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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5화 (5/158)

제5화

차분하고 단단하던 올가는 시간이 갈수록, 병증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히스테릭하게 변해 갔다. 피를 한 번 토할 때마다 온 집안을 뒤집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피해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뿐만 아니라 올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녀의 방을 피해 다녔다. 녹스는 그런 아버지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 가끔 물건이 날아오긴 해도 그렇게 버티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점점 말라 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리고 단단하던 어머니가 무너질 낌새가 보이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쥐새끼 같은 아버지의 눈초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몸져누우시면 그를 막을 자가 아직 없었다. 후계자인 녹스가 아직 성인이 아니기에 모든 권한과 권력은 아버지에게로 향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머니가 완전히 몸져누우신다면 할리드가….’

할리드, 아버지가 가문에서 활개 치게 된다면 가장 위험해질 아이.

지금은 어머니께서 어찌어찌 버텨 내며 대외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만약 그러지 못하게 된다면 그 아이가 위험했다. 아버지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워 댈 것이다.

찬 바람이 깊어지는 어느 밤에 녹스는 자신의 방에 놓여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할리드는 그 옆에서 그가 가르쳐 준 철자들을 복습하고 있었다. 녹스는 책을 들여다보며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다.

“할리드.”

“네, 도련님.”

아이는 계절이 지나는 동안 키가 꽤 자랐다. 이제 녹스의 코끝까지는 닿는 키. 하지만 보슬보슬하게 얇은 모를 가진 회색빛 도는 금발에 동그란 푸른 눈은 여전했다.

“다른 가문으로 가 보는 건 어때?”

“예……?”

녹스의 곁에서 철자를 복습하던 할리드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녹스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붙인 채 아무렇지 않게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가문으로 더 좋은 대우를 받으러 가는 거야. 넌 예쁘니 고용하려는 사람들도 많을 거고….”

“도련님…!”

그때 돌연 할리드가 녹스의 앞으로 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녹스는 책을 읽다 당황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할리드의 눈 또한 커다랗게 뜨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깊게 내려간 눈썹, 흔들리는 동공. 아이는 동요를 그대로 내보이며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제,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할리드, 일어나.”

“도련님,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고치겠습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라는 말씀은 제발…….”

“네가 잘못한 건 없어.”

“그럼 어째서, 네? 도련님….”

할리드는 녹스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무릎에 이마를 대었다. 녹스는 당황해 책을 손에서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작고 동그란 정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스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것이 한숨으로 들렸는지 작은 어깨가 움찔 떨렸다. 녹스는 손을 내밀어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낸 뒤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커다랗고 파란 눈에서 눈물이 곧 떨어질 듯 일렁이고 있었다.

“네가 잘못한 건 없어.”

“그, 그럼 왜….”

“…한 번쯤 생각해 보라는 이야기야.”

“아니요.”

할리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찌나 단호한지 평소와 다르게 깊게 내려간 목소리가 꽤 낮게 울렸다.

“저는 도련님 곁에 있을 겁니다.”

“…할리드.”

“예, 제 도련님.”

할리드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녹스의 무릎에 입 맞췄다. 녹스는 예상치 못한 그 행동에 무릎을 움찔 떨었다. 할리드는 그것을 보고 눈물 어린 눈으로 환하게 웃으며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녹스는 속으로 착잡함을 느꼈다.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널 어떻게….

녹스는 어머니가 조금만 더 버텨 주길 바랐다. 자신이 조금 더 클 때까지. 하다못해 아이가 좀 더 클 때까지.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녹스가 열여섯 살이 되는 해에 침대 위에 앓아눕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슬금슬금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그 더러운 짓거리를 혼자 막아 보려 해도 전부 다 막아내긴 무리였다.

“그 아이는 어딜 갔느냐.”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그렇구나.”

아버지는 어머니가 몸져누우신 후 좋은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녹스에게 수시로 할리드의 안부를 물었다. 마치 그를 압박하듯이. 알아서 가져다 바치라는 듯이. 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그 아이를 이 저택에 둘 순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억지로 내쫓는다고 해도 아이는 분명 저를 찾아 저택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버지가 호락호락하게 할리드를 놓아줄 것 같지도 않고.’

만약 녹스가 내쫓더라도 아이가 떠나지 않고 저택 앞을 서성인다면 아버지가 그대로 불러들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아이를 안전하게 이 저택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녹스는 얼마 가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이후 가장 후회하게 될 어떤 결론을.

“…어릴 적의 첫사랑은 끝낼 때가 되었지.”

녹스는 할리드가 자신에게 가진 애정을 버리길 바랐다. 자신은 그 아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하고 고귀한 자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더러운 피를 이어받은 귀족일 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애정 어린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애와는 태생부터가 다른 사람인 것이다.

‘할리드가 안전하게 지내려면 이 저택도 나도 멀리하는 게 나아.’

어머니가 몸져눕긴 하셨어도 아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는 건 아니었다. 종종 친구들을 불러 티 파티를 즐기기도 했다. 녹스가 보기엔 어떻게든 사교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오기를 부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할리드를 내쫓는다면 아버지께서도 그 아이를 다시 불러들이지 못할 거야.”

그렇게 녹스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아직 어리고 어리석어 할 수 있었던 생각. 아이의 마음은 한 치도 이해해 주지 않고 올곧이 홀로 내린 멍청한 선택.

아버지는 녹스를 보고 어머니를 닮았다 욕했으나 이제 와 녹스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의 피도 이 몸에 흐르고 있노라고. 멍청하고 어리석고 비열한, 그 더러운 푸른 피가.

* * *

평범한 날이었다. 녹스는 오전 일과를 마치고 할리드와 함께 방에 틀어박혀 서류를 고르고 있었다. 이제 녹스의 코끝까지 자란 할리드는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그의 차를 준비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녹스의 귓가를 건드렸다. 평소와 같은 소음, 평소와 같은 너. 하지만 이제 변할 때가 되었다는 걸 녹스는 잘 알고 있었다.

녹스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이. 최대한 평소와 같은 말투로.

“어머니의 방에 있는 푸른 브로치를 가져다주련.”

“마님의 브로치요?”

“그래.”

할리드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가 소중한 제 도련님의 말씀을 감히 의심할 리 없었다. 할리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고 녹스는 이제 마지막일 그 미소에 가슴 한쪽이 뻑적지근하게 당기는 것을 느꼈다. 녹스는 가만히 이를 꽉 물다 놓곤 아이에게 손짓했다.

“어머니께서 요즘 예민하시니,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할리드는 성큼성큼 걸어 녹스의 방을 나섰다. 녹스는 끼이익,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아이의 회색빛 금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이 아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녹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한 선택이 옳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에게 확신을 줄 자는 없었다. 어린 자신 외에는.

녹스는 자신의 방 안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속으로 하나씩 숫자를 세었다. 배 안쪽이 썩어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시녀와 하녀들은 집안의 그 어떤 사용인들보다도 철저했으므로 할리드가 브로치를 가져가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녹스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호흡을 들이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스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뱉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곧.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녹스는 문을 바라보았다. 할리드가 떠난 지 얼마나 되었지. 눈이 시계로 향했다. 이제 이십 분 남짓. 아이가 하녀의 손에 잡히기에, 충분한 시간.

“…무슨 일이지?”

녹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리길 바랐고 당황한 듯한 마에타는 그의 이상을 알아채지 못했다.

“도련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름 아니라 할리드가….”

“나가지.”

녹스는 그 뒤를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빤해서. 녹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마에타가 깊게 허리를 숙이며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녹스는 손짓 한 번으로 그녀를 저지하곤 태연히 걷기 시작했다.

보통 사용인이 주인의 물건에 손을 대면 1층 정문의 홀에 끌어다 놓는다. 모든 사용인이 볼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다.

‘오래전에 아버지의 물건에 손을 댔던 하인이 추천장도 없이 쫓겨났던 때가 있었지.’

녹스가 원한 것도 딱 그 정도였다. 추천장 정도는 자신의 선에서 해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녹스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섰다. 마에타가 그의 등 뒤로 바짝 붙어 속삭였다.

“할리드가 마님의 물건에 손을 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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