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20)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짝사랑 체질이다. 그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반짝거리는 상대를 쫓는 일에는 이골이 났다. 예를 들면 내 옆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자인 연희가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베스트 프렌드 이상의 존재는 아닐 것이다. 서연희는 베타고, 나는 오메가 사내였기 때문이다.

주말 오후의 호텔 바는 사람들로 잔뜩 붐볐다. 그중 연희와 연희의 남자 친구가 앉아 있는 테이블만 포토샵으로 강조해 놓은 것처럼 빛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피팅 모델 아르바이트를 한 데다, 집은 준재벌, 명문 여대를 나와 대기업 사원, 미모의 재원인 서연희. 이제는 거의 끝나 가는 내 짝사랑 상대이기도 한 그녀.

그리고 그 옆에… 그녀의 남자 친구. 시끄러운 바에서 연희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새하얀 피부의 남자가 나의 존재를 문득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이서윤 씨?”

“아, 네.”

“너무 많이 마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내게 묻는 그는, 연희가 특징 없는 예쁜 여자 A로 보일 정도의 절세 미남이다. 단정한 눈썹, 옅은 쌍꺼풀이 진 눈에 창백하고 아름다운 하얀 피부, 오뚝하고 높은 코. 그 남자는 웬만한 연예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미남이었다.

거기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인 W가의 사람이었다. 거기다 국내에서도 드문 초우성 알파. 결혼 시장의 트리플 S 급, 상위 0.1%의 매물, 재벌가 미남 특집으로 연예 프로그램에도 나온 적 있는 남자.

나와 그를 카스트 제도에 비교하자면 수드라와 슈퍼 브라만 정도의 차이가 되겠다. 오메가 중에 드문 남자라는 특이점밖에 없는 평범한 나와 그가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유는 하나. 사랑스러운 연희와 내가 소꿉친구라는 것이었다.

연희가 죽고 못 사는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나. 그래서 나는 이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상위 클래스 커플의 데이트 자리에 병풍처럼 껴 있는 중이다.

연희가 상큼하게 웃으면서 보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이거 봐, 피아노 치는 고양이 동영상이야. 진짜 귀엽지?”

그렇게 말하며 까르르 웃는 그녀가 얼마나 예쁜지 나는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끔 그녀를 보고 상상한다. 베타 남성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하다못해 여자 오메가로라도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렇게 해맑게 웃는 연희처럼 매력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다른 건 바라지 않아도 연희의 이 긍정적인 분위기를 반만이라도 가져가고 싶었다. 20대 중반이 넘어서 동물 동영상에 진심으로 까르르 웃을 수 있는 그녀의 긍정적인 음이온 에너지라는 건 봐도 봐도 중독성이 있었다.

이 세상에는 알파와 오메가, 베타라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연희와 같은 베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는 가장 이상적인 커플들이다. 그리고 알파가 있다. 알파들은 선택받은 존재로, 모든 생물학적 존재 중 최고의 수컷이었다. 베타 여자는 물론 오메가들도 임신시킬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이 나와 같은 존재.

오메가.

오메가로 태어나면 남자든 여자든, 알파를 통해서만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도 오메가 중에 가장 의미 없는 존재라는 남자 오메가. 그중에서도 열성인 존재가 나였다.

“저번엔 스케이트 타는 개 동영상이더니, 이번엔 피아노 치는 고양이야?”

내가 연희를 보며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자동으로 연희 남자 친구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는 금세 미소를 지웠다. 연희의 남자 친구는 질투심이 많다.

“귀엽잖아…. 오늘따라 여기 사람이 많다.”

나는 맞장구치며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연희 남자 친구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베타 여자 친구, 그 옆에 껌처럼 달라붙어 있는 오메가 남자 사람 친구. 그의 비위를 거스르긴 충분하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여기서 처음 만났지?”

연희의 말에 나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민준을 보며 대답했다.

“아, 맞아. 원민준 씨 처음 만난 데가 여기였지.”

그러고 보니 연희가 불러내어 이 호텔 바에서 둘이 술을 마시다가, 연희의 현 남자 친구 민준이 말을 걸고 전화번호를 교환한 것이 연희와 민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커플의 첫 만남부터 사랑의 절정까지 계속 중간에 끼어 있는 셈이었다. 연희가 내 팔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무 붙어 다녔나 봐. 나랑 너랑 둘이 안 가 본 데가 없다니까, 너랑 있으면 좋은 일만 생겨서 그런가 봐. 우리 귀여운 서윤이.”

연희가 나를 귀엽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까르르대는 사이, 민준의 이마가 한 번 찌푸려졌다. 내가 원민준 씨, 하고 이름을 불러서 그런가. 연희에겐 늘 부드러운 낯인데 내겐 항상 찌푸린 낯이다.

“연희와 서윤 씨가 오픈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남자들이 다들 그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죠.”

“연희가 워낙 예쁘니까요.”

단언컨대 아첨 없이 대답했다. 어딜 가든 연희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내가 남자 오메가라고 해도 연희 옆에 있는 동안 알파들이 내게 관심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칵테일의 먹지 않는 체리, 연희는 섹스 온 더 비치. 나는 칵테일의 싸구려 우산, 연희는 미도리 샤워. 그게 정상적인 알파들이 보는 우리 둘의 조합일 것이다.

딱히 그런 상황에 불만은 없다. 오메가라고 해도 다들 알파에 환장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 오메가가 사내들에게 선택받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그러려니 할 뿐이다. 나는 그저 연희 옆에 있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연희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 때문만이 아닐걸?”

나는 그냥 입술을 깨물면서 웃었다. 민준의 얼굴이 더 굳어 갔다. 민준은 내가 연희에게 이렇게 호감을 표할 때면 여지없이 불쾌감을 표현했는데, 묘하게 둔한 연희는 눈치채지 못하곤 했다.

시간을 보니 벌써 밤 11시였다. 내일 출근을 위해서는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민준과 연희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지도 모르니 비켜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만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연희는 아직 핸드폰을 보고 웃고 있었고 민준 또한 이메일 확인이라도 하는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핸드폰에 발송된 문자 메시지 한 통.

「위층 호텔 2011호. 먼저 가서 기다려요.」

발신인은 원민준 이사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연희에게 보이지 않도록 핸드폰 화면을 껐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난 먼저 일어날게.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누군 출근 안 하나. 가지 마, 민준 오빠 과묵해서 둘이 있으면 재미없단 말이야.”

연희가 바로 만류하며 칭얼거렸다. 나는 민준의 눈과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오늘 집에 먼저 가겠다고 했다. 연희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지만 이미 마신 칵테일을 이유로 민준이 만류했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 익숙해지지 않는다.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는 퍽 거리낄 게 있는 인간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디 아프냐는 연희의 말을 애써 웃어넘기며 바를 빠져나왔을 때 손안이 약간 축축했다.

공포, 압도, 약간의 기대감. 심장이 공포 영화를 볼 때처럼 쿵쿵 뛰었다. 사실 그것보다 조금 더 무서워야 정상이다. 내게 원민준은 <주온2>보다, <전설의 고향>보다 무서운 남자니까.

2011호는 한번 가 봐서 어딘지 잘 알았다. VIP용 객실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1층에서 번거롭게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한다는 것도 이미 경험해 봐서 잘 알았다. 왜냐하면, 몇 번 가 봤으니까. 원민준 씨가 반영구 임대해 놓은 그 객실에.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이전부터 남자 운이 더럽기로는 남부러울 것 없었다. 연희가 부자에 미남자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이라면 나는 또라이에 변태를 끌어들이는 자석이었다. 심지어 연희와 알고 지내던 멀쩡하고 정상적인 알파도 나를 만나면 이상한 새끼로 돌변했다.

적중률 200%. 내게 관심을 보이는 알파는 어김없이 변태에 성격 파탄자였다. 그리하여 내가 또 한 명의 변태를 자석처럼 끌어들이고 만 것이었다. 그것도 이번에는 서연희의 남자 친구인 원민준 이사님. 여태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두려운 상대인 그 남자를.

***

나는 호텔방에 멍하니 혼자 앉아 있었다. 민준에게서 새로운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나는 지루함 속에서 민준의 데이트가 끝나고, 그가 호텔방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민준과 내 가장 친한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를 말이다.

내가 가고 나서 더 깨를 쏟을 게 분명한 둘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연희를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언감생심 뭔가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나와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게 웃고 있을 둘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싸하다.

일반적인 객실보다 조금 넓은 이 객실은, 아마도 여러 번 원민준의 오메가가 거쳐 간 곳이 분명했다. 오메가뿐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남자 알파들은 베타 여자도 아주 좋아했다. 거기다 원민준 씨는 수컷 중의 수컷이라는 우성 알파였다. 어떤 여자가 그 남자를 마다할까.

두꺼운 호텔방 문이 열리기 전까지 나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이 방을 스쳐 간 그의 오메가들을 상상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을 때 손바닥과 등의 땀이 식어 한기가 돌았다. 원민준은 나와 둘만 있을 땐 분위기가 일변한다. 연희와 있을 때는 다정한 남자 친구지만 나와 있을 때는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오늘은 도망 안 가고 잘 기다리고 있었네요?”

원민준이 내게 손을 내밀자 나는 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와 있을 때는 표정이며 태도가 급변할 것이다. 굳이 연희 앞에서처럼 밝은 척할 필요 없는 상대니까. 오히려 그는 내가 밝은 척하며 웃는 걸 싫어했다. 그렇다고 나의 다른 부분을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네.”

또 그는 질질 끌며 대답하는 걸 싫어했다. 나는 가능한 한 담백하게 대답하며 눈치를 살폈다.

눈치를 보는 건 내 버릇이었다. 막 연희와 헤어지고 나서 돌아온 민준은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간 들뜬 것 같았다.

하기야 연희처럼 예쁜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가 끝나고 마음이 상해할 남자는 없을 것이다.

“이사님.”

연희의 앞에서는 민준 씨라고 편하게 불렀지만, 그와 둘이 있을 때는 그를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연희 앞에서 그의 이름을 민준 씨, 하고 친구처럼 부를 때 나의 마음이 편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직업이 대표 이사님이시니까.

나는 계속 민준의 눈치를 보며 눈을 굴렸다.

“제가 오늘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그가 나를 연희 몰래 불러내는 경우는 보통 내가 뭔가를 실수해서 나도 모르게 민준의 비위를 거슬렀을 때다. 기실, 그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비위를 좀 거슬렀다는 이유로 내게 오라 가라 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약점이 잡혀 있는 입장에서 대놓고 그렇게 따질 순 없었다.

민준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 많았을 텐데, 샤워는 안 했나 봐요. 기다리면서 서윤 씨가 오늘 뭘 잘못했는지 생각이라도 했습니까.”

사실은 원민준이 끼고 있을, 혹은 있었던 오메가들에 대해 망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반성하고 있었다든지 뭘 잘못했다든지 알아서 이실직고하며 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내가 서윤 씨가 뭘 잘못해서, 벌주려고 불렀다고 생각하나 봐요.”

“…네. 보통 그러시잖아요.”

원래 삶은 공평하지 않고 좋은 일은 작고 나쁜 일은 많은 거다. 내가 원민준처럼 대단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순응하는 것엔 익숙했다. 오늘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그건 이어질 일의 훌륭한 구실이 될 것이었다. 그가 잘못했다면 한 거였다.

“그럼 뭘 잘못했는지 말해야죠.”

“…아까 연희 앞에서 이사님 이름 함부로 불러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했었나요?”

아닌가, 이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아까 연희의 머리에서 나는 냄새가 향기롭다고 생각해서? 그가 말할 때 딴생각하고 핸드폰 해서? 오늘은 뭘 잘못했는지 정말 모르겠다. 아까 연희가 내 팔을 잡고, 미소 짓고, 그녀의 머리에서 향기가 나고… 내가 딴생각을 한 걸 눈치채자 그가 혀를 찼다.

안 좋다.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이러다가 날밤이 새도 민준의 단독 청문회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청문회 대상은 나.

“네. 잘못이라고… 이사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름 함부로 불러서요.”

친구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위협도 안 되는 연적. 아니면 연희의 부록. 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내가 민준에게 친한 체하는 걸 싫어하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내가 연희 앞에서 원민준 이사를 무서워하는 티를 낼 순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테니까.

“이사님이라서, 잘못했다고요.”

그가 느릿하게 말을 꼬았다. 나른하게 말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원민준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잘생겼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쳐서 나는 얼른 무릎을 꿇으며 말을 바꿨다. 그를 ‘그렇게’ 부를 때는 무릎을 꿇으라고 교육받은 터였다.

“아니요, 주인님… 이시니까.”

정답이었는지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나는 이어질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럼 벌을 받아야죠, 서윤 씨.”

“네, 주인님.”

나는 그를 바라보며 멍하니 대답했다. 칵테일을 마셔서 그런지 조금 졸렸다. 아까 칵테일 바의 화려한 조명과 모던한 분위기와, 다리를 꼰 연희가 꿈속이었고, 그에게 받는 침묵과 냉대로 가득 찬 이 방이 현실인 것 같았다. 그 괴리감에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연희를 대하는 그의 나에 대한 온도 차처럼.

“오늘은 오랜만에 맞겠네요.”

“네, 네… 주인님….”

어느 날부터, 나는 그에게 종종 이런 ‘조교’를 받고 있다. 내가 이 남자에게 모종의 약점들을 잡힌 것을 구실로….

조교의 일환으로 민준에게 맞은 적은 이미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건 무차별적인 구타가 아니라 합의하에 이어지는 처벌이었다. 그는 나를 때릴 때도 항상 냉정했으므로 나는 별로 두렵진 않았다. 많이 아플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민준은 나를 때리는 처벌을 하기 전에는 늘 나의 의사를 묻곤 했다. 이럴 때면 말이 많아지는 이상한 남자였다. 물론, 가장 이상한 건 이 상황이지만 말이다.

“그러면 어디로 할까요, 종아리, 아니면 힙. 어디가 좋습니까.”

맞는데 어디가 좋고 말고 할 게 있느냐마는, 나는 어디가 좋다고 대답해야 덜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래서 순응이라는 것이 무섭다.

“엉덩이가… 좋을 것 같아요.”

“저번 주엔 종아리를 맞았죠. 그땐 많이 아팠나 봐요.”

“네, 그리고 걸을 때 바지에 쓸려서…. 여름이기도 하고요.”

“맞아요, 여름이면 반바지를 입어야죠.”

그러면서 그가 혼이 나갈 만큼 잘생긴 얼굴로 싱긋 웃었다. 기대되네요, 하고 작게 덧붙였다. 설마 반바지가 기대된다는 건 아닐 테고 나를 때리는 게 기대된다는 것 같았다. 하여간 이상한 변태 남자다. 다만, 내가 지금껏 살면서 본 모든 변태 중에 제일 잘생기긴 했다.

***

나는 민준에게 체벌당할 준비를 하고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내가 호텔방에서 원민준 이사에게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지만 인생은 원래 예측 불허한 법이다. 그중에서도 나쁜 쪽으로 예측 불허인 것은 당연지사이고.

서프라이즈한 불행들에는 이골이 나 있는 나라 이 또한 언젠가 지나가리라, 할 뿐이었다. 나는 그가 옷장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물쇠로 잠긴 옷장 안에는 민준이 공들여 준비한 도구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중 거울 아래 매달린 것들은 패들과 각종 회초리, 매들이었다.

“오늘은 이게 좋겠네요.”

민준이 새까만 가죽 패들을 꺼내는 걸 지켜보며 나도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그가 열어젖힌 문 안쪽에 달린 거울 속에 내 알몸이 반사되었다. 처음에는 몸을 보이는 것도 기겁했지만, 횟수가 늘어날수록 알몸이 되는 것에 익숙해졌다.

내 몸은 볼품없이 마른 몸이다. 연희처럼 볼륨도 있고 부드러운 것도 아닌, 평범한 남자의 몸. 약간 마르고 가는 것 외에는 특징이 없었다. 그런 나인데도 질리지 않고 같이 잠자리를 가지고 있는 원민준 이사의 취향도 참 특이했다. 변태라서 그런가. 나는 그가 지시하기 전까지 속옷만 입은 채 그를 기다렸다.

에르메네질도 제냐나 휴고보스의 맞춤 슈트만 입는 남자, 그것도 혼이 나갈 만큼 그걸 잘 소화하는 남자 앞에서 초라한 속옷만 걸치고 서 있는 일은 새삼 부끄러웠다. 차라리 모욕적인 섹스를 할 때가 덜 부끄러웠다. 그럴 땐 민준도 벗으니까. 그렇다고 벗어 주세요, 할 수도 없다. 그는 내게 벗으라고 할 수 있는 몸이지만 나는 아니다.

민준의 시선이 나의 속옷에 머물렀다. 오늘 호텔에 갈 줄은 몰랐기에 속옷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자 친구든 남자 친구든 사귀어 본 적이 없으니 속옷에 신경을 쓰고 살아 본 적도 없고. 다시 손바닥에 땀이 배어 그의 눈치를 보며 초조하게 물었다.

“다 벗을까요?”

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파들에게 오메가는 먹이이자 암컷이다. 그래서 알파들은 순종적인 오메가라면 환장을 한다. 딱히 좋아하지 않는 오메가라고 해도 제 밑에서 벌벌 기면 성욕을 느낄 수도 있고 흡족해할 수도 있다. 딱 나와 그의 관계처럼.

“뭐 해요. 얼른 다 벗어야지. 그래야 오늘치 벌도 받고, 내일 출근도 하고 그러죠.”

아까 연희에게 출근 핑계를 대고 일찍 일어난 걸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나는 속옷을 양손 두 손가락에 걸고 천천히 벗었다. 알몸이 되자 더욱 가슴이 서늘해졌고, 아주아주 희미하게, 나조차 근본을 모를 감정이 뱃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조건 반사, 순응. 그리고 기대감.

나는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민감하게 그의 눈을 살폈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이 둘러싸인 민준의 눈이 살짝 일그러진다. 그가 눈짓으로 침대 아래쪽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켰다. 나는 얼른 알몸으로 그곳에 걸어가 테이블을 잡고 엉덩이를 내밀어 자세를 취했다.

긴장감에 등골이 서늘했다. 민준은 내가 자세를 잡는 모습을 아주 천천히 지켜보고 나서야 다가와 내 뒤에 섰다. 나는 이럴 때면 내쉬는 원민준의 숨결조차 아주 얼음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숨결을 상상하며 내 몸은 뻣뻣하게 얼어붙는다. 몇 번이고 그의 숨결을 느껴 봐서 사실은 뜨겁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내 엉덩이에 가볍게 가죽 패들이 닿았다. 새까만 가죽을 무두질해서 만든 그것은 일견 푹신하기까지 했다.

“많이 잘못한 것 같아요?”

“어, 네…. 그런데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요.”

그가 잠시 웃는지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미소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솔직하게 멍청한 행동이나 말을 하면 원민준은 웃었다. 어쩌면 비웃음일지도 몰랐다.

“평소보다는 덜 잘못했다. 이건가요.”

“네, 그런데 이사님… 아니 주인님이 많이 불쾌하셨다면 많이 잘못한 거예요.”

나는 계속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행동에 대해 잘못이라고 정의한 것이 그이니 그 죄의 경중도 그가 정하는 게 맞다.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많이 맞으라면 맞고 적게 맞으라면 맞는 거다.

“그래요, 뭐 짜증 나게는 했지만 저번처럼 큰 잘못을 한 건 아니니까…. 오늘은 다섯 대만 하죠.”

“네, 감사합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진심은 아니었고 그냥 그가 주입한 버릇이었다. 그에게 변태 짓을 당하기 전후로 원민준은 내게 항상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라고 시켰다. 사실 감사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시키니 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하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정말, 정말 구질구질하지만 나는 그가 생각보다 매를 적게 때린다고 하기에 조금 고맙기도 했다. 변태와 어울리다 보니 나도 살짝 맛이 간 것 같다.

나는 어깨를 긴장시켰다. 나의 어깨 근육이 움직이는 걸 지켜보는 게 느껴졌고, 그가 나직하게 명령했다.

“횟수 제대로 세요. 또 제대로 못하면 벌이니까.”

“네 주인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민준이 한 번 패들을 휘둘러 보는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긴장했다. 그리고 약간의, 아주 약간의 아릿한… 인정하기 싫은 일종의 기대감이 차오른다. 이윽고 그가 손목을 휘두르자, 나는 힉, 하고 소리를 내고는 작게 외쳤다.

“하나.”

이어 원민준은 완급을 두고 손목을 휘둘렀다. 첫 번째는 왼쪽 엉덩이를 내려쳤고, 두 번째, 세 번째는 오른쪽 엉덩이였다. 그는 손속을 조정할 줄 알아 처음 세 대는 그렇게 아프지 않게 때렸다. 나는 몸을 떨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견뎠다.

네 대째와 다섯 번째에 그는 손속을 두지 않고 내리쳤다. 짝, 하고 살덩이에 매가 내리쳐지는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마지막 매를 맞을 때쯤, 아픔에 온몸에 피가 돌았다. 엉덩이가 불타는 것처럼 홧홧했다. 그의 손목이 크게 휘둘러지며 엉덩이 살이 크게 출렁였고, 바로 이어지는 고통이 골반을 타고 올라와 내 몸 안 어딘가에 있을 오메가의 부분을 크게 진동시켰다. 그리고 그 감각이 앞쪽의 페니스까지 전해지는 듯한 착각에, 나는 그만 혀를 내밀고 소리를 지르며 발기해 버렸다.

“힉, 다섯….”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테이블을 힘주어 잡고 버텨 냈다.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다섯 대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열 대, 스무 대를 맞았다면 흐트러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 맞아 본 적도 있는데 진이 빠질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민준이 시키는 모든 일을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알파 냄새가 개방되어 스멀스멀 나 자신을 잠식해 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흥분했음을 느끼고 괴로웠다.

알파와 오메가는 각각 상대를 매료시키고 성욕을 고조시키는 고유의 페로몬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남자 열성 오메가라 페로몬이 거의 없었지만, 원민준은 극우성 알파였다. 고로 이 남자는 페로몬 향만으로 나를 적시고 다리까지 풀리게 할 수 있단 뜻이었다.

민준이 의도적으로 분출하는 페로몬 냄새를 맡자 온몸의 근육이 나른해졌다.

“응….”

나는 원민준 이사의 학대 같은 행동들에 흥분했다. 내가 오메가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알파와 음탕한 행동들을 합의하에 하는 오메가들은 쌔고 쌨다. 그러나 애인도 친구도 아닌, 심지어 나를 싫어하는 상대와 이런 일을 하는 것으로 흥분할 정도로 배알 없는 오메가는 드물 것이다. 그게 바로 나라는 건 꽤 우울한 일이다.

어쨌든 내 센티멘털함과는 별개로 내 안의 오메가는 우성 알파의 냄새에 착실하게 흥분했다. 마지막 매로 인해 눈가가 젖었는지 속눈썹이 뻑뻑해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

그리고 뒤에서 민준의 손이 다가와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에게 맞을 때처럼 그 작은 접촉에도 떨었다. 경멸받아 마땅한 내 불쾌한 흥분에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큰 손이 미끄러지듯 척추를 타고 내려가 달아오른 엉덩이를 움켜쥔다. 다리에 자꾸 힘이 풀리려고 했다. 우성 알파는 정말 위험한 존재다.

“맞으면서 흥분했나 봐요.”

원민준이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엉덩이가 발갛게 달아올랐는지, 그의 찬 손에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나는 그를 등지고 입술을 작게 벌렸다. 등뼈가 구부러지며 허리에 힘이 풀린다.

“잘했습니다. 서윤 씨.”

“네, 네에….”

수치스럽게도 나는 그의 칭찬이 좋았다. 민준에게 변태 짓을 당하거나 이상한 일을 강요받는 건 힘들었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그의 칭찬이 기뻤다. 민준이 손을 내려 내 손목을 잡았다. 그가 나를 일으켜 침대로 데려간다.

오늘은 일요일 저녁이라 안 할 줄 알았는데 그가 흥분한 모양이었다. 민준은 많은 행동 중에서 나를 때리는 것에 특히 더 흥분했다. 좋아하지 않는 상대와도 몇 번이고 섹스가 가능하다니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는 참 오묘하다.

나는 민준이 이끄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 원민준은 타이를 당겨 내리며 옷을 차례대로 벗었다. 나는 그가 벗는 순간이 좋았다. 새하얗지만 탄탄한 조각 같은 몸이 드러났다. 저런 남자를 독점하고 있는 서연희가 새삼 대단한 여자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니라도 곁에 있게 해 달라는 오메가가 트럭으로 있지 않을까. 아마 맞아도 상관없다는 오메가들이 줄을 설 것이다.

그는 내 빤한 시선을 보고 살짝 미소 같은 걸 지었다. 나를 체벌하고 난 후의 그는 항상 한없이 다정하다. 민준이 손을 들어 내 머리와 뺨을 어루만졌다. 가족도 없고 애인도 없는 나를 이렇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처럼 어루만져 주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오직 이 남자뿐이다. 나는 그 손길이 너무 기분 좋아 코로 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팠을 텐데 잘 참았네요. 자세도 좋았고요. 정말 착합니다. 서윤 씨.”

“네, 배웠으니까요… 잘 참아 내라고.”

“그래요, 내가 잘 가르쳤네요. 어쨌든 잘했어요.”

민준이 상냥하게 말했다. 나는 항상 그에게 ‘조교’ 받았다. 맞을 때는 이런 자세로, 다 맞기 전에는 자세를 풀지 말 것… 그런 것들. 나의 달아오른 몸과 희미한 페로몬 향을 눈치챘는지 그가 뺨을 만져 주던 손을 내린다. 그리고 내 배로, 그리고 더 내려와 그의 것보다 훨씬 작은 성기를 손에 넣어 매만졌다.

“으응….”

그의 손에 들어간 내 성기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여기도 착실하게 흥분하고, 야하고 착한데요.”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가 앞을 만지작대자, 반사적으로 뒤가 가려웠다. 내가 이런 몸이 된 것도 이 남자의 가르침들 덕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겨우 다섯 대 맞았는데. 금세 또 흥분했네요. 저도 오메가는 많이 봤지만 이서윤 씨처럼 밝히는 오메가는 처음 봅니다.”

“네, 저, 죄송해요.”

나긋나긋하고 다정하게 톤 변화 없이 말하는 민준의 말에, 나의 뺨이 금세 붉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네, 그러니 아무 데서나 천하게 흘리고 다니지 마세요.”

“그럴게요.”

내가 흘리고 다녀 봐야 자극받는 알파도 없을 텐데. 나는 여성형인 것도 아니고 대단한 미인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는 초열성이라 페로몬도 거의 흘리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형식적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내 입술에 키스했다.

“아….”

나는 조금 망설이다 혀를 내어 그와 입술을 섞었다. 민준의 페로몬이 숨을 타고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향이 코를 타고 들어와 폐부까지 찌르는 느낌에 나는 더욱더 흥분했다.

“으….”

어느새 나와 그는 헐떡이며 혀를 섞고 있었다. 그가 한 번도 직접 건드린 적 없는 내 구멍이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민준이 이어 내 눈가에 키스했다. 그는 연희에게도 이만큼 다정했을까. 물론 연희를 때리거나 이상한 짓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입술을 받으며 상상했다. 연희와 그가 나란히 누워 두 손을 다정하게 깍지 낀 모습을.

눈물이 날 만큼 질투가 나야 정상인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구름 위의 두 사람을 상상하면 싸하기만 했다. 민준이 내가 짝사랑하는 여자를 안는 남자라고 해도, 이만큼이나 차이가 나면 질투를 넘어서 상처만 남는 것이다.

“흐윽….”

민준이 혀를 내려 배꼽을 애무하기 시작하자 나는 허리를 바르작대면서 할딱거렸다. 민준은 내 몸을 핥는 걸 좋아한다. 제 입으로 핥을 때 감촉이 좋다고 말한 적이 있으니 아마 사실일 것이다.

문득 이 남자를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내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이내 포기하고 손에 힘을 뺐다. 내가 그를 안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빈손으로 시트를 손으로 잡았다. 그저 민준이 만지면 만지는 대로 순종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가 충분히 나를 애무하고, 내 구멍이 젖은 걸 확인한 후에 손가락으로 두어 번 그곳을 더 문질렀다.

“아….”

그의 큰 성기가 이미 발기한 걸 나는 힐끔대며 바라보았다. 그가 손으로 자신의 것을 몇 번 주무르고 완전히 준비된 상태로 내 구멍에 성기를 들이댔다. 나는 순간적으로 다리를 오므릴 뻔했다. 그러다 얼른 자세를 고쳤다. 무릎을 굽힌 채 다리 사이를 활짝 더 열었다. 그가 내 양 무릎 속으로 손을 넣어 이미 팽팽한 다리 사이를 더 벌려 낸다. 허벅지 안쪽이 당기며 뱃속이 오그라들었다.

민준은 내가 몸을 가리거나 웅크려 그의 시선을 피하는 걸 질색했다. 심지어 나는 그가 몸을 봐 주는 걸 감사하게 여기도록, 더 잘 보여 주라고 교육받았다. 시키니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민준은 내가 피하거나 숨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래서 원민준의 앞에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채 다음 순간을 기다리며 헐떡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의 성기가 천천히 진입하자 나는 숨을 들이키며 몸을 떨었다. 저 큰 것이 내 몸으로 쑥 들어오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하다. 몸 안에 가득 차는 압력을 느끼며 나는 벌어진 허벅지를 떨었다. 발가락이 벌써 오므라졌다.

“우읏… 아….”

감각에 온몸이 떨린다. 나는 민준의 성기를 처음 받던 순간을 떠올렸다. 처음엔 부서질 듯 아팠는데.

물론 그의 것이 커서… 지금도 빠듯하게 아팠지만, 이제는 쾌감이 더 컸다. 오메가의 몸은 알파에게 정말 금방 익숙해졌다. 내가 열성 오메가라고 할지라도 상대가 알파라면 가리지 않고 냉큼 익숙해져 버린다.

“흐아….”

원민준이 끝까지 치밀고 들어오자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내가 버거워하는 것 같자 그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바로 움직이지 않고 내 몸을 쓰다듬고 한 손으로 내 페니스를 애무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참기 힘든지 그도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민준은 나를 안을 때 비교적 다정했다.

나는 흐려진 눈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거웠지만 나도 어느새 성욕이 고조되어 있었다. 하고 싶었다. 그에게 범해지고 안기고 싶었다.

“해 주세요.”

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자 민준은 더 이상 참지 않고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텔의 고급 매트리스가 삐걱거릴 정도로 말이다. 나 또한 참지 않고 신음 소리를 내며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허리를 내밀며 다리를 더 벌렸다. 평소에는 묶여서 섹스할 때도 많았다. 그때의 버릇으로 나는 적극적으로 그에게 안기거나 달라붙지 못했다. 그런 열광적인 연인의 섹스는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묘하게 내가 그럴 거 같다, 라고 생각하는 일은 그의 상성과 잘 맞아떨어지곤 했다.

민준은 만족스럽게 목구멍을 울리며 내 안을 한껏 유린했다. 어느새 찌걱대며 내 안을 한껏 휘젓는 성기에, 나는 한껏 부풀어 오르는 쾌감을 느꼈다. 그가 내 페니스를 주무르며 내 몸 안의 스폿을 교묘하게 스쳤다. 나는 민준이 조금 만져 주는 것만으로 먼저 싸 버렸다.

“아, 앗. 응….”

“…오늘도 빨리 싸네.”

나는 그런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에게 한 번 안길 때 두 번 이상은 싸곤 했다. 그는 정액투성이가 된 내 성기가 우습다며 가끔 비웃었다.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쾌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앗, 흑, 윽… 거기… 아!”

몇 달 전만 해도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성인 영화 배우만큼이나 할딱이며 소리를 질러 댔다. 마침내 민준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깊은 곳을 찌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사정 직전의 격렬함으로 나를 몰아붙였을 때 나는 환희에 찬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아아, 안에… 응….”

민준의 성기가 내 안에서 뜨겁게 도달했을 때, 우리는 거의 끝까지 맞물린 상태였다. 양 많고 진한 정액이었다. 내 안은 터지는 환희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의 것을 먹어 치울 듯 조였다. 민준이 내 머리를 끌어안고 내 이마에 키스했다. 그 건조한 키스에 나는 멍하니 천장만 보았다.

“흐으….”

그리고 그의 절정이 끝났을 때도, 나는 아직 발개진 얼굴로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두 번이나 싸고도 모자라 아직 반쯤 발기한 채 허리를 움찔거렸다. 민준이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 내 입술에 쪽, 하고 한 번 키스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나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나는 아직도 이상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민준은 그런 내 모습이 우스운지 아니면 경멸스러운지 나를 샅샅이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고도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이어 내게 키스했을 때 나는 힘없이 입을 벌려 응수했다. 쪽쪽 하는 소리가 호텔방 안에 작게 울렸다.

“으응….”

그와 키스하며 나는 내가 드디어 변태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평생 변태만 꼬이던 내가 드디어 인생 최악의 변태인 원민준을 만나고, 드디어 나도 변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맞고 섹스하는 게 이토록 기분 좋을 리가 있겠는가.

난 끝났어.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보통 남자가 여자보다 키스를 더 좋아한다고, 연희가 말했다. 연희는 키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비위생적이기도 하고 그냥 축축하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뜻밖에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가 많다고 했다.

남자 친구들이 제게 키스하려고 드는 게 귀찮다고, 잠자리는 좋아도 키스는 정말 싫어, 라고 투덜대는 걸 들은 적이 몇 번 있다. 민준도 키스를 좋아했다. 보통 연희처럼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에겐 키스하고 싶어지는 것이 남자 마음일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쩌면 민준은 연희에게 거절당했을 키스를 대신 내게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내가 남자라서인지 오메가라서인지 몰라도 나는 민준과 하는 키스가 좋았다. 가끔은 심장이 떨리기도 했다.

온몸을 채우는 뿌듯한 충족감과 후희에 나는 낮은 숨을 쉬었다. 그런 나를 민준은 오래도록 물고 빨며 시간을 들였다. 그는 섹스 매너가 좋다. 성 취향이 조금 이상해서 문제지.

입술이 떨어진다. 나는 잦아드는 쾌감을 느끼며 잠시 민준의 품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묘한 후련함이 느껴진다. 온몸이 노곤해서 기분이 좋았다. 한참의 여운을 즐긴 후에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민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사님, 저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그래요. 일어나서 먼저 씻고 오세요.”

그가 내 등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나를 놔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민준이 가운만 입은 채 핸드폰으로 무얼 적고 있는 걸 보았다. 연희에게 연락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시계를 슬쩍 보았더니 벌써 새벽 2시를 넘기고 있다. 졸음이 드리워진 눈꺼풀이 무거웠다. 나는 그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민준을 기다렸다. 침대 헤드에 기대 잠시 졸고 있던 나를 민준이 깨웠다.

“데려다주겠습니다. 일어나요.”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 눈을 비볐다. 그에게 그런 수고를 끼치다니…. 나중에 괜히 책이 잡히기 싫었다. 무엇보다 지금 차를 타면 바로 조수석에서 자 버릴 것 같았다. 민준이 운전하는 차에서 쿨쿨 잠들기라도 하면, 후환이 두렵다.

“택시 타고 가면 돼요. 별로 멀지도 않고.”

“이 밤중에 몸도 못 가누는 오메가가 혼자 걸어 다니면 위험합니다. 별로 멀지 않으니 데려다줄게요. 비효율적으로 떠들지 말고 말 들으세요, 서윤 씨.”

“네.”

민준이 약간 차가운 기색을 보이자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민준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다시 차갑게 돌변하는 건 싫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민준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순된 감정이다.

그의 새까만 포르쉐가 텅 빈 도로를 스치며 지나갔다. 민준의 비싼 차가 내가 사는 산동네로 진입하는 모습은 퍽 부조화할 것이다. 졸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운전을 하는 그의 조각 같은 하얀 옆얼굴을 감상했다.

한편으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려다주려면 연희를 데려다줘야 이치가 맞지 않는가? 연희는 집에 데려다주지 않았을 텐데. 어떤 변덕인지 몰라도 데려다주겠다며 이 조그만 동네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민준의 고집이 참 이상했다.

사내인 내가 위험한 일이 있어 봐야 뭐가 있겠는가. 어쩌면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 빚을 지우려고 하는지도 몰랐다. 물론, 잠자리 상대를 집에 데려다주는 매너 정도는 그에게 선택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하잘것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저기… 편의점 앞에 세워 주세요.”

민준이 천천히 차를 세웠다.

“집이 여깁니까?”

“아니요, 조금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차가 진입하기 힘들어서요. 흠집도 나고 사고도 잦아요. 여기 바로 앞이에요.”

나는 민준에게 집 위치를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가 신기하다는 듯 우리 동네를 고개를 돌려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연희가 사는 집과도, 그가 사는 집과도 동떨어진 풍경의 동네였다.

나는 민준의 눈치를 보며 내릴 타이밍을 엿봤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직 민준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조교받으며 몇 가지 내용을 배웠다. 그중 한 가지가 그에게 항상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조교, 즉 교육이 끝나면 감사합니다, 인사하라는 것. 나는 민준의 팔꿈치를 아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뭐가요.”

“데려다주신 거랑… 저기, 오늘도 교육해 주신 거요. 전부, 감사합니다.”

나는 그가 내리라는 말을 해 주길 기대하며 그를 보았다. 민준의 표정이 아주 이상해졌는데,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관찰했다. 그때 민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들어가 보세요.”

“네, 그리고.”

나는 우물거렸다.

“다음번엔 저 말고 연희를 집에 데려다주세요.”

원민준의 미간이 바로 찌푸려졌다.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연희는 대리 기사 불러 줬습니다. 그쪽이 연희 일에 과하게 참견하지 말라고 했죠. 연희가 그쪽 여자도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이만 가 볼게요.”

민준이 화를 내기 시작할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기 두려웠다. 얼른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낡은 철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자 어제나 다름없는 살풍경한 방 안이 들어온다. 나는 침대에 눕기 전 일부러 텔레비전을 켜고 소리를 작게 줄인 후 불을 껐다. 졸리고 온몸이 무거웠다. 피곤했다. 그러나 그날따라 외로웠다. 어두운 침묵 속에서 혼자 잠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텔레비전 안에서 우웅대는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떠올렸다.

내가 민준과 처음 잔 날….

그날이 아니었으면, 민준에게 협박당해 이런 관계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변태적인 성관계를 강요당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날을 떠올리자 손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날, 어떻게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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