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4권) (16/20)

입에 하드를 하나 물고 비닐봉지를 든 채 나는 과일 가게 앞에서 고민하고 있다. 냉동 블루베리가 세일 중이긴 한데, 달콤한 멜론도 먹고 싶었다.

한 통을 다 사면 너무 비싼데, 과일은 오래 두고 먹기도 힘들고.

나는 이제 제법 불러 온 배를 어루만졌다. 반짝이가 둘 다 먹고 싶다는데 전부 다 살까? 요즘의 내 왕성한 식욕을 생각하면 둘 다 며칠 안 되어 먹어 치울 것 같았다.

일단 멜론만 살까. 돈 아껴서 나쁠 건 없으니, 애기야, 블루베리는 다음에 시장 오면 살게. 그때 냉동 말고 더 좋은 블루베리로 사 줄게. 배를 쓰다듬으며 애기를 달랜다.

과일 가게 아주머니에게 지갑을 열어 현금으로 돈을 지불했다. 지갑 속에 있는 원민준이 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물건을 돌려주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만 이걸 깜빡하고 들고 와 버렸다는 걸, 여기 오고 다음 날 알았다.

‘우편으로 돌려줄 수도 없고.’

카드를 훔쳐 간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이 되었다. 뭐, 알아서 그가 정지시키겠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빨리 가서 멜론이나 먹자. 애기야.

아는 이 하나 없는 도시에 이사와 있으니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배 속의 아기에게 말을 거는 버릇이 생겼다. 아기에게 말을 많이 걸어 주면 아기 정서에도 좋다고 산부인과 선생님이 말했다.

태명은 뭘로 할까, 하다가 반짝이라고 지었다. 태몽이 다이아몬드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남자앤데 다이아몬드 꿈이라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 한가운데 커다란 고목이 서 있는 꿈을 꾸었다. 그 고목에서 보석이 주렁주렁 열리는 꿈을 꾸었다. 아주 큰 나무였는데 신기하게 손만 뻗으면 어떤 보석이든 잡을 수 있었다. 파란 사파이어, 빨간 루비, 가장 큰 다이아몬드까지.

나무에서 딴 보석을 품 안에 가득 안고 있었는데, 보석이 하나씩 녹아 없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하는 사이 품에는 가장 큰 핑크 사파이어 하나와, 아기 머리통만 한 다이아 하나만 남았다.

어, 없어지면 안 되는데, 나는 두 개를 저울질하며 망설이다가 나도 모르게 큰 다이아몬드를 삼켰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여기 이사 온 날 바로 꾼 꿈이다.

그래서 애기 태명은 반짝이가 되었다. 힘들게 가진 아이니까 보석이로 할까, 보물이로 할까 하다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니까 반짝이. 남자 오메가는 애기가 자리 잡기 힘들다는데, 우리 반짝이는 안정기까지 무럭무럭 자라 주었다.

물론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내 몸을 아프게 할 때도 있지만 견딜 만하다. 입덧도 없었고, 임신 중기가 되자 내 식욕은 폭발하고 있다. 덕분에 내 볼에는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항상 빼빼 말랐다는 말만 듣던 나였는데.

임신하면 피부가 뒤집히는 경우도 있다는데 나는 도리어 뽀얀 살이 오르고 있었다. 거기다 페로몬 수치도 태어나서 가장 안정적이었다.

병원 검진을 통해 반짝이가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파인지 오메가인지는 임신 막달이 되어서야 알 수 있다고 한다.

페로몬 샘이 형성되고 활성화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가장 마지막이라고. 우성 알파와 동침했다고 해도 열성 오메가는 알파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그래서 베타나 오메가일 거라고 생각했다. 반짝이의 할머니가 일반 오메가였고 나는 열성 오메가였으니 아가도 아마 오메가가 아닐까.

검진 결과를 듣고 먼저 걱정이 앞섰다. 나처럼 이도 저도 아닌 남자 오메가로 태어나면 어쩌지, 하고. 그러고 보면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내가 남자 오메가로 태어났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내 미래를 걱정하셨을까. 그래도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겠지.

‘어떤 아이로 태어나든… 어때, 뭐. 내가 잘해 주면 되지.’

평생 크게 운 좋은 일이라곤 없었던 나도 반짝이를 가지고 이렇게 행복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비록 짝사랑했던 애 아빠와 잘되진 못했지만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지는 것엔 성공하지 않았는가. 남자 오메가라고 해도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해 줘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사 온 소도시는 아주 조용하고 작은 곳이었다. 계획도시라 동네 구획 구획도 예쁘게 잡혀 있었고 문화 센터나 좋은 병원도 있었다. 크게 부촌은 아니었지만, 동네 사람들 모두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집 근처에 시장도 있고 예쁜 꽃이 자라는 공원도 있었다.

나는 1층이 카페인 2층의 작은 분리형 원룸에 세를 들었다. 1층이 카페라 가끔 시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카페 영업이 끝나면 밤엔 조용했고, 또 보증금도 싸서 좋았다. 이 정도면 쾌적한 집이었다. 멜론을 자르기 위해 선반을 열었다. 도마를 찾는데, 그 위의 채송화 씨앗이 눈에 들어왔다.

“내년에 심어도 되려나….”

상추 화분은 그 사람, 원민준 씨가 버렸으려나. 갑자기 민준의 생각을 하자 마음이 욱신욱신했다.

잘 지내고 있겠지.

모든 것이 괜찮았다. 동네는 평화롭고 배 속의 아이는 잘 자랐고, 당분간 지낼 돈도 있고. 그러나 가끔 그의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저미듯 아파 왔다. 내가 떠나오고도 참, 비겁하게 가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바로 나 같은 건 잊어버렸을까.

아마 내 사건 때문에 연희는 민준에게 계약 결혼 약속을 취소하자고, 헤어지자고 말했을 것이다. 누구 다른 사람이랑 사귀려나, 아니면 나를 대체할 다른 오메가를 찾았을까. 또 오피스텔도 얻어 주고, 초밥도 사다 주고, 내가 쓰던 도구들로 그 오메가를 묶어 주고, 사랑을 나누고, 그러는 일들을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임신으로 감정이 예민해져서 그런지 나는 초반엔 그런 상상으로 많이 울었다. 사람이랑 사람이 헤어지고 나면 좋은 일만 더 생각난다던데, 그래서 이렇게 아쉬운가 보다.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한다는 말까지 했었는데, 민준은 내게 아무런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었다. 그럼 가망이 없는 사이지. 거기다… 나는 부른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 배를 보면 굉장히 화를 낼 사람이었다. 계약을 위반하고 씨 도둑질을 했다고.

어떻게 보면 그 사람도 내게 조금은 피해를 입은 일이 있는 셈이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지려고 했으니까.

생산적인 생각을 하자. 나는 민준의 생각을 멈추려 노력했다. 멜론을 예쁘게 잘라 커튼을 열고 햇빛을 받으며 아삭아삭 먹고 있으니 천국 같았다. 햇볕도 따뜻하고 날도 좋았다.

이제 봄이 오면 반짝이에게 제철 과일을 많이 먹여 줘야지. 혼자뿐인 명절이겠지만 새해가 되면 전도 해 먹고. 기분이 좋아 나는 쿠션을 안고 뒹굴뒹굴했다.

낮잠을 한숨 자고 나는 1층의 카페로 내려갔다.

“왔어?”

요즘 꽤 친해진 카페 주인이 반겨 주었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원룸의 집주인이기도 했다.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바리스타 겸 카페 주인으로 일하고 있는 청년의 이름은, 곽인철.

수많은 퇴사 케이스 중 그나마 안정적으로 자기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다. 30대 초반 독신인 그는 꽤 호인이었다. 인철 형은 시우와 비슷한 면이 있는 성격이다. 그래서 그가 나는 퍽 편했다. 하루 종일 집 안에 있기 질리면 1층 카페로 내려와 일도 조금씩 도와주고 차도 마시고 했다.

“형, 뭐 일 도와줄 것 있어요?”

“오늘은 한가하네. 거기 앉아서 차나 마셔. 뭐 마실래? 너 커피는 못 마신댔고, 홍차는 돼?”

“네, 선생님이 카페인은 안 된다고… 홍차도 안 된대요.”

“디카페인 홍차 있는데 그거 내려 줄게.”

“홍차가 카페인 없는 것도 있어요?”

“다른 거 주문하면서 네 생각이 나서 같이 주문했지.”

“고맙습니다, 저 때문에….”

“무슨, 가서 앉아 있어.”

나는 감사를 표하고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임신 중기까지 몸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의 신신당부에 지금은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여기 오기 직전 집을 판 돈과 회사를 다니며 모아 둔 돈, 그리고 연희와 시우가 준 비상금이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돈을 까먹으며 있을 순 없었다. 애기를 잘 키워 내려면 돈이 많이 들 것이다.

알바 구인 정보가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 여러 가지를 클릭하며 찾아보았다.

“기술이라도 배워 둘걸….”

나는 요즘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한시우의 집안은 나를 크고 작게 어떤 방식으로든 참 많이 도와주셨다.

취직도 시켜 주셨었고. 회사 일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그래도 인사 팀에서 일한 경력은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출산 후 몸을 추스르고 재취직을 준비하긴 해야 할 것이다. 그 전에 잠깐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이라도 실용적인 자격증 공부를 시작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여기 오기 직전에는 원민준 이사가 거의 모든 생활을 도와주었다. 하마터면 바보가 되기 직전이었었지.

“재택근무 아르바이트 없나….”

턱을 괴고 이런저런 게시물을 클릭했다.

“뭐 해? 아르바이트 찾아?”

“네… 의사 선생님이 이제 아기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일해도 된다고 해서요…. 계속 저축 까먹고 있기도 그렇고.”

인철이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갑자기 임신한 배를 안고 혼자서 이사를 온 남자 오메가, 배경을 상상하기 어려운 건 아니다. 애 아빠는? 이라고 묻지 않는 것만으로도 인철은 꽤나 인격자였다. 바로 좋은 친구가 생긴 걸 보니 내가 인복은 있었다.

“그럼 너 이 카페에서 일해 볼래?”

“정말요? 형 아르바이트 구해요?”

“아직은 나 혼자 할 만한데 바쁜 시간에는 손 좀 있었으면 해서….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일해 봐, 월급까진 아니고 용돈 정도는 챙겨 줄 수 있는데.”

“감사합니다. 형.”

나는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집 바로 아래가 근무처고, 익숙한 카페라면 행운이었다. 배부른 임산부를 써 줄 아르바이트처를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월급으로 몇십만 원이라도 줘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인철의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금세 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너 보러 오는 손님도 많잖아.”

“아… 아니에요….”

“왜, 잘생긴 오메가 한 명 카페에 자주 온다고 저번에 손님들이 그러던데.”

나는 민망해서 헤헤, 웃었다. 임신이라는 건 참 신비한 일이다. 평생 페로몬도 제대로 못 내던 오메가인 내 페로몬 수치는 지금 정점을 찍고 있다.

평소에는 알파들이 내가 옆에 있어도 오메가라는 것도 눈치를 못 채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가만히 있어도 몸에서 단 향이 날 만큼 페로몬이 안정적이었다.

페로몬의 마법이란 굉장하다. 저번에는 카페에 앉아 있는데 알파가 전화번호를 물은 적도 있었다. 누가 봐도 임신 중인데. 임신 중이거나, 외모가 어떻게 생겼는지보다 알파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메가의 페로몬인가 보다.

우성 오메가로 태어나면 정말 편하게 살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열성인 나였지만, 몸에서 조금 좋은 냄새가 난다고 친절하게 대해 주는 알파들이 생기다니. 나와는 지금껏 상관없던 일이라 신기할 따름이다.

“서윤아, 홍차 가져가. 뜨거우니 식혀 마시고.”

“네, 형.”

나는 홍차를 후후 불어 마셨다. 디카페인이라지만 향도 맛도 진짜 홍차랑 똑같았다. 좋은 오후였다.

나는 지금 꽤 행복한 것 같다.

***

카페 아르바이트 첫날은 꽤 재미있었다. 나는 풀타임으로 일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인철은 아기에게 좋지 않다며 만류했다.

“애기가 엄마가 잉여였던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갑자기 하루에 8시간 넘게 노동을 하면 놀랄걸. 나도 너 풀타임으로 고용할 여력은 없고, 오전이나 오후에 나와서 서너 시간만 슬렁슬렁 일해. 돈 그렇게 급한 건 아니라며. 대신 내가 일하면서 무료 바리스타 강의해 줄게.”

“아? 정말요? 저야 좋죠.”

커피 맛이 좋기로 유명한 인철의 커피숍은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사용했는데, 제법 마니아 층이 있었다. 소소하게 동네 사람들이 오가는 조용한 사랑방이라고 할까. 이번 달부터는 소규모 바리스타 강의도 할 것이라며 벼르던 차라, 일을 거들어 줄 알바생이 필요한 듯했다.

“학원비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열심히 일하면 교육비는 퉁 쳐 줄게. 그리고 너 여기 이사 오고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알파 손님들 많이 늘어났어. 그러니까 나도 고맙지.”

“형 진짜, 또 그러신다. 그냥 이 동네에 오메가가 귀해서 신기해하는 거예요. 임산부한테 무슨….”

나는 인철의 말에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되었다. 인철 형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주변에 알파 없는 임신한 오메가가 있다는 소문이 났다는 거겠지.

혼자인 임부 오메가, 미혼모 격인 오메가는 굉장히 절박한 상황일 테니, 책임져 주겠다 감언이설로 유혹해 어떻게 한 번 해 보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애기를 가진 후 나는 많이 느긋해졌지만 한편으론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잘못된다면 우리 애기를 지켜 줄 사람이 없다.

“우리는 핸드 드립 하니까, 커피를 내릴 땐 이렇게 원을 그리면서 뜨거운 물을 여과지 위에 붓는 거야, 커피가 흙처럼 물을 빨아들이지? 땅이 아주 비옥하구나, 딱 이렇게 느껴질 정도로 젖으면 더 천천히 돌려가면서 붓고.”

“…이해가 갈 것 같으면서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인철은 기초부터 천천히 일을 가르쳐 주었다. 요새 계속 느긋하게 쉬다 오랜만에 일 때문에 집중하니 재미있었다.

“제자가 이해가 느리네, 해고.”

“아 진짜, 형.”

웃고 떠드는 사이 오전이 훌쩍 지나갔다. 오전 내내 일을 도우며 나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쓰는 법과 드립 커피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오후가 되자 인철 형이 앞치마를 벗었다.

“나 은행 좀 다녀올 테니 가게 한 시간만 봐 줄래? 그것까지만 하고 퇴근해.”

“저 혼자 괜찮을까요?”

“에이드랑 아메리카노, 라테 만들 줄 알면 됐지 뭐. 자신 없는 메뉴 주문받으면 지금은 주문 불가라고 해.”

슬렁슬렁해 보여도 가게 일엔 철저한 인철이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오늘은 은행 일을 꼭 볼 요량인 듯했다. 인철을 배웅하고, 나는 인철이 만들어 준 에스프레소 머신 사용 설명서를 정독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들고 고개를 드니 안경을 낀 잘생긴 알파 한 명이 서 있었다. 우리 가게에 자주 오던 손님이다. 얼굴이 낯익었다. 미안함에 나는 얼른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단골손님인데 기다리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첫날이라서….”

“네, 압니다. 여기 손님으로 자주 오셨죠.”

다행히 화가 나진 않은 듯했다. 아직은 나는 알파들이 거북하다. 나는 주문할 메뉴를 물었다.

“뭐 주문하시겠어요?”

“추천 좀 해 주시겠어요?”

“저, 에이드나 핸드 드립 커피…. 그런데 제가 오늘 처음 배워서 사장님 맛은 안 날 수도 있어요….”

커피 맛이 다르다며 책을 잡힐까 봐 나는 덧붙였다. 알파가 화를 내는 건 여전히 무서울 것 같다.

“아니면 아메리카노요.”

나는 배시시 웃었다. 상대편이 헛기침을 한다.

“뭐가 제일 만들기 쉬운데요?”

“어… 에이드요?”

“그럼 오렌지에이드 주세요.”

“아, 네, 바로 만들어서 자리로 가져다 드릴게요.”

첫 주문이었다. 나는 현금을 받아 거슬러 주었다. 에이드는 만들기 쉬운 편이었다. 인철 형이 미리 재료는 준비해 두었다. 갈아 놓은 생과일과 소다를 섞고 얼음을 넣어 에이드를 만들었다. 에이드를 다 만들고 가져다주려는데, 줄을 서 있는 손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몸이 굳었다.

공교롭게도 지금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이 모두 알파였다. 카운터 앞에 두 명, 아까 주문을 받은 한 명. 알파 셋에 임신한 오메가 하나라니, 좋은 구성은 아니다. 나는 괜히 긴장되어 사내들의 눈치를 보았다. 얼른 카운터로 간다.

“주문하시겠어요?”

…그리고 중대한 문제를 깨달았다. 인철은 카드 포스기 사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카드 포스기를 가지고 끙끙거렸다. 결국 방법을 알아냈을 때 눈앞의 알파들이 나를 모두 멍하니 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결제됐어요.”

“네, 천천히 해 주셔도 됩니다.”

오늘 처음으로 일을 배운 나는 당연히 손이 느렸다. 서두른다고 했는데 커피 만드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 완성되었을 때 첫 번째 손님이 주문한 에이드가 그대로 카운터에 있는 걸 발견했다. 안경 낀 알파, 그 사람이 주문했던 거였는데….

자리로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 에이드….”

“네, 바쁘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안경을 낀 알파가 다가왔다. 기분 좋은 우드 향이 나는 체향이었다. 나는 얼른 사과했다. 첫날부터 실수라니.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 서비스로 다른 거라도… 쿠키 좋아하세요?”

알파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서비스는 됐는데요, 대신 전화번호 좀 주실래요. 괜찮으면요.”

“…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저번에 가게 사장님께 물어보니 결혼은 안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사귀는 알파도 없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런’ 의미로 전화번호를 묻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혼자 착각해서 망신당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미 내 얼굴이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제 커피는 아직 안 나왔나요.”

카운터에서 기다리던 알파가 나를 불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죄송….”

“괜찮은데, 저도 전화번호 좀 주실 수 있습니까, 아직 저쪽하고 번호 교환 안 하셨으면요.”

“저도 전화번호 좀….”

카운터 앞에 서 있던 단골 두 명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잠시 셋이 어색하게 서로를 쳐다보더니 앞다투어 알파 향을 뿜기 시작했다. 머스크 향에 우드 향, 처음 맡는 냄새까지 좁은 카운터 안에 가득 차니 머리가 아릿해졌다.

…맹세코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알파에게 인기가 있었던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도 열성 오메가라는 소문이 나기 전에는 당연히 사람들은 내가 베타인 줄 알았었다.

오메가인 것이 소문나고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을 정도였으니, 그 뒤에도 한 번도 알파에게 고백을 듣거나 플러팅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임신의 마법이란 굉장하구나.

“여기 제 명함입니다.”

안경을 낀 알파가 먼저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두 번째 알파가 그를 노려보더니 얼른 명함을 꺼냈다. 비교적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제 명함도 받아 주세요. 연락 주십시오.”

세 번째 알파가 그 명함을 밀어내듯 손을 내밀었다.

“연락 주세요.”

“저도….”

“근처에서 근무하니 아무 때나 전화주세요.”

나는 제일 위의 명함을 보았다. 안경을 낀 남자의 명함이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서인하 실장.

“저, 알파 냄새 좀….”

앞다투어 말을 걸어 정신이 없는 건 둘째 치고, 카페를 가득 채운 알파 향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임신 후 페로몬이 안정되었다고 해도 나는 열성 오메가였다. 헉헉대는 낮은 숨을 쉬는 나를 보자 알파들이 당황해서 향을 감췄다.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다.

“제가 열성이라서… 숨이 좀 막혀서요….”

“아, 체향이 좋으시길래 저는 우성인 줄 알았는데요.”

내가 우성이라는 말을 듣다니. 정말 임신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알파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저도 이전부터 한번 말 걸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전부터 제 취향이시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체향이 너무 제 취향이셔서요.”

셋이 동시에 입을 열어 대니 머리가 벙벙했다. 나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저… 그런데 일하는 중이라….”

“아, 네 그렇지요.”

“전화 기다릴게요.”

“저는 문자도 괜찮습니다.”

혹시 셋이 아는 사이인가 의심될 정도의 꼬리를 무는 트리오 플레이였다. 셋이 번갈아 가며 자기 어필을 하는 모습이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커피숍 앞치마에 명함을 찔러 넣었다. 그 뒤 손님들이 밀어닥쳤고 정신없는 한 시간을 보냈다. 그 뒤 인철이 돌아왔을 때 겨우 한 시간 일했는데 몸이 무겁고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별일 없었어?”

“네, 그런데 손님이 좀 많아서….”

“웬일로 이 시간에 손님이 많아.”

“그러게 말이에요…. 형 첫날부터 너무 굴리시는 거 아니에요?”

“굴러야 빨리 배우지.”

“아 진짜. 형 포스기 사용하는 법도 안 가르쳐 주시고 간 거 알아요?”

“깜빡했다, 야. 어떻게 했어?”

“그냥 했죠.”

“실전으로 배웠네. 잘됐다.”

“형….”

“하하, 농담이야, 얼른 올라가서 쉬어. 나 애기한테 욕먹겠다. 엄마 고생시킨다고.”

인철의 능청스러운 말이 밉지 않아 나는 웃었다. 그리고 더 이상 서 있는 건 무리였기에 나는 그만 퇴근하기 위해 앞치마를 벗었다.

“맞다, 명함.”

나는 명함 세 장을 꺼냈다. XXX사 그래픽 디자이너 실장, 동물 병원 의사, XXX사 투자 회사. 직종까지 다양했다. 이걸 어쩌지. 고민하다가 일단 받은 거니 가져가기로 했다.

“그게 뭐야?”

“아… 형 안 계실 때 단골손님들이 주셨어요.”

“알파?”

“네, 그 자주 오는… 안경 낀 분하고요, 창가 자주 앉으시는 분이랑, 아침에 자주 오시는 분….”

“드디어 받았네. 언제 말 거나 했다.”

인철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오전에 인철이 말한 나 때문에 늘었다는 알파 단골들이 그들인 걸까. 이 동네에 그렇게 오메가가 귀한가…?

“그 사람들 올 때마다 너 언제 내려오나 문 보던데. 그리고 너 오면 너 쳐다보고, 나한테 너 결혼했냐고 물어보고, 혹시 나랑 사귀냐고 물어본 적도 있고.”

“…….”

“지켜보고 있으니 알파들 그러는 게 재미있더라고.”

“…제 팔자에 이런 일이 다 있네요.”

심지어 오늘은 알파로부터 좋은 향이 난다는 칭찬도 들었다. 평생 페로몬이라곤 안정적으로 발산해 본 적 없는 나다. 페로몬이 나오려면 임신 전에 나와야 연애에 유리했을 텐데 이제 나올 건 뭔가.

그래도 내 배 속의 예쁜 복덩이 덕분에 몸이 좋아져서 페로몬이 제대로 나오는 건가, 생각하면 또 좋았다.

“너 인기 없어? 많은 편 같던데.”

“아, 저 임신 전엔 페로몬이 거의 안 나와서… 페로몬이 없는 남자 오메가는 그냥 알파들에게 베타 남자랑 똑같거든요.”

“아.”

***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뜨거웠다. 열이 나나 했다. 이마를 짚어 봤지만 조금 뜨거울 뿐, 심하지 않았다. 바로 그다음 하반신이 욱신대며 간지러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응….”

나는 잠결에 머리를 베개에 문댔다. 또다. 임신 후, 왕성해진 성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입술을 한 번 핥았다. 나는 바지를 끌어 내렸다.

속옷까지 바로 내렸다. 커튼이 닫혀 있는 걸 확인했다. 망설이다 성기를 손으로 잡았다. 그대로 성기를 주무른다. 부족함을 느끼고 나머지 한 손을 유두에 가져다 댄다. 유두를 만지작대고 성기를 주무르며 나는 보송한 침대 시트에 몸을 문질렀다. 달아오른 뺨이 시트에 스치면서 조금 차갑게 식었다.

원민준은 나의 처음을 가져간 알파였다. 그리고 수없이 몸을 섞었다. 그와 보낸 밤들을 생각하면, 생생한 감각이 떠오른다. 그 남자가 내 몸 안을 관통하던 격통이 생각난다.

나는 유두에서 손을 떼고, 마른 입술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가 키스할 때, 입술을 통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오던 페로몬. 꽉 차고 농축된 그 싸한 향이 되살아났다.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만져 주고, 나의 상체 구석구석까지 애무해 주기도 했었다.

부족해.

내 자신이 텅 빈 사막처럼 느껴졌다. 갈증을 채울 물로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내 손을 묶었던 밧줄의 감촉이 떠올랐다. 그리고 허벅지까지 죄이며 상체를 한꺼번에 휘감았던 밧줄의 압력. 내 엉덩이에 내려쳐지던 그의 손.

“아….”

나는 그 생각을 하자 몸이 더 달아올랐다. 이대로는 건조해서 잘되지 않는다. 머리맡의 알로에 젤을 쭉 짜서 손에 담고 페니스를 마찰시킨다. 조금 더 수월하게 내 성기가 일어섰다.

욕구는 이 정도 자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몸 안쪽이 가려웠다. 나는 옆으로 누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손을 뒤로 돌렸다. 안쪽의 구멍을 문지르며 손가락을 한 마디 넣어 휘저었다. 더 집어넣는 건 무서웠다. 그러다 나는 불완전하게 도달했다.

허무감을 느끼며 헥헥, 숨을 쉬었다. 휴지로 흔적을 닦아 냈다. 몸 안에서 천천히 빠지고 있는 열기를 느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내가 다니는 병원, 산부인과 선생님은 임신 중 성욕 증진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사람에 따라 강한 성욕 증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그러니 아기 아빠와 조심해서 정사를 해도 된다고.

아기 아빠와 같이 산다면,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배를 끌어안았다. 혼자서 일을 치르고 나면 이내 약간 부끄러웠다. 아기 낳고 난 후에도 성욕이 없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걱정도 들었다. 아기를 돌보려면 바쁠 텐데, 계속 몸이 달아 있으면 곤란할 테니까.

***

다음 날은 점심만 먹고 카페에서 퇴근하기로 했다. 오후에 산부인과 진료 예약이 있기 때문이다. 인철 형은 흔쾌히 퇴근하라고 했다. 산부인과까지는 택시를 타기에도 애매했다. 걸어서 20~25분 정도.

“걸어가려고?”

“네. 운동도 할 겸.”

“배도 많이 나왔는데, 오래 걸으면 고생 아니야?”

“걸을 만해요. 의사 선생님도 산책 많이 하라고 하셨어요.”

못내 걱정된다는 표정의 인철이었다. 정이 많은 사람이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어제 그 안경을 낀 잘생긴 알파와 바로 마주쳤다. 이름이 서인하… 씨였던가. 명함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디 가시나요?”

나는 조금 어색함을 느끼며 병원에 간다고 했다. 병원 위치를 듣더니 그 남자가 갑자기 데려다주겠다고 말을 꺼냈다.

“저도 근처에 가는 길입니다, 같이 타고 가실래요?”

“커피 드시러 온 거 아니세요?”

“테이크 아웃해서 그쪽으로 가려고 했어요.”

아무리 봐도 지금 막 지어낸 말이었다. 어쩌면 진짜일 수도 있지만. 홑몸도 아닌데 잘 모르는 알파의 차를 타도 될까. 그렇지만 걸어가면 병원 예약 시간이 빠듯했다. 인기가 많은 병원이었다.

“부담 줄 생각 없어요. 그냥 가는 김에 차만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버스 타고 가면 돌아가잖아요. 차 타면 10분이면 갑니다.”

막상 나와 보니 꽤 추운 날이었다. 오전 중 서서 일했더니 걷고 싶지 않은 마음도 슬금슬금 생긴다. 꽤 유혹적인 제의였다. 서인하의 회색 중형차는 참 아늑해 보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씨엔 아기도 걷기 싫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 고맙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인하의 차에 올라탔다.

“서인하… 씨죠?”

“네, 기억하시네요.”

“어제 명함 주셨잖아요.”

서인하가 아주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안경을 낀 얼굴 아래 딱 보기 좋게 그을린 좋은 피부와 갸름한 턱이 꽤 수려했다. 알파들은 거칠고 제멋대로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는 꽤 섬세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전화 은근히 기다렸는데, 연락 안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찾아오신 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이 커피숍 커피가 맛있잖아요.”

미혼 임부 오메가라면 알파에게 쉬운 이미지일 텐데. 혹은 무시하기 쉬운 이미지일 텐데. 그는 조금의 경멸이나 무엇도 없다. 예의 바른 사람 같다. 거리는 짧았지만 그날따라 차가 밀렸고, 차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문득 내 안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임신 중 성욕 증진이 계속된다면 혹시….

이 사람도 내가 영 최악은 아니니 명함을 주었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제 전화 기다리셨어요?”

“네.”

이쯤 되면 내가 생각하는 의미가 100% 맞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임신 중이기도 한데… 이 사람은 나와 한 번 자고 싶어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데이트라도 해 보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원민준 외에는 알파와 깊은 관계가 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대화를 진행해야 할지 몰랐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알파에게 매력적인 오메가로 보이는지.

민준과는 한번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민준이 모든 관계를 주도했었다. 그는 내게 말을 잘 들으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그러면 그가 알아서 잘해 주었고, 섹스를 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었다.

“그… 저의 체향 때문에요?”

임신 때문에 나의 체향은 지금 일반 오메가만큼 제대로 분비되고 있다. 열성에서 일반으로 체향이 변한다는 것은 꽤 엄청난 일이다. 갑자기 알파들이 내게 관심을 보일 거리라곤 그것뿐이었다.

“네… 체향이… 벌꿀 같이 달콤한 냄새가 나더라고요. 또…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셔서.”

나는 귀 끝이 붉어졌다. 민준 외의 알파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의 베타 여자나 매력적인 오메가들은 남자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듣고 살겠지. 하지만 나는 면역이 없었다.

“그… 고맙습니다.”

나는 이제 알파가 없는 오메가였다. 상대의 호감에 순수하게 기뻐한다고 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내가 어떤 알파를 좋아하게 되거나 사귀게 되는 일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는 임신 중이에요. 아시다시피.”

“네, 그래서 결혼하신 건가 하고 생각했어요.”

“상관… 없어요?”

“사귀는 알파가 있나요? 애 아빠는요?”

“어, 애 아빠는 연락 안 되고 사귀는 사람도 없어요.”

그 말을 하는데 가슴이 지끈 아팠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도 아픔들도 점차 익숙해질 것이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수십 번은 이렇게 대답해야 할 테니.

내가 원해서 가진 아이니까… 도리어 애 아빠는 아이의 존재도 모른다. 가끔 그건 미안했다. 그 사람에게 말이다.

“다행이네요. 언제 저녁 같이하실래요, 제가 사겠습니다.”

“…….”

나는 그러자고 해도 될지 잠시 망설였다. 당분간 누구를 좋아하거나 사귈 마음은 없었다. 아기도 임신 중이었고 또 원민준과도 정리하지 못한 채 도망 왔으니까….

물론 그 사람을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긴 했다.

혹시 뉴스 같은 데, TV에 민준이 나온다면 그때나 얼굴을 보게 되겠지. 잠시 원민준의 생각을 한 것만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그사이 교통 체증이 풀렸다.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제가 곤란하게 했나요?”

“아니요, 저, 죄송해요… 제가 임신 중이라, 그래도 될까 해서요.”

“그냥 저녁 한 번이잖아요. 자꾸 거절하시면 저도 서운한데요.”

서인하가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밉지 않은 말투다. 나는 망설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요.”

“전화 주시는 거예요?”

“예….”

망설였지만 식사 한 끼 정도는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지금만 해도 성욕이 펄펄 끓는데… 나도 알파를 만날 수도 있다. 마음 맞는 사람만 생기면.

꼭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민준이 아니라도….

민준을 좋아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 사람과는 이어질 가능성이 없다. 그러니 식사 한 끼 같이 하는 것이 서인하에게 실례는 아닐 터였다. 나는 배를 끌어안고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또 카페 놀러 갈게요.”

“네. 자주 와 주세요.”

“…영업 멘트 맞죠? 솔직히 방금 조금 설렐 뻔해서.”

나는 웃어 버렸다.

***

젤이 발라진 내 배 위에 초음파 스캐너가 위아래로 오가고 있었다.

“좋아요. 잘 크고 있네요. 컨디션은 어때요?”

초음파 기기 영상 위로 강낭콩에서 사람이 된 아기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웅크리고 자고 있네. 귀여워라. 벌써 내 입꼬리는 헤실헤실 풀려 있었다.

“두통이 가끔 도지고 몸이 무겁긴 해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요.”

“애기 아빠 형질이 우성이랬죠?”

“네.”

남자 오메가는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거기다 열성 오메가인 나였다. 내가 우성 알파의 아이를 배고 처음 상담을 왔을 때 의사나 간호사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드문 케이스니까…. 그렇지만 바꿔 말하면 우성이니까 열성 오메가도 임신이 가능한 것이다. 차트를 보던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애기가 형질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정말요?”

내 예상대로 오메가인 걸까. 엄마를 닮아 남자 오메가일 가능성도 높았다.

“음, 일단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막달까지 페로몬 샘이 형성되다 닫혀서 베타로 태어나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기가 형질이 많이 강하면, 산모가 힘들어질 텐데…. 그럴 땐 아빠인 알파의 페로몬이 도움이 되는데 그건 약간 걱정이네요…. 일단은 지켜봅시다.”

“네.”

열성이나 남자 오메가가 임신하면 출산까지의 과정이 몹시 힘들다고 들었다. 그럴 때는 아빠 알파의 체향이 임신 과정을 버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안정기는 지났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걱정이었다. 아기 아빠를 데려오기는커녕 만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막달엔 입원하시게 될 수도 있으니 준비하시고요.”

“네.”

“어디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남자 오메가의 출산은 힘드니까요. 집에 있다가 갑자기 양수가 터지는 것보다 병원에 미리 있으시는 게 나아요.”

“네, 선생님”

“그래도 처음엔 불안정했는데 이렇게 잘 안착한 걸 보니 애기가 효자예요. 오늘 마사지 잊지 마시고요.”

의사의 말에 나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반짝이는 복덩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남자 오메가는 출산 전 마사지나 요가 같은 것들을 꼭 해 줘야 한다고 한다. 산부인과에 딸린 마사지 숍에 가는 것은 내 생활의 유일한 사치였다.

마사지 숍에는 그날따라 유독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와이프의 손을 꼭 잡고 온 젊은 남편들. 쳐다보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지도 몰라 시선을 돌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러움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 봐야 뭐 해.’

나는 얼른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 마음은 가져 봐야 득 될 것이 없다.

서인하는 그 뒤에도 뻔질나게 카페에 드나들었다. 가끔 동네에서 마주치면 차를 태워 주기도 했다. 그는 내게 저녁을 먹자고 한 번 더 청했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와 데이트를 할 자신은 아직 없다. 나는 잘 돌려 거절했다.

요 며칠 서인하를 관찰하며 느낀 건 그가 믿을 만한 사람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하던 나는 결심했다. 서인하와 알파와 오메가의, 그런, 관계를 가져도 크게 나쁜 짓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바로 뭘 하기로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차를 한잔 마시기로 했을 뿐이다. 저녁 식사는 부담되니까….

보통 오메가와 알파는 이런 것일 거다. 이렇게 만나서 자연스럽게 어른스러운 관계를 가지는 거겠지? 나는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다. 원민준 씨 외의 사람과 말이다.

“카페 분위기는 마음에 드세요?”

“네… 예뻐요. 자주 오시는 곳인가 봐요.”

“가끔이요.”

집에서 좀 떨어진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서인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일을 했다. 젊은 나이에 실장이니 꽤 유능한 축일 것이다. 사회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서인하는 부드럽게 말을 잘 이어 갔다. 나는 딱히 나에 대해 해 줄 수 있는 말이 많이 없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다던가, 지금은 사귀는 사람이 없다던가 그 정도밖에는.

서인하는 고맙게도 애 아빠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차를 마시고 한 시간 좀 넘게 이야기를 하다 주변을 산책했다. 그걸로 짧은 데이트는 끝났다. 서인하는 저녁을 같이 먹고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같이 식사를 하자고 강권하지는 않았다. 서인하는 젠틀하게 나를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 주었다.

“음… 저….”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차 한잔 더 마시고 가실래요?”

나는 서인하에게 얼마 전 배운 방법으로 홍차를 내려 주었다. 서인하는 문득 나를 응시했다. 나는 서인하를 보다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임신 중인 오메가도 만나고 싶다거나 만지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알파는 신기하다.

나는 이제 알파가 나를 바라는 눈빛을 안다. 알파의 성욕을 느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런 것들. 원민준 씨가 내가 가르쳐 준 것들 중 하나다.

“서인하 씨는 누구… 사람들 많이 만나 보셨어요? 알파와 오메가는 사귀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지내잖아요. 그런 것들요.”

“네, 뭐 적당히.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서인하가 침을 삼켰다. 원민준 이후, 알파가 나를 이성으로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게 참 기분이 묘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정부 취급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 나도 누군가에게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것도 그 사람이었다. 나도 누군가의 성욕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서인하는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잘 모르는 알파를 긴장시킬 수 있다니 의외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에게 어디까지 기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은, 누구와 진지하게 사귀거나 만날 자신이 없거든요. 제 상황도 그렇고…. 그렇지만 혹시 그래도 상관없으시면, 그게….”

“네 알겠습니다. 더 말씀 안 하셔도 돼요.”

남자의 눈에 희미한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이 남자는 나에게 육체관계 이상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알파와 오메가가 육체관계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사귀고 말고는 육체관계를 맺고 나서의 옵션이라고. 서인하도 그런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에 대해선 도가 텄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한 말은 실례는 아니었다.

“음, 그럼… 저기….”

“네.”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서인하가 내 고민하는 얼굴을 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

“키스해도 됩니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하가 안경을 벗었다.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서인하가 내게 키스했다. 그가 내게 키스했을 때, 원민준 씨의 것보다는 훨씬 옅은 그의 향이 내 코끝을 스쳤다.

그가 내 입술에 입 맞추면서 손을 내 티셔츠 안으로 넣었다.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가 그의 손에 잡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그가 달래듯이 배를 쓰다듬다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나는 입술을 벌리지 않고 꼭 다물고 있었다.

사실은, 입술이 닿을 때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내 몸에 손이 닿자 소름이 오소소 올라온다.

그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떼고 내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원민준 씨의 숨결이 떠올랐다. 눈을 감자 그 사람의 몸 감촉이 떠올랐다. 나는 순간적으로, 손이 묶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준은 나를 다양한 도구로 자주 묶어 줬다. 그런 욕구는 태교에 안 좋을 텐데, 내가 한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남자는 원민준 씨가 아니다.

“저, 잠깐만요.”

몸이 너무 외로웠고, 서인하 씨는 좋은 사람 같으니까, 하면 기분 좋을 것 같았는데. 막상 서인하의 체향이 몸에 닿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서인하를 살짝 밀어냈다. 더 깊어지려는 애무도 불쾌했다.

“잠시만….”

서인하가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떼고 흐릿하게 나를 보았다. 역시 이 사람은 원민준 씨가 아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슬퍼졌다.

“죄송해요, 역시 아직은….”

“알겠습니다.”

서인하가 숨을 몰아쉬다가 몸을 떨어뜨렸다.

“오늘은 이만 실례할게요.”

“예, 오늘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나중에 또 뵐게요, 다음엔 밖에서.”

“네.”

그 뒤 서인하와 나머지 차를 마시긴 했지만, 분위기는 정말 어색했다. 한번 생긴 섹스 텐션이라는 것이 묘했다. 그러나 정작 서인하와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나는 도저히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화내지 않았다. 나는 서인하가 가고 나서 한숨을 크게 쉬었다.

“어떻게 하냐….”

혹시 원민준 씨의 몸을 못 잊어서 평생 독수공방하게 되면 어쩌지…. 나는 배를 쓰다듬었다.

“이제야 페로몬이 제대로 나오는데. 애기야, 난 역시 재능이 없나 봐.”

나는 짝사랑만 잘했지 연애엔 재능이 없나 보다. 그래도 이전보다 인기가 생기고 알파들에게 오메가 취급받으니 나은 건가. 그런데 그러면 뭐 하나. 가질 수 없는 사람을 바라는데. 다 끝난 관계를 생각하는데.

원민준 씨랑 했던 것 같은 그런 특수한 섹스… 를 해 줄 상대를 찾아야 하는 건가? 그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까? 그런 상대는 어디서 찾지? 그보다, 그런 일을 같이하고 싶은 상대가 생기긴 할까….

“서인하 씨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나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

나는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연락을 차단한 상태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원래 내 핸드폰은 추적당할 수도 있으니 절대 쓰지 말라고 한 시우는 대포폰을 하나 안겨 주었었다. 이게 무슨 블록버스터 영화도 아닌데. 민준이 전화번호 추적까지는 안 할 것 같다는 데도.

이제는 아기도 안정기고, 몸도 마음도 많이 편안해졌다. 이제 연락을 한번 해 봐도 될 것 같다. 나는 시우가 준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시우의 번호를 눌러 메시지를 보냈다.

「나 잘 지내, 거긴 별일 없지?」

바로 시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 서윤아, 야, 왜 이렇게 늦게 연락했어. 별일 없어? 괜찮아? 애기는?

“응, 애기도 건강하고, 나 별일 없어. 여기 XX시야.”

시우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탁 트이고 안도감이 든다. 나는 속사포처럼 근황을 캐묻는 시우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고. 아이가 잘 크고 있고, 아들이고. 바리스타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별일 없고.

“그런데, 거긴, 별일 없어? 연희는 어떻게 됐어? 그 사람은… 잘 지내?”

나는 망설이다 질문했다. 내가 지금껏 시우에게 연락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민준에 대해 들으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원민준의 소식을 들으면 다시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도 마, 나 서연희 잡혀 죽는 줄 알았어. 그 사람, 연희가 도망간 지방 리조트 골프장까지 쳐들어와서 너 내놓으라고 서연희 쥐고 흔든 거 알아? 서연희 그날 맞는 줄 알았어.”

“…어?”

“서연희 이것도 미쳤지, 그걸 또 같이 싸우면서 덤벼서 말리느라 죽는 줄 알았어. 당연히 파혼, 그것도 거하게.”

“아, 그래….”

“아프다고 하더라, 원민준 씨.”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몰라, 몸이 안 좋다고 요즘 두문불출이라는데, 상사병이라는 소문도 있고…. 어쨌든 한동안 그 사람 비서들이 나랑 연희 쥐어짜서 가족 싸움으로 번질 뻔했어. 지금도 너 찾고 있는 것 같으니까 몸조심해, 우성 알파들 성격 더러운 거 알지. 잡히면 피곤해져.”

“으응….”

그래도 나를 바로 잊진 않은 모양이다. 아니 그걸 넘어서서, 날 찾긴 찾는 모양이다. 왜? 내가 돈을 다 돌려주고 도망가서? 화가 나서? 아니면 계약서를 이행하지 않아서, 그걸 잡아서 책임지게 하려고…?

“혹시 나… 애기 임신한 거 눈치챈 거 같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겠어. 솔직히 W가에서 난리 치면 우리 집도 커버하기 힘드니까, 일단 넌 신경 쓰지 말고 아기 낳으면 데리고 올라와, 내가 어머니한테 잘 말씀드릴게. 아예 우리 본가에 들어와 있든지.”

“그런 신세를 어떻게 져. 나 여기 눌러앉을까 생각 중이야.”

“그것도 괜찮겠네, 아무튼, 조만간 갈게. 여기 잠잠해지면.”

“응.”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하다 전화를 끊었는데도 나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왜 아프지? 정말 나 때문에 속병이라도 생겼나. 많이 아픈가. 마음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

근무일을 2주도 못 채웠지만, 그달 25일이 되자 인철 형이 월급을 주었다. 짧은 근무 시간에 비하여 후한 월급이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카페 장사가 잘되었다. 동네 분위기도 들떠 있었다.

형이 생각보다 잘 챙겨 줘서 나도 기뻤다. 바리스타 일도 꾸준히 배우고 있었다. 임신 때문에 커피를 마실 수 없어서 혀끝으로 맛을 보고 뱉거나, 한 모금만 머금으며 커피 맛 내는 법을 배웠다. 정작 나는 내가 만든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는데. 인철 형 말로는 맛이 꽤 괜찮다고 한다. 재능이 있다고.

“형, 감사합니다. 형 덕분에 바리스타 일도 배우고….”

“아냐, 너도 홑몸 아닌데 고생했다. 오늘 저녁엔 회식할까?”

직원이라곤 나 하나라 단둘뿐인 카페인데도 가져다 붙이니 회식이었다. 나는 그냥 배시시 웃었다. 오랜만에 내가 직접 돈을 버니 들떴다. 오랜만에 보는 노동의 단맛이었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 월급이 훨씬 더 많았었다. 그래도 아기가 생기고 책임감이 생겨서 그런지, 유난히 보람찼다.

“형,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럴까? 카페 문 닫고 치킨 시켜먹자. 내가 칵테일 만들어 줄게. 넌 무알콜로.”

“네, 형.”

인철 형은 바리스타답게 손재주가 좋아서 칵테일도 잘 만들었고, 안주도 잘 만들었다. 그날 카페 영업을 끝내고 나는 치킨집에 전화했다.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을 한 마리 주문한다. 배 속의 아기는 튀긴 것도 잘 먹고 과일도 잘 먹었다.

나머지 설거지를 마무리하며 하루를 끝냈고 인철 형은 의자 정리를 했다. 그사이 배달이 도착했다. 나는 물을 튼 채 외쳤다.

“형 테이블에 제 지갑 있어요. 거기 현금 있어요.”

“어, 내가 대신 결제할게.”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닦았다.

“저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배가 불러서 그런지, 따뜻한 실내에서 일을 하다 보면 유난히 땀이 잘 났다. 땀내 나는 몸으로 저녁을 먹고 싶진 않았다. 나는 인철이 알아서 결제하려니 하고 2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자 인철이 치킨을 테이블 위에 풀어 놓고 있었다. 막 튀긴 따듯한 치킨 냄새에 아이가 자극을 받았는지, 유난히 허기가 졌다.

“거기 영수증.”

“아, 네, 형.”

나는 영수증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어, 형. 카드 결제… 했어요?”

인철이 내 지갑에서 꺼내 결제한 카드는 원민준이 이전에 나에게 주었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실버 카드였다. 영수증에 똑똑히 박힌 카드사 이름. 등골이 오싹했다.

“어? 지갑에서 계산하라며. 배달부가 거스름돈이 없다고 하더라고.”

민준이 준 신용 카드를 돌려주는 것을 깜빡하고 그냥 지갑 속에 넣고 다녔었다. 인철이 아무 생각 없이 카드로 결제한 듯했다. 여기 온 뒤로 나는 카드를 가능하면 쓰지 않고 현금으로 모든 걸 계산했다.

“어, 어쩌지?”

나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왜? 이거 쓰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울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치킨집에 전화할게, 결제 취소해 달라고.”

인철이 핸드폰을 집어들며 그렇게 말했다. 돈은 다른 카드 번호를 불러 주고 인철이 결제했다. 나는 사색이 된 채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놀라, 내가 뭐 큰 실수한 거냐?”

“그건 아니고… 다른 사람 카드 잘못 가지고 있던 거라….”

혹시 민준이 이 카드를 도난 신고했으면 어쩌지? 그럼 위치 추적도 어렵지 않고, 또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건데….

“바로 결제 취소했으니 별일 있겠어. 네가 너무 놀라서 내가 다 무섭다. 진정 좀 해.”

“네….”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온 신경은 이 일에 쏠려 있었다.

***

다음 날까지 인철 형이 미안해할 만큼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하루를 불안하게 보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도 막상 아무 일이 없었다.

원민준 씨는 그런 카드가 있다는 것도 아예 잊어버리고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묘했다. 시우 말로는, 민준이 아프다고 했는데, 혹시 카드 이용 내역 같은 걸 확인해 볼 겨를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많이 아픈가? 죽을 정도로 아픈 건가…?

카드가 결제된 곳을 추적하면 내가 있는 곳은 손쉽게 찾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무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하긴 딱히 날 좋아해서 만난 사람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나는 다른 방향의 고민에 둘러싸였다. 왜 하필이면 치킨집이지. 카드 명세서엔 어디서 카드를 결제했는지 가게 상호명이 찍힐 것이다. 그리고 원민준이 나를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아, 그런 카드가 있었지, 하고 카드 명세서를 확인해 보면 치킨집 상호명이 뜰 것 아닌가.

그럼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갑자기 사라진 그 오메가가 정말 치킨을 먹고 싶었구나? 그날따라 치킨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내 자신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치킨으로 기억될 거 아니야….”

나름대로 준 돈도 한 푼도 쓰지 않고 깔끔하게 돌려주고 나왔는데. 나는 원민준이 내게 그 카드를 주었다는 일도 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만일, 혹시 모르니 이 도시를 뜰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몸이 안 좋아졌다, 갑자기 두통도 다시 시작되고 배 속의 아기가 많이 묵직해지면서 허리가 아픈 날도 잦았다. 몸이 안 좋으니 병원 때문에라도 섣불리 이사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그 많던 식욕도 떨어졌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 주에는 카페일도 이틀이나 쉬었다. 토요일에는 손님이 많은 날이라 출근해야 했지만. 나는 창백한 낯으로 카페 일을 도왔다.

“서윤아. 저 차, 어제도 저쪽에 서 있지 않았어?”

“네?”

카페 테이블을 닦던 인철 형이 문득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인철 형이 가리키는 차를 보았다. 검은색의 특징 없는 국산 중형차였다.

“저게 여기 서 있는 걸 어제도 본 것 같은데… 착각인가?”

“어… 제가 가서 좀 내다보고 올까요?”

“아니야, 저쪽 주차해도 되는 곳인데 뭐…. 이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보지.”

나는 불안하게 밖을 살폈다. 그러다 손님들이 들이닥쳤고, 정신없이 일했다. 손님이 좀 빠지고 밖을 내다보니, 그 차는 없어져 있었다. 왠지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러갔다. 병원에서는 내게 안정을 취하길 권했다. 개중 컨디션이 좀 나은 날, 나는 눈을 비비고 세수를 했다. 아침으로 어젯밤에 썰어 놓은 과일과 플레인 요구르트와 바나나, 호밀 빵을 먹었다. 든든히 아침을 먹고 카페에 출근해, 곰돌이가 그려진 카페 앞치마를 입었다. 이 앞치마도 인철 형이 새 식구도 들어왔으니, 유니폼 삼자며 새로 맞춰 온 것이었다.

연갈색 앞치마에 주머니가 달린 디자인인데, 곰돌이가 앞주머니를 둘러싸고 헬로 하고 손을 흔드는 디자인이었다. 보면 볼수록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다. 애를 가지니 애가 되나 보다. 그러고 보니 아기용품을 하나도 못 샀다. 우리 아기도 곰 인형을 가져야 할 텐데.

“애기 신발을 사러 가야 하는데….”

“응? 너 아직 애기 신발 안 샀어?”

“애기 나오려면 아직 많이 기다려야 하는 걸요.”

“그래도 드라마 보면 임신하면 꼭 애기 신발부터 사던데.”

“그렇죠? 애기 신발은 귀엽기도 하고, 쉬는 날 백화점 가야겠어요.”

인철 형의 카페는 손님 많은 일요일에 쉰다. 그래서 주일이라 쉬시냐고, 기독교냐고 물어봤는데 그런 것이 아닌데도 쉰단다. 인철 형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태워다 줄까? 아니면 서인하 씨 부르던가.”

“서인하 씨가 왜 태워다 줘요… 형이 태워다 주시면 고마운데 너무 민폐라.”

“괜찮아. 이웃 좋다는 게 뭐냐.”

“형이 상사지, 이웃이에요.”

내가 세 들어 사는 원룸은 인철 소유의 건물이다. 그러므로 독신자인 인철이 같은 건물에 사는 건 당연했다.

“이웃 상사지, 이웃 상사. 친근하고 얼마나 좋아.”

이웃 상사라니, 사람에 따라 오싹할 만큼 무서운 단어였다. 그런데 그게 인철 형이라고 생각하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 형은 나한테 잘해 주는 편이니까.

“말 되네요.”

“그치.”

실없는 농담을 하며 나는 웃었다. 알록달록한 아기 신발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아기는 발도 손바닥 반만 하다고 하던데. 아니, 갓 태어나면 그것보다 더 작겠지? 남자애니까 첫 신발은 파랑으로 해야겠다.

인터넷으로 아기 신발 사진을 검색해 보니 예쁜 아기 신발이 가득 나왔다. 별 모양, 구름 모양, 로봇 모양.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나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기 나오면 정말 예쁘겠지.

“뭘 그렇게 신나서 봐?”

“이거 애기 신발이요. 예쁘지 않아요?”

“예쁘네. 야, 근데 애기 물건이 이렇게 비싸?”

“브랜드는 더 비싸대요.”

인철의 말에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물론 돈이 많은 건 아니니 비싼 육아용품이나 신발은 무리였지만, 그래도 첫 용품은 다 좋은 걸로 마련하면 좋을 텐데. 역시 백화점에 한번 가 봐야겠다.

“서윤아, 너 오늘 일찍 들어가라. 대신 부탁이 있는데, 현금 좀 ATM에 입금해 줄래? 은행을 못 갔더니 좀 쌓였네.”

“네, 제가 갈게요. 뭐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요즘은 거의 카드로 계산한다고 하지만 의외로 현금으로 계산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매일 은행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동안 모아 두면 가지고 있기 부담스러울 정도는 되었다.

특히 우리 가게는 단골이 많아서 현금 결제만 받는 커피 10잔 쿠폰, 이런 것도 팔고 있었다. 인철의 커피에 중독된 사람이 많은지 의외로 팔리는 편이다.

“돈 잃어버리지 말고.”

“네.”

인철의 가게에서 성실하게 일한 덕인지 아니면 형과 친해져서인지 나는 신뢰를 얻은 것 같다. 형이 현금 봉투를 바로 맡길 정도는 말이다. 봉투 안이 제법 차 있었다. 나는 앞치마를 벗고 코트를 입었다.

나는 머플러를 코까지 둘둘 둘러매고, 코트를 단추를 잠갔다. 두터운 더플코트로도 숨기지 못하는 내 배가 코트 위로 불룩한 곡선을 그렸다. 남자아이라서 그런지, 내 배는 비슷한 개월 수의 임산부들보다 한 달은 앞선 것처럼 불룩했다. 아니면 아기가 아빠를 닮아 장신으로 자라려고 그러나. 다른 아이보다 크게 태어나려나.

“춥다, 조심해서 다녀오고, 갔다 와서 할 일 없으면 다시 들러. 밤 라테 만들어 줄게.”

“네, 형.”

요즘 입맛이 없어서 음식을 잘 못 먹고 있었다. 그래도 인철 형이 계절 메뉴로 내놓은 밤 라테는 입에 잘 맞아서 요즘은 매일 달고 살았다. 나는 설핏 웃었다.

“근데 저 차 뭐야? 대박이다.”

“어? 네?”

인철 형이 저번에 자주 보인다는 중형차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차를 말하는 건가 싶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저거 저거 집 한 채 값인데, 대박. 야, 너 나가서 사진 좀 찍어 와라.”

“모르는 사람 차 사진을 어떻게 찍어요.”

말하자마자 나는 가슴이 덜컹 떨어졌다. 며칠 전 인철 형이 실수로 민준의 카드를 긁은 일이 생각났다.

나는, 조심스레 유리문 앞으로 갔다. 차를 확인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처음 보는 블랙 컬러의 벤틀리였다. 그의 차가 아니었다. 원민준의 차는 다른 종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를 만난 내내 그 차를 타고 다녔으니까. 물론 둘 다 집 한 채 값이라는 건 비슷하겠지만.

굳이 그 사람이 여기까지 쫓아오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배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돈 봉투도 잊지 않고 챙겼다.

“형 저 다녀올게요.”

“차 조심하고.”

“형 저 애 아닌데.”

“홑몸 아니니 조심하라는 거지.”

“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한 번 더 웃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섰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 입김이 나오는 날씨였다. 벤틀리는 카페 앞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런 데 차 세우면 견인되는 거 아닌가. 비싼 차인데… 견인차가 긴장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차 문이 열렸다.

“서윤 씨.”

처음엔 내가 환상을 보고 있나 했다.

원민준이었다. 그 사람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

나는 너무 당황해서 뒷걸음질 쳤다. 왜 여기까지 쫓아온 거지? 혹시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아서…? 나도 모르게 배를 감싸 안았다. 원민준의 눈이 자연스럽게 내 배로 따라 내려왔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다. 그러나 퍽 야윈 듯 보였고 수려한 얼굴에 피로한 빛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인상이 조금 날카로워져 있었다. 물론 여전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의 미남이었다.

문득 나는 내가 손가락까지 살이 오른 임부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 아이….”

그가 내 배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제 아이죠? 들었습니다.”

“…뭘요?”

나는 경계하며 작게 대답했다. 누구에게 뭘 들었단 말인가. 그가 긴 다리로 내게 성큼 다가왔다. 나는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돈 봉투가 툭 떨어졌다. 인철이 준 카페의 매상이었다.

나는 민준을 보았다가 바닥을 보았다. 나는 이제 몸을 굽힐 때 배를 안아야 할 정도로 배가 부풀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몸을 숙였다. 돈만 주워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카페로 들어가자, 누구한테 뭘 들었는지 모르지만, 이 사람 아이가 아니라고 우기자. 나는 패닉에 빠져 생각했다.

내가 힘겹게 몸을 숙이는 걸 보고 원민준이 몸을 굽혔다. 그가 먼저 봉투를 짚자 내 엄지와 그의 손이 스쳤다. 그것만으로 나는 불에 덴 듯 놀라 손을 뗐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나는 새파랗게 질려 말했다.

“그쪽 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민준이 봉투를 쥔 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퍽 야윈 그의 얼굴 때문일까, 그 사람의 눈빛이 일렁이는 것이, 묘하게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나를 정부로 취급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에 상처받은 척할 건 뭔가.

한편으론 그를 다시 보자 마음이 뛰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가 내게 봉투를 내밀었고 나는 그걸 잡자마자 뒤돌아 뛰었다. 사색이 되어 들어온 나를 보고 인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누가 쫓아와?”

“형, 저 여기 없다고 해 주세요. 누가 물어봐도, 꼭 그래 주셔야 해요.”

나는 인철을 잡고 당부했다. 인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인철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마자 나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쪽에는 원룸의 계단으로 통하는 뒷문이 있었다.

배를 끌어안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내 집 안으로 들어가, 나는 현관문을 꼭꼭 잠근다. 체인을 걸고 모든 록을 잠그고 나서야 나는 안심했다. 어쩌지? 시우에게 전화해 볼까? 시우가 준 핸드폰이 어디 있더라.

나는 허둥지둥하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우는 원민준이 얽힌 일은 자기 집안에서도 크게 힘을 쓸 수 없다고 말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은 없다.

우리가 만나고 있을 때 원민준이 내게 작성하도록 한 계약서가 생각났다. 생활비 지원, 집 지원, 차 지원 등의 내용이 있는 그것은 스폰서 계약서였다. 거기엔 결혼 요구 금지, 임신 금지 서약 내용도 있었다.

만일 계약을 어기면 손해 배상을 하기로 했었나, 그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피임약을 먹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약속을 어겼다. 그를 속이고 피임약을 먹지 않았다.

“아기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

민준은 내게 우성 알파 자식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래서 열성이라 불임일 가능성이 높은 나와는 결혼할 수 없다고…. 내 배에 있는 아이는 그에게 필요 없는 아이일 텐데. 혹시 상속 문제라도 생길 것 같아서 그런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내가 의도적으로 돈을 노리고 가진 아이라고 오해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오해를 받기 싫어서, 나는 원민준의 곁을 떠나올 때 그에게 받은 지폐 한 장까지도 모두 돌려주고 왔다. 더럭 겁이 났다.

괜찮아. 이제 와서는 이 사람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애써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미 아이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안정기까지 도망쳐 있겠다는 나의 목적은 이루어진 셈이다. 지금 아이를 건드리면 산모도 위험하다. 그런 상태에서 강제로 어떻게 하려고 한다거나, 그 정도로 나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원민준을 보니 아직도 가슴이 아팠다. 이전의 내 짝사랑들은 그렇지 않았다. 끝나고 난 후에도 항상 좋은 감정만 남았다, 연희도, 진우 형도,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반장도, 모두 웃으면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아니다. 나는 그가 내 눈앞에서 없어졌으면 했다. 원민준이 내 눈앞에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으면 했다. 왜냐면 그게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차라리 이 모든 마음이 후회나 미움으로 바뀌면 좋겠다. 나는 그가 포기하고 돌아가기를 기도하며 커튼마저 모두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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