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가 촌극이듯 나와 그도 그러했다. 딱히 원민준 이사의 말을 거부할 방법이 없는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법적인 효과도 없을’ 계약서에 서명했다. 어쩐지 점점 맹수의 아가리에 알아서 기어들어 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뒤에 사소한 일들이 참 많았다. 나는 차가 필요 없다고 했고 민준은 자신이 항상 데려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내가 차를 꼭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에어백이 잘 되어 있는 독일 차를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수용 국산은 위험해서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그 논리라면 아예 운전을 안 하는 게 안전하지 않냐는 말대답을 했다가 나는 원민준의 분노를 샀다. 일단 그가 화를 내면 꼼짝할 수 없는 나였다. 차를 사거나 이사를 하는 것엔 떨떠름하게 동의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갑자기 고가의 독일 차를 타고 나타나거나 하면 누가 봐도 내 생활의 변화를 눈치챌 것이었다. 거기다 3억짜리 차를 받기라도 하면 나는 부담감에 죽을 것이다. 결국 그는 요즘 새로 나온 국산 중형차 한 대를 보내 주기로 했다. TV에 자주 광고가 나오는 모델이었다. 또, 그는 선물이라며 값비싼 킹사이즈 매트리스를 사 주었다. 그 외에 이사 갈 집에 들어갈 가구는 대부분 오피스텔에 있으니 가구들을 버리라고 지시받았다.
이 집을 팔고 싶진 않았고 아마 세를 줘야 할 것 같았다. 도심에 가깝긴 하지만 워낙 허름한 동네라 세입자가 생길지는 모르겠다. 그는 이 집을 부동산에 내놓는 것까지 모두 비서를 통해 처리해 주었다.
민준의 말대로 내가 고행하는 자세로 살지 않으면, 즉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앞으로의 내 삶이 당분간 편해질 예정인가 보다. 물론 이사 갈 집은 원민준이 정했다. 회사와 집에서 가깝고 방이 하나 딸린 작은 평수의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1층 오피스텔 입구에서부터 시큐리티 키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사는 거의 민준이 보낸 사람들이 와서 도와줬다. 원래 짐도 많지 않은 나는 전날까지 자잘한 짐들을 박스 포장했을 뿐이었다. 정작 이사일에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짐을 옮기는 걸 보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나도 같이 짐을 옮기겠다고 말했지만 이사님이 언짢아하신다며 사람들이 정색했다.
나는 집 곳곳을 돌아보며 이제는 거의 사라진 어릴 적의 기억을 돌아보았다. 안방과 부엌 사이에는 엄마가 표시해 놓은 키 잰 자국들이 있었다.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엔 우리는 이 집에서 꽤 화목하게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아원 동기였고, 고아원을 나와 몇 년 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어 사귀기 시작했었다고 한다. 언제 생각해도 공중파 단편 드라마 같은 스토리다.
어머니는 나와 같은 오메가, 아버지는 보통 사람, 베타였다. 엄마 아빠가 고아 출신인 만큼 그들은 나를 애틋하게 사랑했다. 나는 넘치게 사랑받고 자랐던 것 같다. 그만큼 부모님에게 의존적인 아이기도 했었다.
엄마와 아빠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서 안아 달라고 했었다. 여름이면 집 앞 게딱지만 한 정원의 화단에서 깻잎도 심고 상추도 심고 했었다.
용돈으로 채송화 씨앗을 사 와 이걸 심자며 졸랐다가, 다음 해 봄에 채송화가 피는 걸 기다린 적이 있었다. 피지 않아 한바탕 울어 부모님을 곤란하게 한 적도 있었다.
“뭐 봐요?”
화단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나는 민준의 목소리에 몸을 폈다.
“그냥 오래 살았던 집인데 이사 가려니 서운해서요. 어렸을 때 일도 생각나고요.”
“여기서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추억이 많겠네요.”
나는 괜히 센티해져서 안 해도 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섯 살 때인가, 부모님 졸라서 여기에 채송화 씨앗을 심었거든요. 봄이 와도 꽃이 안 펴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어요. 굉장히 기대했었거든요. 알고 보니 가을에 피는 꽃이더라고요. 어쨌든 채송화가 안 핀 덕분에 엄마가 상추를 기르셨죠.”
“귀여운 추억이네요.”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덧붙였다.
“귀여운 애였을 것 같아요. 서윤 씨 어릴 적을 못 봐서 아쉽네요.”
그가 내 시시한 추억에 맞장구치며 답변해 주자 나는 쑥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아무리 봐도 나는 귀여운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이런 말들은 적응하기 힘들다.
“이사님은 어렸을 때 어떤 아이였나요?”
“글쎄요, 이해하기 힘든 애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차원 같은 건 아니고, 그냥 말이 많이 없었거든요.”
안 봐도 그랬을 것 같다. 인형같이 새하얀 미소년이라 주변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했겠지. 지금만 해도 잘생기다 못해 아름다운 외형의 원민준인데, 소년 시절엔 더 굉장했을 터였다.
거기다 내게 하는 말만 봐도 정신세계가 확고한 사람이었으니, 말없이 있다가 독설을 뱉었을 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니 살짝 웃음이 나왔다. 추억에 잠긴 김에 괜히 감상적이 되어 한 번 더 이사 가기 아쉽다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과거에선 벗어나야죠.”
뜻밖의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그의 말을 들었다.
“연희가 걱정하던데요, 이 집에서 서윤 씨가 혼자 10년 넘게 살았다고. 보통은요, 좋은 기억만 남기고 슬픈 일들은 극복하는 거라고 하잖습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과거에 매달려서 살 순 없죠.”
나는 그가 나를 이사시키려고 한 내막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희망차게 미래를 살아가라고 해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배팅하는 것보다 과거의 좋았던 일에 만족하며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거다. 아마, 원민준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설마, 연희가 제 걱정 해서… 연희 말 때문에 저 이사하라고 한 거예요?”
“제가 그럴 것 같습니까?”
“…아니요.”
그가 약간 찡그리며 나를 보았다. 또다시 바보를 보는 표정이었다.
“서윤 씨 집은 주차가 힘들어서요.”
“네.”
그런 이유 때문에 20억짜리 집을 구매해서 빌려주네 마네,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잠시 잊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연희도 이 집에서 이사를 가면 어떠냐는 말을 조심스레 꺼낸 적이 있었다.
자기 앞으로 있는 노는 오피스텔을 싸게 빌려준다고, 몸만 이사 오라고. 아무래도 내가 이 집에 사는 게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이었나 보다.
…걱정?
그러고 보니 차를 살 때도 그렇고, 보호해 주고 싶단 말도 그렇고, 민준은 주변 사람들을 돌보는 타입인 것 같았다. 걱정도 좀 있는 것 같고.
허울뿐인 세컨드라고 해도 나는 그의 오메가니까, 걱정해 주는 건가. 가슴이 묘하게 쓰리면서 뭉클했다. 안주하지 말자, 라고 스스로 한 번 더 되새겼다. 뭐든지 중독은 나쁜 거다. 나는 감정에 쉽게 중독되는 스타일이니까. 뭐든지 감당할 수 없는 것에 중독되면 박탈당하는 순간이 더 괴로워질 뿐이었다.
이삿날이라 온종일 고생해 가며 일할 각오를 했는데 민준이 도와줄 사람들을 보내 준 덕분에 거의 일할 것이 없었다. 물론 나는 사람들이 짐을 풀어 주거나 옮겨 줄 때 나도 일하겠다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내 모습을 보고 민준이 짜증을 냈다. 나는 움찔하며 움츠러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일인데, 남에게 맡기고 편하게 있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그날 내가 제대로 한 일이라곤 옷을 갈아입고 교외의 레스토랑으로 그와 식사를 하러 나간 것뿐이었다. 호수가 보이는 강가에서 식사를 하며 나는 연신 그의 눈치를 보았다.
“저, 생활비… 같은 거요, 그건 정말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돈이 모자라서 더 달란 뜻인가요?”
“아뇨, 절대 아니에요!”
“그럼 말하지 마요. 지금부터 돈 이야기할 때마다 두 배로 주고, 헤어질 때 다시 두 배로 받을 테니까.”
“…….”
그 말은 내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정말 필요 없는데. 헤어질 때 두 배로 갚게 한다느니 하는 깡패 같은 말을 할 건 뭔가.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눈앞의 파스타를 입에 욱여넣었다.
“…비 맞은 강아지가 자기를 주워가 주지 않는 행인을 원망하며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이네요.”
“…그건 무슨 표정인데요?”
원민준의 남다른 정신세계를 아직 미처 이해하지 못한 나는 파스타를 물고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 표정이 웃긴지 그가 다시 작게 웃었다. 가뜩이나 말도 안 되게 잘생긴 민준인데 웃으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 이 세상이 컴퓨터 코드라면 저 미소는 치트 키였다.
“돈 받아 둬요, 정말 쓸데 따로 없으면 차곡차곡 모아 뒀다가 나랑 끝날 때 돌려줘요. 보증금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다 급한 일이나 큰돈 들어갈 때가 있으면 보험처럼 가지고 있다 쓰면 되잖습니까. 갚으란 말 안 할게요.”
“그래도 보통 큰돈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변하잖아요.”
“그럼 저야 좋죠, 돈이 아쉬워서라도 내 옆에 붙어 있으려고 노력할 테니. 차라리 그런 타입이면 편하겠네요.”
결국 말문이 막혀 나는 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얀 파스타나 계속 깨작거렸다.
무슨 사회적 약자 페티시라도 있나. 자기보다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의 사람에 성적으로 흥분하고 지배하고 싶어 하는…. 그러고 보니 그러고도 남을 원민준이다.
“참 뭐 안 물어보네요, 서윤 씨는.”
“제가 뭘 물어봐야 하나요?”
“보통 이렇게까지 해 주면 그렇게 내가 좋아요, 라던가, 왜 이렇게 잘해 줘요, 나 그런 거 물어보지 않나요. 보통 오메가들은 뭐 확인받는 걸 좋아한다고 하던데.”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어차피 그의 변덕이겠지, 하고 알아서 납득한다. 지금이야 잠깐 반짝 좋아해 줄 수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나와 그는 결혼도 아이를 가져서도 안 되는 사이였다. 그런 사이가 잘되어 봐야 나는 그의 정부일 테고, 그것도 아이를 가지지 못하니 걸출한 첩은 못될 것이다.
왜, 예전 중국 왕들을 봐도 태자를 출산한 후궁이나 중전은 사료에도 남고 사극에서도 비중 있게 등장하지만, 왕이 잠깐 1, 2년 정붙였다 질린 후궁 같은 건 사료에도 제대로 남지 않지 않는가. 내가 총애를 입어 봐야 딱 그 짝이겠지 뭐. 사는 게 다 그렇다. 물론 원민준 씨는 왕이 아니고, 나도 그의 후궁이나 첩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이다.
뭣보다 이게 잘해 줌이라니, 나는 이 상황이 부담스러워서 질식할 것 같은데. 어쨌든 이번에도 내게 그에게 개길 용기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서윤 씨가 요즘 잘못한 일들이 많은 것 같아요.”
미묘하게 달라진 그의 말투에 나는 포크를 든 채 솜털이 쭈뼛 서는 일을 경험했다. 나는 바로 그의 눈치를 보며 움츠러들었다.
“네….”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오랜만에 훈련할까요?”
“…네.”
“어때요, 하기 싫어요?”
“…아뇨, 기대돼요.”
나는 그에게 주입받은 대로 어색하게 대답했다. 한참 동안 그의 조교가 없었던 터라 배 속이 뜨거워지며 공포와 아주 희미한, 미묘한 희열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정말 기대감을 느낀 나 자신의 모습에 당황했다.
***
다음 날 저녁 나는 밀린 TV 미니 시리즈를 보다가, 벨 누르는 소리에 일어나 체인을 걸고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꽃집 배달입니다. 이서윤 씨 맞으시죠?”
나는 조금 경계하며 문을 열었다. 작업복 복장의 남자가 가로로 긴 큼직한 화분을 들어다 베란다에 옮겨 놓았다.
화분은 고와 보이는 갈색 흙만 가득 들어찬 상태로, 아무것도 심긴 게 없는 평범한 플라스틱 화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저희는 주문만 받은 거라서요. 메시지 카드에 보시면 의뢰자 성함 나와 있을 겁니다.”
신종 강매 같은 건 아니겠지, 나는 조금 걱정하며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상추 씨앗과 채송화 씨앗 봉투가 들어 있었고 작은 메시지 카드가 들어 있었다.
채송화는 봄에 심어야 한다고 하니 상추 씨앗부터 심으세요.
-원민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