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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3화 (13/158)

제13화

“커헉!”

“이게 어리다고 봐주니까.”

그들은 이내 벽에 처박혀 바닥에 주저앉은 할리드에게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퍽, 빡, 빠악! 커다란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커흑, 헉!”

할리드는 몸을 둥글게 말고 그들의 발길질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할리드의 눈은 강도 한 명의 손에 들린 찢어진 추천장에 박혀 있었다. 저걸, 손에 넣어야 해. 그래야 도련님을. 어떻게든….

“이 새끼, 지독하네.”

“어린 새끼가.”

“얼굴이 반반한데 노예상에라도 넘겨 볼까?”

“아서라. 요즘 높으신 분이 노예 상인을 잡으러 다닌단다.”

“쯧.”

그들은 쓰러진 할리드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퍽, 걷어찼다. 할리드가 컥 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강도들은 뒤돌아 서둘러 골목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할리드는 이를 악문 채 벽을 짚고 일어나 그들의 뒤에 대고 말했다.

“종이, 그거…. 돌려줘.”

동그랗고 푸른 눈이 얇게 뜨여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도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내놔!”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그들은 천성이 못난 이들이었다. 부랑아로 태어나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하는 것이 당연한 인간들. 누군가의 간절함을 보는 것은 너무도 익숙했고 그들은 그런 자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강도 중 한 명이 이미 반이 잘린 추천장을 갈가리 찢었다.

“아, 안 돼….”

할리드가 절뚝이며 뛰어갔다. 아무래도 발목을 잘못 밟힌 듯싶었다. 강도들은 갈가리 찢은 추천장을 바닥에 뿌리고 낄낄대기 시작했다. 할리드는 무릎을 꿇고 종잇조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게 없으면, 이게, 이게 없으면 다시는 도련님을….

할리드가 옅게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강도들은 어떡해서든 그 종이 쪼가리를 모으려는 어린 소년을 보고 혀를 찼다. 그리고 기분이 잡쳤다는 듯 바닥에 칵, 퉤. 침을 뱉고는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할리드는 더러워진 종이 쪼가리들을 어떻게든 맞추기 위해 손을 움직였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허억, 헉….”

눈앞이 핑 돌았다. 돈을 잃은 것은 괜찮았다. 지나치게 많은 돈이었지만 할리드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귀족가로 들어갈 길이 사라졌다는 게 문제였다.

툭, 투둑, 모래 바닥 위로 할리드의 눈물이 떨어졌다. 아, 아아. 그는 웅크려 소리를 지르듯 울기 시작했다.

골목 밖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비록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 울부짖을지라도 그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뒤 할리드는 여관에서 쫓겨났다. 입고 있는 옷은 점점 더러워져 갔다. 길거리의 부랑자들과 다름없는 꼴이었다.

그나마 깨끗한 꼴일 때 귀족 가문의 하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돌아다녔으나 추천장이 없으니 어느 한 곳도 그를 고용하려 들지 않았다.

할리드의 인내심은 점점 닳고 있었다. 가진 돈은 없었고 더 이상 묵을 곳도 씻을 곳도 없으니 아무리 어여뻐도 그의 몰골이 점점 피폐해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할리드는 종종 그가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을 때, 뱃속에서 무언가 드글드글 끓어오를 때마다 몰래 녹스의 저택으로 가 정원과 가까운 쇠창살 근처에 숨었다. 그리고 정원에 나오는 녹스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검은빛의 속눈썹도, 빛을 받아 반짝이는 녹안도, 곧게 편 허리와 어린 하인을 향해 상냥하게 손짓하는 것도. 조금도, 아무것도 변하질 않았다. 이제 이렇게 달라져 버린 자신과 다르게.

“도련님….”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마다 그의 속에선 무언가가 위장을 박박 긁어내는 것 같았다. 속이 꼬챙이로 쑤셔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쇠창살을 꽉 잡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도련님, 제가 여기 있어요. 할리드, 당신이 아꼈던 제가 여기 이런 꼴로 서 있어요.

더 이상 어여쁘지 않은 몰골로…. 퍼뜩, 그런 생각이 들면 그는 마치 도망치듯 거리의 골목으로 도망쳤다. 이런 꼴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불행히 사는 자신에게 녹스가 손을 내밀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할리드는 빈속을 쥐어 잡고 골목에 주저앉았다.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가 쓰라렸다. 그것이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녹스를 보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할리드의 정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어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할리드는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을 각오를 하고 녹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여 달라 청하고 싶었다.

당신이 다시는 날 잊지 못하게 그렇게 죽어 간다면 의미라도 있을 텐데,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런 골목에서 그에게 잊혀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도련님, 살려 주세요….”

하지만 그런 그의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살려 주세요. 녹스. 목소리는 비쩍 말라 갈라졌다. 할리드는 허공을 바라보며 마치 빌듯 이어 말했다.

“저를 도와주세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저를 찾으러 와 주세요. 제발….”

다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이 툭, 투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할리드는 바닥에 엎드려서 허공에 빌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구해 주세요. 제발, 제게 당신의 곁을 내어 주세요.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도련님은 할리드를 버렸다. 그 사실이 인제야 선명하게 와 닿는 것 같았다. 그에게 버려졌다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감각이 뱃속을 뒤집을 듯 치밀었다.

‘주제넘어.’

그리고 하필, 그렇게 빌고 빌 때.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내뱉은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가 날 사랑하는 것, 그것 자체가 문제야.’

“아, 아하, 아하하….”

할리드는 반쯤 뒤집힌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그를 보듬어 주던 손, 따뜻하게 바라봐 주던 시선 어떤 것 하나 남은 것이 없었다. 할리드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다가 그의 목소리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왜 내게.”

왜 내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요. 제가 그렇게도 미우셨나요.

그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바닥에 널려 있는 돌 중 커다란 것을 잡아 쥐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녹스 라이네리오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그에게 버려진 할리드의 뱃속에 똬리를 틀었던 뱀이 고개를 쳐들었다.

“…당신이 미워.”

할리드가 속삭였다.

“당신이 나보다 불행했으면 좋겠어.”

내가 아픈 것보다 훨씬 아픈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할리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돌을 꽉 쥐었다.

마침 골목 안으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할리드는 살아남겠다는 일념 아래, 그리하여 녹스 라이네리오를 저처럼 불행하게 만들어 버릴 거라는 생각 하나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리고 막 골목으로 들어온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거지 같은데?”

일단은 당장 며칠 굶은 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할리드는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가진 게 있으시거나 먹을 게 있다면 두고 가 주세요.”

“허?”

가죽 갑옷을 입은 자들은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할리드의 눈은 형형했다. 비쩍 말라 버린 얼굴에서 푸른 두 눈만은 번뜩이며 상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농담이 아닌가 본데?”

“살다 살다 이렇게 덤비는 놈도 있네.”

할리드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돌을 치켜들었다. 휙, 그들이 옆으로 피했다.

“어?”

하지만 할리드는 마치 그들이 양옆으로 피할 것을 예상했다는 양팔을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그 돌에 한 명이 어깨를 얻어맞았다. 빠악! 소리가 살벌하도록 울렸다.

“윽!”

다행히 어깨에 가죽 갑옷이 있어 대미지가 덜 한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타격도 아니었다. 그런 그를 왼쪽에서 바라보던 다른 한 명이 할리드의 허리를 걷어차려 했다.

하지만 할리드는 바닥으로 무릎을 접어 앉아 피하고 발차기를 한 상대의 다른 쪽 발목을 세게 걷어찼다. 기우뚱 그의 몸이 기울었다.

“어쭈, 이거 생각보다…!”

두 사람은 결국 한 걸음씩 물러나 허리춤에 찬 단검을 꺼내 들었다. 할리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날이 잘 든, 실제로 사용하는 검이다.

“용병인가?”

“빨리도 알아보네. 그것도 안 살펴보고 덤빈 거야?”

두 용병은 제대로 자세를 잡고 할리드를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둘이 이러는 게 좀 웃기긴 해.”

“우린 어린아이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싸운단다.”

“그거 자랑 아닌 것 같긴 한데. 어린 강도한테 털렸다고 하면 우리 단장이 우리 아가리를 찢어 버릴 것 같단 말이지.”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할리드에게 뛰어들었다. 할리드는 미간을 찡그리고 어떻게든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급격한 움직임에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아….”

빈혈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할리드의 눈앞이 노랗게 변하더니 이내.

털썩.

까맣게 변해 쓰러지고 말았다. 두 용병은 엉거주춤하게 서서 바닥에 쓰러진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긁적이는 손에는 무안함이 담겨 있었다.

“…이게 이렇게 되네.”

“야이 씨, 가자. 어린애 상대로 진심이 됐다는 걸 어디 가서 말하기도 그렇고.”

“아니,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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