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2화 (12/158)

제12화

‘여긴 네까짓 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꺼져.’

퉤, 할리드의 머리 옆으로 누군가 침을 뱉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문지기들을 보며 할리드는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한 번이라도 좋으니 녹스를 보고 싶었다.

제가 너무 그를 좋아해서, 사랑해서 부담되었다면, 그래서 자신을 내쳤다면 이제 순순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다만 그전에 마지막으로 그를 보고 싶었다. 먼발치에서라도 좋으니.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저택 주변의 담벼락을 돌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쭉 가다가 꺾으면 곧 도련님이 머무시는 방의 정원이 드러났다.

‘도련님…!’

그리고 그 정원엔 때마침 녹스가 서 있었다. 햇빛을 받아 녹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 곧게 선 허리. 자신이 사라졌음에도 조금도 변한 게 없는 잔인한 자신의 도련님. 할리드는 낮은 담벼락에 달린 쇠창살을 붙잡으며 그를 불렀다. 아니, 부르려 했다.

‘…….’

정원에 선 녹스의 곁으로 도도도 달려오는 작은 인영만 없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도련님! 시키신 것 가져왔어요!’

‘그래.’

녹스는 어린 하인을 새로 얻은 듯했다. 평범한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아이는 빈말로라도 어여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녹스는 마치 할리드를 대하듯 하인이 가지고 온 물건을 받곤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네에….’

어린 하인이 얼굴을 설핏 붉힌 것 같았다. 할리드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 안의 무언가가 쨍하니 금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저 도련님을 사랑했기에 그런 일을 당했다. 그리고 제가 내쳐지고 난 자리에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 할리드는 알았다.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 사실을 조금의 숨김도 없이 내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쇠창살을 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녹스의 곁에 있는 소년의 목을 뽑고 그에게 물건을 건네는 손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거긴 내 자리야. 그 누구도 아닌 할리드, 자신의 자리.

하지만 그는 녹스의 손에 의해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어떻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저를 내쫓은 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을 채울 수가 있어요. 어떻게.

할리드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헛구역질이 나왔다. 할리드는 쇠창살을 잡고 주저앉은 채 그 자리에서 몇 번이고 헛구역질했다. 위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위액을 잔뜩 쏟아 낸 할리드는 다시 한번 녹스와 어린 하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곧, 눈을 커다랗게 떴다.

녹스가 어린 하인을 향해 웃고 있었다. 마치 제게 웃어 주듯이. 저를 바라보던 때처럼. 할리드는 쇠창살을 강하게 쥐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자리에 누가 있어도 상관없었다는 걸까요.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는 거예요?”

배 안쪽에서 무언가 드글드글 끓는 것이 느껴졌다. 할리드는 그 감정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배 위쪽이 아팠다. 그는 자신의 윗배를 감싸 안고 그 둘이 정원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보고 또 보았다.

녹스가 어린 하인을 챙겨 저택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할리드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주저앉아 있다가 녹스가 사라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등의 상처는 다행히 터지지 않은 것 같지만 기사들에게 맞은 부분들이 욱신거려 왔다.

“도련님…. 도련님은 참 잔인한 분이세요.”

그는 이제 닿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임시로 자신이 머물 수 있게 해 둔 여관으로 향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할리드는 여관으로 돌아와 문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았다. 녹스와 그 하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할리드는 그 상태로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먼 발치에서라도 좋으니 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생각했는데. 뱃속은 오히려 무언가 끓어오르듯 뜨거웠다.

“…왜.”

왜, 어째서, 어떻게. 도련님, 제게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뱀처럼 길게 똬리를 튼 원망이란 감정이었다. 할리드는 곧 두 눈에서 뚝뚝 눈물을 흘리며 제 무릎 위를 긁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으세요.”

나는 이렇게 죽을 것만 같은데. 할리드는 울음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절규했다.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떻게 저를 버리시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어요. 제 전부를 가져가실 거라면 제 목숨도 가져가시지 그랬어요.

하지만 그 절규를 들어 줄 당사자는 더 이상 그의 앞에 없었다. 할리드는 울고 또 울다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눈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의 하루는 그렇게 점점 원망으로 점철되어 갔다.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 안으로.

그리고 그다음 날, 할리드는 여관에 돈을 내기 위해 마에타가 챙겨 준 돈주머니를 쥐고 바깥으로 나섰다. 명목상은 퇴직금이었지만 마에타가 더 챙겨 준 듯 주머니는 묵직했다. 할리드는 금화를 일반 동화와 은화로 바꾸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걸 다 쓰기 전에 다른 일을 구해야 할 텐데….’

사실 이 정도 금화라면 족히 2년을 놀고먹어도 괜찮을 금액이었으나 할리드는 당장 다른 일을 구하고 싶었다. 제일 좋은 건 다른 귀족 저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도련님을…. 가끔은 뵐 수 있지 않을까.’

그 전날 밤에 그를 원망하며 잠들었어도 결국 할리드의 머릿속엔 녹스, 그 하나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금화와 함께 주머니에 꼬깃꼬깃하게 접혀 들어 있는 추천장을 떠올렸다.

그를 원망해도 그가 미워도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이름이 콱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였을까. 어린 그의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자들이 있었다. 굽은 어깨, 더러운 옷차림. 그리고 음울하게 선 눈동자에 할리드는 움찔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세 명의 사내가 할리드를 천천히 둘러쌌다. 할리드는 한 발을 뒤로 슬쩍 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상황 파악한 것 같은데.”

한 명이 킬킬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있는 거 다 내놓고 꺼져.”

“…….”

할리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상대는 전부 성인이었다. 두 명은 잘 먹고 자라지 못한 듯 비쩍 말랐지만 한 명은 덩치가 제 두 배는 넘었다. 할리드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의 뒤엔 이미 다른 자가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꼭 피를 봐야겠어?”

그들은 녹이 슨 칼을 쥐고 있었다. 아직 어린 할리드는 그들을 이겨 낼 수 없다는 판단에 허리에서 주머니를 풀어냈다. 한두 푼이 아니지만, 어차피 곧 다른 귀족가에 취직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할리드가 얌전히 주머니를 푸는 것을 보며 강도들이 킬킬거렸다. 할리드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주머니를 열어 추천장만을 슬며시 꺼내려 했다.

“동작 그만.”

“……!”

할리드가 손을 멈칫거렸다. 강도들은 칼을 들이밀며 말했다.

“손대지 말고 그대로 넘겨.”

“아, 안 됩니다. 돈은 가져가셔도 상관없지만 이건 안 돼요. 어, 어차피 돈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할리드가 재빨리 추천장을 품에 숨기고 돈주머니만 바닥으로 던졌다. 하지만 강도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은 뒤 곧장 할리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할리드는 도망가려 했지만, 뒤에서 버티고 있던 자로 인해 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

“아악!”

강도가 할리드의 팔을 꺾었다. 할리드는 버둥거렸다. 어릴 적부터 힘 하나는 센 편이었지만 성인 남성 세 명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할리드를 제멋대로 제압한 뒤 그의 품을 뒤졌다.

“이게 뭐야? 그냥 종이 쪼가리?”

“예, 예. 그러니 그것만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강도들이 추천장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아볼 턱이 없었다. 할리드는 비굴하게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귀족가에, 다시 그 세계에 편입되어 살아가기 위해선 추천장이 꼭 필요했다.

어느 가문이든 추천장이 없는 하인은 써 주지 않는다.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다고 해도 외모만 보고 합격시켜 주는 저택은 제대로 된 저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라이네리오 가문에서 작성한 추천장이 반드시 필요했다.

‘도련님을 뵐 수 있을 만치 가까운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가 들어가야 할 저택은 최소 백작 이상이다.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는 할리드에게 추천장이란 버릴 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곧, 찌이익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할리드의 눈이 커졌다.

“뭔진 모르겠지만 우리한텐 쓸모없는 거네.”

“아, 안 돼요! 그만두세요!”

할리드가 뒷사람에게 두 팔을 잡힌 채로 몸부림쳤다. 그리고 추천장을 찢는 남자에게 튀어갈 듯 몸에 힘을 줬다.

“어어, 엇!”

단번에 튀어 나가려 하는 힘이 어찌나 센지 할리드의 두 팔을 잡고 있던 마른 남자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할리드는 그 틈을 타 팔을 빼내고 찢어진 추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퍼억-!

하지만 그보다도 옆에 있던 남자가 빨랐다. 그는 할리드의 옆구리를 세차게 걷어찼고, 할리드는 그대로 날아가 골목 벽에 퍽 소리가 나게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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