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0)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오랜만에 본 가장 친한 친구의 얼굴이었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시우에게 한 번 안겼다 떨어졌다. 시우는 내가 연희만큼이나 좋아하는 친구였다. 은인 집안의 둘째 아들이기도 했고.

상쾌한 시우의 향을 맡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너 체향이 좀 변했다? 원래 냄새 거의 없었잖아.”

시우가 내게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들이마셨다. 베타인 연희는 내 냄새를 맡지 못했지만 일반 알파인 시우는 내 페로몬 냄새를 맡을 수는 있었다. 물론 그것에 성적인 자극을 받지는 않았다. 그냥 향을 인식하는 정도였다. 그나마 집중하지 않으면 맡기도 힘든 것이 열성 오메가의 체향이다.

그런데 시우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내 몸 냄새가 바뀌긴 한 모양이다. 원민준의 냄새가 지속적으로 마킹되니, 냄새가 겹쳐 체향이 진해진 것 같다.

“너 진짜 누구 생긴 거야? 서연희가 그러던데, 누구 있는데 숨긴다고. 생긴 거면 왜 말을 안 해. 나랑 서연희 궁금해 죽어.”

“아, 정말 아무도 없다니까. 나이가 들어서 냄새가 변한 거야.”

나는 뛰는 심장을 느끼며 농담으로 넘겼다.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도 시우는 영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차는 언제 샀어?”

“응? 나도 살 때 돼서… 샀지. 작년 보너스 모아 둔 걸로….”

“흐음….”

내 주머니 사정은 빤히 아는 친구들이었다. 갑자기 차를 산 것이 시우에겐 꽤 수상해 보인 모양이다.

“혹시 우리 형이… 너한테 뭐 이상한 짓 한 건 아니지?”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진우 형이 뭐가 부족해서 내게 이상한 짓을 하겠는가. 시우는 오히려 자신의 큰형인 한진우가 이 차를 사 준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진우 형이 나한테 왜 이상한 짓을 해.”

“너 형 한국 들어오고 한 번도 못 봤어?”

“밥 한 번 먹은 게 다야. 그냥 힘든 일 있으면 상담하고 하라고, 형이 그런 말 하긴 했는데….”

“아, 형도 진짜 답답하네.”

시우가 작게 혀를 찼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마침 톨게이트였다. 아직 하이패스 기기를 달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돈을 내야 했다.

“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집 들를 거지?”

“응. 너 짐 내리는 거 도와줄게. 짐도 많잖아.”

“말 진짜 이쁘게 해. 야 진짜, 이걸 아까워서 누구한테 줘.”

“운전 중이다. 머리 만지지 마라.”

나와 시우가 시답지 않은 말을 하는 사이 시우의 본가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가장 부촌이라는 동네에 시우의 서울 본가가 있었다. 부지만 해도 700평이 넘는다고 한다. 저택은 얼마 전 리모델링을 해 비교적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다. 원민준도 본가는 이런 곳이겠지. 더 멋진 곳일지도 모른다.

나는 차에서 내려 시우가 짐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사모님이 현관에서 차가 들어오는 걸 보고 얼른 뛰어나왔다.

“우리 아들, 왔어?”

시우를 반갑게 한 번 안았다 놓고 바로 나를 안아 주시는 사모님은, 도저히 제 나이대로 보이지 않는 우아한 외모의 베타 여성이었다.

“우리 서윤이도 왔구나. 집처럼 드나들라고 몇 번을 말하니, 응? 우리 가족들 서운하게.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야. 명절 때가 아니면 인사도 안 와, 이렇게 내외해서 아줌마 서운하게 할 거야?”

“아 엄마 아들 반 년 만에 봤어. 나도 좀 아는 척해 줘.”

“너는 이제 매일 볼 거잖니, 서윤이 이리 오렴, 밥은 먹었어?”

나는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4년 정도 이 집에서 산 적이 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를 먹이고 입혀 주고 교육을 시켜 준 사람들. 고아인 내가 퍽 불쌍한지 사모님은 나를 볼 때마다 살갑게 대해 주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열성 오메가라는 애매한 신분 때문과, 또 진우 형과의 일 때문에 나는 자취하겠다고 이 집을 나갔었다. 이 집에 사는 동안 나는 항상 고용인과 가족의 중간 위치였다. 그래도 이 집 가족들은 나에게 잘해 주었다.

“자주 못 찾아봬서 죄송해요, 사모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 이거 봐, 나 더 젊어지지 않았니?”

“네, 더 예뻐지셨어요.”

“이 녀석 말 귀엽게 하는 거 봐, 그래 누구 만나는 사람은 없고? 얼굴은 왜 이리 반쪽이 됐어.”

마음이 욱신, 했다. 아까 시우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는데. 다정한 사모님 앞에 서자 괜히 움찔했다. 만나는 사람이야 있는데 아무 사이도 아니라서 문제다. 나는 애써 웃으면서 에이 아무도 없어요, 라고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난 언제나 이렇게 좋은 사람들에게 돌봄을 받았구나. 지금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원민준은 나를 충분히 돌봐 주고 있다. 노팅과 하혈 이후 나는 요즘 기운이 없다. 원민준이 없었다면 아마 버텨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보낸 저택에 다녀오자 조금 기운이 났다. 그곳은 내게 반가운 장소였다. 그러나 동시에 눈치를 보며 자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는 곳이다. 반가움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 집에 살 때 나는 밉보이면 쫓겨날까 불안해했다.

집으로 오자 어느새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오랜만에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서윤아.

“어, 어디야? 뭐 해?”

몇 년간 북마크처럼 항상 통화 기록 상위 목록에 위치했던 서연희였다. 그런데도 오랜만의 전화라서 그런지 못내 어색했다. 연희는 약간 작은 목소리로 속닥이며 전화를 받았다.

- 집이지….

“아, 누구 같이 있나 보다.”

- 응.

“아, 애인… 원민준 씨 와 있어?”

- 아, 어, 응.

대답하는 연희의 목소리가 약간 어색하게 들리는 건 내 기분 탓일까.

- 저기 서윤아, 조만간 둘이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응.”

- 나중에 전화할게.

“응, 조만간 이야기 좀 해.”

나는 심호흡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연희에게 모든 걸 고백하고 나면 원민준과 헤어질 수 있다. 아마 연희에게 용서받진 못할 것이다. 연희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니 배 속이 아플 정도로 고통스럽다.

원민준은 다른 것을 구실로 나를 협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나를 뒤흔들 카드는 주변 사람에게 폭로하겠다, 그것이니까…. 오늘 내게 다정했던 시우와 사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희의 남자 친구와 내가 몰래 자는 사이라는 걸 알아도, 내게 계속 친절할까? 아마 사모님은 당신의 아들들, 알파인 시우나 진우 형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말라 하실 수도 있다. 베타 여자에게 문란한 오메가는 유독 혐오의 존재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연희에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 협박하고 협박당하는 관계를 내 손으로 끝내기 위해.

그래도 어떻게 버텨 내야 할 것이다. 내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민준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나는 이제 주변 사람들을 잃는 것보다 민준에게 마음을 가지는 일이 더 두려웠다.

나는 핸드폰을 보다 내려놓았다. 그냥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TV를 켰다. 트렌디 드라마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키스신이 컬러풀한 미장센으로 브라운관 위에 떠올랐다.

오늘밤은 민준에게 전화가 오지 않을 것 같다.

***

며칠이 흘렀다. 우리 팀 일이 바빠졌다. 원민준도 일이 바쁜지 출장을 가는 일이 많아졌다. 어쩌면 우리 회사 일이 아니라 다른 계열사 일로 바쁠지도 몰랐다. 계열사 이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했었으니까. 연희는 여전히 두문불출이다.

연희가 시우 귀국 기념 겸 나의 이사 기념으로 다 같이 모여 우리 집에서 파티를 하자고 제의했다. 물론 연희는 민준도 불렀다. 원민준 이사는 평소 우리가 섹스하는 집에서 파티를 한다는 것에 질색했다. 그러나 그도 연희에게 의심을 사고 싶진 않았는지 결국 허락했다.

이 집이 원민준이 나와 첩질 하려고 구해 준 집이라는 걸 친구들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손님들이 오기 전 나는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냉장고 안을 먹을 것으로 채웠다. 장롱을 꼭꼭 잠가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롱 안에는 민준이 놔두고 간 슈트와 그의 개인 물건 칸이 있었다. 나는 원민준이 두고 간 슈트를 지난주에 세탁소에 맡겨 드라이클리닝을 해 잘 걸어 두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비밀스러운 SM 도구들이 몇 개 정리되어 있었다. 은 수갑, 말채찍, 패들, 개 목걸이 등. 원민준이 우리 집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가져다 놓은 것이다. 나름대로 원민준이 선호하는 것들을 잘 모아 둔 것이었다. 어느새 이런 도구들이 내 생활에 스며들었다. 그리 생각하자 불쾌한 흥분이 몸속에서 한 번 꿈틀거렸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 밀린 TV 드라마라도 보려고 했는데 벨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시우가 일찍 온 건가? 문을 열자 익숙한 우성 알파의 체취가 확 풍겼다. 원민준이었다.

“오셨어요.”

약속은 저녁이었는데 전화도 없이 미리 온 그였다. 이번 주 평일 내내 민준이 지방 출장이라 얼굴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퍽 오랜만으로 느껴졌다.

“일찍 오셨네요.”

“네, 먼저 와서 서윤 씨 얼굴 보려고요.”

그가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입 맞췄다. 현관문도 열려 있는데…. 달콤한 그의 페로몬이 머리를 마비시키는 것 같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시간을 좀 유익하게 써 보려고요.”

나는 작게 웃었다. 현관문이 닫히며 도어록이 삐빅, 하는 소리를 내며 잠겼다. 그는 그대로 나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좀 있으면 연희랑 시우 오는데….”

“저녁이잖아요. 아직 시간 많아요.”

원민준이 내 손목 안쪽에 입 맞추며 말했다. 마음이 너무 편하다. 요즘 속이 자주 미식거리고 울렁거렸다. 두통도 좀 있었는데 원민준의 냄새를 들이마시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요즘 섹스를 잘 안 하니까 욕구 불만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던 터였다.

그가 내 옷을 하나하나 벗겨 냈다. 나는 저항할 기운도 없어서 원민준이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다. 원민준이 사 준 500만 원이 넘는 매트리스 아래로 우리 옷들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민준이 내 가슴을 핥았다. 판판한 가슴인데 그는 집요하게 유두를 빨고 핥았다. 그의 혀가 내 유두를 돌리듯 감쌀 때마다 등골이 오싹하는 쾌감이 몰려왔다.

그는 계속 내 상체에 몇 번 입 맞췄다. 온몸이 녹는 것 같았다. 나는 역시 이 사람이 좋다. 왜 좋아하게 된 걸까. 진우 형 이후로 스스로를 상처 줄 짝사랑은 안 하기로 결심한 터였는데.

민준의 입술이 내 배꼽에서 맴돌다가 천천히 내려와 내 성기 주변에 입 맞춘다. 나는 히으,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거긴, 아, 안 돼요….”

“서윤 씨 여기가 기분을 안 내니 좀 서운해서.”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뱃속이 움찔할 만큼 섹시한 저음이었다. 그가 내 성기를 입에 물었을 때 나는 허리를 떨었다. 원래, 이런 건 안 해 주는 사람인데, 왜. 누가 페니스를 입으로 품고 빨아 준 건 처음이었다.

그의 축축하고 뜨거운 타액으로 내 페니스가 뒤덮였다. 위아래로 그의 입술이 움직이며 내 페니스가 그의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드러난다. 나는 너무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는 혀 놀림마저 능란했다. 팔딱이는 내 페니스는 금방 도달해 그의 입에서 정액을 토했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죄송해요, 입으로 받으실 줄은….”

그는 퉤하고 내 손바닥에 정액을 뱉었다. 그리고 원민준은 침대 옆 휴지를 뽑아 내 손을 닦았다.

“살다가 남자 오메가의 정액까지 입에 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

나는 민망해 대답도 못하고 그의 어깨를 잡은 채 어물거렸다.

“아, 서윤 씨는 암컷이니까 정액이 아닌가. 무슨 물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모르겠… 으응….”

그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벅지 안쪽의 연한 살을 강하게 물었다. 나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몸 가리면 혼나요, 서연희랑 한시우 앞에서도 혼낼 거예요.”

“두 사람, 이야기하지 마세요….”

나는 괴로워하면서도 흥분해 애원했다. 곧 두 사람이 들이닥칠 텐데. 그들은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들의 친구, 이서윤이 돈을 주는 알파와 이불 속에서 얽혀 뒹굴고 있을 것이라고는….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가 뒤에서 나를 부둥켜안는다. 요즘 약간 살이 붙은 배 위로 그의 팔이 둘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나의 귀를 깨물며 발기한 성기를 엉덩이 골 사이에 비볐다. 연한 엉덩이 살 위로 그의 단단한 성기가 까칠하게 문질러졌다. 고운 얼굴과는 다르게 흉물스러울 정도로 크고 단단한 성기는 이미 충분히 흥분해 팽창해 있었다.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어떻게 할까요, 서윤 씨.”

“으응, 아….”

“안아 줘도 힘이 없고 때려 줘도 힘이 없고, 빨아 줘도 힘이 없고.”

원민준이 내 어깨 위에 입술을 내리며 여러 차례 키스했다. 그리고 목덜미 뒤쪽을 살살 문다. 맹수에게 물린 톰슨가젤이 된 기분이다. 차라리 그가 입을 벌려 내 몸을 씹고 물었으면 좋겠다. 그의 타액과 페로몬으로 범벅이 되고 싶었다. 어느새 원민준의 몸에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흘러나와 나를 잠식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내 입 속에는 침이 잔뜩 고였다. 꿰뚫리고 싶어. 내 머릿속은 달아올라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뭘 해야 슬퍼하지 않으려나. 요즘 그 생각에 잠이 안 오는데.”

“으응… 읏….”

원민준이 내 목 뒤를 강하게 깨물었다. 목 뒤와 정수리가 오메가의 페로몬이 가장 많이 나오는 부위라고 했던가. 내 얼마 안 되는 페로몬까지 모두 빨아 집어삼키려는 듯 그가 집요하게 목 뒤에 자국을 남기고 핥았다. 민준이 한 손을 내 왼쪽 무릎 안쪽에 넣어 높이 잡아 올렸다. 드러난 비부 안에 그가 천천히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답해 봐, 서윤아.”

그가 속삭이며 내 안을 쑤셨다. 서윤아, 라고 불린 건 처음이라 심장이 뜨거워졌다. 왜 당신이 내게 하는 행동들은 이렇게 의미가 있을까. 왜 모든 일이 처음이 되어야 할까. 왜 당신에게 안기고 당신을 좋아하게 되어야 할까.

“앗, 응, 민준 씨. 안아 주세요.”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온몸이 녹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쑤시던 그가 본격적으로 나를 엎드리게 하고 큰 성기로 쑥쑥 쳐올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암고양이처럼 엉덩이를 높게 올리고 울었다. 내가 절정에 달하기 직전 그가 큰 손으로 내 엉덩이를 철썩철썩 내리쳤다.

내 구멍이 너무 젖어서 거의 찰박이는 소리를 냈다. 나는 손힘이 세질 때마다 더 발정했다. 크고 흉물스러운 성기가 내 안을 드나들었다. 나는 팔로 버티며 발갛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더 추어올렸다. 이제 나는 원민준이 시키지 않아도 자세를 잘 잡았다. 허리를 내리고 엉덩이를 치켜 올려야 이 자세에서 더 잘 받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그가 절정에 달해 내 구멍에 진하고 양 많은 것을 토해 냈을 때 나는 그제서야 팔에 힘을 풀고 상체를 침대 위로 무너뜨렸다. 원민준이 이불을 들어 올려 축축하게 물든 천을 보여 주었다.

“이만큼이나 쌌네요. 보통 이렇게까지 물 많은 오메가는 없는데.”

나는 귀를 한껏 붉혔다.

“고개 숙이고 직접 보지 그래요.”

나는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이불을 걷고 침대 시트를 보았다. 오줌이라도 싼 것처럼 시트 한쪽이 동그랗게 젖어 물들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귀만 붉혔다.

“이참에 한시우한테도 보여 주면 어때요. 너 오기 전에 원민준 씨랑 하느라 내가 이만큼 쌌다고.”

“그러지 마세요.”

악마처럼 속삭이는 그의 말에 배 속이 오싹했다. 친구들이 이런 나의 본성을 안다면 나는 참을 수 없다.

“저의 본성은 민준 씨만 아시는 걸로 충분해요.”

원민준이 숨을 들이마시며 내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그의 목에 익숙하게 팔을 두르며 눈을 감았다. 이제 곧 친구들이 오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사들도 끝내야 할 것이다. 조만간….

원래 원민준의 집안과 한시우의 집안이 아는 사이라 둘은 대강 안면이 있었다. 친한 정도는 아니고, 그냥 어색한 형 동생 사이 정도인 듯했다. 다들 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저녁을 먹자마자 술판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 집들이 겸이라 나는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원민준은 그런 내 뒷모습을 이따금 못마땅한 듯 보았다.

나도 기운이 없었지만 원민준도 요즘 기분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대놓고 연희에게 무뚝뚝하게 굴었다. 연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연희는 나만큼 예민한 여자가 아니다.

“서윤아, 나 담배 좀 피워도 돼?”

“아, 나도.”

연희가 시우 앞에서 담배를 한 개비 집어 들자 나는 경악했다. 내가 알기로 원민준에게 아직 내숭을 떠는 중인 연희였다. 나는 연희를 만류했다.

“서연희 너 왜 그래.”

“아, 민준 오빠 이제 나 담배 피우는 거 알아. 괜찮지?”

“임신 전후로만 끊으면 상관없지. 그래도 미리 좀 줄이지 그래.”

“응, 뭐 술 마실 때 가끔 겉담배 피우는 거라.”

원민준은 연희가 담배를 문 모습을 보고도 태연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한 것처럼 쳐다본다. 와인 잔을 손에 든 시우도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갑자기 원민준이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찌푸렸다.

“그래도 둘 다 나가서 피우지 그래.”

“왜, 오빠도 흡연하잖아. 냄새 별로야?”

“이서윤 씨 기관지 약하지 않나. 실내에서 피우면 예민한 사람한텐 안 좋아. 나가서 피워.”

연희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담배를 밀어 넣었다.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원민준 이 남자가 미쳤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모르는 사이로 가장해도 모자랄 판에….

“아, 아냐 나도 가끔 피우는데 뭐. 상관없어. 여기서 피워.”

“좀 있다 피우지 뭐. 괜찮아, 괜찮아. 우리 게임할까?”

역시 연희는 성격이 좋았다. 그리고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이 일은 금방 잊혀졌다. 나는 오늘 술이 잘 안 받았다. 원래 잘하는 편이 아니라 많이 마시지 않았다. 시우와 연희는 원래 잘 마시는 데다 오늘은 필을 받은 듯 초저녁부터 들이켰다.

“서윤아, 우리 누가 좋아요 게임 하자. 오늘 시우 보내 버리자.”

“야 그걸 아직도 기억해? 하지 마.”

“왜. 하자, 하자. 응?”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리는 오래 알고 지낸 만큼 셋의 세계가 견고했는데, 이 게임도 우리끼리 장난으로 하는 게임이었다. 주로 내가 별로 취해 있지 않고 연희와 시우가 만취했을 때 하는 게임으로, 한 명을 그만 마시게 하거나 아예 보내 버리려고 하는 게임이었다.

룰은 간단하다. 연희와 시우가 둘 중 누가 더 좋아? 하고 물으면 내가 시우가 좋아, 연희가 좋아, 하고 대답하는 식이었고 선택되지 못한 쪽이 벌주를 마신다. 그리고 술을 마실 사람이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주로 뽀뽀해 달라는 장난을 많이 치곤 했지만.

“원민준 씨 계시잖아. 그거 남들이 보기에 이상해. 다른 거 하자. 응?”

“왜에- 우리 민준 오빠 얼마나- 오픈 마인드인데. 서윤인 모를걸? 하자. 자, 먼저 잔 따르고. 서윤아, 우리 둘 중에 누가 좋아?”

“왜 둘이에요, 셋이지.”

원민준이 바로 끼어들었다. 이 게임 이름을 바꿔야겠다. 이서윤 이지메 게임으로. 서연희 얘가 도대체 왜 이러지. 미쳤나.

“꺄하하, 오빠 진짜루- 알았어. 그럼 셋 중 누가 좋아요, 서윤아.”

“어….”

나는 어쩔 줄 몰랐다. 확실한 건 원민준 씨가 좋아요, 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 이다음에 죽는다. 지금 원민준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여자 친구 앞이라고 해도 오메가에게 무시당하는 걸 참을 수 없는 게 알파들 기질이다. 이건 무슨, 미친 상황이지. 그러나 연희 앞에서 원민준 씨, 라고 대답할 수도 없어 나는 망설이다 연희를 가리켰다. 무엇보다 서연희는 오늘 그만 마셔야 했다.

“자 그럼 뽀뽀.”

시우가 장난을 치면서 자기 입술을 가리켰다. 보통 이때 뽀뽀하는 시늉을 하면 끝나는 게임이지만… 오늘은 원민준이 있다.

“야 너 왜 그래, 다음에 해. 다른 벌칙 하자.”

“그럼 너 지금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힌트 말해 주기 어때.”

시우까지 오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나는 정말 울 것 같았다. 무슨 재앙의 날인가? 내가 쩔쩔매는 걸 본 원민준의 표정이 더 사나워졌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와인 병 하나가 날아갔다. 원민준이 손으로 와인 병을 밀어 버린 것이다. 쨍그랑하고 큰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는 놀라 혼자 큰 소리를 내 버렸다. 히익, 하고.

“실수했네요. 미안해요.”

원민준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눈빛은 차갑다 못해 누구 하나 칠 눈빛이었다.

“이서윤 씨는 나가서 술 깨는 약 좀 사다 줄래요? 연희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내가 이거 치울게요.”

“네, 네에.”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을 들고 급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배 속이 울렁거렸다. 뒤에서 누가 붙잡기에 놀라 돌아보았다. 민준인 줄 알았는데 시우였다. 시우의 잘생긴 호감형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시우가 내 팔을 잡고 빠르게 걸으면서 속삭였다.

“이서윤, 너 원민준이랑 무슨 사이야. 이거 무슨 상황이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시우가 뭔가 눈치챘다.

눈앞이 깜깜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나는 제자리에 멍하니 섰다.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이 이런 감각일까.

“추궁하려는 거 아니야. 이리 와 봐.”

시우가 내 팔을 잡고 근처 벤치로 데려가 앉혔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원민준이 나를 잡아 죽일 듯 봐. 연희가 너 안 볼 때 원민준이 너 쳐다보는 표정은 또 어떤 줄 알아? 나랑 연희랑 취하니까 민준 형 바로 눈빛 바뀌는 거 봤어?”

꼭 막 잡아먹을 토끼를 보는 퓨마 같다고 시우가 덧붙였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그, 그게, 연희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고백하려고….”

놀라서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이 왔다.

“너 원민준한테 협박당해? 아니면 무슨 일 당했어?”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합의하에… 그렇게… 정말 계속 만나려고 한 건 아닌데….”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시우가 으이구, 하면서 내가 진정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나는 눈가를 쓱쓱 문질러 닦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 꼬였네. 그래서? 원민준 형이 양다리 걸쳐?”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너랑 양다리도 아닌데 자자고 그랬어 그 새끼가?”

가슴이 뜨끔했다. 한시우는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거지. 서연희는 그렇게 눈치가 없는데. 시우는 정말 내 일이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듯 다 알아챘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협박당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복잡했다. 내가 어물대는 걸 보고 시우가 한숨을 푹 쉰다.

“알았어, 일단 이 자리는 빨리 파하고, 너 좀 쉬고 내일쯤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자.”

“응….”

“일단 모른 척할 테니까 약국부터 가자. 서연희 저거 술 좀 깨야지 안 되겠다. 쟤도 좀 들어 볼 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일단 너 좀 진정하고.”

나보다 한 뼘은 큰 시우가 일어나 먼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따라갔다.

“저기, 나… 비난 안 해? 경멸스럽지 않아?”

나는 눈가를 한 번 더 문질러 닦고 물었다. 바로 경멸받고 욕을 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면 아직은 상황을 몰라서 보류해 두는 걸까.

“나 연희 남자 친구랑….”

“네가 서연희 남자 친구 뺏었다고?”

“아니야, 꿈도 꾼 적 없어.”

동갑인데도 형 같은 시우 앞에서는 난 언제나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다. 시우는 항상 연희와 나 사이에서 오빠나 형 노릇을 해 왔다. 나는 급히 부정했다. 나 따위가 서연희의 남자 친구를 빼앗으려 하다니 말도 안 된다.

“휴… 네가 서연희 남자 친구를 의도적으로 후릴 정도로 비범하면 나랑 우리 형이 왜 네 걱정을 달고 살겠냐, 서윤아.”

“…….”

“일단 상황은 한번 들어 봐야 알 것 같은데, 네가 잘못한 것이 있든 없든 나중에 이야기하자.”

시우가 혀를 찼다. 당장은 시우는 나를 믿어 줬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시우 앞에서 자세한 내막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한 특수한 성관계 같은 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벌써 몇 달이나 원민준 이사에게 말려서 밀회를 가지고, 집과 차도… 생활비도… 가난한 출신의 오메가는 어쩔 수 없다고 경멸받으면 어쩌지. 그렇다고 해도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특히 연희에겐… 죽도록 미움받아도 할 말이 없다.

집으로 돌아가자 부엌에서 연희와 민준이 나직하게 싸우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지 말고…오빠나 잘해. …낳아야 하니까 담배 끊으라고? …만 해도… 그게 할 말이야…?”

“…너나 제대로 해….”

원민준의 목소리가 차갑게 뱉어지는 순간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둘이 싸우는 건 처음 본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경직된 날 본 연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왔어? 우리 이야기 다 끝났어.”

시우가 앞으로 나섰다.

“나 집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버지 호출. 너 너무 취한 것 같은데 연희 너도 나와라. 윤 기사님이 데리러 온다는 데 같이 타고 가.”

“응, 그럴까?”

연희는 별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지만 시우가 강하게 잡아끌었다. 다행이었다. 이 자리를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서윤아 너 괜찮아?”

“아, 응, 취했나 봐. 나 좀 쉬고 싶어.”

나는 민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민준 형도 나와요. 오늘은 마실 날 아닌가 보네. 나중에 따로 다 같이 자리 잡죠.”

원민준은 이 상황에 매우 짜증이 나 있었다. 나는 더욱 주눅 들어 빈손만 만지작거렸다. 내 잘못이 있든 없든 나는 그가 화를 내는 것이 무서웠다. 난 어쩌면 이미 원민준에게 꽉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요, 쉬어요, 서윤 씨.”

“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끄덕였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장판이 된 집만 남았다. 계속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몸살기라도 있는 걸까.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진다. 나는 테이블을 외면하고 침대로 가 누웠다.

바로 잘까 고민하다가 원민준에게 전화가 올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쉬다가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신호음이 가고 민준이 전화를 받았다. 시우에 대한 일은 일단 말하지 않을 셈이었다. 이미 들킨 이상 시우에게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먼저였다.

“저기… 집에 가고 계세요?”

- 네.

“오늘 화나셨어요?”

- 제가 왜요?

“…친구들 때문에.”

기죽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원민준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수화기 너머의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한시우랑 그렇게 친해요?

“아… 네.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서.”

- 서윤 씨를 좀 과하게 챙기던데.

나는 민준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불쾌감을 느꼈다. 머리가 더 아파 온다. 약간 앓는 소리를 냈다.

- 어디 아파요? 오늘 안색이 안 좋던데.

“아니요, 그냥… 목이 좀 아파서.”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인 민준이 신경을 쓸까, 나는 말을 넘겼다. 민준은 미심쩍어하는 것 같았지만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는 내 컨디션이 나쁘면 모질게 행동하지 않는다.

- 그래도 알파인데 너무 과하게 가까운 것 아닙니까. 이도 저도 아닌 사이인 알파한테 너무 의지하는 거 보기 좀 그렇네요, 처신 잘하세요.

쌀쌀하게 말하는 원민준이었다. 연희랑 싸운 것 때문에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지. 아니면 시우와 친한 꼴이 정말 보기 싫어서 그런지. 그의 뜻을 알기 힘들었다. 나는 시우와의 대화 이후로 계속 머리가 멍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채 변명하기 시작했다.

“시우는 알파 아니에요. 제 페로몬도 인식 못하는걸요. 제가 하도 열성이라… 제 페로몬은 옅어서 우성이나 되어야 오메가로 느낄 수 있을까 말까래요.”

나는 알파인 시우와 사이가 좋아서 받는 오해들에 대하여 해명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

- …그것도 그렇네요.

“네.”

- 그럼 한진우는?

원민준이 뜻밖의 질문을 했다. 한진우는 시우의 친형으로 역시 알파였고 내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깨끗하게 감정이 정리된 사이였다. 나는 민준이 이걸 왜 묻는지 몰라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어… 그냥 아는 형이요…?”

앞에 예전에 첫사랑이었던, 을 괄호로 생략하긴 했지만 틀린 설명도 아니었다. 진우 형이랑은 정말 친했지만 지금은 많이 데면데면했다. 물론 서로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친한 형 이상은 아니었다.

- 그럼 저는요?

“네?”

- 나는 뭐냐고요.

“어… 그냥 아는….”

- …….

나는 이제 전화 통화만 해도 원민준이 찌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원민준은 내게 관계를 정의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확실한 건, 그는 나에게 자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라고 시킨다는 것이었다. 또, 그가 질리기 전까진 나는 그의 오메가였다.

“어, 아는 주인님…?”

원민준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귀여우려고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진짜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마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맞겠지?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네… 해 버렸다.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하나.

- 한시우 같은 친구 많아요? 남자 중에.

“아니요. 유일한 친구예요…. 남자 중에 제일 친한….”

- 그럼 나 같은 사람은 많아요?

“…아니요, 유일해요.”

- 그럼 유일한 주인님, 해야죠.

원민준이 혀를 찼다. 내 뺨이 붉어졌다. 어느새 머리 통증도 가셨다. 너무 초조하니 상황에 몰입이 안 되었다. 민준과 하는 대화가 만담 같기도 했다. 상황에 걸맞지 않는 대화였다.

- 제대로 대답 못했으니 이서윤 컨디션 좋아지면 또 맞아야겠네.

“그냥 저번처럼 빽빽이 제출하면 안 돼요?”

원민준이 또 한 번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 시우에게 들켜 버린 마당에 그런 플레이를 할 정신력은 없다. 나는 지금 내일 시우와 대면할 생각뿐이었다. 원민준과 그런 플레이에 다음이… 있을까? 어쨌든 나는 요즘 원민준이 어떤 패턴으로 화를 내고 푸는지 조금 파악했다. 이런 종류의 말에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 몇 번 써서 낼 건데요.

“50번이요, 자필로, 저번처럼….”

저번에 원민준이 갑자기 변덕으로 <이서윤은 원민준 주인님의 오메가입니다>라고 50번 써서 내게 한 일을 떠올린다.

- 이제 맞는 것도 싫고, 교육의 성과가 없네요. 서윤 씨.

“죄송해요. 때리셔도 괜찮고요.”

- 됐어요. 푹 쉬기나 해요.

“…네.”

- 내일은 본가 가야 해서 못 들릴 것 같고, 내일모레 갈게요.

“네. 기다릴게요.”

나는 형식적으로 멍하니 대답했다. 원민준은 알겠다고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내 머릿속에서 민준과 한 대화 내용이 날아가 버렸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내일 4시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시우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는 일단 좀 쉬기로 했다. 민준과 대화할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다시 두통이 돌았다. 나중에 생각하고 싶다.

***

나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앉아 있다. 괜히 커피 잔만 쥐었다 놓았다. 맞은편에는 시우가 앉아 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어제부터 계속 배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내일은 병원에 가 봐야겠다.

“그래서, 원민준이랑은 언제부터야?”

“연희랑 원민준 씨랑 사귄 지 한 달 후쯤… 부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눈물이 울컥 나왔다. 물론, 초반에는 원민준의 강압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 약속했다. 들키면 원민준만의 탓이 아니라고 하겠다고…. 내 가장 큰 잘못은 그를 원하고, 탐내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원민준을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다시 욱씬, 하고 배가 아팠다.

“나는….”

배가 아파서 복부를 감싸 쥐었다. 나는 테이블 모서리를 쥐고 몸을 숙였다.

“서윤아?”

하늘이 빙글 돌았다. 눈앞의 커피 잔과 시우의 얼굴이 일렁인다. 배를 감싸 쥐고 웅크렸다. 왜 이러지? 내 몸이….

“서윤아!”

시우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

눈을 떴을 때는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하얀 침대. 소란스러운 주변 소리. 아릿함을 느끼며 옆을 보자 링거가 꽂힌 손목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인지. 멍한 머리가 또렷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차트를 든 간호사가 다가왔다. 간호사가 외쳤다.

“보호자님, 환자분 깨셨어요.”

“서윤아, 괜찮아?”

커튼이 걷히고 시우의 얼굴이 보이자 나는 안심했다. 예민한 내 몸은 방금 정도의 압박도 견디지 못했나 보다. 바로 블랙아웃되다니. 내가 한심했다.

“응… 나 괜찮아.”

“야, 그렇게 힘들면 말을 하지…. 내가 추궁해서 그런 것 같잖아. 아무튼 미안하다, 서윤아.”

“아니야, 그냥 피곤했던 것 같아…. 나 이제 퇴원해도 돼?”

“검사 받고. 맹장 같은 거 아니야? 너 쓰러지기 전에 배를 감싸 쥐던데.”

“…그건 아닐 것 같긴 한데.”

나는 걱정스러운 시우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혹시 크게 아픈 건가? 요즘 계속 배가 아팠으니 신경성 위염이나, 더 심하면 복막염? 아니면 맹장? 맹장은 더 아프다고 들었는데…. 나는 간호사의 권유로 여러 가지 검사를 받게 되었다.

이 병원은 시우의 집안과 관련 있는 병원이었다. 그래서인지 간호사들이 일사천리로 안내해 주었다. 검사도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한시우 도련님이 알파 보호자분이신가 보네요. 앉으세요.”

의사가 상냥하게 말했다.

“이제 거의 2개월째인데, 아시지요? 임신 중 빈혈과 초기 복통입니다. 남자 오메가는 원래 초기 복통이 좀 있거든요. 어디 이상이 있어 그런 건 아니니,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니에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지금 의사가 뭐라고…. 내 표정을 본 의사가 도리어 눈을 둥그렇게 뜬다.

“모르셨어요? 임신 중이신 거….”

나는 아연한 얼굴로 시우와 마주 보았다. 2개월이라고? 그렇지만 분명… 분명히 임신 테스트기를 썼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누구 애야?”

멍하니 묻는 시우의 말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는 투였다. 나는 놀라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안에, 민준의 아이가 있다.

현실감이 없어서 멍하니 시우를 보고 멍하니 다시 의사를 보았다. 의사는 나에게 이 종합 병원 산부인과 층으로 가서 진찰받으라고 지시했다. 정신 차려 보니 나는 산부인과 여의사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저기… 임신 확실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산부인과 여의사가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짚이는 일 없으세요? 임신 확실하신데요…. 남자 오메가에 2개월이면 증상이 많았을 텐데.”

“짚이는 일이 있긴 한데요… 알파와 노팅을 하긴 했었어요, 두 번….”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시우가 움찔했다. 소꿉친구가 또 다른 소꿉친구의 남자 친구와 노팅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불편한 듯했다.

“그런데 바로 하혈을 했어요. 그리고 그 뒤에 열도 나고 몸이 아파서 노팅을 몸이 거부했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배를 감싸 쥐고 쓰다듬었다. 정말 진짜일까? 검진 결과가 잘못 나온 건 아니겠지?

“그 뒤에 임신 테스트기를 써 봤는데 한 줄이라서, 임신이라고는….”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하다는 표정이다.

“남자 오메가는 원래 첫 노팅 시 출혈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노팅을 하면 몸 안의 질이 전부 열리는 건 아시죠? 거기 깊은 곳 내벽에 막 같은 것이 있거든요. 첫 노팅이셨나 보네요. 경우에 따라서 출혈이 심하기도 해요. 그리고 보니까 페로몬 수치가 심한 열성이신데, 그럼 형질 강한 알파의 페로몬을 많이 받으면 체질적 변화가 있기도 해요. 발열이나 구토, 현기증 같은 것이 동반되는 경우도 많고요. 임신 후 변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아마 그런 과정일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정밀 검사가 필요할 것 같네요.”

“그럼 임신 테스트기는요? 분명히 한 줄이었는데….”

“언제 해 보셨는데요? 임신 극초기엔 테스트기로 잡히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아….”

확실히 나는 노팅한 거의 직후에 테스트를 했었다. 그런 거였나? 내가 정말 상식이 없는 편이구나. 딱히 주변에 그런 이야기를 해 줄 오메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 오메가의 몸은 베타 여자와는 다르니까….

“요즘에 하혈하신 적은 없나요?”

“몇 번 한 적이 있긴 한데요. 심하진 않았고요.”

“몸이 임신에 적합하게 변해 가면서 출혈이 일어나는 거예요. 남자 오메가는 출산이 힘든 편이라 지금부터는 다 조심하셔야 해요. 스트레스는 금물이고요.”

“네….”

의사가 하는 말을 모두 귀담아듣고 있는데도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열성 남자 오메가의 임신은 산부인과 의사가 보기에도 흔한 일은 아닌가 보다. 귀한 임신, 어쩌면 두 번은 없을 임신이었다.

“저, 선생님, 혹시 검사 결과가 잘못 나왔을 가능성은 없지요? 혹시 상상 임신이거나….”

“네? 100% 확실한 임신이에요.”

“저 열성이라, 남자 오메가고, 그래서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맞아요. 남자 오메가의 임신은 상대 알파의 형질과 상성에 달렸죠. 사실은 거의 기적이에요. 상대 알파 분이 알파 성질도 강하고 상성도 잘 맞아서 성공하신 거예요.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의사는 시우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시우가 애 아빠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시우가 일반 중에 형질이 강하긴 해도 우성 알파는 아니었다.

보통 열성 남자 오메가는 우성 알파가 아니면 아이를 가지기 힘드니까. 혹은 기적적으로 생긴 일반 알파, 한시우와 열성 오메가의 아이라고 오해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눈가를 쓱쓱 문질러 닦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초음파 들어갈게요.”

나는 의사가 이끄는 대로 검진대 위로 누웠다. 의사가 내 배 위에 초음파 검사 전 바르는 차가운 젤을 발랐다. 그리고 초음파 기기로 내 배를 누르며 스캔했다. 조그만 콩처럼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아기. 정말로 내 안에 있는 거구나….

나는 계속 몇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성공했을 줄이야… 다 포기했는데.

“저, 선생님, 어제 술을 좀 마셨고… 저번엔 두통약도 먹었는데 괜찮아요?”

“검사를 좀 정밀하게 해 봐야 알겠는데 아마 괜찮을 겁니다. 두통약이나 술 한두 번 마셨다고 바로 아이가 잘못되진 않아요. 다만 지금부터는 술, 담배, 약물 다 금지예요. 조산 기운도 좀 있으신데 모든 걸 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힘든 일은 하지 마시고, 직접 성관계도 금지고요.”

“네.”

나는 멍하니 대꾸했다. 아기를 위해서 매일 물구나무를 서세요, 라고 해도 네, 선생님 말이 다 맞아요 하고 법전처럼 맹신했을 것이다. 나는 멍하니 아기집 안의 콩 같은 조그만 아기를 보았다. 너무 작은데….

“강낭콩… 같아요. 굉장히 작아.”

“초기잖아요. 주변 사람들한테 알려서 같이 주의 사항 지켜 달라고 하세요. 남자 오메가 몸은 특히 섬세해요. 열성이시잖아요, 정말 귀한 임신이어서 그러는 거예요. 안정될 때까지 꼭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사람…. 원민준과 연희가 떠올랐다. 일단 원민준에겐 말할 수 없다. 임신 금지, 피임약 복용 등으로 계약서까지 쓰게 만든 남자다. 알면 어떻게 야차처럼 돌변할지 모른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마음의 통증을 무시하고 홀린 듯 나는 초음파 화면을 보았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정말 원하는 걸 가졌다.

“선생님, 저희 집안 아시죠, 말 함구해 주세요. 저랑 아주 가까운 친구라서요.”

아까부터 뚫어져라 초음파 화면을 보던 시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우가 의사를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여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 기록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한시우가 임신한 오메가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온 일은 구설수가 될 것이다. 시우는 자신의 체면 걱정보다 나를 감싸 주려고 한 행동일 테지만.

시우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나올 때 내 손엔 초음파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상황이야 어쨌든 내가 아이를 가졌다니,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아까부터 기쁨에 몸이 떨렸다. 지금껏 내 인생은 모든 것이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주변에 수많은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었지만 한 번도 내 손으로 움켜쥐어 본 적이 없다. 나는 태어나 처음 소원을 이뤘다.

그러나 시우의 표정은 착잡했다. 친한 친구의 혼전 임신이라니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할 거야?”

“낳을 거야. 나한텐 기적 같은 일이잖아.”

나는 시우를 보며 어설프게 웃었다. 일단 이 아이를 어떻게든 원민준에게 숨기자, 그리고 연희….

“연희에겐… 솔직히 고백할 거야. 원민준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아마 연희랑은 그걸로 끝나겠지. 죽도록 욕을 먹고 절교당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것을 잃어도 내게 이 아이만 있다면….

나는 연희와 원민준을 떠날 것이다. 내 인생의 유일한 기회. 내가 가족을 가지게 될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민준에게서 도망갈 것이다.

만일 연희가 아직 민준과 결혼할 생각이 있다면 어떨까. 나는 그녀가 이 아이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도록 잘 설득할 생각이었다.

민준에게 아이의 존재를 밝힐 생각은 없으니 그저 눈감아 달라고…. 어차피 민준은 이 아이가 필요하지 않을 거다. 그에게 필요한 아이는 후계자가 될 우성 알파일 테니.

그러나 연희가 나와 원민준의 관계를 알고도 민준을 용인할지는 미지수였다…. 모든 것은 이제 연희의 결정에 달려 있다. 나는 이번엔 연희에게 결정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오늘… 연희에게 고백하고 정리할 거야.”

시우는 만류했지만 나는 바로 연희를 불렀다. 연희는 할 말이 있다는 내 말에 의아해했지만 바로 오겠다고 대답했다. 연희는 화를 낼까, 아니면 욕을 할까. 연희가 남자 때문에 우는 타입은 아니지만 이번엔 울지도 몰랐다. 그럼 내 가슴은 정말 무너질 것이다.

시우는 여전히 착잡한 표정이었다.

“시우야, 서윤아. 나 왔어.”

요즘 얼굴살이 빠진 연희였다. 원민준 때문에 속을 썩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연희가 발랄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지끈거렸다.

아이를 가지게 된 이상, 민준과의 관계는 연희가 하라는 대로 따를 것이다. 아마 그녀는 정리하라고 할 테니. 나는 그저 이 아이만은 민준 몰래 지킬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안 그래도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어. 시우도 있고 잘됐다.”

연희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덥다는 듯 손부채질을 했다. 연희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기색은 없다. 나는 연희의 눈치를 보았다.

“연희야, 고백할 게 있어.”

나는 서연희에게 몇 가지를 고백했다. 민준과 자는 사이라는 것, 원민준과 처음 가평 별장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성관계를 맺은 일, 호텔방에서의 만남, 아직까지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일.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는 것. 그리고… 민준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 그리고 민준을 좋아하게 된 것….

그러나 연희에게 도둑 키스를 한 일이나 SM 플레이나 스폰서 계약서에 대한 내용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도저히 그것까지는 말할 수 없었다.

내 고백을 모두 들은 연희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이전에 서연희가 보여 준 동영상의 고양이랑 똑같았다. 얼굴에 셀로판지를 붙여 움직이지도 못한 채 눈만 크게 뜨고 굳어 버린 고양이.

연희가 딱딱하게 굳은 입을 열었다. 그 표정은 배신감, 충격,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를 표정이었다.

“그럼 네 안에 원민준의 애가 있다고?”

“…응. 아마 오메가 아기겠지만….”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우성 알파를 임신하진 않았을 거란 변명이었다. 너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그런….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 주변이 축축해졌다. 그러나 잘못한 건 나였다. 괴로워하거나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비겁했다. 내가 괴롭다고 내 잘못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욕을 먹어도 될 상황이니 얼마든지 먹고 연희가 때리면 맞고 속상해하면 다 받아 줄 생각이었다.

“정말 미안해, 연희야. 변명할 말도 없어.”

“하, 씨발.”

연희가 욕을 뱉었다. 연희가 이렇게 화난 모습은 오랜만에 본다. 서연희가 평소엔 웃고 다니는 타입이지만 한번 머리가 돌면 성질이 장난이 아니다.

“너… 무슨 이상한 일은 안 당했어?”

“…어?”

나는 순간 부정할 타이밍을 놓쳤다. 연희의 반응이 상상한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연희와 시우의 표정이 동시에 이상해졌다.

“너 무슨 이상한 일 당했지?”

“아, 아니야, 물론 우성 알파니까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다정하게… 대해 줬어.”

“…….”

연희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우리의 관계에서 원민준과 나는 공범이었다. 나는 공범 중 자백하는 쪽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공범을 옹호했다. 민준이 모질게 굴 때도 있었지만, 다정하게 대해 줄 때가 많았다…. 이런 내 마음은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민준과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시큰했다. 그가 내게 SM 플레이 같은 걸 시키긴 했지만 늘 정도를 지켰고 다정했다. 나도 분명히… 그 플레이를 좋아했다. 그에게 더 구속당하길 바란 적도 있다. 물론 협박당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희에게 부차적인 문제일 터다.

“진짜 개새끼…. 내가 서윤이 너한테만은 손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딱 너한테만 손을 대?”

“어?”

그런데 연희의 반응이 계속 이상하다. 시우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너 진짜 원민준하고 사귀는 건 맞아? 도대체 너희 뭐야? 너 내가 미국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말할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

연희가 시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둘의 반응이 내가 생각한 것과 조금 다르다. 미국 나가기 전에…? 연희가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따로 사귀는 사람 있어.”

“…어?”

“그리고 그 사람 관련해서 민준 오빠한테 잡힌 약점이 있어.”

“…….”

원민준 씨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연희가 풀어내기 시작한 말에 내 눈동자가 커진다. 이건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다르다.

***

“민준 오빠한테 약점 잡히고 나서, 내가 먼저 제의했어. 이해관계가 맞아서 합을 맞추게 된 거야.”

서연희는 화려한 스톤이 달린 손톱을 깨물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연희가 들려준 내막은 이러했다. 연희에겐 집안에서 반대하는 애인이 있다. 아마 무슨 수를 써도 허락해 주지 않을 애인이다. 그리고 원민준은… 약혼녀가 있었다. 그리고 연희를 만났을 땐 그 약혼녀가 막 정리된 상태였다. 자세한 내막은 연희도 잘 몰랐으나 약혼녀에 관한 소문이 더러웠다는 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그 약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어 했다.

그 약혼을 왜 깨고 싶어 했는지에 대한 건 연희도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여자가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나. 원민준은 우성 알파를 낳아 줄 베타 와이프를 바랬다. 그래서 약점이 잡힌 서연희는 원민준에게 먼저 제의했다. 비즈니스 결혼. 이런 이야기가 나오자 시우마저 연희를 미쳤다는 눈으로 보았다.

“너희 그럼 어디서 어떻게 엮인 사이야?”

내가 알기로, 원민준과 연희는 모 호텔 바에서 민준이 연희에게 말을 걸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면서 만난 것이 처음이었다. 그 자리엔 나도 동석해 있었다. 그게 아니었던 건가?

“아냐, 부모님들 소개로 그 전주에 처음 만났어. 그런데 그 뒤에 바로 원민준한테 길에서 진짜 애인이랑 있는 걸 들켰어. 그리고 약점이 잡힌 거야. 그 뒤에 원민준이랑 사귀는 척하는 걸로 이야기가 흘러갔어. 걔도 데리고 있는 오메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그게 나일 줄 몰랐던 거다. 확실히 연희는 요즘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민준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연희를 멀리하게 된 나도 연희의 사생활과 점점 멀어졌었다.

왜냐하면, 민준이 나와 연희를 은연중에 이간질해서…. 확실히 나는 민준을 만나며 그에게 감정이 생길수록 연희를 원망했었다.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이 의도해서 이간질한 것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하나 확실한 건, 민준은 연희와의 관계가 진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나에게 사실을 숨겼다.

연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연희를 본다.

“너 제정신이냐?”

“제정신 맞거든. 야, 내가 우리 집 덕으로 누리고 산 게 얼만데, 집안 지원 끊기면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니? 거기다 원민준 걔는 베타에 관심 없어. 결혼하면 걔 집안에서 가진 걸 다 누리고 살 수 있는데 너라면 한번 혹하지 않겠니?”

“하여간 진짜 너도 또라이다, 그걸 지금껏 말 안 해서 서윤이 이렇게 만들어 놔?”

“야, 이게 왜 내 잘못만이야? 서윤이 너도 그래. 어쨌든 원민준이 내 애인인 줄 알았으면 그런 일이 있었을 때 바로 나한테 말했어야지. 너 혼자 끙끙 앓다가 이런 일까지….”

연희가 내 배를 본다. 나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이건 내가 바란 건데…. 연희가 다가와 내 뺨을 쭉 당겼다.

“너 바보야? 왜 혼자 말을 못하고 끙끙대다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놔.”

“아으, 아파.”

“야, 그만해. 서윤이 맹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분은 안 풀렸지만 겨우 참는다는 표정으로 연희는 내 뺨을 놓았다. 옆에서 말리는 시우가 묘하게 얄미워 보였다. 서연희의 응징의 대가로 내 뺨은 발개져 있었다. 그러나 뺨과는 별개로 나는 엄청난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나는 서연희의 남자 친구와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연희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그런 안도감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나한테 그런 큰일을 숨기고 말도 안 하다니.”

“너도 나한테 숨기고 있었잖아.”

나는 조금 억울해져 뺨을 문질렀다. 연희도 내가 모르는 진짜 애인이란 사람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자 자신에겐 관대한 서연희가 흥, 했다.

아무래도 서연희의 머릿속에는, 내가 연희에게 비밀을 만드는 것이 그녀가 비밀을 만드는 것보다 더 큰 죄라는 룰이 있는 것 같다.

“거기다가 너 바보야? 걔를 왜 좋아해. 너 걔 성 취향 이상한 변태인 건 알아?”

“…….”

아무 말도 못 하는 내 표정을 보고 시우와 연희의 안색이 돌변했다. 원민준이 성 취향이 좀 특이하다는 것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야, 너 역시 무슨 일 당한 건 맞잖아. 아 진짜 원민준 이 자식 죽고 나 죽자.”

어째서 원민준 씨 성 취향까지 연희가 알고 있는 거지? 나는 배를 감싸 쥐고 연희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도 배 속의 애기 아빠인데 죽이니 살리니 하는 건…. 물론 연희 입장에서 원민준은 험한 일을 당해도 싼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아이까지 몰래 가진 상황이었다. 딱히 그가 잘되길 바라진 않지만 그가 나쁜 일을 겪길 바라지도 않는다.

“임산부 앞인데 말조심 좀 해.”

연희가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내 배를 보았다. 지울 거냐 말 거냐 묻지 않는 건 열성 오메가인 나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리라.

“그럼 원민준 씨는 왜 너랑 비즈니스 결혼을 하려고 한 건데?”

“걔 성 취향 특이하잖아. 약혼녀와 헤어지려고 한 것도 있지만, 어차피 자긴 누구랑 결혼하든 상관없대. 자기 취향 맞춰 줄 여자랑 결혼할 가능성 낮다고. 대신 우성 알파 자식만 낳아 달라고.”

“…너 정말 그럴 생각이었어?”

“그래서 너한테 몇 번이나 말했잖아. 고민이라고. 그리고 일단 원민준이랑 내가 생리적으로 안 맞아. 내가 얼마나 둘이 있기 싫었으면 데이트마다 널 데리고 나갔겠니. 서윤아.”

“그래도 꽤 좋아했다며?”

“뭐 잘생기고 매너 좋으니까…. 그냥 같이 살 남자론 나쁘지 않단 말이었어. 못생긴 것보단 낫잖아.”

연희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이유로 나를 매번 데이트에 데리고 나간… 건가? 어쨌든 고만고만한 남자들 중, 애정 없는 결혼에 배팅하기에 원민준이 부족함이 없는 짝이었던 건 사실인 것 같다. …연희라면 못할 생각이 아니다.

“그럴 거면 아예 데이트를 하지 말지.”

“우리 집이랑 민준 오빠 집에서 이상하게 보면 안 되잖아. 그리고 원민준도 데이트에 다른 사람 데리고 나와도 된다고 했어. 그 덕에 나는 서윤이랑 원민준 돈으로 원 없이 놀았는데?”

차원이 다른 신경의 서연희였다. 연희가 머리를 쓸었다. 두 사람 다 정말 대단하다. 그간 민준과 연희, 내가 셋이 껴서 보냈던 시간들을 쭈욱 떠올리던 나는 미심쩍은 점을 발견했다. 설마….

“너, 그럼 제주도 여행이랑 일본 여행은….”

서연희가 살짝 웃었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나는 일본 여행 중, 여관에서 한밤중에 원민준은 내 방으로 넘어오고 서연희는 숲길로 사라진 일을 떠올렸다. 분명히 숲길 안에, 별채가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 사실 내 진짜 애인이 따라와서 여행 내내 몰래 동행했어. 원민준이 보기보다 의리를 지키더라고. 걔랑 내 여행으로 가장하고 밤이랑 낮엔 몰래 내 진짜 애인 만났어. 그리고 서윤이 너 안 부르는 데이트에서는 그 진짜 애인이랑 셋이 놀았고. 걔가 되게 성실하게 역할을 해 준다 했어. 원민준 이 새끼가. 지금 보니까 자기가 떨어질 콩고물이 있어서 그랬네.”

연희가 기가 차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 콩고물이 여기 있다. 바로 나. 결국 그 가장 연애 동안 서연희는 진짜 애인과 밀회를 즐겼고 원민준은 나를 통해 한껏 즐겼다.

도대체 누가 진짜고 세컨드인지 모를 이상한 관계가 우리다. 꼬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연희의 얼굴을 보았다, 시우의 얼굴을 보았다 했다.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떻게 서연희가 우리를 속이고 진짜 애인을 만난 건지, 그 사람은 누군지. 도대체 어떤 상대기에 서연희의 집에서 절대 허락해 주지 않는다는 건지.

“나랑… 원민준 씨 관계는 눈치 못 챈 거야? 전혀?”

“원민준이 너한테 흑심 품은 건 알았는데 너한테 손대면 나랑은 진짜 끝이라고 내가 신신당부했어. 그 뒤에 낌새가 좀 이상해서 너랑 민준 오빠 몇 번 떠봤는데 둘 다 아닌 것 같길래.”

나는 연희가 몇 번이나 내게 소개팅을 주선하려고 했던 것이나 고민 있으면 꼭 말하라고 강조하던 것을 떠올렸다. 거기다 연희는 원래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니다. 그리고 자기 애인과의 밀회에 푹 빠져 있었다. 결국 내게 무관심했던 것이다. 원민준과의 관계에 푹 빠져 있던 나 또한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서연희 네 애인이 지금 누군데. 내가 알던 그 사람이야?”

“아니야, 다른 애야.”

서연희가 자기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시우는 이미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는 서연희의 화려한 손톱. 원민준과 데이트할 시간은 부족해도 꼭 다니던 네일 숍.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 다니는 네일 숍에서 만났어. …오메가고, 자세한 건 아직은 말하기 싫어.”

그렇게 말하는 서연희의 얼굴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오메가를 좋아하는 베타 여자라는 건 원민준 이상의… 독특한 성 취향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항상 제일 좋은 것을 가졌던 여자 서연희, 한 번도 주목의 대상에서 밀려난 적 없는 서연희, 항상 제일 잘나갔던 서연희.

그런 그녀에게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일들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약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단 말인가.

…오메가를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혹시 나도 가망이 있었던 건가.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연희를 좋아하던 나의 마음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연희와 결혼한다던가 연인이 되거나 하는 건 꿈도 꿔 본 적 없는 나였다. 서연희는 도대체 어떤 여자인가. 내가 좋아했던 여자가 맞긴 할까?

“항상… 그랬어?”

“항상은 아니야. 그렇지만 이만큼 좋아하는 상대를 만난 건 처음이야.”

그리고 자기가 만나던 알파나 베타 남자들에게 한 번도 진심으로 열정을 불태운 적 없던 서연희. 조금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내가 연희를 맘 놓고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연희가 그 수많은 남자 친구 중 한 명에게도 진심으로 목맨 적은 없다는 것이었으니까. 연희가 빨개진 얼굴을 했다. 더는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다.

“그래도 어떻게 그런….”

“지금 애인이랑 끝까지 가면 나도 아이 가질 가능성 적어. 원민준 정도면 좋은 종마고.”

“…….”

나는 그 말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 연희까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도도한 서연희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연희를 빠지게 만든 애인의 얼굴이 한번 보고 싶었다. 내가 할 말을 고르던 사이 화살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너는… 배 속 애기는 어쩔 거야?”

“낳을 거야. 당분간 어디 가 있을까 싶어. 애기 낳을 때까지.”

그리고 이 모든 소란의 결과로 나는 아이를 얻었다. 비록 원민준이 원하지 않을 아주 연약한 아이라고 해도. 시우와 연희의 낯이 어두워졌다.

소꿉친구가 미혼모 신세라니. 그들로서는 착잡할 것이다. 조금 미안함을 느꼈다. 나만 아니면 그들이 이런 표정을 지을 일도 없을 텐데.

“혹시 몰라서 그러는데 그 사람은 피임하라고 했어. 그런데, 내가 욕심이 생겨서 가진 거야. 알잖아. 남자 열성 오메가는… 우성 알파가 아니면 아이 가지기 힘든 것. 그래서 탐났어. 나 가족 없는 거 너희도 알지. 그래서….”

친구들에게 이런 내용을 고백한다는 일이 참 부끄러웠다. 아까 연희가 자신의 치부와도 같은 애인 일을 고백하며 느낀 감정이 이런 걸까.

그래도 연희의 진짜 남자 친구의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비겁한 안도감이 몸을 감쌌다. 완전히 최악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평생에 걸쳐 원하던 것을 얻었고, 가장 친한 친구의 남자를 빼앗은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일단 민준 형한테 말은 하는 편이 낫지 않아?”

시우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연희가 바로 가로챘다.

“나랑 진짜 사귀는 것처럼 속여서 지금껏 서윤이 가지고 논 게 그놈이야. 말하지 마. 그놈은 몰라도 싸.”

“말 안 할 거야. 그리고… 말 못 할 상황이기도 하고.”

나는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원민준은 나와 만나는 동안 임신이나 결혼 요구 등을 금지하는 스폰서 계약서를 쓰게 했다. 계약서에 대한 내용은 나의 치부이기도 해서 말하는 것이 쉽진 않았다.

“사실은 계약서를 썼어… 결혼이나 임신은 안 된다고…. 그리고 나와 결혼은 못 한다고 그 사람 입으로 말하기도 했고… 직접 피임약을 사다 주고 내가 먹는지 안 먹는지 체크도 했고…. 그만큼 그런 방면으로 거부감도 있고, 또 조심도 하는 사람이라서. 말하면 아마 좋은 꼴을 못 볼 거야.”

나는 말을 하면서도 친구들의 눈치를 보았다. 둘 다 성격이 외향적이고 불같은 면이 있어서 화를 낼까 걱정되었다. 예상대로 시우와 연희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배를 감쌌다. 누가 화내는 걸 보는 것도 태교에 안 좋을 텐데….

나는 내 배 속의 아이가 친부에게 모욕당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없애고 싶다. 아직 배 속에 있는 강낭콩만 한 아이지만 이 아이가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서 거부당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나와는 달리 좋은 일만 겪으면 좋겠는데. 벌써부터 미래의 이모와 삼촌이 화내는 모습만 보니 걱정이었다. 나에겐 그래도 바라 오던 아이였다. 내 유일한 진짜 가족이 될 아이였다.

“안정기가 되고, 아이 튼튼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어디 가 있으려고. 원민준 씨랑 연락 안 닿는 곳으로. 또, 원민준 씨 정도의 대단한 집이라면 혼외 자식을 어떻게 생각할지 알잖아. 그 사람은 처음부터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까. 그리고 원민준 씨가 인정해 준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람 덕 볼 생각 없어.”

무엇보다 그런 대단한 집안의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를 빼앗길 수도 있다. 원민준은 나에게 잘해 주었지만 가끔은 나에 대해 똑똑한 편이 아니라는 말을 대놓고 할 때도 있었다. 냉정한 면이 있는 사람이니 나 같은 오메가가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한테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남자 오메가는 작은 충격에도 잘못될 수 있다잖아. 그래서… 안정기가 지나고 나면 그때 생각해 볼 거야. 만날지 말지. 애기만 잘 자리 잡으면, 그때는 나한테 모질게 못 할 거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너 편들어 줄 생각이 들어?”

연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원민준이 지금 이 아이를 알게 된다면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지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안정기가 지나 아이를 떼면 산모까지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어떨까.

그땐 어쩔 수 없어 할 사람이었다. 나한테 심하게 해악을 끼치진 못할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편들어 주는 건 아니고.”

“아예 대놓고 쓰레기는 아닌데 은근히 쓰레기다, 이거지? 안정기 지나면 널 어떻게 할 담력까진 안 되는 그런 웃기는 놈.”

“너무 그러지 마.”

나는 쓰게 웃었다. 여러모로 태아에게 좋은 대화는 아니다. 시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연희 너도 열 그만 내. 서윤이한테 안 좋아.”

“…알았어.”

나는 조금 진정한 연희의 얼굴을 보며 원민준이 보일 반응에 대해 상상했다. 나는 내게 가장 소중해질 이 아이를 대상으로 조금의 도박도 하고 싶지 않다. 역시 그 사람에게 알리는 건 되어도 아주 나중 일이 될 것 같다. 어쩌면 영영 알리지 않을 수도 있고.

“나는 그냥 낳아서 잘 키우고 싶어. 다른 욕심은 없어.”

“진짜 이서윤 대단해.”

연희가 혀를 찼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 네가 제일 대단한 것 같아. 원민준이 아무리 …같은 놈이지만.”

서연희는 이제 험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안 흔들려? 걔 돈 진짜 많아.”

“알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정말 예나 지금이나 내 몫을 잘 챙길 정도로 똑똑하지 않다. 그래도 뭐, 이런 인생에도 가끔은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걸 이번 임신으로 알았다.

“그런데 민준 씨 약혼녀가 있었어…? 그게 누군데?”

“너 몰랐어? 윤신아잖아.”

“…여배우?”

“응,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던데.”

이건 또 새로운 충격이었다. 둘이 스캔들이 있었다는 건 알았는데. 내가 멍해져 있는 사이 시우가 입을 열었다. 시우는 낯을 찌푸린 채였다.

“너는 그 사람한테 바라는 게 뭔데? 정말 아무것도 없어? 하나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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