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 씨는 독보적인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서연희 같은 여자는 또다시 만날 수 있지만 이서윤 씨 같은 타입은 놓치면 다시 못 만날 것 같으니까요. 와이프감인 여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 독보적인, 그런 관점에서요.”
언뜻 들으면 다정한 듯한데 곱씹어 볼수록 로맨틱한 말은 아니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쉽게 말해 내가 마음대로 다루기 좋다는 뜻일 것이다.
연희같이 예쁘고 똑똑한 여자조차 언제든 다시 사귈 자신이 있지만, 나는 상황이 특이하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변태적인 섹스 플레이를 하면서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상대, 그것도 남자 오메가라는 가치는 그에게도 희귀할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나같이 별로 잘난 것 없는 오메가가 오히려 구하기 힘들다는 말일 것이다.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보통을 초월했다. 예쁘고 똑똑하고 부자다, 라는 서연희를 지칭하는 가치들이나 남자 오메가에 말 잘 듣고 마조히스트 기질이 있다, 뭐 이런 가치도 그에겐 그냥 둘 다 비슷한 의미인가 보다.
부자들은 득실을 잘 따진다고 하니까. 나는 민준만 한 부자도 계산기를 굴린다는 것에 신기할 뿐이었다.
나와 같은 상대를 둬서 그에겐 손해 볼 것이 없다. 아마 그와 나는 성적인 취향이나 궁합이 잘 맞는 편인 것 같다. 매번 나 혼자 느껴서 쩔쩔매고 우는 것이 아니라면 그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영 아니면 만나지 않겠지. 딱히 나는 잘하는 편도 아니니까.
“네, 그런 관점이요.”
민준이 한층 어둠이 걷힌 블라인드 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는 게 그런 거잖습니까.”
“…….”
“뭡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지레 찔려 연희에게 댓바람부터 북엇국까지 끓여다 바쳤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북엇국과 달걀 프라이를 앞에 두고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다.
“아… 너무 맛있어. 서윤아 너 나한테 시집와라…. 아침마다 국 끓여 주면 내가 진짜 너 책임진다.”
“나 국 세 종류밖에 끓일 줄 몰라. 레퍼토리 다 끝나면 소박맞는 거야?”
“괜찮아, 누나가 책임질게. 요리 학원 다니면서 신부 수업이나 해. 요리야 배우면 되지.”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이런 농담은 늘 주고받던 건데 같이 마주 웃으면서도 마음이 따끔따끔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국그릇에 국을 더 퍼 주었다.
“주말에 백화점 갈까? 토요일 어때?”
“아… 토요일은 일정이 있어서.”
토요일은 원민준 이사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살짝 죄책감을 느끼며 거절했다.
“누구 만나?”
“응, 아는 사람….”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호기심 모드로 변한다. 초롱초롱.
“너 역시 요즘 누구 만나지.”
“아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회사에서 아는 사람….”
나는 머뭇머뭇 거짓말을 했다. 아예 쌩 거짓말은 아니었다. 회사 사람 중 아는 사람이 맞긴 맞다. 그분이 이사님이셔서 문제지.
그녀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파고들지 않았다.
“흐응… 요즘 너, 나 모르는 약속이 많다. 이제 시우까지 입국하면 나한테는 시간도 안 써 주는 거 아니야?”
“아냐, 요즘 너랑, 원민준 씨랑 계속 셋이 지냈잖아. 시우 입국하면 셋이 봐야지 왜 네가 소외돼.”
나는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에 하나하나 변명을 달고 있었다. 이전에는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우리였다. 그러나 연희가 민준과 사귀고부터 그녀도 비밀이 많아졌다. 결혼 이야기 때문일까. 그녀가 조금 멀게 느껴졌다.
“뭐 알았어…. 참 서윤아, 너 소개팅 안 할래?”
“응? 갑자기 왜…?”
“저번에 술자리에서 만난 미진 언니가 너 한번 따로 보고 싶다는데.”
미진… 이 누구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몇 달 전에 연희가 데려간 디자이너와 모델 모임이었던가. 거기서 만난 모델 출신 여성 알파였다. 키가 크고 이국적으로 생긴 아름다운 여자였다. 뭔가 고급스러운… 이미지라고 할까, 그런 스타일이었는데.
“할까….”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딱히 못 할 이유는 없었다. 원민준의 특이한 이성관에 따르면 나는 특수한 행위도 받아 주는 효용 가치가 있는 상대일 뿐만 아니라, 민준이 언제든 결혼 전제의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도 진짜 연인을 사귄다고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민준과 성관계를 맺으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상대에게 못할 짓이다. 일단 나 좋다는 상대방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뭐? 정말?”
“아 깜짝이야.”
갑자기 연희가 굉장한 소리를 내서 나는 먹던 국이 목에 걸릴 뻔했다.
“너 진짜 할 거야? 그래 이참에 너도 누구 좀 만나. 야, 이런 나무에도 꽃은 피는구나.”
“…이런 나무는 또 뭐야?”
“모쏠로서의 절개가 너무 깊어서 소나무인 알았는데 우리 서윤이도 꽃나무로구나. 응? 나한테 맡겨.”
호들갑을 떠는 연희의 태도로 볼 때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내 방 내 침대에서 자는 사이, 원민준 이사가 다녀간 일 같은 건.
유독 피곤해 보이는 내 얼굴에서도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안심했다. 그리고 그 안심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는 연희를 위해서라면 다칠 수도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는데, 그런 친구인데 나는 그녀에게 잘못을 하고 있다. 모든 걸 들키면 용서받지 못하겠지.
“기다려 봐, 내가 소개팅 후보자들 아예 포트폴리오 만들어 올게. 넌 찍기만 해. 이게 웬일이야.”
서연희는 아침부터 희소식을 들은 것처럼 호들갑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마주 보고 웃었다. 그 포트폴리오라는 거, 상대방의 합의는 받고 만드는 건지 궁금해진다.
“됐어, 무슨 소개팅은 소개팅. 나 낯가리잖아.”
“엥? 왜에~ 미진 언니라도 만나 봐, 그 언니 완전 쿨하고 집도 부자야. 그리고 그 언니… 남자 오메가 좋아한단 말이야.”
“당연히 알파니까 오메가 좋아하겠지. 여자니까 남자 오메가 선호하겠고.”
“다르지 그건.”
갑자기 연희가 찡그리며 말했다.
“응?”
“남자 오메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여자 오메가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도 있어. 그것도 기호인걸.”
“그래…?”
“뭐, 보통 알파는 베타든 남자나 여자 오메가든 가리지 않긴 하지만….”
그럼 원민준 이사는 남자 오메가를 좋아하는 기호인가? 문득 그의 기호가 궁금해졌다. 원민준 이사 같은 알파 남성은 어떤 성향의 상대든 골라 만날 수 있었다. 오직 알파에게서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오메가와 달리.
민준과는 여러 차례 잤다. 그러나 서로의 취향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다. 주로 그가 이것저것 캐물으면 내가 대답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내가 민준에 대해 먼저 물어본 적은 없었다.
…기회가 있으면 물어볼까.
대화할 기회가 있긴 할까. 주로 만나면 바로… 순식간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어쨌든 안 할래. 상대가 먼저 소개팅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한번 보자고 한 걸 수도 있잖아. 소개팅하라고 밀어붙이면 그 미진 씨라는 사람한테도 실례야.”
연희의 수완이라면 어떤 감언이설을 해서라도 소개팅 자리에 상대를 끌고 나올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정말로 태평하게 소개팅이나 할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아우, 그럼 일단 생각은 해 봐. 알았지? 너도 빨리 누구 좋은 사람 생겨야지.”
“왜 갑자기 애완동물 분양하듯 치워 버리려 그래. 내가 무슨 유기 동물도 아니고.”
“그냥 뭐… 하긴. 우리 서윤이가 애인 생기면 진짜 서운하긴 하겠다…. 나랑 같이 쇼핑도 안 가 주고 너네 집에서 술도 못 마시고….”
연희는 저야말로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서 우리 집에 마음대로 드나든다는 건 잊은 듯했다. 나는 그냥 웃으며 말을 돌린다.
“백화점, 일요일에 갈까? 내가 짐 들어 줄게.”
“응! 같이 가. 일요일 낮에 가자.”
“뭐 또 사려고?”
“민준 오빠 생일이잖아.”
“아… 그래?”
“안 그래도 민준 오빠가 자기 생일 기념으로 같이 일본 여행 가자더라. 아는 곳 있다고 온천 하러 가자고.”
“그래? 좋겠네.”
“응, 너 온천 좋아하지? 같이 가자. 오빠가 생일 턱으로 자기가 여행비 다 낸대.”
…이건 또 무슨.
그냥 남자 사람 친구의 여행비를 진짜 남친이 내게 하는 서연희의 무신경함도 무언가를 초월했다.
“내가 거길 왜 가.”
“같이 가자. 민준 오빠도 너 오는 쪽이 훨씬 재미있데. 오빠 너무 점잖아서 둘이 있으면 지루하단 말이야.”
원민준 씨, 그 사람 안 점잖다고, 연희 앞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지. 나는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오빠가 네 비행기 표까지 다 산다는데? 아마 이미 결제했을걸?”
“내 여권 번호도 모르면서 비행기 티켓을 어떻게 사.”
“미리 결제는 가능하지. 환불도 안 될걸?”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원민준과 서연희 사이에 끼어서 해외여행이라니 이건 무슨 신종 지옥이지. 올해도 내년도 세상은 나한테 녹록하지 않을 전망인가 보다.
여행 가기, 원민준 말 거스르기, 그냥 소나무 되기 이런 선택지가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제일 마지막 걸 선택할 것이었다. 차라리 그냥 나무가 되고 싶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 사람, 생일이 언젠데?”
“이번 달 27일.”
그가 여름에 태어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왠지 겨울에 태어난 사람 이미지였는데.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연희에게 물었다.
“결혼 관련해서는… 고민 중이야? 생각해 봤어?”
모른 척할 수 없어 나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제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연희가 제 풀에 원민준에게 질려 먼저 그를 차 버리는 길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나중에 모든 게 밝혀지면… 똑같이 미움받겠지만 그나마 연희가 민준을 먼저 차 버렸다는 사실이 완충제가 되어 줄 터였다.
“일단 오빠 계속 만나면서 생각해 보려고. 음, 그리고 기회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좀 더 만나 보고.”
“…사귀면서 그러겠다고?”
“너무 나쁜가? 그래도 결혼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잖아, 100% 확신이 들지 않으면 뭐든지 해 보는 거지. 그리고 오빠가 나 좋다고 죽도록 좋아서 쫓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좋을 것 같아 결혼 이야기 오가는 거니까 뭐. …그렇다고 오빠가 싫다는 건 아냐.”
연희가 조그만 볼 가득 밥을 담고 있다 삼키고 말했다. 도무지 이 사람들의 결혼관은 이해를 할 수 없다. 하긴 나야말로 사랑이 가득한 결혼, 같은 걸 꿈꿀 처지는 아니다. 그러니 그들에 대해 평가하는 걸 그냥 조용히 포기할 뿐이었다.
내 처지가 사랑을 모르는 그들을 딱하다 여길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생일 선물은 뭐 사게?”
“어, 옷 살까 하는데.”
연희는 평소 옷을 보는 센스가 좋아서 내 옷도 자주 골라 주곤 했다. 나는 서연희가 원민준에게 사 줄 만한 옷 브랜드들을 머릿속으로 검색했고, 선물 예산이 100만 원 이상이 되리라고 예측했다. 물론 내가 원민준에게 100만 원짜리 선물을 할 여유는 없다.
진짜 그 여행 따라가야 하는 건가. 셋이서 간 여행의 기억이 좋지 않아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았다. 간다고 하면, 나도 선물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하는 건가. 나는 숟가락을 들고 고민에 빠졌다.
***
오랜만이라 출근하기 싫다며 찡찡대는 서연희를 보내고, 나는 평소와 같은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 사건이 많아서 그런지 출근 피로가 극심했다. 어젯밤에 한숨도 자지 못해 나는 퀭한 눈을 하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같은 팀의 서민우 사원이 충남 지사로 4개월간 장기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출장 시즌도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라고 같은 팀 직원들이 떠들었다.
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민우 사원이 저번에 나에 대해 음담패설을 하는 것을 엿들은 이후 내내 그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도 몇 번 서민우 사원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신경 쓰이던 차였다.
그리고 일 잘하고 훈남으로 유명한 알파 신영재 대리는 전략 기획실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원래 신영재 대리는 알파인 데다 엘리트여서, 핵심 부서로 발령받는 것이 당연한 조치라는 평이었다. 다만 인사 철도 아닌데 급한 이동이라, 이게 무슨 일들인지 팀원들이 웅성웅성했다.
평소 친한 김인영 대리가 살짝 귀띔해 주었다.
“우리 팀 대표 이사실에서 집중 마크 들어간대. 핵심 인력 팀인가 뭔가, 비공식적으로 지정했다고 하더라.”
“…인사 팀이 하는 일이 중요하긴 한데, 이제 와서 왜….”
“난들 알아. 자긴 뭐 들은 거 없어?”
“제가 듣는 소식들 출처가 다 김 대리님인데 제가 알겠어요.”
“흐응… 그건 그렇지? 이야기 들은 거 있으면 나도 바로 알려 줄게. 서윤 씨.”
김인영 대리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건 또 뭔지. 요즘 내 일상은 원민준 이사와 사적으로 만나지 않을 때에도 온통 원민준 이사에 관련된 이야기뿐이다.
***
아침부터 민준이 생각나서 하루 종일 멍했다. 다행하게도 바쁜 시즌이 아니었다. 넋 놓은 내 정신으로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업무만 주어졌다. 멍하니 깨작깨작 업무를 시작하자 오전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점심시간 직전에 나는 충동적으로 민준의 이름을 검색창에 입력했다. 을 인터넷 검색 엔진에 검색하자 연예인 파파라치 못지않은 퀄리티의 그의 사진이 떴다. 듣기로 그의 사진을 잘못 공유하면 바로 회사 보안 팀에서 쪽지가 온다던데.
제재를 가한 게 분명한 기사 몇 개만 있었다. , <해외 유학파 재벌 2, 3세대 특집>.
갑자기 우리 사이의 까마득한 거리가 실감 난다. 어젯밤에 그 난리를 쳤다고 해도 민준이 나에게 질리면 나는 아마 접근도 하기 힘들겠지.
혹시 연희와 그가 결혼하면 먼 주변인 A 정도가 되어 눈인사나 주고받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그와 만나고 있는 이상 연희와의 관계도 바람 앞 등불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문득 그의 얼굴이 생각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인터넷 기사 검색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옆자리의 김인영 대리는 점심을 카레로 먹을지 아니면 파스타로 먹을지 진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20분 전을 이런 곳에 쓰다니 나도 참 프로페셔널 궁상꾼이다.
갑자기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김인영 대리가 내 얼굴을 빤히 본다. 그리고 갑자기 열심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내가 상사도 아니고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없을 텐데. 갑자기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척할 건 뭔가. 그러고 보니 요즘 김인영 대리의 태도가 퍽 살가웠다. 또 요즘 팀 내에서 내게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없어 회사 생활이 평온하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눈치를 보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발신인이 원민준 이사다.
…내가 그새 뭘 잘못했나? 오늘 새벽에 분명히 기분 풀린 것 같았는데….
나는 살금살금 나가 비상계단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접니다. 출근했어요?
민준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태연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보이지 않는데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출근했어요.”
- 피곤할 텐데. 출근하지 말고 쉬라고 했는데도.
“…그러면 눈치 보여서… 팀원들한테도 민폐고요.”
- 그런 거 편하게 하라고 민 부장님한테 서윤 씨 잘 부탁한다고 직접 이야기했었는데. 민 부장님한테 잘 보인 줄 알았는데요, 저.
민 부장님은 우리 팀 최고 결정권자인 팀장님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지난주에 그가 우리 팀에 들른 일이 있긴 했었다. 설마 민 부장님에게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한 터였다.
“그래도 평사원이 어떻게 맘대로 쉬어요.”
- 저도 마음대로 못 쉽니다. 평사원이니까 가끔 병가도 낼 수 있는 거죠.
“저기… 저희 팀 그런 분위기 아니라서….”
- 민 부장님께 다시 한 번 부탁해 둘까요?
내 평생 부탁이란 단어가 이렇게 무서운 단어인지 처음 알았다. 나는 매우 열성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기, 별로 안 피곤해서…. 저 괜찮아요. 점심시간에 자면 돼요.”
- 점심시간에 낮잠도 자요?
“네, 자리에서, 잠깐 자요.”
- 턱도 괴고요?
“네? 엎드려서도 자고….”
그는 1, 2초 정도 말이 없었다.
- 두상이 작아서 그렇게 자면 귀엽겠네요.
“…네?”
이건 다음번에 네 두상을 때리겠어 하는 예고인가? 아무리 그래도 머리를 맞는 건 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이건 또 무슨 의미지.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는지….”
- 토요일에 같이 저녁 먹자고요. H호텔에 예약해 둘게요.
“네.”
호텔로 오라는 뜻으로 전화한 건가, 하고 나는 납득했다. 항상 원민준에게 문자로 어디로 오라는 연락을 받곤 했었다. 평소엔 문자가 한 줄 올 뿐이었으니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네, 갈게요. 시간 말씀해 주시면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 그래요, 이번 주 평일 중에 만나서 저녁이라도 먹고 싶은데… 일이 좀 많네요.
꼭 그는 내가 꼭 만나야 하는 비즈니스 파트너라도 되는 것처럼 평화롭게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저녁을 먹는 게 결박 플레이나 뭐 체벌 플레이처럼 그런 종류의 암호 중 하나인가? 저녁이 아니라 나를 먹겠다는 뜻인가?
“…그런데 문자 보내 주시면 되지 왜 전화를… 받고 조금 놀라서요.”
- 우리 사이, 오늘 새벽 이후로 정리된 것 아니었습니까?
“네?”
- 이런 통화가 이상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무래도 원민준과 나는 다른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나는 수화기 너머의 그의 표정이 바로 상상되었다. 설명하자면, ‘이서윤 씨는 지능이 뛰어난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대고 이런 통화가 이상할 사이 맞는데요, 라고 말할 자신은 내게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네, 맞아요, 하고 멍청한 대답을 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나 연희가 속한 세계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논리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 그럼 들어가 볼게요.”
- 네, 그러세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도 그가 몇 초 정도 전화를 끊지 않아 나는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점심 맛있게 드시고요.”
나는 어색하게 직장인 단골 멘트를 남겼다. 점심시간 직전에 다른 직원이나 옆 팀 사람에게 메일을 보낼 때 멋쩍게 붙이는 말 중 하나였다.
- 네, 서윤 씨도요.
나는 한숨을 뱉으며 전화를 끊었다. 통화 한 번 하는 것도 쉬운 사람이 아니다.
***
나는 지금 원민준과 마주 앉아 고기를 썰고 있다. 나는 외계 행성으로 방금 납치된 지구인처럼 멍한 상태였다.
그가 H호텔을 예약해 둔다는 말은 방이 아니라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해 둔다는 뜻이었다.
물론 나와 그의 사이에 대화를 할 공통 주제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식사는 아주 어색했다. 웨이터마저 우리를 묘하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을 따라 줄 정도였다.
“와인 마실래요?”
“네.”
그래도 저녁은 사 줄 모양이었다. 더치페이하자고 할 타입이 아니라 다행이다. 언뜻 본 메뉴판의 가격이 굉장했었다. 요즘 살이 찌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기를 작게 잘라 꼭꼭 씹어 먹었다. 원민준은 내가 먹을 때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잘 먹네요.”
“네, 살 좀 찌려고….”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잘 생각했어요, 운동도 좀 하고. 체력이 너무 약해서 뭘 해도 한 시간을 못 버티니, 데리고 잘지 묶을지 혼낼지 고르기도 힘들어서요. 이서윤 씨 몸.”
“…….”
나는 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포크에 찍힌 고기를 괜히 접시에 비볐다. 아주 부드러운 안심이었다.
“그렇게까지 안 약해요.”
원민준과 같이 있는 것은 체력적인 것을 떠나서, 정신적으로 금방 진이 빠지는 것이 문제였다. 여러 가지 의미로. 나는 말을 돌리기 위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곧 생일이시라고 들었어요.”
결국 나는 연희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그러고 보니 일본 여행 건도 있었다.
“네, 그래요.”
“여행 가자고 하셨다고….”
“여권 있어요?”
“네, 있긴 한데.”
“여권 좀 줄래요? 비서한테 말해서 나머지 일 좀 처리하라고 하게.”
“…꼭 가야 하나요? 커플 여행에 제가 끼는 것도 이상하고… 그리고 갑자기 그렇게 여행 가는 것도… 휴가도 그렇고, 비용도….”
“커플 여행이 아니게 되면 따라오겠단 말인가요?”
그 말에 등골이 오싹했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연희를 정리하죠’ 사건이 다시….
그를 만나는 게 심적으로 힘들어 그만하자고 부탁했을 때 그는 바로 연희와 헤어지고 모든 걸 털어놓자고 말했었다.
“…그건 아니고요.”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요. 솔직히, 서윤 씨가 먼저 돈 이야기 꺼내는 거 기분 좀 그렇습니다. 나 가고 싶은 데, 내가 가고 싶은 곳 같이 가자는데 설마 그것 돈 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도….”
“같이 가요. 같이 가서 좀 쉬고 싶네요. 요즘 피곤할 일이 많은데 서윤 씨까지 속 썩이니 좀 릴렉싱 하고 싶어요.”
“제가 속을 썩이나요?”
나와 그가 무슨 사이인데 감히 내가 속까지 썩인단 말인가. 민준은 살짝 찡그렸다가 다시 희미하게 미소 같은 걸 지었다.
“꽤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와 서윤 씨요. 그리고 서윤 씨가 그 동안 저의 기대를 채워 준 적은 딱히 없잖습니까.”
“죄송해요.”
그러고 보면 민준과의 정사에서도 늘 제멋대로 나가떨어졌고, 수동적으로 굴었다.
어제 새벽엔 밤새 말다툼 비슷한 것도 하고. 그러니까 그게 문제고 고민이었다. 도대체 왜 원민준이 나에게 시간을 쓰는지. 어쨌든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건 내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나는 일단 작게 사과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쓰이는 데는 대중이 없습니다, 서윤 씨가 이런 사람이다, 저런 사람이다 해서 마음이 쉽게 덜 가고 더 가고 하는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억지로 바뀌려고 하지 마세요. 이서윤 씨는 지금이 제 취향입니다.”
잘못하면 로맨틱하다고 착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와인을 평소보다 빠르게 홀짝이며 주변을 살폈다. 알파와 젊고 예쁘장한 그들의 일행이 많이들 쌍으로 앉아 있었다. 어쩌면 나도 그런 커플들 중 하나로 보일지도 모른다.
전에 연희가 졸라서 같이 간 백화점에서, 연희를 따라 VIP 라운지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문간에서 소란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어떤 여자 오메가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색기가 넘치고 예쁜 여자는 처음 보았다.
듣기로는 그녀는 금전적 지원을 해 주던 남자의 줄이 끊겨, 백화점 VIP가 해지되었다고 한다. 그날 라운지에서 VIP 해지 소식을 처음 들었다고, 그래도 계속 드나들던 VIP 라운지인데 직원들이 자기를 냉대하니 모멸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자기를 이렇게 대접하냐며 백화점 직원에게 항의하다 망신을 당했다.
그때 그 여자를 보며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경멸하는 표정을 기억한다. ‘멍청한 오메가 년이’, ‘딱 3년짜리 년이지. …가의 …씨한테 완전 까였대. 애지중지 물고 빨더니 그렇지 뭐, 누가 진지하게 만나’, ‘완전 망신이네’.
나는 퍽 그녀에게 불쌍함을 느꼈다. 알파가 오메가를 안기 위해서는, 딱히 진지하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도 드라마 남주인공처럼 온갖 꿀은 다 발라 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난동을 부리던 그녀에게 상대 남자가 얼마나 달콤하게 잘해 줬을까. 그녀에게 질리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그녀처럼 화려한 미모의 여자 오메가도 아니었다. 심지어 밤 11시 로맨스 미니 시리즈 드라마만 해도 여주인공은 항상 가난하고 예쁜 베타, 혹은 오메가였다.
나 같은 남자 오메가는 나와도 여주인공의 게이 친구 같은 역할로나 나올까 말까였다. 그가 나에게 조금 잘해 준다고 해도 그것은 그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일 테다.
나는 그에게 네, 라고 대답하며 와인을 마셨다. 약간의 떫은맛 외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면 남자와 호텔방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
식사를 마치고 나는 원민준이 미리 잡아 둔 방으로 올라갔다. 유리 엘리베이터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별처럼 흔들렸다. 와인 때문에 취기가 올라와서 나는 원민준 옆에 서서 벽을 손으로 짚었다. 조금 급하게 마신 모양이었다.
민준이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려 감쌌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는 못내 부끄러워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어가며 그가 작게 물었다.
“와인에 많이 약한가 봐요.”
“그렇게까진 아닌데… 오늘은 좀 취했나 봅니다.”
“자주 먹여야겠네요.”
나는 약간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 알파들은 오메가를 취하게 하려 한다고 하더라고요.”
“흑심이 있을 경우에 그렇죠. 그러니 어디 가서 술 함부로 얻어먹고 다니면 안 돼요, 연희랑 있을 때 마시는 것도 조심하고.”
나는 문득 민준이 여동생을 가진 오빠라는 걸 떠올렸다. 언뜻 듣기로 고양이를 맡긴 여동생이 있다고 들었다. 여동생에게도 저렇게 잔소리를 할까. 여동생에게도 다정할까. 퍽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말이었다.
방 안은 꽤 화려했다. 그가 나를 침대 앞으로 데려갔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 위에 앉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있는 샴페인 보틀을 땄다. 어느 영화에서 본 라벨의 샴페인이었다. 호텔을 통해 주문했다면 비쌀 텐데. 원민준이 말하는 ‘정리된 사이’라는 건 고가의 샴페인을 사 줘도 돈이 아깝지 않은 사이라는 걸까. 나도 더 많은 걸 요구받게 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그래도 언제 원민준 같은 남자에게 평생 이런 대접을 받아 보겠는가. 방도 예약해 주고, 샴페인도 따라 주고. 나는 전면 창의 야경을 바라보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문득 목이 불편해서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그… 서면으로 남긴다는 거요.”
“네, 변호사가 준비 중입니다. 들어가길 원하는 내용 있어요?”
지난번에 비밀을 지켜 주는 대신, 나는 그가 원하는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내 애원에 그는 ‘그 뭐든지 하겠다’라는 부분을 서면으로 남겨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의 변호사가 그러한 내용의 서류를 작성 중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내용을 선택할 수도 있는 건가? 도대체 뭘 작성하고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저는 제가 원하는 내용 다 넣을 거라서요, 서윤 씨가 원하는 부분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금전적인 부분도 괜찮습니다.”
“신체 포기 각서 같은 건… 아니죠? 그… 장기 팔 때 쓰는 것 같은.”
“저는 서윤 씨의 장기를 팔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여유 있습니다, 거기다, 제 입장에선 서윤 씨의 장기가 건강하고 신체도 건강한 쪽이 훨씬 이득이지요. 가질 수 있는 게 훨씬 많아지니까.”
민준은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잔잔하고 나긋하게 말하는데, 말하는 내용들의 괴리감이 상당하다. 그래서 나는 아 그러시구나, 하고 납득해 버릴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아무튼 이상한 남자다. 이런 표현 방식을 듣고 있자면 무슨 내가 미네랄 같은 자원이 되는 기분이다.
“제가 건강하면 이득인 거네요.”
나는 그의 말을 멍하니 따라 했다. 일단 몸이 건강해야 데리고 자는데 문제가 없다는 건가. 확실히 내가 아플 때도 억지로 할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아프다고 하면 그는 꽤 걱정도 해 줄 것 같다. 그런 묘한 다정함이 있는 남자였다.
“…그 계약서엔 뭘 넣을 수 있는데요?”
“문제의 소지가 될 내용들을 빼고는 다 넣을 수 있어요, 서윤 씨가 넣을 수 있는 건 대부분이 금전적인 지원에 대한 내용이겠지만요.”
“문제요?”
“임신이나, 주식 증여, 주식 작전 매매 같은 거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부자들이 철저하다고는 들었지만,
혹시라도 내가 들러붙어 그런 것들을 요구할까 걱정한 걸까. 그래서 그런 서류를 작성하기를 요구하는 건가?
잠깐이지만 원민준의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 헛된 희망을 가진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왜냐면, 열성 남자 오메가인 내가 아이를 가지는 방법은 우성 알파인 민준을 통하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가족을 가지고 싶었다.
확실히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니까, 부자니까 혼외 자식이 생기는 건 곤란하겠지…. 그냥 잠자리 상대가 책임지라며 결혼이나, 돈을 달라고 요구해도 곤란할 거고.
나는 침울해졌다. 내 표정을 살피며 민준이 내 머리를 쓸었다. 퍽 다정한 손길이었다. 나는 그가 다그친 적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변명을 시작했다.
“…저, 저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 경우 없는 요구나 헛된 기대 같은 걸 하는 타입 아니에요, 그리고 정말, 아무 흑심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저는 지금 회사 다니는 것만 해도 정말 취직해서 기쁘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알아요.”
“그래서 그런 거면 그런 계약서 안 써도 된다고요. 그리고 정말 저는 돈 요구 같은 거 할 생각 없어요. 제가 원해서 시작한 관계도 아니잖아요.”
왜 내가 민준에게 이런 변명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억울했다. 그가 내 얼굴을 보았다.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상처 준 것 같네요.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 부분들은 일반적으로 넣는 사항이니까, 다그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이서윤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이런 게 ‘일반적인’ 일이라니. 알파는 물론 여자 친구 한번 사귀어 본 적 없는 나는 그들의 세계가 신기할 뿐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좁은 세계는 그와는 너무 멀어 보였다. 나는 마지못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화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자자고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그의 성 취향에 대한 것이 생각났다. 민준은 이미 내 입술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할 생각이 가득한 것 같다. 몇 번이나 몸을 섞었는데도, 그가 내게 성욕을 느낀다는 것이 신기했다.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말해 봐요.”
“성… 취향 같은 거요. 저랑 하시는 거… 막 평범한 방법으로 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몇 개를 빼면 보통 커플 사이에서도 하는 일인데요.”
그런데 일단 우리는 보통도, 커플도 아니니까. 일단 거기부터 문제가 있고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입 안에서 그 말을 삼켰다.
“원래 남자를… 묶거나 때리는… 그런 거, 좋아하시는 거예요?”
“남자 오메가와 장기적인 관계를 맺은 건 서윤 씨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걸 좋아하는 건 맞습니다만, 서윤 씨를 고통 주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봤거든요… 그 동영상도 보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알파와 성적인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보통 성인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면 주로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했다.
사귀지 않아도 자는 경우도 흔하다 하던데.
나는 그 ‘보통’이 되어 본 적은 없고, 보통 이렇다더라 하고 주워듣는 쪽이었다. 연희가 남친이랑 어떻게 했느니 하면서 세부적인 일까지 상담한 적이 있긴 하다. 그렇게 서연희 전용 상담사가 되어 본 것 외에 타인과 성적인 것에 대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대화가 그에게 알몸을 보이는 일보다 부끄러웠다.
“뭘 봤는지 상상이 되네요.”
“네…. 찾아보니까 이런 관계를 SM이라고 하고, 또 제가 마조히스트고요…. 그… 주인님이 마조히스트를 때리고 또 교육도 시켜 주고, 다른 사람들한테 그걸 보여 주기도 하고, 심하면 물고문도 하고, 또 사생활도 통제하고…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하던데. 아니면 남자 여러 명이랑 여자 한 명이 그런 걸 하기도 하고.”
민준이 약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조금 쑥스러워졌다.
“알차게도 찾아봤네요, 동영상도 보고 인터넷 게시판까지 뒤져 본 모양이에요.”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귓불이 붉어졌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걸 계속하면, 점점 단계를 높여 나가고… 그런 심한 것들까지 해야 하나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그래요, 잘했어요. 걱정도 하고.”
“네?”
“서윤 씨는 뭘 좀 무서워해야 해요. 나랑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묶이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걸 보고 큰일 나겠다 싶었거든요. 처음에는 정조 관념이 아예 없는 줄 알았고요.”
“…네?”
이건 또 무슨…. 나는 그를 거부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언반구 없이 지금까지 관계를 진행하다니. 나는 그를 멍하니 보았다.
“첫 번째로 서윤 씨가 말한 관계는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의 관계입니다. 도미넌트는 주인님, 서브미시브는 노예 역을 맡는 마조히스트를 말하죠. 두 번째로 저는 상대를 고통 주는 것을 싫어합니다. 한 번 이성을 잃은 적은 있었지만 서윤 씨의 몸에 상해를 입힐 생각은 없어요. 세 번째로 저는 서윤 씨를 묶는 걸 좋아하는데 그건 저의 성적인 기호일 뿐이고, 마찬가지로 고통을 줄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본 바로 즐거워하는 것 같더군요. 제게 묶이는 게 싫다고 하면 그만두는 것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준이 나를 꽁꽁 묶어 한 시간 반 동안 방치했던 일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가 조금만 나쁜 마음을 먹었더라면 큰 일 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나를 정성 들여 묶어 주는 민준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그 후에 나를 칭찬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도 좋았다. 마치 그가 공들여 취급하는 예술품이 된 것 같은, 그때가 좋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굳이 나처럼 특별한 것도 아닌 상대를 누가 그렇게 공들여 대접해 줄 일이 다시는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나도 퍽 정상은 아닌가 보다.
“싫진 않았어요.”
결국 나는 붉어진 얼굴로 작게 말했다.
“그게 성 취향이 잘 맞는다는 거죠. 그리고 저는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게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서윤 씨를 통제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통제요?”
“네….”
민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았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그는 정말 매혹적일 정도로 잘생겼다.
“아침에 뭘 먹을지, 점심으로 뭘 먹을지, 퇴근하고 뭘 할지, 어디에 거주할지, 무슨 일을 할지. 그냥 나한테 다 의논하고 허락을 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흘리고 다니면 벌도 받고, 제 눈치도 보고, 기분도 살피고, 그런데 그게 괴로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세상의 중심이 제 쪽으로 옮겨 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게 보호받고 통제받고 허락받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
나는 멍하니 그 말을 들으면서 입을 벌렸다. 원래, 이런 관계가 그런 건가?
꼭 그건 도가 넘치는 애정, 같은, 집착 같은, 그런 거…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질 쳐서 나는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다. 나는 태어나서 타인에게 이만한 관심을 처음 받아 본다.
민준의 말이 고백이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만한 열정을 내가 평생 다시 받아 볼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소름 끼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독히 외로운 나에게는 싫지 않게 들렸다.
“그거 꼭 애완동물 같네요.”
“애완동물은 아니고요.”
그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저는 서윤 씨가 분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 있습니다.”
연희도 소나무 운운하더니 내가 식물처럼 보이기라도 하나? 나는 멍하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분재를 보면 항상 제자리에 있고, 가장 좋은 곳에 놓여 있잖습니까, 볕도 잘 드는 곳에요, 또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방 안의 중심에 놓여 있고, 가지도 치고 어떻게 자랄지 주인이 통제하고, 매일 공들여 물도 주고 조금만 관심을 놓으면 시들고… 또 한자리에 결박된 것처럼 놓여 있기도 하고요…. 그냥 그쪽이 분재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자리에 계속 놓아두면 고통스러워할 것 같아서 그럴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네. 네….”
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엄청난 욕구 고백은 뭐지? 내가 상상한 것과 너무 달라서… 점점 감당하기 힘들게 느껴진다.
“태, 태어나서 다른 사람이랑 이런 대화를 한 게 처음이라서요….”
나는 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저는 좋습니다.”
그 좋습니다, 마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쨌든 서윤 씨가 원치 않는데 물에 처박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될 일은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저는 폐쇄적이고 안전한 관계를 선호해서요.”
“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내 두 뺨과 눈은 손에 가려진 채였다.
짧았지만 민망한 대화가 끝나고 민준은 달아오른 나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구죠, 서윤 씨.”
“주인님이요.”
나는 빨개진 얼굴을 짚은 손을 조금 뗐다. 눈만 드러나도록,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잘했어요. 그래서 SM 동영상이나 사진 찾아보면서 흥분했어요?”
“아뇨, 그냥 무섭다고 생각했어요. 거의 다요….”
“거의 다면 몇 개는 흥분되었다는 말이네요.”
나는 빨개진 채 망설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고. 민준이 살짝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본 것 중 어떤 것에 가장 흥분했어요?”
민준은 내게 나긋하게 물었다. SM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검색한 야동과 사진 중 어떤 것에 흥분했냐고. 나는 작게 대답했다.
“여자가 묶여서 남자한테 안기는 거…. 침대 위에서요.”
“서윤 씨가 누구한테 그렇게 안기는 거 상상했어요?”
“…아뇨, 어, 몇 초 정도는… 그렇게 상상하긴 했어요. 아주 잠깐 동안만.”
민준은 내 대답에 미소 지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내가 매일 밤 혼자 야동을 보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느 부분에서요?”
“말 못 하겠어요.”
“대답 못 하면 벌 받아야죠. 서윤 씨.”
“…….”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나는 내가 본 야동 내용을 생각하고 있었다. 화려한 빅토리아풍 침실에서 금발의 서양 여자가 묶인 채 남자에게 안기는 동영상이었다.
캐노피가 쳐진 침대에서 위. 여자는 노예 같은 모습으로 빨간 밧줄에 칭칭 묶인 채 남자와 교합했다. 그러다 오르가즘을 느끼며 몸을 떨며 울었다.
절정에서 남자는 여자의 발뒤꿈치를 깨물고 애무했다.
서양인인 남자 배우가 아주 조금, 원민준 씨와 비슷한 골격의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열중해서 보았다. 그리고 조금 흥분했었다.
“여자가 묶여 있는데 남자가 발뒤꿈치를 깨무는 장면이요.”
“아킬레스건 부분이요?”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뱃속이 뜨거워질 만큼 부끄러웠다. 민준이 은은하게 알파 냄새를 뿜으며 내 팔을 잡았다.
“그럼 우리 서윤 씨가 아킬레스건이 성감대인지 알아봐야겠네요.”
“네….”
나는 빨개진 볼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벗어야 알아보겠죠?”
나와 그는 나란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가 내 팔을 잡고 나를 침대 밖으로 부드럽게 밀어냈다. 나는 그 말뜻을 알아듣고 침대 앞에 서서 한 겹씩 옷을 벗었다. 다 입은 그의 앞에서 하나씩 알몸이 되는 일은 언제 겪어도 부끄럽다. 내 옷가지가 하나하나 그의 눈앞에서 벗겨지고 나는 곧바로 속옷조차 남기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굽힌다. 알몸이 된 채 무릎을 꿇으려는 나를 그가 제지했다. 민준은 나를 손짓으로 침대 위로 불렀다.
“아.”
그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내가 침대 위에 엎드리도록 몸을 살짝 눌렀다. 나는 침대 위에 편안히 엎드려 앉아 그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것만으로 벌써 몸 안쪽이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시작하기 직전의 쾌감 섞인 긴장감에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엎드린 내 오른쪽 발목을 들어 올려 아킬레스건을 슬슬 매만졌다. 나는 아직 샤워도 안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퍽 민망했다. 그를 만나러 오기 전 집에서 몸을 깨끗하게 씻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응….”
아, 나는 정말 변태인가 보다. 민준이 나를 살짝 만지는 것만으로 등이 옹송그려지고 몸 안쪽이 설렜다.
“흑.”
민준이 긴 손가락을 내려 발바닥 안쪽의 움푹 파인 부분을 간질인다. 나는 소리를 내며 시트를 쥐었다.
“민감해서 좋아요. 평소엔 무덤덤하게 앉아 있는데 조금만 만져 주면 흐트러져서. 처음부터 재능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민준이 속삭이며 내 아킬레스건으로 다시 손을 옮겼다. 손톱으로 그곳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그가 몸을 숙인다. 그는 내 아킬레스건을 물었다. 갑자기 물린 나는 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시트를 긁었다.
이어 그는 혀로 그곳을 축축이 핥았다. 그리고 몇 번 쪽쪽 하고 키스한다. 내가 본 야동에서와 똑같은 행동이었지만 상황은 조금 달랐다. 그의 행동은 약간 달콤하게까지 느껴졌다.
마치 사랑받는 것 같았다. 다정한 연인의 애무 같았다. 그래서 그 감촉이 퍽 좋게 느껴졌다. 그의 알파 냄새가 짙어지자 내 엉덩이 사이가 더 축축하게 젖어 왔다.
민준이 한참을 그곳을 물고 빨고 애무하다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의 무릎이 올라왔을 때 침대가 출렁이며 한차례 움직였다. 나는 아랫도리에 미세한 자극을 받았다. 잠깐 감질이 난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온몸을 자극받고 싶었다.
“그럼 거기가 성감대가 맞았는지 확인해 볼까요.”
민준의 긴 손가락이 내 엉덩이 사이를 꾹 눌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어 민준이 나른하고 섹시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말했다.
“뭐 해, 주인님한테 확인시켜 줘야지.”
“네, 네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스스로 양 엉덩이 살을 잡고 벌렸다. 그의 눈에 내 온몸이 전부 드러났다.
“이제부터 제가 보여 달라고 하면 잘 봐 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부끄러워요….”
“그래도 할 수 있죠?”
나는 빨개진 귀로 고개를 끄덕이고 망설이며 작게 말했다. 이미 벌주세요, 혼내 주세요, 안아 주세요, 이런 말도 몇 번이나 해 본 나였지만 오늘따라 유독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잘 봐 주세요, 제 몸…. 부탁드립니다.”
그가 살짝 웃었다. 민준이 만족하는 것이 느껴져 나는 조금 기뻤다. 나는 천성적으로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거나 실망시키는 일을 못 했다.
그가 내 구멍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긁었다. 질척해진 그곳을 확인하듯.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이미 푹 젖은 그곳은 민준의 손가락을 수월하게 삼켰다.
“온몸이 성감대인 거예요, 아니면 발꿈치가 성감대인 거예요.”
“그게, 주인님 냄새가… 흑….”
“아 맞다. 내 냄새에 발정하죠, 서윤 씨.”
“네에, 그, 흐윽, 냄새가 짙어지면….”
“알파 향이 좀 강하면 아무한테나 발정하나.”
“아니요, 주인님 향에만… 흑… 앗….”
그가 손가락을 밀어 넣어 내 안의 민감하게 도드라진 곳을 긁어냈다. 나는 그것만으로 허리를 떨며 소리를 질렀다.
그가 조금만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 쾌감이 내 온몸을 지배했다. 내 몸은 싫든 좋든 그에게 익숙해진 것 같았다.
“큰 소리로 말해야 나를 기쁘게 하죠. 서윤 씨만 기쁘면 안 되지.”
나는 그의 말에 더듬거리며 아까 한 말을 반복했다.
“주인님 향에만 이렇게 돼요….”
“내 향에 어떻게 된다고?”
“그, 주인님 향에만, 발정해요….”
말하고 나자 나는 내가 민준의 냄새에만 흥분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알파 향에 무뎠다. 열성 남자 오메가는 번식력이 약해 일반 알파의 냄새는 매우 짙어져야 감각이 있을까 말까였다. 즉 진한 알파 향을 맡아도 성욕이 느껴질까 말까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성 알파인 그의 냄새는 조금만 맡아도 금세 몸 안쪽이 두근거리고 뻐근해졌다. 어쨌든 내 주변에 우성 알파는 그뿐이니까, 아예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네요.”
민준이 그렇게 대답할 줄은 몰라서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침대 시트만 긁었다. 원민준이 나로 인해 기쁘다는 것은… 좋았다. 어떤 상황이든, 정상적이고 옳은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도.
목덜미에 민준의 입술이 닿았다. 이어 등뼈를 핥으며 그가 입술을 점차 내렸다. 더욱 밀착한 그가 엎드린 내 엉덩이에 입 맞췄을 때 가벼운 쾌감 같은 것이 온몸을 내달렸다. 그가 엉덩이를 손에 쥐고 주무르며 내 구멍을 핥았다.
“아, 거기, 지저분해요, 읏….”
내 엉덩이 골 사이로 그의 코가 내뿜는 더운 숨이 느껴졌다. 전희가 길지 않았는데도 나는 이미 하고 싶었다. 애가 탈 정도로. 이미 나는 그의 성기를 여러 차례 담고 느껴 본 적 있었다. 그 감각이 그리웠다.
“아, 아….”
나는 그대로 쾌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민준이 내 팔을 잡고 일어나 나를 앉혔다. 그리고 베개를 허리 아래에 깔고 정면으로 눕게 만들었다.
민준이 내 몸 위에 올라타 셔츠 단추를 급하게 풀었다. 나도 서둘러 그가 옷을 벗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셔츠를 벗자 새하얗고 조각 같은 몸이 드러났다. 일정하게 운동을 하고 관리를 하는지, 그의 몸은 짜임새 있고 아름다웠다.
얼굴만 하얀 것이 아니라 민준은 온몸이 희었다. 그도 꽤 마른 편인데, 옷 입었을 때도 벗었을 때도 나보다 훨씬 체격이 좋았다.
그가 급하게 고개를 내려 내 유두를 물었다. 여자처럼 가슴이 있는 것도 아닌데 꼭 그는 갈급한 사람처럼 내 유두를 빨고 혀를 돌려 핥았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내려가 다시 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더 밀어 넣었다. 그의 혀와 손가락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위아래로 축축하고 찌걱대는 소리가 나니 나는 감각에 휘말려 멍해질 정도로 흥분했다. 몸 안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했다.
“으응, 흣… 하….”
민준이 손가락을 빼내고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내 구멍에 비볐다. 나는 벌써부터 발정한 듯, 그의 등을 다리로 감싸 안았다.
민준이 단번에 성기를 치밀어 넣자 온몸이 점령당하는 감각에 나는 숨을 멈추고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몸 안에 가득 차는 그 뿌듯함…. 그가 성기를 추삽질하기 시작했다.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린다.
“으응, 앗….”
그는 내 안을 휘저으며 함락해 왔다. 내 몸 안쪽은 꼭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성기를 게걸스럽게 물며, 그의 단단한 기둥에 착 달라붙어 그를 바란다.
“벌써부터 뭘 그렇게. 조여요, 응?”
그가 신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 내며 중얼거리고, 내 입술에 입 맞췄다. 그가 내 볼을 핥다가 말캉말캉한 볼 위에 이를 세운다. 나는 몸 안에서 커진 열기를 느끼며 흐윽, 흐윽,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몸 안, 전체가 덥게 느껴졌다. 뜨거웠다.
“으응, 응… 아아….”
너무, 좋아서, 뜨거워서, 나는 음탕한 소리를 내며 신음을 내뱉었다. 볼에 이를 세우던 그는 고개를 내려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귓가에 그의 더운 신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가 내 목덜미에 이를 세운다. 목 부분의 살의 아픔과 동시에 그의 성기의 추삽질도 더 강해졌다.
나는 팔을 들어 그의 목에 감고 온몸으로 매달렸다. 마침내 그가 내 성감에 닿았을 때 내 눈가까지 젖어 있었다.
“하아, 하아. 응! 아….”
나는 쾌감에 소리를 지르며 그의 목을 더 끌어안았다 놓았다. 내 목덜미를 세게 깨물고 떨어진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내 발목을 쥐고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그대로 크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안쪽으로 강하게 치대며 다시 내 포인트를 건드렸다. 너무 큰 쾌감에 나는 발가락을 오므리며 흐느꼈다.
그렇게 여러 번 거칠게 치고 빠지던 그가 허리를 천천히, 조금 느긋하게 돌리며 내 발목을 잡고 한 손에 잡힌 내 발목에 쪽쪽, 키스했다.
그러다 정강이를 타고 올라와 종아리 안쪽에 입 맞췄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행동에 내 비부 안쪽뿐만 아니라 가슴이 찌르르 떨려 왔다.
“아….”
너무, 위험해…. 이렇게 다정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가 내 종아리에서 입술을 떼자 그는 더 봐주지 않고 성기를 거칠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행동에 따라 치받히며, 목구멍 안쪽에서 흑, 으윽, 하는 일정한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서툴게 맞추어 허리를 흔들었다. 맞물림이 집요하고 진해질수록 머리가 하얗게 된다. 나는 할딱이며 쾌감을 질러 낼 뿐이었다.
긴 애욕의 시간이 지나가고, 민준이 내 안 깊은 곳에서 정액을 토해 냈다. 몸 안에서 폭발하는 감촉을 느끼며 나도 동시에 뒤만으로 도달했다.
뿌연 정액이 그의 복근 위에 흩뿌려지는 것을 보며 나는 모든 힘을 푼 채 침대 위에 멍하니 드러누웠다.
잔 쾌감이 아직 몸에 산재해 전신의 세포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내 몸에서 조심스럽게 성기를 빼냈다. 외형은 새하얗고 아름다운데, 딴판으로 생긴 그의 커다란 성기는 사정 직후에도 묵직했다.
그가 한숨을 쉬면서 내 옆에 몸을 내렸다. 그리고 시트를 끌어당기자 나는 몸을 들어 그가 이불을 덮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가 내 몸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나는 땀이 식어 싸늘해진 몸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원민준의 품에 기댔다.
나는 그의 품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나를 자연스럽게 끌어안는다.
쿵쿵. 원민준의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그의 심장은 나와 똑같은 속도로 크게 뛰고 있다.
짧았지만 우리 둘은 정신없이 잠을 잔 것 같다. 나는 깊은 잠에 들었다 눈을 떴다. 민준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손을 내려다보니 민준이 내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침대 위에 힘없이 늘어진 내 손은 새벽이라서 그런지 창백해 보였다.
원민준은 그것을 꼭 유리로 만들어진 보물을 다루는 것처럼 어루만졌다. 나는 조금 간지러워 손을 웅크렸다.
“깼어요, 미안해요.”
민준이 내 머리카락을 남기며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잠결인 내게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니에요…. 제 손에 뭐 묻었어요?”
민준이 피식 웃었다.
“손이 너무 예뻐서요, 내가 좋아하는 손이에요.”
“그럼 싫어하는 손도 있나요.”
“좋아하는 손은 있는 것 같네요. 오늘 알았어요.”
원민준이 내 손을 들어 그대로 손등에 입 맞췄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감정이 느껴질 만큼 달콤했다. 때로 그가 너무 상냥한 사람이라 슬펐다. 열린 커튼 사이로 새벽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더 자는 건 무리인 것 같고, 낮에 연희를 만나기로 했다.
연희와 백화점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민준도 일어나 나를 직접 씻겨 주고 옷까지 입혀 주었다. 원민준 같은 남자의 옷시중에 목욕 시중이라니 평생에 받아 보지 못할 호사였다.
그가 돌보는 것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또 한편으론 좋았다. 애틋할 정도의 다정함이 너무 달았다.
그리고 항상 꿈에서 깨어나듯 끝 맛이 쓰디썼다. 불량 식품에 중독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민준은 이른 아침도 군말 없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내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일단 여행비도 내 주시니까 생일 선물… 드리고 싶은데, 원하시는 선물 있어요?”
어차피 원민준 정도 되는 남자면 어마무시한 생일 선물들을 가득 받을 거다. 뭐, 자동차라든가 수표라든가, 외국에서 들여온 현대 작가의 값비싼 회화라든가.
연희만 해도 100, 200만 원은 되는 선물을 고를 테니, 나로선 그만한 걸 해 줄 여력이 없다. 그냥 솔직히 물어보자는 심산이었다. 거기다가 섣불리 선물 같은 걸 하면 도리어 싫어할 수도 있다. 아첨을 하는 것처럼 보이긴 싫었다.
“글쎄요. 딱히 지금 필요한 건 없네요.”
“제가 살 수 있는 거면 꼭 해 드릴게요.”
“굳이 하나 고르자면, 천장에 설치할 수 있는 도르래가 있으면 좋겠네요.”
원민준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사람도 매달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것으로요.
그게 왜 평범한 가정집에 필요한 걸까? 도르래라면 그… 줄과 원이 달려서 사람도 매달 수 있는… 그런 물건이었다. 도르래가 얼마인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게 생긴다면 나에게 매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런 예감이 마구 치밀었다.
“그런 거 말고요….”
“농담이에요. 서윤 씨에게 받고 싶은 건 있지만 물건은 아니고요, 뭐 필요한지 다음 주 중에 말해 줄게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 더 무서워진다. 그럼 어떤 ‘요구’라는 건데. 웬만한 일은 하라는 대로 해 줄 내게 굳이 선물 핑계까지 대면서 시킬 만한 일이면 뭘까.
위험한 일만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하긴 지금까지 크게 위험한 일을 시킨 적은 없긴 했다.
“다음 주 중에 변호사가 서윤 씨에게 전화할 거예요.”
“네.”
“연락받으면 나머지는 변호사랑 처리하면 됩니다.”
“직접 이야기하면 안 되는 종류의 내용인가요?”
민준이 말하는 내용은, ‘그 뭐든지 다 하겠다.’ 라는 약속을 내가 서면으로 남기기로 한 것에 관련된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가 준비한 서류에 내게 직접 날인하고 지장을 찍는 일이 된 것 같다. 물론 그 서류는 민준의 변호사가 만드는 것일 터이다.
원민준과 관련된 일은 항상 내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서 조금 무섭다.
“네, 그런 이야기 직접 하는 것 싫어해서.”
“네….”
더 묻고 싶었지만 차가 집 근처에 도착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민준이 차를 멈추고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가 살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해야죠.”
나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기다렸는지 깨달았다. 성교와 관련된 일들은 대중이 없었지만 그가 내게 꾸준히 요구하는 게 있다면 그 두 가지였다.
벌을 받을 때는 죄송해요, 하고, 벌을 다 받거나 혹은 섹스 플레이가 다 끝나고 나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것.
“감사합니다. 저기… 저녁 식사도 감사했고, 또 밤에도….”
밤일을 생각하자 다시 얼굴이 화끈해졌다. 솔직히 지난밤엔 유난히 좋았다. 깨문 것도 좋았고, 평소와는 조금 다른 뜨거운 섹스도 좋았다. 밤새도록 몇 번이나 이어진 섹스였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골랐다. 민준이 입을 열었다.
“볼에 뽀뽀해 볼래요?”
그의 말에 나는 소름이 쭈뼛 돋았다. 갑자기 이 남자가 왜 이러지, 갑자기 어제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사 주고…. 어쨌든 하라면 해야 했다. 나는 망설이다 그의 볼에 키스했다. 그는 심지어 모공도 없었다. 정말 쓸데없이 잘생겼다.
“다음부터는 볼에 키스하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 주면 좋겠네요.”
“…네.”
돈이 드는 일도 아니었고 딱히 거절할 구실도 없어서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요즘 원민준이 하는 짓이 롤러코스터처럼 이랬다저랬다 한다. 심장을 들었다 놓는 것이 혈압에 안 좋았다. 나는 멍하니 사라지는 그의 차를 보다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정신을 차렸다.
그 주 일요일은 고스란히 연희에게 바쳤다. 원민준 이사의 생일 선물 쇼핑을 빙자한 본인 물건 쇼핑 릴레이를 다녀왔다. 그리고 그녀의 표현으로는 요즘 핫하다는 S동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음식을 먹으며 계속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계속 위가 아팠다. 연희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에 웃으면서도 웃는 게 아니었다.
- 안녕하세요, 원 이사님 관련 일로 전화드렸습니다. 원 이사님 변호사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화요일쯤 원민준 이사의 담당 변호사에게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는 아주 정중했다. 집에 방문해도 되겠냐고 물어보기에 회사가 끝나고 만나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흔쾌히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 근처 카페에서라도 만날 심산으로 집 주소를 알려 주었다.
집 근처에서 전화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변호사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전화도 없이 집 문을 두드렸다. 조금 당황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집이 지저분하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간단히 녹차를 끓여 내가자 변호사가 바로 용건을 꺼냈다.
“원민준 이사님의 전담 변호사인 김은호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변호사는 매우 정중했고 그래서 나도 경직된 채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가 준비해 온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 내용을 본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돈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이게 뭐죠?”
나는 멍하니 변호사에게 물었다. 첫 번째 페이지부터 엄청난 내용이 가득했다.
나- 지원 목록)
1) 갑은 을에게 월 1천만 원의 생활비를 지급한다.
2) 갑은 을에게 20억 원정 이하의 부동산을 무기한 렌트하며, 갑과 을의 계약 종료 시 을은 갑에게 부동산 거주 권리를 반납한다.
3) 갑은 을에게 3억 원정 이하의 차량을 을의 명의로 구입해 준다.
4) 갑과 을의 관계가 1년 이상 지속될 경우 현금 3억 원정을 지급한다.
5) 갑과 을의 관계가 5년 이상 지속될 경우 현금 15억 원정을 지급한다.
6) 갑과 을의 관계가 10년 이상 지속될 경우 현금 25억 원 정을 지급하며, 을이 거주 중인 부동산의 명의를 을의 명의로 무상 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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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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