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어른들 생각해야지 그런 말 하면 어떻게 해요. 저 괜찮아요. 그렇게 불쌍한 놈 아니에요. 형이 제 도움 필요하면 저 언제든지 뭐든지 도와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런 말 마세요.”
나는 쓰게 웃으며 그렇게 진우 형을 달랬다. 묘한 기분이었다. 평생 어떤 알파의 관심도 받지 못했던 나였다. 우성 알파를 만나고 있어서일까. 뒤늦게 오메가로서 개화라도 한 건가.
갑자기 체향이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질 않나, 첫사랑이 다시 내게 관심을 보여 주질 않나….
아무래도 원민준 이사는 치트 키가 맞나 보다. 그러나 나는 치트 키 같은 건 필요 없다.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도 상관없으니 그저 평온하게만 살고 싶다.
진우 형이 내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그의 손을 바라보며 나는 새하얀 원민준 이사의 손을 생각했다. 진우 형의 손은 손끝도 조금 더 뭉툭했고, 손가락도 더 굵고 짧았다.
“서윤아. 내가 네 생각 자주 한다는 것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알았지, 무슨 일 있으면 꼭 우리한테 의논해야 해.”
그의 손은 차가운 원민준 이사의 손보다 훨씬 뜨거웠다. 아마 진우 형이라면 손등으로 내 뺨을 올려붙이는 일도 없겠지. 알파들은 사귀면 본색을 드러낸다지만, 진우 형만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끄덕였다. 한편으론 걱정되었다. 혹시 나 좋다는 알파가 나타나도, 내 뺨을 때리지 않는 알파가 나 좋다고 해도, 내가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원민준이 내게 하는 일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알파와… 내가 교제할 수 있을까. 앞으로 그런 날이 오긴 할까.
***
그 주 토요일, 나는 저녁때나 불려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낮부터 원민준 이사에게 호출당했다. 이제 그는 나를 호텔방으로 부르지 않았다.
내가 이사한 후에는 주로 내 집, 아니면 그의 집에서 만났다. 나와 그가 주로 만나던 호텔방 비밀 옷장 속에는 구속 도구와 매를 비롯한 체벌 도구 등이 가득했었다. 그건 모두 민준이 자신의 집으로 옮겨 온 것 같았다.
그 호텔방을 정리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민준이 다른 오메가를 만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마 민준도 당분간 그 방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민준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로 침실로 끌려가 곧장 옷을 벗을 것을 지시받았다. 나는 그 주 내내 그가 선물한 속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 입은 것은 새하얀 속옷이었다. 내가 속옷까지 다 벗을지 말지 망설이자 침대에 앉아 내 모습을 보던 민준이 명령했다.
“속옷은 남기고 이리 와요.”
민준은 오늘 시작부터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내 팔을 잡아 나를 강하게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자신의 무릎 위로 불렀다.
“오늘 잘못한 게 많으니 맞으면서 배워야겠습니다. 바로 이리 와요.”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곧 바로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 엎드렸다. 내 엉덩이가 그의 허벅지 위에 위치하게 되었다.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했다.
민준은 감정적이 되면 나를 평소보다 심하게 체벌한다. 평소라면 많아야 열 대, 충분히 견딜 정도로 맞겠지만…. 나는 벌써부터 겁먹어 소심하게 빌었다.
“죄송해요.”
“뭐가요?”
“저, 이번 주에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그가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낮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바로 내 속옷을 내리고, 엉덩이를 내려쳤다. 손바닥이었다. 생각보다 아파서 나는 깜짝 놀랐다. 몸이 떨린다.
“이번 주 금요일에 무슨 속옷 입었어요.”
“보, 보라색…. 주인님이 선물해 주신 것….”
“개년이 진짜, 그런 속옷을 입고 알파랑 둘이 만나? 나 몰래?”
찰싹, 찰싹.
민준이 씹어뱉듯 말하며 손바닥으로 계속 내 엉덩이를 내려쳤다. 그의 손힘이 강했다. 두 대만에 엉덩이가 멍들 것 같았다. 나는 그가 화를 내면 얼어붙어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겁을 먹고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고 계속 사과했다.
과하게 떨며 비굴하게 사과하는 내 모습에 그가 조금 진정한 것 같았다.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한 번 내 엉덩이를 내려쳤다.
찰싹.
“잘못한 것 다 말해 봐.”
“아, 알파랑 둘이 술 마신 거….”
“술도 마셨다고?”
나는 바로 말실수를 해 버린 것 같다. 내 엉덩이에 다시 그의 손바닥이 내리쳐졌다.
“그리고 흘리고 다녔지요.”
“아, 안 흘렸어요. 그냥 어렸을 때부터 아는 형이라….”
나는 쩔쩔매며 변명했다.
“둘이 뭐 했습니까?”
“아무것도… 밥만 먹었어요. 그날도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
“둘 중의 한 놈은 발정했겠죠. 이서윤 같은 오메가를 눈앞에 두고 술까지 마시는데 안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원민준이 내 엉덩이를 다시 한 번 내리쳤다. 아니,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취향이 독특한 건 아니라고요, 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심지어 진우 형은 러트 상태에서도 나를 마다한 초인적인 자제력의 알파다. 반대로 말하면 나는 러트 상태에서도 하고 싶지 않은 무매력의 오메가고.
“안 그래요, 정말이에요… 딴생각할 틈이 어디 있어요. 이번 주에도 몇 번을 했는데….”
이번 주 며칠 사이에만 해도 원민준과의 음란한 이벤트가 몇 개였는가, 화장실에서의 셀프 속옷 촬영, 회사 비상계단에서의 속옷 검사, 그리고 나와 그의 집에서 각각 한 번씩의 잠자리. 이 정도 스케줄에 다른 알파랑 잘 생각까지 할 정도로 성욕이 왕성한 오메가는 없을 것이었다.
그가 잔꾀를 부린다며 내 엉덩이를 몇 대 더 내리쳤다. 이건 훈련이나 체벌이 아닌 화풀이였기에 나는 그저 그의 화가 풀리기를 기대하며 아픈 소리를 냈다. 그에게 맞을 때마다 손가락으로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가 잠시 후 조금 진정한 듯 내 몸을 놔주었다.
“무릎 꿇어요.”
나는 비틀대며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까 나랑 침대에서 바쁘게 일하느라 딴생각할 틈이 없다 이거죠.”
“네…? 네. 그리고 정말 딴생각 안 해요, 안 합니다.”
어쨌든 알파는 오메가 한 명과 정기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 의부증 수준의 집착을 보인다. 그게 알파의 생리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도덕적인 논리를 떠나 그를 진정시키려 노력할 뿐이었다.
그가 눈을 차갑게 치떴다. 숨이 막힐 만큼 무섭고 또 잘생겼다.
“앞으로도 자주 박아 달란 뜻이에요?”
“네? 아, 아니에요.”
“안 그럼 또 흘리고 다닐 거 아니에요.”
“안 흘리고 다닐게요, 절대, 아무한테도….”
“아무한테도? 나한테도 말입니까.”
나는 숨을 멈추고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일지 헤아려 보았다.
“아니, 저, 주인님한테만 흘릴게요.”
“이서윤.”
“네, 주인님.”
“그쪽 주인님이 누구예요?”
“주인님… 이사님이요.”
“내 이름.”
“원민준 주인님이요.”
나는 백치처럼 순진하게 그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서 떨어질 말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이서윤 씨 오메가예요, 알파예요.”
“오메가요.”
“그럼 주인 있는 오메가네. 그렇죠?”
“예? 예.”
내가 말을 더듬자 그가 손으로 내 뺨을 쭉 당겼다 놓았다. 이건 또 처음 받아 보는 공격이다. 아프다기보단 놀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뺨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다가 민준의 차가운 눈빛을 받고 바로 손을 내려 뒤로 돌렸다.
“그럼 말해야지. 누구 오메가라고?”
“원민준 주인님의 오메가… 입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정말 변태가 된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가 정말 그에게 소속된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게 바로 마조히즘… 이란 거겠지.
“자필로 50번 써서 내요.”
“…네.”
“쓸 때는 알몸으로 써요.”
“…네.”
아무래도 내가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면 아직 먼 것 같았다. 50번 쓰기…. 못할 건 없었지만 상상도 한 적 없는 괴롭힘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면 그는 비범한 사디스트고 나는 평범한 마조히스트인가 보다.
그가 혀를 찼지만, 나는 민준의 화가 풀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무릎 꿇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만졌다. 내 엉덩이를 힘껏 내리쳐서인지 그의 손도 뜨거웠다. 아마 그의 손바닥도 부풀 것 같았다. 나는 적잖게 놀랐다.
“이번만 봐주는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럼 이번 주엔 다섯 대만 더 맞죠. 도구는 직접 고르세요.”
나는 그의 말에 일어섰다. 침실 한쪽의 테이블에는 원민준이 세팅해 놓은 패들과 채찍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새까맣게 빛나는 그것들을 보자 두려웠고, 아주 조금, 약간의 기대도 생겼다. 작은 채찍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좀 더 본격적인, 그와 나의 훈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의 뱃속에서 검은 정염 같은 것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나는 이미 이 상황에 도취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큰 의자 등받이를 끌어안고 의자 위에 무릎으로 올라앉았다.
“오늘은 맞으면 숫자 세요.”
“네….”
나는 조금 떨며 말했다. 그가 가볍게 채찍을 내리쳤다. 몸이 한 번 진동하긴 했지만, 그리 크게 아프게 맞지는 않았다.
“하나….”
이어 민준이 두세 번 더 채찍질을 했다. 둘, 셋, 나는 멍하니 숫자를 셌다. 심하게 아프다기보단 따끔따끔했다. 그러나 그에게 맞을 때마다 나는 음문을 조이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지금 맞는 걸로 흥분하는 중이다, 라는 배덕감이 몸을 휘감았다.
그가 네 대째 때리고 내 앞으로 돌아와 입에 무언가를 물려 주었다. 동그란 원형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난 부드러운 그것은 볼 개그라고 했다.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입에 물리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손속을 봐주지 않고 때릴 모양이다. 나는 부드러운 그것을 꼭 물었다. 그리고 눈을 꼭 감고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그가 가볍게 손목을 한 번 허공에 휘두른다. 그 다음에야 내 엉덩이를 내리쳤다. 그 채찍질이 정확히 들어맞아 내 엉덩이에 쫙 감겼다. 쫘악, 하는 소리와 함께 눈물이 찔끔 났다. 엉덩이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민준이 뒤에서 손을 뻗어 볼 개그를 입 안에서 빼냈다.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다섯….”
끝까지 명령을 수행한 내가 잘했다는 듯 그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두상을 어루만지는 방식은 훈련받은 리트리버를 칭찬하는 부유한 주인의 그것 같았다. 나는 목과 어깨를 떨며 그가 다음 지시를 내릴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이어 그가 내 허리를 들어, 내 몸 전체를 안아 올렸다. 내가 마르긴 했어도 단신은 아닌데, 그는 어렵지 않게 나를 들어 올려 침대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내가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그가 살짝 허리를 눌러 일어나지 못하도록 나를 제지한다.
“아…!”
내 엉덩이에 그의 혀가 닿았다. 완전히 달아올라 발갛게 부풀기 시작한 엉덩이 살에 축축한 혀가 닿으니 죽을 맛이었다. 따갑다. 내 몸 어딘가에 있을 오메가의 부분까지 천천히 자극받으며 함께 떨려 왔다.
나는 훌쩍이며 침대에 머리를 비볐다. 아픈 동시에 흥분되었다. 따갑고 가렵고 자극적이고… 나는 그가 얼른 구멍을 쑤셔 줬으면 했다.
“히엑, 윽… 제발요….”
그가 이어 내 엉덩이에 가볍게 이를 세웠을 때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용서해 주세요, 하고 다시 빌었다. 그때 내 구멍은 축축이 젖어 수축되었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방 안에 자욱한 그의 알파 향내가 퍼졌다. 원민준이 몸을 떼고 은 수갑을 가져와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건조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 가죽 아래 압축된 흥분을 느끼며 허리를 떨었다.
나는 순순히 떨리는 두 팔을 그에게 내밀었고, 그는 두 손을 수갑으로 채운 채 침대에 고개를 처박게 했다. 이윽고 바로 그의 성기가 내 엉덩이를 가르고 들어왔을 때 나는 아프고 좋아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제는 나도 성욕이 파도처럼 내 자신을 정복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애원해 봐.”
그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 압축된 흥분이 나는 못내 좋았다.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 점이 좋았다. 도리어 불쾌할 만큼 강렬한 정욕을 나와 그가 동시에 느끼는 점이 좋았다. 나 같은 열성도 누군가를 발정시킬 수 있는 오메가라는 것이 좋았다.
“안에, 해 주세요, 쑤셔 주세요, 주인님.”
나는 할딱이며 끊어 말했다. 이어 민준이 몸을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기에 맞추어 허리를 흔들었다. 그의 분노만큼이나 열정적인 성교였다. 나는 그의 움직임이 끊길 때까지 평소보다 높은 교성을 지르며 구멍을 조였다 풀었다.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엉덩이가 아직 욱신거렸다. 무언가가 코를 찌르는 느낌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부스스 눈을 떴다.
“윽.”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에 얹히는 느낌에 놀라 눈을 뜨자 눈앞에 새파란 눈동자 한 쌍이 보인다. 민준의 여동생이 맡기고 갔다는 고양이였다.
고양이 이름이 특이하게도 거북이라고 했었지. 고양이가 핑크색의 작은 코를 벌름대며 가슴 위에 올라가 내 얼굴 냄새를 맡고 있었다.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앞발로 내 가슴을 꾹꾹 누르는 것이 약간 아팠다.
“으….”
고양이가 수염으로 나를 찌르다 우연인지 내 입술에 뽀뽀했다. 가슴이 지잉 떨리는 것 같았다. 너무 귀엽잖아. 한 번 더 뽀뽀해 주지 않을까 해서 목을 길게 빼고 있는데 고양이가 냐아, 하며 꼬리로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요물이다. 용기를 내서 고양이의 미간 사이를 살살 긁다가 고개를 돌리니 문간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원민준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조금 당황해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가 내게 다가와 침대 옆에 앉았다.
“아픈 덴 없어요?”
“엉덩이가 조금….”
“이따가 약 발라 줄게요.”
네,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차려 놨어요.”
어젯밤의 열락에 아직도 배 속이 뜨거운 것 같았다. 근육이 조금 아프고 엉덩이가 약간 쓰라린 것을 빼면 괜찮았다. 나는 잠이 덜 깨 배시시 웃었다.
속궁합이 잘 맞는 알파와의 격렬한 섹스. 그리고 상대가 차려 주는 아침. 새하얗고 예쁜 고양이까지 나쁘지 않은 아침이었다.
물론 어제 그에게 맞거나 다그쳐질 땐 조금 무서웠지만. 오메가의 몸이라는 건 고통보다 쾌락을 가장 크게 기억하는 것 같다. 격렬한 섹스를 마치고 나면 쾌락의 기억이 가장 강하게 남곤 했다.
“아침부터 서윤 씨 웃는 얼굴을 보니 좋네요.”
민준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팔을 잡고 조심스레 일으켰다. 그의 말에 행복감 같은 감정이 몽글몽글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나도 기뻤다.
“거북이가 귀여워서….”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그를 보고 습관적으로 한 번 더 웃었다.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따뜻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보고 싶은 모습이네요.”
그가 고양이를 어루만지는 잠이 덜 깬 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괜히 마음속이 간지러워졌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었으면 했다. 깨고 나면 아, 애틋하고 달콤한 꿈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꿈.
식탁 위에는 그가 방금 만든 따뜻한 스크램블드에그와 토스트, 구운 소시지가 차려져 있었다. 가정부가 준비해 놓고 갔을 것이 분명한 샐러드도 있었다. 성욕이 왕성해진 만큼 식욕이 늘어난 나는 그것을 부지런히 먹었다.
“요즘 잘 먹어서 좋습니다. 집에서도 저녁 잘 챙겨 먹어요.”
일단 밖에서 식당 같은데 가면 잘 먹는 나지만, 굳이 집에서 밥을 잘 챙겨 먹는 건 귀찮아하는 편이었다. 혼자 산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나를 위해 뭘 차려 먹는 일은 쉽게 버릇이 들지 않았다.
“혼자 밥을 잘 못 먹어서…. 그래도 요즘은 저녁 잘 챙겨 먹어요.”
그가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는다.
“참 잘 흘려요, 서윤 씨”
“네?”
“평일에도 서윤 씨 저녁 자주 먹여야겠네요. 마음 같아선 매일 끼고 밥 먹는 것 보고 싶어요.”
그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귀 끝이 붉어졌다. 원민준이라는 남자는 정말 나쁜 남자다. 그럴 맘도 없으면서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
민준이 지금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고 해도, 앞으로 내가 가지게 될 진심과는 굉장히 다른 종류의 것일 텐데. 아무리 관심을 주고 다정하게 대해 준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정식으로 함께할 수 없는 상대와의 로맨스는 결국 그저 그렇게 끝난다.
“여행 가기 전에 뭐 필요한 것 없어요?
“일본 여행이요?”
“네, 며칠 안 남았잖아요. 내 카드 줄 테니까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사요. 여행 가려면 필요한 것 많잖아요. 한도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카드는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나에 대해 화가 풀린 모양인지, 혹은 도리어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그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은색 카드였고 그의 명의였다. 나는 달걀을 입 안에서 오물대며 눈치를 봤다.
“저 필요 없는데….”
그에게 받은 생활비만으로 이미 부담 백배였다. 돈도 연희처럼 써 본 사람이 써 보는 거지, 나는 돈을 제대로 쓸 줄 몰랐다. 별로 필요한 곳도 없었다.
가끔 좋은 클럽이나 바, 레스토랑에 가긴 했지만 그건 모두 연희가 가자는 곳일 뿐이었다. 그 외엔 집에서 조용히 보내는 편이었다.
“가지고 가서 내가 저녁 못 챙겨 줄 때 맛있는 거 사 먹어요. 간식도 사 먹고, 친한 회사 팀원 있으면 이걸로 밥도 사 주고, 누가 괴롭히면 이걸로 뇌물이라도 사서 주고.”
“…….”
괜히 좀 부끄럽다. 나는 손을 꼼지락 움직였다. 누가 나를 이렇게 돌봐 준 적이 있던가. 이래서 오메가들이 알파한테 미치고 버림 받고… 반복하나 보다.
남보다 빼어날 것 없는 나지만, 그런 만큼 다른 오메가들과 다를 것도 없는 나였다. 잘해 주면 금세 흔들린다. 민준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를 보다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무 말 않는 걸 보니 회사에서 누가 괴롭히진 않나 보네요.”
“아….”
떠본 건가? 같은 팀원들이 내 험담… 음담패설 비슷한 것을 몰래 하는 걸 들은 적은 있지만, 오메가가 그런 일을 당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땐 창백해질 정도로 화가 났지만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니었다. 팀원들이 천사표는 아니었지만 과하게 모난 사람도 없었다.
“괜찮아요, 팀원들 다 좋아요….”
“회사 계속 다닐 거예요?”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오메가가 대기업에 취직하기도 힘들고, 장기 근속하는 건 더 힘들었지만… 나는 회사를 오래 다니고 싶었다.
“저… 회사 일 열심히 해요, 매일 칼퇴근하는 것 같아도 저기, 야근하는 날도 많고….”
“알아요. 서윤 씨 팀 부장님이 서윤 씨 성실하다고 그러던데.”
원민준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그의 커피 잔에서는 진한 원두 향이 났다.
“아마 늦어도 1,2년 안에 사업부를 옮길 것 같습니다. 그때 맞춰서 서윤 씨도 회사 그만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다른 일 하고 싶으면 알아봐 줄게요. 카페 같은 것 하나 차려도 괜찮고.”
“네…?”
“더 배우고 싶은 것 있으면 공부도 괜찮겠네요. 대학교는 졸업했죠? 공부하고 싶은 것 있으면 한 1년 쉬면서 대학원 준비하는 것도 괜찮고. 배우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요.”
이 역시 부담 백배였다. 나는 지금 그에게 받는 돈들도 헤어지면 한 푼도 남김없이 돌려줄 생각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고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이런 관계도 멘털이 좋아야 하나 보다.
“저 일 그렇게 못하는 편 아니에요.”
“해고하려는 게 아닙니다.”
원민준이 내가 참 말귀 못 알아듣는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나는 괜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서윤 씨는 마음이 약해서 회사 생활에 안 맞는 것 같아서요.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는 것도 괜찮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이서윤 씨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아….”
오메가가 번듯한 직업 가지기 얼마나 힘든 줄 몰라서 하는 소리 같다. 또다시 그의 변덕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그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정말 회사까지 그만두게 되는 줄 알았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적어도 그가 부를 때 회사 핑계를 대며 못 가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로, 평온하게 살고 싶다.
***
다음 날 나는 그가 시킨 대로 집에서 알몸으로 나 이서윤은 원민준 주인님의 오메가입니다, 라는 글자를 50번 썼다. 손으로 계속 쓰다 보니 손가락이 아팠지만 최대한 예쁜 글씨로 꾹꾹 종이에 눌러썼다.
다 쓰고 나니 묘하게 속이 술렁거리고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그의 오메가였다. 기한은 원민준이 내게 질릴 때까지. 비록 약점으로 매여 있는 사이라고 해도….
“시킨 건 다 썼어요?”
다음 번 만남 때 나는 직접 빽빽하게 쓴 그 종이를 가져갔다. 그것을 보여 주면서 나는 글씨가 못났다고 그가 얼굴을 찌푸리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원민준이 그걸 빤히 보았다.
50번을 쓴 것이 맞는지 줄 수를 체크하는지도 몰랐다. 한참 보다가 원민준이 종이가 구겨지지 않게 그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글씨가 귀엽네.”
원민준이 퍽 만족한 듯 말하자 나는 안심했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기대감이 슬며시 치밀어 올랐다. 이다음 그에게 칭찬을 받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블로프의 개가 다 됐다.
“잘했습니다. 이제 버릇도 괜찮고 말도 잘 듣고, 굉장히 예뻐요.”
원민준은 내가 제출한 빽빽이 종이를 보고 대단히 만족해서 몇 번이나 내게 잘했다고 칭찬했다. 쓰면서는 별짓을 다 시킨다고 욕을 했는데, 그가 과장해서 칭찬해 주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시간이 약간 걸리긴 했지만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
“이리 와요.”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다가갔다. 원민준이 가볍게 나를 포옹하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상냥한 어조였다.
“진심으로 쓴 거죠?”
“네? 아, 네….”
그는 나를 꼭 끌어안고 내 귀에 주입하듯 속삭였다. 누구 오메가라고요?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주인님 오메가요. 매일매일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확실히 취하는 것 같다. 이 상황에.
***
어느새 연희와 원민준 이사의 커플 여행이 바짝 다가왔다. 원민준 이사 생일 기념 일본 여행. 내가 덤인 여행이다. 당일 아침에 나는 퀭한 얼굴로 공항에 도착했다.
연희와 나의 숙박비는 물론 비행깃값까지 모두 원민준이 지불했다. 공항으로 도착하자 민준의 비서 중 하나가 공항 수속을 도와주었다. 정신 차려 보니 나는 그의 전용기에 올라 있었다.
막연히 그가 퍼스트 클래스를 예약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전용기가 준비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텅 빈 소형 비행기에 나와 연희, 민준 셋만 있게 되자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거 한 번 띄우려면 돈도 많이 들 것 같은데….
벌써부터 화려한 바캉스 룩을 입고 와 당연한 듯 캐리어를 항공사 직원들에게 맡기는 연희나, 아무렇지 않게 승무원이 주는 음료를 마시며 비행기에 앉아 있는 원민준 씨.
그리고 그 사이에 편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온 나는 이질적이었다. 일류 패션 잡지의 모델 사이, 누가 잘못 배치해 놓은 소품 같았다.
연희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내내 나를 모른 척하고 있던 민준이 말을 걸었다. 이전에도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간 적은 있지만 이런 비행기에 타는 건 처음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부자인 건지. 나는 상상하기도 힘든 원민준 이사의 환경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혹시 비행기 처음 타 봅니까. 무서워서 그래요?”
“아뇨, 처음은 아닌데… 전용기 같은 걸 타고 갈 줄은…. 티켓값… 드리려 했는데 너무 비쌀 거 같고.”
나는 횡설수설했다. 그가 피식 웃었다.
“프라이빗 제트예요. 한국에 전용기 가진 사람 별로 없어요.”
“그게 뭔데요?”
“전세기는 전세기인데 잠깐 빌린 거예요.”
민준이 내게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개인 소유 비행기가 아니라, 일 년간 몇십 시간 정도를 사용하기로 연초에 계약을 해 놓은 임대 비행기 개념이라고 했다. 올해 해외에 나갈 일이 생각보다 없어서 남은 시간으로 일본에 가기로 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1년 임대 비용이 어마어마하겠지만 자세히 묻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나 한 명 탄다고 돈이 더 들진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겨우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안심되는 이야기였다. 사치스럽고 좋은 것도 누리던 사람이나 누리는 거다. 나는 분에 맞지 않는 일은 부담스러워하는 편이었다.
“제트 비행기라, 조금 흔들릴 겁니다. 너무 무서우면 말하고.”
그가 연희가 없는 사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연희가 들어간 화장실 문을 응시했다.
화장실 문이 열리기 전 민준은 손을 떼어 냈다. 화장을 고친 듯한 연희가 나오자, 민준이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중 나온 승무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입국 수속은 항공사 직원들이 캐리어를 옮겨 주는 동안 직원 중 한 명이 우리 여권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끝났다.
보통 입국 수속은 줄을 서서 공항 직원들의 검문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프라이빗 비행기를 타고 오면 수속도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게 10분도 걸리지 않아 공항을 나오자, 검은 차 한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W 계열사의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는, 단정히 인사하고 민준에게 차 열쇠를 넘겨주었다.
민준은 수고했다 말하고 벤츠 운전석에 올라탔다. 연희는 조수석, 나는 뒷자리였다. 나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운전을 하는 민준과 연희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앞자리가 참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그 둘을 구경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더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숲 속에 위치한 오래되어 보이는 일본식 전통 여관이었다. 품위 있는 중년의 일본인 여주인이 나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오래전 보았던 게이샤 영화의 호화로운 여관과 비슷했다. 정원은 넓고 아름답게 일본식으로 조경되어 있었다. 정원 가운데에 있는 그림 같은 작은 연못에서는 비단잉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옛 일본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곳이었다.
우리가 묵을 별채에 다른 손님은 없어 보였다. 아마 그가 여관 전체를 임대했을지도 모른다.
원민준 이사는 일본어도 잘했다. 그가 평소처럼 무감각한 표정을 짓고 능숙하게 일본어로 여주인과 대화하는 사이, 나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연희의 시답잖은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민준 오빠 외국어도 많이 할 줄 안다더라, 뭐 몇 개 국어 하고 그러겠지?”
“천재네.”
“우성 알파잖아. 그러니 우성 알파 아들이라면 있는 집에서 환장들 하지.”
그녀가 푸시시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서 나도 마주 웃었다. 나는 문득 민준의 아름답고 잘생긴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원민준 이사를 보며 평정을 가장하는 일이 힘들어진다. 그가 나를 안던 손길, 내 팔을 죄여 오던 단단한 팔, 내 둔부를 세게 내리치며 부풀어 오르던 그의 손바닥, 그리고 그의 숨결과 입술….
멍하니 있다 보면 계속 그와의 성관계를 생각하고 만다. 생식 능력이 떨어진다는 열성 오메가인데 그러면 성욕은 왜 이리 강하게 태어난 건지. 내 처지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알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으로 태어나면 좋았을 텐데. 매력적으로 태어난 그 다음 성욕이 강한 게 이치에 맞는 거지. 성욕만 강하면 어쩌라는 건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그를 거역할 수 없어 이번 여행에 따라왔다. 그러나 역시 오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남의 커플 여행에 따라온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었다. 원민준 이사도 생일이라면 연희랑 둘이 오붓하게 지내는 편이 좋을 텐데….
여자 베타, 그리고 남자 우성 알파와 오메가라는 상황 때문인지 여관의 여주인은 우리가 각자 쓸 수 있는 노천온천을 따로 배정해 주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온천욕을 핑계로 자리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원민준과 연희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면 될 것 같았다. 이런 계산을 하는 나의 처지가 새삼 우울해졌다.
저녁 식사 코스는 아주 길었다. 음식은 모두 좋았다. 여관의 종업원들이 무릎을 꿇고 식사를 하나하나 상 위에 차려 주었다. 회는 신선했고 꽃잎으로 장식 된 가이세키 요리(일본 연회용 코스 요리) 접시들은 예뻤다. 연희는 사진을 몇 장 찍어 SNS에 올렸다.
냄비 요리는 모두 개인용으로 1개씩 준비되어 부드러운 와규와 신선한 야채들이 함께 끓고 있었다. 달걀 요리까지도 모두 좋은 재료를 사용한 것이었다. 평소 먹던 맛과 달랐다.
음식은 맛있었고 황공할 만큼 호화로웠지만 나는 계속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음식을 깨작댔다. 아까부터 속이 조금 쓰라렸지만 티를 내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강제로 끌려오긴 했지만… 이곳에 오기 위해 민준은 많은 돈을 썼을 것이었다.
원민준은 내게 딱히 말을 걸지 않고 주로 연희와 잡다한 이야기를 했지만 내내 나를 못마땅한 듯 힐끔거렸다. 어쩌면 나를 데려온 일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전에는 원민준의 앞에서 억지로 밝은 척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연희와 함께 있는 그를 보면 나는 서글퍼졌다.
이제 억지로 웃기도 힘들었다. 연희의 말 상대도 해 주고 분위기도 좋게 만들어 주리라 생각하고 덤이나 다름없이 데려온 나였을 텐데. 식사 내내 죽을상이니 그가 언짢을 만도 했다.
“참, 맞다 서윤아. 너 소개팅 있잖아.”
“응?”
연희가 정말 뜻밖의 화제를 꺼냈다.
“있지 민준 오빠, 얘가 그런 애가 아닌데 갑자기 저번에 소개팅하겠다고 하더라고. 저번에 미진이라는 언니가 얘 보고 소개해 달라고 얼마나 난린지, 서윤이 요새 인기 많다?”
“연희야, 나 그거 안 한다고 했잖아. 그리고 인기는 무슨….”
내 가느다란 항변은 못 들은 것처럼 백치 천사 서연희는 해맑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를 우연히 한 번 보고 소개해 달라고 한 미진 언니라는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미인인지, 취미로 모델 하고, 일반 알파지만 뭐 거의 우성에 가까울 만큼 빼어나고, 거기다 부자고….
민준 앞에서 누가 부자라고 자랑하는 서연희의 신경이 대단도 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아도 정도가 있지.
“그래두 미진 언니 진짜 괜찮다니까? 그리고 내가 소개팅 후보자들 몇 명 뽑아 봤는데, 들어나 봐, 민준 오빠도 좀 봐. 진짜 다들 괜찮은데…. 하, 우리 서윤이가 맘만 먹으면 장난 아닐 텐데 너무 겸손해. 나랑 같이 좀 골라 보자. 서윤아 사진 좀 봐. 이 오빠는 부동산 투자 회사 하는데, 나이가….”
본격적으로 자기가 맘대로 물어 온 소개팅 상대자들 프로필을 읊기 시작하는 연희 덕에 내 머리가 멍했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만나 달라고 부탁한대도 만나 줄 리도 없거니와, 아까부터 나를 언짢은 눈으로 보던 원민준이 더욱 짜증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본처는 따로 있을 수 있어도 자기랑 자는 오메가가 샛서방질하는 꼴은 못 보는 것이 알파였다. 대단히 무신경한 서연희는 그의 분노를 눈치도 못 챈 듯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나 혼자 속으로 히익, 히익,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서윤 씨한테는 안 어울릴 것 같네. 서윤 씨 좀 내성적인 타입이잖아.”
원민준이 미묘하게 짜증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보통 내성적인 타입이 알파들에게 선호받는 건 아니지.”
그가 차갑게 덧붙였다. 듣고 보니 내 욕 같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와 정기적으로 자고 있는 사람은 원민준이다. 이렇게 말해 봐야 내 취향은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는 커밍아웃밖에 더 되나.
크게 마음이 쓰이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풀이 죽었다.
“오빠 말 묘하게 한다? 그런 말 들으면 서윤이 기분이 어떻겠어.”
“아니야, 나 괜찮아. 틀린 말도 아닌데 뭐. 오메가라고 해도 나도 남자야, 알파라고 다 좋아하고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냥 밥이나 먹자.”
연희가 발끈해서 민준에게 뭐라 쏘아붙이기 전에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원민준이 나를 약간 차갑게 보았다. 그리고 그걸 나만 눈치챘다.
잠시 뭐라고 툴툴대던 연희는 새 음식이 나오자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민준에게 조잘대며 이런저런 음식을 품평했다. 마주 보고 둘러앉은 그 둘을 보니 마음이 시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은 사귀는 사이였다. 그림처럼 어울린다.
그래도 서울에 있을 때는 둘이서 마주 앉아… 민준과 밥을 먹은 적도 많았는데. 그렇지만 이쪽이 현실이고 나와의 시간은 잠깐의 일탈이려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전에 내가 원민준에게 그만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차라리 연희와 헤어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란히 앉아 간간이 웃으며 대화를 하는 둘을 보니 그 말도 그저 협박용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연희에게 우리 사이를 숨기려면 나는 결국 꼼짝없이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결국 민준은 연희와 헤어질 마음 같은 건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나는 그런 생각을 깨닫고 기분이 묘해졌다.
“서윤아 너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조금 피곤한가 봐. 속이 조금….”
“여관에 말해서 의사를 불러 오겠습니다.”
“어머, 너 손이 왜 이렇게 차, 거의 먹지도 않아 놓고…. 체했어?”
그들은 정말 미안하게도 내게 신경 써 주었다. 원민준은 내 손을 잡은 연희의 손을 보고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겁먹어 더욱 움츠러들었다.
“의사는 무슨요. 나 괜찮아. 그냥 좀 일찍 자면 될 것 같아.”
나는 연희와 민준을 보며 애써 웃었다.
“둘이 시간 보내. 생일이잖아. 나 밥 먹고 먼저 가서 쉴게.”
걱정스러운 듯 보이는 둘을 보며 나는 애써 웃었다. 모처럼 생일이니까 둘이 케이크라도 먹으라고 피해 주는 것이 맞다 싶었다. 저녁 식사 자리 분위기를 미묘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지만.
***
방 배정은 당연하게도 내가 독실, 민준과 연희가 조금 더 큰 커플 룸이었다. 일찍 쉬고 싶다고 하자 여관 종업원 중 한 명이 두터운 비단 이불을 다다미 바닥에 깔아 주었다.
붉고 묘한 색의 이불이었다. 똑같은 이불이 민준과 연희의 방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 위에 하얀 베개 두 개가 나란히 놓인 것을 상상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나는 방 안에 있는 욕실에서 혼자 목욕을 하고 여관에서 주는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일찍 이불 속에 들어갔다. 저녁을 제대로 먹지 않아 허기가 졌지만 식욕은 없었다.
역시 따라오지 말 걸 그랬다. 이전에도 수없이 본 연희와 원 이사의 데이트 장면이지만, 요즘은 점점 더 태연하게 보기 힘들었다.
잠깐 베개에 머리를 댄 것뿐인데 나는 금세 짧은 잠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눈가가 축축했다. 사춘기 청소년도 아닌데 감정이 복받쳐 베개를 눈물로 적시다니, 이건 무슨 청승이란 말인가.
한숨을 한 번 쉬고 창문을 열었다. 이미 하늘이 어둡다. 그날따라 달이 컸다. 어두운 밤이라 정교한 일본식 정원이 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달빛이 그 정원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 몽환적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연희…?
여자 한 명이 여관의 가운을 입고 숲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연희의 뒷모습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이 시간에 산책? 그때 다다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몸을 긴장시켰다 풀었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들으니 민준이었다. 맞은편 벽에 달린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1시였다. 나는 고개만 들어 조심스럽게 그를 보았다. 예상대로 민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민준을 보자마자 물었다.
“연희는요?”
“방에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아까 본 건 다른 사람이었나 보다. 여관 종업원일 수도 있고.
“아까 왔었는데 서윤 씨가 자는 것 같길래 깨우지 않았습니다.”
“네, 오신 것 몰랐어요. 죄송해요.”
나는 작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스탠드 불빛을 제외하고 방이 어두워서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터였다. 나는 내가 운 걸 민준이 몰랐으면 했다.
나는 그가 억지로 밝은 체하며 친한 척하는 내 모습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억지로 미소 지으며 그를 보았다. 그런 가식이라도 떨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연희가 브라우니 구워 왔다고 하던데, 생일 케이크 먹었어요?”
“네, 너무 달아서 제 입맛에는 안 맞더군요.”
요리는 꽝이지만 베이킹은 좋아하는 서연희가 만든 브라우니는 나도 몇 번 얻어먹어 보았는데 꽤 맛있었다. 그래도 내가 자리를 피해 준 덕에 둘이 파티는 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꽤 오래 잤으니까. 4시간, 5시간, 연희와 둘이 파티를 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기엔 충분했겠지. 나는 억지로 웃었다.
“그래도 생일엔, 진짜 여자 친구랑….”
뭐라고 말하려 했는데 말을 잇기 힘들었다. 무슨 말을 해도 구차해 보였다. 나는 내가 느끼는 이 어두운 감정을 민준이 몰랐으면 했다. 질투 비슷한 감정.
다시금 비참함과 자기혐오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가끔 내게 보여 주는 민준의 다정함에 기대면서도 연희와 그의 일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다는 나의 이율배반적인 마음.
그가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나는 몸을 더욱 움츠려 무의식중에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가 짜증스럽다는 듯 손을 뻗었다.
“뭐가 문제라 이렇게 울었어요?”
민준이 세심하게 내 이마를 쓸자 나는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나는 내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그에게 감정이 생긴 내가 싫었다.
아무리 관계를 강요당했다고 해도 결국 나는 멋대로 감정을 키워 버렸다. 남들은 잘만 쿨하게 산다는데 왜 나만 항상 구질구질하게 사는지 모를 일이다. 이를테면 이루어지지 않을 상대에게 집착하게 되는 일들 같은 것. 나는 고개를 숙이고 민준에게 작게 말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전 그냥 내일 아침 비행기로 가면 안 될까요, 비행기 티켓은 제 돈으로 살게요.”
민준은 대번에 찌푸리더니 단칼에 잘라 냈다.
“이틀만 버텨요, 금방 집에 돌려보내 줄 테니까.”
그가 달래기 귀찮다는 태도로 말했다. 나는 그가 정말 미웠다. 결국 정부 취급 할 거면 주제라도 알게 해 줘야지, 둘이 있을 때면 왜 그렇게 잘해 주는 건지.
‘매일 아침 보고 싶은 모습이네요.’
‘정말 예쁩니다.’
‘웃는 얼굴을 보면 좋아요.’
나를 흔들어 놓았던 말도 결국 나를 마음대로 다루기 위하여 했던 말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나는 결코 그의 옆자리에 당당히 서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이 보기 싫었다. 차라리 어두운 방에 혼자 있고 싶었다.
“가서 연희랑 있어 주세요. 전 더 잘래요.”
나의 그 버릇없는 말이, 뭐라고 집어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원민준의 어떤 점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일종의 가학심 포인트 같은 것 말이다.
민준의 표정이며 행동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다가 가만히 내 턱을 잡고 강제로 얼굴을 보게 만들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한테 할 말이 그게 다인가 봐요.”
“저….”
“제일 중요한 것이 뭐라고 했죠.”
“주, 주인님 기분이요….”
“잘못한 것 없어요?”
저녁 식사 자리에 화제로 오른 내 소개팅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민준의 눈치를 보았다.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다른 알파들을 찾았나 봐요, 지금 혼자 서울로 돌아가라고 허락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게 뭡니까.”
“…아니에요…. 정말로.”
“정말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평소라면 벌써 몇 번이나 그에게 죄송합니다, 하고 빌었을 나였지만 오늘은 그러기가 싫었다. 민준이 한숨을 쉬더니 옷장을 열었다. 안에는 가운이 한 벌 더 있었다. 그가 가운에서 허리띠를 빼냈다. 이어 내게 다가와 내가 입은 가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내가 입은 가운을 풀었다. 허리띠가 스르르 풀렸다.
“아….”
내 가운에서 빼낸 것까지. 두 개의 허리끈이 그의 손에 들렸다.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뻔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조심스레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가 바로 내 뒷덜미를 잡아 앉혔다.
그의 손이 올라가는 것을 본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흡, 하는 소리를 냈다. 민준이 내 두 손을 잡아 앞으로 내밀게 했다. 그리고 양 손목을 한꺼번에 묶었다. 설마 여기서… 옆방에 연희가 있는데…. 나는 파랗게 질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지금은 안 돼요, 저기, 돌아가서….”
“조용히 해요.”
그가 나직하게 어르며 체향으로 나를 지그시 눌렀다. 나는 그것만으로 일순 숨이 막혀 마른침을 삼켰다. 나 같은 열성에게 우성 알파의 체향이란 조금만 맡아도 기함할 만한 것이었다. 민준이 이어 내 몸을 거칠게 눕혔다.
그리고 다리 쪽으로 내려가 내 다리를 끈으로 칭칭 동여맸다. 가운 앞섶이 온통 벌어져, 나는 순식간에 반라나 다름없는 상태로 그에게 꽁꽁 묶이는 처지가 되었다. 이게 그의 말에 말대꾸를 한 대가인 것이다.
자신은 방금까지만 해도 연희와 한 방에 있다가 나왔으면서…. 나는 남을 원망하고 기억해 두는 성격이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가 진심으로 원망스러웠다. 조금은 이 상황에 미안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연희에게는,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닌가.
“소리 안 지를 수 있어요.”
나는 가만히 민준을 응시하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때리세요. 연희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요. 화가 나셨다면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나는 조용히 다음 단계를 기다렸다. 민준의 손이 치켜 올라가는 단계. 그는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정말로 그가 미웠다. 내가 이대로 그를 더 미워할 수 있게 그가 당장 나를 때리고 욕하면 나을 것 같았다. 내 가슴을 후벼 파는 이 감정이 싫었다. 내 자신만큼 그가 미웠다.
“서윤 씨.”
그가 내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서윤 씨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는 서윤 씨를 놔주지 않을 겁니다. 서연희한테 아직 마음 남은 것처럼 구는 것도 거슬리고, 또 틈만 나면 도망칠 태세인 것도 보기 싫고요. 일단 오늘밤 동안 생각해 보고 내게 할 말이 생긴다면 전화하세요. 저는 옆방에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민준은 묶인 내 두 손 앞에 나의 휴대폰을 떨구어 주었다. 두 손이 묶였지만 손가락은 자유로웠다. 액정을 눌러 전화 정도는 걸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다다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는 연희가 있는 방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저렇게 탐욕스러운 사람이 있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부가 개기는 건 싫은데 연희랑 할 건 다 해야겠고.
나는 이불에 고개를 묻었다. 주제를 잘 아는 나였지만, 이 상황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정식 상대가 될 수 없는 그런 첩 같은 존재였다. 비록 내가 원하지 않은 관계라고 해도…. 그래서 그가 여자 친구와 함께 있는 방의 바로 옆방에서 이렇게 묶여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와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여자 친구가 있는 옆방에서. 그에게 말대답을 했다는 이유로.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 몸을 관통하고 날뛰었다. 그가 너무 밉다, 그의 옆에 누워 있을 연희가 너무 야속했다.
그녀는 내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모든 것에 대한 원망이 내 몸을 둘러싼다. 원래 결박 후에 방치되는 것에는 약했다. 원래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는 나였지만, 나는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한 채 몸을 떨며 버텼다.
무엇인지 모를 악에 받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귀를 기울이자 옆방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연희와 그가 사랑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가슴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와 연희의 방은 벽을 하나 두고 있을 뿐이지만 내게 다른 세상처럼 멀게 느껴졌다…. 나는 두꺼운 이불에 몸을 묻고 손발이 묶인 채 숨죽여 울었다.
나는 내가 주제를 참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불 아래서, 내가 자란 큰 I가의 저택과, 넓은 정원과 그 집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진짜 조랑말을 생각했다.
만일 내가, 그 집에서 태어났다면, 그 집의 아이였다면 그랬다면… 지금 원민준 이사의 옆자리에 누워 있는 건 나겠지. 연희가 아닌, 그와 같은 이불을 덮고 베개를 베는 건 나겠지….
원민준의 특이한 취향의 성욕 처리를 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의 배우자감으로 그의 옆에 누워 있는 건 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자리는 그의 옆 베개가 아닌, 밧줄과 빈 이불로 대변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긴 밤을 홀로 오래도록 보내게 될 것이다.
영원히 가족조차 없는 몸으로, 그렇게….
그러나 나는 이미 원민준에 대해 감정이 생겨 버렸다. 가족도 없이 평생을 이렇게 비참하게 살수는 없었다.
짧은 잠에서 눈을 떴을 때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쯤 되었다. 원민준이 내 앞에 앉아 내 손발을 풀고 있었다. 손발이 자유로워졌는데도 나는 팔다리가 저려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끔찍하게 목이 말랐다. 민준이 물을 따라 주었고 나는 그것을 조금씩 마셨다. 살 것 같았다. 3시간 넘게 묶여 있다니, 범죄와 연루되지 않는 한 나 같은 소시민은 좀처럼 겪을 수 없는 일이다.
“힘들지 않았어요? 오늘은 끝까지 버티네요.”
그가 한다는 말이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저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내지 않았다.
“그런 거 좋아하시잖아요. 그러니 해야죠.”
나는 작게 대답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속이 여전히 쓰라렸다.
“좀 더 금방 나를 찾을 줄 알았습니다.”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전화? 소리라도 쳐서 그를 부르면 연희가 깰 거고, 자기 남자 친구가 나를 반라로 옆방에 묶어 둔 걸 보게 되겠지.
그럼 내가 연희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이랑은 한 번도 섹스한 적 없고 오늘 우연히 묶였어. 이런 사람인 걸 몰랐지 뭐야. 뭐 이런 변명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밉습니까.”
“이 상황이요.”
“내가 있어서 화가 나는 거예요, 연희가 여기 끼어 있어서 화가 나는 거예요?”
“제가 화가 난다고 뭐가 달라져요. 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어차피, 당신한테 진지한 상대도 아니잖아요.”
나는 원민준이 이 말을 부정해 주길 바랐다. 적어도 내가 그에게 결혼감이 아닌 것을 미안해해 주길 바랐다. 그래도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맹세라도 해 주길 바랐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우리 사이가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저는 서윤 씨와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 헛된 기대는 하고 싶지 않아요. 연희와 헤어진다고 해도 다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야 할 겁니다.”
“왜요?”
나는 수많은 이유를 빤히 알면서도 그에게 멍청하게 물었다. 왜인지는 나도 빌어먹을 정도로 잘 알았다. 내가 가난해서, 내가 무엇도 아니라서, 내가 이서윤이라서, 내가, 그의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적어서.
“우성 알파 자식을 낳는 것이 저의 의무니까요.”
차갑게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맞다. 우성 알파라고 해도 열성 오메가를 임신시킬 확률은 베타 여자나 우성 오메가에 비하여 현저히 낮다. 그리고 그 아이가 알파일 확률도 현저히… 낮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에게 우성인 자식을 안겨 줄 수 없다.
그 말이 내 머리를 차갑게 일깨웠다. 갑자기 몸에 오한이 들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옆방에서 연희랑… 둘이 누워 계시는 모습을 상상하니 화가 났어요.”
나는 그에게 작게 말했다. 진심이 담긴 사과는 아니었고 나는 그저 빨리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그가 한숨을 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원민준은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결국 나는 다음 날 아침 먼저 귀국했다. 민준은 차를 불러 주었고 공항에서 원민준의 사람들이 수속을 밟아 주었다. 연희와 민준은 이틀을 더 일본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그사이 내 머리는 조금 더 차가워져 있었다.
문득 원민준의 생일을 망쳐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괜찮은 생일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 예쁜 약혼녀와, 또 자기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급이 조금 떨어지는 오메가와 함께하는 밀월여행. 모든 알파 남자들의 꿈이 아닌가.
짐을 정리하다가 민준의 생일 선물로 샀던 M 브랜드의 열쇠고리를 발견했다. 여행 마지막까지 살까 말까 망설였다. 그래도 빈손으로 가는 건 염치가 아닌 것 같아 전날 몰래 백화점에 들러 사 왔었다. 가지 말아야 할 여행에 시킨다고 따라간 것도 부족해 생일 선물까지 곱게 사 들고 갔으니. 나의 멍청함에 쓴웃음이 났다.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물론 처음엔 원민준과의 관계가 내키지 않았지만 그는 내게 나름대로 잘해 주었다. 내 일상을 신경 써 주고 좋은 집을 마련해 주고, 내게 생활비까지 주었다. 그리고 그와 하는 성관계는 대부분 지나치게 좋았다.
그래서 나는 원민준에게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일본의 여관방에서 묶여 있으면서 나는 하룻밤 동안 그를 미워했다. 종래에는 연희까지 미워했다. 그는 결국 내가 연희를 원망하게 만들었다.
원민준은 나에게 서연희를 빼앗아 갔고 그녀에 대한 내 애정까지 빼앗아 갔다. 나는 행복했던 적은 없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가난했지만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은 없지만 주인공들 사이의 괜찮은 조연이었다. 연희나 시우 같은 빛나는 사람들의 그림자로 있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원민준을 만났기 때문에 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게 되었다.
민준이 나에게 잔인하게만 굴었다면 나는 다소 불행해졌을지 몰라도 내 자신을 이렇게 싫어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참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조금은 미워해도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원민준을 이용하여 아이를 가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도망쳐 나만의 가족을 만들 것이다. 이건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였다. 우성 알파의 정자가 정자 마켓에 나온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구입할 돈이 없었다. 또 원민준을 놓치면 다른 우성 알파가 나에게 성적인 관심을 보여 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이번 세상에는 다신 없을 거다.
원민준은 우성 알파인 자식을 원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진지한 연애 대상으로 고려할 수 없었다. 나는 반대의 이유로 그를 단순한 섹스 파트너로만 볼 수 없었다. 나는 가족을 원했다. 나는 우성 알파가 아니면 임신할 수 없는 열성 오메가인 몸이었다.
아마 아이를 가지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에게는 쓸모없을 오메가 자식을 낳을 것이었다. 얄궂게도 열성 오메가는 힘들게 임신을 해도 대부분 자식도 일반이나 열성 오메가였다. 열성이면서 왜 우성 유전자로 발현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주 희박하게 열성 오메가가 우성 알파를 낳을 수도 있지만 확률상으로 5%도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원민준에겐 필요 없을 오메가 자식이든 베타 자식이든 가지게 된다면 온전히 나만의 아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가지고 나면 원민준의 앞에서 사라지면 될 터다.
원민준은 귀국하자마자 내 집에 왔다. 나는 그가 굉장히 화가 나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때리겠다면 맞을 것이고 묶겠다면 묶일 것이다. 화를 낸다면 빌 것이었다.
나는 조금 주저하는 태도로 문을 열어 주고 그를 맞이했다.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반성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애썼다.
나는 이제 이 사람을 이용할 것이니까, 내가 목적을 이루기 전에는 나는 원민준이 필요하다.
“오셨어요.”
그는 일본에서 사 왔다며 내게 이탈리아제 구두 상자를 내밀었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면 구두 선물은 안 했을 그였다. 보통 신발을 사 주면 도망간다고 하니까.
구두만 해도 기백만 원은 넘는 브랜드의 것이었는데, 그것도 부족한지 병아리 모양 만주며, 진공 포장된 케이크며 초콜릿까지 바리바리 사 와서 안겨 주었다. 내가 먼저 귀국한 후 그래도 조금은 내 생각을 한 것 같아 그가 재미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쩌면 내가 우는 것을 보고 조금은 미안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닐 가능성이 더 높지만. 어쨌든 원민준의 태도로 볼 때 적어도 지금 당장은 나와 헤어지고 싶어 하진 않는 것 같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맑게 웃었다.
“온천 하러 간다더니, 거기서도 쇼핑하러 갔었나 봐요. 이거 전부 연희가 골라 준 거예요?”
“3일 중 반을 쇼핑하는데 쓰더군요. 전부 제가 직접 골랐습니다.”
“연희 쇼핑 따라다니느라 고생 좀 하셨겠네요.”
나는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 주려 애썼다. 그는 조금 수상하다는 듯,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태연한 체했다.
사실은 나는 전혀 태연하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함께 눈을 뜨는 사람이, 퇴근하고 나를 위한 저녁을 사 오는 사람이, 나를 묶고 때리고, 구속하도록 허락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혀를 섞는 꼴은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오메가들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약속할 수 있어 누군가를 독점하겠는가. 누군가를 보호해 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영원히 사랑받을 자신도 없다. 또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우성 알파가 아니면 아이를 보기도 힘든 나였으니.
그러니 나는 내가 민준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해도 그를 독점하는 것은 애초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념한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그에게 너무나 원하는 것이 생겼다.
“알아서 쇼핑하던데요. 하루 종일 같이는 안 다녔습니다. 저는 주로 기다렸죠.”
그가 조금 쌀쌀맞게 말했고 나는 과장해서 풀이 죽은 척 눈치를 보았다. 내가 연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그였다. 일본에서 그 난리를 친 것이 조금은 미안한지 민준은 약간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밥은 먹었어요?”
“네.”
“이틀 동안 별일은 없었고요.”
“네, 그냥 집에 있었어요, 아무데도 안 가고….”
“외롭진 않았고요.”
“…조금이요.”
민준이 또다시 내게 다정하게 묻자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는 여전히 눈부시게 잘생겼고, 또 내게 나직하게 묻는 어조는 정말 진심 같았다.
이틀간 아무 일도 없이 혼자 집에 있었던 참이라 외롭기도 했다. 요 몇 주간 민준과 매일 통화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만났으니까. 간만에 지루한 주말이었다.
“그래요, 저도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외롭게 해서 미안해요. 뭐든지 보상해 줄게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가릴 것이 없으니 나는 민준에게 적극적으로 달라붙기로 했다. 내가 성공할 때까지는 민준의 관심이 내게서 식으면 안 되었다.
나는 민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누군가의 오메가가 된다는 것은 이럴 것일까. 오랜만에 맡는 그의 체향이 퍽 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페로몬을 독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체향을 맡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면 얼마나 좋을지…. 적어도 내가 아이를 가질 때까지만이라도…
“이제 다 괜찮아요.”
나는 그에게 기대도 될지 망설였다. 그러자 민준이 먼저 내 어깨를 안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언젠가 내가 원할 때 이 사람을 떠나리라는 내 결심은 확고했다. 그러나 내 몸과 페로몬은 줄곧 그를 원했다. 그를 더 유혹해서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었다. 정부라도 좋으니 내 생각을 해 주길 바랐다.
이제 그와의 관계가 끝나는 시점은 내가 정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더 무서울 게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본에서 한 이야기요….”
“네.”
“저… 진지한 상대니 그런 이야기 한 거요. 진심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연희가 말한 건, 정말로 제가 누구 먼저 소개시켜 달라고 한 적은 없어요. 그냥 오해가 생긴 거예요.”
“나도 미안해요. 제 눈엔 서윤 씨가 가장 매력적인 오메가입니다. 사람이 질투를 하면 치졸해지더군요.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었어요.”
나는 그가 이틀이나 지난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데 적잖이 놀랐다. 연희에게 내가 ‘알파들에게 선호받는 타입’의 오메가가 아니라며 나를 나쁘게 말한 일에 대한 사과였다. 그 말을 듣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를 마음대로 다루기 위한 감언이설이라도 좋았다. 나는 내게 사내가 될 수 있는 알파에게 칭찬받아 본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작은 관심에도 기뻐했다.
“네….”
나는 민준의 팔에 얼굴을 묻고 코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 번도 내가 이렇게 그에게 달라붙어 본 적이 없어 경계하는 지도 몰랐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만졌다, 나는 고개를 빼고 턱을 들어 그 손길을 즐겼다. 조금은 비굴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강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차라리 생각이 단순해져 일일이 마음 아플 일도 없을 텐데.
키우는 고양이도 잘 돌봐 주는 그였으니 강아지는 더 잘 돌봐 줄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가 더 손이 많이 간다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비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화내실 줄 알았는데 화를 안 내시니까 좋아서요.”
민준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 모습도 혼이 나갈 정도로 잘생겼다. 나는 아마 잘생긴 얼굴에 약한가 보다.
“정말 파악하기가 힘들어요, 서윤 씨는. 내가 화내면서 혼내 주면 좋아하지 않나요.”
“…….”
나는 귀 끝을 붉혔다. 그가 나를 처벌할 때는 무섭지만 또 굉장히 좋았다. 그가 나를 통제하는 일에 집착하는 것처럼, 나도 그에게 통제받는 데 애착이 있었다.
“좋긴 하지만 무서워서… 화가 많이 나시면 무서워요.”
“오늘은 굉장히 솔직하네요.”
“머리가 좀 식었나 봐요, 싫으시면 쓸데없는 소리는 안 할게요.”
“서윤 씨가 하는 말 중 쓸데없는 말은 없습니다. 가끔 정말 나를 화나게 하는 말은 하지만요. 평소에도 서윤 씨가 하는 말은 모두 잘 듣고 있습니다.”
“저는 늘 잡다한 말밖에 안 하는데요, 전화 통화할 때도….”
“서윤 씨의 일은 무엇이든 제게 중요해요.”
나는 가슴이 조금 짠해졌다. 매력적인 오메가라면 빼어난 화술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지루한 타입이다. 민준의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라곤 할 줄 모르는데도 그는 항상 내 이야기에 집중해 주었다.
몇십 년 후, 어쩌면 원민준은 치정사로 칼에 찔려 죽을 지도 모른다. 나처럼 스쳐 지나갈 오메가에게까지 이만치 잘해 주면 나 다음에 그가 만날 어떤 오메가든 결국엔 그에게 집착할 것이다. 그러나 그 오메가 중 누구든 서연희처럼 그의 본처감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냉정한 사람이라, 오메가들에게 퍽 다정하게 대해 준다 해도 선을 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이 그렇게 화가 났어요?”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었다.
“연희 앞에서 내가 서윤 씨를 깎아내렸는데도 서윤 씨가 그냥 웃길래 굉장히 화가 났어요.”
“왜요?”
“글쎄요, 나를 포함해서 누구든 서윤 씨를 우습게 보는 일이 화가 납니다. 그만큼 내게 진지한 사람이 되었나 봅니다.”
“진지한 사이 아니라면서요.”
“난 세 가지만 빼고 서윤 씨에게 뭐든 다 해 줄 겁니다. 10년 동안이든, 20년 동안이든요.”
나는 그 세 가지가 뭔지 정확히 안다. 임신, 결혼, 주식 증여. 민준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그가 가진 것을 희생시켜야 하는 세 가지다.
그는 자신에게 넘치는 것, 이를테면 돈 같은 것을 나눠 줄 만큼은 나를 좋아하나 보다. 그러나 자신을 희생할 만큼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씁쓸한 일이었다.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에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당장은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모래처럼 흘러 날아갈 감정이고, 그가 말하는 20년 후엔 민준은 아름다운 베타 여자 와이프와 아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었지, 이서윤이라는 사람’ 이렇게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가 최대한 나를 강렬하게 기억해 줬으면 했다.
내가 성공한다면 그는 내 피를 나눈 자식의 아버지가 될 터이니. 적어도 나를 어떤 강한 감정과 함께 기억해 줬으면 했다.
민준이 내 입술에 입 맞췄다. 나는 이제 완전히 중독된 것처럼 달게 느껴지는 그의 페로몬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나 또한 20년 후에도 이 향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당신 눈앞에서 사라지면 어떨까. 당신은 내 체향을 얼마나 오래 기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