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기가 희귀 동물입니까? 학계에 보고하니 마니 하게.”
어이가 없다는 듯 민준이 말했다. 우성 알파에 대한 공개된 연구는 미진한 부분이 많았다. 우성 알파들 대부분이 부유하고 비밀스러운 집안 출신인데, 미쳤다고 자기 몸을 연구 재료로 제공하겠는가.
우리는 아이를 안고 근처 구청에 가서, 사이좋게 혼인 신고서를 제출했다.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났다. 그리고 손을 잡고 구청에서 나왔을 때 우리는 법적인 부부가 되어 있었다. 민준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모든 일에 서둘렀다. 어쩌면 내가 몸을 회복하고 나면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부모님한텐 말 안 해도 돼요…?”
“뭘요?”
“우리 아기, 알파인 거….”
민준이 그 말에 슬쩍 웃었다. 그는 우리 아이가 알파라는 것에 기뻐하긴 했다. 일이 수월해질 거라고, 그렇지만 내가 생각한 만큼 극적으로 기뻐하거나 감격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우성 알파를 낳았다고 해도 나와의 결혼은 여전히 트러블거리일지도 모른다.
“아이, 알파라는데 안 기뻐요?”
“기뻐요. 서윤 씨가 마음고생 할 일이 없어져서요.”
“그런데 너무 안 기뻐하는 것 같아서.”
“저는 서윤 씨가 저랑 결혼해 준 게 가장 기쁩니다.”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긴 한데….
“별로 안 기뻐 보이는데요….”
민준이 나를 가상하다는 듯 보았다. 으음, 좀 더 주관적으로 해석하자면 귀엽다는 듯 보는 눈에 가까울 것 같다. 평소에는 매일 서늘한 표정이면서. 멜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니 적응 안 된다. 아직까지도… 설레기도 하지만.
“우성 알파 아이라고 어떻게 크게 기뻐하겠어요, 오메가 아이라도 소중하게 키우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아….”
“솔직히 말하자면 기뻐요, 하지만 내가 했던 결심은 변하지 않았어요, 우성 알파 아이가 아니라 오메가고, 그로 인해 집안에서 불이익을 겪는다고 해도 계속 서윤 씨를 좋아했을 겁니다.”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말해 주지도 않고….”
사람이 항상 의뭉스럽게 입 다물고 있으니 나로서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투덜거리는 나를 보다 민준이 볼에 키스했다. 음, 그리고 몇 분 정도 시간이 지났다. 키스를 하느라 우리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채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민준이 붉어진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애정 표현은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항상 진짜 중요한 건 말 안 해 주잖아요.”
민준은 슬쩍 미소 지었다.
***
내 몸이 좀 회복되자, 바로 민준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짐은 민준이 보낸 사람들이 와서 이미 야무지게 정리해 둔 상태였다. 짐이 많지 않아서 민준의 차에 꼭 필요한 짐만 챙기고 나머지는 인철 형이 택배로 보내 주기로 했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 아기를 안고 인철 형에게 인사하러 갔다.
“야, 애기 진짜 귀엽다. 축하해.”
“고맙습니다.”
“이름은 지었어?”
“아직… 태명이 반짝이라서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나는 수줍게 말했다.
“그래, 서울 가면 다시 안 돌아오지?”
“네. 아마도요. 남편 회사 때문에요.”
“남편…?”
내 말에 인철 형은 나와 아이를 멍하니 본다. 민준이 나긋하게 말했다. 몹시 말하고 싶었다는 태도였다.
“혼인 신고했습니다.”
“오, 진짜 축하드려요, 잘됐다.”
인철 형이 말했다. 그래도 여기서 살면서 많이 정들었는데 떠나려니 아쉽다. 그때 문이 열리고 타이밍 좋게 서인하 씨가 들어왔다. 나와 민준을 보다가 내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서인하가 탄식했다.
“아….”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서인하에게는 감사 인사를 할 일이 있다. 내가 윤신아에게 납치당했을 때 내가 탄 벤을 우연히 본 것이 서인하였다. 그가 민준에게 말해 주지 않았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걱정했어요,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네… 좀 많은 일이 있었어요.”
“서윤 씨 애기예요?”
“네….”
나는 수줍게 아이를 보여 주었다. 아이는 옹알대다가 곤하게 자고 있다. 배 속에 있을 때도 많이 속 썩이지 않더니, 나고서도 예쁜 짓만 하는 아기다. 민준이 아직 아기를 안는 것이 서투른지 민준 씨가 안으면 자주 울지만 내가 안으면 울지도 않고 예쁜 짓도 잘했다.
“그래요….”
서인하가 퍽 씁쓸하게 말했다. 민준이 옆에서 가차 없이 말했다.
“서윤 씨, 출발해야죠.”
내가 서인하와 말을 섞는 그 감상적인 몇 분도 싫다는 눈치다.
민준의 질투심이란, 앞으로도 줄지 않을 것 같다. 아마 저 남자와 같이 살면 알파들과 말 섞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민준이 오메가와 말만 애틋하게 섞어도 나도 가만히 있지 말아야겠다고. 막 난리를 쳐야지.
“잠깐 인하 씨에게 인사 좀 드리고 갈게요.”
민준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 서울로 다시 돌아가려고요….”
“그렇군요. 아마 다시 보긴 힘들겠네요.”
알파들의 세계에서 상대가 있는 오메가에게는 함부로 말 걸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결혼한 사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서인하도 그럴 것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 잘해 주시고,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처음 보는 알파에게 그런 따뜻한 대접을 받아 본 건 처음이에요. 정말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호감이 있으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마음이 찡했다. 서인하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내가 인복이 있긴 한가 봐. 우리 애기가 서인하 씨 같은 알파로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메가라고 무시하지도 않고 선의로 남을 도와줄 수 있고 예의 바른 사람.
“꼭 언젠가 보답하고 싶어요. 저기,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알려 주세요. 기다릴게요.”
“네, 서윤 씨가 잘 지내면 그걸로 됐습니다. 다음에 한번 뵈어요.”
“네….”
나는 서인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이제 진짜 떠나는구나…. 먼저 나는 민준이 혼자 사는 펜트하우스에 들어가 살기로 했다. 신혼집을 찾는 건 그 뒤로 결정하기로. 민준이 살던 펜트하우스도 충분히 넓어서 굳이 다른 신혼집은 필요 없을 것 같으니 그런 문제는 일단 차후로 미루기로 했다. 우선 아이 물건을 세팅해 놓고, 민준과 작명책을 보며 애기 이름을 짓기로 했다.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하다.
민준의 벤틀리에 올라탔는데 내 임시 휴대폰이 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내가 전화를 받으려니 민준이 휴대폰을 빼앗았다.
“어. 왜요?”
민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수신을 거부했다. 휴대폰 발신 창을 보니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다. 모르는 번호라곤 하지만 내 휴대폰으로 온 전화를 마음대로 끊다니.
“왜 전화 끊어요?”
“안 받아도 되는 전화예요.”
“스팸 전화예요?”
“뭐, 지금 당장은 비슷한 거.”
“아는 사람 번호예요…?”
“네, 우리 아버지.”
“…….”
내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쨌든 혼인 신고를 했다. 민준의 아버지면 내게는 좋든 싫든 시아버지다. 전화를 이렇게 끊어도 되나? 혹시 우리 애기가 알파라는 걸 알고 전화하신 건가?
“그, 그런데 전화 끊어도 돼요?”
“갑이 왜 전화를 바로 받아요. 안 그래도 됩니다.”
“제가 언제부터 갑이 된 거죠?”
민준이 슬쩍 웃었다.
“서윤 씨가 없어지고 제가 상사병에 걸려 병원에 간 날부터, 그리고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길길이 날뛴 순간부터 갑이었죠.”
민준이 내가 뭐랄 새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도로 위로 그의 벤틀리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주행을 시작했다.
“병원에서 아기가 우성 알파 가능성이 높다는 걸 전해 듣고 전화하신 걸 겁니다. 당장 받을 필요 없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어른인데 전화를 수신 거부하다니. 혹시 이걸로 날 더 미워하시는 건 아니겠지…. 고민을 안 하게 될 수 없었다. 그보다 이쪽에서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병원을 통해 보고를 듣고 계시는 건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민준도 참… 그렇다. 어떤 집안인지 궁금해지는 집안이다.
“그래도 한번 인사드리는 게 맞지 않아요?”
“네, 나중에.”
그 나중에가 아주 추상적인 나중에로 들렸다. 이런 일은 민준에게 맡기는 게 나은가.
“그래도….”
“아마 거의 확실히 아이는 우성 알파가 될 겁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네….”
“만일 반짝이가 우성 알파가 안 된다고 해도 그때 말 바꾸시지 않도록 하려면 밀당 좀 하는 게 나아요. 지금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신다고 나올 때 바로 며느리 노릇 하겠다고 나서면 안 좋습니다.”
“…그런 생각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역시 민준은 철저하다. 이 남자는 확실히 효자는 아닌 것 같다. 아니면 지금은 효심보다는 나에 대한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민준이 그렇게 말하니 나는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민준의 옆모습을 보다가 나는 조수석 옆자리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민준의 집에는 하얀색 아기 침대가 놓였다. 민준은 신혼집을 좋은 곳으로 알아보겠다고 했지만 나는 지금 당장은 여기서 살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이사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며칠 후 민준의 집에는 도우미 가정부가 출입하기 시작했다. 민준의 어머니에게 받은 수표는 아직 쓰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몸이 조금 나아진 후 첫 외출에서 민준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혼인 신고부터 해 버렸지만, 청혼도 잊지 않겠다고 말한 민준이었다. 그는 그 말을 지켰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반지를 받는 고전적인 프러포즈였다. 저녁 식사의 마지막 코스에 웨이터가 은색 쟁반을 가져왔고, 그 위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있었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클래식한 프러포즈였다. 한편으로는 내가 여자도 아닌데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쑥스러웠다. 하지만 정말 기뻤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나는 괜히 부끄러워 반지를 낀 손을 오므리며 속삭였다.
“은 수갑이나 개목걸이로 프러포즈 하지 않으셔서 다행이네요.”
민준이 내 농담에 설핏 웃었다. 민준의 잠자리 취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몸이 회복되면, 아마 그런 일도 계속되겠지…. 그러나 싫지 않았다. 민준이 만들어 놓은 내 취향은 완전히 내 몸에 정착해 버린 모양이다.
다만 우리의 사적인 사이는 조금 변할 것이다. 사생활에서는 오히려 민준이 내 말을 잘 따라 주고 있는 요즘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런데 왜 이런 걸 준비하셨어요?”
“고전 영화 좋아하잖아요, 서윤 씨. 고전적인 걸 좋아하니까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요.”
그가 담담하고 나긋하게 말했다. 이래 봬도 민준은 나에게 섬세하게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다. 내 머릿속에서 오피스텔의 거실에 나란히 앉아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오래된 영화를 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아마 일본 여행을 다녀온 직후였을 거다.
그때 나는 민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나는 TV 속의 아름다운 여배우와 그녀의 인생을 응시했다. 그러나 민준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그의 큰 손이 부드럽게 내 어깨를 쓸었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여배우가 티파니의 진열창을 바라보며 아침 식사를 하던 장면을 보고 큰 다이아를 사 준 건가.
“…그렇지만 그 영화는 여주인공이 다이아몬드를 가지게 되는 영화가 아닌걸요….”
도리어 다이아몬드보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 내용이다. 가난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헵번의 영화는 로마의 휴일이에요.”
“그건 몰랐네요. 나중에 같이 이탈리아 가요, 그대로 똑같이 해 줄게요.”
나는 그 말에 웃어 버렸다. 다이아몬드도, 진심도, 그렇게 대단한 것들을 내가 손에 넣어도 될까? 나 같은 사람이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내가 동경하던 영화만큼 멋진 것들을 가져도 될까?
“나와 결혼해 줄 거죠.”
“이미 했잖아요.”
“그리고 평생 즐겁게 둘이 살아요.”
“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감동을 받으면 명치께에 뭐가 걸린 것처럼 먹먹하기도 한 모양이다. 정말… 기뻤다. 그의 마음이 기뻤다.
“계속 말해 주세요….”
“사랑해요, 다시는 서윤 씨 실망시키지 않고 내가 평생 잘하겠습니다.”
“…….”
나는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 드라마나 영화로 많이 봐서 면역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프러포즈요….”
“네.”
“겪어 보니 다른 거였네요….”
나는 빨개진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가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 본다. 내 손에 겹쳐진 손을 나도 잡았다. 나는 민준의 눈을 보다가 손을 떼고 말했다.
“그래도 조건이 하나 있어요.”
나는 천천히 내가 생각하는 조건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