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돌벽은 차갑고 축축했다. 초록색 이끼가 낀 바닥은 미끌미끌했으며 사방에선 지하의 냄새가 났다. 녹스는 쇠창살을 마주 본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지하 감옥에 끌려온 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쇠사슬이 연결되어 뒤로 묶인 팔은 오래전부터 저려 왔다. 이젠 감각도 느끼기 힘들었다. 어깨는 뻐근했고 차가운 바닥 탓에 오한마저 일었다.
끼익-
점점 둔해지는 감각에 어깨를 한 번 뒤틀 때였다. 감옥의 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밧줄과 천을 든 채였다.
“가만히 있어.”
그들은 녹스에게 명령했다. 살아생전 어머니 외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어투였다. 녹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웃겨 피식 웃었다. 그러자 그들은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퍼억!
기사 중 한 명이 녹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고개가 돌아가고 입 안이 터져 피 맛이 맴돌았다. 녹스는 덤덤한 얼굴로 피 섞인 타액을 바닥에 퉤 뱉어 냈다. 기사들은 곧 천으로 녹스의 눈을 가리고 쇠사슬을 풀었다.
“자기가 아직도 귀족인 줄 아나 보군.”
그리고 단단하고 거친 밧줄로 두 팔을 아프도록 꽉 묶기 시작했다. 녹스는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섰다. 차라리 반항을 해서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반항한다고 죽일 것 같지도 않았다.
죽일 거라면 진작에 죽였을 테니까. 그는 그대로 기사들에게 이끌려 걷기 시작했다. 눈이 가려져 있으니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뻔했다. 그날 이후 자신이 누구의 것이 됐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계단을 올랐다. 곧이어 바람이 느껴졌다. 바깥으로 나온 것 같았다. 녹스는 곧 마차 안으로 던져졌고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애가 왜 날 달라고 했을까,’
어렸을 때의 원한이라고 하기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곁에 두고 괴롭히고 싶다는 의미인가. 어릴 적 원수 따위는 차라리 바로 목을 베어 죽여 버리는 편이 옳을 텐데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황태자의 머리를 안고 그대로 머리를 잘려 버린 더럽고 어리석은 나의 아버지. 녹스는 눈이 가려진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는 그날부터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그 병마를 이고도 아버지보다 오래 살다니.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작위를 빼앗겼으니 저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 몰수는 진즉 끝났을 텐데 어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죽음을 피하지 못하셨겠지.’
사실 반역죄인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천운일 지경이었다. 할리드, 그 아이가 자신의 소유권을 요청했기 때문에.
마차는 아직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나아갔을까.
덜컹.
마차가 멈추었다. 곧 기사들이 문을 열고 녹스를 끌어내었다. 그가 눈이 보이지 않아 발이 꼬여 비틀거려도 멈추어 주는 법이 없었다. 체감상 한참을 나아갔다. 계단도 올랐다. 긴 복도를 지난 것도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멈추어 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몇 걸음을 더 안으로 들어갔다.
곧 기사 한 명이 무릎 뒤를 강하게 찼다. 털썩, 녹스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걷어차인 무릎 뒤편이 얼얼했다.
그때, 누군가 제 턱을 강하게 쥐어 올렸다.
“…누가 이랬지.”
할리드, 이제 강건해진 그 아이의 목소리였다. 녹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짝 굳혔다. 그를 붙잡아 온 기사 중 하나가 대답했다.
“접니다.”
빠악-!
녹스가 기사에게 맞았을 때보다 더 큰 소리가 났다. 녹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고 턱을 쥔 손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나가 봐.”
“예.”
두 기사가 한꺼번에 대답했고 이어 걸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철걱대는 갑옷 소리가 멀어진다. 이내 방문이 닫혔고 녹스는 숨을 죽였다. 할리드와 한 방에 단둘이 남겨졌다는 게 느껴졌다. 인기척이 그의 것 외는 없었다.
곧 할리드가 눈을 가린 천을 거칠게 풀어냈다. 녹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앞을 보았다. 며칠간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 빛에 곧바로 익숙해지지 못해 눈이 부셨다.
“…….”
하지만 점점 눈이 빛에 익숙해지며 그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이제 아이라 할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회색빛이 도는 금발. 자신이 알던 동그란 눈이 아니라 새파랗게 벼려진 날카로운 눈. 저를 찢을 듯 바라보는 남자, 할리드.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해 주었던 그 아이는 어느새 모르는 남자가 되어 서 있었다.
“녹스 라이네리오.”
처음 듣지만 익숙하다 느꼈던 음성. 그 음성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이젠 노예 신세니 그냥 녹스겠지.”
낮고 거칠거칠한 목소리에 비웃음이 걸렸다. 녹스는 턱을 잡힌 채로 그를 억지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고 싶었다. 자신이 버린,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녹스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의 큰 손이 턱이 아릴 정도로 세게 쥐어 왔다.
“똑바로 봐.”
“…….”
“이제 네 주인이잖아.”
녹스는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었다. 차가운 눈이 저를 직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녹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쯧 하고 혀를 찼다.
“꼴이 더럽군.”
할리드가 누군가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씻겨.”
그의 명령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들어와 녹스의 양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녹스는 그들의 손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혼자 뭘 할 수 있을까. 그녀들을 뿌리치고 도망간다 해도 어디로 간단 말인가.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하녀들과 앞장서 걷는 녹스의 뒤를 할리드가 어슬렁거리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감시라도 하듯이.
‘도망갈 것 같은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꼴이 이렇게 됐지만 녹스는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은 기사다. 여러 명이라고 해서 귀족들의 수발을 드는 여인네들을 이기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녀들은 녹스의 팔에 감긴 밧줄을 풀었고 녹스는 피가 통하는 감각에 몸을 한차례 떨었다. 묶인 부위부터 손끝까지 찌릿하게 저렸다.
하녀들은 그를 할리드의 방에 딸린 욕실로 안내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저택의 욕실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바닥 아래로 깊게 파인 욕조의 테두리는 진줏빛이었고 하녀가 깃을 세운 새의 조각을 만지자 거기서부터 뜨거운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녹스에게 할리드가 망설임 없이 명령했다.
“벗어.”
녹스는 그 말에 멈칫거렸다. 씻어야 하는 상황이니 당연히 옷을 벗어야겠지만 할리드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지금의 녹스는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녹스는 저린 손끝으로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었다. 지금 자신은 노예이며 할리드의 말대로 그의 것이 되었다.
녹스는 지금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2황자, 아니, 이제 황제가 되었을 펠티온의 앞에 무릎 꿇려졌을 때부터 전부 체념한 상태였다.
아니. 녹스는 속으로 설핏 웃었다. 그의 곁에 할리드라는 남자가 서 있을 때 전부 포기했었나. 앞으로 자신은 그의 노예로서 살아가야 했다. 자신이 죄를 지은 그의 노예로.
그 사실이 벼린 칼처럼 가슴을 찔러 왔다.
툭, 툭.
옷을 하나씩 벗을 때마다 할리드의 시선이 닿아 왔다. 어깨에, 등에, 무릎과 허벅지 사이로. 녹스는 그 시선에 온도가 있는 것만 같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과는 다르게. 아주 뜨거운 온도가.
녹스는 옷을 벗은 채 바르게 섰다. 할리드의 시선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천천히 훑고 올라갔다. 그에게 등을 보인 채 녹스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무언가 살금살금 기어오르는 것 같은 감각이다.
그렇게 그의 몸을 핥듯 기어오르던 시선이 문득 어디선가 멈추었다. 적당하게 근육이 선 등 어딘가에. 녹스는 쓰게 웃으며 그의 망설임을 모르는 척했다. 그가 궁금해하지도, 궁금해할 필요도 없는 사정일 뿐이다.
“이리로.”
하녀의 말에 녹스는 그녀들이 이끄는 대로 적당한 온도의 물이 찬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노예에겐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노예란 그저 저택 우물 구석에서 전부 벗겨 놓고 물을 끼얹어도 아무 말 못 하는 처지니까.
할리드는 무슨 생각인지 하녀들이 녹스를 씻기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팔짱을 낀 채 서서 지켜보았다.
닿아 오는 시선마다 자신을 찌르는 듯했다. 어울리지 않게 간지럽기도 했고. 겨우 몸을 다 씻고 가운을 걸친 녹스는 어째 모든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자신을 감시하듯 바라보던 할리드의 탓이 제일 클 것이다.
녹스는 전부 씻은 후 다시 할리드의 방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녹스는 도대체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할리드의 방은 기억 속 어머니의 방보다 넓었고 창문도 더 많았다. 특히 테라스로 난 문이 일반적인 문보다 컸다. 녹스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밖으로 이어진 테라스의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