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이 도망쳤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민준은 잠시 그대로 몇 초간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번 비틀대더니 이서윤은 바로 지하철로 뛰어 내려갔다.
‘아, 카메라.’
짚이는 곳이 있다. 서윤의 누드 사진이 담긴 카메라. 그걸 보고 겁먹은 건가? 어차피 얼굴도 안 나온 사진인데.
원민준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차를 운전했다. 집에 도착할 때쯤 이서윤에게 전화를 건다. 이서윤이 사는 곳 정도는 이미 번지수까지 알고 있었다. 근처에 차를 대고 전화를 걸자 무거운 신호음이 한참 울린다. 서윤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액정에 뜬 제 이름을 봤는지 ‘여보세요’도 안 하는 서윤이었다. 잔뜩 쫄 거면 도망은 왜 쳤는지. 이 오메가의 영악하지 못한, 일종의 바보스러움은 민준의 마음을 움직였다. 멍청한 오메가라면 질색을 하는데 이서윤이 멍청한 건 괜찮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몸이 어디가, 얼마나 나빠서 그렇게 내뺍니까.”
“그… 머리가.”
“거짓말하고, 이서윤 씨 버릇 다시 나빠져서 안 되겠네요. 혼나야겠어요.”
유치원생 아이를 추궁하듯. 느긋이, 나긋하게 말한다. 수화기 너머의 서윤이 침묵하는 것이 느껴졌다. 잡아먹히기 직전의 토끼처럼 겁먹어 있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겁이 많으면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말든가. 저질러 버리고 겁먹는 이서윤의 성향조차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면 확실히 최근, 민준 자신의 마인드에 좀 문제가 있다.
“지금 나와서 벌 받을래요, 아니면 묵혀 뒀다 나중에 나랑 협의해서 해결할래요?”
협의라는 평화적인 단어를 사용했는데도 이서윤이 수화기 너머에서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작은 말이 이어졌다.
“어디로 갈까요?”
민준은 수화기 너머로 작게 웃었다. 많은 걸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벌써 기억을 잘 못하는 걸 보니 서윤이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다. 멀쩡하게 대학교 나와서 사회생활 하는 오메가가 이렇게 귀엽고 멍청하면 범죄 아닌가. 아니면 성격이 더러워서 진입 장벽이라도 높든가. 허들은 엄청 낮아서 한 번 자기에 어렵지 않을 것 같은 타입. 가난하고 부모 없고 뒷배 없는 젊은 오메가. 거기에 반반하고 잘빠진, 이라는 부연 설명이 붙는다. 너무 뻔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의 캐릭터인 이서윤이다.
그런데 그 뻔함이 정말 잘 먹힌다. 기묘하게도 민준에게 아주 잘 먹혔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정신 못 차리게 잘 먹혔다.
그날은 충동적으로 서윤을 집으로 불렀다. 서윤을 집까지 들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페로몬을 풍기는 오메가가 이 집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었다. 서윤은 겁먹어 벌 받기 전의 아이처럼 제 눈치를 보았다. 이서윤을 벗겨 꿇어앉히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샤워할 시간은 줄 걸 그랬나.
정말 놀랍게도 민준은 이제 이서윤의 체향까지 좋아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것이라면 질색을 하는 원민준이다. 그러나 이서윤의 달콤한 땀 냄새나, 성관계 시 비부에서 나는 야한 냄새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눈앞에 꿇어앉혀 놓고 목덜미와 정수리 냄새만 맡아도 즐거울 것 같았다. 일단 욕구를 좀 풀고 씻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갔네요, 버릇없이.”
“죄송해요….”
이서윤은 풀이 죽어 금세 사과를 했다. 혼나는 강아지처럼 옹송그린 어깨가 참 귀여웠다. 그간 서윤을 많이 봐주었는데, 오늘은 이걸 구실로 손속 없이 한번 때려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이 기회에 이서윤의 한계를 시험해 봐도 될 것 같았다. 어디까지 열릴 수 있는지, 어디까지 종속될 수 있는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어디까지 고통을 참을 수 있는지. 앞으로 서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원민준은 이서윤에게 참 궁금한 것도 많았다. 얼마나 궁금한 것이 많은지 이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서윤 생각을 할 지경이었다.
남자 오메가에 홀리다니, 가족들이 들으면 통탄할 일이다. 알파와 오메가의 스캔들은 늘 좋은 화젯거리였다. 재벌 회장이 끼고 있는 정부는 90%가 오메가였고 유명 연예인의 룸살롱 스캔들이 나도 상대는 대부분 오메가였다. 심지어 베타도 오메가를 따먹는 걸 자랑으로 여겼다. 참 안된 인생들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민준이다. 그런 민준이 지금 특별할 것 없는 열성 오메가에 홀려 있다. 호텔방에서 알몸으로 쫓겨났던 원민준의 전 약혼녀인 윤신아, 그녀가 참 억울해할 노릇이다.
“잘못한 것 다 말해 봐요, 한번.”
“어… 도망가서 죄송해요. 저기, 하고 싶어 하시는 것 알았는데, 그게 오늘은 하기 싫어서….”
“이제 독심술도 해요? 재미있네.”
“…….”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알고. 눈치가 빨라 기특한 건지, 독심술인 건지 그냥 궁금해서.”
민준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서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열성이라지만 보통 우성 알파를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나? 겁먹는 걸 보니 귀여워 죽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민준이었다.
‘하루 종일 가둬 놓고 싶군.’
사육장에 가둬 하루 종일 토끼풀만 먹이고 싶은 그런 종류의 귀여움이었다.
재미있다. 눈치는 빠른데, 영악하진 않고. 자존감은 낮은데 저열한 열등감은 없고. 하는 짓은 예쁘고. 너무 이상적인 오메가라서 과외라도 받고 왔는지 의심된다.
알파에게 흘리기 특별 강좌, 이런 거.
“왜 도망갔어요? 그렇게 하기 싫었으면 여기 오지 말았어야지.”
이서윤의 시선이 카메라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초조하게 뒤진다.
“카메라 찾아요?”
이렇게 묻자 흠칫 놀란다. 독심술은 이서윤 씨만 쓰는 게 아닌가 보다. 원민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때리려고 했는데 사람 마음 약해지게 귀엽고 난리다. 서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가 왜? 설마 내가 놀이동산 한가운데서 옷 벗고 사진이라도 찍자고 할까 봐요?”
“하지만 그 카메라로 저번 주에.”
이서윤이 말하려다 마른 입술을 핥는다. 저 버릇까지 나오면 더 약해지는데. 원민준은 이서윤의 산호색 혀가 입 안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음미했다.
이서윤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질렀다. 너무 부끄러우면 시선을 이렇게 피한다. 타조도 아니고, 눈을 가리면 모든 일이 없어지는 줄 아나. 그러나 이서윤의 약간의 멍청함은 늘 민준을 기쁘게 했다.
“저번 주에 제… 몸, 다 벗은 거 찍으셨잖아요. 그걸로 연희 사진 찍으시는 걸 보니까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괴감 같은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아니면 마음이 약한 이서윤이니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원민준은 이서윤이 부끄러움이 많다는 것도 참 좋았다. 이서윤을 조련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자괴감이나 수치심보다 공포가 위에 위치하게 하면 된다.
어쨌든 이서윤은 지금 덫에 걸려 있다. 서윤이 그토록 좋아 죽는 서연희다. 사실 너의 남자 친구와 정기적으로 자는 사이다, 뭐 이런 걸 알리지 않기 위해선 비디오를 찍자고 해도 찍을 이서윤이었다. 참 작은 세계에 산다, 이서윤은. 그 작은 세계의 주요 등장인물인 서연희를 지키기 위해선 더 큰 것도 희생할 것이다.
참 다루기 쉬워.
별로 안 똑똑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원민준은 속으로 살짝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이 오메가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덫에도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이러니 집착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아니면 미인으로 태어나지 말던가. 처음엔 이서윤이 어떻게 생긴지도 기억 못 하던 과거는 까맣게 잊었다. 민준은 서윤이 아주 이상적인 미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서윤이 느끼는 자괴감은 자괴감이고, 민준은 자신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야 했다.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죠, 아무리 우리 사이라도.”
“네, 죄송해요.”
“오늘도 잘못한 거 많잖아요.”
“네….”
“그런데 자세는 누가 풀라고 했어요?”
나른하게 말하는 민준에 서윤이 금세 기가 죽어 죄송해요, 라고 사과했다. 후다닥 민준의 눈치를 보고 무릎을 꿇은 자세를 고친다. 그리고 두 손을 바로 뒤로 돌렸다. 살짝 떨리는 몸과 상기된 뺨을 보니 오늘 이서윤의 바닥을 한번 두드려 봐도 될 것 같았다.
“저번 주에 몇 대 맞았지?”
“…다섯 대요.”
“아팠어요?”
“네, 그런데 많이… 심하게는 안 아팠구요….”
그런 데다 이서윤은 참 솔직하기도 했다. 죽도록 아팠다고 해야 덜 맞을 텐데 순진하게 별로 안 아팠어요,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아파서 싫었겠네요?”
“…아픈 건 싫은데… 그….”
“그?”
나긋하게 서윤의 말을 민준이 한 번 따라 하며 말끝을 올린다. 서윤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아픈 게 다가 아니었으면 느꼈다는 거지. 서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원민준은 그것만으로 폭발할 듯 흥분했다. 향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보통의 우성 알파는 열성을 제 짝으로 인식하기 힘들다.
서윤을 상대로 모든 체향을 풀어놓으면 서윤이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겨우 눌러 참는다. 대신 냄새를 조금만, 아주 조금만 풀어놓았다.
자기 체향도 잘 조절 못 하는 하찮은 오메가가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돌아 버리게 하는지.
거기다가 타고난 마조히즘 성향, 주변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성격,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왕성한 성욕.
세상 사람들은 왜 이런 오메가가 길을 걸어 다니게 그냥 놔두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오메가를 발견한다면 그 즉시 발에 쇠공이라도 채워서 저택에 가둬 둬야 한다. 이렇게 잘 흘리고 다니는데, 이렇게 순진한데, 이렇게 기가 약한데.
거기다 열성 오메가. 알파들 중심의 세계는 이런 오메가에게는 지뢰밭을 맨발로 달리는 것보다 위험하다. 쇠사슬로 몸을 꽁꽁 묶어 대형 안전 금고 안에 던져 놔도 부족함이 없는 오메가라고, 민준은 꿇어앉은 서윤을 보며 오늘도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문명사회는 상호 협의 없는 사육 같은 것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
원민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이 특수 성행위라는 옵션이 붙은 관계를 이서윤이 스스로 우리 속에 걸어 들어가는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
물론 정말 철로 만든 우리에서 목줄을 채워 키울 생각은 없다. 이서윤은 원민준이 마련해 준 고급 맨션에서 철저한 경비 시스템과 안전 속에 살게 될 것이었다. 그다음 풍부한 금전과 식생활로 혈색을 좋게 만들어 줄 거다. 먹이 대신 돈 쓰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물론 목줄 정도는 실제로 채울지도 모르지만.
이서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움찔거렸다. 아마 제가 내뱉은 말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런 동작으로도 저를 홀리다니 저 오메가는 타고났다.
“그런데 어쩌죠, 오늘은 서윤 씨 조금 아프게 맞아야 할 것 같은데.”
“네, 네에….”
“가르쳐 준 것도 기억을 못 하니 벌을 주는 쪽도 지칩니다. 혹시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나쁘다는 말 듣고 자라지 않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를 앞에 두고 등을 보이고 도망친 건 조금 화가 난다. 이렇게 다그치니 안절부절못하는 이서윤이었다. 이렇게 기가 약해서야 사회생활은 어찌하는지. 이서윤이 특히 원민준을 무서워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딱히 다른 사람 상대라고 큰소리치고 진상 부리며 살 서윤은 못되었다. 당하는 쪽이 더 어울리는 성격이다.
“별로 똑똑하단 말을 듣고 자라진 못했어요.”
풀이 죽어 이서윤은 또 곧이곧대로 대답한다. 원민준은 이서윤을 꿇어앉혀 놓고 하는 대화를 즐겼다. 이서윤을 심문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물으면 이렇게 순진하고 직관적인 대답이 바로 나오는 것이다. 이게 저를 홀리기 위해 하는 연기라면 이서윤은 정말 천재였고, 아니라도 대단한 오메가다.
이 대답들이 뭐라고 원민준을 이렇게 빨려들게 만드는지. 이서윤은 냉큼 대답해 놓고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어린 시절에 대한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민준은 서윤의 집중이 흐트러지자 짜증이 났다.
“딴생각하고, 버릇이 점점 안 좋아지네요. 서너 시간 벌 받아 봐야 정신 차릴래요.”
이서윤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벌 받을게요.”
“어떻게?”
“…때려 주시는 거요.”
“그냥 맞으면 돼요?”
“…아니요, 아프게… 때려 주세요. 주인님.”
민준을 만나기 전, 서윤은 이런 관계에 대한 경험은커녕 성관계에 대한 개념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참 찰떡같이 주인님의 비위를 잘 맞추는 면도 있었다. 이렇게 고분한 대답을 들으면 민준의 마음속에서 태어나 처음 겪는 성취감이 생겨났다. 그 감정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민준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감정으로 서윤을 옭아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민준은 준비해 둔 패들을 꺼냈다.
이서윤은 떨면서도 희미한 기대감으로 그 패들을 지켜본다. 그것만으로도 민준의 욕구의 반은 채워지는 것 같다.
민준은 소파 옆의 등받이가 딱딱한 의자를 가리켰다.
“올라가서 무릎 대고 자세 취해.”
이서윤은 알몸으로 쭈뼛대며 의자로 갔다. 그리고 무릎으로 앉았다. 그대로 등받이를 잡고 허리를 숙였다. 원래 마른 몸인데 엉덩이엔 약간 살집이 있고 골반의 위치가 높은 체형이었다. 엉덩이가 민준 쪽으로 내밀어지며 둥글게 불빛 아래 드러나자 선정적이었다.
의자 옆에는 아까 서윤이 벗은 옷이 흐트러져 있어, 이대로 한 장 찍어 액자로 만들어 놓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앵글이다. 민준은 서윤에게 다가가 한 번 가늠하듯 엉덩이에 패들을 대었다 뗐다.
“오늘 꽃이 예쁘더라고요. 빨갛게 피어서….”
“네… 예뻤어요.”
“많이 맞으면 서윤 씨 엉덩이도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기념사진 찍어서 액자라도 만들어 걸어 둬야겠네.”
아마 웬만한 풍경 사진보다 나을 것이다. 그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엎드린 서윤의 귀가 붉게 확 달아오르는 것을 민준은 즐거운 듯 지켜보았다.
“도망쳤으니까 10대, 자세 마음대로 풀었으니 5대, 오늘 서연희 앞에서 태도가 안 좋았으니 5대. 스무 대는 맞아야겠네요. 아주 예쁘게 빨개지겠네.”
서윤의 엉덩이를 한 번 쓰다듬다가 민준은 예고도 없이 매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철썩, 철썩. 서윤의 엉덩이에 패들이 내리쳐질 때마다 서윤은 신음을 높였다.
이서윤은 공포 외의 다른 감정은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손목을 휘둘러 내리칠 때마다 봉긋 솟은 엉덩이가 출렁였다.
그 감촉도 말도 못하게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주는 고통에 몸을 내맡긴 이서윤이 사랑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 따윈 모두 잊고 몰입하는 모습이 훨씬 더 낫다. 고통이든 뭐든 이서윤의 모든 감정이 자신의 것이었으면 했다. 공포, 복종, 쾌감, 그리고 애정 같은 감정까지도.
“아, 아파요.”
평소에 아무리 많이 때려 봐야 열 대를 넘기지 않았었고 그것도 제대로 힘주어 때리지도 않았었다. 진짜로 맞은 매는 한 번에 한두 대가 될까 말까 정도.
그렇게 소프트한 조교 난이도를 유지했었다. 갑자기 많은 매는 이서윤이 감당하지 못할 게 뻔했다. 이서윤은 열 대도 넘기지 못하고 우는소리를 냈다.
“못 하겠어요, 너무 아파요….”
이서윤이 의자 위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패들을 쥔 저의 손을 쥐며 애원했다. 서윤은 이 방면에서 육체적인 재능이 별로 뛰어나진 않다. 고통에 너무 약했다. 그렇지만 정신적인 재능은 굉장하다. 몇 번 조교받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진심으로 애원하다니.
타고난 복종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점이 위험했다. 이런 타입은 다른 알파에게도 같은 일을 당하면 얼마든지 복종할 수도 있었다.
“용서해 주세요, 아파요. 잘못했어요.”
서윤이 훌쩍이며 말하자, 처음으로 강도 높게 조교해 보려 했던 민준의 결심이 약해졌다. 민준은 그 순간 강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건 내 건데, 울게 하면 안 되지, 이런 소유욕에 기반한 책임감.
‘앞으로도 심한 건 안 되겠어.’
원민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서윤을 보며 소파 테이블을 가리켰다. 사람 하나는 누워도 될 정도로 넉넉한 넓이의 대리석 테이블이다.
“양 무릎에 손 넣어서 허벅지 끌어안고 누워 봐.”
이서윤은 부끄러운지 잠시 주저하다가 바로 테이블 위로 올라가 다리를 m자로 만들고 무릎 안쪽에 스스로 손을 넣어 허벅지 안쪽을 안고 누웠다. 서윤은 이제 이런 자세도 스스럼없이 하는 오메가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서윤을 ‘그런 오메가’로 만들었다는 점이 참을 수 없이 좋았다. 자신이 이서윤을 그렇게 만든 첫 번째 사람이라는 것도 좋았다.
그래도 아직 부끄러운지 서윤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눈.”
그렇게 말하며 서윤의 엉덩이를 패들로 툭 치자 화들짝 놀라며 다시 시선을 맞춘다. 차마 눈을 보지는 못하고 코를 보는 서윤이었다.
“더 못 맞겠으면 여길 대신 때려 줄까요.”
서윤의 성기를 패들로 툭툭 치며 말하자 이서윤이 하얗게 질린다. 고개를 저으며 사색이 되는 서윤이었다.
“대답.”
민준은 패들을 세워 서윤의 구멍 주변을 치대며 비볐다.
“으응…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뭐든요.”
서윤이 속삭였다. 민준은 성의 없이 힘 빠진 동작으로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을 살짝 내려치다 매를 내려놓는다.
“자세 풀어.”
서윤이 바로 자세를 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서윤에게 팔을 내밀자 안아 주려는 걸 안다는 듯 이서윤이 몸에 힘을 풀었다. 민준은 그대로 서윤을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이서윤은 더 이상 맞지 않을 거라는 것을 눈치채고 몸을 내맡겼다. 자신의 품에서 완전히 안심하고 몸에 힘을 푼 이서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성욕을 자극했다. 서윤을 침대에 눕히자 서윤이 정욕에 달뜬 얼굴로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아프니 마니 해도 흥분한 모양이었다. 정말 묘한 오메가였다. 자제력이 강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만 마음의 바닥을 두드리면 금세 굴복했다. 그러면서도 기회가 생기면 몸 안에 숨겨 온 정욕을 꾸준히 풀어냈다. 이서윤이 의외로 밝히는 타입이라는 것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픈 걸 못 참아서 이제 체벌은 횟수 조정을 해야겠네.”
그렇게 말하자 서윤이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발개진 눈을 하고서. 사람을 죽도록 무서워하는 주제에 또 은근히 신뢰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민준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민준이 일어선 성기를 서윤의 젖은 구멍에 가져다 대자 서윤이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렸다. 마음은 거리가 있다고 해도, 서로의 몸은 금방 익숙해졌다. 서로를 자신의 알파와 오메가로 인식하며 각자 페로몬을 풀어놓는다.
“그래도 흥분한 걸 보니 잘했어요.”
“네….”
“이제 맞으면서도 잘 느끼고.”
“감사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맞으면서 느끼는 변태 년이었나, 우리 서윤 씨.”
민준의 말에 서윤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흥분해 발가락을 오므렸다. 민준은 더 기다리지 않고 서윤의 안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이서윤이 흥분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뒤로 젖힌다. 민준은 조이는 속살을 비틀며 깊숙한 곳까지 진입했다. 민준은 서윤의 어깨를 누르고 성기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으응….”
몸 안에 치닫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출 것도 같은 열락이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성관계에서 이렇게 딴생각을 해 본 적 없는 건 처음이었다. 이서윤과 하나가 되면 세상이 하얗게 변하고 멈추는 것 같았다.
“흐으… 읏….”
서윤은 빈손으로 시트를 쥐며 흐느꼈다. 민준은 서윤을 누르고 있던 몸을 놓았다. 서윤의 손을 잡아 끌어당겨 어깨에 걸쳐 놓는다.
“흐으… 윽, 주인님….”
서윤이 민준에게 엉기며 달라붙는다. 허벅지에 서서히 힘을 주며 자신을 더 그러안는다. 민준은 자신의 오메가를 정복하며 더 깊은 곳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서윤이 고개를 꺾으며 주먹을 꼭 쥔다. 감히 주인님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다는 걸 아는 오메가였다.
서윤의 신음이, 땀이, 페로몬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야했다. 민준은 서윤을 안고 땀에 젖은 이마를 핥았다. 곧 흥분이 너무 심해서 이를 세웠지만. 한참을 결합된 채 움직이다 절정에 달할 때, 입술을 깨무는 서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사실 민준이 보기에 모든 날의 이서윤이 아름다웠다.
카메라는 바로 버리고 새로 샀다. 그깟 카메라가 무서워서 이서윤이 도망까지 쳤다는데, 다시 서윤의 눈에 띄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메모리도 깨끗이 정리했다.
서윤의 사진은 암호가 몇 중으로 걸린 컴퓨터에 비밀 파일로 잘 저장하고 있었다. 만일 어디 유출된다면 본 사람들을 가만 놔두지도 않을 것이고 유출될 일도 없으리라.
그때 생각을 하면 살짝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그날도 이서윤은 예뻤다. 그렇게 생각하며 민준은 서윤이 기다리고 있을 호텔방 문을 열었다.
***
서윤과 자는 사이가 되고 나서, 민준은 서윤을 확실히 자신의 오메가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이런 오메가는 살아가면서 두 번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취향이었다.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특별했다. 윤신아와 헤어질 때 겪은 트러블을 빼고는 민준은 한 번도 오메가에 관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아마 부모님도 이해할 것이다. 그가 서윤과 결혼할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알파가 오메가 한 명 지원해 주며 데리고 있는다고 해도 큰 흠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서연희는 여전히 괜찮은 상대였다. 서연희는 저에게 지나친 감정을 품을 가능성이 없었다. 그녀와는 결혼 후에도 서로 독자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도 서연희와 낳을 우성 알파 아이가 필요했다. 그건 서연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애인과 서연희가 관계를 어디까지 보는지 몰라도, 그녀도 그 남자와 아이를 가지는 데 성공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민준은 서연희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서윤을 잘 단속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묘하게 보기 싫어지는군.’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요즘 묘하게 서연희가 거슬렸다. 처음엔 좋아만 보였던 말버릇이나 거침없는 성격도 밉상으로 보였다. 서윤이 연희의 팔을 잡고 뭐라고 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아, 이서윤이 서연희를 좋아해서.
이윽고 민준은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질투였다. 서윤이 좋아하는 서연희가 알짱거리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럼 더더욱 서연희와 헤어질 수 없었다. 서윤이 연희를 짝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확실히 갈라놓아야 했다.
이서윤은 묘한 오메가였다. 욕구는 인정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풀어놓을 줄을 몰랐다. 여러 가지 의미로 방심할 수 없었다. 서연희와 자신이 진짜 연애 관계가 아닌 것을 알면 바로 서연희에 대한 마음을 다시 불태울지도 몰랐다.
이렇게 밝히는 오메가면서, 베타 여자에게 마음을 품다니 참 어이가 없다. 원민준은 이제 이서윤의 몸이 없다면 인생이 참 공허해질 것 같았다. 비단 서윤의 몸이 아니라 이서윤의 웃는 얼굴이나, 또 무서워하는 얼굴이나, 자신에게 뭐라 작게 말하는 목소리나 모든 것이 그랬다.
서윤도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면 참 좋을 것이다. 안 된다면 적어도 저의 조련으로 길들여지기를 바랐다.
서연희라는 요소가 이 관계에서 없어져도 이서윤이 자신을 떠나가지 않도록.
서연희와 자신이 진짜 사귀는 사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더 좋다. 이간질이 될 터이니. 자신의 옆에 있는 서연희를 볼 때마다 서윤의 마음은 무너질 것이다.
서윤이 민준에게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겨서 서연희를 증오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렇게 되면 갈 곳 없는 이서윤의 마음을 붙들어 두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서연희에게 이 관계를 들키면 모두 제 탓으로 돌리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건 알겠습니다만, 그쪽이 정말 고통만 느꼈다면 저도 계속하자는 말은 안 했을 겁니다.’
어느 날 자신과 왜 자냐는 질문을 이서윤이 했던 것 같다. 그때 대답하던 민준은, 서윤이 서연희에게 마음을 다 접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2, 3개월 공들이는 것만으로는 이서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당분간 서연희는 지켜보기로 했다. 우성 알파 후계자를 낳기 위해서, 형식적인 결혼이라도 해야 했다. 꼭 서연희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서연희는 서윤을 괴롭히는 본처는 되지 않을 것이다. 렇게까지 생각을 정리했는데도, 여전히 서연희는 거슬렸다.
한번 서연희로 시작해 거슬리기 시작하니 끊임없이 거슬리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이서윤이 사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I가의 첫째의 눈에 들었다는데도 서윤이 사는 모습은 궁상맞기 그지없었다.
서윤은 골목골목이 얽혀 있는 추레한 달동네에 살았다. 달동네라니, 정말 어이가 없다. 민준의 친어머니도 결혼으로 신분 상승을 했다. 그러나 재벌가는 아니라도 부유한 집에서 음대를 나온 여자였다. 그에 비해 이서윤은 내세울 것이 정말 없었다. 고아에 가난했고 학력도 대학은 나왔지만 중간 정도였다. 그러나 이서윤은 예쁘지 않은가.
서연희 같은 뻔뻔한 여자도 민준의 카드를 마음대로 긁고 다닌다. 그 뻔뻔한 여자가 자신의 카드로 서윤에게 밥이라도 잘 사 주는지 의문이다. 윤신아 같은 성격 파탄자 오메가도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산다.
신아도 고급 오피스텔에서 매일 다른 외제차가 마중 나오는 생활을 하는데. 이서윤은 이 둘보다 훨씬 외모도 나았고, 성격도 좋았고, 하는 짓도 귀여웠다. 민준은 정말 어느새 진심으로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여배우인 윤신아보다 이서윤이 훨씬 외모가 낫다고.
그런데 왜 이서윤은 차도 없이 만원 지하철로 출근을 하고 달동네를 힘들게 걸어 올라 다니며 사는가. 민준은 이 모든 것이 눈에 거슬렸다. 마음이 약하고 겸손해서 그런가.
‘뭔가 좀 조치를 취하긴 해야겠군.’
이서윤이 마음이 약하고 자존감이 낮다는 걸 알게 되자, 끊임없이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그래도 W 계열사들이 만만한 회사가 아닌데 그 멘털로 회사에서는 잘 버티는지. 이서윤이 인사 팀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고 인사 팀에 직접 한 번 내려갔었다.
“이서윤 씨랑 제가 잘 아는 사이라서요. 제 약혼녀의 가장 친한 친구라더군요. 오메가라서 차별받는 일 없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 팀 팀장인 민 부장은 안면이 있었다. 이서윤이 자신의 지인이니 잘 챙겨 주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그때 사무실에서 서윤과 마주쳤다. 서윤은 알파 남자와 나란히 걸어오다 민준을 보고 놀란 듯 했다. 같은 팀에 알파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신영재 대리라고 했나. 아침부터 이서윤과 나란히 땡땡이치는 사이인지는 몰랐다.
그 무렵 연희와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제주도에 머무는 친척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슬슬 서연희를 주변 사람들에게 선보여야 할 때였다. 서윤을 두고 주말 내내 서울을 비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안면이 있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인영 대리. 이서윤과 1층 카페 앞에 서 있던 걸 본 기억이 났다. 민 부장이 우리 팀 에이스는 김인영 대리와 신영재 대리라고 말했던 기억도 났다.
이서윤 주변의 알파는 물론, 베타 여자까지 경계해야 했다. 취향 베리에이션도 넓은 이서윤이었다. 그래 봐야 M 기질에 천생 오메가면서. 민준은 자신이 서윤을 쉽게 안은 만큼, 주변을 경계했다. 저런 오메가라면 금세 누군가에게 표적이 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흑심을 품은 사람도 못 알아볼 게 뻔했다. 그런 경계는 서윤이 민준의 눈에 매혹적으로 보이는 만큼 더 견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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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타칭 인사 팀 에이스인 김인영 대리는 태어나서 처음 임원 콜을 받았다.
- 안녕하세요. 원민준 이사님 비서실 이서영 사원이라고 합니다. 이사님이 잠깐 뵙고 싶어 하시는데, 시간 나실 때 잠시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부 보고 없이 방문 요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