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0)

일본 여행에서 돌아올 때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돌아간다는 핑계를 댔었다. 병문안을 온다는 연희를 말리느라 애먹었다. 나는 이제 연희가 어려웠다. 내가 그녀의 남자 친구와 ‘그런 관계’였으니까.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 집에 들른 민준은 그날 밤 나를 안지 않았다. 그는 취향도 아닌 오드리 헵번의 흑백 영화를 같이 봐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나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려 노력했다.

그가 드러내 놓고 미안해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내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 신선했다. 나름대로 미안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나는 원민준이 나를 안지 않고 그냥 잠만 자고 가자 아쉬움마저 느꼈다.

다음 날 새벽 민준은 나보다 먼저 출근했다. 나는 현관에서 그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물었다.

“저… 이번 주엔 속옷은 뭐 입어요?”

“평소처럼 입어요.”

민준이 그렇게 말하면서 뭔가를 억눌러 참는 듯 나를 조심스럽게 만지작대다가 키스했다. 나는 천천히 입 맞추고 떨어졌다. 나는 얼른 민준의 목에 팔을 둘렀다.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야 하기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급하게 하자고 하면 할 수 있었다. 최대한 많이 해야 했다. 생산성이 없는 내 몸은 횟수라도 많아야 임신할 확률이 높을 거다.

나를 끌어안았을 때 민준의 성기는 반쯤 발기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꾹 참고 내 몸을 놓았다. 아마 회사에서 할 일이 많은 것 같았다.

“퇴근하고 다시 올까요.”

“네… 이따 저녁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와서 같이 밥 먹어야겠네요. 저녁 혼자 못 먹잖아요, 서윤 씨.”

“네… 시간 나면 와서 같이 먹어 주세요. 그리고 저, 벌도 받아야 하니까… 빨리…. 죄송해서 뭔가 하고 싶어요.”

나는 민준의 몸을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고작 이틀 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견우와 직녀처럼 이 난리를 쳤다. 알파들이 첩질을 한 번 하면 그렇게 진하게 한다는데 나와 그가 딱 그 짝이겠지. 애틋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나는 나와 그가 우스웠다. 민준이 나를 한 번 꽉 마주 안았다 놓았다.

“갑자기 이러지 마세요. 사람 이상해집니다.”

“뭐가요…?”

“서윤 씨 참 알기 복잡한 타입이에요.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내가 이상한 스위치를 눌러 버리는 것 같거든.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예쁜 짓을 해요.”

그가 내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는 내가 의도적으로 저에게 아양을 떨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다. 나는 긴장해서 그의 눈치를 보며 떨어졌다. 내가 딴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나는 원민준이 여전히 어렵다.

“저… 주제넘은 행동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만졌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너무 예쁘게 구니까 나도 좀 이상하다 싶어서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아요…?”

“딴생각하지 말고 이대로만 해요. 지금 아주 착해요.”

유사 연애, 애인 놀음, 그가 내게 원하는 것들임이 분명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하는 길에 휴대폰으로 임신율을 높이는 방법에 대하여 찾아보았다. 가장 확실한 것은 알파의 러트나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에 동침하는 것이다.

오메가와 알파는 각각 히트 사이클과 러트라고 불리는 발정기를 가지고 있다. 마치 동물처럼. 일반적으로 오메가의 발정기, 히트 사이클이 알파보다 훨씬 잦다. 히트 사이클 시기가 되면 성욕이 굉장히 증진되고 알파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내게 된다.

알파의 러트도 비슷하지만 알파의 러트에는 일반적으로 굉장한 폭력성이 동반된다고 한다. 알파가 러트 시기에 합의 섹스를 한 오메가의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정도는 고소당해도 법적으로 참작이 될 정도면 말 다했다.

문제는, 내가 너무 열성이라는 것이다. 나는 임신 촉진기이자 발정기인 히트 사이클까지 끊긴 지 오래인 오메가다. 듣기로는 사창가의 오메가들이 쓰는 히트 사이클 촉진제가 있다는데. 그걸 구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원민준에게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들키면 그가 나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알파의 러트 사이클은 오메가에 비하여 텀이 굉장히 길었다.

지금 원민준의 비위를 잘 맞춰 두면 러트의 상대 정도는 될 수 있을지 몰랐다. 피임약을 잘 먹고 있다는 것도 어필해야 했다. 나는 날짜를 계산해 며칠째 손대지 않은 피임약 몇 알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그러고 나자,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한 죄책감이 몸을 휘감았다.

연희에게도 민준에게도 이건 못할 짓이겠지. 성공한다고 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내가 아이를 가질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일 아이를 가진다면 나는 멀리 도망쳐서 평생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에게 아버지를 가르쳐 줄 수 없어 슬프겠지만 그들에게 아무 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

그 주에 원민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무슨 바람인지 나를 안지 않았다. 매주 시행되던 훈련이나 교육도 없었다. 민준은 갑자기 나의 태도가 변한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 멘털이 불안정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도 몰랐다. 촉은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성관계가 없다가 흐지부지되면 어쩌지. 이러다 우리 관계가 끊길까 봐 조바심이 났다. 10살 때 가지고 싶어 했던 학용품,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 청소년기의 부모님의 사랑, 첫사랑과의 하룻밤, 나는 평생 동안 내가 정말로 원했던 걸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다. 내가 절실히 바라는 것이 생기자마자 원민준은 나를 안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인터넷 성인용품점에서 직접 SM용품을 구입했다.

원민준은 지킬과 하이드 같은 사람이었다. 하이드는 창녀인 루시에 집착하고 지킬은 약혼녀 엠마를 사랑하지만, 기묘하게 원민준의 지킬과 하이드는 모두 내게 관심을 보였다. 그가 나를 훈련할 때는 엄했지만, 평소엔 그의 지킬은 꿀처럼 다정했다. 나는 그의 또 다른 양면성을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흥분시킬 일이 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SM용품을 구입하기로 한 것이다. 의외로 SM용품은 흔하게 팔았다. 보송한 토끼 꼬리 같은 털이 달린 수갑부터, 진짜 경찰들이 쓸 것 같은 수갑이나, 말에게 쓸 것 같이 생긴 채찍 같은 것들. 그런 건 검색 엔진만 조금 돌려도 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

민준은 내가 화장실에서 시키는 대로 셀프 카메라로 속옷 사진을 찍어 보냈을 때 흥분한다고 했었다. 직접 구입한 가죽 수갑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을 민준의 휴대폰으로 보냈다.

그다음 메시지를 뭐라고 보낼지 고심했다. 페로몬이 좋은 우성 오메가라면 알파를 유혹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텐데.

결국 ‘이거 같이 사용해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지우고 ‘이거 채워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완성시켜 보냈다. 효과가 굉장했다. 민준이 아직 회사에 있을 시간인데 바로 전화가 왔다. 화를 내진 않겠지, 두근대는 심장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이건 뭡니까.”

“저, 수갑이요….”

“몰라서 묻는 것 같아요?”

나는 그의 까칠한 말투를 느끼고 내가 그를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침을 삼켰다.

“그… 하고 싶어서….”

“뭐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이런 것까지 샀어요, 묶인 다음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네….”

나는 멍하니 대꾸했다. 전화기 너머로 민준의 흥분이 느껴져 몸이 약간 떨렸다. 어쨌든 나는, 성공한 것 같다. 내가 그를 유혹하는데 성공했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이 몸을 관통했다.

“많이 하고 싶어요.”

수화가 너머로 숨을 들이키는 소리 외에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하긴 한데, 일단 15분 안에 갈게요.”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해냈다. 열성 오메가인 내가 원민준을 유혹해 내는데 성공하다니, 내가 해내 놓고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급하게 샤워를 했다. 피임약은 미리 먹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 미리 한 알을 화장실에 버렸다. 추궁하면 아침마다 먹고 있다고 말할 요량이었다.

조금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나는 원민준임을 직감하고 바로 현관을 열었다. 급하게 우리 집 문을 연 민준의 눈에는 숨길 수 없이 억눌린 흥분이 있었다. 나는 얌전히 그가 이끄는 대로 카펫으로 끌려가 스스로 옷을 벗었다.

“사진에 있던 게 이거예요?”

내가 거실에 미리 꺼내 놓은 가죽 수갑을 손에 들고 민준이 물었다. 말끝에 거의 으르렁거리는 숨이 붙어 있었다. 그는 냄새를 숨기지 않아서, 내 아랫도리는 금세 축축한 관능에 젖어 그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급히 긍정했다.

“이걸로 묶어 주셨으면 해서….”

“기다리면 어련히 묶어 줄 걸 어디서 이런 싸구려를 사 왔어.”

싸구려랑 고급품도 있나? 내가 어리둥절한 사이 그가 수갑을 머리맡으로 던져 버렸다. 벌을 주듯 손등으로 내 뺨을 살짝 때린다. 나 뭔가 잘못 구입한 건가. 이건 잘한 일이 아닌 건가? 그러고 나서, 그는 나를 묶지도 않고 급하게 키스했다. 정신없이 혀를 얽어 오는 탓에 나는 입 안이 통째로 먹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민준이 내 팔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렀다. 그대로 나는 그를 몽롱하게 보았다.

“오늘 꼬셔 놓고 내빼면 그냥 안 둬.”

“네, 잘할게요.”

나는 몽롱하게 그의 페로몬에 취해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원민준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의 이미 발기한 성기를 물고 핥았다. 그는 이번엔 봐주지 않고 내 입 안을 쑤셨다. 조금 벅찼으나 나는 숨을 참고 꾹 버텼다. 다행히 그가 어느 정도 이성은 있는지 내 목구멍이 약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네다섯 번 쑤시다가 금세 성기를 빼냈다. 빨지 않아도 될 만큼 그의 끝은 이미 젖어 있었다.

“나한테 안기고 싶었어요.”

“네 주인님.”

“그럼 다리 벌리고 구멍 보여 줘 봐요.”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카펫에 등을 댄 채 무릎 사이에 손을 넣어 다리를 벌려 냈다. 내 구멍은 이미 축축하게 젖었다. 온몸이 기대감에 떨렸다. 그에게 안기지 못한 것이 고작 열흘인데. 내 안에 성욕이 모이는 샘이 있다면 이미 꽉 차 흘러넘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조금 두려워졌다. 나는 그를 만나고 변해 버렸다. 이전엔 자위도 거의 한 적 없었는데….

“이제 와 무서워졌어요…?”

민준이 내 구멍을 쓰다듬다가 가운데 손가락을 집어넣고 쑤시며 속삭였다. 겨우 손가락이었는데 몸이 떨릴 만큼 자극이 되었다. 긴 손가락이 내 구멍에 파고들 때 구멍을 스치는 감각에 나는 허리를 떨었다. 너무 흥분돼서… 나는 원민준에게 솔직히 대답했다.

“내가 변해서 무서워요.”

“어떻게 변했는데요?”

“밝히고, 응….”

대답하는데 민준이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어 내 구멍 안을 늘리듯 두 손가락을 위아래로 쑤셔 댄다. 나는 숨을 들이키며 몸에 힘을 풀었다.

“워, 원민준 씨가 저를 상대 안 해 주면 어떻게 하나 싶고….”

나는 당황해 속내를 털어놓았는데, 그 말을 듣고 민준은 무언가를 납득하는 것 같았다. 내 최근의 이상한 행동들에 대해서 말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원하고 그가 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내가 평생 서윤 씨 성욕 풀어 줘야겠네요.”

민준이 내 귓가에 속삭이자 안도감이 온몸에 퍼졌다. 적어도 내가 떠나기 전에 그에게 버림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손을 빼내고 단번에 커다란 성기를 밀어 넣었다. 내 자신이 완전해지는 느낌, 충만감에 온몸이 떨렸다.

“응, 좋아요, 너무, 좋아.”

나는 끊어질 듯 속삭이며 구멍을 조여 그의 페니스를 자극했다. 그의 몸이 한 번 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내 몸을 더 느껴 주길 바랐다. 거칠게 다룰 수 있는 상대라서 안아 주는 것이라도 좋았다. 그가 바로 격렬하게 내 몸 안을 쑤시기 시작하자 나는 몸이 밀리지 않도록 단단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커다란 성기가 내 몸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세찬 파도가 몸을 점령하는 것 같았다. 깊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충족감에 다리를 떨었다. 그를 더 깊게 받기 위해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찌걱대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한참을 그렇게 엮인 채 몸을 움직였다.

“응, 안에 해 주세요. 안에….”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속삭였다. 쾌감과 목적이 뒤범벅되어 머릿속이 엉망이 되는 것 같다. 그가 나를 가득 채웠으면 했다. 한참을 나를 안고 움직이던 원민준이 내 목에 쪽쪽, 키스하며 나를 놓았다. 그리고 어깨를 누르고 무릎 안쪽에 손을 집어넣은 채 퍽퍽 치대기 시작했다. 조금 아팠지만, 아픔마저도 짜릿하게 느껴져서 나는 원민준의 팔을 잡고 긁었다.

“아, 아… 아!”

내 입에서 히스테리가 섞인 교성이 흘러나왔다.

“받고 싶어요.”

나는 할딱이며 속삭였다. 원민준이 내 귀를 깨물었다. 내 귀에 거친 숨을 쉬며 그가 진한 정액을 토했다. 아주 깊은 곳에. 나는 멍해져서 그를 끌어안으려 팔을 벌렸다. 원민준이 아직도 서 있는 내 성기를 손으로 잡고 마찰했다. 나는 더욱 크게 교성을 울리며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좋다고 그에게 계속 속삭였던 것 같다.

***

나는 평생 남보다 빼어나거나 잘하는 건 없는 무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즘 나도 한두 가지는 남보다 잘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로 원민준에 관련된 일이었다. W가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내로라하는 혈통의 우성 알파. 연예인보다 잘생긴 그 남자. 어떤 베타 여자든 오메가든 그의 짝이 되길 꿈꿀 것이다.

그런 원민준이 말하기를 내가 그를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나는 그의 비위를 잘 맞출 수도 있었다. 내가 민준 몰래 그의 아이를 가지기로 결심한 다음 나는 최대한 그의 기분을 잘 살피려 노력했다. 나는 열 살 때부터 부모님이 아닌 어른들의 돌봄을 받으며 자랐기에 남의 기분을 살피는 일은 자신이 있다.

처음에 나는 그가 단순히 나를 때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디스트인 줄만 알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는 나를 통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통제광, 이런 종류의 성애가 무엇인지는 나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원민준은 내가 아파하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가해자가 자신인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 감정의 주체가 되기만 한다면, 즉 그가 나, 이서윤의 유일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내가 웃고 유순하게 행동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그런 그의 기묘한 성벽과 나의 성벽이 잘 맞아 떨어졌다. 한 번도 타인의 관심의 중심이 되어 본 적 없는 나는 그의 그 통제가 싫지 않았다.

가학자와 피학자로선 천생연분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러면서도 민준은 묘하게 내가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랐다. 그는 내가 자신에 대한 애정을 보여 주는 일을 즐겼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다못해 개를 기르는 주인도 먹이를 주면 꼬리를 잘 치는 개를 좋아한다. 하물며 그는 내게 한 달에 천만 원씩이나 지불하고 있으니 내가 유순하게 애교를 떨기를 바라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원민준은 아주 돈이 많았다. 아마 내가 신세를 지며 자란 I가의 사람들보다 더 부자라는 것 같았다. 그의 말로는, 내가 그의 통제하에 있는 동안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원하면 사치를 하거나 남보다 좋은 것을 먹고 입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환심을 사는 것만으로 생계가 가능하다니.

그것도 부유해 본 적 없는 내가 돈 많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재능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나는 그에게 금전적으로 무언가를 한 번도 요구한 적 없다. 그러나 그는 내게 물질적으로 많이 베풀어 주려 애썼다.

내가 임신에 성공해 아이를 가지게 되면 목돈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달동네 집을 처분하기로 했다. 원민준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비서들을 통해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고 한다.

“그냥 부동산에 내놓으면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해 줄 텐데….”

내가 작게 항변하자 원민준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그런 일들은 직접 처리할 필요 없습니다, 대신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서윤 씨는 하고 싶은 일만 하세요.”

나는 딱히 하고 싶은 일이나 갖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이런 말들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원민준이 내게 이런 말들을 할 때, 내가 자신의 아이를 몰래 가질 흑심을 품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떠나는 순간 그에게 받은 지폐 한 장마저 모두 돌려줄 셈이었다. 나는 그의 신용 카드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으며 다달이 생활비로 입금되는 천만 원에서 백 원도 쓰지 않았다.

이사도 왔고, 또 민준이 집에 자주 들르면서 손님이 매일 생기니 이전보다 생활비가 더 들었다. 나는 월급을 더 쪼개어 아껴 사용했다. 딱히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돌봐 주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이 무서웠다. 나는 원민준과 내가 오래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극심한 발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전날부터 몸살이 온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해서 민준에게도 몸이 좋지 않아 일찍 잔다는 연락을 하고 잠든 터였다. 약을 먹고 하룻밤 푹 자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몸이 더 달아올라 있었다.

그뿐 아니라 몸 안이 가려웠다. 은밀한 음문부터 허리까지 녹진하게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민준이 너무 보고 싶었다. 나는 시트에 몸을 비비며 울먹였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나는 민준이 내 안에 그의 큰 것을 삽입할 때의 감촉을 상상하며 구멍을 손으로 더듬었다. 몽롱한 머릿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아, 이건….

히트 사이클이었다.

열성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규칙적이지도 않았다. 자그마치 7년 만에 온 사이클이었다. 나는 정말 내 히트 사이클이 정말 영영 끊긴 줄 알았다.

나는 침대를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나는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찾아낼 수 있었다. 급하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벌써부터 눈물이 쏟아져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도 숨만 몰아쉬었다.

- 서윤 씨, 많이 아픕니까?

원민준의 목소리에 담긴 걱정스러운 소리를 듣고 나의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시계를 보자 이미 출근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는 이미 평소처럼 몸에 맞춘 듯한 정장을 입고 회사 사무실에 있을 것이다.

“저, 일 때문에 바쁘신 거 알지만, 정말 죄송한데… 지금 와 주시면 안 될까요?”

- …….

“저 지금 사이클인 것 같아서….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알고 있는 다른 사람도 없고, 또, 제가 아는 알파는 원민준 씨뿐이라….”

- …….

“제발요, 제가 꼭 은혜 갚을게요….”

내 애원을 듣고 그가 뭐라고 초조하고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그러나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진우 형이 자신의 러트 때 나를 거절했던 일을 기억했다. 내 마음은 그때의 기억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알파에게 거절당한 일을 트라우마처럼 되새겼다.

원민준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없었다.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는 혐오할지도 모른다. 알파 중에 그런 케이스도 있다고 들었으니까.

보통 히트 사이클이면 아무리 못생긴 오메가라도 어떤 알파든 유혹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 같은 열성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따로 히트 사이클 해소를 위해서 부를 알파가 없는 것도 맞았지만 와 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원민준 외에는 바라지 않았다. 사이클에 접어들어 이성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나서 정확히 깨달았다. 나는 그의 아이 외에 다른 아이를 가지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를 원했다.

그가 몇 초 뒤 입을 열었다. 그 몇 초가 내겐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 회의가 있긴 한데 바로 취소하고 가겠습니다.

“네….”

- 15분… 10분만 참아 봐요, 아무도 문 열어 주지 말고. 내가 문 열고 들어갈 테니 침대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있어요. 잠깐만 참아요.

그가 대답을 하면서 일어서는지 소란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인다. 몸이 오한처럼 떨렸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날뛰며 내 뇌 속부터 발끝까지 세포를 헤엄치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 무언가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내 온몸의 신경이 달아올라 날뛴다.

도어록 버튼을 누르는 신호음이 들리자 나는 이불 안에서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다. 이렇게 진한 히트 사이클은 처음이었다.

하루 이틀 미열과 함께 조금 앓다 금방 사라지는 가벼운 사이클은 겪어 봤지만…. 민준이 침실로 들어서는 걸 보자마자 안도감이 들었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이성을 잃고 그에게 안겼다.

사이클에 들어선 몸은 알파의 페로몬을 바란다. 그가 내 몸을 안아 주길 바랐다. 구멍이 너무 간지럽다. 범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뭐라 하는 지도 모르고 웅얼웅얼 그에게 중얼댔다. 민준이 내 팔을 잡고 나를 나른하게 보았다.

“진짜 안 되겠네, 열성은, 예고도 없이….”

나는 울먹이며 죄송해요, 하고 사과했다. 중요한 회의였을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그는 일도 버리고 달려온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벗고 기다리고 있든가.”

“네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급히 옷을 벗었다. 민준이 내 속옷을 끌어 내리며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나는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이렇게 혼자 발정이나 나고.”

그다음, 그가 나를 침대 위에 던졌다. 나는 그가 나를 바로 안아 줄 줄 알았다. 그는 그러지 않았고 나는 선물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억울해졌다. 다음 순간 내 양팔에 무언가가 채워졌다. 목에도… 무거운 쇠 징이 달린 물건이었다.

두 손목을 감은 가죽 수갑에는 가는 사슬이 달려 있다. 같은 가죽 재질 개 목걸이에는 고리 같은 게 달려 있는 듯 했다. 그가 그 고리에 양손 수갑에 달린 사슬을 채웠다. 양손을 얼굴 옆으로 들어 올리고, 재롱을 부리는 애완견 같은 자세를 취한 채 묶였다.

치켜 올라간 양손과 내 목 사이의 공간은 완벽한 삼각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불편해 양손을 움직이자 목이 같이 졸려 나는 캑캑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대로라면 목줄에 달린 쇠사슬 때문에 벌을 서는 것처럼 계속 양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동물처럼 굼질대는 나의 뒤통수를 보다 그가 줄을 확 당겼다. 알고 보니 목 뒤에도 쇠줄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줄 끝은 나의 주인님의 손에 잡혀 있다. 그가 조금 힘을 준 것만으로 나는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내 열기를 바로 달래 주지도 않고 묶다니, 나는 그의 행동에 분노를 느끼기보다 서운함을 느꼈다. 내가 조금만 더 페로몬이 나왔다면 바로 안아 주었을 텐데… 열성만 아니었다면.

“흑… 너, 너무해요….”

내 항변을 들은 그가 침대 위로 올라가 다리를 뻗고 앉았다. 그 순간 방 안에 민준의 페로몬이 가득 찼다. 나는 더 발정 난 채 개처럼 흐느꼈다. 싫어, 해 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나는 그가 나를 안아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 안을 뛰노는 이 열기를 없앨 수만 있다면….

“우리 서윤이, 발정 났으니까 바로 해도 되겠네.”

내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투로 그가 그렇게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긍정했다. 네, 맞아요, 하고.

“올라타 봐.”

그의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양손을 얼굴 근처까지 추어올린 자세로 묶인 채, 급히 침대 위에 앉은 그의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가 내 엉덩이를 내려쳤다.

“뒤돌아.”

나는 울먹이며 등을 보이고 그의 위에 앉았다. 바지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내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엉덩이 골 사이로 그의 페니스가 이미 단단해진 것이 느껴졌다. 나는 흐느끼며 단단하고 큰 그의 페니스 위로 엉덩이를 비볐다.

“그렇게 하고 싶어? 사이클이라서?”

“네, 네에….”

“나 아니라도 허락해 줄 거야?”

“해, 해 줄 사람이 없는걸요.”

나는 울먹이며 솔직히 대답했다. 이런 열성에 아무것도 없는 오메가는 원민준 같은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바라지 않을 거다.

“썅년이 진짜….”

그가 내 엉덩이를 찰싹 내려쳤다. 나는 내가 그가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말을 고쳤다.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아요, 안아 주세요….”

그가 칭찬하듯 내 엉덩이 사이에 그의 성기를 비집어 넣었다. 귀두가 삽입된 것뿐인데도 나는 환희를 느끼며 허벅지를 떨었다. 입구가 벌름대며 그의 성기 끝과 스치는 느낌마저 참을 수 없이 좋았다. 어서 그가 나를 가지고 마음대로 다루어 주었으면 했다. 나는 그의 개보다 더한 것도 될 수 있다. 그의 알파 냄새가 나를 더욱 발정하게 만들었다.

민준이 단번에 내 안에 삽입했다. 그 동시에 목줄이 팽팽히 당겨졌다. 그가 오른손에 쥔 목줄을 삽입과 동시에 강하게 당겼기 때문이다. 순간 숨이 부족했다. 그가 느슨하게 줄을 놓는 순간 몸에 산소가 돌며 빠듯하게 꽉 찬 아래가 느껴진다.

“으, 학….”

나는 태어나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을 정도로 강하게 흥분했다.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가 손바닥을 내 허리에 감아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움직여 봐. 너 하고 싶은 만큼.”

그의 목소리에 꽉 찬 흥분이 느껴져 나는 최면에 걸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성기를 구멍으로 조이며 허리를 들썩였다. 처음 해 보는 체위였지만 나는 누구보다 욕심내며 엉덩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한껏 벌어진 내 엉덩이 사이로 그의 크고 두꺼운 성기가 푹푹 박힐 때마다 나는 허벅지를 떨며 배 아래쪽을 조였다.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한 번에 깊게 박혀 들어오는 그의 크고 단단한 성기도 좋았고, 그의 성기를 삼킬 때 느껴지는 까칠한 음모의 감촉조차 너무 좋았다. 이미 깊은데도 더 깊게 박아 줬으면 했다.

“너무, 너무 좋아요, 주인님.”

나는 그에게 의미도 없이 계속 좋아해, 좋아해요, 라고 속삭이며 울먹였다. 그는 내 성기가 깊게 들어가는 순간 목줄을 잡은 손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그는 몇 번이나 끈질기게 네가 누구 건지 말해 봐, 라고 질문했고 나는 쾌감에 미쳐 교성을 흘리면서도 주인님 거예요, 라고 몇 번이나 고백했다.

나는 그의 것이다. 이 세상에 나를 소유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알파는 그였다. 그는 이 순간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일부를 영원히 가질 것이다. 나와 그는 그렇게 유일한 사이였다.

“아, 응, 주인님, 아…! 너무 좋아요…! 으응…!”

내가 민준의 위에서 골반을 위아래로 격렬하게 움직이는 동안, 내 성기는 금세 뒤쪽의 쾌락만으로 한 번 사정했다. 그러나 한 번에 만족하지 않고 곧 나의 볼품없는 성기가 금세 발기하며 다음 쾌락을 요구했다.

그는 그걸 보고 내게서 성기를 빼냈다. 내 안에서 빠져나온 그의 큰 성기는 애액이 묻어 번들거렸다. 끝부분에 쿠퍼액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곧 사정할 것 같은데…. 나는 탐이 나 내 비부를 그의 성기에 맞추고 비볐다. 다시 그가 내 안에 들어와 줬으면 했다. 그는 큰 손으로 내 엉덩이를 크게 철썩 내려쳤다. 나는 옹알대듯 애원하며 몸을 숙였다.

민준은 나를 침대에 눕혔다. 자세를 바꿔 한 번에 다시 큰 성기를 푹 밀어 넣었다. 잔뜩 젖은 내 밀부와 그의 성기에서 물 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이번엔 더 깊게 내 안을 쑤셨다. 그가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더 큰 쾌락이 나를 덮쳤다. 그가 한 번 치밀고 들어올 때마다 내 안은 온몸으로 기뻐하며 그의 성기를 한껏 조였다.

나는 그를 안고 싶었지만 손이 묶여 있어 여의치 않았다. 내가 우는 것을 보고 그가 내 뺨을 핥았다. 그의 혀는 축축했고 내 눈물의 짠맛은 그의 혀끝에서 맴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타액으로 축축해진 내 뺨이 좋았다.

될 수 있으면 온몸이 그의 것으로 젖었으면 했다. 샤워를 했다면 몸을 깨물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타액이든 뭐든 좋았다. 온몸이 원민준의 냄새로 마킹되면 좋을 텐데.

그가 성기를 쳐올릴 때마다 나는 밀려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리에 힘을 주어 종아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마침내 사정이 다가오자, 그의 성기가 내 안에서 아프게 더 커지며 팽창했다. 몸 안이 꽉 차는 느낌에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노팅. 알파의 성기가 오메가의 임신율을 높이기 위해 몸 안에서 더 부풀어 맞물리는 행위.

첫 번째 노팅이었다.

나는 무서워 묶인 손으로 빈 허공을 잡았다. 눈을 꼭 감고 몸의 힘을 풀려고 노력했다.

“아파….”

눈가에 눈물이 그득 고이자 민준이 더없이 다정하게 내 눈가에 쪽쪽 키스했다.

“괜찮아. 착하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다정하게 달래 주는 그의 태도가 너무 좋아서, 나는 더욱 울컥했다. 나는 그를 속이려 하고 있는데. 한편으론 내게 그가 노팅해 준다는 것이 기뻤다. 그는 허락하지 않겠지만 나는 정말로 그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저 가족을 가지고 싶어서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아이라서 가지고 싶은 것도 있었다.

나는 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어 그가 노팅하기 쉽도록 했다. 그가 결박된 내 손을 꽉 쥐고 깍지를 낀다. 조금씩 몸이 진정되었다. 나와 그는 정말로 하나가 되었다.

“연결되어 있어요.”

나는 작게 말했다. 평생 나를 괴롭혀 온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그와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이 나와 아이를 가져서 내 가족이 되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가 노팅해 주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민준이 내 눈물을 닦고 내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삼 일간 회사에 나가지 못했다. 이틀 동안 사이클을 앓았다. 이렇게 긴 사이클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첫째 날, 첫 번째 노팅은 한 시간 정도로 끝났다. 두 번째 날은 민준이 나를 묶지 않았다.

다소 평범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원민준은 나를 녹여 낼 듯 달콤하고 정성스럽게 안았다. 온몸을 핥고 서로 깨물었다. 녹아날 듯한 달콤한 섹스였다. 우리는 키스를 많이 했다. 그리고 원민준은 내가 생각도 못한 부위까지 내 몸을 만지고 핥았다. 내 몸이 이렇게 많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배웠다. 내 온몸은 원민준이 만지는 것에 따라 움직이고 또 달아오를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허리 아래가 간질간질해졌다. 첫 번째 날 결박 섹스에 더 많은 쾌감을 느꼈지만 두 번째 날도 굉장히 좋았다.

질척하고 달콤한 두 번째 날의 정사가 끝날 때쯤 민준은 내게 한 번 더 노팅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정도로 우성 알파의 페로몬으로 샤워를 하고, 또 두 번이나 노팅했으면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나는 그가 샤워하는 사이 몰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원민준 씨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잘될 것이라고 속으로 확신했다.

“사이클이 규칙적이면 좀 더 준비를 했을 텐데 아쉽네요.”

“이번 사이클만 해도 7년 만에 온 건데요.”

나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웃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몸이 아직 뜨겁긴 했지만 몸 전체가 굉장한 해방감에 둘러싸여 있다. 내 몸은 온통 그의 키스 마크로 울긋불긋했다.

약간 얼얼한 피부 감촉마저 좋았다. 마치 기분 좋게 운동을 하고 나서 느끼는 쾌감 같은, 그런 종류의 느낌. 그러나 훨씬 더 질 좋은 쾌감이었다. 운동 후의 나른한 쾌감이 몇십 배 증폭된 느낌이었다.

물론 아직 조금 열이 나긴 하지만 금방 나아지리라. 민준은 내가 지금껏 피임약을 먹어 왔다고 믿고 있으므로 별로 임신의 가능성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혹시 원민준이 추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날짜를 계산해 피임약을 버려 왔다. 추궁한다고 해도 할 말은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민준이 시켜 그의 비서가 사 온 음식을 먹었다. 구운 식빵 사이를 베이컨과 햄, 야채로 채운 매콤한 소스의 샌드위치였다. 방금 사 온 딸기 바나나 주스도 신선했다. 나는 음료수를 쪽쪽 빨아 마시다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메가의 사이클에 알파가 준비할 것도 있어요?”

“미리 날짜를 알면 별장에서 사이클을 보내거나, 냉장고에 음식을 가득 채워 두거나 이런 준비는 할 수 있죠. 알파가 사이클에 얼마나 배려를 해 줬느냐가 오메가의 자존심이란 말도 있더군요…. 아니면 조용한 섬의 프라이빗 리조트에 가는 것도 괜찮죠. 사이클 주기가 확실해야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것도 있구나….”

“날짜만 확실했다면 장소를 마련해 뒀을 겁니다.”

나 같은 열성에게는 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런 장소들은 둘째 치고, 나는 그가 회사 일을 제치고 달려와 준 것만 해도 기뻤다. 적어도 진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중요한 일들을 제치고 달려와 준 것이 아니겠는가.

멋진 호텔이나 별장 같은 좋은 장소를 준비하는 것은 원민준 같은 부자에겐 별로 힘든 일도 아닐 테다. 그러나 귀중한 시간을 열 일 제치고 달려와 사용해 주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전 와 주신 것만으로 기뻤어요.”

내가 다시 한 번 배시시 웃자 원민준의 새하얀 얼굴에도 조금 생기가 돌았다. 격렬한 사이클을 같이 보낸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호의가 생긴다. 꼭 유대감이나 친밀감 같은 것. 그런 탓인지 나는 평소보다 그가 퍽 가깝게 느껴졌다.

“회사 나가 보셔야 하는 거면 저는 이제 괜찮아요.”

사실은 그가 좀 더 옆에 있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내 사이클을 위해 이틀이나 갑작스레 회사를 쉬었다. 원민준 같은 중요한 직위의 사람이 그러는 건 쉽지 않으리라. 나도 회사에 전화를 하려 했었지만 민준이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그냥 두라고 했다. 정말 회사에서는 전화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출근하면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할지 걱정이었다. 팀원들은 대부분이 베타라 히트 사이클 때문에 못 나왔다고 해도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원민준은 출근을 위해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가 옷을 입다 말고 베개를 안고 옆으로 누운 내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어 이마에 그의 입술이 떨어진다. 마음이 달콤한 맛이 나는 버터가 된 것 같다. 버터처럼 달게 녹아내리는 것 같다.

“아직 혼자 두기 좀 걱정되네요.”

그가 침대 속을 더듬어 내 손을 찾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민준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러다 문득 그가 내게 첫날 채웠던 수갑이 침대 너머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산 건 싸구려고 저건 고급이에요?”

“네.”

“내가 산 것도 싼 거 아니었는데….”

“서윤 씨가 샀던 것 같은 물건을 쓰면 피부에 상처 납니다. 상처를 내도 내가 내야 하는데 장난감 때문에 다치게 할 순 없죠.”

뭐라고 할까, 그는 때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세심했다. 좋은 주인님과 나쁜 주인님이 있다면 그는 좋은 주인님 축일 것이다.

문득 그가 내 사이클 첫 번째 날 첫 성교를 시작하자마자 나를 목과 팔을 구속하는 수갑으로 묶었던 것을 떠올렸다. 개처럼 줄을 당기며 섹스를 했었다. 사실 꽤 좋았었다.

“그런데 첫날… 저 사이클인데… 왜 묶었어요?”

“한번 해 보고 싶어서요.”

나는 시트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귀가 빨개진다. 사이클 터진 오메가를 묶고 XXX. 무슨 야동 타이틀 같네.

“보통 오메가의 사이클에는 알파들이 흥분해서 앞뒤 모르고 덤빈다는데….”

그는 침착하게 자 묶고 시작합시다 하고 내 손에 수갑이나 채우고 있었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내가 일반만 되었어도 민준이 더 흥분해 주었을 텐데.

“이틀간 그렇게 덤볐는데, 부족해요?”

“민준 씨가 너무 이성적인 타입이셔서 가끔 흥분하신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피식 웃었다.

“이제 이사님이 아니라 민준 씨예요?”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분명히 원민준 씨가 먼저 이름으로 부르라고 허락한 적은 있었다. 사내 성추행하는 기분이라 별로니까 이사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그래도 비위를 거슬렀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나는 조금 눈치를 보았다.

“싫으시면 안 그럴게요.”

“아니요, 나쁘지 않아요.”

그가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다 입술에 몇 번 자연스럽게 입 맞췄다. 적어도 민준은 나와 사이클을 치른 후 불쾌해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도 좋았다.

내 생애 이런 충족감과 만족감을 느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묶는 거 너무 좋아해요.”

“서윤 씨는 싫어요?”

“싫진 않지만요….”

오히려 내가 이상한 쪽으로 변해 가는 게 무섭다고 할까, 싫지는 않았다.

히트 사이클 첫날 그에게 묶여 목줄이 당겨지며 나는 누구보다 강하게 발정했다. 요즘은 성관계에 대해서도 민준과 많은 대화를 했다. 그는 내가 뭐가 좋고 싫은지 묻는 일을 즐긴다.

“그래도, 저 같은 오메가가 묶는 걸 허락하지 않으면 상대해 줄 리 없잖아요.”

사이클의 열기를 빌려 나는 솔직하게 투덜거렸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가 ‘묶고 때릴 수 있어서 좋지만 그것 외에도 아주 조금은 장점이 있습니다’ 정도라도 말해 줬으면 했다. 나는 원민준이 가끔 내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것이 좋았다.

이제 그와 헤어지면 누군가 내게 이렇게 다정할 일도 어리광을 받아 줄 일도 없을 테다. 나는 마지막까지 우리의 관계를 만끽하고 싶었다.

“왜 또 말을 그렇게 합니까, 내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가 찰싹 내 엉덩이를 내려쳤다. 나는 등을 숙였다. 피부가 아직 예민해서 생각보다 아팠다.

“내가 서윤 씨에게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플레이… 때리거나 묶는 걸 하는 건 그냥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거예요.”

“음식이요…?”

“서윤 씨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데 그걸 애인이 자주 만들어 준다면 어떨 것 같아요?”

“…애인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그거예요. 하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애인이 먹지 못하게 한다면 화가 나겠죠…. 그렇다고 애인을 바꾸진 않습니다. 음식이 아니라 애인이 좋은 거니까.”

그것 참 기발하고 귀에 잘 들어오는 비유다. 나는 발개진 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잠깐, 그건 애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다면 뒤에서 몰래 먹는다는 뜻인가…?

“그럼 애인이 그 음식을 못 먹게 하면… 애인이 없을 때 그 음식을 다른 여자를 불러서 먹는 건가요?”

“…….”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뭐 이런 게 있냐는 눈이었다.

“패배주의도 이 정도면 신기할 정도네요. 저는 정기적인 상대가 생기면 쉽게 눈 돌리는 타입이 아닙니다.”

“네….”

그러니까 첩질을 하긴 하되 이 첩 삼 첩은 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내가 정부 자리에 만족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우리는 꽤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보기보다 질투도 많고 질척한 성격이라 그렇게 쿨하게는 못살 것 같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누워서 그가 출근 준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원민준은 타이를 매는 모습도 멋졌다. 현관까지 배웅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민준이 만류했다.

“몸이 사이클에 익숙하지 않아서 더 힘들 겁니다. 내일 하루 더 쉬어요. 회사 일은 걱정하지 말고.”

“네.”

“퇴근하고 올게요.”

“네…”

이틀이나 내게 통째로 써 주고도 다시 와 준다는 민준이 고마웠다. 그가 나를 한 번 안았다 놓았다.

“고맙습니다. 없어요, 오늘은?”

나는 아, 하고 뒤늦게 깨달은 듯 그의 볼에 키스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뭐가요?”

“사이클인데 와 주시고, 또 안아 주시고… 다정하게 해 준 것도 좋았고….”

“또?”

“묶, 묶어 주신 것도 좋았어요.”

그가 피식 웃었다.

“서윤 씨 보면 참 보는 재미가 있어요. 왜 알파들이 오메가 끼고 사는지 서윤 씨 보면 알 것 같아요.”

“…….”

“저녁에 봐요.”

민준이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몽롱함마저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는 현관문 소리가 들리자 나는 침대에 풀썩 누워 이불을 안고 눈을 감았다. 아직 몸이 나른하고 졸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마가 뜨거웠다. 발정기는 끝났을 텐데…. 감기에 걸린 것처럼 열이 오르고 몸이 아팠다. 사이클에 너무 무리해서 몸살이라도 온 걸까. 비틀대며 물을 찾아 한 모금 마시고 침대에 누웠다. 온몸이 작신작신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아랫배가 당기고 아프다. 아랫도리도 축축했고…. 왜지? 나는 이불을 들추고 잠옷을 입은 내 아랫도리를 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속옷을 벗고 확인해 보니, 나는 하혈하고 있었다.

속옷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다.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내 몸은 노팅을 거부하고 있었다.

왜, 두 번이나 노팅했는데,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왜 안 되는 거지? 나는….

남한텐 당연한 일인데.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잘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멍해져서 아랫배를 끌어안았다. 빼앗아 가지 마세요.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기도했다. 성공했다면 이렇게 배가 아플 리가 없었다. 피가 멈추지 않아서 무서웠다. 몸은 불덩이 같았는데 손발은 아주 찼다. 나는 이불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나는 단 하나만 바랐다.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내가 원민준 씨를 독점하고 싶다고 기도한 것도 아닌데 왜,

왜….

나는 끙끙대며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나는 어릴 적의 꿈을 꾸었다. 그곳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I가의 커다란 저택이었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부엌에 서 있는 뒷모습이 태반이었다. 그녀는 앞치마가 잘 어울렸고 이미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는데도 퍽 앳되게 예뻤다.

내 동갑 친구인 시우는 그 집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 집 남매는 늘 물건이 풍부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이면 늘 많은 선물이 들어왔다. 새 책가방, 새 필통, 새 운동화, 새로운 책들. 시우는 언제나 새 물건이 들어오면 그걸 늘어놓고 구경시켜 주었다.

나는 무언가를 조르는 버릇은 없는 아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어리광이 줄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시우가 들고 있던 물건이 부러웠다. 그때 가장 유행하던 로봇 필통이었다. 평소라면 이거 너 줄까? 라는 묻곤 하는 시우임에도 그건 양보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끌어안았다.

‘엄마가 사 줬어.’

새 학기니 크리스마스니 하는 아이들이 주인공인 시즌이 돌아오면 I가에는 선물이 끝없이 들어왔다. I가의 아이들은 물건이 부족해 본 적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시우는 어머니가 시내에 나가서 직접 사 준 그 필통이 좋았던 거다. 그 필통이 너무 탐이 났다. 나는 주방으로 달려가 간식을 준비 중인 엄마에게 졸랐다.

“엄마, 나도 필통….”

“엄마가 사모님 허락받고 오후에 나가서 사다 줄게.”

어머니에게선 달콤하고 고소한 과자 냄새가 났다. 나는 엄마를 끌어안고 활짝 웃었다. 어머니에게 늘 관대했던 사모님은 내 학용품값을 하라며 어머니에게 돈까지 좀 쥐어 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오후엔 뉴스 속보가 있었다. 2차선 버스 충돌 사고에 대한 뉴스였다.

승객 중 6명이나 즉사한 사건이었다. 어머니는 가장 앞자리에 타고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천애 고아인 데다, 딱히 연락이 되는 친척도 없는 나였다. 나는 I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그날, 사모님은 어머니에게 기사를 불러 주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러면 미안하다며 버스를 타고 다녀오겠다 하셨다고 한다. 저택에서 정류장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어머니는 즐거우셨을까, 기껍게 외출하셨을까, 가끔 그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한다.

사모님은 말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나를 안고 우셨다. 나는 장례식 첫날 하루는 울었고 이튿날부터는 입을 닫았다. 발인이 끝난 날 나는 천장을 보며 기도했다.

다시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을게요, 제가 필통을 가지고 싶다고 졸라서 그래요, 저는 아무것도 가질 자격이 없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저를 더 고통스럽지만 않게 해 주세요.

그 맹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원하는 것들이 생겼다. 첫사랑인 알파와, 한진우와 하루라도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반장의 애인이 되고 싶었다. 그 뒤 좋아하게 된 베타 여자 친구인 서연희의 옆에 있고 싶었다.

가족이 가지고 싶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짝사랑 체질이다. 나는 이제 연희가 아닌, 내 처음을 가져간 알파인 원민준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그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모양이다. 내가 욕심을 내면 모든 일이 망가진다. 내가 열성으로 태어나서… 내 몸뚱이에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일어났을 때 나는 울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방 안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내가 많은 것을 바란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단 하나 원하는 것, 그것도 실패한 것 같다. 잘되었다면 이렇게 아랫배가 아플 리 없다. 이렇게 피를 흘릴 리 없었다.

나는 민준이 오기 전에 피 묻은 시트를 숨겼다. 새 시트를 깔고 겨우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 정신이 멍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차가운 손이 내 이마를 쓸고 있는 것을 느꼈다. 원민준의 손이었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침대 옆에 앉은 그를 보았다. 생각보다 깊이 잔 모양이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천천히 우아한 입술을 열었다.

“왜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집에 오자마자 내가 뭘 먹었는지 냉장고부터 확인해 본 모양이었다. 먹어 봤자 내 몸에 생산적인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데. 나는 그를 멍하니 보았다.

나는 그의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든다. 아이조차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언제 그를 떠나면 좋단 말인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바란 적이 없다. 내가 유일하게 바란 것은 가족을 가지는 것과, 그 다음 평범하게 사는 것뿐이다.

원민준 같은 대단한 남자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적 없다. 이런 남자의 관심을 내가 어떻게 묶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봐야 우리는 목적 없는 사이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혼자 있고 싶어요.”

“몸이 계속 안 좋아요?”

원민준이 퍽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그 말투에 울컥했다. 어차피 나를 당신의 무엇도 될 수 없게 할 거라면 왜 자꾸 다정하게 대하는 건지. 왜 내 인생을 당신에게 의지하게 하는 건지. 이 모든 것은 원민준의 잘못이었다.

“저, 저한테 그러지 마세요, 다정하게 대하지 말고….”

“서윤 씨?”

“그렇게 대하실수록 불편하다고요.”

눈가가 벌써 젖었다. 차라리 나를 때리고 가두고 주제에 맞는 대접을 해 주는 것이 나을 텐데. 그럼 나는 그저 그를 원망하며 연희를 계속 좋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제에 어울리는 짝사랑에 만족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내게 희망 같은 것을 주는 당신이 나쁘다.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당신이 나쁘다.

“저는 안 되겠어요, 희망 없는 관계는…. 베타 여자가 아니라 오메가가 좋은 거면 저 말고도 좋은 오메가가 많을 거예요, 또 성 취향도 이사님이랑 잘 맞고, 더 잘하는 오메가도 많을 거고요. 저는… 불편해요. 이러시는 거.”

“…….”

그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나 같은 열성 오메가에게 몇 번이나 거절당하다니,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나는 원민준이 떠나 주길 바랐다. 내게 헛된 희망을 주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그에게 마음을 주게 될수록 비참하고 슬퍼진다.

“자, 자꾸 기대게 하고… 그렇게 만드시니까, 괴로워요,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저답게…. 이런 관계는 싫어요.”

“그래서 나에게 뭘 원하는 건가요.”

대꾸하는 그의 말은 부드럽지만 차가웠다. 나는 원민준이 나 같은 열성과는 결혼할 수 없다며 선을 그은 날을 떠올렸다.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될 지 말해 봐요.”

“바라는 건 없어요. 그냥 지쳐요.”

어차피 민준은 내가 정말 바라는 것들은 들어주지 않을 거다.

“그러면 혼자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든가. 이서윤 씨 같은 성격은 내가 아니라도 금방 다른 사람의 표적이 될 겁니다, 도저히 혼자 둘 수가 없어요. 이서윤 씨를 보고 있으면 불안합니다.”

“제가 무슨 모자란 사람으로 보이시나 본데, 당해도 다른 사람에게 당하는 게 나아요.”

나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나는 민준이 이전부터 나를 깔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서연희를 아무렇지 않게, 별 노력도 없이 가진 남자였다. 나에겐 빛나던 여자를 대수롭지도 않게 대하는 남자였다. 누구나 원민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

조금만 바라도 좌절을 겪는 나와 같은 사람과 날 때부터 황제와 같이 모든 것을 누린 당신이 서로 같을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괜찮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을 휘젓는 건 원민준 이 사람이었다.

“나는 당신한테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나를 마음대로 다루고, 흔들어 놓고…. 나는 그냥 내 주제에 맞게 살고 싶다고요.”

“진심이에요?”

“네.”

“주제에 맞게 살고 싶다고요? 정말 어이가 없는 생각이네요. 도대체 뭘 성취하고 싶다거나 쟁취하고 싶다는 마음은 아예 없습니까? 나 때문에 서연희를 포기했다고요, 그리고 이번에는 겨우 그런 이유로 나와의 관계를 포기하는 건가요?”

나는 그 말에 폭발했다. 나에게서 연희를 빼앗은 사람이 누군데. 연희를 미워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내가 정말 원하고 얻고 싶었던 건 가족이었다. 아이였다. 그러나 이젠 그것조차 힘들 것 같은데. 그것이 민준의 탓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래도 민준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가 무서운 것도 잊고 대들었다.

“나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원민준 씨가 나 같은 사람이 되어 본 적 있어요? 나는 여자와 결혼할 수도 알파의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데. 이런 삶에 대해서 당신이 뭘 알아요, 내가 원민준 씨를 계속 만나 봐야 뭐가 달라져요? 내가 누구하고 경쟁할 수 있겠어요.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군데.”

“…….”

“자꾸 마음 흔들지 말란 말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꼴사납게 눈가를 적셨다. 나는 그래도 그를 좋아한다. 사이클을 치르고 나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음 깊은 곳, 내 바닥에는 민준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 계속….

그러나, 그 감정이 우리 사이의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원민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내뱉어진 그의 말은 조금 은근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조금만 더 참아요. 그러면서 내게 마음 붙이세요.”

그의 나직한 미성의 목소리는 마음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원민준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아직 축축했다.

“나를 좋아하며 몇 년만 참으세요, 그 이후엔 뭐든지 서윤 씨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습니다. 뭐든지 다. 몇 년만 참아 줘요.”

원민준의 말은 뜻밖이었다. 나와 히트 사이클을 보냈기 때문에 태도를 바꾼 걸까? 그래서 이렇게 나를 회유하는 걸까? 히트 사이클이 좋았기 때문에…?

거짓인지 진실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감언이설을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며칠 전이었다면 나는 이 말에 혹했을 것이다. 뭐든지 들어준다면 당신 아이를 가지게 해 주세요, 하고 바로 조건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첫 번째로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원민준이 임신을 허락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히트 사이클 기간에 우성 알파에게 두 번이나 노팅을 받고도 하혈부터 하는 몸이었다. 이런 몸으로는 그의 아이를 가질 수 없다. 이번 사이클이 내 인생의 마지막 사이클이었을 수도 있는데.

이번 바람도 아마 이루어지지 않겠구나. 그냥 산산이 흩어져 없어지겠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원민준의 눈에 희미한 안심 같은 것이 떠올랐다. 나는 그 눈을 멍하니 응시하다 눈을 내리 깔았다. 원민준은 그날 내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

히트 사이클이 끝나고 나는 혹시 몰라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 집에서 혼자 테스트를 해 보았다. 예상대로 결과는 한 줄.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약간 자포자기했다. 무슨 일을 하든 기운이 나지 않았다.

내 생활은 아직 민준의 지배하에 통제되고 있기에 그는 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민준은 요즘 자주 짜증을 냈다. 주로 나 때문이었다. 겨우 오른 내 살이 다시 내렸다고 짜증이었고, 풀이 죽어 있다고 회사에서 누가 괴롭히는 게 아니냐고 추궁했다. 밥을 깨작댄다며 짜증을 냈다. 참, 책임감 있는 남자다. 나 같은 오메가와 몇 번 잤다고 이렇게까지 과하게 관심 주지 않아도 될 텐데.

마지막 희망까지 없어진 지금 나는 빨리 민준과의 사이를 끝낼 궁리뿐이다. 그가 내게 질리는 순간, 나는 버림받을 거다. 그러면 나는 아마 무너질 것이다. 그에 대한 내 짝사랑이 깊어지기 전에 먼저 끝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원민준은 요즘 내게 전화를 자주 한다. 이전에는 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전화 한 통뿐이었는데 요즘은 출근하기 전 아침에도 매일 전화 통화를 한다. 아마 그는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오해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체념한 상태일 뿐인데. 그러나 그에게 내가 시무룩한 원인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다.

사실은 당신 아이를 몰래 가지려다 실패했어요, 그러니 제가 우울해하더라도 신경 쓰지 마세요, 뭐 이렇게 말해 줄 수도 없잖은가.

심지어 요즘은 그와 성관계도 많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원민준이 나를 예전처럼 대해 줬으면 했다. 나를 조교해 주었으면 했다. 예전처럼 교육받고 싶었다. 그가 욕망으로 나를 대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아픔과 쾌락으로 몰아붙여지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원민준은 내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자 거짓말같이 그 행위를 뚝 끊었다.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건 취향이 아닌 모양이다. 성관계는 계속하긴 했다. 그러나 1, 2주에 한 번 정도였다.

이쯤 되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민준의 관심이 곧 사라질 것 같았다. 오히려 원민준이 왜 내게 계속 공들이고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나는 이제 그의 성욕도 제대로 채워 주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원민준 본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본인이 주장하는 대로 그는 오메가를 바로 버리는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민준과 통화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는 내가 알파와 둘이 만나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좋든 싫든 이제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알파, 시우를 만나는 일도 미리 허락을 받아야 했다.

“저, 오늘 제일 친한 친구가 미국에서 귀국하는 날인데 공항으로 마중 나가려고요.”

“한시우요?”

“네…. 저기 그 친구가 알파긴 한데, 제가 열성이라 체향이 거의 없어서…. 아시잖아요, 그래서 그냥 친구 사이거든요. 굉장히 친한 친구예요. 그래서 다녀오려고 하는데.”

열성 남자 오메가는 어떤 알파들에게는 그냥 베타 남자애랑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민준은 내가 일반 알파들과 같이 있는 것을 싫어했다. 우리 사이에 신뢰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아직은 그를 거역하고 싶지 않았다. 트러블을 만들기 싫었다. 민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같이 가면요?”

“그건 좀, 연희랑 셋이 많이 친해서, 저희 둘이 나란히 공항에 마중 나가면 연희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가 약간 불편하게 침묵했다.

“알겠습니다, 버스 타지 말고 꼭 차 타고 가고요.”

“네.”

요즘 원민준은 날 과보호한다. 나는 요즘 그에게 반항할 기력도 없을 뿐더러 무기력을 핑계로 그에게 기생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나는 그의 보호를 그냥 모른 척하고 있었다.

“운전할 때 조심해요, 마음 같아서는 사람을 보내 주고 싶은데….”

“제가 갑자기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나타나면 다들 이상하게 볼 거예요….”

나는 사모님처럼 기사가 문을 열어 주는 검은 차에서 내리는 나를 상상하며 살짝 웃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민준은 내게 튼튼한 국산 차 한 대를 사 주었는데, 국산 차는 사고 나면 위험하다고 독일 차로 바꾸라는 말도 자주 했다.

원민준은 내 삶에 불만도 참 많았다. 아마 내가 구질구질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불편한 것 같았다. 나는 지금 그가 해 주는 것들도 호사였다. 언제 그래도 잘해 줘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라도 해 줘야 하나 싶었다.

전화를 끊고 침대에 들었다. 나는 요즘 잠을 많이 잔다. 사람이 무기력해지면 잠이 많아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위안되는 것이 있다면 내일 시우가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연희와는 연락이 점점 잘 닿지 않았다. 그녀도 뭔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엔 원민준 이사와의 사이를 연희에게 들키느니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상황이 되니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이야 원민준 이사가 내게 잘해 주지만 평생 갈 관계도 아니다. 나는 연희에 대해 애정도, 미움도 아닌 감정만 품고 있다. 연희에게 모든 걸 다 고백하고, 그러면, 그 사람과 헤어질 수 있을까….

이번 짝사랑을 이걸로 끝낼 수 있을까.

언젠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평온했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헤어지고 나면 원민준에 대한 감정도 서서히 사라질까, 그를 더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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