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0)

“각인은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오는 거 아니에요? 요즘 세상에도 각인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부모님….”

“아니 원민준 씨 부모님 말고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을 끊었다.

각인이란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화학 작용이었다. 지금껏 많은 학계에서 각인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언제나 결론은 각인이란 정신 병리학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각인을 하면 서로만을 암컷과 수컷으로 인식한다. 또 알파가 각인을 하면 각인 오메가에게서만 자식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건 오메가도 마찬가지다. 각인은 알파와 오메가 서로에 대한 영원한 구속이다. 각인은 보통 알파의 러트나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을 같이 보낼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하면 우성 알파인 원민준 씨, 세상에서 가장 멋진 유전자를 가진 남자 중 한 명일 이 남자가 열성 남자 오메가인 나와 각인하겠다는 거다. 그리고 그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뭐 이런 침착하게 미친 사람이 있지.

“그리고 누가 각인해 준대요? 왜 자꾸 나한테 안 물어보고 내 일 결정해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청혼도 안 하면서 각인? 아니, 딱히 청혼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아, 안 된다. 또 말려 들어가고 있어. 저 잘생긴 얼굴만 보면 나도 모르게 어어, 하면서 내 정신이 원민준 사이드로 다이빙할 준비를 하는 게 문제다.

“저는 이서윤 씨랑 각인하고 싶은데요.”

“…….”

“서윤 씨는 싫어요? 나를 못 믿는 게 문제였잖아요, 각인만큼 나를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각인하면 상대의 마음이나 기분까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고 하잖습니까.”

나는 입을 벌리고 있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역시 원민준 씨는 정신 건강에 안 좋다. 여러모로. 홀리는 것 같다.

“…몰라요, 진짜. 각인 같은 건 위험한 거고… 우리 둘이 하고 싶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죠.”

“…….”

“그럼 부담 가지지 말고 어머니만 만나 봐요,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네.”

나는 그에게 또 말린 걸 느꼈다. 각인은 거절해도 어머니를 만나는 것까진 거절하긴 힘들어 네, 라고 곧바로 대답해 버렸다.

원민준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런 타입이 정치를 하면 위험할 것 같다. 막 추종자들을 세뇌할 거야. 어쨌든 여러모로 그의 부모님이 궁금했기에 나는 내뱉은 말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

평일임에도 다음 날 오전에 민준은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카페로 출근하자 가게 한쪽에 앉아 한산한 카페에서 일을 봤다. 원민준은 가끔 이렇게 카페에 앉아서 내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물론 카페 일을 그만두는 문제로 몇 번 언쟁이 있었다. 내가 이겼다.

그나마 근무 시간이 하루에 네 시간 정도라 아직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이 점점 무거워져서 이번 달까지만 일하기로 인철 형과는 이야기를 해 놓은 상태다. 일이 싫어서 그만두는 건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의외로 사무직보다 카페 같은 곳에서 접객업을 하는 편이 나한테 맞는 것 같다.

이 카페엔 진상 손님도 없고, 바리스타 일을 배우는 것도 재미있다. 인철 형도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했다.

“아이고, 원 이사님 오셨어요? 오늘은 뭐 드실래요?”

“…….”

참고로 인철 형은 원 이사에게 홀렸다. 원민준을 임신 기간 동안 받아 주기로 한 다음 날 내가 카페에 근무할 때 민준이 왔다. 그리고 인철 형이 자랑하는 코스타리카산 원두 드립 커피를 청했다. 몇 모금 마시고 원민준이 말했다.

“맛 괜찮네요, 블랜딩 커피 하나만 추천해 주시겠어요.”

난 미리 인철 형에게 원민준 이사는 나쁜 사람이라고 주입을 시켰다. 그러나 덧없었다.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잘생긴 우성 알파 남자가 나긋이 뭐라고 말하면 보통 사람은 홀린다. 심지어 베타 남성도 말이다. 인철 형이 자가 스페셜 블랜딩 커피를 새로 만들어 내왔다. 원 이사가 몇 번 입맛을 보더니 부드럽게 물었다.

“원두를 직접 수입하시나 봅니다.”

“네, 제가 외국 커피 농장에 친구들이 좀 있어서요. 남미 여행 때 농장 친구들을 좀 터놨죠. 제가 브라질에까지 지인이 있다니까요. 브라질 산토스도 한번 마셔 보실래요?”

“어쩐지 커피 맛이 좀 다른 것 같더군요. 사연이 궁금해지네요.”

“제가 대학생 때 여행을 다니다가 좀 특수 지역도 많이 가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워낙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 농장들을 돌았죠. 종종 거기서 일해서 경비도 벌고, 그러다 몇 군데 농장 주인들하고 친해지니까, 외국 지인들도 막 연결을 해 줘서요. 그래서 저희 커피들은 대부분 다 산지 직송 원두를 씁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만 와서 마시는 커피 명소가 되었죠.”

“남다르네요. 커피숍 이름도 좋고요.”

참고로 우리 카페 이름은 곽인철 커피다. 형 대단한 사람이다 진짜…. 자기 이름으로 커피숍을 냈다. 왜 이렇게 했냐고 했더니 곽인철이 커피를 만드는 곳이라고 했다. 원 이사가 천상의 미소로 살짝 웃었다.

“이 정도면 어디서든 충분히 통하겠네요. 인테리어도 이만하면 괜찮고, 제가 서울 I동 길 쪽에 건물이 하나 있는데 1층에 마침 빈 곳이 있습니다. 애기 낳으면 서윤 씨 이름으로 카페 하나 내주려고 했는데, 곽인철 커피 서울점도 괜찮을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프랜차이즈비는 지불해야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 인철 형은 원민준을 귀인이라고 불렀다. 가끔 그런 남잘 왜 놓치냐며 어서 꽉 잡아서 내게 계약을 달라고 종용도 한다. 파렴치한 자본주의자 같으니….

나는 오늘따라 얄미운 인철 형의 뒤통수를 팍 노려보았다. 아. 속 터져. 인철 형이 빠르게 내온 커피를 우아하게 마시는 원민준 씨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원민준 씨의 어머니는 내가 있는 지방 도시 번화가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른을 만나는 거니까 내가 서울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원민준 씨가 단칼에 어머니를 이쪽으로 모시고 오겠다고 했다. 산부한테 오라 가라 하는 것이 더 예의가 아니라고. 임신을 한 이후로 먼 거리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준비 다 했어요…. 지금 나가려고요.”

외출 준비를 하고 나는 민준에게 전화를 했다.

- 그래요, 이쪽은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것 같아요. 혼자 올 수 있죠? 몸이 무거워서 걱정이네요.

“괜찮아요, 가까운 외출인데요…. 택시 타고 가려고요.”

- 저번 주에 내가 두고 간 차 타고 오지 그래요. 운전하는 편이 낫지 않아요?

“너무 비싼 차라 부담스러워요. 그리고 민준 씨 어머니 만나는데 제가 원민준 씨 차 타고 나타나면 뭐라고 생각하시겠어요.”

- 그것도 그렇네. 곧 봐요.

“네… 금방 뵐게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 원민준이 타고 있는 차 옆자리엔 그의 어머니가 앉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날 달가워하시진 않을 텐데 어떤 모습으로 대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아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원래는 좀 더 단정하게 입어야겠지만 임신 후반기라 정장을 입을 수도 없었다. 결국 늘 입던 임부복 중 하나를 깨끗하게 드라이클리닝 해 입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선 대로변으로 나가야 했다.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낯익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윤 씨, 잘 지냈어요?”

단발머리에 늘씬한 몸매, 연예인 윤신아였다. 별로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윤신아는 처음 보는 밴 앞에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연예인용인 물건이라 온 창문이 다 까맣게 선팅되어 있다.

“나한테 전화 안 하더라고. 왜 그랬어요? 나 기다렸는데.”

정말 화사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실물은 살짝 요사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를 볼 때마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민준이 이 여자를 보고 정신이 이상한 여자니 조심하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로서도 딱히 호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딱히 제가 전화할 이유가 없어서요. 무슨 일이세요?”

“잠깐 가서 나랑 이야기 좀 해요. 민준 오빠 일로도 할 말 있고.”

“죄송한데 약속이 있어서요….”

“잠깐이면 되는데. 민준 오빠 만나러 가요?”

그때 그녀가 지은 표정은 꿈에 나올 것 같은 소름 끼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보았다. 나는 흠칫했다.

“죄송한데, 그만 가 주세요. 실례할게요.”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밴을 스쳐 지나가는데, 밴의 뒷좌석이 열렸다.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나왔다.

“빨리 잡아!”

윤신아가 작게 외쳤다. 남자가 내 팔을 쥔다. 나는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 순간 남자가 내 입에 솜을 가져다 댔다. 솜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나는 몸을 비틀었다. 그러다 천천히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신아야, 진짜 이 새끼 맞아?”

“응, 맞아.”

“이건 임신 막달 아니야…? 이거 정말 뗄 수 있어?”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나는 눈을 떴다. 부자유스러운 몸이 느껴진다. 나는 지금 양 손발이 묶여 있다. 손을 보자 청 테이프가 양 손목에 돌돌 말려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 답답했다.

방 안은 처음 보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쳐서 나는 흠칫 놀랐다.

“눈떴네.”

“서윤 씨, 일어났어?”

신아가 늘씬한 몸으로 걸어온다. 정신병자. 원민준이 했던 말이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테이프 좀 떼 봐. 소리 지르면 바로 때려.”

남자가 주저하며 내 입을 막았던 테이프를 뗐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많이 묶여 봐서 익숙할 줄 알았는데 무서웠나 봐, 민준 오빠 취향이 바뀌었나? 요즘은 그런 거 안 해 줘요?”

윤신아가 천사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너무 놀라 입이 굳었다. 칼을 들고 원민준의 방에 침입했던 여자. 이전에 그녀를 봤을 때부터 그녀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납치까지 감행할 줄은 몰랐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푸세요. 이거 범죄예요.”

“소리 지르면 때릴 거예요. 이 무서운 오빠가.”

윤신아가 상황에 맞지 않게 웃었다. 그리고 뒤쪽의 남자를 가리킨다.

무슨 속셈으로 나를 납치한지 몰라도 이건 윤신아에게도 자살행위였다. 윤신아는 광기에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좁은 창문이 있는 창고 같은 방. 빛이 들어오는 걸 봐선 1층은 아니고 2층이나 3층인 듯했다. 창문은 신문지로 가려져 보이는 것이 없다. 방은 몹시 추웠고 나는 코트가 벗겨진 채 간이침대에 눕혀져 있다. 그리고 윤신아의 공범자로 보이는 남자가 나를 본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범죄에 익숙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험악하게 생긴 남자였지만, 남자의 초조함이 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승우 오빠, 그렇게 서성거리지 마.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 한배 탄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잘 끝날 거야. 오빠 돈 필요하다며.”

“그래도 이건 너무 범죄잖아, 신아야…. 얘가 진짜 협박범 맞아? 술집 다니는 애라며…. 그런데 이건….”

“맞다니까.”

상황을 조금 짐작할 만했다. 저 승우라는 남자를 돈으로 유혹해 윤신아가 나를 납치하라고 사주한 것 같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임신을 해 남자를 협박하고 있는 오메가라고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윤신아는 영악했다. 나는 팔다리를 움직였다.

“저, 저 좀 도와주세요….”

나는 남자를 향해 가느다랗게 말했다.

“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속으신 거예요. 그리고 윤신아 씨, 저 민준 씨 만나러 가던 중이었어요. 그 사람이 찾아내는 거 시간문제에요. 그렇게 되면 윤신아 씨도 무사하지 못할 걸요.”

“…….”

“원민준 씨 무서운 거 신아 씨도 아시잖아요….”

설상가상으로 배가 욱신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 때문일지도 몰랐다. 임신 8개월이라도 조심하라고 했는데, 우리 아기, 어쩌지. 아기…. 나는 그 둘에게 가늘게 부탁했다.

“지금 풀어 주시면 원민준 씨한테 아무 말도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 약속 지킬게요.”

“너 진짜 바보야?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윤신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고 코웃음 쳤다. 도대체 원민준이란 남자가 이렇게 정신병자 같은 짓을 감행할 가치가 있는 남자인가?

“오빠, 얘 말 듣지 마요, 그렇게 내 약혼자 홀린 애가 얘야. 갈보 같은 게, 그렇게 홀려서 임신했다니까. 어차피 지금 얘 풀어 주면 누구 인생 좆 될 것 같아? 오빠 부양가족 생각해야지.”

승우라는 남자는 윤신아의 말에 넘어가는 듯했다. 나는 눈앞이 깜깜했다.

“입 다시 막아.”

윤신아가 내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고 다시 내 코에 마취약 냄새가 나는 솜을 들이댔다.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있으면…. 내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아이가 무사해야 하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 따뜻한 음식 냄새가 나고 있었다. 승우라는 남자가 스프 그릇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입은 막혀 있지 않았다.

“먹어요, 남기지 말고.”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가 들이대는 숟가락을 피했다. 음식에 뭘 넣었을지 몰랐다.

“아, 안 먹어요….”

“눈치 빠르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짜 안 먹어요. 빨리 저 좀 풀어 주세요, 제발….”

윤신아가 그릇을 대신 받아서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미묘하게 나사 풀린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자기는 자연 유산하게 될 거야. 나는 절대 물리적으로 폭력은 휘두르지 않을 거예요. 다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내가 준비한 약 먹으면, 8개월이 아니라 9개월이 된 애라도 떨어진대.”

“…….”

“그리고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나면 여기서 나가는 거예요. 약물 검출되지 않을 때까지만 가둬 둘게. 물론 서윤 씨가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을 내 탓이라고 우기면 안 되니까 영상만 몇 개 찍어 둘 거예요. 촬영은 바로 시작할 거고.”

“…….”

“그러게 왜 주제넘게 남의 남자를 넘봐요, 네? 원민준 씨를 그런 취향으로 만든 건 저예요. 그걸 이용해서, 잠깐 사이가 멀어졌다고 이렇게 파고드는 거 반칙이잖아, 우리는 완벽한 커플이었어요. 우리 사이 갈라놓은 죄 받는다 생각하세요.”

대꾸해 줄 가치도 없는 미친 소리들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빨리 풀어 주세요, 당신 제정신 아니야.”

“참, 그리고 민준 오빠가 나한테 돌아올 때 죄책감이 있으면 안 되니까, 마지막 날 승우 오빠가 얼굴은 좀 긁어 놓을게요. 아마 당신 얼굴이 볼만하게 되면 나한테 보복할 생각도 잊을 걸요? 그쪽이 누군지도 잊을 테니까. 그런 사람인 거 자기도 잘 알죠?”

“…….”

“왜 표정이 그래? 자기 같은 사회 밑바닥층 오메가 하나가 나한테 해코지당했다고 떠들며 다닌다고 해도 내 인생 안 망해. 나나 민준 오빠 같은 사람은, 자기랑은 달라. 그러니까 헛된 꿈 꾸다, 더 다치지 말고 여기 있는 동안 나 시키는 대로 따라요. 그럼 사지 보전은 할 테니까. 너 같은 연놈들 몇 어떻게 돼도 민준 오빠랑 나는 결합해서 잘 살걸? 주제 파악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미친 여자가 아니었다. 자기가 겪을 피해며 상황을 모두 계산해 놓았고 냉정하게 이런 일을 벌였다. 물론 이 일을 벌인 이유나 행동, 사고 패턴 같은 것은 정상이 아니다. 거기다 협박용 영상까지.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계획을 한 것이다. 그 계획의 현실성과는 별개로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이다. 그러니 이 여자는 미친 여자가 아니라 악한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류였다. 원민준이 누군가가 정말로 싫다거나 정신병자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그녀의 본성을 민준은 알고 있었다.

나는 애를 뗀다는 시점에서 이미 정신을 놓았다.

“애한테 손대지 마요.”

나는 그녀에게 외쳤다. 그녀는 도리어 측은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내 머리가 점차 패닉으로 물들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경찰차 소리가 들린 것은. 승우라는 덩치 큰 남자가 흠칫 놀랐다.

“신아 너 나가서 좀 보고 와.”

“내가 왜? 아무 일도 없어.”

“아까부터 계속 경찰차가 순찰하던데, 이 사람 찾는 걸 수도 있어. 얼굴 가리고 좀 보고 와 봐.”

“알았어, 빨리 걔한테 한 그릇 다 먹여.”

“내가 알아서 할게.”

윤신아는 문을 닫고 나갔다. 승우라는 남자는 윤신아에게 사주를 받고 이 일에 동참한 것 같다. 이쪽 남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윤신아가 그를 속인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 나는 아기를 품은 배를 남자에게 보여 주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아직 안 늦었어요…. 우리 애기 잘못되면 저도 죽어요…. 사람 죽일 생각까지는 없으시잖아요. 제발요, 신고 안 할게요.”

“안 돼.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발 못 빼.”

남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윤신아가 무엇으로 이 남자를 구워삶았을까.

“돈은 저도 달라는 대로 드릴게요. 어떻게든…. 경찰 와도 제가 감싸 드릴게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그때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흠칫 놀라더니 그릇을 내려놓았다. 윤신아가 급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밖에 경찰 쫙 깔렸어. 그리고 사설 경호 업체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 근처 들쑤시고 다녀.”

“어떻게 알아낸 거지? 핸드폰도 부쉈는데.”

“오빠, 이 새끼 옷 다 벗겨. 어디 GPS 장치 붙어 있을지도 몰라.”

남자가 쳇,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내게 다가와서 다리 쪽 청 테이프를 풀었다. 그리고 먼저 바지를 벗기려 손을 들었다. 나는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을 걷어찼다. 쿵쿵대는 소리가 더 커진다. 나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윤신아가 내 몸을 잡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나는 급하게 문에 달린 잠금을 열었다. 초인적인 힘이 나왔다. 경첩이 고장 났는지 아슬아슬하게 문이 열렸다. 천운이었다.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윤신아가 내게 매달린 틈을 타 승우라는 남자가 달려들었다. 나는 복도에서 쓰러졌다.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팠다. 쓰러지며 허리에 강한 통증이 왔다.

“민준 씨….”

그때 복도 저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민준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날 보더니 눈이 커진다. 나는 원민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윤 씨!”

윤신아가 황망한 눈으로 문간에서 나를 본다. 원민준이 다가와 나를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 오빠….”

원민준은 나를 조심스레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민준이 신아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윤신아의 뺨이 몇 번 쫙 돌아간다. 윤신아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신아야.”

민준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러나 눈빛은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그가 윤신아를 보며 빠르게 말한다.

“오빠….”

“신아야. 너 지금 내 오메가에 손댄 거야, 네가 네 인생 말아먹은 거다. 내가 평생 너 인생 괴롭게 만들어 줄 테니까 기대해.”

원민준이 윤신아의 멱살을 잡아 밀쳤다.

“저깟 게 뭐라고….”

“닥쳐.”

원민준이 다시 윤신아의 뺨을 갈겼다. 윤신아의 고운 얼굴이 온통 터졌다. 저 사람도 지금 이성을 잃었다. 나는 민준을 불렀다. 복도 안에 원민준의 페로몬이 자욱했다. 승우라는 남자가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민준을 바라본다. 남자는 맹수 앞의 닭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민준 씨, 의사 좀 불러 주세요….”

나는 무겁게 몸을 누르는 민준의 페로몬을 느꼈다. 나는 그를 애타게 불렀다.

“민준 씨.”

민준이 급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둘러업었다.

“배가 아파요.”

“금방 병원 데려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민준이 나를 엎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쓰러진 이후 계속 배가 아팠다. 오래된 건물을 나왔으나 나는 어딘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경찰들이 나를 보고 놀라서 다가왔다. 원민준은 급히 나를 차에 태웠다.

“민준 씨, 저 피 나요….”

“지금 바로 병원 갈게요. 멀지 않아요. 늘 보던 의사 선생님 보는 거예요. 놀라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어떻게든 해 줄게요. 내가 다 해결할 테니 걱정 말아요.”

민준이 파랗게 질려 내게 몇 번이나 속삭였다. 나는 흐느껴 울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

나는 옮겨지는 과정에서 한 번 의식을 잃었다.

“바로 제왕 절개 들어가야 해요.”

“보호자분, 수술 동의서 서명 부탁드립니다, 산모님 잠깐 놔주시고요, 지금 바로 수술실 들어갑니다.”

“긴급이라 전신 마취해야 해요.”

정신이 들었을 때 주변이 시끄러웠다. 주변이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겨우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자 어지러운 사람들이 파노라마처럼 흔들렸다. 나는 이동 침대 위였다.

이동 침대가 크게 한 번 덜컹하고 멈췄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차가운 손이 떨어지려는 듯 움직였다. 낯익은 감촉이다. 아직도 내 하체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아이는 아직 내 배 안에 있다. 몸이 묵직했다. 나는 떨어지려는 손을 잡고 속삭였다.

“미, 민준 씨, 원민준 씨.”

“…네.”

원민준이 숨을 몰아쉬며 짧게 대답했다. 그의 숨소리가 그렇게 절박하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원민준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수술 들어가요?”

“조산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바로 낳으면 괜찮대요.”

우리 아이는 아직 잘못되지 않았다. 마취를 기다리며 나는 원민준의 손을 놓치기 싫어 더욱 꼭 쥐었다.

나는 아이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나는 두 번째였다. 아이는 살아야 했다.

“저 혹시 잘못돼도… 나 피 안 멈춰 서 어떻게 돼도 우리 애 꼭 돌봐 줘야 해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리고 아이는 내가 잘 돌볼 겁니다, 서윤 씨랑 같이요.”

“의사 선생님이 애기가 형질이 있다고….”

눈앞이 가물거렸다. 의사가 마취를 하기 위해 내게 다가왔다. 마스크를 쓴 수술복 차림의 의사가 거대하게 느껴졌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민준의 팔을 꼭 잡았다. 마취관이 다가왔다.

“남자 오메가 아기라고 외면하면 안 돼요, 꼭….”

“서윤 씨는 잘못되지 않을 겁니다. 다 괜찮을 거예요. 아이도 무사할 거고요. 내가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원민준의 말은 내게 퍽 위안을 주었다. 허리 아래가 너무 아팠다. 아이도 아파하고 있을까?

“혹시 저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한테 꼭 전해 주셔야 해요. 엄마가 아빠를 좋아해서 가진 아이라고, 꼭….”

나는 마취되는 것을 느끼며 민준의 눈을 그제야 보았다. 민준의 눈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이 차가운 남자가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민준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긴 속눈썹에서 무거운 눈물이 한 방울 눌러 떨어졌다. 그가 한 번 숨을 골랐다. 이 사람도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나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 때문에 슬퍼하고 있었다.

“다 괜찮을 거예요, 우리 애는 행복한 부모 아래서 자라게 될 겁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위로하려고,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였다. 이윽고 정신이 암전되었다.

***

결론적으로 나는 죽지 않았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 나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파를 찍었지만, 나는 무사했다. 그리고 아이도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의사는 원민준 씨를 칭찬했다. 구급차를 기다리지 않고 나를 바로 병원으로 옮겨서 둘 다 무사했다는 것이다. 조산아가 된 아가는 지금 인큐베이터에 있다. 나도 아직 보지 못했다. 미리 알고 있던 대로 남자아이였다.

“8개월이면 아이가 거의 형상을 갖추고 자랐을 때에요. 또 아이 몸무게도 묵직하고, 건강해요. 어디 아픈 데도 없고요. 인큐베이터에 오래 있지 않아도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산모분도 당분간 동반 입원하시고 절대 안정이에요.”

나는 의사의 그 말을 듣고 그만 울었다. 나는 훌쩍이며 민준에게 말했다.

“민준 씨, 아이 보고 싶어요….”

“아직은 안 돼요. 조금 쉬었다가 컨디션 좋아지면 보러 가요.”

원민준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달랬다. 그 잠깐 동안 퍽 야윈 듯한 얼굴의 그를 보자 마음이 놓인다. 아이가 당장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와서 진통제를 놔주자 그래도 살 만했다. 나는 몇 시간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민준은 내 옆에 엎드려 턱을 괴고 자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민준을 깨웠다.

“민준 씨….”

민준이 피로에 지친 얼굴로 눈을 떴다. 퍽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목말라요.”

“오늘 하루는 물 마시면 안 된대요.”

그래도 목이 바짝 탔다. 내가 웅얼대자 그가 물과 작은 그릇을 가져왔다.

“입에 머금었다 뱉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지근한 물을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최대한 물로 바짝 마른 입 안을 오래 적신 다음 뱉었다.

“잘했어요. 조금만 있으면 물도 마실 수 있어요.”

여전히 목이 말랐지만 겨우 참을 만했다. 나는 갈라진 목으로 물었다.

“…윤신아는 어떻게 됐어요?”

“공범이랑 같이 지금은 경찰서에 있습니다. 아마 아버지 힘을 써서 곧 나오겠죠.”

“그렇구나….”

내가 말하자 원민준이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윤신아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신경 쓰지 말아요, 감옥보다 바깥을 훨씬 피곤한 곳으로 만들어 줄 겁니다.”

웬만하면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나도 윤신아라면 치가 떨렸다. 무엇보다 다시 나와 아기에게 찾아올까 두려웠다. 나는 윤신아가 이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심정적으로 이해를 하는 부분도 있었다.

만일 민준이 하루아침에 손바닥 바꾸듯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면 어떨까. 다른 오메가를 상냥하게 챙겨 준다면 어떨까. 만약 다른 오메가에게 집착하고 또 나와 한 것 같은, 그런 플레이를 하고…. 그럼 나도 정신이 살짝 나갈 만큼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 민준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질투는 그런 마음과 별개인 모양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힘드니까.

그러나 윤신아는 진심으로 나와 내 아이를 해하려 했다. 나에게 보복하는 건 그렇다 치고 애기에게 손을 대다니. 만일 그녀가 나와 같은 열성 오메가였다면 나를 이해했을까. 아이를 가지는 것이 내겐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 알아주었을까.

“그냥 경찰서에 있으면 좋겠어요. 죗값만 치르도록. 그냥 다시는 내 눈앞에 안 나타나면 좋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민준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조금 안심했다. 아마 윤신아는 내 눈앞에 모습을 보일 일이 향후 십 년은 없을 것이다. 아니 아마 평생 얼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민준이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없으리라.

“그때… 나를 어떻게 찾아냈어요?”

“CCTV를 다 뒤졌습니다. 다행히 여기 경찰청장이 아버님과 잘 아는 사이라서 몇 분 안에 조치를 취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서인하 씨가 카페 근처에 큰 벤이 서 있는 걸 봤다고 하더군요.”

윤신아는 치밀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벤에 가짜 번호판을 구해다 붙이는 용의주도함까지 보였다. 벤은 나를 납치한 카페 옆 골목, CCTV가 없는 장소에 세워 두었다. 뒤늦게 나를 찾으러 온 민준은 서인하에게 낯선 벤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민준은 인근의 모든 CCTV를 뒤져 벤을 찾았다. 벤은 번호판 조회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CCTV 화면에 마지막으로 잡힌 골목은, 카페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민준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사람을 풀고 경찰의 협조를 받아 빈 사무실이 있는 모든 건물을 뒤졌다.

윤신아가 납치 장소로 골랐던 곳은 빈 사무실이 많은 낡은 건물이었다. 내가 일하던 카페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미리 장소까지 물색을 해 둔 걸 보면 나름대로 계획 범죄였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랬을까요.”

“서윤 씨,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은 이해하려고 노력할 가치가 없습니다.”

원민준이 나긋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내가 열성 오메가에 별것 없는 존재라 정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민이 귀족의 것을 훔치면 사형을 당하는 중세 시대의 룰처럼, 그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내가 험한 꼴을 당해도 별일 아닐 거라고… 내 아이만 없어지면 민준이 관심을 끊을 거라고, 그리고 내 얼굴을 상하게 하려 했다. 그렇게 되면 민준이 곧 나를 잊을 거라고….

“그 윤신아 씨 말로는요….”

“네.”

민준은 이미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 얼굴을 긁어서 보기 끔찍하게 만들면 민준 씨는 나를 바로 잊을 거라고….”

“하.”

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저는 서윤 씨가 하루아침에 곰 인형이 되도 평생 귀여워 해 줄 거예요. 그러니 그런 말 신경 쓰지 말아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아픈 와중에도 조금 웃어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곰 인형을 상대로 하는 변태는 너무 하지 않나. 웃으니 더 아팠다. 나는 민준의 팔을 잡고 아프다고 칭얼댔다. 민준이 다정하게 나를 달랬다.

나는 이제야 민준의 눈을 제대로 보았다.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을 때,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내가 그의 아이를 낳은 지금. 그의 눈은 한결같이 무심한 듯 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계속 나를 응시하고 있다.

곧 녹아 사라질 달콤한 것을 보는 것처럼 애틋하고 숨 막히는 눈이었다. 언제부터 이 사람은 나를 보고 있었을까. 이렇게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복잡한 감정들이 희미해진다. 이제 그를 용서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그 눈을 보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약속에 관한 것이 떠올라 다시 무거운 눈을 떴다.

“…민준 씨 어머님은요? 저 약속 장소 못 나갔는데.”

“이 근처 호텔에 묵고 계세요.”

“어… 왜 서울 안 돌아가시고.”

“서윤 씨 얼굴 한 번 보고 가시겠다고 하네요.”

“그럼 저… 제가 갈 순 없고 병실에서라도….”

몸이 좋지 않은 상태긴 했지만 계속 그의 어머니를 호텔에 대기시켜 놓을 수도 없었다. 이런 몸 상태로 만날 수 있을까… 침대에서 꼼짝할 수도 없었다. 나는 민준의 소매 깃을 잡았다.

“병문안 오고 싶어 하셨는데,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서윤 씨 지금 아프니까 보고 싶으면 며칠 기다리라고.”

“…….”

뭐라고 할까, 만일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민준과 결혼하면, 그리고 시댁과 싸움이라도 나면 민준은 정말 든든한 남편이 될 것 같다. 친엄마를 오지 말라고 하는 이 패기를 보면.

“마음 상하시면 어떻게 해요.”

“아픈데 신경 쓸 만한 일 만드는 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민준이 살짝 웃었다.

“이럴 때도 다른 사람 신경 쓰고. 참 착해요, 그래도 좀 쉬어요. 내일 식사 마치고 컨디션 괜찮으면 그때 이야기해 봐요.”

“네….”

***

다음 날 저녁쯤 민준의 어머니가 병문안 왔다. 그의 어머니답게 곱고 품위 있는 얼굴을 한 여자였다. 자세히 보면 우아한 화장 아래 앳된 얼굴이 감춰져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연보라색과 분홍색 수국과 백합이 든 꽃다발을 들고 왔다. 그녀의 뒤에는 수행 비서로 보이는 젊은 오메가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녀가 누워 있으라고 했다. 나는 누운 채로 어색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제가 민준이 엄마예요. 서윤 씨 이야기는 몇 번 들었습니다, 고생하셨는데 몸은 어떤가요?”

“네…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차차 놓을게요. 꽃을 좀 사 왔는데, 마음에 드나요, 플로리스트가 서울에서 급하게 만들어 보낸 거라,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민준의 어머니는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약간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말하는 것은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건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보인다. 꽃향기보다 그녀의 몸에서 더 달콤한 플로랄 향이 풍겼다. 짙은 향은 아니라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냄새였다.

“어제 서윤 씨 수술실 들어갈 때 저도 있었어요.”

“아… 네.”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민준의 손을 잡고 했던 이야기들을 들은 건가. 내 귀가 붉어졌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느꼈다. 그중 한 명이 민준의 어머니였나 보다.

어쨌든 민준의 허락 없이 아이를 가진 건 내 쪽이었다. 자식이 혼외 자식을 본 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테다. 나는 죄스러워 그녀의 앞에서 계속 표정 관리를 못 했다. 나도 모르게 풀 죽은 표정이 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원래 여기 서윤 씨를 만나러 내려온 건, 서윤 씨를 설득하기 위해서였어요.”

“…….”

“서윤 씨와 함께해서 내 아들이 잃을 게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죠?”

그리고 그녀는 유언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민준이 이미 집안 자산 중 어느 정도를 물려받긴 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재산은 어떤 조건 하에 상속받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받은 신탁 자금, 가장 중요한 계열사들의 주식 같은 것. 상속 조건은 간단했다. 민준이 우성 알파 자식을 낳은 시점에서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민준이 나와 결혼하기 위해 그 많은 것들을 포기하기로 했다는 것. 어렴풋이 예상한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민준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민준이 그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게 온다고 우리 사이가 잘되리란 보장이 없기에.

“이렇게 된 이상 둘 사이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알아요. 다만 민준이를 위해 어디까지 노력해 줄 수 있나 궁금했어요.”

아마 그녀가 말하는 노력이란 내가 우성 알파를 낳기 위해 하는 노력을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결국 민준이 다른 사람과 자식을 보는 것을 용인해 달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죄송하지만.”

나는 작게 말했다.

“차라리 헤어질 수는 있어요, 그래도 만일 함께한다면, 저는… 누군가와 민준 씨를 나누고 싶지 않아요.”

원민준을 독점할 수 없어서 그와 헤어지겠다고 생각했다. 반쪽인 그 사람을 가질 기회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 내가 그와 함께한다면, 누구와도 나누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짓는다. 약간 씁쓸한 미소였다. 그리고 민준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나도 이기적인 요구는 할 생각 없어요. 사실, 마지막까지 반대할까 했어요. 어제 수술실 앞에서 민준이랑 서윤 씨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더군요.”

“…….”

“저는 일반 오메가예요. 물론 여성 일반 오메가라 우성을 낳을 가능성은 서윤 씨보다 훨씬 높았지요. 그리고 남편과 제가 각인한 건 사고였죠. 그래서 원씨 집안에서는 저를 받아 줄 수밖에 없었죠. 남편은 저를 행복하게 해 주었지만 저도 맘고생이 많았어요. 민준이가 우성 알파로 발현하기 전에는 매일매일 마음을 졸였죠, 의사도 확실하다고 했지만 만에 하나 때문에요. 만에 하나, 민준이가 우성 알파가 아니면 어쩌나 하고.”

“네….”

“민준이 할아버지는 애 아빠보다 훨씬 냉정하고 잔인한 분이셨죠. 아버님을 볼 때마다 얼마나 질책받는 느낌이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민준이만큼은 무난한 상대와 결혼하길 바랐습니다. 며느리가 저처럼 맘고생 하는 걸 보기 싫었거든요.”

“예… 저, 죄송해요.”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만, 변명이라도 생각해도 좋아요. 민준이가 집에 와서 서윤 씨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저는 서윤 씨를 동정했어요. 일반에 각인을 한 저도 그토록 괴로웠는데, 서윤 씨가 이 집 들어와서 맘고생 할 것 생각하면 정말 불쌍했죠, 우리 민준이 걱정도 했고요…. 열성 오메가가 얻기 불가능한 자식을 가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면, 그 부부 생활이 얼마나 지옥이 되는 줄 아나요? 상상해 본 적 없을 거예요. 나도 그런 사례를 몇 번 봤습니다.”

“…….”

“민준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서윤 씨에 대해서…. 그러나 변명이라고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네….”

복잡한 이야기였다. 민준의 집안에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민준의 집에서 나를 반대한 것도 이해는 갔다. 힘들게 낳은 우성 알파 외아들이, 대를 잇지 않겠다고 했다. 나 때문에. 그런 상황을 기꺼워할 집안은 없다. 거기다 재산이 많은 집이면 더 그렇겠지.

나는 아직도 민준과 내가 미래를 같이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다, 다만, 그가 우리 아이의 이상적인 아빠가 되어 준다고 하면, 내가 그걸 거절할 수 있을까. 일생을 기다려 온 꿈의 실현을 앞두고 그를 거절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지금부터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하면 바깥사람이 유언장을 고치게 할지.”

“네…?”

“태어난 애기가 민준이를 닮았더라고요. 아직 형질은 모른다고 하던데.”

“네… 아마 오메가일 거예요, 선생님도 그러셨고.”

“퇴원하고 나면 아이 자주 안고 본가 오세요. 쉽지 않아도 그렇게 얼굴 비추다 보면 그이도 마음 흔들릴 겁니다. 뭐니 뭐니 해도 민준이 하면 끔뻑 죽는 양반이에요. 또 서윤 씨도 어디 가서 미움 살 타입은 아닌 것 같네요. 억지로 귀염 떨어 예쁨받으라는 것 아니에요. 상속 문제예요. 민준이가 받아야 할 몫, 다 받으라고 하는 충고예요.”

“저….”

“그래도 잘되리란 보장은 없어요, 민준이 성격 알죠, 그거 제 아버지 고집 닮은 거예요.”

“네….”

그녀가 손을 들어 내 손등에 손을 포갰다.

“잘 안 풀려서 상속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민준이 옆에 계속 있어 줄 수 있나요? 엄마로서 부탁할게요.”

“물론이에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다만 제가 걱정하는 건, 저 때문에 민준 씨가….”

민준의 어머니는 정말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 옆에 계속 있어 줄 수 있냐는 예상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묘했다.

“그래요. 그렇게 말해 주니 기뻐요. 그럼 식은 천천히 올리는 게 낫겠어요. 이왕이면 민준 아빠 참석한 채로 하는 게 낫잖아요. 그이 마음 좀 풀리면 그때 이야기해 봅시다.”

“허락… 해 주시는 건가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살며시 웃었다.

“윤 비서, 서류 좀 준비해 주세요. 내 앞으로 된 h동 10층짜리 건물, 서윤 씨 출산 선물 겸 결혼 선물로 해 줄 거니까.”

“네, 사모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서윤 씨 사정이 여의치 않은 건 이미 알아요. 민준이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수표 보낼 테니, 신혼집 살림은 그걸로 장만하세요. 물론 우리 남편한텐 비밀이고요. 아이, 인큐베이터에서 나오면 한번 같이 봅시다.”

“네… 사모님.”

나는 놀라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기세에 눌려 수표를 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서울에서 봅시다.”

“네… 살펴 가세요.”

나는 꿈꾸는 것처럼 멍하니 대답했다.

***

그날 오후, 나는 겨우 움직여 인큐베이터의 아이를 보고 왔다. 인큐베이터에서 꼬물대는 아기는 오동통했다. 피부도 민준 씨를 닮아서 흰 편인 것 같다. 아직 신생아인데 코나 눈이 잘 보면 민준을 닮은 것 같다.

“아기 건강한 것 같아요… 너무 귀여워….”

“서윤 씨 닮아서 그래요.”

“아니에요, 민준 씨 닮아서 그래요.”

나는 배시시 웃었다. 몸은 아직 아팠지만 아이를 보니 온몸에 행복감이 차올랐다.

“안아 보고 싶은데.”

“아직은 안 된대요, 나오면 그때 안아 볼 수 있을 겁니다.”

“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큐베이터에서 꼬물대는 아기를 보았다. 조산아라 인큐베이터에 있긴 하지만 아이는 건강해 보였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정말 예쁜 갓난아기였다. 나는 민준의 팔에 안겨 겨우 병실로 돌아왔다. 그가 나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나는 신음을 내며 몸을 눕히고 그와 대화했다.

“민준 씨 어머니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네, 어머니 만난 건 힘들지 않았어요?”

“아니요, 좋았어요. 저. 그런데 제 앞으로 건물을 주신다고…. 그거는 받기 좀 그럴 것 같은데 민준 씨가 잘 말씀드려 주시면 안 돼요?”

“왜요, 받아요. 그건 어머니 재산이에요. 주실 만하니 주시는 겁니다.”

“그래도… 제가 뭘 했다고.”

원민준이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와 마주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추는 것 같다. 민준이 입을 열었다.

“혼인 신고부터 할까요?”

“네…?”

“결혼식, 프러포즈 이런 건 조금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일단 혼인 신고부터 해요.”

“어… 하지만….”

민준의 어머니가 허락했다고 해도 우리 사이를 둘러싼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방금만 해도 민준의 아버지는 아직 반대하는 중이란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 사람에게 나를 위해 그 많은 걸 포기하게 해도 될까?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서윤 씨 놔주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 아이가 혼외 자식이 되는 것도 싫어요.”

“…….”

“혼인 신고하고, 바로 출생 신고해요.”

원민준은 내게 꿀을 잔뜩 바른 덫 같은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들고 나를 유혹한다. 그와 결혼하면 아이는 혼외 자식이 아니게 된다. 입술 위아래가 꿀로 붙은 듯 나는 차마 거절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랑 살아요.”

“후회할 수도 있어요.”

“서윤 씨와 한 번 헤어지고 죽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잘못되더라도 서윤 씨랑 같이 후회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편이 행복할 거예요. 그리고 내가 잘하면 되죠, 서로 후회하고 괴로울 일 없게 내가 다 커버하고 노력할게요.”

나는 코를 훌쩍였다. 거절해야 하는데, 내 주제를 알고 이 사람과 거리를 둬야 하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민준이 내 눈가를 살짝 훔쳐 준다.

결국 며칠 후, 나는 병실에서 혼인 신고 서류를 작성했다. 내가 퇴원하자마자 같이 가서 제출하기로 했다. 나는 평생 결혼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가질 가능성도 낮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알파를 독점하고 가질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게 민준 같은 우성 알파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멍하니 서류를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민준 씨, 제 휴대폰 어디 있어요?”

“충전 안 해 놨는데, 여기 있어요.”

“연희랑 시우한테 연락하려고요. 아이 낳았으니 연락해야죠.”

“…….”

묘하게 싫어하는 것 같다. 애도 아니고 왜 이렇게 질투가 심한지. 잠깐 나는 흠칫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결혼하고 나면 친구들 못 만나게 하고 그런 거 아니죠…?”

민준이 나를 제어하고 통제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았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런 기질을 보일 건 자명하다. 연인과의 애착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와는 나쁜 상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 명 되지 않는 친한 친구들을 못 만나게 하는 건 사절이다.

“만나고 싶으면 만나야겠지요.”

민준이 불편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결혼하고 나면 친구들을 질투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결혼하면 민준 씨 말은 잘 들을 거예요. 그래도 친구들 못 만나게 하면 다시 생각해 볼래요.”

민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는 갑이 된 것 같다. 평생 갑으로 살아 본 적 없는 내가 원민준 같은 남자의 갑이 될 줄이야. 민준이 살짝 찌푸리더니 제 손으로 휴대폰에 충전기까지 꽂아서 건넨다. 나는 전원을 켰다. 전화를 걸기 전에 살짝 민준의 눈치를 본다.

“결혼하면 진짜 말 잘 들을게요.”

“그래요, 서윤 씨는 착하게 말 잘 들으리라 믿어요.”

“…저한테 할 말 없어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지나갔다. 민준이 곧 대답했다.

“…나도 서윤 씨 말 잘 들을게요.”

“그게 다예요?”

“내가 말 더 잘 들을게요.”

나는 그제야 만족해 배시시 웃으며 시우와 연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물론 반응은 예상대로 열광적이었다. 먼 길인데도 한달음에 아기 보러 오겠다고 한다. 두 명과 통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퍽 편해졌다. 나는 민준의 팔에 고개를 기댔다. 민준이 내 이마에 키스한다.

“빨리 퇴원하고 서윤 씨 몸 회복되면 좋겠어요.”

민준이 나긋하게 고저 없이 뭐라고 말하면, 나는 이제 그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내 귓가가 붉어졌다,

“병실에서 그런 생각 하면 안 돼요.”

“눈치 빨라서 좋아요.”

원민준이 슬며시 웃으며 내 어깨를 감쌌다. 그러고 보니 결혼 후에… 우리가 같이 살면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 민준과 헤어졌을 때 다른 남자와 자려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내가 평범한 섹스에는 만족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민준과 하는 건 예외다. 이 사람과 하는 건, 가능했다.

아무튼, 민준은 평범하지 않은 섹스를 좋아한다. 그는 그런 취미가 있다. 아마 지금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있을 것이다.

“내 이상적인 파트너이자 아내가 되어 줄래요?”

민준의 내 손을 잡고 속삭이듯 말했다. 출산 직후에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좀 그렇지만 약간 설렘을 느꼈다. 난 원민준에 의해 변태가 되었으니 말이다.

“설마 이게 프러포즈예요?”

“설마요, 이건 그냥 확인이에요.”

나는 테이블 위의 혼인 신고서를 한 번 보고 민준을 보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 신혼 생활은 밧줄과 함께 시작될 것 같다. 그러나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다. 그게 민준에게 이상적인 사랑이라면…. 그리고 솔직히 나도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심한 일을 당할까 무섭다. 그러나 그 긴장감까지 포함해서 그와의 관계가 좋다.

“신혼집부터 마련해야겠네.”

민준이 속삭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을 제치고 행복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람과 살게 되는 거다.

***

며칠 후 원민준 이사의 어머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액수의 수표가 도착했다. 그녀의 비서가 과일 바구니와 함께 수표가 든 봉투를 들고 왔다. 신혼집에 놓을 가구를 사라는 명목이었다. 이제 나도 결혼 준비라던가 그런 걸 해야 하는 건가.

“저… 액수가 너무 많은데.”

“쓰다 보면 모자라실 거예요.”

“그냥 돌려 드릴게요. 저도 가구 정돈 살 수 있어요.”

비서가 말없이 쿨하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무슨 재단 이사장의 명함이었다. 낯선 여자 이름이 적혀 있다. 우미윤.

“사모님 성함이십니다.”

거절을 하려고 해도 직접 거절하라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울리고 한 번 들어 본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 이서윤이라고 합니다.”

- 아, 서윤 씨.

“보내 주신 것 잘 받았습니다.”

- 잘됐네요, 지금 골프장이라 조금 바쁜데… 감사 전화인가요?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왠지 민준을 연상하게 된다.

“아니요, 저 정말 감사하지만 수표는 돌려드리려고요, 금액이 너무 많습니다.”

- 받고 다음부턴 어머니라고 불러 주는 건 어때요?

“…네?”

수표와 어머니 호칭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젊은 사람이 너무 어른들 도움 마다하고 고사하는 것도 안 예뻐 보여요. 그리고 우리 집, 며느리에게 혼수 강요할 만큼 돈 부족한 집 아니에요.

여기서 그래도 못 받는다, 라는 말을 하면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되는 건가? 왜일까. 이 화법이 익숙한 건.

“저… 그래도… 사모님.”

- …….

잠깐 몇 초간 대답을 안 하신다. 나는 이 패턴에 이미 익숙한 것 같다. 민준의 대화 패턴이 이렇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 어머님…?”

- 그래요, 돈 요긴하게 써요. 힘든 일 있으면 민준이한테 상담하고.

심지어 하고 싶은 말만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눈치 없이 죽어도 못 받는다 뻗대기가 힘들었다. 나는 어른들 말은 잘 들어야 한다고 배우고 자랐다. 주저하다가 네, 하고 대답했다. 일단 받아 두고 민준을 통해 돌려 드리든, 민준에게 주든 해야겠다.

민준의 성격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기시감은 기분 탓이겠지…?

***

민준이 회사에 일을 보러 서울로 간 사이 친구들이 놀러 왔다. 친구들은 내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보디가드들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다가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 윤신아가 더 농간을 부릴 수는 없겠지만, 혹시 모른다며 민준이 붙여 준 사람들이다.

“서윤아! 우리 순둥이!”

연희가 나를 꼭 안고 부비부비 얼굴을 비볐다. 나는 으엑, 하는 소리를 냈다.

“야, 아, 아퍼. 나 수술받은 지 얼마 안 됐어.”

“어머 미안해. 애기는 어디 있어?”

“같이 보러 가. 아직 인큐베이터.”

“애기 어디 아파?”

“아냐, 건강하대. 내가 좀 사고 때문에 조산을 해서…. 금방 나올 수 있을 거야. 어디 나쁜 건 아니고. 혹시 몰라서 며칠만 인큐베이터에 안전하게 두는 거야.”

원래도 수려했던 시우는 못 본 사이 더 잘생겨져 있었다. 시우가 나를 훑어본다.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다고 해도 시우에게 나는 베타 친구 같은 위치였다. 내가 출산을 했다는 것이 신기할지도 모른다.

“너는 좀 어때?”

“나도 괜찮아. 이제 곧 아가랑 같이 퇴원해도 된대.”

우리는 나란히 인큐베이터 앞에 가서 아기를 보았다. 연희와 시우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서연희는 벌써부터 아기가 언제 말하냐고 난리였다.

“보통 엄마부터 배우잖아, 이모는 언제 배워?”

“야, 벌써부터 난리야. 애가 뭐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면서 날 때부터 말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시우가 연희를 타박 줬다. 연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애기를 보았다.

“아기 빨리 안아 보고 싶다.”

“예쁘긴 하네. 하얗고 코도 오뚝하고….”

여기까지 말하고 시우는 말을 멈췄다. 연희도 눈을 굴렸다. 나는 그들이 차마 못 잇는 이야기를 대신했다.

“그치…? 좀 심하게 아빠 닮지 않았어? 신생아라 아직 통통하고 말랑한데도 이목구비가… 나도 자꾸 그 생각이 들어….”

“얼굴 하나는 남부럽지 않게 크겠네.”

연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음,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게 민준 씨 자식이어야 아무리 생각해도 양육권 소송을 하면 질 것 같다. 곧 혼인 신고를 할 거니까 상관없지만.

“그러고 보니 민준 형은?”

“지금은 회사. 편하게 보려고 없을 때 불렀어.”

“잘했어.”

시우가 떨떠름하게 연희의 표정을 살폈다. 서연희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내가 그 새끼 때문에 집에서 카드 정지 먹은 것 생각하면….”

“어, 그랬어?”

내가 떠나자마자 놀랍게도 민준 쪽에서 연희의 집에 파혼 통보를 했다고 한다. 연희의 ‘실수’로 인해 파혼하고 싶다. 대놓고 말했다고 한다. 민준은 복수를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인 듯했다. 연희의 표현으로는 분풀이였다. 분풀이할 대상인 내가 없어지자 남아 있는 나를 팼다며 연희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쩌지, 이모랑 애 아빠가 이렇게 사이가 나쁘면…? 연희는 피가 이어진 친척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친구다.

“됐어, 네 잘못도 아니고, 그러니까 너한테 잘못하면 진짜 그냥 안 둔다고 전해. 알았지?”

가슴이 뭉클했다. 연희는 성미가 불같지만 역시 성격 하나는 좋다. 우리 중에 제일 알파감은 이 그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나에겐 과분한 친구들이었다.

“연희야, 그간 내가 신경도 많이 못 써 줬지…. 나 이제 서울 돌아가니까 내가 더 잘할게.”

그렇게 말하면서 연희를 한 번 꼭 끌어안았다. 예전엔 연희를 이성으로 본 적도 있다. 안으면 두근거렸지만 지금은 그런 두근거림은 없다. 여전한 친숙함은 있었지만.

“그래. 으구으구, 우리 순둥이가 애를 다 낳고, 진짜 잘했어.”

연희가 나를 토닥여 주었다. 시우가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웃다가 말했다.

“그래서 민준 형이랑은 어떻게 할 거야? 다 풀었어?”

나는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모든 걸 다 걸고 고백했을 때, 민준은 나를 거절했다. 그러나 다시 재회했다. 그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서로 마음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나는 다시 그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 것 같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처럼 그에게 마음이 가 버렸다.

“그… 퇴원하면 혼인 신고부터 하기로 했어.”

“대박.”

연희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 아무리 개새끼라도 사람이 그렇게 책임을 지고 살아야지. 잘했어. 아주 네가 꽉 잡고 살아, 잘못한 것 있으면 바로 도망가, 시우네 집에서 며칠은 재워 줄걸?”

“며칠이 뭐야, 몇 년 들어와 살면서 우리 엄마랑 놀아 주면 다들 좋아할걸? 우리 집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맘 편히 와.”

음, 민준이 들으면 친구들을 싫어하게 될 것 같았다. 난 이런 그들이 참 좋았지만. 시우가 말을 이었다.

“혼전 계약서 쓰겠네? 변호사 내가 알아봐 줄게.”

“아니야, 그런 거 안 쓸 거야. “

친구들은 민준이 나와 결혼하기 위해 상속까지 포기했다는 건 몰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사정을 풀어놓았다. 시우마저도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로맨스 소설이냐…?”

“대박… 그 새끼… 가 아니라 그 오빠가 그런 면이 있다고?”

“나도 내가 이러는 게 잘하는 건진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렇게 된 이상 같이 살아 보려고.”

나는 수줍게 말했다. 나와 함께해서 민준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민준의 삶에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이렇게 우리 사이가 엮인 이상 한 번은 같이 살아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운명 같은 것… 뭐 그런 거. 팔자라고 말해야 더 정확하려나.

그리고 민준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참 신비한 일이다. 나 같은 오메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영영 혼자 살 팔자라고만 생각했다.

“진짜 나는 민준 형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오메가라면 제일 냉정하게 굴던 사람이.”

“그거 아니야? 감정 표현 없고 무슨 생각 하는 건지 모르는 사람일수록 하나 터뜨리면 거하게 터뜨리잖아. 핵폭탄을 터뜨린 거지.”

“…민준 씨가 원래 어떤데…?”

내 친구들은 나와 달리 대단한 집안 출신이다. 그래서 민준과 원래 알음알음 알던 사이였나 보다.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집안 출신에, 굉장한 외모의 재원인 민준이었다. 민준은 그들의 세계에서는 유명한 알파이자 모두가 노리는 신랑감이었을 것이다.

“민준 형 외모가 그렇잖아. 오메가들이 엄청 목매는 걸로 유명했지. 그런데 본인이 그렇게 냉정하게 대한다고… 뭐 그런 것들.”

“…그래?”

나는 우리의 질척한 만남에 관한 역사를 떠올렸다. 민준은 역시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알 수 있나 보다. 아무튼 민준의 과거에 대해 더 파고드는 건 내게 안 좋을 것 같다. 나는 그냥 말을 돌렸다.

“너네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해 줘.”

시우와 연희는 병실에 죽치고 앉아 한참 이야기를 풀었다. 늘 그렇듯 주로 연희가 말했다. 친숙한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이상하다, 이전에도 그랬던가? 난 시우와 연희를 참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들과 함께 있을 때도 나는 늘 미묘하게 긴장했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인데도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느낌이 없이 마냥 마음이 편했다. 원래 좋아했던 친구들인데 더 좋아지는 느낌이다. 민준이 나를 변화라도 시킨 걸까, 그 사람과의 만남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 걸까.

어쨌든 시끌벅적하게 둘이 한 번 병실을 쓸고 가자 내 마음은 여느 때보다 들떴다. 저녁에 민준이 병실에 오자 나는 팔에 기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민준은 내 말을 들어 주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이전에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민준은 내가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항상 하나하나 듣고 있다.

***

나는 남자 오메가라 보통 산모보다 길게 입원했다. 출산 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의사의 설명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아이와 함께 퇴원하는 날, 병원에서는 마지막 정밀 검사를 했다.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아이는 팔삭둥이답지 않게 건강했다. 비로소 나는 그날 처음 아이를 안아 보았다. 말랑하고, 예쁘고, 귀엽고…. 마음을 교차하는 수많은 감정들이 나를 감쌌다. 그러나 잠시 안아 보았을 뿐 간호사에게 검사를 위해 아이를 넘겨주어야 했다.

의사와 면담을 하며 내 몸에 대한 체크를 받고 아이의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런 말은 그렇지만, 어떤 면에선 잘되신 거예요. 남자 오메가는 9개월과 10개월째, 막달의 출산 직전 고통이 굉장해요. 출산할 길을 확보하려고 몸이 크게 변하거든요. 그때 통증 때문에 빨리 제왕 절개 하고 싶다고 우는 남자 오메가 분들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무엇보다 개월을 못 채우고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으니 정말 잘됐죠.”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 것만으로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의사가 아이의 차트를 보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아기가 알파네요.”

“예…? 오메가가 아니라요…?”

“네, 알파예요. 남자 열성이 모체일 경우 알파가 태어나는 경우가 드문데…. 잘되셨네요, 남자아이면 알파가 훨씬 낫죠. 그런데 페로몬 수치가 왜 이렇게 높지?”

민준이 손을 뻗어 검사지를 보았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농도의 페로몬 수치의 검사지가 있었다. 지금 성인인 내 페로몬 수치의 딱 10배였다. 민준이 그 페로몬 결과를 보더니 살짝 찌푸렸다. 좋아서 그런지 놀라서 그런지 모를 표정이었다.

“제가 태어났을 때의 첫 페로몬 수치와 같네요.”

“네…?”

의사가 놀란 듯 말했다.

“이거 아기가 우성 알파가 될 것 같은데요…?”

이런 쪽에 대해서는 상식만 아는 나도 안다. 남자 오메가가 우성 알파를 낳을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는. 나와 의사는 멀거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민준을 보았다. 민준이 나직하게 말했다.

“잘됐네요.”

이게 다인가? 잘됐네요, 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는 일인가…? 민준의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일 아닌가…? 나는 어안이 벙벙해 다시 의사를 보았다. 설명해 달라는 눈으로.

“남편분이 우성 알파면 이론적으론 가능하죠…. 이거 가능성이 5% 정도 되는 일로 아는데요….”

“7%입니다.”

민준이 나긋하게 말했다. 나는 다시 민준을 멍하니 보았다. 우리 아기가 우성 알파라고?

“이미 검사해 봤어요.”

“어떻… 게요?”

“서윤 씨 머리카락을 채취해서 했었죠.”

“네…? 언제…?”

민준이 살짝 웃었다. 그러면서 언제 해 봤는진 대답하지 않는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상상도 못 한 일이라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어쨌든 이 남자도 기뻐하고 있는 듯했다. 의사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저… 병원비 할인해 드릴 테니 정밀 검사 좀 하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 학계에 논문을 발표하고 싶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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