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0)

그 주 토요일은 연희의 쇼핑에 동행했다.

나에게 간절기는 감기와 꽃가루의 계절이지만 서연희에겐 쇼핑의 계절이었다. 동시에 내겐 스포츠의 계절이었다. 연희의 쇼핑 동행은 스포츠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서연희는 그렇게 꾸미는 것이 좋은지 오전엔 네일 숍에 가야 한다며 오후로 약속을 잡았다. 이번에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새로 칠한 그녀의 손톱이 백화점 쇼윈도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연희의 말로는 오늘은 바쁘고 중요한 날이었다. 신상품이 많이 나오는 날이라나. 드레스 룸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새 옷이 필요한 연희의 왕성한 소비 욕구는 나에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생명력이 있는 여자다.

“서윤아, 이건 어때?”

섹시한 블랙 홀터넥 원피스를 입었다가, 화사한 남색 꽃무늬 원피스로 갈아입은 연희가 피팅 룸에서 나와서 포즈를 취했다. 보통은 어울리는 옷을 사기 위해 쇼핑을 하겠지만, 연희의 경우는 어울리는 게 너무 많아 그중에 정말 갖고 싶은 것만 추려 내는 게 일이었다. 남색 꽃무늬 원피스는 청순해 보여 잘 어울렸다. 연희의 파란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이 너울대는 원피스 자락 위로 움직였다.

“짠.”

그녀가 한 바퀴를 다 도는 순간 등이 다 파인 디자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동생의 미니스커트를 본 오빠의 심정이 이런 걸까.

“너무 노출이 심하지 않아?”

“손님, 요즘 바캉스 룩은 다 이만큼은 입어요. 고객님은 몸매가 예쁘셔서 특히 잘 어울리시네요.”

“얘가 이렇게 보수적이라니까.”

바로 대꾸하는 여직원과 연희였다. 보수적이라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연희는 내가 저번 주만 해도 민준과 무슨 일을 했는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연희는 내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거 사고 세트로 모자랑 신발 보러 가면 되겠다. 이거랑 이거, 이거 다 살게요.”

“네 감사합니다.”

여직원이 화색이 되어 연희가 고른 옷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바캉스는 갑자기 왜?”

“응, 나 오빠랑 제주도 가기로 했거든. 민준 오빠네 제주도 별장.”

“아, 그래.”

가슴이 더욱 무거워졌다. 속에 갑자기 뭐가 얹히는 것 같다. 그 감정이 뭔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내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연희는 카드를 아예 직원에게 맡기고 옷을 몇 벌 더 골랐다.

“저거 남자 옷이에요?”

“네, 저희 브랜드 이번에 론칭 하는 남성복 라인 신상들인데, 이쪽 매장에 몇 벌 가져다 뒀어요. 남자 친구분들이 여자 친구 옷 보러 와서 많이들 같이 사 가세요.”

“이거 괜찮네. 재단도 잘빠졌고. 서윤아 너 이거 입어 봐.”

“난 됐어. 옷 필요 없어.”

“왜, 너 요즘 입던 것만 입는 것 같은데. 옷이 예뻐서 피팅한 것 보고 싶단 말이야. 응? 입어 봐.”

나는 연희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나는 피팅 룸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단추를 채우는데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의 목소리였다.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회사 들렀다 오느라.”

나는 몸을 굳혔다. 민준이 여기 오는 줄은 몰랐는데.

“서윤이 안에서 옷 입어 보고 있어.”

“그래, 옷은 좀 샀어?”

민준은 퍽 다정한 남자 친구임이 분명하다. 내게는 늘 차가운 말투인데. 연희를 대하는 말투는 한층 누그러진 말투다. 물론 감정의 고저 없이 나직한 어조는 여전했지만. 어쨌든 둘이 주고받는 말들은 평범하고 달콤한 연인 같았다.

하긴 오늘은 토요일이고, 벌써 식사 시간이니 남자 친구를 부르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나는 작게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연희가 고른 옷은 그레이 톤의 청 셔츠에 검은 바지였는데 재단이 정말 잘빠지긴 해서, 마른 내 몸도 괜찮아 보이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밖으로 나가며 민준에게 태연한 척하려 노력하며 인사했다. 연희가 나를 보고 감탄했다.

“뭐야, 이 옷 진짜 잘 나왔다. 완전 잘 어울려, 서윤아.”

“정말 잘 어울리네요.”

민준이 연희 말을 거들었다. 원민준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온몸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시선이었다. 알몸도 몇 번이나 본 사인데 굳이 옷 입은 걸 저렇게 쳐다볼 이유는 뭔가. 나는 정말로 이 상황이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에게 묶이는 일 만큼이나. 언뜻 본 가격표로는 이 옷 가격이 상당하던데, 그래서인지 점원들이 열성적으로 거들었다.

“어머, 손님 혹시 모델이세요? 정말 체형 좋으시다. 너무 잘 어울려요.”

“서윤아, 이거 내가 사 줄게.”

“내 옷을 네가 왜 사 줘. 난 됐어. 옷 갈아입고 나올게. 너 신발 보러 간다며, 그거나 보러 가자.”

서연희 고질병인 억지로 선물 떠안기기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얼른 옷을 다시 갈아입고 나왔다. 갈아입은 옷은 바로 점원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옷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점원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연희는 마지막까지 뭘 살지 고르지 못하고 이걸 빼고 저걸 빼고 하며 원 이사의 의견을 물었고, 원민준은 다 괜찮다는 성의 없는 대답으로 그녀의 빈축을 샀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계산하는 내내 여직원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원민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을 엿보는 엑스트라가 된 기분이다.

결국, 민준은 연희가 고른 모든 원피스를 다 사 주었다. 눈치 빠른 여직원들이 계산을 위해 미리 맡아 놓고 있던 연희의 카드를 살짝 돌려주었다. 민준은 일반인이 발급받기 힘들어 보이는 카드로 모든 옷을 계산했다. 다음 순서로 당연하게도 연희의 짐꾼 경력 10년이 넘는 내가 짐을 들기 위해 다가갔다.

“서윤 씨.”

원민준이 내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같이 계산했습니다. 받으세요.”

나는 힐끗 쇼핑백 안을 보았다. 내가 아까 입어 본 바지와 셔츠가 들어 있었다. 나는 기분이 불쾌해졌다. 연희 옷을 사 주는 건 당연한 일이라지만 내 옷까지 사 줄 건 뭐란 말인가. 그가 걷기 시작하자 나는 얼른 따라갔다.

“저기, 제 옷은 됐습니다. 환불하세요.”

민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는데, 나는 해석할 수 있었다. 이게 건방지게, 이런 표정이다. 나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서윤아, 그냥 받아. 오빠 아니면 내가 사 주려고 했어.”

우리 오빠 돈 많아, 라는 태도로 연희가 얼른 치고 들어왔다. 차라리 연희가 사 주는 거라면 몰라도 나는 정말로 그에게서 상하의 합쳐서 78만 원 하는 옷을 받을 이유가 없다.

“정말로 됐습니다. 원민준 씨가 왜 제 옷을 사 줘요.”

원민준이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후환이 두려웠지만, 꾹 참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연희고 뭐고 본성을 드러낼까 나는 긴장했다. 민준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 회사에 있는 동안 연희랑 쇼핑도 같이 해 주셨잖습니까, 그리고 정말로 잘 어울렸어요. 그래서 사 주는 거니 부담 갖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맞아. 정 싫으면 내가 오빠한테 옷값 줄게. 그럼 됐지?”

서연희, 이 백치 같으니. 나는 더는 그에게 강하게 말할 기운을 잃고 연희의 쇼핑백을 드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목마르다고 해서 우리는 백화점 라운지 카페로 올라갔다. 천하의 서연희라도 원민준을 쇼핑 뺑뺑이에 돌릴 수는 없는 모양이다. 오늘의 쇼핑은 이걸로 끝날 기미가 보였다. 밥을 안 먹고 가면 연희가 난리를 칠 테니 밥만 먹고 나면 나는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라운지의 전면 창 위로 밝은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오빠,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그때 연희가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초조함에 몸을 떨었다. 연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민준의 표정이나 몸짓이 미묘하게 변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태도도 비굴하게 변한다. 나는 각설탕만 바라보며 초조하게 빨대로 음료를 휘저었다.

“서윤 씨.”

“네, 네.”

“선물이 맘에 안 들어요?”

“아니요.”

“연희보다 옷을 적게 사 줘서 마음이 상했나?”

“아니에요, 받을 필요 없는 거라 그렇습니다. 제가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

“빚은 싫어서요?”

“아? 네.”

“알 것 같네요.”

원민준이 그렇게 말하고 커피 잔을 들어 마셨다. 나도 모르게 커피 잔의 잔상을 따라갈 만큼 우아한 동작이었다. 그는 여전히 무섭고 잘생겼다.

“서연희 말입니다.”

“…네?”

“처음에 만났을 땐, 서연희가 그쪽 물주인 줄 알았거든요. 서연희가 주야장천 끼고 다니는 오메가라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깟 옷 한두 벌 가지고 곧 죽을 개복치처럼 날뛰는 걸 보니 확실히 아니네요.”

개, 개복치?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벙긋거리는 나를 보며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민준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뺨을 손등으로 찰싹 때렸다. 강한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고 외려 강아지나 아기를 혼낼 때의 동작과도 비슷했다. 어쨌든 주말 백화점에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게, 뭐… 뭐….”

나는 너무 당황해서 계속 입만 벙긋대고 있었다. 연희가 보면 어쩌려고.

“잘 어울려서 이걸로 끝난 겁니다.”

“…네?”

“오늘 옷이요, 잘 어울렸다고요.”

“…….”

나는 그 말에 계속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제 내가 원민준에게 받은 옷 쇼핑백을 꺼림칙한 기분으로 끌어안고 돌아가고 나서, 민준은 늦도록 연희와 데이트를 했다. 연희와 거의 모든 일상을 공유하는 나는 둘의 연애 사정을 지나칠 정도로 잘 알았다. 나는 그 커플의 데이트 사정을 들을 때마다 연희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 당장에라도 민준이 그만두자고 하면 나는 기쁘게 이 관계를 그만둘 수 있다. 애초에 그에게 약점을 잡혀 다리를 벌린 것이 일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1개월이 지나고 이제 3개월째가 되자 나조차도 확신이 없어졌다. 공포나 껄끄러움 같은 마이너스적인 감정에도 사람은 쉽게 중독되는 것이다. 그에게 당하는 일들은 싫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 큰 쾌락이었다.

“하아….”

어쨌든 서글프게도 일요일은 왔다. 일요일은 약속대로 원민준 이사를 만나야 했다. 직장인에게 일요일을 이렇게 싫어하게 만들다니 정말 너무 못됐다 싶었다. 거기다 친절하게 외박 준비까지 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 원민준 이사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나는 문자를 통해 집으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민준의 집은 회사에서 가까운 부촌의 펜트하우스였다. 그와 몸을 섞은 지 3개월 정도 되었지만, 그의 집에 가 본 적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호텔이 마음이 편했는데, 그의 집까지 제 발로 걸어가려니 사자의 아가리에 얼른 물어 주세요~ 하고 기어들어 가는 초원의 톰슨가젤이 된 기분이었다.

그것도 나는 치약과 칫솔에 갈아입을 속옷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갔다. 민준이 외박 준비를 해 오라면 해야 했다. 이왕 안된 팔자면 양치질이라도 잘 챙겨 하는 안된 팔자가 낫지 않는가.

“들어와요, 서윤 씨.”

민준의 시작은 언제나 참으로 고상했다. 나를 발가벗겨 몇 번이나 때릴 남자이지만 나를 맞이해 주는 모습은 평온한 데다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주말이라 편안한 차림인 그는 여직원들이 보면 이사님은 정장 아닌 모습은 더 잘생겼다고 하고 난리 칠 만큼 멋졌다. 그의 집은 드라마에서 보던 펜트하우스보다 넓었다. 그리고 고급스럽게 세팅되어 있었다. 늘 현실이 드라마보다 화려한 법이라니까.

“점심은 먹었습니까?”

“네.”

“잘했네요, 그래도 배고파지면 꼭 말해요.”

“네, 그럴게요.”

“오늘 뭐 하기로 했는지 기억해요?”

“네….”

벌써부터 귓가가 홧홧해졌다. 민준은 나를 묶고 싶어 하고 있었다. 묶는 거든 욕질을 하는 거든 민준이 나와 같은 남자 오메가에 어떤 갈급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신기하다.

어쨌든 내가 어떤 난리를 치든 이 관계는 오래가지 않고 끝날 것이다. 그와 같은 남자가 한 오메가에게 오래 머물 리도 없거니와, 또 기가 약한 것 외에 딱히 내가 우성 알파들의 마음을 오래 끌 부분은 없다. 나는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금세 끝날 거다, 하는. 벌써 그게 3개월째이긴 했지만.

“묶어 주시는 날이라고….”

“서윤 씨.”

“네.”

“서윤 씨가 교육 수준이 높지 않고 또 학습 능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번 주 서윤 씨가 보인 행동들을 보면 그간 배운 걸 다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태도가 건방지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그는 조곤조곤 차분히 말했다. 그와 동시에 주마등처럼 지난주의 나의 ‘건방진’ 행동들이 떠올랐다. 연희 앞에서 옷을 받을 수 없다며 반항했던 일, 사무실에서 빚지는 건 싫다고 말대꾸했던 일, 회사에서 그를 무시하고 도망갔던 일….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자진해서 민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학습된 패배주의는 언제나 내게 좋은 핑계였다.

“네, 주인님, 교육해 주세요.”

“그게 아니죠. 오늘 뭐 할 거라고 했죠?”

그의 고저 없는 단정한 말투에 약간의 짜증이 서렸다. 나는 그가 원하는 바를 향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주인님, 오늘 저를 묶어 주시고…. 또 벌을 주세요.”

이번에도 정답이었다. 나는 그의 기분을 푸는 데 영 재능이 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즐겁겠죠?”

“네, 정말 즐거울 거예요.”

나는 그를 따라 마주 웃으려 노력했다. 즐거울 거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정말로 쾌락을 느낄 수 있을 거다. 그 또한 지난 3개월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리라. 원민준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 뺨을 만지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가늠하듯 나를 훑어보았다. 이 물건이 혹시 고장 난 건 아닌지 의심하는 소비자 같은 눈빛이었다.

더 괜찮은 오메가를 찾을 기회가 많았을 텐데. 나를 이렇게 데려다 앉혀 놓고 사람을 또 의심할 건 뭔가. 내가 이상하든 말든 민준은 곧 서연희와 제주도에 다녀올 텐데.

“어디 아픕니까?”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오늘따라 마음이 과하게 불편한 것을 빼고는 괜찮았다. 벌써 심장이 뛰고 속이 조금 이상했다. 아예 점심을 거르고 오는 건데.

“벗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준의 앞에서 옷을 하나씩 벗었다. 이미 몇 번이나 보인 알몸인데도 오늘따라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옷을 다 벗고 나자 그는 카펫의 한가운데로 나를 이끌었다. 초여름인데 에어컨을 켜 놓아 약간 추웠다. 그가 나를 살피더니 일단 에어컨 온도를 높였다.

민준은 묘하게 배려심이 있어 늘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흔들어 놓았다. 심한 일을 당해도 사실은 다정한 사람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래서야 나도 원민준 이사님 팬인 여직원들과 다를 바 없다. 특히 이사장을 대상으로 할리퀸 망상을 하는 팬들 말이다.

나는 민준이 지시하는 대로 무릎으로 앉은 채 팔을 뒤로 돌렸다. 그는 내 몸을 천천히 살폈다. 새로 생긴 자국이나 상처는 없는지, 검사하는 과정이다. 그럴 때면 마치 내가 원민준이 구입한 소비 물품이 된 것 같아 뱃속이 뒤틀리며 오싹해졌다.

“저번처럼 긁힌 자국은 없네.”

민준이 낮게 속삭였다. 이 남자는 내 몸에 자기 허락 없이 상처나 흠집이 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어쩌다 긁힌 상처가 있었다는 이유로 매를 맞은 적도 있을 정도다.

“시작할게요.”

어느새 민준이 밧줄을 들고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양팔을 뒤로 돌려 묶고 단단히 결박하기 시작한다. 두 손목을 겹쳐 사극에 나오는 죄인처럼 팔목을 접어 올려 뒤로 묶는다.

그는 악기라도 조율하는 것처럼 아주 섬세하게, 천천히 움직였다. 민준이 나를 묶는 방법은 단순하게 칭칭 나를 감아 버리는 작업이 아니었다. 항상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나를 묶곤 했다. 팔을 완전히 뒤로 돌려 올려 묶는 데만 3, 4분의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원민준이 밧줄을 내 목에 걸었다. 민준이 나를 위해 준비한 밧줄은 아주 부드러운 재질이었다. 몸에 착 감기면서도 부드럽게 죄여 왔다. 어쩌면 민준이 어느 정도 나를 봐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격적으로 고문하면 이런 부드러운 밧줄은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차라리 민준에게 불려 오는 이 시간이 아릿한 쾌감의 시간이 아니라 아픔만 가득한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 시선에 배 속이 아프지 않을 텐데.

이렇게 아랫배가 조여 오는 감각은 없는 편이 나을 텐데,

밧줄이 감기자 나는 바로 히익, 하며 숨을 내쉬었다. 목이 졸리는 건 질색이다. 원민준 이사가 목을 조르는 기호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민준이 그런 나를 보더니 목에 걸린 밧줄을 더 느슨하게 풀었다. 두세 번 간격을 가늠하며 부드럽게 풀었다 다시 매듭을 조이고 다시 감아올리는 그 손길이 퍽 다정했다. 그냥 아프게 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할 텐데. 차라리 그런 강압이 내겐 더 친절한 일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가끔 나는 그의 이상한 다정함이 불편하다.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요. 이대로 몇 시간은 있어야 할 테니까.”

“네.”

나는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처음 묶여 오래 방치당했을 때는 너무 두려워서 민준을 원망하고 신음 소리를 냈었다. 나는 이제 이런 면에선 어느 정도 그를 신뢰한다. 안전 감각이 마비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굳이 여기서 날 교살해서 한강에 내다 버리기엔 그는 너무 잃을 게 많았다.

“윽….”

이어 그가 밧줄을 내 가슴에 돌려 감았다. 나는 작은 탄성을 냈다. 밧줄이 가슴 아래 살을 옥죄는 감촉이 고통과, 약간의 달콤함으로 느껴졌다.

그와 이런 관계가 되고 나서 몇몇 하드하다는 SM 야동을 찾아보았다. 이를테면 이렇게 여자가 밧줄로 묶이거나 스팽킹을 당하거나, 그걸 여러 명과 하는 거. 동영상 안에서 여자들이 괴로운 듯 소리를 지르면서도 교성을 섞어 헐떡였다. 그러나 어느 동영상에서도 내가 원민준에게 겪는 것과 같은 것을 하는 야동을 본 적이 없다.

이를테면 내 몸 전체를 결박하는데 20, 30분이나 되는 시간을 신중하게 쓰면서 내 온몸을 꼼꼼히 살피는 작업 같은 것 말이다. 그것도,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무슨 도자기 같은 것을 보는 눈으로 나를 살핀다. 이만큼 정성스럽게 피학자를 묶는 가학자는 없을 것이다. 보통 결박 후에는 그와의 성관계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나를 이렇게 살피는 그의 행동은 성욕과는 아예 상관없는 일종의 예술 작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몇 겹으로 겹쳐져 다시 매듭이 지어진다. 마치 거북이 등껍질처럼 몸이 밧줄로 여러 등분되어 밧줄에 의해 억죄였다. 마치 몸의 부위를 하나하나 영역 표시를 한 것처럼 되었다. 원민준이 큰 손으로 내 허벅지를 잡고 벌렸다. 나는 부끄러움을 잊은 채 그의 리드에 따라 허벅지를 열었다. 밧줄이 가랑이 양쪽을 관통하여 살이 벌어질 만큼 꽉 조여 왔다.

예술 작품만큼 정교하게 하나하나 지어지는 매듭을 보면 민준이 어디서 이런 걸 배웠는지 궁금했다. 아마 그를 거쳐 갔을 수많은 오메가들의 몸을 묶으며 익혔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어쨌든 나를 다루는 그의 손길은 아주 진중했고 차분했다.

이러한 성관계가 정상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나는 이 순간이 괴롭지만은 않았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진지한 성적 대상이 돼 본 적 없는 매력 없는 오메가인 나조차, 공들여 대할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타고난 나의 애정 결핍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마저 타인의 관심으로 받아들이며 기쁜 듯 허덕였다. 민준이 비정상이듯 나 또한 여러모로 정상은 아니었다.

공들여 상체의 매듭을 마무리하고 나자 그가 커다란 쿠션을 깔아 주고 그 위로 상체를 대고 옆으로 눕도록 지시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시를 따라 누운 채 허벅지에 힘을 풀었다. 몸을 모로 누이자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긋해졌다.

원민준이 잠시 시간을 두고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허벅지와 종아리를 하나하나 밧줄로 움켜 묶었다. 피가 통하지 않는 허벅지가 층층이 도넛처럼 나뉘어 엮였다. 이렇게 전신을 공들여 묶고 나면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나무토막처럼 늘어져 그의 다음 지시만을 기다리며 순종적으로 민준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원민준은 거실에 미리 마련해 둔 전신 거울을 내 쪽으로 끌고 왔다.

“다 됐어요. 아픈 곳은 없습니까?”

그의 다 됐어요, 하는 말은 일상적으로 해야 할 작업을 마쳤다는 투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밧줄이 온몸을 옥죄어서 빈말이라도 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견딜 만은 했다. 민준은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꼼짝할 수 없었으므로 온몸을 그에게 내맡긴 채 완전히 안길 수밖에 없었다.

“잘 봐요.”

민준은 전신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내가 보게 만들 셈인 듯했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보, 보기 싫어요.”

“부끄러워요?”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공들여 묶어 준 내 모습이 천하고 추할까 두려웠다. 묶이는 동안 다정한 그의 시선에 달구어진 내 몸은 어떤 모습일까.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마치,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보는 것 같은 민준의 시선 다음에, 현실의 나 자신을 직접 거울을 통해 확인하는 게 싫었다.

“직접 봐요. 거울 속이요.”

원민준이 숙인 내 고개를 뒤에서 가볍게 들어 올려 고정시켰다. 나는 홀린 듯 거울 속에 비친 민준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거울 속 한 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나, 나의 얼굴.

묶인 내 몸은 마치 바짝 마른 통나무 한 짝처럼 뻣뻣하게 그의 품속에 안긴 채 서 있었다. 내 온몸을 질서 정연하게 결박한 밧줄은 몸의 중요한 부위 어떤 곳도 가려 주지 못했다. 밧줄 아래 내 음부의 섬모까지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다 벗은 것보다 훨씬 음탕한 모습이다.

“진짜 예쁩니다, 그쪽….”

나는 숨을 들이켰다. 뱃속이 심하게 당기면서 아파 왔다. 내 추악한 속을 들킬 것 같았다. 민준이 그대로 내 어깨에 입술을 내렸다. 닿은 입술부터 어깨가 따뜻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서 있기 힘들어요.”

나는 시선을 외면하며 겨우 속삭였다. 내 모습이 정말로 수치스러웠다. 민준은 내가 놀랄까 봐 염려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나를 푹신한 카펫 위에 눕혔다. 카펫은 모피처럼 부드러웠고 푹신해서 갑자기 쓰러져도 뇌진탕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사진 찍을게요.”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이 내 사진을 찍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몇 번인가 내 결박된 뒷모습이나, 체벌당한 후의 발개진 몸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얼굴은 안 돼요, 나오지 않게 해 주세요.”

나는 작게 덧붙였다. 이토록 공들여 작업했다면 사진 기록을 남기고 싶은 것도 이해는 했다. 모든 취미 활동은 결국 남는 게 사진이니까. 그렇다고 민준이 프라모델 마니아 블로거처럼 조립 완성 사진을 자기 SNS에 올릴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랬다간 그가 사회적으로 더 잃을 게 많았다.

“카메라 새로 샀어요, 서윤 씨 찍으려고.”

그가 DSLR을 꺼내자 나는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가 몸에 힘을 풀었다. 보통은 동물이나 나무, 꽃 같은 걸 찍는 게 건전한 취미 활동이겠지만, 나와 그 둘 다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찰칵하면서 플래시도 없이 카메라가 내 몸을 찍었다.

원민준이 조심스럽게 나를 일으켜 앉혔다. 나는 소파에 강아지처럼 머리를 기댄 채 앉아, 묶인 두 다리를 모아서 접은 채 한쪽으로 두었다. 꼭 인어 공주 같은 자세다. 나와 같은 인어가 있다면 공주라는 말은 못 붙일 것 같지만.

“으….”

민준에게는 등을 드러낸 자세였다. 내 엉덩이 골 사이를 보는 그의 눈빛이 느껴졌다. 밧줄 사이로 눌린 내 살들이 음란하게 느껴진다. 엉덩이 살이 눌리며 드러난 구멍 속에 시원한 바람이 닿았다. 내 귀가 붉어졌다. 나도 모르게 염치없는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내 뒷모습과 여러 겹으로 결박되어 뒤로 돌려진 팔 사진을 찍었다.

내 뒷모습 사진을 충분히 찍은 후 그가 카메라를 내렸다. 몇 장의 사진 촬영이 끝났을 무렵 내 귓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민준의 칭찬이 이어졌다.

“잘했어요.”

민준이 다가와서 뒤에서 내 귀를 쓸었다. 내 피부가 더욱 달아올랐다. 얌전히 잘 있었다는 의미로 그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서윤 씨가 싫어하는 건 알지만, 얼굴이 나오게 한 장만 찍어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민준이 그 중저음의 목소리로 나긋이 속삭이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지금껏 얼굴이 나온 사진은 한 번도 찍어 본 적 없었다. 지금도 그에게 잡힌 약점들이 있는데 굳이 더 약점을 늘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말 원하는 듯 날 보는 그의 차분한 눈동자를 보자 거절하기 힘들었다.

…얼굴이 나온 사진 한 장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민준이 변태에 무서운 사람이긴 하지만 플레이를 할 땐 내게 늘 다정했다. 그가 허락을 구하면서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내 마음을 움직였다. 거절하기 무섭기도 했다. 내가 저번 주에 버릇없이 군 일이 많아서이기도 했다.

“사진, 어디 올리고 그러실 건 아니죠?”

따먹은 오메가의 사진을 공유하면서 즐기는 질 낮은 알파들도 많다고 했다. 그들에게 있어 오메가는 너무 먹기 쉬워서 새로울 것도 없는 기호품이라고 했다.

원민준이 내 말끝에서 희미한 동의를 읽고 작게 웃었다.

“누구든 보면 가만히 안 둘 겁니다, 나만 볼 거예요.”

민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카메라의 초점을 조정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려 뷰파인더를 응시했다.

찰칵.

민준이 셔터를 눌렀다. 약속한 대로 단 한 장뿐이었다. 그 한 장을 찍고 나자 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구속된 채로는 앉아 있는 것만 해도 고역이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몸을 옭아맨 밧줄들이 파고든다. 그것은 달콤하기도 했고 고통스럽기도 한 감각이었다. 이대로 크게 흥분하면 그에게 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나는 호소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민준이 빠르게 내 의도를 눈치채고 나를 다시 옆으로 눕혀 주었다. 사진을 찍게 해 줘서인지그는 기분이 흡족해 보였다. 원민준이 쿠션을 가져와 자신의 무릎에 대고 내 머리를 얹었다. 달콤하고 다정한 시선이 내 이마에 닿자 나는 전율할 것 같았다.

민준이 다정하게 이마를 쓸면서 느릿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 오빠랑 제주도 여행 가기로 했어.’

그의 시선 위로 연희가 오버랩 된다. 그는 연희와의 잠자리에서도 이렇게 다정한 눈빛을 보일까? 어쩌면 그녀와는…. 내가 알기로 연희와 그는 아직 잔 적이 없다. 연희가 직접 말한 적 있다. 아직 확신이 안 서서 잠자리는 안 했다고, 그러나 실제로 잤을지 아닐지… 그런 일은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한 번의 주말만으로도 바뀌는 것이 남녀 사이였다. 이번엔 단둘이서 여행까지 간다고 하니까, 분명히, 틀림없이… 연희와 그는 잘 것이다. 원민준은 내가 좋아하던 여자, 서연희와 동침할 때도 이런 눈빛을 할까. 가슴이 저미듯 아팠다. 그가 내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서윤 씨는 모를 겁니다, 이렇게 묶이면 서윤 씨가…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원래 이렇게 말해 줘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니요.”

대답이 겨우 1, 2초 만에 돌아와서 나는 민준이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긴 했는지 궁금해졌다.

“보통은 아닙니다.”

민준이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저는 장기적인 관계는 선호하지 않아요.”

약간 의외였다. 별걸 다 궁금해한다는 듯 민준이 내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렸다.

원민준은 항상 나를 결박하여 무력하게 만들고 나서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자상하게 나를 돌봐 주었다. 꼼짝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나를 좋아했다. 자신보다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이 차이 나는 오메가, 그리고 그 오메가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나서야 보이는 동정 같은 자상함. 그리고 애인도 친구도 아닌 상대에게 가학당하며 위로를 받는 나.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코미디였다.

지금 내 머리는 쿠션에 부드럽게 얹혀, 그의 무릎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계속 이마를 쓸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땐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만져 주기도 했었다. 줄곧, 나는 정말로 외로웠다. 그러나 나에겐 가족이든 애인이든 생기는 건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다정하게 만지며 살피는 게 너무 좋아서, 나는 이럴 때면 원민준과의 관계도 끔찍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식물처럼 눈만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저기, 이런 어디서 배웠어요? 이렇게… 잘 묶는 거요.”

잘 묶는다는 표현도 웃기지만, 못 묶는 건 아닐 것이다. 그의 결박은 거의 예술의 경지였다.

“잡지도 보고 동영상도 보고, 공부합니다.”

“공부요?”

너무 뜻밖의 말이라 나는 원민준이 싫어하는 일을 하나 더 했다. 말대답. 이게 공부씩이나 해야 하는 일인가? 그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 건가?

“잘못하면 몸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고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괴롭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던 말인가….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보고 원민준이 어이없다는 듯 홍채가 검은 눈동자를 찌푸렸다.

“서윤 씨는 이 관계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아무나 묶고 싶어 하는 종류의 변태는 아닙니다. 괴롭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요.”

“몰랐어요.”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가끔 그가 나를 뭐라고 할까, 그럴 필요 없는데 성의 있게 대해 준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건 처음이라 정말 몰랐어요.”

민준이 천천히 내 몸의 실루엣을 쓸었다.

아무나가 아니었구나, 나는. 귀가 다시 홧홧해졌다. 그가 손끝으로 둥그렇게 내 귓바퀴를 쓸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만지든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깃털처럼 가볍게 만져지는 것만 해도 굉장히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부끄러우면 귀부터 발갛게 되는 거 알고 있습니까?”

“…그래요?”

“처음엔 묶은 다음 마스크를 씌워서 호흡을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서브(Sub)의 감각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본 것 같아요, 인터넷에서….”

얼굴을 다 가리고 호흡할 수 있는 구멍만 내놓은 마스크, 꼭 고문 도구같이 생긴 것, 얼마 전 검색한 SM 포르노 사이트에서 언뜻 본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귀가 둥글고 예쁘더군요. 늘 여기서부터 빨개져서, 천천히 얼굴이 물들어 홍조가 생겨요. 그걸 계속 관찰하고 싶어서 그만뒀습니다.”

“마스크 같은 건 괴로울 것 같아요. 철 가면도 아니고….”

“안 할게요, 그쪽이 괴로운 건 안 합니다.”

“…네.”

그 말에 마음이 다시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내가, 싫어하는 건 안 하는구나.

나에게만 보이는 종류의 자상함도 있었구나.

특이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원민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위안을 받았다. 그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런 다정함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이 잠시의 시간이 끝나면 민준은 다시 내게 차가워질 것이고, 나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가려워요. 허리.”

민준은 묶인 내 허리를 손톱으로 긁어 올렸다.

“다리도 아파요.”

그는 피가 잘 통하지 않아 이제 보라색 핏줄이 비치고 있는 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기분 좋은 시간을 만끽하며 민준의 무릎에 머리를 묻은 채 낮게 숨을 쉬었다. 이어 방치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루틴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눈 감아요.”

나는 곧 눈에 씌워질 안대를 예상하고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는 내 눈에 검은색 안대를 씌웠다. 그리고 쿠션을 빼고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바닥에서 바르작대는 나를 지켜보는 민준의 보이지 않는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배 속이 오싹해졌다.

“착하게 기다릴 수 있죠?”

“네.”

그가 내 뺨을 톡톡 쳤다. 내가 대답을 뭔가 잘못한 건가? 나는 조금 늦은 박자로 대답했다.

“주인님을 착하게 기다릴게요.”

그가 이렇게 나를 방치하고 나면 돌아오는 시간엔 대중이 없다. 어떨 때는 한 시간, 어쩔 때는 그 이하. 언제 돌아오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래 봐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안다.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카펫에 뺨을 기대고 누워 있으니 귀와 감각이 예민해졌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어두운 세계 속에 드러눕는다.

나는 침묵 속에 혼자 남겨졌다. 약간의 초조함과 긴장감을 남기고. 벌써 민준이 기다려지기 시작한다.

20분, 30분쯤 지났을까.

가려운 곳도 생기고 좀도 쑤셔서 나는 애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환청 같은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울렸다.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 무언가가 방 안을 긁는 소리, 조그마한 아기 소리 같은 것.

이제 환청도 들리는 건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안대 안에서 눈을 깜빡이며 나는 그가 나를 자유롭게 해 주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지났을까. 그것만으로 나는 온통 지쳐서 버림받은 아이처럼 그가 돌아와 나를 풀어 주기를 기다렸다.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혼자 두고 나갔다거나, 몇 번이나 이런 상황에 처해 봤음에도 나는 새로이 불안에 떨었다. 체감상으로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났다. 귀에 계속 우앙 대는 이상한 환청이 들렸다. 나는 두려움을 꾹 참고 그를 기다렸다. 한 시간쯤 다시 지났으려나,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사님?”

거기 있어요? 있겠지? 아무도 없는 건 아니겠지? 이대로 혼자 방치되어 몇 시간이고… 그날따라 너무 무서웠다.

“거기 있어요? 원민준 씨? 아니, 주인님….”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근처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인기척이 느껴졌을 텐데 오늘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온몸을 옥죄는 밧줄이 아프게 느껴졌다.

“주인님? 어디 있어요? 주인님?”

나는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그가, 나 따위는 잊어버리고 나가 버렸으면 어쩌지? 연희에게 급한 연락이라도 와서 만나러 간 건가? 현관문 소리는 못 들었는데.

“힉!”

그때 까슬한 무언가가, 내 허리에 닿았다. 까칠하고 축축한 고슴도치 같은 것. 이어 뭔가 뾰족하고 푹신한 것이 배 위에 닿았고 무언가 아주 작은 물건이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주인님, 이상한 게, 이상한 게 있어요….”

나는 패닉에 빠져 인기척도 없는 그에게 외쳤다. 그가 정말 와 줬으면 했다. 민준이 내게 지금 와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묵직한 무언가가 내 몸 위에 얹혔다.

그때 안대가 풀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민준의 발을 보았다. 양말만 신은 그의 발소리는 카펫 위에서 들리지 않았었다. 부끄럽게도 내 눈은 젖어 있었다. 나는 바로 내 배 위를 확인했다.

“고양이?”

냐-. 새하얀 고양이가 내 배 위에 발톱을 세우고 묵직하게 누워 으앙, 하며 울었다. 기껏해야 고양이 한 마리에 패닉에 질려 울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내 귀가 다시 달아올랐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한 원민준의 눈빛….

“한 시간 반인데, 그걸 못 참습니까.”

“평소보다는 길었잖아요. 정말, 힘들었어요. 안 와 주시는 줄 알고….”

그리고 의무도 무엇도 없는 관계에 죄책감을 느끼며 변명하는 내가 있다. 아까의 달콤함이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나는 서러워졌다.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시킨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잊어버린 줄 알았어요.”

눈가가 계속 젖어 물이 차올랐다. 나도 내가 조금 한심했다.

“평소엔 한 시간이면 오시니까, 그래서… 오실 줄 알고….”

원민준이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아서 치웠다. 내 상체를 거칠게 일으켜 세우는 것이 내가 마치 흥을 깼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원민준은 수동적인 상대를 좋아한다. 평소보다 늦었다고 보채는 귀찮은 상대는 그의 취향이 아닐 것이다. 머리로는 내가 민준의 취향일 의무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실망시켰다는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기다렸는데, 안 와서…. 죄송해요.”

나는 작게 덧붙이며 목덜미를 수그렸다.

“기다렸습니까?”

민준이 팔의 밧줄을 풀면서 나직하게 물었다.

“네, 기다렸어요. 버리고 가신 줄 알고….”

“보고 싶었고요?”

“…네.”

나는 솔직히 수긍했다. 방치당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건 무서웠다. 내 몸을 묶은 밧줄이 한 겹 한 겹 풀려나가고, 몸이 자유롭게 되었다. 묶였던 곳이 아직 욱신거렸다. 그러고도 나는 인형처럼 몸에 힘을 뺀 채 민준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한편으로는 온몸에 한순간에 피가 돌며 부들부들 몸이 떨릴 만큼 후련했다. 환희에 가까울 정도로 해방감이 굉장했다. 온몸에 열이 돌며 붉어졌다.

“흐윽….”

고양이에 겁먹지 않고 그를 얌전히 기다려, 민준이 원하는 방치 시간을 달성했다면 좋을 텐데… 환희와 함께 아쉬움의 감정이 차올랐다. 나는 민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채우고 싶다.

“그러면 말해 보세요, 보고 싶었어요, 하고, 그러면 내 기분이 좀 더 나아질 것 같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내게 가르쳐 주었다. 못할 것 없다. 나는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용서해 주세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버려진 줄 알았어요.”

그 말에 원민준이 낮은 한숨 같은 걸 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번엔 더 잘해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른하게 민준에게 온몸을 내맡겼다. 그가 나를 안아 올려 침대로 데려갔다. 민준의 침실에서는 그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민준이 침대에 나를 눕히자 나는 몰래 그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알싸한 우성 알파의 냄새였다. 감질난다. 나는 그가 내게 다가올 때 호흡을 길게 하는 척하며 그의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내 호흡기를 타고 들어와 마음을 충족시켰다. 오메가들이 우성 알파라면 왜 환장하는지 알겠다. 원민준은 늘 그렇듯 굳은 내 몸을 손수 주물러 주었다. 온몸을 꾹꾹 누르는 그의 크고 기다란 손가락에 나는 황홀한 소리를 내며 그르렁거렸다. 침실까지 쫓아온 하얀 고양이가 문간에 몸을 비비며 우리를 지켜보았다.

“고양이 키우시는 줄은 몰랐어요.”

“여동생 고양이에요. 두 달간 미국 여행 간다고 본가에 맡겨 둔 걸 데려왔어요.”

“동물 좋아하세요?”

내 끈질기고 귀찮은 질문에도 민준은 짜증을 내지 않았다. ‘결박’ 플레이 전후에는 그가 다정하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피가 잘 통하지 않아 보라색이 비치는 내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서윤 씨가 고양이 좋아한다고 연희가 그러더군요. 그래서 저번에 본가 간 김에 데려왔습니다. 중간중간 쉴 때 고양이 데리고 놀라고요.”

나는 너무 놀라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보통 그냥 자는 상대를 이 정도로 배려해 주나?

“고, 고양이 좋아해요.”

나는 놀라서 대답했다.

“애교가 많은 놈이더군요.”

“네.”

“하얗고요.”

“…네, 하얀 고양이도 까만 고양이도 좋아해요.”

민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 내 말이 웃긴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시간 반이든, 두 시간의 결박이든 참아 볼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존감이 낮다는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다. 아무리 모질게 대해도 잘해 준 것만 기억한다고, 맹한 성격이라고. 갑자기 연희가 부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건데. 나 같은 상대가 뭘 좋아하는지도 기억할 정도면 원민준은 연희에겐 더 다정하게 대해 주겠지, 실제로 그는 연희에게 잘해 주는 편이었다.

연희 생각을 하자 다시 마음이 서늘해졌다. 목이 바짝 말라 그를 호소하듯 바라보자 민준이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생수 보틀을 따 물을 주었다. 그에게 받은 물을 마시고 천천히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배고파요?”

“아니요, 아직.”

아닌 게 아니라 입맛이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나는 부은 눈가를 끔뻑이며 그를 지켜보았다. 원민준과의 관계가 끝나고 진짜 연인이 생긴다면 그 사람도 내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줄까. 나 같은 사내가 좋다고 하는 알파가 있기는 할까, 만일 있다면, 다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와 있을 땐 모든 일에 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뭔가를 먹는다든가, 화장실에 간다든가. 그는 그렇게 통제하는 걸 좋아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침실에 딸린 작은 화장실로 갔다. 민준이 나를 따라왔다.

“오, 오늘도예요?”

나는 당황해 작게 물었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목덜미 뒤쪽을 쓸었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르며 속삭였다.

“변기 써도 돼요?”

“써요.”

정말 이 상황은 미친 것 같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민준과 있을 때, 그는 내가 소변을 보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네발로 소변을 보라고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온통 붉어진 채 변기에 소변을 봤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화장실 안에 울렸다. 민준이 그런 내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다했어요?”

“네.”

“뒤처리해야지.”

“네….”

나는 그가 지시하는 대로 물을 내리고 휴지로 뒤처리를 했다. 그리고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었다. 민준이 나를 훑어보며 내 몸을 다시 검사하고 손을 살폈다.

“깨끗하네.”

“…네.”

나는 꼭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화장실 거울 너머로 내 몸을 보자 온몸에 울긋불긋하게 밧줄 자국이 나 있다. 알몸인데도 옷을 입은 것처럼 선정적이었다. 수영장이나 사우나는 꿈도 못 꿀 모습이다. 민준이 나를 부축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나를 눕혀 준다. 약간 비틀대며 나는 침대에 파고들었다. 온몸이 빠듯하게 아프면서도 나른했다.

“서윤 씨.”

“네….”

“내가 서윤 씨를 괴롭히고 싶어서 이 관계를 이어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어느 정도 그리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 씨, 오메가 중에 피학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모든 오메가가 저에게 체벌 받으면서 흥분하는 건 아닙니다. 하물며 제게 묶이는 걸 기뻐할 정도면 서윤 씨도 이쪽에 재능이 있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요.”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작게 항변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여전히 두렵지만 가끔은 기대도 한다.

“알파와 오메가가 이 정도 만났으면 보통 관계의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민준이 고저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눈만 깜빡대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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