밀하게 재운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 사실까지 떠오르자 윤일우는 김본기의 존재를 재운의 곁에서 영영 치워 버리고 싶었다.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낸 이를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도 윤일우의 표정에는 죄책감 따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몸을 뒤틀다가 결국에는 추욱 늘어진 몸뚱이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한겨울의 바람보다도 시렸다.

* * *

“이재운.”

문이 열리자마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진대원이 마른 몸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목덜미로 번지는 가쁜 숨에 재운은 어정쩡하게 팔을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진대원의 페로몬이 쏟아지듯 재운을 향하고 있었다. 알파의 짙은 페로몬에 재운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그만해…….”

분명 입과 코를 막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재운이 진대원의 허리춤을 잡고 제게서 밀어냈다. 그러나 재운을 옭아맨 팔의 힘은 풀리지 않고 더욱 강해졌다.

“나 안 보고 싶었냐. 나는 너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재차 옷자락을 부여잡고 당기던 움직임은 젖은 목소리에 느릿느릿 잦아들었다.

재운이 곰곰이 기억을 돌이켜봤다. 진대원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는지.

처음이었다.

마치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제게 뻗어진 손을 발견한 사람처럼 진대원은 절박했다. 그런데 그런 진대원의 모습을 보고도 재운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그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작은 의문점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의식이 뿌옜다. 윤일우가 떠나기 전까지 재운은 그와 발정 난 짐승처럼 뒹굴었다.

새벽녘까지 시달린 구멍은 지금도 감각이 둔하게 느껴졌다. 피만 나지 않았을 뿐이지 심하게 부어오른 입구는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였다.

“……아무 생각이 없었어.”

재운의 살결에 맺혀 있는 페로몬을 갈급하게 들이마시던 진대원이 천천히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제 귀에 들린 목소리가 정말 재운의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너…….”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에 재운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게 실책이었다.

새까맣지만 맑게 빛나던 눈동자가 빛을 잃은 달처럼 어둑하게 죽어 있었다. 자신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면서도 미력하게나마 빛나던 눈동자였다.

“윤일우 씨발 새끼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진대원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들끓는 한숨을 내쉬었다. 탈색을 거듭해 거친 머릿결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꽁꽁 숨겨 두고 보여 주지 않길래 잘 지내는 줄 알았더니…….”

재운의 몸을 훑는 진대원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얇은 소재의 홈웨어를 입은 재운의 몸이 기억 속 모습보다도 말라 있었다.

원래도 결코 살집이 있다고 말하기 힘든 몸이었다. 지금은 가느다란 팔목이 정말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톡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지금쯤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타 있을 놈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기고 싶었다.

“너 밥은 먹었어?”

“배 안 고파.”

“안 고파도 먹어. 지금 시대에 아사로 죽으면 뉴스에 나온다.”

진대원이 재운의 팔목을 잡아채고 부엌으로 이끌었다. 재운이 멀거니 커다란 손에 감싸인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사람은 바뀌었는데 자신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닮았다.

윤일우도 재운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으면 이렇게 팔목을 이끌고 부엌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일우는 언제 와?”

“뭐?”

“……보고 싶어서.”

“너는 널 이렇게 만들었는데도 그 새끼가 아직도 좋아?”

“……응. 일우니까.”

이 등신 같은 새끼를 어떡하면 좋을까.

진대원은 가슴속 한가운데 돌덩이가 날아와 처박힌 듯한 답답함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못 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얘가 이 지경이 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진대원은 재운이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도망갔던 재운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던 윤일우는 제대로 머리가 돌아 있었다.

이후 재운이 걱정돼 재운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번번이 윤일우의 방해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때만큼 진대원은 제가 가진 힘이 윤일우에 비해 보잘것없다는 걸 깨달은 적이 없었다.

“정신 차려, 이재운. 너 지금 감금된 거나 마찬가지인 거 몰라?”

“……알아.”

감금이라는 단어에 재운이 오늘 만난 이후 처음으로 뚜렷한 반응을 보였다.

초점이 흐릿했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차올랐다. 진대원의 한쪽 눈썹이 스윽 천장을 향해 올라갔다.

“그 정도 이성은 있어서 다행이네. 너 계속 이렇게 윤일우한테 붙잡혀서 살 거야? 지금 네 꼴을 봐. 목줄만 없을 뿐이지, 갇혀 있는 개새끼랑 다를 게 없다고.”

진대원은 지금 재운에게 밥을 먹이는 것보다 그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게 우선이라는 걸 깨달았다.

윤일우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적기였다.

진대원이 재운을 도와주고 싶어도 재운이 지금처럼 윤일우를 맹목적으로 바라보면 소용이 없다.

매일같이 붙어 있다가 윤일우가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보고 싶어 하는 재운이었다.

이대로라면 윤일우의 곁에서 떨어뜨려 놔도 재운이 제 발로 윤일우에게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학교도 휴학시킨 놈이야. 바깥에 외출도 제대로 못 하게 하는 놈이라고. 그런 놈이 너를 진짜로 아끼는 것 같아? 키우는 개새끼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산책시켜.”

재운이 뜨거운 감각이 몰려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진대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잔인하게 재운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윤일우가 제게 고백하던 순간만큼은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괜찮아질 거라 여겼다.

하지만 윤일우의 행동은 정상 궤도를 아득하게 벗어난 지 오래였다. 재운은 이곳에 지내면서 그 사실을 몸서리치도록 깨달았다. 윤일우는 결코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재운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면서도 재운이 말라 가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게 그 증거였다.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윤일우가 너 못 건드리게 해 볼 테니까.”

진대원이 재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윤일우가 제게 했던 경고들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부모 말도 제대로 안 듣는데 윤일우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재운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일부는 입술 새로도 스며들어 입을 여는 입술이 축축해졌다.

‘절대로 다시 도망갈 생각하지 마. 다음번엔 나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으니까.’

함유재가 건넨 손을 마주 잡고 도망쳤던 순간에는 잠시 해방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재운은 윤일우에게서 벗어난 이후로도 자유롭게 생활하지 못했다. 별장에 몸을 숨기고 벌벌 떨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됐던가.

윤일우에게 잡혀 짐승처럼 좆에 처박혔다.

지금도 윤일우가 인상을 굳히면 무섭기는 하지만 그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시 한번 더 도망갔다가 붙잡히면…….

“흐억, 억, 끄읍…….”

“뭐야. 너 왜 그래? 야, 이재운!”

재운이 가슴을 부여잡고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숨을 못 쉬고 쓰러지는 재운 때문에 진대원의 얼굴도 희게 질렸다.

“씨발, 숨 쉬어. 숨 쉬라고……!”

언젠가 한 번 봤던 장면이었다. 당시에는 상황도, 쓰러진 이도 달랐지만 진대원은 그 사람에게 다가가 응급 처치하던 손길을 떠올렸다.

진대원이 재운의 몸을 끌어안았다. 두 손을 모아 재운의 입과 코앞에 가져다 댔다.

작은 몸이 품 안에서 죽어 가는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숨 쉬어. 숨 쉬는 거 잊으면 안 돼.”

새까만 속눈썹이 눈물에 푹 젖어 파르르 떨렸다. 재운은 진대원의 말을 따라 숨을 의식적으로라도 쉬려고 노력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윤일우의 모습을 지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가 제게 다정하게 대해 줬던 모습을 떠올렸다.

“후으, 으…….”

잦아든 숨결 대신 재운을 덮친 건 서글픈 울음이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우는 재운을 진대원이 별다른 말 없이 마주 보고 안았다.

재운은 진대원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그의 어깨가 온통 젖어 들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실컷 울어. 지금은 여기에 너랑 나밖에 없으니까.”

울음소리조차 숨죽여 내려 노력하는 모습에 진대원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 또한 재운에게 한 짓이 있어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건 알지만, 윤일우는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게다가 윤일우가 김본기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김본기는 재운에게 한 짓이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놈의 잔혹한 성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재운을 향한 집착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몰라 불안했다. 지금까지 거칠게 섹스를 하는 걸 제외하면 재운을 다치게 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꼭지가 돌아 버린 놈이 홧김에 재운의 목을 조르기만 해도 재운의 숨은 단번에 끊어지고 말 거였다.

“……이재운?”

가느다랗게 떨리던 몸이 추욱 늘어졌다. 진대원이 놀라 재운의 목 뒤를 받쳤다.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숨이 느껴졌다.

“하아…….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진대원이 다리에 힘이 풀려 재운을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숨이라도 멈춘 줄 알고 순간 가슴이 철렁거렸다.

“일단은 여기에서 지내는 게 낫겠지.”

재운에게는 당장이라도 윤일우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현관문 바깥에만 나가도 경호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윤일우가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송진오 새끼.”

이곳에 오기 전 만났던 송진오와의 대화 내용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윤일우랑 척 지는 거 싫은데. 이재운 안 죽었다며. 그러면 된 거지, 뭐. 왜 이렇게 유난이야.’

송진오는 차남이었다. 위에 있는 형이 가문 어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어 송진오는 호시탐탐 형의 자리를 노리는 중이었다.

차기 병원장 자리에 올라가려면 형을 제쳐야 하는 상황에서 윤일우와 대적하는 건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너도 정신 차려. 윤일우가 말로만 경고한 거 제 딴에는 봐준 거라는 거 알잖아. 집안에서 아예 쫓겨나려고 그러냐? 윤일우가 김본기 새끼한테 한 짓 보면 몰라?’

윤일우는 처음에 김본기에게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마약의 유통처를 연결해 줬다.

이미 웬만한 약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던 김본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은밀하게 열리는 마약 파티에 나가 뒹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취마저 감췄다.

무서운 건 김본기네 집안에서는 윤일우가 김본기에게 마약을 연결해 줬다는 걸 모른다는 점이었다.

전도유망하던 제 아들이 마약에 빠져 망가지는 걸 보다 못한 김본기의 모친이 윤일우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본인이 김본기에게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연결해 준 장본인이면서 윤일우는 눈동자의 흔들림 하나 없이 입바른 말을 했다.

‘……우리가 말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윤일우는 자신과 송진오 앞에서는 김본기를 망친 걸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입꼬리를 끌어 올리던 윤일우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했다.

‘말해도 괜찮아. 진실이 알려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거 하나도 없을 테니까.’

여유작작한 모습이었다. 진대원은 그 순간 김본기네 모친에게 전화를 걸까, 하는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핸드폰을 꺼내지도 못했다.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제 말을 믿어 준다는 보장이 없거니와 윤일우가 증거를 남겨 뒀을 리 없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자신이 의심받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방법 알아볼게. 나도 너한테 잘못한 거…… 많으니까.”

진대원이 잠든 재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바닥 안에 담기는 얼굴이 너무나 자그마했다.

“볼에는 그나마 살이 있었는데.”

옷을 벗겨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늑골이 두드러질 정도로 재운의 살이 빠졌다는 걸.

“페로몬은 여전히…… 달콤하고.”

재운이 의식을 잃어서인지 달큼한 페로몬의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진대원이 눈을 감고 재운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맥박이 뛸 때마다 오메가 페로몬이 조금씩 새어 나와 온몸의 감각을 두들겼다.

“……짐승이냐.”

진대원이 불룩하게 솟은 앞섶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울다가 쓰러진 애를 앞에 두고 좆을 세웠다.

“으으…….”

마치 진대원을 탓하듯 재운이 몸을 뒤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동그란 이마에 맺힌 식은땀으로 보아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알았어. 이상한 생각 안 할게.”

잠시 옷 아래 감춰져 있는 재운의 몸을 떠올렸다. 처음에 얼굴을 본 순간에는 껴안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들었으나, 한번 성적인 자각이 들자 좁고 습했던 구멍이 떠올라 버렸다.

“널리고 널린 게 오메가인데 왜 네 페로몬만 이렇게 달게 느껴지는 건지 이유 좀 알려 줘라.”

진대원이 재운을 안아 들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형질인의 수가 비형질인에 비해 적다고 해도 진대원의 위치상 엮일 수 있는 오메가는 많았다.

일주일 전에도 사교 파티에 다녀온 참이었다.

진대원 또래의 알파와 오메가들이 바글바글한 파티였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유명한 호텔 홀에서 열린 파티였다.

파티 주최자의 의도는 은밀한 듯하면서도 노골적이었다.

다들 정재계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정략결혼으로 엮인 이들이 아니면 슬슬 짝을 찾아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도 진대원은 파티장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다가오는 오메가 한 명 데리고 호텔 룸으로 바로 올라갔을 텐데.

객관적으로 봐도 달콤하기 그지없는 페로몬들에 이상하게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떠오르는 건 재운의 오메가 페로몬뿐이었다.

옅은 듯하면서도 맡고 있다 보면 뚜렷한 흔적을 남기는 페로몬이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진대원이 재운을 침대에 눕히고 옆에 걸터앉았다. 이불을 끌어와 마른 몸 위로 덮어 주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이재운.”

이불자락을 매만지던 손은 어느새 재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입안에서 굴려지는 이름이 사탕처럼 달았다.

“네가 윤일우가 아니라…… 나를 좋아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가끔 진대원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재운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재운에게 시선이 가기 시작했던 건, 재운이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부터였다.

이상하게도 재운의 페로몬을 맡을수록 갈증이 일었다. 페로몬 수치가 높지도 않으면서 재운은 안간힘을 써서 페로몬을 풀지 않으려 노력했다.

때때로 짓궂게 재운에게 말을 걸면서 페로몬을 풀라고 말했던 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다.

“나도 개새끼지만…… 그래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놈을 바로 다른 놈들한테 던져 주지는 않았을 거야.”

어느 순간부터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재운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 보면 재운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알 수밖에 없었다.

시선에도 색이 있다면 윤일우를 바라보는 재운의 시선은 수줍게 피어난 꽃봉오리같이 예쁜 분홍빛이었다.

윤일우는 재운의 시선이 느껴져도 항상 그 시선에 보답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분명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그러니까 윤일우만 바라보지 마.”

머리카락을 넘기며 스치듯이 이마에 닿았던 손을 고운 선을 따라 미끄러뜨렸다.

동그란 콧방울을 지나 손끝이 멈춘 곳은 작게 벌어진 입술 위였다.

입술 위에는 재운이 짓씹은 흔적들이 뚜렷하게 나 있었다. 상처를 매만지자 기다란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움찔 떨렸다.

“……나도 너 좋아하니까.”

깨어 있는 재운에게는 차마 하지 못한 고백이었다. 살면서 양심을 지켜 본 적이 드물었다.

한번 제 마음을 자각하고 나자 없던 양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직은 눈을 뜬 재운에게 직접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나 이용해도 돼. 너한테는 이용당해도 기분 안 나쁠 거야.”

진대원은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엄한 부모님과 제 형제마저도 배척하는 형 밑에서 숨죽이며 살아 온 인생이었다.

애정에 굶주린 아이는 애정을 갈구하는 대신 그들의 미움이라도 받으려 발버둥 쳤다.

그런데 이제는 원하는 게 생겼다. 재운이 예전처럼 밝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윤일우의 곁에서 말라 죽어 가는 모습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길 때였다.

“……좋은 꿈 꿔.”

제가 듣기에도 낯간지러울 정도로 다정한 음색이었다.

진대원은 귀 끝이 새빨개진 채로 재운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할 때까지 잠든 재운의 곁을 지켰다.

* * *

“나 진짜 외출해도 돼……?”

“된다니까.”

진대원은 아침 일찍 윤일우에게 전화를 걸어 외출 허락을 받아 냈다. 안 된다고 하면 경호원을 따돌려서라도 외출하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윤일우는 흔쾌히 허락했다.

재운이 진대원이 건넨 옷을 매만지며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속고만 살았냐? 윤일우랑 통화라도 시켜 줘?”

“……아니야. 지금 바쁘다며.”

윤일우는 본격적으로 승계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 미국에 간 것도 원래는 윤일우의 부친이 가서 체결해야 했을 계약을 대신 하기 위한 걸로 안다.

비슷한 환경에 놓인 다른 후계자들에 비해 아직 나이가 어린 편이지만 그의 부친은 일을 서두르는 중이었다. 진대원은 넌지시 윤일우의 부친이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귀띔해 주며 뒤 사정을 알려 줬다.

윤일우는 재운에게 내색한 적 없던 이야기였다.

재운은 또 한 번 무너지는 마음을 추슬렀다. 윤일우에게 제가 어떤 위치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확인받을 때마다 아파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오늘 하늘이 맑아. 나가서 바깥 공기 좀 쐐. 집에만 있으니까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하지.”

재운이 손을 들어 제 볼을 매만졌다. 사실 거울을 본 기억도 오래되어 자신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자각도 없었다.

“……갈아입고 나올게.”

진대원이 건넨 옷을 들고 드레스 룸 안쪽으로 향했다. 연하늘빛 반팔 니트에 색이 옅은 청바지였다.

처음 보는 옷이었다. 윤일우가 사 놓은 건지, 아니면 진대원이 갖고 온 건지는 몰라도 얼추 사이즈가 맞았다.

“허리띠 있어? 바지가 좀…… 커서.”

상의는 커도 입을 수 있었지만 바지는 허리춤이 골반에 걸쳐지고 있었다.

“그거 제일 작은 사이즈인데. 기다려 봐.”

진대원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드레스 룸을 뒤적거려 벨트를 가져와 직접 재운의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살이 도대체 얼마나 빠진 거야…….”

벨트를 재운의 허리에 맞게 줄이면서도 진대원의 미간은 찌푸려진 그대로였다. 이 정도로 가느다라면 남성 허리라고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오늘부터 끼니 거르지 마. 너 여기서 더 살 빠지면 위험해.”

“알았어.”

재운도 말라비틀어진 제 몸이 보기 싫었던 건 매한가지였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벨트가 채워진 허리를 움직여 봤다.

“이제 안 흘러내릴 것 같아. 고마워.”

“별게 다 고맙다.”

다행히 재운은 진대원이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보다 상태가 나아지는 중이었다. 시선도 잘 마주치지 못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고맙다는 말을 하는 재운이었다.

진대원은 열이 오른 귓불을 매만지며 먼저 드레스 룸을 나섰다.

“양말 꺼내 놓은 거 신고 나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재운이 눈에 띄게 놓인 양말도 신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도 외출을 해도 된다는 게 얼떨떨했다.

별거 아닌 일인데도 언젠가부터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진대원이 꺼내 준 신발도 신고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생각보다도 짧았다.

정말 윤일우가 허락해 준 걸까.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경호원들은 두 사람이 지나가자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다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숨기지 못한 호기심이 옅게 묻어났다. 낯선 이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재운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왜 이렇게 떨어. 이리 와.”

재운만 바라보고 있던 진대원이 이상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혀를 낮게 찬 그가 재운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묵직한 온기에 재운의 떨림이 차츰 가라앉았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글쎄.”

“생각해 봐. 내가 가고 싶은 곳보다는 네가 원하는 데 가는 게 낫잖아.”

진대원이 열어 준 조수석 문을 지나쳐 자리에 앉은 재운은 안전벨트의 끈만 만지작거렸다.

시동을 건 진대원은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는 대신 재운에게 선택권을 건넸다.

“……학교.”

“한국 대학교?”

“……응.”

한참 동안 눈만 깜박이던 재운이 내놓은 대답은 학교였다.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뜬 진대원이 내비게이션에 한국 대학교를 입력했다.

“학교에 좋은 기억이 있어? 없지 않나.”

재운이 학교생활을 즐긴 시간은 짧았다. 그마저도 학교 곳곳에서 자신을 비롯한 이들에게 유린당했다.

진대원의 말에 재운이 치아로 말랑한 입술을 짓씹었다.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이상한 말 안 할 테니까 입술 깨물지 마. 걸레짝 만들 일 있냐.”

실언했다는 걸 깨달은 진대원이 손을 뻗어 재운의 입술을 엄지로 뭉근히 문질렀다.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되자 재운이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기 시작했다.

입술 대신 손가락이 엉망이 되어 가는 걸 보며 진대원이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참았다.

“학교 가서 뭐 하고 싶은데.”

“……그냥. 앉아 있을래.”

괜찮아졌나 싶다가도 이런 반응을 보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진대원은 신호가 멈출 때마다 재운의 손을 가져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었다.

답답한지 재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드럽게 바퀴를 굴린 스포츠카가 한국 대학교 주차장 한쪽에 멈춰 섰다.

“방학이라서 조용하네.”

“……그러게.”

“내려.”

진대원의 말대로 교정은 고즈넉했다. 가끔 돌아다니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지만 재운의 기억 속에 비하면 수가 적었다.

재운이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띄는 스포츠카에서 내린 덕분에 근처를 오가던 이들의 시선이 날아들듯이 박혀 왔다.

“벤치 생각나는 곳 있어? 아니면 저기 도서관 쪽으로 갈래?”

“……응.”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진대원의 뒤로 숨은 재운이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진대원이 제 허리춤을 부여잡고 있는 재운의 손을 잡고 도서관 쪽으로 걸어갔다.

“날이 좀 덥네. 너는 안 덥냐?”

“……별로.”

한여름에 가까워지는 계절이었다.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하던 차 안과 달리 바깥은 바람이 불어도 후덥지근했다.

진대원이 땀에 젖어 달라붙은 셔츠를 펄럭거렸다. 재운은 벤치에 앉아 도서관 앞을 지나다니는 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움직이지 말고 여기 앉아 있어. 음료수라도 사 올 테니까.”

재운을 따라 평화로운 풍경에 시선을 두던 진대원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갗에 들러붙는 천의 감촉에 불쾌함이 치솟았다. 재운을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온몸이 땀에 절여질 것 같았다.

진대원이 급한 발걸음으로 떠난 후에도 재운은 멍하니 전방에 시선을 두었다.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앞을 오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뭐야? 도서관에 있었어?”

“어. 너는 웬일이냐.”

“웬일은. 4학년인데 방학에 어떻게 쉬어. 스펙 하나라도 더 쌓아야지.”

“나도……. 죽겠다, 진짜.”

도서관 앞에서 만난 학생 둘이 반갑게 서로를 향해 말을 걸었다. 힘들어 죽겠다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이지만 생기가 넘쳤다.

재운이 손을 들어 버석하게 메마른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멈춘 곳은 굳어 있는 입꼬리 부근이었다. 웃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까마득했다.

학생들은 힘들다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유려하게 올라가는 입매를 보며 재운도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봤다.

“……안 올라가네.”

고작 작은 미소를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재운의 입꼬리는 움찔 떨리기만 할 뿐 곡선을 그려 내지 못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가능한 걸까.”

재운은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오래전에 윤일우를 만나며 과분한 행복을 거머쥐었기 때문이었다.

보육원에 있다 보면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한테 입양되기를 기다린다. 하루하루를 불안함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리면 퇴소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덜했지만 같이 지내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누군가에게 입양되어 갈 때마다 상실감을 느끼는 건 같았다.

재운은 운이 좋은 경우였다.

비록 양자로 입적한 건 아니어도 윤일우네 집안에서 후원을 받으며 자랐다.

한국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 윤일우 덕분이었다.

“욕심부려서 벌받나 봐…….”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재운은 세상 누구보다 욕심쟁이인 걸지도 몰랐다.

윤일우를 바라보면서 친구로라도 그의 곁에 평생 있고 싶다고 마음먹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이제는 연인이라는 허울은 썼지만 남들에게 떳떳하게 내보일 수 없는 허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윤일우가 생각하는 사랑이 서로 다르듯이 연인이라는 관계도 그럴지 몰랐다.

“내가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히트 사이클이 그날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친구였을까.”

히트 사이클이 왔던 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도 재운이 오메가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오메가 주제에 알파들 사이에서 친구 행세를 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

이미 상황은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진 뒤였다.

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한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재운은 끝없는 가정을 상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그저 미국에 일이 있어 다녀온다고만 말했다.

진대원도 재운에게는 불편한 존재라는 걸 알면서 재운의 곁에 진대원을 붙여 주고 갔다.

재운이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주머니를 뒤적거려도 핸드폰도, 천 원짜리 한 장도 없었다.

그런데 맨몸뚱이를 가린 옷은 지나치게 고급스러웠다. 분수에 맞지 않게.

“……진짜 강아지랑 다를 게 없잖아.”

주인의 의지에 따라 집에 갇혀 있고, 외출을 시켜 주기를 기다려야 하고,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다.

재운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자유롭게 교정을 오가는 이들과 제 처지가 상반되어 다가왔다.

“……추워.”

가슴이 욱신거려 숨이 가빠졌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햇빛이 포근하게 재운의 상체 위로 쏟아지듯 내렸다.

분명 날은 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그러나 재운은 가슴 한구석에 선득하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몸을 웅크렸다.

두 다리를 끌어모아 팔로 감싸 안았다. 무릎 위에 고개를 대고 눈을 감자 수런수런 들려오던 소리들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언제 버려질지 몰라서 불안한 강아지.”

윤일우가 제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안다. 그러지 않았다면 윤일우의 성격상 재운을 보육원에서 주운 후에 지금까지 후원해 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애정이 언제까지 지속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고백을 듣던 순간에는 달라질 미래를 그리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든 게 다 불안했다.

이미 몸도 수없이 섞은 사이였다. 차라리 친구로 남아 있었다면 아슬아슬하게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있는 관계였는데.

“오메가가 아니면…….”

순서 없이 뒤죽박죽 이어지던 생각의 결론은 오메가라는 형질이 문제라는 거였다.

윤일우도, 진대원도 모두 재운의 페로몬에 집착했다.

재운이 고개를 들고 팔목을 끌어당겨 코를 킁킁거렸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달큼한 향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재운은 제 향이 불행의 서막 같았다.

그날 이후 히트 사이클이 온 적은 없지만 다시 히트 사이클이 온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윤일우는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은 재운에게 종종 노팅을 했다. 자궁구가 열리지 않았는데도 배 속에 가득 정액을 싸고 정액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좆을 부풀렸다.

보통 알파는 러트 사이클이 온 게 아니면 노팅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윤일우는 높은 페로몬 수치를 가진 알파답게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노팅을 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아기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윤일우는 재운이 아기를 가졌다는 걸 알면 아기를 죽일 사람이었다. 그가 재운에게 고백했어도 그 사실 하나는 절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아이를 싫어한다. 설령 그게 제 씨와 재운의 난자가 만나 만들어진 생명일지라도.

아직은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고 있지만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 재운의 페로몬 수치가 낮아도 윤일우가 높으니 임신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정말 진대원의 말대로 지금이 기회인 걸까. 그가 도와준다면 실패로 끝났던 이전과 달리 윤일우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헉…….”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름을 몇 번을 불러도 몰라.”

재운이 끝없이 뻗어 나가는 상념에 젖어 있을 무렵 어깨를 건드는 손길에 파드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물방울이 표면에 맺힌 음료수를 양손에 든 진대원이 코앞에 서 있었다.

“이거 마셔. 더위 먹었냐?”

진대원이 손등을 재운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딱히 열이 나는 건 아닌 듯싶었지만 혹시 몰랐다.

재운은 언제든지 몸 상태가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태였다.

“……고마워.”

진대원이 건넨 음료를 받아 든 재운이 빨대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음료로 목을 축이자 엉클어져 있던 머릿속도 한층 나아졌다.

진대원도 재운의 옆에 앉아 아예 컵 뚜껑을 열고 안에 든 음료를 마셨다. 재운이 한 모금을 비울 동안 진대원은 얼음만을 남긴 채 음료를 한 번에 비웠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찬 음료를 먹자 더운 기운이 한층 사그라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진대원이 컵 표면을 매만지며 재차 생각에 빠진 재운의 팔을 툭 건드렸다.

“……있잖아.”

“응. 말해. 여기 우리 둘밖에 없잖아.”

“정말로 나 도망갈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

“뭐야. 드디어 마음먹은 거야?”

설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재운은 생각보다 일찍 진대원의 제안을 받아들일 모양이었다. 다시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건 재운이 보였던 반응 때문이었다.

과호흡이 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된 애를 보고서도 그 이야기를 재차 꺼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응. 이렇게 계속 지내다가는…….”

아이를 임신하고, 그 아이를 윤일우가 죽이고. ……자신은 완전히 미쳐 버리고.

뒷말은 삼킨 채 재운이 진대원을 간절히 바라봤다. 지금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그밖에 없었다.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도움을 구할 수 있다면 구해야만 했다.

“잘 생각했어. 내가 금방 방법을 찾아 볼게.”

“……일우가 돌아오기 전에.”

“나도 알아. 그 새끼 돌아오면 너 만나는 것도 힘들어질 테니까.”

윤일우의 얼굴을 마주하면 애써 어렵게 먹었던 마음이 무너져 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재운은 윤일우에게 약했다. 그가 저를 망가뜨리고, 엉망으로 짓밟아도 그를 향한 마음을 온전히 지워 낼 수가 없었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것처럼 재운의 세상에서는 변하지 않을 진리나 마찬가지였다.

“……고마워. 도와줘서.”

진대원도 재운에게 한 짓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도와주는 마음은 분명 재운에게 건네는 호의였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고맙다는 말에 면역이 없는 진대원의 귓불 위로 붉은 기가 스며들었다.

“실내로 들어가자. 계속 바깥에 있다가는 더위 먹겠다.”

헛기침을 몇 번 내뱉은 진대원이 벤치에서 일어나 재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자신과 다른 커다랗고 단단한 손에 눈길을 주던 재운이 진대원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옮기는 걸음마다 윤일우를 향한 미련한 마음이 덜어지기를 바라며 걸었다.

쨍쨍한 햇빛이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이 걷는 길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 하나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그림자를 향해 있었다.

8.

“……너희 형이 도와주기로 했다고?”

“응. 내 힘만으로는 부족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진대원이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집안의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윤일우와 달리 진대원은 한정적으로만 이용하는 게 가능했다.

재운을 도와주기 위해 진대원은 그나마 남아 있던 자존심까지 박박 긁어 형에게 부탁했다.

‘형, 제발 이번 한 번만 나 좀 도와줘. 앞으로는 형 말 잘 들을게.’

‘내가 살다 살다 우리 동생이 부탁하는 모습을 볼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진대원과 닮은 듯하면서도 훨씬 더 냉철하게 생긴 진대현은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도와줄게. 하나밖에 없는 형인데 동생의 부탁 정도는 들어줘야지.’

사실 진대원은 진대현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는 모습에 진대원은 그동안 진대현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을 어느 정도 덜어 냈다.

“지금 바로 나가야 해. 윤일우한테는 형이 연 파티에 참석한다고 미리 말해 놨어.”

“파티에?”

“어. 형이 지인들이랑 같이 주기적으로 여는 사교 모임이야. 나도 예전에 가끔 참석했었고. 너만 혼자 두고 파티에 갈 수 없다고 하니까 윤일우가 데려가도 된다고 허락했어. 네가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윤일우도 아는 파티기도 하고.”

재운은 파티에 참석해 본 경험이 전무했다. 윤일우와 다른 애들은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참석하는 모임에도 재운은 낄 수가 없었다.

파티나 모임에 참석할 자격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럴 때마다 재운은 같이 어울리는 이들이 저와 다른 세상에 산다는 걸 깨닫고는 했다.

“겉으로는 파티 참석하는 거로 보여야 해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진대원이 재운에게 건넨 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양복이었다. 옅은 베이지색이 도는 양복은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처럼 옅은 광택이 돌았다.

“……역시 잘 어울리네. 이리 와. 커프스 버튼도 해 줄게.”

재운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진대원이 재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훑었다.

가느다란 재운의 체형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양복에 어울리는 커프스 버튼까지 채워 주자 여느 집안 자제 못지않은 태가 났다.

“따로 챙길 물건은 없어?”

“……응.”

이곳에 있는 재운의 물건은 모두 윤일우의 손을 거친 것들뿐이었다. 가지고 가 봐야 윤일우에 대한 생각만 날 게 분명했다.

“그럼 가자. 벌써 파티 시작했겠다. 형이 파티 시작되고 상황 지켜보다가 빠져나가게 해 준다고 했거든.”

진대원이 재운의 팔목을 쥐고 집을 나섰다. 재운이 닫힌 문을 뒤돌아봤다. 단절된 공간처럼 정말로 이제는 윤일우와 제 삶이 멀어질 수 있을까.

“파티에 가서 기분 나쁜 일이 있을 수도 있어.”

“……왜?”

“형이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오메가를 좀 천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차가 주차되어 있는 층수를 누르며 진대원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자신 또한 오메가를 경시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떳떳한 목소리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있을게.”

재운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진대원과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잘게 끄덕거렸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대해지는 건 익숙했다.

윤일우의 곁에서 지내며 받아 본 질투와 멸시의 말을 합하면 가뿐히 백 마디가 넘어갈 거였다.

게다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모진 일을 당한 경험은 재운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 곁에 꼭 붙어 있어. 건전한 파티기는 한데…… 이상한 놈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진대원이 불안한 눈초리로 재운을 살폈다. 파티에 어울리는 옷을 입힌 건데 재운의 외모가 확 살아 버렸다.

안 그래도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여러 일을 겪은 후에는 묘한 색기마저 묻어났다.

순결한 성자와 문란한 창부가 한데 얽힌 듯한 기묘한 분위기가 재운에게는 있었다.

특히 알파라면 재운의 페로몬을 인지하는 순간 입맛을 다실 게 분명했다.

“응. 페로몬 간수도 잘 할게.”

재운이 진대원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뒷말을 이었다.

“그런 말은 아니었어.”

“알아. ……하지만 내가 오메가니까 조심해야 되는 건 맞잖아.”

오메가의 인권이 많이 향상됐다고 해도, 알파의 페로몬에 취약한 오메가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오메가는 여전히 성적인 농담거리의 주요 소재였다.

재운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러나 진대원은 재운의 버석한 목소리가 물기에 젖은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이 탄 차는 부드럽게 움직여 한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 차 안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만이 맴돌았다. 별장은 서울 근교에 위치해 있었다.

무전기를 들고 있던 한 남성이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초대권 있으십니까?”

“여기.”

진대원이 미리 준비해 둔 카드를 꺼내 경호원에게 건넸다.

“확인되셨습니다. 여기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차 키는 저에게 주시고요.”

“주차하고 차 키 다시 나한테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차키를 경호원에게 건넨 진대원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진대원이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조수석 문이 열렸다.

재운이 차에서 내려 불빛이 새어 나오는 별장을 바라봤다. 주변에는 진대원의 차처럼 수억을 호가하는 차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창문이 죄다 닫혀 있어서 별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별장이 외진 곳에 있을 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재운은 이상하게도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함유재의 손을 빌려 도망쳤을 때 몸을 의탁했던 별장과 닮아서일까.

이번에도 제가 원하는 결과대로 일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는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왜 그래?”

진대원이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재운을 뒤돌아봤다. 재운의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어디 아파?”

“……아니야.”

예감이 좋지 않다고 한들, 이곳까지 왔는데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재운은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별장을 향해 움직였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진대현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재운이 제 앞에 내밀린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한눈에 봐도 진대원과 형제지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은 남자였다.

다만 더욱 가느다란 눈매라든지, 입가에 맺힌 자신만만한 미소가 진대원과 달랐다.

“……아.”

살짝 잡았던 손을 놓으려던 재운은 손바닥을 간질이는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운이 손을 뒤로 빼내려고 하자 진대현은 재운의 손을 꽉 힘주어 잡고는 놓아줬다.

“대원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많이 궁금했는데…….”

스물스물 알파 페로몬이 진대현에게서 흘러나와 재운에게 다가왔다. 재운이 숨을 머금고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물러난 게 무색하도록 진대현이 한 발자국 다가와 재운의 귓가에 입술이 스칠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도 맛있는 향이 나네요. 다른 알파의 오메가라는 게 아쉬울 만큼.”

진대현은 언뜻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입에 매달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진득하게 재운을 훑어 내렸다.

재운이 소름이 이는 팔을 붙잡고 뒷걸음질을 쳤다.

“조심해요. 뒤에 계단 있으니까.”

진대현이 재운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의 말대로 재운의 뒤에는 1층 홀을 가로지르는 계단이 놓여 있었다.

“……대원이 어디 있어요?”

진대원과 함께 별장에 들어온 후 두 사람은 파티의 주최자인 진대현에게 인사하러 2층으로 올라왔다.

분명 진대원과 함께 올라왔는데. 재운은 어느 순간부터 홀로 남겨져 진대현을 마주 보고 있었다.

“대원이가 오랜만에 파티에 나와서 다들 신났나 봐요. 저기 있네요.”

진대원은 재운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다 진대현에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갔었다.

그를 알아보고 손짓하는 사람에게 붙들려 1층으로 향한 걸 재운은 앞만 보고 올라가느라 보지 못했다.

진대현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자 진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 동생이라고 친구들이 챙겨 주는 거예요.”

진대현이 재운의 곁에 다가서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혼자서는 뭣도 없는 놈인데.”

부드러운 음색과 달리 담고 있는 말은 까슬까슬한 가시가 가득했다.

“우리도 내려갈까요? 파티에 왔으니 즐겨야죠.”

“저는 괜찮…….”

“이리 와요.”

재운이 거절하려고 했지만 진대원은 재운의 팔목을 쥐고 1층을 향해 내려갔다.

손을 비틀어 봐도 진대현의 힘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에서 흩뿌려지는 빛 때문에 1층은 대낮처럼 환한 상태였다.

삼삼오오 모여서 파티를 즐기던 이들의 시선이 재운에게 닿았다. 흥미로운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이재운.”

진대원이 성큼성큼 걸음을 움직여 재운에게 다가왔다. 날 선 시선은 재운의 팔목을 쥐고 있는 진대현의 손에 고정된 채였다.

사납게 굳은 진대원의 얼굴을 지켜보는 진대현의 눈동자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예의를 지켜야지. 동생아. 내가 주최한 파티에 왔으면 내 룰을 따라.”

진대현이 미소를 띤 채 진대원의 걸음을 막아섰다.

“너…….”

“쯧쯧. 말버릇은 여전해. 형한테 너라니.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어.”

진대원이 손바닥에 반달 모양의 상흔이 생기도록 주먹을 쥐었다. 한 배를 빌려 나온 형제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진대현의 눈동자에는 경멸의 빛이 가득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이쯤에서 못 참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알겠으니까 이재운 손목 놔줘.”

진대현의 한쪽 눈썹이 의외라는 듯 상승 곡선을 그렸다. 진대원이 이토록 목줄 채워진 개새끼처럼 행동하는 걸 볼 줄이야.

“누가 보면 내가 너희 둘을 강제로 파티에 데려온 줄 알겠어.”

진대현이 재운의 손목을 놓기가 무섭게 진대원이 재운의 팔목을 잡아 제 쪽으로 이끌었다.

재운은 아까부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알파들의 페로몬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등허리가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이 났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도 얼굴과 몸에 닿아 오는 시선에 진절머리가 났다.

재운의 상태를 확인한 진대원이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다들 페로몬 치워.”

진대원이 페로몬을 본격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진대현에게 무시당하고,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이어도 진대원의 페로몬 수치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같은 알파의 사나운 페로몬에 주변에 몰려들었던 알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야, 진대현. 진대원 페로몬 좀 어떻게 해 봐.”

물러난 다른 이들과 달리 진대현은 여전히 재운과 진대원의 가까이에 서 있었다. 진대현의 관자놀이에도 시퍼런 핏줄이 섰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이 항의하는 소리에 진대현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단숨에 잦아들었다.

“이제 올 사람도 다 왔으니까 다들 파티 좀 즐겨. 파트너도 데려오고. 알파 페로몬을 융화하려면 오메가 페로몬만 한 게 없잖아.”

현재 1층에 있는 사람들은 재운을 제외하고 다 알파였다. 진대현의 말에 물러났던 이들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이 파티…….”

“왜? 오늘도 건전하게 술만 몇 잔 마실 줄 알았어?”

진대원이 입술을 짓씹으며 재운을 제 뒤로 숨겼다. 별장은 넓은 만큼 1층과 2층에 있는 방 또한 많았다.

알파들 수만큼 오메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들 방 안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끔은 이렇게도 놀아 줘야지. 다들 집안과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진대현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네도 저쪽에 가서 앉아. 그래야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에 윤일우 눈 피해서 도망가지. 여기에 윤일우 집안사람도 있는 거 알지?”

마지막 말은 진대원과 재운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했다.

“대현 씨.”

“내가 준 옷 입고 나온 거야? 기특하네.”

진대현의 곁으로 여리여리한 체형의 오메가 남성이 다가왔다. 재운은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흐읏……. 버, 벌써 해요?”

“이미 이렇게 젖었는데. 뭘 빼고 있어.”

남자는 속이 훤하게 비치는 와이셔츠 한 장에 가터벨트를 한 상태였다.

진대현의 손이 아래로 향한 순간 남자가 발뒤꿈치를 들었다. 가터벨트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입지 않은 둔부 사이로 진대현의 손가락이 사라졌다.

쿨쩍쿨쩍, 젖은 소리가 주변을 맴돌다 퍼져 나갔다.

지척에서 들려오는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던 파티장은 순식간에 육욕의 장으로 뒤바뀌었다.

“아, 아흐…….”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오메가의 뒤로 덩치 큰 알파가 달라붙었다.

오메가가 입고 있던 바지가 알파의 손짓 한 번에 찢겨 용도를 상실했다.

아직 애액이 제대로 흘러나오지도 않은 입구에 알파가 발기한 좆 대가리를 문질렀다. 입구가 벌어지는 느낌에 오메가가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붙이며 벗어나려고 했다.

“엉덩이 더 뒤로 안 빼?”

“아파요…….”

알파는 아파하는 오메가를 배려하는 대신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커다란 손바닥과 하얀 볼깃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울먹이는 오메가의 구멍을 보는 알파의 눈동자에서 점점 초점이 사라졌다.

“……대원아.”

좋지 않았다. 재운이 진대원의 소맷귀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못 볼 꼴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저도 무슨 짓을 당할 것만 같았다.

알파들의 페로몬에 이어 오메가들의 페로몬까지 별장을 자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개중에는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아아……!”

“씨발, 절경이네.”

아직 손가락밖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 한 명이 허리를 비틀며 분수를 쌌다.

“대원아, 우리 어디라도 들어가 있으면 안 돼?”

재운이 반응이 없는 진대원의 소맷귀를 붙들고 흔들었다.

“하아…….”

“대원아?”

“이제 반응이 오나 보네요.”

“흐응, 응…….”

진대원이 바닥으로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그제야 재운은 진대원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흠뻑 적셔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제 앞에 선 오메가의 엉덩이 골 사이로 좆을 미끄러뜨리고 있던 진대현이 재운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흐, 아…….”

투명한 액으로 번들거리던 좆이 단번에 오메가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진대현에 비해 체격 차이가 크게 나는 오메가의 몸이 앞쪽으로 휙 쏠렸다.

무너져 내리는 몸을 진대현이 팔을 뻗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진대현이 거친 삽입을 이어 가면서 사색이 되어 가는 재운의 얼굴을 느긋이 감상했다.

“억, 으, 하, 너, 너무 빨라요…….”

“몸조심해요. 조심해야 할 사람이 대원이뿐은 아닌 듯싶어서.”

재운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자신을 천천히 돌아보는 진대원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일렁이는 알파의 페로몬이 기어 다니는 뱀처럼 재운의 몸을 휘감아 왔다.

“아, 안 돼…….”

재운이 젖어 드는 아래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주스러운 오메가의 몸뚱이는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알파의 페로몬을 접한 것만으로도 좆을 받아 낼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억누르려고 해 봐도 재운에게서도 서서히 달콤한 페로몬이 스물스물 흘러나왔다.

“냄새 진짜 군침 도네.”

“으흐…….”

진대현이 입맛을 다시며 박고 있던 오메가의 양팔을 등 뒤로 둘러 한 번에 잡았다.

하얀 볼깃살이 붉게 달아오르도록 거칠게 처박는 움직임에 오메가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울듯이 신음을 흘렸다.

“하아…….”

“이러지 마, 대원아……. 제발…….”

재운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진대원이 빠르게 재운의 허리를 팔로 휘감아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목덜미에 비벼지는 코끝의 감촉이 지나칠 정도로 선연했다.

“달아…….”

진대원이 혀를 길게 빼내 재운의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재운이 고개를 있는 힘껏 빼내어 봐도 살갗에 닿아 오는 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재운이 간신히 손을 빼내 진대원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깜박이는 눈꺼풀 속 눈동자가 열기에 들끓어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수척해진 볼을 따라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렵게 먹은 마음이었다. 이대로라면 진대원에게 유린당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윤일우에게 다시 붙잡혀 애완동물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대원아…….”

“씨이, 발…….”

재운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린 걸까.

진대원이 이를 악물고 힘겹게 숨을 토해 냈다. 괴로운 듯 일그러진 얼굴이 온통 붉었다.

눈을 감은 채 뜨거운 숨을 몇 번 반복해 내쉰 진대원이 힘겹게 재운을 밀어 냈다.

“도망, 가……. 어디 방 안에라도, 들어가서…….”

이성이 잠시 돌아왔지만 간당간당하게 이어질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본능에 휩싸여 재운을 그대로 엎어 놓고 좆을 쑤셔 박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재운을 밀어낸 손등 위로 새파란 핏줄이 돋았다.

“진짜 눈물겹네. B급 로맨스 영화 같아.”

두 사람을 지켜보는 진대현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너……. 나랑 한, 약속…….”

진대원의 눈동자가 진대현을 향해 돌아갔다. 본능을 억누르느라 하얀 눈자위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살기 어린 시선에도 진대현은 여유롭게 허리를 움직였다. 오메가의 좆에서 튀어나온 정액이 몇 방울 진대원의 발치 가까이 튀었다.

“너는 나를 진짜로 믿었어?”

그 말 한 마디에 진대원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만 같았다.

“……누구야. 윤일우, 그 새끼야?”

진대현이 여는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진대원의 말을 흔쾌히 허락하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글쎄.”

진대원의 말에도 진대현은 정답을 쉽게 알려 주지 않았다. 커다란 손을 아래로 뻗어 사정하여 시든 성기를 쥐었다.

“으, 아아……!”

강하게 압박하자 좆에 꿰뚫린 오메가가 눈을 부릅뜨고 울부짖었다. 그만큼 좆을 바짝 조여 무는 내벽에 진대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나갔다.

“저기 오네. 너보다 나한테 좋은 조건을 제시한 사람.”

“뭐……?”

진대원의 고개가 진대현이 눈짓한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김본기……?”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이었다.

김본기는 재운에게 별장에서 히트 사이클이 오는 약을 먹였다는 게 알려진 후로 두문불출했다.

윤일우가 김본기에게 강하고 독한 마약을 얻을 수 있는 루트를 연결해 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

“너, 그 꼴은 도대체…….”

원래의 탄탄하던 체격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볼 수가 없었다. 베타였지만 웬만한 알파보다 단단한 체격을 가졌던 놈이었다.

그랬던 놈이 지금은 광대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살이 빠졌다. 구부정하게 굽어진 어깨 때문에 커다란 키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퀭하게 풀린 눈동자가 진대원을 스쳐 지나가 재운에게 닿았다.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빛이 김본기의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내가 약을 누구한테 제공받았겠어. 나도 이 정도 양의 효과 좋은 약은 구하기 쉽지 않다고.”

한 번 사정한 진대현이 오메가를 옭아매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으으…….”

끈 떨어진 인형처럼 오메가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채 다물리지 않은 구멍 사이로 허연 정액이 뭉쳐져 새어 나왔다.

“너네 사이 진짜 재밌게 변했더라.”

어린 시절부터 묶여 다녀서 겉으로 보기에는 사이가 좋아 보였다. 하지만 진대현은 진대원이 제게 와 부탁을 한 순간, 윤일우와 진대원 사이에 결코 좁혀지지 않을 금이 그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제 부탁 좀 들어주세요.’

그런데 진대원이 부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본기까지 자신을 찾아왔다.

김본기가 부탁한 건 별거 아니었다.

이재운을 만나게 해 달라는 것.

마침 진대원이 진대현에게 부탁한 것도 이재운을 빼돌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진대현으로서는 한 번에 두 가지 부탁을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진대원과의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진대원이 부탁했던 재운의 안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달라졌을 뿐.

“본기야, 약 진짜 좋다. 덕분에 오늘 파티가 더 재밌어질 것 같아.”

진대현이 난장판이 되어 가는 거실을 훑어봤다. 평소에는 점잖게 행동하던 놈들마저 약에 취해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버렸다.

“아, 아아악……!”

“씨발, 가만히 좀, 있으라고……!”

사방에서 오메가들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죽는 사람만 나오지 않는다면 상관없었다.

“진대현, 이 개새끼가……!”

진대원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진대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워워. 진정해. 도망은 칠 수 있게 해 준다니까? 그 전에 본기도 볼일을 보게 해 준 것뿐이야.”

손쉽게 진대원의 공격을 피한 진대현이 입꼬리가 찢어져라 미소 지었다.

“약 처음이라서 힘들 텐데 용케 버티고 있네? 더 센 걸로 할걸 그랬나 봐.”

“흐, 아…….”

진대원이 걸쭉한 침을 바닥으로 뱉어 냈다. 점점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풀어 오른 고간이 느껴질 때마다 이성이 아득해졌다. 주먹을 쥐고 숨을 고르며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차리려 할 때였다.

벌어진 입안으로 작은 알맹이가 들어왔다. 동시에 코와 입을 단단한 손이 우악스럽게 틀어막았다.

“너도 즐겨. 오메가 하나 때문에 못난 꼴 보이지 말고.”

진대원의 목울대가 꿀렁이는 걸 확인한 진대현이 손을 뗐다. 잠시나마 초점이 돌아왔던 진대원의 눈동자가 맥없이 풀렸다.

툭툭 끊어져 나가는 이성 사이로 진대원이 재운이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사람 구실 못 할 것 같던 김본기는 손쉽게 재운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목이 붙잡혀 끌려가는 재운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크윽, 하…….”

진대원이 거친 손길로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바닥을 기어 도망가려던 오메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악……!”

오메가가 진대원의 몸과 바닥 사이에 낀 채로 바르작거렸다. 미끈한 액으로 범벅이 된 구멍을 단번에 거대한 좆이 뚫고 들어갔다.

상대방은 배려하지 않는 무식한 좆질이 가해졌다. 진대원의 좆은 진대현보다도 훨씬 커다랬다.

진대원이 허리를 처박을 때마다 몸이 딱딱한 바닥에 짓눌렸다.

“대, 대현 씨…….”

“재밌게 놀아.”

오메가가 죽을 것 같은 압박감에 곁에 서 있는 진대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머리카락을 스치듯이 쓰다듬는 손길이었다.

“나도 즐기러 가 볼까.”

제 파트너 말고도 먹어 치울 오메가는 넘쳐났다.

게다가 구멍에는 좆 하나만 들어가도 되는 게 아니었다. 이미 한구석에서는 오메가가 구멍 하나에 알파 좆 두 개를 받아먹은 상태로 헐떡이고 있었다.

“두 시간 정도면 되겠지.”

진대현이 재운과 김본기가 사라진 방향을 힐끗 바라봤다. 방 하나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복도에는 벽에 매달린 조명에서 새어 나오는 빛만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 * *

“흐윽…….”

재운이 목을 조른 손등을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손등 위에 붉은 실선이 그어지는데도 김본기는 묵묵히 재운의 목을 조른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광경 속에서 진대원이 진대현을 상대하던 오메가에게 달려드는 게 보였다.

문이 열리고 재운의 몸이 방 안에 있던 침대 위로 던져졌다.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푹신했지만 열렸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끔찍했다.

“콜록, 콜록…….”

재운이 목을 부여잡고 막혔던 숨을 토해 냈다. 기침이 이어질수록 목 안쪽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떨리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침대가 쪽에 창문이 하나 있었다. 문은 김본기가 막고 있어 그쪽으로는 나가는 게 불가능했다.

힘이 빠져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침대 위를 기어갔다.

바닥에 발끝이 닿은 순간 머리 쪽에서 억센 고통이 느껴졌다.

“흐읏…….”

“……재운아, 어디 가려고. 우리 되게 오랜만에 만났잖아.”

느릿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투가 어눌했다. 재운이 두피 쪽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하고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연이어 재운의 머리채를 쥔 손에 가해진 힘에 결국 무너지듯이 침대에 몸이 처박혔다.

“제발……. 하지 마…….”

김본기가 재운의 상체에 올라타 양 무릎으로 꿈틀거리는 팔을 고정했다.

눈물 젖은 얼굴이 약에 취해 있을 때도 내내 생각이 났다. 손을 뻗어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기자 보고 싶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그거 알아?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아니, 지금도 좋아하는 건가…….”

“……뭐?”

팔을 움직일 수가 없어 발뒤꿈치로 침대 시트를 밀어내던 재운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가판대에 올려진 생선들처럼 김본기의 동공에는 힘이 없었고 퀭했다. 눈 아래 맺힌 그늘진 음영에 음울한 인상이 두드러졌다.

게게 풀린 눈동자가 스르륵 굴러다니며 재운의 얼굴과 몸을 훑어 내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김본기의 눈동자가 추억 어딘가를 덧그리는 듯 몽롱한 빛으로 물들었다.

“윤일우네 집에 갔는데…… 못 보던 애가 있는 거야. 근데 얼굴이 새하얗고, 눈동자는 까맸어. 흑연처럼.”

재운의 머릿속에도 흐릿하게나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보육원에서 나와 윤일우가 구해 준 집에서 살기 전까지 잠시 윤일우네 집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윤일우는 재운을 만나기 전부터 이들과 어울렸다. 집안끼리 얽히고 얽힌 영향도 있고, 다들 나이가 동갑이어서였다.

그런 만큼 서로의 집에 종종 놀러 가는 일도 있었다.

“나는 너랑 인사하고 싶었는데……. 너는 계속 윤일우만 바라보더라.”

당시 재운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무서웠었다. 한 번도 마음을 주고받을 만한 인간관계를 겪지 못해서였다.

생애 최초의 기억이 시작된 보육원에서는 방치와 괴롭힘, 학대를 당했다.

윤일우가 내민 손이 처음 경험한 다정함이었다. 그런 재운이었기에 어린 시절에는 더욱더 새끼 오리처럼 윤일우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재운의 기억 속에서 김본기는 항상 조용한 아이였다. 재운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김본기는 더했다.

그가 말한 대로 김본기는 조용히 재운을 지켜보고는 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좋아해서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후에도 나는 너랑 계속 얘기하고 싶었어. ……오메가로 발현한 후에는 더더욱.”

멍했던 눈동자가 달라졌다. 동시에 투두둑, 재운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들이 김본기의 손짓을 따라 떨어져 내렸다.

“그만, 해…….”

재운이 잠시 늘어져 있던 팔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김본기는 무릎에 힘을 더 주며 재운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마약에 몸이 약해졌어도 재운 한 명쯤 옭아매는 건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쉬워 보였다.

“하아……. 페로몬 맡고 싶다…….”

베타인 김본기는 재운이 아무리 페로몬을 풀어도 느낄 수가 없었다. 별장에서도 그랬다.

다른 이들은 모두 히트 사이클이 온 재운의 페로몬에 반응하는데 그만 감각이 거세된 사람처럼 멀뚱히 있어야만 했다.

“좋아한다면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울고 싶지 않았다.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된다면 눈가가 짓무르도록 통곡할 수도 있었다.

눈물은 지금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재운은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굴러떨어지는 물길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랑한다면서 재운의 두 날개를 꺾어 버린 윤일우도, 그런 윤일우를 여전히 사랑하는 자신도, 좋아한다면서 재운을 나락으로 끌어 내린 김본기도.

커다란 손이 마른 상체를 배회하며 재운을 자극했다. 알파들의 페로몬 때문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이 투박한 손길에도 쉽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재운의 발끝이 곱아졌다. 발가락 사이에서 구겨진 시트만큼이나 재운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좋아하니까 이러는 거지…….”

김본기가 순하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재운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기도 했다.

“너는 왜 윤일우한테서 벗어나려고 안 했어……. 그 새끼도 나처럼 너한테는 나쁜 놈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윤일우가 찾아왔던 날, 김본기는 정말 죽을 뻔했다. 그토록 좋아하던 약도 쳐다보기 싫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윤일우에 대한 증오로 불타올랐다.

간신히 도와줄 만한 사람에게 연락을 넣었다. 빠져나오자마자 재운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재운을 죽여야 한다. 그게 자신이 재운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윤일우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으읏…….”

김본기의 손가락이 꼿꼿하게 서 있는 재운의 유두를 벌주듯이 짓눌렀다.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한 힘에 재운이 허리를 비틀었다.

“……윤일우가 알파라서 그런 거야?”

“그게 무슨……. 으윽…….”

가슴을 희롱하던 손이 가느다란 목을 틀어쥐었다. 한 손으로도 잡힐 만큼 연약한 목은 김본기의 양손에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재운의 얼굴이 새빨간 물감을 톡 떨어뜨린 것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김본기가 재운의 목을 조르면서 상체를 앞으로 숙인 덕분에 팔이 자유로워졌다.

벌건 자국이 남은 손으로 숨통을 조이고 있는 김본기의 손목을 붙들었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줘 봐도 김본기의 손등 위로 돋아난 푸르른 핏줄은 더욱 선명해지고만 있었다.

“……예쁘다. 재운아, 너는 고통스러워할 때 정말 예뻐. 박제하고 싶을 만큼.”

김본기가 황홀하다는 듯이 재운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얼굴로 몰린 압력 때문에 새하얀 눈자위와 살결에 너나 할 것 없이 실핏줄이 터지고 있었다.

헐떡이느라 반쯤 벌린 입술에 김본기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맞췄다.

손바닥 안에서 펄떡이는 핏줄의 발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 감각이 너무나 황홀해서 입매가 흐무러졌다.

‘일우야…….’

재운이 멀어지는 정신을 따라 떠오르는 윤일우의 모습을 서글피 떠올렸다. 이대로 죽는다면 윤일우가 과연 진심으로 슬퍼해 줄까,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윤일우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지금쯤 미국에 있을 그가 이곳에 나타날 리 없는데도 죽어 가는 육체를 따라 약해진 마음은 간절히 그를 떠올리며 바랐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힘없이 얼굴 위로 내려앉을 때였다.

“으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김본기의 몸이 재운의 옆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흐으, 쿨럭, 쿨럭……”

재운이 목을 잡고 힘겨운 소리를 냈다. 시야가 가장자리부터 검게 물들었다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닫혔던 문이 어느새 활짝 열려 있었다. 침대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인영에 재운은 윤일우인가 싶어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한 번 어그러졌던 시야는 막혔던 숨이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일우, 쿨럭, 야…….”

지금 제 앞에 나타나 줬으면 하는 사람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쇠에 긁힌 듯 엉망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듣기 괴로울 정도였다.

재운의 옆에 널브러져 있던 김본기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재차 그의 머리를 가격한 힘에 이번에는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허억, 헉……. 너는 이 상황이 되어서도 윤일우를 찾냐…….”

잔뜩 구겨진 옷을 입은 진대원이었다. 급하게 옷을 추슬러 입었는지 셔츠의 밑자락이 바지 위로 들쑥날쑥 튀어나왔다.

무언가를 참는 듯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선을 따라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리 와. 지금 당장…… 나가야 해.”

진대원이 어지러운 시야 때문에 고개를 휙휙 저었다. 정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재운을 찾아 나선 거였다.

미약 종류인 건지 참기 힘든 성욕이 이성을 밀려들어 오는 밀물처럼 앗아 갔다.

본능적으로 도망가는 오메가를 붙잡아 급한 대로 성욕을 해결했다. 그제서야 어렴풋이 이성이 들어 재운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움직인 거였다.

김본기의 밑에 깔려 죽어 가는 재운을 본 순간 다시 한번 더 이성이 날아갔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들어 김본기의 머리를 후려쳤다.

진대원이 잔뜩 구겨진 시트를 끌어와 재운의 몸을 감쌌다. 재운은 진대원에게 기댄 채 비틀거리는 걸음을 이어 갔다.

“아아악……!”

“더, 더, 더 조여 봐. 응?”

기다란 복도를 따라 나오자마자 마주한 광경은 지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 다 본능에 취해 한 몸처럼 뒤엉켜 있었다. 고통 어린 비명과 육욕으로 들끓는 신음이 어지럽게 얽혀 지옥 같은 음률을 만들어 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재운의 몸이 덜덜 떨렸다.

여행을 떠났던 별장과 비슷한 공간이었다. 알파들 아래 짓밟히고 있는 오메가의 모습 위로 제 얼굴이 겹쳐 보였다.

진대현과 인사를 나눈 후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에 재운의 정신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보지 마.”

재운의 상태가 심상치 않자 진대원이 재운의 얼굴을 제 가슴팍에 묻다시피 했다.

자신도 괜찮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가 갈리도록 악물며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 재운이 죽을 뻔했다.

단 일 분만 늦었더라도 진대원이 마주한 건 숨이 끊어진 재운의 시체였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선득한 바람이 온 마음속을 할퀴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안아 들고 싶지만 제 몸도 휘청거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재운을 안아 들었다가 넘어지면 재운도 다칠 위험이 커서 지금으로서는 부축하는 게 최선이었다.

“후우…….”

진대원이 열기 맺힌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터질 듯한 욕구를 해소하기는 했지만 일부였을 뿐이었다.

재운의 몸이 맞닿고, 희미하게 페로몬까지 맡으니 이성 위로 단두대의 칼날이 날뛰고 있었다.

“이재운, 내 말 잘 들어.”

진대원이 재운을 데려간 곳은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 중 하나였다. 진대원의 차는 아니었다. 검은색에 진대원의 차 기종보다 훨씬 더 사양이 낮은 종류였다.

차도를 지나가면 10분에 한 번꼴로 마주할 만큼 평범한 차.

“으, 응…….”

재운이 얼굴을 감싸 안는 손길에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아랫입술이 희게 질리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의 잔상이 어지럽게 떠오르던 시야로 식은땀에 흠뻑 젖은 진대원이 들어왔다.

진대원의 얼굴 또한 재운만큼 엉망이었다. 떨리는 손길이 재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너 혼자 움직여야 해. 지금 같이 움직였다가는…….”

차 안에서 재운을 범할 게 분명했다. 지금도 진대원의 고간은 눈에 띄게 부푼 상태였다.

재운을 준비된 차까지 데리고 오는 게 진대원이 발휘할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였다.

“왜……?”

재운이 불안한 마음에 진대원의 소맷귀를 붙들었다. 진대원도 온전히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김본기에게 졸렸던 목은 벌써부터 붉은빛이 푸른 멍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지금은 목을 조르고 있는 손이 없는데도 목소리에서 가느다란 쇳소리가 났다.

“상태 괜찮아지면…… 바로 뒤따라갈게. 일단은 자리를 피해. 윤일우한테 얘기 들어가는 순간 도망가는 건 더 힘들어지니까.”

현재 재운이 타고 있는 차는 진대현이 마련한 차였다. 진대현은 진대원에게 반쪽짜리 약속을 지켰다.

재운과 진대원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도 않고, 김본기에게 재운을 넘겼으나 도망갈 루트는 제대로 마련해 줬다.

“이거…… 가지고 있어.”

진대원이 주머니에서 핸드폰과 현금 뭉치를 꺼내 재운에게 건넸다.

차가워진 손을 펼쳐 준비한 것들을 쥐여 주고 손을 감싸 쥐었다.

“……금방 뒤따라갈게.”

망설이던 진대원이 재운의 입술을 스치듯이 훔치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 운전석 쪽에 기립하고 있던 남자에게 눈짓했다.

재운이 탄 좌석의 문을 닫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짙게 선팅된 차창 너머로 흐릿하게 보였다.

* * *

“출발하겠습니다.”

운전석에 탄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재운에게 묵례를 했다. 재운도 덩달아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베타인 듯 어떤 페로몬도 맡아지지 않았다. 그 사실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제 처지가 한심했다.

새까만 휴대폰 화면 위에 비친 얼굴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초췌했다.

망설이듯 입술을 꾹꾹 깨물던 재운이 핸드폰을 켰다.

오랜만에 만져 보는 핸드폰이었다. 재운은 곧장 인터넷 창을 켰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검색하기 위해서였다.

“……아.”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재운이 낸 신음에 운전에 집중하던 남자가 백미러로 재운을 살폈다. 그러나 재운은 남자의 말에도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를 점령한 실시간 검색어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재운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온통 Khan 그룹과 관련된 것들로 가득했다. 일부는 유명 연예인에 관한 내용도 있었지만, 정재계 쪽은 Khan 그룹과 관련된 기사들이 도배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윤일우, 약혼.

윤일우라는 이름이 흔하지는 않아도 한 사람만이 가진 것도 아니니 동명이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Khan 그룹 후계자 윤일우는 재운이 알고 있는 한 사람뿐이었다.

재운이 홀린 듯이 가장 위에 떠오른 뉴스 기사를 눌렀다.

<……Khan 그룹 윤성훈 회장의 독자 윤일우(19) 군이 미국 가이아 그룹 창업주의 증손자 리암 테일러(20) 군과 함께 G 호텔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포착됐다. ……>

기사에 사용된 사진 속에서 윤일우는 금발의 한 남성과 나란히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오메가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여리여리한 체형에 고운 외모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약혼 발표에 대한 기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언론과 미국 언론 매체는 두 그룹의 만남을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었다.

기사가 떠오른 핸드폰 화면 위로 툭툭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저 재운에게 미국에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난 윤일우였다.

윤일우가 재운에게 어떤 언질이라도 줬다면 재운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도 애써 못 본 척했을 거였다.

‘나는 진짜 너한테 어떤 의미인 걸까…….’

자신을 아끼는 마음 모두가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쓰다듬는 손길, 다정한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을 거짓이라 치부하기에는 윤일우와 지내 온 세월이 있었다.

하지만…… 윤일우에게 자신은 옆을 함께 거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워 두고 숨겨 둬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윤일우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제 존재는 자체만으로도 죄악이 될 거였다.

그걸 알기에 윤일우도 재운에게 별다른 말 없이 미국으로 떠났을 테지.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서 오지 않던 연락을 떠올렸다. 금방 올 거라는 약속을 하고, 진대원이 함께 있을 거라는 말만을 남기고 떠났다.

질끈 감긴 눈가를 따라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임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진대원의 도움으로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고 있지만, 재운은 언젠가는 잡힐 거라는 걸 알았다.

유예기간을 번 것뿐이었다.

아직 재운에게 흥미가 떨어지지 않은 시점이었다. 재운이 윤일우와 완전히 이별하게 되는 순간은 재운의 의지와 상관없이 윤일우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저기…….”

“네. 말씀하십시오.”

“들를 곳이…… 있어요.”

“……저는 곧바로 이쪽으로 향하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만.”

남자가 목적지가 떠오른 내비게이션을 가리켰다. 내비게이션 위에 떠오른 주소는 충청남도로 시작됐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잠시만 여기에 들렀다 가 주세요. ……제발.”

죽어 가는 사람처럼 연약한 목소리였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재운이 건네준 핸드폰 화면 위로 떠오른 주소를 바라봤다.

다행히 목적지에서 조금만 우회하면 들를 수 있는 거리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지금 움직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재운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진대원이 핸드폰과 함께 쥐여 준 현금 뭉치의 액수를 가늠해 봤다.

정확한 금액은 모르지만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저희 병원에 처음 오셨나요?”

“……네.”

“이쪽에 인적 사항 좀 적어 주세요.”

재운이 간호사가 내민 종이 위로 제 이름과 주민 번호를 적었다. 다른 칸은 그대로 비웠다.

“살고 계신 주소도 적어 주셔야 하는데…….”

“……없습니다.”

간호사가 재운의 눈치를 보면서 공란을 가리켰다. 재운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에 간호사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눈에 봐도 큰일을 당한 것처럼 보이는 몰골이었다.

오메가 전문 병원 특성상 이런 유의 환자가 한 달에 서너 번은 방문하고는 했다.

목에 드러난 상처를 보는 간호사의 얼굴이 연민으로 물들어 갔다. 손자국 모양대로 나 있는 멍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이쪽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재운이 간호사가 가리킨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온몸에 무거운 추라도 단 것처럼 몸이 축축 처졌다.

눈물샘이 메말라 다행이었다. 재운이 버석한 눈가를 매만지면서 제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렸다.

“이재운 환자분, 제1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재운이 제1 진료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흰머리가 인상적인 나이 많은 의사분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가 재운을 보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습니까?”

“저…….”

입안이 바짝 말랐다. 재운이 한참 동안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어물거렸다.

답답할 만도 한데 의사는 별다른 말 없이 재운이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자궁 적출술을 받고 싶습니다.”

“자궁 적출술이요?”

안경알 너머 의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궁 적출술을 한다고 적어 놓기는 했지만, 실제로 받으러 온 환자는 손에 꼽았다.

그만큼 위험한 수술이었다.

의사는 재운을 설득하려고 입술을 떼었다가 재운의 상태를 보고 말을 아꼈다.

이후 의사는 재운에게 수술 과정과 위험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며칠 간의 유예기간을 주기 위해 수술 날짜를 다른 날로 잡으려던 의사에게 재운이 애원했다.

“오늘…… 꼭 받아야 해요. 최대한 빨리요.”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한 모습에 의사가 목 끝까지 치밀어오른 한숨을 삼켰다.

가끔 이렇게 알파에게 학대받은 듯한 오메가들이 병원을 찾을 때마다 속이 답답했다.

세상은 오메가들의 인권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고 떠들지만 아직도 재운 같은 환자들이 존재한다. 입맛이 씁쓸한 현실이었다.

“동의서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다행히 병원이 한가할 때 찾아 주셨어요.”

재운이 의사가 건넨 동의서를 주르륵 읽어 내리고 곧장 사인을 했다. 이름 석 자를 쓰는 것뿐인데도 손이 떨려서 한참 걸렸다.

이후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차가운 수술대 위로 몸을 올렸다.

“정말로 결정에 후회 없으시겠습니까?”

“……네.”

“다른 사람의 협박 때문에 하시는 건 아니죠? 본인의 결정 맞으십니까?”

의사는 이미 재운의 확고한 의사를 들었지만 재운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아시다시피 오메가가 자궁을 들어내면 여러 합병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체 기관 하나를 없애는 거니까요.”

“……떼 주세요. 제발요.”

재운은 어렵게 먹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오메가로 남아 있는 한 자신의 삶은 지금보다 더한 구렁텅이로 빠져들 게 분명했다.

차라리 건강을 망치는 게 나았다. 수술이 잘못돼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살아서 맛보는 지옥보다는 죽어서 가는 지옥이 나을 테니까.

“마취 들어갑니다. 숫자 1부터 10까지 천천히 세면 돼요.”

얼굴 위에 산소 호흡기가 씌어진 후 재운이 의사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채 숫자 열을 세기도 전에 몸이 축 가라앉았다. 새까만 심해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온몸이 무거워졌다.

서서히 감기는 눈가를 따라 맑은 눈물방울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윤일우.’

다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떠오른 사람은 이번에도 한 사람뿐이었다.

재운이 마취 상태에 들어가고 일정한 심전도 기계 소리만이 울리던 수술실 안.

의사가 수술 도구를 들어 올리며 본격적인 수술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콰아앙―, 굳게 닫혀 있던 수술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의사가 놀라 수술 도구를 쥔 손에 힘을 잔뜩 줬다.

“……당장 손 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윤일우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목에 반쯤 걸쳐져 있던 넥타이를 아예 뜯어내듯이 풀어내는 손길이 거칠었다.

흥분으로 일렁이는 시야에 죽은 듯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재운이 들어왔다.

“지금 도대체 뭐 하는…….”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의사가 놀라 사람을 부르기 위해 호출기를 찾았다.

의사의 곁에 서 있던 간호사도 몸을 덜덜 떨면서 몸을 뒤로 물렸다. 의사는 베타였지만 간호사는 오메가였다.

윤일우에게서 흘러나오는 알파 페로몬이 위압적으로 온몸을 내리눌렀다. 무방비한 상태로 굶주린 맹수를 맞닥뜨린 듯한 공포심이 들었다.

“마취 풀리게 조치해.”

그러나 의사는 윤일우의 뒤를 이어 들어오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행동의 통제권을 잃었다.

지금 상황에서 반항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기민한 눈치로 파악했다.

환자의 몸에 남은 상처로 보아 범죄와 같은 일에 연루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다.

그런데 정말로 평범한 신분이 아니었던 듯싶었다.

윤일우는 의사가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만 인내심을 발휘했다.

“다, 다 됐습니다…….”

의사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윤일우가 재운의 몸을 안아 들었다. 나신에 수술복만을 입은 가느다란 몸뚱이가 힘없이 늘어졌다.

“어디로 모실까요, 도련님.”

“집으로.”

수행원의 말에 짧게 대답한 윤일우가 병원 앞에 주차된 차로 걸음을 옮겼다. 윤일우는 미국에 간 후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예정된 일정보다도 훨씬 이르게 전용기에 올라탔다. 비행기 안에서는 재운에 대한 보고를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국과 한국의 시차가 상당했던 터라 몸은 피로했지만, 정신은 여느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진 상태였다.

“이재운…….”

재운의 표정은 경직된 윤일우와 달리 평온해 보였다.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입술에 무거운 시선이 오랫동안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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