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0)

우리가 결혼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도 민준은 시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나는 내가 열성이라 창피한가, 하고 고민했을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민준이 출근한 사이, 누군가 민준의 펜트하우스 벨을 눌렀다.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세요?”

“저 원민준 씨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인터폰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나는 너무 놀랐다. 나는 편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 제가 지금 실내복 차림이라.”

“잠깐 밖에서 기다릴까요.”

민준의 아버지가 점잖게 말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매너는 있는 사람 같다. 저 나이대의 중장년이 밖에서 어린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부드럽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

“아니요… 저. 괜찮으시면 들어오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문에서 비켜섰다. 후드 티에 편한 바지 차림인 것이 창피했다. 민준과 닮아 수려한 이목구비에 넓은 어깨, 큰 키의 중년이었다. 나에겐 호적상으론 시아버지인 사람이다.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민준이 녀석이 연락을 다 차단하더군요. 누가 해코지라도 하는지 원….”

나는 그 소리에 마음이 뜨끔했다. 나는 민준의 아버지와의 연락을 피하고 있었다. 민준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진작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산후조리하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요.”

“차 한잔 드시겠어요?”

“부탁드리죠.”

예의 바른 말투를 보니 딱 민준의 아버지였다. 나는 부랴부랴 카페인 없는 따뜻한 꽃차를 준비해 내갔다. 민준의 아버지가 집 곳곳을 살펴보았다.

“아기는….”

“낮잠 시간이에요.”

왠지 아기를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아기가 알파라는 것이 떠올랐다. 보여 드려도 될까. 민준에게 지금이라도 알릴까.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강압적으로 아이를 빼앗으러 오신 건 아닌 것 같지만….

“얼굴만 잠깐 봐도 됩니까.”

“네….”

그래도 첫 손자실 텐데, 얼굴도 못 보게 할 정도로 모질게 굴 자신은 없는 나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고 데려왔다.

“민준이 어릴 때 판박이군요.”

민준의 아버지가 살짝 웃었다. 한 번 아이를 안아 봐도 되겠느냐 하시고 안았다가 놓는다.

“그래, 민준이가 잘해 줍니까? 이 집은 신혼집으로 살기에 좀 불편할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넓고 좋아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민준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지요.”

“아닙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호적상으로 시아버지인 건 둘째 친다고 해도, 까마득한 신분의 사람이었다.

“속으로는 이 노인네가 뻔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아이가 알파이니 태도를 바꾼다고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침묵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나를 부드럽게 보았다.

“사람 관계에는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성 알파 아이가 필요한 건, 저희 집안의 사정입니다. 그렇다고 서윤 씨에게 다 받아 달라고 할 순 없지요.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가끔 집에나 놀러 와요. 부담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사이가 좋아지길 기대하겠습니다.”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명목상의 시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민준은 그의 아버지가 능구렁이 같다고 욕을 했다.

***

그리고 나는 슈퍼 갑이 되었다. 정말, 놀랍게도 그러했다. 민준은 같이 살며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었다. 사소한 일도 모두 내 의사를 묻고 결정했다. 함께 사는 일은 좋았고, 편했다. 내 몸도 빠르게 회복되어 이제는 건강했다. 아이도 건강하게 크고 있다.

민준의 어머니는 알고 보니 아주 밝은 분이셨다. 그녀는 나를 만날 때마다 과하게 대접해 주셨다. 선물이니 용돈도 만날 때마다 주셨다. 어머니를 잃은 지 퍽 오래된 나였다. 그녀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서윤아, 뭐 갖고 싶은 건 없니?”

“아, 없습니다. 다 좋아요.”

“얘, 우리 서울 집 방도 많이 비는데, 거기 들어와서 살면 안 되겠니? 애기도 있는데, 서울 집이 넓고 좋잖니.”

드라마에서 보면 재벌 집 사람들은 꼭 큼직한 부지의 저택에 산다. 별채도 여러 개 있는 그런 저택. 그리고 아들 부부는 꼭 그런 별채에 들어가서 살고 한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나. 어머님의 상냥한 말에 내가 그렇게 고민할 때쯤. 민준이 어머님의 말을 끊었다.

“그러다가 슬쩍 신혼집 들어오시려고 하는 것 압니다. 안 됩니다.”

“얘는, 너한테 안 물었어. 우리 예쁜 서윤이한테 물었다.”

“전… 사람들 북적이는 것도 좋아해서요. 다 괜찮습니다.”

나는 가족 없이 자랐다. 그래서 북적이는 가족들을 동경했다. 그리고 시우네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산 적도 있어, 어른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이 익숙했다. 민준은 칼같이 잘랐다.

“절대 안 됩니다, 신혼부부 방해하지 마세요. 정 우리 서울 집 들어가서 사는 것 보고 싶으시면, 명의 이전 해 주세요. 그다음에 열쇠도 바꿀 겁니다. 맘대로 못 들어오시게. 온전히 신혼부부의 집으로 만들어 주시죠.”

“나 참, 엄마 못 믿어? 얘 바로 서윤이 편 된 거 봐. 어쩜 이래.”

“아, 죄송합니다. 어머님.”

“네가 왜 사과를 하니? 민준이가 배우자 편 되는 건 당연하지.”

“아, 네.”

주로 대화는 이런 패턴으로 흘러가곤 했다. 결국, 가끔 시아버지와 넷이 식사를 하는 조건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서울 집에는 우리만 들어가 사는 것이 되었다. 민준의 부모님은 교외에 그대로 살고 계시다.

그리고 민준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지하실 리모델링이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가만히 누웠다. 사지가 벌려진 채로. 나는 두터운 카펫 위에 알몸인 채였다. 그리고 내 양 손목, 양 발목에는 튼튼한 밧줄이 감겨 있다. 주위를 가볍고 등받이가 없는 의자 네 개가 둘러싸고 있었고 각각의 밧줄 끝은 의자 다리에 감겨 있었다. 손발을 조금만 움직이면 의자들이 움직이리라. 그래서 나는 팔다리에 힘을 빼고 숨만 낮게 쉬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받는 교육이라.”

민준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인내심 교육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죠?”

민준이 나긋하게 물었다. 나는 물기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팔다리에 연결된 것들을 쓰러뜨리지 않는 것부터 합시다. 넘어뜨리면 오늘은 봐주지 않고 체벌할 겁니다.”

“네, 네에….”

나는 물기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엔 슈퍼 갑이다. 그러나 잠자리에선 철저하게 그의 것이다. 유일하게 내가 을이 되는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 않다. 나는 그에게 지배되는 것이 좋다.

민준이 내 팔다리를 부드럽게 가죽 채찍으로 쓸기 시작했다. 채찍이 지나간 자리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

가끔 생각한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퍽 철학적인 질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 삶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냥 더 잃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며 살았다. 그런 나에게도 원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천애 고아인 나는 가족을 원했다. 오래도록 혼자 살아왔기에 고독을 옷처럼 입고 있었다. 피가 이어진 가까운 가족이 있었으면 했다. 그것 외에 더 바라는 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커다란 집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 배우자를 닮은 예쁜 아들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우성 알파에 가까운 아이. 열성 오메가인 내가 우성 알파 아이를 가질 확률은 7% 이내였다고 한다. 기적적인 일이다.

내 아이는 성장하여 우성 알파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의사의 분석으론 그러했다. 내가 아이를 가질 당시, 민준이 내게 각인하기 직전의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어떤 이유로 각인이 깨졌고 내가 떠나자 민준은 한동안 꽤 아팠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 아이는 민준이 내게 일시적이나마 각인한 것이나 다름없을 때 가진 아이다. 열성 오메가도 우성 알파와 각인하면 우성 알파를 낳을 확률이 높아지는 모양이다.

심지어 그는 내게 완전히 각인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해도, 7%에서 10%나 20%로 오르는 정도라고. 확실히, 우리 아이는 기적의 아이다.

원래대로라면 불임이나 다름없는, 열성 남자 오메가인 나.

남자 알파를 통해 임신하기도 쉽지 않고, 여자를 임신시키기도 쉽지 않은 나. 거기에 상대에게 무엇도 줄 수 없는 대단찮은 나. 그런 나였지만, 나를 정말로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나의 지금 남편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는 커다란 집을 둘러보며 나는 가끔 이게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서윤아, 꽉 잡고 살아. 그 새끼가 너한테 잘못한 것이 있는데 절대 쉽게 봐주면 안 된다 너.’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서연희. 그녀는 몇 번이나 그렇게 충고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그의 곁에 있다 보면 서운한 일은 스르르 잊어버렸다. 천성이 이런가 보다. 나는 아무래도 독하게 살 팔자는 아닌 듯했다.

‘나 이미 화 다 냈어. 그리고 이왕 같이 사는 거 화내서 뭐 해. 그리고 나도 그 사람에게 잘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닌걸.’

내가 이렇게 말하자 연희는 혀를 찼다. 그녀의 기준에서 나는 물러 터진 순둥이, 철없는 친구인가 보다. 그래서 가끔 나는 생각한다.

내가 가져도 될까. 바라는 것 없는 지나치게 무난한 인생. 빼어난 것 없는 열성 남자 오메가. 이런 내가 이런 삶을 가져도 될까. 모두가 바라는 우성 알파인 그를 독점해도 될까. 그럴 때면 나는 아기방으로 간다. 요람 속에서 잠든 아기를 바라본다. 내 남편, 나의 알파, 나의 주인인 민준을 닮은 아이는 새근대며 자고 있다.

“참 얌전해요. 방금 잠들었어요.”

베이비시터가 의자에 앉아 있다 일어나서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 하나뿐인 내 아이. 내 인생에 태어난 기적. 나는 아이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아이의 작은 코를 쓸었다. 아이는 모든 것이 작다. 작은 코, 말랑말랑한 뺨, 조그만 입술까지. 그리고 숨결까지 너무도 조그맣다.

참 예쁘다. 몇 번을 봐도 예쁘고 귀엽다.

물론, 이 기적적인 내 인생에 낭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놀라운 지금 내 삶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두 가지 반전이 있었다.

첫 번째 반전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정말 엄청난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 반짝이. 내 아이. 이 귀여운 아기가 아무리 얌전하다고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민준이 퇴근하고 아이를 봐주는데도 그랬다.

결국 내가 지쳐 민준의 설득에 넘어가 베이비시터를 고용했을 때 민준이 혀를 차며 말했다.

“베이비시터 진작 고용하자니까요.”

아이 때문에 내 관심을 독점하지 못한다며 민준은 짜증을 냈다. 결국 나는 베이비시터를 구했다. 시터가 낮에 아이를 봐 주니 한결 살 만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이에겐 손이 많이 간다. 행복하지만 힘들었다.

미혼모가 될 결심을 하고 가진 아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내 자신에게 참 혀가 내둘러진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정말 보통이 아닌데, 시터는커녕 남편도 없이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울 생각을 했는지.

내 마음이란 얼마나 변화가 빠른 것인가. 처음에는 아이를 가진 것만으로 정말 기뻐 감지덕지했는데. 그래도 아이가 주는 행복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삶에서 아주 잔잔한 행복을 느끼게 하는 요소였다. 나는 아이가 자는 모습을 한참보다 아이 방을 나왔다.

나는 정원을 산책하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이 지하실은 내 삶의 두 번째 반전이다.

민준은 지금 회사에 있을 시간.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민준이 이 집에 입주하며 대대적으로 공사한 지하실에는 그가 나 전용으로 만든 플레이 룸이 있다. 베이비시터에게는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공간이다. 망설이다 나는 플레이 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 공간에도 이제 익숙해져야 하는데.

나와 남편인 민준의 관계는 일반적인 관계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남자 알파와 남자 오메가이자 서로의 배우자였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플레이의 파트너 관계기도 했다. 바로 가학과 피학의 관계. 그야말로 낮과 밤으로 엮여 있는 사이이다.

나는 많이 변했다. 먼저 우성 알파인 민준과 거듭해서 관계를 가지며 옅은 페로몬이 짙어졌다. 민준의 말로는 원래 희미하게 사람을 홀려 놓았는데, 이제는 정신없이 홀려 놓는다고 한다.

윤신아나 다른 우성 오메가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향이지만 그는 이 냄새가 좋다고 한다. 하긴, 내가 곰돌이 인형이 되어도 평생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는 남자가 내 배우자, 그 남자였다.

어쨌든, 잘난 것 없는 우성 오메가인 나를 그가 선택한 데는 이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성 취향이 똑같다는 것. 내가 그에게 구속당하고, 피학당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

그렇다고 내가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변한 건 아니다. 나는 마조히스트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선 엄살도 많고, 인내심도 없다. 많이 아픈 것도 두려워한다.

그러니 내가 그 사람이 만든 이 공간을 무서워하는 것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망설이다 플레이 룸의 불을 켰다. 안에 드러난 광경에 나는 멍해진다.

사람을 올려놓고 채찍질할 수 있는 형태의 삼각대. 수상한 목마. 사람도 매달 수 있는 거치대. 벽에 매달린 수갑 고리들. 그리고 새하얀 시트가 깔린 큰 침대. 벽에 걸린 다양한 종류의 채찍 등. 내 남편이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공간이다. 그리고 그의 표현으로는 나를 길들이고 사랑해 줄 공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매일 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을 나눌… 리가 없다. 난 아직 이 공간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두려워한다. 기껏 비싼 돈을 들여 만든 공간을 나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는데, 민준은 전혀 화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천천히 해 보자며 나를 다독였다. 그냥 이건 판타지 같은 거라나.

그렇지만, 이 공간이 흥분되지 않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나를 다루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무섭기도 하다. 복잡하다. 갈 데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랑, 그게 두려운 마음. 하긴 이제 와서 뭘 잃겠는가. 날 마음대로 다루는 사람은 내 남편이다.

“구경하고 있었어요?”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민준의 목소리였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들어오다 서윤 씨가 이쪽으로 오는 걸 보고.”

그가 나를 뒤에서 안았다.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면 내가 헛된 기대 한 건가.”

내 귀가 빨개졌다.

“아직은 좀….”

“아직은 위층에서 할 맘밖에 안 드나.”

“네. 아직 무서워서.”

나는 작게 중얼댔다. 위층에서라 함은, 우리 부부 침실에서 하는 섹스를 뜻한다. 나는 거기서 평범하게 그와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묶이기도 한다. 잘못한 것이 있을 땐 맞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기다림에 보답하듯, ‘한 달에 한 번씩 하드한 플레이 하기’는 우리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지하실로 내 발로 걸어 들어오는 날이 올까. 그가 나를 위해 맞춘 음탕한 본디지 의상을 입고 맨발로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주인님, 마음대로 다뤄 주세요. 주인님의 노예이자 소유물입니다, 라고 말하는 날이 올까. 그리고 그는 나를 마음껏 다루고 채찍질하고 삼각대 위에 올려 울게 하겠지. 그렇게 상상하자 몸이 뜨거워졌다.

“무슨 상상을 이렇게 할까, 서윤 씨가.”

민준이 내 귀에 나긋하게 속삭인다. 나는 고개만 서둘러 저었다.

***

더없이 평화로운 우리 사이.

그리고 몇 달에 걸친 조름 끝에, 시어머니 – 이 호칭은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다 – 는 아이를 안고 시댁으로 갔다. 1주일이라도 아이를 데리고 있다고 싶으시다나. 그녀가 그렇게 해 준 덕에, 베이비시터와 나는 1주일의 휴가를 얻었다. 내 몸은 이제 완전히 건강해졌다. 아이를 가졌을 때 찐 살도 모두 내렸다.

집 안에 있는 러닝 룸에서 운동도 자주 한다. 아이가 좀 더 자라면 나는 카페든 뭐든 작은 일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취직은 민준이 반대하고 있지만 내가 하기로 마음먹으면 이길 수 있으리라.

아무튼, 덕분에 오늘은 오랜만에 신혼부부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같이 보고, 민준이 해 준 요리를 먹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부부 침실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부부 침실엔 민준이 준비해 놓은 밧줄을 비롯한 도구들이 세팅되어 있겠지. 그러나 예정이 어긋났다.

내가 취해 버렸기 때문이다. 민준이 와인을 사 왔는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몇 잔이나 연거푸 마셨다. 그와 오랜만에 단둘만의 시간을 보낸다니 좋았다. 그래서 오버한 모양이다. 와인을 마시고 취한 나는 크나큰 말실수를 해 버렸다.

“미안해요, 그, 서인하 씨랑 한 번, 키스했어요.”

내 입에서 멍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망했다고. 완전히 망했다.

***

민준은 좀 묘한 사람이다. 훤칠한 데다 굉장한 미남임은 당연하고, 이상하게 뭐든지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가 이전에 내게 물은 적 있다.

‘우리 한 번 헤어졌을 때, 별일 없었죠?’

‘별일… 이요?’

‘내가 걱정해야 할 일. 다른 알파들. 곽인철 씨에게 듣기로 서윤 씨가 그 동네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거기서 만난 알파, 서인하 씨와의 키스.

그땐 너무 외로웠고, 민준과 영영 끝난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즉시 후회하고 바로 그 키스를 멈췄었다. 서인하 씨와 좀 어색하게 되었었지.

‘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나는 거짓말을 참 못하는 타입이다. 민준은 그때 내 표정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 분명하다. 내가 거짓말할 땐 티가 다 난다나. 사실이었다. 난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하다.

그렇게 넘어가는 듯싶더니, 민준은 오늘 내가 술에 취한 김에 한 번 더 떠보았다.

“난 서윤 씨랑 잠깐 헤어진 후,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서윤 씨는 아닙니까.”

나는 민준이 내 눈을 보며 진중하게 묻자 입의 빗장이 풀려 버렸다. 사실 나도 그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그, 서인하 씨랑 한 번, 키스했어요.”

민준의 표정이 일변한 건 그때였다. 나는 그가 바로 화를 낼 줄 알고 움찔했다.

“근데 그때는요, 우리 확실히 헤어진 상태였고….”

“일방적으로 헤어진 상태였는데요, 전 그때 서윤 씨에게 청혼하러 달려가고 있었죠.”

나는 그 말에 움찔했다.

“재밌네요, 이서윤 씨.”

민준이 나긋하게 말했다. 난 생각했다. 큰일 났다. 이건 정말 그가 화가 났을 때 나오는 어조였다.

“민준 씨도 나 만나기 전까지 할 것 다 하셨잖아요.”

나는 작게 항변했다.

“그건 그렇죠.”

민준이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민준은 내게 다정하게 음식을 권했다.

나는 그의 화가 풀린 줄 알고 안심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

“약속대로 오늘은 뭘 시키든 따를 거죠?”

“네, 한 달에 한 번. 약속이니까.”

나는 민준에게 작게 대답했다. 취기가 꽤 많이 돌았다. 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서윤 씨가 많이 취해서 바람 좀 쐬어야겠네요.”

민준이 하얀 손으로 내 이마를 짚는다.

“이마도 뜨겁고.”

“오랜만에 기분 좋아서.”

나는 배시시 웃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기쁨도 크지만, 오랜만에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참 좋았다.

“뭐가 좋아요?”

“그냥요, 당신이랑, 둘이서.”

나는 민준의 화가 완전히 풀린 줄로만 알고, 방심하고 그의 품에 뺨을 기댔다. 민준이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나는 얼마 전 민준이 백화점에 가서 같이 골라 준 부드러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목께가 쇄골까지 라운드 모양으로 파인 부드러운 물건이다.

“이 옷 입고 있으면 꼴리더라. 말라서, 몸 윤곽이 참 잘 드러나.”

민준이 내 날갯죽지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나는 뺨을 붉혔다. 민준이 내 티셔츠를 끌어올렸다. 나는 고분고분하게 팔을 들고 다리를 벌려 그가 나를 알몸으로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다. 더운 몸에 옷이 벗겨지니 공기가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산책 나가신다면서요.”

“네, 나갈 겁니다.”

민준이 나긋하게 대답한다.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뺨을 확 붉혔다. 그가 나를 바닥에 앉혔다. 나는 자동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민준이 다이닝 룸을 나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새빨간 목줄이 들려 있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다.

“새로 맞춘 거예요?”

“네, 서윤 씨 전용으로.”

그가 나를 보고 눈짓했다. 나는 마치 죄인처럼 고분고분하게 그의 앞에 머리를 숙여 목덜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꼼짝하지 않았다. 이제 배우자의 시간은 끝나고, 주인님과 종속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가 서두르지 않는 동작으로 내 목에 아주 부드러운 가죽 목걸이를 채웠다. 찰칵. 원민준은 가늠하듯 목줄을 팽팽히 한 번 당겨 봤다. 나는 끌려가지 않도록, 그러나 저항하지 않으며 기다렸다.

“아….”

목이 한 번 졸렸다가 힘이 풀린다. 내 고분고분함에 그가 만족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해. 기어야지.”

나는 얼른 자세를 고쳤다. 강아지처럼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그를 올려다본다. 그가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오늘은 강아지가 되는 거예요.”

“…네.”

나는 작게 대답했다. 뺨이 붉어졌다. 도그 플레이. 그가 얼마 전부터 내게 시킬 거라고 벼르던 놀이다.

“그럼 정원 산책부터 하죠.”

그가 목줄을 당겼다. 나는 바닥에 손을 짚었다. 부끄럽지만 와인을 많이 마셔서 요의가 올라왔다.

“저, 주인님. 죄송합니다. 화장실에 갔다가 시작하면 안 될까요?”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진다. 나는 등을 긴장시켰다.

“용서해 주세요, 주인님. 금방 다녀올게요.”

“강아지는 사람 화장실을 쓰면 안 되죠.”

어…?

그가 내 머리를 살짝 누르며 어르듯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내 목줄을 당긴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나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민망하다.

나는 속옷 한 장 걸치지 못한 채 알몸으로 정원을 기는 중이다. 내 목줄의 끝은 민준의 손에 잡혀 있다. 정말 산책하는 강아지처럼, 그렇게 기고 있다.

어느덧 여름이라 춥지는 않았지만, 밤공기에 괜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부모님이 지은 집. 이 집의 좋은 점은 서울 중심부에 있는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원이 있다는 것이다. 가로등이 켜진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조경사들이 와서 정원을 정리한다. 잔디 바닥은 깨끗했고 무릎과 손으로 기는 내 살결에 걸리는 건 없었다. 물론 흙이 좀 배기긴 했지만, 아마 민준이 곧 씻겨 줄 것이다.

“으….”

민준이 조금 성급하게 목줄을 당겼기에 나는 따라가기 벅찼다. 그의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급하게 따라가느라 무릎이 한 번 꺾이자 민준이 그제야 목줄을 쥔 손을 느슨하게 했다.

그는 보폭을 내게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풀숲 근처에 도착해 멈췄다.

“소변 보고 싶다고 했지? 해도 괜찮아.”

나는 빨개진 얼굴로 민준을 보았다. 진도가 너무 빠르다. 부끄러웠다. 나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해야지. 서윤아. 응? 착한 강아지 되어야지.”

나는 빨개진 눈으로 민준을 보았다.

“진짜 강아지처럼.”

그가 조금도 봐주지 않고 말했다. 나는 등을 부르르 떨다가 한쪽 다리를 강아지처럼 올렸다.

“빨리.”

그의 인내심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다. 그가 위협하듯이 혀를 찼다. 나는 주눅 들었다.

어느새 이 플레이에 몸이 심취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강아지. 그는 나의 무섭고 사랑스러운 주인님이다. 나는 쌕쌕 숨을 쉬었다. 그러나 너무 긴장해서인지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아까 전의 요의는 온데간데없다.

나는 울상으로 민준을 올려다본다. 더운 숨, 진짜 애완견처럼 눈치 보는 표정. 민준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만진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붙을 붙였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밤하늘에 퍼진다. 나는 그의 인내심이 담배처럼 줄어드는 모습을 훔쳐본다.

쪼르륵.

마침내, 내 몸 안에서 소변이 나오자 나는 안심했다. 불편한 자세로 끝까지 소변을 보았다. 한 번 둑 터지듯 터진 요의는 끈질겼다. 무릎 아래, 내가 짚은 흙이 고운 땅에 내 소변이 흘러들었다. 내 무릎과 하반신이 지저분해진다.

부끄럽다. 온몸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나는 일을 마치고 어깨를 웅크렸다. 난 인간 이하의 강아지. 그의 강아지다. 한편으로는 흥분된다.

“이리 와.”

민준이 내 목줄을 당겼다. 나는 그의 앞까지 기어가 강아지처럼 순종적으로 그를 본다.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로. 그가 손을 뻗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잘했어요, 착하기도 하지.”

나는 그의 칭찬에 마음이 충만해진다. 칭찬을 듣자 수치심이 가시고 뿌듯함이 차오른다. 이런 내가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 나의 주인님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나를 바꿔 놓았다.

그가 다시 목줄을 당긴다. 나는 한결 나아진 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는 내가 지치자 현관까지 나를 안고 갔다. 그리고 현관 매트 앞에 나를 내려놓는다. 그가 나를 대기시켜 놓고 따뜻한 물에 적신 타월을 가져온다. 그리고 현관 매트 앞에서 몸을 닦아 주었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그 손길에 한껏 몸을 맡긴다. 민준은 다시 나를 사랑하는 주인님이 되었다.

“착해. 도그 플레이는 익숙하지 않을 텐데 잘했어요. 우는소리도 안 내고.”

나는 그의 칭찬에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앞에 선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진짜 강아지처럼 그의 바지 위로 코를 비볐다. 그가 소리 없이 웃는다.

그리고 그는 나를 안아 올려 침실로 데려간다. 먼저 욕실에서 몸을 구석구석 소중히 씻겨 준다. 그리고 침실로 데려가 나를 느긋하게 두 번 안았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소리를 지르다 지쳐 침대 위에 누웠다. 힘이 빠진 내 몸을 그가 그러안는다. 나는 그의 알파 향을 맡으며 늘어진다. 나는 민준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화났었어요?”

“조금은. 그런데 화 풀렸어요. 서윤 씨가 예뻐서.”

“…. 화내서, 무서웠어요.”

“미안해요. 질투.”

나는 기분이 스르르 풀렸다. 해방감이 온몸을 적신다. 그와의 플레이도, 성교도 어느새 너무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질투 심한 것도 병이라던데.”

“우성 알파는 원래 다 이래요. 안 고쳐지는 병입니다.”

나는 작게 웃었다. 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 열성 오메가는 질투가 심하면 안 돼요?”

“질투해 줘요. 난 언제든 환영이니까.”

그의 말에 나는 미소 짓는다.

난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좋다. 과거의 원망 따위는 사라질 만큼. 바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가 내 귀에 속삭인다.

사랑해요.

나는 충만함을 느끼며 그에게 몸을 기댄다.

나의 알파, 나의 남편, 나의 아이의 아빠, 나의 주인님.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의 가학적 로맨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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