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3권) (14/20)

지난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새하얀 나무로 둘러싸인 정원 안에 있는 꿈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꽃과 나무가 햇빛 아래 부서져라 빛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조금 걸어가자 나무 사이에 작은 샘이 보였다. 샘 가운데서 민준을 홀려 놓은 오메가가 자고 있었다.

그리고 오메가, 서윤의 품에는 커다란 보석이 안겨 있었다. 서윤은 민준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 꿈속이지만 그 평화로운 광경을 보고 민준은 웃었던 것 같다. 발걸음을 옮겨 서윤에게 다가가는데 꿈에서 깼다. 잘 생각해 보니 서윤이 안고 있던 것이 다이아몬드인 것 같기도 했다.

이젠 꿈에서까지 이서윤을 본다. 민준은 일어나자마자 어이가 없어 웃었다. 몇 개월 전 이서윤을 처음 만나서 충동적으로 이서윤을 안고부터 원민준은 곳곳에서 이서윤의 생각을 한다.

알람을 끄고 일어나 면도를 하고 단정하게 셔츠를 갖추어 입었다. 민준은 규칙적인 생활을 선호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늘 아침 8시,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하우스 매니저가 차려 놓고 간 것으로, 커피는 아침 8시 20분, 출근은 러시아워를 피해 아침 9시 30분에. 그의 삶은 잔잔한 규칙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 안의 룰은 큰일이 없는 한 깨지지 않았다.

자동차는 미국이나 프랑스 차는 타지 않는다. 독일 차를 선호했고, 독일 차가 아니면 취미로 구입하는 이탈리아제 페라리를 탔다. 이성은 오메가만 만났고 우성을 선호했다. 또 어떤 오메가와도 관계를 한 달 이상 지속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이성 취향, 여자 우성 오메가를 좋아하는 취향은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우성 알파로 태어난 것만으로 부모님은 그에게 많은 강요를 하지 않았다. 다만, 여성 우성 오메가를 만나라는 주입은 4살 때부터 들어왔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사이클에 이서윤이라는 오메가가 끼어들고 나서 민준은 많은 것을 수정해야 했다. 원민준은 이제 장기적인 관계를 선호했고 한 오메가에 대해 굉장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요즘 자신이 관리하고 보호하는 오메가인 이서윤의 몸이 좋지 않아서 신경이 쓰인다.

점심쯤 이서윤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을 때 민준은 의아함을 느꼈다. 이서윤의 작은 머리와 작은 세계에서는 매일 다채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단조로운 일상에 얼마나 고민은 또 많은지, 며칠 전부터 쩔쩔매는 것이 저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 듯했다. 아마 그렇게 큰일은 아닐 것이다. 이서윤이 하는 고민의 규모는 민준의 입장에서는 하잘것없이 작은 것들이 많았다.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서윤은 뜻밖의 말을 했다. 서윤의 말을 듣자 속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왈칵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자신을 화나게 할 수 없었다. 그의 감정을 크게 움직이는 오메가는 오직 서윤뿐이다. 거의 다 길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슬슬 서윤도 진심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또 제자리이다. 이 오메가는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겁이 많은 건지 모를 일이다.

이서윤은 다른 사람이 생겼고 그 사람과 결혼할 예정이라는 깜찍한 거짓말을 했다. 아니,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 한진우가 결국 용기를 내 마지막 선을 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의외로 한시우라던가.

그러나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것이 다라면, 이별 통보가 다라면 서윤이 이렇게 뭔가 말하고 싶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 리 없다. 이서윤이 언제까지 참고 억누르고 있을지 꽤 궁금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저에게 진짜 원하는 것을 드러낸 모양이다.

서윤이 요구하는 건 뭐든 들어줄 수 있다. 몇 가지를 제외하고. 그중에 가장 불가능한 건 이서윤과의 결혼이다.

“좋아했어요….”

저에게 울면서 말하는 이서윤의 목소리를 듣고 원민준은 깨달았다. 결혼이 아니면 이번에는 이 오메가를 붙잡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결국 이서윤은 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을 배팅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서윤 씨를 좋아하고 서윤 씨가 날 좋아하는 걸로는 안 되나요?”

이서윤은 눈물 젖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서윤의 눈빛 안에 숨어 있던 열망과 욕망이 점차 사그라져 간다. 눈물 젖은 눈동자가 점차 우울하게 침전했다.

이번엔 이서윤을 협박으로 붙잡을 수 없었다.

민준은 그것을 깨달았다. 서윤은 비틀거리며 민준을 뿌리치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마른 등과 오늘따라 퍽 작아 보이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머리를 좀 식혀야겠다. 민준은 회사로 돌아가 오후의 일정을 차분히 하나하나 처리했다.

원민준 이사의 수행 비서는 갑자기 오후 소규모 임원 회의를 미루라고 하고 사라졌다 돌아온 원민준 이사의 낯을 살폈다. 원민준 이사의 조용하고 잘생긴 낯은 평소와 같이 평온했다. 그 주변을 맴도는 묘하게 무거운 분위기와 위압감도 여전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가끔 시계를 확인하거나 멍하니 한 점만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피곤한 기색도 보였고 눈가를 자주 문질렀다.

“우리 회사가 언제 금연 빌딩이 되었죠?”

“05년입니다.”

“오래되었네요, 오늘따라 아쉽네요.”

“저… 조금 피곤하시면 바람 좀 쐬고 오시죠.”

시계를 다시 한 번 바라본 민준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백화점이 몇 시에 닫죠?”

“…네? 보통 저녁 8시까지 합니다.”

원민준은 또다시 시계를 보았다. 그랬다가 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뗐다.

“나가 보세요.”

비서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확인해 보니 오늘치 결제가 반도 떨어지지 않았다. 인트라넷 결제 창을 보던 김 비서는 이 미형 안드로이드 같은 사람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다.

“급한 일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오늘은 개인적인 일이 있으니 저에게 연락 안 오게 해 주세요.”

“네, 이사님.”

원민준은 재킷을 걸치더니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전화를 받던 여자 비서가 일어나 인사를 했다. 방 밖을 나가자 민준은 미간을 폈다. 표정이 부드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놀랍게도 그 대단할 것 없는 오메가, 이서윤은 이제 원민준을 움직일 수 있었다. 기껏 저와 만나고 말고, 저에게 마음을 주고 말고로 그 오메가는 이제 원민준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은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곧바로 서윤의 오피스텔로 가는 대신 민준은 백화점으로 향했다.

‘오드리 헵번의 영화를 좋아했지.’

서윤이 여자는 아니지만 오드리 헵번의 영화를 좋아했으니 좀 뻔하지만 고전적인 브랜드로 사 주면 좋아할 것 같았다. 바로 T사로 들어가 남자용 반지가 있냐고 물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수려한 원민준의 얼굴을 보고 잠깐 동공이 커졌다 작아진 여직원이 급하게 반지를 추천해 주었다.

“다이아몬드가 큰 편이 좋을 것 같네요.”

보통은 백화점에서 무언가를 사는 일은 비서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원민준은 서윤을 만나고 별걸 다 직접 했다. 집에서 저녁을 잘 챙겨 먹지 않는 서윤을 위해 음식 셔틀까지 할 정도였다.

이서윤은 손이 남자 손답지 않게 가늘고 예뻤다. 체형이 섬세한 몸이었다. 그래도 여자보다는 굵은 손가락이다.

사이즈를 대충 가늠해 매장에 있는 반지를 샀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얼마든 다시 사 주면 된다. 가능하면 1억 정도 하는 큰 캐럿 반지를 사 주고 싶었지만, 남자 오메가용 반지는 제품 가짓수도 적었고 다이아도 작은 것이 태반이었다.

일단 심플한 디자인의 얇은 백금 테 반지를 구입했다. 여직원들이 반지를 포장하는 것을 유리케이스를 톡톡 두드리며 지켜본다. 간밤에 이서윤이 다이아몬드를 안고 있는 꿈을 꾸더니 서윤에게 반지를 사 주려고 그랬나 보다.

일단 결심을 하니 모든 것이 너무 더딘 것처럼 느껴졌다.

백화점 지하에서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샀다. 이서윤은 사랑이나 애정에 대한 환상이 큰 타입이라 뻔한 것이 가장 잘 먹힐 것이 분명했다. 이서윤의 집으로 가면서 정말 서윤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로 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 그렇다고 해도 마음을 바꿀 것이 분명했다. 마음이 약하고 정이 많으니 한번 좋아한 사람을 거절하지 못할 서윤이다.

울면서 좋아한다고 하던 이서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윤이 울던 모습을 떠올리면 한 번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뛰는 것 같았다. 그 오메가는 이제 눈물 한 번으로, 고백 한 번으로 원민준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서윤과 결혼해서 잃을 것들이나 감당해야 할 것들은 많았다. 그러나 민준은 결심한 후부터, 오히려 흉금을 떨어낸 듯 마음이 편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할 일이었다. 서윤은 그의 유일한 오메가였다. 태어나 맞이한 첫 번째 오메가, 유일한 존재.

민준이 서윤에게 청혼하기 위해 서윤의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것은, 모든 짐이 깨끗이 정리되어 텅 빈 집 안이었다.

***

누군가 원민준의 독특한 성 취향을 알면 민준에게서 불행한 어린 시절이나 애정 결핍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상호 간에 애정어린 스킨십을 주고받는 것보다 구속이나 통제에 집착하거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밧줄로 묶고 싶어 하는 취향 말이다.

그러나 원민준의 성 취향은 그의 어린 시절과는 별개의 물건이었다. 원민준은 날 때부터 완벽하게 부유한 집에서, 완벽하게 남다른 신분으로, 수려한 외모로 완벽한 삶을 가졌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나 가정에 충실했다. 바람을 피우기는커녕 애처가였다.

좋은 부부 금슬 사이에서 원민준은 첫째 아들로 태어나 모두의 축복 속에서 사랑받고 자랐다. 날 때부터 알파였고, 자라며 7살 때 우성 판정을 받았다. 지능도 뛰어난 편이었고 신체 능력도 좋았고, 남보다 발육도 좋았다.

민준의 가족은 그에게 압박을 주지 않았다. 저와 똑같은 우성 알파인 아버지는 민준에게 늘 말했다. 너는 누구보다 누리고 살게 해 주고 싶다고, 회사 일에 흥미가 생기지 않으면 너 대신 전문 CEO를 세워라, 대신 사람 보는 눈과 결단력만 키워라. 민준이 피아노에 두각을 보이자 12살 때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신분의 사람이, 아버지와 같은 정서의 세대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민준도 잘 알았다.

7살 때 우성으로 발현하고 나서 원민준은 건조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았다. 무엇을 해도 어렵지 않았다. 그림을 그려도, 악기를 연주해도, 공부를 해도 이 우성이라는 축복받은 유전자는 그에게 남보다 나은 시작점을 주었다.

그렇다고 원민준이 철없이 저의 건조한 처지를 불행하다 여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누리는 것에 대한 책임도 잘 알았고 자신의 처지가 누구보다 낫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무언가에 심장이 뛸 만큼 열정을 느낀 적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완벽한 원민준에게도 하나의 금기는 있었다. 바로 생산력 없는 오메가에게 빠지는 일이었다. 원민준은 남보다 수없이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지만 대가로는 하나의 의무만 지면 되었다.

<자신과 같은 우성 알파 후계자를 낳을 것>.

W가는 몇 대째 우성 알파를 배출하는 집안이었다. 몇 대 전 전쟁이나 여러 가지 재난 속에서도 살아남아 번성한 집안은 지금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민준에게 물려줄 재산이 끝없이 많았다. 그러나 민준이 미리 물려받은 재산들을 제외하고, 유언장에 쓰인 모든 재산은 상속에 하나의 단서가 붙었다.

원민선의 아들 원민준이 우성 알파 판정을 받은 자식을 낳았을 시, 이 재산을 정상적으로 상속한다. 우성 알파는 이 세상에서 컬트적인 의미를 가진다. 물론 아버지도 그 의무를 졌다.

아버지는 일반 여성 오메가인 여성을 사랑했다. 결혼까지 생각했었는지 모르지만, 젊은 시절 그녀와 각인해 버렸다. 본인들에겐 사랑이었을지 몰라도 타인들이 보기엔 끔찍한 사고였다. 우성 알파라고 해도 일단 한 오메가와 각인하면, 각인 오메가 외에는 자식을 볼 수 없다. 빌어먹을 유전자의 신비다.

아이가 날 때부터 알파로 태어나는 경우, 보통 10세 이전에 우성인지 일반, 열성인지 결정되었다. 태어날 때 타고난 페로몬의 양으로 아이의 우성일반열성 가능성을 예측할 수는 있었다. 그 예측은 거의 90% 이상 들어맞았다. 문제는 페로몬도 아이의 몸과 함께 수용량이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고나는 우성 알파는 없다는 것이다.

몇 대째 우성 알파를 배출해 온 집안이었다. 오직 우성 알파만이 이 집안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 종교적인 믿음은 오랜 세월 이 집안에 군림해 왔다.

어머니가 일반 오메가였기 때문에, 자신을 낳기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들었다. 다행히 날 때부터 민준은 알파였다. 신생아로 태어났을 때 측정된 페로몬 양도 엄청났다. 누가 봐도 열 살 이전에 우성으로 발현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럼에도 안심하지 못한 어머니는 시험관 아기를 비롯한 갖은 노력 끝에 몇 년 후 여동생을 낳았다. 그녀의 몸에는 아직도 다양한 시술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민준이 우성이 되기 전, 어머니는 잠든 민준의 귓속에 언제나 중얼댔다. 잘 자라 내 아가, 어서 빨리 우성이 되렴.

어머니는 대단할 것 없는 여자였다. 평범하고 가녀린 여자인 그녀가 우성 알파인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녀는 이 집의 며느리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성 알파인 아이를 낳아야 했다. 이 집의 종교는 우성 알파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것을 깨뜨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혼 전후 몇 년간은 수세에 몰려 있었던 것 같았다.

‘아빠는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좋아하는 여자를 찾아서 엄마랑 나처럼 오래 사이좋게 살면 좋겠어. 그렇지만, 아내감으로는 우성 알파를 낳을 수 있는 아이가 아니면 안 된다. 너와 나는 이 집안의 마지막 우성이야. 혹시 마음에 드는 아이가 생겨도 사리 분별 잘해라. 나는 너에게 모든 걸 다 주었고, 나머지도 넘겨줄 거다. 그러니 너도 의무를 다해라. 네 엄마가 네가 우성으로 발현하기 전에 하루하루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니, 그러니 조심해라. 여자 문제만 조심하면 아빠는 네가 뭘 하고 살든 지지할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나도 네 편이 될 수 없단다.’

‘취미 없으니 걱정 마세요. 소모품에 푹 빠질 만큼 멍청하지 않습니다.’

민준은 그리 말하며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일반이나 열성 오메가는 결국 소모품이죠. 좋은 유전자의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까요.’

그때 민준은 그렇게 대답했다.

이서윤에게 빠지기 전, 민준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

오메가를 적게 만나 본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민준은 다른 알파들이 그러하듯 오메가에게 깊은 열정을 느껴 본 적 없었다. 베타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알파들도 많았다. 민준은 굳이 고르자면 베타 여자와 오메가 중 오메가 쪽이 나았다. 그것도 굳이 고르자면 말이다.

그런 무덤덤한 민준에게도 두 번의 강렬한 열정의 기억이 있기는 했다. 민준은 스무 살 이전에 두 번의 열정을 경험했다.

20살이 되기 전, 일본에 있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지인의 고택에 방문한 적이 있다. 주인은 고택 안에 멋들어진 수집실을 가지고 있었다. 우키요에 그림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인 집주인은 아버지와 민준에게 기꺼이 자신의 컬렉션을 보여 주었다.

유명한 수집가였던 지인이 보여 준 목판화는, 여자가 문어 괴물에 얽혀 음란하게 구속당한 그림이었다. <어부 아내의 꿈>.

“에도 시대의 그림이지요. 아주 귀한 물건이에요.”

그 그림이 진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몸을 관통하는 강렬한 성감을 느꼈다. 입은 벌어져 있고 눈은 나른했다. 초점을 잃은 여자의 눈매. 구속된 모습이 무엇보다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강렬한 느낌은 오래도록 민준의 기억에 남았다.

그 다음은 우연하게 본 도색 잡지였다. 놀러 간 친구의 방에서 본디지 스타일의 에로 잡지를 보았다. 남자 오메가 특집이었다. 마르고 좁은 등의 남자 오메가가 빨간 줄로 묶여 손을 늘어뜨린 뒷모습 사진이었다. 약간 거뭇한 피부와 날개 뼈가 도드라진 뒷모습은 충격적일 정도로 에로틱했다. 자신에게 ‘묶는’ 기호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뒤 수소문해서 그 잡지를 손에 넣었다.

타고나게 아름다운 외형에 우성 알파라는 체질 덕에, 민준에겐 오메가가 꼬여도 너무 꼬였다.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자취하는 집에 몰래 오메가가 숨어든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문제는 너무 예민한 원민준의 감각에 있었다. 발달해도 너무 발달한 우성 알파의 감각은 한 오메가의 냄새에 쉬이 빠져들지 못했다. 일반 정도만 해도 체향이 어느 순간 너무 짙게 느껴졌다. 우성 알파의 개체가 많지는 않지만 알아본 바론 다른 우성 알파는 민준만큼 향에 예민하지 않다고 했다.

민준은 오메가에 대한 취향이 정교하고 예민했다. 코가 예민한 사람일수록 아무 향수나 뿌리는 것을 꺼리는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오메가의 체향은 한 달이면 질려 버렸다. 나중에는 오메가를 만날 때 한 달의 기한을 두고 만나자고 했을 정도다.

한 달 후, 마음에 변화가 생기면 헤어지자는 선언. 물론 오메가들은 한 달 후에 떨어지지 않았다. 미쳐 달려들고 울고 매달렸다. 떼어 내는 것도 큰일이었다. 민준은 그것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다소 귀찮아서 어느 순간부터 오메가를 만나는 것도 꺼리게 되었을 뿐이다.

오메가는 그에게 넘쳐 나는 자원이었다. 굳이 애착을 가질 필요 없는, 손만 움켜도 손 사이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이었다. 원하면 언제든 쥘 수 있었다. 민준뿐만 아니라 모든 우성 알파들이 그랬다. 그걸 알면서도 오메가들에게 우성 알파는 기꺼이 자신을 던질 만한 존재였다.

어쨌든 청소년기 이후 민준의 취향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난 몇 명의 오메가들을 묶은 채 섹스를 하기도 했다. 오메가들은 웃으며 즐거워했다. 처음 몇 번은 결박 섹스에 민준도 흥분했다. 결국 포르노를 보고 허무해지는 기분처럼 그것에도 질려 버렸다. 민준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단순한 결박이나 가학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민준이 성인이 되자, 부모님은 각종 유전자 검사 결과지를 내밀었다. W가 외아들인 민준과 연을 대고 싶어 하는 집안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자기 딸들의 유전자 검사 결과지를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모두 우성 오메가와 베타 여자였다. 우성 알파를 낳을 확률이 높은 여자들.

참 재미있게도 요즘은 선대의 혈통과 페로몬 수치에 따라 우성 알파를 낳을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할 수 있었다. 물론 100% 맞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빙성이 있었다.

우성 알파의 유전자란 신비하다. 시험관 아이로 쌍둥이로 할지, 외동으로 할지, 성별은 무엇으로 할지도 선택 가능한 세상이다. 그러나 우성 알파의 유전자를 인공적으로 선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결과지의 여자들 중, 우성 알파를 낳을 매칭률이 가장 높은 것이 그 여자였다. 여배우 윤신아. 건설 기업의 둘째 딸로, 우성 오메가였다. 윗대에는 알파가 여러 명 있다. 거기다 집안 격도 맞고, 상당한 미인이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 없는 상대였다. 민준은 딱히 그녀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우성 오메가만큼이나 알파를 낳기 좋은 혈통으로 치는 것이, 알파 가정에서 태어난 베타 여자였다. 베타 여자는 우성 오메가와 비슷한 생식력을 가진다.

매칭률 89%의 서연희. 아버지가 두 번째로 마음에 들어 한 여자였다.

***

윤신아의 집안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다. 어른들은 민준과 신아의 유전자 궁합이 좋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윤씨 집안에서도 신아를 들이대고 싶어 안달이었다. 민준은 그녀에 대해 깊게 생각한 적 없지만 부모님은 약혼녀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빤히 아는 사이인데 부모님은 윤신아와의 선 자리를 들이밀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윤신아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웨딩드레스도 아니고 첫 만남부터 하얀 옷은 좀 그렇지 않나. 민준은 나른하게 맞은편의 신아를 보았다.

“난 너와 결혼 생각 없어. 약혼녀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오메가들은 이미 겪어 알았다. 미리 끊어 내지 않으면 곤란한 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원민준은 그녀에게 딱 잘라 말했다. 신아는 민망해하지도 않고 화사하게 웃었다.

“그냥 한번 만나나 봐요. “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야심차게 챙겨 온 카드를 꺼냈다.

“오빠, 저 오빠 성향에 대해 알아요.”

윤신아가 부드럽게 손을 겹쳐 왔다.

“저흰 천생연분인 것 같아요. 잘 맞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로….”

달콤하게 신아가 웃었다. 민준도 마주 웃었던 것 같다. 윤신아는 그의 성벽을 처음으로 열어 준 여자였다.

“한 달만 만나 보지. 정할 거 미리 정하고. 단, 선을 넘으면 바로 아웃이야.”

무심한 민준의 대답에 그녀는 꽃처럼 웃었다. 원민준은 그녀의 제안에 흥미를 느꼈지만, 한편으로 윤신아의 열정이 꺼림칙했다. 그는 부모님과 같은 각인 오메가와 알파의 관계를 기대하지 않았다. 역할을 잘해 줄 똑똑한 여자면 충분했다.

부모님은 서로를 한 몸처럼 사랑했다. 각인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란 그런 것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민준은 첫사랑조차 경험해 보지 못했다. 아마 자신에겐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체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딱히 비극도 아니지 않는가.

어쨌든 신아는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노라고, 그렇게 재잘재잘거렸다. 신아는 민준과 비슷한 기호를 가지고 있었지만 조금 더 격렬한 열정을 가진 여자였다. 신아는 독특하게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의 경험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중 민준은 도미넌트의 성향만을 가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신아를 약혼녀로 인정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 안에서 민준과 신아는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의 은밀한 관계를 가졌다. 신아는 말 그대로 능숙했다. 역할에 대한 경험이 있는 여자였다.

신아는 민준에게 자신의 모든 생활을 통제해 줄 것을 요구했고 민준은 그렇게 해 주었다. 처음엔 꽤 즐거웠던 것 같다. 일주일에 두 번의 만남, 윤신아의 식단을 정해 주고, 운동할 시간과, 할 일을 지정해 주고,

잠자리에서 윤신아를 묶고, 때리고, 은밀한 것을 그녀의 안에 밀어 넣고. 그들은 상당히 궁합이 좋았고, 윤신아는 도리어 민준에게 더 깊고 하드한 관계를 요구했다. 신아에게 민준은 꿈속의 왕자님이자 지배자였다. 자신 인생에 찾아온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쟁취해야 할 자신의 알파라고 생각했다. 성적 기호도 일치하는 데다 그 사람이 여자라면 누구나 꿈꿀, 우성 알파에 부유한 미남자라는 것에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오빠, 정말 사랑해요. 오빠는 제 모든 거예요.”

아무리 원래 알던 사이라고 해도 관계를 가진 지 2주도 안 되어 이런 말을 내뱉다니 이 여자는 뇌가 케이크인가 싶었다. 거기다 신아는 사사건건 선을 넘었다. 민준이 원하는 건 구속과 통제에서 오는 유대감이었지만 신아는 민준을 독점하는 것이 서로의 구속이라고 생각했다.

경우 없이 회사에 나타난 것이 세 번, 몰래 문을 따고 집에 들어온 것이 두 번, 휴대폰을 훔쳐본 것이 셀 수 없이 되자 한 달이 안 되어 민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민준이 원하는 건 말 잘 듣는 서브미시브였다. 신아가 원하는 건 그녀의 도구였다. 즉 신아가 원할 때마다 신아를 채찍질해 주지만 사생활에서는 신아의 모든 것을 수용해 주는 그런 남자 말이다.

윤신아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자인 데다 빠질 것이 없었다. 원래 관심받는 것을 좋아해서 배우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를 찬양했다. 도대체 이 여자의 어디에 지성이 있는지 민준은 끝까지 찾아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윤신아가 길을 걸으면 알파들이 쫓아왔고, 음식점에서 돈을 내지 않고 음식을 대접받는 일은 사건도 아니었다. 대학생 때는 술집에 가면 술값을 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신아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인생이었다. 연예인으로 뜨고 나서는 옷과 물건까지 물밀 듯 들어왔다.

그러나 윤신아는 묘한 결핍을 가진 여자였다. 그 결핍은 더 많은 갈망과 구속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윤신아가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이상한 여자인 게 아니었다. 원래 마음속에 텅 빈 동공(洞空)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가 우연히 그런 취향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취향은 그녀의 욕구를 더 크게 키웠다.

연예인으로 성공했으나 윤신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남다른 욕구가 숨어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완벽한 주인에게 영원히 구속받고 관심받는 것이 최종적 목표였다. 그러려면 윤신아는 그 관심을 붙잡을 대상이 되어야 했다. 아름답고 빛나야 했다. 마땅히 보물 상자에 넣어 둘 왕관만큼 큰 보석이어야 했다. 그래서 윤신아는 항상 남들에게도 관심을 받아야 했다.

윤신아의 심층 어디에서 그런 마음이 나왔는지, 어떤 성장 과정을 가졌는지는 민준이 알 바 아니었다. 거기다 윤신아와 하는 자극적인 플레이들마저 쉽게 질렸다. 윤신아에 대한 것은 다소 소비적인 취향이었다는 것을 민준은 인정했다. 신아와의 관계는 순간의 열정까진 몰라도 애정이 되지는 못했다.

반면 신아는 민준에게 운명을 느꼈다. 안타깝게도 민준은 아니었다. 다른 오메가에게 그렇듯, 윤신아의 체향에도 민준은 익숙해지지 못했다. 약속된 한 달이 지나자, 다 식은 열정으로 신아를 대강 상대하고 있던 민준은 신아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원민준이 신아와의 관계에서 배운 것은 민준 자신이 일반적인 돔과 서브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아는 민준의 이별 통보를 납득하지 못했다. 윤신아는 원민준을 스토킹하기 시작했다. 지방 출장 중이던 민준의 호텔방에 칼을 든 신아가 침입한 것은 이별 통보 후 2주일 후의 일이었다. 윤신아는 옷을 벗고 민준에게 매달렸다. 이제 윤신아라면 지긋지긋했던 민준은 약간의 몸싸움 후, 그녀를 반라로 호텔방 밖으로 내던졌다. 그 과정에서 민준은 팔을 조금 베였고 윤신아는 타박상을 입었다.

윤신아가 복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빠, 내가 오빠가 나랑 뭐 했는지 폭로하면 오빠도 무사할 것 같아? 할 거 다 해 놓고, 고상한 척하지 마, 내가 오빠 어떻게든 엿 먹이고 말 거야.”

그러나 연예인인 것은 윤신아지 원민준이 아니었다. 신아의 집안에서는 이 일이 기사로 나는 걸 막으려고 꽤나 애를 썼다. 그 주 증권가 찌라시에 ‘A급 스타 B양, 재벌 총수와 함께하던 호텔방에서 쫓겨나 수모’ 등의 기사가 돌긴 했지만 이마저도 하루 만에 사라졌다. 한발 늦게 터진 스캔들 기사도 급하게 회수해야 했다.

민준은 아버지에게 소환되어 호되게 혼이 났다. 드문 일이었다.

“긴말할 것 없다. 우성 오메가가 그리 싫거든 베타 여자애 중에 찾아봐라. 다음 주부터 당장 선봐라, 너 지금껏 하고 싶은 거 다 하도록 해 줬다. 이 의무 하나 지지 못하면 넌 내 자식 아니다.”

민준은 한 번도 가족들의 속을 썩이지 않은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우성 알파답지 않게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가족들도 민준의 결혼 문제만은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해서 89%의 여자, 서연희와 맞선을 보게 되었다. 원민준은 종종 생각했다.

윤신아와 서연희가 아니었다면 이서윤을 좋아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연희라는 여자는 윤신아보다 훨씬 나았다. 예쁘고 기가 센데, 머리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내뱉는 말은 직관적이라, 남자들이 환장할 타입이었다. 서연희와의 선 자리는 w호텔 카페에서 이뤄졌다. 적당히 좋은 분위기에서 명함을 교환했다.

다만, 서연희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S동의 한 건물에서 지인과 식사를 하고 나오다 서연희와 우연히 마주쳤다.

정말 사람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비가 왔고 서연희는 길거리에서 남자 친구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민준이 바로 본 대로 서연희는 성깔이 장난이 아니었다. 서연희의 애인으로 보이는 사람의 체향이 민준의 후각을 자극했다.

오메가.

아, 그렇게 된 거였군.

민준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연희처럼 알파 혈통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는 베타 여자 중, 퇴화한 페로몬과 함께 알파 성향만 갖추고 태어나는 드문 케이스가 있다. 페로몬은 맡을 수 없는데 오메가를 오메가로 인식하는 것이다. 참 안된 일이었다. 남자 오메가는 베타 여자를 임신시킬 수 없으니. 물론 베타 여자인 서연희도 오메가 남자를 임신시킬 수 없다.

원민준은 그 광경을 보며 서연희로 마음을 굳혔다. 밤에 칼을 들고 침대로 기어들어 오는 여자보다는, 약점을 미리 쥐고 있는 신붓감이 나았다. 차라리 자신에게 집착할 가능성이 적은 와이프가 나았다. 아마 서연희와는 말이 잘 통할 것 같았다.

정말 놀랍게도 며칠 후 우연히 서연희를 W호텔의 바에서 보았다. 민준이 살며 느낀 것은, 우연은 늘 원민준의 편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그날 서연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서연희는 베타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였다.

“오랜만이네요, 오늘은 남자 친구랑 같이 안 있네요.”

그 말을 들은 서연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비밀스러운 만남이면 길거리에서 큰소리 지르지 말든가.

“명함을 잃어버려서 그런데 전화번호 좀 줄래요, 우리 애프터 해야죠.”

그렇게 말하며 민준은 미소 지었다. 서연희의 옆에 서 있던 베타 남자가 고개를 들어 민준을 보았다. 조용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꽤 단정한 얼굴이었다. 평범한 베타 남자였는데 묘하게 눈이 가는 인상이다. 그게 이서윤과의 첫 만남이었다.

“오빠 원하는 게 뭐야?”

“별로. 우리 선봤잖아. 그러니까 애프터 한 거 아닌가.”

“…오빠 베타 여자 관심 없다며, 그리고 윤신아랑 사귄다며. 나랑은 처음부터 아니었던 거 아냐?”

서연희의 말이 100% 맞지는 않았다. 어쨌든 원민준은 오메가를 조금 더 선호했고, 그것보다는 크게 누구에게 감정을 느껴 본 적 없었다. 원래 천성이 그렇게 무심한지도 모른다.

“윤신아 그 여자가 입을 잘못 놀리긴 했지.”

부모님이 소문을 막았다. 그래도 서연희처럼 집안끼리 알고 지내는 애들 사이에선 윤신아와의 소동이 알음알음 퍼진 터였다. 윤신아를 생각하니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오빠, 내가 생각해 봤는데, 제안할 게 있어. 오빠도 지금 급하다며. 우성 알파면 지금이 적령기 아닌가.”

마침 민준도 비슷한 제안을 하려던 참이었다. 역시 윤신아보다 이해가 빠르다. 원민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서연희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서연희는 부모와 절연하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돈과, 지금의 생활수준 유지를 원했다. 또 서연희의 애인은 오메가였다. 오메가와 베타 여자는 아이를 가지기 힘들다. 계약 결혼, 그리고 두 명 이상의 아이. 아이를 낳으면 우성 알파가 아닌 쪽의 양육권을 서연희에게 주기로 했다.

거기다 민준은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서연희가 마음에 들었다.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그 뒤 서로 합의하에 잘 헤어지든 몇 년 더 연극을 하든 해 보자고. 그렇게 결론을 냈다. 원민준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통계적으로 – 그놈의 통계가 항상 문제다 – 우성 알파 남자가 우성 알파를 낳을 확률이 높은 시기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였다. 부모님만 해도 나이 들어 낳은 여동생은 일반 알파였다.

“오빠가 오메가 첩질 하고 다니든 말든 난 신경 안 쓸게. 근데 내 눈에 과하게 띄면 안 된다? 나랑 사는 척이라도 할 거고, 자는 척이라도 할 거면 몸 굴리고 다니면 기분 더러워.”

서연희는 말버릇이 더러웠다. 원민준을 막 대하는 여자라서 보고 있으면 재미있었다. 나쁘지 않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민준이 오메가를 만나면 오메가들은 다 민준에게 미쳐서 집착했다. 우성 알파의 마법이란 신기하기도 하지. 서연희는 그럴 염려도 없어서 좋았다.

가끔은 내가 이 여자에게 정들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여자로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89% 매칭률의 서연희는 민준에게도 만나기 쉽지 않은 상대였다.

반면 서연희가 원민준을 만날 때와는 딴판으로 대하는 상대가 있었다. 애교를 떨며 꿀처럼 잘해 주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가 바로 서연희가 끼고 다니는 베타, 이서윤이라는 남자였다. 연희는 둘이 있기 어색하다며 데이트마다 그 베타 남자를 데려왔다.

이서윤이 상당히 미인이라는 것은 세 번째 만남에서 발견했다. 서연희는 그 질투 심한 오메가 애인과 통화를 하기 위해 걸핏하면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테이블에 남아 마주 앉은 것은 민준과 서윤, 둘이었다. 서윤은 과하게 저를 경계하며 유리잔에 묻은 물방울을 만졌다. 민준의 서윤에 대한 첫 발견은, 아마 손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서윤의 그 손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갔다. 그때 손이 정말 예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톱은 반질하고 타원 모양으로 둥글었는데 손가락이 굉장히 길었다. 손 우물도 아주 귀엽고 손이 희었다. 왜 손이 이렇게 예쁘지? 불빛이 어스름해서인지 몰라도 손등은 벨벳 같아 보였다.

“혹시 피아노 쳐요?”

“예? 아, 아니요….”

이서윤은 민준이 말을 걸자 과하게 긴장해서 고개를 저었다. 베타 남자 중에 알파에게 열등감을 가지는 타입들이 있다. 민준으로서도 딱히 신경 써 주고 싶은 타입은 아니었다. 그때 진동 벨이 울렸다. 서연희가 디저트가 먹고 싶다며, 마음대로 주문한 아이스크림이 나온 것 같았다.

“저, 아이스크림 가져올게요.”

살았다는 표정이었다. 누가 때렸나, 아니면 괴롭혔나. 서연희 앞에서는 정부처럼 잘도 웃어 대면서. 서연희만 없어지면 엄마 뺏기고 계모에게 맡겨진 아이 같은 낯이다. 이서윤이 일어나서 몸을 돌렸는데 민준은 내심 놀랐다. 체형이 정말 예뻤다.

이서윤을 자세히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등이 굉장히 곧고 자세가 좋았다. 목선은 부드러웠는데 몸이 워낙 말라서 얇은 상의 아래로 날개 뼈의 실루엣이 살짝 보였다. 큰 체구는 아니었지만 상체는 균형이 좋은 역삼각형이었다.

몸을 이룬 골격 자체가 섬세해서 움직일 때마다 눈길이 갔다. 골반은 평균보다 위쪽에 붙어 있었고 골반은 작았지만 엉덩이는 탄력 있고 약간 살집이 있었다. 아마 벗기면 그럴 것 같았다. 뼈대 자체가 약간 가는 몸이라 발목도 가늘었다.

‘남자 베타가 보통 저렇게 몸이 야한가.’

성인이 되기 전 보았던 그 잡지. 거기서 본 묶인 오메가의 등과 똑같았다. 묶기에 이상적인 체형이었다. 순간 민준의 안에서 욕구가 비죽 고개를 들었다. 윤신아를 묶기 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욕구였다. 저 단단하지만 가는 양 손목에 밧줄을 감고 싶다는 생각.

서윤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돌아와 앉았다. 다시 자신의 눈치를 보며 아이스크림에 시선을 고정하는 이서윤이었다. 단정하게 생긴 얼굴인데 보면 볼수록 묘하게 눈길이 가는 얼굴이었다. 눈꼬리가 길고, 콧대가 가늘지만 높았다. 얼굴이 참 작았다. 윗입술도 귀여운 모양새였고 눈을 크게 뜨면 속 쌍꺼풀이 있어 강아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왜 처음엔 미인인 걸 몰랐지?

“아이스크림 먹어요. 서연희 늦을 것 같은데.”

“저… 연희가 시킨 건데….”

“돈은 어차피 내가 내잖아요. 먼저 먹고 있어요.”

그 순간 민준은 서윤에게 굉장한 흥미가 생겼다. 서윤이 주춤하고 망설였다. 아이스크림을 몹시 먹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망설이다 아이스크림을 작게 떠서 입 안에 넣는다.

‘굉장히 고분고분하네.’

작은 입을 달싹이며 아이스크림을 삼키는 광경 또한 심하게 관능적이었다. 입술 색이 옅은데 입술 선은 또렷해서 보면 볼수록 야해 보이는 입술이었다. 이서윤은 꼭 아이스크림이 사약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조심조심 먹었다.

“맛있나 봐요.”

“네.”

이서윤은 식은땀을 흘렸다. 민준의 관찰을 눈치채서 불편한 듯했다. 그 순간, 민준의 코에 달콤한 바닐라 향 같은 것이 스쳤다. 일순간에 강하게 확산하는 짙은 향이었다. 그러다가 잔향만 남기고 사라졌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은 그것의 흔적을 민준이 들이마셨다.

…오메가? 아주 희미한 냄새였다. 그러나 페로몬을 감지하는 감각이 예민한 우성인 민준은 어렵지 않게 맡을 수 있었다. 한번 자각하니 이서윤의 몸에서 아주 옅은 향이 미미하게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옅은 체향이라서야. 일반이나 열성 알파는 이 남자가 오메가인 걸 눈치도 채지 못하리라. 갑자기 원민준의 입맛이 달았다.

“아이스크림 싫어해요?”

이서윤이 눈치를 보며 조그만 티스푼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왜 먹었어요?”

“이사님이 먹으라고 하셔서요.”

“언제 봤다고 이사님이에요?”

원민준은 갑자기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다. 석탄 속에서 다이아몬드를 찾아낸 기분이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잘 모르는 남자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라고 한다고 억지로 참고 먹을 정도로 고분고분한, 미인 오메가.

아마 서브미시브 역할에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원민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저… 제가 W사에 다녀서요.”

“아.”

지금 원민준이 대표 이사로 있는 회사는 친할아버지로부터 7세부터 주식 증여를 받은 회사였다. 할아버지가 제일 애지중지하시던 회사로, W계열사의 전신이 된 회사기도 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자마자 그 회사에 입사하여 최대 주주의 신분으로 단기간에 이사직에 올랐다. 이서윤이 자신의 회사 직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제가 누군지 알았겠네요.”

“네.”

“전 이서윤 씨가 지금껏 누군지도 몰랐는데 굉장히 아쉽네요.”

진심으로 아쉬웠다. 반면에 갑자기 서연희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한테 첩질 심하게 하고 다니지 말라고 경계하면서 저는 오메가를 두 명이나 끼고 있어? 보고 있자니 제가 정말 페로몬이 있는 알파라도 되는 줄 아나.

“아이스크림 계속 먹어요. 녹잖아요.”

“네.”

이서윤은 망설이다 다시 스푼을 들고 조금씩 떠먹기 시작했다. 서연희의 것이라서 그런지 더 조심스럽게 먹는 것 같았다

그 다음 날부터 원민준은 이서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서연희는 기특하게도 매 데이트 때마다 서윤을 끼고 왔다. 저도 성격이 세서인지, 우성 알파인 민준과 둘만 있기 어색한 듯했다. 민준과 연희는 둘만 있으면 부딪히기 쉬운 기질이었다.

물론 부딪히기 쉬운 기질이 연인으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케이스도 있다. 하지만 민준과 연희가 연애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었다. 거기다 이서윤과 서연희는 원래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붙어 다니는 사이인 듯했다.

원민준이 놀란 건 이서윤이 아예 체향 조절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윤은 알파인 민준 앞에서 한 번도 자신의 체향을 감춘 적 없었다. 민준이 조금만 겁을 주거나 자신의 향을 발산하면 몇 초 정도 서윤의 몸에서 폭발적인 체향이 발산되었다.

바닐라 향 같기도 하고 꿀 같기도 했다. 아주 달콤한 향이었다. 고급스런 향은 아니나 몽환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체향은 한 번 폭발하고 나면 몸 근처에서 계속 미미하게 돌며 민준을 꾸준히 자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준의 감각이 워낙 예민했기에 이서윤의 연한 체향이 딱 좋았다. 부담되지도 않았고, 편했다. 오메가가 편하게 느껴지는 날이 오다니 이런 건 처음이었다. 신경 쓰지 않는 것이나 대충 대하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라는 것도 배웠다. 어느새 서연희가 자리를 비우면 원민준은 서윤만을 관찰하고 있었다.

‘유혹하는 건가.’

이쯤 되면 이서윤도 자신의 시선을 느끼는 건 아닌지. 유혹하는 것이 아닌지 민준도 의심되기 시작했다. 한 번 이서윤을 빼고 만난 자리에서 서연희를 떠본 적이 있었다.

“이서윤 씨, 오메가 맞아?”

“응, 눈치챘어? 역시 우성이라 예민하네. 근데 걔 열성이라 별로 티가 안 나. 알파들이 정신 못 차리게 생겼는데 그나마 다행이지 뭐야.”

“뭐가 다행인데.”

“서윤이 알파 불편해하거든. 그래서 모쏠.”

그러고 보니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원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괴었다. 서연희가 바로 눈꼬리를 추어올렸다.

“오빠 근데, 걔 건드리면 안 돼? 걔는 진짜 안 돼.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앤데. 그리고 걔 보기보다 인기 많아. I가 첫째가 걔 좋아해, 누구 애인으로 줘도 그 오빠, 진우 오빠한테 주지, 오빠 같은 사람은 안 돼.”

서연희의 말에는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애인으로 준다’라는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남자 열성 오메가가 아이를 가지는 일이 힘들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이서윤은 괜찮은 남자의 와이프감은 아니었다. 아닌 정도가 아니라 그런 사례는 없었다. 일정 이상의 사회적 신분을 가진 알파들이 서윤을 가지려면 결혼을 배제한 애인으로 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I가 첫째면 한진우?”

“응, 서윤이 I가에서 자랐잖아.”

그 순간 굉장한 불쾌감이 들어 원민준은 체향 조절에 실패했다. I가의 냄새가 묻은 오메가인 줄은 몰랐는데.

“고아인 줄은 알았는데, 그건 몰랐네.”

“서윤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I가 사모님이 굉장히 좋아하셨대. 그 집 가정부로 오래 일하셨다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I가 들어가서 몇 년 살았어. 그 집 삼 남매가 서윤이 얼마나 싸고도는 줄 알아? 오빠, 걔 어떻게 한 번 해 볼 애 아니야. 걔 손대면 나랑도 진짜 끝이다? 그런 거 아니지?”

“열성이잖아. 오메가인 것도 몰랐어.”

서연희의 거침없는 말버릇이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거슬렸다. 제가 뭔데 이서윤을 주니 마니 난리인가.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도 돼? 원민준은 상대하기 귀찮아 대충 흘렸다. 생각보다 진한 서연희와 이서윤의 애착 관계가 거슬렸다. 당시 민준은 몰랐지만, 이 둘의 관계는 훨씬 더 거슬리고 귀찮은 일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

서연희는 참 할 일도 많은 여자였다. 자기 진짜 애인도 관리해야겠고, 그러면서도 즐길 건 즐기고 누릴 건 다 누려야 하는 여자였다. 매사에 나른하고 건조한 민준과는 다른 인종이었다.

서연희의 제안으로 셋이서 가평 별장으로 놀러 가게 되었을 때, 민준은 서윤과의 무언가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감추지 않는 체향이나 지나칠 정도로 자주 따라 나오는 데이트 자리.

거기다 은근히 무언가를 원하는 듯, 묘한 갈망으로 젖곤 하는 눈동자.

만일 이서윤이 민준을 꼬시려고 마음먹은 것이라면 굉장히 잘 먹히고 있었다. 보통의 오메가는 형질이 낮을수록 우성 알파가 접근만 해 줘도 감지덕지했다. 원민준이 오만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연한 통념이었다. 민준은 자라면서 수많은 오메가의 접근을 받았다. 고등학생 때 가정부로 일하던 오메가가 민준 앞에서 옷을 벗은 적도 있었다. 별로 좋은 추억은 아니다.

어쨌든 민준도 서윤을 한번 만져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이서윤 같은 오메가라면 이상적인 서브미시브이자 파트너가 될 것이다. 서연희가 눈치채면 조금 귀찮게 굴겠지만, 설마 그 여자가 무서워서 손을 못 대겠는가.

별장에 도착하고 저녁을 먹자마자 술판이 벌어졌다. 그날따라 술이 잘 들어가는지 서연희가 먼저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서윤은 서연희에 휘말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서윤은 보면 볼수록 귀여운 얼굴인데 술이 들어가니 더 방긋방긋 잘 웃었다.

이서윤이 웃으면 귀엽다는 것도 왜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는지. 서연희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민준은 서윤이 취한 모습을 한껏 즐기며 감상했다.

오메가가 체향을 감추지 않고 알파에게 발산하면 바로 만진다고 해도 실례가 아니다. 그만큼 알파와 오메가의 세계에서는 강력한 유혹의 표시였다. 서윤은 향을 감추지 않았다. 반면에 이서윤은 아직도 자신을 무서워했다.

정말 내가 무서우면 이렇게 여행까지 따라오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이서윤의 마음은 알 길이 없다. 민준은 서윤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취했는데도 서윤은 주는 대로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알파가 저에게 성욕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주는 대로 술을 받아먹다니 여러모로 큰일 날 성격이었다. 아니면 아예 문란한 타입이거나. 그러다 이서윤이 잠들었다.

“나 참, 이게 뭔지….”

누군가 원민준이 열성 남자 오메가에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남자 알파들에게 열성 남자 오메가는 접시 위에 올라와도 가장 마지막에 손을 댈 음식이었다. 개체 수가 적기도 했거니와 페로몬이 약한 이상 그냥 베타 남자와 비슷한 존재였다.

‘그런데 왜 저렇게 예쁘게 생긴 거지.’

이서윤은 열성 오메가였지만 묘하게 예뻤고 향도 좋았다.

민준은 잠시 잠든 서윤과 연희를 두고 밖에 담배를 피러 나갔다. 그날은 민준도 많이 취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굳이 바람을 쐬러 나간 것은, 술 취한 이서윤에게 자꾸 자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꺼내기 위해 바지 주머니를 뒤지는데 금속성 물체가 잡혔다. 꺼내 보니 양손 엄지를 구속하는 조그만 엄지 수갑이 손에 잡혔다.

‘민준 오빠, 오늘 밤에 이거, 나랑 써 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 옷을 입고 윤신아를 만난 적이 있는데 신아가 저녁 식사 중 민준의 바지 주머니에 이것을 밀어 넣었었다. 하우스 매니저가 세탁을 하면서 주머니 안에 든 물건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하우스 매니저를 잘라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다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순간, 이걸 이서윤에게 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 엄지를 딱 붙이고 구속당해, 그것만으로도 불편해서 꼼지락대며 저를 올려다보는 모습은 어떨까. 소름 끼칠 정도로 쉽게 상상이 되었다. 손가락이 가늘어서 채울 맛이 날 거다.

아마, 지금껏 본 모든 결박 중 가장 완벽하고 예쁜 모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원민준이 부엌으로 돌아가 본 것은 이서윤이 서연희에게 도둑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원민준은 속이 새까매질 정도로 화가 났었던 것 같다. 이서윤이 보이던 묘한 갈망이 서연희를 향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서윤에게서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답은, 서연희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황한 이서윤을 2층으로 끌고 갔다. 남의 여자 친구에게 몰래 키스하는 장면을 들키고 난 이서윤은 패닉이었다. 취한 채 당황한 이서윤은 자신의 다그침에 먼저 키스해 왔다. 패닉을 일으켜 한 행동인지, 자신의 잘못을 몸으로 무마하기 위해 한 행동인지 민준도 몰랐다.

다만 가장 정확히 기억이 나는 것은 그 조그만 입술에서 나온 장난 같은 키스가 민준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민준은 서윤을 안았다.

원민준은 가끔 생각했다. 그날 이서윤을 범하지 않았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까, 하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이서윤을 한 번이라도 알게 된 이상, 민준은 서윤에게 현혹되었을 것이다. 아마 어떤 상황이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서윤을 가졌을 것이다.

그날, 이서윤과의 첫 정사 날, 서윤이 먼저 키스하지 않았다고 해도.

별장에서의 일 이후, 민준은 서윤의 약점을 잡았다. 약점을 구실로 민준은 어렵지 않게 서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서윤은 도미니언트와 서브미시브의 관계는커녕 정말로 알파를 몰랐다. 한 번도 알파와 사귄 적이 없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원민준은 사귀는 오메가에게 굉장히 무관심한 타입이었다. 늘 끝은 상대가 제풀에 지치거나 미쳐 달려들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민준은 그때쯤 가끔 서윤과의 끝을 생각해 보았다. 이서윤은 아무리 생각해도 두 가지 중 어떤 케이스도 아닐 것 같았다.

민준이 보기에 서윤은 ‘그런’ 기질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서윤이 도망가지 않도록 아주 기초적인 일부터 시작할 셈이었다. 가벼운 결박, 말로 하는 처벌, 가벼운 스팽킹, 예상대로 서윤은 그 초보적인 조교에 굉장히 흥분했다. 서연희에 대한 마음 때문에 꺼리곤 했지만 몸은 고분고분하게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민준은 서윤에게는 태어나 처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었다. 신아와는 과격한 플레이도 서슴지 않았었다. 신아가 먼저 요구했으니. 그러나 이서윤은 사람이 너무 섬세해 보여서 묶는 것 하나도 조심하게 되었다.

이서윤의 몸을 묶고 있자면 가끔은 이서윤이 설탕으로 된 인형처럼 느껴지곤 했다. 입 안에 넣으면 달콤하게 터질 설탕 인형. 그러나 조금이라도 거칠게 다루면 가루가 되어 떨어질 덩어리.

서윤과 편하게 만나기 위해 아예 호텔방을 하나 영구 임대해 두었다. 따로 방을 잡아 만날 필요 없도록. 그날도 그 방으로 서윤을 불러냈다.

이서윤의 뒤로 돌려진 손에는 은색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빛나는 그것은 가느다란 손목에 유난히 어울리며 반짝였다. 서윤은 침대 위에 앉은 민준 위에 올라타 있었다.

“무, 무서워요.”

“괜찮아요. 내가 안고 있잖아요.”

그날 서윤은 처음으로 기승위로 민준의 위에 올라탔다. 손이 등 뒤로 묶여서인지 이서윤은 유독 무서워했다. 아마 자신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체위는 처음이라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서윤의 떨리는 등을 민준은 단단히 감아 안았다. 이서윤이 떨며 민준의 위로 허리를 내렸다. 얼굴은 얌전한데 서윤의 안쪽은 꼭 살아 있는 것처럼 민준을 먹어 치웠다.

이 뜨겁고, 녹진하고, 좁은 안은 도대체 무엇으로 되어 있는 건지, 서윤과 한 번 잔 후로 원민준은 다른 오메가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성이나 일반의 독한 체향은 이제 불쾌하기까지 했다.

“끝까지 들어왔어요.”

서윤이 속삭였다. 엉덩이를 끝까지 내리자, 그것만으로 숨이 막히는지, 서윤이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민준도 태어나 처음 알았다. 그 뜨거운 육벽이 착 달라붙어 자신의 것을 녹여 내는 것 같았다. 어째서 이런 오메가가 지금껏 애인도 없이 살아온 건지 믿을 수 없다.

“천천히 움직여 봐.”

서윤의 귀에 속삭이자 서윤이 바르르 몸을 떨더니 엉덩이를 서툴게 내리기 시작했다. 테크닉이 형편없다. 앞뒤로 몸을 흔들기만 하는 그 동작은 정말 귀엽기까지 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본인도 무언가를 느끼는지 어느 부분에서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부르르 떨었다.

그때 서윤의 구멍이 민준의 것을 꼬옥 조여 오는 통에 원민준은 천국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세상에 이런 달콤한 오메가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 오메가를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라고 민준은 몇 번이나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 여기, 이상해….”

“거기로 꽂아 봐요.”

잘하고 있다는 듯 민준이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단단히 일어선 민준의 커다란 성기를 품은 서윤의 엉덩이는 양쪽으로 부끄러움도 모른 채 한껏 벌어져 있다. 서윤이 움직일 때마다 둥글고 말랑한, 탄력 있는 엉덩이 사이로 핏줄 선 기둥이 드러났다 안쪽으로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거울로 된 방이라도 만들어야겠어.’

이서윤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기 위해선 거울 방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윤은 한 번 쾌감을 느끼자 동물적으로 움직였다. 느끼는 부분을 향해 골반을 푹푹 꽂아 내리며 히익, 히익, 하고 흐느꼈다. 멋대로 도달한 앞부분은 이미 민준의 배를 한 번 더럽히고도 발딱 일어서기 시작했다. 민준은 박자를 맞추어 서윤의 엉덩이를 철썩철썩 내려치기 시작했다.

“흐아, 흐아앙….”

이서윤이 매 맞는 아이처럼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더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엉덩이를 철썩 한 대 맞으며 동시에 앞으로 정액을 싼다.

“무슨 이런 암캐가 다 있어.”

이렇게 속삭이면 서윤은 순하고 촉촉한 눈을 휘었다. 그리고 흥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맞든가 싸든가, 하나만 해야지. 변태 년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윤이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잠자리에서 서윤에게 더티 토크를 하는 건 민준의 취향이었다. 그러면 이서윤이 더 흥분하기 때문이다. 서윤의 귀를 꾸욱 깨물며 본격적으로 허리를 맞추어 움직인다. 이제는 제법 박자까지 맞추며 허리를 흔드는 서윤이었다. 자신이 발굴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가슴이 서늘했다. 그런 오메가였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윽고 동시에 도달했을 때, 서윤의 안에 민준의 진한 정액이 잔뜩 끼얹혔다. 그때 서윤은 이미 세 번째 사정을 한 후였다. 녹초가 된 서윤은 온 상체를 민준에게 완전히 내맡기고 숨을 쌕쌕 쉬었다. 조심스럽게 성기를 빼내고 서윤을 침대에 눕히자, 은 수갑에 구속된 서윤이 침대에 모로 누워 발개진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았다.

참을 수 없이 순종적인 눈이었다. 정액이 질질 흘러내리는 엉덩이는 민준의 손자국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자국 예쁘게 남았네요.”

“…으.”

이서윤은 귀 모양까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둥글고 작은 귀가 새빨갛게 변하자 민준은 너무 귀여워 그 귀를 깨물 뻔했다.

“사진 찍어도 됩니까, 너무 귀여워서.”

“이런 게 뭐가 귀여워요….”

“싫어요?”

“…얼굴, 안 나오죠?”

“물론이에요.”

서윤은 꼬물꼬물 움직여 엎드렸다. 정말이지, 동그랗게 올라붙은 하얀 엉덩이에 민준의 손자국이 큼직하게 남아 있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꼭 단풍이 진 것 같았다. 원민준의 독특한 미학을 모두가 긍정하진 못하겠지만 에로틱한 모습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휴대폰으로 엉덩이 사진을 찍어 서윤에게 보여 주자 부끄러워하면서도 흥분한다.

“발갛네요.”

“…….”

“보기 좋네요.”

이서윤은 눈을 깜빡여 민준을 보았다. 이 작은 머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눈에서는 미지의 두려움을 읽을 수 있다.

“묶는 거 무서워요?”

“아니요, 저… 제가, 자꾸 이상한 감각을 느끼니까 무서웠어요.”

“…성욕이요?”

“…네…그리고 묶이고 좋아하니까, 자꾸.”

이서윤이 드디어 그 작은 입으로 털어놓았을 때 원민준은 그런 소유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서윤은 기질적으로는 타고났다. 그러나 그 기질을 극대화한 것은 자신이었다. 민준은 그 말에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서윤의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쳤다.

“예의범절대로 해야죠?”

“아, 네, 안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윤이 부끄러운 듯 속삭였다. 민준이 서윤을 조교하기 시작하며 요구한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잘못한 것은 바로 고백하고 죄송합니다, 할 것. 일이 끝나면 항상 감사하다고 할 것, 자신이 만나자고 하면 사정이 없는 한 나올 것.

윤신아는 훨씬 능숙했다. 그녀는 서윤과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소화했고 또 그것에 기뻐했다. 그러나 원민준은 그녀를 소유하고 싶지 않았다.

민준의 인생에서 열정을 느끼게 하는 일은 몇 없었다. 그리고 몇 없는 만큼 민준은 열정을 가지게 된 것에 꾸준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 오메가에 애틋한 열정을 가진 것은 서윤이 처음이었다. 서윤은 원민준이 태어나 처음으로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상대였다. 몇 번 잤을 뿐이다. 그리고 이서윤은 원민준이 태어나 처음으로 갈구하는 오메가가 되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밤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다. W 호텔 바의 조명은 나른했다. 그날따라 사람이 많았다. 원민준은 서연희가 고른 칵테일을 마시며 맞은편에 앉은 오메가를 보았다. 오메가, 이서윤은 서연희가 조잘거리는 소리에 맞장구를 치면서 그녀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요 근래 이서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첫째, 서윤은 저를 무서워한다. 이렇게 있다가도 제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면 죄를 지은 아이처럼 황급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세금 징수를 하러 온 영주를 본 소작농도 저렇게 시선을 피하진 않을 터였다.

둘째, 이서윤은 초조하면 입술을 핥는 버릇이 있다. 아니면 야한 생각을 할 때도 그랬다. 가끔 서연희가 있는 자리에서 호텔로 오라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이서윤에게 자극이 될 메시지를 보내면 초조하게 입술을 핥아 올렸다. 꽤나 관능적으로 보이는 동작이다.

셋째, 이서윤은 자세가 좋았다. 처음 이서윤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 것도 그 이유였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엉치뼈에 긴장이 들어가 등이 곧게 펴져 있다. 이상적으로 훌륭한 자세였다. 어릴 적에 무용이라도 했나 물어보고 싶었다.

넷째, 이서윤은 웃는 것이 꽤 괜찮다. 서연희가 뭔가 하찮은 말을 하면 마주 웃으면서 비굴할 정도로 맞장구를 쳐 주는 이서윤이었다. 그럴 때 올라가는 얇은 입술의 입꼬리며 휘어지는 눈꼬리가 제법 애교 있게 움직인다. 가끔은 이서윤이 웃을 때면 얼굴 전체가 따뜻한 느낌에 감싸이는 것 같았다. 눈 자체가 크고 크게 눈을 치뜨면 쌍꺼풀이 지는 얼굴이었다. 꼼꼼히 살펴보기에 따라 충분히 귀여운 맛이 있는 얼굴이다.

이서윤이 서연희와 나란히 서 있으면 화려한 여자 친구와 다소 소박한 남자 친구처럼 보였다. 서연희는 자기 자신을 꾸미는 데 관심이 많았다. 앞으로 돈이 많이 들 타입이다. 딱히 돈이 부족한 건 아니니 상관없었다. 오늘 이서윤은 서연희가 골라 줬을 게 분명한 검은색 맨투맨 티를 입고 있었는데, 태를 보아하니 디자이너 제품이었다.

웃기는 여자다, 먹지도 않을 오메가 옷은 왜 챙겨 주는지. 자기가 뉴요커라도 되는 줄 아는지. 남자 오메가 베스트 프렌드가 게이 베스트 프렌드 같은 트렌드인 줄 아나. 아니면 이서윤이 보험이나, 세컨드 예비군이라도 되나.

아무튼 착 달라붙은 두 사람의 모습이 기분 좋지 않았다.

“시우가 보내 준 동영상인데, 이거 봐, 피아노 치는 고양이 동영상이야.”

서연희는 뭔가 또 지루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 휴대폰을 보기 위해 수그렸던 목을 펴는 이서윤의 목덜미가 희었다. 목덜미 또한 이상적으로 길고 아름다웠다.

아, 정말이지.

묶고 싶어지는 체형이다.

오늘은 넉넉한 맨투맨 티를 입고 와서 그런지 상체 전체를 완벽히 가리고 있다. 지난주에 상체 전체를 묶어 주었는데, 자국이 아직 남아 있으려나.

금욕적인 체하지만 묶어 주면 좋아하는 이서윤의 기질을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 열심히 해야겠군, 좀 잘해 줘서 느끼게 해 줘야겠군. 이런 생각이 드는 오메가는 처음이다. 이서윤을 만나기 전에는 제가 무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했던 원민준이다.

최근, 원민준은 본인 마인드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서윤을 보면 야한 생각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묶고, 때리고, 안고, 파고들고, 울게 하고, 마지막에는 기뻐요, 감사해요, 주인님, 이라고 말하게 하는 루틴. 이미 횟수로는 열 번 이상 반복한 것 같다. 그러나 좀 진정이 되기는커녕 갈급이 더욱 커졌다.

먹고 싶다. 서연희와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웃고 떠드는 이서윤의 눈을 보며 드는 생각은 결국 그것뿐이다. 조미료 강한 음식에 중독된 것처럼, 짠 음식을 먹고 나면 다음 끼니도 짠 음식이 생각나는 것처럼.

이서윤이라는 오메가는 천성이 유순했다. 저에게 그깟 약점이 잡혔다는 이유로 제법 험한 일들을 당하면서도 싫다며 저항한 적도 없었다. 민준은 서연희가 가끔 알파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다. 그런 센 여자인 서연희의 온갖 어리광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맞춰 주는 성정은 타고났다.

그러니 자꾸 사람을 자극하는 거지.

민준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물론, 그런 유순한 이서윤이라고 해도 생활이라는 건 있으리라. 일단 이서윤은 저의 부하 직원이었다. 평사원과 대표 이사라고 해도, 그 사이 수많은 피라미드 같은 단계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부하는 부하다. 월요일이면 칼같이 아침 9시 이전에 출근도 해야 할 테고.

그래서 오늘 이서윤과 한다면 기껏해야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그 안에 끝내야 했다. 저의 눈치를 보는지 마침 이서윤도 자신의 눈동자를 본다. 홍채가 새까만 눈동자였지만 지금은 불빛에 흔들려 연한 갈색으로 보였다. 이런 불빛 아래서 보니 조명 성형이라도 된 것인지 평소보다 굉장히, 예뻐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도 서연희는 이서윤을 놔줄 줄 몰랐다. 빨리 이 자리를 파해야 이서윤을 잡아채 호텔에 갈 텐데.

원민준은 서연희가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윤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었다. 바로 호텔방 2011호로 올라오라는 메시지였다. 이서윤이 메시지를 본 것인지 먼저 일어서겠다고 나섰다. 움츠러든 어깨가 긴장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원민준은 요 근래 이서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겁먹은 척 빼다가 정사가 시작되면 빨리 안아 달라는 듯 다리를 벌리는 오메가라는 것도,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관능적이라는 것도, 저의 가학성에 딱 부합하는 반응을 보여 주는 오메가라는 것도.

“누군 출근 안 하나. 가지 마, 민준 오빠 과묵해서 둘이 있으면 재미없단 말이야.”

“미안, 내일 회사에 일이 좀 많아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민준 씨.”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원민준은 나른하게 웃으며 이서윤에게 인사했다.

“응, 진짜 너무해. 집에 가서 연락해, 서윤아.”

서연희가 응석을 부리며 말했다. 원민준이 서연희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한 가지는 있었다. 이 여자는 말이 너무 많았다.

서연희를 보내고 원민준은 느긋하게 이서윤이 기다리고 있을 호텔방으로 올라간다. 이럭저럭 40분 정도. 원민준은 이서윤의 하루 중 40분이 저를 기다리는 데 쓰였다는 것조차 기뻤다. 가능하면 어디 들어앉혀 놓고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직업 삼게 하고 싶을 정도였다.

‘오늘은 도망가지 않았겠지.’

그리 생각하자 민준의 입꼬리가 한 번 올라갔다.

이서윤이 한 번 도망간 적 있었다.

언제였던가, 이렇게 데이트 후에, 서연희를 보내고 이서윤을 불러낸 적이 있다. 그날 아버지의 비서가 따라붙었다. 약혼녀와 헤어지자마자 만난다는 마성의 여자 서연희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서연희와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팔짱을 끼거나 볼에 키스를 하거나 하는 생쇼를 했다. 아버지의 비서가 멀리서 감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진즉에 서연희를 어디 길가에 버리고 가 버렸을 것이다.

서연희의 머리에선 달콤한 샴푸 냄새가 났다. 이 나이에 과일 향 샴푸를 머리에서 폴폴 풍기고 다니다니 너무 뻔해서 신물 나는 어필이다. 거기다 원민준은 인공적인 향들이라면 질색을 했다. 타고나기를 향에 예민했다.

우성 알파라는 건 감각이 너무 발달해서 도리어 사는 게 피곤한 존재다. 그날은 서연희가 졸라 놀이동산에 꽃놀이를 갔다. 서연희의 사진은 찍어도 뭐 하나 쓸모없는 물건이었지만 서윤의 사진을 찍는 건 나쁘지 않았다.

이서윤을 벗겨서 정성껏 묶어 놓고 사진을 찍은 적은 여러 번이었지만 대낮에 옷을 다 입은 이서윤의 사진은 없었다.

서연희는 들판에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이서윤의 손을 잡고 빨간 장미꽃밭을 쏘다녔고 민준은 몇 컷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서윤은 서연희와 꽃밭 너머에 서 있었고, 서윤에게 초점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 이서윤이 민준의 카메라를 보았다. 놀란 듯 흠칫했다. 며칠 전 이서윤의 알몸을 찍은 카메라였다. 물론 아직 메모리를 비우지 않아 이서윤의 벗은 사진이 가득했다.

이서윤이 그걸 보고 겁먹은 표정을 짓더니 그날 내내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기분 좋지는 않았다. 서연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호텔로 데려가기 위해 차를 돌렸다. 그 순간, 이서윤이 말 그대로,

도망쳤다.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더니 뛰어서 도망쳤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