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자 기분이 나아졌다. 드디어 연희에 대한 내 죄책감이 줄어들었다. 감옥에서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원민준의 눈앞에서 조용히 사라진다는 큰 미션이 생겼지만 말이다.
나는 병원에서 받아 온 초기 임신 주의 사항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요즘 계속 두통과 아랫배의 통증이 있었다. 그게 임신 초기 증상이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사람에 따라 심한 통증이 있을 수도 있다고. 엽산도 먹어 주는 게 좋다고 하니 일단 약국에 가서 영양제부터 사야겠다. 또 운동도 조심해야 하고… 성관계도 안 되고.
지켜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팸플릿을 다 읽고 아랫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요즘 허리 쪽에 살이 붙었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도 아직은 배가 판판하기만 했다. 오늘 일이 많아서 강낭콩만 한 아기도 놀라지 않았으려나. 아무리 작아도 아기니까, 사람이니까, 마음도 생각도 있겠지?
민준과 연희가 진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건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뒤 들은 연희의 사정도.
민준은 왜 나를 속였을까? 왜 연희와 나 사이를 이간질했을까…. 그가 내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긴 한 것 같았다. 공들여 붙잡아 둘 상대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나를 속여서라도….
그러나 가만히 배를 만지며 아기에 대한 생각에 집중하고 있으려니, 이 모든 충격은 이제 나와 다른 세계의 소란처럼 느껴졌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이 아이다. 물론 연희도 소중하고 원민준을 좋아하는 마음도 아직 남아 있지만… 이 아기는 이제 내게 유일한 존재가 될 거니까. 그때 도어록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급하게 침대 시트 아래에 팸플릿을 숨겼다. 그리고 거실로 나갔다. 앞으로 이 집에 얼마나 머무를지 모르지만 민준에게 임신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했다.
“오셨어요.”
민준은 서류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주인을 맞이하는 정부처럼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의 알파 냄새가 퍽 달가웠다. 원래 오메가가 임신하면 아빠인 알파 냄새가 안정제 작용을 한다던데. 알파가 우성일수록 그렇다고 했다.
알파 오메가 커플의 경우, 부친인 알파 페로몬 없이는 임신 기간을 나기가 힘들다고 들었다. 우리 애기는 임신 중기부터 나랑 둘이 버텨 내야겠구나. 하지만 아마 우리 애기는 오메가나 베타 아이일 테니 괜찮을 터였다. 보통 그런 경우는 아기가 알파일 경우 심하다고 하니.
“전화도 없이 와서 미안해요. 서윤 씨 예전에 살던 집이 팔려서.”
저번 집들이 이후로 처음 보는 그였다. 나는 그의 기분을 살폈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고 평온해 보였다. 나는 안심했다. 최대한 원민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하자. 화가 난 우성 알파의 기운은 정말 무서웠다. 배 속의 아기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식탁 위에 서류를 올려놓는 원민준을 보았다. 당신은 왜 서연희랑 사귀는 사이라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를 안았을까. 내가 그에게 그렇게 적합한 성관계 파트너였을까. 거짓말에 대한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그가 서연희와 진짜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에게서 얼른 도망칠 궁리를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마음의 방어 없이 당신을 완전히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급속도로 그에게 빠져들어 <미저리> 저리 가라 매달렸을 수도…. 원민준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홀릴 여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민준이 연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와 결혼하지 못할 것이다. 결혼 같은 것 기대하지 말라고 대놓고 말한 적도 있는 사람이니까… 연희가 아니라도 그는 다른 베타 와이프감을 찾아내 데리고 올 사람이었다.
“바로 계약하는 조건이라 서류 가지고 왔어요.”
온통 그에게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제서야 서류를 보았다. 생각보다 높은 가격이 부동산 매매 서류에 적혀 있다. 부동산 매수인란에 처음 보는 낯선 이름과 주민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런 낡은 집이 이 가격에 팔리다니. 서울 집값이 비싸긴 하구나….
“그것 때문에 일부러 오신 거예요?”
“네, 얼굴도 좀 보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도장을 꺼내 와 매도인란에 찍었다. 이제는 이런 일을 도와주는 사람 없이 모든 걸 내 스스로 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쨌든 퍽 다행이었다. 아기를 출산하는 덴 많은 돈이 들 테다. 이제 직장도 그만둬야 할 거고. 당분간을 지내기에 충분한 목돈이 들어와서 안심이었다. 그 생각에 나는 배시시 웃었다.
“안 서운해요?”
“네?”
“어렸을 때 그 집 살았다면서요. 이사 가기 싫다고 했을 정도면 정든 집 아닌가요.”
“아… 그런데 또 막상 이사 나오니 무덤덤해지네요.”
나는 애써 평온한 척하며 대답했다. 서연희와 원민준의 사이에 대해서도 모른 척해야 했고 아기가 생긴 것도 비밀로 해야 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데 두 가지나 그를 속이려니 자꾸 긴장된다. 쉽지 않다.
“직접 오신 게 더 놀라운데요. 오메가랑 돈 이야기 하는 거 싫어하신다고 김은호 변호사님이 그러시던데.”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원민준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서윤 씨 일이니까 제가 돌봐 줘야죠.”
“네….”
어쨌든 아이에게 언젠간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랑 내가 결혼하진 못했지만 그이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단다, 정도는 말이다. 민준이 그 정도는 좋은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모질기만 한 사이에서 생긴 아이라면 조금 슬플 것이다. 그가 소파 옆자리로 나를 불러 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원민준의 어깨에 기댄다.
이런 애인 같은 스킨십도 어느새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나는 그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기 위해 천천히 숨을 쉬었다. 원민준과 내가 만날 수 없더라도 내 몸에 그의 향이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집이 생각보다 비싸서 놀랐어요.”
“네, 제 비서들이 일을 잘했는지 괜찮게 팔았더군요.”
그래도 부모님이 남겨 주신 돈으로 아이의 어린 시절은 지원이 가능할 것 같아서 기뻤다. 그가 내가 웃는 걸 보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몸에 그의 손이 닿자 다시 울컥했다.
“간만에 잘 웃는 날이네, 오늘은.”
“어… 그런가요?”
“돈 생겨서 좋아요? 용돈 줄까요?”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요즘 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다소 피로해 보이는 미소였다. 부자라고 해도, 그런 중책을 맡고 있으면 힘들겠지. 아마 내가 상상하는 ‘회사 생활의 힘든 일’과는 다른 베리에이션의 고충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평사원인 내가 그를 걱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네, 용돈 주세요, 하면 지갑에서 5만 원짜리 뭉치들이라도 꺼내서 주는 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확인해 보면 안 될 것 같다.
“아니요, 그냥… 저… 고맙습니다.”
“뭐가요?”
“저 많이 신경 써 주시는 거요.”
“알긴 하네. 손 가는 거.”
원민준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 많이 가는 사람이 내 취향인가 봅니다.”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이에 대해서 나만 알고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가 너무 다정하게 말해서 마음이 흔들렸다. 말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원민준은 나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또 서연희 문제도 해결된 셈이니까…. 내가 망설이는 사이 원민준이 입을 열었다.
“서윤 씨 친구들은 과한 면이 있던데요.”
“아… 연희랑, 시우요… 요즘 제가 비밀이 생겨서 서운해서 그랬나 봐요.”
그가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저번 술자리에서 연희가 좀 과하긴 했다. 나는 친구들의 잘못이 내 잘못인 것처럼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친구들에 대해 나쁘게 말한다면 속이 상할 것 같았다. 원민준이 뭐라고 하려다가 내 표정을 보고 하려던 말을 집어넣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요즘 계속 다정하다.
“끌어안아 주시면 안 돼요?”
그의 냄새를 더욱 느끼고 싶어 그렇게 부탁했다. 원민준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를 안아 주었다.
“나한테 할 말 있어요?”
“아… 없어요.”
편안함을 느끼던 중, 한 번 가슴이 철렁했다. 민준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할 말 생기면 하세요.”
“네….”
내게 고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다행히 뭔가 눈치챈 것 같진 않다. 내가 임신을 한 걸 알면 이렇게 가만히 물어보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그의 향이 파고든다. 당분간, 어쩌면 평생 이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퍼졌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 주, 회사에서 자진해서 추가 근무를 했다. 야근 수당도 올리지 않았다. 김인영 대리가 자꾸 무슨 일을 하냐고 캐물어서 숨기느라 고생을 했다.
“일이 좀 밀려서 정리해 두려고요.”
회사에서 정리할 것이 있다느니, 밀린 일들이 있다느니 하는 애매한 말은 파고들기 힘든 구석이 있다. 나는 팀원들 몰래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매뉴얼을 정리했다. 누가 후임으로 와도 바로 내가 하던 일을 알 수 있도록.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는 원민준 이사의 회사였다. 사직서라도 내면 원민준에게 바로 들킬지 모른다. 내가 그 사람 몰래 이사 가려는 것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또다시 계약서에 대한 내용에 떠올랐다. 의논 없이 거주지 이전 금지, 먼저 헤어지자는 말 금지 등의 이야기가 적힌 계약서다. 그러니 당분간 꼭꼭 숨어야겠다. 아무리 속아서 쓴 계약서라고 해도… 약속을 어기려니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나 속아서 쓴 계약서를 꼭 지킬 의무는 없다고 스스로 자위한다.
비밀리에 시우의 집안과 연계된 병원 산부인과에 한 번 더 다녀왔다. 함구하도록 시우가 배려해 주었으니 원민준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연희에게는 내가 사라지는 날까지 원민준과 내 일을 모르는 척해 달라고 부탁했다. 연희는 떨떠름하게 알았다고 대답했다. 나 때문에 거짓 결혼이든 뭐든 원민준과 오가던 혼담이 깨지게 생겨 연희도 상황이 복잡할 것이다. 어쨌든 내가 떠나는 준비를 하는 며칠 동안 서연희는 모두가 내막을 알고 있는 이 연극에 계속 동참하기로 했다.
어차피 민준은 요즘 대놓고 연희에게 무관심했다. 양가 부모님을 속이는 연극이 완성되기만 하면 연희가 뭘 하든 그는 큰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민준은 냉정한 면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내게도 질리면 저토록 냉담하리라. 내가 알아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판에 별생각을 다 하는 나였다.
연희와는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나는 이제 그녀를 더 질투하지 않아도 됐다. 물론 서연희가 거짓이든 뭐든 그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는 여자라는 것은… 여전히 부럽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민준의 마음을 내가 완전히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연희를 원망하지 않아도 되었다.
도리어 요즘 사정이 복잡해 보이는 연희를 두고 가는 것이 미안했다. 한때 나는 연희를 많이 좋아했었다.
“너 힘든데 같이 못 있어 줘서 미안해.”
나는 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희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미안하지. 속상해 죽겠는데 그런 말 하지 마, 이 순둥아. 진짜 나 너 없으면 어떻게 하나 깜깜해.”
우리는 서로를 당분간 보지 못하는 것이 퍽 섭섭했다. 그래도 연희에게 품었던 원망이나 미움이 모두 눈 녹듯 사라지자 후련했다. 이 소란으로 인해 우리 사이에는 아직 약간의 어색함이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면 그런 것은 싹 사라질 것이다.
아마 배 속의 아이가 서연희라는 예쁜 이모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퍽 기뻤다. 연희도 시우도 내 아이가 태어나면 분명히 예뻐해 줄 것이다.
통장에는 계약서에 서명한 바로 다음 날 집을 거래한 돈이 꽂혔다. 원민준 이사가 나서면 집을 매매하는 큰일도 한 큐에 해결되나 보다. 그의 보호를 받는 인생이라는 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하다. 다행히 요 며칠 원민준 이사의 일이 바빴다. 나는 그 틈을 타 조용히 내게 필요한 준비들을 했다.
***
“진짜 혼자서 괜찮겠어?”
시우는 내가 떠나기로 한 날 직전까지 몇 번이나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이가 배 속에서 무사히 자랄 때까지 연희와 시우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기로 했다. 민준은 내게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독점욕만은 정말 강한 남자였다. 내 행선지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연희나 시우를 추궁하면 둘 다 곤란해질 거다. 말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상책이었다.
다만 떠나는 날짜 정도는 그들에게만 말해 두었다. 바쁜 며칠이었다. 병원에 가고, 또 회사를 그만둘 준비를 하고. 짐은 정말 최소한만 꾸렸다. 그리고 떠나기로 결심한 날 나는 회사에 휴가를 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내일 아침 나는 회사 부장님에게 문자로 급한 일이 생겨 사직서를 내게 되었다고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문자 사직서라니, 내가 저지를 일이지만 정말 개념 없는 일이다. 내가 그런 일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래도 내 배 속 아이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니까…. 원래 회사에서 중책을 맡은 것도 아니었다. 내가 없어도 팀은 금세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은행에 갔다. 그리고 원민준에게 받은 모든 돈을 현금으로 출금했다. 원민준이 내게 생활비를 주고부터 한 달에 천만 원씩 받았다. 스폰서 비였다. 나는 한 푼도 그 돈을 쓰지 않았다.
돈을 돌려주고 싶었지만 계좌 이체를 해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내가 받았던 모든 돈들을 현금으로 찾아 오피스텔에 두고 가기로 했다. 원민준이든 원민준의 비서든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 번은 이 집에 방문할 것이었다. 나는 돈뭉치 위에 편지를 써서 올려놓았다.
주신 돈 모두 돌려드립니다. 사용하지 않았으니 금액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