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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4화 (4/158)

제4화

“할리드.”

녹스는 별관을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별관에서도 창고에서도 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들러 본 마구간에서조차 아이의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아이가 집 밖으로 도망간 거라면? 그러다 돌아오지 못한 거라면…. 그는 별관을 다 뒤진 뒤 본관으로 향했다. 본관에서라도 그 아이를 찾으면 다행이었다.

녹스는 본관의 손님방을 모조리 뒤졌지만 저녁이 되도록 아이를 찾지 못했다. 녹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옅게 땀이 비치는 이마를 훑었다.

“대체 어딜 간 거야. 할리드….”

그렇게 한숨을 내쉬는데 무언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이가 숨을 만한 곳. 아이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공간. 녹스는 자신이 제 방에 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녹스는 급하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제 방을 둘러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천천히 방 안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할리드…?”

대답은 없었다.

“할리드, 나란다. 녹스.”

그 말에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자신의 드레스 룸 한편에 놓여 있는 옷장 안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녹스는 아이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옷장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자그마한 아이가 몸을 말고 앉아 있었다. 녹스는 할 말을 잃고 그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울었는지 눈은 아직도 발갛게 부어 있었고 못 본 일주일 새에 바짝 말라 있었다. 녹스는 자신도 모르게 할리드를 끌어안았다. 할리드는 기다렸다는 듯 녹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도, 도련, 도련님. 흐윽, 헉.”

“괜찮아. 할리드. 내가, 내가 왔어. 내가.”

그는 아이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안심시키고 이름을 불러 주었다. 아이는 헐떡이며 품 안으로 더더욱 파고들었다. 아이는 뼈가 부딪힐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래, 아이는 그 일주일간 이 옷장에 숨어 자신을 기다린 것이다.

녹스는 눈가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가 그동안 이 옷장 안에 숨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그 심경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미안해. 할리드.”

“흐윽, 윽….”

녹스는 다시는, 다시는 아이를 제 곁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 녹스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들어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아이는 그 틈에도 녹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옷깃을 잡아당겼다.

“괜찮아, 어디 가지 않아.”

녹스는 아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그 깡마른 몸을 안아 주었다. 다신 아이를 혼자 두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녹스가 마른 할리드를 치료사에게 보이고 있을 때쯤, 그의 어머니 올가 라이네리오는 자신의 방에서 마에타에게 그간의 일을 보고 받고 있었다. 그녀는 시녀가 내어 온 찻잔을 내려다보며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래서.”

“그, 그래서 아이는 도망갔고 주인님께서는 술만 마시고 계십니다.”

“녹스는.”

“도, 도련님께선 아이를 치료사에게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할리드가 일주일 내내 굶주린 상태라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하.”

올가는 천천히 터뜨리듯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숨 하나에 마에타가 바짝 몸을 굳혔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안 시녀가 창문을 열었다. 연 창문으로 따뜻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바람은 올가의 옆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 방 안을 부드럽게 휘돌았다.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그녀는 홀로 중얼거리며 찻잔을 들었다. 적당히 따뜻한 차는 그녀의 입맛에 딱 맞았고 덕분에 부글부글 끓던 속이 조금이나마 잦아들었다. 올가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시녀는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쯧, 한동안은 두고 보지.”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에타는 더더욱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창문을 열었던 시녀가 부드럽게 그녀의 옆에 앉아 속삭였다.

“도련님께선 총명한 분이시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 곧 정신 차리겠지.”

올가가 그렇게 말하자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올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올가는 그 손을 가만히 두며 마에타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녹스와 그 아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바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올가는 찻잔을 내려 두었다. 그리고 거의 다 비워진 붉은 홍차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제 아들은 총명한 아이다. 그러니 곧 정신을 차리고 그런 하인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녀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올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시녀는 어설프게 웃었다. 도련님께서 빨리 정신을 차리셔야 할 텐데. 그녀는 속으로 그런 걱정을 했다.

* * *

아이가 회복하기까지 꼬박 석 달이 걸렸다. 녹스는 할리드가 다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정성껏 지켜봐 주었고 할리드는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이가 일어날 즈음엔 무더운 여름이 되어 있었다.

할리드는 오히려 전보다 더 건강해진 몸으로 시중에 임했다. 그날은 폭우가 쏟아져 기사단 훈련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방 안에 처박혀 있을 때였다.

어차피 공부할 거리는 차고 넘쳐 났고 녹스는 오래간만에 책 사이에 처박혀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달칵.

그때 녹스의 책상 앞으로 차가 한 잔 놓였다. 녹스가 고개를 드니 할리드가 찻주전자를 들고 서 있었다. 녹스는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라는 듯 가볍게 눈짓했고 할리드는 다른 테이블에 주전자를 놓고 책상을 돌아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때 녹스가 물었다.

“글자는 읽을 줄 알아?”

“어, 아니요….”

할리드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지만 녹스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먹고 사는 일로 바쁜 평민들은 보통 글자 읽는 법을 잘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아이에게 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빈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펜을 들어 기본적인 철자를 죽 나열하여 쓴 후 말했다.

“읽는 법을 알려 줄게.”

“예?”

“싫어?”

“아뇨, 아뇨. 좋아요!”

할리드는 고개를 마구 끄덕여 댔다. 회색빛 금발이 강아지의 것처럼 흔들렸다. 녹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반응에 녹스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귀를 매만졌다.

“앗.”

할리드는 부끄러운 건지 간지러운 건지 모를 얼굴로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녹스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여상하게 말했다.

“뭐가 묻어 있기에.”

“예, 예에….”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아이는 자신의 붉어진 귓가를 만지작댔다. 녹스는 손끝에 스친 아이의 촉감을 기억했다. 그리고 발갛게 물들인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아이에게 사랑받는 기분이 좋은 거다. 이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받아 줄 수도 없는 마음을 이렇게까지 키워 놓는다는 것 자체가.

‘웃기기도 하지.’

멍청한 아버지, 고압적인 어머니.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귀족가이나 사실 텅텅 비어 있는 금고나 마찬가지인 집안. 그 안에서 보드라운 털실 같은 아이가 자신을 따르니 너무나 좋은 거다.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녹스는 생각을 끊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건 이렇게….”

녹스는 철자를 하나하나 짚어 가며 아이에게 발음을 알려 주었다. 할리드는 제법 잘 배우고 잘 외웠다. 필사적으로 녹스의 손끝을 따라왔다. 녹스는 몰랐다. 아이의 시선이 철자가 아닌 자신의 손끝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단정하게 잘린 손톱 끝을 자신이 만들어 냈다는 사실에 뿌듯해한다는 사실을. 아이의 마음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커다랗게 변해 있다는 사실 또한.

“제법 잘하는구나.”

“……네.”

아이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다. 도련님, 제가 도련님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아시면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그런 소리를 언젠가 입 밖으로 꺼내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는 알았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애정이라는 것쯤은. 그 어린 나이에도.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자라나는 걸, 커서 자신보다 큰 어른이 되는 걸 곁에서 볼 수만 있다면 아이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영원히 그의 곁에서 그의 수발을 들 수 있다면 그가 자신에게 애정을 쏟지 않아도. 혹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해도.’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녹스와 할리드는 평화로운 시간을 함께했다. 녹스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할리드에겐 다정했고 할리드도 그에게 헌신을 다 했다. 그린 듯 완벽한 시간이었다.

빌어먹을 아버지는 한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가문은 안정적이었으며 폭우가 끝난 후의 날씨마저 모두 좋았다.

하지만 어느 날, 마치 불행을 알리듯 강건하던 어머니께서 병에 걸리셨다.

* * *

열다섯의 겨울이었다. 나뭇가지는 마르고 땅은 차갑게 굳어 갔다. 옷깃으로 스미는 찬 바람은 사람을 움츠리게 했고 그런 계절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머니의 병세는 가문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나가!”

와장창-!

올가가 던진 화분이 하녀를 스쳐 벽에 부딪혔다. 하녀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올가는 고작 화병 하나를 던졌다고 덜덜 떨리는 자신의 팔을 보며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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