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왔다.
두어 시간 정도, 불편한 잠을 잤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굳게 닫힌 연하늘색 커튼이 지는 저녁노을 빛으로 희미하게 물들고 있었다. 잠시 자다가 울었는지 내 눈가는 축축했다. 나는 거울을 보고 부은 눈을 한 번 문질렀다. 그리고 조심스레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원민준의 차는 아직 거기, 그대로 서 있다.
아직 돌아가지 않았나 보다. 어쩌지.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저기 버티고 있으면 언제든 한 번은 만나야 할 것이다.
누구의 아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통하기나 할까. 나는 늘 원민준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했었다.
나는 새삼 내 입장을 생각했다. 만일 사실대로 털어놓는다고 해도, 인정할지 말지는 민준이 결정할 일이었다.
그가 아니라고 하면 나는 절대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그의 아이가 아니라고 우겨 봐도 원하면 언제든 민준은 아이를 빼앗을 수 있다.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싫어도 한 번은 대화를 해야 할 거다. 아이에 대해….
“이러면 애한테도 안 좋을 텐데.”
그 사람과 스치는 것만으로 마음이 이렇게 아프다. 산모의 마음이 심란하면 아기에게 다 전해진다고 하던데. 그를 떠나오기 전, 나는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었다.
내게는 절절한 첫 고백이었다. 모든 것을 다 걸고 낸 마지막 용기였다. 항상 혼자 좋아하는 감정에 만족했던 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짝사랑을 직면했다. 그때 민준은 내게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에게 내 마음은 통하지 않았다.
그때 민준은 내게, 몇 년만 기다릴 수 없겠냐고 말했었다. 그와 헤어지고 시간이 좀 지난 후, 나는 종종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그 몇 년은 무슨 뜻이었을까. 나를 붙잡고 꼼짝 못 하게 할 몇 년? 아니면, 몇 년 만나면 내게 질릴 테니 상관없다는 뜻이었을까.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 찬 듯 뿌옇게 변했다.
왜 지금 찾아온 걸까. 만일 내가 그의 신용 카드를 쓴 것 때문에 내가 있는 곳을 알았으면 연락이 와도 바로 왔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임신한 걸 누가 알린 걸까. 시우와 연희는 절대 입을 열 사람들이 아니었다. 시우가 말했다. 원민준이 연희를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고. 혹시 연희를 다그쳐 알아내기라도 했나? 연희가 성깔이 없는 편이 아니라 쉽게 당할 여자는 아닌데…. 나는 갑자기 여러 가지 걱정이 들었다. 연희에게 해코지를 한 건 아니겠지.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현관문으로 다가가 외시경으로 밖을 보았다.
원민준이었다. 내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서윤 씨, 잠깐만 이야기 좀 해요.”
그가 내가 철문 너머에 있는 것을 아는지, 나직하게 말했다. 복도에 미성인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가 통통, 문을 다시 두 번 두드렸다. 나는 체인을 건 채 문을 열었다.
“저는… 할 이야기 없어요.”
“서윤 씨.”
그가 내가 닫으려는 문을 잡았다. 이성적으로 한 번은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지금 당장은 그를 피하고 싶었다. 원민준이 내 아이를 빼앗으러 달려온 건 아닐까 무서웠다. 내가 떳떳하지 못한 입장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얼굴 좀 보여 주세요.”
민준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나를 항상 따르게 하는 힘. 가슴속을 울리는 것 같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민준이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생김새를 하나하나 확인하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묘하게 애가 타는 시선. 그 시선을 받는 나의 배 속이 뜨거워졌다. 나는 현관에서 비켜섰다.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니까, 그래서 문 열어 드린 것뿐이에요. 복도가 시끄러워지니까.”
나는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작게 말했다.
“집에 잠깐 들어가도 되나요.”
민준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좁은 현관에서 어색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민준이 내 배를 내려다본다.
“몇 개월째예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정기는 한참 전에 넘었어요.”
곧 작게 대답했다. 아이를 떼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원민준이 이마를 쓸었다.
“돌아가 주세요. 계속 밑에서 기다리시면 민폐예요.”
이전의 나라면 원민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내심 내뱉어 놓고 마음 한구석은 원민준의 눈치를 보고 있다. 나는 아직 그가 무섭다.
“내 아이인 것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잠깐이라도 괜찮으니 우리 이야기 좀 해요.”
“원민준 씨 아이 아니에요. 우리 각서도 썼잖아요, 당신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민준이 내게 쓰게 한 계약서에 임신 금지 서약이나 피임약 복용에 대한 내용이 들어간 이유는 나도 안다. 이런 일이 생겨도 친권을 인정받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런 계약서를 먼저 쓰게 한 건 이 사람이었다. 나도 네 당신 애 맞아요, 하고 순순히 말하고 싶지는 않다. 뻔한 거짓말이라는 건 나도 안다. 날 임신 시킬 수 있는 건 우성 알파뿐이고, 내 주변에 유일한 우성 알파는 민준뿐이었으니.
“우리가 사귄 것도 아니고, 제가 지금 원민준 씨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니고…. 우리 아무 관계 아니었어요.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시는 거… 이상해요. 저는 당신하고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갑자기 찾아오시고 하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요? 하루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 할 말입니까?”
민준이 손을 뻗어 내 팔을 꽉 잡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제가 여기 당신을 들인 건, 연희나 시우를 다그치지 말라고 말씀드리려고 한 거예요. 제 아이는 당신하고 상관없는 아이니까.”
“…….”
“모른 척해 주세요. 저도 앞으로, 당신 눈에 안 띄고 살게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더 이상 이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과 공포가 천천히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공허한 미움이 나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아직도 민준의 얼굴만 봐도 내 감정은 날뛴다. 감정을 꽤 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아직 내 질척한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서윤 씨.”
원민준이 내 팔을 놓았다. 나는 흠칫했다. 민준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손에 녹는 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서인하 씨가 나를 만졌을 때와는 다른 감촉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
나는 숨을 삼켰다. 눈을 감자 오래 참고 있던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정말 원민준 씨 아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매일 서윤 씨 생각을 했어요. 내 아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
불현듯 내 입 안에서 단어가 춤을 췄다. 입에 오래 물고 있으면 불에 델 것 같은 뜨거운 말들이었다. 나는 겨우 참고 목구멍으로 말들을 삼켰다.
이 사람은 내가 자기 몰래 임신한 걸 알고 하는 말일까. 내가 몰래 피임약을 버린 것. 그것조차 알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임신한 것이 사고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마음대로 다루기 위한 감언이설일까. 이미 한 번 내게 거짓말을 했던 사람이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이미 서연희에 대한 내 마음을 이용했던 사람이다. 내 약점을 잡은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에게 다시 향하려 하는 내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왜 이제야 그런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어요.”
“…….”
“제 배 속 아이는, 정말 당신 아이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고 태교도 하고, 배 속 애기도 돌본 거예요. 내연 관계의 결과로 생긴 아이라고 생각했다면, 모성이 생기진 않았을 거예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사귀는 사이도 무엇도 아니었으니까.”
“…….”
“필요한 서류가 있다면 뭐든지 작성할게요. 얼마든지 사인할게요. 당신 아이 아니라는 거 믿어 주신다면요. 그리고 돈을 요구하지도 않을 거예요. 절 믿으시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러니까 돌아가 주세요. 오늘은 더 보고 싶지 않아요.”
그가 낮은 숨을 쉬었다. 마음속 깊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내뱉는 듯한 한숨이었다. 그가 피곤한 눈빛으로 나를 잠시 보았다가 시선을 뗐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또 도망가지만 말아 주세요. 여기 얌전히 있어요.”
“…….”
“…또 올 테니까 일단 쉬어요.”
거기서 차마 다시는 오지 마세요, 라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가 몸을 돌려 나갔다. 현관문이 철컹,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안도했다.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왜 이전의 좋았던 기억이 나는 걸까, 예전에 민준과 현관에서 한데 어울려 엉켰던 기억이 났다. 그가 내 손을 어루만졌던 기억이 났다. 그가 내 이마에 키스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건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
“그 사람 누구였냐.”
“누구요?”
“그 5억짜리 벤츠남.”
“그거 벤츠가 아니라 벤틀리인데.”
“요즘은 돈 많은 남자 보고 벤츠라고 하지 않나?”
“아뇨, 그건 돈도 많고 착하고 멋진 남자 보고 하는 말이고요.”
나는 테이블을 닦다가 인철을 보았다. 벤츠가 뭐야, 사람을 정부로 만들었던 사람이다. 그래도 인철 형과 만담을 하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요 이틀 내내 나는 우울했었다.
“너 그 사람 다녀가고 울었지? 그 남자 뭐야? 뭐길래 네가 다음 날 눈이 퉁퉁 부어서 나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예전에 알던 사람.”
“그냥 아는 사람이 널 그렇게 절절하게 봐? 야, 그 남자 진짜 잘생겼더라. 무슨 너를 보는 눈빛이… 현대판 로미오던데. 너… 혹시….”
“뭐요?”
“그 사람 돈 떼먹었니?”
“아, 진짜.”
인철 형의 아저씨 개그는 가끔 감당하기 힘들다, 인철 형이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하지 않고 자영업을 해서 그런가 보다.
나를 절절하게 보다니, 뭐가 그리 아쉬워서. 막상 내가 떠나니 내가 조금은 좋아졌나? 그러면 뭐 하나, 이미 한 번 나를 그렇게 취급했던 사람인데….
내가 좀 좋아졌다고, 나를 보고 싶어 했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하루아침에 나와 그의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그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돈을 떼먹긴요, 한 푼 한 푼 다 돌려줬는데.”
“헤어질 때?”
“네, 뭐.”
대답하고 나는 내가 유도 심문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형이 은근히 말발이 좀 있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놓았다. 그러고 보니 원민준과 만날 때 차도 받았었고, 또 오피스텔 월세도 그 사람이 내 줬는데.
관계를 아주 깔끔히 정리하려면 오피스텔 월세도 다 돌려줘야 하는 건가. 나는 내가 지금 가진 돈을 떠올렸다. 어차피 원민준에게 여기 있는 거 들킨 거, 이젠 통장 거래도 편하게 해야겠다.
다음번에 오겠지, 내가 조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긴 했지만, 또 온다고 했으니까….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자꾸 신경이 쓰였다. 버튼이 있다면 눌러서 그런 생각들을 멈추고 싶을 정도다.
“그 사람이 혹시 애기 아빠…?”
“…몰라요.”
나는 인철 형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걸레질만 열심히 했다. 요 며칠 식사를 못 했는데 원민준이 다녀가고 갑자기 식욕이 폭발했다. 우울함과 식욕이 별개로 움직일 때도 있나 보다.
“형, 점심에 피자 시켜 먹을까요?”
“어? 그래. 이제 속 메슥거리는 건 괜찮아?”
“네,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딸랑, 하면서 가게 문 열리는 종소리가 났다. 나는 얼른 걸레질을 하다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 인철 형이 입이 딱 벌어져 지금 들어온 사람을 보고 있었다. 왜냐면 들어온 손님이 엄청난 미녀였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쇼트커트 헤어에, 새하얗고 조그만 얼굴을 커다란 선글라스로 가린 여자였다. 단정한 얼굴 윤곽. 선글라스 너머로도 미모가 짐작된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몸매가 아주 날씬한 중키였다. 그녀가 경쾌한 굽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다가올수록 나는 그녀가 낯익다고 생각했다. 화악, 하고 달콤한 꽃 내음 같은 것이 카페에 가득 찼다. 여자는 우성 오메가였다. 이렇게 달고 진한 향을 가진 오메가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 같은 오메가라도 나와는 페로몬의 농도가 차원이 달랐다. 그녀가 내 앞에 다가와 선글라스를 벗고 생긋 웃었다.
연예인 윤신아였다. TV보다 실물이 훨씬 예뻤다.
트레이드마크이던 긴 머리가 싹둑 잘려서 바로 못 알아봤다. 왜 이런 동네 카페에 연예인이…. 그녀는 놀란 나와 인철 형의 표정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도톰한 핑크색 입술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우리 직접 보는 건 처음이죠?”
윤신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았던 여배우 윤신아, 우성 오메가에 원민준 이사와 스캔들이 있었던 사람. 그리고 서연희의 말에 따르면, 원민준 이사의 예전 약혼녀. 그녀가 나를 잘 아는 것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저를 아세요?”
며칠 전엔 귀여워서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던 곰돌이 앞치마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괜히 움츠러들었다. 살며시 걸레를 쥔 손을 내렸다.
“네, 우리 민준 오빠 애인이셨다고.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녀가 카페를 한 번 둘러보더니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요즘 이 근처에 자주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중형차가 있었다.
“감시자가 있어서 대화는 오래 못하겠네. 저랑 차 한잔해요. 바쁘세요?”
윤신아가 나를 보고, 내 손에 들린 걸레를 보다가 빙긋 웃었다. 당장 CF 안에 박제해야 할 것 같은 상쾌한 미소였다.
인철 형이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 건 처음 봤다. 인철 형은 윤신아가 주문한 콜롬비아 수프리시모산 원두 드립 커피를 온갖 정성을 다해 내린 다음 윤신아의 앞으로 서빙했다.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인철 형이 일벌처럼 충성스럽게 말했다. 윤신아는 상큼한 미소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인철 형의 표정이 뽕 맞은 것처럼 풀리는 걸 나는 조금 어이없게 보았다. 나는 내 앞의 물방울 맺힌 물 잔을 손으로 쥐었다. 아까부터 손에 땀이 밴다.
“뭐 좀 마시시지, 저 맘 불편하게.”
“아니에요, 아까 마셨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윤신아가 턱을 괴더니 찬찬히 눈동자를 굴려 내 얼굴을 훑어보았다.
“되게 생각한 거랑은 다른 스타일이시네요?”
“네?”
“민준 오빠요, 제 얼굴이 별로래요,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나 태어나서 그런 말 처음 들었거든. 자기 취향 아니라고, 그래서 민준 오빠 취향이 바뀌었나 해서 봤어요. 막 나보다 더 화려하고 예쁜 여자 만날 줄 알았거든. 그 재수 없는 새끼 엄청 도도하잖아.”
“…….”
내 표정을 보던 윤신아가 다시 낯을 바꾸어서 싱긋 웃었다.
“그건 그렇고, 원민준이 자기랑 할 때도 도구 쓰고 그랬어요? 그 오빠 그런 거 환장하잖아.”
“네…?”
“그 사람 취향 특이한 거 몰랐어요? 그냥 평범한 섹스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원민준은 윤신아와 잘 때도 그런 걸 했던 걸까?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를…. 묶거나 때리거나, 조교를 하거나. 장기적으로 그런 관계를 가진 건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었는데.
또, 거짓말을 했던 걸까.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뭐지, 내가 왜 지금 불쾌감을 느끼는 건지. 그와 ‘그런’ 관계를 가진 오메가가 내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이라도 했나, 이제 나와 상관없는 사람인데….
“내가 먼저였거든요, 그 사람이랑. 그래도 우리 죽고 못 살았는데.”
윤신아가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휘휘 젓다가 내 표정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오빠가… 그 방면으로 진짜 사람 미치게 하잖아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녀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아, 나는 저 표정을 알고 있다. 그에게 가학당할 때, 내가 저런 표정을 지었을 것 같다. 몽롱하고 압도된 표정. 그녀의 얼굴에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기색을 나는 읽었다.
“우리 정말 좋았죠, 성 취향도 맞는 데다가, 집안 레벨도 비슷하고, 민준 오빠네 부모님도 나 좋아하고, 내가 우성 오메가라서요. 정말 좋았어요, 그런 남자가 내 인생의 마스터키(Master Key)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녀는 은유적으로 말했지만 나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윤신아는 원민준과 단순한 약혼자와 약혼녀 사이가 아니었다는 걸. 그 둘은 나와 민준이 그랬던 것처럼, SM 관계. 주종 관계였다….
“그쪽도 속았죠? 결혼해 줄 것처럼. 그거 그 사람 패턴이에요. 그러다 선 긋고, 매몰차게 대하고, 사람 병신 만들고.”
“…….”
“왜 표정이 그래? 우리 비슷한 처지였잖아, 다른 건 딱 하나. 당신은 아이를 가질 수 있었고, 나는 그 새끼가 시키는 대로 몸 사리면서 피임약 먹다가 실패했다는 거고. 그 사람 당신 쫓아다니고 하지 않아요? 얼마나 놀랐겠어, 그 집안 재산이 얼마나 많은데, 혼외 자식 볼까 봐 눈에 보이는 게 없을걸요?”
내 마음의 불안한 곳을 들쑤시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요동쳤다. 확실히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불현듯 이틀 전, 카페 앞에서 나를 바라보던 민준의 눈빛을 떠올렸다. 갈구하는 눈동자, 늘 그가 나를 보던 눈. 그 눈으로 윤신아도 봤을까.
“그 사람이랑 하는 플레이, 정석적이고 다정해서 좋았거든요.”
가슴이 욱씬, 하고 아팠다.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민준 씨 험담하러 여기 오신 거예요?”
윤신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윤신아가 손톱마다 빨간색으로 빼곡히 칠한 손을 내밀어 보여 주었다.
“있잖아요, 그 사람이 빨간 손톱을 좋아했어요.”
“…그래서요?”
“그래서 제게 늘 빨간 손톱만 하게 했죠. 그리고 제 일상의 모든 것을 체크했고요.”
“그만하세요.”
원민준과 내가 만날 때 민준은 매일 밤 전화해 나의 일상을 보고하게 했다. 그리고 그 소소한 일들을 진지하게 들어 주었고, 또… 가끔은 다정한 말도 해 주었다.
그것이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 행위였다니. 윤신아와도 똑같은 행위를 했던 걸까.
내가 특별할 거라고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상처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진심으로 불쾌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원민준과는 끝난 사이다. 민준이 멋대로 찾아온다고 해도 변할 건 없다.
“저 그 사람이랑 끝냈어요. 그리고 앞으로 볼일 없이 살 거고요. 왜 이렇게 몰려와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원 이사님이 당신 배 속의 아기 그냥 둘 것 같아요? 그 집 혼외 자식 같은 거 용인하는 분위기 아니에요.”
“…그쪽하고 상관없잖아요.”
“상관있지, 왜 없어요, 저도 그 사람한테 겪은 일이 있는데.”
윤신아가 빨간 손톱이 얹어진 손가락을 내 손등 위에 올렸다.
“제가 도와줄게요. 도망갈 수 있게. 그 사람 이 애 그냥 안 둬요. 없애기 늦었으면 빼앗아서 자기 통제 아래 두려고 할걸요. 알잖아요, 그 사람 Control Freak인 거. 여기 들킨 이상 빨리 다른 곳으로 뜨는 게 좋을 걸요?”
“저를 왜 도와주시는데요?”
“저 그 오빠 진짜 사랑했거든요, 천생연분이고, 내 목숨을 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버림받았죠, 당신처럼. 그래서 도와주려고, 그 사람 엿 좀 먹여 보려고.”
흠 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동굴을 본 것 같았다.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은, 깊은 구멍 같은 것.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생각해 볼게요. 아마 도움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생각해 봐요. 여기 내 직통 번호 줄게요.”
그녀가 메모지에 적힌 전화번호 하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문득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감시자가 있다는 윤신아의 말.
“그런데 감시자가 있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저기 밖에 차, 딱 보니 사설탐정인데? 몰랐어요?”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얼마 전부터 자주 보인다고 인철 형이 말한 검은색 국산 중형차였다. 그 차가 나타난 날이 언제였더라. 인철 형의 실수로 원민준의 카드를 사용해 버린 날이다. 민준은 내 소재를 알자마자 감시인을 붙인 것이다. 등골이 서늘했다.
“진짜 몰랐나 보다, 자기 큰일이네. 그래서 그 무서운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래.”
윤신아가 혀를 찼다. 그녀가 H 브랜드의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각상처럼 매끈하고 날씬한 유선형 몸이 드러났다. 확실히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훨씬 더… 묶거나 사랑해 주고 싶다든가 하는 마음이 들었겠지….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조만간 또 봐요.”
그녀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리고 나는 인철 형이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검정색 차량의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은 선팅되어 있었다. 차 안의 사람은 내가 창문을 두드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한참을 모른 척했다. 나는 창문을 주먹으로 세게 탕 쳤다. 그제야 창문이 못 이기는 척 열렸다.
“진정하세요.”
창문이 열리고 드러난 얼굴은 평범했다. 3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원민준 씨가 시켜서 저 감시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의뢰자분들에 대한 건 기밀 유지가 있어서요. 진정하세요, 손 다치시기라도 하면….”
“지금 저를 감시하시면서 기밀 유지라고요? 원민준 씨한테 전하세요. 이런 짓 하면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다시 제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요.”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이 남자도 배가 잔뜩 부푼 임산부가 이러니 뭐가 잘못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자기가 덤터기를 쓰긴 싫겠지.
“저, 그게 제가 받은 명령은 감시가 아니라 보호입니다.”
“당장 가 주세요. 안 그러면 영업 방해로 경찰 부를 거예요.”
태어나서 잘 모르는 타인에게 그렇게 쏘아붙인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소리 질러서 아기가 놀라지 않았을까. 나는 배를 움켜쥐었다. 날은 추운데 이마에서 땀이 났다. 우습게도 그 사설탐정이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그의 부축을 받아 카페로 돌아와 겨우 의자에 앉았다.
“저, 정말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전 괜찮고, 됐으니까 저희 카페 감시하지 말고 얼른 가세요. 제가 그러라고 했다고 원민준 씨한테 꼭 전해 주시고요.”
사설탐정은 마지못해 카페를 나갔다. 나는 유리문을 통해 그가 차에 시동을 거는 것을 보았다. 차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안심하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혼외 자식을 보느니 빼앗아서 자기 통제에 둘 사람이다-, 라고 윤신아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다음번에 민준을 만나면 당신 같은 사람에게 아이를 줄 생각 없다고 쏘아붙여 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너 괜찮아?”
“네….”
인철 형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인철 형이 만들어 준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나서야 조금 진정했다. 인철 형은 퇴근하고 올라가서 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기분으로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카페에 남아 간간이 일을 도와주며 멍하니 오후를 보냈다.
“흠.”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드니, 가게 뒷정리를 마친 인철 형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아, 형, 죄송해요. 남은 설거지 제가 할게요.”
“아냐 아냐, 너 근무 시간도 아닌데. 그보다… 좀 진정했어?”
“네….”
“나 너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다. 너 화도 내고 그러는구나.”
“저도 그래 본 것 처음이에요.”
나는 늘 어렸을 때부터 순하다, 얌전하다는 말만 들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더 착한 아이로 있어야 했다. 고아란 조금만 무엇을 잘못해도 역시 그렇지, 라고 사람들이 흰 눈을 뜨는 존재니까.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만큼 무언가를 바라거나 욕망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항상 착한 아이여야 하니까. 그래서 원민준 이사와 하는 SM 플레이 같은 것, 그것이 좋았었다. 그 사람은 내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착한 아이인 척하려는 내 본성을 그는 눈치챘다. 원민준이 내 본성을 다그치고 또 반대로 칭찬할 때 나는 그가 나를 긍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빠졌었던 것 같다.
“흠, 너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네?”
“여배우 윤신아에게서 알파 남자를 빼앗다니…. 형 널 다시 봤다. 거기다 그 남자가 아직도 너 쫓아다니고.”
“아, 형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사람 저랑 아무 상관도 없어요.”
한참 진지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인철이 뜬금없이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빼앗긴 누굴 빼앗아. 윤신아 같은 여자랑 사귈 수 있는데도 나를 억지 춘향으로 건드렸던 원민준이 이상한 거지.
“그래도 그 남자가 애 아빠 아니야?”
“…눈치챘어요?”
“그걸 어떻게 눈치 못 채. 그 남자가 너 임신한 거 알고도 모른 척했어? 이제 와 쫓아다니고 그런 거야?”
“그건 아니고요….”
그 말에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사실 원민준을 속이고 임신한 건 나니까.
“그냥… 그 사람은 내가 임신한 것도 몰랐는데, 집이 좀 부자라 그런지 내가 가진 애기가 불안한가 봐요. 그게 다예요.”
“그래도 너한테 마음 남은 것 같은데… 한번 이야기라도 해 봐.”
“할 이야기 없어요. 그 사람 좋은 남자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밤중에 갑자기 멜론 맛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과일도 먹고 싶었는데, 냉장고를 열어 보니 마침 다 떨어졌다.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옷을 챙겨 입었다.
“우리 애기가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대신 사다 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아니니까… 한밤중에 갑자기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직접 사러 나가야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귀찮음과 식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난 한 번도 우리 아기를 이긴 적이 없다. 아기가 먹고 싶다면 사 줘야지. 뻔질나게 편의점을 드나든 탓에 편의점 직원이 나를 알아볼 정도였다.
편의점에도 과일을 팔긴 하니, 우선 바나나라도 사 먹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섰는데 집 앞에 낯선 벤틀리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원민준의 새 차였다. 오늘 윤신아가 들렀다는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내가 사설탐정을 쫓아낸 일을 듣고 바로 달려온 걸까.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았다. 피할까 하다가 나는 용기를 내 차 앞으로 걸어갔다. 창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차 문이 열렸다.
“…많이 한가해지셨나 봐요.”
나는 작게 말했다. 오늘 윤신아가 다녀간 뒤로 원민준에 대한 마음이 더 곱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내가 좋아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직접 보니 마음이 약해지긴 했다. 나는 독하게 마음을 먹으려 노력했다.
“…이야기 들었어요. 윤신아 왔었단 이야기도.”
“여기 계속 계셨던 거예요?”
“네, 갑자기 집에 찾아가면 놀랄까 봐.”
그래도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마음이 다시 약해지려는 걸 다잡았다. 저 천사 같은 얼굴에 속지 말자. 무서운 사람이고, 잔인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안다.
“어디 가요, 내 차로 가요.”
“됐어요, 그냥 편의점이니까.”
“…뭐 먹고 싶어서 사러 나온 거예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다 줄게요. 뭐 먹고 싶어요?”
“됐어요, 왜 제가 먹을 걸 사다 주세요.”
우리가 만날 때, 민준은 평소에 다정했다. 내게 먹을 걸 사다 주거나 내 생활을 돌봐 주거나… 같이 밤을 지내면 아침도 꼭 직접 차려 줬었다. 비록 스폰서에 정부 관계였지만…. 그러나 그건 우리 관계가 건재할 때의 일이었다.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게 제 의무잖아요. 내 아이니까.”
원민준은 퍽 인내심을 발휘했다. 평소라면 바로 그에게 벌을 받고도 남을 행동만 하고 있는 나였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 올라오세요, 말씀드릴 게 있어요.”
나는 앞장서서 내 집으로 올라갔다. 윤신아가 다시 찾아오는 것도 싫었고, 사설탐정이 나를 감시하는 것도 싫었다. 나는 그와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해야 한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와 원민준에게 줄 차를 준비했다.
“집에 카페인이 없는 차밖에 없어요, 괜찮으세요?”
“됐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뭐 하지 마세요. 그냥 잠깐 이야기나 해요.”
민준이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배려에 다시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만큼 마음을 다잡고 있는 것도 떨어진 동안 마음을 많이 정리한 덕택이다.
“제가 마시려고요. 그럼 그냥 저 마시는 거 준비할게요.”
원민준은 내가 차를 타는 사이 집 안 곳곳을 구경했다. 그는 이 집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보기엔 월세에 비해 좋은 곳인데. 분리형 구조에 평수도 혼자 살기에 널찍했다.
그러나 민준의 눈에는 고시원 쪽방촌보다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허브차 두 잔을 준비했다. 입주 옵션인 테이블에 그와 나는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윤신아가 다녀갔다면서요, 무슨 해코지하지는 않았고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원민준 씨랑 사귀었었다는 이야기는 하더라고요.”
원민준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 여자 정신병자니까 가까이하지 마세요. 또 여기 오면 나한테 전화하고.”
원민준의 그 말투는 이전에 나를 대하던 말투와 비슷했다. 나는 순간 착각을 일으킬 뻔했다. 여기가 서울이고, 여기가 그가 마련해 준 오피스텔 안인 것 같은 착각. 나는 물끄러미 민준을 보았다.
“이번 일 다 정리하시고 나면, 다음 상대에게 저에 대해 그렇게 말하실 거예요?”
적어도 윤신아는 민준에게 미련이 그득해 보였다. 원민준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그 여자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넘어가지 마세요. 위험한 여자니까 조심하고.”
적어도 나한텐 윤신아보다 원민준이 훨씬 더 위험한 사람인 것이 자명했다. 나는 민준과 더 대화를 하는 것이 싫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한 서류를 찾았다. 그리고 민준에게 내밀었다. 오늘 윤신아가 다녀가고 나서 카페의 프린터를 빌려서 출력한 것이었다. 요즘은 각종 계약서, 서약서 양식이 인터넷에 돌아다녀 편했다. 이전부터 생각하던 것이었다.
“혹시 걱정하실까 봐 준비했어요. 양육비 포기 각서에요.”
“…….”
원민준의 낯이 싸늘해졌다. 나는 항상 남이 내 앞에서 찌푸리거나 싫은 티를 내면 과도하게 눈치를 보았었다. 특히 그 상대가 원민준이라면 더욱 그랬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슬쩍 눈을 피했다.
“이게 뭐죠?”
“저번에 원민준 씨 아이 아니라고 한 건 죄송해요. 일단 원민준 씨와 만날 때 생긴 아이는 맞아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당신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원민준 씨 같은 분에게 혼외 자식은 민감한 문제일 거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제가 돈 가지고 귀찮게 굴 일은 없을 거란 뜻이에요.”
“…….”
“계약서 같은 거 중요하게 생각하시잖아요. 이거 말고 상속 포기에 대한 각서도 쓸게요. 친권 소송 안 하겠다는 각서 같은 것도 있다고 들었어요. 일단 이거 받으시고 그것도 다 서명할게요. 제가 요구하는 건 이제 서로…. 볼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저 감시하고 그러지 마세요.”
“하….”
원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지금 내 오메가, 그리고 그 오메가가 낳을 내 애가 이런 데서 사는 걸 두고 보라고요, 두 눈 뜨고 양육권까지 포기하고요.”
“아이 원하지 않으셨던 거 알아요. 물론, 당신 말 듣지 않고 내가 조심하지 않은 건 맞아요. 아이 가진 것에 대해 말 안 한 것도….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래서요.”
“저는 당신 오메가도 아니고, 또….”
“…….”
“원민준 씨도 저 속였잖아요.”
기분이 진정되지 않아 나는 숨을 한 번 쉬었다. 침착해야 했다. 윤신아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너 그래서 그 무서운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래’ 그런 말이었다. 예전엔 원민준을 마주 보는 것도 무서워하던 나였었다.
“연희랑 진짜 사귄 것도 아니면서 우리 관계를 다 이야기하겠다고, 그렇게 저 협박해서 스폰서 계약서까지 쓰게 만드셨잖아요. 제가 임신하거나 결혼하자고 매달릴까 봐 그러셨던 것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신경 쓰실 일 없게 이번에도 어떤 계약서든 사인해 드릴게요. 물론 우리 둘이 가졌던 관계는 저도 싫지만은 않았으니까 그건 그냥 됐어요.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전 다 잊었어요. 그러니까 저랑 배 속 아기 그냥 놔둬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서윤 씨.”
“연희를 짝사랑한다고 하다 이제 당신이 좋다고 매달리는 저 보고 속으로 재미있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절 그렇게 취급하신 거겠죠, 그것도 사과 안 하셔도 돼요, 이젠 그 감정도 다 잊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이서윤 씨.”
겨우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다 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원민준의 눈을 피했다.
“서윤 씨.”
“…….”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과하고 싶어요.”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뭘… 사과하신다는 건데요?”
“조금 더 빨리 이서윤 씨에게 청혼할 생각하지 않은 거요.”
“…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멍하니 그를 보았다. 원민준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 서윤 씨가 회사로 찾아왔다가 사라진 날 저녁. 오피스텔로 찾아갔었습니다. 서윤 씨에게 결혼하자고 말하려고요.”
“저랑… 요?”
거짓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건 그가 이 상황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아주 희미한 희망이 마음속에서 멋대로 움텄다.
“서윤 씨 말이 맞습니다. 처음엔, 서윤 씨를 마음대로 다루려고 했습니다. 서연희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적당히 살다가 헤어지고, 그때까지 이서윤 씨를 정부로 두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 때문에요?”
그는 내게 우성 알파 아이가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내가 그에게 안겨 줄 수 없는, 우성 알파 아이.
“서연희도 자신의 연인과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요. 오메가 남자는 여자를 임신시킬 수 없죠.”
연희와 서로의 필요에 따라 한 거래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입으로 들으니 새삼 놀라웠다. 서로를 원하는 관계가 아닌데도, 조건 때문에 아이를 가지려 하다니. 결혼을 그렇게 형식적인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다니.
“그런 거래는 이상해요…. 둘 다 이상해요, 제가 보기엔….”
“저도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몰래 계획적으로 그의 아이를 가진 나도 이상한 사람이긴 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이해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윤 씨에게 전념할 생각이었습니다. 집안의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 줄 여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이서윤 씨가 상대가 아닌 이상, 우성 알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어떤 여자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오메가는 이서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서윤 씨가 우성 알파 자식을 낳을 가능성은 희박하죠.”
“어….”
이제 와서 원민준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가 하는 말이 정말 진실일까.
“그러다 마음이 변했습니다.”
“왜요…?”
“서윤 씨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여자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성 알파 자식을 낳지 못하면 제 상속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상속권의 일부를 포기하고 서윤 씨에게 청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날 저를 떠보려고 한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언제부터 저와…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데요?”
“서윤 씨가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부터 흔들렸지만, 그날 서윤 씨가 내게 고백하고 나서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날 청혼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
그게 진짜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그가 내게 했던 잘못들이 다 없어지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그를 믿지 못하겠다.
“그리고 서연희 문제로 서윤 씨를 속인 건, 서연희와의 관계를 털어놓았다면 서윤 씨가 저를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서윤 씨는 한 번도 우리 관계에 확신을 준 적이 없었죠.”
“저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어요. 정말 죄책감을 느꼈다고요. 그리고… 우린 그런 관계였어요. 어떻게 당신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라는 거예요?”
“알아요. 그래도 어떻게든 서윤 씨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좋아한 오메가는 당신이 처음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일들도… 모두 미안해요.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원민준이 나직하게 사과했다. 심장이 한 번 뛰었다. 의심도 들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쪽이 민준의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믿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만 생겨나려 했다.
역시 민준은 안 된다. 너무 위험한 사람이다. 잠깐 이야기한 것만으로 나를 홀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알겠지만 솔직히… 못 믿겠어요. 그리고 저는 마음 정리했어요. 이제 와 이러시는 것도 솔직히 곤란하고요.”
“…그렇겠죠.”
원민준의 눈빛에 희미한 체념이 서렸다. 이 사람의 눈을 보면 약해진다. 나는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
“휴….”
찻잎이 담긴 병을 정리하다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왜 대낮부터 한숨을 쉬고 그래, 태교에 안 좋다?”
“그렇죠…? 한숨 쉬면 안 되는데.”
나는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요 며칠 원민준에게 들었던 말들이 신경 쓰여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뭔가 착각한 게 아닐까, 그 사람은 원래 나를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시 그런 것이라면, 원민준을 떠나온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나 하는 고민.
솔직히 말해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 사람은 언제나 나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손가락으로 가지고 놀았다. 그의 가볍고 간단한… 너와 결혼하려 했었다, 좋아했다, 뭐 이런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진심인지도 모르겠고….”
만일 원민준이 잠깐 머리가 살짝 맛이 가서 지금은 나를 그, 사랑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우리 관계가 달라지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우리 사이의 간극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원민준이 이제 와 나를 좋아한다고 한들, 그의 집안에서 나 같은 사람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원민준이 성격이 이상한 놈이든 나쁜 놈이든 현실적인 조건이 너무 다르다. 지금만 해도 벌써부터 윤신아급의 연예인이 쫓아와 질척대지 않는가.
우리가 만났을 때도 내내 연희가 사이에 껴 있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그랬는데 한 번 피곤한 남자는 나중에 더 피곤해진다고 한다.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너 팬터마임 하냐, 표정이 왜 혼자 어두워졌다 무표정해졌다 그래.”
“어…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그 남자 때문에 그래…? 저번에 그 벤틀리남?”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은 혼자 삭이는 편이었지만 문제가 너무 커서 그런지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왜, 너 쫓아다니면서 괴롭혀?”
“…….”
괴롭긴 한데, 그가 나를 어떻게 가해하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이걸 참 뭐라고 말해야 하지.
“형 있잖아요, 어떤 남자가.”
“응.”
동서고금을 통틀어 어떤 남자가, 여자가, 내 친구가, 뭐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본인 이야기였다. 인철 형도 당연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어떤 오메가를 만나는데, 그 오메가한테 너랑 결혼은 못 하겠다고 딱 잘라 말했어요. 그리고 사귀자는 말도 없었고요….”
“나쁜 놈이네.”
“그렇죠…. 그런데 그 오메가가 가족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아서… 그게 딱하다면서 굉장히 잘해 줬거든요, 매일매일 전화도 하고, 밥도 자주 사 주고, 집도 알아봐 주고… 물론 그 오메가가 해 달라고 한 건 아니고.”
나는 혹시 오메가가 알파를 등쳐 먹은 이야기처럼 들릴까 봐 말을 골랐다.
“그런데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해야 할 것 같다고 하고, 또 실제로 여자 친구도 있었는데, 그, 여자랑은 서로 안 좋아하는 사이였고요…. 그게 너무 힘들어서 오메가가 말도 없이 사라진 거예요.”
“응. 흥미진진한데?”
“그런데 그 남자가 오메가를 찾아내서, 갑자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사실은 너에게 청혼하려고 했다고 그러는 거예요. 네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그랬을 거라고.”
“이거 주부 카페에서 읽은 거니? 아니면 주말 드라마 스토리니?”
“…둘 다 아니고요.”
진지하게 말하다가 그만 내 입꼬리가 일그러져 버렸다. 나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형 말대로 무슨 삼류 주말 드라마 스토리도 아니고.
“그래서 그 오메가가 그 말에 심란한 게 맞냐는 거죠. 어쨌든 한 번 아니었던 사이인데 이제 와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러니까 가볍게 만나다가 남자가 진심이 되었다는 거지? 그래서 그 알파가 다시 청혼했다는 거야?”
“…어 그건 아니고요.”
“그 남자 성격은 잘 모르겠는데 뭐 허투루 말하는 성격 아니면 진심으로 한 말이겠지.”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거죠.”
“그냥 대충 거짓말로 어떻게 한 번 붙잡아 놓으려는 게 아닌 이상 진심이겠지. 그 다음에 중요한 게 그 오메가가 아직 맘이 있냐는 거고.”
“…마음이 있냐 없냐… 말이죠.”
원민준을 좋아했었다. 사실 마음이 남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래도 한 번 단념한 사람에게 미련을 두고 싶지 않다.
“근데 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있나? 한 번뿐인 인생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좋아해 주는 것도 가능성 진짜 낮아. 또 별로 안 좋아해도 적당히 결혼하는 사람들이 널렸는데. 그저 그런 감정으로 사귀다 헤어지는 사람들은 그것보다 훨씬 많고.”
“그런가요.”
그때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소리 내며 울렸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는 서인하 씨였다. 요 며칠 안 보이더니, 어디 다녀오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날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일 이후 그가 좀 어색했다.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뵙네요.”
“네, 출장을 좀 다녀왔거든요.”
“그러셨구나. 저, 뭐 주문하시겠어요?”
“아메리카노 주세요.”
“네.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천천히 해 주셔도 되는데…. 그런데 서윤 씨 내일 일요일인데 뭐 하세요? 시간 나세요?”
그때 인철 형이 끼어들었다. 그러면서 안 해도 될 말을 한다.
“서윤이 일요일에 백화점 간다는데, 태워다 줄 사람 없다고 하던데요.”
그 말에 서인하가 반색했다. 그때 카페 문에 달린 종이 한 번 더 딸랑였다. 서인하를 상대하느라 나는 누가 들어오는지도 못 봤다. 서인하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백화점 갈 일 있는데 일요일에 같이 가요.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괜찮….”
“서윤 씨.”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원민준이었다. 장신에 굉장한 미남인 데다, 우성 알파인 그였다. 서인하도 놀라 원민준을 잠시 바라보았다. 민준이 가만히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랑 어딜 간다는 거죠?”
“서윤 씨, 이분은…?”
서인하도 형질이 약한 알파는 아니었지만 진짜 우성 앞에 서자 페로몬이 가려졌다. 꽤 잘생긴 축인 서인하였다. 그런데도 민준 옆에 있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민준 쪽으로 돌아갔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이분은.”
그냥 아는 사람이라는 말에 민준이 싫은 기색을 보인다. 민준이 눈을 들어 서인하를 한 번 훑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서윤 씨 제가 보호하는 오메가입니다. 어디 데려다줘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하겠습니다. 배려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이서윤 씨하고 어떤 사이신지 모르겠지만 누구 차를 탈지는 서윤 씨가 결정할 일이죠.”
“제가 아기 아빠인데, 제 의무인 게 당연하죠.”
과연 아이 아빠라는 말에는 어쩔 수 없는지 서인하 씨의 눈이 커졌다. 나는 퍽 미안함을 느꼈다. 나는 급히 커피를 만들었다. 이대로 둘이 대치하는 건 불편했다.
“여기, 서인하 씨 커피요. 오늘은 그냥 제가 사 드릴게요.”
“괜찮은데….”
“꼭 받아 주세요. 저, 출근하셔야 하지 않아요?”
원민준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인하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다. 내 눈짓에 서인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또 오겠습니다.”
“그냥 손님으로만 오세요.”
민준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나는 그가 상냥하게 말할 때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안다. 서인하는 미간을 한 번 찌푸리더니 그 말을 무시하고 나갔다. 기분 탓일까. 카페 문도 평소보다 거칠게 닫는 것 같다.
나는 원민준이 갑자기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를 초조하게 보았다. 우리가 만날 때도 원민준은 내가 다른 알파와 말을 섞는 꼴도 못 보는 사람이었다. 알파의 소유욕과 사랑은 별개였다. 그리고 원민준은 독점욕 하나는 남다른 사람이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에요.”
못 본 사이 성질이 죽었는지 원민준은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 사려고 백화점 가려고 했는데요?”
“아기 신발이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같이 가요, 내가 사 줄게요.”
“…됐어요.”
“서윤 씨가 지금 제게 정이 떨어졌을지 몰라도 내게도 첫아이입니다. 아이 신발 정도는 나도 사 주고 싶어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
그 말에는 뭐라 반론하기 힘들었다. 확실히 내 마음대로 가진 아이지만, 이 사람의 아이기도 했다. 신발 하나도 못 사 주게 하는 건 너무 못된 일 같았다.
“물건 몇 개 사 줬다고 그걸 구실 삼진 않겠습니다, 이런 약속은 지키는 편이지 않나요, 저.”
“…그건 그렇죠.”
그것도 사실이었다. 원민준은 이런 일로는 거짓말을 안 했다. 서연희 일로 나를 속이긴 했지만 그것도 교묘하게 사실을 비튼 것이었다.
“육아용품은 좋은 걸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게 양육비를 받든 말든 그건 서윤 씨 자유지만, 갓난아이일 때부터 좋은 물건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자랄지 모르지만 자라면서 돈 때문에 덜 좋은 물건을 쓰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돌 전까지라도 좋은 물건을 사 두고 쓰면 나쁠 거 없잖아요.”
“그래도 저는 원민준 씨한테 뭐 받고 싶은 마음 없어요.”
“그건 서윤 씨 마음이고, 좋은 걸 못 가지면 아이가 불쌍하지 않나요. 사 줄 경제력이 있는 아빠도 있는데.”
역시 원민준은 달변이었다. 감언이설을 하는 안드로이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아직 민준에게 경계를 허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솔깃했다. 은근슬쩍 내 마음은 이미 민준 쪽으로 판정승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 저분 말이 맞네. 그 정도는 받아라 서윤아.”
“…….”
그리고 듣고 있던 인철 형까지 홀린 것 같다. 형 누가 저 사람한테 좋아요 눌러 주고 있으라고 했어요. 원래 형이 백화점 데려다준다고 했었으면서. 이렇게 날 버리다니…. 나는 배신감을 느끼며 인철 형을 보았다.
“…그럼 차만 태워다 주세요. 안 그래도 택시 타고 갈까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일요일 저녁 8시에 데리러 올게요.”
“그 시간엔 백화점 닫잖아요.”
“제가 말하면 열어 줍니다. 이 근처에 S백화점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배불러서 사람 많은 데 가면 힘들 거예요. 사람들한테 치이고요. 사람 없을 때 가서 가지고 싶은 육아용품 다 쇼핑해요.”
나는 순간적으로 상상했다. 문 닫은 백화점. 그리고 전 직원이 나와 원 이사 앞에 도열해 있는 모습을. 그들의 감시 아닌 감시를 받으면서 명품관 물건도 아닌 육아용품을 구입하고 있는 나의 모습.
“그런 부담스러운 거면 안 갈래요. 싫어요.”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돈이니, 권력이니 이런 것으로 이 남자가 나를 찍어 누르는 건 사양이다. 상상만 해도 부담 백배다. 또 이것저것 받게 만든 후, 이 사람에게 말리는 패턴이 되는 건 싫었다.
“알았어요, 그럼 그냥 낮에 가요.”
원민준은 못마땅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헤어졌다 만난 원 이사는 이전보다 내 말을 훨씬 잘 들어 주는 것 같다. 하긴 이전에도 내가 싫다고 하면 다 들어주는 편이었다. 안 돼, 또 원민준 이사를 기억 속에서 미화하고 있어. 쉽게 믿으면 안 될 사람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 일요일에 봐요.”
“네.”
“…안 가세요?”
원 이사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혹시 여기로 이사라도 왔나. 그럴 리가 없지.
“잠깐 서윤 씨 얼굴 보고 가고 싶은데요.”
“저 일하는 중인데.”
“여기 앉아서 잠깐만 보고 가는 것도 안 됩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돌아가세요. 바쁘시잖아요. 회사 가는 날이잖아요.”
“너무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 눈앞에 있으면 눈을 못 떼는 게 정상 아닌가요.”
정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정상 운운하니 좀 어색하긴 했다. 동시에 내 귀가 붉어졌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원 이사는 살짝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하고 미형 안드로이드처럼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꾸 말리는 것 같다.
***
원민준은 일요일 오후 2시에 나를 태우러 왔다. 나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서 외출할 준비를 했다. 오늘 다시 두통과 요통이 시작되어 약속을 취소할까 하던 차였다. 신기하게도 원민준 이사를 보자 통증이 싹 가셨다. 나는 우리 집 앞에 차를 대고 내리는 원민준을 묘하게 쳐다보았다.
반짝이가 아빠를 알아보나.
산부인과 의사가 말했다. 형질이 있는 아이를 임신하면, 배우자의 알파 페로몬이 몸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준다고. 원민준이 배우자는 아니지만 아이 아빠는 맞다. 그러고 보니 저번 주 내내 식사를 못 하다 원민준 이사가 다녀가자 식욕이 늘기도 했었다.
“계단 조심해서 내려와요.”
원민준 이사는 내가 계단에서 내려올 때 공주라도 되는 양 손을 잡아 주었다. 이제 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내가 여자도 아닌데. 나는 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어색하게 손을 빼냈고 원민준 이사도 민망해진 손을 내렸다.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 번쩍거리는 원 이사의 외모와 그만큼 번쩍이는 벤틀리를 한 번씩 쳐다보고 갔다. …좀 창피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배를 끌어안고 얼른 올라탔다. 배가 나온 이후로 조금만 추워도 돌아다니기 힘들었다. 원민준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별일 없었어요?”
“네.”
나는 그가 민망할 정도로 짧게 대답했다. 원민준이 내 표정을 보고 살짝 웃었다.
“벌써부터 집에 가고 싶다는 표정 짓지 마요. 아무것도 안 하고 돌려보내 줄 테니까.”
“네, 뭐, 제가 언제 선택권이 있었나요.”
“배불러서 툴툴대니까 화난 펭귄 같네요.”
“…네?”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나는 말을 말기로 했다. 원민준은 내가 아직까지 웃기고 재밌기만 한가 보다. 참 사는 게 쉬운 사람이다. 백화점은 주차 줄이 길었다. 차 안에서 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원민준도 별말이 없었다. 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작게 입을 열었다.
“…차는 왜 바꿨어요?”
“이전 차가 싫어져서요.”
“…그거 되게 좋은 차라고 연희가 그러던데, 무슨 그런 이유로 차를 바꿔요.”
“서윤 씨가 사라지고 자꾸 이서윤 씨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환상이 보이길래요. 제가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았거든요. 한 번 그러다가 사고 날 뻔하고 바꿨습니다.”
“사람 앞에 두고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또 귀가 빨개져 버렸다. 진짜 이 사람 뇌를 열어서 한번 해부하고 싶다. 뭐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있지? 그것도 안드로이드처럼 표정 변화 없이 아주 나긋하게 말을 한다. 뻔뻔함도 정도가 있지.
“…자꾸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하면서 사람 맘 가지고 놀고…. 그런 거 나빠요….”
“진심인데요.”
정말 날 보고 싶어 했나. 마음대로 다루고 손안에서 가지고 놀다가 빠져나가니 아쉽기라도 했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지나자, 다시 차 안이 밝아졌다. 대충 도착한 것 같아서 안전벨트를 풀던 나는 깜짝 놀랐다.
“어, 얼굴이 왜 그래요?”
원민준의 국보급, 아니 유네스코급 얼굴에 누가 이런…. 민준의 뺨이 부풀어 있었다. 거기다 입가가 터졌는지 상처가 있었다. 보통 강한 힘으로 맞은 게 아닌 듯했다. 이 사람을 때릴 정도의 상대가 있다고?
원민준은 내 표정을 보고 한 번 살짝 찌푸리더니 아무 일도 없는 양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
“가요.”
“…말 안 해 주면 안 내릴래요.”
원민준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와 조금 언쟁이 있었습니다. 별일 아니에요.”
혹시 나 때문에?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물론 원민준이 맞고 다니던 어쨌건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윤 씨 때문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차 문 열어 줄게요.”
원민준은 오메가가 임신을 하면 팔다리가 없어지는 줄 아나 보다. 이 과한 케어는 뭔지.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몸이 무거워지고 나선 차 문을 열기 위에 팔에 힘을 주는 것 같은 작은 일조차 귀찮아질 때가 있었다. 몸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른하다. 나는 원민준이 차 문을 열어 주자 못 이기는 척 내렸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나 임신시켰다고 맞은 거예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요?”
“저의 결혼 문제로 조금 싸웠습니다.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대신 상속을 포기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러다 말다툼이 조금 격해졌습니다.”
원민준이 아주 쌀쌀맞게 말했다. 물론 아무리 들어도 별일 아닌 부분이 없었다. 나는 순간 머리가 띵하고 아팠다. 누가 결혼을 해 준대? 왜 혼자 자폭하고 오고 난리야.
“…결혼이 뭐라고요? 상속이요? 원민준 씨 외아들 아니에요?”
“알파 여동생이 있습니다. 똑똑한 애예요.”
“진짜 머리에 총 맞았어요? 나 없는 동안 어디 다친 거 아니죠?”
“서윤 씨는 못 본 사이에 말버릇이 많이 나빠졌네요.”
그가 살짝 찌푸리더니 내 뺨을 살짝 당겼다.
“교육 시킨 보람도 없이.”
“…뭐 진짜.”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이 남자의 정강이를 차 버릴까 했다. 제정신인가 이 사람. 그렇다고 내가 먼저 누가 당신하고 결혼해 준대요, 라고 따지기도 뭐했다. 그보다 내가 왜 이런 만담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됐어요. 말 안 할래.”
나는 그냥 소나무가 되기로 했다. 그냥 나무처럼 가만히 있다가 가지고 싶은 물건 사고, 원 이사가 차 태워 주면 집에 돌아와서 바로 문을 쾅 닫아 버리자. 그리고 다음부터 아무리 질척대도 이 사람 무시하자. 원민준도 별말이 없었다. 그러다 툭 입을 열었다.
“…상속을 포기해도 이서윤 씨 평생 손에 물 묻히지 않게 살게 해 줄 수 있으니 안심하세요. 아버지 쪽 재산을 포기하는 것뿐이니까.”
“아 진짜, 됐다고요.”
나는 견디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에 꽉 찬 사람들이 우리를 신기하게 보았다. 그리고 언제 보아도 놀라운 광경은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 여자들은 모두 원민준의 얼굴을 한 번씩 빤히 쳐다본다는 것이다. 심지어 제일 앞줄에 있는 할머니까지 목을 빳빳이 들어 쳐다보신다.
원민준이 내 팔을 잡아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엘리베이터가 빨리 움직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진짜 사람 신경 쓰이게, 어디 가서 절대 안 맞을 사람처럼 보이는 주제에 갑자기 맞고 나타날 건 뭔가.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한다. 앞으로 연관될 일 없다고 하는데도.
나는 아동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내 속으로 원민준을 욕했다. 그러던 나였지만 막상 유아용품 매장에 도착하자 눈빛이 달라졌다.
“어서 오세요, 손님, 아기 신발 보세요? 이쪽이 신상품이에요.”
“우와….”
아기 신발은 생각보다 더 작았다. 내 손바닥보다 작은 것 같았다. 별 모양 무늬가 있는 걸 보고 싶었는데 막상 보니 곰돌이 무늬도 예뻤고, 어른 신발을 흉내 내어 만든 아기 스니커즈도 엄청 예뻤다.
“남자앤가 보네요.”
내가 신발을 보는 것을 보고 원민준이 무심한 듯 말했다. 이전엔 저런 어조가 정말 흥미 없어 하는 말투인 줄 알았다. 가만 보니 매사에 어조가 저렇게 나른하고 무심한 모양이었다.
‘이 사람 진짜로 애한테 관심이 있긴 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 원민준을 바라보았다. 보통 바로 아기 성별부터 물어보지 않나? 지금껏 보고 싶었다느니 결혼이니 운운해 놓고 아이 성별도 묻지 않다니. 나는 헤실헤실 풀었던 표정을 다시 굳혔다.
“남자애 맞아요.”
“그래요, 갖고 싶은 거 다 골라 봐요. 애기 예쁘게 꾸미는 것도 재미라고 하더라고요.”
참 무심하고 기계 같은 어조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애 아빠 아니세요?”
백화점 직원이 놀랐는지 물었다. 껄끄러운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용자다.
“애 아빠 맞아요.”
“애 아빠 아니에요.”
“유전자는 내가 줬어요.”
“유전자만 준 거예요, 우리 애기 부모는 저예요.”
“모(母)겠죠. 무슨 우리 애기가 박혁거세예요. 엄마 혼자 임신하게.”
“이….”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원민준 이사만 노려보았다. 자기가 잘한 것도 없으면서 밉살스러운 말만 한다. 내 표정을 본 원민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물건 골라요. 이제 안 그럴게요.”
“혼자 온다는데 억지로 끌고 와서 자꾸 방해만 하고….”
설마 임산부를 괴롭히진 않겠지. 그런 생각에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로 했다. 씩씩대는 나를 보자 원민준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풀었다. 화를 내기보단 곤란해하는 것 같다.
“알았어요, 내가 미안해요. 이서윤 씨 하는 말에 말대답 안 할게요.”
“…….”
나는 그제서야 입을 다물고 진열대로 시선을 돌렸다. 신중하게 물건을 골랐다. 육아용품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왜 육아 사업이랑 수험생 관련 사업은 절대 안 망한다는지 알 것 같다. 남자 오메가인 나도 아기용품을 보면 눈빛이 풀리니, 여성 오메가나 베타 여성 엄마들은 오죽할까.
“신생아용 양말은 이쪽이에요.”
양말은 더 사람을 정신 줄 놓게 했다. 신발도 귀여운데 말랑 폭신한 니트 양말들은 혼이 나가게 귀여웠다. 막 별 모양 코르사주가 붙어 있고…. 백화점 직원은 나를 홀리는 영업력으로 이번엔 신상 아기 모자들을 보여 주었다. 어느 쪽이든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어, 엄청 귀여워요.”
“지금 30만 원 이상 구입하시면 이쪽 곰돌이 인형 드려요. 남자아이들도 좋아하도록 파란색 옷을 입은 곰돌이랍니다. 손님, 솔직히 아이 첫 옷은 좋은 것 구입하는 게 맞아요. 지금 집에 사 두신 것 많으세요?”
“아뇨 사실 아직 아무것도 안 사 놔서….”
“어머 그럼 오늘 옷부터 신발까지 다 마련하세요. 한 세트 마련하면 30만 원 금방이에요.”
30만 원…. 순간 머릿속으로 계산기가 돌아갔다. 목돈이 손에 있긴 하지만 막 쓸 순 없었다. 그래도 곰돌이도 예쁜데, 아기 침대 옆에 곰돌이 정도는 놔 줘야 하지 않을까…. 내 평생 이렇게 쇼핑에 홀려 본 적은 처음이었다. 원민준이 사 준다고 말은 했지만 이 사람이 사 주는 걸 받을 생각은 없었다.
30만 원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찼다. 아기 물건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비쌌다. 신중하게 30만 원 어치를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여직원들이 내가 본 물건들을 따로 빼서 포장하기 시작했다.
“저, 아직 다 못 골랐는데….”
나는 놀라 여직원들에게 말했다. 직원들이 포장하고 있는 물건들은 언뜻 봐도 30만 원은 이미 훅 넘어갔다. 숍 매니저로 보이는 중년의 여직원이 살며시 웃었다.
“남편분께서 손님이 만지는 건 전부 다 구입하겠다고 하셨어요. 천천히 보세요.”
중년의 여직원은 넉살 좋게 5% 할인까지 해 주겠다면서 말했다. 세상천지에 원민준 같은 사람에게 직원가 할인이라니. 제값 다 내고 세금까지 꼬박꼬박 내야 할 부자가 원민준이었다.
“아니에요, 저 사람 계산 안 할 거예요. 그거 다 풀어 주세요. 저 이거 다 안 살 거예요.”
“서윤 씨, 직원들이 포장 다 했잖아요. 이제 와서 풀면 진상 돼요.”
원민준이 나직하게 나를 지적했다. 진짜 뭐 이런 진상이 다 있지. 아무리 봐도 진상은 내가 아니라 이쪽인데.
“안 받는다고 했잖아요. 왜 맘대로 그래요. 방해할 거면 집에 가세요. 진짜.”
나는 팍 짜증을 냈다. 원민준이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야말로 원민준이 화를 내리라 생각하며 긴장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뭐지? 혹시 이 사람 죽나? 혹시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보통이라면 당장 호텔로 끌고 가서 매를 들었을 텐데….
“…화 안 내요?”
이러다가 갑자기 팩 돌아서 응축된 분노를 한 번에 풀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의심하며 그를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로 했지만 막상 민준이 이러니 무서웠다.
“화 안 내요.”
“…….”
원민준이 내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교육 중도 아니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랑 다신 그런 거 안 해요.”
나는 귀가 빨개져서 대답했다.
“물건이나 마저 골라요. 다음 가게도 봐야지, 한 곳에서 다 살 거 아니잖아요.”
나는 한숨을 쉬고 원민준을 노려보았다.
“아기는 좋은 걸 가져야 하잖아요,”
원민준이 그렇게 말하자 조금 마음이 혹하긴 했지만.
***
육아용품은 생각보다 살 것이 많았다. 아이 턱받침, 모자, 양말, 우주복, 장난감. 원민준은 내가 고르는 물건을 알아서 계산해 주었다. 매장에서 택배로 집에 물건들을 보내 주기로 했다. 그래도 신발은 당장 가져가고 싶어서 나는 신발 한 켤레만 따로 포장해 달라고 했다.
주말 백화점은 사람이 많았다. 나는 쇼핑이 끝나자 지쳤다. 피곤하니 갑자기 너무 배가 고파졌다.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었다. 두꺼운 고기. 임신 후 가끔 식욕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할 때가 있다. 쇼핑만 마치고 바로 원민준과 헤어지려고 생각한 게 당초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원민준이 뭐 먹을래요, 라고 물었을 때 나도 모르게 작게 스테이크라고 대답해 버렸다.
주말 오후의 백화점은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았다. 원민준은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음식점에 들어가, 가장 좋은 스테이크를 주문해 주었다. 맞은편에 앉은 원민준의 곱다 못해 아름다운 얼굴이 여전히 얄미웠다. 그러나 윤기가 흐르는 스테이크는 죄가 없었다.
나는 미디엄 웰던의 스테이크를 작게 썰어 꼭꼭 씹어 먹었다. 처음에는 조금씩 식사를 하는 시늉을 내던 원민준은 이제 마실 것까지 시키고 턱을 괴고 대놓고 나를 구경했다.
“먹는 걸 왜 그렇게 봐요? 이 버릇 진짜 이상해.”
“알고 있었어요? 내가 이서윤 씨 먹는 모습 좋아하는 거.”
“진짜 이상해요. 내가 무슨 케이지에 있는 씨앗 먹는 햄스터 된 것 같다고요.”
이전에 우리가 만날 때도, 원민준은 내게 먹을 것을 사다 주고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버릇이 있었다, 원민준이 설핏 웃었다. 내가 이 남자의 실체를 몰랐다면 순식간에 홀렸을 것 같은 미소다.
“햄스터보다는 이서윤 씨가 밥 먹는 게 훨씬 귀엽죠, 쥐랑 비교가 되나.”
“…뭐예요 그건.”
“저는 이서윤 씨 먹는 모습이 좋습니다, 생명력 있고 귀여워서.”
“자꾸 그런 소리 할 거면 다른 테이블 가서 앉으세요.”
원민준이 표정을 무너뜨리지도 않고 입술로 엷게 웃었다. 교양의 화신 같아 보이는 모습이 너무 얄미웠다. 나는 같이 나온 샐러드의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원민준을 보았다.
“…이제 회사 일은 어떻게 되는데요? 지금 그 회사… 아버지 계열사 아니에요?”
원민준 이사의 아버지가 W그룹 총수인 원 회장이라는 걸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나 때문에 회사까지 잘리는 건 아니겠지.
“제가 어떻게 이 나이에 대표 이사 꿰차고 있겠어요, 내가 그 회사 대주주니까 그렇지. 그건 상관없어요, 아버지가 물려주신 게 아니라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자산이니까.”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고, 내가 원민준 이사 처지 걱정해 줄 일은 없을 것 같다.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살겠지 뭐.
“제가 쓴 양육비 포기 계약서 안 가져가셨어요. 오늘 가져가세요.”
“…….”
“그리고 정말 이젠 오지 마세요. 마음 심란하면 태교에 방해되니까요.”
나는 같이 나온 주스를 빨대로 마시면서 눈을 들어 원민준을 보았다. 일단 오늘은 신세를 졌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 말려들게 하는 게 원민준 패턴이다. 돈으로 사람 압도하고, 뭔가 받게 만들고, 이제 함정 파고 약점 잡아서 계약서만 쓰게 하면 딱 원민준이겠네.
“제가 원민준 씨가 쓰게 한 스폰서 계약서, 그거 내용 안 지키고 사라지긴 했지만 애초에 저 속여서 쓰게 만드신 계약서잖아요. 그러니 그건 무효예요.”
원민준 이사는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내게 스폰서 계약서를 쓰게 했다. 그 안에는 내가 최소 10년간 원 이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걸 지키지 않으면 원 이사가 손해 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원민준도 인정했었다. 법적인 효력은 없을 거라고. 그게 거짓말인지 아닌진 모르지만 내가 지킬 의무는 없다. 어차피 그가 서연희에게 우리가 내연 관계라는 걸 폭로하겠다는 협박으로 쓰게 만든 계약서니까. 그것도 약속이라고, 약속을 어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나요.”
“…원민준 씨 기분이요?”
“네, 뭐 그것도 있지만, 지금 당장 이서윤 씨 입장에서 생각하면요, 스폰서 계약서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양육권 소송을 거는 것부터 걱정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확실히 양육권 소송을 하면 내가 100% 질 것이다. 가진 것 없는 미혼모 오메가와 유수의 재벌가 외아들. 판사가 아닌 내가 봐도 어느 쪽 양육 환경이 나은지는 자명하다. 만일 원민준이 양육권 청구 소송을 걸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꼼짝없이 아이를 빼앗길 거다.
“…어차피 원민준 씨한텐 필요한 아이도 아니잖아요.”
“혈육인데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임신하지 말라고 약까지 먹였으면서.”
다시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돌았다. 뻔뻔하고 나쁜 남자다. 공공장소만 아니라면 원민준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싶었다. 임신 중에는 원래 감정 기복이 생기나 보다.
“제가 청구 소송을 하는 걸 막으려면, 이서윤 씨에게 필요한 건 저의 양육권 포기 각서예요.”
나는 벌써 젖기 시작한 눈을 들어 원민준을 보았다.
“…어떻게 하면 써 주실 건데요?”
원민준이 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임신 기간만 이서윤 씨를 돌보게 해 주세요.”
“그리고요?”
“아이가 태어나면 양육권을 포기할게요, 그리고 양육비도 매달 지급하고요. 다만 아이를 일정 기간에 한 번은 보게 해 주면 좋겠네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말 그거면 돼요?”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민준은 나를 속였지만 아이에 대해선… 민준은 이 애에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남자도 아이의 아빠로 행세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전부 포기하고 양육비까지 준다면 내게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왜 갑자기 저에게 유리한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이서윤 씨 옆에 있고 싶으니까요.”
“…제가 싫다고 해도 쫓아다니시고 계시잖아요, 지금. 그리고 저는 양육권 포기 각서 받고 나면 원민준 씨 안 만날 거예요.”
“압니다. 그래도 지금은 제가 쓸 수 있는 카드가 그것뿐이니까요. …다른 일이었다면 더 제대로 협상을 했겠죠. 하지만 지금 제가 가진 가장 좋은 카드를 이서윤 씨와 보낼 몇 개월에 쓸 만큼, 저는 절박하니까요. 제가 아쉬운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
갑자기 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건데. 마음 불편하게. 설사 이것이 뻔한 덫이라도, 나는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매력적인 덫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거짓말 안 하실 거죠.”
“그럴게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납득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좋아요,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일단 거주지를 옮길 것.”
“싫어요, 저는 이 동네가 좋아요. 서울 다시 안 갈 거예요. 여기서 병원도 다니는걸요.”
“…알겠어요. 그럼 이서윤 씨 집에 제가 드나들게 해 주세요.”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의지하고 돌봐 주는 것을 받아들일 것. 임산부일 때는 혼자 힘으로는 버티기 힘든 거 알아요.”
나는 이것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나에게 좋은 조건이었다. 지금껏 혼자 임신 초기, 중기를 보내며 쉽지 않은 일들도 많았다. 백화점 한 번 나오는 것도 이렇게 버거운데, 원민준이 도와준다면… 솔직히 몸은 정말 편할 거다. 마음이 좀 불편해서 문제지. 거기다 원민준은 정말 사람을 잘 돌봐 준다. 한번 그의 보호 아래에서 살아 본 나는 잘 알았다.
“그게 답니다.”
“…정말 그게 다예요?”
원민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너무 좋은 조건이라 마음이 찜찜할 정도였다. 원민준은 무심하게 나를 보다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 카페에 있던 사람은 누구죠, 누군데 이서윤 씨를 백화점에 데려다준다는 겁니까.”
“아… 서인하 씨요.”
아무래도 하루 종일 벼르던 질문인 듯했다. 바로 표정이나 기색이 바뀌는 걸 보면. 나는 순간 서인하와 있었던 짧은 스킨십을 떠올리고 얼굴이 더워졌다. 순간적으로 향이 스치듯 흘렀다. 무거운 향이라 나는 흠칫 놀랐다.
“남자 친구예요?”
“아니에요, 그냥 가게 손님이에요.”
“그 사람 다신 만나지 마요. 이서윤 씨한테 흑심이 있는 것 같으니.”
“무슨 상관이에요. 그 사람은 날 정부로 만들거나 스폰서 계약서 같은 거 쓰라고 할 사람 아니에요. 설마 그만한 흑심 가지고 있겠어요.”
자기는 날 만나는 내내 다른 여자와 정략결혼할 생각을 했으면서. 나도 모르게 곱지 않은 눈으로 원민준을 보았다. 볼멘소리가 나온다.
“누굴 만나든 제 자유… 예요.”
원민준의 눈빛에 한 번 움찔했지만 끝까지 말하는 데 성공했다. 원민준이 혀를 찼다. 그리고 나를 살짝 노려보는데 말도 안 되게 수려한 얼굴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심장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계속 그를 보았다.
“…그래요, 맘대로 해요.”
“나중에 말 바꾸고 화내기… 없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니까.”
다른 건 몰라도 원민준은 우성 알파라 그런지 알파 중에서도 질투심이 어마어마했다. 나는 눈치를 보면서도 눌러 박듯 말했다. 원민준이 나를 노려보았다. 뿌득, 하는 소리가 났다. 지금… 이 간 거야…? 등골이 오싹했다. 이러다 나,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맞는 건 아니겠지.
“맘대로 해요. 내가 세컨드라도 어쩔 수 없죠. 이서윤 씨가 누굴 사귀든, 눈앞에서 없어지는 것보단 나으니까.”
“…….”
놀랐다. 원민준이 이런 말까지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물론 누굴 사귈 생각은 없었다. 서인하 씨와 한 번 진지한 분위기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때 서인하 씨에게 멈춰 달라고 했다. 아직은 원민준이 아닌 다른 알파와는 불가능했다.
내 성욕도 아예 정상적인 성질의 것은 아닌 모양이니까. 시간이 흘러 내가 여유가 생기면 그땐 나의 성욕과 마음을 채워 줄 상대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때 적합한 상대가 찾아질지도 확실히 모르겠고. 뭣보다 아이를 낳고 내 페로몬이 다시 이전의 열성의 것으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월플라워(wallflower), 아무도 찾지 않는 시든 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이를 낳으면 돌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테니까. 가족이 생긴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어쨌든 감사해요. 양육비를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아이를 낳고 당장 직업을 찾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으니 생각이 많았거든요.”
“제가 아빠니 당연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건 저도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이 사람 입장에선 바라던 아이도 아닐 텐데… 민준은 책임질 의무가 없는데도 양육비를 주겠다고 한다. 그건 진심으로 고마웠다. 무슨 꿍꿍이인지 아직 100% 믿을 순 없지만, 원민준이 이렇게 나오자 심적으로 안정을 주었다.
“…윤신아 씨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윤신아 씨가 찾아와서 한 말로는 민준 씨 집에서는 혼외 자식 같은 거 절대 인정 안 하는 분위기라고 하던데요.”
“그런 일은 서윤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민준은 퍽 다정하게 말했다. 어느새 원민준의 손은 내 손 위에 겹쳐져 있다. 그제서야 나는 그 손을 눈치챘다. 순간, 지금 허니 트랩에 한 발을 담갔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다. 그러나 나직하게 이어지는 원민준의 말에 집중하며 그 생각을 금방 잊어버렸다.
“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서윤 씨는 건강하게 아이를 낳는 일만 생각해요.”
이번엔 마음이 조금 움직일 뻔했다. 그래도 이 사람을 속이고 맘대로 아이를 가진 건 난데, 원민준은 다시 만나고 한 번도 나를 탓한 적 없다.
“그래도 고마워요, 저… 사실 굉장히 걱정했거든요. 원민준 씨가 이 아이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면 어쩌나…. 당신은 원하지 않던 아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
“그러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내 멋대로 행동했는데도 책망하지 않아서…. 그것 하나만은 늘 고맙게 생각할게요. 다른 일과는 별개로.”
원민준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혼외 자식을 바라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내가 서윤 씨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바라지 않은 건 아닌데요.”
“어… 네?”
이건 또 뜻밖의 이야기였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저한테 임신은 안 된다고 하셨었잖아요.”
“지금은 안 된다는 거였죠. 그리고 영영 임신시키지 않을 오메가에게 호르몬 조절약과 영양제까지 사다 바치는 알파가 어디 있어요.”
“그건 언젠가는 저와….”
혹시 이 사람, 언젠가는 나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던 걸까. 보통 오메가라면 네가 뭔데 내 임신 여부를 결정하느냐고 대들 일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항상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가족을 절실히 원했다. 열성 남자 오메가인 나를 임신시키는 것이 가능한 우성 알파는 내 주변엔 이 사람뿐이었으니까.
이 사람이 언젠가는 같이 아이를 가지자고 말했으면 어떨까. 나는 많이 흔들렸을 거다. 당시의 나는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어떤 여자와든 우성 알파 아이를 낳고 나서의 일이었겠지만요.”
“우성 알파를 낳는 건, 원민준 씨 집안엔 많이 중요한 거겠죠….”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우성 알파라는 건 굉장한 의미를 지녔다. 선택받은 인생을 낳을 수 있는데 나 같은 열성에게서 오메가나 베타 자식을 볼 우성 알파는 없었다. 뛰어난 지능과 압도적인 페로몬, 우월한 신체 조건…. 우성 알파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선망은 굉장했다.
우성 알파라는 것 자체가 우성 알파 가계에서만 태어나는 것이었다. 원민준 씨가 우성 알파로 태어난 것을 보면 원민준 씨의 부모도, 할아버지도 우성 알파를 낳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집에는 중요하죠, 그게 저의 상속자로서 가장 큰 의무니까요.”
“…….”
나는 불안해져 배를 쓰다듬었다. 이 사람 집안에 필요 없는 아이라고 해코지를 당하진 않을지 걱정되었다. 내 불안한 표정을 본 원민준이 말했다.
“그런 일은 신경 쓰지 말아요. 지금 저에게는 서윤 씨가 가진 아이가 제일 중요하니까.”
원민준의 말이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는 빈 접시를 보다 눈을 들어 원민준을 보았다.
“…정말, 저와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네.”
“그건 원민준 씨한테 아무 득 될 것도 없는 일이잖아요.”
그냥 데리고 있고 싶은 거면 혼외 자식이 없는 채로 데리고 있는 것이 낫지 않나. 부잣집에서 혼외 자식은 늘 화근이니까, 이미 임신한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좋아하는 오메가에게서 자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죠. 몇 년간은 안 되겠지만, 서윤 씨만 원한다면 언젠가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결혼하고 우성 알파 자식을 낳으면, 그다음에는 혼외 자식을 가져도 상관없었다는… 거예요?”
원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본다.
“좋아하는 오메가에게 혼외 자식을 낳게 하고 싶은 알파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 혼외 자식이 아닌 자식을 낳는다면….”
나는 순간 원민준과 연희의 정략결혼 약속을 떠올렸다. 그 둘은 서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자식이 필요했고, 가짜 결혼을 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가짜 결혼 다음에는 보통 뭐가 있지? 쇼윈도 일상? 아니면… 형식적인 결혼 생활 후 이혼? 불현듯 어떤 쪽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서연희와 몇 년 살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이혼하기로 했었습니다.”
마침 웨이터가 후식인 커피를 가져왔다. 내 눈앞에 놓인 티라미수를 멍하니 보며 나는 그걸 먹을 생각도 못 했다.
“서윤 씨에게 청혼할 생각이었어요, 몇 년 후든, 언제든. 서윤 씨와 아이를 가진다면 결혼 후에 정식으로 가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좋아하는 오메가에게 사생아를 낳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누구 맘대로 그런….”
이전 원민준이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몇 년만 참고 자신을 좋아하며 기다리라고. 원민준이 정략결혼을 하고, 그 사이에서 우성 알파 자식을 낳을 몇 년. 그 몇 년을 벌기 위해 이 사람은 나를 강제하고 붙잡아 둬야 했었다. 내가 말을 잘 들어야 결혼이니 뭐니 하는 요구를 안 하고 순종적으로 그를 기다릴 테니.
무슨 그런 제멋대로인 계획이 다 있지.
나는 불만스럽게 그를 보았다. 내 마음도 모르고, 나는 멍청하게 원민준을 짝사랑했었는데…. 몇 년 후엔 사람 맘이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그때, 원민준과 만나고 있을 때 원민준에게 그런 제의를 들었다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맘대로 그런 계획이나 세우고 내게는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서윤 씨는 서연희와 내 관계를 알게 되면 도망갔을 거잖아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도망갔겠죠. 그리고 아마 계속 서연희를 짝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건….”
상식적으로 원민준 같은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누가 그런 말을 믿겠는가. 연예인보다 잘생긴 재벌 3세. 인터넷 소설에도 안 나올 설정이다. 그런 남자가 나 같은 사람을…. 거기다 원민준 씨는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날 맘고생 시키기도 했었다.
“지금 그래서 잘하셨다는 거예요?”
나는 티라미수를 떠먹으려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원민준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그래도 잘못한 건 원민준 씨니까. 누가 정부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나. 그리고 몇 년 뒤 결혼해 주세요, 라고 부탁이라도 했었던 것처럼. 이런 말들로 사람 심란하게 만들고. 상황을 합리화시키고. 괜히 흔들리는 내 마음까지 얄미웠다.
“그래서 잘못했다고 하잖아요.”
“그냥 좋은 여자 만나서 전념하세요, 우성 알파인 자식도 낳고. 그러면 아버지하고 부딪칠 일도 없잖아요.”
원민준의 부푼 뺨이 묘하게 안쓰러워 마지막 말은 말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누가 시켰나. 그렇게 집에서 싸우고 다니라고, 마음대로 맞고 다니고…. 원민준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여자하고 결혼은 안 합니다.”
“우성 알파인 자식을 낳아야 한다면서요.”
“이서윤 씨 외의 다른 사람과의 아이는 안 볼 겁니다. 우성 알파 자식을 낳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면 원민준 씨 집에서 이 사람을 그냥 놔둘까. 거기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나면 원민준 씨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쐐기를 박아 놓았었다.
“…저는 원민준 씨 다시 볼 마음 없어요, 저하고 그러셔도 시간 낭비일 거예요. 원민준 씨 격에 맞는 상대를 다시 찾아보시는 게 나을 거예요. 저한테 제시해 주신 조건으로 저는 충분히 만족했으니까.”
“알아요. 서윤 씨가 나를 만나 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요.”
“알면 왜 그래요… 괜히 집에서 미움만 받고….”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는데 자꾸 흔들렸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이 사람은 득 볼 게 없는데 왜 하겠다는 건지. 상속… 을 포기하겠다고 했었지, 그리고 나 외의 사람과 자식도 보지 않겠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 사람을 만나거나 책임질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계속 마음이 걸렸다.
“제가 원하니까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바로 다음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사람 마음은.”
“…….”
“제가 더 이상 이서윤 씨를 강제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사람 외의 다른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 건 내 자유잖아요. 그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쯤 되면 나도 원민준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음이 약해져 티라미수만 숟가락으로 찔렀다.
“그거 다 먹고 나면, 집에 가서 좀 쉬어요,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마요.”
“…….”
“태교에 안 좋으니까.”
그 말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교, 아이. 지금 나를 확실히 움직일 수 있는 두 단어였다.
***
긴 쇼핑이 끝났다. 나는 민준의 차로 편안하게 돌아왔다. 나는 쇼핑백에서 파란색 별 모양 아기 신발을 꺼내 빈 책장 한 칸에 올려 두었다. 다시 봐도 정말 귀엽다. 신발을 가만히 손으로 건드렸다.
“그렇게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요 조그만 신발 안에 들어갈 작고 말랑한 발. 얼마나 예쁠까. 나는 망설이다 작게 말했다.
“원민준 씨 닮으면 애기가 정말 예쁠 것 같아요.”
“저는 서윤 씨 닮으면 좋겠는데, 서윤 씨 닮아서 내 옷자락 잡고 있으면 귀여울 것 같네요.”
그 말에 나는 원민준 주니어가 원민준 씨의 양복 끝자락을 잡고 수줍게 나를 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심장이 쿵 떨어질 뻔했다. 원민준 씨를 닮으면 하얗고 말도 안 되게 예쁜 애겠지. 근데 성격은 원민준 씨 안 닮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오랫동안 가족 없이 살아온 만큼, 태어날 아기가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내 배를 쓰다듬었다.
“씻겨 줄까요?”
“아, 아니요, 혼자 씻을 수 있어요.”
“임신하면 원래 남편이 목욕 시중도 들어 준다고 하던데요. 배 나오면 움직이는 것 힘들다고.”
“…남편 아니시잖아요.”
“돌봐 주기로 했으니까 남편 대신이라고 할게요. 애 아빠는 맞잖아요.”
나는 순간 원민준이 내 맨살갗을 만지는 것을 상상했다. 희고 가늘고 큰, 원민준의 손이… 나를 어루만지고. 임신을 한 후, 성욕이 강한 시기로 들어서 몇십 번을 야한 꿈을 꿨다. 대부분 원민준 이사에 대한 꿈이었다. 절대 안 된다. 원민준이 나를 만지면 또 말려 들어갈 거다. 이 남자는 우성 알파고 또 잘생기고, 아무튼 위험했다.
“됐어요, 정말. 씻고 올게요.”
나는 원민준을 피해 후닥닥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로 들어가자 오늘 레스토랑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세컨드가 되도 좋다느니, 좋아하는 오메가라느니, 나 외에 다른 사람과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느니. 말도 안 되는 말뿐이었다.
사실은 원민준을 짝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꿈속에서도 바라던 말들이었다. 그러나 너무 꿈같아서 덫 같았다. 믿으면 안 될 것 같다. 샤워를 하는 내내 심란했다. 이 남자를 집에 들인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싶다. 사실 지금 벌써 흔들리는데, 애기를 낳을 때쯤엔 내 마음을 나도 못 잡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육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다 씻었어요?”
나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왔다. 불룩한 배 덕에 가운을 입어도 앞섶이 조금 벌어져서 허벅지가 살짝 보였나 보다. 원민준의 시선이 내 허벅지 쪽으로 쭉 내려가는 것이 느껴져 나는 가운 앞섶을 여몄다. 원민준이 내게 아직 성욕을 느끼고 있을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원민준과 한창 그 짓… 들을 했을 땐 나는 평균보다 말랐고 지금처럼 배 나온 둥글둥글한 임산부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누군가에게 섹스어필할 상황은 아니다.
“옷 입어요. 머리 말려 줄게요.”
옷을 입고 나자 원민준이 머리를 말려 주기로 했다. 배가 부르고 꼼짝하기 귀찮을 때가 많았다. 돌봐 주는 건 허락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못 이기는 척 헤어드라이어를 넘겼다. 원민준이 따뜻한 바람을 틀어 머리를 말려 주었다. 그가 내 머리를 털면서 슬며시 목덜미를 긴 손가락으로 스치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 행위에 민준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 큰일 났다. 몸이….
페로몬 분비가 왕성해서인지 나는 가끔 불같은 성욕이 들었다. 부끄럽지만 혼자 집에서 자위를 한 적도 많았다. 그 성욕이 원 이사가 목덜미를 스친 것만으로 슬몃슬몃 고개를 들려고 하고 있었다.
“저, 그만할래요….”
“왜요, 금방 끝나요.”
원민준이 내 어깨를 살짝 누르고 계속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 누구는 임신을 해야 페로몬이 나올까 말까 한데 원민준은 지금도 나를 살짝 만지는 것만으로 성욕이 들게 만들 수 있다니. 원민준이 내 쪽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닌데 온몸을 은은하게 맴도는 페로몬 냄새가 내 귓가를 스쳐, 코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몸은 안정되는데 마음엔 불이 붙었다.
나는 숨도 크게 쉬지 않고 민준이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다 했어요?”
민준이 몸을 뗐을 때 나는 숨까지 작게 쉬고 있었다. 그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왠지 조금 분해졌다.
***
임신 중후반기까지 혼자 보내서일까. 누군가 돌봐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게 참 편하게 느껴졌다. 원민준은 주말에 주로 왔고, 평일에도 시간이 나는 대로 들렀다.
“으음….”
민준의 하얀 손이 내 퉁퉁 부은 발을 주물렀다. 임신을 하고 나서 자꾸 몸이 붓는다. 특히 발. 나는 침대에 느긋하게 앉아 원민준이 발을 주물러 주는 것을 받았다. 내 통통해진 발가락은 원민준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었다.
민준은 자신이 돌봐 주기로 결정했으니 남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마사지, 양육 공부 도와주기, 산부인과 같이 가 주기 같은 것 말이다. 처음엔 원민준 이사를 경계하던 나도 이젠 모르겠다, 하며 그 달콤한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시원해요?”
“네에….”
나는 원민준이 발가락을 주물러 주자 흐물흐물해져 느긋한 소리를 냈다. 예전엔 이런 것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기까지 하다. 내 몸인데 참 못났다. 빨리도 누군가의 돌봄에 적응한다.
“오늘 점심은 뭐 먹고 싶어요?”
거기다 민준이 오는 날은 먹고 싶은 것도 다 사다 주니 너무 편했다. 아침부터 원민준이 사다 준 브런치를 먹고 그가 해 주는 마사지를 받았다. 원민준은 원래도 평소엔 잘해 주는 편이긴 했다. 그런데 내가 임신을 하고는 더 잘해 준다.
“파스타도 먹고 싶고 또 치킨도 먹고 싶고…. 산부인과 갔다 와서 생각해 볼게요.”
나는 작게 말했다. 원민준이 나를 돌봐 주고 있지만 우리 관계를 정의 내리진 않았다. 물론 성적인 접촉도 없다. 원민준이 잘해 주는 건 정말 좋았다. 그러나 다시 그런 관계가 되면…. 또 한 번 상처받는 것이 두려웠다. 아직은 어떤 것에도 안심할 수 없다.
“옷 갈아입어요. 병원 가야 한다면서.”
“네에….”
나는 흐물흐물해져 있다 뒤뚱대며 몸을 일으켰다. 원민준이 조심스럽게 나를 일으켰다. 그는 가끔 잔뜩 부푼 내 배를 신기한 듯 본다.
“보통보다 좀 많이 나온 것 같은데.”
“남자애라서 그런가 봐요…. 선생님 말론 애기 계속 더 크고 있대요.”
“그래요, 막달 되면 거동도 힘들겠네요.”
나는 원민준 이사의 새 벤틀리 조수석에 느긋하게 몸을 파묻었다. 이전엔 산부인과에 갈 때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녔다. 그렇게 하루 외출하고 오면 진이 다 빠졌다. 이제는 민준이 태워다 주니 편하긴 했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산부인과 진료실에는 대기 중인 산모들이 많았다. 원민준이 페로몬 냄새를 죽이고 있어도, 그가 어떤 공간에 들어가면 묵직한 페로몬이 잠깐 코끝을 스친다. 인상적이고 우아한 체향이었다.
사람들이 원민준의 수려한 얼굴과 큰 키를 한 번 훔쳐봤다. 우성 알파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나는 부끄러워 얼른 원민준의 손을 이끌어 한편에 가서 앉았다. 민준과 달리 나는 주목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이런 알파가 데려온 임산부가 과연 누구일까. 이렇게 생각하며 사람들은 한번 옆 사람을 체크해 보기 때문이었다.
대기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나는 원민준이 가져다준 산부인과 카운터의 사탕을 먹으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보호자분이 같이 오셨네요.”
임신 중반기를 넘어서 갑자기 애 아빠가 등장하자 산부인과 의사가 놀란 듯했다. 의사는 나와 민준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나는 머쓱했다.
“저… 그렇게 됐어요.”
“남편분이 우성 알파시라곤 들었는데, 정말 그러시네요.”
“남편 아니에요.”
나는 얼른 부정했다. 원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아빠가 우성 알파고, 멀리 있다는 이야기만 했다. 이래서야 내 맘대로 남편이 우성 알파라고 말해 둔 것 같지 않은가.
“남편 맞습니다. 제가 바빠서 다른 지방에서 근무하느라 지금껏 못 와봤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아마 별별 커플을 다 본 탓인지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말씀드린 대로 정밀 초음파 들어갈 거예요.”
초음파 검사를 시작하자며 의사가 배에 투명한 액체를 발랐다. 이 병원은 중기 이후에도 한 번 더 정밀 초음파 체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평이 좋다나. 모니터에 아이 모습이 떠오르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전 검사 때보다 한층 커진 것 같아 보이는 아기였다.
“반짝이가 많이 컸어요. 여기 보이시죠, 이게 손이에요.”
초음파 동영상을 확대시켜 주자 아주 작은 고사리 같은 손이 드러났다.
“여기 보니까 애기 페로몬 샘이 생기고 있는 것 같네. 아마 변동이 없으면 형질이 있을 거예요…. 알파인지 오메가인지는 태어날 때까지 알 수 없고요.”
“네….”
나는 오메가 아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도 말하는 투가 알파를 기대하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난 남자 오메가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보통 남자아이가 형질이 있다고 하면 알파를 기대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정말 작네요.”
원민준이 잠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배는 이만큼이나 나왔는데 애는 너무 작아요.”
“태아가 태어나면 묵직할걸요, 남편분이 장신이시고, 산모님도 작은 키는 아니시잖아요. 남자 알파와 남자 오메가 커플의 아이는 대체로 장신으로 태어난다고 하죠. 우량아로 태어날 것 같으니 산모님 막달에 더욱 조심하셔야겠어요. 남자 오메가는 없던 장기가 형성되어 아이 낳는 거라서 힘들어요. 남편분이 많이 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원민준은 나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원민준의 옷깃을 잡았다.
“저기… 진료받는 동안 잠깐만 나가 계시면 안 돼요? 그게….”
이전에는 보여 줄 것 못 보여 줄 것 다 보여 주고, 묶이고 맞고 할 것 다 한 사이였다. 새삼 지금은 아랫도리까지 다 보이며 진료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그랬다. 간접적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한방에 있는 것이 민망했다. 원민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실에서 기다릴게요.”
원민준이 나가자 의사가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날 보았다. 뭐, 뭐지?
“정말 다행이에요. 애기 형질이 강할 것 같아서, 임신 후반부 어떻게 버티실지 걱정 많이 했거든요. 남자 오메가들은 새로운 자궁이 생겨서 아이를 품는 거 아시죠.? 그래서 장기 위치가 더 밀려요. 막달로 갈수록 통증이 심할 텐데, 남편 알파 페로몬 없이 버티기 힘드셨을 거예요. 정말 잘됐어요, 안심이네요.”
“아… 그랬어요?”
나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의사가 이렇게 걱정할 정도면 나 위험한 거였구나. 아마 출산 때까지 순순히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원민준이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것이다. 마음 한편으론 이 상황에 안심하는 내가 있었다. 그에게 도움받는 것에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무럭무럭 올라오는 죄책감을 애써 눌렀다.
***
나는 요즘 정말 잘 먹었다. 태어나 이렇게 식탐이 있어 본 건 처음이었다. 고기도 야채도, 심지어 생선도 잘 먹었다. 나는 민준의 맞은편에서 루콜라와 새우가 올라간 파스타를 열심히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살은 별로 안 쪘는데, 잘 먹네요. 산모들은 보통 더 살이 오르지 않나.”
나는 많이 쪘다. 의사 선생님이 이 정도 체중 증가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쪘다. 원민준이 아직 나를 좋아한다고 하긴 했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 불꽃같은 성욕이나 그런 건 느끼지 않을 것이다.
“저 많이 쪘어요…. 출산하고도 살 안 빠질까 봐 걱정인 걸요.”
“많이 먹어요. 난 옆구리에 러브 핸들 잡히고 그런 것도 좋아해요.”
“…베리에이션이 왜 이렇게 넓어요?”
여배우 윤신아를 사귀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 스테디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나였던 민준이다. 그는 꽤 오픈된 취향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아이를 가지기 전엔 나는 마른 몸이었다. 마른 몸 취향이 아니었나? 윤신아도 굉장히 날씬했었고….
“군살 있는 몸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군살 잡히는 이서윤도 귀여울 것 같아서.”
“…농담 좀 그만하세요.”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겨우겨우 선을 긋고 있는 나였다. 원민준이 도와주고 잘해 주는 건 다 좋다 친다. 그래도 가끔 이런 말을 툭툭 뱉는 덴 적응이 안 된다. 또 낯간지러운 말로 좋아한다는 어필을 하면서도 다시 어떻게 해 보자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청혼만 해도 그렇다. 내게 청혼할 생각이었다고 말했으면서 그 말도 다시는 안 꺼낸다.
…딱히 그렇게 말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들이대면서도 선을 긋는 원민준 이사의 태도는 이골이 났다. 얄밉다고 할까.
“피자도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고기 올라간 걸로 하나 시켜 줄까요?”
나는 볼이 터져라 파스타를 넣고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새우가 들어간 파스타가 정말 맛있긴 했지만 고기도 먹고 싶었다.
“이제 배부른데… 먹고 싶긴 해요.”
원민준은 내가 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손을 들어 피자를 주문했다. 나는 파스타를 오물거리며 원민준을 보았다. 왜 자꾸 윤신아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윤신아랑 데이트할 때도 이렇게 잘해 줬을까. 그러니까 그런 대단한 여자가 내 얼굴 보겠다고 쳐들어온 거겠지.
나는 에이드를 쪽 빨아 먹고 원민준을 보고 질문했다.
“윤신아는 피자를 좋아했어요, 파스타를 더 좋아했어요?”
나는 민준의 포크를 쥔 손이 한 번 크게 떨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옛 애인이란 주제는 원민준 같은 남자에게도 쥐약인 주제인가 보다. 나는 민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관심 없어서 주의 깊게 안 봤습니다.”
“…왜 관심이 없어요, 나랑 한 것보다 더 대단한 것도 많이 했을 텐데.”
원민준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살짝 찌푸린 낯이었지만 나는 그가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그런 플레이 하고, 그런 건 아닐 것 아니에요….”
나는 조금 소심하게 말했다. 그러나 볼멘소리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쩐지 원민준이 아까부터 말이 없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약혼까지 했었다면서요.”
“부모님끼리 알고 지내던 사이라 자연스럽게 혼담이 나온 사이입니다. 거기다 신아가 우성 오메가니까 부모님이 기꺼워하셨죠. 그뿐이고, 그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남자 오메가는 여자 오메가에게 열등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내 경우엔 딱히 다른 오메가들에게 열등감을 가져 본 적은 없다. 바라는 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윤신아의 날씬한 몸과 누가 봐도 우성의 것이던 상쾌한 향을 떠올리자 주눅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강하고 상쾌한 향. 그건 굉장했다.
나도 모르게 내 불룩 나온 배를 한 번 봤다. 어쩌면 이게 바로 산모 우울증인가. 저번에 산부인과에서 산모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날씬했던 산모 한 명이 자기가 몸이 불어난 것을 비관해 산모 우울증이 왔다고 한다. 맞다, 이건 산모 우울증인가 보다. 원민준이 누굴 사귀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몸으론 할 거 다 했으면서.”
이번에도 부정은 없다. 깊은 관계에 할 것 다 하고, 나랑 한 것보다 더 대단한 것도 많이 하고. 왠지 오늘따라 원민준 씨가 내세우는 감언이설도 없다. 나는 파스타에 남은 새우들을 푹푹 찔러 먹었다.
“…진짜 그런 관계였어요? 나랑 한 것 같은… SM 관계요…. 그런 사람 많았어요?”
“…윤신아가 첫 번째고 서윤 씨가 두 번째였습니다. 처음에 신아와의 약혼은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제가 혹할 만한 조건을 제시했죠.”
“아….”
“윤신아가 제게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의 관계를 가르쳐 주었죠.”
“그럼 천생연분이네요.”
윤신아가 자기 입으로 원민준과 자신은 천생연분이었다고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원민준 이사의 특이한 성 취향. 그가 좋아하는 결박이나 구속, 그걸 먼저 하자고 윤신아가 제의했던 건가. 확실히 특이한 성벽을 받아 줄 대상이라는 건 찾기 쉽지 않으니 혹했겠지.
“그냥 마음이 안 가더군요.”
원민준은 윤신아를 몇 마디로 간단히 정리했다. 그냥 마음이 안 가다니, 그렇게 예쁜 여자에게 어떻게 그렇게 쿨할 수 있는지 역시 원민준 이사다.
“윤신아는… 많이 잘했어요?”
원민준이 내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살짝 웃었다. 뭐야 저 은근한 웃음은.
“네.”
“오래 묶이고…? 막 한 시간 이상 잘 참고?”
원민준이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잘 맞고?”
원민준은 이제 대놓고 피식 웃었다.
“자기가 먼저 해 달라고 졸라서 내가 컨디션을 걱정해 줄 정도긴 했죠.”
“그럼 다시 만나면 되겠네.”
나는 더욱 볼멘소리를 냈다. 둘 다 에고이스트로 보이는 사람들끼리, 이상하고 돈 많은 사람들끼리 잘 만났네. 애먼 나 건드리지 말고 잘 만나보지.
“그래도 묘하게 취향에 안 맞고, 신경을 거슬러서 헤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윤신아가 저를 스토킹했죠.”
“…네?”
“출장 중이라 지방 호텔방에서 묵을 때, 칼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온 적도 있었고요.”
“어… 음… 사귀는 동안 그렇게 원한 살 일을 많이 하셨어요?”
원민준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원민준이 피식 웃다가 찌푸렸다.
“제가 그런 여자와 어울릴 정도로 수준이 이상하진 않습니다.”
“…….”
지금 내 수준도 내놓을 만큼은 아니므로 나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그래서 윤신아를 보고 정신 나간 여자라고 했던 건가. 칼을 가지고 호텔방에 침입하다니, 자존심이 강한가 보다. 자존심이 강해야 분해할 거고, 그러니 보복하려고 할 테니.
보통 이런 거, SM에서 M역할을 하는 타입이면 나처럼 자신감이 없거나, 또 잘 휘말리는 타입일 것 같은데 윤신아가 그런 건 의외였다. 하긴 어디서 듣기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피학 성향이 있다는 것도 들어 본 적 있다.
“서윤 씨, 태교에 안 좋으니 윤신아 생각은 그만하세요. 그런 이상한 여자 생각할 시간에 집에 가서 저랑 동화책 읽어요. 아기가 좋아할 겁니다.”
“아, 네.”
나는 마법의 단어, 태교에 홀려 고개를 끄덕였다.
***
원민준과 얘기를 나눈 후로 그날 하루 종일 윤신아가 신경 쓰였다. 연희와 원민준이 진짜 사귀는 줄 알았을 때도 질투하긴 했는데, 윤신아만큼 마음에 거슬리지는 않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윤신아와 원민준이 나랑 했던 것 같은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의 관계를 가졌었다는 것이 새삼 충격이었나 보다. 원래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는데도, 원민준의 입으로 들으니 새삼 놀라웠다.
집에 와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TV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얼마 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보고 싶다고 원민준에게 말했더니, 민준은 디즈니 DVD를 전부 다 사 왔다. DVD 플레이어도 사다 줬다. 원민준과 있으면 편하긴 하다. 임신을 하니 나도 아이가 되는지 애니메이션이나 가족 영화를 즐겨 본다. 태교에도 좋다고 하고. 한창 TV를 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 옆에 앉은 원민준을 보았다.
…언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는지. 요즘 정신 차려 보면 간식을 먹으며 원민준의 품 안에서 TV를 보고 있기 일쑤다. 좀 사육당하는 느낌인데 기분 탓이겠지…. 내가 TV에 푹 빠져 있으면 슬금슬금 다가와 스킨십을 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그의 아이를 가진 후로 나는 민준의 체향이 무섭지만은 않았다. 이전보다 더 친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태아가 아빠의 페로몬 냄새를 기꺼워하나 보다. 이렇게 몸을 붙이고 있으면 허리 통증도 가시는 것 같고 기분도 편해졌다.
“재미있었어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민준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잘래요?”
“예….”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일어날 때마다 원민준은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그의 부축으로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누웠다. 임신한 후로 배가 나오니 허리가 아플 때가 많다. 그렇게 말하니 원민준은 비서를 시켜 새 침대 매트리스를 보내 주었다. 비싼 침대가 좋긴 좋다. 몸이 출렁이며 매트리스에 부드럽게 감겼다. 나는 누워서 눈을 깜빡이며 민준을 보았다.
“…호텔 잡아 놓으셨어요?”
원민준이 일주일에 3일 정도는 우리 집에 오지만, 그때마다 민준은 근처에 호텔방을 잡아 놓고 거기에서 잤다. 집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볼 때도 많았다. 침대가 더블이긴 했지만 나도 이 남자와 한 침대에서 잘 자신은 없다. 여러 가지 의미로.
“네, 서윤 씨 잠들면 갈게요.”
나는 원민준의 옷깃을 잡았다. 아직 원민준과 어떤 사이가 되기를, 우리 사이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임신 후 몇 개월이나 나는 성관계가 없었다. 임신 후 성욕 증진이 일어나는 케이스가 많다는데, 내가 그 케이스였다. 나는 옷깃을 잡고 중얼거렸다.
“자고 가셔도 되고요.”
그러니까 원민준을 만져서 기분이 좋은 건 이 사람을 용서해서가 아니라 성욕 때문이었다. 원민준과 몇 달 헤어졌을 때, 마음이 많이 사그라들었을 때도 의외로 원민준의 몸 생각이 많이 났다. 이제 와 배부른 나에게 민준이 계속 성욕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원민준이 한 번 숨을 멈췄다. 원민준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키스해도 됩니까?”
나는 망설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민준이 내 팔을 잡아 부드럽게 끌어당겨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원민준이 조심스럽게 혀를 내 입 안에 섞었다.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뜨끈했다.
혀와 혀가 내 입 안에서 부드럽게 얽힌다. 원민준은 깨지는 설탕 과자를 녹여 먹듯 부드럽게 내 입술을 삼켰다. 나는 원민준의 손을 끌어 천천히 내 하반신으로 끌었다. 그가 그대로 손을 내 피부에 붙였다. 부드럽게 등을 쓸고 둔부께로 손을 가져다 댄다.
“우리, 우리 사이요….”
“네.”
“이걸로, 바뀌는 건 없으니까…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나는 원민준이 목을 깨무는 것을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내 성욕 때문에, 내가 원민준 씨 이용하는 거니까… 으응….”
“이서윤 씨 거니까 이용해도 돼요.”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나는 원민준의 오메가였다. 그러나 원민준이 나만의 남자였던 적은 없다. 그는 지금 자신이 나만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던 말이다. 한편으론 너무도 바라던 말이다.
“응. 불 꺼 줘요….”
“보고 싶어요, 오랜만에 서윤 씨 몸.”
“싫어요. 어서….”
나는 임신해 배가 나온 내 몸을 보이기 싫었다. 무엇보다, 내 몸은 묘한 모습으로 변했다. 평소 남자 오메가의 진짜 질은 직장 안쪽에 있다. 그러나 임신 시에는 축소된 자궁이 커진다. 그래서 회음부에 출산을 위한 여성형 외음부가 생긴다. 물론 그 여성기는 너무 좁아서 자연 분만은 거의 힘들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남자 오메가에게 직접 출산은 권유하지 않는다. 제왕절개가 아니면 거의 출산이 힘들다고 봐야 한다.
아주 옛날에는 남자 오메가가 아이를 무사히 낳을 확률이 아주 적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 오메가는 거의 불임이라는 인식이 있다. 우성 오메가가 아닌 이상에야….
원민준은 마지못해 불을 껐다. 원민준이 다시 내 몸 곳곳에 쪽쪽 키스하며 내 임부복을 벗기려 했다. 허벅지께까지 덮는 디자인이었다. 나는 그것도 고개를 저었다.
“내가 벗을게요.”
나는 꾸물꾸물 바지와 속옷만 벗었다.
“다 벗어요.”
“부끄러워서 싫어요.”
“오랜만에 서윤 씨 몸 보고 싶어요.”
“싫어요… 빨리 안 하면 안 할래….”
나는 원민준에게 칭얼대듯 말했다. 원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원민준 성격이라면 바로 ‘교육’에 들어갔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할 걸 안다. 내가 임부니까.
“내 몸, 이상해졌어요….”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원민준의 몸이 잠깐 굳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우성 오메가는 태어날 때부터 여성기를 타고난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갑자기 생긴 내 몸의 변화가 너무 창피했다. 원민준이 나를 부드럽게 눕히더니 상의를 들추고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아, 원민준 씨. 그러면, 아…!”
내 조그맣게 생긴 그곳에 원민준의 혀가 닿았다. 춥, 추웁 소리를 내며 원민준의 혀가 능란하게 움직였다. 여기, 엄청, 기분 좋아. 조그만 꽃잎들을 헤치고 원민준의 혀가 뾰족하게 파고들었다. 임신 시에만 생기는 곳인데도 거기는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원민준은 내 뒤쪽 구멍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손을 넣어 쑤셨다. 양 구멍이 쑤셔지니 혼이 나가도록 좋았다. 가뜩이나 욕구 불만이었던 나였다.
“으응, 아아, 응…! 응…!”
나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원민준의 머리를 쥐고 허리를 비틀었다. 원민준이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속삭였다.
“여기, 제대로 생겼네요. 다 있어요.”
“응…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야한 이서윤 몸에 딱이네.”
원민준이 내 발목을 쓰다듬다가 허벅지 안쪽에 다시 입 맞췄다. 달콤한 원민준의 페로몬이 내 열린 모든 구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온몸에 미열이 도는 것처럼 뜨거웠다. 꿀에 온몸이 절여지는 기분이다.
“어느 쪽으로 예뻐해 줄까, 응?”
원민준이 내 조그맣게 생긴 그 성기를 살살 간질이다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쑤시며 말했다. 애기도 듣는데 그런 말이나 하고,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너무, 좋아….
“늘 하던 곳으로….”
“거기가 어딘데?”
원민준이 내 귀에 속삭였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귓바퀴에 키스하며 살살 깨문다. 오랜만의 성관계라 나는 너무 하고 싶은데, 급한데, 혼자 여유 넘치는 민준의 모습이 얄미웠다.
“맘대로 이용해도 된다면서….”
나는 울컥해서 민준을 노려보았다. 원민준이 미소 짓는다. 혼이 나갈 만큼 수려한 미소다. 그가 내 귀를 긁으면서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싫어요, 이제 그런 거 안 할래….”
“나 이용하려면 내가 좋아하는 걸 해 줘야죠, 그래야 공정하지?”
나는 그 말에 원민준을 내려다보다가 꾸물꾸물 일어났다. 원민준이 침대 옆 작은 스탠드 조명을 켰다. 불빛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걸 느끼면서 나는 한쪽 엉덩이를 스스로의 손으로 벌렸다.
“저기 민준 씨….”
“네.”
“늘 넣어 주시던 구멍으로 넣어 주세요….”
원민준이 숨을 들이켰다. 그가 나를 옆으로 눕혔다. 그리고 한쪽 다리의 무릎 안에 손을 넣어 다리를 올렸다. 엉덩이 골 사이 그의 큰 성기가 느껴졌다. 그는 이미 충분히 발기해서 배에 닿을 듯 부풀어 있었다. 그는 옆에 누운 상태로 성기를 지긋이 집어넣었다. 원민준은 참으려 노력하며 가능한 한 부드럽게 움직였다. 너무 부드러워서 나는 약간 아쉬움마저 느꼈다.
“으응, 너무 오랜만이라… 아!”
“너무 좋아, 이서윤….”
“저도… 요….”
나는 숨을 들이켰다. 원민준도 더운 숨을 쉰다. 내 숨과 그의 숨이 얽힌다. 원민준이 끊임없이 내 목덜미에 키스했다. 내 팔을 잡고 천천히 성기를 쑤신다. 놀라지 않게. 퍽 자상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는 원민준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몸 모든 곳은 원민준을 기억하고 있었다. 원민준이 손을 돌려 앞으로 내 성기를 잡았다. 속도를 맞추어 민준이 몸을 움직였다. 맞닿은 곳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으응, 안에는… 안에 싸면 좀 그래요….”
“알았… 어요.”
한참을 움직이던 그가 사정하려는 걸 느끼고 나는 구멍을 한 번 조였다 풀며 말했다. 원민준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며 성기를 쳐올리자 조금 걱정되었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안쪽을 비비는 굵고 큰 성기를 느끼며 나는 묽은 정액을 토했다. 민준이 성기를 빼내서 내 등에 사정했다. 나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쾌감을 느끼며 몸에 힘을 풀었다. 민준이 휴지를 뽑아 와 내 등과 성기를 닦아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짓궂게 회음 아래로 들어가 새로 생긴 그곳을 살짝 긁었다.
“여기도 젖네…. 한번 여기도 개통해 줘야 하는데.”
“그런 말 하지 마요….”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민준이 이쪽으로 하려고 할까 봐 약간 걱정되었다. 너무 좁아서 안 될 것 같은데….
“애기 듣는단 말이에요. 그리고 거기로 하면 위험하댔어.”
“알겠어요.”
민준이 약간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 나른한 숨을 쉬며 누워 나를 뒤로 끌어안았다. 원민준의 손이 불룩 나온 배를 만진다. 아기가 놀랐는지 발차기를 한다.
“아, 방금 찼어요.”
민준이 배를 어루만지며 달랬다. 그 손길이 묘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네….”
나는 아직도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끄덕였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너무 좋았다. 원민준은 계속 나를 어루만지며 후희를 했다. 나는 목을 울리며 기분 좋게 몸을 내맡겼다.
“기분 좋았어요….”
“나도요.”
원민준이 나를 안고 말했다. 그가 한참을 내 냄새를 맡으며 숨을 쉬다가 내가 거의 잠들 때쯤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살아요.”
원민준이 뒤에서 나직하게 말했다. 퍽 달콤하게 들리는 어조였다. 들려던 잠이 깼다. 여태 마음먹은 것도 잊고 가슴이 떨렸다. 한 번만 더 믿어 볼까, 하게 하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내가 평생 잘할게요. 나랑 같이 살아요. 아이에게도 잘할게요….”
“…오메가 애일 거예요.”
나는 침을 삼켰다.
“의사 선생님이 형질이 있다고 했단 말이에요. 당신이 바라는 우성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 아이일 거라고요.”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오메가 아이라도 내겐 마찬가지로 사랑해야 할 아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민준의 집에선 아니었다.
“상관없어요. 오메가 아이라면 더 잘 돌볼게요. 우성 알파 아이를 가족들이 바라는 건 맞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오메가와의 아이인 것이 더 중요해요.”
내 심장이 잔잔하게 뛴다. 처음부터 민준이 그렇게 말해 줬다면 내가 맘고생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우성 알파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이유로 민준은 나를 상처 주었다. 나를 배우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잘….”
민준이 내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민준의 침묵 속에서도 내 심장은 뛰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음은 떨렸지만 몸은 아주 평온했다. 잠결에 원민준이 따뜻한 타월로 내 몸을 닦아 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깨지 못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
어느 날 주말, 나는 원민준 씨에게 말했다.
“민준 씨, 애기한테 얘기 좀 해 주세요.”
내가 몇 번이나 이렇게 말했는데 이상하게 원민준 씨는 태담을 해 주지 않았다. 아기 태명인 반짝이도 자주 불러 주지 않는다. 그래도 애 아빠 노릇 하겠다면서 왜 묘하게 이런 것만 해 주지 않는지. 다른 건 다 잘하면서.
민준이 아이에게 사실은 무관심하면서도 관심 있는 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전부터 했었다. 태담을 피할 때마다 나는 그 생각에 미약한 확신을 보탰다.
역시 알파 아이가 아니라서 싫은 건가. 그냥 나를 붙잡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가, 하고.
“이따가 해 줄게요.”
“지금 해 주세요.”
나는 옷을 들춰 배를 보이면서 말했다. 내 배는 한층 더 불러 있었다.
“튼 살 크림 바를 때 되지 않았어요?”
원민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말을 또 돌렸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튼 살 크림 바르고 해 주세요….”
그 말에 원민준도 더 도망갈 구석이 없는지 알겠다고 대답했다. 긴 손가락과, 큰 손으로 내 배를 문지르며 마사지를 해 주었다.
“애기 태명 부르면서 태담 해 줘야 태교에 좋다는데….”
물론 원민준이 천사같이 생기긴 했지만, 나는 그 특이한 성격을 익히 알았다. 무럭무럭 예쁘게 자라라, 이런 태담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하는 시늉이라도 해 줄 순 있는 거 아닌가. 내가 원민준을 선택하려면 민준이 나와 아이 모두를 사랑해 준다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아이에 대한 애정이 없는데 그냥 나를 데리고 있고 싶어서 그런 척하는 거라면…. 무관심한 나쁜 아빠는 우리 아기에겐 필요 없다. 민준을 짝사랑할 때 워낙 맘고생을 해서 그런지 나는 가끔 불현듯 경계심이 들었다. 원민준은 매우 어색해하면서 내 배에 귀를 댔다.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네요.”
“이건 태담이 아니잖아요. 애기한테 말 걸어 주세요.”
원민준은 조금 곤란한 듯 미소를 짓더니, 배를 두어 번 따뜻하게 쓰다듬었다.
“엄마만큼만 예쁘게 태어나요. 그리고 엄마 속 썩이지 말고.”
민준이 말이 퍽 진심인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엄마보단 예쁘게 태어나야죠.”
“왜요, 엄마만큼 예쁘기도 얼마나 힘든데, 지금만 해도 정말 예뻐요.”
음… 자존감이 높지 않은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어디로 도망가고 싶어진다. 나는 어쩔 줄 모르다 상의를 내려 배를 감췄다.
“다른 건 다 잘해 주면서 왜 태담만 싫어하는지….”
“낯간지럽잖아요.”
“나한텐 매일 낯간지러운 말 하잖아요….”
“그냥 내가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
나는 말없이 원민준을 빤히 보았다. 내가 임신한 후로 이렇게 쳐다보면 원민준이 알아서 모든 걸 다 해 준다. 속내도 털어놓고 자백도 한다.
“알았어요, 그냥 질투가 나서 그랬습니다.”
“질투요?”
“서윤 씨는 지금도 아기 생각뿐인데, 아기가 태어나면 나에게 정 떼고 관심도 끊을까 봐.”
남잔 다 애라더니 원민준마저 그럴 줄이야. 나는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아, 아가 태어나면 뭐… 아가 낳고 우리가 같이 살기로 한 것도 아니고….”
나는 어물어물 말했다. 민준에 대한 마음이 새삼 다시 생기고 있는 건지. 이런 말을 들으면 가끔 부끄럽고 두근댄다.
“그러니까 더 그렇죠. 태어나면 아빠 버리고 아기만 안고 다시 도망쳐 이서윤의 세계에 꽁꽁 숨어 버릴까 봐.”
“…안 그래요….”
나는 빨개져서 어물어물 대답했다. 원민준이 나를 보다가 갑자기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폭 안긴다. 심장 터질 뻔했네. 나는 원민준을 슬쩍 밀어냈다. 넘어가면 안 돼, 넘어가면… 모르겠다. 원민준의 체온이 따뜻하다.
***
원민준은 시간이 나는 대로 평일 저녁이나 주말마다 비행기를 타고 내 작은 집이 있는 지방을 오갔다. 여기서 편하게 쓰려고 차도 두고 다녔다. 어느 날 평일 저녁 민준이 일찍 내 집에 왔다.
“우리 어머니 한 번 만나 볼래요?”
저녁을 먹으러 나온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아 식사를 하던 중 민준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는 먹고 있던 가지구이가 체할 것 같아서 겨우 포크를 내려놓았다.
“네…?”
“우리 어머니요, 동시에 우리 애기 할머니.”
“…제가 왜요?”
“이유는 너무 많죠,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가 더 설득하기 쉬우니까요.”
원민준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중의적인 말인데도 많은 걸 압축하고 있다. 그것도 중요한 주제가 갑작스런 타이밍에 나온다. 순식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 어머니도 저 임신한 거 아세요?”
“당연하죠. 아버지와 그 난리를 쳤는데 어떻게 모릅니까.”
“그럼 저….”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원민준 씨와 몸을 섞고부터 우리 관계를 아직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아이를 낳고 나서 원민준 씨와 완전히 관계를 단절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다.
“무슨 설득을 해야 하는데요?”
민준이 설핏 웃었다. 그는 우리 결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원민준과 결혼할 생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민준의 어머니가 궁금하긴 했다. 무엇보다 아기의 할머니니까….
“싫다면 만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네. 물론이죠.”
“민준 씨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각인한 알파와 오메가, 한 쌍의 잉꼬 커플입니다. 체통이 무색하게 금슬이 좋다고 평가받는 중년 부부죠.”
“켁.”
나는 먹던 주스를 쏟을 뻔했다. 그런데 그 금슬 좋은 부부, 그리고 화목한 가족 아래서 왜 이런 성격의 아이가 태어났지…? 우리 애도 혹시 원민준 씨처럼 타고나게 성격이 더럽진 않겠지? 내 고민하는 얼굴을 보고 원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역시 독심술 하는 안드로이드다.
“각인한 알파와 오메가 커플 사이에서 자란 아이는 대체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고, 자기 세계가 강하다고 하죠. 부모님의 견고한 세계에서의 분리를 일찍 경험하며 자라니까요.”
“그렇구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건 그렇고 나나 원민준 씨나 성격이 독특한 부분이 있어서 애기도 개성이 강할까 걱정이었다. 사람은 둥글둥글 유순하게 사는 게 최고다.
교양 있는 집 자식들이라면 으레 각인의 위험성에 대해 배우고 자라기 마련이다. 요즘이야 각인도 정신 질환의 일종으로 분류하니 마니 하고 미리 예방 주사도 맞고 하는 실정이지만. 가끔 정말 각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들었다. 그런데 그게 원민준 씨의 부모님일 거라곤 생각을 못 했다.
“아마 원민준 씨 부모님은 우리 애기 인정 안 해 주시겠죠?”
나는 답을 알면서도 풀이 죽어 말했다. 꼭 민준과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친척이나 가족이 없어서 그런지 애기에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으면 좋겠단 욕심이 들긴 했다. 우리 애기는 나보다 사랑받고 자랐으면 했다. 이것도 내가 고아라서 하는 생각일까.
“언젠가는 하실 겁니다, 10년, 20년 후에라도….”
“…왜요?”
“제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선 아이를 볼 생각이 없고, 두 번째는 제가 서윤 씨와 각인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
역시 원민준은 미친 사람이다.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에코 사운드로 머리에서 뭔가가 울렸다. 각인, 각인, 각인. 우성 알파가 열성 오메가와 각인? 진짜 정신이 나갔나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