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7화 (7/158)

제7화

녹스는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녹스의 피는 더러운 아버지의 것이나 나머지 반쪽은 순수한 어머니의 것이었다. 어리석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그것이 녹스의 불행 중 하나였다.

“…할리드를 내 방으로 옮겨.”

“하지만….”

마님께서 쫓아내라고 하셨는걸요. 마에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녹스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이 열이 오르는 눈가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벌써 먹먹하게 잠겨 있었다.

“모두 끝낸 뒤, 제대로 내보낼 테니까.”

마에타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인들을 시켜 할리드를 녹스의 방으로 옮겼다. 뚝, 뚝. 할리드의 등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방으로 가는 길은 핏자국으로 표시가 남았다. 녹스는 천천히 그 핏자국을 따라 걸었다. 걸음걸음이 무거웠다.

그대로 아이를 제 방에 숨기고 아무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할리드를 위해서,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자신에게서 떠나보내는 편이 좋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시탐탐 노리는 아버지도 문제였지만 어머니 올가마저 할리드를 주시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던 녹스는 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인에게 업혀 가는 할리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길고 긴 복도를 걸었다. 하인이 먼저 녹스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서 할리드의 등이 천장을 향하도록 조심스럽게 눕혔다. 녹스는 하인에게 나가 보라 눈짓했고 하인은 눈치껏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끼익, 탁.

문이 닫히자 아이의 거친 숨소리와 숨을 죽인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 찼다. 녹스는 천천히 의자를 끌어다 침대 곁에 놓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시트를 적시는 피를 바라보았다. 할리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째깍째깍.

시간은 조금씩 가고 있었다. 아이의 등에서 흐르는 피는 조금씩 멎어 갔다. 하지만 가시덩굴로 만든 채찍에 맞은 상처는 심하기만 했다. 녹스는 할리드가 저택 밖을 나가서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명령이 아닌 것처럼 해야겠지만.

“으윽….”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할리드가 낮은 신음을 내며 눈을 떴다. 아이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녹스는 바닥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할리드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닦아 주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입 안의 혀를 꾹 깨물며 참았다. 자신이 여기서 끊어 내지 않으면 자신의 어머니, 올가가 강제로 끊어 줄 것을 알고 있었다.

“일어났나?”

“도련, 님?”

“그래. 할리드.”

녹스의 목소리는 할리드를 어여쁘게 부르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없이 차갑고 딱딱하고. 마치 완전한 타인을 대하는 듯한 그 음성에 이제 막 정신을 차린 할리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할리드는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그리고 녹스가 손을 잡아 주길 바랐다.

천천히 다가오는 손을 꾹 잡아 주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녹스는 손등으로 아이의 손을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쳐 냈다. 아이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진다.

“…제, 제가 실수했어요.”

그리고 할리드는 마치 이 상황을 수습해 보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애처로웠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아이는 웃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등이 피투성이가 된 채. 몰려드는 불안감을 어떻게든 지워 보려고.

“도, 도련님께선 그런 말씀을 하신 적 없으신데, 제가 마음대로 착각해서, 화, 화가 나신 거지요?”

한 번 쳐 내졌던 할리드의 손이 다시 한번 녹스의 손을 잡았다. 녹스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어느샌가 자라 강해진 손아귀의 힘이 녹스의 손을 놓지 않았다. 녹스는 혀를 더 강하게 깨물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녹스는 그것을 할리드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할리드.”

“말씀하지 마세요.”

“할리드.”

“제발. 제가 뭘 잘못했나요.”

할리드는 무언가를 직감하고 있다는 듯 굴었다. 당연하겠지. 자신에게 브로치를 가지고 와 달라고 부탁해 놓고 모르는 척하는 것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맞을 필요 없는 채찍을 맞기 시작했을 때는 확실히 뒤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다. 녹스는 땀에 젖은 회색빛 금발을 보며 말했다. 도저히 눈을 맞출 수 없었다.

“네가 저택에서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할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푸른 빛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나도 슬슬 괜찮은 곳과 약혼을 해야 하거든.”

녹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여유롭다는 듯이,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애썼다.

“할리드, 날 사랑해?”

그리하여 가장 잔인한 말을 던졌다.

“그게 네 잘못이야.”

할리드는, 어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 자체가 잘못됐다는 목소리에 아이는 도저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겠다는 듯 굳어 버렸다.

“네가 온몸으로 날 사랑하고 있다고 표현을 하는 게, 네 잘못이라고.”

“도련, 님….”

할리드의 음성이 목을 비집고 나오듯 겨우 새어 나왔다. 땀과 피에 젖은 온몸. 그리고 잔인한 말을 입에 올리는 녹스의 모습. 할리드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대로 기절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꿈일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다정하게 보던 도련님이 이렇게 사라졌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할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한 팔로 침대를 짚고 일어섰다. 녹스는 그 모습을 보며 제 손을 잡은 할리드의 손을 다시 한번 뿌리쳤다.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되도록 빨리 저택을 나가 줬으면 좋겠어.”

“진심, 이세요?”

“진심이야. 어머니까지 동원한 내 뜻을 이해해 줄 수 있지?”

녹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입가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부디 이것이 미소 같아 보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할리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피투성이 몸을 하고서.

녹스는 할리드가 자신에게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자신을 배신할 수가 있냐고. 욕을 하고 분노를 토해 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털썩.

오히려 반대였다. 할리드는 녹스가 앉은 의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녹스의 눈이 커졌다.

“죄송, 죄송합니다.”

할리드가 녹스의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다시는 티 내지 않을게요.”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마치 올가의 앞에서 처절하게 이 저택에 있게 해 달라고 빌 때처럼.

“도련님의 눈에 띄지 않게 노력할게요.”

아이는 이내 녹스의 바지 자락을 놓고 두 손을 모았다. 크게 뜨인 푸른 눈동자.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을 용서받겠다 모은 두 손. 모든 것이 녹스를 미칠 것 같이 만들었다.

“제발 이 저택에만 남아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녹스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달싹였다. 자신에게 화를 낼 거라고, 분노를 쏟아 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자신의 착각일 뿐. 아이의 사랑은 이미 녹스가 생각하던 것보다 아득하게 커져 있었다. 이렇게 키울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아니, 커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할리드.”

“예, 예. 내 도련님….”

녹스는 어떻게든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다. 말 그대로 뱃속이 썩어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할리드뿐 아니라 스스로를 베어 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녹스는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마지막 말을 뱉었다.

“넌 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할리드는 호흡을 멈추었다.

“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툭, 하고 아이의 손이 떨구어졌다.

“네 주제에.”

녹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기사단 훈련에 나가 봐야 해. 내가 돌아오기 전에 나가 줬으면 좋겠어.”

할리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녹스는 할리드가 볼 수 없도록 두 손을 꾹 맞잡았다.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잘 살아.”

그를 그 누구보다 잔인하게 내쳐 놓고 잘 살라 말하는 이 모순적인 태도.

“넌 예쁘니까, 어딜 가든 잘 살 수 있겠지.”

녹스는 그것이 그의 원망이자, 자신을 미워할 수 있는 힘이 되리라 생각했다.

녹스는 그대로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녹스와 할리드의 사이가 단절되듯 어둠이 찾아왔다. 오늘따라 복도가 어두웠다. 녹스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하지만 자신은 울 자격이 없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도련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에타가 자그맣게 그를 불러왔다. 녹스는 천천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마에타가 따랐다. 본디 할리드가 따라야 했을 그 뒤를.

“할리드를 치료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봐. 추천장도 써 주고 당분간 생활할 수 있는 거처와 돈을 마련해 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내가 해 줬다는 걸 알리지 마.”

그 말에 마에타가 잠시 멈추어 섰다. 그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마에타의 다음 말을 잘 알고 있는 녹스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그 애가, 나를 죽도록 원망하며 자란다 해도 상관없어. 마에타는 녹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곧 침묵으로 응했다.

녹스는 한참 동안 밖을 서성거렸다. 아이가 충분히 상처를 추스를 수 있도록. 자신을 충분히 원망할 수 있도록. 그리고 완벽히 자신을 떠나갈 수 있도록.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