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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6화 (6/158)

제6화

녹스는 다 알면서 물었다.

“할리드가?”

“그럴 애가 아닌데….”

마에타의 말에 녹스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맞아, 할리드는 그럴 애가 아니지. 하지만 녹스는 지금부터 그 아이를 ‘그런 애’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걸 왜 네 마음대로 판단하지?”

“예?”

마에타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소 할리드를 아끼는 녹스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녹스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하인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웅성거리며 홀의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이 오셨어…!”

누군가의 작은 외침에 하인들이 우르르 길을 내주었다. 녹스는 그들이 내어 준 길 끝에서 홀 가운데 무릎 꿇려진 할리드를 발견했다. 어머니의 하녀가 아이를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홀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저 아이가 마님의 브로치를 훔치는 걸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오래간만에 밖으로 나와 허리를 펴고 서 계셨다.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지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완벽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 옆에서 눈치 보기 바빴다. 하, 헛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결코 이기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라도.

“아, 아닙니다! 저는 훔치지 않았어요!”

할리드가 반박했다. 아이는 하인들의 손에 잡혀 바닥에 무릎이 꿇려진 상태였다. 순간, 할리드가 녹스를 바라보았다. 애처로운 눈빛에 녹스는 잠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저 눈빛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가 저 아이의 손에서 마님의 브로치를 빼앗았습니다! 저건 거짓말이에요!”

하녀가 손을 높이 들어 푸른 브로치를 보였다. 푸른 보석을 담고 있는 금빛 테의 브로치는 그 어느 것보다도 값비싸 보였다. 할리드는 녹스와 눈을 맞추기 위해 애처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녹스는 아이와 눈 맞추지 않았다. 할리드는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듯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도, 도련님….”

“…….”

“도련님, 도련님께서 제게 시, 심부름시키셨잖아요. 마, 마님의 브로치를 가지고 와 달라고. 그렇지요?”

“…….”

녹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게 옳으리라. 그는 목이 막혔다. 자신이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가에 대한 후회. 그리고 아이를 저택에서 내보내기 위해선 정말 이게 최선인가에 대한 의문. 그리하여 내려진 합리화.

그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기어코 그 말을 내고야 말았다.

“……저는, 그런 심부름을, 시킨 적, 없습니다.”

말이 띄엄띄엄 나왔다. 녹스는 그 말을 내뱉은 뒤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할리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자신을 잡고 있는 하인들의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그를 불렀다.

“도련님, 도련, 도련님…!”

녹스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이대로 쫓겨나면 다른 하인을 시켜 다른 가문에 취직시켜야지. 그 가문엔 내가 따로 언질을 두면 될 거야. 어린 녹스는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돌아가거라 믿었다.

하지만 녹스가 간과한 게 있었다. 녹스와 할리드를 주시하던 올가의 시선 그리고 병증으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녀의 상태. 올가는 흉흉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다 차갑게 일갈했다.

“감히 주인의 물건에 손을 댄 죄, 그리고 다른 주인의 핑계를 댄 죄.”

녹스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휩싸였다. 무언가, 잘못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의도가 불경하니 가시덩굴을 꼬아 만든 채찍으로 백 대를 때린 후 가문에서 쫓아낸다.”

“어머니!”

녹스가 곧바로 올가를 불렀다. 녹스의 눈동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건 너무나 과한 처사입니다.”

“과하다?”

올가의 눈동자가 분노와 광기로 번들거렸다.

“감히 주인의 물건을 훔치고 주인의 핑계를 댔는데 과하다라.”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그저 가문에서 내쫓는 것만으로도 충분….”

“아들.”

올가가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 아이가 네 하인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하나 사사로운 정으로 그런 애매한 처분을 내려서는 안 된단다.”

“하지만…!”

녹스는 저도 모르게 어머니의 말에 반박했고 그녀는 시선이 흔들리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소리쳤다.

“닥치거라!”

올가는 더 이상의 반항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로 명령했다.

“지금 당장 백 대의 매를 때리거라!”

“예, 마님!”

녹스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어린 녹스는 결코 이런 상황이 오길 바란 게 아니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쫓아내면 아버지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아이를 섣불리 데려오지 못할 거고. 그사이에 다른 가문으로 들여보내려 했다. 그러면 아이는 완벽히 안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계획은 그저 어린아이의 것일 뿐. 지금 펼쳐진 상황은 무엇이던가.

“마님!”

그때 하인들의 손을 뿌리치고 할리드가 올가의 발 앞에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마님, 마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할리드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빌었다.

“제발 가문에서 쫓아내지는 말아 주십시오. 제발, 제발….”

“네가 정신을 못 차렸구나. 하녀장! 무얼 하느냐.”

“예, 예!”

마에타는 하인 중 하나가 들고 온 채찍을 들었다. 가시덩굴을 꼬아 만든 채찍엔 가시가 가득했다. 애초에 백 대나 때리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녹스는 어머니에게 말하려 했다. 사실 자신이 시킨 게 맞다고. 그러니 벌할 거라면 자신을 벌하라고. 하지만 입을 벌리려는 순간에 올가의 암녹색 눈이 흉흉한 빛을 띠며 경고했다.

“입 다물거라.”

어머니는 녹스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아이에게 시킨 것을 내가 설마 몰랐을까….”

녹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도 결국 더러운 네 아비를 닮았구나. 저 아이를 아끼는 것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녹스는 깨달았다. 자신의 머리 위에 어머니가 있노라고. 멍청한 아버지를 대하느라 몰랐던 것. 항상 또래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아 자신 위에 누가 서 있는지 잊어버린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

“나는 저놈을 내 눈앞에서 치워야겠다. 네 아비에 너까지 꼴사납게 구는 모습을 더 이상 눈 뜨고 보아 줄 수가 없구나.”

그때 마에타가 이를 악물고 매를 높게 쳐들었다.

짜악!

얇은 옷감은 아이의 방패가 되어 주지 못했다. 비명이 터졌다. 이제 막 변성기에 들어선 할리드의 비명이었다. 녹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올가는 그의 어깨를 꾹 눌러 쥐고 매를 맞는 할리드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도록 녹스의 몸을 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속삭였다.

“네가 벌인 어리석은 짓을 보아라. 네 놈은 결국 더러운 반쪽짜리지만 내가 사람으로 만들어 주마.”

올가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파고들어 아팠다. 녹스는 입 안에서 혀를 깨물었다.

짜악!

아이의 비명이 계속해서 터졌다. 녹스는 혀를 더, 더 세게 깨물었다. 입 안에서 피 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부릅뜬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새빨갛게 터진 핏줄이 흰자를 붉게 물들였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녹스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아이를 구해 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한 걸음. 그것만 떼려 하면 어깨를 강하게 눌러 오는 어머니의 손이 있었다.

“보아라, 너의 죄다. 너의 어리석음이고. 너의 잘못이다.”

“어머, 어머니. 어머니….”

녹스가 더듬더듬 말했다. 할리드는 계속해서 매를 맞았고 비명은 수없이 홀 안을 울렸다. 녹스는 어머니를 쳐다보지도 않고 매를 맞아 쓰러져 피를 흘리는 할리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그만하십시오.”

“아들.”

올가의 손톱이 끝끝내 옷을 파고들어 녹스의 피부에 상처를 내었다. 그 부위가 화끈거렸다.

“네가 벌인 일은 네가 끝까지 감당해야지.”

올가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고드름 같았다. 차갑고 시리고 또 아팠다.

“저 아이만 불쌍하게 됐구나….”

올가는 그렇게 말한 후 녹스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아직도 매를 맞고 있는 아이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저놈을 다신 내 눈앞에 띄게 하지 말아라.”

그 말은 녹스에게 하는 것이었으며.

“…….”

눈치를 보며 한껏 수그려 있는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자 어깨를 굽힌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오로지 녹스만이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할리드는 매를 맞다 결국에 기절했는지 미동이 없었다.

녹스는 기절한 아이에게 매질하는 마에타에게 다급히 다가갔다.

“그만, 제발 그만!”

“도, 도련님.”

“…마에타. 제발 부탁이야. 한 번만 내 말을 들어줘.”

“…….”

하녀장 마에타는 녹스가 얼마나 할리드를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하녀장은 주변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디 구경났다고 다들 여기 모여 있어! 각자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

“예, 예!”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 사라지고 이제 홀에 남은 건 마에타와 녹스 그리고 기절한 할리드뿐이었다. 녹스는 실핏줄이 터진 새빨간 눈으로 할리드를 내려다보았다. 항상 녹스를 따라 바르게 펴져 있던 등이 온통 피투성이었다. 녹스는 엉망진창이 된 할리드의 등을 바라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어머니, 올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벌인 일은 네가 끝까지 감당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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