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0)

처음부터 원민준과 그런 사이였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망할 가평 여행에서 시작되었다.

「서윤아, 나랑 민준 오빠랑 여행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응? 몸만 와. 재미있을 거야. 아직 오빠랑 선 넘을 사이는 아니라서 둘만은 어색하단 말이야.」

내 잘못은 첫 번째, 눈치 없이 그 여행에 따라간 것이었다. 오빠랑 아직 둘이 여행 가기 어색하고, 또 다 같이 놀면 재미있으니 몸만 따라와라, 라는 서연희의 꼬드김을 거절할 수 없어 남의 커플 여행에 쫄래쫄래 쫓아가고 말았다.

두 번째는 술이 문제였다.

나의 가장 친한 여자 친구 연희는 항상 남자 친구가 있었다. 서연희라는 여자의 레벨이 높은 만큼 남자 친구도 정말 다양했다. 사업가, 변호사, 판검사, 기업 임원 등. 서연희는 이전 남자 친구들을 고객으로만 유치할 수 있다면 결혼 정보 회사를 차려도 될 판이었다.

물론 그중 누구도 지금 남자 친구인 원민준만큼 잘생기지도 부유하지도 않았다. 연희는 화려한 연애담을 자랑하면서도 연애에 도취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지금 남자 친구인 원민준 이사님이 나타나기 전에는 말이다.

연희가 그를 남다르게 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어느 정도 선을 긋고 그를 만났지만, 원민준 이사 정도 되는 남자니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는 티가 났다.

나는 연희를 요 몇 년간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 오메가와 베타 여자 커플은 이뤄질 수 없을 게 자명했다. 남자 오메가인 나는 그녀에게 생물학적인 수컷이 될 수 없었다. 그녀와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씁쓸함을 느끼며 내 마음을 잡고 있었다.

거기다 연희의 남자 친구는 원민준 이사였다. 알파 중의 알파라는 우성 알파. 선택받은 지능과 능력의 상징. 거기에 잘생기고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민준 같은 남자와 경쟁할 자신이 있는 남자는 같은 알파 중에도 몇 없을 것이다.

연희가 남자 친구가 있었던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행을 통해 민준을 좀 더 알고 싶었다. 어쩌면, 정말 그가 연희와 잘되면 오래 볼 사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여행 전의 내 마음은 유난히 심란했다.

가평 여행은 원민준 이사의 별장으로, 연희와 나, 민준, 이렇게 셋이서만 갔다. 나는 부엌에 서서 고기를 구웠다. 원민준 이사도 간간이 일을 도왔다. 뜻밖에 소탈한 면이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산책도 하고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저녁에는 와인부터 시작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게 문제였다.

연희는 그날따라 초저녁부터 퍼마시다, 뭐가 그리 슬픈지 나를 끌어안고 서윤아 미안해, 미안해, 하고 중얼거리다가 다시 마시고 울기를 반복했다. 울다가 뻗어 잠드는 연희의 술버릇을 겪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마주 안고 토닥대며 그래그래, 하고 달래 주었다. 자신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것을 보는 민준의 시선이 아까부터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민준 이사는 내게 그저 지나치게 잘생긴 연희의 새 남자 친구,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때도 나는 데면데면한 사이의 그가 많이 어려웠었다. 그리고 연희가 뻗자마자 나는 연희 대신 원민준의 술 상대를 하게 되었다. 꼭 친분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열성 오메가인 나는 우성 알파인 그가 불편했다. 우성 알파는 열성 오메가가 감당하기엔 과하게 짙은 페로몬과 위압감을 가진 존재다.

‘드세요.’

나는 민준이 어려워 거절도 못 하고 억지로 웃으며 그가 따라 주는 잔을 넙죽넙죽 마셨다. 내가 술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금방 취한다는 걸 간과하고서 말이다.

그렇게 마시다 필름이 끊겼던 것 같다. 나는 누군가 내 팔뚝을 툭, 치는 감각에 눈을 떴다. 일어나 보니 연희가 작은 손을 내게 뻗으며 내 팔을 잡고 있었다. 남자 친구가 생겨서인지 요즘 들어 더 화려해지는 연희의 빨간 손톱 위로 알알이 은빛 스톤이 박혀 빛나고 있었다.

나는 술에 취해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내 앞에 엎드린 연희의 머리통을 보았다.

순간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났다. 열린 창문과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창가의 나무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연희. 그리고 샤프로 공책을 톡톡 두드리며 필기를 시작했던 그녀의 모습.

나와 연희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내가 연희를 처음 좋아하게 된 것이 언제더라. 애틋한 기분을 느끼며 조심스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 연희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더욱 감성적이 되었다.

그때 술기운에 내가 잠시 미쳤었던 것 같다. 나는 용기를 내어 연희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연희는 깨지 않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스쳤다. 나는 좀 더 용기를 내어 연희에게 손을 뻗었다. 맹세코 이상한 짓을 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 주려는 것이었다.

‘이서윤 씨, 지금 뭐 합니까’

그리고 부엌 문간에 서 있는 원민준 이사에게 정통으로 그 장면을 들켜 버렸었다. 그는 내가 연희에게 도둑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모두 봤던 것이다. 그때 내가 연희를 향해 손을 뻗은 각도는, 정확히 연희의 가슴 쪽이었다. 물론 내 손은 연희의 가슴에 조금도 닿지 않았다. 그러나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임은 분명했다.

원민준이 정말로 화가 났다는 것이 바로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제어하는 것을 잊었는지 그의 몸에서 알파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만으로 열성 오메가인 나를 얼음처럼 굳게 하기에 충분했다. 알파의 페로몬은 오메가를 유혹할 수도 있었지만, 상대를 기세로 찍어 눌러 꼼짝 못하게도 할 수 있다.

나는 연희가 깰까 얼어붙은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저, 저기….’

그가 나를 노려보다 손짓했다. 나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연희에게서 후다닥 떨어졌다.

‘으음….’

연희가 몸을 움직이다가 다시 테이블에 고개를 박았다. 다행히 그녀는 깨지 않은 듯했다. 평소 내성적이라고 생각하던 남자 오메가에게 도둑 키스 당하고 웃을 수 있는 베타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벌을 받기 직전의 아이처럼 겁먹어 민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작게 말했다.

‘2층으로 올라가죠.’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민준을 따라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2층 방 중 아무 곳에 나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우성 알파의 여자에게 남자 오메가가 손을 대다니, 경우에 따라 죽을 정도로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우성 알파들은 자존심이 아주 세다. 거기다 그와 나는 사회적 신분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나는 떨며 민준이 시키는 대로 침대 쪽에 섰다.

당시 나는 술기운에 푹 젖어 있었기에 사리 분별이 어려웠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겁을 집어먹고 그를 경계했다. 그때라도 제대로 변명을 했었다면 상황이 나아졌을지도 모르는데.

‘이서윤 씨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남자 오메가라서 의심도 안 하고 잘 헤실헤실하기에 그냥 방심하고 있었더니.’

‘…….’

‘감히, 내 여자 친구한테 손을 대?’

찰싹. 뺨이 날아갔다. 나는 그에게 손등으로 뺨을 맞았다. 나는 놀라 뺨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민준은 자신의 알파 페로몬을 숨기지 않았다. 심장을 죌 정도로 무겁고 불편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뺨을 손으로 감싸 쥔 채 멀거니 민준을 보았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열성임에도 내 몸이 오메가라 그의 페로몬에 성적인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성적인 자극과 공포, 그 두 개가 공존하는 감각은 처음이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다 침대에 주저앉았다. 잠깐 향을 맡은 것만으로 내 바지 속이 축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겨우 입을 열어 민준에게 빌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게 뭡니까, 서윤 씨. 남자 오메가가 여자 베타를 강간했다는 사례는 들어 본 적은 없긴 하지만, 그쪽도 수컷이니 그런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죠.’

‘그,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나는 사색이 되어 변명했다. 물론 자는 여자에게 도둑 키스를 한 것이 잘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연희는 평소 내게 장난스러운 스킨십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장난으로 내 볼에 키스를 하거나 끌어안거나 하는 건 별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큰 잘못이라곤…. 물론 잘못한 건 맞지만, 민준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맹세코 연희에게 나쁜 짓을 할 마음은 없었는데….

나는 점점 패닉에 젖었다. 그가 전혀 알파 향을 감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을 했으면 빌어야지, 도망을 가?’

민준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내 등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나는 또다시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했다. 맹수 앞의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그가 다가와 내 눈을 보았다.

‘내려가서 서연희에게 말할 겁니다, 그쪽이 자는 사이 추행하려 했다고요.’

그때 나는 정말로 패닉이었기에 민준에게 마구 빌기 시작했다. 연희에게 경멸받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오랜 친구이긴 했지만 남자 친구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듣는다면 의심할 것이다.

‘그, 그러지 말아 주세요… 제발.’

‘그럼 뭐로 내 입막음을 할 겁니까?’

원민준이 자신의 입을 가리키며 나를 비웃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미쳤었던 것 같다. 상황과, 페로몬과 또 술기운에. 나는 나도 모르게 민준에게 입 맞춰 버렸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날 보았다.

아예 근본 없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와 연희와, 또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 같이 하는 술자리 게임 중에 입술에 키스를 하는 벌칙이 있다. 그 게임을 할 때 내가 벌칙에 걸리면 연희와 친한 친구, 시우 중 한 명의 입술에 키스하는 흉내를 내야 했었다. 키스하기 전에 손으로 입술을 가리키며 벌칙이라고 말하는 게임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뺨이 다시 확 달아올랐다.

찰싹.

민준에게 뺨을 한 대 더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원민준 이사를 조금 냉정하고 차가운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다. 감정 기복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고…. 나는 그가 이렇게 불같이 분노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이거 미친년 아니야.’

그가 중얼댔다.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이렇게 원래 아무한테나 흘리고 꼬시고 다녀요, 이서윤 씨는?’

민준이 살짝 부풀어 오른 내 뺨을 툭툭 쳤다. 나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시, 실수였….’

나는 점차 성적으로 흥분해 헐떡이면서 말했다. 새하얀 얼굴의 원민준이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평소 냉정해 보이는 사람이 화를 내면 이렇게 무섭다는 걸 처음 알았다. 특히 그게 잘생긴 우성 알파라면, 더욱 무섭다는 것을….

이 방에서 나가면 나는 평생 우성 알파들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무서웠다.

‘오늘 나를 꼬시려고 온 거예요, 아니면 서연희를 추행하려고 온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이 뭐예요?’

‘둘 다 아니에요.’

나는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그가 나를 찬찬히 보다가 경멸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한번 확인해 보죠.’

‘네?’

‘이서윤 씨가 지금 흥분했으면 연희에게 그러려고 한 거고, 그게 아니면 내가 오해했다고 치고 잊어 줄게요.’

‘확인이요?’

민준이 손을 들어 내 바지에 손을 댔을 때 나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다. 그가 다시 나를 때릴 것처럼 손을 들자 손을 나는 금세 겁먹어 웅크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은빛의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작은 고리 두 개가 짧은 체인으로 연결된 한 뼘만 한 물건이었다.

아주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건 엄지 수갑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내 엄지 양쪽을 고리로 채웠다. 아주 작은 물건인데도 양쪽 엄지가 한 번에 묶여 몸이 구속되었다. 나는 두 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만 손을 비틀어도 양 엄지에 통증이 왔다.

민준은 도대체 왜 이런 걸 가지고 있는 거지? 설마 연희에게 쓰려고 가져온 건가?

원민준이 손을 내려 내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지익, 하고 바지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가 속옷까지 단번에 벗겨 내자, 내 흥분한 하반신에 민준의 시선이 닿았다. 그가 혐오스럽다는 듯 나를 본다.

‘내 생각이 맞는 것 같네. 연희를 지금 불러와야겠어요.’

내 등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내가 흥분한 이유는 지금도 내 몸을 누르고 있는 위압적인 남자의 페로몬 때문이다. 나는 그가 정말 이대로 연희를 불러와 내 하반신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흥분한 건… 이사님 향 때문에….’

‘나 때문에요?’

‘페로몬 때문에….’

아, 하고 그는 작은 소리를 내며 내 눈을 마주 보았다. 민준의 새까만 눈동자는 자세히 보면 잿빛이 섞였고 동공이 작은 눈동자였다. 그 위로 긴 속눈썹이 촘촘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 것만으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발정했다?’

‘네…? 네.’

‘그럼 나를 꼬시려고 온 거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부정하면 그럼 연희 때문에 흥분한 거냐며 몰아붙일 것 같았다. 그가 내 바지를 완전히 벗겨 냈다. 나는 그의 페로몬 사이에 섞인 희미한 욕정을 느꼈다. 나는 정말로 원하지 않았으나 내 안의 오메가는 뉴런을 타고 흘러 들어온 페로몬에 열광했다. 호흡을 하며 그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하반신이 묵직해지고 구멍이 촉촉이 젖어 갔다.

그는 우성 알파. 나는 열성 오메가. 민준은 페로몬을 조금 흘리는 것만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할 수도 있고, 발정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나와 그의 생물학적 격의 차이였다.

설상가상으로 구멍 안쪽이 화끈대며 가렵기까지 했다. 우성의 페로몬은 맡는 것만으로 최음 효과가 있기도 하다던데… 정말 그런 건가?

민준이 큰 손을 들어 내 몸을 뒤집고 허리를 꽉 눌러 엎드리게 했다. 자동적으로 엉덩이가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나는 양쪽 엄지가 한데 구속된 채 어깨를 움츠렸다.

‘안 돼요….’

그는 서연희의 남자 친구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가 내 엉덩이를 내려쳤다. 그것만으로도 흥분한 내 구멍에 고인 애액이 엉덩이 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변태 년인 줄 진작 알았으면 다르게 대했을 텐데. 생긴 거랑은 다른 타입이네요, 이서윤 씨.’

원민준이 긴 손가락으로 내 구멍을 문질렀다. 그는 단번에 내가 질척하게 젖은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민준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매우 의무적으로 내 구멍을 몇 번 문질렀다. 내 구멍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가 손가락 하나를 내 안에 밀어 넣고 안쪽을 문질렀다. 동시에 내 오른쪽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찰싹, 찰싹.

엉덩이에 내리쳐지는 뜨거운 손바닥에 나는 헐떡이는 숨을 쉬었다.

‘아…!’

민준의 손힘은 굉장히 강했다. 이미 흥분한 나는 어쩔 줄 모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으응, 읏…!’

그가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다음 순간 민준은 단번에 내 안을 관통했다. 나는 그제야 이게 내 첫 경험이라는 걸 떠올렸다. 알파의 성기가 내 몸을 비집고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불기둥이 몸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구멍뿐만 아니라 골반 전체가 뻐근했다.

‘우, 으. 우….’

너무 아팠다. 원래 이렇게 큰 건가? 나는 숨을 쉬지 못했다. 민준이 내 등을 어루만지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너무 조여요, 숨 쉬어… 몸에 힘 풀고… 내뱉어….’

민준이 내 등을 문지르며 말하자 나는 겨우 밭은 숨을 입으로 내뱉으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의 페로몬에 지배되는 열성 오메가인 나는, 그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울먹이며 베개에 고개를 비볐다. 방 안은 그의 성기가 내 안을 드나들며 나는 퍽퍽 소리로 가득했다.

‘으우, 으. 읏….’

첫 섹스는 쾌감보다는 아픔이 컸다. 찌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게 내 안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꾸 힘이 풀려 내가 허리를 내리려 하면, 남자는 엉덩이를 내리쳤다. 아마 내 엉덩이에 벌건 손자국이 가득 남았을 것이다.

알파의 페로몬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나는 민준이 엉덩이를 내리칠 때마다 흥분했다. 종래엔 거의 엉엉 울면서도 남자가 엉덩이를 때리는 박자에 맞추어 허리를 움직일 정도였다. 내 안을 한참을 멋대로 쑤시던 원민준의 성기가 잠시 멈추더니 내 허리를 꼭 붙잡고 일정하고 빠른 박자로 안쪽을 퍽퍽 치대기 시작했다.

‘아, 응. 으응….’

민준의 숨결도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아파서 죽을 것 같으면서도, 금욕적인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나는 엎드려서 그에게 박히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민준은 사정 직전에 내 안에서 몸을 빼냈다. 우성 알파의 정자를 이런 열성에게 줄 수 없는 것은 알파와 오메가의 세계에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리라. 그는 힘이 풀려 엎드린 내 등 위에 사정했다. 등에 뜨끈한 것이 흩뿌려졌다.

민준이 내 엉덩이에 페니스를 문질러 닦더니 바지 지퍼를 올렸다. 힘없이 널브러진 나는 겨우 눈만 돌려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민준의 새까만 눈동자는 한 번 빼냈음에도, 아직도 숨길 수 없는 욕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눈을 보다가 나는 술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온몸의 진이 빠진 느낌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바지를 벗고 티셔츠만 입은 채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이불을 걷고 하반신을 확인해 보니, 누가 씻겨 준 것처럼 깨끗했고, 속옷도 곱게 입혀져 있었다.

나는 그래서 처음엔 지난밤의 일이 꿈인 줄 알았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눕는 순간 약간 하드한 타입의 고급 매트리스에 닿은 등부터 엉덩이까지 찌르르한 통증이 엄습했다.

‘으….’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아직도 욱신거리는 구멍을 느꼈다. 부어오른 것 같았다. 나는 지난밤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파와 밤을 보낸 것이다. 그것도 절대 자면 안 되는 사람 전 세계 5위 안에 들 것 같은 사람과. 나가서 어떻게 민준의 얼굴을 보지.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때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서윤아~ 민준 오빠가 밥 차려 놨어, 빨리 와서 아침 먹어.’

‘으, 응….’

나는 마지못해 일어나 옷을 대충 입고 밖으로 나갔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꾹 누르며 나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연희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너 괜찮아? 어제 우리 셋 다 엄청 마셨어. 오빠도 중간부터는 필름 끊겼다더라.’

‘그래?’

나는 그 말에 너무 반색해 버렸다. 혹시 민준도 다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젯밤 일은 나만 함구하면 없었던 것이 된다. 나는 제발 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길 바라며 원민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연희의 말에 대꾸하며 아침을 먹고 있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 같다. 정말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제야 허기가 느껴져 나는 아직 따뜻한 국과 밥을 먹었다.

올라갈 때는 올 때처럼 다 같이 원민준 이사의 차를 타고 갔다. 집 위치는 연희의 집, 그다음이 나, 마지막이 원민준 이사가 내리는 순서였다. 연희의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연희를 따라 내리려 했다.

‘오빠, 서윤이 피곤해 보이는데 서윤이 집까지 데려다줘.’

‘아, 아냐, 괜찮아. 나 여기서 집 가기 쉬워.’

‘중간까지라도 태워다 드릴 테니 그냥 타시죠, 짐도 있잖아요.’

‘정말 괜찮은데….’

나는 연희와 민준의 성화에 마지못해 차에 올라탔다. 그의 포르쉐가 수면 위의 새처럼 도로 위로 미끄러졌다. 나는 뒷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빨리 차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아무 지하철역이나 보이면 내려 달라고 할 심산이었다.

‘어?’

그런데 그가 차를 시내가 아닌 다른 곳으로 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원민준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어 보이는 건물 앞이었다. 낡고 관리되지 않은 외형은 폐건물 같아 보였다.

‘담배 한 대 피우고 가려고요.’

‘네, 네에….’

나는 뒷좌석에 비루먹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은 채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힐끔거렸다.

‘이서윤 씨가 제 상사예요?’

‘네?’

‘뒷좌석에 타고 있으니 좀 그래서.’

‘죄송해요.’

나는 후다닥 뒷좌석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수석으로 옮겨 탔다.

민준의 태도는 묘하게 고압적이었다. 나는 움츠러들어 그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담배를 다 피우고 담배꽁초를 창문 밖으로 버렸다. 어젯밤의 그런 열정을 보였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동시에 오싹할 만큼 잘생긴 얼굴이다. 이 정도 얼굴에 재벌가의 후계자라니, 드라마 주인공도 이 정도 스펙으론 짜 맞추기 힘들 정도의 캐릭터였다. 사고였다지만 이런 남자와 그런… 일을 했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서윤 씨.’

‘네.’

‘서윤 씨 주머니 좀 볼래요?’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나는 의아하게 그를 보다 내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거기서는 엄지만 한 크기의 톱날 같은 것이 달린 작은 고리 수갑이 나왔다. 엄지 수갑, 어젯밤 내 손을 구속했던 조그마한 물건이다. 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도대체 언제 이걸 내 주머니에 넣어 놓은 걸까.

‘좋아하는 것 같길래, 나중에 또 같이 쓰자고요.’

‘…….’

‘잘 챙겨 놔요.’

‘…….’

‘대답.’

‘네, 네에….’

나는 새파랗게 질려 멍하니 네, 하고 대답했다. 그 뒤 그가 나를 시내에 내려 줄 때까지 나는 혼이 나간 것처럼 멍한 상태였다.

아, 나는 망했다.

나는 영혼까지 탈곡된 상태로 집에 들어가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던 것 같다.

***

나는 문자 메시지를 적었다. 수신인은 원민준 이사였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고, 연희에게 이 일을 숨겨야 했다.

「원민준 이사님께.

지난주 있었던 일은 정말 큰 실수였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겠고 연희를 대할 때도 조심해서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일은 없던 것으로 해 주세요. 연희하고도 절교할 수는 없지만,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생각은 전혀 없으니 모른 척해 주시면….」

나는 이런 내용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지난주 주말의 일은 내가 미쳤었던 것 같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망설이면서 몇 번을 고친 메시지를 민준에게 보냈다. 두근대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바쁜 사람이라 그런지 답장이 없다. 혹은 답장을 할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며 핸드폰을 보다 내려놓고 집안일을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연희인가? 택배 받을 것도 없는데, 나는 빨래를 개다가 수신인도 확인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 이서윤 씨?

소름이 오싹 돋았다. 민준이었다.

‘네.’

- 메시지 잘 봤습니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왜요?’

- …….

잠시 수화기 너머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언짢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 원래 그렇게 버릇이 없어요?

‘어… 그….’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민준이 이어 말했다.

- 어쨌든 만나죠.

그리하여 나는 가시방석 위에 앉게 되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반지하 카페에는 다행하게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손을 꼼지락대며 맞은편에 앉은 원민준의 눈치를 보았다.

‘메시지 봤습니다. 조금 당혹스럽더군요.’

‘예?’

나는 그의 전화를 받고부터 네? 예? 만 하는 멍청한 대답 자판기가 되어 있었다. 민준이 나랑 대화할 일이 뭐가 있지? 그 일은 그냥 술김의 흑역사 아닌가? 그냥 내 쪽에서 입 다물면 끝나는 일이 아닌가?

‘이서윤 씨가 먼저 꼬신 거 아닙니까, 오메가들이 알파라면 상황 안 가리고 덤빈단 말은 들었는데, 가장 친한 친구 남자 친구에게까지 덤빌 줄은 몰랐습니다, 이서윤 씨 보기보다 적극적인 타입이네요.’

‘그런 거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많은 오메가가 알파에게 의존해서 산다고는 들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알파를 밝히지도 않았고, 나 같은 오메가가 적극적으로 덤빈다고 넘어가 줄 알파도 없을 것이다. 그걸 잘 알기에 나는 누구의 애인이 되는 건 진작 포기하고 살았었다.

‘그건 그냥 사고였잖아요….’

원민준이 잘생기다 못해 아름다운 입술로 희미하게 웃었다. 왜 웃지?

‘서연희 좋아해요?’

나는 죄인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냥 저 혼자 마음이고 연희는 그런 거 꿈에도 몰라요, 저도 아무것도 할 생각 없어요. 그날은 정말 제가 취해서 실수했던 겁니다.’

나는 연희의 남자 친구에게 그렇게 변명하고 있었다. 내가 술 취한 채 연희에게 도둑 키스를 한 일에 대해서…. 말하다 보니 코끝이 찡해졌다. 혼자 마음을 잘 갈무리하고 있으면 될 터이지 괜히 감상에 젖어서 그런 실수를 하다니. 그녀에게 대한 마음도 접기로 한 마당에.

민준이 연희에게서 떨어지라고 요구해도 나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연희는 내 소중한 친구였다.

‘조심할 테니까, 그냥 모른 척해 주세요….’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원민준이 삐뚜름하게 입술을 내리며 나를 경멸과 약간의 혐오를 담아 보았다. 우성 알파의 눈에 이런 부탁을 하는 남자 오메가가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못 믿겠네요. 이서윤 씨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서연희한테 뭔지 아직 모르겠거든요.’

‘…….’

‘아, 연희에게 가서 직접 물어볼까요.’

‘그것만은.’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민준이 재미있다는 듯 나를 내려다본다. 완전히 깔보는 시선. 내 모든 자존심이 작신작신 밟히는 것 같았다.

‘당분간 이서윤 씨가 어떤 사람인지 제가 좀 지켜봐야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부르면 오세요.’

‘…네.’

‘몇 번 더 자세히 봐야 알겠거든요. 그냥 암컷이면 연희 옆에 있어도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죠… 거기다….’

‘네.’

‘이서윤 씨는 계속 절 입막음해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민준이 그렇게 말하며 자기 입술을 가리켰다. 입막음, 그 단어를 듣자마자 뺨이 확 붉어졌다. 정말 그날은 내가 미쳤었다. 술을 아무리 마셨어도 그렇지 머, 먼저 키스를 하다니.

‘어떻게 날 입막음할지는 생각해 봤어요?’

‘어, 저… 뭐든지.’

‘내 입 막으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겠네요?’

‘…예.’

‘그래요, 잘됐네요, 요 며칠간 나도 서윤 씨한테 시킬 거 많이 생각했거든요.’

많더라고요. 원민준이 나직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을 때 나는 뱃속이 뒤틀리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동시에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야기는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패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나는 이 남자에게 약점을 잡혀 버렸다.

‘제가 취향이 조금 독특하거든요, 성 취향 말입니다. 서윤 씨도 눈치챘겠지만요.’

‘저 묶으신…. 거요?’

‘눈치가 빨라서 좋네요. 누군가는 제 취향을 받아 줘야 할 거고, 그게 누가 되면 좋겠습니까, 연희?’

나는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연희를 그렇게 거칠게 다룬다고?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연희에게는 그러지 마세요.’

‘그럼 누구한테 해야 할까요.’

그가 느릿하게 내 몸을 훑어보았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민준은 이미 결론을 낸 듯했다. 나는 작게 입을 열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내 엉덩이를 내려치던 민준의 큰 손을 떠올리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내 몸을 격렬하게 드나들던 크고 단단한 성기와, 알파의 녹진할 정도로 강하고 무거운 향과 내 손가락을 묶던 손가락 수갑. 통증과 쾌감이 내 온몸을 뒤흔들어 놓았었다…. 아픔만큼 오싹하게 감미로운 경험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시킬 일은요….’

나는 최면에 걸린 듯 그가 하는 말들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게 본격적인 내 망함의 시작이었다. 재앙 중에서도 블록버스터급 재앙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석 달간 그가 부르면 언제든 호텔방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연희에게 그런 일을 하겠다는 원민준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임을 깨달았다. 왜냐면 그는 ‘아무나 때리고 싶어 하는’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연희는 그의 가학적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표적이었다.

원민준이라는 잘생기고 아름다운 남자는, 내 예상대로 SM,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에 관련된 성벽을 가진 남자였다. 그날 이후 남자는 자신의 욕구를 풀 표적으로 나를 점찍었다. 다음부터 나는 석 달 이상 이어질 긴 조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나를 고문하거나 괴롭히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민준은 자신의 표적을 느긋하게 요리하며 정신까지 마비시켜 버리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또 그 남자는… 정말 이상한 다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호텔방으로 불러내어 묶거나 때리거나 했지만 그 직후에는 내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달콤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민준은 자신의 피학자를 다루는 철학을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3개월 후, 나는 완전히 원민준을 통해 겪는 일들에 도취하여 버리고 말았다. 즉, 완전히 망했다.

다른 말로 풀어쓰면 변태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내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지금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

오랜만에 민준과의 첫 정사를 떠올린 날 밤, 나는 꿈을 꾸느라 새우잠을 잤다.

지난 일요일 밤 호텔방 2011호에서의 정사. 성관계 다음 날의 피로는 월요일 아침부터 지각할 뻔하게 만들었다. 나는 퀭한 얼굴로 월요일 하루를 시작했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사원증을 목에서 빼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목에 답답하게 뭔가 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메일을 확인하며 할 일들을 체크했다. 오메가는 보통 대기업 취직이 힘들다. 히트 사이클도 그렇고 여러 가지 사회적 편견과 제약이 있어 서류 전형에서 많이 걸러지는 편이었다. 지인 추천이 아니었다면 내게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낙하산에 오메가 평사원인 내게 딱히 중요한 일이 주어질 리 없다.

오늘도 주어진 소소한 일들을 하다 보면 하루가 갈 것이었다. 적당히 힘 뺀 회사 생활을 적당히 성실하게 하는 데 익숙해지는 덴 1, 2년이 걸렸다. 엑셀 작업을 하고 있으려니 뒤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김인영 대리가 등을 쳤다.

“서윤 씨!”

“김 대리님, 회의 끝나셨나 봐요.”

월요일 아침엔 평사원급을 제외한 대리급 이상 팀 회의가 있었다. 나는 퍽 피곤한 얼굴로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그녀와는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말 잘 보냈어요? 피곤해 보이네. 잘생긴 얼굴 아깝게.”

나는 그냥 말없이 한 번 뺨을 문지르며 웃었다.

“이따 점심 같이 먹어요.”

“네, 그래요.”

“그리고 미안한데, 이번 신입 사원 지원 서류 정리 아직 시작 못 해서 그러는데 오늘 야근 좀 할 수 있어요? 도와주면 좋을 것 같은데.”

“네, 도와드릴게요. 별일 없어요.”

“데이트 있는데 내가 방해 한 거 아니죠?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요. 주말에 출근해서 일하려고 했는데 다른 건으로 호출받아서 지방 내려갔다 왔잖아. 정말 미안.”

“데이트는 무슨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따가 봐요.”

“하, 역시 미남이 성격도 좋아, 고마워요. 서윤 씨. 추가 근무 내역 꼭 올려 두고요, 제가 부장님한테 야근 수당 결제 한꺼번에 받아 줄게요.”

밝게 활짝 펴지는 그녀의 얼굴에 의미 없이 한 번 더 따라 웃어 준다. 팀원들 대부분이 바빴고 개중 내가 가장 한가했다. 낙하산에 가장 쉬운 일만 맡는 상대가 팀 내에서 고와 보일 리 없다. 거기다 나처럼 붙임성 없는 남자 오메가는 더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한 한 팀원들 말을 잘 들어 주고 부탁받은 일은 바로 해 주곤 했다. 김인영 대리의 말대로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갑작스러운 2, 3시간 추가 근무는 스트레스도 아니었다.

약간 피곤한 것 때문인지 그날 하루는 유독 빨리 흘렀고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팀원들은 대부분 칼퇴근을 했다. 오후 6시 이후가 되자 사무실에는 나와 김인영 대리 둘만 남았다.

이번 신입 사원 지원자를 거르는 정리를 하면서 지난 공채들에서 탈락한 지원자들의 하드 카피 자료도 함께 정리하는 일이었다. 단순한 일이지만 월요일부터 하기엔 피곤한 일이었다. 한 시간 반쯤 집중해서 일을 하다가 그녀가 기지개를 켰다.

“아, 피곤해. 우리 커피 한 잔 마시고 와서 할래요? 제가 살게요.”

마침 나도 졸음이 오던 차라 좋은 타이밍이었다. 로비 1층의 오픈 카페는 밤늦게까지 영업했다. 카페에서 나란히 아이스 카페 라테를 빨면서 김인영 대리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연희도 그렇고 이런 타입과 잘 맞았다. 스스럼없고 자존감이 높고, 적극적이고 밝은 타입. 아마 자존감 낮은 내 성격과 반대라는 점이 오히려 맞아떨어지는 요소일 것이다.

“그런데, 서윤 씨는 정말 누구 없어요? 알파들이 줄을 설 것 같은데.”

‘오메가’라는 문제는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쉽게 꺼낼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나와 그럭저럭 친분이 있는 편인 김인영 대리기에 이런 말을 꺼내는 거겠지. 월요일부터 같이 야근을 서 달라 부탁한 것이 미안해서인지 그날따라 김인영 대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이런저런 예의상 칭찬을 하며 근황을 물었다.

“없어요, 정말로요. 회사 다니기도 바쁜 거 아시잖아요.”

나는 빨대로 커피를 쪽 빨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여자 알파가 흔한 것도 아니고요.”

여자 알파와 남자 오메가는 남자 알파와 여자 오메가만큼 괜찮은 조합 중 하나였다. 다만 남자 오메가도 드물었고 여자 알파도 수가 적었다. 남자 오메가보다야 훨씬 흔했지만.

어쨌든 김인영은 내 말에 대충 납득하는 것 같았다. 남자 오메가라고 해도 남자 알파와 여자 알파 중 이상형을 정할 수 있는 취향의 권리 정도는 존재하는 것이다.

어쨌든 내 처지에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무슨 알파 애인이란 말인가. 이렇게 좋은 회사에 평안하게 괴롭힘 없이 다니고 있고 아픈 데 도 없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람이 많이 바라면 죄받는 법이다. 그리고 나 좋다는 알파도 없을뿐더러 있어 봐야 지금 처한 트러블이 가중될 뿐이었다. 연희와 원민준 사이에 껴 있는 이 상황부터 해결해야지. 나는 빨리 이 악연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그거 알아요? 원민준 이사님 여자 친구 생겼다던데. 저번에 회사 앞에서 같이 있는 걸 사람들이 봤대요. 여자 엄청 예쁘다고. 부잣집 딸 같아 보인다던데.”

나는 그 말에 말없이 쓰게 웃었다. 지금 내가 처한 트러블의 중심, 원민준 이사는 내가 다니는 이 회사의 대표 이사님이셨다. 그러니 연희의 일 말고도 내가 그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잘 모르겠어요. 여직원들이 슬퍼하겠네요.”

“어, 저기 이사님 아니에요?”

나는 그녀의 말에 벼락을 맞은 듯 입구를 보았다. 중역으로 보이는 남자들과 비서로 보이는 사람들 세 명에게 둘러싸여 민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 그를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보통 나 같은 평사원에게 회사의 대표 이사란 몇 년 재직해도 한 번 볼까 말까 한 구름 위의 존재인 것이다.

“쿠키 드실래요?”

“응?”

“카페에서 파는 쿠키요, 우리 그거 사 먹어요.”

나는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김인영 대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때 바로 민준이 우리를 바라보았고, 김인영 대리는 어색하게 꾸벅 묵례했다. 나도 그래야 했지만 나는 당황하여 김인영 대리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카페 안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정말 민준과 회사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애인도 아닌 남자와 침대에서 뒹군 일 같은 건 사생활의 저편으로 묻고 묻어 마지막에 생각나는 일쯤으로 해 두는 게 내게 좋았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일이 손이 잡히지 않았다. 이건 100% 책을 잡힐 일이라고 생각했다. 민준은 내가 피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걸 지독히 싫어한다. 그런데 그 앞에서 대놓고 도망치려 했으니. 그렇다고 인사를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재벌가 출신 대표 이사에게 하찮은 인맥을 과시하는 평사원. 공식적으로 우리는 그냥 약간 아는 사이일 뿐이었다. 그는 연희의 남자 친구, 나는 연희의 남자 사람 친구.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인가 민준에게 조교를 받고 있다. 잘못한 것에 관해 책을 잡히고 벌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연희를 탐냈다는 이유로 그가 나에게 내리는 벌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구실로 난생처음으로 성관계까지 맺었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아무거나 책이 잡혔다. 이제는 연희가 구실이 아니라 내가 민준을 거스른 일들이 구실이 되었다. 문제는 내가 이 상황에 심취해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민준이 내리는 처벌에 열중한다. 고통도 느끼고 쾌감도 느낀다. 그리고 명백하게 잘못한 일에선 죄책감도 느낀다. 아무리 봐도 이런 관계는 정상이 아니다. 나는 일을 하다가 이마를 문질렀다.

“괜찮아요, 서윤 씨? 역시 피곤한데 내가 억지로 잡은 거 아니야? 그만 퇴근할래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문자를 확인하자 원민준 이사였다.

「이사실로, 지금 바로 올라와요. 30층입니다.」

호텔방으로 불려 간 적은 여러 번 있어도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평탄한 회사 생활의 꿈이 멀어져 가고 트러블은 커져만 간다. 그가 부르면 당장 달려가던 나였지만 손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처음으로 그의 말에 말대꾸, 즉 답장했다.

「이사님 비서들이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아요.」

나는 궁색한 핑계를 댔다.

「당장」

그의 답장은 바로 왔고 아주 짧았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김인영 대리에게 아는 사람이 회사 근처에 와서 인사만 하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내가 들어서자 여비서가 얼른 일어나 안내해 주었다. 비서들이 정색하고 눈앞을 가로막을 걸 상상한 나는 상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원민준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언제 봐도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에,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조건 반사적으로 그를 보자마자 내 얼굴에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왔습니까.”

“안녕하세요, 이사님.”

나는 그에게 인사했다. 내 목구멍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사람이 이렇게 무서울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쓸데없이 잘생겨서 더 무서웠다. 민준은 나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손짓으로 가까이 불렀다.

“내가 왜 불렀을 것 같습니까.”

“제가 잘못한 게 있어서요.”

기실 그가 나를 호출하는 이유는 그것뿐이지 않나.

“그래요, 우리 서윤 씨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요.”

“저… 인사, 안 한 거요?”

“방금 인사했잖아요, 안녕하세요, 하고.”

“그거 말고 아까 1층에서요.”

“네, 저는 서윤 씨가 저를 못 본 줄 알았습니다. 인제 보니 봤네요.”

“네….”

미주알고주알 그에게 다 고해바친 격이 된 나는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 뿐이었다. 눈 좀 피하고 도망친 게 무슨 죄겠냐마는, 내 죄는 원민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다. 나는 평소에도 민준에게 꼼짝 못 했지만 대표 이사 명패 앞에 있는 그를 보니 더욱더 작아졌다.

“서윤 씨, 서윤 씨가 어젯밤에 나를 뭐라고 불렀죠?”

“주인님이요.”

“맞아요, 그런데 주인님을 우연히 만났어요, 그러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죠, 그렇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도망치면 어떻게 합니까. 서연희한테는 방긋방긋 잘 웃어 주잖아요. 아까 그 여자, 김 대리였나요. 잘 웃어 주고 스킨십도 하고 하던데, 나랑 서윤 씨가 보통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행동하면 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민준이 매우 나른하게 말했다. 그는 나를 추궁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죄의 유무는 별로 중요한 이슈도 아니었다. 듣던 나는 정말 억울해졌다. 우리 사이에 뭐가 있다고 사이 운운이란 말인가.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면 연희와 그의 사이에 낀 내 등 터지는 소리뿐이었다. 아주 그것도 내가 아주 꾹꾹 압사당하는 소리.

“네, 잘못했어요.”

그런데도 그에게 다그침을 당하게 되면 나는 홀린 듯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마는 것이다. 죄책감 없이도 사과하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 이제는 아주 물 흐르듯 플로를 타고 용서를 비는 내 입이 밉다.

“잘못했죠?”

“네.”

“그럼 다음부턴 어떻게 할까요?”

“벌 받을게요.”

나는 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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